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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맨" 조지 거빈은 제리 웨스트가 '자신이 돈내고 볼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선수'라고 까지 극찬을 했으며, 그 외에도 줄리어스 어빙, 마이클 조던, 게리 페이튼 등 수많은 레전드 농구인들이 극찬에 극찬을 더했던, 정말로 농구를 쉽고 우아하게 그리고 창조적으로 해내던 선수였다. 물론 이는 팬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피나는 기본기 훈련과 각고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6-8 (203cm)의 거빈은 슈팅 가드로서 최초로 3연속 득점왕에 올랐고, 역대 최고의 가드 중 한명으로도 꼽히지만 실제로는 전형적인 가드가 아니었다. 팀에서 2번으로 출장은 했지만, 당시의 스퍼스는 1가드-3포워드-1센터 시스템을 자주 쓰던 팀이었고, 거빈은 가드의 역할보다는 주로 스코링 스몰 포워드의 역할을 하던 선수였다. 당시의 스몰 포워드들은 골밑, 미드레인지, 장거리슛까지 마스터해야만 했던 전방위 공격수들이었고, 이는 거빈도 마찬가지였다. 주로 인사이드에서 오프볼-무브 중에 패스를 받아 골밑 득점을 하거나, 포스트업에서 양 손을 모두 사용하는 런닝 훅슛으로 득점을 했다. 외곽에서 공을 잡으면 드라이브인을 해서 장신 인사이더들이 손도 못 댈 핑거롤 레이업으로 득점을 하기도 했으며, 컷인 능력도 뛰어났고, 아무리 수비가 2중 3중으로 타이트하게 붙어도 결국에는 슈팅루트와 각도를 찾아내어 골을 성공시키고야 마는 타고난 골잡이였다. 3점슛도 매우 뛰어났다. 특히, 수비가 자신의 시야와 슈팅 각도를 완전히 커버하거나 가리면, 3점슛을 뱅크샷으로 성공시키던 슈팅의 귀재가 바로 조지 거빈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포워드와 가드를 "그네 타듯이 넘나드는" 포지션 파괴 스타일때문에 사람들은 거빈을 "스윙맨"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서 조지 거빈은 "원조" 스윙맨인 셈이다. 거빈 이전에 활약하기 시작했던 보스턴 셀틱스의 레전드 존 하블리첵이 플레이 스타일상 최초의 스윙맨 소리를 들어야 했으나, 아무튼 캐스터나 해설자들이 처음으로 스윙맨이란 단어를 사용했던 대상은 조지 거빈이었다.

