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마이클 조던 (Michael Jeffrey Jordan) - 가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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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02/17/1963 브루클린, 뉴욕 시
키: 6-6 (198cm)
몸무게: 216 lbs.(98kg)
학력: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교
포지션: 가드
드래프트: 1984년 1라운드 (3번 픽) 시카고 불스
주요수상: 1996 위대한 50 플레이어 선정 ... NBA 6회 우승 (1991~1993, 1996~1998) ... NBA 정규시즌 MVP 5회 (1988, 1991~92, 1996, 1998) ... 득점왕 10회 (1987~1993, 1996~1998) |
● 통산 성적
시즌 |
팀 |
경기 |
시간 |
FG% |
3P% |
FT% |
REB |
AST |
STL |
BLK |
TO |
PF |
PTS |
84/85 |
CHI |
82 |
38.3 |
.515 |
.173 |
.845 |
6.5 |
5.9 |
2.4 |
0.8 |
3.5 |
3.5 |
28.2 |
85/86 |
CHI |
18 |
25.1 |
.457 |
.167 |
.840 |
3.6 |
2.9 |
2.1 |
1.2 |
2.5 |
2.6 |
22.7 |
86/87 |
CHI |
82 |
40.0 |
.482 |
.182 |
.857 |
5.2 |
4.6 |
2.9 |
1.5 |
3.3 |
2.9 |
37.1 |
87/88 |
CHI |
82 |
40.4 |
.535 |
.132 |
.841 |
5.5 |
5.9 |
3.2 |
1.6 |
3.1 |
3.3 |
35.0 |
88/89 |
CHI |
81 |
40.2 |
.538 |
.276 |
.850 |
8.0 |
8.0 |
2.9 |
0.8 |
3.6 |
3.0 |
32.5 |
89/90 |
CHI |
82 |
39.0 |
.526 |
.376 |
.848 |
6.9 |
6.3 |
2.8 |
0.7 |
3.0 |
2.9 |
33.6 |
90/91 |
CHI |
82 |
37.0 |
.539 |
.312 |
.851 |
6.0 |
5.5 |
2.7 |
1.0 |
2.5 |
2.8 |
31.5 |
91/92 |
CHI |
80 |
38.8 |
.519 |
.270 |
.832 |
6.4 |
6.1 |
2.3 |
0.9 |
2.5 |
2.5 |
30.1 |
92/93 |
CHI |
78 |
39.3 |
.495 |
.352 |
.837 |
6.7 |
5.5 |
2.8 |
0.8 |
2.7 |
2.4 |
32.6 |
94/95 |
CHI |
17 |
39.3 |
.411 |
.500 |
.801 |
6.9 |
5.3 |
1.8 |
0.8 |
2.1 |
2.8 |
26.9 |
95/96 |
CHI |
82 |
37.7 |
.495 |
.427 |
.834 |
6.6 |
4.3 |
2.2 |
0.5 |
2.4 |
2.4 |
30.4 |
96/97 |
CHI |
82 |
37.9 |
.486 |
.374 |
.833 |
5.9 |
4.3 |
1.7 |
0.5 |
2.0 |
1.9 |
29.6 |
97/98 |
CHI |
82 |
38.8 |
.465 |
.238 |
.784 |
5.8 |
3.5 |
1.7 |
0.5 |
2.3 |
1.8 |
28.7 |
01/02 |
WAS |
60 |
34.9 |
.416 |
.189 |
.790 |
5.7 |
5.2 |
1.4 |
0.4 |
2.7 |
2.0 |
22.9 |
02/03 |
WAS |
82 |
37.0 |
.445 |
.291 |
.821 |
6.1 |
3.8 |
1.5 |
0.5 |
2.1 |
2.1 |
20.0 |
총합 |
- |
1072 |
38.3 |
.497 |
.327 |
.835 |
6.2 |
5.3 |
2.3 |
0.3 |
2.7 |
2.6 |
30.1 |
● Did you know? you know?
● 마이클 조던 전기 (Biograph)
어린 시절_ 마이클 조던은 1963년 2월 27일, 뉴욕 브루클린에서 아버지 제임스와·어머니 들로리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걸음마를 뗐을 때 조던 가(家)는 노스캐롤라이나주 윌밍턴으로 보금자리를 옮겼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농구선수였던 조던의 유년 시절은 또래 아이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의 형제들은 새 교복이나 운동화를 사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뛰며 어려운 집안형편에 맞는 삶을 살았지만 소년 조던은 달랐다. 조던은 동네 담배농장이나 주유소에서 용돈을 버는 대신 운동장과 동네 공터의 농구 골대로 향했다. 그렇게 이 어린 소년의 가슴속에서는 훗날 프로 스포츠 선수의 꿈이 무럭무럭 커가고 있었다. 꼭 농구가 아니어도 좋으니 운동선수를 업으로 삼고 싶었던 것이다.
