스퍼스의 '기본기' 농구 들여다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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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전 내내 팽팽한 줄다리기였던 경기가 3쿼터가 시작되면서 스퍼스의 일방적인 경기로 급격히 전환됐다.

4쿼터 전체가 가비지 타임이 되고 말았던 이 경기. 이토록 큰 변화를 가져오게 한 스퍼스 경기력의 열쇠는 무엇이었을까?


시시하게도........... 새로운 것은 전~혀 없었다.

상황에 따른 결정을 각 선수들이 잘해준 결과였고, 전술과 시스템을 잘 알고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팀 전체의 공이었을 뿐이다.


타 팀 선수들에 비해 네임벨류 면에서는 떨어지지만, 지난 10년간 네 번이나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던 팀 스퍼스의 저력이 바로 여기에 있다.

정확하게 어느 시점에 어느 각도에서 빈 자리가 생겨날 지를 미리 알고 움직이는 게 스퍼스 선수들이다.

언제 컷-인을 들어가고, 언제 돌파를 해야하며, 언제 어디로 패스를 빼줘야 하는 지도 아주 잘 알고 능숙하게 움직이는 팀이다.


스퍼스의 공격 루트를 보면 아주 단순 무식하다. 딱 세 가지 경로만 쓰기 때문이다.

1) 덩컨을 중심으로 한 포스트업에서 파생되는 골밑 찬스와 오픈 삼점슛
2) 코트를 넓게 가져가며 빅맨의 스크린을 타고 돌파하는 파커나 지노빌리
3) 2 대 2로 풀어나가는 픽앤롤과 픽앤팝


무척 역설적인데...... 이런 단순무식하고 잘 알려진 전술들이 먹혀드는 이유가 바로 스퍼스 선수들이 BQ가 뛰어나고 이타적이기 때문이다.

스퍼스 선수들, 개개인 능력만 보면 사실 대부분 별 거 없는 선수들이다.

그런데 이 별 것도 아닌 선수들이 BQ(농구 IQ)들은 정말로 뛰어나다. 그리고 팀을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할 줄도 안다.




(동영상 1 - 시작부터 10초) 더블 팀이 붙을 것을 미리 감지한 덩컨이 반박자 빠르게 골밑에 있던 보너에게 킬패스를 넣어준다든지...
   

(동영상 2 - 12초에서 24초) 수비진이 바깥 쪽으로 약간 넓혀지는 것을 느낀 파커가 그 짧은 찰나에 ball-screen switch를 이용해 골밑 돌파를 하는 것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픽앤롤 공격을 수비할 때 수비수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철칙이 바로 "절대로" '스위치 디펜스'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인데...

동영상에서 보셨듯이, 파커를 수비해야 할 클리퍼스의 제이슨 하트 선수가 파커를 놓치면서 덩컨을 수비해야만 하는 스위치 디펜스 상황이 오고 말았다. 이 기회를 놓칠 파커가 아니다. 파커는 덩컨의 스크린을 타고 비교적 쉬운 페네트레이션을 성공시킨다.

이렇게 상대 팀 수비의 허를 빨리 간파하고, 실행에 옮길 수 있어야 하는 것이 농구의 기본이고, 이런 교과서적인 농구를 리그에서 가장 잘하는 팀들 중의 하나가 바로 스퍼스다.  

(동영상 3 - 26초에서 37초) 자신에게 붙는 헬핑 수비를 보며 재빨리 자리를 옮겨 빈 자리의 보너에게 패스를 빼주는 파커의 pick-and-pop 플레이도 이러한 탁월한 공격 기본기에서만 파생될 수 있는 종류의 플레이다. 
                                                      

교과서적인 농구. 이런 기본적인 농구를 리그에서 가장 잘하는 팀들 중 하나가 스퍼스다.

6~70년대는 대부분의 NBA 팀들이 이러한 시스템 농구를 했고, 그래서 운동능력이나 재능보다도 기본기와 BQ가 더 중요시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90년대의 시카고 불스와 유타 재즈 이후로, 이러한 기본기에 입각한 농구를 하는 팀들은 이제 손에 꼽아야 할 지경이 되었다.

여러 다양한 기술들이 보편화되고, 선수들 개개인의 신체조건이 발달을 했어도, 많은 농구원로들이 오히려 농구가 퇴보하고 있다고 아우성치는 이유다.

타 팀에 비해 개개인의 능력치는 뛰어나지 않지만, 이와 같이 BQ가 좋고, 전술 실행능력이 뛰어난 이타적인 선수들로 이루어진 팀, 스퍼스.

재미없고 지루한 팀이라고 쉽게 치부할 일이 아니다. 기본기를 중요시하는 많은 농구인들이 최고로 꼽는 팀들 중 하나가 스퍼스이기 때문이다.

독자들과 농구팬들께서
이 팀의 오랜 기간 지속되는 저력의 원천이 대체 무엇인지를 피부로 직접 느끼며 경기를 관전하실 수만 있다면, 이 졸렬한 글을 쓴 필자에게는 무한한 영광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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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필라델피아 76ers 이외의 이야기를 한번 해볼까 합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리그에서도 손꼽히는 슈터. 슛하나로 리그에 입성한 사나이. 카일 코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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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금 발전하고 있는 카일 코버.

유타 재즈 경기를 보다 보면 항상 데론 윌리암스보다도 더 저의 이목을 끄는 선수가 있습니다.

팀에서 그리 높은 비중을 가지지는 않았지만 항상 열정적으로 경기에 임하는 선수. 허슬러라는 명칭이 하나도 아깝지 않은 선수. 바로 카일 코버입니다.

지난 시즌에는 서혜부 부상(사타구니라는 말이 더 친숙하지만, 일본식 용어라고 하여 서혜부 부상으로 통일하여 사용합니다.)으로 인해서 오프 시즌 훈련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고, 워낙에 부상과는 거리가 먼 선수였었던 데다가 부상 부위 자체가 슈팅에 큰 지장이 있는 부분이었기 때문에 시즌 내내 그리 좋은 컨디션이 아니었는데요.(부상이 완쾌된 것이 시즌 개막 후 거의 2달이 지나서입니다.)

이번 시즌에는 예의 스나이퍼 다운 모습을 되찾은 듯 보입니다. 제가 코버를 유독 좋아하는 이유는 이 선수가 정말 놀라울 정도로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선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드래프트 때부터 그리 각광받는 선수는 아니었습니다.

대학 시절에 상당한 명성을 쌓았던 선수였음에도 불구하고 드래프트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처참할 지경이었죠. 그런데 사실 대학교 4년을 다니면서 그가 이룬 업적은 대단했습니다. 그리 유명하지는 않은 Creighton University에서 4년을 보내었음에도 졸업하는 순간 그의 이름은 이미 상당히 알려져 있었을 정도였죠.

2003년 NCAA 최우수 선수 후보에 올랐으며, Creighton University All time scorer 5위, NCAA 3점 슛 성공 개수 역대 7위에 올랐을 정도로 3점 슛 하나로 그가 쌓아올린 위상은 대단했습니다.(이 부분은 이전에 썼던 글에서도 밝힌 바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장점을 뒤덮고도 남을 만큼 단점이 두드러지는 선수였습니다. 더욱이 그 단점이 NBA에서는 뛰기 힘들다는 평을 받을 정도의 너무나도 평범한 운동능력이었기 때문에 이것은 그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코버는 그러한 평가를 딛고 일어서서 매년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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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당시 스카우팅 리포트는 그를 이렇게 평가하였습니다. “그는 리그 내 어떤 가드도 막지 못할 것이다.” 안 좋았던 운동능력으로 인해서 대학 시절 내내 그를 따라다녔던 수비력 불안이라는 단어가 결국 NBA 입성 당시 그의 발목을 잡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최악의 혹평을 들었던 수비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에서 최선을 다하는 그의 자세는 결국 2004-05시즌에 이르러 그를 필라델피아 라인업 중 주전의 자리에 올려놓았죠.

물론 주전으로 올라섰던 그 당시에도 그의 수비력에는 큰 발전이 없었습니다.

그는 항상 노력하는 선수였지만, 운동능력 만은 그의 뜻대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결국 그는 이로 인해서 계속적으로 슈팅만 가능한 반쪽짜리 선수라는 저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부족한 운동능력을 가진 그의 한계는 결국 그의 플레이 스타일상의 한계로 드러나게 됩니다.

리그 3년차가 되었던 2005-06시즌에도 그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3점 슛 뿐이었는데 이것이 운동능력의 한계로 인해서 고착되고 만 그의 한계였던 것이죠. 운동능력이 뛰어나고 피지컬 적으로 우위를 보이는 상대를 만나면 코버의 존재는 한없이 작아지기 일쑤였고, 더욱이 수비에서는 여전히 안 좋은 모습만을 보여주기 일쑤였습니다. 하지만 2006-07 시즌 그는 새로운 시도로(어쩌면 슈터로써의 생명까지 걸어야만 했던 위험한 시도였던) 새로운 돌파구를 여는 데 성공합니다.

바로 벌크 업을 행한 것입니다.

평범하기만 한 그의 운동능력으로는 도저히 빠르고 강한 다른 선수들을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은 자명했고, 성장하는 것 또한 열정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지한 그는 결국 벌크 업이라는 방법을 선택한 것입니다.

사실 캐치 앤 슛을 주 무기로 하는 슈터 성향의 선수였던 그로써는 순발력과 유연함에 큰 악영향을 줄 수도 있어 결과적으로 슈팅 자세를 무너뜨릴 수도 있는 벌크 업이 그리 매력적인 대안은 아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러한 위험한 시도였음에도 그는 모험을 감행하였고, 그 효과는 확실했습니다. 공격에서는 보다 다채로운 1 : 1이 가능해졌으며, 수비에서는 힘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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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층 성장한 코버의 기세는 무서웠습니다. 식스맨의 역할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팀 내 2옵션의 역할을 맡았으며(평균 14.4득점), 필드골 시도가 많아지고, 3점 슛 시도는 줄어들면서 보다 효율적인 공격을 지향하게 되었습니다. 수비에서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데 성공하면서, 여전히 나쁜 수비력이었지만 발전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데 성공하였죠.

2007-08시즌 또한 그에게는 발전의 해였습니다.

비록 부상으로 공격에서는 제 기량을 선보이지 못했지만, 수비에서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는 데 성공하면서 최악의 수비력을 가졌다는 세간의 인식을 일정 부분까지 깨트리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운동능력은 떨어지지만, 버티는 힘은 좋아졌다는 평가를 들었던 06-07시즌을 넘어서기 위해서 그가 선택한 새로운 활로는 “머리로 하는 수비”였습니다.

지난 시즌보다 효율적인 움직임을 보이고자 노력하였고, 적절히 헬핑 포인트를 잡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의 수비력은 눈에 띄게 발전했습니다. 여전히 대인 마크에 있어서는 문제를 보였고, 그로 인해서 그의 수비력은 여전히 주전이 되기에는 모자랐지만, 최소한 식스맨으로써는 부족함이 없는 수비력을 갖추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존 디펜스 하에서 그의 움직임은 놀랍도록 효율적이었으며, 더욱이 터프하게 부딪치고, 두려움 없이 동선을 잘라 들어가는 그의 모습은 팀 내 분위기 향상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07-08시즌에는 부상으로 인해 컨디션이 좋지 못했고, 그로 인해서 체력적인 문제점을 드러내기도 하였으며, 이로 인해서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기복 심한 플레이까지 보여주기도 하였습니다. 거기에 트레이드로 인해서 새로운 팀에 적응해야만 하는 숙제까지 안게 되면서 그의 07-08시즌은 팬들에게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모습만을 남긴 채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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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08-09 시즌. 그는 새롭게 부활했습니다.

그는 08-09시즌 들어서 평균 22분 출장, 8.2득점 1.7어시스트, 2.6리바운드 43.9%필드골 성공률, 42.7% 3점 슛 성공률이라는 수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수치는 물론 그의 커리어 수치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더욱이 06-07 시즌 3점 슛에만 얽매이는 슈터라는 오명을 벗어던지면서 보여주었던 그 모습(당시까지 코버는 필드골 시도의 거의 절반이 3점 슛인 전형적인 캐치 앤 슈터 유형의 3점 슈터였으나, 06-07시즌을 기점으로 다른 득점 루트도 가능한 선수라는 재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이 무색할 정도로 이번 시즌에는 다시 3점 슈터로 회귀한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지난 시즌보다 발전했습니다.

