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측부터... 마이클 쿠퍼, 놈 닉슨, 커림 압둘자바, 밋치 컵첵, 폴 웨스테드, 자말 윌크스, 매직 존슨

런-앤-건 농구.

공격권만 넘어오면, 달리고 뛰고 점프해서 빠른 속도로 공격을 하고, 기회만 된다면 호쾌한 덩크까지 꽂아버리는 매력적인 농구 스타일입니다.

그러나... 역사를 돌아봐도 이 스타일로 우승까지 한 NBA 팀은 잘 찾아보기가 힘이 듭니다.

60년대에 첫 농구 왕조를 세웠던 보스턴 셀틱스

빌 러셀과 밥 쿠지를 중심으로 한 이 팀은 런-앤-건 팀은 아니었지만, 런-앤-건 농구를 곧잘 구사했던 팀이었습니다.

러셀이 이끈 셀틱스 골밑과 수비진은 몹시 두터웠고, 그래서 이 팀에는 속공기회도 많이 주어졌습니다. 전성기 때 경기당 8~9개의 블락샷을 했다고 전해지는 러셀은 블락샷을 할 때도 무작정 쳐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팀의 가드들 손에 공이 떨어질 수 있도록 쳐낼 곳을 정확하게 조준해서 블라킹을 하던 선수입니다. 이런 공은 영락없이 빠른 속공으로 이어졌고, 셀틱스는 아주 쉬운 득점들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러기 위해선 러셀 뿐 아니라 시대를 앞서갔던 포인트 가드, 밥 쿠지의 역할 또한 매우 컸습니다.

그러나 60년대의 셀틱스는 속공기회를 잘 살려 팀의 전력에 보탬이 되는 농구를 한 팀이지 정통 런-앤-건 농구팀은 아니었습니다. 1972년에 69승을 거두며 우승을 했던 체임벌린과 웨스트의 레이커스도 런-앤-건 농구를 자주 하던 팀입니다. 그러나 이 팀도 정통 런-앤-건 팀은 아니었습니다.

 
60년대 중반에 창립된 NBA의 라이벌, ABA 리그

ABA 리그는 대놓고 NBA와는 모든 면에서 구별되는 농구를 하겠다고 천명하며 시작된 리그였습니다.

리그 전체가 뛰고 덩크하는 농구를 구사한 흥미만점의 리그였으나, NBA 리그의 강한 텃세와 훼방공작 등으로 미국 프로 스포츠 계에 깊은 뿌리를 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방송 중계권도 NBA가 완전히 독점을 하는 바람에 ABA 경기는 지방 방송국을 통해서만 시청이 가능했습니다.

줄리어스 어빙이 이끈 뉴저지 넷츠를 포함해 이 때 우승한 ABA 팀들은 모두 런-앤-건 농구를 구사했던 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글의 취지가 ABA 리그가 아닌 정통 느림보(?) 농구만을 고집했던 NBA 리그 역사에서 런-앤-건 농구로 우승까지 한 팀이 어떻게 우승까지 가능했느냐는 것이기 때문에, ABA 리그 이야기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다시 NBA로 돌아오겠습니다.

보스턴 셀틱스 왕조가 천수를 다 누린 이후인 70년대는 골밑을 지배하는 자가 우승한다는 기본 취지 아래 센터들 중심의 농구가 펼쳐지며 수많은 명예의 전당급 센터들이 군웅할거하던 춘추전국 시대였습니다.

이러던 시기에 리그 역사에 큰 획을 그을 선수가 하나 등장했으니... 그의 이름이 바로 매직 존슨입니다.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부터 포지션을 가리지 않고 종횡무진 코트를 누비며 소속학교들을 우승으로 이끈 이 농구천재는 타고난 센스와 농구 아이큐, 뛰어난 승부근성과 강심장은 물론, 수비하기가 무척 힘들었던 엇박자의 드리블 기술, 206cm라는 신장에 떡 벌어진 어깨와 근력, 농구하기에 딱 좋은 긴 팔과 긴 다리, 그리고 큰 손까지 보유한 괴물이었습니다.

이런 엄청난 선수가 당시 리그 MVP였던 커림 압둘자바의 레이커스에 합류를 한 것입니다.

레이커스엔 이미 리딩과 득점력, 스피드가 모두 리그 정상급이었던 놈 닉슨이란 가드가 있었지만, 레이커스는 매직 존슨을 중심으로 팀 칼라를 아예 바꿔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닉슨을 좋아했던 폴 웨스테드 감독은 매직을 중심으로 팀 칼라를 완전히 바꾸는 것에 대해 약간 미온적인 자세를 취했습니다. 그러나 신인답지 않게 엄청난 활약을 보이며 레이커스를 우승시켜버린 매직 존슨 앞에서 큰 소리만 치고 있을 수만은 없는 입장이었죠.

이러한 묘한 팀 내 갈등은 1981-82 시즌이 시작되면서 표면화되기 시작했고, 닉슨과 매직은 시즌 중에 서로를 대놓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폴 웨스테드 감독이 사퇴를 했고, 어시스턴트였던 팻 라일리 감독이 지휘봉을 잡으면서 레이커스의 농구 스타일엔 일대 대변혁이 일어나게 됩니다.

팻 라일리 감독은 놈 닉슨과 매직 존슨이 경기 중에 서로의 포지션을 바꿔가며 뛰게 하는 "스위치 리딩 가드 시스템"을 도입합니다. 그리고 기회만 나면 속공으로 속전속결해버리는 "뛰는 농구"를 선수들에게 주문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팀 수비"와 "디펜스 리바운드"가 그 무엇보다 중요했기에, 압둘자바를 도와 골밑에서 궂은 일만 전문으로 해줄 수 있는 커트 램비스를 영입해 옵니다.

비록 불협화음과 함께 시작한 시즌이었으나, 이 런-앤-건 농구로 매직의 레이커스는 또 다시 리그 정상의 자리에 오르는 기염을 토합니다.

이런 80년대 초중반 레이커스의 쇼우타임 런-앤-건 농구의 위력이 잘 보여졌던 경기가 1984년 파이널 3차전입니다. 

참패를 한 후, 래리 버드가 "셀틱스 선수들이 모두 계집애들처럼 뛰었다" 며 굴욕으로 받아 들였던 경기이기도 하지요.

먼저 제가 편집한 짧은 동영상을 감상해 보십시오. 

어떠셨습니까?  정말 엄청난 공격력 아닙니까?

수비가 좋기로, 특히 상대팀의 속공을 잘 저지하기로 유명했던 당시의 보스턴 셀틱스가 속수무책으로 당해버린 레이커스의 런-앤-건 농구였습니다.

당시의 레이커스엔 작고 빠른 가드들이 없었습니다. 놈 닉슨은 이미 클리퍼스로 트레이드가 된 이후였습니다. 루키였던 바이런 스캇도 193cm에 윙스팬과 운동능력이 뛰어났던 선수였고, 매직 존슨은 206cm, 그리고 두 가드 포지션을 모두 소화할 수 있었던 만능 식스맨이자 에이스 스타퍼였던 마이클 쿠퍼가 198cm였습니다. 그런데도 이 팀은 틈만 보이면 속공으로 화력을 쏟아 부었습니다.

이 경기 하일라이트만 잘 관찰해서 보더라도 어떻게 해야 런-앤건 농구로 리그 정상에 올라설 수 있는 지를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첫째, 강력한 팀 수비는 필수입니다.

나이를 먹었으나 엄청난 내구력과 체력을 자랑하던 압둘자바가 페인트 존 수비를 장악했고, 팻 라일리 감독이 82년 시즌부터 자주 사용하기 시작했던 "함정 수비" (공을 가진 상대 수비수에게 기습적으로 두 세 선수가 붙으면서 패스할 루트를 차단하거나 상대선수의 턴오버를 유발시키는 수비)로 상대팀의 볼 무브먼트가 원활하게 돌지 못하도록 사전에 차단을 했습니다.

둘째, 제공권 장악입니다.

노장이었던 압둘자바, 그리고 체력이 왕성했던 블루칼라 워커, 커트 램비스, 파워 포워드의 힘과 사이즈를 지니고 있었던 제임스 워디, 센터를 봐도 괜찮았을 매직 존슨의 수비 리바운드 가세 등으로 당시의 레이커스는 어느 팀에게도 수비 리바운드에서 밀리는 법이 없었습니다 (단, 모제스 말론이 이끌던 식서스는 예외였습니다). 이런 수비 리바운드가 재빠른 아울렛 패스로 이어지면서 수많은 속공 기회가 자연스럽게 발생했던 것이죠.

셋째, 선수들의 사이즈와 상관없이 팀 전체적으로 뛰어난 기동력과 페이스업 기술이 중요합니다.

레이커스 선수들이 워낙에 커서 얼핏 보면 속공이 그리 빨라 보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사이즈가 크면서도 잘 달릴 수 있었던 레이커스 선수들이었기에 리바운드에서도 밀리지 않으며 런-앤-건 농구를 구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매직 존슨은 차치하고라도, 압둘자바, 워디, 쿠퍼, 램비스, 밥 맥카두 등이 모두 포지션 대비 월등한 사이즈를 갖고 있던 선수들이었지만, 속공 시에도 항상 최전방에 나가 활약을 하는 것이 보이실 겁니다. 이들은 웬만한 수비는 일대일 페이스업으로 따돌릴 수 있는 기술이 있었고, 또 코트를 계속 왕복으로 달릴 수 있는 체력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넷째, 하프코트 오펜스에도 능해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도 간단한 요건입니다. 경기 내내 달리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플레이오프같이 수비가 더 강해지는 시기엔 누구나 지공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되지요. 80년대 레이커스는 압둘자바와 제임스 워디, 자말 윌크스 등이 이끈 지공 또한 뛰어났던 팀입니다.

다섯째는...... 매직 존슨입니다.

이런 농구는 아무리 머리를 짜내고 연구해 봐도, 결국 매직 존슨 같은 특급 포인트 가드가 있어야만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매직 존슨은 본인이 리바운드를 잡고 코스트-투-코스트 공격으로 상대팀 수비진을 마음먹은대로 무너뜨릴 수 있었던 선수입니다. 르브론 제임스와 같은 하드웨어로 유연하고도 빠른 속도로 드리블을 치고 들어오는 이 거인을 상대팀 수비수들은 보고만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이즈가 되는 선수들이 막기엔 너무 빨랐고, 스피드가 되는 선수들이 막기엔 신장과 힘이 너무도 월등했습니다. 

이런 선수가 코트 정중앙을 가로질러 달려나가면, 나머지 레이커스 선수들은 마치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 대형처럼 코트 양 사이드로 넓게 퍼져서 V자 형태로 그 뒤를 따르는 형국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상대팀 수비진은 파울로 속공을 끊는 수 밖엔 별다른 방법이 없어집니다. 일단 매직 존슨의 파워넘치는 중앙 돌파를 막기도 버거울 뿐더러, 그나마 매직 존슨의 길목을 막는다 치면, 매직이 기동력 좋은 양 사이드의 다른 레이커스 선수들에게 완벽한 어시스트를 넣어주니까요.

혹, 이들의 속공을 노련한 수비로 막는다 하더라도, 매직 존슨 같은 패싱력이 좋은 선수들이 상대팀의 수비대형이 완전히 갖춰지기 전에 "얼리 오펜스"로 득점할 수 있도록 빼어난 어시스트 패스를 찔러 넣어주기 때문에... 일차적으로 막는다는 것도 실상은 별 효용이 없습니다.

결국, 매직 존슨 한 선수로부터 파생되는 엄청난 시너지 효과가 80년대 레이커스의 런-앤-건 농구가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였던 셈입니다.

이상, 위의 글에서 살펴본 바, 역사를 자세히 돌아봐도 런-앤-건 농구로 현 NBA에서 우승을 하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런-앤-건 농구로 우승까지 하며 십년 가까이 그 위세를 떨쳤던 레이커스에는 매직 존슨이라는 거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매직 존슨 하나 때문에 가능한 공격대형은 아니었습니다. 탄탄한 수비와 팀워크, 강력한 제공권 장악, 훌륭한 감독의 전술, 그리고 모든 팀원들이 갖추고 있었던 기동력과 페이스업 기술 등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잘 달리는 농구를 한 팀들은 그 당시에도 있었고 (어빙의 식서스, 거빈의 스퍼스, 잉글리쉬의 너겟츠), 또 현재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셋째 요건을 제외한 나머지 사항들을 골고루 갖추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우승까지는 힘들었던 것이죠.

매직 존슨같은 선수는 앞으로도 나오기 힘들 겁니다. 그러나 속공을 잘 이끌 수 있는 특급 포인트 가드를 보유한 팀이 위의 나머지 네 가지 사항도 잘 준수한다면, 런-앤-건 농구로 우승할 수 있는 팀이 NBA에 또 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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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
년 세계 농구 선수권은 냉전시대의 산물인 올림픽 보이코트로 인해 연이어 무산됐던 구소련과 미국의 농구 맞대결을 볼 수 있었던 장이어서 당시에 매우 큰 관심을 끌었던 대회였습니다.

 

미국에서도 그 당시에 막 떠오르던 스포츠 전문 케이블 방송인 TNT가 테드 터너 사장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대회 주요 경기들을 미국에 생중계 해줄 정도로 관심도가 매우 컸습니다.

이것이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었는데, 왜냐하면 그 당시만 해도 세계 농구 선수권은 유럽 국가들이나 열을 올린 대회였지, 올림픽에만 신경을 쓰던 농구 본고장인 미국에선 정작 별 관심을 두지 않던 대회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큰 관심 때문이었을까요? 미국은 남녀 농구 모두 결승전에서 숙적인 구소련을 꺾으며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습니다. 특히, 여자농구에선 '여자 마이클 조던'이란 별명을 달고 다녔던 셰릴 밀러 (前 인디애나 페이서스 가드 레지 밀러의 누나)의 대활약상을 빼놓을 수가 없는데, 여자농구 얘기까지 하면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일단 여기서 정리하겠습니다.

 

데이빗 로빈슨의 미국과 아비다스 사보니스의 구소련이 결승에서 맞붙으며 막을 내린 대회이긴 했으나, 사실 많은 농구 전문가들은 대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유고슬라비아를 최강의 전력으로 뽑았었습니다. 당시의 유고팀엔 80년 모스크바 올림픽 금메달의 주역들은 물론유럽 최고 수퍼스타였던 드라전 페트로비치, 청소년 대표팀에서 발탁된 약관 18세의 블라데 디바치 등이 신구의 조화를 이루며 막강한 라인업으로 포진해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구소련이나 미국팀보다도 더 화려한 팀구성이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준결승에서 격돌한 구소련 대 유고슬라비아 간의 혈투는 당시로선 단일 농구경기로서 최고의 시청률을 올렸고, 경기 수준 또한 매우 높았습니다. 또한, 이 경기는 국제농구 경기 사상 최고의 역전 드라마를 연출해내기도 했지요. 모든 역전 드라마가 그렇듯이, 이 경기에서도 비운의 주인공은 따로 있었습니다.

 

오늘, 이 경기의 백미였던 대역전의 순간을 잠시 회고해볼까 합니다.

 

이 경기는 당시의 유럽을 양분하고 있던 22세 동갑내기 수퍼스타, 페트로비치와 사보니스의 대결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양 국가를 대표하는 대들보들 답게, '전천후 폭격기' 페트로비치는 집중적인 수비를 받으면서도 29득점을 해 유고슬라비아 공격의 선봉장 역할을 톡톡히 해냈고, 故 레드 아워백 옹에 의해 '7피트 4인치의 빌 월튼'이라 불리우던 사보니스는 3점 슛 4개를 포함, 25득점, 10리바운드, 5어시스트, 6블락으로 구소련을 이끌었습니다.