정비 관리 회사에서 말단으로 시작했던 아버지 제임스는 퇴직전까지 부장을 지냈고, 은행원이었던 들로리스 역시 꾸준히 경력을 쌓아 VIP 고객상담까지 맡을 정도로 성실한 일꾼이었다. 하지만 부모의 입장에서 이러한 조던의 낙천적인 태도는 걱정거리였다.
윌밍턴에 위치한 엠슬리 A·레이니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조던의 본격적인 농구인생이 시작됐다. 주 대회 챔피언과 MVP를 획득하며 괜찮은 소질을 보였던 야구는 아버지와 상의 끝에 그만두고 농구코트에 본격적으로 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180cm의 단신 가드에 불과했던 조던은 기술 또한 특출나지 못하여 결국, 2학년 시절에 팀 선발에서 제외된다. 당시 레로이 스미스라는 라이벌에게 밀린 조던은 그 아픔을 잊지 않기 위해 훗날 독특한 복수를 실천하였는데, 시카고 불스 초창기 시절에 원정경기를 가질때마다 호텔 체크인시 레로이 스미스의 이름으로 사인을 했다는 후문이다.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 지 모를 스미스가 조던의 남다른 승부근성을 깨운 것이다.
졸업 후에 노스캐롤라이나 대학를 택한 조던은 지리학을 전공했다. 신입생에게 엄격하기로 소문난 딘 스미스 감독 아래서 '올해의 신입생'을 수상한 조던은 1982년의 NCAA 결승전에서 황금같은 결승골을 성공시키며 모교에 2번째 우승 트로피를 안겼다. 이 슛은 조던을 일약 전국구 스타로 거듭나게 해준 촉매제가 되었고, 그의 이름을 만천하에 알리는 발판이 됐다. 마지막 3학년에는 NCAA 최고의 영예인 네이스미스상과 우든상을 모두 휩쓸며 명실상부 대학 최고의 선수로 거듭났다.
시즌 종료 후 당시 주임코치였던 딘·스미스가 추천해서 프로 입성을 결의한다. 1984년의 드래프트로 시카고·불스에 전체 3위로 지명되었다.(당시의 전체 1위는 휴스턴·로케츠의 하킴·올라주원이었다.) 대학을 휴학한 후의 여름에 미국 대표로 LA 올림픽에 참가, 중심 선수의 한 명으로서 금메달 획득에 공헌했다.
시카고 불스_ 2시즌 미만의 은퇴 기간을 제외해, 입단(1984년)으로부터 2번째의 은퇴(1998년)까지 13 시즌을 시카고·불스에서 보냈다. 주된 포지션은 슈팅 가드였지만, 포인트 가이드나 스몰 포워드도 플레이 할 수 있는 올라운드인 면도 있었다.
불스에서 물러난 1998년의 시점에서 시즌 득점왕은 10회, 통산 득점은 역대 3위, 1 시합 평균은 역대 1위의 득점 31.5점이며, 그의 시대로는 예외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높은 득점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인사이드에서는 덩크나 독창적인 움직임으로부터 계속되는 레이업, 아웃사이드에서는 페이드 어웨이 점프슛 등 폭넓은 오펜스 스킬을 구사했다.
단지 득점능력 뿐만이 아니라, 초기의 조던을 유명하게 한 것은 덩크 슛이나 공중에서 디펜더를 피하는 기술이었다. 다른 선수가 우선 흉내낼 수 없는 듯한 공중의 플레이를 많이 보여 조던 개인이 주목을 끄는 큰 요인이 되었다.
승부를 결정짓는 힘을 겸비한 선수이기도 했다. 마지막 순간에서의 활약은 수많은 명장면을 낳아, 팬의 기억에 남게 되었다. 그는 6회의 NBA 우승(1991년-1993년,1996년-1998년)을 차지해, 5회의 레귤러 시즌 MVP에 빛났다(1988년,1991년,1992년,1996년,1998년). 1985년에는 신인왕을 획득. 6회의 우승에서 각각 파이널 MVP를 수상했다. 그는 또 레귤러 시즌, 파이널, 올스타의 MVP 3관을 1996년과 1998년에 2회 달성하고 있다. 그 밖에 MVP 삼관왕을 달성한 플레이어는1970년의 윌리스·리드와 2000년의 샤킬 오닐뿐이다.
우수한 디펜더이기도 해서 1988년 이후에는 은퇴하고 있던 시즌을 제외하고 1998년까지 9회 올 NBA 디펜시브 퍼스트팀에 선출되었다. 1988년에는 시즌 MVP와 최우수 수비 선수를 동시 수상했다.