수비 측면에서 보면, 본연의 수비력은 더욱 좋아졌으며, 비효율적인 움직임은 거의 사라진 채 존 디펜스에 완전히 녹아든 듯 보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헬핑 포인트를 잡는 능력도 일취월장하여 로우 포스트에 협력 수비를 들어갔다가 다시 돌아 나오는 움직임이 정말 깔끔해졌습니다.

공격에서도 그의 움직임은 매우 효율적입니다.

전술적으로 팀이 원하는 바를 훌륭히 수행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팀에 그대로 녹아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공간을 찾아들어가는 특유의 움직임 또한 지난해 대비 더욱 좋아졌으며, 컷해 들어가는 움직임이나 돌아 나와 3점 라인을 찾아가는 움직임, 스윙 등이 비효율적이지 않게 상당히 부드럽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가 필라델피아 시절 높은 평가를 받았던 원인은 그 이외에는 전혀 3점 슈터가 없었음에도 그 한명으로 인해서 필라델피아가 3점 슛 부진을 겪은 적이 거의 없었다는 점 덕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역시 그가 기복 없는 플레이를 유지하면서, 클러치에 유독 강한 강심장이라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즉, 항상 오픈 찬스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클러치 상황에서 절대로 혼자 두어서는 안 되는 선수였기 때문에 그 정도의 존재감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인데요. 이번 시즌 들어서 다시 그는 그러한 장점을 어느 정도 되찾은 듯 보입니다. 아직까지 완전히 기복을 벗어내지는 못한 듯 보이지만 최소한 그의 3점 슛은 예년의 날카로움을 회복했습니다.

2008-09 시즌, 평균 42.7%의 성공률을 기록하고 있으며, 성공 개수는 32개를 기록하고 있는데요.(이하 기록은 2008년까지의 기록만을 참조하였습니다.) 이 개수는 유타 팀 내 3점 슛 성공 개수의 22%에 해당하는 높은 수치입니다.

이번 시즌 들어서 괄목할만한 성장세를 보여주고 있는 CJ 마일스로 인해서 팀 내 최다 3점 슛 성공의 자리는 내어주었지만(최근에는 특히 CJ 마일스의 분전이 무섭습니다. 최근 3경기 평균 14.3점을 기록하고 있으며, 출장 시간 또한 세 경기 평균 32분을 기록 중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코버 또한 평균 27.3분을 출장하며 평균 9.6점 40% 3점슛 성공률을 기록 중일 정도로 여전히 좋은 활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전히 3점 슛 성공률은 팀 내 1위이며, 이를 바탕으로 한 그의 위치는 팀 내에서 상당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필라델피아 시절보다 그의 비중은 분명히 줄어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유타에서도 여전히 팀 내 최고의 3점 슈터이며, 감독이 선호하는 스타일인 BQ가 높고, 열정적인 플레이를 펼칠 줄 알면서도 시간 대비 플레이 효율이 높은 선수입니다. 그리고 그렇기에 다소 비중이 줄어들었음에도 그의 미래는 여전히 밝다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이번 시즌에도 한층 더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하면 된다.”라는 이야기의 실제 주인공이 되어가고 있는 코버의 활약에 경의를 표합니다.

남보다 못한 재능으로 최고의 리그에서 점차 자신의 입지를 넓혀 나가고 있는 카일 코버. 앞으로도 그의 빛나는 활약을 기대하며 이 글을 마칩니다. 무엇보다 전 매년 이렇게 발전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항상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제가 코버를 유독 좋아하는 이유입니다.

노력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 코버는 이 말을 현재까지 실력으로 입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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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애미 히트의 드웨인 웨이드와 LA 레이커스의 코비 브라이언트가 미 프로농구 NBA에서 선정하는 12월의 선수로 나란히 뽑혔다.

당초 2008-09시즌에 앞서 마이애미 히트의 새 시즌 전망은 어두울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지만 현재 당당하게 6위를 달리고 있다. 예상외의 선전은 웨이드의 활약이 뒷받침 돼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리그 전체 득점 1위(28.7점)에 랭크 되어있는 웨이드는 12월에 치러진 13경기에서 경기 당 29.2점으로 전 경기 두 자리 수 득점으로 팀을 이끌었다.  이 중 11경기에서 20득점 이상을 올렸으며 30득점 경기도 6경기나 기록했다. 어시스트도 9차례나 리드하며 경기 운영에도 발군의 기량을 과시한 웨이드의 활약은 공격에서 그치지 않았다. 특유의 스피드와 감각을 앞세워 8경기에서 스틸을 리드한 웨이드는 가드로서 기록하기 힘든 블락 부문에서까지 6차례나 팀 내 리더에 이름을 올렸다.

말 그대로 경기를 혼자 전담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공수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친 웨이드 덕택에 마이애미는 한 달간 9승 4패의 호성적을 남겼다.   

득점기계 코비 브라이언트는 장기인 슈팅이 서서히 살아나며 이번 시즌 들어  처음으로 ‘이달의 선수’에 선정됐다. 코비는 한 달간 치러진 15경기에서 득점포를 가동시키며 개인 득점 부문 3위(26.3)까지 이름을 올렸다.

LA 레이커스는 지난 11월, 단 1패만을 기록하며 순항했지만 12월 들어 원정경기에서만 4패를 기록하는 등 아쉬움을 남겼다. 하지만 코비의 득점본능이 서서히 눈을 뜨며 홈경기 7전 전승, 월간 종합성적 11승 4패로 2008년의 대미를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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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의 여름은 두 선수에게 특별한 여름이 되었다.

마르코 벨리넬리는 2009 유로바스켓 예선전 이탈리아 대표팀에서 뛰기를 거부하면서까지 NBA 적응을 위한 필사적인 노력을 시작한다. 2008년 여름에 말이다.

"그는 매일 우리 팀 연습에서 가장 열심히 하는 선수다"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의 주전 센터 안드레스 비엔드리쉬의 말이다.

비엔드리쉬의 인터뷰는 바로 마르코 벨리넬리의 노력을 보고 이야기한 것이다. 마르코 벨리넬리가 처음 농구를 시작할 때 비르투스 볼로냐의 유소년 코치는 유달리 몸이 약한 벨리넬리에게 농구를 그만두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유했다. 하지만 벨리넬리는 철저히 자신의 노력만으로 그 코치의 말을 단번에 뛰어넘어버린 적이 있다.

2008년 여름은 마르코 자신에게 있어서 과거의 아픔을 떠올리게 만든 시기였을 것이다.

어쨌든 섬머리그 참가와 약점으로 지적받은 수비, 그리고 돌파에 의한 다양한 슈팅 기술(플로터 포함)을 배우면서 벨리넬리는 NBA 정규시즌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쯤 중국 베이징에서 열리고 있는 올림픽에서 스페인 대표팀으로 참가하고 있던 루디 페르난데스는 결승전에서 17분 동안 22득점을 몰아넣는 괴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포틀랜드의 감독인 네이트 맥밀란 감독의 마음을 또다시 사로잡았다. 맥밀란은 "그는 언제 어디서든지 공격할 수 있는 선수다. 우리 팀에 엄청난 임팩트를 몰고 올 선수임을 확신 한다"며 페르난데스에 대한 신뢰감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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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시작된 2008~2009 NBA 시즌.

루디 페르난데스는 맥밀란의 신임아래 영건 군단 포틀랜드에 없어서는 안 될 키-식스맨으로 자리 잡았다. 마이애미 히트와의 경기에서는 중요한 순간에 클러치까지 성공시키면서 25득점을 몰아넣었고, 그와 스페인 대표팀 동료인 세르지오 로드리게즈의 ‘스페니쉬 커넥션‘ 플레이는 포틀랜드의 광적인 팬들이 가장 좋아하는 플레이 중 하나로 손꼽히기도 하면서 성공적인 NBA 데뷔 시즌을 보내고 있다.

마르코 벨리넬리는 몬타 엘리스의 부상으로 출장시간이 늘어나는 듯 보였지만, 앤써니 모로우의 등장과 함께 돈 넬슨 감독과의 불화로 초반 작년과 마찬가지로 벤치를 달구면서 여러 가지 트레이드 설에 휘말리기도 했다. 하지만 코리 매거티의 부상과 함께 다시 한 번 출장기회를 잡으며 최근 2경기에서 엄청난 모습을 보여주었다.

샌안토니오 스퍼스의 마누 지노빌리나 포틀의 루디 페르난데스처럼 4쿼터에 유독 강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최근 골든스테이트의 2연승에 중추적인 역할을 해냈다.

오클라호마시티 썬더전에서는 18분 동안 13득점 2리바운드 2스틸을 기록했고, 밀워키 벅스전에서는 4쿼터 풀타임을 뛰면서 14분 28초 동안 15득점 3리바운드, 2어시스트를 기록했다. 4쿼터에만 11득점을 몰아넣으며 말이다.

특히 밀워키전에서는 3쿼터에만 15득점을 몰아넣으며 NBA 최고 슈팅가드들 중 한 명이였던 마이클 레드를 4쿼터에 2득점으로 틀어막는 수비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마르코 벨리넬리의 오클라호마시티전 하이라이트


벨리넬리의 밀워키전 Top10급 플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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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벨리넬리와 루디 페르난데스는 이제 22세, 23세밖에 안 되는 젊은 선수들이다. 하지만 NBA에서 드라젠 페트로비치 이후 유럽에서 NBA로 건너간 가장 재능 넘치는 젊은 슈팅가드들이다. 둘은 아직 드라젠에 비견할만한 실력을 가진 선수는 아니지만 그들은 향후 10년간 NBA에서 유러피언 슈팅가드들 중 엄청난 실력을 보여줄 선수임에는 틀림없다. 그들의 활약을 보고 있는 유럽 사람들은 아마도 매우 즐거울 것이다" 포틀랜드에서 활약한 바 있는 리투아니아의 전설적인 센터 아비다스 사보니스의 말이다.

드디어 제가 올 시즌 제가 바라던 대결구도인 루디 페르난데스 대 마르코 벨리넬리의 대결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 같다. 지켜보라. 분명 이들은 수많은 국내 NBA 팬들에게도 충분히 어필할만한 라이벌 구도를 만들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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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정말 많은 유럽리그 관련 글들을 준비 중인데 먼저 이 글로 스타트를 끊으려 한다. 과거에 이 둘의 대결을 시즌 전에 쓴 적이 있었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다시 써보는 것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에 글을 보완하여 써본다. 그리고 예전에 제가 썼던 마르코 벨리넬리 글과 루디 페르난데스 글을 참조하였으니 그 점 양해 부탁드린다.

이 둘의 라이벌 대결은 사실 NBA에서부터 시작이 아니다. 바로 2005-06 유럽농구 시즌부터 이 둘에 관한 끊임없는 라이벌리 논쟁은 시작됐다. 유럽농구 팬 포럼을 가는 곳마다 마르코가 낫다 루디가 낫다는 둥 여기저기서 이탈리아와 스페인 네티즌들 간의 감정싸움도 치열했다.

이 감정싸움의 이유는 당시 유럽농구의 형세를 봐야 이해하기가 쉽다.

당시 유럽농구에서는 바로 차세대를 이끌고 갈 유로피언 영건 슈팅가드 3인방이 유럽농구를 아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때문에 NBA 스카우터들도 이들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

세간의 관심을 모은 트리오를 살펴보면 파르티잔 소속의 86년생 6-5의 슈팅가드 유로스 트립코비치, DKV 유벤투트의 6-5의 슈팅가드 루디 페르난데스, 그리고 클리마미오 볼로냐의 6-5의 마르코 벨리넬리가 그 3명의 주인공이다.

당시 임팩트 면에서는 트립코비치가 먼저 치고 올라왔다. 사실 지금 트립코비치는 파르티잔에서 기량이 많이 쇠퇴한 느낌도 드는데, 당시에는 팀에서 거의 에이스급에 준하는 선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유로스를 제외한 나머지 둘이 서서히 유럽 리그에서 엄청난 임팩트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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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마르코 벨리넬리가 유럽 리그에서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경기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2005-06시즌 이탈리아 리그 파이널 4에서 나폴리와의 경기에서 이탈리아 농구 역사상 길이 남을 34득점 퍼포먼스 쇼를 보여주었다. 이 경기는 아직도 수많은 이탈리아 농구팬들이 꼽는 명장면으로 회자되고, 당시 몇몇 유럽리그 농구 팬 사이트에서 꼽는 최고의 명장면 순간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 경기에서 상대의 집중수비를 받는 거친 경기를 치렀음에도 불구하며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마르코 벨리넬리의 모습을 보고, 전성기 시절의 드라젠 페트로비치를 봤다며 엄청나게 흥분했다.

