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 & COLUMNS/POINT GUARD 2009. 12. 22. 19:40

숫자로 보는 NBA의 크리스마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다들 크리스마스 계획은 잘 세우고 계신지? 멋진 이성 친구와의 데이트가 예정되어 있다면 참으로 축하할 일이다. 하지만 24일 아침에 잠이 들어 26일에 눈을 뜨겠다며 괴로워하고 있는 이들도 분명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 여러분들을 위해 준비했다. 이름 하여 "숫자로 보는 NBA의 크리스마스". 자고로 숙면을 유도하는데 숫자보다 좋은 게 또 어디 있겠나.

미국과의 시차로 인해 NBA의 크리스마스 경기는 우리 시각으로 26일 새벽에 펼쳐지게 된다. 24일 아침에 이 글을 읽고 단잠에 빠진 뒤, 26일 새벽 2시에 일어나 크리스마스 매치를 즐긴다면 2009년 크리스마스도 안전하게 넘길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럼 시작해볼까?


크리스마스 최고의 단골손님


24일 아침에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크리스마스 최고의 단골손님은 단연 '케빈'일 것이다. 그렇다면 NBA 팬들에게 크리스마스 최고의 단골손님은 누구일까?

크리스마스는 미국 최고의 축제 기간이다. 필연적으로 TV 시청률과 경기장을 찾는 이들의 발걸음이 늘어난다. 해서 리그 사무국은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가장 인기 있고 커다란 시장성을 가진 팀들의 경기를 주선한다. 크리스마스 단골손님이라는 것은 곧 가장 인기 있는 팀이라는 이야기로 해석해도 좋다는 것이다.

리그 역사상 크리스마스에 가장 많은 초대를 받은 귀하신 손님은 단연 뉴욕 닉스다. 1946년, NBA가 아닌 BAA라는 이름으로 처음 리그가 출범했을 당시부터 2008년까지 총 63번의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동안 무려 44회나 리그의 부름을 받았다. 그 때나 지금이나 뉴욕이라는 거대한 연고지를 등에 업은 그들은 리그 제일의 시장성을 가진 팀으로써의 위치를 확고히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뉴욕은 프랜차이즈의 두 번째 시즌이었던 1947년의 크리스마스부터 리그의 초대를 받았다. 당시 (지금은 사라져버린)'프로비던스 스팀롤러스와의 경기에서' 89-75로 승리를 거두며 크리스마스의 기쁨을 만끽했다.

뉴욕의 뒤를 잇는 팀은 LA 레이커스로 총 35회의 크리스마스 매치를 경험했다. 1949년의 크리스마스 매치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그들은 특히 최근 들어 더욱 자주 크리스마스의 단골손님으로 손꼽히고 있다. 뉴욕이 계속되는 부진에 빠진 사이 샤킬 오닐, 코비 브라이언트 등의 슈퍼스타들을 앞세워 단연 최고의 인기 팀으로 군림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닐과 브라이언트는 나란히 총 11회의 크리스마스 매치를 경험하며 크리스마스 최다 출연 기록을 가지고 있다. 특히 브라이언트의 경우 예정되어 있는 올 해의 크리스마스 매치까지 소화할 경우 무려 11년 연속 크리스마스에 얼굴을 보이며 리그 제일의 슈퍼스타임을 입증하고 있다.

반면 리그 제일의 명문 팀으로 손꼽히는 보스턴 셀틱스의 경우 크리스마스 매치 경험이 총 25회에 그치고 있다. 디트로이트 피스톤즈(32회), 필라델피아 76ers, 새크라멘토 킹스(이상 29회)등의 팀들보다도 적은 횟수에 불과한 수치다. 이는 시즌 일정이 지금보다 적었고, TV 중계 문화가 발달하기 이전에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는 점에서 약간의 손해를 보는 측면이 있고, 우수했던 성적에 비해 플레이 스타일이 화끈한 공격 농구와는 조금 거리가 있었던 탓에 상대적으로 크리스마스의 외면을 받아왔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크리스마스의 사랑을 듬뿍 받는 팀이 있는가 하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크리스마스 매치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팀들도 존재한다. 샬럿 밥캣츠, 멤피스 그리즐리스, 미네소타 팀버울브스가 그 주인공들. 이들의 공통점은 비교적 역사가 짧은 신생팀이라는 점, 그 동안의 성적이 신통치 못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하지만 세 팀 모두가 젊고 풍부한 가능성을 갖고 있는 팀이기에 머지않은 미래에 이들과 함께할 크리스마스가 찾아오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크리스마스의 강자와 약자

당대의 인기 팀들이 총 출동하는 크리스마스 매치인 만큼 그들의 승패 여부도 큰 관심사가 되곤 한다. 가장 많은 초대를 받은 뉴욕은 크리스마스 전적 20승 24패로 채 5할이 되지 않는 승률을 기록 중이다. 화려한 초대 경력에 비해 성적표는 조금 초라한 것이 사실. 그렇다면 크리스마스 최고의 강자는 누구일까?

물론 댈러스 매버릭스(2전 2승)처럼 100%의 승률을 기록하고 있는 팀도 존재하지만 그 표본이 너무 작다. 실질적인 크리스마스 최고의 강팀은 바로 포틀랜드 트레일 블레이저스다. 포틀랜드는 지금까지 총 15회의 크리스마스 매치를 치루며 무려 13승 2패라는 압도적인 승률을 기록 중이다. 특히 2008년의 크리스마스에 댈러스에게 패배하기 전까지는 크리스마스 12연승을 기록 중이었을 만큼 크리스마스만 되면 힘이 펄펄 나는 팀이다. 올 해의 크리스마스에도 초대를 받은 그들은 덴버 너게츠와의 경기를 준비 중이다. 과연 크리스마스 통산 14승째를 기록할 수 있을 것인지를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는 관전 포인트가 될 것이다.

이런 포틀랜드를 부럽게 바라보는 팀이 있으니 바로 오클라호마시티 썬더다. 시애틀 슈퍼소닉스 시절부터 총 11번의 크리스마스 매치에 초대받은 그들이지만 단 한 번도 승리하지 못하며 11전 전패를 기록 중이다. 2회 이상 크리스마스 매치를 경험한 팀들 중 유일하게 전패의 수모를 겪고 있는 팀이기도 하다. 1997년의 크리스마스를 마지막으로 계속해서 리그 사무국의 초대장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섭섭함 보다는 안도감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과연 오클라호마의 크리스마스 첫 승은 언제쯤 이뤄질까?


크리스마스 최고의 퍼포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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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경기 100득점이라는 거짓말 같은 기록을 가지고 있는 월트 체임벌린은 크리스마스에서도 그 괴물 같은 위력을 유감없이 뽐냈다. 그 중에서도 1961년의 크리스마스가 단연 백미였다. 당시 필라델피아 소속이었던 체임벌린은 1961년 크리스마스 매치에서 뉴욕을 상대로 59득점 36리바운드라는 어마어마한 활약을 펼쳤다. 비록 팀은 136-136으로 패배했지만 체임벌린이 잡아낸 36개의 리바운드는 지금까지도 크리스마스 역대 최다 리바운드 기록으로 남아있다.

59득점 역시 1984년 버나드 킹이 60득점을 기록하기 전까지 23년간 크리스마스 역대 최다 득점 기록으로 남아있었다(현재 2위). 재미있는 것은 당시 체임벌린의 기록을 깨뜨린 킹의 당시 소속팀이 뉴욕이었다는 점이다. 이래저래 체임벌린의 크리스마스는 뉴욕 때문에 김이 새버리는 느낌이다.

현역 선수들 중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인 이는 트레이시 맥그레디다. 그는 올랜도의 유니폼을 입고 총 3번의 크리스마스 매치를 경험했는데 그 때마다 최고의 컨디션을 자랑했다. 그의 첫 크리스마스 매치는 2000년 인디애나 페이서스와의 경기였다. 당시 팀은 93-103으로 패배했으나 맥그레디는 홀로 43득점 9리바운드를 기록하며 맹활약했다. 2002년의 크리스마스에 두 번째 초대를 받은 맥그레디는  디트로이트를 상대로 46득점을 퍼부으며 팀의 승리를 이끌었다. 이는 크리스마스 단일 경기 역대 최다 득점 부문 5위에 해당하는 수치다. 이 뿐만이 아니다.

바로 다음 해였던 2003년 크리스마스에서는 당시 최고의 신인이었던 르브론 제임스를 상대로 41득점, 8리바운드, 1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팀의 승리를 챙겼음은 물론이고 제임스의 첫 번째 크리스마스 매치를 혹독한 신고식의 장으로 만들어버렸다. 맥그레디는 크리스마스 커리어 평균 43.3득점을 기록 중인데 이는 리그 역대 최다 평균 득점 기록이기도 하다.

이쯤 되면 많은 이들이 마이클 조던의 크리스마스 평균 득점 기록에 대해 궁금해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던은 팬들의 기대와는 달리 겨우(?) 28.3득점을 기록하는데 그쳤다.


숫자로 보는 NBA의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최다 출전 : 뉴욕 닉스 44회
크리스마스 최다 승 : 뉴욕 닉스, LA 레이커스 20승
크리스마스 최다 패 : 뉴욕 닉스 24패
크리스마스 최다 연승 : 포틀랜드 트레일 블레이저스 12연승
크리스마스 최다 연패 : 오클라호마시티 썬더 11연패

크리스마스 통산 최다 득점 : 오스카 로버트슨 377점 (현역 : 코비 브라이언트 269점)
크리스마스 통산 최다 리바운드 : 빌 러셀 176개 (현역 : 샤킬 오닐 147개)
크리스마스 통산 최다 어시스트 : 오스카 로버트슨 145개 (현역 : 코비 브라이언트 60개)

크리스마스 평균 최다 득점 : 트레이시 맥그레디 43.3점
크리스마스 평균 최다 리바운드 : 월트 체임벌린 25.3개 (현역 : 샤킬 오닐 13.4개)
크리스마스 평균 최다 어시스트 : 오스카 로버트슨 12.1개 (현역 : 제이슨 키드 10.5개)

크리스마스 단일 경기 최다 득점 : 버나드 킹 60점 (1984년)
크리스마스 단일 경기 최다 리바운드 : 월트 체임벌린 36개 (1961년)
크리스마스 단일 경기 최다 어시스트 : 네이트 아치발드 (1972년) , 가이 로저스 (1966년) 18개

NEWS & COLUMNS/JEFFREY23 2009. 6. 18. 08:20

90년대 시카고 불스의 오늘 모습은?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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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A는 그동안 수많은 풍파와 룰개정등을 거쳐 반세기가 넘는 리그로 성장했다. 시대마다 각기 다른 시스템이 도입됐으며 구단과 선수들은 마치 카멜레온 처럼 그에 맞는 색깔로 변화를 거듭해왔다. 때문에 '어느 시대의 팀이 더 뛰어나다'라는 주제에 답을 내놓으려면 최소한 경기의 규칙과 리그의 시스템 등의 동일 명제가 수반되어야 한다.

스포츠계에서 과거지향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새로운 기술과 전통의 창출은 어떠한 집단을 막론하고 통용되는 법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되돌아볼 이 팀은 어느 시대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불굴의 팀이었으며 동시에 승리에 목마른 오늘날의 모든 이들에게 성공의 영감을 주고 있다.

승리하는 팀의 노하우는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변치 않았다. 견고한 팀워크, 뚜렷한 팀 칼라. 그리고 확실하게 팀을 이끌수있는 수퍼스타가 있다면 금상첨화다. 하지만 이러한 사례는 시카고가 아닌 다른 팀에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시카고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단순히 농구를 잘했던 팀이라면 지천에 널렸다.

지구 최고의 농구선수와 스몰포워드의 개념을 정립한 만능 재주꾼. 엔터테이너이자 매일밤 가십거리를 쏟아내는 리바운드 챔피언. 여기에 영화배우 뺨치는 미남 유럽용병에 NBA역사상 가장 높은 3점슛 확률을 자랑하는 전문슈터까지..이 모든 캐릭터가 한 팀에 있었다면 믿겨지는가? 불과(라고 하기에 그리 멀지 않지만) 13년전에 그러한 팀이 있었다.

NBA 역사상 가장 많은 정규시즌 72승과 구단 4번째 우승이라는 경사를 맞은 시카고의 업적 이면에는 개개인의 화려함도 이어졌다. 2년여간의 외도 끝에 돌아온 마이클 조던은 MVP 3관왕과 함께 8번째 득점왕, 올 NBA팀과 수비팀에 모두 선정되며 황제의 귀환을 만천하에 알렸다. 코트의 악동 데니스 로드맨도 5년 연속 리바운드왕에 오르며 건재를 과시했다. 팀에 전에 없는 활력을 불어넣어 주며 주위의 우려를 불식시켰음은 물론 우승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들의 이룬 업적은 실로 대단하다. 하지만 그것이 오래도록 사랑받는 이유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추억은 조금씩 잠식되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하지만 때로는 애뜻하게 가슴한구석에 아련함이 남아 있는 추억들도 있기 마련이다. 필자에게는 1996년도 시카고 불스가 그러한 존재로 남아있다. 신인왕 데릭 로즈와 캡틴 커크 하인릭이 이끄는 현재의 시카고에 만족할 수 없고, 끊임없이 과거의 답습을 갈망하며 투영시키는 이유다.

전 세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이들의 현재 모습은 어떠할까?  


마이클 조던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시카고의 리더 마이클 조던. 조던은 1998년 6번째 우승이후 손가락 부상과 팀의 해체를 이유로 2번째 은퇴를 선언했고, 시카고와 영원한 이별을 고하였다.

이후 그의 고향 노스캐롤라이나 주에 소재한 샬럿 호네츠로 복귀가능성이 제기되며 팬들의 궁금증을 증폭시키도 하였다. 하지만 그가 택한 제2의 농구인생은 다름 아닌 워싱턴에서 이어졌다. 조던은 NBA 프로팀인 워싱턴 위저드와 아이스하키 리그인 NHL의 워싱턴 캐피털스의 소유 지분을 취득하며 구단주로서 새출발을 다짐했지만 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듬해인 2001년 단지 농구를 사랑해서, 농구가 그리워서 선수로 복귀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날 시카고에서 겪었던 성공적인 컴백신화는 쌓지 못했다. 남다른 그의 농구 열정에는 찬사가 쏟아졌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과 비난도 함께 했기 때문이다.

그가 맺은 2년 계약기간동안 팀을 플레이오프에 올려놓는데 실패했을뿐만 아니라 구단과 동료들에게도 박수를 이끌지 못할정도로 원만한 대인관계를 이끌지 못했다. 3번째 은퇴를 선언한 조던이 다시 한 번 구단주로 돌아오는데 실패한 이유도 워싱턴 선수단의 거센 반대가 한 몫했을 정도였다.