조던의 코치였던 필 잭슨은 이렇게 말한다. “1984년에 조던이 리그에 왔을 때 그는 돌파를 주로 하는 선수였습니다. 그의 외곽슛은 프로 수준까지 올라와 있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프시즌에 매일 수백 개의 슛을 체육관에서 연습했습니다. 결국 그는 치명적인 3점 슈터가 되었습니다.”
경력 초기_ 입단 초의 조던은 높은 운동 능력과 득점 능력을 가지는 기대주였다. 첫해의 평균 득점은 28.2, 부상에 의해 시즌의 대부분을 결장한 두 번째 년도에는 22.7점, 그리고 세 번째 년도에 스코어링 머신이 된 조던은 매 시합 고득점을 기록해서 평균 득점은 37.1점이었다. 이 시즌 조던은 처음으로 득점왕이 되었을 뿐 아니라 평균 득점, 시즌 총득점 3,000점을 넘긴 것은 윌트·쳄벌레인 이래의 높은 수준이었다.
득점 능력뿐만이 아니라 운동 능력, 특히 공중에서의 바디 컨트롤에는 발군의 센스를 보여 젊은 선수면서 리그 굴지의 인기 선수가 되어 있었다. 시카고·불스가 원정으로 방문하는 시합은 많은 관객이 모였고 홈 시합의 티켓은 구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팀은 아직 강하지 않았고, 불스를 「조던과 그 외 4명」이라고 야유하는 기자나 팬도 있었다. 조던은 볼을 가질 기회와 슛의 갯수가 많아 독선적인 플레이를 비판하는 소리도 있었다.
입단 초의 조던은 고가의 액세서리를 몸에 달고 플레이 하는 일이 있어 선배 선수들에게는 건방진 신인이라고 불리는 일이 있었다. 1985년에는 신인이면서 올스타전 출장을 하지만 이 시합에서 조던은 아군 선수가 패스를 돌려 주지 않는(프리즈·아웃) 처사를 받는다. 후에 조던은 이 경험에 많이 다쳤다고 말하고 있다. 이 사건의 주모자라고 알려진 아이재아·토마스(디트로이트·피스톤스)와는 좋지 않는 관계가 계속 되었다.
피스톤스의 벽_ 1980년대가 종반에 가까워지면서, 이 시대 동부·컨퍼런스를 지배하고 있던 보스턴·셀틱스 도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대신해 대두해 온 것은 디트로이트·피스톤스였다.
한편 시카고·불스는, 젊은 덕·콜린스 감독 아래 힘을 돋우기 시작해 플레이 오프에서도 싸워 이길 수 있는 팀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1987년에 셀틱스에 진 다음 시즌, 불스는 매년 플레이 오프에서 피스톤스와 대전하게 된다.이 시기, 난폭한 디펜스로 배드 보이즈로 불리고 있던 피스톤스는, 대전할 때마다 불스와 조던을 패배시켰다.
피스톤스는 조던·룰로 불리는 방법으로 조던의 오펜스를 봉하려고 했다. 이것은 인사이드에 돌진한 조던을 몇 사람에 걸쳐 막는 것으로, 정신적·육체적으로 조던을 괴롭혔다.
콜린스의 지도가 보람이 있어서 불스는 50승을 할 수 있는 팀까지 되어 있었다. 그러나1988년에 이어 1989년에도 플레이 오프에서 피스톤스에 패배하면서 콜린스는 불스에서 해고되었다. 다음 시즌, 불스는 CBA의 어시스턴트 코치 필·잭슨을 감독으로 승격시켰다.
잭슨은 새로운 오펜스 시스템 도입(트라이앵글·오펜스)에 임하는 등 팀 강화에 노력했다. 불스에 가입하고 있던 젊은 스코티·피펜과 호레이스·그랜트도 점차 성장해서 마침내 레귤러 시즌의 승점을 55승까지 늘렸다. 팀 메이트의 신망이 두터운 빌·카트 라이트는 캡틴으로서 팀을 정비했고 롤 플레이어 존·팩슨은 백 코트에서 조던과 뛰는 선수가 되서 불스는 더욱 더 견실한 팀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플레이 오프에서는, 피펜의 부진 등도 있어서 3승 4패로 또다시 피스톤스에 패배했다. 이 시즌과 전 시즌 피스톤스는 연패를 이루어서 팀 사상 최고 절정기에 있었다.
최초의 3연패_ 피스톤스에 졌지만 불스의 선수 개개인의 성장 그리고 팀으로서의 성장은 분명하고 다음1990-91시즌에는 팀 사상 최다의 61승을 올리고 있었다. 조던 자신도 지금까지의 스타일을 바꾸어 잭슨 감독의 방침대로 볼을 다른 팀 메이트와 분담하는 장면을 이전보다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시즌, 팀의 승리 수는 최고에도 불구하고, 조던의 평균 득점은 과거 수년으로 최저의 31.5점이었다.(그런데도 득점왕이 되었다.)