이 시즌에서 토론토의 명품 GM 브라이언 콜란젤로와 당시 피닉스의 감독이었던 마이크 댄토니의 마음을 사로잡은 벨리넬리는 세계 선수권에서 20세라고 믿기 어려운 활약을 펼쳤다. NBA 스카우터들의 애간장을 태웠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2006-07시즌은 벨리넬리에게는 시련의 시즌이었다.


 벨리넬리의 34득점 퍼포먼스

동료들의 부상, 그리고 여러 겹으로 집중된 상대팀의 수비는 벨리넬리를 힘들게 만들었고, 부상까지 겹쳐서 사실 평균 득점은 유로리그에서 12.8득점에 그쳤다. 이탈리아 리그에서 평균 17.6득점을 기록하며 표면적으론 준수한 듯 보였지만 전체적인 플레이는 실망스러웠다.

2007년 NBA 진출을 선언한 후 골든스테이트에서 힘겨운 생활이 시작됐다. 섬머리그 37득점 퍼포먼스는 그를 섬머리그 조던 혹은 섬머리그 페트로비치로 만들어주었고 많은 NBA 농구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게끔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팀 동료인 몬타 엘리스의 벽이 너무도 컸다. 게다가 한때 벨리넬리의 선발 출장도 고려한 돈 넬슨 감독이 정규시즌 전 치러지는 시범경기에서 벨리넬리의 경기력을 보고 아직 NBA에서 많은 것을 고쳐야 될 선수라며 그의 벤치 행을 결정했다. 백업으로도 당시 프리시즌 최고 스타 중 한 명이였던 아주부케에게 밀려버렸다. 골든스테이트의 팀 칼라인 런앤건 시스템에 고전한 이유도 컸다.

그러는 사이 유럽에서는 루디 페르난데스가 스페인 리그에서 대박을 치고 있었다. 2007-08 ACB 시즌에서 루디 페르난데스는 마르크 가솔, 리키 루비오와 함께 말 그대로 ACB를 접수해버린다. 용병들조차도 루디와 마르크의 기량에 혀를 내두르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울 정도로 루디의 기량은 2007-08 시즌을 기준으로 엄청나게 도약한 것이다.

2007년 자신을 사치세 문제로 외면해버린 피닉스 선즈를 보란 듯이 말이다.


페르난데스의 2007 유로바스켓 전 평가전 때의 하이라이트

유럽리그에서 정말 전무후무한 평균 21.2득점이라는 기록을 보이면서 이미 루디의 주가는 폭등했고 그를 피닉스로부터 데려왔던 포틀랜드는 발 빠른 행보를 보였다. 구단주 폴 앨런은 스페인으로 날아가서 직접 페르난데스의 아버지를 만나는 등, 그를 2008-09 시즌에 NBA에 합류시키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2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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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구단주 어브 레빈(Irv Levin)의 열망으로 인해 연고지를 수천마일 떨어진 샌디에이고(San Diego)로 옮긴 버팔로 브레이브스(Buffalo Braves)는 "샌디에이고 클리퍼스(San Diego Clippers - Clippers는 '쾌속선'을 가리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출항을 앞두게 되었다.

캘리포니아 주에 위치한 샌디에이고는 60년대 말에는 로케츠(Rockets)라는 구단의 연고지였다. 1967년에 탄생한 "샌디에이고 로케츠"는 성적이 그다지 신통치 못했고, 이로 인해 흥행 부진에 허덕이다가 결국 71년 휴스턴으로 연고지를 이전하며 지금의 "휴스턴 로케츠"가 되었다.

로케츠가 발사 된 뒤 잠시 쓸쓸했던 이 도시에 8년만에 새로운 NBA 팀이 항구로 찾아오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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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퍼스 호'의 첫 항해는 비교적 순탄한 편이었다. 연고지를 바꾸고 처음 맞은 78-79시즌, 비교적 어수선한 팀 분위기에서도 새 감독 진 슈(Gene Shue)는 팀을 그럭저럭 잘 이끌며 5할 이상의 호성적(43승 39패)을 기록했다. 

비록 안타깝게 두 경기 차로 6개팀에게만 주어지던 플레이오프 티켓을 따내는 데는 실패했지만, 버팔로 시절의 전 시즌보다 16승이나 향상된 제법 괜찮은 성과였다.

클리퍼스 호의 첫 일등항해사는 바로 월드 B. 프리(World B. Free)라는 4차원의 이름을 가진 선수였다. 필라델피아 76ers에서 뛰다가 오프시즌에 트레이드되어 클리퍼스에 합류한 프리는 무려 평균 28.8 득점을 올리며 조지 거빈(George Gervin)에 이어 리그 득점 2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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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는 그의 이름만큼이나 참 독특한 선수였다. 본명은 로이드 버나드 프리(Lloyd Bernard Free)였는데 일찍부터 뉴욕 길거리에서 그 이름을 날렸고, 그의 화려한 플레이에 반한 길거리의 팬들은 그에게 '월드(World)'란 별명을 붙어주었다. '세계 최고'라는 이 별명이 무척 맘에 들었는지 로이드 프리는 '월드'를 아예 자신의 본명처럼 사용했다.

프리는 필라델피아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는데, 당시 팀에는 쥴리어스 어빙(Julius Erving), 조지 매기니스(George McGinnis)같은 대선배들이 있었기에 그의 이름대로 자유로운 플레이를 펼치지는 못했다. 필라델피아 시절 그의 평균 득점은 15점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클리퍼스로 오자 상황이 달라졌다. 프리는 필리 시절 펼치지 못한 그야말로 프리-스타일(Free-style)의 농구를 맘껏 선보이며 팀을 들었다 놨다 했다. 그의 현란한 개인기와 폭발적인 외곽슛, 그리고 엄청난 운동능력은 팬들의 이목을 사로잡았고, 연일 화려한 득점 쇼가 이어졌다. 클리퍼스에서 일약 에이스가 된 프리는 그의 평균 득점을 거의 두 배 가까이 상승시키며 올-NBA 세컨드 팀에도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너무나도 자유로웠다. 프리는 농구가 5명이서 하는 스포츠라는 걸 무시한 선수였다. 그는 슛을 해서는 안될 상황에서도 자유롭게 슛을 했고, 했고, 또 했다. 그의 플레이는 자유의 단계를 넘어서 거의 방종 수준이었다. 팀 승리보다 개인 스탯 올리는 게 더 중요하다고 떠들어대던 선수기도 하니 오죽했을까.

또한 제멋대로인 그의 성격은 종종 라커룸 분위기를 흐리곤 했다. 팀 동료들은 그의 실력은 인정했지만 그의 뒤틀린 성격까지 인정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그는 매일 밤 1:9의 농구를 해댔다.

아무튼 프리의 득점 쇼와 버팔로 시절부터 터줏대감이었던 베테랑 랜디 스미스(Randy Smith)의 활약 하에 클리퍼스 호는 첫 항해에서 B+ 정도의 무난한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근데 보면 도박에 처음 손대는 초보자가 돈을 따는 경우가 흔히 있다. 그래서 그 초보자는 자부심에 찬 나머지 그 다음 판에서 대담한 베팅을 하다가 쪽박을 차곤 한다.

클리퍼스의 베팅도 대담했다. 그들이 올-인한 카드는 바로 빌 월튼(Bill Walton)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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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튼은 한때 NBA 최고의 선수였다. 76-77시즌 소속팀 포틀랜드를 NBA 우승으로 이끌었고, 이듬해에는 리그 MVP도 차지했다. 하지만 그는 77-78시즌 중에 치명적인 발 부상을 입어 78-79시즌을 통채로 쉬어야 했다. 그의 부상은 커리어 자체를 뒤흔들 수 있을 만큼 심각했고 재기가 불투명했다.

첫 해에 제법 괜찮은 성적을 올렸지만 흥행은 부진했던 클리퍼스는 티켓 판촉의 타개책으로 포틀에서 개점 휴업중인 월튼의 영입을 추진했다. UCLA 대학의 전설이었던 그는 캘리포니아 주의 농구 영웅이었고, 또한 샌디에이고에서 고등학교를 다녔었다. 그들은 샌디에이고가 배출한 역대 최고의 농구 선수라면 흥행과 성적 향상에 충분한 밑거름이 될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가 당한 심각한 부상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다.

월튼에 대해 반 포기상태였던 포틀랜드는 클리퍼스가 공짜로 월튼을 FA로 데려가는 것까진 용납하지 않았고, 결국 클리퍼스는 주전 파워포워드 커밋 워싱턴(Kermit Washington), 7풋의 백업 센터 케빈 커너트(Kevin Kunnert),  1라운드 픽과 35만불의 현금을 댓가로 바쳤다.

하지만 야심차게 영입한 월튼 카드는 알고보니 쪽박패였다. 긴 부상 공백으로 인해 그의 내구성은 실드 없는 아칸 수준에 불과했던 것이다. 결국 월튼은 79-80 시즌 고작 14경기밖에 뛰지 못한 채 또다시 부상으로 쓰러져버렸다.

프리가 평균 30.2득점을 올리며 2년 연속 리그 득점 2위에 랭크되었고, 쓰러진 월튼 대신 주전 센터로 활약한 스웬 네이터(Swen Nater)가 평균 15리바운드로 리그 리바운드 1위를 차지하며 선전했지만, 팀 성적은 오히려 전년보다 추락했다. 클리퍼스는 시즌 중반만 해도 한때 26승 21패의 호성적을 달리며 잘나가나 싶더니, 이후로는 겨우 9승을 추가하는 데 그치며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최종 성적은 35승 47패로 당연히 플레이오프 탈락이었다.

떨어진 팀 성적 만큼이나 팀 분위기는 가라앉았고 에이스 프리는 늘어나는 득점만큼이나 팀원들과 불화를 쌓아갔다. 특히나 부상으로 코트에 서지 못하는 월튼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결국 클리퍼스는 시즌이 끝나고 프리를 골든 스테이트로 트레이드하며 분위기 쇄신을 꾀했다. 리그 평균 득점 2위인 프리를 내준 댓가로 클리퍼스가 받은 건 필 스미스(Phil Smith)란 가드와 미래의 1라운드 픽이었다.

스미스는 과거 올스타 경력도 있는 좋은 선수였지만 당시 부상으로 하향세를 걷고 있었고 평균 득점은 프리의 절반에 불과했다. 프리같은 팀의 간판 스타를 내준 댓가 치고는 영 시원찮아 보였지만, 프리가 워낙에 팀 케미스트리 파괴자로 악명을 떨치다보니 울며 겨자먹기로 도매급 판매를 한 셈이다. 훗날 샌 안토니오가 데니스 로드맨(Dennis Rodman)을 내주는 댓가로 겨우 윌 퍼듀(Will Perdue)를 받아온 것과 비슷한 시츄에이션이었다.

선장도 새로 바꼈다. 진 슈 감독이 물러난 자리에 선수 시절 블루 워커로 이름을 날린 폴 사일러스(Paul Silas)가 새로 부임했다. 현역에서 은퇴한 지 곧바로 한 팀의 감독이란 중책을 맡은 사일러스는 당시만 해도 37살의 신출내기였다.

하지만 클리퍼스 호의 항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월튼은 여전히 회복 불가의 상태였고 또 한 시즌을 통으로 개점 휴업내야 했다. 월튼도 없고~ 프리도 없고~ 그나마 프리맨 윌리엄스(Freeman Williams)와 스웬 네이터가 분전해봤지만 결국 클리퍼스는 36승에 그치며 또다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계속된 성적 난조와 흥행 부진에 시달리던 구단주 어브 레빈은 결국 시즌 도중 클리퍼스 구단을 L.A의 갑부 도널드 스털링(Donald Sterling)에게 팔아버렸다. 클리퍼스와 스털링 간의 길고 긴 악연(?)은 바로 이때부터 맺어진 것이다.

