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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농구를 접하신 분들도 7~80년대를 풍미했던 ‘아이스맨’ 조지 거빈과 그의 ‘핑거롤’에 관한 이야기 쯤은 익히 들어 잘 알고 계실 것이다. 조지 거빈은 줄리어스 어빙과 함께 70년대에 중학생이던 필자를 NBA의 세계로 빠지게 만들어준 장본인이다. 그동안 여러 농구팬들로부터 거빈에 관한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었지만, 이 선수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의 칼럼으로는 부족할 것 같았고, 또 막상 시리즈로 쓰자니 일이 너무 커질 것 같아서, 차일피일 미뤘던 것이다. 허나,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다는 I Love NBA 카페나 NBA 매니아와 같은 사이트에 조차도 거빈에 관한 칼럼 하나가 없음을 며칠 전에 발견하고는, 부족하지만 2부 정도의 부담없이 읽을만한 짧은 칼럼이라도 써서 이 선수를 국내에 소개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12년 연속 올스타 선정, 3년 연속 올스타 최다 팬득표, 3년 연속 (총 4년) 득점왕, 커리어 평균 야투 성공률 52%, 2년 연속 MVP 득표 2위, 7번의 All-NBA (퍼스트 팀 5회) 선정, 명예의 전당 헌액, 위대한 50인 선정 등등, 거빈의 선수로서의 업적과 위대함은 짧게 열거하기가 쉽지 않다. 역대 최고 슈팅가드들을 논할 때 항상 5위 안에 이름을 올리는 거빈. 그를 제대로 평가하려면 그의 전성기적 경기영상을 많이 봐야만 한다. 거빈의 플레이를 직접 본 팬들은 알 것이다. 스탯이나 수상경력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그만의 멋이 있었음을. 코트에 서있는 그가 얼마나 매력이 있었으며 카리스마 또한 넘쳤는지는 동시대를 살아가며 함께 호흡을 하지 않고는 사실 느낄 수 없는 부분일 것이다. 포지션이나 신장, 경기를 풀어나가는 모습으로만 미루어 비교한다면, 현 로켓츠의 트레이시 맥그레이디가 가장 많이 닮았다고 볼 수 있겠지만... 사실 거빈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정말로 특이하고 개성이 넘치는 고유의 색깔이 넘쳐나는 선수였다.

조지 거빈의 어린 시절은 몹시 불우했다. 디트로이트의 빈민굴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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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한 번도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자란 적이 없다. 거빈의 아버지가 그의 출생과 동시에 가족을 버리고 가출해버렸던 것이다. 거빈의 어머니는 이 철부지 육남매를 홀로 먹여 살려야만 했다. 공중화장실 청소로부터 종이봉투를 만드는 공장일까지... 거의 하루의 3분의 2를 막노동으로 보내며, 그녀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만 했다. 거빈이 회고하길, 자신의 집은 정말로 가난했지만, 6남매 모두 끼니를 거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그녀는 훌륭하고 강한 어머니였다. 이러한 어머니의 노고를 보며 자란 거빈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성공해서 어머니를 행복하게 해드리겠다는 각오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살던 주거지가 위험한 갱들이 득실거리던 지역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었어서, 어릴 적부터 마약, 술, 창녀, 폭력, 살인 등에 완전히 노출되었던 거빈이었지만, 프로농구선수가 되고자 하는 어릴 적 꿈을 좇아 그는 주변의 유혹을 이길 수 있었으며 착실히 농구에만 열중하는 청소년기를 보낼 수가 있었다. 많은 위대한 농구선수들의 레파토리처럼 들리시겠지만, 거빈은 농구를 하기엔 신장이 터무니없이 작았다. 그리고 몸은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것 같은 젓가락이었다. 그가 중학교 농구팀 감독으로부터 퇴짜를 맞은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거빈은 여기서 포기하지 않았다. 어머니로부터 영향을 받은 하나님을 향한 기독교 신앙은 어린 거빈을 더더욱 강하게 만들어줬고, 결국,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세 가지 응답을 받았다. 첫째, 그의 키가 갑자기 쑤욱쑤욱 자라기 시작한 것이다. 173cm였던 신장이 몇 개월 만에 193cm가 되었다. 둘째, 농구팀 감독으로부터는 퇴짜를 맞았지만, 그를 불쌍히 여긴 Meriweather 코치로부터 꾸준히 농구수업을 받는 특권을 누릴 수가 있었다. 셋째, 수줍고 내성적이었으나 심성이 착했던 거빈은 중학교 경비원 아저씨와 쉽게 친해질 수 있었고, 경비원은 밤에도 체육관을 사용할 수 있게끔 그에게만 특별히 허락을 해주었다.

거빈은 하늘이 그에게 내려준 이 세 가지 기회를 소중하게 여겼다. Meriweather 코치로부터 농구의 기본기와 전략 등을 상세히 배운 그는, 저녁시간만 되면 학교 체육관으로 가서 쉴 새 없이 그만의 슈팅연습을 했다. 그의 전매특허 ‘핑거롤’은 바로 이 때 그가 스스로 만들어낸 기술이다. 1년 365일 단 하루도 개인연습을 거른 적이 없어서, 매주 일요일에도 체육관 문을 열어주러 학교에 와야만 했다는 마음씨 착한 당시 경비원 아저씨의 증언에 따르면, 거빈은 매일같이 육백 개에서 일천 개에 달하는 슈팅을 마치고서야 집에 돌아갔다고 한다. 그의 중고등학교 시절은 이와 같이 오로지 농구 뿐인 인생이었다. 거빈은 선수시절에 한 TV 인터뷰에서, “몇 년 동안 매일같이 컴컴한 체육관에서 혼자 공을 드리블하며 슛을 쏴대는 나를 알아 준 이는 이 세상에 오직 하나님 뿐이셨다” 라며 당시의 힘들고 외로웠던 나날들을 짧고 담담하게 표현했다.