플레이 오프에서는 컨퍼런스·파이널로 피스톤스와 4년 연속의 대전을 했다. 이 해는 4승 0패로 지금까지의 설욕을 하고 NBA 파이널에서는 매직·존슨의 LA 레이커스가 상대가 되었다. 신구 슈퍼스타 대결이 된 이 시리즈를, 시카고·불스는 4승 1패로 승리해, 첫 우승을 차지한다. 조던은 파이널 MVP를 수상했다.
다음 시즌, 불스는 리그 67승을 올렸다. 다시 NBA 파이널에 진출한 불스는,클라이드·드렉슬러의 포틀랜드·트레일블레이저스와 대전했다. 조던을 닮은 타입으로 득점력이 있는 슈팅·가드 드렉슬러를 상대로 조던은 눈부신 퍼포먼스를 보여 4승 2패로 2년 연속의 우승을 실현했다.
다음의 1992-93시즌은, 불스의 승리는 57승으로 전 시즌보다 10승 줄고 있었지만 플레이 오프에서는 다시 NBA 파이널에 진출했다. 서부·컨퍼런스를 지배한 것은 피닉스·선즈로, 팀의 에이스이며, 조던의 친구이기도 한 찰스 바클리는 이 시즌 MVP로 선정되어 있었다. 레귤러 시즌의 승리수가 리그 최다였던 선즈는 홈 코트 어드밴티지를 가지고 있어 불스는 홈에서의 시합수가 하나 적은 불리를 안고 있었다. 시리즈는 적지에서의 6 시합을 지배한 불스가 승리해, 3번째의 우승을 결정했다. 이 시리즈로 평균 41득점(NBA 역대 최고)을 기록한 조던은 MVP로 선택되었다.
1980년대말보다 「3연패」를 의미하는 「Three-Peat」라고 하는 말이 사용되고 있었지만 NBA의 팀이 3연패를 한 것은 1960년대의 보스턴·셀틱스 이래의 처음이었다.
은퇴와 복귀_ 3연패 후 사건에 의해 부친을 잃은 후 머지않아 조던은 1993년 9월에 갑자기 은퇴했다. 전성기에 있던 은퇴는 NBA와 미디어에 충격을 주었다. 은퇴 표명의 회견에서 조던은 「더 이상 증명할 것은 없다」라고 말했지만, 그전까지 계속 되고 있던 조던에 대한 비난, 3 연패에 의해 모티베이션이 저하한 것, 아버지를 잃은 충격이 은퇴의 동기가 되었다고 매스컴은 추측했다.
2년간 MLB에 도전한 후 MLB의 파업을 계기로 1995년 3월에 다시 불스에 복귀한다. 미디어는 대대적으로 조던의 복귀를 알렸다. 시즌 말의 17 시합에 참가해 팀은 플레이 오프에 진출했다.
조던은 2년에 걸쳐 야구선수로서 연습을 한 다음이어서 농구에 어울리는 체형을 되찾지 못했었다. 조던은 32세가 되어 있었다. 은퇴 전과 같이 공중을 도약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점프슛을 중심으로 한 오펜스가 눈에 띄었다.
플레이 오프에서는 1회전에서 샬럿·호네츠를 3승 1패로 꺽고 계속 되는 컨퍼런스·준결승전에서는 올랜도·매직과 대전했다. 올랜도는 샤킬 오닐과 앤퍼니·하더웨이가 있었다. 두 명의 재능있는 젊은이가 이끄는 신예의 팀이었다. 이 시리즈에 조던은 중요한 장면에서 사소한 미스를 반복해 2승 4패로 불스가 패배하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후기 3연패_1994-95시즌 종료 후의 오프시즌에 조던은 농구의 체형을 되찾을 수 있도록, 그리고 다시 우승을 노리기 위해서 열심히 트레이닝을 실시했다.
빌·카트 라이트나 호레이스·그랜트, 존·팩슨은 이미 팀을 떠나서 전력을 보강하기위해 불스는 파워 포워드에 데니스·로드맨을 영입했고 팀에 유럽의 최우수 선수 포워드 토니·쿠코치도 3년째를 맞이하고 성장세를 보이고 있었다. 조던 복귀 이전에 있던 론·하퍼도 우수한 디펜더로 변모했다. 조던 부재의 사이 팀을 견인한 스코티·피펜은 리그에서도 톱 클래스의 선수로 성장하고 있었다. 로드맨은 일찌기 배드 보이즈로 불린 디트로이트·피스톤스의 중심 멤버의 한 사람으로 또 여러 가지 언동이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기 때문에 불스에 적응 할 수 있을지가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
1995-96시즌이 시작되면서, 불스는 쾌진격을 계속해 NBA사상 최고의 승수를 노릴 수 있을 정도의 기세였다. 조던, 피펜, 로드맨은 리그 최강의 3인조로서 주목을 끌었다.