 


영상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사보니스는 유고의 수비가 지역방어를 펼치면 외곽으로 나와 3점슛(4개 시도해 모두 성공)을 던졌고, 유고가 수비진영을 넓히면 안으로 들어와 훅 슛과 파워무브로 공격하는 다양성과 영리함을 보여줬습니다. 또한, 6개의 블락을 성공함과 동시에 수많은 유고 선수들의 슛 궤도를 바꾸는 에너지 넘치는 수비력까지 선보였습니다.

 

사보니스의 이러한 공수에 걸친 맹활약에 힘입어 유고의 내노라 하는 센터들은 모두 5반칙 퇴장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후반전의 중반부터는 '루키' 디바치가 사보니스를 막아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고의 전력은 탄탄했습니다.

 

후반전이 거의 끝나갈 무렵, 그러니까 40여 초를 남겨둔 상황에서 유고슬라비아의 백전노장 큐추라가 삼점 슛을 성공시켰을 때 유고는 9점 차까지 점수를 벌여놓을 수 있었습니다.

 

85 76.  남은 시간은 45승부는 거의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은 바로 이 때였습니다.

 

다음 포제션에서 구소련의 국보급 센터 사보니스가 백보드를 맞추며 장거리 삼점 슛을 성공시킨 것입니다.

 

85 79.

 

유고슬라비아가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드라전 페트로비치의 형, 알렉산더가 공을 드리블하며 나갔습니다. 이 때, 사보니스와 같은 리투아니아 출신인 코미츄스가 공을 스틸하며 재빨리 티코넨코에게 패스를 해주었고, 티코넨코는 조금의 지체함도 없이 곧바로 삼점을 던졌습니다. 이것도 깨끗하게 들어갑니다.

 

85 82. 점수차는 3점으로 좁혀졌습니다.

 

위태위태한 순간이었으나, 공격권은 아직도 유고슬라비아의 손에 있었습니다.

 

구소련은 계속해서 파울로 유고의 리듬을 끊으며 실책을 유도했습니다.

 

이제 남은 시간은 15초.... 공만 빼앗기지 않는다면 유고의 승리는 이대로 굳어질 전망이었습니다.

 

타이트한 압박수비를 펼치는 구소련의 수비 앞에 유고 선수들이 조금씩 당황을 하는 가운데, 아무도 막고 있지 않던 어린 센터, 블라데 디바치에게 공이 건네졌습니다.

 


블라데 디바치
... 18세의 청소년 대표 출신... 몸이 유연하고 볼핸들링과 패싱력이 좋아서, 유고슬라비아 농구협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고의 레전드 센터 출신 감독인 코시치 씨가 대표팀에 합류시킨 인물입니다.

 

국가대표 경험이 없어서였을까요? 아니면, 자신의 볼핸들링에 너무 자신감을 가졌기 때문일까요? 디바치는 이 숨막히는 판국에 이리저리 드리블을 쳤습니다. 이를 놓칠 구소련 수비가 아니죠. 소련 가드진 둘이 디바치에게 바싹 붙자마자, 디바치는 너무나도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맙니다. 잡았던 공을 다시 드리블하려 한 것입니다.

 

이 수준높은 경기에서, 이 숨막히는 클러치 상황에서, 디바치는 더블 드리블 바이얼레이션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구소련에게 기사회생의 기회가 왔습니다.

 

별명이 '시베리아 백여우'인 포인트가드 볼터스가 공을 몰고 들어갑니다. 그를 쫓아가던 드라전 페트로비치를 거대한 사보니스가 픽을 걸어주며 스크린을 섰고, 볼터스는 사보니스를 방패삼아 회심의 삼점을 던집니다.

 

동점이었습니다.

 

불과 40초 동안에... 상대팀의 두 개의 턴오버를 묶어 세 개의 삼점 슛으로 연결시키며 승부를 원점으로 돌린 구소련 팀이었습니다.

 

그렇게 전개가 된 세계 농구 선수권 사상 최대의 역전 드라마는 이제 승부를 연장전으로 끌고 갑니다.

 

이 마지막 40여 초의 숨막히는 순간을 동영상으로 감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사보니스의 3점포부터 시작합니다.

 

연장전이 시작되긴 했으나, 이미 전의를 상실한 유고슬라비아는 기가 있는대로 살아난 구소련의 적수가 될 수 없었습니다. 미국과의 결승전 티켓은 결국 구소련이 거머 쥐었습니다.

 

이 위대한 역전 드라마의 비운의 주인공, 블라데 디바치가 이 경기를 회고하며 인터뷰를 가진 적이 있는데... 인터뷰에서 디바치는 자신의 결정적인 실책 이후엔 정말로 아무 것도 눈에 보이지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후반전이 동점으로 종료되는 순간, 한 선배선수가 자신에게 다가와 "너 같은 XX는 죽어버려!" 하는 외침을 들은 후엔 그 자리에서 자살하고 싶은 충동까지 느꼈다고 합니다.

 

연장전 내내 울면서 뛰었다고 하죠. 2002년 월드컵 이탈리아 전에서 페널티킥을 실축한 후 경기 내내 울면서 뛰었다고 한 안정환 선수가 오버랩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안정환 선수와는 달리, 디바치에겐 설욕의 기회조차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40초 간에 걸쳐 벌어진 농구 선수권 사상 최고의 각본없는 역전 드라마는 그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비 온 뒤의 땅이 굳는다고 했던가요?  이 일을 계기로 디바치는 더 한층 성숙한 선수로 발전할 수 있었고, 결국 꿈에도 그리던 NBA 리그에 입성할 수 있게도 되지요. 88년 올림픽에선 또 다시 사보니스의 벽을 넘지 못하며 은메달에 머물렀지만, 90년 세계 선수권에선 토니 쿠코치, 페트로비치와 함께 그렇게도 바라던 정상의 자리에 조국을 올려놓는 주역이 됩니다. 많은 농구인들은 입을 모아 1990년 당시의 이 유고슬라비아 팀을 드림팀이 출현하기 전까지의 역대 최고 FIBA 국가대표팀이었다고 평합니다.

 

그러나 1986년의 한 여름날, 운명의 여신이 그에게 내린 너무도 가혹한 결정은 평생을 두고 그의 가슴 속에 천추의 한으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글의 내용이 너무 우울한 듯 해서 재미있는 영상으로 게시물을 끝맺겠습니다.

위에 언급한 숨막히는 40여 초 바로 직전에 나온 장면입니다.
심판의 판정에 항의하는 아비다스 사보니스의 모습이지요. 인상을 쓰며 주심에게 소리를 질러보지만, 주심이 노려보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손사레를 치며 방향을 바꿔 자기 갈 길(?)을 가는 능청스럽고 유머스러운 모습입니다. 당시에 TNT 중계를 맡았던 릭 베리와 빌 러셀로 하여금 박장대소를 터뜨리게 한 장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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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림 압둘자바와 매직 존슨.

아마도 마이클 조던과 스카티 피펜,  칼 말론과 존 스탁턴과 더불어 NBA 역대 최고의 궁합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자신의 나이와 상관없이 어느 팀에서건 자신이 리더가 되어서 팀을 이끌어야지만 직성이 풀렸던 매직 존슨. 그에게도 넘지 못 할 산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70년대 농구판을 휩쓸다시피 했던 수퍼스타, 카림 압둘자바였습니다.

코트 위에선 자신이 야전 사령관이 되어 휘저었어도, 경기 외적인 부분에선 조용하고 차가운 카리스마의 압둘자바 앞에서 숨을 죽였던 매직 존슨이었습니다.

얼음과 불이어서였을까요? 이 둘은 자연스레 서로 녹아들기 시작했습니다. 각자 타인의 아성을 침범하지 않은 채..

 
이 둘의 궁합은 매직의 첫 시즌, 첫 경기부터 그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매직의 프로 데뷔 경기인 샌디에고 클리퍼스 전에서부터 이 둘은 호흡이 척척 맞았던 것입니다.

매직은 어떻게 해야 압둘자바가 효과적으로 스카이 훅을 던질 수 있는 지 본능적으로 알았고, 그래서 그 큰 신장과 뛰어난 센스를 이용, 칼같이 정확한 엔트리 패스를 게임 내내 넣어 주었습니다.


경기는 2초를 남겨두고 동점, 레이커스의 마지막 공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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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인트 존 외곽에서 마크 랜스버거로부터 패스를 받은 압둘자바는 그대로 장거리 훅 슛을 터뜨립니다.

경기가 레이커스의 극적인 승리로 끝나면서 압둘자바에게 제일 먼저 달려와 안긴 선수는 역시 매직 존슨이었습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온갖 매스컴에서 떠들어 댔며 전 농구팬들이 관심을 갖고 지켜봤던 그의 프로 데뷔전이었습니다. 더구나 다른 선수도 아닌 그가 존경하던 압둘자바가 그의 프로 데뷔전을 승리로까지 이끌어준 것입니다.


80년, 82년 우승, 83년, 84년 2연속 파이널 진출, 85년 우승, 87년, 88년 백투백 우승, 89년 파이널 진출... 10년 동안 8번의 파이널 진출, 그리고 다섯 번의 우승, 이 둘이 10년 동안 함께 뛰며 이뤄낸 쾌거입니다.


이 둘이 함께 했던 시즌 중 하나인 1983-84 시즌에 있었던 하나의 에피소드를 소개할까 합니다.

이 시즌은 시즌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압둘자바가 윌트 체임벌린의 커리어 총득점을 깰 것으로 기대가 모아졌던 시즌이었습니다.

3~4년 전에 체임벌린이 압둘자바는 자신의 총득점 기록을 절대 깨지 못할 것이라며 못 박아둔 적이 있어서 더 귀추가 주목되던 시즌이었죠.

결국, 정규시즌 막바지인 1984년 4월 5일, 대 유타 재즈전에서 그 역사적인 순간의 기회가 왔습니다.

이 경기에서 압둘자바가 14점만 득점하면 체임벌린의 기록을 깨는 것이었습니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부터 매직 존슨은 반드시 자신의 어시스트로 압둘자바가 체임벌린의 기록을 깨게 할 것이라며 호언장담 했었습니다.

그러나 뚜껑을 열고 보니, 유타 재즈의 반격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일단, 7-4의 거인 블라킹 머쉰, 마크 이튼이 압둘자바가 자리를 아예 못 잡도록 수비를 탄탄히 했고, 퍼리미터에선 리키 그린, 대럴 그리피스, 애드리안 댄틀리를 앞세운 올스타 라인업의 기세가 너무도 등등했습니다.

매직 존슨은 끊임없이 압둘자바에게 공격기회를 만들어 줬고, 압둘자바는 그 패스를 꾸역꾸역 득점으로 연결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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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둘자바가 12점을 득점함으로써 체임벌린의 기록을 깨는데 단 두 점만 남겨놓은 상황, 매직 존슨이 공을 드리블치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이 대기록의 순간을 지켜볼 수 있게 된 유타의 홈관중들은 모두 기립해서 응원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참으로 기이한 현상이었습니다. 유타의 모든 홈관중들이 레이커스의 매직과 압둘자바를 응원하고 있었거든요.

매직은 침착하게 엔트리 패스를 압둘자바에게 투입했고, 압둘자바는 잠깐 불완전한 드리블을 하다 이내 몸의 균형을 잡으며 회심의 스카이 훅을 이튼의 긴 팔 너머로 던졌습니다.

골인~

31,421번째 득점.

호언장담했던 체임벌린의 예언이 38세의 압둘자바에 의해 보기좋게 무너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너무나도 역사적인 순간이었어서, 주심은 작전타임도 없었는데 경기를 중단시켜 줬습니다.

온 유타 홈관중들이 압둘자바에게 기립박수를 보내줬고, 그에게 제일 먼저 달려가 포옹을 해준 선수는 역시나 매직 존슨이었습니다.

경기는 15분 동안이나 중단됐고, 경기 중에 기자들이 계속해서 압둘자바를 인터뷰하는 진풍경이 벌어졌습니다. 장내 아나운서는 체육관이 떠나가도록 압둘자바의 위대함과 그가 세운 깨지기 힘든 기록들을 관중들에게 소개해 줬습니다.


이와 연관된 또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이 기록경신에 대한 공식 축하파티는 레이커스가 홈으로 돌아온 이틀 후에 레이커스 홈구장인 포럼 경기장에서 성대하게 치뤄졌는데, 이 자리에 윌트 체임벌린이 직접 나와 압둘자바를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훈훈한 장면을 연출했다는 것이죠.

사실 체임벌린은 레이커스의 대 유타전에 공식적으로 초청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본인의 피치 못 할 사정으로 인해 자신의 기록이 깨지는 순간을 직접 목격하지는 못 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경기장에 오지 않았다는 무성한 신문보도들이 이어지기도 했지만, 체임벌린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레이커스 홈구장에서 압둘자바와 뜨거운 포옹을 하며 그의 위대함을 칭송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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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직 존슨과 압둘자바 간의 보기 드문 찰떡 궁합, 그들이 만들어낸 깨지기 힘든 기록의 경신, 그리고 자신의 기록을 깬 선수를 뜨겁게 포옹해주며 진심으로 축하해준 체임벌린...

이들이 보여준 사나이들의 훈훈함과 뜨거운 우정이 추운 연말연시를 조금이나마 따뜻하게 해주었으면 합니다.


Merry Christmas
and a Happy New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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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A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한 개인상 타이틀과 그 주인공을 소개해 볼까 합니다.

바로 1987~88 시즌의 리바운드왕 쟁탈전입니다.

1978년 4월 9일, 정규시즌 마지막 날까지 계속됐던 "스카이워커" 데이빗 톰슨과 "아이스맨" 조지 거빈 간에 벌어진 득점왕 레이스 (톰슨은 73점을, 거빈은 63점을 득점했고, 거빈이 평균 27.22점을 마크하며 27.15점에 그친 톰슨을 따돌렸습니다)... 그리고 1994년 정규시즌 마지막 날에 "제독" 데이빗 로빈슨이 클리퍼스를 상대로 71득점을 하며 2년차 센세이션, 샤킬 오닐을 누르고 득점왕을 가져간 사실들은 익히 잘 알려져 있는 또 다른 치열했던 개인상 타이틀의 역사입니다.

저는 88년의 리바운드왕 타이틀이 위에 열거한 두 개의 득점왕 타이틀보다 "훨씬" 더 가치가 높았다고 봅니다.

이유는, 톰슨도, 거빈도, 오닐도, 로빈슨도... 모두 자신들의 소속팀에서 이 타이틀을 딸 수 있도록 전면적으로 협조를 해줬던 반면, (물론, 이것은 "밀어주기"가 아닙니다. 제가 정의하는 밀어주기란, 상대팀 또는 심판들까지도 어느 특정한 선수에게 관대함을 베풀며 개인상을 가져갈 수 있도록 암암리에 또는 대놓고 도와준 것을 의미하는데, 거빈의 경우에도, 또 로빈슨의 경우에도, 그런 "조작극"은 없었습니다. 있었다면 그것은 범죄죠. 단지 팀원들이 그들에게 득점할 기회를 끊임없이 제공해 줬다는 점이 평소와 달랐을 뿐입니다) 88년 리바운드왕의 경우엔 이런 협조나 도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리바운드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팀원들이 도와주거나 특수전략 등으로 도움을 줄 수는 없는 스탯이지 않습니까? 자기 스스로 처절한 몸싸움과 박스아웃을 통해 잡아내야만 하는 튄 공들에 대한 수치가 리바운드입니다. 멀리 튀어버리는 롱 리바운드가 자주 나오거나, 아무리 자리를 잘 확보해도 공이 림 안으로 들어가버리면 수포로 돌아가 버리는 게 리바운드기도 하죠. 그런 면에서, 마지막 날까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명승부가 펼쳐진 1988년의 리바운드왕 타이틀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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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던의 Bodyguard" 찰스 오클리와 "Mr. Windex"  마이클 케이지가 이 명승부의 주인공들입니다.

