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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들의 재롱잔치로 여겨지는 루키 챌린지는, 올해로 15회를 맞이하며 NBA 올스타에서 빠질 수 없는 이벤트로 자리매김했다. 1994년 미네소타 루키 챌린지에 참가했던 16인의 신인들 중 현재 리그에 남아있는 선수는 린지 헌터뿐이니 나름의 역사를 가졌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루키 챌린지와 함께 병행되는 Youth Jam도 10년째를 맞이하여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원년인 1994년, 천재팀(Phenoms)과 돌풍팀(Sensation)으로 명명된 팀명은 이듬 해 화이트 팀과 그린 팀으로 변경되었고 1996년 샌안토니오 올스타를 맞이하며 메인 올스타전과 같은 동부와 서부로 이름이 교체됐다. 루키 챌린지를 동부와 서부로 선정함으로서 2라운드에 픽업된 B급 신인들도 만나볼 수 있는 장점이 있었지만 한편으로 경기의 질적 향상을 기대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었다. 때문에 NBA는 2000년 오클랜드에서 열린 올스타에서 신인 대 2년차(Shopomore)라는 카드를 제시했고 결과는 대박이었다. 덕분에 루키팀은 1라운드에 뽑힌 우수한 신인들로 구성됐고 2년차 팀 역시 리그의 미래를 짊어질 선수들로 로스터가 알차게 꾸려져 올스타전다운 구색을 갖출 수 있었다.  

쿼터제가 아닌 전후반제를 현재까지 고수하고 있는 루키 챌린지는 대학농구를 비롯하여 고교농구까지 아마무대에서 갓 프로에 입문한 신인들을 위한 리그의 배려가 그 배경이 되었다. 때문에 NBA의 공식룰과는 달리, 팀 파울 10개가 누적될 경우 페널티를 적용하여 자유투를 허용토록 한다. 전 후반 각각 종료 2분 전에 일어나는 파울도 마찬가지로 페널티가 부가된다. 또한 경기의 재미를 위해 개인 파울은 기록을 하지만 퇴장을 없애고 정규시간 안에 승부를 가르지 못할 경우에는 2분의 연장전에 돌입하여 승패를 결정하게 된다.

먼저 이번 2009 루키 챌린지에 초대 받은 16명의 선수들을 소개하겠다.

루키팀_ 마이클 비즐리(마이애미 히트), 루디 페르난데스, 그렉 오든(포틀랜드 블레이저스), O.J. 메이요, 마르크 가솔(멤피스 그리즐리스), 에릭 고든(LA 클리퍼스), 브룩 로페즈(뉴저지 네츠), 데릭 로즈(시카고 불스), 러셀 웨스트부룩(오클라호마시티 썬더)

소포모어팀_ 애런 브룩스(뉴저지 네츠), 윌슨 챈들러(뉴욕 닉스), 케빈 듀란트, 제프 그린(오클라호마시티 썬더), 알 호포드(애틀랜타 호크스), 루이스 스콜라(휴스턴 로케츠), 알 쏜튼(LA 클리퍼스), 로드니 스터키(디트로이트 피스톤스), 테디우스 영(필라델피아 76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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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램덩크, 앨리웁 등 정규시즌에서 자주 보기 힘든 화려한 플레이로 가득 차게 될 올스타전도 결국은 농구경기다. 특정선수의 인상적인 플레이는 두고두고 이야깃거리가 되며 MVP 수상도 빠질 수 없는 후담이지만 경기의 승패는 기록지에 남겨지며 지워질 수 없는 흔적이 된다. 소포모어팀은 선후배 대결의 원년인 2000 올스타전에서 당시 엘튼 브랜드와 스티브 프랜시스가 이끄는 루키팀에 패한 이래 8년 동안 승리를 놓치지 않고 있다. 이쯤 되면 고참에 대한 예우를 떠나 자존심이 상할 법도 하다.  

명단을 살펴보면 이번 루키챌린지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아 보인다. 소포모어팀은 오클라호마시티를 이끌고 있는 듀란트와 그린이 선발멤버 출장이 유력하며, 지난 시즌 올 NBA 루키팀에 선정된 호포드와 스콜라가 골밑을 책임진다. 이미 한 시즌을 거치며 실력검증을 마쳤고 소속팀에 굵직하게 한자리씩 꿰차고 있는 선수들이다. 루키팀은 실종된 정통센터의 맥을 이어갈 그렉 오든과 브룩 로페즈가 더블포스트로 대항할 공산이 크지만 아무래도 소포모어의 골밑에 비해 무게감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이번 2008 드래프트에 불어 닥친 ‘1학년 얼리엔트리’의 주연들은 백코트를 뜨겁게 달굴 전망이다. 돌격대의 선봉에 설 주인공은 바로 데릭 로즈와 O.J. 메이요다. 강력한 신인왕으로 거론되고 있는 이 백코트 콤비는 객관적인 전력에서 소포모어팀에 우위를 점하고 있다. 패기와 기동력을 십분 살린다면 뜻밖의 결과를 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최근 폭발적인 외각슛으로 주가를 올리고 있는 에릭 고든의 존재도 루키팀에 힘을 실어 줄 것으로 기대된다.

유례없는 NBA 현역선수의 코칭스태프 등록도 귀추를 주목시키고 있다. 마이애미의 간판스타 드웨인 웨이드와 올스타 득표 1위 드와이트 하워드는 루키 챌린지에서 클립보드를 들고 어시스턴트 코치로 나설 예정이다. 타임아웃 때마다 선수들을 불러 모아 작전 지시를 하는 웨이드와 하워드를 보는 재미도 제법 쏠쏠할 것이다.

이밖에 이번 루키 챌린지에서 사용될 선수들의 유니폼에도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NBA는 세계적인 게임사 ‘EA(Electronic Arts)’가 주최한 NBA 라이브 유니폼 제작 콘테스트에서 수천명의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당선된 팀 아메드의 작품을 채택했다. 아직 약관의 나이도 되지 않은 아메드(18세)는 뛰어난 디자인을 뽐내며 영광을 안았다.

이번 2009 루키 챌린지는 한국시간으로 오는 14일 오전 11시에 피닉스 선즈의 홈구장인 U.S 에어웨이센터에서 열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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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2월이 다가오면 NBA 팬들 못지않게 올스타전을 기다리는 이들이 있으니 바로 각 계층의 유명인사들이다.

물론 팬으로서 경기장을 찾는 이들도 있겠지만 영화배우을 비롯하여 뮤지션, 타 구기 종목 스타들은 바로 이 유명인사 초청경기를 통하여 직접 코트에서 플레이하기를 고대하고 있다. 물론 농구를 좋아하는 이들에 한해서 말이다.

맥도날드에서 후원하는 유명인사 초청경기는 지난 2006년 고안되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지난 2008년 뉴올리언즈 올스타에서는 각계각층에서 다양한 인물들이 참여하여 행사를 빛낸 바 있다. WNBA 올스타에 선정됐던 루쓰 라일리(샌안토니오 실버스타)와 스윈 캐쉬(디트로이트 쇽스)는 남성판인 코트에 뛰어들어 여성파워를 과시했고 R&B 스타 네요는 마이크 대신 농구공을 잡으며 색다른 모습을 선보였다. 영화 ‘러시아워’에서 성룡과 함께 호흡을 맞추었던 크리스 터커는 당일 경기에서 유일하게 터진 3점 슛의 주인공이 되며 박수갈채를 받았다.   

풋볼필드가 아닌 농구코트에 등장한 2명의 NFL 스타도 눈길을 끌었다. 2차례 슈퍼볼 챔피언을 경험한 디온 샌더스와 댈러스 카우보이에서 활약했던 터렐 오웬스가 바로 그들이다. 특히 오웬스는 덩크슛을 포함하여 18점을 획득 경기 MVP에 선정됐다.

초청경기는 직접 경기를 뛰는 선수들만큼이나마 코칭스태프의 네임밸류도 만만치 않다. 미국드라마 ‘위기의 주부들’에서 열연중인 에바 롱고리아는 지난 2006년 휴스턴 올스타전에서 클러치시티 팀의 감독을 맡은 바 있고, ESPN의 해설과 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빌 월튼, 그렉 앤쏘니, 팀 레글러, 스티븐 A.스미스 등 유명언론인들의 참여도 뒤따랐다. 굳이 현역농구계에 몸담지 않아도 본인의 의지와 열정만 있다면 누구든 참가가 가능하다는 점이 초청경기의 매력이며 관중과 시청자들의 입장에서는 또 다른 볼거리인 셈이다.  

이번 초청경기의 참가자 명단은 아직 발표되지 않았지만 역대 로스터에 이름을 올린 이들의 인지도를 고려해볼 때 충분히 기대할만 하다.

 이번 초청경기는 한국시간으로 오는 14일 오전 9시에 현지 ESPN에서 방영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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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어느 리그를 막론하고 올스타전만큼 선수와 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이벤트는 없을 것이다. 특히 세계 최고의 농구리그인 NBA 올스타전에 대한 관심은 말할 것도 없다.

NBA는 1년 전부터 올스타 행사 팀을 구축하여 초호화 콘서트를 방불케 하는 다양한 볼거리를 준비한다. 올스타전이 탄생한 1951년부터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 행사는 단순히 팬과 감독이 인정한 별들의 전쟁에 불과했다. 하지만 라이벌 리그였던 ABA의 슬램덩크 콘테스트에서 착안하여 All-Star Saturday(전야제)가 생겨났고 리그에 갓 입문한 신인들의 무대인 루키 챌린지 등 다양한 콘텐츠로 그 영역을 확장해왔다. 2000년대 들어서는 공격의 기술을 총망라한 스킬챌린지와 은퇴선수를 끌어들인 슈팅스타 대결이 추가되며 현재의 구도를 갖추게 됐다.

지난 시즌에는 자선활동의 일환으로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초토화된 뉴올리언즈 시를 위해 올스타팀을 투입시켰다. NBA Care 행사를 통하여 시가지 복구 작업뿐 아니라 선수들의 개인소장품 바자회를 열어 허리케인 난민기금에 힘을 보탰고, 요리사로 나선 올스타 선수들이 맛있는 음식을 시민들에게 제공하며 민심을 어루만져 주었다. 결국 이 NBA Care는 리그 이미지 재고를 위해 마련된 하나의 기구였지만 넓게 보면 팬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긍정적인 제도인 셈이다.

이번 2009 올스타전에서도 코트의 천사들이 다시 한 번 출동할 예정이다. 한국 시간으로 14일, 피닉스 컨벤션 센터에서 열리게 될 행사에서 NBA Care & Cook 행사팀은 농구팬들과 미식가들의 입맛을 사로잡을 것이다. 특히 푸드 스테이션 곳곳에 전문 요리사와 NBA 은퇴선수들을 배치하여 발이 닺는 곳마다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을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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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COLUMNS/MINWOOK 2009. 1. 28. 22:08

유로리그 16강 관전포인트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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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리그와 유로컵. 이 두개 컵 대회는 농구의 챔피언스리그, 유에파컵(UEFA) 경기다.

거두절미하고 관전포인트를 살펴보자. 먼저 유로리그를 소개하겠다.


파르티잔의 돌풍은 어디까지 이어질까?

이미 여러번 설명해서 말이 필요없는 세르비아의 명문클럽 파르티잔.

지금 이 팀이 유로리그  Top 16에  이름을 올린 지도 3년째가 되어간다.

유럽 빅 리그의 초호화 멤버군단들도 속절없이 탈락하는, 그리고 올해는 DKV 유벤투트의 리키 루비오도 넘지 못했던 유로리그 예선전의 벽을 이 팀은 다시 한 번 넘었다. 그것도 전년도 우승팀 메시나 매직이 작렬하는 CSKA 모스크바를 꺾으면서 말이다.

파르티잔은 밀렌코 테피치, 유로스 트립코비치, 알렉산드르 라시치로 이어지는 백코트 라인이 강점이다. 이들 중 밀렌코 테피치의 경우 1~3번을 오고 가면서 득점부터 리딩, 어시스트, 수비까지 전 방위에서 강점을 보이고 있다. 올해 드래프트에서 주가를 높이려면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CSKA 모스크바의 우승은 이루어질까?

지금부터 본선이니 모스크바의 초 절정 경기력이 나올 때도 됐다. 모스크바는 이번 시즌 종료 후 토론토 랩터스 차기 감독으로 거론되고 있는 유럽 최고의 명장 에토르 메시나 감독이 이끌고 있으며 조직력과 개인기가 잘 어우러진 팀이다.