조던 자신은 1993년전의 강렬한 슬램 덩크를 하는 것보다는 기교적인 점프 슈터로서 플레이 하고 있었지만 평균 득점 30.4로 8번째의 득점왕에 빛나게 된다.
시카고·불스는 72승 10패로 레귤러 시즌을 끝냈다. 이 승수는 NBA 사상 최다이며, 70승을 넘은 팀도 역사상 처음이었다. 불스는 숫자상 사상 최강의 팀으로서 플레이 오프에 임해, NBA 파이널에서 시애틀·슈퍼소닉스와 대전했다. 적지의 시애틀에서 2경가를 패배했지만 6차전에 시카고로 돌아와 4번째의 우승을 결정했다. 조던은 다시 파이널 MVP를 수상했다.
계속 되는 1996-97시즌 불스는 전 시즌보다 3승 적은 69승으로 레귤러 시즌을 끝낸다.
플레이 오프에서는 이 시즌도 불스는 파이널에 진출한다. 서부·컨퍼런스에서는, 유타·재즈가 올라왔다. 사상 최고의 명콤비라고 일컬어지는 존·스탁턴과 레귤러 시즌의 MVP 칼·말론을 상대해서 시리즈는 4승 2패로 불스가 승리한다. 첫 경기의 버저 비터와 적지 솔트레이크 시티에서의 병에도 불구하고 활약한 조던이 다시 MVP로 선택되었다. 불스와 조던의 우승 수는 5회가 되고 있었다.
계속 되는 1997-98시즌은 필·잭슨감독이 시즌 후의 퇴임을 빠른 시기부터 암시하고 있어 피펜은 팀 경영진과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있었다. 강호 불스는 금년에 최후일까라고 말하는 관측을 매스컴은 잭슨의 표현을 빌려 라스트 댄스라는 말로 나타냈다. 복귀 이후 매스컴이나 팬은 자주 조던의 연령을 화제로 하고 있어서 「언제까지 플레이 할까」가 관심의 초점으로 되어 있었다. 조던은 「잭슨 감독과 피펜이 그만두면 자신도 그만둔다」라고 발언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진퇴에 대해서는 직답을 피하고 있었다. 이 시즌은 불스의 2번째 「3연패」가 걸려 있어 여러가지 의미로 주목을 끌게 되었다.
불스는 NBA 파이널에 진출해 대전 상대는 이번에도 유타·재즈였다. 양 팀 모두 레귤러 시즌은 62승 20패였지만, 시즌중의 대전 성적에 이기고 있던 유타·재즈가 홈 코트 어드밴티지를 얻고 있었다.
5차전까지 3승 2패로 시리즈의 무대를 유타에 되돌려 6차전 조던은 남은 5.2초에 결승 슛을 결정해 불스에 6번째의 우승과 2번째 3연패를 가져왔다. 조던은 시즌 종료 후 1999년 1월 13일에 2번째의 은퇴를 발표했다.
유명한 플레이_ 1986년의 플레이 오프 당시 사상 최강이라고 일컬어진 보스턴·셀틱스와 대전한 동부·컨퍼런스 1라운드 2차전에서 플레이 오프 기록이 되는 63득점을 올렸다. 시합 후 래리·버드는 「저것은 마이클 조던의 모습을 한 신이다」라고 코멘트했다. 시합 자체는 불스의 패배로, 시리즈도 3연패로 패배했다.
1989년의 플레이 오프 클리브랜드·캐벌리어스와 싸운 동부·컨퍼런스 1라운드 2승 2패로 맞이한 5차전 종료 직전에 99 대 100의 장면에서 조던은 몸을 옆으로 돌리면서 어려운 슛을 던져 종료의 버저와 동시에 역전을 성공시켰다. 이 슛으로 불스의 컨퍼런스·준결승전 진출이 정해졌다.
1991년 NBA 파이널 2차전, 덩크를 하기위해 도약하는 조던은 샘·퍼킨스의 블록을 피하기 위해 볼을 오른손에서 왼손에 바꾸어 낙하하면서 슛을 결정했다. 이 슛을 The Move라고 부르는 일이 있다.
1992년의 NBA 파이널 1차전, 조던이 던지는 3점슛이 모두 들어가서 전반에 6개의 3점슛 성공은 당시의 NBA 파이널 기록이었다.
1993년 파이널 6차전, 시합 종료전에 혼자서 디펜스를 돌파해 매우 높은 위치에서의 레이 업을 성공해서 글라이더라고 불린다. 그리고 NBA 3연패를 완수했다.(조던은 MVP)
1997년의 NBA 파이널 5차전, 조던은 인플루엔자로 최악의 컨디션이었지만 38득점을 올려 불스는 우승한다.