법률가 출신의 스털링은 비버리 힐스 일대에서 부동산으로 떼돈을 번 수완가였다. 그런데 하루는 그의 고객이자 레이커스의 구단주인 제리 버스(Jerry Buss)가 NBA 구단을 운영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해왔고, 스털링은 자금난에 시달리던 클리퍼스를 12.5mil에 사들이며 어엿한 NBA 구단주가 되었다.

하지만 스털링이 보기에도 샌디에이고란 도시는 영 매력없는 프랜차이즈였다. 클리퍼스의 성적이 신통치 못한 점도 있었지만 리그에서 거의 매년 꼴찌를 다툴 정도로 티켓 판매가 부진했으니 말이다. 대신 스털링은 자신의 홈타운인 로스 앤젤레스(Los Angeles)로 연고지를 옮길 궁리를 하고 있었고, 이를 위해 본격적으로 로비에 들어갔다. 이제 샌디에이고에 또다시 NBA 팀이 사라지는 건 시간 문제였다.

81-82시즌은 클리퍼스에겐 악몽과도 같았다. 월튼은 2년 연속 개점 휴업 간판을 내걸었고, 월튼을 대신해 클리퍼스의 골밑을 수호하던 스웬 네이터마저 무릎 부상으로 쓰러져버렸다. 그들의 성적은 17승 65패로 처참했으며, 프랜차이즈가 출범한 이래 버팔로 시절까지 합쳐 최악의 부진이었다.

그나마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 유일한 희망은 드래프트 1라운드로 뽑은 루키 톰 체임버스(Tom Chambers)였다. 백인이었지만 놀라운 운동능력을 보유한 체임버스는 루키임에도 불구하고 평균 17.2득점으로 팀 내 득점 1위를 차지했다.

82-83시즌이 시작하자 드디어 그들의 잊혀진 영웅 빌 월튼이 컴백했다. 의사들도 한때 재기가 불가능하다고 포기했었지만 월튼은 굳은 의지로 여러 차례의 수술을 감내하며 다시금 코트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만신창이가 되버린 그의 몸은 메딕 없는 스팀팩 마린이었다. 경기를 연속으로 뛰게 되면 영영 쓰러질지도 모를 몸상태였기에 의사들은 윌튼에게 1주일에 1번만 경기에 뛰도록 허락했고, 그는 시즌 내내 고작 33경기에 출장해야 했다.

평균 14.1득점, 9.8리바운드, 3.6블록슛을 기록한 윌튼은 비록 부상으로 망가진 몸이었지만 코트에 서있는 시간만큼은 여전히 위력적인 센터였다. 그러나 제 아무리 잘해도 세 게임에 한 번 꼴로 출장해서는 팀 성적 향상에 별 보탬이 될 수 없었다.


한편 82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2위로 뽑힌 테리 커밍스(Terry Cummings)는 평균 23.7득점, 10.6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신인왕에 올랐고, 2년차인 체임버스는 17.6득점을 보탰다. 이 두 젊은 포워드들의 활약상은 놀라웠지만 어린 선수들에게만 의지해서는 리그에서 승수를 쌓기 힘들었고, 클리퍼스는 고작 25승에 그쳤다.

83-84시즌을 앞두고 클리퍼스호는 제법 큰 물갈이를 단행했다. 폴 사일러스는 NBA 감독 일이 힘들다는 경험치만 잔뜩 얻은 채 짐 라이넘(Jim Lynam)에게 바통을 넘겼다. 또한 두 차례의 큰 트레이드를 거치며 팀 구성원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첫번째로 그들은 시애틀에 포워드 톰 체임버스와 가드 알 우드(Al Wood), 그리고 드래프트 픽 몇 개를 넘기는 대가로 7-2의 거구의 센터 제임스 도날드슨(James Donaldson), 포워드 그렉 켈서(Greg Kelser)와 역시 드래프트 픽 몇 개를 받아왔다.

풀 시즌을 뛰지 못하는 월튼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앞날이 창창한 유망주 포워드 체임버스를 내주면서까지 장신 센터를 데려온 것이다. 하지만 도날드슨은 그저 키만 큰 꺽다리에 불과했고, 체임버스는 훗날 올스타 포워드가 되었다.

한편 매직 존슨(Magic Johnson)을 앞세워 80년대 초 두 차례나 우승을 차지한 전통 명문 옆동네 레이커스에서 약간의 알력 다툼이 있었다. 당시 레이커스의 주전 포인트가드를 흔히들 매직 존슨으로 알고 있지만 80년대 초반까지는 베테랑 놈 닉슨(Norm Nixon)이 주전 포가였고, 매직은 포지션은 지금의 르브론, 웨이드처럼 포인트가드가 아니면서도 팀 내 제 1의 컨트롤 타워 역할을 했다.

한마디로 80년대 초반 레이커스에는 실질적으로 두 명의 포인트가드가 코트 위에서 뛰는 셈이었다. 이 둘의 뛰어난 리딩에 힘입어 머리 둘 달린 용 레이크드래곤은 두 개의 챔피언 링을 차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매직은 자신이 본격적으로 풀타임 포인트가드가 되길 원했고, 그럴려면 닉슨을 몰아내야 했다. 당시 레이커스에서 매직의 입김은 절대적이었고, 결국 레이커스에서 6년이나 주전 포가로 활약한 닉슨은 매직에게 밀려나 정든 팀을 떠나야 했다.

닉슨 트레이드의 거래 대상이 바로 옆동네 클리퍼스였다. 클리퍼스는 닉슨과 에디 조던(Eddie Jordan), 2개의 2라운드 픽을 데려오는 댓가로 83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4번으로 뽑은 바이런 스캇(Byron Scott)과 부상으로 망가진 노장 센터 스웬 네이터를 보냈다.

클리퍼스에서 지명된 스캇은 이 트레이드로 레이커스에서 데뷔하게 되었고, 이후 레이커스의 주전 슈팅가드로 활약하며 3번의 우승에 훌륭한 조력자 역할을 해냈다.



클리퍼스에서 2년차 시즌을 맞게 된 테리 커밍스는 22.9득점, 9.6리바운드를 기록하며 팀의 확고한 에이스 자리를 지켰고, 새로 클리퍼스 호의 키를 잡게 된 조타수 닉슨은 그동안 매직에게 눌린 설움을 풀기라도 하듯 평균 11.1 어시스트로 매직에 이어 리그 어시스트 2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이들의 활약보다 더 고무적인 것은 월튼의 늘어난 출장 경기 수였다. 악몽같은 부상에서 복귀해 1주일에 1번만 뛰는 철저한 몸관리로 한 시즌을 무사히 마친 뒤 월튼의 몸상태는 더더욱 좋아졌고, 83-84 시즌에는 55경기나 뛸 수 있었다. 월튼 본인으로선 부상으로 시름한 지 5시즌 만에 50경기 이상을 소화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더이상 그의 실력은 팀 성적을 좌지우지할만한 슈퍼 스타급이 아니었고, 팀에서는 젊은 제임스 도날드슨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길 바랬다. 어렵게 건강을 찾은 월튼이었지만 대신 수많은 부상의 악령들과 싸우며 그의 천재적인 농구 재능은 거의 바닥나버린 것이었다.

클리퍼스는 팀에 많은 변화를 주었음에도 30승 52패란 암울한 성적에 그쳤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샌디에이고 클리퍼스에겐 고3 기말고사 성적표가 되고 말았다.

자신의 구단 클리퍼스를 L.A로 옮기려는 스털링의 로비는 끝내 성공했고, 클리퍼스 호는 샌디에이고 항구를 끝나 L.A 항구에 닻을 내릴 준비를 하게 되었다. 바야흐로 NBA 최악의 만년 꼴지 구단 L.A 클리퍼스 호가 진수식(進水式)을 눈앞에 둔 것이다. (3부에 계속)

샌디에이고 클리퍼스의 통산 성적

78-79시즌 43승 39패 승률 .524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감독 진 슈(43-39)
79-80시즌 35승 47패 승률 .427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감독 진 슈(35-47)
80-81시즌 36승 46패 승률 .439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감독 폴 사일러스(36-46)
81-82시즌 17승 65패 승률 .207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감독 폴 사일러스(17-65)
82-83시즌 25승 57패 승률 .305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감독 폴 사일러스(25-57)
83-84시즌 30승 52패 승률 .366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감독 짐 라이넘(30-52)

6시즌 통산 186승 306패 승률 .378 플레이오프 0회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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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COLUMNS/HELTANT79 2008. 12. 29. 00:57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2008년 10대 뉴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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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블랜드의 2008년이 끝나가고 있다.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고의 성적을 거두며 순항하고 있는 클리블랜드는 28일(이하 현지시각)과 30일 마이애미 히트와의 2연전을 마지막으로 2008년 일정을 마무리하게 된다.

클리블랜드는 두 번의 대형 트레이드를 통해 2005년 이후 이어져오던 시스템을 전면 개편하고 2010년 이후를 위한 포석을 밟아나가기 시작했다. 2008년은 '팀 르브론' 클리블랜드가 진정한 리그 엘리트 팀으로 나아가는 첫 걸음이 된 셈이다.

클리블랜드의 다사다난했던 2008년을 수놓은 사건 10가지를 살펴본다.


10. 2007-2008 플레이오프 2라운드 탈락

우승팀 보스턴을 상대로 7차전 승부를 펼치며 동부 디펜딩 챔피언의 저력을 보여줬지만 끝내 원맨팀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 
1차전 원정경기에서 클리블랜드는 에이스 르브론이 12득점 10턴오버로 철저히 틀어막히면서 패배를 맛보아야 했고 2차전 역시 대패해 조기 탈락하는듯 했다. 하지만 클리블랜드는 홈에서 펼쳐진 3,4차전에서 승리를 거둔 후 5,6차전을 나눠가져 승부를 최종전까지 끌고갔다.
보스턴에서 펼쳐진 운명의 7차전, 르브론은 45점을 올리며 분전했지만 상대팀 에이스인 피어스가 41점으로 함께 폭발하며 힘든 경기를 펼쳤고, 결국 막판 집중력 부족으로 2년 연속 파이널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시즌중 대형 트레이드로 팀워크를 완전히 다지지 못한 클리블랜드에게 '올해의 수비수' 케빈 가넷이 이끄는 보스턴의 수비는 넘기 힘든 벽이었다.


9. 바레장, 파블로비치의 난조-잘못 끼운 첫 단추

2007-2008 시즌이 개막했을 때 클리블랜드의 로스터에는 팀이 2007년 파이널에 진출하는 데 크게 공헌했던 두 선수의 이름이 없었다. 두 명 모두 팀과의 재계약 실패로 경기에 나서지 못한 것이다. 핵심 롤 플레이어인 두 사람의 공백은 클리블랜드의 시즌 운영에 굉장한 부담을 주었다.
앤더슨 바레장의 에이전트는 터무니없는 금액을 요구하기로 악명 높은 댄 페건이다. 페건은 겨우 20분 남짓 출전하는 바레장에게 연간 1,000만 달러를 지급해달라고 요구했는데 이것은 팀으로써는 받아들이기 힘든 금액이었다. 결국 12월 중순에야 복귀한 바레장은 프리 시즌을 소화하지 않은 몸의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부상, 2월의 거의 모든 경기를 결장해야 했다. 바레장의 공백은 32살의 노장 센터 지드루나스 일가우스카스의 체력 부담을 연결되었고, 결국 일가우스카스마저 부상을 겪에 되었다. 바레장이 초래한 클리블랜드 인사이드진의 이러한 부담은 프런트가 월러스와 스미스를 영입하는 블록버스터 트레이드를 단행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파블로비치는 바레장에 비해 빨리 계약을 마무리지어 시즌 초반부터 출장했지만, 연봉 협상 기간 동안 전혀 농구를 접하지 않은 몸은 NBA의 힘든 일정을 견뎌내지 못했다. 결국 부상과 컨디션 난조로 1월 말부터 경기에 나서지 못한 파블로비치는 3월 중순에야 복귀할 수 있었고, 이것은 휴즈를 떠나보낸 클리블랜드 백코트진의 부담으로 이어졌다. 파블로비치는 이번 시즌에도 컨디션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클리블랜드와 2010년까지 계약되어있다. 하지만 바레장은 이번 시즌이 끝나면 FA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얻고 파블로비치는 코칭스태프의 눈 밖으로 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앞으로도 클리블랜드 유니폼을 입게 될지는 미지수다.