여전히 유럽 최강팀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지만 문제는 그리스 국가대표팀의 큰 형님이자 팀의 기둥이나 마찬가지였던 파파루카스의 공백을 완벽하게 메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파파루카스의 진가는 전략적으로 벤치로 나와 말 그대로 탑에서 자신의 역할을 120%소화하내며 팀의 응집력을 높이는 것이었는데, 올해는 그 구심점이 보이지 않고 있다.

조란 플라니니치는 좋은 가드지만 파파루카스의 공백을 대신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르며, 트라젠 랭던 역시 예전에 비해서는 파괴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다. 홀든도 부상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흔들리고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이 팀의 가장 큰 강점은 메시나가 지휘봉을 잡고 있다는 것이다. 큰 경기에는 그 어떤 감독보다도 강한 메시나가 이번에도 마술을 부려 이 팀을 우승으로 이끌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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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피아코스, 파나시타이코스의 선전은 이루어질까?

파나시타이코스는 작년 파르티잔에게 패하여 탑16에서 탈락한 것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고, 그리스 농구팬들에게도 상당한 실망감을 안겨줬다.

그 좋은 스쿼드를 놔두고, 도대체 왜?라는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올해도 역시 쓰리 가드체제다. 사루나스 야시케비셔스-스파놀리스-디아맨티디스로 이어지는 가드진은 유럽 최고의 라인이지만, 문제는 이들의 조화가 생각보다 좋지 못하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언터쳐블이라 일컬어지는 그리스 자국 리그에서조차 브레드 뉼리가 이끄는 파넬리니오스에게 패할 정도로 이들의 조합은 사실상 실패작으로 의견이 모아지는 분위기다.

이로 인한 의구심들을 타파하려면 이번 유로리그에서의 성적이 정말 중요함은 말할 것도 없다. 또한 니콜라 페코비치가 작년 파르티잔 8강 돌풍 때보다 좀 소프트해졌다는 것도 문제다.

올림피아코스의 경우 뉴욕 닉스의 스테판 마버리의 영입설로 시끄러운데, 제발 구단주가 돈 가지고 선수 영입에 열 올리지 말고 현재 팀의 조직력부터 다지길 바란다.

파파루카스,칠드레스가 팀에 합류했는데도 자국 리그에서 파나시타이코스에게 왜 무릎꿇었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선수들간의 조화가 파파루카스를 제외하고 확실하게 팀을 잡아줄 선수가 없다. 파파루카스 의존도 역시 다소 높은 편이다.

린 그리어같은 볼호그부터 1대1에 열올리는 선수까지 모두 처리를 하고, 세르비아 출신의 87년생 유망주 포인트가드 밀로스 테오도시치에게 더 많은 자유를 줘야 한다. 요탐 헬퍼린은 개인적으로 완전히 올림피아코스를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진 선수라고는 장담하지 못하겠다. 분명 자질은 있지만, 볼 소유시간부터 줄여야 하는 법을 배워야할 것이다.

랩터스의 알박기 유망주 85년생 포워드 프린테지스가 이럴 때 힘을 내줘야 한다. 지금보다 몇 배는 더 힘을 내줘야한다. 프린테지스의 가장 안 좋은 점 중 하나는 바로 기복이고, 팀 내에서 역할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다. 올림피아코스의 ‘차재영‘같은 느낌이 강한데, 아직도 더 다듬어야 할 재목이다.


후안 카를로스 나바로, 이번에는 유로리그 정상정복 가능?

나바로는 2002-03시즌 유로리그 우승을 차지한 이후 아직 유로리그에서의 우승 경험은 없다. 4강까지는 팀을 올려봤지만 말이다.

F.C 바르셀로나의 전력은 여전히 우승권이지만, 문제는 후안 카를로스 나바로의 부담을 더 덜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에르산 일야소바의 다재다능함이나 빅토르 사다의 수비력이 바로 여기서 빛을 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프란 바스케스의 경우에는 아직 유니카야 시절의 모습을 4~5년째 되찾지 못하고 있는데, 바르셀로나가 자꾸 바스케스를 제한시키기보다는 좀 더 그의 공격능력을 살려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듯 싶다.

일단 이 4가지로 축약해봤고, 유로컵 관전 포인트는 빠른 시일 내에 찾아뵙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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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애미 히트의 베테랑 센터 알론조 모닝(38, 마이애미 히트)이 23일(이하 한국시간) 공식적인 은퇴절차를 밟으며 현역에서 물러났다. 90년대 NBA를 주름잡았던 ‘정통센터 1세대’의 한축을 담당했던 모닝의 은퇴로 이제는 샤킬 오닐(37, 피닉스 선즈) 정도만이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됐다.

센터로는 다소 작은 208cm의 키로 10년 넘게 골밑을 누빈 모닝. 모닝은 상대 공격수에게는 높디높은 산이었으며 동료들에게는 믿음직한 맏형이었다. 큼직한 눈망울을 지닌 모닝은 나름의 수려했던 외모와는 달리 그렇게 파이팅 넘치는 투사기질로 오늘날까지 많은 후배 선수들에게 귀감을 사왔다. 종종 난투극 현장의 주범으로 언론에 입에 오르내렸지만 모닝의 남다른 승부근성을 대변하는 사건들이다.
신장이식 수술로 저하된 신체능력은 불굴의 투지와 의지로 이겨냈다. 부상을 이겨내고 코트에 선 마지막 순간까지 투혼을 불사르던 그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가 왜 ‘전사‘로 불렸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부상으로 인해 재능을 피우지 못하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많은 스타플레이어들과는 겪을 달리한 인간승리였다.

올스타 선발, 세계 선수권대회 금메달, 올해의 수비왕 등 남부럽지 않은 경력을 쌓은 모닝은 뉴저지 네츠를 거쳐 친정팀으로 복귀한 지난 2005-06시즌, 180도 다른 모습으로 돌아왔다. 팀의 기둥은 이미 타인의 몫이었지만 자존심은 내던진 지 오래였다. 입단 동기이자 라이벌이었던 오닐의 백업을 자처한 모닝은 그 해 평생 바라왔던 타이틀을 차지하며 이력의 마지막을 채웠다.

필자에게 있어 모닝의 노년투혼은 감동과 슬픔이 교차하는 시간들이었다. 이른바 4대 센터로 90년대 리그의 골밑을 평정했던 라이벌들에 비해 모닝은 상대적으로 저평가 받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던 모닝이 한껏 날개를 펼 즈음 부상의 악령이 찾아왔고 더 이상의 도약은 없었다. 그에게서 블락과 골밑 수비 능력을 앗아간다면 더 이상 남아있을 것이 없다는 사실이 그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 건강만 잃지 않았다면 더 크게 뻗어 나갈 만한 재목임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때문에 2005-06시즌 우승 트로피를 품에 안은 모닝의 모습은 앤퍼니 하더웨이나 그랜트 힐에게서 맛보았던 아쉬움을 해소시켜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전성기를 보내야 할 시기에 부상과의 싸움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는 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보냈기 때문이다. 1년이 걸리든 10년이 걸리든 말이다. 예전처럼 20득점이나 두 자리 수의 리바운드를 걷어내지는 못했지만 우승에 기여한 모닝의 공로는 결코 작지 않았고, 그 사실에 많은 팬들이 기뻐했고 감사해하였다.

한국 나이로 불혹을 맞이한 알론‘Zo' 모닝의 40년 인생을 다시 한 번 조명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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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의 불운한 탄생, 그리고 농구

1970년 2월 8월, 버지니아 주(州)에 소재한 체서피크의 한 병원에서 우렁찬 신생아의 울음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이 아기를 맞이한 것은 따듯한 부모의 품이 아닌 차가운 양육원 건물이었다. 그의 부모는 그가 태어나던 시기에 10대 청소년에 불과했으니 모닝의 양육원행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어렸을 때는 소극적이면서 반항아였다. 툭하면 싸움을 벌여 벌을 받곤 했다”며 유년시절을 회고하였다. 10살이 되던 해에 모닝은 변화가 필요한 시점임을 느꼈다. 부모가 있고 따뜻한 집이 있는 제대로 된 안식처 말이다. 하지만 어렵사리 찾은 모닝의 부모가 모닝이 12살이 되던 해에 이혼을 결정하면서 소년의 꿈은 다시 한 번 산산조각 났다.

“정말 화가 났었다. 집과 가정을 갖고 싶다는 생각은 사라지고, 양육원에서 다신 나오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모닝의 말이다. 이후 모닝은 부모의 친구였던 패니 쓰리트라는 이웃집으로 보내졌다. 이후 부모의 이혼을 받아들이며 힘겨운 시간을 보낸 어린 모닝은, 학교 선생님과 주위 친구들의 권유로 농구공을 잡게 된다. 또래 아이들에 비해 월등히 큰 키를 자랑했던 모닝이었지만 농구가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정말 서투르고 실력도 형편없었다”며 농구와의 첫 만남을 회상한 모닝은 “사람들은 나를 비웃었지만 그것이 나를 더 연습에 몰두하게 만들었다”며 유년시절의 추억을 이어갔다.
어둠으로 점철됐던 모닝의 과거는 남다른 승부근성의 토대가 되었고 갖가지 자선활동과 무료 농구캠프에 열을 올리는 동기가 되었다. 특히 고아들에 대한 모닝의 관심은 남달랐다. 아마도 부모님 대신 그의 울타리가 돼주었던 양육원 생활의 추억들이 지금의 모닝을 만들었을 것이다. 모닝은 해마다 오프시즌이 되면 마이애미 등지에서 팀 하더웨이 같은 과거 동료들을 초청하여 자선 올스타전을 열어왔다.

지역 고등학교인 인디안 리버 고교에 입학한 모닝은 농구선수의 재능을 마음껏 펼쳤다. 입학하던 해에 모교의 51연승을 주도한 모닝은 2학년이 되자 경기당 25점 15리바운드 12블락을 기록하며 마침내 진가를 발휘해 보였다. 센터임에도 준수한 중거리 슛 능력과 다양한 포스트 업 기술을 자랑했던 모닝은 수비에서는 이미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선수로 성장해 있었다. 혹자들은 이런 모닝을 두고 전설적인 센터 카림 압둘자바의 젊은 시절을 연상케 한다며 입을 모았다.

대학입학을 앞둔 모닝의 선택은 다름 아닌 조지타운이었다. 조지타운은 그가 존경했던 패트릭 유잉을 배출한 명문대학이었기에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조지타운 입학 전 모닝은 1988 서울올림픽 국가대표팀 트라이아웃에 초청되었지만 아깝게 탈락하였는데 연습경기에서 동문선배인 유잉과의 맞대결로 아쉬움을 달랬다. 신입생 시절 전미 블락왕 타이틀을 거머쥔 모닝은 졸업반이 되던 해에 올-아메리칸 팀에 선정되며 명실상부 전국구 스타로 거듭났다.


고아 농구선수의 ‘Dream come tr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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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A행을 외친 지난 1992년, 또 한명의 대어였던 오닐에 밀리며 전체 2위로 살럿 호네츠(現 뉴올리언즈 호네츠)에 입단한 모닝. 모닝은 리복의 모델도 아니었고, 힙합 패션을 즐기며 랩 앨범을 발매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사각의 코트에서는 오닐에 필적하는 성적표를 남겼다. 특히 플레이오프 같은 큰 무대에서 모닝의 담대함은 빛을 발하였다. 전공인 수비력은 일찌감치 인정을 받아 모닝은 훗날, 공격력까지 겸비한 빌 러셀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었다.
모닝의 혼자 힘으로 쌓은 것은 아니지만 코트 밖에서는 샬럿의 유니폼 판매율이 상한가를 치며 비인기 약체 팀과 신생구단의 이미지를 벗는데도 일조하였다.

전직 권투선수라는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 래리 존슨과 전 세계 어린이들의 팬心 을 사로잡은 리그 최단신 가드(160cm) 타이론 보그스의 존재는 모닝과 함께 팀의 미래를 밝혀주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4년의 신인 계약 만료기간이 다가옴에 따라 구단은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했다. 모닝과 존슨을 모두 잡기에는 무리라는 판단아래 트레이드를 물색했고 매물 대상은 다름 아닌 모닝이었다. 샬럿은 마이애미 히트의 글렌 라이스, 맷 가이거를 받는 조건으로 지난 3년 동안 팀을 이끈 모닝을 내주었다.