1998년의 NBA 파이널 6차전, 시합 종료 직전에 조던은 칼·말론으로부터 스틸해서 그대로 볼을 드리블해서 점프슛을 성공시킨다. 나머지 5.2초에 역전에 성공. 불스는 6번째의 우승을 결정했다.
올림픽_ 조던은 올림픽 미국 대표 팀에서 2회 플레이 해 금메달을 얻었다. 첫 번째는 대학 선수로서1984년의 LA 올림픽에서 두 번째는 1992년의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매직·존슨과 래리·버드와 함께 「드림팀」으로서이다.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의 드림팀의 활약은 센세이셔널한 것으로 각 시합에서 대승을 계속했다. 또 미국 대표의 활약에 의해 NBA와 조던의 인기가 국제적으로도 상승한다고 하는 효과도 가져왔다.
금메달 수여식에서 조던은 유니폼 챔피언(스포츠 메이커)의 로고를 성조기로 숨긴다고 하는 행동을 취했다. 이것은 조던이 나이키와 스폰서 계약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지만, 이 별로 볼 수 없는 행위는 화제가 되었다.
비난_ 1991년의 우승으로 정점까지 오른 조던의 명성은 다음 시즌에는 손상을 입게 된다.
우승한 NBA의 팀은 백악관에 초대되는 것이 전례였지만 조던은 부시 대통령을 이전에 만났던 적이 있는 것을 이유로 초대를 거절하고 있었다. 매스컴은 조던의 행동이 예의에 어긋난다며 비난했다.
같이 바르셀로나 올림픽참가를 처음 무렵에는 꺼리고 있었다고 보도된 것도 애국심이 없고 독선적이다라고 비난의 이유가 되었다.
또 이때부터 조던의 도박 버릇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어 사람들의 예상을 넘는 액수의 돈을 걸고 있는 것은 실망과 빈축을 샀다. 특히 조던의 도박 상대에게는 살해된 마약판매원이 있어 그 유품으로부터 20만 달러 조던 서명의 수표가 발견되면서 비판이 일어났다.(조던 자신은 마약 판매원의 살해에 관계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1991-1992시즌 기간 중에 시카고의 신문기자 샘·스미스가 출판한 Jordan Rules 라고 하는 저서는 조던을 자기중심적으로 독재적인 인물로서 그리고 있었다. 구체적인 정보원을 기초로 쓰여져서 비난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일련의 비난에 의해 조던은 궁지에 처했는지 명백하게 매스컴을 피하는 시기도 있었지만, 엄격한 비판도 이윽고 조던을 덮치는 비극과 함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가족의 비극_ 1993년 8월 조던의 부친 제임스는 친구의 장의로부터의 귀로 도중에 선잠을 취하기 위해 노스 캐롤라이나주의 하이웨이에 정차하고 있었는데, 두 명의 강도에 의해 살해되었다. 범인들은 마이클의 선물인 렉서스를 훔쳐 제임스의 사체를 근처에 유기했다.
범인들은 제임스의 휴대 전화로부터 빈번히 발신을 실시했기 때문에 즉시 체포되었다. 제임스는 행선지를 분명히 하지 않고 몇 일간 외박 하는 일이 자주 있었기 때문에 당초 마이클과 가족은 경찰에 수색 요청을 하지 않았다. 수색이 시작되면서 제임스의 사체가 강에서 발견되어 신원 불명인으로서 조례에 의해 소각되고 있던 것을 알았다. 미디어는 당초 제임스의 살해를 마이클의 도박 버릇과 묶으려고 했다. 제임스가 골프로의 내기로 몇 만 달러도 잃은 것을 마이클이 인정했던 것이 넓게 공표되었다.
마이클 조던이 최초의 은퇴를 표명한 것은, 사건이 밝혀지고 한 달이 넘은 후의 일이었다.
MLB에의 도전_조던은 시카고·불스를 은퇴해서 머지않아 1993-94년의 NBA 시즌 개막 2일전에 MLB·시카고·화이트 삭스의 팜 팀 버밍햄·배론스에 입단했다. 많은 팬이 마이클은 부친이 살해된 슬픔을 감추기 위해 어릴 적의 또 하나의 꿈을 추구했던 것이라고 해석했다. 화이트 삭스의 오너는, 시카고·불스의 오너이기도 한 제리·라인스도르프여서 실력이 아니고 커넥션으로 입단했던 것이라고 반감을 가지는 야구 선수나 팬도 있었다.