자, 이쯤에서 그토록 유명했던 거빈의 핑거롤의 메카니즘을 한 번 짚고 넘어가 보자. 많은 농구 팬들께서 아마 이렇게 반문하실지 모르겠다. 핑거롤이야 이제는 한국선수들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극히 보편화된 레이업 기술이 아니겠냐고. 조던, 드렉슬러, 피픈, 에디 존스, 티맥, 코비, 모두들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기술이 아니겠냐고. 그런데...... 그게 그렇지가 않다. 아무리 덩크가 보편화된 공격기술이 되었다 하더라도 줄리어스 어빙과 마이클 조던의 덩크에는 뭔가 차원이 다른 깊이와 멋이 존재하듯이, 조지 거빈의 핑거롤은 매우 특별했고, 공이 손가락 끝을 떠나는 지점이나 궤적, 각도 등이 현재의 농구선수들은 흉내내기도 힘든 슛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핑거롤은 거빈 이전에 이미 존재했다. 가장 먼저 핑거롤을 경기에서 무기로 사용한 인물은 '윌트 체임벌린'이다. 체임벌린은 페인트존 근처에서 공을 건네받으면, 주로 턴어라운드 점퍼나 "터닝 핑거롤"로 득점을 올리곤 했다. 플레이 그라운드의 레전드 '커니 호킨스'도 핑거롤을 주무기로 사용한 선수다. 이 커니 호킨스의 긴 팔과 큰 손에서 터져나오는 다양한 각도의 핑거롤이 버지니아 스콰이어스에서 같이 뛰던 조지 거빈과 줄리어스 어빙에게 큰 영감을 가져다 주었다. 그래서 이 둘은 팀 연습이 끝난 후에도 코트에 남아 일대일 대결을 즐기며 자기들 나름대로의 핑거롤 기술을 계속 발전시켜 나갔던 것이다. 핑거롤 레이업이 게임 중에 자유롭게 구사가 되려면, 일단 큰 손은 필수다. 그리고 길고 부드러운 손가락, 유연한 손목 등도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체임벌린, 호킨스, 어빙, 거빈이 모두 이 조건에 잘 부합되는 신체의 소유자들이었다. 특히, 거빈은 손목을 뒤로 꺾어도 손가락 끝이 팔목에 닿는 놀라운 유연성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거빈의 핑거롤이 유명해진 이유는, 대체로 그 슛의 사정거리가 무척이나 길었다는 것과, 본인이 페인트존 안에만 있다면 어느 각도에서건 스핀먹은 레이업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는 데에 있다. 7~80년대 스퍼스 경기 영상을 보면, 거빈이 자유투 라인에서 핑거롤을 던지고 성공시키는 모습 등을 아주 흔히 볼 수 있다. 수비가 불가능한 거리와 각도다. 베이스 라인에서 돌파해 들어갈 때도 마찬가지. 보통 선수들이 한 두 걸음 더 치고 들어가야 할 지점에서 공은 이미 큰 궤적을 그리며 림을 향해 치솟곤 했다. 거빈의 핑거롤은 비단 레이업에만 국한된 기술이 아니었다. 자신만이 갖고 있는 손목과 손가락의 터치를 이용해 응용된 훅슛이나 플로터 등도 자유자재로 시도했으며, 이 모든 다양한 슛을 양 손 모두로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이 그의 크나큰 장점이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백보드를 이용해야 할 지, 아니면 그냥 림을 향해 던져야 할 지에 대한 슛셀렉션과 판단력, 임기응변력이 누구보다도 뛰어났던 선수가 거빈이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핑거롤은 이제 보편화된 기술이다. 그러나 필자는 아직까지도 거빈과 같이 먼 거리에서 높은 궤적을 그리며 날아가는 핑거롤은 목격한 적이 없다. 그리고 거빈처럼 경기당 6~7개의 우아하고도 난이도가 높은 핑거롤을 꾸준히 성공시키는 선수도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

조지 거빈... 필자는 그를 생각할 때마다 '핑거롤을 저작물로 만든 사나이'라는 특별한 호칭을 붙여주고 싶다. 별명인 '아이스맨'답게, 자신의 핑거롤 기술을 후세 선수들이 도용(?)치 못하도록 영원히 냉각시켜버린 것만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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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빈은 이와 같은 다양한 기술로 네 번의 득점왕에 올랐고, 세 번 연속으로 득점 타이틀을 따내는 기염 또한 토했다. 팀의 에이스 스윙맨으로서 수비를 2~3명씩 달고 다니면서도 52%에 육박하는 야투 성공률을 기록한 것이 놀랍기만 하다. 그 와중에 78년과 79년 두 번 연속으로 MVP 득표 2위를 한 것은 덤이라 할 수 있겠다. 거빈의 커리어 중 최고 하이라이트는 뭐니뭐니해도 1978년 시즌 마지막 날 벌어진 덴버의 데이빗 톰슨과의 득점왕 대결이었다.