위기는 기회라고 했던가? 당시 마이애미의 선장은 팻 라일리 감독이었다. 라일리는 80년대 ‘스카이 훅슛의 달인‘ 카림 압둘자바에 이어 90년대 킹콩‘패트릭 유잉’을 키워낸 센터 조련사로 이름난 감독이었다. 특히 숨 막히는 압박수비 시스템을 뉴욕 닉스에 투영시키며 본격적인 수비농구시대를 연 인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라일리 감독의 성향은 모닝과도 잘 부합하였고 이들은 빠른 시간 내에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었다. 모닝과 P.J. 브라운이 버티는 마이애미의 골밑은 리그에서 가장 공략하기 까다로운 공간이었으며 백코트 역시 끈끈한 수비로 이름난 댄 멀리와 팀 하더웨이가 버티고 있어 물 샐 틈 없는 수비진용이 구축됐다.

모닝은 주위의 기대를 결코 저버리지 않았다. 매 경기 20점에 가까운 득점을 뽑아내면서도 10개의 리바운드와 4개의 블락을 함께 조달하며 공수에서 팀을 이끌었다. 하지만 모닝도 천하의 농구 황제 앞에서는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신흥강호로 급부상한 마이애미는 2년 연속 시카고 불스에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번번이 고배를 들며 자리를 내주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고 팀 분위기도 좋았지만 마이클 조던과 시카고의 벽은 너무나도 높아 보였다.

그리고 찾아든 선수 노조파업과 직장폐쇄. 승승장구 할 것 같던 조던과 시카고가 마침내 해체됨에 따라 모닝은 수많은 무관의 제왕들과 함께 우승의 꿈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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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브론과 함께 급부상하고 있는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고, 그동안 이 구단을 거쳐간 수퍼스타들로 Cavs All-Time Team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구단은 1970년에 신생팀으로서 창단되었습니다. 연고지는 29년 동안 한 번도 안 바뀌었지요. 첫 해에는 15승 67패를 기록함으로써 리그 최하위였고, 덕분에 당시 대학최고선수였던 '오스틴 카'를 드래프트할 수 있었습니다. 항상 성적이 하위권에서 맴돌았기에 거의 매년 대학 최고의 선수들을 영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1975-76 시즌에는 49승을 올리면서 구단 역사상 최초로 디비젼 타이틀을 따냅니다. 그 이후로는 다시 내리막 길이었죠. 80년대 중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다시 한 번 중흥의 길을 터보려 했던 이 팀의 발목을 매번 잡은 것은 마이클 조던의 불스였습니다. 그리고 20년후, 캐벌리어스는 르브론 제임스를 중심으로 구단 역사상 세번째의 중흥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캐벌리어스는 3명의 '명예의 전당' 선수들을 배출했습니다. 네이트 써몬드, 웨인 엠브리, 레니 윌킨스가 그들입니다. 하지만 이 선수들의 전성기는 클리블랜드 소속 시절이 아니었기에, 이 구단이 이 세 명의 인물들을 배출했다고 말하는 것은 말에 좀 어폐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캐벌리어스 소속으로 뛴 선수들 중 6명의 져지넘버가 영구결번 됐습니다 - 빙고 스미스 (7), 래리 낸스 (22), 마크 프라이스 (25), 오스틴 카 (34), 네이트 써몬드 (42), 브랫 도허티 (43). 네이트 써몬드는 그의 이름값 때문에 영구결번이 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말년에 두 시즌 벤치멤버로 뛰면서 팀에 그리 공헌한 것은 거의 없었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르브론 제임스가 별 이상없이 지금의 실력을 향후 4~5년간만 지속해 준다면, 명실공히 구단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자리매김 될 것입니다.

지금부터, 현역선수들을 제외한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All-Time Team을 구성해 보겠습니다.


Starting Five

센터 - 브랫 도허티(Brad Daugher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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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역대 캐벌리어스 선수들 전체를 대상으로 투표해도 별다른 이견없이 뽑힐만한 선수라 생각됩니다. 브랫 도허티는 1965년생이고, 키는 213cm입니다.

1986년 드래프트에서 전체순위 1번으로 영입됐습니다. 이 드래프트는 2번 픽으로 셀틱스에 의해 드래프트가 되자마자 사망한 '렌 바이어스' (사진 오른쪽에서 두번째)로 인해 더 유명해진 드래프트였죠. 이 드래프트에서 '론 하퍼'도 8번픽으로 뽑혀서 캐벌리어스 유니폼을 입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댈러스와의 트레이드로 인해 '마크 프라이스'까지 낚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존 “Hot Rod” 윌리암스'라는 뛰어난 USBL출신 파워포워드까지 영입한 캐벌리어스는 아마도 NBA 역사상 드래프트 당일날, 유능한 선수들을 한꺼번에 가장 많이 영입한 팀일 것입니다. 프라이스를 제외한 이들 모두는 86-87 All-Rookie 팀에도 이름을 올렸습니다.

마이클 조던과 함께 대학생활을 하며 딘 스미스 감독으로부터 철저한 기본기를 전수받은 도허티의 플레이는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실속있었고 효율적이었습니다. 현재의 팀 던컨과 아주 비슷한 스타일의 농구를 했었지요. 팀 던컨이 조금 더 몸이 크고 느려서 센터를 봐야만 했다면 영락없는 도허티입니다. 물론 수비력과 리더쉽에 있어서는 던컨이 훨씬 더 뛰어나지만요. 도허티는 올스타게임에 다섯번 출전하며 (88, 89, 91, 92, 93) 8시즌을 캐벌리어스의 일원으로 뛰었습니다. 커리어 평균은 19.0점, 9.5리바운드, 3.7어시스트입니다. 센터로서는 상당히 높은 어시스트 수치가 눈에 띄지요?

도허티는 1993-94 시즌을 끝으로 28세의 젊은 나이에 농구인생을 접어야만 했습니다. 고질적인 허리 디스크때문이었지요. 도허티가 건강했더라면 90년대 4대센터들의 각축전에도 뛰어들만한 실력의 선수였습니다. 현재는 기독교인으로서 수많은 사회봉사 일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파워포워드 - 존 '핫 로드' 윌리엄스(John "Hot Rod" Willia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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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Hot Rod” 윌리암스는 1962년생으로 신장 211cm의 전형적인 수비형 파워포워드였습니다. 1985-86년 시즌에 USBL에서 뛰었던 숨은 진주를 캐벌리어스가 건져낸 거였죠. 이 선수의 수비력과 블라킹 능력이 워낙 뛰어났기에, 상대적으로 이 부분들이 약했던 도허티를 드래프트하는데 있어서 별 고민을 하지 않았었다고 전해집니다. 1988-89 시즌에는 16.8점, 8.1리바운드, 2.1블락샷을 기록하며 식스맨으로서 맹활약하기도 했습니다.

존 윌리암스라는 이름이 워낙 흔한 이름이라서 그의 어렸을 적 별명인 "Hot Rod"를 미들네임처럼 사용했습니다. 당시에 해설자들도 그를 '핫 로드 윌리암스'라고 했지 '존 윌리암스'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Hot Rod는 어렸을때 윌리암스가 집안에서 자동차의 엔진소리를 내며 집안을 가로질러 뛰어다녔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입니다. 엔진이 밖으로 드러나서 엔진소리가 유난히 크게 나는 차를 가리켜 미국에선 Hot Rod라고 하거든요.

윌리암스는 9시즌을 캐벌리어스 유니폼을 입고 뛰었으며, 그의 1,200 블락샷과 20,802분의 출장시간, 그리고 1,620개의 공격리바운드는 아직도 프랜차이즈 올타임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윌리암스의 40분 대비 커리어 평균은 14.9점, 9.1리바운드, 2.4어시스트, 2.2블락샷입니다.


스몰포워드 - Larry Nance(래리 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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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닉스 선즈에서 프로생활을 시작한 낸스는 1988년부터 1994년까지 캐벌리어스의 일원으로 뛰었습니다. 1959년생이며 신장 208cm인 낸스는1981년 드래프트에서 전체순위 20번으로 드래프트 되었습니다.

올스타 게임에 3번(85, 89, 93) 출전했고, 1984년 슬램덩크 콘테스트에서는 줄리어스 어빙을 결승에서 누르고 NBA 첫 슬램덩크 우승자가 됐지요. 대학 졸업시의 서전트점프가 102cm였던 낸스는, 프로 초창기에는 주로 선즈의 칼 매이시의 앨리우프 패스만 받아먹는 단조로운 공격패턴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986-87 시즌에는 22.5득점을 기록하며, 더 이상 덩크만이 아닌 미드레인지 점퍼와 다양한 공격루트를 장착했음을 과시하기도 했습니다. 낸스는 또한 스타팅 멤버로 뛴 11시즌동안 매시즌 평균이 최소 16득점에 8리바운드로써 ‘꾸준함’에 있어서도 유명했던 선수였습니다. 1989년과 1992년, 93년에는 All-Defensive Team에도 뽑혔었죠.

1988년에 있었던 피닉스와 클리블랜드 (케빈 존슨, 댄 말리)의 트레이드로 인해 클리블랜드에 새 둥지를 튼 낸스는 젊은 피의 수혈로 점점 강해지던 캐브스를 당장에 파이널 컨텐더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허나, 두 가지 장벽이 도사리고 있었으니, 같은 컨퍼런스에 조던의 불스가 있었다는 점과, 이때부터 그의 고질적인 허리부상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는 점이었습니다.

3번부터 5번까지의 포지션을 모두 소화할 수 있었던 낸스의 커리어 평균은 17.1점, 8.0리바운드, 2.6어시스트, 2.2블락샷입니다.


슈팅가드 - 오스틴 카(Austin Car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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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틴 카는 클리블랜드가 창단 첫해에 리그의 쓴 맛을 본 덕분(?)에 다음 시즌인 1971년의 드래프트에서 전체순위 1번으로 뽑혔던 당시 대학 최고의 득점기계이자 대학 최우수선수상을 받은 선수였습니다. 1948년생이며 193cm였던 이 슈팅가드는 노틀댐 대학시절 34.5점이란 대학 커리어 평균을 해내 세상을 놀라게 했었지요. '"피스톨" 피트 마라비치'와 비견될 만한 득점기계였습니다. 코트 위의 어떠한 위치나 각도에서도 터지는 그의 슈팅레인지는 가공할 무기였습니다.

하지만 입단 첫 시즌부터 입은 발과 다리부상의 어두운 그림자는 커리어 내내 그를 괴롭혔고, 결국 그는 대학때의 명성에 걸맞지 않는 수준으로 농구인생을 마쳐야만 했습니다. 1973-74 시즌에는 21.9점, 3.6리바운드, 3.8어시스트에 86%의 자유투 성공률을 보이며 잠시나마 그가 어떠한 능력의 소유자인지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잠깐, 다음 시즌에 곧바로 무릎부상을 입으며 다시 힘든 커리어를 보내게 됩니다.

오스틴 카는 캐벌리어스의 일원으로 뛴 9시즌동안 16.2 평균득점을 기록했습니다. 계속되는 부상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도전하던 그의 모습은 많은 젊은 농구선수들에게 귀감이 되었고, 그래서 구단은 그의 져지넘버를 영구결번시켜 주었습니다.


포인트가드 - 마크 프라이스(Mark Pr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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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긴 것 부터가 남달리 영민하게 생긴 마크 프라이스는 "생긴대로" 플레이했던 뛰어난 포인트가드였습니다. 1964년생이며 농구명문 조지아 공대를 졸업한 프라이스는 182cm라는 작은 신장에도 불구하고 코트를 휘젓고 다니던 카리스마 넘치는 민완가드였죠. 너무 작고, 너무 느리고, 너무 정석적인 플레이만 한다며 그를 드래프트 2라운드까지 끌어내렸던 스카우터들의 안목을 비웃기라도 하듯, 프라이스는 보란 듯이 12시즌 동안 NBA 코트의 야전사령관 역활을 멋지게 해냈습니다.