조던은 연령도 신장도 자기보다 한층 아래의 선수들에게 섞여 버스로 원정을 다녔다. 열심히 연습을 거듭했지만 전문가는 프로 레벨의 변화구를 치는 것은 힘들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의 성적은 127경기 출장에서 타율 2할 2리, 홈런 3개, 11 에러였고 메이저 리그에 승격은 못했다.
1994년에는 MLB 파업이 일어나 다음 해가 되어도 사태는 해결되지 않았다. 화이트 삭스 구단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선수에게 개막전에 출장하도록 요구해 따르지 않는 경우는 시설의 이용을 거부했다. 구단 사장은 조던에게는 이 조치를 적용하지 않는다고 약속하고 있었지만 구단 관계자는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조던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이 건은 조던이 불스에 복귀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워싱턴·위저즈 오너 및 인사부문 책임자_ 1999년 은퇴 후의 조던이 샬럿·호네츠(현 뉴올리언스·호네츠)의 오너진에 참가한다라는 보도가 이루어졌다. 조던은 실제 그 때문에 관계자와 협의를 실시하고 있었지만 결국은 결렬에 끝나 조던의 오너 영입은 실현되지 않았다.
다음 2000년에 그는 워싱턴·위저즈에 출자를 실시해 오너의 한 명이 되었다. 동시에 팀의 농구 운영 부문의 사장이 되었다. 이것은 선수의 인사에 관한 책임자가 된 것을 의미했다.
이 시기의 위저즈는 승수 20전후로 침체하고 있어서 팀 재건은 조던에 부과된 사명이었다.조던은 불스의 감독이었던 덕·콜린스를 위저즈 감독으로 임명한다. 2001년의 드래프트에서는 위저즈는 전체 1위의 지명권을 획득하고 조던은 과미·브라운을 지명했다. 고졸의 신인이 전체로 1위 지명을 받는 것은 NBA 사상최초여서 당시 논의를 부르고 있던 신인의 저연령화를 상징하는 사건이 되었다.
2번째의 현역 복귀_ 2001년에는 침체를 계속하는 위저즈를 위해서 2번째 현역 복귀를 한다. 이전에는 가드 포지션이었지만, 팀 사정에 의해 조던은 포워드로 플레이 하게 되었다. 그의 기술은 매년 약해지고는 있었지만 2001-02년 시즌은 부상에 골치를 썩이면서도 평균 23점의 기록을 올렸다. 2002-03년 시즌은 평균 20점을 올린다. 라스트 시즌에는 리그 사상 유일한 40세에 40득점이라고 하는 기록도 수립했다.
복귀 당초 조던은 팀을 플레이 오프에 진출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2001-02시즌은 37승 45패로 동부·컨퍼런스 10위 2002-03시즌은 37승 45패로 컨퍼런스 9위로 목표를 완수하지 못하고 끝났다.
2002년 NBA 올스타 게임에서는 이전에 그의 상징인 슬램 덩크를 실패해 시청자들이 망연자실했다. 그러나 다음 시즌의 올스타 게임에서는 시합 종료 직전에 역전 페이드 어웨이 슛을 넣었다. 직후에 재역전되었지만 이미 시즌 종료 후의 은퇴를 표명하고 있던 조던에 대해 경기장에서는 조던 콜이 반복해졌다.
비즈니스_ 1980년대에 NBA에서 플레이 한 이후 조던은 많은 기업과 광고 계약을 맺어 여러가지 사업을 다루어 왔다. 조던은 프로농구 뿐만 아니라 본업 이외로 얻는 수입의 크기에서는 스포츠계에서도 두드러진 존재가 되었다.
조던의 초기부터 가장 중요하게 된 것은 스포츠 용품 메이커 나이키와의 관계였다. 조던은 신인의 시즌보다 나이키와의 계약을 맺어 자신의 이름을 브랜드에 도입한 농구화 「에어·조던」시리즈의 생산·발매가 개시되었다.
에어·조던 시리즈의 텔레비전 CM의 제작에는 당시 신인 영화 감독이었던 스파이크·리가 기용되었다. 조던의 운동 능력을 강조하면서도 기발한 연출을 넣은 리의 CM은 히트해서 조던의 인기와 함께 에어·조던은 폭발적인 매출을 보였다. 조던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던 러닝 개런티 계약을 맺고 있어 신발의 매상에 비례해 조던의 수입도 상승했다. 나이키 자신도 당시 업계 1위였던 컨버스를 제치게 되었다. 이후 NBA의 스타 선수의 상당수는 나이키와 같은 계약을 맺게 되었다.
에어·조던에 관해서는 주로 두 가지로 비판이 일어났다. 하나는 이 시리즈가 너무 인기를 얻었기 때문에 소년 소녀들이 신발을 노린 강도의 피해를 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있던 것이었다. 하나는 에어·조던을 생산하기 위해서 개발 도상국의 아동들이 저임금으로 일하게 되고 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어느 쪽이나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은 곤란한 문제이며 조던도 명확한 반론은 하고 있지 않다.