 


스카티 피펜



데니스 로드맨



토니 쿠코치



론 하퍼



룩 롱리



스티브 커



빌 웨닝턴



랜디 브라운


09/07/01 Chicago named Randy Brown director of player development

줃 버츨러



제이슨 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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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시카고 불스의 백코트를 지휘했던 놈 반 리어의 사망소식이 알려진지 불과 2시간 후에 또 다른 비보가 울리며 시카고 시민들은 망연자실하였다. 전 시카고의 감독이자 지역 방송국 아나운서를 담당해온 조니 ‘레드’ 커는 오랫동안 전립선암과 투병해왔지만 76세를 일기로 그렇게 유명을 달리했다. 홈구장인 유나이티드센터에서 그의 기념식이 치러진지가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조니 ‘레드 커’는 시카고 불스의 아이콘이다” 구단주 제리 레인스도프의 말이다. 그는 이어서 “커의 위대함을 그리워 할 것이다. 그의 명복을 빌고, 유가족들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한다”며 비통함을 감추지 않았다.

NBA 마니아들이나 시카고 불스의 골수팬이 아니라면 그가 이름이 다소 생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이 활약하던 지난 90년대 경기를 떠올려보자. 시카고의 홈경기가 있을 때마다 조던은 어김없이 경기 전, 송진가루를 손바닥에 묻혀 털곤 했다. 마치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르브론 제임스처럼 말이다. 제임스의 화려한 퍼포먼스에는 열광하는 관중들의 함성이 뒤따랐지만, 조던의 행동에 늘 곤욕을 치룬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古 레드 커다. 가루가 흩날릴 때마다 익살스런 표정으로 쿨럭 대던 그의 모습을 기억한다면 이미 그에 대한 절반의 추억은 떠올린 셈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커가 이룬 업적과 족적을 모두 설명할 수 없다. 흔히 알고 있는 WGN(시카고 불스 지역방송국) 아나운서 자리는 그의 기나긴 농구여정의 종착역에 불과 했기 때문이다.


농구인의 첫걸음, 선수생활의 시작   

1932년 7월 17일 세상에 태어난 레드 커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아버지 매튜와 스웨덴 출신의 어머니 플로렌스 사이에서 태어난 유럽혼혈아다. 하지만 아버지 매튜는 레드 커가 3살 때 폐렴으로 일찍이 세상을 등졌다.  

레드 커의 근래, 생전 모습을 그야말로 주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온화한 할아버지 그 자체였다. 백발이 성하며 자켓 사이로 삐져나온 후덕한 뱃살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영광의 시절이 있었다. 레드 커는 고등학교와 대학 농구에서 뛰어난 선수였고, NBA 우승과 올스타 선발경험도 지니고 있다.

뉴욕에 소재한 틸든 고교에 입학한 레드 커는 졸업반에 오르기 직전 무려 22cm 가까이 성장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된다. 전 SBS 한창도 해설위원의 명언으로 익히 알려져 있는 스코티 피펜의 ‘경이로운 24cm'의 기적이 레드 커에게도 찾아온 셈이다. 이는 가장 좋아했던 축구 대신 농구를 택하게 만든 일대 사건이었다. 농구선수로서 최고의 날개를 달은 레드 커는 변화를 빠르게 받아들이며 곧바로 모교를 1950년 리그 우승팀으로 올려놓았다.

레드 커는 고교 졸업 직후 일리노이스 대학의 리쿠르팅으로 마침내 시카고와 연을 맺게 되었다. 일리노이스는 현재 마이클 조던의 장남인 제프리 조던이 소속되어 있는 학교로서 시카고 지역에서는 팬들의 지지도가 가장 높은 곳이다. 그가 NCAA(미 대학농구)에 남긴 업적은 굉장하다. 레드 커는 1952년 빅10 타이틀을 견인한데 이어 그 해 모든 대학농구선수들의 로망이자 꿈의 무대인 파이널포(역자주 : 토너먼트 4강전을 일컫는 말)를 밟는 기염을 토해냈다. 3년의 재학시절동안 그가 남긴 1299점은 모교 최다득점으로 남아있으며 컨퍼런스에서는 3번째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이러한 레드 커의 활약은 시카고 지역 언론인 트리뷴에서 9번째로 선정한 ‘빅10 실버 바스켓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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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인 1954년 NBA 드래프트에서 행운은 계속되었다. 전체 6번째로 시라큐스 내셔널스(現 필라델피아 76ers)에 지명된 레드 커는 데뷔와 함께 훗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전설적인 선수와 호흡을 함께 하게 됐다. 돌프 쉐이즈는 프로통산 12차례나 NBA올스타와 리바운드왕을 지낸 스타플레이어였다. 루키시즌에서 경기 당 10.5점, 6.6리바운드를 수확한 레드 커는 처음이자 마지막 우승에 기여하였다.

이후 11시즌을 시라큐스와 필라델피아에서 보낸 레드 커는 1965-66시즌을 앞두고 볼티모어 불리츠(現 워싱턴 위저드)에서 커리어를 마감한다. 통산 905경기에 출장하여 12,480점과 10,092 리바운드를 남겼으며, 경기 당 13.8점, 11.2리바운드를 기록했다. 한 번의 리그 우승과 3번의 올스타 선정도 뒤따랐다. 결코 화려하진 않았지만 무관의 제왕들도 울고 갈 우승반지도 손가락에 끼워 보며 남부럽지 않은 프로경력을 마감한 그였다.

또한 한 가지 간과하면 안 될 것이 레드 커는 매일 밤 같은 디비전의 윌트 체임벌린과 빌 러셀과 마주해야 했다는 사실이다. 러셀과 체임벌린이 누군가? 눈뜨는 아침이면 NBA 역사책의 기록을 갈아버리는 괴물들이 아니었던가. 두 거인들의 틈바구니에서 무언가를 해본다는 것은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질 일이었지만 레드 커는 쉽사리 굴복하지 않았고 당당히 더블-더블 활약을 이어왔다.

팀 동료였던 쉐이즈는 지난 2월 치러진 레드 커의 기념식에서 “50년대 최고의 센터는 빌 러셀, 2번째는 윌트 체임벌린이었고 레드 커가 넘버3였다”며 오랜 친구를 치켜세우기도 하였다. 전성기 시절의 샤킬 오닐과 현재의 드와이트 하워드와 함께 같은 디비전에서 10년 넘도록 더블-더블을 기록해온 백인센터가 있다면 어떤 평가가 내려질까? 비현실적인 상상으로 치부 될 수도 있는 가정이지만 레드 커의 시대적 상황은 현실이었다.

844경기 연속 출장 기록도 그의 성실함을 뒷받침한다. 이 숫자는 훗날 랜디 스미스와 철인 A.C 그린에 의해 깨지기 전까지 그만이 보유했던 넘사벽의 기록이었다. 마이크를 잡았던 아나운서의 모습만으로 고인을 추억하기에는 그가 남긴 NBA의 족적은 결코 작지 않았다.


세계적인 프로스포츠 팀, 시카고 불스를 창조하다

구단프론트에 몸담았던 시절에는 뛰어난 업무수행능력을 발휘하였으며, 존경받는 아나운서였다. 하지만 후세에 그가 기억될 이유가 있다면 레드 커는 오로지 시카고 불스밖에 모르는 인물이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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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불스가 탄생하기 전인 1966년, 연고지에는 이미 무수히 많은 프로스포츠 팀들이 존재하였다. NFL과 MLB, NHL등 대부분의 종목들이 한 자리씩 차고 있었다. 하지만 프로 농구팀을 창단하기 위한 여러 단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스의 탄생은 답보상태를 이어갔다. 이 가운데 레드 커가 구단프론트의 중책을 담당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신생팀 창단의 바람이 불자 타 구단들의 거센 반대로 난항을 겪었다. 하지만 레드 커는 현 미국 농구협회 이사회 회장을 지내고 있는 제리 콜란젤로를 위시하여 모든 실무진들과 힘을 뭉쳤고 결국 팀 창단에 성공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감독직을 자원한 레드 커는 젊은 황소군단을 진두지휘하였다. 33승 48패. NBA 역사상 존재했던 수많은 창단 팀들 가운데 최고기록이다. 뿐만 아니라 4대 메이저 스포츠로 불리는 NFL과 MLB, NHL에서도 전례가 없던 사건이다. 그 어떤 리그에서도 창단 첫 해 플레이오프에 오른 팀이 없었다. 레드 커의 올해의 감독상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시카고는 가드와 포워드를 겸하고 있는 제리 슬로안(現 유타 재즈 감독)이 팀 내 리바운드 리더를 차지할 정도로 단신 팀이었다. 이러한 핸디캡을 안고 있는 팀들의 해결책은 크게 다르지 않다. 팬들에게 “수비는 우리가 시합하는 방식”이라며 공약한 레드 커는 신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속공과 강력한 압박수비를 주문했고 선수들은 이를 잘 소화해냈다. 레드 커는 당시 이를 두고 “마치 YMCA 농구를 보는 듯 했다”며 만족스러워 한 바 있다. 

창단 첫 해 치고는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지만 이듬 해 29승 58로 저조한 성적을 남기며 팀을 떠난 레드 커는 당시 NBA의 인기를 능가했던 ABA로 눈을 돌리게 된다. 화려한 ABA에 매료된 그는 시카고의 어시스턴트 코치이자 오랜 친구인 알 비앙키와 함께 버지니아 스콰이어의 단장으로 취임하였다. 이후 레드 커는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닥터 J' 줄리어스 어빙과 첫 번째 계약을 맺는 행운을 누렸으며 핑거롤의 대명사인 '아이스 맨’ 조지 거빈을 EBA라는 마이너리그에서 건졌다. 특히 거빈은 폭력사태로 NCAA에서 선수자격을 박탈당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진흙 속에서 진주를 건진 것과 진배없었다. 운수 한 번 기가 막히게 좋은 인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ABA와 NBA가 리그합병이 되면서 설 자리를 잃어버린 것이다. 시카고로 돌아가야 할 것을 직감한 레드 커는 곧바로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레드 커는 당시 팻 윌리엄스 단장이의 공백을 채우기 보다는 감독직을 더 원했다. 하지만 딕 모타 감독이 버티고 있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의 손에 마이크가 들릴 시간이 온 것이다.


헤드셋과 마이크로 연 농구인생 3막, 그리고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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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나운서 경력 중 가장 자부할만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마이클 조던의 신성한 의식일 것이다. 조던은 경기 전 송진가루를 레드 커의 면전에 털곤 했는데 이것은 그가 신인 시절 처음 가졌던 연습경기부터 시작되었다. 조던은 훗날 “이 의식이 어떻게 시작됐는지는 잘 모르겠다. 처음 그를 봤을 때 멋진 정장이 눈에 띄었고, 조금 더럽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었던 것이 계기였던 것 같다”며 웃음 지었다.

레드 커가 방송인으로서 첫 발을 내딛은 것은 미국 스포츠 전문방송인 짐 더럼의 제안에 의해서였다. 이후 레드 커는 2007-08시즌까지 90년대 6회 우승과 함께 시카고와 울고 웃었다. 가까이서 까까머리의 젊은 청년이 시작했던 공중곡예를 모두 목격한 몇 안되는 인물인 셈이다.

이번 2008-09시즌에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시카고의 전반전 해설을 담당할 정도의 열의를 보였다. 암도 레드 커의 열정을 꺾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지난 2003년부터 2년에 걸쳐 모조 왼쪽 엉덩이에 의지하며 발가락 절단수술과 심장수술을 경험하였다. 모진 풍파를 견디면서 끝까지 시카고의 농구를 시청자들에게 전파하였다.

하지만 그도 결국 인간이었다. 육신을 잠식하는 암세포는 그를 휠체어에 앉혔고 이는 그가 사랑했던 시카고와 농구, 그리고 세상과 이별을 고할 시간이 가까워졌음을 암시하였다.

“제 손녀딸 아이 하나는 저를 무척이나 따릅니다. 농구랑은 상관없이요. 왠지 아십니까? 저는 노래도 부를 줄 알고 문워크도 할 줄 알거든요” 트레이드 마크인 윙크를 날리면서 레드 커가 생전에 남긴 말이다. 열혈 농구인이었지만 집에서는 인자한 할아버지의 모습도 보여주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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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니 ‘레드’ 커. 붉게 타오르는 그의 머리카락은 그의 별명으로 쓰였고 미들네임이 되었다. 마치 어빈 매직 존슨처럼 말이다. 정열의 붉은 색으로 대변되는 시카고 불스에는 그렇게 23번의 농구신에 가려진 진짜 ‘미스터 불스‘가 존재했었다.

그의 열정은 영원히 시카고와 불스팀에 살아 숨 쉴 것이며 왕조의 부활에도 함께 하리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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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COLUMNS/JEFFREY23 2009. 4. 30. 10:40

NBA 역사 속의 오늘

BY jeffrey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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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30, 1956
보스턴 셀틱스가 에드 맥컬리와 클리프 하간을 세인트 루이스 호크스로 트레이드 하며 드래프트 1번 픽을 얻었다. 보스턴은 이 픽으로 빌 러셀을 지명하였다.

April 30, 1971
떠오르는 신성 카림 압둘자바와 베테랑 오스카 로벗슨 콤비가 볼티모어 불리츠와의 파이널 4차전(118-106) 승리를 견인하며 스윕을 거두었다. 밀워키 벅스는 구단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 우승이었다.

April 30, 1975

래리 오브라이언이 J.월터 케네디에 이어 3번째로 NBA 커미셔너에 부임하였다.

April 30, 1988
서부컨퍼런스 1라운드 2차전에서 83점을 합작한 슬리피 플로이드와 하킴 올라주원(각각 42점, 41점)의 휴스턴 로케츠가 댈러스에 119-108, 승리를 거두었다. 이들은 NBA 플레이오프 역사상 두 번째로 2명이 40점 이상을 뽑아낸 주인공이 되었다.

April 30, 2002
시애틀 슈퍼소닉스의 게리 페이튼이 역사상 2번째로 올 NBA 퍼스트 수비팀에 9번 당선된 선수로 이름을 올렸다. 이 기록은 앞서 마이클 조던이 시카고 불스 시절 세운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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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COLUMNS/HELTANT79 2009. 4. 8. 01:31

마이클 조던의 작은 선행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로베르토 거레이가 미래를 내다볼 수 있었다면 그날은 평소보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출근했을 것이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1987년 8월의 어느 날, 시카고 시경에서 근무하던 거레이는 신고 전화를 받고 시카고 남부에 위치한 한 아파트로 출동했다. 꼬마 아이가 의식불명 상태로 있다는 것이었다. 응급구조대와 함께 현관문을 연 거레이는, 이후로도 계속해서 그를 괴롭히는 악몽을 만나야 했다.
방 안에는 다섯 살도 안 돼 보이는 아이가 발목에 심한 상처를 입은 채로 누워있었다. 끈으로 오랜 시간 동안 졸려있을 때나 생길 수 있는 상처였다. 호흡을 확인하기 위해 아이의 셔츠를 걷어올리자 훨씬 끔찍한 상처가 나타났다. 아이의 가슴이 화상으로 완전히 문드러져 있엇던 것이다.

“살덩어리가 완전히 문드러져서 흘러내리고 있었죠. 말도 안되는 광경이었어요. 제 평생 그런 끔찍한 모습은 처음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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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살짜리 레티 맥기의 참혹한 죽음은 시카고 시민들을 경악시켰다. 도대체 누가, 무슨 이유로 이런 어린아이를 이렇게 잔인하게 죽였을까? 시카고 언론은 레티의 사망을 주요 기사로 보도했고, 시민들은 범인이 밝혀질 때까지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레티의 친엄마 앨리시아 에이브러햄과 그녀의 남자친구 죠니 캠벨이 체포될 때까지 말이다.