이 글을 보시는 분들이 기억하실지 모르겠으나, 마크 프라이스의 플레이를 보다 보면 저의 고교 1년 선배셨던 유재학 감독님의 전성기적 플레이가 떠오르곤 합니다. 허재나 강동희같은 특출난 기술이 없었어도 언제 패스하고 언제 외곽슛을 날려야 할 지를 누구보다 빠르게 판단할 수 있었던 분이었죠. 낮고 불규칙한 드리블, 경기를 읽는 영리한 두뇌, 그리고 단신임에도 인사이드를 향해 치고 들어가며 완벽하게 빼주는 킥아웃 패스나 직접 시도하는 반박자 빠른 레이업 등이 그 분의 전매특허였습니다. 프라이스도 그러한 스타일의 농구를 했습니다. 키는 작았지만 드리블을 치다가 순간적으로 점프하며 높은 타점에서 터뜨리는 풀업점퍼는 예술이었죠. 그리고 강한 손목힘에서 비롯된 3점라인 훨씬 뒤에서의 안정된 롱슛이나 빠른 드리블과 함께 변칙적인 타이밍에서 발생되는 킬패스는 역대 최고수준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자유투 성공률도 커리어 평균이 90.4%에 달했고 3점슛 성공률도 40%를 상회했습니다. 1988-89 시즌에는 '야투성공률이 50%를 넘고, 3점슛이 40%를 넘으며, 자유투까지 90%의 성공률을 보인 180 클럽' (버드, 노빗츠키, 내쉬, 레지 밀러 등)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4번의 올스타 게임에 출전했던 프라이스는 1992-93 시즌에는 All-NBA First Team에 선출되기도 했지요. 프라이스의 40분 대비 커리어 평균은 20.4점, 9.0어시스트, 1.6스틸입니다.

1994년에는 세계농구선수권에서 샤킬 오닐, 숀 캠프, 레지 밀러등의 공격을 이끌어내며 미국에 금메달을 안기는데 있어 큰 공헌을 했던 주전 포인트가드 마크 프라이스. 그의 캐벌리어스 All-Time Team 선정에는 이견이 없을 듯 합니다.


벤치 멤버들

센터 겸 파워포워드 - 숀 켐프(Shawn Ke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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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다른 프로필이 필요치 않은 수퍼스타 숀 캠프의 클리블랜드에서의 3시즌은 상당히 화려했습니다. 1997년부터 2000년까지 캐벌리어스의 일원으로 활약하며 18~20점에 9~10리바운드를 기록해 줬지요. 1998-99 시즌에는 자신의 커리어 하이인 20.5점을 득점했습니다.

1998년에는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올스타 게임에 스타팅 멤버로 '선발출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클리블랜드에 온 후에 시작된 체중조절의 문제는 그의 커리어를 단축시키는 주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슈팅가드 겸 포인트가드 - 월드 B.프리(World B. F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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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시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원래의 이름은 Lloyd Free였는데, 나중에 커리어가 쌓임에 따라 자기는 이 세상을 품는 대인이 되겠다고 선언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World B. Free로 개명한 선수입니다 (가운데 B는 아무 의미가 없답니다.^^;)) 월드 비 프리는 1975년부터 1988년까지 활약했는데, 신장은 186cm였지만 44인치의 점프력을 이용해 가공할 덩크를 많이 보여줬던 선수입니다.

몸은 뚱뚱한(?)편으로 둔해보이기까지 했는데도 몸놀림은 무척 민첩했습니다. 79년과 80년에는 조지 거빈과 득점왕을 다툴 정도로 득점력도 뛰어났습니다. 커리어 평균은 20.3점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루키시즌과 말년 두시즌 동안에 많이 까먹은 수치고, 나머지 10시즌 동안에는 대체적으로 23점에서 30점 사이를 득점해줬죠. 클리블랜드에서는 82년부터 86년까지 뛰며 평균 23점을 득점했던 뛰어난 스코러였습니다.


스몰포워드 겸 슈팅가드 - 론 하퍼(Ron Har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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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시카고 불스에서 뛰던 선수로만 기억하실 분들이 계실텐데요.... 론 하퍼는 1985년에 입단할 때부터 '조던의 라이벌', '오렌지 조던'같은 수식어가 따라다닐 정도로 조던과 여러면에서 비슷한 선수였습니다.

훌륭한 점프력을 바탕으로 한 그의 올라운드 공격력은 클리블랜드에서의 루키시즌에 이미 평균 22.9점이라는 수치로 증명이 되었습니다. 클리블랜드에서의 3시즌을 보낸 뒤에 LA 클리퍼스에서 맹활약을 했던 하퍼. 그를 멈춘 것은 무릎부상이었습니다. 그 후, 레이커스와 불스에서 롤플레이어로 뛰며 우승반지를 5개나 챙겼지요.

무릎부상을 당하기 전인 클리블랜드와 LA 에서의 8시즌 동안엔 꾸준히 18점에서 23점 사이를 득점해주며 리바운드와 어시스트도 5~6개씩 해주던 올라운더였습니다.

이 외에도 로이 힌슨, 키이쓰 리, 타이론 힐, 마이크 밋첼, 빙고 스미스, 필 허바드, 테럴 브랜든과 같은 많은 좋은 선수들이 있었지만, 위에 언급된 선수들만큼 긴 시간동안 꾸준한 활약을 보이지는 못했다고 판단되어 All-Time Team에서는 제외시켰습니다. 이제 르브론을 중심으로 클리블랜드에 새 태양이 떠오를 것을 기대하며 여기서 글을 줄일까 합니다.


설 연휴, 의미있게 잘 보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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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A
최고의 상품이라고 할수있는 올스타전이 다가온다. NBA 올스타전에는 최고의 슈퍼스타들이 한곳에 모여 자웅을 겨룬다. 현재 NBA에는 450여명의 선수들이 등록되어 있다. 올스타전에 뛰는 26명의 선수들은 최고중의 최고가 아닐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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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우선 올스타전에 대한 정의를 필자가 내려보겠다. 필자에게 올스타전이란 최고의 스타 플레이어들이 한자리에 모여 팬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는 무대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볼거리" 란 바로 농구다. 최고급 선수들이 함께 모여 농구하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전율이 흐를만큼 짜릿하다.

그럼 NBA 올스타전 멤버가 어떻게 선발되는지 함께 알아보도록 하자. NBA 올스타전은 동부지구와 서부지구, 두 팀으로 나뉘어져 있다. 각 팀마다 13명의 선수들이 선발된다. 물론, 동부지구 올스타 팀에는 동부지구에 소속된 선수들이, 서부지구 올스타 팀에는 서부지구에 소속된 선수들이 선발된다.

각 팀의 스타팅 멤버 다섯명은 팬들이 온라인 투표를 통해서 선발된다. 스타팅 멤버 선발에는 가드 부문에서 두명, 포워드 부문에서 두명, 센터 부문에서 1명씩 선발된다. 즉, 쉽게 말하자면 가드 부문에서 최다득표 1,2위 선수들이 올스타전 스타팅 멤버가 되는것이다. 포워드와 센터 역시 똑같은 방식으로 선발된다.

올스타전은 팬들을 위한 축제와 같다. 그때문에 팬들에게 올스타팀 선발권을 온라인 투표를 통해 부여하는 것이다. 팬들 각각 자신만의 스타팅 라인업을 상상할게 아닌가?

하지만 이 온라인 투표가 때로는 오용될 수 있다. 최소한 팬들의 투표권의 의미와는 거리가 먼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필자는 2009년 올스타전과 이 치엔리엔에 대한 문제를 파헤쳐보려 한다.

1월 14일 NBA가 발표한 올스타전 온라인 투표 중간집계 결과를 볼때 서부지구 가드 부문에는 LA 레이커스의 코비 브라이언트와 휴스턴 로켓츠의 트레이시 맥그레이디가 1,2위를 기록했다. 포워드 부문은 샌안토니오 스퍼스의 팀 던컨의 독식과 함께 덴버 너겟츠의 카멜로 앤써니가 2위를 차지했고, 센터 부문에서는 야오밍이 압도적인 득표수로 1위를 차지했다. 그럼 동부지구로 가보자. 동부지구 가드 부문은 마이애미 히트의 드웨인 웨이드와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의 앨런 아이버슨이 1,2위를, 포워드 부문은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르브론 제임스와 보스턴 셀틱스의 케빈 가넷이 1,2위를 고수중이다. 센터 부문에서는 올랜도 매직의 드와이트 하워드가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따로 있다. 동부지구 올스타 포워드 부문에서 중국 출신의 포워드 이 치엔리엔이 포워드 부문에서 득표수 3위를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재 그는 포워드 부문 2위의 가넷을 약 15만표 차이로 따라붙고 있다. 올스타전이 2월 15일임을 고려해보면 이 치엔리엔이 가넷을 제치고 2위로 등극할 가능성도 있다.  15만표는 그리 큰 차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치엔리엔의 득표수는 큰 논란거리다. 왜냐하면 그의 득표수는 거의 대부분이 중국 네티즌들이 던진 표이기 때문이다. 일명, 중국의 인해전술이 만들어낸 기이한 결과가 바로 이 치엔리엔이 올스타전 득표수 3위에 등극한 상황이다.

이 치엔리엔이 득표수로 제친 선수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더더욱 경악할 것이다. 이 치엔리엔의 뒤를 쫒고 있는 선수들은 토론토 랩터스의 크리스 보쉬, 보스턴 셀틱스의 폴 피어스, 올랜도 매직의 히도 터콜루, 마이애미 히트의 션 매리언,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대니 그레인저 등이다. 이 치엔리엔과 비교해볼때 위에 언급한 선수들의 경력은 확연히 차이가 난다. 크리스 보쉬는 시즌 초 엄청난 활약으로 MVP 후보로까지 거론되었던 인물이다.
폴 피어스는 작년 보스턴을 우승으로 이끈 스타 플레이어임과 동시에 여러차례 올스타전에 출전했던 엄청난 경력의 소유자다. 히도 터콜루 역시 현재 올랜도의 에이스 플레이어며 션 매리언 역시 여러차례 올스타전에 출전했던 선수이다. 대니 그레인저 역시 묵직한 플레이로 인디애나를 이끌고 있는 신성이다. 이 모든 선수들을 제치고 이 치엔리엔이 득표수라는 제도를 통해 올스타전에 선발 출전하는 장면이 상상이나 되는가? 현재의 상황만 놓고 본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치엔리엔이 올스타전에 출전 할만한 자격을 갖추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올스타전은 영어로 All Star Game 이다. 단어 그대로 해석하자면 All Star, 즉 모두의 스타들이 한자리에 모인 농구경기다. 여기서 모두란 무엇일까. 바로 팬들이다. 즉 팬들이 원하는 스타들의 무대가 바로 올스타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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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잠깐 다시 필자가 언급했던 올스타전의 정의를 보자.

필자는 올스타전이 최고의 선수들이 모여 그동안 농구경기에서 보지 못했던 신선하고 짜릿한 경기를 팬들에게 보여주는 무대라고 생각한다.

필자의 정의와 올스타전이라는 단어의 해석에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올스타전의 주인공들은 스타 플레이어들이라는 것이다. 물론 올스타전의 진정한 주인공은 팬이라는 문구가 있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필자에게는 팬들을 존중하기 위한, 입에 바른 예의상 발언이라고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어찌됬던 올스타전을 빛낼 이들은 바로 NBA 선수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지엔리엔이 올스타전을 빛낼 수 있는 자격이 있는가?

기량만 본다면 당연히 아니다. 그는 팬들의 이목을 살 만한 능력을 지금까지 단 한번도 보여주지 못했다.

잠시 2003년으로 돌아가 보자.  2003년은 르브론 제임스와 카멜로 앤써니의 데뷔 시즌이었다. 그들은 루키임에도 불구하고 올스타급 활약을 하며 거물 루키가 무엇인지를 확실히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들이 2003년 올스타전에 초청되지 않았을때 당사자들은 물론 수많은 팬들이 NBA에 의문점과 함께 불만을 표출했다. (물론, 사태는 커지지 않았다.) 제임스와 앤써니 역시 언론에 자신들은 꼭 뽑힐줄 알았다면서 아쉬움과 함께 약간의 불만을 드러냈다. 이 사태에 대해 트레이시 맥그레이디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물론 그들이(르브론 제임스와 카멜로 앤써니) 좋은 선수라는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들 역시 올스타가 될 자격을 갖추고 있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올스타 선수들이 명단에서 빠져야 하는가? 올스타전에 초청된 선수들 역시 올스타 자격이 있어 초청된것이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스타가 아니라는것을 알아야 한다." (I know they’re good players and all, but does that make them kick out some of the all star players who were invited? Come on, these men are here because they are an all star. They gotta know their places, they’re not the only stars in the league.”)