두 선수 모두 대학시절부터 리바운더로서 정평이 나있던 정통 블루칼라워커형 파워포워드 겸 센터였습니다 (옆의 GIF 파일은 86~87 시즌 중에 둘이서 몸싸움하다가 으르렁대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오클리는 이미 루키시즌부터 두자릿수에 가까운 리바운드를 하며 조던과 함께 불스의 핵심전력으로 자리를 잡았던 인물이고, 케이지는 첫 두 시즌을 벤치멤버로서 배운 후, 3년차 때에 평균 15.7점, 11.5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스타덤에 오른 클리퍼스의 기둥이었습니다.

오클리에 대해선 많이들 잘 아시겠지만, 케이지에 대해 잘 아시는 분들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마이클 케이지는 농구론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샌디애고 주립대학 출신입니다. 1학년 때 이미 13.7개의 리바운드를 잡아냈고, 3학년과 4학년 때도 평균 12.6개의 리바운드를 잡아냈던 케이지는, 80년대 초반에 발행된 웬만한 농구 전문잡지에서 빠지지 않고 다뤄지던 유망주였습니다. 농구명문 출신이 아니란 이유로 역대 최고의 드래프트라 불리우는 84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14번 픽까지 미끄러지기도 했지만, 그는 여전히 많은 NBA 팀들이 노리고 있던 내구력이 뛰어나고 힘이 좋은 떡대였습니다.

1983년엔 미국대표팀에 뽑혀 마이클 조던, 샘 퍼킨스, 크리스 멀린과 함께 조국에 미주 농구선수권 금메달을 선사하기도 했습니다. 84년 올림픽 팀에도 뽑힐 것으로 예상됐었으나, 주전과 후보를 명확히 하는 바비 나이트 감독의 선호도에 따라 막판에 바클리와 함께 탈락했습니다. 바비 나이트 감독은 베스트 12를 뽑는 감독이 아니라, 주전급 8~9명에 벤치워머급 3~4명을 뽑는 감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덕분에 제프 터너, 존 콘캑, 조 클라인 같은 허접한 선수들이 대신 나라를 대표했었지요.


케이지는 대학시절에 리바운드에 대한 장문의 칼럼들을 써서 전문 농구지에 올릴 정도로 필력 또한 뛰어났던 선수입니다. 케이지가 1982년도 The Sporting News 지에 쓴 칼럼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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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리바운드 하나에 제 인생을 걸려고 합니다. 이 세상엔 타고난 훌륭한 농구선수들이 넘쳐납니다. 그들과 경쟁하기엔 제게 없는 부분이 너무 많아요. 그러나, 리바운드는 특별한 재능을 필요로 하지 않지요. 리바운드에 있어 가장 중요한 덕목은 리바운드된 공을 잡겠다는 강렬한 의지와 포기할 줄 모르는 근성입니다. 피지컬한 부분들은 그냥 따라오는 거에요. 제가 프로에 가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바로 이 리바운드의 멘탈적인 부분에서 나태해지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세일 것입니다."

"리바운드가 오늘날의 저를 있게 했습니다. 그래서 프로에 가더라도 리바운드로 제 이름을 남기고 싶습니다. 이를테면, NBA 리바운드왕 타이틀을 따내는 것이랄까요? 그것이 제 희망사항입니다."


마이클 케이지의 그 희망사항이 현실화 된 것은 그로부터 6년 후인 1988년이었습니다.

이 1988년 시즌은 센터보다 파워포워드들이 리바운드들로서 이름을 떨치던 시기입니다. 리그 탑 5리바운더만 보더라도 올라주원을 제외한 나머지 네 명이 모두 포워드였습니다 - 벅 윌리암스, 칼 말론, 찰스 오클리, 그리고 마이클 케이지.

올스타 게임이 끝난 시즌 후반기부터 이 리바운드왕 타이틀에 대한 이야기들이 모락모락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시작은 오클리였습니다. 전년도 리바운드왕이었던 찰스 바클리를 항상 의식하고 있던 오클리는 공공연하게 현 리그의 최고 리바운더는 이제 본인임을 인터뷰들을 통해 피력했고, 또 실제로도 오클리는 시즌 대부분에 걸쳐 리바운드 수위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때에 소리소문없이 리바운드를 야금야금 잡아내며 오클리를 추격했던 선수가 바로 케이지입니다. 12월, 1월, 2월에 걸쳐 간혹 20개 이상씩의 리바운드를 잡아내던 그가 시즌이 종반으로 치닫던 3월부터 피치를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타고난 체력과 내구력도 한 몫을 했습니다. 이맘 때 쯤이면 많은 선수들이 누적된 피로와 잔부상 등의 여파로 지치게 마련인데, 케이지는 이 때부터 오히려 더 팔팔하게 살아났습니다.

15-14-13-16-23-16-21-19-21-23.

시즌의 한 경기 만을 남겨놓은 상태에서 케이지가 잡아낸 정규시즌 마지막 열 경기의 리바운드 스탯입니다. 시즌 대부분에 걸쳐 오클리에게 평균 1개 이상으로 뒤쳐져 있던 리바운드 수치였는데, 이제 코앞까지 쫓아 왔습니다. 당시의 CNN 스포츠 뉴스에서도 이 둘의 리바운드 스탯을 매일같이 보도하며 흥미롭게 지켜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선수는 오클리였습니다.

오클리도 뒤질세라 마지막 여섯 경기에서 21-14-17-17-35-21개의 리바운드를 잡아내며, 근소하게 리드를 지켰습니다. 사실, 오클리가 시즌 마지막 두 번째 경기였던 클리블랜드 전에서 35개의 리바운드를 잡아냈을 때 (오펜스 리바운드만 16개),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역시 오클리!" 하며 리바운드왕 타이틀이 그의 것으로 거의 굳혀졌다고 보았습니다.

1988년 4월 24일,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를 끝으로 오클리는 정확하게 13.00개의 평균 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시즌을 마쳤습니다.

이제 주사위는 케이지의 큼지막한 손 안에 쥐어져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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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경기는 시애틀 수퍼소닉스 전이었습니다. 케이지가 오클리를 따돌리려면 이 경기에서 28개의 리바운드를 잡아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케이지는 프로 커리어에서 그 정도의 리바운드를 잡아낸 적이 없었습니다. 감독도, 팀원들도, 그를 도울 수 있는 길은 없었습니다. 그나마 감독이 배려해 준 것이 48분 내내 출장시킨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마지막 경기를 앞둔 심정이 어땠었냐는 기자의 질문에, 케이지는 "두렵고 떨렸다"고 솔직하게 답한 적이 있습니다. 어쩌면 본인의 커리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리바운드왕 타이틀의 기회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케이지는, 코트 위에서 죽겠다란 각오로 뛰었습니다. 자신의 농구인생에 있어서 어쩌면 가장 중요할 수도 있었던 그 날의 소닉스 전에서 그는 자신의 모든 혼과 땀을 쏟아 부었습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경기장에 와 응원해주던 노모 한 분의 기도 만이 그의 유일한 위안이었습니다.

그리고 케이지는 해냈습니다...... 리바운드 30개. 그의 리바운드 평균이 13.03개가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한 경기로 인해 그에게는 "Mr. Windex"란 별명이 붙여졌습니다. 백보드를 깨끗이 정리하고 닦아 버린다는 뜻이죠.

불행히도 이 날의 경기는 TV 중계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리그 꼴찌이자 제일 인기가 없었던 클리퍼스 경기였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케이지의 인터뷰 내용을 빌어보면, 경기가 끝나는 순간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을 정도로 탈진이 됐다고 합니다. 본인의 그 날 컨디션으로만 보면 리바운드 한 10개 정도 잡을 수 있는 날이었답니다. 그다지 몸이 가볍지 않았었다는 얘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투혼으로 30개를 잡아내고 코트에 쓰러졌습니다.

6년 전에 그가 가졌던 소박한 희망사항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처음 농구공을 잡는 순간부터 2000년을 끝으로 16시즌이라는 NBA 커리어를 마치는 순간까지, 케이지는 항상 몸을 사리지 않고 코트에 혼을 쏟아부은 리바운더였습니다. 리바운더로서 이름을 남기겠다는 그의 꿈은 1988년의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리바운드왕 쟁취로 이루어질 수 있었고, 그의 성실함과 겸손함, 그리고 투혼과 열정은 후세에 많은 젊은이들에게 귀감이 되었습니다.

은퇴 후, 케이지는 자신의 아내와 함께 많은 불우한 청소년들의 복지를 위해 전력을 다 해 일해오고 있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못 하는 일을 일찌감치 잘 분별해내어 할 수 있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후회없는 인생을 사는 마이클 케이지.... 그가 진짜로 멋진 싸나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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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티 피펜, 그리고 토니 쿠코치.

마이클 조던과 함께 쓰리핏을 해낸 불스의 주역들입니다.

불스의 제리 크라우스 GM이 유럽시절의 쿠코치에 반해 그를 드래프트하는 순간부터 이들의 견원지간은 시작됐습니다.

일단, 쿠코치의 공격에서의 역할이나 포지션이 피펜과 겹쳤다는 점이 피펜의 자존심을 건드렸죠.

역할이 완전히 겹치는 것은 아니었지만, 쿠코치의 유럽 전성기 시절의 역할이 "Initiator"(공을 소유한 채로, 지공이든, 속공이든, 자신이 팀의 공격을 풀어나가는 위치 - 장신 포인트 가드로 보시면 되겠습니다)였고, 제리 크라우스 매니저가 쿠코치에게 반한 점도 바로 그 부분이었다는 점에서, 포인트 포워드 역할을 맡았던 피펜이 쿠코치의 불스입성을 반길 수 만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르셀로나 올림픽 예선리그에서 크로아티아를 만난 미국팀의 조던과 피펜은 쿠코치를 대놓고 혼을 내줍니다.

그러나 이에 질세라 두 팀이 결승전에서 다시 만났을 때, 쿠코치는 자신에게만 유독 가해지는 피펜과 조던의 압박수비를 뚫고 18점, 8리바운드, 9어시스트로 맹활약을 했지요. 

이 경기가 끝났을 때 조던이 쿠코치에게 다가가 했던 말이 있습니다, "Welcome to the NBA !" 


그러나 쿠코치의 루키시즌이 시작되기 직전에 조던이 은퇴를 발표하면서, 이들 둘을 묶어줄 구심점은 사라지고 맙니다.

불스의 리더가 된 피펜은 쓰리핏 우승팀에서 돌아온 다른 멤버들과 함께 커리어 최고의 시즌을 보내며 팀을 이끌었고, 쿠코치는 나름대로 새 리그에 적응을 하며 쏠쏠한 활약을 펼쳤습니다.

쿠코치는 특히 정규시즌 네 경기에서 클러치 결승골을 터뜨림으로써 '한 방'이 있는 강심장임을 리그 전체에 알렸으며, 그의 수비를 신용하지 못하던 필 잭슨 감독도 이 해결사 기질 부분만큼은 인정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작된 1994년 플레이오프.

숙적 뉴욕 닉스와의 시리즈가 시작됐습니다.

1차전... 2차전... 거듭된 뉴욕 원정경기에서 완패를 하고 온 불스는 3차전부터의 반격을 위해 배수진을 쳤습니다.

그러나 패트릭 유잉이 이끈 닉스는 막강했고, 불스는 앞서나가던 큰 점수차를 모두 까먹은 채, 자칫하다간 3차전마저 닉스에게 내줄 지도 모르는 절대절명의 순간까지 왔습니다.

3차전 남은 시간은 1.8초.  점수는 동점.  공격권은 불스에게 있었습니다.

필 잭슨 감독은 정규시즌 네 경기에서 팀을 패배로부터 구해냈던 쿠코치를 마지막 슈터로 지목했습니다. 피펜은 분노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농구화를 벗고, 자신은 경기에 안 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필 잭슨 감독은 물론, 불스 선수들 전원이,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이 피펜의 행동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런 것을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죠.

경기는 속개됐고, 쿠코치는 1.8초를 남기고 공을 어렵게 잡아 고난도의 페이더웨이 턴어라운드 점프슛을 꽂아 버립니다.

불스는 자칫 잘못하면 닉스의 스윕으로 끝났을 수도 있었던 시리즈의 흐름을 자기들 쪽으로 가져올 수 있었고, 결국 승부를 7차전까지 끌고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이 멋진 슛을 집어넣은 쿠코치는 관중석을 향해 주먹을 흔들며 보란 듯이 자신의 해결사 기질을 뽐냈습니다.

그러나...... 이 슛이 불발되고, 불스가 일찌감치 닉스 앞에 무릎을 꿇었다면... 피펜의 팀 내 입지는 과연 어찌 됐을까요? 생각만 해도 아찔한 부분입니다.

스카티 피펜은 4차전이 시작되기에 앞서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인정했고, 팀 전체에 사과도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그가 맹활약함으로써, 불스는 4차전, 6차전, 홈에서의 승리도 나꿔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작된 1994-95 시즌.

호레이스 그랜트를 올랜도 매직에게 보내고, 쿠코치가 선발 라인업의 파워포워드 포지션에서 시작한 시즌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파워포워드가 없었던 불스는 그동안 시스템 농구로 버텨오던 팀 전력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소위 "약빨"이 다 된 것입니다.

경기에서 자꾸 지기 시작하니, 팀원들 간의 불화도 심해졌고, 결국엔 팀 케미스트리가 붕괴되기 일보직전까지 오게 됐습니다.

팀 전체가 이토록 삐걱이던 차에, 팬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멋진 플레이 하나가 이 피펜과 쿠코치에 의해 만들어 졌습니다.

상대는 필라델피아 76ers였습니다.

자유투라인에서 리바운드를 잡은 쿠코치가 마치 이미 약속이라도 한 듯이, 그 자리에서 냅다 상대팀 림을 향해 빨래줄 같은 공을 패스해 줬고, 림으로 달려들어가던 피펜이 공을 잡음과 동시에 연속동작으로 림까지 올라가며 앨리우프 덩크를 꽂아버린 것입니다.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이었지만, 너무도 멋진 그림같은 플레이였습니다.


 
80년대  쇼타임 레이커스 시절, 매직 존슨이 하프라인 근처에서 마이클 쿠퍼에게 넣어주는 앨리우프 플레이를 쿠퍼의 이름을 따 "Coop-a-Loop"이라 불렀습니다.

이 플레이는 그 수준을 훌쩍 뛰어 넘었습니다.

쿠코치의 패스가 나간 지점이 하프라인이 아닌 자유투라인이었습니다.

그리고 피펜은 그 먼 거리에서 날아오는 빠른 공을 림으로 점프해 올라가는 동작에서 잡아 덩크로까지 연결시켰습니다.

평생 견원지간이었던 두 선수가 만들어낸 플레이였기에 더더욱 값져 보인 플레이였습니다.