시즌 내내 득점왕 자리를 놓고 각축전을 벌였던 두 선수는 시즌 종료 마지막 날까지도 싸워야만 했다. 먼저 벌어진 경기에서 73점을 쏟아부은 데이빗 톰슨이 마지막 경기를 남겨둔 거빈에게 총득점 58점 차로 앞서고 있었다. 59점을 득점하면 득점왕이 거빈의 차지가 되는 상황이었다. 모든 농구팬들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뉴올리언즈 재즈 원정경기를 시작한 거빈은 첫 여섯 개의 야투를 모두 실패한다. 너무 긴장한 탓이었다. 그러나 곧 슈팅리듬을 찾았고 1쿼터에만 20점을 득점하며 좋은 출발을 했다. 그러더니 2쿼터에서 그야말로 폭발을 하고 만다. 코트의 모든 각도에서 온갖 슛을 다 성공시킨 거빈은 이 한 쿼터에서만 33점을 득점한다. 이는 아직껏 깨지지 않는 한 쿼터 최다 득점 기록이다. 하프타임 때 거빈의 득점은 이미 53점. 득점왕 경쟁의 승자는 이미 정해졌다. 3쿼터 중반이 지나기도 전에 거빈은 63점을 득점했고, 거칠어지는 재즈 선수들의 수비와 반칙때문에 플레이오프를 앞두고 부상의 가능성을 염려한 더그 모 감독이 거빈을 벤치로 불러들인다. 30여분만 뛰고 기록한 63득점이었다. 4쿼터까지 놔두었더라면 80점은 가뿐히 넘어섰을 슈팅리듬이기도 했다. 득점왕은 거빈의 차지였다 - 평균 27.22점 (톰슨 - 평균 27.15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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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거빈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 거리가 하나 있다. 바로 그의 아이스맨 나이키 포스터에 얽힌 일화다. 80년대 초반까지 농구화 시장을 석권하다시피했던 컨버스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낸 나이키는 광고 포스터에서부터 차별화를 선언하고 나섰다. 1982년의 일인데, 이미 줄리어스 어빙, 래리 버드, 매직 존슨을 모두 스폰서하고 있던 컨버스 운동화였어서, 애초부터 쉬운 싸움이 아님을 간파하고 있던 나이키는 리그 MVP 모제스 말론, 그리고 득점왕이자 올스타 팬득표 1위의 조지 거빈을 앞세운 최고급 광고 포스터를 제작하기에 이른다. 일류 사진사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창안해낸 회심의 나이키 포스터 처녀작이 바로 거빈의 아이스맨 포스터다.

얼음 보좌에 앉아 은색 농구공 위에 양 손을 얹고 썩소를 날리고 있는 거빈이 이 포스터의 컨셉이다. 필자의 친구 누님이 1982년 당시 미국 방문길에 이 포스터를 사왔는데, 그 친구가 액자로 제작해 벽에 걸어 놓는 바람에 이 포스터를 갖고 있던 그 친구를 무척이나 부러워했던 기억이 있다.

이 포스터의 미국 내 인기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나이키사는 이 멋진 포스터를 다량으로 제작해 아주 저렴한 가격에 팔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나이키 농구화 판매량도 수직상승하기 시작했다. 한 때 이 포스터의 판매량이 나이키 농구화 판매량을 앞지르기도 하는 웃지 못할 헤프닝이 일어나기도 했다. 주객이 전도된 셈이었다. 현재도 이 1982년도판 오리지날 나이키 포스터가 EBay같은 곳에 가끔 경매로 올라오는데, 여기저기 찢기고 구겨진 포스터인데도 값이 미달러로 $200까지 치솟곤 한다. 90년대와 최근 들어 이 포스터의 Replica들이 제작되기도 했지만, 이러한 복제품들은 이미지나 색상이 선명하지가 않고, 사실 별 가치도 없다.

아무튼 조지 거빈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70년대와 80년대 초반 농구화의 지존이었던 컨버스사에 정면도전을 한 나이키사의 선봉장이 되다시피 했고, 당시 나이키사의 이 참신한 아이디어는 지금도 높게 평가를 받고 있다. 거빈이 시작한 이 나이키 농구화 포스터의 전통은 모제스 말론, 버나드 킹과 같은 인물들에 이어 마이클 조던이 물려받았고, 나이키사의 농구화 판매량과 인기도는 80년대 내내 철옹성을 구축할 수 있었다.

나이키 포스터로 선후배의 연을 맺은 거빈과 조던은 거빈의 은퇴년도인 1986년에 시카고 불스에서도 한솥밥을 먹는 인연으로 이어졌다. 노쇠화를 보이며 은퇴를 준비하던 거빈이 후배인 앨빈 로벗슨에게 자리를 내주기 위해 스스로 트레이드를 요청했고, 스퍼스는 거빈을 조던의 불스로 보내줬다. 자신의 루키시즌을 줄리어스 어빙과 함께 시작했던 거빈이 이제 자신의 은퇴시즌을 어빙의 후계자라 할 수 있었던 마이클 조던과 함께 하게 된 것이다. 조던이 2년차 때 입은 큰 발목부상때문에 조던과 거빈이 실제로 함께 뛴 경기는 20게임이 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두 선수는 경기가 없는 날도 함께 하며 끊임없이 많은 대화를 나눴고, 매일같이 일대일 농구를 하며 돈독한 우정을 키워 나갔다. 체임벌린 이후 최초로 3연속 득점왕의 자리에 올랐던 거빈의 풍부한 경험에서 나온 노하우가 조던의 경기력에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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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빈은 조던이 없는 동안 평균 20점에 가까운 득점을 하며 불스를 이끌기도 했다. 댈러스 원정경기에서 있었던 일화다. 조던이 벤치에 앉아 지켜보는 가운데, 거빈이 전반에만 35득점을 했다. 그러나 후반전에 체력이 달리면서 총 40득점에 그치고 말았다. 조던이 거빈에게 "형님, 많이 늙으셨구려. 후반전 통틀어 단 5득점이라니..." 하면서 장난기있게 놀리자, 거빈이 "이 친구야, 전반전은 내가 젊었을 때는 어떻게 플레이했었는지를 자네에게 보여주려 한 것이고, 후반전은 왜 내가 이제 물러나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야" 하면서 "이제 자네가 리그의 득점왕이 되어주게"라는 말을 해줬다. 그리고 조던은 다음 시즌부터 내리 7시즌 연속 득점왕의 영예를 누렸다.