하지만 이 지엔리엔은 어떠한가? 팬투표 결과 하나때문에 이 지엔리엔이 다른 스타 플레이어들의 자리를 차지할 자격은 없다. 그는 올스타에 어울리는 선수도 아니며, NBA 주전 라인업에 어울리는 선수도 아니다. 현재의 그는 롤 플레이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를 깊게 평가하고 싶지 않지만, 간단하게 그에 대한 평가를 내리자면 그는 올스타급 선수는 절대 아니다. 그는 올스타전에서 뛰지 말아야 한다. 기량이 급성장한 수년 후라면 모를까.

물론 수많은 반론들이 있을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올스타전의 의미에 대한 여러가지 해석이다. 우선적으로 올스타전이라 함은 NBA에 많은 성원을 보내준 팬들에 대한 선수들의 특별한 무대다. 즉 팬들을 위한 퍼포먼스가 바로 올스타전이라는 것이다. 다만 필자는 그 무대를 펼치는 선수들의 기량이 최고급, 아니면 최소한 올스타 기준에는 근접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의 기준에 이 치엔리엔은 올스타전에 출전할 자격이 없다. 그의 기량은 올스타급은 커녕, NBA 팀의 주전급에도 못미친다. 그의 잠재력은 인정하지만 현재기량만 따지고 볼때 그는 그저그런 벤치 플레이어일 뿐이다.

그러나 필자의 주장에도 모순이 포함되어있다. 그 이유는 바로 NBA가 올스타전은 팬들을 위한 무대임을 어떠한 기준도 두지 않은채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는 NBA가 매 해 올스타전 선발 라인업의 전권을 온라인 투표라는 제도를 통해 팬들에게 쥐어줌으로써 증명되었다. 특히 아무런 올스타전 출전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내놓지 않았기 때문에 NBA가 올스타전 선발 라인업에 대해서는 100% 팬들의 요구를 지지한다고 해석하는게 맞다. 온라인 투표제를 현지 내의 팬들에게만 적용하면 되지 않느냐? 대답은 바로 “NO” 다. 이는 NBA는 물론 데이빗 스턴 커미셔너의 명성에도 크게 해를 입힐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스턴은 수년간 NBA의 세계화를 주장해왔다. 그리고 그 계획을 조금씩 현실화시켜왔다. 몇몇 NBA 팀들은 트레이닝 캠프와 시범경기를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서 실시했으며, NBA 스타들이 꾸준히 중국과 우리나라 등을 방문했기 때문이다. 또한 NBA는 NBA 정규리그 중계권인 NBA League Pass를 우리나라를 포함해서 각국에 팔아서 이익을 봤다. 이는 NBA가 현지 팬들만이 아닌 타국의 팬들까지 인정한다는 의미다. 이런 상황에서 타국 팬들의 온라인 투표를 제한한다면 수많은 팬들의 원성을 살것이며 이는 NBA의 명성에 큰 타격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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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다시 이 지엔리엔으로 돌아가 보 자.현재 그는 동부지구 올스타전 포워드 부문 득표 3위를 달리고 있다. 그러나 득표수 중 대부분이 중국 네티즌들 덕분(?)인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중국인들에게는 자국의 스타가 NBA 올스타전에 출전하는 모습을 보고싶어 할 것이다. 현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활약하고 있는 박지성의 활약을 보고싶어 하는 대한민국 국민들처럼.

물론 예외는 있다. 마이클 조던은 은퇴 후 워싱턴 위저즈에 복귀하는 동시에 올스타전에 선발되었다. 하지만 그는 온라인 득표수가 아닌 감독추천에 의해 올스타전에 선발되었다. 마이클 조던의 그해 성적만 본다면 어쩌면 그는 올스타감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의 활약상이 최고급의 수준이라고는 말하기 어려운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NBA 역사상 최고의 선수였고 황제의 복귀와 동시에 그를 올스타전에서 보고 싶어하는 팬들이 많았다. 비록 황제의 귀환이라는 메리트가 있었지만 그동안 쌓아둔 업적과 그의 나이를 고려하면 그의 올스타전 출전은 당연하다고 볼 수도 있다. 또한 같은 동부지구 올스타전 선발 라인업에 포함된 선수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주전 자리를 조던에게 양보하겠다며 황제에 대한 예우를 갖추었다.
결국 조던은 올스타전에 당당히 선발로 출전했고 많은 팬들은 그의 선발출전에 흡족해 했다. 하지만 이 지엔리엔의 출전은 조던의 예와 같이 적용해서는 안된다. 그가 그동안 NBA에 보여준게 있는가? 그는 농구 황제도 아니며 MVP 나 All-NBA First Team등 수상 한번 못해본 수준 미달의 2년차다. 그의 현재 기량은 당시 조던의 기량에 비교할 때 훨씬 떨어진다. 만약 이 예를 들어 이 치엔리엔의 올스타전 출전을 지지한다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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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지엔리엔과 NBA는 커다란 숙제를 안고있다. 만약 이 지엔리엔이 동부 포워드부문 득표에서 케빈 가넷을 제치고 새롭게 2위로 등극한다면 그는 올스타전에 뛰어야 한다. NBA가 만들어 놓은 올스타전 선발 제도 때문이다. 하지만 백조 사이에 까마귀가 뛰어노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중국 팬들을 제외한 다른 팬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십중팔구 이 지엔리엔이 올스타전에 뛰는 것을 좋게 보지는 않을 것이다.

NBA 역시 처지는 마찬가지다. 이 문제를 어떻게 수습하냐에 따라 팬들의 반응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NBA는 어떻게든 팬들의 원성을 사게되는 처지에 놓여있다. 단, 이 치엔리엔이 득표율 2위를 차지했을 때의 상황이긴 하지만. 만약 이 치엔리엔이 득표수 2위를 차지했다고 가정해보자. 과연 NBA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NBA가 공언한 제도를 따라 이 지엔리엔에게 동부지구 올스타 선발 한자리를 내줘야 한다면 이는 중국팬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팬들의 원성을 사게 될 것이다. 이 지엔리엔의 퀄리티는 다른 올스타 레벨 선수들에 비해 극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필자의 주장대로 NBA가 과감히 이 치엔리엔을 올스타전에서 제외한다면 중국 팬들의 비난이 쏟아질 것이다. 여기서 필자가 NBA에게 제시할 수 있는 한가지 방법이 있다. 만약 이 지엔리엔이 동부지구 포워드 부문에서 득표수 2위를 차지했다면, NBA가 최종 득표순위를 발표하기 전에 그 결과를 교묘히 바꾸는 것이다. 이 방법은 이 지엔리엔을 올스타전 출전에 제외시키는 한편, 팬들의 비난을 최소화 할 수 있을것이다. 다만, 이 방법이 매해 통할지는 미지수다.

필자는 여러 칼럼을 통해 NBA의 흥미요소를 강조해 왔다. 현재의 상황 역시 NBA의 또다른 흥미요소라고 할 수 있다. 남은 올스타전까지 이 상황의 전개를 지켜보는것 역시 또다른 재미가 아니겠는가? 필자 역시 NBA와 이 지엔리엔이 이 어려운 숙제를 원만하게 풀어나가길 기대하면서 이 칼럼을 마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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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COLUMNS/MINWOOK 2009. 1. 16. 13:18

왜 밀렌코 테피치를 주목해야 하는가?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요즘 한창 열기를 더해가고 있는 유로리그. 그 유로리그에서 현재 가장 잘 나가고 있는 유망주는 누구일까? 필자는 87년생 이하 유망주중 가장 잘 나가는 선수로 세르비아 명문클럽 파르티잔의 밀렌코 테피치를 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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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렌코 테피치는 1987년생 세르비아 골든 제너레이션 세대다.

세르비아 골든 제너레이션이란 현재 1986년생인 유로스 트립코비치를 필두로 최근 3년간 유럽 U-16, 18, 20대회를 우승으로 쓸어 담았던 1986년~1989년생 사이의 세르비아 선수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리고 2007년 당시 세르비아 노비셰드에서 열린 세계 청소년 선수권 대회 결승에서 미국 청소년 대표팀(당시 이 청소년 대표팀에는 스테판 커리, 마이클 비즐리가 있었다.)을 이기면서 돌풍을 일으켰다. 블라디 디바치가 이 경기를 보고 "이제 우리(세르비아)의 미래는 더 이상 어둡지 않다. 특히나 미국을 우리 땅에서 이겨서 더욱 기분이 좋다"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이들에 대한 극찬을 늘어놓았다.

이들의 활약상은 전 유럽농구 전문가들에게 강인한 인상을 남겼다.

밀렌코 테피치역시 2006년 유럽 U-20대회에서 사실상 리더역할을 하면서 올림피아코스의 가드인 밀로스 테오도시치와 함께 세르비아 U-20대표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테피치가 파르티잔 이적 초기에는 자신의 다재다능함을 잘 살리지 못하고 무척 맴도는 모습이었지만, 니콜라 페코비치의 이적과 유로스 트립코비치의 잦은 부상 등 악영향 속에서도 파르티잔을 현재 Top 16(유로리그 16강) 컨텐더로 이끌고 있는 22세의 에이스로 성장했다.

밀렌코 테피치를 왜 주목하냐고 물어본다면 필자는 이 선수의 다재다능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테피치는 이렇게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슈팅가드가 최적 포지션이지만, 팀에서 포인트가드나 스몰포워드를 주문하면 그 역할을 80%정도는 소화해낼 수 있는 선수."라고 말이다. 바로 이것이 지노빌리가 유럽에서 가졌던 장점 중 하나였다. 테피치가 별로 가슴에 와닿지 않는 분들께 드리고 싶은 한 마디는 이것이다.

여담으로 테피치는 현재 파르티잔의 팀 사정상 소화해야할 역할이 너무 많아서 자신의 플레이를 완벽하게는 보여주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예전의 폭발력 있는 모습보다는 팀의 안정과 꾸준함에 더 집중해야하는 상황에 직면했기에 팀플레이 면에서 돋보이는 테피치다. 하지만 개인적인 명성이나 기록에는 손해를 보고 있어 다소간의 아쉬움이 남는다.

밀렌코 테피치의 공격에서 장점은 장신 선수라고 보기 힘든 엄청난 코트 비전, 그리고 좋은 운동능력과 리딩력, 또한 양손을 자유자재로 쓰면서 언제든지 유로스텝으로 상대를 공략하는 드라이브인에 있다. 파울을 얻어내는 능력은 이제 완전히 도가 튼 것 같다.

밀렌코 테피치를 돋보이게 하는 또 다른 점은 바로 수비다. 201cm~204cm의 좋은 신장을 가지고 있음에도 수비에 대한 기본기가 매우 탄탄하다. 테피치의 수비는 결코 스틸이나 블록 노리고는 맹목적인 수비가 아니다. 이 점은 사실 젊은 선수들에게서 찾기 힘든 것인데,  테피치는 그 사실을 깨우치고 있다는 것이 수비에서 많은 플러스 요인을 받고 있다.

이런 테피치를 두고 한 유럽농구 전문가는 "그가 유럽리그 최고 수비수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라 이야기한다. 필자 역시 이를 공감하는데, 이때 생각나는 누군가가 떠오르지 않는가? 바로 NBA 드래프트에서 비교대상으로 이야기하는 마르코 야리치다.

하지만 야리치와 테피치는 분명 틀리다고 생각한다. 테피치의 스피드나 운동능력이 훨씬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며 무엇보다 테피치의 슈팅력이 많이 올라왔다. 그리고 패스 장면을 보면 테피치는 진짜 완벽한 포인트가드 같다.