8. 르브론, 마침내 생애 첫 득점왕 등극

2007-2008 시즌은 르브론이 또 한 단계 발전한 시즌으로 기록될 것이다. 경기당 30점을 기록하며 데뷔 5년만에 처음으로 득점왕에 오른 르브론은 야투율, 리바운드, 어시스트, 블록슛에서 모두 커리어 하이를 기록하며 개인 기록 면에서는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하지만 이것은 클리블랜드가 그만큼 원맨팀이라는 사실 역시 반증했다. 르브론 외에 확실한 득점원이 없었던 클리블랜드는 시종일관 답답한 경기를 펼쳐야 했고, 리그 득점왕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득점력 빈곤에 시달려야 했다. 게다가 주축 선수들의 잦은 부상과 블록버스터 트레이드로 인한 어수선한 팀 상황은 모두 리더 르브론의 부담으로 연결됐고, 르브론은 시즌이 진행될 수록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번 시즌 완벽하게 정비된 팀에서 확실한 조력자들과 함께 뛰고 있는 르브론은 지난 시즌에 비해 개인 기록이 크게 떨어졌다. 하지만 르브론은 개인 기록에는 연연하지 않는 눈치다. 르브론에게는 4쿼터에 10점씩을 올리면서 힘든 경기를 해야 했던 지난 시즌보다 벤치에서 춤을 추며 동료들을 응원할 수 있는 이번 시즌이 더 행복할 것이다.


7. 기록의 시대-일가우스카스와 르브론의 프랜차이즈 기록 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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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9일은 클리블랜드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같은 날 두 개의 프랜차이즈 통산 신기록이 수립됐기 때문이다. 12월 9일 토론토와의 홈경기에서 르브론은 경기 시작 1분여만에 두 개의 스틸을 기록, 마크 프라이스가 가지고 있던 734개의 통산 스틸 기록을 넘어섰다. 그로부터 20여분 뒤, 이번에는 팀의 터줏대감 일가우스카스가 그날 4개째의 리바운드를 잡아내며 브래드 도허티가 가지고 있던 5,227개의 통산 리바운드 기록을 2위로 밀어냈다.
르브론과 일가우스카스는 클리블랜드의 통산 기록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이름들이다. 르브론은 2월 27일 보스턴 원정경기에서 도허티의 통산 득점 기록(10,389점)을 넘어섰고, 9672점을 기록하고 있는 일가우스카스도 이번 시즌 내로 팀 통산 4번째로 1만점을 돌파할 전망이다.


6. 르브론 올림픽 금메달 획득-더이상 르브론'즈'가 아니다!

르브론이 국제대회 도전 세 번째만에 마침내 우승의 기쁨을 맛봤다. 르브론은 베이징 올림픽의 주전 멤버로 활약하며 미국에 8년만의 금메달을 안겼다.
르브론은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았던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 출전했지만 동메달에 그쳤다. 2년 뒤 미국 대표팀의 공동 주장을 맡아 세계선수권에 출전했지만 이번에도 준결승에서 그리스에 패하며 동메달에 그쳐야 했다. 리그를 대표하는 선수로써 굉장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르브론에게 이번 올림픽은 반드시 우승할 필요가 있는 대회였다. 시즌 MVP 코비 브라이언트와 국제대회 무패 제이슨 키드등 최고의 라인업으로 올림픽에 출전한 미국 대표팀은 매경기 상대를 압도하며 결승에 진출, 스페인을 명승부 끝에 제압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팀 리더 중 한 명이었던 르브론은 대회 평균 18.2득점과 3.6리바운드 4.7어시스트를 기록했고, 팀내 최고인 76%의 야투 성공율과 62.2%의 3점 성공율을 기록했다. 최고의 선수들과 함께 하며 리더로써 한 단계 발전했다고 말하는 르브론은 대표팀에서 얻은 자산을 이번 시즌 소속팀에서 마음껏 발휘하고 있다.


5. 딜론테 웨스트, 우울증으로 팀 이탈-전화위복

10월 중순 웨스트가 팀을 갑자기 이탈했을 때 팬들은 우려 섞인 시선으로 그를 기다렸다. 팀에서는 웨스트의 이탈 이유를 발표하지 않았기 때문에 온갖 소문들이 돌아다녔다.
사실 웨스트는 우울증을 앓아오고 있었다. NBA 선수가 된 다음에도 우울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팀 자체 청백전을 뛰고 있었던 웨스트는 갑자기 심판과 크게 싸우기 시작했고, 우울증이 심각해졌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치료를 위해 팀을 떠났다.
웨스트가 우울증과 싸운 2주 동안 클리블랜드의 팀 동료들은 수시로 전화를 걸어 그를 염려해줬다. 또한 웨스트 스스로 밝힐 때까지는 웨스트의 증상을 언론으로부터 철저히 감싸줬다. 마침내 우울증을 극복하고 시즌 개막 직전 복귀한 웨스트는 클리블랜드의 주전 슈팅가드로써 뛰어난 활약을 보이고 있다. 또한 웨스트를 배려하는 과정에서 팀 전체가 똘똘 뭉치게 됐다. 지난 시즌에 비해 로스터 대부분이 교체되어 서로가 생소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웨스트의 이탈은 팀 캐미스트리를 다지는 좋은 계기가 됐다.
현재 클리블랜드의 팀 분위기는 최고다. 르브론이 '내가 입단한 이래 이렇게 분위기가 좋았던 적은 없었다'고 말할 정도다. 지난 시즌에는 래리 휴즈등 몇몇 선수가 팀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선수들이 경기 끝나고 어디를 함께 갈지가 화제에서 빠지지 않을 정도로 개인적으로도 친해진 상태다. 클리블랜드의 이번 시즌 전망을 밝게 하는 이유다.


4. 블록버스터 트레이드 단행-2010 프로젝트의 초석

좀처럼 대형 트레이드를 하지 않는 대니 페리 단장이 모처럼 '한 건'을 터뜨렸다. 클리블랜드는 2월 22일 시카고 및 시애틀과의 3각 트레이드를 발표했다. 클리블랜드는 래리 휴즈와 드류 구든, 섀넌 브라운, 세드릭 시몬스를 시카고 불스로 보내고 벤 월러스, 조 스미스, 드래프트 2라운드 지명권을 받았으며 도넬 마샬, 이라 뉴블을 시애틀 슈퍼소닉스로 보내고 딜론테 웨스트와 월리 저비악을 받았다.
클리블랜드의 이 트레이드는 2005-2006시즌부터 진행해온 '래리 휴즈 2인자 프로젝트'의 포기를 선언하는 것이었다. 클리블랜드에서 팀 시스템 적응 실패와 부상으로 제 몫을 하지 못하던 휴즈를 보내면서 휴즈와 함께 계약한 마샬 등을 처분한 것이다. 대신 수비왕 4회에 빛나는 월러스를 비롯해서 클리블랜드 시스템에 잘 맞는 선수들을 모아왔다. 이 트레이드로 클리블랜드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 중 조 스미스를 제외한 모든 선수들이 현재 클리블랜드의 주축 선수로 활약하고 있다.
한편 이같은 블록버스터 트레이드와 잦은 부상 등의 여파로 클리블랜드는 2007-2008시즌에만 리그에서 가장 많은 23명의 선수가 로스터에 이름을 올려, 조직력을 다지는 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3. '모 윌' 영입-마침내 르브론의 조력자를 얻다?

클리블랜드의 팀 개편 노력은 오프시즌에도 이어졌다.
베이징 올림픽이 한창이던 8월 13일, 클리블랜드는 공격형 포인트가드인 모리스 윌리암스를 영입했다고 발표했다. 클리블랜드는 조 스미스를 오클라호마 시티에, 데이먼 존스를 밀워키에 보내고 밀워키는 윌리암스를 클리블랜드에, 데스먼드 메이슨을 오클라호마 시티에 보냈으며, 오클라호마 시티는 루크 리드노어와 애드리언 그리핀을 밀워키에 보내는 삼각 트레이드였다.
트레이드의 핵심은 클리블랜드 유니폼을 입게 된 모리스 윌리암스였다. 유타와 밀워키에서 선수생활을 한 6년차 포인트가드 윌리암스는 뛰어난 볼핸들링과 공격력으로 그간 원맨팀의부담을 혼자 짊어져왔던 르브론의 조력자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베이징에서 트레이드 소식을 들은 르브론 역시 '윌리암스는 매우 뛰어난 포인트가드'라며 트레이드에 'A'를 주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시즌이 1/3 정도 진행된 시점에서 윌리암스는 이러한 팀의 기대를 100% 만족시켜주고 있다. 윌리암스는 르브론과 함께 뛸 때는 르브론의 리딩 부담을 덜어주고, 르브론이 벤치에서 휴식을 취할 때는 스스로 공격 찬스를 만들어내며 르브론의 공백을 완벽하게 메워주고 있다. 윌리암스의 가세로 클리블랜드는 르브론 외에 또다른 '컨트롤 타워'를 얻게 되어 르브론만 막으면 이길 수 있는 팀이라는 소리를 더이상 듣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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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010 프로젝트' 파동-리그의 이목을 모은 르브론의 거취

11월 내내 리그를 후끈 달군 이슈는 레이커스의 엄청난 상승세도 보스턴의 여전한 강세도 아니었다. 심지어 이번 시즌에 일어난 일도 아니었다. 20개월이나 남은 2010년 이적시장에 대한 기사가 홍수처럼 쏟아졌고, 그 모든 논란 한가운데 르브론이 있었다.
리그의 몇몇 팀들은 벌써부터 2010년을 대비해서 샐러리캡을 비우고 있고, 공공연히 르브론을 노리고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르브론 자신이 2010년 이후 자신의 거취에 대해 확답을 주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각 팀의 '2010 프로젝트'는 점점 과열 양상을 띠고 있다. 그 와중에 TNT 해설위원인 찰스 바클리가 '르브론은 입을 닥쳐야 한다. 2010년 거취에 대해 자꾸 떠드는 것은 팀 동료와 팬들을 생각치 않는 처사'라며 르브론을 비난했고, 르브론이 '난 두 아이의 아버지다. 바클리에게 그런 소릴 들을 이유가 없다. 바클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다. 끝!'이라며 받아치는 사건까지 있었다.
르브론에게도 2010년의 거취를 질문받는 것은 고역임에 틀림없다. 프로 선수가 지금 당장도 아닌 2년 후의 계약 문제에 대해 못박아 대답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르브론은 어린 나이답지 않은 노련한 언론 플레이로 오히려 언론을 가지고 놀며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기회로 삼고 있다.
이미 여러 팀이 '2010 프로젝트'를 선언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르브론의 행보에 대한 추측은 계속될 것이다. 르브론 스스로가 '아직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고 있는 만큼, NBA 팬은 '2010 프로젝트'를 향한 각 팀 단장들의 머리싸움을 2년간 즐길 수 있을 전망이다.


1. 팀 역사상 최고의 시즌?

클리블랜드는 12월 28일 현재 25승 4패로 보스턴에 1경기 뒤진 리그 2위를 달리고 있다. 25승 4패의 성적은 당연히 팀 역사상 최고의 초반 성적이고, 득실 마진(+12.72), 최소실점(89.24) 등에서 리그 1위를 달리고 있다. 또한 홈경기 15승 무패로 리그 유일의 홈경기 무패팀으로 남아있다. 시즌 개막 전 50승도 안되는 성적으로 동부 4위권에도 오르지 못할 것이라던 전문가들의 예측을 무색케 하는 선전이다.
클리블랜드가 리그 엘리트 팀으로 발돋움한 것은 지난 시즌 대폭 물갈이된 선수들이 프리시즌 캠프를 함께하면서 팀워크를 다졌고, 모리스 윌리암스의 합류로 공격이 훨씬 부드러워졌으며, 마이크 브라운 감독이 수비에서뿐 아니라 공격에서도 뛰어난 지도력을 보이며 한단계 성장했기 때문이다. 팀 스타일이 탄탄한 수비력과 결실한 팀 플레이에 의존하기 때문에 남은 시즌도 기복없는 경기력을 유지할 전망이다.
클리블랜드는 르브론 입단 후 꾸준히 발전해왔지만 지금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르브론 본인도 예상 밖이라고 말할 정도로 큰 발전을 이뤘다. 시즌 MVP 후보 0순위로 꼽히고 있는 르브론이 이끄는 클리블랜드가 이번 시즌 어디까지 발전할지, 과연 르브론의 선언대로 파이널 우승을 달성할 수 있을지, 모든 것이 결정될 2009년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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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 농구 카페나 동호회의 질문 게시판에 종종 올라오는 글을 보면 이런 물음들이 발견됩니다.