거빈은 1986년 불스와의 1년 인연을 마치고 NBA에서 은퇴했다. 26,595점이라는 통산득점과 함께. 그 후, 거빈은 이탈리아 리그의 Banco Roma팀에서 한 시즌을 더 뛰었다. 이미 35세가 넘었지만, 평균 26.1점을 득점하며 맹활약했고, 나중에는 39세의 나이로 CBA의 Quad City Thunder 팀에서 한 시즌을 뛰며 평균 20.3점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의 지칠줄 모르는 농구를 향한 열정과 득점력을 대변해주는 간접적인 증거다.

조지 거빈에게 항상 따라다니는 두 가지 통설이 있는데, 하나는, '거빈은 팀을 우승권으로 이끌 능력이 안되는 뛰어난 스코러였을 뿐이었다'라는 평가고, 또 하나는, '그의 수비력이 제로였다'라는 평가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거빈은 사실 네 번이나 팀을 컨퍼런스 파이널까지 올려 놓았다. 다만, 그때마다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상대해야 했던 팀이 당대의 최고 팀들이었던 헤이스, 언셀드의 워싱턴 불렛츠, 매직 존슨, 압둘자바의 레이커스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거빈은 일대일 수비능력이 뛰어나지는 않았으나, 대신 패싱라인을 차단하는 능력이나 헬핑은 매우 뛰어났던 선수였다. 역대 가드들 중 블락샷 1위에 랭크되어 있는 선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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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으로부터의 은퇴 이후, 스퍼스의 어시스턴트 코치 역할을 잠시 했었지만, 그가 은퇴 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몸담고 일해오고 있는 분야는 사회복지 활동이다. 본인 스스로가 너무나도 불우한 유년기, 청소년기를 보냈던 터라, 지금도 샌안토니오 지역의 가난하고 환경이 좋지 못한 아이들을 돕고 교육하는 일에 대부분의 시간과 자산을 쏟아 부으며 지내고 있다. 교육을 받을 재정적 여건이 안되는 아이들에게는 기술 양성을 위한 전문학교이자 비영리단체인 the George Gervin Youth Center에 무료로 입학시켜주는 특혜를 주고 있으며, 십대 미혼모들에게도 무료 주거시설을 마련해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정성껏 보살피고 있다.

본인이 선수로서 얻었던 모든 영예와 재물을 고스란히 사회에 환원하며 거기서 진정한 삶의 보람을 느끼고 사는 사람이 바로 조지 거빈이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든든한 구단 후배 데이빗 로빈슨 목사가 함께 한다. 이 둘을 중심으로 한 샌안토니오 구단의 지역사회 봉사의 규모는 실로 엄청나다. '얼음 사나이'의 따스한 손길로 인해 샌안토니오 시가 봄 눈 녹듯 녹아 내리고 있다.

'아이스맨' 조지 거빈.... 그는 진정으로 살아 숨쉬는 레전드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으나 '아이스맨', '핑거롤의 달인', '득점기계'와 같은 수식어를 달고 다니며 NBA에서 대성공을 하는 '인간승리'를 일궈냈고,  지금은 예전의 자신처럼 힘든 상황에 처한 이들을 위해 다시 한 번 뜨거운 열정을 불태우고 있지 않은가?

그에게 "당신은 욕심쟁이, 우후훗 ~"이라는 멘트를 날려주고 싶다.

글: Doctor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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