2002년도에 나온 한 잡지에서 쿠코치는 자신의 불스 시절 피펜과의 관계를 이렇게 밝힌 적이 있습니다.

"스카티 피펜... 솔직히 처음엔 싫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가 얼마나 위대한 선수인지도 알 수 있었다. 내가 NBA 리그에 들어온 이후로 나에게 가장 큰 영향과 배움을 준 선수는, 페트로비치도, 조던도 아닌, 스카티 피펜이었다."

아무튼... 둘 다 멋진 사나이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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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 명문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요즘 성적이 신통치 못한 뉴욕 닉스. 현재 자산 규모만 608 Million 달러인 이 부자구단은 1946년에 BAA 리그의 한 팀으로서 설립되었습니다. 닉스는 1950년에 넷 클리프튼이란 흑인선수와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리그에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리그 역사상 첫 흑인선수를 영입했던 이 구단은 그 이전인 1947년에 와따루 미사까라는 일본선수를 영입한 적도 있습니다.

 

파이널에 8번 진출했고, 70년과 73년에 걸쳐 두 번의 우승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구단입니다. 레이커스, 재즈와 더불어 아직까지 한 시즌에 60패를 해보지 않은 세 팀 중 하나인 닉스는 긴 역사에도 불구하고 리그 MVP는 단 한 명 밖에 배출하질 못 했습니다. 하지만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닉스 출신의 선수들은 무려 12명이나 됩니다. 그리고 9명이 닉스 구단에 의해 영구결번이 되어 있습니다 - 월트 프래지어 (#10), 딕 바넷 (#12), 얼 먼로우 (#15), 딕 맥과이어 (#15, 감독), 윌리스 리드 (#19), 데이브 드부셔 (#22), 빌 브래들리 (#24), 패트릭 유잉 (#33), 레드 홀즈만 (#613, 감독, 613승을 거뒀다는 의미입니다). 이 중, 프래지어, 먼로우, 리드, 드부셔, 유잉 등 다섯 명과 제리 루카스는 역대 최고 50인에도 선정이 됐습니다.

 

 

 

1973년도 우승팀 사진입니다.

빌 브래들리 (24), 필 잭슨 (18), 데이브 드부셔 (22), 윌리스 리드 (19), 제리 루카스 (32) 등이 뒤에 서있고, 앞선에 헨리 비비 (17, 마이크 비비의 아버지), 윌트 프래지어 (10), 레드 홀즈만 감독,
얼 먼로우 (15) 등의 모습도 보입니다.

 

 

, 그러면 이제 제가 선정한 All-Time 뉴욕 닉스팀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스타팅 5

 

포인트 가드 - 월트 프래지어 (Walt Frazier, 193cm, 1967~1977)

  

Walt Frazier vs Wilt Chamberl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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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 1라운드 드래프트 5번 픽으로 뉴욕에 둥지를 튼 프래지어는 All-NBA 팀에 6, All-NBA Defensive 퍼스트 팀에 7회 선정된 뉴욕 닉스 구단 사상 최고의 포인트 가드였습니다. 총 어시스트 수에서 아직도 깨지지 않는 닉스 구단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프래지어는 역대 포인트 가드 랭킹에서도 5위 안에 이름을 올리는 선수입니다.

 

커리어 평균으로 18.9, 5.9리바운드, 6.1어시스트, 1.9스틸, 49.0% 야투율을 기록한 프래지어의 플레이 스타일은 한 마디로 빨랐습니다. 포인트 가드로선 큰 편에 속했지만, 수비 스타일이 마치 고양이처럼 민첩했던 선수입니다. 프래지어는 장거리 외곽슛을 보유하지는 못 했습니다. 하지만, 스피드를 이용한 돌파나 미드레인지 점프슛. 턴어라운드 점프슛 등이 매우 정확했습니다. 화려한 묘기가 없이도 인기가 높았던 매우 효율적인 농구를 구사한 명 가드였습니다. 특히, 롤스로이즈를 몰고 다니며 항상 패션을 이끄는 모자와 외투 착용으로도 유명했던 레전드입니다. 1970년과 1973, 두 번에 걸쳐 우승의 영광을 누렸으며, 70년 파이널 7차전에선 36점에 19어시스트로 맹활약 했습니다.

 

 

슈팅 가드 - 얼 먼로우 (Earl "The Pearl" Monroe, 191cm, 1972~1980)

  

Calvin Murphy vs Earl Monr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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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핀 무브와 헤지테이션 무브의 창시자, 얼 먼로우는 학창시절부터 필라델피아 시 길거리 농구의 신화로 알려져있던 인물입니다. 당시에 얻은 "블랙 지저스"라는 특이한 별명이 후에 덴젤 워싱턴 주연의 농구영화 'He Got Game'에서 레이 앨런의 영화 속 이름인 '지저스'로 인용되기도 했지요. 이 "흑인 구세주"의 농구인생은 화려했습니다.

 

1967년 볼티모어 불렛츠에 의해 전체 2번픽으로 드래프트된 먼로우는 같은 해 드래프트된 뉴욕 닉스의 월트 프래지어와 치열한 라이벌 관계를 유지했었습니다. 그래서 71~72 시즌 중간에 그를 닉스로 데려온 결정은 큰 모험이었습니다. 대학에서나 프로에서나 언제나 팀의 에이스였던 선수가 과연 자신의 평생 라이벌이었던 프래지어와 호흡을 맞출 수 있겠는가? 이를 긍정적으로 바라본 시각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는 한낱 기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매 경기 20개를 웃도는 야투시도를 해왔던 먼로우는 닉스에서 철저히 자신을 죽이며 팀의 일원으로 녹아들었습니다. 평균득점(커리어 평균 18.8)은 눈에 띄게 줄었지만, 대신 닉스는 리그 전체를 파죽지세로 몰아붙일 수 있는 막강한 전력을 갖출 수가 있었습니다. 체임벌린과 웨스트의 레이커스도, 압둘자바와 오스카 로벗슨의 벅스도, 하블리첵과 코웬스의 식서스도, 닉스의 프래지어-먼로우-윌리스 리드-데이브 드부셔 등이 안팎에서 터뜨리는 파상공세엔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73년도의 우승은 그의 이런 희생에 대한 보상이었습니다. 68년 신인왕이었던 먼로우는 69년엔 All-NBA 퍼스트 팀에도 이름을 올렸던 닉스 역사상 최고의 슈팅 가드입니다.

 

 

스몰 포워드 - 버나드 킹 (Bernard King, 200cm, 1982~1987)

 

Bernard King
Bernard King by Vedia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닉스 소속으로 뛴 시즌은 비록 4시즌 밖에 안 되지만, 80년대 초중반에 리그를 쥐고 호령했던 그의 강력한 카리스마와 무시무시한 역대 최고급의 공격력은 그를 닉스 올타임 팀의 선발진에 놓고도 남음이 있게 합니다. 버나드 킹, 그는 '불운과 의지'의 사나이였습니다. 루키시즌에 이미 24.2, 9.5리바운드를 기록하며 화려한 신고식을 한 킹은 프로 3년차 때 입은 심한 부상으로 선수생명에 위협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각고의 노력 끝에 다음 시즌에 화려하게 재기하며 'Comeback Player of the Year' 상의 주인공이 됩니다.

 

82년에 닉스로 트레이드된 후부터 그의 공격력은 거의 "언터쳐블" 수준으로 급상승합니다. 특히, 84년 올스타 게임 직후, 두 게임 연속으로 50득점을 한 후의 킹은, 당시 최고의 포워드라 불리웠던 래리 버드나 줄리어스 어빙 조차도 "현 리그의 진정한 MVP는 버나드 킹이다"라고 표현을 할 정도의 괴물이었습니다. 이름 그대로 '왕'이었죠. 현재 르브론 '킹' 제임스가 보여주는 리그 내 영향력이나 임팩트를 생각해보시면 얼추 비슷할 것 같습니다. 누구보다도 빠른 슛 타이밍을 자랑하던 그의 턴어라운드 점퍼는 압둘자바의 스카이 훅과 더불어 가장 막기 힘든 슛이었다는 평가도 받았습니다. 간발의 차이로 버드에게 84 MVP를 빼앗긴 킹은, 85년 시즌에도 평균득점 33점으로 승승장구 하고 있었으나, 시즌 55번째 게임에서 심각한 무릎부상을 당하고 맙니다. 28세의 나이로 최전성기에 들어가던 이 위대한 포워드의 전성기는 거기서 사실상 끝이 나고 맙니다. 수없이 많은 재활 끝에 1991년에 평균 28.4점을 기록하며 올스타와 All-NBA 팀에 뽑히는 재기에 성공하지만, 그의 나이는 이미 35세였습니다.

 

 

센터 - 패트릭 유잉 (Patrick Ewing, 213 cm, 1985~2000)

  

EWING /NEW YORK KNICKS - SAN ANTONIO SPURS 93-80

특별한 설명이 필요가 없는 선수죠. 국내에선 90년대 4대 센터 중 한 명이었다는 소리를 듣는 위대한 센터입니다. 대학 초년생 시절부터 이미 빌 러셀과 압둘자바의 대를 이을 재목이라는 평을 받았던 유잉은 대학 4년 동안 조지타운 대를 3번이나 파이널에 올려 놓은 전적도 있습니다. 유잉은 대학 최고의 센터란 소리를 들으며 뉴욕 시민들의 기대를 한 몸에 안고 프로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초창기는 그리 평탄치 않았습니다. 팀엔 이미 올스타에도 뽑힌 적이 있었던 센터, 빌 카트라이트가 버티고 있었고, 유잉은 자신만의 특별한 공격무기를 개발하지 못 했으며, 리바운드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 했습니다. 프로 5년차였던 1989~90 시즌에 맞춰서 턴어라운드 점퍼를 주무기로 장착했고, 또 이 때쯤 되서야 리바운드에도 눈을 떴지요. 이 때부터가 유잉의 전성기입니다. 문제는 같은 컨퍼런스의 마이클 조던과 불스도 그 때부터 전성기로 돌입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번번이 우승의 문턱에서 주저앉아야만 했던 유잉이었습니다. 94년 파이널에서도 6차전, 7차전 모두 간발의 차이로 승리를 내줬고, 이후에도 레지 밀러의 인디애나에게 무릎을 꿇는 등, 유잉은 실력에 비해 정말로 우승복이 없는 선수였습니다. 1986년 신인왕, 1990 All-NBA 퍼스트 팀을 포함 All-NBA 팀 총 10회 선정, 올스타 11회에 빛나는 유잉의 커리어 평균은 21.0, 9.8리바운드, 2.4블락샷입니다.

 

 

파워 포워드 / 센터 - 윌리스 리드 (Willis Reed, 206cm, 1964~1974)

  

Chamberlain vs Willis Reed
Chamberlain vs Willis Reed by Vedia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윌리스 리드는 뉴욕 닉스의 심장과 같은 선수입니다. 뉴욕의 올드팬들은 지금도 윌리스 리드를 닉스 구단 사상 최고의 선수로 꼽는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센터로서는 단신이었으나 탄탄한 몸과 근성, 배짱으로 체임벌린, 빌 러셀, 압둘자바, 데이브 코웬스, 웨스 언셀드와 같은 동시대 최고의 센터들과의 싸움에서 항상 우위를 점했던 빅맨입니다. 큰 경기에서 유독 강했고, 플레이오프에서 만난 레전드급 센터들과의 대결을 대부분 승리로 이끌었던 역전의 용사였습니다. 대퇴부와 허벅지 부상으로 출전이 불가능했던 70년 파이널의 7차전에서 절룩거리는 상태로 등장해 체임벌린과 점프볼을 했고, 닉스에게 경기의 첫 두 골을 선사하며 팀의 사기를 끌어올린 그를 가리켜 닉스팬들은 '수퍼맨'이라 불렀습니다.

 

65년 신인왕이기도 했던 리드는 70년과 73년 두 번의 우승 시즌에 모두 파이널 MVP를 탔으며, 70년엔 리그 MVP와 올스타게임 MVP로까지 선정되어 3관왕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습니다. 동시즌에 All-NBA Defensive 퍼스트 팀에도 이름을 올렸었지요. 리드는 커리어에 걸쳐 18.7, 12.9리바운드를 기록했는데, 블락샷이 기록이 되질 않았어서 그렇지 블라킹도 아주 잘했던 선수입니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기동력도 좋았고, 훅 슛이나 중거리 슛에도 능했습니다. 무엇보다 풋워크가 좋아서 현란한 포스트업 무브로 상대팀 센터들을 페인트존 안에서 농락할 수 있는 기술까지 보유하고 있었죠. 닉스 사상 최고의 선수인 리드를 유잉과 함께 올-타임 팀 선발진의 더블 포스트에 추대합니다.

 

 

 


벤치 멤버들

 

 

파워 포워드 - 데이브 드부셔 (Dave DeBusschere, 200cm, 1968~1974)

 

Dave Debusschere
Dave Debusschere by Vedia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서 커리어의 상반기를 보낸 드부셔는 폴 사일러스와 함께 NBA 최초의 블루칼라워커 형 파워 포워드였다고 칭할 만한 원조 터프가이 중 하나였습니다. 사실, 사일러스와 드부셔의 골밑 몸싸움 대결은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무시무시하고 처절했었어요.

 

디트로이트 시절에도 All-Defensive 팀 제도가 있었다면, 아마도 커리어 내내 All-Defensive 퍼스트팀에만 오르다가 은퇴했을 명 수비수였기도 하지요. 69년부터 74년까지 6년 연속으로 All-Defensive 퍼스트팀에 선정된 직후 은퇴를 했습니다. 그러나 16.1, 11.0리바운드라는 커리어 평균이 말해주듯이 드부셔는 득점력도 뛰어난 수비수였습니다. 그를 디트로이트에서 데려오는 순간, 닉스의 우승 퍼즐이 다 들어 맞았다는 평가를 받았지요. 리드-프래지어-드부셔로 이어지는 삼각편대가 완성됐던 것입니다. 신장은 작았으나 체임벌린을 가장 잘 막았던 선수인 드부셔는 올스타에도 8회나 선정이 됐습니다.

 

 

슈팅 가드 - 앨런 휴스턴 (Allan Houston, 198 cm, 1996~2005)

 

BASKETBALL: Allan HOUSTON

닉스 구단에서 9시즌을 뛰고 은퇴한 휴스턴은 레지 밀러와 더불어 명실공히 90년대 최고의 외곽슈터였습니다. 커리어 3점 성공률이 40%를 넘는 휴스턴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견고한 슈팅 폼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2000년과 2001, 2년 연속으로 올스타에도 선정된 훌륭한 슈팅 가드였습니다.

 

1999년엔 8번 시드의 닉스를, 대들보인 유잉 없이, 스프리웰, 래리 존슨과 함께 파이널로 견인한 바도 있지요. 닉스의 라이벌, 마이애미 히트를 1라운드 5차전에서 회심의 버저비터 중거리 슛으로 꺾고 주먹을 불끈 쥐었던 그의 모습을 기억하는 국내 팬들도 많으실 겁니다. 휴스턴의 커리어 평균은 17.3점이고 플레이오프 평균은 19.3점입니다.