"저의 농구 롤모델은 누구로 하면 좋을까요?"

"코비를 저의 롤모델로 삼고 싶은데 도움 좀 주세요.".....

여기서 말하는 '롤 모델'로 삼는다는 표현은, 어떤 특정선수와 같은 스타일의 슛폼이나 농구 스타일을 닮고 싶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렇죠?

그런데.... 과연 여기서 말하는 '롤 모델'이 올바른 용어사용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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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 모델'이란 단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Robert K. Merton이라는 이름의 대학교 사회학 교수셨습니다. 이 분이 말한 '롤 모델'의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A role model is any "person who serves as an example, whose behaviour is emulated by others".

이 분이 사회학을 전공하는 대학생들에게 "한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인생의 귀감이 될만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역설하는 과정에서 이 용어가 창조되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특정한 인물의 삶과 행동양식을 닮아서 그 사람처럼 본이 되는 삶을 살고 싶을 때에, 그 모델이 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롤 모델'이라는 것이죠.

제 닉네임이 말해주듯이, 저는 자라면서 'Doctor J' 줄리어스 어빙을 저의 롤 모델로 삼고 자랐습니다.

줄리어스 어빙처럼 공중을 걸어 다니고, 덩크하고 싶어서 그를 롤 모델로 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빙이 코트 위에서나 코트 밖에서나 타 팀의 모든 선수들과 감독들로부터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린 마음에 저도 커서 그러한 인물이 되고 싶었습니다. 아직도 멀었지만, 그와 같은 모습으로 살고자 최소한 노력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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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지에 실린 '롤 모델' 관련 칼럼을 보면, 미국의 모든 메이저 스포츠를 통틀어서 최고의 롤 모델이 누구였는가라는 질문에 칼럼니스트가 주저함 없이 줄리어스 어빙을 1위로 지목했습니다. 농구선수로서는 데이빗 로빈슨도 3위인가 4위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어빙이 농구를 제일 잘 해서가 아닙니다. 잘 하는 순서였다면 당연히 마이클 조던이었겠죠.

또 어빙이 완벽한 인간이라는 말과도 거리가 멉니다. 이미 혼외정사로 인해 낳은 어빙의 2세도 있지 않습니까? 그도 어쩔 수 없는 한 인간임을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선수 시절의 어빙은 자신의 팀원들은 물론, 라이벌 팀의 선수들, 타 팀의 감독들, 리그의 모든 심판들을 포함해 사무국까지, 그리고 농구에 관련되어있지 않은 모든 사람들로부터도 한결같은 존경과 애정을 받았고, 심지어 라이벌들에게조차 안 좋은 말이나 트래쉬 토킹을 해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신화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프로 선수들이 흔히 하는 도박이나 술, 담배 등은 평생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인터뷰를 할 때도 언제나 옳은 말만 했고, 자기 자신을 내세우거나 또는 상대방 선수, 상대 팀을 깍아 내리거나 폄하해서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선수가 어빙입니다.


'롤 모델'은 이렇게 자신에게 바람직하고 올바른 인생관과 행동양식을 갖고 살고 싶게끔 자극을 준 다른 특정 대상인 가리킬 때 쓰는 용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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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프로 초창기에 악동 노릇을 많이 했던 찰스 바클리도 '당신은 아이들이 보고 닮고 싶어하는 프로 스포츠 스타인데 이렇게 말하고 행동해도 괜찮겠느냐?'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아주 단순하게 "I am not a role model. I am Charles Barkley."라고 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이들에게 자신의 삶과 행동양식을 배우라고 강요하지 않을테니, 당신들도 나에게 어떤 특정한 모습의 삶의 모습을 강요하지 말아라'라고 한 것이죠.

말이 길어졌군요. 정리하겠습니다.

간단히 예를 들어보자면 이렇습니다.

"나는 마라도나를 나의 롤 모델로 삼겠다." "나는 데니스 로드맨을 나의 롤 모델로 삼겠다"라는 말은 사실 어불성설입니다.

이들을 롤 모델로 삼는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마약 중독에 빠진 사람이나 여성편력, 기행 등을 일삼던 선수처럼 인생을 살고 싶다"라는 말도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농구선수였던 윌트 체임벌린이 선수 시절 당시에 '롤 모델'로 거론되지 않았던 것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그냥, '나는 마라도나의 축구 기술를 배우고 싶다'라든지 '데니스 로드맨의 열정과 몸관리, 리바운드 기술을 본받아 내 것으로 만들어 농구할 때 써먹고 싶다', 또는 '코비의 슛폼과 플레이 스타일, 또는 그의 악착같은 근성과 노력하는 자세를 내 인생에도 적용하고 싶다'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롤 모델은 인격과 행동양식에 관한 용어이지, 실력이나 능력, 스타일에 관한 용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특정 용어가 약간 잘못 이해되고 사용되어지는 것 같아서 한 말씀 올렸습니다.

 다가오는 연말연시 건강하고 보람있게 잘 보내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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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기사는 월간지 '점프볼' 1월호에서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편집 : 신호섭(heltant79)
참여 : 신호섭(heltant79), 안태진(Dream Time), 송석규(Point Guard), 김준우(jeffrey23)

NBA의 현재와 미래가 만났다. NBA를 대표하는 두 선수 코비 브라이언트와 르브론 제임스는 지난여름 베이징 올림픽에서 미국에 8년 만의 금메달을 안기며 최고의 호흡을 과시했다. 또한 2008-2009 시즌 초반 리더로써 소속팀의 높은 승률을 이끌고 있다. 뛰어에서는 1월 19일(미국시각) 시즌 첫 맞대결을 가지게 될 이들이 함께 하는 가상 인터뷰를 마련해 봤다.

뛰어(DDUEH)_ 먼저 지난 베이징 올림픽 얘기부터 해볼까요? 두 분 모두 생애 처음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올림픽 금메달은 두 분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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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언트(KB24) 나라를 대표해서 올림픽 금메달을 위해 경쟁하는 것은 굉장히 멋진 일입니다. 최소한 저에게는 NBA 파이널보다 올림픽이 더 큰 의미를 가졌죠. 10년 넘게 프로 선수 생활을 하면서도 올림픽에 나가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 올림픽은 매우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게다가 미국은 지난 아테네 올림픽에서 금메달 획득에 실패했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우승을 차지하며 미국 농구의 강함을 세계에 증명한 이번 올림픽은 매우 뜻 깊은 대회였습니다.

제임스(LBJ23) 저는 루키 시즌을 갓 마친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 처음 대표 팀으로 선발됐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너무 어렸고 큰 기여를 하지 못한 채 동메달에 그치고 말았죠. 제가 본격적으로 대표 팀의 주축이 된 것은 2006년 일본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 대표 팀 부터였습니다. 제 드래프트 동기인 드웨인 웨이드, 카멜로 앤써니 등이 함께 했었죠. 일본으로 가기 전 한국에서 시범경기를 가졌는데, 거기서 복무하고 있던 주한미군을 방문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애국심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죠. 그래서 올림픽에서는 꼭 금메달을 따고 싶었습니다. 대표 팀 모두가 자기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마침내 우승을 차지해 시상대에 섰던 것은 정말 특별한 추억이었습니다.

DDUEH_ 두 분은 지난 올림픽 지역예선에서 처음으로 한 팀이 되었습니다. 팀 동료로써 서로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KB24_ 이번 대표 팀에는 서른을 넘은 베테랑 선수가 저와 제이슨 키드뿐일 정도로 젊은 팀이었습니다. 그래서 르브론을 비롯한 젊은 선수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대회 기간 내내 좋은 분위기를 유지했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죠. 르브론은 실력과 품성 모두 뛰어난 선수입니다. 2006년부터 대표 팀 주장을 맡으며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확고한 리더십을 발휘했고, 이번 올림픽에서는 팀 전체의 목소리를 잘 대변해줬죠. 코트 위에서는 올 라운드 플레이를 선보이며 팀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해냈습니다. 르브론은 최고의 농구선수이자 최고의 리더입니다.

LBJ23_ 작년 여름 코비가 우리 팀에 가세하자 팀의 경쟁력은 매우 높아졌습니다. 코비는 상대 에이스 봉쇄와 클러치 타임 공격을 맡았는데, 그는 두 가지 모두 최고의 선수임을 증명했죠. 스페인과의 결승전에서 코비가 4쿼터에 성공한 4점 플레이 보셨나요? 그런 슛을 넣은 선수가 코비라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죠. 이번 올림픽 대표 팀에는 소속팀에서 에이스인 선수가 즐비했지만, 위기의 순간 코비에게 볼을 주는 것을 주저한 선수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DDUEH_ 두 분의 소속팀인 LA 레이커스와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는 지금 리그 최상위권에 올라있습니다. 두 팀 모두 지난 몇 년 동안 꾸준히 발전하고 있는데요, 데뷔 후 한 팀에서만 뛴 프랜차이즈 스타로써 감회가 새로우실 것 같습니다.

KB24_ 레이커스는 전통의 강팀입니다. 창단 이래 약팀이었던 적이 별로 없었던 팀이죠. 지난 몇 년간 힘든 시간을 겪기는 했지만, 언젠가는 다시 강팀이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저희 팀원 대부분은 팀이 어렵던 시절을 함께 한 오랜 동료들입니다. 필 잭슨 감독님과 함께 트라이앵글 오펜스 시스템을 갈고닦아왔죠. 지난 시즌에는 보스턴에게 아깝게 패했지만, 이번 시즌은 다를 겁니다.

LBJ23_ 제가 입단한 2003-2004 시즌 이래 팀에서 꾸준히 추진해온 전력 강화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맺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2003년 저희 팀은 리그 최약체였지만 지금은 재능 있는 선수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죠. 마이크 브라운 감독님의 수비농구 위에 이번 시즌에는 뛰어난 공격력까지 추가됐습니다. 이번 시즌의 캐벌리어스는 제 프로 경력 뿐 아니라 팀 역사를 통틀어서도 최강이라 자부합니다.

DDUEH_ 두 분은 내년 1월 19일(미국시각) LA에서 이번 시즌 첫 맞대결을 치르게 됩니다. 두 분의 맞대결은 모든 팬들의 눈을 한 곳에 모으곤 하는데요. 지금까지의 맞대결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경기는 어떤 것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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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24_ 저는 지난 시즌 홈경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군요. 저와 르브론 모두 최고의 플레이를 펼쳤습니다. 하지만 르브론이 마지막 순간을 지배하며 제 머리 위로 위닝샷을 꽂아 넣었죠. 저 친구 굉장히 좋아하더군요(웃음). 르브론과 대결하는 것은 대단히 흥분되는 일입니다. 저는 항상 최고의 선수를 상대로 경기하고 싶고, 르브론은 리그 최고의 선수 중 하나거든요.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습니다.

LBJ23_ 2005~2006 시즌 가졌던 원정 경기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그날 코비는 마지막 순간 저를 틀어막으며 연속해서 야투 세 개를 성공시켰죠. 코비는 경기 내내 팀 전체를 어깨에 짊어지고 갔고, 저도 그렇게 해보려 했지만 마지막 순간 실패했습니다. 에이스가 어떻게 경기해야 하는지 깨닫게 해준 한판이었죠. 제가 농구에 진지하게 빠져들 무렵 코비는 이미 리그 최고의 선수 중 하나였고, 제가 리그에 발을 들여놓기 전 이미 세 개의 우승반지를 가지고 있었죠. 그리고 코비는 제가 NBA에서 상대해본 선수 중 단연 최고의 선수입니다. 이런 선수와 대결하는 것은 제게 언제나 엄청난 동기부여가 되죠.