테피치가 2009년 NBA 드래프트에 나온다면 필자가 단장이라는 가정 하에 1라운드 중, 후반픽을 가지고 있다면 과감하게 테피치를 선택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토론토 랩터스나 필자 가 팬으로 있는 샌안토니오 스퍼스에 정말 최적화된 선수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의 젊디젊은 단장이다. 욕심이 많아서 그런지 몰라도 이 선수를 노리고 있다. 도대체 어디까지 포틀랜드를 강하게 만들려고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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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NBA를 접하게 된 것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통해서였다. 이 후 1992-93 시즌부터 지금까지 NBA를 즐기고 있다. 당시 아무런 사전 지식이 없던 상태에서 처음 NBA를 접했던 탓에 몇 몇 팀들에 대해 오해 아닌 오해를 했던 경우가 있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LA 레이커스였다.
당시 매직 존슨 은퇴 직 후의,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내던 그들이었으나 내게는 그저 그런 중위권 팀으로 보일 뿐이었던 것이다. 1년의 시간이 지난 뒤에서야 레이커스가 전통의 명문 구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레이커스의 경기 비디오 테입을 구하게 된 나는 한 명의 작은 선수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그는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경기장을 누볐다. 팀은 패배할 지언정 자신만은 패배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마저 느껴지는 듯 했다. 암흑기에 빠진 명문 구단을 홀로 일으켜세우리라 말하는 것 같았다. 얼마 뒤 그 선수의 별명이 "the Quick" 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 강렬함은 배가 되어 다가왔다.

1990년대 중반. 레이커스가 암흑기를 보내던 시절, 한 줄기 빛과도 같은 활약을 펼치던 선수. 그러나 팀이 전력을 재정비하여 다시금 챔피언 반지를 손에 넣을 무렵, 플레이오프 무대에 오르지도 못한 타 팀의 유니폼을 입고서 친정팀의 우승 퍼레이드를 TV로 지켜봐야만 했던 그 선수.

이번에 함께 만나볼 그 때 그 선수는 바로 닉 반 엑셀이다.


악동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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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 반 엑셀은 신시내티 대학 시절 부터 훌륭한 활약을 보였던 될 성 부른 떡잎이었다. 대학에서의 마지막 시즌에는 평균 18.3점 4.5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신시내티를 파이널 4 무대로까지 이끌었고 여세를 몰아 1993년 NBA 드래프트에 참가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시작이 그리 순탄하지는 못했다. 당시 올 아메리칸 3rd 팀에 이름을 올릴 만큼 후한 평가를 받고 있던 반 엑셀이었으나 워크 아웃 캠프에서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떨어뜨리는 행동을 보인 것이다. 불성실한 태도로 구단 관계자들과의 인터뷰에 임했고, 컨디션 난조를 이유로 캠프에 불참하기 일쑤였다. 결국 거만하며 예의가 없어 '프로 선수로 부적합한 자세를 가진 선수'라는 낙인이 찍혔다.
결국 본인이 가진 실력과 가능성에 비해 형편없는 드래프트 순위인 37번(2라운드 10번) 픽으로 LA 레이커스의 유니폼을 입게 됐다.

훗날, 실제로 커리어 동안 불성실한 마인드가 문제시되며 훌륭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 가치를 인정 받지 못하는 선수로 성장하는 반 엑셀은 그 등장부터 악동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Nick the Quick

하지만 그의 실력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데뷔 전에서 주전 멤버로 출장해 23득점 8어시스트를 기록, 경기를 접수했다.
이 후로도 그의 활약은 계속 되었다. 1993-94 시즌 동안 그는 신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30분 이상의 플레잉 타임을 기록하며 81경기에 출장했고, 그 중 80경기에 선발 멤버로 코트에 나섰을만큼 그를 향한 팀의 신뢰도 매우 높았다. 1994년 루키 세컨드 팀에 이름을 올리며 성공적인 첫 시즌을 보낸 반 엑셀은 매직 존슨이 떠난 레이커스의 새로운 희망으로 각광 받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994년, 드래프트를 통해 팀에 합류한 에디 존스와 함께 백코트를 구성하며 쇼타임 레이커스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당시 피닉스로부터 이적해 온 세드릭 세발로스까지 합세한 레이커스의 퍼리미터 공격진은 런앤건 공격을 주도하며 조금씩 과거의 영광을 되찾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한 지 단 1년 만에 다시금 5번 시드를 차지하며 플레이오프 무대로 복귀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두 번째 시즌에 임하고 있었던 풋내기 반 엑셀은 80경기에 모두 선발 출장해 16.9득점, 8.3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맹활약을 펼쳤다.

반 엑셀은 전형적인 공격형 포인트 가드였다. 현란한 개인기를 앞세워 스스로 득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전광석화 같은 스피드와 유려한 볼핸들링을 이용한 돌파는 물론이고, 비교적 작은 체구였음에도 포스트 업을 이용한 공격에도 능했던 선수였다. 전방위에서 쏘아 올리는 점퍼와 외곽슛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특히 훌륭한 클러치 플레이어이기도 했던 반 엑셀은 중요한 순간 승부의 물줄기를 바꾸는 3점슛을 종종 터뜨리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가 단순히 슛만을 즐기던 포인트 가드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그는 화려한 패싱 스킬을 가진 선수였으며, 플레이메이킹 능력도 준수한 수준이어서 그야말로 훌륭한 포인트 가드로 활약할 수 있었다. 또한 화려한 플레이 스타일에 비해 많은 실책을 저지르는 선수도 아니었기에 그야말로 쇼타임 레이커스에 가장 들어맞는 선수였다고 할 수 있겠다. (커리어 평균 어시스트 6.6개, 커리어 평균 실책 2.1개)

순발력이 좋고 높은 BQ를 가진 선수였기에 좋은 수비수가 될 수 있는 자질을 충분히 가진 선수이기도 했으나 수비에 있어서는 공격에서만큼 공을 들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가지고 있는 능력에 비해 평이한 수비수였던 그는 특히 팀 디펜스에 녹아들지 못했고, 패싱 레인을 읽는 것에 미숙해 빠른 손과 발을 가졌음에도 많은 스틸을 기록하지는 못했다. (커리어 평균 0.8개)

더해서 슈팅에 있어서 다소 기복이 있는 편이었고, 돌출행동을 일으키는 등 감정의 변화가 심한 선수였기에 컨트롤 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던 선수였다.

하지만 천부적인 농구 센스, 코트 위에서만큼은 강력한 빛을 발했던 리더쉽, 마법 같은 패스와 넓은 코트비전을 앞세워 레이커스를 이끌어갔다. 팬들은 반 엑셀이 제리 웨스트, 매직 존슨의 뒤를 잇는 레이커스의 에이스 가드로 성장해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 그를 가리켜 팬들은 "Nick the Quick" 이라는 멋진 애칭까지 붙여주었다. 반 엑셀과 레이커스의 미래는 황금빛으로 가득할 것만 같아 보였다.


굴러들어온 돌, 반 엑셀을 밀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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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후 레이커스는 조금씩 과거의 명성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한다. 1995-96 시즌 반 엑셀은 경기 중 판정에 거칠게 항의하다 심판을 떠밀게 되고, 출장 정지 징계를 받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다. 본인의 개인 성적은 다소 하락했으나 레이커스는 반 엑셀 데뷔 이 후 처음으로 50승 고지를 돌파하는 등 (53승) 성과를 거둔다. 그러나 홈코트 어드밴티지를 가지고 돌입한 플레이오프에서 1라운드 탈락이라는 기대 이하의 성적에 그친다.

1996-97 시즌을 앞둔 레이커스는 대대적인 전력 재편을 감행한다. 자유 계약 선수로 괴물 센터 샤킬 오닐을 영입했고, 그 전까지 팀의 주전 센터로 활약하던 블라데 디바치를 고졸 신인 코비 브라이언트와 트레이드 했다. 레이커스 팬들은 공격적인 팀의 행보에 열광했지만, 새로운 동료들을 바라보는 반 엑셀의 시선은 그리 편치만은 않아 보였다.
기존에 호흡을 함께 하던 에디 존스, 세드릭 세발로스의 경우 볼을 소유하는 시간이 적은 선수들이었기에 공에 대한 욕심이 많은 반 엑셀과 큰 무리 없이 조화를 이룰 수 있었으나 새로 가세한 오닐의 경우는 물론이고 풋내기로 밖에 보이지 않던 브라이언트마저 공에 대한 욕심이 강한 선수들이었다. 스스로를 레이커스 최고의 선수라 생각했던 반 엑셀로써는 '굴러들어온 돌'들이 좋게 보일리 만무했다.

상황을 악화시킨 것은 다름 아닌 팀의 감독으로 부임한 델 해리스였다. 주도권 싸움으로 묘한 팀원들의 분위기를 다독거리지는 못할 지언정, 선수단을 장악하는데 실패했고, 되레 특정 선수를 편애하는 모습까지 보이며 반 엑셀을 포함한 몇 몇 선수들의 불만을 샀다. 성격이 불같고 자존심이 강했던 반 엑셀과의 불화는 예정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리스와 반 엑셀 사이에 감정의 골은 깊어져만 갔고, 결국 1997-98 시즌을 마지막으로 반 엑셀은 LA를 떠나야했다. 덴버의 토니 배티와 당시 신인이었던 타이론 루에 대한 권리를 패키지로 하여 반 엑셀과의 2:1 트레이드가 성사된 것이다. 포스트 매직 존슨의 시대를 열어갈 것이라 기대를 받았던 반 엑셀의 퇴장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일어났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듬해인 1998-99 시즌이 시작되고 채 한달도 되지 않아 반 엑셀을 떠나게 만든 장본인, 해리스 코치가 경질된 것이다.


레이커스 왕조의 부활, "Nick the Quick" 은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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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2000 시즌, 레이커스는 오닐과 브라이언트를 앞세워 정상의 자리를 탈환했다. 하지만 반 엑셀은 더 이상 레이커스의 선수가 아니었다. 그는 덴버의 유니폼을 입고 플레이하고 있었다.

그가 처음 덴버에 합류했던 1998-99 시즌, 덴버는 14승을 기록하는데 그친 최약체 팀이었다. 밑바닥에서 출발한 반 엑셀은 안토니오 맥다이스, 라예프 라프렌츠 등과 함께 팀의 성적을 조금씩 끌어올렸다. 이 후 덴버는 35승, 40승을 차례로 기록하며 가파른 상승 곡선을 그렸다.
그러나 반 엑셀의 마음은 결코 즐겁지 않았다. 같은 기간 동안 자신의 팀이라 생각했던 레이커스가 2연속 우승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우승을 노릴 수 있는 팀으로의 이적을 원했고, 2001-02 시즌 도중 댈러스로 둥지를 옮겼다. 당시 댈러스는 덕 노비츠키, 스티브 내쉬, 마이클 핀리로 이어지는 삼각 편대가 이끌어가던 팀이었다. 내쉬의 존재로 인해 반 엑셀은 데뷔 이 후 처음으로 주전 가드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우승 하나만을 바라보며 자존심을 굽히고 식스맨으로 대활약했던 당시의 반 엑셀은 어딘지 처절함마저 느껴졌다.
그러나 댈러스는 크리스 웨버, 마이크 비비 등이 이끌던 새크라멘토에 의해 플레이오프 2라운드에서 시즌을 종료해야 했고 설상가상으로 친정팀인 레이커스는 3연속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쌓아올리며 반 엑셀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했다.
2002-03 시즌 역시 팀의 식스맨으로 최선을 다해보지만,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샌안토니오를 만나 또 한 번 우승의 꿈이 물거품으로 날아가버린다.

반 엑셀은 2003-04 시즌을 앞두고 골든스테이트와 댈러스의 5:4 트레이드에 패키지로 포함되어 골든스테이트로 둥지를 옮겨야 했다. 비록 약체팀이라고는 해도, 다시 한 번 주전 멤버로 발돋움 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으나 부상으로 인해 시즌을 거의 모두 날려버렸다. 단 39경기에 출장했던 것을 마지막으로 짧았던 골든스테이트에서의 시간은 끝이 나버렸다.

이 후 2004-05 시즌 포틀랜드를 거쳐 마지막으로 우승을 노리며 샌안토니오로 합류하지만
안타깝게도 2005-06 시즌은 샌안토니오의 안식년이었고, 결국 쓸쓸히 커리어를 마감해야만 했다.


"Van Excellent"?  "半 Excellent"...

레이커스가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낼 무렵, 단신의 몸으로 한 줄기 빛과 같은 활약을 보여주던 그는 곱상한 외모와 화려한 플레이로 LA의 새로운 스타가 될 가능성이 충분했다. 그런 그를 보며 팬들은 수많은 애칭을 붙여주었다. 반 엑셀은 가장 유명한 애칭인 "Nick the Quick" 못지 않은 멋진 애칭이 한 가지 더 있었다. 그것은 바로 "Van Excellent". 그의 이름을 재치있게 사용한 애칭이다. 하지만 결국 반 엑셀의 LA 생활은 Excellent 하지 못했다.