 


콤보 가드
- 존 스탁스
(John Starks, 195cm, 1990~1998)


패트릭 유잉의 전성기와 함께 했던 열정의 가드, 존 스탁스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식품점 배달원을 하며 생활하다가 뒤늦게서야 오클라호마 주립대를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NBA에 드래프트되지도 못 했고, 25세가 되던 1990년에 뉴욕 닉스의 트라이 아웃에 참가해서 눈에 띄이게 됐습니다. 연습시합 중 유잉의 위로 인-유어-페이스 덩크를 시도하던 찰나에 유잉이 밀쳐내면서 무릎부상을 당하게 됩니다. 부상으로부터의 완쾌가 지연되면서 어영부영 닉스의 멤버가 된 그는 92~93 시즌부터 선발진으로 승격이 됩니다. 역시 '인생 한 방' 입니다.

 

숱한 명승부를 연출해내며, 닉스의 백코트를 이끈 스탁스는 94년엔 올스타에, 97년엔 올해의 식스맨에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3점이 매우 뛰어난 선수였으나, 94년 파이널 6차전 막판, 회심의 슛이 올라주원에게 블락을 당했고, 7차전에선 최악의 야투율을 보여서 보기에 안타까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스윙맨 - 빌 브래들리 (Bill Bradley, 196cm, 1967~1977)

  


by Jeffrey Guterman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브래들리는 명문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한 수재였습니다. 영국 옥스포드 대학으로부터 장학생 자격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후, 미국 대통령 선거에 후보로 출마까지 했던 인물입니다. 대학시절엔 3년 연속으로 All-America팀에 선정되고, 65년엔 대학 MVP로까지 선정됐습니다.

 

프로 전 커리어를 뉴욕 닉스에서만 보냈던 브래들리는 수비력과 패싱력이 뛰어난 스몰 포워드였습니다 (대학시절엔 가드였습니다). 특히, 속공 상황에서의 연결고리 역할을 누구보다 잘 수행했으며, 중장거리 뱅크샷이 주특기였던 선수입니다. 70년과 73년 우승시즌 때 팀에 없어서는 안 되었을 감초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파워 포워드 - 찰스 오클리 (Charles Oakley, 206cm, 1988~1998)

  


유잉이 카트라이트와 포지션이 겹쳐있는 비효율적인 라인업에 카트라이트 대신 진정한 블루칼라워커 리바운드로서 영입된 빅맨이었죠. 88년에 오클리가 팀에 합류하자마자 닉스의 성적은 전년도의 38승에서 52승으로 훌쩍 뛰었고, 유잉은 자유롭게 자신의 센터 역할에만 충실할 수가 있었습니다.

 

오클리는 꾸준히 두자릿수 리바운드를 잡아주며 유잉의 보디가드 역할을 해주었고, 자신만의 터프한 수비력도 꾸준히 향상시켜 나갔습니다. 94년엔 올스타와 All-Defensive 퍼스트팀에도 선정이 됐습니다. 내구성이 좋아서 웬만하면 부상을 당하는 일이 없던 오클리는 닉스의 90년대 중흥에 반드시 필요했던 선수였습니다.

 

 

포인트 가드 - 마크 잭슨 (Mark Jackson, 186cm, 1987~1992, 2000~2002)

  


마크 잭슨은 닉스 구단에서 총 6시즌 반을 뛰었던 선수로서, 유잉, 오클리와 함께 닉스를 플레이오프 컨텐더로 만들었던 정통 포인트 가드였습니다. 루키시즌에 이미 13.6, 10.6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올해의 신인왕'을 수상했는데, 이는 1라운드 18번픽으로 뽑힌 선수로선 역사에 남을 업적이었습니다.

 

자유투를 던지기 직전 림을 향해 팔을 뻗어보며 마치 거리를 재는 듯한 이상한 습관을 갖고 있기도 했지만, 그의 패싱력은 최고였습니다. 특히 뒤에서 따라오는 선수에게 정확하게 넣어주는 No-look 패스가 일품이었죠. 89년에 올스타에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파워 포워드 / 센터 - 제리 루카스 (Jerry Lucas, 203cm, 1971~1974)

  


by Jeffrey Guterman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1960년 로마 올림픽 금메달의 주역, 제리 루카스는 자신의 커리어 말년 세 시즌만 닉스와 함께 했습니다. 한 구단의 올-타임 팀에 넣기엔 활약한 시즌이 많지가 않았지만, 닉스가 리그를 장악했던 70년대 초반, 팀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는 상징성때문에 백업 빅맨으로 이 팀에 그의 이름을 올렸습니다.

 

시즌 평균 20득점, 20리바운드를 두 번이나 기록했던 신시내티 로열즈 시절이 선수로서의 최전성기였으나, 닉스 시절에도 윌리스 리드와 데이브 드부셔를 보좌하며 리그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프런트라인을 구축하는 데에 일조를 했습니다. 72년 시즌 초반에 리드가 부상으로 시즌을 마감하자, 팀의 주전 센터로서 평균 17, 13리바운드, 4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팀을 파이널로까지 이끌기도 했지요. 루카스는 초창기엔 훅 슛과 플로터 등이 주 공격루트였는데, 닉스 시절엔 중장거리 점프슛까지 장착을 했었습니다. 체임벌린, 러셀 등과 동시대를 뛰었으면서도 All-NBA 팀에 5, 올스타에 7회 선정됐으며, 1996년에 선정된 역대 50인에도 당당히 이름을 올린 레전드 빅맨입니다.

 

 

 

이 외에도 닉스를 거쳐간 수많은 스타 플레이어들이 있습니다. 초창기 선수로는 리치 게린, 해리 갤러틴, 리차드 맥과이어, 밥 맥카두, 마이클 레이 리차드슨, 빌 카트라이트 등이 있겠고, 최근 선수로는 래리 존슨, 라트렐 스프리웰, 스테판 마버리 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닉스에서 뛴 햇수가 너무 적었거나, 구단에 미친 임팩트 면에서 위에 올린 선수들에 비해 약간 밀린다고 판단되어서 제외시켰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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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COLUMNS/DOCTOR J 2009. 9. 22. 02:23

내가 80년대 최고의 파워포워드였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 매시즌 16~19점을 득점해주고, 야투성공률은 항상 56~58%를 유지하는 올스타급 선수
■ 매시즌 12~13리바운드를 잡아주고, 박스아웃과 페인트존 수비를 천직으로 알고 즐기는 블루칼라워커
■ 부상 당하는 법이 없이 매시즌 82게임을 소화하고, 게임당 38분 이상을 뛰는 왕체력
■ 체력과 기동력이 좋아서 골밑에서 몸싸움을 하다가도 속공 찬스만 나면 제일 먼저 달려나가는 빅맨
■ 농구 IQ가 뛰어나 전술이해가 몹시 빠르고, 쉴 새 없이 완벽한 스크린을 서주는 파워 포워드
■ 모든 선수들을 어우를 수 있는 리더쉽이 있으며 매사에 긍정적이고 이타적인 팀 주장
■ 감독의 말을 잘 듣고, 오프시즌에도 체력훈련과 몸 만들기에만 열중하는 롤 모델


어떻습니까? 이런 선수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 어느 누구라도 탐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선수가 실제로 존재했습니다.

지금부터 소개할 '80년대 최고의 파워 포워드'로 불리우는 벅 윌리암스(Buck Williams)가 바로 그런 선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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벅 윌리암스의 본명은 'Charles Lynwood Williams'입니다. 1960년, 자동차 수리공의 아들로 태어난 윌리암스는 어릴 때부터 골격과 체력이 또래 아이들에 비해 남달랐다고 합니다. 고등학교 시절엔 육상, 미식축구, 농구를 겸했고, 이 세 종목 모두에서 출중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매릴랜드 대학에 진학한 후에도 윌리암스는 미식축구와 농구를 병행했고, 취미삼아서 뛰곤 했던 육상 중장거리 달리기 부문에선 대학 최고기록을 수립하기도 했던 준족이자 왕체력의 천부적인 운동선수였습니다. 워낙 잘 뛰어다녀서 붙은 숫사슴이란 뜻의 별명 'Buck'가 아예 이름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우상이었던 커림 압둘자바를 좇아 그는 농구선수의 길을 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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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이 6-8, 203cm에 체중도 100kg이 채 되질 못 했지만, 대학 3년 내내 그 터프하다는 ACC 지구에서 주전 센터를 보며 랄프 샘슨과 같은 큰 선수들을 상대했고, 이들과의 대결에서 조금도 밀린 적이 없었던 터프가이입니다. 매 시즌 ACC 지구의 리바운드 1위를 차지하기도 했고요.

그의 타고난 보드 장악력과 탄력, 터프함, 그리고 성실성이 눈에 띄어, 그는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대표팀에 뽑히게 됩니다. 아이재야 토마스와 함께 대표팀의 공동주장을 맡았던 그는 NBA 팀들이나 구소련, 동구권 팀들과의 친선경기에서 주전 센터로서 활기찬 모습을 보여주며 많은 프로 스카우터들의 눈길을 끌 수 있었습니다.

매릴랜드 대학 3학년을 마치고 NBA 드래프트에 뛰어든 그는 전체 지명 3번으로 뉴저지 넷츠에 입단을 했고, 자신의 커리어에서 처음으로 포워드 포지션을 맡게 됩니다. 워낙에 자기보다 키 크고 덩치좋은 센터들과만 대결해 온 그로선 프로 적응이 상당히 쉬웠습니다. 이젠 자신과 비슷한 체격의 선수들만 상대하면 됐으니까요.

프로 첫 시즌부터 마치 몇 년 뛰어온 베테랑같은 원숙한 모습을 보이며 윌리암스는 페인트존을 장악하기 시작합니다. 급기야 게임당 12.3개의 리바운드, 평균 15.5점에 야투율까지 58.2%를 기록하며 아이재야 토마스를 밀어내고 '올해의 신인왕'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죠.  

데뷔하자마자 어린 나이에 소속팀의 리더가 된 그는 동부 올스타에도 선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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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당시 모든 구단의 감독, GM들이 군침을 흘리던 선수였어요. 맨 위에 묘사해 놓은 것처럼, 이런 선수는, 농구 밖에 모르며 혼을 불태우는 선수들이 많았던 옛날에도 찾기 힘들었습니다.

그렇게 터프한 농구를 하는데도 부상이 없고 체력도 남아 도는 선수, 골밑에서 상대팀 센터와 격렬한 몸싸움을 벌이다가도 속공 찬스만 나면 번개처럼 달려나가 호쾌한 덩크로 속공 피니쉬를 해주는 빅맨, 라커룸의 리더이자 연습시간이나 오프시즌에도 타선수에게 본이 되는 자세만 보여주던 롤 모델, 이런 선수를 어떻게 탐내지 않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윌리암스에겐 그 흔한 '서포모어 징크스'도 없었습니다. 루키 시즌에 이미 모리스 루카스와 함께 리그 최고의 파워 포워드 반열에 오른 그였지만, 프로 2년차엔 모든 부문에서 더 향상된 모습(17.0점, 12.5리바운드, 1.3블락샷, 58.8% 야투율)을 보이며 All-NBA 세컨드 팀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이게 특기할 만한 사항인데... 80년대 초반엔 정말로 훌륭한 포워드들이 많았어서 All-NBA 팀에 선정되기가 하늘에 별 따기였다는 점이지요. 퍼스트 팀 포워드는 항상 래리 버드와 줄리어스 어빙의 차지였기 때문에 어느 포워드라도 All-NBA 세컨드 팀에 뽑힌다는 것은 정말로 대단한 영광이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런 자리에 프로 2년차의 블루칼라워커 리바운더가 들어간 겁니다. 그러니 그의 2년 연속 올스타 선정도 당연한 결과였던 것이죠.
 

윌리암스가 이끈 뉴저지 넷츠는 84년에 디펜딩 챔피언인 필라델피아 식서스를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업셋시키는 이변을 연출합니다. 윌리암스는 이 시리즈에서 식서스의 센터, 모제스 말론과 매치업이 되기도 했지만, 시리즈 평균 18.6점, 15.5리바운드를 기록하며 팀 승리의 1등 공신이 되지요.

85년에도, 86년에도, 87년에도, 88년에도, 그의 스탯에는 도무지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 때 그의 별명이 영국 런던의 명물 대형 시계탑 '빅 벤'인 적도 있습니다. 평균스탯이 별 오차가 없이 항상 한결같다는 뜻이었습니다. 부상으로 결장하는 법이 없이 매경기 38~40분을 뛰어주며, 야투율은 55~59% 사이, 득점은 16~18점, 리바운드는 첫 7시즌동안 게임당 12개 (4개 이상의 오펜스 리바운드 포함)는 꼭 잡아주던 선수였으니까요. 

점프력은 37인치(93센치)에 불과했지만, 호쾌한 덩크를 아주 자주 터뜨려 줬습니다. 코트에서 그가 뛰어다니던 모습을 보면 한 마리의 야수와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별명이 "Wild Cat"이었죠.

파워 포워드란 포지션이 골밑에서 센터를 도우며 몸싸움만 해주는 단순한 역할만을 부여받던 시절, 온갖 궂은 일은 물론, 팀의 득점까지 담당하며 코트 전역에 걸쳐 다이내믹한 플레이를 펼쳐보이던 그의 등장은 모두에게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1989년에 칼 말론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벅 윌리암스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파워 포워드이며, 동시에 코트에선 만나지 않았으면 하는 선수다. 그가 다른 컨퍼런스에 있어서 다행이다."

벅 윌리암스는 수비력도 훌륭했습니다. 커리어에 걸쳐 올디펜시브 퍼스트팀에 두 번, 세컨드팀에 두 번, 도합 네 번 밖엔 뽑히지 못 했지만, 간발의 차로 세컨드팀을 놓친 게 또 네 번이나 됩니다. 항상 팀을 먼저 생각했고, 라커룸의 리더였으며, 코트 위의 온갖 궂은 일은 도맡아 하는 살림꾼이기도 했지요.

그러나... 무슨 마가 끼었는지 그의 팀, 뉴저지 넷츠는 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정말로 재능이 넘쳐났던 올스타 장신 포인트 가드, 마이클 레이 리차드슨이 1986년 시즌 중에 약물복용 문제로 리그에서 쫓겨난 후부터 3시즌 내리 드래프트하는 선수마다 실패였고, 트레이드해오는 선수마다 부상으로 앓아 누웠습니다. 오로지 한 선수, 벅 윌리암스만이 자신의 역할을 소처럼 묵묵히 해주고 있을 때였습니다.

성실하고 조용한 수퍼스타, 벅 윌리암스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던 팀의 감독이자 GM, 윌리스 리드(전 뉴욕 닉스의 스타 센터 출신입니다)가 오.로.지. 윌리암스를 제대로 된 팀에서 뛰어보게 해주려고 트레이드를 감행합니다. 팀은 어차피 3시즌 내내 플레이오프에도 못 오르는 팀으로 추락해버린 상태였고, 윌리암스도 나이가 30세가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 윌리암스를 항상 존경하고 좋아해왔던 포틀랜드의 클라이드 드렉슬러가 팀 프런트를 향해, 벅 윌리암스만 영입해주면 팀을 파이널에 올려놓을 자신이 있다며 강력하게 트레이드를 제안했습니다. 결국, 윌리스 리드와 드렉슬러의 도움(?)으로, 벅 윌리암스는 1989년에 '부상병동' 샘 보위와 트레이드가 되며 젊은 포틀랜드 팀으로 이적을 하게 됩니다.