에이브러햄과 캠벨은 그해 여름 내내 레티를 학대했다. 레티의 목소리가 너무 높다는 것이그 이유였다. 캠벨은 레티를 ‘계집애같다’고 나무라며 주먹과 몽둥이로 두들겼다. 담뱃불로 살갗을 지지는 것도 모자라서 다리미까지 동원했다. 에이브러햄에게서 받은 바늘로 계속해서 레티를 찔러댔다. 나중에는 끓는 물을 끼얹기도 했다. 밤에는 더 끔찍한 학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캠벨은 레티의 발목을 묶어 옷장 옷걸이에 밤새 거꾸로 매달아버렸다. 애타게 엄마를 찾았지만 소용없었다. 전에도 시 복지국으로부터 아동 방치에 대한 경고를 받은 적이 있었던 에이브러햄은 레티가 아무리 울부짖어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캠벨은 레티의 입에 헝겊 조각을 물린 뒤 감자껍데기로 눈을 비벼댔다. 레티가 죽기 전날 레티는 이미 폐렴 증세를 보이고 있었고, 쇄골과 골반이 부러져 있었다.

운명의 날, 캠벨이 레티를 풀어주자 레티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목이 마르다고 했다. 캠벨이 사내답게 스스로 찾아먹으라고 소리치자, 몸무게가 12킬로그램도 안 되는 레티는 혼자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캠벨이 게으름 피우지 말라고 소리치는 순간 마침내 레티의 고통도 끝이 났다. 레티가 학대의 손길에서 벗어나 영원한 안식을 찾았을 때, 레티의 친엄마 에이브러햄은 바로 옆에 앉아서 ‘헐크’를 보고 있었다.

에이브러햄과 캠벨을 체포하긴 했지만 어려움은 남아있었다. 두 사람의 혐의에는 정황증거만이 뚜렷할 뿐, 결정적인 목격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혐의를 극구 부인했고, 아파트 주민 중에는 레티의 울음소리를 들은 사람조차도 나타나지 않았다. 대부분의 아동 학대 사건이 겪는 ‘증인 불명’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담당 검사인 제임스 비고네스가 이 최악의 살인자들이 법의 심판을 받도록 최선을 다 하겠다고 천명했지만 사건은 장기화 조짐을 보였고, 어쩌면 살인마들이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날 수도 있었다.
두 사람의 희망은 큰 오산이었다. 레티가 뒤늦게 발견되던 날, 그 아파트에는 레티 말고도 아이 한 명이 더 있었던 것이다. 레티보다 한 살 많은 형인 코르넬리우스 에이브러햄은 그해 여름 내내 레티가 학대받는 모습을 지켜봤고 그 끔찍한 형벌 중 몇 가지는 함께 고통받기도 했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에이브러햄과 캠벨의 혐의를 입증할 수 있는 증인은 코르넬리우스뿐이었다.

하지만 코르넬리우스가 증언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당시 다섯 살에 불과했던 코르넬리우스가 그날 있었던 일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경우 배심원들이 얼마나 믿어줄지 의문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코르넬리우스가 살인자 두 명과 또다시 대면하는 일에 극도의 공포를 나타냈던 것이다.
하지만 비고네스 검사는 포기하지 않았다. 비고네스는 코르넬리우스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코르넬리우스가 심리적으로 안정을 찾도록 해주는 한편, 동생을 위해서라도 법정에서 진실을 밝혀야 한다며 코르넬리우스를 설득했다.

코르넬리우스는 마침내 용기를 내 법정에 섰다. 평소 농구와 함께 책읽기를 가장 좋아하는 소년이었던 코르넬리우스는 두 살인자의 얼굴을 마주보며, 배심원들에게 책을 읽어주듯이 그해 여름에 있었던 일을 또박또박 설명해줬다. 정의는 승리했다. 2년여의 재판 끝에 에이브러햄과 캠벨은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두 살인자는 절망으로 고개를 떨궜다.

살인자는 죗값을 치렀지만 살아남은 자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코르넬리우스는 부모의 사랑이 가장 필요한 나이에 엄마로부터 ‘너는 필요 없는 녀석이야. 너 같은 녀석은 죽어버려야 해’라는 말을 들으며 학대받아왔다. 다섯 살은 엄마가 검은 것을 희다고 하면 희다고 믿는 나이다. 이제는 더 이상 그런 말을 듣지 않아도 됐지만, 어린 코르넬리우스는 자신이 계속 살아가도 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코르넬리우스는 극도로 조용하고 주위에 무관심한 아이가 되었다.
비고네스 검사도 코르넬리우스가 법정에 서야 할 이유를 설명해줄 수는 있었지만, 어째서 계속 살아가야 하는지, 살아가는 게 세상에 무슨 도움이 되는지 설명해줄 수는 없었다. 비고네스는 살인에서 재판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심층 취재한 시카고 트리뷴의 밥 그린 기자와 함께 코르넬리우스에게 웃음을 찾아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굳게 닫힌 문을 여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린 기자는 시카고 불스 프런트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코르넬리우스가 농구를 좋아한다니 일요일에 열리는 마이애미 히트와의 경기를 볼 수 있게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이미 그날 경기는 매진되었지만 특별히 자리를 마련해주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1990년 4월 1일, 코르넬리우스는 그린, 비고네스와 함께 태어나서 처음으로 시카고 스타디움을 찾았다.

아무리 마음의 문을 닫았어도 코르넬리우스는 한창 호기심 많은 여덟 살이었다. 하물며 코르넬리우스는 지금 마음속의 신전이었던 시카고 스타디움에 와 있는 것이다. 경기장 복도를 걷고 있는 지금도 자신이 걷고 있는 곳이 시카고 스타디움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비고네스와 그린이 코르넬리우스를 라커룸 앞으로 데려가는 동안, 코르넬리우스는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로 경기장 구석구석을 돌아봤다. 하지만 문이 열리고 정장을 입은 한 남자가 걸어나오는 걸 본 순간, 코르넬리우스는 입을 크게 벌릴 수밖에 없었다. 입뿐 아니라 눈도 놀라움과 경이로움으로 가득 찼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눈앞에 마음속 신전의 주인이 서 있었던 것이다.
코르넬리우스는 입을 뻐끔거리며 뭔가를 말하려 했지만 도무지 제대로 된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남자가 먼저 말을 걸어야 했다.


“안녕, 코르넬리우스. 나는 마이클 조던이다.”

조던은 무릎을 꿇고 앉아서 조용히 얘기를 시작했다. 몇 가지 조크를 섞어가며 농구 이야기를 들려줬지만 결코 대답을 재촉하지는 않았다. 코르넬리우스가 겪었던 일을 위로하지도 않았다. 신문에서 코르넬리우스와 레티의 이야기를 읽고 코르넬리우스가 불스 경기를 보러 온다는 소식을 듣자, 구단 관계자에게 부탁해서 이 모든 것을 준비한 조던이었이다. 조던은 코르넬리우스를 도울 계획을 나름대로 생각해놓고 있었다.
경기 준비를 위해 라커룸으로 들어가면서, 조던은 코르넬리우스에게 말했다. “오늘 우리 팀을 응원해주지 않을래? 우리가 이기려면 너의 도움이 필요하단다.”

그날 불스는 코르넬리우스의 도움을 정말 많이 필요로 하는 것 같았다. 불스의 붉은 저지를 입은 코르넬리우스는 다른 볼보이들과 함께 선수들이 연습하는 동안 정신없이 볼을 챙겼고, 마침내 경기가 시작되자 불스 벤치에 앉아서 경기를 지켜봤다. 코르넬리우스에게 주어진 자리는 조던 바로 옆자리였다. 조던이 벤치에서 쉬는 동안 코르넬리우스는 조던 옆에 앉아 있다가, 조던이 다시 코트로 들어가면 조던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경기는 불스가 리드를 잡은 가운데 마이애미의 거센 추격이 이어졌다. 하지만 언제나와 같이 조던이 경기를 끝냈다. 이날 69%의 야투율로 47득점 6리바운드 7어시스트 3스틸 3블록슛을 기록한 조던은 경기 막판 승부를 결정짓는 강력한 슬램덩크를 꽂아넣었다. 그리고 불과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는, 그날 하루 종일 ‘필요한 사람’이었던 코르넬리우스가 기쁨에 겨워 마구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경기가 끝난 후 그린은 기자 생활 처음으로 불스 라커룸으로 향했다. 그린 역시 불스 경기를 본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항상 수많은 기자들에 둘러싸여 있던 조던은 모든 인터뷰를 끝내고 막 짐을 챙겨 라커룸을 빠져나가려 하고 있었다. 라커룸 문 쪽으로 걸어오던 조던은 그린을 발견하고 발걸음을 멈췄다. 그린은 조던에게 말했다.

“오늘 당신이 해준 일을 코르넬리우스가 얼마나 고마워하고 있는지 말해주려고 들렀습니다.”

그 말을 들은 조던은 한참동안 말없이 서있었다. 조던은 그에게 그런 감사를 한 후 새로운 부탁을 하려 했던 사람들을 많이 만나봤던 것이다. 그린을 한참이나 지켜보고 있던 조던이 말했다.

“그냥 그 말을 하려고 온 겁니까?”
“음, 당신이 선물한 하루가 코르넬리우스에게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잘 모르는 것 같군요.”
“아뇨, 저는 단지 당신이 그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내려온 것에 놀랐을 뿐입니다.”

그린은 미소지으며 대답했다.“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우리 어머니가 절 죽이려 했을 겁니다. 우리 어머니는 저를 올바르게 자라도록 키우셨거든요.”
조던도 웃으며 말했다.“우리 어머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린이 조던과 악수를 나누고 돌아서는데 조던이 물었다.

“경기장에는 자주 오십니까?”

“아뇨, 오늘이 처음입니다.”

“흠, 그럼 꼭 다시 한번 오세요.”


그날의 경험이 코르넬리우스에게 온전히 행복을 가져다준 것은 아니다. 코르넬리우스는 친아버지와 함께 살게 됐지만 친아버지 역시 코르넬리우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코르넬리우스를 사랑으로 돌봐줄 양부모가 나타날 때까지 코르넬리우스는 보호시설에서 살아야 했다.
하지만 이제 코르넬리우스는 더 이상 왜 사는지 모르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는 필요한 사람이었으니까. 코르넬리우스 마음속 신전의 주인이 그렇게 말해줬으니까. 그날 시카고 스타디움에서의 경험은 코르넬리우스에게 어떤 역경에도 맞서 싸울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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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고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한 코르넬리우스는 노던 일리노이 대학에 입학, 컴퓨터 공학도의 길을 선택했다. YMCA 시카고 지부 청소년 상담 분과는 학대를 딛고 어린이에게 희망을 준 사람에게 주는 ‘코르넬리우스 S. 에이브러햄 상’의 첫 수상자로 코르넬리우스를 선정했다.

플레이오프라는 전쟁터에 임하게 될 전사들이여, 명심하라. 그대들이 써나갈 이야기는 그대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누군가는 그대들의 모습을 보고 삶을 살아갈 용기를 얻을 수도 있다. 그대들은 그들 마음속 신전의 주인으로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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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그대들의 마음속에 있는 마이클 조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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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COLUMNS/일반 뉴스 2009. 2. 19. 21:52

한 눈에 보는 오늘의 NBA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작성: jeffrey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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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애나 94-103 샬럿

25점 10리바운드, 7어시스트로 만점 활약을 펼친 제랄드 월라스가 팀 승리를 이끌었다. 선발 가드 레이먼드 펠튼과 이적생 블라드미르 라드마노비치도 31점을 합작하며 승리를 도왔다. 인디애나는 트로이 머피(16리바운드)와 재럿 잭이 각각 18점을 넣으며 분전했지만 팀의 패배로 빛이 바랬다. 이로서 샬럿은 22승 32패를 기록하며 변함없이 싸우스웨스트 디비전 4위에, 인디애나는 22승 34패로 센트럴디비전 꼴찌를 지켰다.

클리블랜드 93-76 토론토
기사단의 3총사가 클리블랜드의 승리를 견인했다. 베테랑 센터 지드루나스 일가우스카스는 팀 내 최다인 22점을 올리며 공격을 주도했고 간판스타, 르브론 제임스도 20점 14리바운드로 뒤를 받쳤다. 토론토는 주득점원인 크리스 보쉬의 결장 속에 이렇다할만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며 17점차 대패를 당하였다. 클리블랜드(41승 11패)는 오늘 승리로 동부컨퍼런스 1위인 보스턴 셀틱스와의 격차를 1게임 반으로 줄이며 추격의 불씨를 당겼다. 최근 트레이드와 부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토론토는 21-35를 기록하며 플레이오프 합류 가능성이 점차 희박해지고 있다.

미네소타 111-104 마이애미
세바스찬 텔페어가 30점 8어시스트로 활약하며 5연패의 수렁에 빠진 팀을 구해냈다. 기대주 라이언 곰즈도 20점 7리바운드를 보태며 승리를 도왔다. 마이애미 히트는 리그 개인득점 선두를 달리고 있는 드웨인 웨이드가 37점 12어시스트로 대활약을 펼쳤지만, 리바운드의 압도적인 열세(49-24)로 고개를 숙였다. 미네소타는 값진 원정승과 함께 18승 35패를 기록하며 서부컨퍼런스 탑10 진입을 눈앞에 두게 됐다. 갈 길 바쁜 마이애미는 동부컨퍼런스 6위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에 반 게임차로 추격을 당하며 5위에 머물렀다. 

시카고 113-104 밀워키
명가 시카고 불스가 원정경기에서 승리하며 플레이오프 가시권에 한 발짝 가까이 섰다. 승리의 주역은 이번 시즌 들어 벤치로 내려간 커크 하인릭(31점 4어시스트)이었다. 이밖에 포워드 루올 뎅이 21점을 보태며 공격을 도왔고, 특급신인 데릭 로즈와 선발로 올라온 벤 고든이 각각 18점을 올리며 뒤를 받쳤다. 간판스타 마이클 레드를 잃은 밀워키는, 리차드 제퍼슨(32점)의 분전과 제공권 장악에도 불구하고, 3할대의 팀 야투율로 자멸하였다. 시카고는 오늘 승리로 24승 30패를 기록, 8위 밀워키 벅스(27승 30패)와의 격차를 1경기 반차로 좁혔다.     

올랜도 85-117 뉴올리언즈
뉴올리언즈 호네츠가 동부컨퍼런스의 강호 올랜도를 32점차로 대파하며 2연승 휘파람을 불었다. 올스타 가드 크리스 폴은 36점 6리바운드, 10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위용을 과시했다. 라슈얼 버틀러와 데이비드 웨스트는 각각 15점과 14점을 넣으며 힘을 보탰다. 올랜도는 라샤드 루이스가 17점으로 체면치례를 했지만 간판스타 드와이트 하워드가 12점 8리바운드에 그치며 좀처럼 공격의 활로를 뚫지 못한 것이 뼈아팠다. 뉴올리언즈는 연일 계속되는 싸우스웨스트의 진흙탕 싸움에서 소중한 1승을 추가하며 32승 20패(디비전 2위, 서부컨퍼런스 5위)를 기록했고, 올랜도는 39승 14패로  변함없이 동부컨퍼런스 3위를 지켰다.

