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

토론토 랩터스의 슈터 제이슨 카포노의 3점 슛이 림을 돌아 나오자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르브론 제임스와 지드루나스 일가우스카스가 리바운드를 잡기 위해 점프했다. 토론토 선수들은 공격리바운드를 포기하고 모두 백코트 했기 때문에 둘 중 하나는 분명히 리바운드를 잡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20여 분 전 이미 클리블랜드의 프랜차이즈 스틸 기록을 경신한 르브론은 일가우스카스를 흘끔 바라본 후 손을 내렸고, 일가우스카스는 볼을 한 번 바운드한 후 경기 네 개째의 리바운드를 잡아냈다. 마이크 브라운 클리블랜드 감독은 곧바로 타임아웃을 신청해 경기를 중단시켰고, 2만여 명의 홈 관중들은 일가우스카스에게 기립박수를 보냈다. 일가우스카스는 덤덤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답례했다. 통산 리바운드 5,228개. 구부정한 등을 지닌 리투아니아 출신의 이 센터가 프랜차이즈 통산 최다 리바운드 기록을 세우는 순간이었다.

일가우스카스는 큰 키(221cm)를 제외하면 그렇게 눈에 띄는 선수는 아니다 그는 르브론처럼 높이 점프하지도 않고 벤 월러스처럼 강렬하지도 않다. 득점도 호쾌한 슬램덩크보다는 점프슛이 대부분이다. 하다못해 팀 후배 앤더슨 바레장처럼 특이한 헤어스타일을 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를 아는 사람은 그의 인간성에 대한 찬사의 말을 아끼지 않는다. 2007년 클리블랜드의 첫 번째 파이널 진출이 확정된 직후 일가우스카스에게 달려가 안겼던 르브론은 ‘그런 인간성을 지닌 선수와 같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말했고, 브라운 감독은 ’그를 지닌 우리 팀은 정말 운이 좋은 것‘이라며 ’그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한 마디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라 말했다. 

브라운의 말이 맞다. 일가우스카스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하려면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는 NBA에서 첫 경기를 치르는 것부터 실력에 비해 훨씬 가혹한 운명과 싸워야 했다.

일가우스카스는 1975년 발트 3국 중의 하나인 리투아니아에서 태어났다. 1990년 소련에서 독립한 인구 350만의 이 작은 나라는 어린아이들이 매 처음 농구선수를 꿈꾸고, 자신에게 가능성이 없다는 걸 깨달으면 의사나 변호사를 꿈꿀 만큼 농구의 인기가 높은 나라다. 일가우스카스는 농구의 나라인 이 나라에서 축구선수를 꿈꾸던 아이였다. 지금도 그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경기를 꼬박꼬박 챙겨보는 열혈 축구팬이고, 집에서 키우는 개 이름도 ‘베컴’이다.

하지만 너무 빨리 자란 키 때문에 축구를 포기해야 했던 일가우스카스는 고향 카우나스 선배이자 세계적인 농구선수였던 아비다스 사보니스의 경기를 보고 농구선수가 되기로 결심했다. 맨 처음 맡은 포지션은 포인트가드였다. 당시 유럽은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출전했던 드림팀 I의 영향으로 NBA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높아지고 있었다. 리투아니아에서도 TV를 틀면 항상 NBA 경기를 볼 수 있었고, 이제 리투아니아의 농구소년들은 그냥 농구 선수가 아닌 NBA 선수를 꿈꾸게 되었다. 일가우스카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이미 210cm가 넘게 자란 일가우스카스는 NBA 선수가 되기 위해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

일가우스카스는 미국 대학에 입학하기로 했다. 미국에서 고등학교 졸업 경력을 얻고 영어를 익히기 위해 리투아니아의 고등학교 마지막 학년을 일부러 유급하기도 했다. 미국에 있는 동안 그를 관리해줄 에이전트와도 계약했다.