당시에 이 조용한 트레이드를 눈여겨 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벅 윌리암스가 입단하면서 포틀랜드의 농구가 갑자기 강력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워낙에 젊고 운동능력이 뛰어난 선수들만 우글대던 팀이라 벅 윌리암스처럼 경험이 많은 터프가이가 골밑을 완전히 책임져 주자 그 시너지 효과가 엄청나게 불어났던 것입니다. 릭 애들먼 감독이 윌리암스를 '본드'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다 따로따로 놀던 블레이저스의 어린 선수들을 하나로 묶어준 접착제같은 역할을 했기 때문이죠. 드렉슬러는 윌리암스를 '슈가'라고 불렀습니다. 아이스 커피를 마실 때에 마지막에 넣는 액체설탕처럼 팀 전체에 녹아들어 팀의 경기력 전체를 살려주는 선수란 뜻이었습니다.

Buck Williams 89
Buck Williams 89 by Vedia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포틀랜드에 영입이 되자마자 벅 윌리암스는 세 시즌 연속으로 All-NBA Defensive 팀에 선정이 됩니다. 칼 말론, 숀 캠프, 탐 체임버스, 로이 타플리, 오티스 소프, 데이빗 로빈슨, 하킴 올라주원과 같은 득점력 좋은 서부의 올스타 빅맨들을 상대로 그는 맹활약을 합니다. 그리고 2년 연속으로 야투 성공률 1위의 자리에도 오르게 되지요. 

팀의 성적도 그에 비례했습니다. 1990년에 59승의 성적으로 파이널 진출, 1991년엔 리그 최고의 승률인 63승과 함께 서부 결승 진출, 92년에도 파이널 진출... 비록 팀을 우승으로 이끌지는 못 했지만, 그가 합류하기 전까진 네 시즌 연속으로 1라운드에서 탈락하던 팀이 포틀랜드였음을 감안해 보면 그의 팀 합류가 가져온 위력이 얼마나 컸는 지를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게 되지요.

대신, 포틀랜드에 합류하면서 벅 윌리암스는 스스로 롤플레이어가 됐습니다. 팀에 뛰어난 득점원이 많았고, 모두들 열심히 해보자는 의지 또한 강했기 때문에 윌리암스는 철저히 자신을 죽이며 골밑 수비와 리바운드에만 신경을 씁니다. 그래서 90년대의 그가 별다른 재능이 없이 골밑에서 몸싸움만 해대는 '노가다' 선수의 이미지로 굳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89년과 90년에 나온 대부분의 권위있는 농구잡지들 - 이를테면 Basketball Digest, ESPN Pro Basketball, Street & Smith's Pro Basketball, The Sporting News 등등 - 에선 80년대 최고의 파워 포워드로 윌리암스를 선정하는 데에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80년대는 찰스 바클리, 칼 말론, 케빈 맥헤일이란 역대급 파워 포워드들 3인이 쏟아져 나온 시기이기도 했으나 (물론, 윌리암스도 동포지션 역대 10위 안에 드는 선수입니다만) 이들의 전성기의 시작은 80년대 중반이나 후반이었죠. 윌리암스의 경우는 81년 데뷔시즌을 시작으로 10년 이상 꾸준히 그 전성기 기량이 유지된 케이스이기 때문에 80년대만 놓고 봤을 때는 윌리암스가 최고였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그리고 어느 특정한 시기를 떠나 윌리암스의 플레이 스타일이란 것이 어느 팀에 가든 완전히 녹아들 수 있었고, 이 선수의 내구성이나 이타적인 자세, 성실함, 운동능력 등이 많은 선수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자산이었음을 볼 때, 이러한 부분들만 놓고 봐도 참으로 '완소'의 대표적인 선수가 아니었겠나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윌리암스는 커리어 통산 오펜스 리바운드가 4,526개로 모제스 말론과 로버트 패리쉬 다음인 역대 3위에 랭크되어 있습니다. 4위가 데니스 로드맨이고 5위가 찰스 바클리입니다. 그의 진정한 선수로서의 가치는, 수비 시엔 상대팀 빅맨들에게 절대로 자리를 내주지 않는 포기할 줄 모르는 박스아웃 근성, 그리고 공격 시엔 끊임없이 도전하는 공격 리바운드에 대한 불굴의 투지에 있었습니다.

정신력, 체력, 내구력, 이 세 가지가 하나가 되어 어우러지면서 그를 위대한 블루칼라워커형 파워 포워드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17년 동안 1,300 여 게임에 출전한 벅 윌리암스는 13점, 10리바운드, 그리고 55%의 야투율을 커리어 평균으로 기록했습니다.

90년대 초반, 원조 드림팀이 결성됐을 때, 그 팀의 사령관이었던 척 데일리 감독이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비록 이 드림팀에 뽑히지는 못 했지만, 이 팀에 어울리고, 또 이런 영광스러운 자리에 들어오는 것이 그야말로 마땅한 선수를 하나만 더 뽑으라면, 저는 주저없이 벅 윌리암스를 뽑겠습니다." 자신의 선수인 아이재야 토마스가 팀에 선정되지 못 했는데도, 척 데일리 감독은 이러한 말을 남겼습니다. 벅 윌리암스는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타선수들 사이에서도 덕망이 높았던 윌리암스는 90년대 현역시절에 NBA 선수협회 노조위원장으로서 활약하며 선수들과 협회 사이에 생겨날 수 있는 갈등을 최소화시키는 역할도 참 잘 해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1990년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 피닉스 선즈와의 6차전 원정경기에서 마지막 결정적인 스틸과 리바운드를 잡아내며 팀을 파이널에 올린 그가 공을 체육관 천정을 향해 높이 던져 올리는 순간, 모든 블레이저스 선수들이 그를 코트 바닥 위에 눕히고 덮치며 기뻐하던 모습이 불현듯 떠오릅니다. 파이널 진출이 확정되고, 라커룸에서 샴페인을 터뜨리며 자축하는 블레이저스 선수들에게로 중계 캐스터가 인터뷰를 위해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드렉슬러에게 질문했습니다.

캐스터: "현재 기분이 어떠십니까?"

드렉슬러: "벅 윌리암스!"

캐스터: "예. 올 시즌, 벅 윌리암스 선수의 활약이 정말 컸습니다. 그렇죠?"

드렉슬러: "벅 윌리암스!"

캐스터: "파이널 전망을 어떻게 보시는 지...?"

드렉슬러: "벅 윌리암스! 포틀랜드, 예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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벅 윌리암스의 수상경력

ACC Rookie of the Year: 1979
ACC All-ACC (2nd team): 1980, 1981
USA Olympic Team: 1980

NBA All-Star: 1982, 1983, 1986
NBA All-NBA (2nd team): 1983
NBA Rookie of the Year: 1982
NBA All-Rookie (1st team): 1982
NBA All-Defense (1st team): 1990, 1991
NBA All-Defense (2nd team): 1988, 1992
NBA Field Goal Percentage leader: 1991 (60.2%), 1992 (60.4%)
NBA Minutes Played leader: 1985 (3182)
NBA Offensive Rebounds (total) leader: 1984 (355)
NBA Games Played leader: 1985 (82), 1987 (82), 1990 (82), 1995 (82)


요즘은 왜 이런 '쾌남' 파워포워드가 나오지 않나 모르겠습니다.


Nets Legend Buck Willia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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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의 출애굽기 14장을 보면 이러한 잘 알려진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4:21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 지라 14:22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 14:23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들이 다 그 뒤를 쫓아 바다 가운데로 들어오는지라 14:24 새벽에 여호와께서 불 구름 기둥 가운데서 애굽 군대를 보시고 그 군대를 어지럽게 하시며 14:25 그 병거 바퀴를 벗겨서 달리기에 극난하게 하시니 애굽 사람들이 가로되 이스라엘 앞에서 우리가 도망하자 여호와가 그들을 위하여 싸워 애굽 사람들을 치는도다.

너무나도 잘 알려진 이스라엘의 해방에 관한 역사이며, 그들의 하나님이신 여호와의 종, 모세를 통해 이루어진 기적의 기록입니다. 1950년대에 찰튼 헤스턴이 모세 역을 맡았던 영화 '십계'를 통해서도 잘 알려진 에피소드지요. 

 


1983년 5월, 뉴욕 메디슨 스케어 가든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같은 '모세'에 의해서.

시계를 거꾸로 돌려 1982년 여름의 필라델피아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줄리어스 어빙이 이끌던 필라델피아 76ers는 1977년부터 1982년까지 컨퍼런스 타이틀을 밥먹듯 쟁취하며 파이널에만 세 번을 올라갔던 강 팀이었습니다. 그러나 파이널마다 이들이 넘지 못했던 벽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리바운드의 열세'였지요. 백보드 부수기만 좋아하던 괴물 덩커, 대럴 도킨스, 그리고 수비는 좋았으나 몸싸움에서 많이 밀렸던 키 큰 파워 포워드, 콜드월 존스. 이 두 명의 빅맨으로 빌 월튼, 모리스 루카스, 로버트 패리쉬, 케빈 맥헤일, 커림 압둘자바 등이 버티고 있던 리그의 강 팀들을 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1982년 파이널에서도 식서스가 압둘자바의 레이커스에 무릎을 꿇자, 식서스의 구단주, 해럴드 캣츠는 큰 용단을 내립니다. 자유계약 선수로 풀리는 휴스턴 로켓츠의 모제스 말론을 당시로서는 구기 종목 사상 최고의 충격적인 금액인 6년 13.2 밀을 제시하며 데려오기로 결단을 내린 것이죠. 휴스턴에서 이에 맞서 대응을 했으나, 악에 받쳐 말론에 올인하겠다는 식서스 구단주의 결심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식서스는 1983년 드래프트 1번 픽 권한 (이 픽이 랄프 샘슨이 될 것임은 식서스도 알고 있었습니다)과 콜드월 존스를 묶어서 모제스 말론과 트레이드 합니다.


모제스 말론... 좀 더 정확하게 발음하자면 '모우지스 멀론'인데, 이 모제스 (Moses)가 바로 구약성서 출애굽기의 그 '모세'와 같은 이름입니다. 히브리어로는 '모셰'라고 하는데, 그래서였는지 당시 한국 신문에서도 이 선수를 '모세 말론'이라고 표기를 했었습니다.

이미 리그 MVP를 두 번이나 수상했고, 매 시즌 리바운드왕이었으며, 특히나 압둘자바와의 대결에서도 우위를 가져갈 수 있는 28세의 센터. 거의 혼자의 힘으로 약체였던 휴스턴 로켓츠를 1981년 파이널까지 올려놓았던 80년대 당시의 MDE.

그가 줄리어스 어빙의 식서스에 합류를 한 것입니다.

예상대로 이 식서스는 타 팀들을 파죽지세로 몰아 붙이며 정규시즌을 65승이라는 성적으로 마쳤습니다. 사실 시즌 막판 어빙의 부상만 없었다면 70승을 거둘 수도 있었던 팀이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입니다. 전년도 시즌, 팀 리바운드가 리그 꼴찌권이었던 팀이 말론의 합류로 단 번에 리그 1위의 자리에도 올랐습니다.


플레이오프가 시작되기 직전, 모제스 말론은 TV 카메라 앞에서 식서스의 플레이오프를 다음과 같은 세 마디 말로써 전망했습니다.

"Fo, fo, fo".

다시 말해 "4승, 4승, 4승", 세 번의 스윕으로 우승하겠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고, 일종의 예언(?)이었습니다.

모제스 말론은 프라이드와 자부심이 대단한 선수였습니다. 식서스에 합류하면서 백넘버도 24번에서 2번으로 바꾸었죠. 자신의 1년 연봉이 2백만 달러임을 져지넘버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받는 최고액 연봉에 걸맞는 활약을 하겠다는 자기 스스로에 대한 채찍질의 간접적인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당시에는 양 컨퍼런스에서 각각 6개의 팀들만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었습니다. 그리고 상위 시드 1, 2위 팀은 부전승으로 1라운드를 통과했고, 나머지 3~6위의 팀들 중 두 팀이 올라와 1, 2위 팀들과 컨퍼런스 준결승전을 치뤘습니다.

리그 1위였던 식서스는, 뉴저지 넷츠를 이기고 올라온 뉴욕 닉스와 2라운드를 치루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 당시의 뉴욕 닉스는 결코 만만한 팀이 아니었습니다. 올스타 센터였던 빌 카트라이트, 80년대 초중반, 어빙, 버드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스몰 포워드, 버나드 킹, 그리고 찰스 오클리 스타일의 리바운드왕 출신 파워 포워드, '트럭' 로빈슨까지 버티고 있던 팀입니다.

그러나... 뚜껑을 열고 보니 일방적인 시리즈였습니다. 홈에서의 2연전을 아주 쉽게 챙긴 식서스는 3차전 원정경기마저 승리로 장식하며 시리즈 스윕을 눈 앞에 두게 된 것이죠. 스윕을 당하지 않으려는 닉스 선수들이 절치부심 4차전에서 죽기살기로 경기에 임했습니다.


4차전 종료 1분을 남긴 상황에서 양 팀은 동점이 되었습니다.

닉스의 공격. 골 밑의 빌 카트라이트에게 버나드 킹의 패스가 투입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카트라이트 뒤에 있던 말론이 이 엔트리 패스된 공을 쳐냈습니다. 식서스의 모리스 칙스가 가까스로 이 공을 살려내 다시 모제스 말론에게 공을 던져 주었습니다.

공을 다시 건네받은 말론은 하프라인 바이얼레이션에 걸리지 않기 위해 본인이 스스로 공을 몰고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센터가 공을 드리블하기 시작하자 이 공을 뺏으려고 닉스 선수들이 겹겹이 그의 앞을 막아서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 때였습니다,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 모인 닉스 팬들이 자기들의 눈을 의심한 것은.

자기 앞에 서있는 카트라이트를 방향전환 드리블로 가볍게 제친 말론은 포인트 가드인 트렌트 터커마저 크로스오버 드리블로 따돌리고, 몸을 날려 그의 드리블을 저지하려던 어니 그런펠드도 360도 스핀 무브로 뚫습니다.

뒤쫓아온 카트라이트의 스틸시도를 왼 손 드리블로 가볍게 처리한 뒤, 골밑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터프가이, '트럭' 로빈슨 위로 점프하며 더블 클러치 레이업을 올려 놓았습니다.

그의 돌파와 드리블 앞에서 추풍낙엽처럼 떨어져나가는 닉스 선수들.... 거대한 센터가 coast-to-coast 기술로 상대팀 선수들을 넉다운 시키는 진풍경이었습니다.

마치 모세가 홍해를 지팡이로 가르는 듯한 모습이었죠.

닉스 선수들과 팬들은 경악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식서스의 시리즈 스윕을 겸허한 자세로 받아 들여야만 했습니다.

이 닉스와의 시리즈에서의 모제스 말론의 스탯은 게임당 31점, 18리바운드였습니다.



1982년 여름, 식서스에 입단할 당시부터 '식서스의 구세주', '식서스를 해방시켜 약속의 땅으로 이끌 모세'로 필라델피아 시민들로부터 큰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모제스 말론. 그는 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고, 파이널에서 압둘자바와 매직 존슨의 레이커스까지 스윕해버리며 필라델피아 시민들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었습니다.

1983년 5월, 구약성서의 한 믿음의 영웅과 같은 이름을 갖고 있던 그가, 그 영웅이 보여줬던 홍해의 기적을 뉴욕의 심장인 메디슨스퀘어 가든에서 재연해 보인 것은 이 팬들과의 약속의 실현을 준비하는 장엄한 전주곡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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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COLUMNS/DOCTOR J 2009. 4. 18. 18:44

NBA 역대 최고의 리바운더는 누구일까?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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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긴 NBA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리바운더는 과연 누구일까?