덴버 101-89 필라델피아
차세대 포워드 카멜로 앤쏘니와 베테랑 가드 첸시 빌럽스가 팀 득점의 절반에 가까운 48점을 합작하며 팀 승리를 이끌었다. 앤쏘니는 리바운드도 14개나 곁들이며 공수에서 몸을 아끼지 않았고, 주전센터 네네 힐라리오도 17점 7리바운드로 골밑을 지켰다.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필라델피아는 주전 포인트가드를 담당하고 있는 안드레 밀러가 17점 7리바운드로 분전했지만 팀의 연패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덴버는 오늘 승리로 37승 17패를 기록하며 3연승의 가파른 상승세를 이어갔고, 필라델피아는 27승 26패로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에 동부컨퍼런스 6위를 내주었다.

뉴저지 98-113 댈러스
3쿼터에만 40점을 집중시킨 댈러스 매버릭스(32승 21패)가 홈경기를 승리로 장식했다. 수훈갑은 24점 10리바운드를 기록한 포워드 조쉬 하워드였다. ‘캡틴’ 제이슨 키드는 23점 10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모처럼 적극적인 득점가담에 나서며 친정팀에 비수를 꽂았고 독일병정 덕 노비츠키도 23점 9리바운드로 이름값을 해냈다. 뉴저지 네츠(24승 31패)는 날쌘돌이 데빈 해리스가 18점 7어시스트로 분전했지만, 야투 난조를 보이며 지원사격에 실패한 빈스 카터의 부진이 아쉬웠다.

애틀랜타 105-100 세크라멘토
최근 트레이드로 어수선한 분위기를 맞고 있는 세크라멘토가 홈경기를 내주며 시즌 44패째(11승)를 기록했다. 애틀랜타는 마이크 비비(29점 5리바운드)와 간판스타 조 존슨(20점)의 슛이 호조를 보인데다 2년차 센터 알 호포드가 18점 18리바운드로 더블더블 활약을 펼치며 선승을 거두었다. 에이스 케빈 마틴이 32점 11리바운드로 선전한 세크라멘토는 오늘 패배로 6연패의 수렁에 빠지며 사실상 플레이오프 진출이 어렵게 됐다. 애틀랜타는 32승 22패로 변함없이 동부컨퍼런스 4위를 지켰다.

레이커스 129-121 골든스테이트
LA 레이커스가 ‘미스터 81‘ 코비 브라이언트(30점 9리바운드)의 활약에 힘입어 연승가도를 달렸다. 스페인 용병 파우 가솔은 24점 13리바운드 5어시스트를 찍으며 연이틀 좋은 활약을 이어갔다. 식스맨 라마 오돔도 단 27분 동안 22점 7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선발선수들 못지않은 활약을 펼쳤다. 골든스테이트는 스티븐 잭슨과 코리 매거티가 각각 24점씩 기록하며 대항했지만, 선수단 전원이 고른 득점을 기록한 레이커스와의 득점 쟁탈전에서 결국 밀렸다. 이로서 레이커스는 44승 10패로 리그 전체 1위 자리를 굳게 지켰고, 골든스테이트는 19승 36패로 희망의 불씨를 살리는데 실패했다.

피닉스 142-119 클리퍼스
‘공격농구의 부활’을 선포한 피닉스 선즈(30승 23패)가 연이틀 엄청난 화력을 뿜어내며 연승행진을 이어갔다. 올스타 포워드 아마레 스타더마이어는 42점 11리바운드로 활약하며 팀의 상승세와 더불어 절정의 득점력을 뽐냈다. 신바람 농구로 회귀한 피닉스의 화려한 부활을 씁쓸하게 지켜보는 이는 LA 클리퍼스뿐만 아니다. 올스타 브레이크가 끝나기가 무섭게 경질된 테리 포터 감독은 재임직후 팀 체질개선에 들어가며 지공농구로의 변화를 주도해 왔지만 결과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클리퍼스(13승 42패)는 2경기 연속 굴욕을 당함에 따라 ‘불사조의 귀환‘의 조연으로 이름을 올리게 됐다.

멤피스 90-94 포틀랜드
신흥강호 포틀랜드 블레이저스가 시즌 33승(20패) 고지를 밟았다. 간판스타 브랜든 로이는 24점 5리바운드에 어시스트 9개를 보태며 공격을 진두지휘 하였다. 멤피스 그리즐리스의 떠오르는 듀오 루디 게이와 O.J. 메이요는 39점을 합작하며 진가를 발휘했지만 막판 집중력의 부족으로 아쉬운 1패를 기록하였다. 한편 지난 시즌 포틀랜드에서 방출된 대리우스 마일스는 노골적인 관중야유로 눈길을 이끌었는데 정작 본인은 “포틀랜드 유니폼을 입었을때도 들어왔던 야유다. 처음있는 일도 아니다”며 담담한 모습을 보였다.

부상-트레이드-계약-징계현황 업데이트
시카고 불스(드류 구든, 안드레스 노시오니, 마이클 루핀) <-> 세크라멘토 킹스(브래드 밀러, 존 샐몬스, 세드릭 시몬스)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이케 디오구) <-> 세크라멘토 킹스(마이클 루핀)
LA 레이커스(크리스 밈) <-> 멤피스 그리즐리스(미래의 드래프트 픽)
재크 랜돌프(LA 클리퍼스)_ 2게임 출장중지(사유/주먹 사용)
제이슨 리차드슨(피닉스 선즈)_ 징계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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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ruary 18, 1961
세인트루이스 호크스(現 애틀랜타 호크스)가 밥 페티트가 커리어하이 기록인 57점에 힘입어  디트로이트 피스톤스를 141-138로 꺾었다.
 
February 18, 1964
윌트 체임벌린이 디트로이트와의 경기에서 52점을 넣으며 개인통산 2번째로 백투백 50점 기록을 달성했다.

February 18, 1972
1983년 3월 말, 906경기 연속 출장의 대기록을 수립한 랜디 스미스가 버팔로 브레이브스 소속으로 기록의 첫발을 내딛었다. 스미스의 기록은 1997년 11월 20일, 댈러스 매버릭스의 A.C. 그린이 907연속 경기에 출장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February 18, 1983
필라델피아의 모제스 말론이 휴스턴과의 경기에서 NBA 400만점 득점(리그전체 통산득점)의 주인공이 됐다. 진귀한 이 기록은 1쿼터에 말론이 본인이 놓친 슛을 팁인으로 넣으며 작성됐다.

February 18, 1984
전 뉴욕 닉스의 포워드이자 미국 상원의원을 지낸 빌 브래들리의 24번 유니폼이, 영구결번 되어 메디슨스퀘어 가든의 천장에 걸렸다. 

February 18, 1986
샌안토니오 스퍼스의 앨빈 로벗슨이 네이트 써몬드에 이어 NBA 2번째로 쿼드러플더블의 주인공이 됐다. 20점 11리바운드 10어시스트와 함께 10스틸을 추가하며 진기록을 달성한 로벗슨의 활약에 힘입어 샌안토니오는 피닉스를 120-114로 격파했다. 쿼드러플더블은 훗날 하킴 올라주원과 데이비드 로빈슨이 추가로 기록하며 현재까지 4명만이 작성한 불멸의 기록으로 남아있다.

February 18, 1993
NBA의 대표행사 중 하나인 ‘잼 세션’이 트레이딩카드 전문회사인 플리어의 후원을 등에 업고 1993년 솔트레이크시티 올스타전에서 첫 선을 보였다. 잼 세션은 팬들이 은퇴선수와 현역선수들과 함께 모두 어우러져 다양한 농구 이벤트를 즐기는 큰 축제로 올스타전에서 빠질 수 없는 대표적인 이벤트로 자리매김했다.

February 18, 1995
15어시스트를 기록한 존 스탁튼의 활약에 힘입어 유타 재즈가 보스턴 셀틱스를 108-98로 꺾었다. 스탁튼은 이날 경기로 NBA 역사상 최초로 10000 어시스트 고지를 밟았다.

February 18, 1996
시카고 불스의 마이클 조던(44점)과 스카티 피펜(40점)이 84점을 합작하며 인디애나와의 원정경기를 승리로 이끌었다(110-102). 조던과 피펜이 기록한 2명의 득점합산 기록은 역대 9위에 기록됐고, 연장전을 제외한다면 6위에 해당한다.

Happy Birhdays~♬
현역_ 마이크 밀러(1980~ , NBA,  2001~2009/올랜도-멤피스-미네소타), 코스타 페로비치(1985~ , NBA, 2009/유타), 자와드 윌리엄스(1983~ , NBA, 2009/클리블랜드)

은퇴_ 치코 본(1940~ , NBA-ABA, 1962~1970/세인트루이스-디트로이트-피츠버그-미네소타), 자히디 화이트(1976~ , NBA, 1999~2005/워싱턴-피닉스-샬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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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COLUMNS/일반 뉴스 2009. 2. 12. 02:48

역사속 오늘의 NBA, 생일자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작성
: Dreampie, jeffrey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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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ruary 11, 1970
애틀랜타 호크스가 NBA 역사상 가장 많은 ‘후반전 팀 득점’ 기록인 97점을 넣으며 역사를 새로 썼다. 애틀랜타는 대기록에 힘입어 샌디에고 로케츠(現 휴스턴 로케츠)를 155-131로 격파하였다. 전반전 기록은 1990년 11월 10일에 피닉스가 작성한 107점으로, 당시 덴버와의 경기에서 수립됐다. 

February 11, 1978
‘아이스맨’ 조지 거빈이 4쿼터에만 23점을 쓸어 담으며 소속팀인 샌안토니오 스퍼스의 승리를 견인하였다. 샌안토니오는 거빈의 무서운 뒷심에 힘입어 골든스테이트와의 연장접전 끝에 131-122로 승리를 거두었다. 

February 11, 1982
휴스턴 로케츠 센터 모제스 말론이 시애틀 슈퍼소닉스를 상대로 NBA 기록인 21개의 공격리바운드를 걷어내며 117-100, 대승을 이끌었다.

February 11, 1989
3점 슛 버저비터를 포함하여 26점을 기록한 캘빈 머피의 동부컨퍼런스 올스타팀이, 은퇴선수가 참여하는 레전드 클래식 경기에서 서부 컨퍼런스에 54-53으로 승리하였다. 이 경기는 휴스턴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올스타 전야제로서 프랜차이즈 스타인 머피의 기쁨은 2배가 될 수 있었다.

February 11, 1990
신생팀 마이애미 히트가 창단 1년 만에 올스타전을 유치하는 기쁨을 누렸다.

February 11, 1995
마이애미 히트가 NBA 역사상 최초로 슬램덩크 챔피언과 AT&T 슛아웃(3점 슛 대회) 챔피언을 동시에 소유하는 구단이 되었다. 피닉스에서 열린 1995 NBA 올스타전에서 당시 ‘베이비 조던’이라 불리던 해롤드 마이너와 글렌 라이스가 가각 슬램덩크 콘테스트와 AT&T 슛아웃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소속팀의 이름을 빛냈다.

February 11, 1996
제 46회 NBA 올스타전이 열린 알라모돔(샌안토니오 스퍼스 홈구장)에 무려 36,037명의 관중이 웅집하며 뜨거운 열기를 과시했다. 동부컨퍼런스 팀은 당시 25점, 10리바운드을 기록한 샤킬 오닐과 돌아온 농구황제 마이클 조던의 활약을 등에 업고 129-118로 승리하였다. 조던은 단 22분 동안 20점을 기록하며, 통산 2번째 올스타전 MVP를 차지하였다.

February 11, 2001
워싱턴 위저드의 홈구장인 MCI센터에서 열린 제 50회 NBA 올스타전에서 아이버슨이 마법을 부렸다. 아이버슨은 이날 기록한 25점 중 4쿼터에만 15점을 집중시키며,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명명된 경기에서 111-110, 대역전승의 주역이 됐다. 특히 드래프트 동기인 스테판 매버리가 경기종료 28초 전 시도한 3점 슛이 림을 가르며 승부에 쐐기를 박았다. 아이버슨은 19점차로 뒤지며 패색이 짙던 동부컨퍼런스 팀에 활력을 불어넣으며 생애 첫 올스타전 MVP를 수상하였다.

Happy Birthdays~♬

토니 배티 (1976~)
자크 본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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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YERS/NBA 2008. 8. 31. 23:57

마이클 조던 (Michael Jeffrey Jordan)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3  마이클 조던 (Michael Jeffrey Jordan) - 가드
고향: 02/17/1963 브루클린, 뉴욕 시
: 6-6 (198cm)
몸무게: 216 lbs.(98kg)
학력: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교
포지션: 가드
드래프트: 1984년 1라운드 (3번 픽) 시카고 불스
주요수상: 1996 위대한 50 플레이어 선정 ... NBA 6회 우승 (1991~1993, 1996~1998) ... NBA 정규시즌 MVP 5회 (1988, 1991~92, 1996, 1998) ... 득점왕 10회 (1987~1993, 1996~1998)

통산 성적
 시즌   팀   경기  시간  FG%  3P%  FT% REB AST STL BLK  TO  PF  PTS
84/85  CHI   82  38.3  .515  .173  .845  6.5  5.9  2.4  0.8  3.5  3.5  28.2
85/86  CHI   18  25.1  .457  .167  .840  3.6  2.9  2.1  1.2  2.5  2.6  22.7
86/87  CHI   82  40.0  .482  .182  .857  5.2  4.6  2.9  1.5  3.3  2.9  37.1
87/88  CHI   82  40.4  .535  .132  .841  5.5  5.9  3.2  1.6  3.1  3.3  35.0
88/89  CHI   81  40.2  .538  .276  .850  8.0  8.0  2.9  0.8  3.6  3.0  32.5
89/90  CHI   82  39.0  .526  .376  .848  6.9  6.3  2.8  0.7  3.0  2.9  33.6
90/91  CHI   82  37.0  .539  .312  .851  6.0  5.5  2.7  1.0  2.5  2.8  31.5
91/92  CHI   80  38.8  .519  .270  .832  6.4  6.1  2.3  0.9  2.5  2.5  30.1
92/93  CHI   78  39.3  .495  .352  .837  6.7  5.5  2.8  0.8  2.7  2.4  32.6
94/95  CHI   17  39.3  .411  .500  .801  6.9  5.3  1.8  0.8  2.1  2.8  26.9
95/96  CHI   82  37.7  .495  .427  .834  6.6  4.3  2.2  0.5  2.4  2.4  30.4
96/97  CHI   82  37.9  .486  .374  .833  5.9  4.3  1.7  0.5  2.0  1.9  29.6
97/98  CHI   82  38.8  .465  .238  .784  5.8  3.5  1.7  0.5  2.3  1.8  28.7
01/02  WAS   60  34.9  .416  .189  .790  5.7  5.2  1.4  0.4  2.7  2.0  22.9
02/03  WAS   82  37.0  .445  .291  .821  6.1  3.8  1.5  0.5  2.1  2.1  20.0
 총합    - 1072  38.3  .497  .327  .835  6.2  5.3  2.3  0.3  2.7  2.6  30.1


 Did you know?  you know?