하지만 리투아니아에 닥친 경제위기가 그의 꿈을 가로막았다. 버스 기사였던 아버지와 엔지니어였던 어머니가 모두 직장을 잃었고, 일가우스카스는 미국 대학에 다니기는커녕 부모님과 여동생의 생활을 돌보아야 할 처지가 되어버렸다. 일가우스카스는 미국 유학을 포기하고 고향 카우나스의 신생 농구팀인 아틀레타스에 입단해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다행히 첫 팀에서의 경력은 순조로웠고,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리투아니아 국가대표로 뽑히기도 했다.

그 무렵 리투아니아 대표 팀은 켄터키 대학의 초청을 받아 미국에서 시범경기를 가지게 되었다. 켄터키 대학의 홈구장에서 열린 이 경기에서 일가우스카스는 26득점 19리바운드 4블록슛 2스틸을 기록하면서 33점차 대승을 이끌었다. 깜짝 놀란 릭 피티노 당시 켄터키 감독은 친구인 마이크 프라텔로 당시 클리블랜드 감독에게 연락해서 ‘제2의 사보니스가 등장했다’며 흥분했고, 일가우스카스는 몇몇 NBA 관계자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자신감을 얻은 일가우스카스는 1995년 NBA 드래프트에 참가했고, 켄터키 대학과의 경기 비디오를 본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던 케빈 맥헤일 단장은 일가우스카스를 시험해보기 위해 미네소타 팀버울브즈의 워크아웃에 일가우스카스를 초청했다. 일가우스카스의 머리 위에서 카메라를 설치하던 촬영기사가 삼각대를 떨어뜨려 죽을 뻔 하기도 했지만, 아무튼 그는 이틀 동안 진행된 워크아웃에서 맥헤일에게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 지명 가능성을 높였다. 하지만 오른발에 갑자기 통증이 느껴졌고, 결국 발이 부러진 것으로 확인된 일가우스카스는 NBA 입성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프로 생활을 시작한 후 처음으로 겪은 부상이었다.

이듬해인 1996년 열린 드래프트는 앨런 아이버슨과 코비 브라이언트, 스티브 내쉬등이 참가한 NBA 역사상 최고의 드래프트 중 하나였다. 일가우스카스는 2라운드에라도 뽑히면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프라텔로의 이야기를 들은 웨인 엠브리 클리블랜드 단장이 20번째 지명권을 그에게 사용했다. 12번째 지명권을 일가우스카스와 같은 센터인 비탈리 포타펜코에게 썼음에도 불구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다른 팀들은 미국 농구를 경험하지 못한 데다 부상 경력까지 있는 일가우스카스를 외면했지만, 엠브리는 큰 키에 걸맞지 않은 부드러운 슛터치에 주목했다. 일가우스카스의 NBA 경력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운명은 NBA 데뷔전을 쉽사리 허용하지 않았다. 첫 시즌을 앞두고 맹연습을 하던 중 또다시 오른발이 부러진 일가우스카스는 NBA 데뷔전을 또다시 1년 후로 연기해야 했다.

그래도 일가우스카스가 크게 낙담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리그에 갓 입단한 신인으로써 모든 것에 호기심을 보였고, 팀 분위기에 빠르게 적응해갔다. 영어 실력도 많이 늘었다. 비록 가장 먼저 배운 게 욕이었지만 말이다. 일가우스카스와 함께 뛰었던 선수들은 누구든 그의 걸쭉한 농담에 대해 이야기하며 웃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일가우스카스는 1997-1998시즌 마침내 첫 경기를 치렀다. 개막전에서 16득점 16리바운드 2블록슛을 기록하며 화려하게 데뷔한 일가우스카스는 시즌 전 경기를 뛰며 평균 13.9득점과 8.9리바운드를 기록, 클리블랜드의 주전 센터로 확실히 자리 잡았다. 올스타 루키 챌린지에도 선발 출장해서 루키 챌린지 MVP가 된 첫 번째 클리블랜드 선수가 되었다.