DDUEH_ 두 분은 각자의 포지션에서 리그 최고의 선수입니다. 서로가 생각하는 상대의 경기 스타일과 장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LBJ23_ 코비는 리그에서 가장 다재다능한 스윙맨입니다. 올 어라운드 플레이어를 상징하는 ‘20득점 5리바운드 5어시스트’를 기록한 시즌도 일곱 차례나 되죠. 슈팅가드 포지션에서는 최상급의 리바운드와 어시스트 능력을 지녔습니다. 풀타임 주전으로 발돋움한 후 코비는 줄곧 레이커스의 플레이메이커 역할과 주득점원 역할을 겸해왔습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게 있죠. 코비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재능은 득점력이란 것 말입니다. 코비가 득점왕 타이틀을 차지하기 전에도 그는 리그 최고의 득점기계였습니다.

코비는 리그 역사를 통틀어 가장 다양한 공격루트를 지닌 선수 중 한 명입니다. 내외곽에서 모두 득점이 가능하며 슛 거리 또한 상상을 초월하죠. 어떠한 상황에서도 슈팅 자세가 무너지지 않을 만큼 밸런스가 좋고, 몇 명이 수비하건 자신의 공격리듬만 완벽하면 보란 듯이 슛을 성공시킵니다. 과거에 비해 돌파 비중이 줄어들고 중거리 점프슛 시도가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야투 성공률이 더 좋아진 것은 그만큼 그의 슛이 위력적이라는 증거죠. 코비는 수비에서도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입니다. 코비는 지금까지 언제나 상대팀의 에이스들을 직접 수비해 왔으며, 팀 사정에 따라 포인트 가드부터 스몰 포워드까지 완벽하게 상대할 수 있죠. 코비는 지난 베이징 올림픽 때도 전문 수비수 이상의 찰거머리 수비로 미국의 우승에 공헌한 바 있습니다. 어떤 팀을 무너뜨리려면 그 팀의 에이스를 무너뜨리면 됩니다. 코비는 그런 일을 항상 해오고 있죠. 좋은 자세와 판단력, 경험이 어우러진 코비의 수비력은 리그 내에서도 최고 수준입니다.

하지만 코비의 진정한 위대함은 다른 데 있습니다. 게임의 승패가 결정되는 순간, 코비는 평소에도 대단한 집중력을 한두 단계 높여버립니다. 코비의 이런 집중력과 승부사 기질은 제가 항상 본받고자 하는 부분입니다.

KB24_ 르브론의 가장 큰 장점은 그의 몸 자체입니다. 206cm, 115kg의 몸은 파워포워드나 센터에게 어울리는 신체조건이죠. 그런 몸이 가드의 스피드로 치고 들어오는 르브론의 돌파는 현재 리그에서 가장 강력한 공격무기 중 하나입니다. 이런 식의 공격능력은 그에게 안정성과 성공률이라는 이점을 가져다주죠. 르브론은 완벽한 신체조건과 운동능력, 바디 밸런스를 지니고 있어 돌파만으로도 얼마든지 득점을 올릴 수 있습니다. 아직 공격적인 측면에서 발전단계에 있는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시즌 득점왕 타이틀을 차지한 걸 보세요. 그가 점프슛을 안정적으로 던질 수 있게 되었을 때 어느 정도의 공격력을 선보일 지 정말 기대됩니다. 르브론은 수비 또한 해마다 발전을 거듭해왔습니다. 패싱 레인 차단에만 의존하던 신인 시절과는 달리, 요즘 르브론은 상대 에이스와의 1:1 대결에서도 대부분 승리를 거두고 있죠. 신체조건이 워낙 뛰어나기 때문에 거의 모든 포지션을 수비할 수 있다는 점도 르브론이 가지는 가치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르브론이 정말로 무서운 선수인 이유는 지금 보여주는 모습이 그의 전성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르브론은 매년 자신의 단점을 보완하고 있죠. 이번 시즌도 그동안 많은 지적을 받았던 자유투 성공률을 10% 가까이 끌어올렸습니다. 3~4년 후 팬 여러분은 엄청나게 성장한 르브론을 볼 수 있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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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UEH
_ 두 분의 그런 스타일은 언제부터 자리를 잡았나요? 프로가 되기 전의 경험이 NBA에서의 플레이 스타일에 영향을 주었습니까?

KB24_ 물론입니다. 필라델피아에서 로워 매리언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저는 농구부의 정규 훈련이 끝난 다음에도 길거리 농구장에서 시합을 계속했습니다. 필라델피아의 길거리 농구는 미국의 다른 지역들과는 조금 다릅니다. 보통 길거리 농구에서는 수비가 크게 강조되지 않는데, 필라델피아에서는 수비를 못하면 농구를 할 수 없습니다. 정규 농구건, 길거리 농구건 간에요. 그래서 저는 어려서부터 수비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었죠. 생각해보면 저는 어려서부터 승부욕이 굉장히 강했던 것 같습니다. 친구들과 1:1 대결을 할 때도 상대를 철저히 누르지 못하면 직성이 풀리지 않았죠. 끊임없는 연습을 통해 제 실력이 늘었다는 걸 확인할 때가 가장 행복했습니다.

LBJ23_ 저는 농구를 시작하면서부터 포인트가드로 뛰었습니다. 볼을 가지고 동료들의 득점을 돕는 게 재미있었어요. 승패가 결정되는 순간 제 생각대로 게임을 조립하고, 조립한 대로 결과를 만들어내는 게 좋았습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키가 2미터를 넘어선 후에도 제 포지션은 여전히 포인트가드였습니다. 그리고 스몰포워드로 뛰고 있는 지금도 팀 리딩의 상당부분을 맡고 있죠. 저는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동료들이 위기 상황에서 저에게 의지하는 것이 기분 좋았습니다. 항상 리더가 되고자 했죠. 그래서 NBA 선수가 된 다음에도 동료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기 위해 항상 노력했습니다.

DDUEH_ 어린 시절 이야기를 좀 더 해보기로 하죠. 두 분은 성장 과정이나 농구를 접하게 된 과정 등이 모두 다릅니다.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KB24_ 저는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아버지(조 ‘젤리 빈’ 브라이언트)께서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에서 NBA 선수로 활약하고 계셨죠. 아버지는 1982-83시즌을 끝으로 NBA 무대를 떠나 이탈리아 리그에서 뛰게 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유년시절을 미국과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보내게 되었죠. 사실 저는 어린 시절 농구선수가 되겠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시다시피 이탈리아는 열광적인 축구 열기로 유명한 나라였기 때문이죠. 그곳의 모든 아이들은 축구 선수를 꿈꾸며 자라났고, 저 역시 AC 밀란 팀의 프로 축구선수로 뛰는 것을 꿈꿨습니다. 그런데 제 키가 너무 빨리 자라면서 문제가 생겼어요. 결국 저는 제 신체조건이 축구를 계속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농구선수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한번 시작하자 농구란 운동이 너무 재미있었더군요. 마치 저를 위해 생겨난 운동 같았죠. 하루 종일 농구공과 함께 살았습니다. 아버지도 저를 위해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고요.

아버지께서 은퇴하신 후 저희 가족은 다시 필라델피아로 돌아왔습니다. 학교에서 저는 이탈리아어를 할 줄 아는 조금 특이한 아이였죠. 일단 미국 아이들 문화에 적응해야 했습니다. 조금 혼란스럽기는 했지만, 저는 금방 적응했죠.

저는 사실 대학교를 거쳐 NBA 선수가 되고 싶었습니다. 대학농구 경험이 없으면 NBA에서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학교 성적도 좋았고요. 그런데 저보다 1년 일찍 고졸로 입단한 케빈 가넷이 NBA 적응에 성공하는 걸 보고 강한 자극을 받았습니다. 저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죠. 그래서 NBA 드래프트를 신청했습니다.

LBJ23_ 저는 오하이오 주 애크런에서 태어났습니다. 저희 팀 홈구장인 퀴큰 론즈 아레나와는 50킬로미터쯤 떨어진 조그만 도시죠. 그러니까 태어나서 지금까지 오하이오 토박이로 살아온 셈입니다.

저희 어머니는 저를 굉장히 힘들게 키우셨습니다. 16살에 아버지 없이 저를 낳으셨거든요. 게다가 제가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어머니는 저를 데리고 여기저기 이사를 다니며 힘들게 아르바이트를 하셔야 했죠. 그나마도 제가 열 살 무렵에는 법원에서 저희 어머니에게 부양능력이 없다는 판결을 내려서 따로 살아야 했습니다.

힘든 시절이었지만 운동을 하고 있을 때만은 행복했습니다. 운동장에서는 제가 가장 뛰어났거든요. 저는 농구와 미식축구를 했는데 저희 학교 미식축구팀 감독님이던 프랭키 워커 선생님께서 저를 맡아 키워주셨습니다. 제 은인인 셈이죠.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농구 교실에서는 제 평생 친구들도 만났습니다. 그 친구들과 농구를 하고 싶어서 세인트 빈센트-세인트 메리 고등학교에 함께 입학할 정도로 친했죠. 그 친구들은 지금도 제 주위에서 일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저희 팀이 유명해지자 사람들이 저를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행복하지 않았어요. 언론들은 저에 대한 기사를 써서 돈을 버는데, 저와 어머니는 여전히 가난했기 때문이죠. 그건 굉장히 불공평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빨리 돈을 벌고 싶었죠. 어머니를 더 이상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학을 거치지 않고 NBA 드래프트를 신청했죠.

DDUEH_ 서로 다른 길을 걸어 지금은 같은 목표를 향해 경쟁하고 있군요. 이제는 각기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아이들, 그리고 가족들은 두 분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KB24_ 제 아내 바네사와 저는 1999년 처음 만났습니다. 저는 21살, 바네사는 17살 밖에 되지 않았을 때였죠. 저희는 첫눈에 반했습니다. 하지만 제 부모님은 저희들의 결혼을 크게 반대하셨어요. 저희가 너무 어리고 바네사가 흑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죠. 저희는 끝내 부모님을 설득하지 못했고, 부모님은 저희 결혼식에 오시지 않으셨어요. 결국 몇 년 동안 부모님과 의절하고 살아야 했습니다.

첫 딸 나탈리아가 태어난 것은 그 무렵이었습니다. 나탈리아는 저희와 부모님 사이에 놓인 벽을 단숨에 허물어주었습니다. 저희는 나탈리아를 데리고 부모님을 찾아뵈었고, 부모님은 언제 저희 부부의 결혼을 반대했느냐는 듯이 저희를 따뜻하게 맞아주셨죠. 그 아이가 저희 모두를 다시 가족으로 만들어줬어요. 나탈리아와 2년 전 태어난 둘째딸 지아나는 제게 가장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LBJ23_ 저도 아이들 엄마인 사바나와 일찍 만났습니다. 저흰 고등학교 동창이었죠. 아직 결혼식을 올리지는 못했지만 언젠가는 꼭 멋진 결혼식을 올릴 겁니다. 저는 벌써 두 아들의 아버지죠. 이제 네 살이 된 맏아들 르브론 주니어는 저를 많이 닮았고, 두 살인 브라이스 막시무스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인 ‘글래디에이터’의 주인공 이름을 따서 지었어요. 제가 아버지 없이 자랐기 때문에 이 아이들에게는 좋은 아빠가 되어주고 싶습니다. 오프 시즌 동안에는 하루 종일 아이들과 뒹굴며 보내죠. 고향 팀에서 뛰고 있기 때문에 홈경기마다 어머니와 아이들을 관중석에 앉히고 경기할 수 있어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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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UEH
_ 두 분은 모두 마이클 조던의 후계자로 주목받아왔습니다. 두 분에게 조던은 어떤 의미이고 조던과의 비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KB24_ 저는 선수생활 내내 조던과 비교되어 왔습니다. 리그 안팎에서 '제2의 조던'을 찾으려고 하던 시절에 전성기를 보냈기 때문이겠지만, 역사상 최고의 선수와 비교된다는 것은 저를 굉장히 피곤하게 만들더군요. 물론 저의 플레이가 조던을 연상시킨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제 어린 시절 조던은 모든 아이들의 우상이었고, 농구를 한 아이 치고 조던의 영향을 받지 않은 선수는 없었으니까요. 언젠가 필라델피아로 원정을 온 조던을 경기장 복도에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저를 보고 그냥 지나치려다 소개를 받고 짧은 인사를 나눴죠. 그때는 긴장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몇 년 후 데뷔 2년 만에 올스타전 선발로 뽑혀 조던을 상대로 경기했을 때는 너무 행복했습니다. NBA에서 경력이 쌓이고 저 스스로가 이룬 업적이 늘어가면서, 이젠 조던과의 비교에서는 어느 정도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조던이 아니고 조던도 제가 아니죠. 저는 팬 여러분께 '코비 브라이언트'라는 농구선수로써 기억되고 싶네요.