마이클 조던 전기 (Biograph)

어린 시절_ 마이클 조던은 1963년 2월 27일, 뉴욕 브루클린에서 아버지 제임스와·어머니 들로리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걸음마를 뗐을 때 조던 가(家)는 노스캐롤라이나주 윌밍턴으로 보금자리를 옮겼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농구선수였던 조던의 유년 시절은 또래 아이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의 형제들은 새 교복이나 운동화를 사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뛰며 어려운 집안형편에 맞는 삶을 살았지만 소년 조던은 달랐다. 조던은 동네 담배농장이나 주유소에서 용돈을 버는 대신 운동장과 동네 공터의 농구 골대로 향했다. 그렇게 이 어린 소년의 가슴속에서는 훗날 프로 스포츠 선수의 꿈이 무럭무럭 커가고 있었다. 꼭 농구가 아니어도 좋으니 운동선수를 업으로 삼고 싶었던 것이다.

정비 관리 회사에서 말단으로 시작했던 아버지 제임스는 퇴직전까지 부장을 지냈고, 은행원이었던 들로리스 역시 꾸준히 경력을 쌓아 VIP 고객상담까지 맡을 정도로 성실한 일꾼이었다. 하지만 부모의 입장에서 이러한 조던의 낙천적인 태도는 걱정거리였다.
 
윌밍턴에 위치한 엠슬리 A·레이니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조던의 본격적인 농구인생이 시작됐다. 주 대회 챔피언과 MVP를 획득하며 괜찮은 소질을 보였던 야구는 아버지와 상의 끝에 그만두고 농구코트에 본격적으로 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180cm의 단신 가드에 불과했던 조던은 기술 또한 특출나지 못하여 결국, 2학년 시절에 팀 선발에서 제외된다. 당시 레로이 스미스라는 라이벌에게 밀린 조던은 그 아픔을 잊지 않기 위해 훗날 독특한 복수를 실천하였는데, 시카고 불스 초창기 시절에 원정경기를 가질때마다 호텔 체크인시 레로이 스미스의 이름으로 사인을 했다는 후문이다.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 지 모를 스미스가 조던의 남다른 승부근성을 깨운 것이다.  


 
졸업 후에 노스캐롤라이나 대학를 택한 조던은 지리학을 전공했다. 신입생에게 엄격하기로 소문난 딘 스미스 감독 아래서 '올해의 신입생'을 수상한 조던은 1982년의 NCAA 결승전에서 황금같은 결승골을 성공시키며 모교에 2번째 우승 트로피를 안겼다. 이 슛은 조던을 일약 전국구 스타로 거듭나게 해준 촉매제가 되었고, 그의 이름을 만천하에 알리는 발판이 됐다. 마지막 3학년에는 NCAA 최고의 영예인 네이스미스상과 우든상을 모두 휩쓸며 명실상부 대학 최고의 선수로 거듭났다.
 
시즌 종료 후 당시 주임코치였던 딘·스미스가 추천해서 프로 입성을 결의한다. 1984년의 드래프트로 시카고·불스에 전체 3위로 지명되었다.(당시의 전체 1위는 휴스턴·로케츠의 하킴·올라주원이었다.) 대학을 휴학한 후의 여름에 미국 대표로 LA 올림픽에 참가, 중심 선수의 한 명으로서 금메달 획득에 공헌했다.

시카고 불스_ 2시즌 미만의 은퇴 기간을 제외해, 입단(1984년)으로부터 2번째의 은퇴(1998년)까지 13 시즌을 시카고·불스에서 보냈다. 주된 포지션은 슈팅 가드였지만, 포인트 가이드나 스몰 포워드도 플레이 할 수 있는 올라운드인 면도 있었다.
 
불스에서 물러난 1998년의 시점에서 시즌 득점왕은 10회, 통산 득점은 역대 3위, 1 시합 평균은 역대 1위의 득점 31.5점이며, 그의 시대로는 예외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높은 득점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인사이드에서는 덩크나 독창적인 움직임으로부터 계속되는 레이업, 아웃사이드에서는 페이드 어웨이 점프슛 등 폭넓은 오펜스 스킬을 구사했다.
 
단지 득점능력 뿐만이 아니라, 초기의 조던을 유명하게 한 것은 덩크 슛이나 공중에서 디펜더를 피하는 기술이었다. 다른 선수가 우선 흉내낼 수 없는 듯한 공중의 플레이를 많이 보여 조던 개인이 주목을 끄는 큰 요인이 되었다.
 
승부를 결정짓는 힘을 겸비한 선수이기도 했다. 마지막 순간에서의 활약은 수많은 명장면을 낳아, 팬의 기억에 남게 되었다. 그는 6회의 NBA 우승(1991년-1993년,1996년-1998년)을 차지해, 5회의 레귤러 시즌 MVP에 빛났다(1988년,1991년,1992년,1996년,1998년). 1985년에는 신인왕을 획득. 6회의 우승에서 각각 파이널 MVP를 수상했다. 그는 또 레귤러 시즌, 파이널, 올스타의 MVP 3관을 1996년과 1998년에 2회 달성하고 있다. 그 밖에 MVP 삼관왕을 달성한 플레이어는1970년의 윌리스·리드와 2000년의 샤킬 오닐뿐이다.
 
우수한 디펜더이기도 해서 1988년 이후에는 은퇴하고 있던 시즌을 제외하고 1998년까지 9회 올 NBA 디펜시브 퍼스트팀에 선출되었다. 1988년에는 시즌 MVP와 최우수 수비 선수를 동시 수상했다.
 
조던의 코치였던 필 잭슨은 이렇게 말한다. “1984년에 조던이 리그에 왔을 때 그는 돌파를 주로 하는 선수였습니다. 그의 외곽슛은 프로 수준까지 올라와 있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프시즌에 매일 수백 개의 슛을 체육관에서 연습했습니다. 결국 그는 치명적인 3점 슈터가 되었습니다.”

경력 초기_ 입단 초의 조던은  높은 운동 능력과 득점 능력을 가지는 기대주였다. 첫해의 평균 득점은 28.2, 부상에 의해 시즌의 대부분을 결장한 두 번째 년도에는 22.7점, 그리고 세 번째 년도에 스코어링 머신이 된 조던은 매 시합 고득점을 기록해서 평균 득점은 37.1점이었다. 이 시즌 조던은 처음으로 득점왕이 되었을 뿐 아니라 평균 득점, 시즌 총득점 3,000점을 넘긴 것은 윌트·쳄벌레인 이래의 높은 수준이었다.


 
득점 능력뿐만이 아니라 운동 능력, 특히 공중에서의 바디 컨트롤에는 발군의 센스를 보여 젊은 선수면서 리그 굴지의 인기 선수가 되어 있었다. 시카고·불스가 원정으로 방문하는 시합은 많은 관객이 모였고 홈 시합의 티켓은 구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팀은 아직 강하지 않았고, 불스를 「조던과 그 외 4명」이라고 야유하는 기자나 팬도 있었다. 조던은 볼을 가질 기회와 슛의 갯수가 많아 독선적인 플레이를 비판하는 소리도 있었다.
 
입단 초의 조던은 고가의 액세서리를 몸에 달고 플레이 하는 일이 있어 선배 선수들에게는 건방진 신인이라고 불리는 일이 있었다. 1985년에는 신인이면서 올스타전 출장을 하지만 이 시합에서 조던은 아군 선수가 패스를 돌려 주지 않는(프리즈·아웃) 처사를 받는다. 후에 조던은 이 경험에 많이 다쳤다고 말하고 있다. 이 사건의 주모자라고 알려진 아이재아·토마스(디트로이트·피스톤스)와는 좋지 않는 관계가 계속 되었다.

피스톤스의 벽_ 1980년대가 종반에 가까워지면서, 이 시대 동부·컨퍼런스를 지배하고 있던 보스턴·셀틱스 도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대신해 대두해 온 것은 디트로이트·피스톤스였다.
한편 시카고·불스는, 젊은 덕·콜린스 감독 아래 힘을 돋우기 시작해 플레이 오프에서도 싸워 이길 수 있는 팀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1987년에 셀틱스에 진 다음 시즌, 불스는 매년 플레이 오프에서 피스톤스와 대전하게 된다.이 시기, 난폭한 디펜스로 배드 보이즈로 불리고 있던 피스톤스는, 대전할 때마다 불스와 조던을 패배시켰다.
 
피스톤스는 조던·룰로 불리는 방법으로 조던의 오펜스를 봉하려고 했다. 이것은 인사이드에 돌진한 조던을 몇 사람에 걸쳐 막는 것으로, 정신적·육체적으로 조던을 괴롭혔다.
콜린스의 지도가 보람이 있어서 불스는 50승을 할 수 있는 팀까지 되어 있었다. 그러나1988년에 이어 1989년에도 플레이 오프에서 피스톤스에 패배하면서 콜린스는 불스에서 해고되었다. 다음 시즌, 불스는 CBA의 어시스턴트 코치 필·잭슨을 감독으로 승격시켰다.
 
잭슨은 새로운 오펜스 시스템 도입(트라이앵글·오펜스)에 임하는 등 팀 강화에 노력했다. 불스에 가입하고 있던 젊은 스코티·피펜과 호레이스·그랜트도 점차 성장해서 마침내 레귤러 시즌의 승점을 55승까지 늘렸다. 팀 메이트의 신망이 두터운 빌·카트 라이트는 캡틴으로서 팀을 정비했고 롤 플레이어 존·팩슨은 백 코트에서 조던과 뛰는 선수가 되서 불스는 더욱 더 견실한 팀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플레이 오프에서는, 피펜의 부진 등도 있어서 3승 4패로 또다시 피스톤스에 패배했다. 이 시즌과 전 시즌  피스톤스는 연패를 이루어서 팀 사상 최고 절정기에 있었다.
 
최초의 3연패_ 피스톤스에 졌지만 불스의 선수 개개인의 성장 그리고 팀으로서의 성장은 분명하고 다음1990-91시즌에는 팀 사상 최다의 61승을 올리고 있었다. 조던 자신도 지금까지의 스타일을 바꾸어 잭슨 감독의 방침대로 볼을 다른 팀 메이트와 분담하는 장면을 이전보다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시즌, 팀의 승리 수는 최고에도 불구하고, 조던의 평균 득점은 과거 수년으로 최저의 31.5점이었다.(그런데도 득점왕이 되었다.)
 
플레이 오프에서는 컨퍼런스·파이널로 피스톤스와 4년 연속의 대전을 했다. 이 해는 4승 0패로 지금까지의 설욕을 하고 NBA 파이널에서는 매직·존슨의 LA 레이커스가 상대가 되었다. 신구 슈퍼스타 대결이 된 이 시리즈를, 시카고·불스는 4승 1패로 승리해, 첫 우승을 차지한다. 조던은 파이널 MVP를 수상했다.
 
다음 시즌, 불스는 리그 67승을 올렸다. 다시 NBA 파이널에 진출한 불스는,클라이드·드렉슬러의 포틀랜드·트레일블레이저스와 대전했다. 조던을 닮은 타입으로 득점력이 있는 슈팅·가드 드렉슬러를 상대로 조던은 눈부신 퍼포먼스를 보여 4승 2패로 2년 연속의 우승을 실현했다.
 
다음의 1992-93시즌은, 불스의 승리는 57승으로 전 시즌보다 10승 줄고 있었지만 플레이 오프에서는 다시 NBA 파이널에 진출했다. 서부·컨퍼런스를 지배한 것은 피닉스·선즈로, 팀의 에이스이며, 조던의 친구이기도 한 찰스 바클리는 이 시즌 MVP로 선정되어 있었다. 레귤러 시즌의 승리수가 리그 최다였던 선즈는 홈 코트 어드밴티지를 가지고 있어 불스는 홈에서의 시합수가 하나 적은 불리를 안고 있었다. 시리즈는 적지에서의 6 시합을 지배한 불스가 승리해, 3번째의 우승을 결정했다. 이 시리즈로 평균 41득점(NBA 역대 최고)을 기록한 조던은 MVP로 선택되었다.
 
1980년대말보다 「3연패」를 의미하는 「Three-Peat」라고 하는 말이 사용되고 있었지만 NBA의 팀이  3연패를 한 것은 1960년대의 보스턴·셀틱스 이래의 처음이었다.


 
은퇴와 복귀_ 3연패 후 사건에 의해 부친을 잃은 후 머지않아 조던은 1993년 9월에 갑자기 은퇴했다. 전성기에 있던 은퇴는 NBA와 미디어에 충격을 주었다. 은퇴 표명의 회견에서 조던은 「더 이상 증명할 것은 없다」라고 말했지만, 그전까지 계속 되고 있던 조던에 대한 비난, 3 연패에 의해 모티베이션이 저하한 것, 아버지를 잃은 충격이 은퇴의 동기가 되었다고 매스컴은 추측했다.
 
2년간 MLB에 도전한 후 MLB의 파업을 계기로 1995년 3월에 다시 불스에 복귀한다. 미디어는 대대적으로 조던의 복귀를 알렸다. 시즌 말의 17 시합에 참가해 팀은 플레이 오프에 진출했다.
 
조던은 2년에 걸쳐 야구선수로서 연습을 한 다음이어서 농구에 어울리는 체형을 되찾지 못했었다. 조던은 32세가 되어 있었다. 은퇴 전과 같이 공중을 도약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점프슛을 중심으로 한 오펜스가 눈에 띄었다.
 
플레이 오프에서는 1회전에서 샬럿·호네츠를 3승 1패로 꺽고 계속 되는 컨퍼런스·준결승전에서는 올랜도·매직과 대전했다. 올랜도는 샤킬 오닐과 앤퍼니·하더웨이가 있었다. 두 명의 재능있는 젊은이가 이끄는 신예의 팀이었다. 이 시리즈에 조던은 중요한 장면에서 사소한 미스를 반복해 2승 4패로 불스가 패배하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후기 3연패_1994-95시즌 종료 후의 오프시즌에 조던은 농구의 체형을 되찾을 수 있도록, 그리고 다시 우승을 노리기 위해서 열심히 트레이닝을 실시했다.
 
빌·카트 라이트나 호레이스·그랜트, 존·팩슨은 이미 팀을 떠나서 전력을 보강하기위해 불스는 파워 포워드에 데니스·로드맨을 영입했고 팀에 유럽의 최우수 선수 포워드 토니·쿠코치도 3년째를 맞이하고 성장세를 보이고 있었다. 조던 복귀 이전에 있던 론·하퍼도 우수한 디펜더로 변모했다. 조던 부재의 사이 팀을 견인한 스코티·피펜은 리그에서도 톱 클래스의 선수로 성장하고 있었다. 로드맨은 일찌기 배드 보이즈로 불린 디트로이트·피스톤스의 중심 멤버의 한 사람으로 또 여러 가지 언동이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기 때문에 불스에 적응 할 수 있을지가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
 
1995-96시즌이 시작되면서, 불스는 쾌진격을 계속해 NBA사상 최고의 승수를 노릴 수 있을 정도의 기세였다. 조던, 피펜, 로드맨은 리그 최강의 3인조로서 주목을 끌었다.
조던 자신은 1993년전의 강렬한 슬램 덩크를 하는 것보다는 기교적인 점프 슈터로서 플레이 하고 있었지만 평균 득점 30.4로 8번째의 득점왕에 빛나게 된다.
 