 

참으로 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90년대 초반부터 NBA를 보기 시작한 분들은 무조건 데니스 로드맨을 지목하실 것이고, 역사와 스탯을 강조하시는 분들은 아무래도 체임벌린과 러셀의 손을 들어주실 테니까요. 저같이 70년대부터 농구를 보신 분들은 네이트 써몬드와 모제스 말론이 최고라고 하실 겁니다.

 

그래서 본 게시물에서는 어느 특정한 선수 하나를 지목하기보다는, 제가 아는 얄팍한 지식과 해당선수들의 플레이들을 직접 보았던 경험에 의거해 한 15~20인 쯤 후보들을 뽑은 후 그들의 강점과 특성 정도만 설명해 볼까 합니다. 물론 선수들 이름 앞에 있는 순위는 편의상 매겨놓은 주관적인 랭킹일 뿐입니다. 사실 이 리스트에 올라있는 리바운더드들, 특히 6위부터 15위까지의 실력이야 백짓장 하나 차이지요.

 

일단 최고의 리바운더 후보명단은 리바운더로서의 재능과 영향력을 팀의 주전으로서 한 10시즌 정도는 꾸준히 보여줬던 선수들에 한해서만 만들어졌음을 알려드립니다. 따라서 80년대 후반에 반짝했던 마이클 케이지 (88년 리바운드왕) 90년대 말에 아주 짧은 전성기를 가졌던 제이슨 윌리암스같은 선수는 제외됐습니다. 또한 꾸준한 스탯만이 아닌 경기 중에도 리바운더로서의 본연의 자세에 충실한 선수들만 뽑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리바운드 스탯이 커리어 내내 꾸준히 좋았어도 경기 중에 박스아웃을 종종 게으르게 했다거나 허슬에 있어서 소홀한 부분이 없지 않았던 선수들은 제외시켰습니다.

 

또한, 아무래도 리바운드라는 부문과 스탯의 특성 상, 파워포워드나 센터 등 빅맨들 위주로만 뽑았음도 알려드립니다. 각 포지션 별로도 위대한 리바운더들이 수두룩하지만 이들까지 거론하자면 너무 일이 커질 것 같아서요. 다만, 저의 판단으로는, 래리 버드 (스몰포워드), 클라이드 드렉슬러 (슈팅가드), 라파옛 리버 (포인트가드), 이 세 선수가 나머지 세 포지션의 역대 최고 리바운더였다는 언지만 남겨 놓겠습니다.

 


훌륭한 리바운더가 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덕목은 무엇일까요?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팔길이나 운동능력, 사이즈 등은 훌륭한 리바운더가 되기 위한 필수덕목이 아니라는 것이죠. 리바운드를 잡는 데 있어 이런 것들이 도움이 될 수는 있지만 근본적이고 중차대한 요소들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리바운더가 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덕목은 근성입니다. 골밑에서의 처절한 몸싸움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즐길 수 있는 파이터 정신, 리바운드된 공은 모두 내가 잡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 맞상대가 나보다 크고 강해도 심리적으로 절대로 밀리지 않는 배짱과 깡, 위치선정을 위한 부단한 몸 움직임, 뭐 이런 것들이지요.

 

이런 멘탈적인 부분들이 기본적으로 밑에 깔려있는 상태에서, 리바운드된 공의 타이밍과 방향을 읽는 능력이라든지, 손의 악력, 전후좌우로 스텝을 밟으며 공을 따라갈 수 있는 유연성, 서너 번을 연속으로 튀어오를 수 있는 순발력, 지칠 줄 모르는 체력 등이 가미가 되어 위대한 리바운더들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 그럼 위대한 리바운더들을 과거부터 훑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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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밥 페팃 (1954~65)

 

50년대부터 뛰었던 선수이고, 러셀이나 체임벌린처럼 60년대 후반, 70년대 초반까지 뛰지를 못 하다보니 게임영상 자체가 많이 남아있지 못 합니다. 그래서 과소평가를 받기도 하는데, 동시대를 살았던 선수들과 감독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페팃이야말로 NBA 빅맨의 새 장을 연 선수라고. 조지 마이칸이 엄청난 하드웨어로 상대선수들을 누르고, 빌 러셀이 수비형 센터로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할 때, 공수 양 분야와 보드장악력에서 놀라운 운동능력과 근성으로 리그를 장악했던 선수입니다. 커리어 통산 리바운드가 16.2개인 페팃은 게임당 리바운드 평균에서 역대 3위에 올라 있습니다. 페팃의 리바운드 본능은 올스타게임에서조차 빛을 발했습니다. 27개로 올스타게임 최다 리바운드 기록을 갖고 있지요.

 

14. 폴 사일러스 (1964~80)


밥 페팃의 은퇴시즌에 루키로서 한솥밥을 먹었던 페팃의 수제자입니다. 블루칼라워커형 파워포워드의 효시이기도 한 사일러스는 70년대 최고의 리바운딩 포워드였습니다. 흑인이었음에도 점프력이 없었고, 팔길이도 평균에 미치지 못 했던 2미터 신장의 선수였으나, 빠른 풋워크와 근성, 리바운드를 잡겠다는 의지 하나로 골밑을 장악한 매력있는 선수였습니다. 74년과 76년 셀틱스가 우승할 때, 하블리첵, 조조 화이트, 데이브 코웬스와 빅 4를 이뤘던 선수이고, 소닉스가 79년 우승을 할 때도 팀의 정신적인 지주로서, 그리고 터프가이로서 큰 공헌을 한 선수입니다. 70년대의 피닉스 선즈, 보스턴 셀틱스, 시애틀 소닉스는 박빙의 플레이오프 경기에서 이 선수의 결정적인 팁인이나 수비리바운드로 승리를 챙긴 예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팀들입니다.


13. 데이브 코웬스 (1970~83)


폴 사일러스와 두터운 친분을 유지했던, 역대 최고의 허슬 플레이어입니다. 사일러스와 셀틱스에서 한솥밥을 먹으며, 작은 신장임에도 불구하고 (6-8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신장은 6-7에 더 가까웠습니다), 커림 압둘자바나 빌 월튼, 윌트 체임벌린과의 골밑싸움에서 한 치도 밀리지 않았던 근성가이였습니다. 백인이었으나 점프력, 근력, 순발력 등이 탁월했고, 미드레인지 점퍼, 왼손 훅슛 등이 뛰어났던 센터입니다. 무엇보다도 박스아웃에 능해서 상대팀 센터들이 페인트존 안에서 마음대로 플레이할 수 없도록 꼼짝없이 그들을 붙들어 맸던 수비형 센터였습니다. 1973년 리그 MVP였기도 하지요. 절친인 사일러스가 소닉스로 트레이드 된 후 아예 농구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릴 정도의 의리파이기도 했습니다.

 

 

12. 팀 덩컨 (1997~)


꾸준하지요. 리바운더로서의 덩컨의 강점은 꾸준함입니다. 팔도 길고 손도 크고, 몸은 할아버지같지만 근력이 매우 좋은 타고난 빅맨입니다. 근육으로 똘똘 뭉쳐있었던 데이빗 로빈슨보다 부벼대는 힘이 훨씬 더 좋았습니다. 덩컨은 골밑에서 상대팀 빅맨들과 몸싸움을 하다가도 weak side로부터 치고 들어오는 상대팀 스윙맨의 돌파까지 견제할 수 있는 넓은 수비범위를 자랑합니다. 중요한 경기의 4쿼터나 플레이오프에서 리바운더로서의 그의 진가가 더더욱 잘 드러나지요. 한 번 마음만 먹으면 골밑 제공권 장악에 대한 기어를 순식간에 몇 단계는 올려버리는 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예로, 2007년 클리블랜드와의 파이널에서 그가 보여준 블루칼라워커로서의 리바운드 활약은 후배들에게 많은 귀감이 되었습니다.

 

 

11. 하킴 올라주원 (1984~2002)

 

속칭 90년대 4대 센터들 중에서는 하킴이 최고의 리바운더였다고 확신합니다. 리그에 일곱명 밖에 되지않는 커리어 통산 4천개 이상의 공격리바운드 획득자들 중 하나이며, 커리어 통산 랭킹에서도 11위에 올라 있습니다. 그의 리바운더로서의 강점은 놀라운 풋워크에 있었습니다. 도저히 빅맨의 풋워크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현란한 스텝으로 페인트존 안에서의 急방향전환이 가능했고, 바로 이 능력이 그를 훌륭한 리바운딩 센터로 만들어줬습니다. 농구를 처음 시작한 휴스턴 대학시절 1학년 때조차도 올라주원의 리바운드 능력만큼은 전문가들로부터 호평과 인정을 받았었습니다. 축구 골키퍼 출신이었던 특이한 경력과 의형제 지간인 모제스 말론의 영향이 구력이 짧았던 그가 짧은 시간 동안에 좋은 리바운더로 클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습니다.


10. 웨스 언셀드 (1968~81)

  

6-6, 198센치의 센터였던 언셀드는 찰스 바클리를 능가할 만한 두껍고 두터운 몸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래서 바클리가 처음 리그에 뚱뚱이의 몸으로 입성했을 때 그를 '언셀드의 몸과 어빙의 운동능력을 합쳐놓은 사나이'라고 부르기도 했었죠.

언셀드는 점프력이 전무했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기어다니는 냉장고'였습니다. 하지만 타고난 몸싸움 능력과 무쇠같은 몸으로 루키시즌에 신인왕과 리그 MVP를 동시에 거머쥐었으며, 나중에는 파이널 MVP와 리바운드왕까지 해먹은 욕심쟁이(?)입니다. 커리어 평균 리바운드가 게임당 14개고, 커리어 통산 리바운드에서도 역대 10위에 랭크되어 있습니다. 언셀드는 스크린의 천재로도 불리웁니다. 수많은 상대팀 선수들이 그의 스크린에 걸릴 때마다 온갖 타박상을 당해야만 했다는 슬픈 전설이 떠돕니다. 언셀드와 몸을 부딪혀 본 선수들은 하나같이 쇳덩어리에 부딛힌 것 같았다고 하더군요.


9. 케빈 가넷 (1995~)


가넷은 팀 덩컨과 마찬가지로 신체적으로 우월한 리바운더입니다. 리그에서 14년째 뛰고 있는 가넷은 아직도 5~6년은 거뜬히 더 뛸 수 있는 상태인데도 벌써 커리어 통산 리바운드에서 역대 25위에 올라 있습니다. 게임당 평균 리바운드에서도 역대 25위 안에 들어 왔습니다. 상대팀 빅맨에게로 투입되는 패스에 대한 디나이 수비에 있어서 리그 탑 수준이며, 유연한 허리를 이용한 수비와 제공권 장악의 범위가 넓습니다. 무엇보다도 가넷은 리바운드가 뭔지를 잘 아는 선수입니다. 특히 수비리바운드가 그의 강점이죠. 뛰어난 점프 타이밍, 공을 나꿔채는 탁월한 기술, 거기에 긴 팔과 큰 신장, 현명한 위치선정, 그리고 강한 승부욕 등이 적절하게 어우러져 있습니다. 4회 연속 리바운드왕.

 

 

8. 벅 윌리암스 (1981~98)


역대 파워포워드들 중에서 가장 과소평가받는 선수라고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윌리암스는 80년대 최고의 파워포워드였습니다. 맥헤일이 스타로 떠오른 시기는 80년대 중반부터고, 바클리와 칼 말론은 1987년부터 전성기에 들어갔으니까요. 1981-82 시즌 신인왕이었던 윌리암스는 넷츠 시절엔 부상으로 결장하는 경기 없이 매 시즌마다 게임당 12개의 리바운드를 잡아주던 내구력 최고의 블루칼라워커였습니다. 그러면서도 팀의 주득점원이었고, 속공 피니쉬까지 담당했던 기동력있는 선수였습니다.

90
년대 블레이저스 시절엔 그 역할이 많이 축소화됐지만요. 올스타 3, All-Defensive 4, All-NBA 세컨드 팀에까지 선정됐던 윌리암스는 4526개의 공격리바운드를 잡아냈으며, 커리어 통산 리바운드에서도 역대 12위에 올라 있습니다.


7. 제리 루카스 (1963~74)


매력적인 백인 터프가이, 제리 루카스는 실제신장 201센치의 언더사이즈 센터였습니다. 60년대 내내 꾸준히 올스타게임과 All-NBA 팀에 선정이 된 레전드였지만, 우리 한국팬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20-20을 두 번이나 했던 선수라고 하면 좀 더 귀에 익으실 겁니다. 체임벌린, 러셀, 써몬드같은 흑인 빅맨들이 점령했던 골밑에서 영화배우처럼 잘 생긴 단신의 백인센터가 리바운드를 20개 이상씩 잡아냈으니, 그의 당시 인기는 제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상상이 가실 겁니다.

루카스의 농구스타일은 데이브 코웬스와 흡사했습니다. 공격기술은 루카스가 더 다양했고, 수비면에서는 코웬스가 앞섰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 선수의 실제경기영상을 한 번 보십시오. .. 터프한 선수였습니다. 경기당 리바운드 평균은 16.2개로 역대 4위입니다.

 

 

6. 찰스 바클리 (1984~99)

 

실제신장이 194센치인 바클리는 역대 최단신 리바운드왕이기도 하지요. 앞에서 이미 언급한 웨스 언셀드에 점프력, 순발력, 풋워크를 장착시키면 찰스 바클리가 됩니다. 작은 신장에도 불구하고 탄탄한 하체로부터 터져나오는 폭발적인 점프력과 강인하고도 두터운 상체로 웬만한 상대팀 빅맨들은 공중에서 다 떨궈버릴 수 있었던 바클리는 점프볼도 잘했고, 순간 스피드나 2초 동안에 서너 번씩 튀어오르는 순발력에 있어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선수입니다.

박스아웃 싸움에서 밀리거나 하면 순간적으로 상대선수의 등을 타고 방향을 전환해 다시 본인이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곤 했지요. 무엇보다도 점프 타이밍이 탁월했습니다. 올라주원과 함께 모제스 말론으로부터 엄청난 영향을 받은 바클리도 4천개가 넘는 커리어 공격리바운드를 잡아냈습니다.

 

 

5. 데니스 로드맨 (1986~99)

 

늦은 나이에 NBA에 입성한 로드맨은 BQ가 정말로 뛰어났던 타고난 블루칼라워커였습니다. 피스톤즈 초창기 시절에는 모든 포지션의 상대팀 스코러들을 막는 전천후 수비수로서 키워졌지만, 1990-91 시즌에 자신이 리바운더로서 더 재능이 있었음을 갑작스레 깨닫게 됩니다. 시즌이 끝난 후, 어떻게 해야 리바운드를 많이 잡아낼 지를 스스로 독학한 로드맨은 그 다음 1991-92 시즌부터 폭발적인 리바운드 스탯을 쌓아올리기 시작하지요. 상대팀 선수들의 슛을 비디오로 면밀히 관찰한 후, 해당선수의 슛이 튀는 각도까지 통계를 내가며 효율적인 리바운드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로드맨 특유의 몇 번씩 튀어오르며 공을 자기 몸쪽으로 쳐내는 기술과 전후좌우 어느 방향으로든 몸이 공을 쫓아갈 수 있는 놀라운 유연성과 풋워크도 크게 한 몫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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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네이트 써몬드 (1963~77)

  

커리어 평균 15-15의 사나이 써몬드는 '쿼드러플 더블' (네 가지 스탯에서 두자리수 기록)의 첫 공식 기록자이기도 합니다. 6-11의 써몬드는 7-7의 윙스팬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블락샷에 능했습니다. 하지만 써몬드는 리바운드에서 더 두각을 나타냈던 빅맨입니다. 로드맨처럼 루즈볼을 향해 몸을 내던지고, 양다리가 벌어지는 희한한 자세로 공중에서 리바운드를 나꿔채던 센터였습니다.