화려하게 데뷔를 하고, 암흑기에 빠진 팀에게 구원의 손길이 되어줬던 그였으나 결국 드높은 콧대와 말썽 유전자가 가득했던 성격으로 인해 레이커스와의 원치 않은 작별을 고해야했다.
만약 그가 보다 성숙한 마인드를 가진 선수였다면, 아니 볼에 대한 욕심만 조금 덜한 선수였다면 어땠을까? 뉴 밀레니엄 레이커스 왕조의 멤버로 우승에 큰 공헌을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결국 그는 스스로를 무너뜨리고 말았다. 데뷔를 앞두고 드래프트 캠프에서 스스로의 가치를 깎아내린 것처럼 말이다.

너무나 화려했던 커리어의 초창기에는 팀이 그를 받쳐주지 못했고, 훗날 팀이 그를 받쳐줄 만큼 성장했을 무렵에는 본인의 성숙하지 못한 태도가 앞을 가로막았다. 결국 반 엑셀은 "Van Excellent" 가 아닌 "半 Excellent" 에 그쳐야만 했다. 누구보다 뛰어난 선수였던 스스로를 끝내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의 주인공, 닉 반 엑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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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k Van Exel (1994-2006)

생애통산 880경기 출장(670선발)
평균 14.4득점, 2.9리바운드, 6.6어시스트, 32.9분 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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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COLUMNS/일반 뉴스 2009. 1. 11. 15:21

빅게임 리뷰: 보스턴@클리블랜드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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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가 1월 9일(이하 현지시각) 이번 시즌 최고 빅매치중 하나였던 보스턴과의 홈경기에서 완승을 거두며 동부 컨퍼런스 1위 자리를 굳게 지켰다. 보스턴을 1.5게임 뒤진 동부 3위로 밀어낸 클리블랜드는 홈경기 연승 횟수를 19로 늘렸다. 4쿼터 이전에 승부가 결정된 대승이 다수 포함되어있는 이 19경기중 최저 점수차는 지난 크리스마스 워싱턴전의 4점인데, 홈에서 최소 4점차 이상으로 19경기를 연속해서 이긴 것은 1966~67년 필리 이후로 처음이다.

이번 시즌 클리블랜드가 경기를 끝내면 보통은 선수들이 샤워를 마친 후 라커룸에 모여앉아 식사나 영화 약속 등을 잡으며 잡담을 나눴다. 하지만 7일 샬럿전과의 홈경기가 끝난 다음 클리블랜드 라커룸에는 마치 경기 시작 직전같은 긴장감이 감돌았다.선수들은 라커룸에 걸린 대형 평면TV를 통해 보스턴과 휴스턴의 경기 4쿼터를 시청하고 있었다. 굳은 표정으로 경기를 지켜보는 선수들 사이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간간이 보스턴의 경기력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는 말이 오가는 정도였다. 라커룸에서 긴장감이 없던 사람은 아버지 발치에서 글씨쓰기 연습을 하고 있던 르브론 주니어 뿐이었다. 클리블랜드 선수들은 이미 한 달 전부터 달력의 9일 부분에 동그라미를 치고 이 경기를 준비해왔다.

클리블랜드 선수들이 9일 경기에 이렇게 집중하고 있었던 것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먼저 동부 컨퍼런스에서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수 있는 팀들, 특히 1라운드 홈코트 어드벤티지를 받을 수 있는 팀들의 홈경기 승률이 굉장히 좋다. 8일까지 동부 1~5위팀들의 홈경기 성적은 클리블랜드 18-0, 보스턴 18-2, 올랜도 15-3, 애틀 15-3, 디트 12-5로, 이들의 홈경기 평균 승률은 무려 85%에 달했다. 서부 상위시드 팀들에 비해 크게 높은 수치다. 따라서 동부 플옵 컨텐더 팀들에게는 매 라운드 홈코트 어드벤티지가 굉장히 중요해졌다. 그중에서도 홈경기 승률, 평균점수차, 야투율, 야투허용율에서 리그 1위를 기록하며 홈에서 가장 강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클리블랜드가 파이널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홈코트 어드벤티지를 확보하는 게 필수적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특히 보스턴이나 올랜도같이 동부 1위 자리를 다투는 팀들과의 대결에서는 반드시 이겨서 승차를 벌려야 했다.

하지만 이런 객관적인 이유 외에도 클리블랜드 선수들은 내일 경기를 절대 지면 안되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이 클리블랜드 선수들에게 이 경기가 리벤지 매치이기 때문이었다.

리더인 르브론 제임스는 아직도 지난 플레이오프를 잊지 못한다. 정말 간발의 차이로 보스턴에게 아깝게 졌기 때문이다. 특히 7차전 막판에 피어스와의 쇼다운에서 밀린 것은 여름 내내 르브론에게 동기부여가 됐다. 게다가 시즌 개막전에서 보스턴의 우승 배너 게양식을 보면서도 또 진 것은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그러니까 르브론이 9일 경기에 대해 '겨우 한 경기일 뿐이라고 말한다면 거짓말이다. 보스턴에게 도전할 날을 기다려왔다'고 말한 것도 당연했다.

모리스 윌리암스 역시 개막전 패배를 설욕하려 벼르고 있었다. 보스턴과의 개막전은 윌리암스의 클리블랜드 정규시즌 데뷰전이었다. 그런데 아직 팀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한 상태에서 과욕을 부리다가 보스턴의 라존 론도에게 봉쇄당하며 경기를 망쳤다. 데뷰전을 망친 윌리암스는 "보스턴에서는 그들이 승리를 가져갔다. 이젠 우리가 갚을 차례"라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딜론테 웨스트가 가지는 감정은 좀더 특별했다. 2004년 보스턴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고 2년 전까지 보스턴 유니폼을 입고 있던 웨스트는 빅3중 한 명인 알렌이 영입되는 과정에서 팀을 떠났고, 시즌중 다시 트레이드되어 클리블랜드 유니폼을 입고 친정팀 보스턴과 플레이오프에서 맞붙었다. 하지만 3차전에서 위닝샷을 터뜨리기도 했지만 중요한 순간마다 옛 후배 론도에게 밀리며 친정팀의 우승을 지켜봐야 했다. 웨스트의 주머니 속에는 아직도 지난 플레이오프 기록지가 들어있다. 지갑을 꺼낼 때마다 빠져나오게 해놨다. 지난 플레이오프 2라운드는 올시즌 커리어 최고의 농구를 하고 있는 웨스트에게 동기부여를 하고 있었다.

이밖에도 클리블랜드 선수들은 저마다 보스턴을 이겨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팀 전체로 봐도 보스턴과의 대결은 중요했다. 왜냐하면 클리블랜드는 지난 시즌 이맘때에 비해 무려 8명이 바뀐 '새 팀'이기 때문이다. 이번 시즌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고는 있지만, 아직도 서로를 알아가고, 발전하고 있는 팀이다. 그런 팀이 자신의 현주소를 명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디펜딩 챔피언 이상의 시험 상대가 없었다. 만약 9일 경기를 이길 수 있다면, 클리블랜드 선수들은 지난 시즌 패배에 대한 압박감을 털어버리고 팀의 미래에 대해 지금보다 더 큰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이 클리블랜드 팀 스스로가 보스턴과의 경기에 동기부여를 하고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9일 경기는 매우 중요했다.

필자는 9일 경기가 시작하기 전 아래 다섯 가지 항목을 각각 20점 만점으로 산정, 총점 100점 기준으로 클리블랜드의 경기력을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평가 결과 클리블랜드가 9일 보여준 경기력은 그리 좋은 것이 아니었지만 몇 가지 외부 효과로 인해 만점짜리 결과를 냈음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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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 기선 제압

클리블랜드는 수비팀이다. 그리고 보스턴 역시 수비팀이다. 수비팀끼리의 대결에서는 어느 쪽이 먼저 리드를 잡느냐가 대단히 중요하다. 게임의 나머지 시간 동안 얼마나 효율적인 경기를 할 수 있느냐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클리블랜드 선수들이 지난 며칠간 말해왔듯이 클리블랜드는 이 게임을 '플레이오프 모드'로 치르기로 했고, 1쿼터에 그런 집중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보스턴 선수들도 연패에서 벗어나려는 의지를 보였지만 클리블랜드의 의지가 더 강했다.

경기 초반 12점중 10점을 페인트존 득점으로 연결시킨 클리블랜드는 계속해서 페인트존으로 볼을 보내며 보스턴 수비를 흔들었고, 보스턴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보스턴도 훌륭한 패스워크로 클리블랜드의 페인트존을 공략했지만, 클리블랜드 수비진이 패싱루트에 서서히 적응하면서 슈팅 지점이 점점 밖으로 밀려났다. 1쿼터 후반에는 르브론의 드라이브인 공격까지 터지면서, 클리블랜드는 1쿼터에만 72.2%의 야투율을 보이며 33-23으로 리드할 수 있었다.

이 리드는 클리블랜드 승리의 초석이 됐다.
수비팀끼리의 대결에서 초반 리드를 빼앗기 팀이 따라잡으려고 무리한 공격을 하다 보면 원래 가지고 있는 수비력을 발휘하기 힘들어진다. 클리블랜드는 1쿼터부터 두자릿수 리드를 잡았기 때문에 이후 경기에서 부담없이 수비력을 발휘하며 이를 바탕으로 손쉬운 게임 운영을 할 수 있었다. 보스턴의 쿼터별 득점은 23, 17, 20, 23점이었다. 매 쿼터 클리블랜드의 수비력이 기복없이 작용했다는 걸 알 수 있다. 클리블랜드가 경기 내내 우위를 보인 데 가장 큰 몫을 한 것은 1쿼터 10점차 리드의 '저금' 이었다.

다만 2쿼터 초반부터 페인트존을 공략하지 못하고 수비에선 리온 포우에게 밀리면서 추격을 허용했던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2쿼터 초반 6분만 잘 뛰었으면 전반 끝나기 전에 승부를 결정지을 수도 있었다.

점수: 15점


론도 봉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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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도가 보스턴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적지 않다. 론도는 뛰어난 돌파력으로 상대 수비진을 흔들 수 있고 보스턴에서 상대 가드에게 압박을 가할 수 있는 유일한 포인트가드다. 클리블랜드 역시 론도에게 당한 적이 많았다. 지난 플레이오프 5차전에서는 3쿼터 초반 론도가 웨스트를 압박하면서 클블의 볼무빙이 멎어 역전당했고, 이번 개막전에서도 윌리암스와 깁슨이 론도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역전패했다. 이번 시즌 론도는 백코트에서 자신의 비중을 크게 늘리며 게임의 승패를 좌우할 정도의 선수로 성장했다.

클리블랜드는 론도를 잡기 위해 준비를 많이 해왔다. 먼저 론도의 드라이빙 경로를 사전차단하고 론도가 픽 공격을 할 때 적극적인 헷지 수비로 템포를 늦췄다. 또한 윌리암스가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론도를 막다가 때때로 웨스트가 붙어 압박하고, 르브론이 항상 헬프를 준비하고 있었다. 공격시에는 론도에게 압박당하지 않기 위해 아예 르브론이 볼을 운반했고, 윌리암스는 론도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집중해서 볼을 다뤘다.

이 모든 시도가 거의 모두 들어맞았다. 론도 봉쇄에 실패한 것은 3쿼터 초반 딱 한 번 뿐이었다.

보스턴은 3쿼터가 시작하자마자 론도를 이용한 픽 공격을 계속해서 시도했다. 그런데 클리블랜드 가드진이 잠시 집중력이 떨어진 사이 이 픽들이 모두 성공하면서 픽어를 수비하던 바레장이나 빅벤이 론도를 막는 스위치 상황이 생겼고, 론도는 이를 이용해 계속해서 파울을 얻거나 적절한 패스를 넣었다. 3쿼터 한때 점수차가 3점차까지 좁혀젔던 건 론도를 놓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간대를 빼면 론도에 대한 클리블랜드의 수비는 아주 좋았다. 피어스가 르브론에게 막혀있었기 때문에 보스턴에서 유일하게 슬래셔 역할을 맡아야 했던 론도에게 크게 휘둘리지 않은 것이다. 비록 론도가 전반에만 7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좋은 패싱능력을 보였지만, 그것은 오히려 보스턴의 패싱 루트를 단순화시켜 클리블랜드가 갈수록 손쉬운 수비를 하도록 해줬다.