시카고·불스는 72승 10패로 레귤러 시즌을 끝냈다. 이 승수는 NBA 사상 최다이며, 70승을 넘은 팀도 역사상 처음이었다. 불스는 숫자상 사상 최강의 팀으로서 플레이 오프에 임해, NBA 파이널에서 시애틀·슈퍼소닉스와 대전했다. 적지의 시애틀에서 2경가를 패배했지만 6차전에 시카고로 돌아와 4번째의 우승을 결정했다. 조던은 다시 파이널 MVP를 수상했다.
 
계속 되는 1996-97시즌  불스는 전 시즌보다 3승 적은 69승으로 레귤러 시즌을 끝낸다.
플레이 오프에서는 이 시즌도 불스는 파이널에 진출한다. 서부·컨퍼런스에서는, 유타·재즈가 올라왔다. 사상 최고의 명콤비라고 일컬어지는 존·스탁턴과 레귤러 시즌의 MVP 칼·말론을 상대해서 시리즈는 4승 2패로 불스가 승리한다. 첫 경기의 버저 비터와 적지 솔트레이크 시티에서의 병에도 불구하고 활약한 조던이 다시 MVP로 선택되었다. 불스와 조던의 우승 수는 5회가 되고 있었다.
 
계속 되는 1997-98시즌은 필·잭슨감독이 시즌 후의 퇴임을 빠른 시기부터 암시하고 있어 피펜은 팀 경영진과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있었다. 강호 불스는 금년에 최후일까라고 말하는 관측을 매스컴은 잭슨의 표현을 빌려 라스트 댄스라는 말로 나타냈다. 복귀 이후  매스컴이나 팬은 자주 조던의 연령을 화제로 하고 있어서 「언제까지 플레이 할까」가 관심의 초점으로 되어 있었다. 조던은 「잭슨 감독과 피펜이 그만두면 자신도 그만둔다」라고 발언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진퇴에 대해서는 직답을 피하고 있었다. 이 시즌은 불스의 2번째 「3연패」가 걸려 있어 여러가지 의미로 주목을 끌게 되었다.
 
불스는 NBA 파이널에 진출해 대전 상대는 이번에도 유타·재즈였다. 양 팀 모두 레귤러 시즌은 62승 20패였지만, 시즌중의 대전 성적에 이기고 있던 유타·재즈가 홈 코트 어드밴티지를 얻고 있었다.
 
5차전까지 3승 2패로 시리즈의 무대를 유타에 되돌려 6차전 조던은 남은 5.2초에 결승 슛을 결정해 불스에 6번째의 우승과 2번째 3연패를 가져왔다. 조던은 시즌 종료 후 1999년 1월 13일에 2번째의 은퇴를 발표했다.



유명한 플레이
_ 1986년의 플레이 오프 당시 사상 최강이라고 일컬어진 보스턴·셀틱스와 대전한 동부·컨퍼런스 1라운드 2차전에서 플레이 오프 기록이 되는 63득점을 올렸다. 시합 후 래리·버드는 「저것은 마이클 조던의 모습을 한 신이다」라고 코멘트했다. 시합 자체는 불스의 패배로, 시리즈도 3연패로 패배했다.

1989년의 플레이 오프 클리브랜드·캐벌리어스와 싸운 동부·컨퍼런스 1라운드 2승 2패로 맞이한 5차전 종료 직전에 99 대  100의 장면에서 조던은 몸을 옆으로 돌리면서 어려운 슛을 던져 종료의 버저와 동시에 역전을 성공시켰다. 이 슛으로 불스의 컨퍼런스·준결승전 진출이 정해졌다.

1991년 NBA 파이널 2차전, 덩크를 하기위해 도약하는 조던은 샘·퍼킨스의 블록을 피하기 위해 볼을 오른손에서 왼손에 바꾸어 낙하하면서 슛을 결정했다. 이 슛을 The Move라고 부르는 일이 있다.

1992년의 NBA 파이널 1차전, 조던이 던지는 3점슛이 모두 들어가서 전반에 6개의 3점슛 성공은 당시의 NBA 파이널 기록이었다.

1993년 파이널 6차전, 시합 종료전에 혼자서 디펜스를 돌파해 매우 높은 위치에서의 레이 업을 성공해서 글라이더라고 불린다. 그리고 NBA 3연패를 완수했다.(조던은 MVP)

1997년의 NBA 파이널 5차전, 조던은 인플루엔자로 최악의 컨디션이었지만 38득점을 올려 불스는 우승한다.

1998년의 NBA 파이널 6차전, 시합 종료 직전에 조던은 칼·말론으로부터 스틸해서 그대로 볼을 드리블해서 점프슛을 성공시킨다. 나머지 5.2초에 역전에 성공. 불스는 6번째의 우승을 결정했다.
 
올림픽_ 조던은 올림픽 미국 대표 팀에서 2회 플레이 해 금메달을 얻었다. 첫 번째는 대학 선수로서1984년의 LA 올림픽에서 두 번째는 1992년의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매직·존슨과 래리·버드와 함께 「드림팀」으로서이다.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의 드림팀의 활약은 센세이셔널한 것으로 각 시합에서  대승을 계속했다. 또 미국 대표의 활약에 의해 NBA와 조던의 인기가 국제적으로도 상승한다고 하는 효과도 가져왔다.
 
금메달 수여식에서 조던은 유니폼 챔피언(스포츠 메이커)의 로고를 성조기로 숨긴다고 하는 행동을 취했다. 이것은 조던이 나이키와 스폰서 계약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지만, 이 별로 볼 수 없는 행위는 화제가 되었다.



비난
_ 1991년의 우승으로 정점까지 오른 조던의 명성은 다음 시즌에는 손상을 입게 된다.
 
우승한 NBA의 팀은 백악관에 초대되는 것이 전례였지만 조던은 부시 대통령을 이전에 만났던 적이 있는 것을 이유로 초대를 거절하고 있었다. 매스컴은 조던의 행동이 예의에 어긋난다며 비난했다.
 
같이 바르셀로나 올림픽참가를 처음 무렵에는 꺼리고 있었다고 보도된 것도 애국심이 없고 독선적이다라고 비난의 이유가 되었다.
 
또 이때부터 조던의 도박 버릇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어 사람들의 예상을 넘는 액수의 돈을 걸고 있는 것은 실망과 빈축을 샀다. 특히 조던의 도박 상대에게는 살해된 마약판매원이 있어 그 유품으로부터 20만 달러 조던 서명의 수표가 발견되면서 비판이 일어났다.(조던 자신은 마약 판매원의 살해에 관계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1991-1992시즌 기간 중에 시카고의 신문기자 샘·스미스가 출판한 Jordan Rules 라고 하는 저서는 조던을 자기중심적으로 독재적인 인물로서 그리고 있었다. 구체적인 정보원을 기초로 쓰여져서 비난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일련의 비난에 의해 조던은 궁지에 처했는지 명백하게 매스컴을 피하는 시기도 있었지만, 엄격한 비판도 이윽고 조던을 덮치는 비극과 함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가족의 비극_ 1993년 8월 조던의 부친 제임스는 친구의 장의로부터의 귀로 도중에 선잠을 취하기 위해 노스 캐롤라이나주의 하이웨이에 정차하고 있었는데, 두 명의 강도에 의해 살해되었다. 범인들은 마이클의 선물인 렉서스를 훔쳐 제임스의 사체를 근처에 유기했다.
 
범인들은 제임스의 휴대 전화로부터 빈번히 발신을 실시했기 때문에 즉시 체포되었다. 제임스는 행선지를 분명히 하지 않고 몇 일간 외박 하는 일이 자주 있었기 때문에 당초 마이클과 가족은 경찰에 수색 요청을 하지 않았다. 수색이 시작되면서 제임스의 사체가 강에서 발견되어 신원 불명인으로서 조례에 의해 소각되고 있던 것을 알았다. 미디어는 당초 제임스의 살해를 마이클의 도박 버릇과 묶으려고 했다. 제임스가 골프로의 내기로 몇 만 달러도 잃은 것을 마이클이 인정했던 것이 넓게 공표되었다.
 
마이클 조던이 최초의 은퇴를 표명한 것은, 사건이 밝혀지고 한 달이 넘은 후의 일이었다.
 
MLB에의 도전_조던은 시카고·불스를 은퇴해서 머지않아 1993-94년의 NBA 시즌 개막 2일전에 MLB·시카고·화이트 삭스의 팜 팀 버밍햄·배론스에 입단했다. 많은 팬이 마이클은 부친이 살해된 슬픔을 감추기 위해 어릴 적의 또 하나의 꿈을 추구했던 것이라고 해석했다. 화이트 삭스의 오너는, 시카고·불스의 오너이기도 한 제리·라인스도르프여서 실력이 아니고 커넥션으로 입단했던 것이라고 반감을 가지는 야구 선수나 팬도 있었다.
 
조던은 연령도 신장도 자기보다 한층 아래의 선수들에게 섞여 버스로 원정을 다녔다. 열심히 연습을 거듭했지만 전문가는 프로 레벨의 변화구를 치는 것은 힘들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의 성적은 127경기 출장에서 타율 2할 2리, 홈런 3개, 11 에러였고 메이저 리그에 승격은 못했다.
 
1994년에는 MLB 파업이 일어나 다음 해가 되어도 사태는 해결되지 않았다. 화이트 삭스 구단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선수에게 개막전에 출장하도록 요구해 따르지 않는 경우는 시설의 이용을 거부했다. 구단 사장은 조던에게는 이 조치를 적용하지 않는다고 약속하고 있었지만 구단 관계자는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조던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이 건은 조던이 불스에 복귀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워싱턴·위저즈 오너 및 인사부문 책임자_ 1999년 은퇴 후의 조던이 샬럿·호네츠(현 뉴올리언스·호네츠)의 오너진에 참가한다라는 보도가 이루어졌다. 조던은 실제 그 때문에 관계자와 협의를 실시하고 있었지만 결국은 결렬에 끝나 조던의 오너 영입은 실현되지 않았다.
 
다음 2000년에 그는 워싱턴·위저즈에 출자를 실시해 오너의 한 명이 되었다. 동시에 팀의 농구 운영 부문의 사장이 되었다. 이것은 선수의 인사에 관한 책임자가 된 것을 의미했다.
 
이 시기의 위저즈는 승수 20전후로 침체하고 있어서 팀 재건은 조던에 부과된 사명이었다.조던은 불스의 감독이었던 덕·콜린스를 위저즈 감독으로 임명한다. 2001년의 드래프트에서는 위저즈는 전체 1위의 지명권을 획득하고 조던은 과미·브라운을 지명했다. 고졸의 신인이 전체로 1위 지명을 받는 것은 NBA 사상최초여서 당시 논의를 부르고 있던 신인의 저연령화를 상징하는 사건이 되었다.



2번째의 현역 복귀
_ 2001년에는 침체를 계속하는 위저즈를 위해서 2번째 현역 복귀를 한다. 이전에는 가드 포지션이었지만, 팀 사정에 의해 조던은 포워드로 플레이 하게 되었다. 그의 기술은 매년 약해지고는 있었지만 2001-02년 시즌은 부상에 골치를 썩이면서도 평균 23점의 기록을 올렸다. 2002-03년 시즌은 평균 20점을 올린다. 라스트 시즌에는 리그 사상 유일한 40세에 40득점이라고 하는 기록도 수립했다.
 
복귀 당초 조던은 팀을 플레이 오프에 진출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2001-02시즌은 37승 45패로 동부·컨퍼런스 10위 2002-03시즌은  37승 45패로 컨퍼런스 9위로 목표를 완수하지 못하고 끝났다.
 
2002년 NBA 올스타 게임에서는 이전에 그의 상징인 슬램 덩크를 실패해 시청자들이 망연자실했다. 그러나  다음 시즌의 올스타 게임에서는 시합 종료 직전에 역전 페이드 어웨이 슛을 넣었다. 직후에 재역전되었지만 이미 시즌 종료 후의 은퇴를 표명하고 있던 조던에 대해 경기장에서는 조던 콜이 반복해졌다.

비즈니스_ 1980년대에 NBA에서 플레이 한 이후 조던은 많은 기업과 광고 계약을 맺어 여러가지 사업을 다루어 왔다. 조던은 프로농구 뿐만 아니라 본업 이외로 얻는 수입의 크기에서는 스포츠계에서도 두드러진 존재가 되었다.
 
조던의 초기부터 가장 중요하게 된 것은 스포츠 용품 메이커 나이키와의 관계였다. 조던은 신인의 시즌보다 나이키와의 계약을 맺어 자신의 이름을 브랜드에 도입한 농구화 「에어·조던」시리즈의 생산·발매가 개시되었다.
 
에어·조던 시리즈의 텔레비전 CM의 제작에는 당시 신인 영화 감독이었던 스파이크·리가 기용되었다. 조던의 운동 능력을 강조하면서도 기발한 연출을 넣은 리의 CM은 히트해서 조던의 인기와 함께 에어·조던은 폭발적인 매출을 보였다. 조던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던 러닝 개런티 계약을 맺고 있어 신발의 매상에 비례해 조던의 수입도 상승했다. 나이키 자신도 당시 업계 1위였던 컨버스를 제치게 되었다. 이후 NBA의 스타 선수의 상당수는 나이키와 같은 계약을 맺게 되었다.
 
에어·조던에 관해서는 주로  두 가지로 비판이 일어났다. 하나는 이 시리즈가 너무 인기를 얻었기 때문에 소년 소녀들이 신발을 노린 강도의 피해를 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있던 것이었다. 하나는 에어·조던을 생산하기 위해서 개발 도상국의 아동들이 저임금으로 일하게 되고 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어느 쪽이나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은 곤란한 문제이며 조던도 명확한 반론은 하고 있지 않다.
 
조던은 식품 광고도 폭넓게 했다. 맥도날드의 CM에 출연해 현지의 시카고에서는 「마이클 조던·스페셜」이라고 하는 메뉴가 나왔다. 게토레이의 CM로 채용된 「마이크 같이 되고 싶다」라고 하는 노래는 널리 알려졌다. 그 밖에 코카·콜라의 캐릭터가 된 것 외에 시리얼 식품 「위티즈 (Wheaties)」에서도 조던의 모습이 패키지에 등장했다.
 
조던은 속옷 메이커 헤인즈와도 광고 계약을 맺었고 1996년에는 영화 「스페이스·잼」에 출연해, 애니메이션의 캐릭터 벅스·바니 래리·버드, 찰스·바클리 , 배우 빌·머레이 등과 공동 출연했다.
조던은 시카고 뉴욕, 고향 노스캐롤라이나주에 레스토랑을 가지고 있다.
 



조던의 무브먼트
_ 1991년의 첫 우승과 1992년의 올림픽 출전을 거치고 조던의 인기는 새로운 차원에 도달했다. 국제적으로 지명도가 상승했다, 국내에서는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조던을 따라다녀서 보통수준의 일상생활을 보내는 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조던을 주제로 했다 Hang Time Rebound의 저자 인기·작가인 보브·그린은 조던이 엘비스·프레슬리의 재림이며, 「미국 문화의 정점으로 올라갔다」라고 표현했다.
 