Eastern Michigan 대학시절의 거빈은 더이상 말라깽이 코흘리개가 아니었다. 그는 이제 신장도 201cm이었으며, 2학년 때는 평균 29.5점에 15.3개의 리바운드를 잡아내는 명 포워드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선수로서의 황금기에 청천벽력과 같은 사건이 하나 일어났으니, 바로 Roanoke 대학과의 토너먼트 경기 중에 거빈의 어머니를 입에 담아 트래쉬토킹을 한 상대선수에게 그가 정권을 날렸던 것. 거빈은 어릴 때부터 80년대말 프로생활을 청산할 때까지 누구와 싸우거나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어머니가 욕의 대상이 되자 그것만큼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큰 불상사였다. 거빈의 대학감독은 책임을 지고 사임해야 했으며, 거빈 자신도 NCAA 선수자격을 박탈당하고야 말았다. 졸지에 NBA 선수로서의 꿈을 접어야 했던 거빈은 EBA라는 한 마이너리그에서 밥벌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이 전화위복이 될 줄이야... 우연히 마이너리그 경기장에 왔다가 거빈의 실력을 꿰뚫어 본 ABA 버지니아 스콰이어스의 스카웃 담당자 죠니 커 씨가 거빈을 스카웃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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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조지 거빈은, 이미 일 년 전부터 버지니아 스콰이어스에서 뛰며 ABA 리그의 역사를 새롭게 쓰고 있던 Doctor J 줄리어스 어빙과 한 솥밥을 먹게 되었다. 나중에 한 번 더 언급하겠지만, 조지 거빈은 남들에게는 없는 아주 특이한 경력이 하나 있다. 줄리어스 어빙과 마이클 조던, 이 두 레전드들 모두와 한 팀에서 뛰어봤던 유일한 선수였다는 것.

조지 거빈은 슈팅 가드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본래의 포지션은 스몰 포워드였던 선수다. 줄리어스 어빙과 한 팀에서, 그것도 동포지션에서 뛰면서 충분한 출장시간을 얻어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둘이서 함께 뛴 1972~73 시즌에 줄리어스 어빙은 평균 31.9점을 득점하며 득점왕이 되었고, 어빙을 백업하며 슈팅 가드 역할까지 소화해야 했던 루키 거빈은 평균 23분의 출장시간을 기록하며 14.1점을 득점했다. 디트로이트 뒷골목 출신 말라깽이의 비교적 성공적인 프로 데뷔였다.

거빈은 정말 운대가 따라주는 인물이었다. 어빙이라는 훌륭한 수퍼스타와 함께 하며 프로 첫 시즌을 부담없이 무난히 보낼 수가 있었던 그에게 또다른 행운이 찾아온 것이다. 바로 줄리어스 어빙이 뉴욕 넷츠로 가게 된 것. 버지니아 스콰이어스의 주전 스몰 포워드 자리는 이제 그의 몫이었다. 거빈은 평균 23.4점, 8.4리바운드, 1.4스틸, 1.6블락샷을 기록하며 순식간에 팀의 에이스가 되었고, ABA리그의 새로운 수퍼스타 스윙맨으로 떠올랐다. 물론, 그는 생애 첫 올스타 게임에도 출전할 수 있었다.

거빈이 본인 특유의 ‘핑거롤’과 함께 수퍼스타로 떠오를 무렵인 1973년, 그의 팀메이트인 “Fatty” 테일러가 그에게 별명을 지어주었다. 이름하여 “Iceberg Slim”. 우리말로 굳이 표현하자면 “비쩍 마른 얼음 빙산”이 되겠다. 코트 위에서도 평상시에도 절대로 표정의 변화가 없는 차갑고 냉정해보이는 그의 얼굴표정때문에 붙여진 별명이었다. 거빈은 그랬다. 자신의 버저비터로 팀이 승리를 챙겨도, 상대선수가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어도, 그의 얼굴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필자는 거빈의 경기를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을 넘게 봐 왔지만, 한 번도 그가 코트 위에서 웃거나 화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불우하고 외로운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거빈은 감정을 표현할 줄을 몰랐다.

그다지 느낌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던 이 별명을 그의 팬들이 “The Iceman”으로 바꿔주었고, 그 때부터 거빈은 “얼음 사나이”의 이미지를 좇아 커리어 내내 ‘쿨’한 모습을 꾸준히 유지했다. 거빈의 몸동작은 굉장히 부드럽고 편안해 보였다. 영어로 표현하자면 effortless라고나 할까? 전혀 무리하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상상도 못할 각도와 거리에서도 불가능해 보이는 슛들을 너무 쉽게 성공시키곤 했다. 마치 피겨 스케이터들이 얼음을 지치듯, 코트 위에서 부드럽게 미끄러져 들어가는 그의 풋워크와 스탭들은 “The Iceman”이라는 별명과 너무나도 잘 맞아 떨어졌다.

이런 거빈의 스타성을 알아본 ABA 리그의 신생 팀 샌안토니오 스퍼스는 연고지와 팀 명을 바꾼 후, 1973~74 시즌 중간에 그를 영입해 온다. 거빈의 나이 21세. 이제 바야흐로 샌안토니오의 전설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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