로드맨과 비슷한 스타일의 거머리 수비(All-Defensive 5)를 펼쳤는데, 여기에 신장과 윙스팬까지 좋았으니, 체임벌린과 압둘자바가 상대하기 제일 싫어했던 선수로 꼽는 게 당연했지요. 한 경기에 42개의 리바운드를 잡은 적도 있는 써몬드는, 경기당 평균에서는 역대 5, 통산 리바운드에서는 8위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습니다.

 

 

3. 모제스 말론 (1976~94)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6731개의 공격 리바운드. 전성기 때는 경기당 7개의 오펜스 리바운드로 상대방 진영을 초토화시킨 선수. 말론은 처음 프로에 입문할 때 몸이 몹시 야위었다고 표현됐을 정도로 깡마른 빅맨이었습니다. 몸이 근육질도 아니었고, 더군다나 그의 신체 중 취약점인 매우 작은 손은 과연 그가 NBA에서 빅맨으로서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말론은 이 모든 약점들을 끊임없는 노력과 성실함, 집념과 열정으로 이겨냈습니다.

상대방 2~3인이 들러붙어도 탱크처럼 밀고 들어가 잡아내던 오펜스 리바운드의 사나이. ABA 시절의 두 시즌 스탯을 포함시키면, 그는 통산 리바운드에서 역대 3위에 오르게 됩니다. 훈련량과 체력에 있어서 동포지션 역대 지존인 선수이기도 합니다. 리바운드왕 6.


2. 윌트 체임벌린 (1959~73)


모제스 말론과는 달리 신체적인 축복을 너무나도 많이 받은 선수죠. 그러나 체임벌린의 하드웨어적 우월함이 그의 리바운드 능력까지 깎아내릴 수는 없습니다. 엄청난 신체조건에도 불구하고 체임벌린은 거친 몸싸움과 박스아웃에 전력을 다 쏟았고, 최고의 리바운더가 되기 위해 부단한 노력까지 감행했던 아주 특별한 선수였습니다. 체임벌린의 경기들을 보면 60년대 전성기 시절부터 70년대 은퇴를 앞둔 시기까지 한결같이 48분 내내 모든 튀어오르는 볼은 자기가 다 잡으려하는 듯한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리바운드를 잡기 위한 꾸준한 노력에 엄청난 신체, 거기에 탁월한 센스와 감각까지 갖추었던 그가 통산 리바운드와 평균 리바운드 양 부문에서 1위에 올라있으며 리바운드왕도 총 11회나 휩쓴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1. 빌 러셀 (1956~69)


빌 러셀 - 한 시즌 평균 20개의 리바운드를 잡은 최초의 선수, 후반전에만 잡아낸 32개의 리바운드 신기록. 동시대를 함께 했던 체임벌린때문에 리바운드왕 타이틀이 많지는 않으나 13시즌 커리어에 리바운드 평균 20개를 넘긴 시즌만 무려 10시즌입니다.

러셀은 신장에 비해 스탠딩 리치가 좋았고, 점프력과 순발력도 뛰어났으며, 데니스 로드맨의 유연성과 풋워크까지 보유하고 있던 선수입니다. 특히, 공중에 떠있는 볼에 대한 타이밍에 있어서는 역대 지존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블락샷도 잘했고, 점프볼이나 리바운드 싸움에서도 우위를 가져갈 수 있었던 것이죠. 보기보다 힘이 좋았고, 상대선수를 머리싸움에서 이기고 들어가던 선수였으며,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경기에서는 거의 초인적인 보드장악력을 보여줬던 클러치 리바운더였습니다.

 

 


이상, NBA 역사를 빛낸 리바운더들을 훑어 봤습니다.

 

왜 이 리스트에 샤킬 오닐이 없냐고 반문할 팬들이 계실 겁니다. 샤킬 오닐과 칼 말론은 각기 동포지션 역대 최고의 자리를 다투는 최고의 빅맨들입니다. 하지만 저의 견해로는, 뛰어나고도 꾸준한 그들의 리바운드 스탯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위에 언급된 선수들에 비해 '리바운더'로서는 0.2% 정도 밀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쉴 새없이 골밑에서 부벼대는 근성이나 경기 내내 보여줘야 할 박스아웃 및 위치선정에서 가끔씩 허점을 보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 선수들이 팀에서 맡은 주득점원으로서의 책임이 너무 크기 때문에 생겨난 현상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고, 기본적으로 이런 몸싸움을 즐겨하지 않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이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 선수들의 리바운드 능력 자체를 폄하하려는 의도는 없었으니 팬들께서는 양해해 주십시오.

 

오닐과 말론 외에도 저 리스트에 이름을 올릴 만한 선수들은 참 많습니다. 돌프 셰이즈, 월트 벨라미, 빌 월튼, 잭 시크마, 찰스 오클리, 모리스 루카스, 벤 월러스, 엘빈 헤이즈, 데이빗 로빈슨, 커림 압둘자바, 데이브 드부셔 등등.

 

이제 드와잇 하워드가 무서운 기세로 치고 올라오고 있군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It's not who jumps the highest - it's who wants it the most."
- Buck William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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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임벌린 대 제리 루카스 (왼쪽에 필 잭슨도 보이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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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1986년 4월 6일에 벌어졌던 당시 NBA 리그 최고의 라이벌전, 식서스 대 셀틱스의 경기를 추억해 볼까 합니다.

1960년대 러셀의 셀틱스 대 체임벌린의 식서스의 대결로 시작된 영원한 맞수 셀틱스와 식서스. 그들은 1970년대에 들어서도 데이브 코웬스, 존 하블리첵이 셀틱스를 이끌며 ABA로부터 줄리어스 어빙을 영입한 식서스와 그 유명한 라이벌 관계를 꾸준히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1980년. 셀틱스가 드래프트한 래리 버드와 함께 라이벌 전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양 팀은 1980년대 초중반 미국 프로 스포츠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라이벌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지요.

80년대 초중반의 이 두 팀 간의 대결은 당시 한국 농구대잔치 시절의 현대, 삼성 간의 라이벌 대결을 보는 듯 했습니다. 라이벌 전이 벌어지기 전 날은 선수들이 잠도 잘 못 자고 음식도 먹지 못 할 정도였다니까요.

두 팀 간의 대결은, 보스턴과 필라델피아 두 도시 간의 싸움이기도 했습니다. 직장인들도, 학생들도, 이 두 팀 간의 경기를 앞두고 며칠 전부터 신경전과 탐색전을 벌였고, 경기결과에 따라 두 도시 전체의 분위기 자체가 영향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이 두 팀은 프리시즌 시범경기를 하다가도 패싸움을 벌이기가 일쑤였습니다. 1982년 10월로 기억하는데, 이 한 경기에서만 4번의 싸움이 일어나는 바람에, 이 두 팀은 이후로 몇 년 간은 시범경기에서조차 맞붙지 못 하게 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1986년 시즌은 래리 버드의 셀틱스가 최전성기를 구가할 때였습니다. 많은 전문가들은 이 86년의 셀틱스를 87년의 레이커스, 96년의 불스, 72년의 레이커스와 함께 역대 최고 팀의 반열에 올려 놓습니다. 버드, 맥헤일, 패리쉬, 데니스 존슨이 최절정기의 기량을 보유하고 있었고, 여기에 벤치에서 빌 월튼이 식스맨으로 출전하던 팀이었습니다.

반면, 식서스는 프로 2년차 찰스 바클리가 리그를 강타하고 있었으나, 모제스 말론과 앤드루 토니가 부상으로 신음하고 있었고, 바비 존스와 줄리어스 어빙은 은퇴를 앞두고 있던... '지는 해'였던 팀입니다.

4월 6일. 대부분의 강팀들이 플레이오프를 준비하며 컨디션 조절에 힘쓰던 시기. 리그에서 파죽지세로 14연승을 구가하던 무적의 셀틱스가 식서스 원정경기를 왔습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이 경기는 단순한 정규시즌 경기가 아니었습니다. 플레이오프를 준비하며 몸을 사리는 일도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이 경기는 무조건 이겨야만 하는 라이벌 전이었습니다.

식서스도 마찬가지. 바로 전 경기에서 상대선수에게 눈을 찔리는 부상을 당해 시즌아웃된 모제스 말론 없이 셀틱스의 막강한 프런트 라인을 상대해야 했지만... 이 경기는 목숨을 걸고라도 잡아야만 했던 셀틱스 전이었습니다. 식서스는 배수의 진을 펴고 이 경기에 팀의 사활을 걸었습니다.


긴장 속에 시작된 숨막히는 경기. 당시 AFKN에서도 셀틱스 대 식서스의 라이벌전은 TV로 곧잘 생중계를 해줬기 때문에, 저는 직접 녹화를 하면서 이 긴장감 넘치는 경기를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전반전에는 맥헤일, 패리쉬의 고공 농구 대 바클리의 파워 농구 양상이었습니다. 버드와 어빙은 서로 수비를 너무 타이트하게 하다 보니 약간은 부진한 경기를 펼쳤습니다.

전반전은 셀틱스가 48 대 47, 1점차로 앞선 가운데 마쳤습니다.

이 두 팀 간의 팽팽한 긴장감이 폭발을 한 것은 3쿼터가 끝나갈 무렵이었습니다. 셀틱스의 가드 데니 에인지와 식서스의 가드 쎄데일 쓰릿 사이에 몸싸움이 일어났고, 성격이 있는 에인지가 쓰릿에게 다가와 욕설을 하며 쓰릿의 가슴을 밀쳤지요.

이 때, 쓰릿이 번개보다 빠른 동작으로 에인지의 턱에 정권을 날립니다. 에인지는 고개가 한 번 휙 돌아가더니 비틀비틀 거리다가 쓰러졌습니다. 그 쓰러진 에인지에게 바클리까지 달려 들었습니다.

데니 에인지.... 그는 그 날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입니다.


쓰릿이 퇴장을 당한 후 속개된 경기는 점차 셀틱스의 분위기로 바뀌어 나갔습니다. 전반전에 잠잠했던 버드가 살아나기 시작했던 것이죠.

버드는 이 경기에서 18점, 10리바운드, 10어시스트의 트리플 더블 활약을 했습니다.

4쿼터 중반에 이를 때까지 셀틱스는 계속 7~8점차의 리드를 유지했습니다.

바로 이 때였습니다. 경기 내내 잠잠하던 줄리어스 어빙(23점, 6리바운드, 5어시스트)의 슛이 갑자기 폭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빙은 혼자서 연이어 9득점을 하더니 급기야 승부를 원점으로 돌리며, 셀틱스의 완승으로 굳어져가던 경기를 진흙탕 싸움으로 끌고 갔습니다.

이 라이벌 전의 드라마는 경기종료 막판까지 계속 됐습니다.

94 대 92로 박빙의 리드를 지켜나가고 있던 셀틱스에게 승리를 굳힐 기회가 찾아 왔습니다. 20여 초를 남기고 던진 셀틱스 제리 시스팅의 슛이 식서스 선수들의 손에 맞고 나가면서 셀틱스에게로 팀 리바운드가 주어진 것입니다.  바클리의 지나친 의욕이 가져온 뼈아픈 실수였지요. 팀원인 클레몬 존슨이 수비 리바운드를 잡았으나, 굳이 자기가 잡겠다고 열을 올리다가 공이 튕겨져 나가고 만 것입니다.

스틸을 노리며 타이트한 수비를 펼쳤으나 스틸에 실패한 식서스는 공을 가진 버드에게 파울을 해야만 했습니다.

남은 시간은 6초. 자유투라인 앞에 버드가 섰습니다.

리그 최고의 클러치 슈터, 래리 버드. 버드는 89.6%로 1986년 시즌 자유투 성공률 1위였던 선수이기도 했습니다.

이제 경기는 끝났다고 봐야 했습니다. 자유투 한 개만 들어가도 95 대 92로 셀틱스가 3점차 리드를 잡은 채 식서스

는 6초 동안에 3점슛을 쏴야만 했으니까요. 천하의 버드가 여기서 자유투 한 개라도 놓칠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니 딱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위대한 이름...... 바로............ 찰스 바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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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클리는 자유투를 던지려던 버드를 노려보며 두 손으로 자기의 목을 꽉 조르는 몸짓을 보였습니다. 무슨 뜻이냐고요? "버드, 너 오늘 죽었다" 라는 뜻이었답니다.

버드도 인간이었나 봅니다. 그 천하의 버드가 첫번째 자유투를 놓친 것입니다. 경기해설을 맡았던 게리 벤더 씨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라며 놀라더군요.

그리고 두번째 자유투......

세상에...... 버드가 이 두번째 자유투까지 놓치고 맙니다.

리바운드는? 물론 바클리의 품 안으로 들어갔지요.

벤치에 앉던 버드가 자기 손에 들려있던 큰 타월을 부욱 찢어 버리더군요. 금세기 최고 수준의 악력이었습니다.

이제 식서스에게 남은 시간은 6초.

작전은 탄력받은 바클리를 이용한 빠른 2점슛이었습니다. 돌파하는 바클리. 그리고 사력을 다해 이를 저지하려던 맥헤일.

점프볼이 선언됐습니다. 남은 시간은 3초.

식서스는 작전타임을 불렀고, 마지막 3점슛을 쏘기 위한 작전이 전달됐습니다.


자, 이제 식서스가 경기를 가져가려면 세 가지 조건의 시나리오가 충족되어야 했습니다.

(1) 194센치의 바클리가 스탠딩 리치 295센치에 달하는 맥헤일을 상대로 점프볼을 따내야 했습니다.

(2) 그 따낸 점프볼이 작전상 3점을 쏘게끔 되어있던 식서스 선수의 손으로 정확하게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3) 그 공을 받은 식서스 선수가 곧바로 3점을 던져서 그 골을 성공시켜야만 했습니다.


이 세가지가 모두 실제로 일어났다면.... 여러분, 믿으실 수 있겠습니까?

제가 아는 한, 역대 최고의 점프볼 능력을 갖추고 있던 바클리는 심판에게 공을 좀 높이 띄워달라고 부탁을 했고, 자신의 폭발적인 점프력, 놀라운 타이밍, 그리고 뱃심까지 가세한 삼박자로 정확하게 어빙에게로 공을 쳐내줍니다.

공을 받은 어빙은 즉시로 점프를 하며 앞에서 수비하던 데니 에인지 위로 페이더웨이 3점슛을 던졌고, 그 공은 깨끗하게 림의 그물을 갈랐습니다.

95 대 94. 식서스의 승리였습니다. 어빙의 승리였고, 바클리의 승리였으며, 맷 구카스 감독의 승리였습니다.




라이벌 전은 이래서 재미있습니다.

객관적인 전력으로는 분명히 밀리는데도, 더 강한 상대팀을 이길 수 있는 힘과 방법이 어디에선가 솟아 나거든요.

휴스턴의 7-4 파워포워드 랄프 샘슨의 버저비터와 함께 디펜딩 챔피언 레이커스가 탈락한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 5차전 경기와 더불어 1986년 시즌 최고의 게임으로 선정된 경기의 리캡이었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 Doctor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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