사람들은 조던이 사상 최고의 농구 선수다라고 논할 뿐만 아니라 베이브·루스, 무하마드·알리와 비교하는 등 농구를 넘은 차원으로 그의 존재를 말하게 되었다.
 
조던이 이런 존재가 된 것은  몇 가지의 요인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운동 능력 _조던은 역사적으로 봐도 매우 높은 운동 능력을 가지고 있어 보는 사람의 주목을 끄는데 충분했다. 그는 사람들이 본 적도 없는 움직임을 자주 보여 특히 공중에서의 플레이는 보는 사람을 경탄시켰다. 닉네임 「에어」를 만든 수직 점프는 122 cm를 기록해서 중계하는 아나운서는 조던이 점프 하면 「TAKE OFF(이륙을 개시했다)」라고 표현했을 정도이다. 조던의 개인 능력이 주목받게 된 것은 시카고의 시장이 비교적 컸던 일, 캐리어 초기에 불스의 감독을 맡고 있던 Kevin Loughery가 조던을 자유롭게 플레이 시킨 것도 있다.
 
80년대의 NBA의 융성_1970년대 말기에는 NBA의 인기는 침체하고 있어 리그의 이미지도 별로 좋지 않았다. 그러나 데이비드·스턴이 커미셔너로 취임해 리그의 재건에 노력한 것, 매직·존슨과 래리·버드의 라이벌 관계가 많이 주목받은 것 등에서, NBA의 인기는 상승하며 갔다. 매직과 버드가 캐리어의 말기에 들어가는 무렵에는 다음 조던 시대에의 토양이 충분히 완성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시대에 케이블 TV가 보급된 것도 이 흐름을 도왔다.
 
상업적인 성공_조던은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을 거둔 스포츠 선수의 한 사람이다. 1998년의 시점에서  Fortune잡지는 조던이 프로 들어가 이후 100억 달러의 경제 효과를 올렸다고 말하고 있다.이것은 본업인 농구 뿐만이 아니라 나이키,맥도날드,코카콜라,게토레이 등과의 스폰서십 없이는 완수할 수 없다. 특히 1980년대에 당시 신진 영화 감독이었던 스파이크·리 지휘에 의한 나이키 일련의 CM이 성공했던 것이 크다.



그 외
_1989년에 결혼, 아내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낳았다. 조던은 일리노이주 하이랜드 파크에 주거지를 가지고 있다. 파니타 부인은 2002년에 이혼 소송을 일으켰지만 후에 화해했다.
 
조던은 가장 빠른 시기에 머리를 대머리로 한 NBA선수의 한 명이었다. 그가 연령에 비해서 빨리 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했던 것이 이유의 하나였지만 1990년대 초 이후 대머리는 북미의 젊은이, 특히 흑인 남성의 사이에서는 패션으로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조던은 경기 중에 집중하고 있을 때에는 혀를 내미는 버릇이 있는 것도 유명했다.
 
일상생활로는 골프를 좋아하고 있어, 시합인 어느 날에 수 홀을 도는 일도 자주 있었다. 골프를 좋아하는 것이 지나쳐 1990년대 초반에는 내기 골프가 사회의 비판을 받은 적도 있었다.
 
시합 전에는 스테이크와 포테이토를 먹고 시합에 임하고 있다.


NBA에는 다양한 기술이 존재한다. 오늘날 스타들은 코트위에서 덩크슛, 크로스 오버 드리블, 더블 클러치등 팬들을 매료시키는 스킬을 구사하며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하지만 오늘 소개할 기술을 말하자면, TV 중계에도 캣치하기 힘들며, 경기장에서도 눈을 크게 뜨고, 귀를 열어야 간신히 볼수있는 음지에 존재하는 기술이라 할수 있을것이다. 

바로 '트래쉬 토킹'이다. 트래쉬 토킹의 사전적 의미는 《미》 (스포츠에서 상대(팀)에 대한) 모욕적인 말(하기), 더러운 욕설(하기) 라고 명시돼있다. 사실 필자가 트래쉬 토킹을 처음접한것은 NBA의 존재조차 모르던 유년시절이다.

영화 'White Men Cany't Jump'에서 웨슬리 스나입스와 그의 동네 친구들이 벌이던 설전을 배꼽잡아 봤던 기억이 난다. 동네에서나 일어날법한 유치한 말장난이 NBA 코트에서 심심치않게 벌어지고있다는것은 새삼스럽지않다.

도가 지나치면 벌금이 부과되기도 하는 이 기술을 선수들이 왜 사용하는지를 알아보기에 앞서, 역대 최고의 입담꾼들을 소개해볼까한다.


게리 페이튼(마이애미 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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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쉬 토킹을 얘기할때 페이튼의 이름을 논하지 않을수 없다. 그만큼 페이튼의 입담은 전설적이다. 1996년 시카고 불스와의 챔피언 결정전에서 또 다른 베스트 트래쉬 토커 마이클 조던을 상대로 전혀 주눅들지않고, 유일하게 조던을 파이널에서 20점대로 묶는 철벽수비를 선보여 많은 호평을 받았다.

NBA에서는 트래쉬 토킹에 대해서 심판에게 500달러짜리 벌금 스티커를 뗄수있도록 하는데, 한창때는 연간 2만달라씩 벌금을 물어도 그의 혀는 멈출줄을 모른다. 지금부터 전설적인 페이튼의 어록들을 한번 살펴보자.

1995년 창단된 밴쿠버 그리즐리스의 루키 크리스 로빈슨에게 한말이다. "이봐, 애송이! 수비 좀 배우고 와야겠어. 여기는 고등학생 노는곳이 아니라고."

덴버 너겟츠 시절의 바비 잭슨은 페이튼의 쉴새없는 트래쉬 토킹에 진저리가 난 나머지, "니가 얼마나 잘하는지 한번 보자, 어디한번 마음대로 쏴보라구"라고 받아쳤다. 이에 페이튼은 보란듯이 3점슛을 성공시키며 "내가 괜히 1200만달러씩 받는줄 알어?"라고 되받아쳤다는 후문.

2004년 파이널 MVP이자 매년 All-NBA 디펜시브 팀에 단골손님으로 빠지지않는 천시 빌럽스도 보스턴 셀틱스 루키시절에 페이튼에 뒤통수를 맞은경험이있다. "어이~ 꼬맹이, 수비를 그렇게 해서돼겠나?" 현재 빅리그에서 모습을 감췄지만 빌럽스와 입단동기였던 론 머서 역시 페이튼의 독설을 피할수없었다. "이봐, 애송이! 네가 날 막는다면, 1200만달러 주는 우리 구단주가 눈물을 흘릴걸세. 그지?"

최고의 스피드를 자랑하는 앨런 아이버슨은 정말 치욕스러운, 토킹을 경험했다. "니 별명은 키스 밴혼이 어떨까? 넌 너무 느리거든." 하지만 아이버슨은 이에 굴하지않고 평소대로 플레이를 진행했고, 페이튼은 한술더떠 아이버슨을 자극했다. "앨런, 왜 사람들이 너를 'Answer'라고 부르는지 알것같에. 누가 25개의 슛을 시도해 0개 성공시킬 해답(Answer)이기 때문이지. 하하!"   

페이튼의 어록은 나열하자면, 그 어떤 백과사전도 부럽지않을 두께로 채울수있을것이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페이튼의 어록의 게스트는 존 스탁튼이다.

평소 냉정하고 웬만해서 흥분을 하지않기로 유명한 스탁튼의 이성을 흔들어놓은 페이튼은 대체 어떤 마법을 부렸을까? 소닉스와 재즈의 경기중 스탁튼은 쉴새없이 떠드는 페이튼에게 "니 입에는 모터가 달렸냐? 하루종일 떠드는데 혀가 지치지도않는가? 좀 쉬어가며 하지?"라고 일침을 놓았다. 이에 페이튼은 "존 할아버지, 내 혀의 젊음이 부러운가보군."라고 화답하며 스탁튼을 도발시켰다.

페이튼의 트래쉬 토킹에 대한 타 선수들의 입장은 각양각색이다. 앞서 언급한 마이클 조던은 "페이튼의 입에 농구공을 쳐넣고싶었다."라고 회고했고, 현재 마이애미 히트에서 한솥밥을 먹고있는 제이슨 윌리엄스는 "나는 코트 내에서 변변치 못한 실력을 뽐내는 선수 9명 보다는 말 잘하는 1명의 선수가 더 낫다고 생각한다."라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코트에서 말을 하지 않으면 농구를 하는 것 같지 않다. 나는 트레쉬 토킹을 하면서 `내가 최고다'라는 자기 최면을 건다. 트래쉬 토킹은 이기기 위한 방법이다." 페이튼의 말이다.


마이클 조던(前 시카고 불스-워싱턴 위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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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칭호를 가지고있는 그가 이런 더티한 스킬을 구사한다? 사실이다. 마이클 조던 역시 트래쉬 토킹의 대가로 알려져있다. 조던의 트래쉬 토킹은 그의 칭호답게 페이튼과 달리 품격(?)이 있었다고 한다. 덩크슛이나 드라이브인을 할때마다 어김없이 나왔던 조던의 혀가 우리들이 모르는 어딘가에 쓰였는지 알아보는것도 또다른 재미일것이다.

조던의 눈감고 자유투 슛은 필자가 처음본 조던의 '트래쉬 토킹'이었다. 사실 트래쉬 토킹 중에서는 수위가 낮다고 볼수도있고, 그 범주에서 벗어날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농구경기 도중에 동료도 아닌 다른선수와 대화를 할수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장면이기에 지금도 뇌리한구석에 선명히 자리잡고있다.

상황은 이러했다. 무톰보의 데뷔시즌이었는데(1992년) 조던의 명성을 시험해보고픈 마음에 "헤이~ 마이클, 제 아무리 당신이래도 자유투를 눈감고 넣을수는 없을꺼야" 조던은 웃으면서 기꺼이 무톰보의 도전에 응했고, 크린으로 성공한뒤 한마디 던졌다. "Welcome to the NBA."

훗날 무톰보는 이일을 두고두고 회자하면서 자식들 얼굴을 어떻게 보냐면서 걱정했다는 후문이다. 어찌보면 무톰보가 도발을 시켰지만 결국 당한것은 무톰보였기에 조던에게 저작권을 주어도 무방하지않을까? 

역시 같은해인 1992년도 파이널 1차전에서 일어난 일이다. 리그 슈팅가드의 양대산맥이라 불리던 조던과 드렉슬러의 대결로 관심을 끈 이 시리즈에서 드렉슬러는 조던의 혀에 또다른 희생양이 돼고말았다. 평소 조용하고 침착한 성격으로 알려진 드렉슬러도 격분하게 만든 조던의 토크를 들어보자.

조던의 3점슛이 연거푸 터지자 드렉슬러를 향해 조용하 입을 열었다. "오늘 내 슛이 너무 좋은 것 같에. 자네 잘못이 아니야." 드렉슬러는 슬슬 스팀이 올라오고있었다.

조금후에 클리포드 로빈슨을 앞두고, 전반전 6번째 3점슛을 성공시킨 조던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도 자네 잘못이 아니야. 냐도 놀랬거든. 이번엔 자네가 넣어보게." 전반전에만 조던에게 35점과 NBA 파이널 역사상 가장많은 3점슛(개인)을 허용한 블레이저스는 결국 1차전을 내주고말았다.

1997-98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와의 정규시즌때 일이다. 당시 올랜도에서 이적해온 브라이언 쇼는 조던의 공격을 번번히 막아내며, 자신감이 충만한나머지 조던에게 트래쉬 토킹을 건낸다. 조던은 응답했다. "이제 조용히 하는게 좋을걸?" 쇼는 조던의 충고를 무시한채 조던을 열받게하는데 열중했다.

조던은 워리어스의 감독이었던 P.J 칼리시모 감독에게 말했다. "저 친구 조용히하게 하는게 좋을걸요." 이후 조던은 12연속 득점을 몰아넣으며 워리어스는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가오는 칼리시모 감독에게 조던은 입을 열었다. "내가 조용히 시키는게 좋을거라고 했죠?"

이러한 사례들은 조던의 지인들과 리그 여러선수로부터 어렵지않게 들을수있다. 조던은 상대방이 트래쉬 토킹을 시작하면 반드시 응징을 내렸고, 눈이 마주치면 도전으로 받아드렸다고하니, 그 위용이 짐작이 되고도 남음이다.

상대 선수중에 시그네처 신발을 신고 나오는 선수가 있다면 "어이, 자네 오늘 그 신발을 꼭 신게나. 내가 너보다 10배는 잘한다는 것을 보여줄테니까." 라고 말했고, 어렵사리 골을 성공시키면 "자네 수비 매우 훌륭했어. 하마터면 내가 막힐 뻔했으니까." 라고 도발시켰다.

좀 자극적이지만 가족 이야기를 들먹거리는 예도 있다. "나 오늘 50점정도 넣을것 같은데, 자네 아들이 보고있다면 정말 미안하게됐네." 정말 굴욕적이지않을수없다.

최고의 트래쉬 토커가 누구냐는 질문에 조던에게 한표를 던진 리그 동료선수들의 이야기다.

브라이언 러셀 : "MJ다. 트래쉬 토킹은 NBA의 일부이다. 어느 팀이든 한 명은 꼭 그렇게 해줘야 하는 선수가 있어야 한다."
에디 존스 : "당연히 MJ!!!"
앤쏘니 필러 : "그는 좀 세련된 트래쉬 토크를 추구한다. 예를 들어 점프샷을 인유어 페이스로 넣고 '아깝군 거의 막을 수 있었는데'라는 식으로.."
헤이우드 워크맨 : "만약 당신이 공격형 선수가 아니라면 그는 '쏘게 해주지'라고 한 후 오픈 찬스를 내준다. 당신이 넣지 못하게 하고 공격에서 완전히 당신을 제외시킨다." 

이런 조던의 어록들은 그의 남다른 승부근성을 대변하는 선례라 할수있을것이다.


찰스 바클리(前 필라델피아 76ers-피닉스 선즈-휴스턴 로켓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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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다니는 냉장고', '리바운드하는 둥근산', '코트의 악동'. 누군지 금방 눈치챘을것이다. 때로는 재치있는 위트로, 모든 NBA 관계자를 대변하는 거침없는 독설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과 비난을 한몸에 받고있는 찰스 바클리를 일컫는 수식어들이다. 

1999-00시즌 자신의 친정팀인 필라델피아 76ers와의 정규시즌 경기도중 입은 부상으로 은퇴를 선언해야만했다. 이후 바클리는 방송계에서 장기인 입담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종횡무진 활약중이다.

휴스턴의 야오 밍이 20득점 이상하면 당나귀 엉덩이에 키스를 한다고 공약했다가 야오의 30득점으로, 스튜디오에 당나귀를 끌고와 기어이 입을 맞추는,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올초에는 케니 스미스의 도발로 라스베가스에서 열렸던 올스타전에서 딕 바베타 심판과 수어 사이드 형식의 시합을 벌이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전성기 시절 책임못질 언행으로 수많은 사건사고 사례들을 양산해낸 바클리는 해설가로 변신하긴 했지만 역시 그의 입은 은퇴하지 않았음을 과시하고 있다.