클리블랜드가 보스턴을 이길 때는 항상 론도가 잘 해줬다. 따라서 론도를 잡은 것은 오늘 승리에 큰 몫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보스턴으로써는 론도의 역할을 나눠 수행해줄 토니 알렌이 빠졌다는 게 뼈아팠다. 알렌이 15분 정도 나오면서 개막전과 같이 공수에서 론도를 도와줬더라면 2쿼터 양상은 다르게 흘러갔을 것이다.

점수: 15


피어스에게 연속슈팅 허용은 금물

오늘 클리블랜드가 폴 피어스를 얼마나 잘 막았는지는 따로 얘기할 것이므로, 여기서는 피어스가 경기 내내 연속슈팅을 몇 번이나 했는지만 살펴보겠다.

피어스는 오늘 15개의 야투를 시도했는데, 이중 두 번 이상의 포제션에서 연속해서 야투를 시도한 것은 딱 한번 있었다. 4쿼터 초반 피어스가 레이업을 실패한 후 다시 리바운드를 잡아 또다시 레이업에 실패한 때이다(그 직후 다시 볼을 따낸 포우가 앤드원을 성공시켰다). 다시말해 클리블랜드는 피어스에게 연속 야투를 전혀 허용하지 않은 것이다.

피어스는 전형적인 리듬슈터이다. 계속 슛을 던지며 자기 리듬을 찾고, 한번 리듬을 타면 계속해서 슛을 꽂아넣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계속 부진하다가도 승부처에서 연속득점으로 팀을 승리로 이끄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피어스가 계속해서 슛을 던지며 감을 잡게 만들면 안된다. 하다못해 자유투 2구도 연속으로 던지게 하면 안된다. 클리블랜드는 이 부분에서 완벽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자유투도 두 개밖에 허용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슛을 던지지 못하며 경기 내내 르브론의 밀착수비에 고생한 피어스는 끝끝내 리듬을 회복하지 못했고, 최근 어려운 가운데서도 득점력을 발휘하며 팀을 이끌어왔던 피어스가 부진에 빠지자 보스턴은 추격 기회를 잡지 못했다.

점수: 20


보스턴의 헐거워진 수비 스페이싱 공략

절반의 성공이다. 1쿼터는 더할 나위 없는 대성공, 나머지는 실패, 르브론은 더할 나위 없는 대성공, 나머지는 실패다.

클리블랜드는 1쿼터에 적극적으로 페인트존을 공략하며 손쉬운 공격을 했습니다. 선수들의 오프더볼 무브가 워낙 좋았고 르브론과 윌리암스가 적절한 패스를 넣어줬다. 하지만 2쿼터부터 클리블랜드의 슈팅이 점점 밖으로 밀려났다. 클리블랜드 슈터진들의 감이 너무 좋았던 걸까? 클리블랜드 선수들은 구멍이 뻔히 보이는 보스턴의 페인트존으로 볼을 보내기보다는 점프슛를 더 선호했고, 이것이 클리블랜드 공격의 효율성을 떨어뜨렸다.

오늘 르브론은 보스턴의 수비진을 무인지경으로 헤집었다. 동료들의 픽 도움을 받아가며 보스턴 수비를 완전히 농락했다. 지난 플레이오프에서 보스턴이 르브론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은 피어스가 르브론의 첫 스텝을 따라가주고 캔드릭 퍼킨스나 리온 포우가 미들레인지로 들어오는 르브론의 두번째 스텝을 지연시킨 후 마지막으로 케빈 가넷의 높이를 이용해 터프샷을 유도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 보스턴의 수비는 두번째 과정이 사라졌다. 피어스가 못막으면 바로 최종수비가 골밑에서 르브론을 막아야 하는 상황이 이어진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 르브론 수비에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거의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페인트존에 들어온 르브론은 원하는 방법으로 마무리를 했고, 가넷의 높이가 아무리 높다고 해도 페인트존에서 편하게 슛하는 르브론을 막기는 힘들었다. 4쿼터 들어 포우가 르브론의 두번째 스텝을 막아보려고 달려들어봤지만, 르브론과 어깨가 부딪치자 마치 샷건을 맞은 터미네이터처럼 주욱 밀려났다. 르브론의 몸은 지난 시즌에 비해 더욱 탄탄해졌다.

르브론을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의 인사이드 공략은 별로 인상적이지 못했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르브론이 드라이브인을 할 때 위크사이드에서 점프슛을 노렸다. 사실 르브론의 드라이브인을 막다 보면 반대 사이드는 텅 비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위크사이드 점퍼를 노리는 게 현명한 선택일 수도 있다. 하지만 보다 효율적인 공격을 위해서는 좀더 많은 컷인이 필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바레장의 페인트존 움직임은 역시 뛰어났다. 경기 초반 계속해서 컷인을 성공시킨 것을 비롯해 꾸준히 페인트존으로 쇄도하며 파울을 얻어냈다. 높은 확률을 보여준 픽앤팝은 이런 골밑 움직임에 따르는 보너스 같은 것이었다.

점수: 10


페인트존에서 힉슨의 역할

J.J. 힉슨은 포우에게 심하게 밀렸다. 몸싸움에서 밀렸을 뿐 아니라 포우를 막기 위한 위치선정에도 실패했다. 그래도 공격시 큰 실수를 저지르지 않고 무난히 임무를 수행한 것은 평가해줄 부분이다.

점수: 5

위와 같은 기준으로 총점을 내보면, 오늘 클리블랜드의 경기력은 65점짜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65점짜리 경기력을 보였음에도 100점 만점짜리 결과를 낸 것은 다음과 같은 보너스 점수가 더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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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tra Point #1: 르브론의 수비

르브론의 루키 시즌부터 르브론의 경기를 계속 지켜봐 왔지만, 9일 경기같은 수비력을 보인 경기는 처음이었다. 르브론은 피어스를 야투 4/15, 11점으로 완벽하게 틀어막았다.

르브론의 피어스 수비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9일 경기에서 피어스가 기록한 11점 중 4점은 르브론이 벤치에 앉아있던 4쿼터 초반 웨스트와 월리 저비악을 상대로 얻은 점수이. 그러니까 르브론이 피어스를 막은 35분여 동안 피어스는 7점을 넣은 것이다. 그런데 이 7점을 다시 살펴보면 1쿼터 속공 상황에서 이지 덩크, 2쿼터 인바운드 상황에서 오픈 3점, 3쿼터 더블팀 온 저비악의 파울로 얻은 팀파울 자유투 2점이다. 모두 르브론과 1:1로 대치하지 않은 상황에서 득점한 것이다.

다시 말해, 피어스는 르브론과의 1:1에서 단 한 점도 뽑아내지 못했다.

르브론이 9일 경기에서 보여준 대인수비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피어스보다 뛰어난 사이즈와 운동능력을 바탕으로 피어스의 볼 캐치 과정부터 끊임없이 압박했고, 페이크에 속지도 않고 몸에 밀리지도 않으며 거의 매 순간 피어스를 자신의 수비범위 안에 두었다. 피어스가 픽을 이용해서 르브론을 떨쳐내려 하면 르브론은 리그에서 픽을 가장 잘 걸어주는 가넷의 픽을 뚫고 어느새 따라붙었고, 피어스가 픽앤팝 패스를 빼주면 '감사히 먹겠습니다' 수준으로 스틸을 성공시켰다. 파울을 얻어내보려 해도 르브론의 체크가 워낙 완벽했기 때문에 전혀 통하지 않았다. 오늘 피어스는 르브론과 대치한 35분 동안 야투를 11개밖에 던지지 못하며 그중 2개만을 성공시켰고, 자유투는 두 개만 얻어낸 반면 턴오버는 5개나 저질렀다. 특히 4쿼터에는 5분동안 야투 한개 시도에 그치며 무득점으로 묶였다. 이 정도면 철저히 눌렸다고 할 수 있다.
피어스가 그동안 르브론을 막지는 못해도 공격에서는 자신의 할 일을 다 했고 개막전에서도 3쿼터 연속득점으로 르브론에게 판정승을 거뒀음을 생각하면 오늘 르브론의 대인수비력은 완벽했다고밖에는 할 수 없다.

르브론은 대인수비만 보여준 게 아니다. 팀 수비도 완벽하게 해냈다. 르브론은 경기 후 인터뷰에서 피어스에 대한 수비를 묻는 질문에 '좋은 결과가 있으면 한 명의 공헌에 포커스가 집중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오늘 보인 수비력은 팀 전체가 노력한 결과'라며 겸손함을 보였지만, 사실 그 팀 수비에서도 르브론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9일 경기에서 르브론이 보여준 헬프수비는 충격적이었다. 이번 시즌 들어 멋진 헬핑블락을 자주 보여주긴 했지만, 9일 경기에서는 마치 분신술을 쓰는 것 같았다. 피어스를 완벽히 제어하면서 나머지 네 명의 수비까지 도와주고, 터프 리바운드를 잡아내는가 하면 상대 속공을 저지시키고, 계속해서 몸을 던지며 허슬플레이를 하는 모습은 38득점보다 훨씬 놀라운 것이었다. 4스틸 3블락이라는 스탯만으로는 르브론이 오늘 보여준 수비력을 설명할 수가 없다. 르브론은 오늘 수비면에서도 게임을 완전히 지배했다.

무엇보다 오늘 르브론이 보인 '단호한 결의'는 지난 며칠간 보스턴전 노래를 부른 것이 그냥 빈말이 아니었음을 여실히 보여줬다.


Extra Point #2: 보스턴의 작전 미스

오늘 보스턴은 가넷의 픽을 바탕으로 론도와 알렌, 피어스가 주로 공격을 하는 공격 전술을 시도했다. 그런데 이 작전이 완전히 실패했다.

사실 오늘 클리블랜드가 안고 있던 가장 큰 폭탄은 빅맨진의 선수층이 얇다는 것이었다. 주전 센터인 지드루나스 일가우스카스가 빠지고 바레장이 선발로 올라오면서 클리블랜드의 백업 빅맨은 루키인 힉슨과 다넬 잭슨, 그리고 감기로 고생하고 있던 라이트 뿐이었다. 따라서 가넷에게 볼을 주고 포스트업 공격을 시켰으면 클리블랜드 빅맨진에게 심각한 부담을 줄 수 있었다. 힉슨이 오늘 전혀 활약하지 못했음을 감안하면, 바레장과 빅벤중 한 명만 파울트러블에 걸리게 했어도 훨씬 쉽게 경기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보스턴은 쉬운 길을 택하지 않고 리그에서 산왕 다음으로 완벽한 2:2 로테이션 수비를 자랑하는 클리블랜드를 상대로 2:2 공격을 시도했다. 클리블랜드로써는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Extra Point #3: 관중의 서포트

MBC-ESPN의 최연길 해설위원에 따르면 오하이오 지역의 클리블랜드 경기 시청률이 7.5%에 달한다고 한다. 놀라운 수치가 아닐 수 없다. 9일 클리블랜드 홈구장인 퀴큰 론즈 아레나에서는 이런 통계상 수치가 실제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클리블랜드 관중들이 보여준 응원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선수들만 '플레이오프 모드'였던 게 아니다. 매진 사례를 기록한 20,562명의 관중들 역시 '플레이오프 모드'였다. 경기 시작 직전 엄청난 함성으로 선수들에게 힘을 실어줬고, 타임아웃 때마다 기립박수를 보내며 분위기를 띄웠다. 클리블랜드 관중들이 이 정도로 열광적인 응원을 펼치는 것은 2년 전 동부 파이널 6차전 이래 처음이었다. 선수와 관중이 목표의식을 완벽하게 공유하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장관이었다.


클리블랜드는 사흘을 쉰 다음, 서부 원정 4연전을 비롯해 7경기중 6경기를 원정으로 치르는 강행군을 펼치게 된다. 클리블랜드는 9일 승리를 위해 스스로 동기부여를 하고 복수의 칼을 갈아왔고, 마침내 승리하면서 앞으로의 힘든 일정에 자신감을 가지고 임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큰 목표를 달성하고 나면 방심하기 쉬운 법, 팀이 침체기에 빠지거나 선수가 부상당하는 등의 악재는 이런 방심을 뒤따라오게 마련이다. 클리블랜드 선수들이 흥분을 가라앉히기에 사흘 휴식은 알맞은 기회다. 푹 쉬고, 다시 긴장감을 회복하고, 자신감만 가지고 남은 일정에 임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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