조던은 식품 광고도 폭넓게 했다. 맥도날드의 CM에 출연해 현지의 시카고에서는 「마이클 조던·스페셜」이라고 하는 메뉴가 나왔다. 게토레이의 CM로 채용된 「마이크 같이 되고 싶다」라고 하는 노래는 널리 알려졌다. 그 밖에 코카·콜라의 캐릭터가 된 것 외에 시리얼 식품 「위티즈 (Wheaties)」에서도 조던의 모습이 패키지에 등장했다.
조던은 속옷 메이커 헤인즈와도 광고 계약을 맺었고 1996년에는 영화 「스페이스·잼」에 출연해, 애니메이션의 캐릭터 벅스·바니 래리·버드, 찰스·바클리 , 배우 빌·머레이 등과 공동 출연했다.
조던은 시카고 뉴욕, 고향 노스캐롤라이나주에 레스토랑을 가지고 있다.
조던의 무브먼트_ 1991년의 첫 우승과 1992년의 올림픽 출전을 거치고 조던의 인기는 새로운 차원에 도달했다. 국제적으로 지명도가 상승했다, 국내에서는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조던을 따라다녀서 보통수준의 일상생활을 보내는 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조던을 주제로 했다 Hang Time Rebound의 저자 인기·작가인 보브·그린은 조던이 엘비스·프레슬리의 재림이며, 「미국 문화의 정점으로 올라갔다」라고 표현했다.
사람들은 조던이 사상 최고의 농구 선수다라고 논할 뿐만 아니라 베이브·루스, 무하마드·알리와 비교하는 등 농구를 넘은 차원으로 그의 존재를 말하게 되었다.
조던이 이런 존재가 된 것은 몇 가지의 요인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운동 능력 _조던은 역사적으로 봐도 매우 높은 운동 능력을 가지고 있어 보는 사람의 주목을 끄는데 충분했다. 그는 사람들이 본 적도 없는 움직임을 자주 보여 특히 공중에서의 플레이는 보는 사람을 경탄시켰다. 닉네임 「에어」를 만든 수직 점프는 122 cm를 기록해서 중계하는 아나운서는 조던이 점프 하면 「TAKE OFF(이륙을 개시했다)」라고 표현했을 정도이다. 조던의 개인 능력이 주목받게 된 것은 시카고의 시장이 비교적 컸던 일, 캐리어 초기에 불스의 감독을 맡고 있던 Kevin Loughery가 조던을 자유롭게 플레이 시킨 것도 있다.
80년대의 NBA의 융성_1970년대 말기에는 NBA의 인기는 침체하고 있어 리그의 이미지도 별로 좋지 않았다. 그러나 데이비드·스턴이 커미셔너로 취임해 리그의 재건에 노력한 것, 매직·존슨과 래리·버드의 라이벌 관계가 많이 주목받은 것 등에서, NBA의 인기는 상승하며 갔다. 매직과 버드가 캐리어의 말기에 들어가는 무렵에는 다음 조던 시대에의 토양이 충분히 완성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시대에 케이블 TV가 보급된 것도 이 흐름을 도왔다.
상업적인 성공_조던은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을 거둔 스포츠 선수의 한 사람이다. 1998년의 시점에서 Fortune잡지는 조던이 프로 들어가 이후 100억 달러의 경제 효과를 올렸다고 말하고 있다.이것은 본업인 농구 뿐만이 아니라 나이키,맥도날드,코카콜라,게토레이 등과의 스폰서십 없이는 완수할 수 없다. 특히 1980년대에 당시 신진 영화 감독이었던 스파이크·리 지휘에 의한 나이키 일련의 CM이 성공했던 것이 크다.
그 외_1989년에 결혼, 아내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낳았다. 조던은 일리노이주 하이랜드 파크에 주거지를 가지고 있다. 파니타 부인은 2002년에 이혼 소송을 일으켰지만 후에 화해했다.
조던은 가장 빠른 시기에 머리를 대머리로 한 NBA선수의 한 명이었다. 그가 연령에 비해서 빨리 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했던 것이 이유의 하나였지만 1990년대 초 이후 대머리는 북미의 젊은이, 특히 흑인 남성의 사이에서는 패션으로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조던은 경기 중에 집중하고 있을 때에는 혀를 내미는 버릇이 있는 것도 유명했다.
일상생활로는 골프를 좋아하고 있어, 시합인 어느 날에 수 홀을 도는 일도 자주 있었다. 골프를 좋아하는 것이 지나쳐 1990년대 초반에는 내기 골프가 사회의 비판을 받은 적도 있었다.
시합 전에는 스테이크와 포테이토를 먹고 시합에 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