이듬해, 순조롭게 흘러갈 것 같은 두 번째 시즌이었지만 또다시 부상 악령이 찾아왔다. 이번에는 왼쪽 발목이 부러진 일가우스카스는 단 6경기만 뛰고 시즌을 접어야 했고, 이듬해에도 코트에 나서지 못했다. 일가우스카스는 크게 낙담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용기를 찾았다. 힘든 재활과정을 견뎌나가는 그의 성실함은 팀 관계자들을 감동시켰다.

2년여의 공백 끝에 코트에 돌아온 2000-2001 시즌, 일가우스카스는 첫 23경기에서 11.7점과 6.8리바운드를 올리며 부활을 알렸다. 팀도 15승 8패로 선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시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일가우스카스는 시즌 최다득점인 24점을 올린 다음 경기였던 마이애미 전에서 점프슛을 던진 후 왼발에 엄청난 통증을 느꼈다. 수많은 부상을 당해봤지만 결코 느끼지 못했던 통증이었다. 의료진이 달려오는 짧은 시간 동안 일가우스카스는 공포에 질려있었다.

그의 왼발이 또다시 부러진 것이다. 이번에는 분쇄골절이었다. 발등 뼈가 산산조각 나버렸다.

클리블랜드의 모든 팀 관계자들은 깊은 슬픔에 빠졌다. 일가우스카스가 다시 코트에 서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왔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동료 선수들은 남은 시즌 결과에 신경을 쓸 수 없을 정도로 그의 부상을 슬퍼했다. 8년이 지난 지금도 클리블랜드 관계자들은 그 일을 떠올릴 때면 눈물짓곤 한다.

하지만 일가우스카스 본인의 절망은 훨씬 컸다. 지금까지 수많은 시련도 잘 이겨내 왔지만 이번만은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수술을 해도, 재활을 해도 다시 코트에 설 수 있다는 보장이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또다시 가만히 앉아서 동료들이 뛰는 모습을 구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농구선수 생활을 계속해야 할지 회의마저 들었다. 하지만 일가우스카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클리블랜드 프로 스포츠 역사에서 최악의 거품 선수로 기록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그를 다시 분발케 했다. 그는 마침내 재건 수술을 받기로 결심했다. 왼발 뼈의 대부분을 금속제 인조 뼈대로 바꾸는 대수술이었다. 나중에 ‘의술이라기보다는 예술에 가까웠다’는 평을 받은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난 다음에는 혹독한 재활 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발의 고통은 이제는 친숙해질 정도였고, 진통제를 군것질거리처럼 달고 다녀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자리에서 일어난 일가우스카스는 더 이상 발의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가우스카스는 2001-2002 시즌 기적적으로 복귀했다. 처음에는 크리스 밈의 백업으로 출전했지만 금방 선발진으로 올라섰다. 그는 62경기에 출장하며 11.1득점 5.4리바운드를 기록했다. 이듬해에는 생애 처음으로 올스타에도 선정됐다. 2003년 르브론이 입단하자 팀 전체가 르브론에 맞춰 개편됐지만 일가우스카스는 여전히 클리블랜드의 주전 센터로 남아있었다. 건강을 되찾은 일가우스카스가 르브론과 함께 힘을 발휘하면서 클리블랜드의 성적도 점점 나아졌다. 2004년 결혼한 일가우스카스는 2005년 다시 한 번 올스타에 선정되었고 팀과 5년간의 장기계약을 맺기도 했다. 이제 모든 시련은 끝난 듯했다.

2007년 2월, 클리블랜드 로스터에서 일가우스카스의 이름이 갑자기 사라졌다. 원정 3연전을 앞두고 그의 아내 제니퍼가 쌍둥이를 유산한 것이다. 일가우스카스 부부의 첫 아이들이었다. 일가우스카스는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지금까지 당한 그 어떤 부상보다도 심한 아픔이 가슴을 때렸다. 아내가 고통 받을 때 같이 있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도 그를 괴롭혔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고통을 이겨내고 다시 돌아왔다. 지금까지 그를 믿고 기다려준 팀을 어려움에 빠뜨릴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아내가 일가우스카스가 코트에서 뛰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다. 네 경기 만에 복귀한 일가우스카스는 클리블랜드의 첫 파이널 진출을 이끌었다.