LBJ23_ 저는 조던이 루키 시즌을 보내던 1984년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조던이 은퇴한 바로 다음 시즌 리그에 데뷔했죠. 제 또래 선수들은 어린 시절을 온전히 조던과 함께 보낸 셈입니다. 모든 아이들이 조던처럼 되고 싶어 했죠. 저 역시 마찬가지로, NBA에 데뷔했을 때 등번호도 아무 망설임 없이 23번으로 정할 정도였습니다. 고등학생 시절 조던이 저를 워크아웃에 초청한 적이 있었어요. 거기서 조던과 함께 훈련했습니다. 40살에 가까웠던 조던이 소화하는 엄청난 훈련 량을 본 경험은 워크아웃 후에도 계속해서 저를 분발하게 했죠. 저는 최고의 선수가 되고 싶습니다. 최고의 선수란 자신의 소속팀을 크게 발전시킬 수 있는 선수를 말하죠. 저는 조던을 보면서 그렇게 될 수 있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물론 저는 조던이 아닙니다. 조던같이 플레이하지도 않고요. 하지만 조던이 농구를 이룬 업적은 저도 꼭 이룩하고 싶습니다.

DDUEH_ 마지막으로 두 분이 서로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으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KB24_ 르브론은 NBA의 미래입니다. 2000년대에 데뷔한 선수 중 가장 앞서가고 있죠. 아직 전성기를 맞지 않았는데도 이미 리그 최고의 선수 중 하나가 됐습니다. 팬 여러분들은 어쩌면 지금부터 10년을 지배할 선수가 뛰는 모습을 보고 계신 걸지도 모르죠. 농구인으로써 르브론과 같은 선수가 발전해가는 과정을 본다는 것은 매우 흥분되는 일입니다. 그가 마침내 전성기를 맞이하게 될 순간을 기대합니다.

LBJ23_ 코비는 저의 우상이었습니다. 고등학생 시절 코비가 제게 아디다스 농구화를 선물했을 때도 그랬고, NBA 선수가 되어 서로 경쟁하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죠. 그는 오늘날 리그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입니다. 저는 이 말을 수백 번도 더 반복해서 말해왔죠. 마침내 코비가 그의 가치를 인정받아 MVP를 수상했던 지난 시즌 저도 함께 기뻐했습니다. 코비는 저희 같은 젊은 선수들에게 프로 선수의 모범을 보이고 있죠. 앞으로도 그와 오랜 시간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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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A의 메카 뉴욕 시티에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30개 구단중 연봉 지출 1위를 달리고있는 뉴욕 닉스에서 가장 많은 연봉을 받고있는 선수가 단 한 경기도 뛰지 못한 채 벤치를 지키고 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스테반 마버리.
한때 NBA를 대표하는 공격형 포인트가드였던 마버리였지만 올시즌 단 한번도 코트를 밟지 못했다.

그의 몸상태에 문제가 있어서도 아니다.
그의 결장 사유는 다름아닌 구단과의 불화 때문이다.
작년 부상으로 시즌 대부분을 벤치에서 지킨 마버리는 올 시즌을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피닉스에서 영입된 댄토니 감독의 영입을 제일 먼저 반긴 선수이기도 했다.
하지만 댄토니 감독은 시즌 전, 마버리는 자신의 계획에 없다고 공언했으며 프리시즌 경기에서도 아주 짧은 출전 시간만을 마버리에게 할애했다. 마버리는 굉장한 허탈감을 느꼈을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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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것은 비극의 시작에 불과했다.
닉스는 마버리에게 트레이드나 웨이브 대신 바이아웃을 제시했다. 바이아웃(Buy-out) 이란 선수 연봉의 일부분만을 지급하고 계약을 해지하는 것이다. 뉴욕은 페이롤을 줄이면서 마버리를 FA로 풀어주려는 복안이었고, 이것이 닉스 구단에게는 최선의 방법이기도 했다 (닉스가 마버리를 웨이브 하려면 마베리에게 총 연봉을 고스란히 지불해야 한다. 또한 트레이드 역시 선수들간의 연봉이 어느정도 맞아 떨어져야 가능함으로, 웨이브나 트레이드 둘다 닉스의 페이롤을 줄이지 못한다)

마버리의 올시즌 연봉은 2290만불에 달한다. 닉스는 처음에는 마버리에게 적은 바이아웃 액수를 제시했다. 하지만 마버리는 자신을 뛰게하던지, 아니면 웨이브를 하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결국 닉스가 마지막으로 제시한 바이아웃 액수는 그의 연봉보다 100만불 낮은 2190만불이었다. 즉, 쉽게 말하자면 닉스는 마버리에게 총 연봉보다 100만불이 낮은 2190만불을 줄테니 계약을 해지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닉스는 쓰지도 않을 마버리에게 고액의 연봉을 전부 지불하고 내쫒느니, 몇푼이라도 아끼자는 심정에서 파격적인 바이아웃 조건을 내걸었다. 하지만 마버리는 이것마저 거절하였다.

그럼 마버리의 진심은 어디에 있는것인가? 코트에 다시 돌아올 생각이 없는것인가?
아니면 받을연봉 다 받겠다는 심산으로 땡깡을 부리는것인가?
하지만 우리는 마버리의 자존심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마버리는 시즌 전 여름동안 재활훈련을 열심히 해왔던걸로 알려져 있다.
부상에서 돌아와 팬들 앞에서 닉스를 이끄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특히 댄토니의 런앤건 시스템은 공격형 가드인 마버리에게 최적의 시스템일 수도 있을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희망사항들은 댄토니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결국 마버리는 자신보다 실력면에서나 연봉면에서나 떨어지는 선수들이 주전으로 도약하는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마버리의 눈에는 자신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은 채 나아가는 닉스의 행보가 좋게 비춰질리 없다. 또한 바이아웃은 구단과 선수간의 합의가 있어야 한다. 결국 선수측에서 하기 싫으면 그만이라는 뜻이다. 결국 마버리는 바이아웃을 포기하고 닉스의 선수로 남기로 결정했다. 결국 웨이브 아니면 트레이드라는 조건으로 닉스와 대립한 것이다. 어찌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결정이기도 하다. 자신의 연봉인 2290만불 중 100만불만 포기하고 FA가 될수 있는 기회를 차버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닉스의 행보 역시 기이한 것은 마찬가지. 닉스는 결국 팀내 최고연봉의 선수에게 연봉을 그대로 지급하면서 그를 벤치에만 앉혀두기로 결정했다. 마버리의 결정에 “맞불”을 놓은것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마버리를 팀 훈련에서 제외시켰고 팀 락커룸과 클럽하우스의 출입 역시 금지시켰다. 마버리는 오직 팀이 원정경기를 나갔을 때만 클럽하우스 출입이 허용된다. 그러나 닉스는 지금까지도 마버리에게 연봉을 꼬박꼬박 지급하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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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버리와 닉스의 무언의 전쟁 도중 댄토니 감독과 마버리 사이의 불화설이 있었다.
닉스와 마버리 간의 협상 도중 마버리가 댄토니의 출전 명령을 거부했다는 것.
진실 여부를 떠나서 이 사건 때문에 마버리와 닉스간의 골은 더더욱 깊어졌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하다. 시즌 도중 닉스와 골든 스테이트 워리어스간의 대형 트레이드가 이루어졌고 닉스의 주전 슈팅가드 자말 크로포드 역시 이 딜에 포함되었다. 디트로이트와의 경기를 앞두고 닉스의 가드진은 부상병동이었고 닉스로 트레이드 된 가드 커티노 모블리 역시 출전이 불투명한 상태였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댄토니는 슈팅가드로써 경기에 투입시킬 선수가 필요했고 결국은 마버리를 경기에 투입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마버리는 디트로이트와의 경기에 출전하지 않았고 닉스는 그 경기에서 패배 했다.

이 상황에 대해 댄토니는 가드진의 상황이 절박하여 마버리에게 경기 투입을 지시했지만 마버리가 단번에 거절했다고 했다. 하지만 마버리의 말은 달랐다. 마버리는 댄토니가 자신에게 “오늘 30분에서 35분 가량의 출전시간이 있으니 경기에 뛰고싶다면 투입시켜 주겠다” 라는 제안을 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마버리는 댄토니가 “오늘 출전한다고 해서 자신이 댄토니의 계획에 다시 합류하게 된것은 절대 아니다” 라고 못박았다고 했다. 결국 계획에도 없는 팀을 위해 뛴다는 자체가 불편해서 그 제안을 거절한 것이라고 했다. 마버리는 결국 예 와 아니오 사이에서 아니오를 선택했을 뿐 이라고 반박했다.

현재 많은 팬들은 마버리를 비난하고 있다.
마버리의 프로의식에 의문점을 던지고 있으며 일부는 마버리를 돈밖에 모르는 고집쟁이라고 몰아붙이고 있다. 하지만 최소한 필자의 눈에는 마버리가 돈때문에 이러한 싸움을 시작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카트리나 피해 복구를 위해 가장 많은 액수의 돈을 기부한 선수중의 하나인 마버리가 과연 돈밖에 모르는 선수일까? 그 외에도 현재 마버리는 수많은 자선 활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자신의 시그내쳐 신발을 15달러에 팔 만큼 돈에 연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왔다.

필자는 마버리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마버리는 엄연히 닉스가 장기 계약을 안겨주고 고용한 선수이며 해마다 계약에 따른 연봉을 지급하기로 계약서에 서명했다. 당연히 마버리는 계약에 명시된 대로 총액을 지급받을 권리가 있으며 이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마버리가 비난받을 이유는 단 하나도 없는 것이다. 닉스의 바이아웃 제안을 왜 마버리가 받아들여야 하는가? 물론 마버리가 닉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닉스에게도, 또한 마버리에게도 좋은 결과를 얻을수 있을것이다. 닉스는 연봉지출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으며 마버리 역시 새로운 팀을 찾아 코트로 복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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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버리가 무조건 바이아웃 협상에 응해야 하는가? 절대 아니다.
이것은 순수한 마버리의 권리이며, 마버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를 행사했을 뿐이다.
마버리의 결단은 비난받을 만한 일이 절대 아니다. 닉스는 마버리와 계약하였으며 이제는 마버리와의 계약을 해지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닉스의 입장이며 마버리는 닉스와의 계약을 중도해지 하고 싶지 않은것이다. 이 결정을 가지고 누가 뭐라고 비난할 것인가? 닉스에게 피해를 입힌다고? 닉스가 마버리에게 입힌 피해 역시 크다.

이 문제의 발단은 마버리도 아니면 댄토니 감독도 아니다. 필자는 이 문제의 시발점을 닉스의 도니 월시 회장이라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댄토니 감독을 영입한것도 월시의 결정이기 때문이다. 가정이지만, 만약 월시가 댄토니가 아닌 다른 감독을 영입했다면 마버리 역시 중용될 수 있을것 아닌가? 댄토니는 마버리를 자신의 계획에서 배제시켰고 닉스는 쓰지않을 마버리에게 높은 연봉을 지급하면서 팀에 잔류시킬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마버리와 바이아웃 협상을 가진게 아닌가.

하지만 마버리 사건때문에 댄토니의 농구 철학이 잘못됬다는 것은 아니다. 댄토니는 팀을 이끄는 감독이며 팀에 대한 전권은 댄토니가 쥐고있다. 댄토니의 철학에는 마버리가 안맞았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문제의 발단은 마버리도, 댄토니도 아닌 바로 닉스의 월시라고 하는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또 한가지 덧붙이자면, 댄토니는 피닉스 감독 시절에도 마버리와 불편한 관계였고 심한 마찰을 일으켰었다. 월시 역시 NBA에 몸담는 사람으로써 이 사실을 알고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시는 댄토니를 닉스 감독으로 영입한 사람이다.

뉴욕 시티의 파국의 최대 피해자는 바로 마버리라고 생각한다. 마버리가 여러 여론들, 그리고 팬들에 의해 마녀사냥을 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버리의 행동 역시 비즈니스 차원에서는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NBA는 비즈니스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구단은 구단대로 이익을 챙기고 선수는 선수대로 또 이익을 챙기는 곳이 바로 NBA라는 곳이다. 마버리의 행동 역시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결정이라고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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