현재 ESPN에서 바클리와 함게 한솥밥을 먹고있는 레지 밀러는 “그는 선수의 기록만 들먹이는 다른 해설자들과 달리 선수들에게 비난도 서슴지 않는 독특한 입담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그의 활동을 좋아한다."라고 말하며 동료애(?)를 과시하기도 했다.

바클리는 사실 코트에서보다 경기장 밖에서의 어록들로 어필을 많이 하였다. 코트 위에서 일어난 바클리의 트래쉬 토킹을 들어보자.

평소 신앙심이 남달랐던 '코트의 철인' A.C 그린에게 바클리가 말한다. "하나님이 그렇게 위대하다면, 왜 너에게 점프슛 능력을 주지않은건가?"

코비 브라이언트가 98년 서부컨퍼런스 올스타 투표 1위를 달리고있을때 당시 로켓츠 소속이었던 바클리가 오닐에게 물었다. "코비가 누구냐?"

마지막 백인 리바운드왕이자 악명높은 배드 보이즈의 일원이었던 빌 레임비어가 은퇴하자, 바클리가 편지를 보냈는데 내용은 이러했다. '친애하는 빌에게. 엿먹어. 당신을 사랑하는 찰스가'

조던이나 페이튼이 상대방의 약점을 극대화해 이성을 흔들게하는 '마인드 컨트롤러형'이라면 바클리는 자기과시형의 토킹을 즐겨썼다. 일례로 "이봐, 난 잘생겼지. 게다가 돈도많어. 넌 나한테 모든면에서 안돼."라고 하거나 자신의 시그내쳐 슈즈를 신고있는 상대방에게 보이며, "이게 이번에 나온 내 운동화라네. 하지만 이걸 자네가 신는다고해서, 자네를 부자로 만들어주거나 리바운드를 잡게해준다는 생각은 버려. 아, 당연히 나처럼 잘생기게 해주지도 않고 말이야. 그냥 나랑 똑같은 신발을 신었다는데에 의미를 두도록 하게나."라고 하기도했다.

바클리는 코트에서 항상 무언가를 말한다. 그를 떠벌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항상 실력으로 말을 뒷받침하는 바클리다.

"나는 이렇게 될걸로 정해져 있었다고 생각한다. Philly에서의 끝은 정해져 있었다." - 선즈로 트레이드된 후 인터뷰에서

"내가 입단했으므로 우승할 수 있을 것이다. 친구 마이클과 결승전에서 만난다면 더 바랄것이 없겠다." - 선즈에 이적한 후 첫 시즌을 맞으며

"내가 그에게 엉터리 같은 판정을 하더라고 말했더니 그는 그런 말을 하면 벌금을 물리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돈으로 위협말라 돈으로는 나를 움직일수 없을 테니까라고 말했다." - 심판 판정에 항의하다 벌금을 문후

"인생에서 이렇게 좋은 날은 죽을때까지 없을 것이다. 꿈이라면 깨고 싶지 않다." - 93년 5월 MVP수상 소감중

"우리들은 지금 커다란 구멍에 빠졌다. 아리조나에는 그랜드캐년이 있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일은 태양이 뜰 것이다." - 93년 파이널 2차전 불스에 패배후

"선즈의 팬들에게 말하겠다. 케빈존슨이 없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결승에 올라왔겠는가. 그런 그에게 야유하다니 그런 사람은 경기장에 오지마라." - 93년 파이널전때 부진했던 케빈존슨을 야유하는 팬들에게

"사람들은 멋진 일년이었지 라고 하겠지만 지금 기분은 최악이다. 우승했다면 은퇴하겠지만 이래서야 어디 그만 두겠는가. 나는 준우승하러 피닉스에 온게 아니다." - 93년 파이널 패배

"나는 신이 내가 시작한 곳에서 그걸 끝내길 원한다고 생각한다. 내 맘속엔 어떤 슬픔도 없다. 모두들 내가 소년에서 어른이 되가는걸 봐 왔잖은가. 그리고 내가 시작했었던 Philly에서의 끝은 훌륭하다. 내가 명예의 전당에 갈만큼 운이 좋다면, 그건 76er로서일 것이다" - 2000년 필라델피아에서 부상후 인터뷰에서

“이대로 떠날 수 없다. 화려한 은퇴경기를 갖겠다. 단 한 경기다. 더 이상은 뛰지 않겠다. 내가 원하는 건 단지 마지막 경기서 남의 부축을 받지 않고 내 힘으로 당당하게 코트를 나서는 것이다."
 
바클리는 희망대로 시즌아웃에 버금가는 무릎부상을 눈물겨운 재활훈련으로 극복하며, 2000년 4월 19일 밴쿠버 그리즐리스와의 마지막 경기에 출장하였다. 그리고 15년동안 보여주었던 특유의 공격 리바운드에 이은 바스켓 카운트 골밑 슛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역시 바클리답지않은가?


레지 밀러(前 인디애나 페이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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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적인 3점슛터로 명성을 떨치던 레지 밀러가 트래쉬 토킹으로 세간에 알려진것은 80년대 조던과의 사건에서 비롯됐다.

밀러는 당시 2년차에 불과한 애송이였는데, 2년 연속 득점왕에, 2년연속 슬램덩크 콘테스트에서 우승한 '라이징 스타 마이클 조던'에게 도전장을 내밀었고 기어이 조던을 화나게 하며 그가 먼저 밀러에게 주먹을 날리게하는 불상사를 만들어낸다. 이 정도의 담대함이라면 그가 왜 4쿼터 승부처에 그토록 강심장일수있는지 짐작이 간다.  

밀러는 은퇴후에 바클리와 케니 스미스가 속해있는 TNT 해설위원팀에 들어가서 제2의 농구인생을 준비하였는데, 향후 해설자로서의 포부를 묻는 인터뷰에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데이빗 스턴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독설을 퍼부을수 있습니다."

레지 밀러와 트래쉬 토킹을 말하자면, 빠질수없는 사람이 한명있다. 바로 '스파이크 리' 감독이다. 레이커스에 잭 니콜슨이 있다면 닉스에는 스파이크 리가 있다고 할정도로 열렬한 닉스의 팬이었던 스파이크 리는 닉스팬들에게 원성을 살만한 일을 저지른 과거가 있다.

기자: 스파이크 리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 하십니까?
밀러: (기자에게 어깨 동무를 하며) 스파이크 뭐요?

둘의 악연은 시간을 거슬러 지금으로부터 12년전에 시작됐다.

당시 닉스는 패트릭 유잉과 올 NBA팀에 선발된 존 스탁스가 팀을 이끌고 있었고, 헤드 코치는 명장 팻 라일리 였다. 결과론적으로 닉스는 이 해에 동부 컨퍼런스 챔피온에 등극하며 로켓츠와 자웅을 겨룬게된다. 페이서스의 전력도 만만치않았지만, 5차전에서 마크 잭슨의 결장과 릭 스미치의 파울 트러블은 페이서스를 궁지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스파이크 리는 늘 그랬듯이, 적군에게는 독설을, 아군에게는 독려의 말을 아끼지않으며, 떠들기 시작했다. 5차전이 열린 홈구장 메디슨 스퀘어 가든은 경기 내내 뜨겁게 달궈졌고, 필자가 기억하는 이 당시 분위기는 파이널을 방불케 할정도로 대단했다. 팻 라일리는 숨이 막히는 수비를 주문하며 페이서스를 유린했고 우세하게 경기를 장악해나갔다. 적어도 스파이크 리의 독설이 시작됐기전까지는 말이다.

"이봐 밀러, 우리 닉스랑은 상대가 안돼. 네가 하는게 농구냐? 나도 그정도는 하겠다. 넌 3점밖에 모르잖아." 그 얘기를 들은 레지 밀러는 벤치에 들어가다가 말고 스파이크 리에게 가서 이렇게 설교를 했다. "시끄러워 땅꼬마 감독아! 난 너같은 인간이 제일 싫어. 입만 살아가지고, 나 열받게 해봤자 좋을 건 하나도 없다는 건 알아라."

"너같이 3점밖에 모르는 놈한테 몇백만 달러씩 주는 인디애나도 참 한심하다. 불쌍한 팀이야. 벤치에 앉아 있는 애들과 별반 다를게 없잖아? 넌 내 영화에 출연하면, 시간당 10달러도 안줄텐데 말이야." 순간 레지 밀러는 머리 끝까지 폭팔하고 말아서 그에게 달려가 그가 입고 있던 뉴욕 닉스 유니폼을 붙잡고 설교했다. "넌 날 열받게 했어. 열받게 하지 말랬지. 너 때문에 닉스는 죽 쑨 밥이 되고 말거야, 이제 두고 봐라."

작전타임 뒤 레지 밀러의 예고대로 게임의 양상은 바뀌기 시작했다. 밀러의 주특기인 3점슛 퍼레이드가 시작됐고, 골이 들어갈 때 마다 밀러는 스파이크 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연속 3점슛 3개 성공, 그리고 9m 3점슛. 메디슨 스퀘어는 조용해 졌고 카메라 앵글들은 밀러와 스파이크 리를 번갈아 가며 비추기 시작했다. 그 당시 밀러의 마크맨이던 최고의 수비수 존 스탁스가 그에게 말했다.

"야 너무 무섭다. 적당히 해라. 네 체면도 생각해야지."

"나보고 난 시간당 10달러 짜리라고 스파이크 리가 말하는데 넌 5달러 주기도 아깝단 소리지?" 이것이 바로 첫번째 밀러 타임이다.

이듬해인 1995년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메디슨 스퀘어가든의 악몽은 재현됐다. 경기 종료가 18초 정도 남았을 시점, 인디애나 페이서스는 6점 차로 뒤지고 있었다. 그러자 이것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밀러의 3점슛이 다시 한번 터졌다. 차이는 3점 차. 3점을 넣음과 동시에  백코트로 돌아갈려고 하던 밀러는, 그러나, 다시 방향을 바꿔 스탁스에게 오던 패스를 스틸했고, 스탁스는 넘어졌다.

그런 뒤 밀러는 3점 라인 밖에 나가자 마자 턴어라운드 3점슛을 쐈고, 손에서 떠나간 공은 그대로 림에 꽂혔다. 동점을 만든 밀러는 그 뒤 파울을 엏어 그의 주특기 중 하나인 자유투 두개를 림에 꽂음으로써 8.9초 8득점으로 닉스를 격침시켰다.

경기 종료 버저가 울렸을 때, 전광판 스코어는 107-105. 밀러는 스파이크 리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이봐, 스파이크 리 감독. 10달러짜리 선수한테 깨져버린 닉스는 시간당 1달러 주기도 아깝지 않나? 너무 고맙네, 스파이크 리. 경기장 나갈 때 목숨부지하길 바라네." 밀러의 얘기에 스파이크 리는 기가 완전히 죽어버렸고, 언론은 스파이크 리가 닉스를 죽였다는 식으로 보도를 했다.

세월이 약이랬던가. NBA 최고의 앙숙이 되버린 둘의 관계는 밀러가 은퇴할 무렵에 극적인 반전을 맞는다. 레지 밀러 최고의 Hater는 어느덧 최고의 팬이 돼있었다. 사실 필자는 레지 밀러가 코트에 남긴 트래쉬 토킹에 관한 어록을 잘 알지못한다. 앞서 얘기했던 80년대 후반 조던과의 마찰만이 유일하게 기억나고 밀러와 리그의 어떠한 선수가 입씨름을 했던 사례가 있다하여도 스파이크 리와의 전쟁보다 더 할수는 없었을것이다. 

레지 밀러를 4번째 토커로 선정한것은 사실 트래쉬 토킹보다도 그의 3점슛 때문이다. 밀러는 스파이크 리에게 약속을 하였다. 그것도 원정경기에서 그 어느 팀에게 뒤지지않을 열정적인 원정팬들 앞에서 말이다. 스파이크 리의 혀에 응수하는 밀러의 기백넘치는 처세술과 그에 걸맞는 실력을 입증하는 시나리오 자체가 레지 밀러와 인디애나 페이서스 팬, 나아가 NBA 팬들을 충분히 매료시키지않았는가.

 이번시즌 TNT에서 많은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지만 내년에는 바클리 못지않은 입담을 기대해봐도 좋을것이다.


지금까지 알아본 특정 4인이 모두 불혹을 전후하는 베테랑 혹은 은퇴선수다. 그렇다면 젊은 현역 선수중에 이들의 계보를 이을만한 입담꾼은 없는걸까? 아이버슨은 근래에 잠잠한 모습이지만 한창때는 선배들에게 거침없이 독설을 날리며 명성을 쌓아왔고, 코비 브라이언트나 케빈 가넷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최고라고 중얼거리며 자기암시를 하는등, 선배못지않은 입담을 과시하고있다.

최근 사람들 머리속에 강렬히 각인되어 회자되고있는 트래쉬 토킹은 아마 르브론 제임스가 그 주인공일것이다. 지난 2006시즌 워싱턴 위저드와의 플레이오프때 생긴 일이다. 당시 6차전이 치러지고 있었는데, 양팀다 물러설수없는 중요한 한판승부였다. 아레나스는 연장전 종료직전 승부를 결정지을수있는 자유투 2개를 얻었고, 첫번째 자유투를 실패했다.

르브론 제임스는 두번째 자유투를 준비하던 아레나스에게 다가가 말했다 "이번에 못넣으면 너흰 집에 가게될꺼야." 정말 일품이지 않은가? 아레나스는 결국 2의 자유투를 모두 놓쳤고, 데이먼 존스에게 통한의 3점슛을 허용하며 패배의 빌미를 제공했다.

선수가 아닌 관중에 의해 시작된 2005년 인디애나-디트로이트 사건은 트래쉬 토킹이 최악의 상황으로 연결될수있는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었지만, 그 이면에는 승부에 활력이 되는 긍정적인 사례를 어렵지않게 찾아볼수있다.

신인왕과 MVP, 2회 우승을 거머진 '해군 제독' 데이비드 로빈슨이 말한다. "조던, 버드, 페이튼의 트래쉬토크는 즐길만 했다. 하지만 요즘의 트래쉬 토크는 도를 넘어 지나치게 천박한 느낌이다. 그래서 내가 팀 던컨을 좋아한다. 그는 경기와 자기 플레이 이외의 것들은 절대 신경쓰지 않는다." 최근 눈살을 찌뿌리게하는 젊은 선수들의 언행이 야기시키는 일련의 문제들을 꼬집어 얘기하고있는 로빈슨이다. 이는 최근 몇년간 리그에 불어닥친 폭력사태와도 무관하지 않다.

스퍼스의 또 다른 선수인 브루스 보웬 역시 동료였던 로빈슨과 같은 생각이다. "트래쉬토크는 잡담에 불과하다. 쓸데없는 짓 말고 경기에 집중하는게 낫다."

 지금까지 트래쉬 토킹에 관해 여러가지 어록들과 인터뷰를 알아보았다. 필자는 이번 글을 쓰면서 한가지 결론에 도달할수 있었다. 트래쉬 토킹은 독이다. 하지만 훌륭한 약사는 독을 약으로 조제한다. 그렇지 못하면 약사와 환자 모두가 해를 입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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