NBA 13시즌 째를 맞고 있는 일가우스카스는 이번 시즌 26분간만 출장, 15.1득점과 7.5리바운드를 올리고 있다. 53%의 야투율은 생애 최고이고, 평소에도 넓었던 슈팅 범위를 더욱 늘려 올시즌에만 벌써 6개를 성공, 지난 시즌까지 성공시킨 3점슛 갯수(5개)를 이미 넘어섰다. 우리 나이로 35세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발전을 멈추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일가우스카스가 수많은 시련을 딛고 계속 발전할 수 있는 것은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 때문이다. 몇 주 전 필라델피아 원정 경기에서 왼발 부상을 당해 라커룸으로 향했을 때, 엑스레이 사진을 찍은 필라델피아 의료진들은 깜짝 놀랐다. 재건 수술을 받을 때 집어넣은 인공뼈가 발을 온통 뒤덮고 있어서 부상 부위가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묻는 의료진들에게 일가우스카스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음, 그거 설명하자면 좀 긴데요."
지난 주 미네소타 원정 경기에서 일가우스카스는 맥헤일 미네소타 단장과 재회했다. 맥헤일이 사진기사의 실수로 일가우스카스가 죽을 뻔했던 것을 떠올리자 일가우스카스가 대답했다. "만약 그때 제가 죽었으면, (미네소타 홈 구장인) 타겟 센터는 이름이 (저를 기념해서) Z 센터로 바뀌었을 걸요?" 일가우스카스에게는 시련조차도 유머의 소재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일가우스카스는 스스로가 동료들의 모범이 될 뿐 아니라 어린 선수들이 리그에 적응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기도 한다. 특히 외국인 선수들이 겪는 문화적 어려움을 잘 이해하고 그들이 미국 생활에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앤더슨 바레장이나 사샤 파블로비치같은 선수들은 일가우스카스가 베푼 엉망진창 유머가 섞인 따뜻한 배려 덕분에 팀에 쉽게 녹아들 수 있었다. 유순해 보이는 외모와는 다르게 상대팀과 몸싸움이 벌어지면 가장 먼저 달려가 동료들을 보호하기도 한다.

일가우스카스의 따뜻한 시선은 팀 동료뿐 아니라 자신에게 기회를 준 지역사회까지 미친다. 팀 내 지역봉사활동 모임의 일원으로써 클리블랜드와 오하이오 주를 돌며 봉사활동을 펴기도 하고, 특히 건강이 좋지 않은 아이들을 돌보는 데 관심이 많다. 클리블랜드 아동병원을 방문하는 것은 그가 자주 하는 활동 중 하나다. 일가우스카스는 클리블랜드 홈 팬들의 마음에 이미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일가우스카스가 클리블랜드에서 선수 생활을 한 13년 동안 그는 2명의 구단주, 2명의 단장, 7명의 감독, 그리고 118명의 선수들과 함께했다. 일가우스카스 개인적으로나 팀으로써나 쉽지만은 않은 세월이었다. 하지만 그는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 클리블랜드의 각종 통산 기록에 빠짐없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얼마 전 일가우스카스는 내년에 FA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스스로 포기하고 클리블랜드에 남기로 했다. 르브론이 말한 것과 같이, 일가우스카스는 클리블랜드에서 영구 결번될 것이다.

일가우스카스가 2010년 후에도 선수생활을 계속할 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언제 은퇴하건, 클리블랜드 팬들은 그가 겪은 시련과 이를 극복한 그의 열정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경제적 어려움도, 거듭된 부상도, 아이를 잃은 아픔조차도 농구에 대한 그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일가우스카스가 마지막 경기를 마치는 날, 팬들은 그가 보여준 것만큼의 열정을 담아 박수를 보낼 것이다.

< 저작권자 ⓒ 뛰어(www.ddueh.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