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 & COLUMNS/떠돌이검사 2009. 12. 16. 14:44

잊혀진 남자 스티브 프랜시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당돌했지만 한편으론 순진했던 한 NBA 선수가 있다.

아니, 있었다 라고 하는게 더 좋은 표현이겠다. 그는 이미 NBA에서 더이상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도 그가 NBA에서 뛰고 있는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건 왜일까.
 
아마 그만큼 그는 특별했기 때문이 아닐까.
 

2000년대 NBA 팬이라면 프랜시스의 화려한 전성기를 기억 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그 위치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아는 이는 드물다. 한 팀의 프랜차이즈로 영원히 남을 것만 같았던 특별한 재능, 바로 2000년대 공격형 포인트가드를 대표했던 스티브 프랜시스의 농구인생을 재조명 해보고자 한다.

 


불쌍한 청개구리


프랜시스는
1977 2 21일 워싱턴 DC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 프랜시스의 친아버지는 프랜시스가 2살때 가족을 버리고 떠났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어머니인 브렌다 윌슨이 혼자 한 가정을 책임져야 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증오했던 프랜시스에게 어머니란 존재는 소중함 그 자체였다.

 

유년시절을 매릴랜드 주의 타코마 파크 시티에서 보낸 프랜시스는 9살부터 농구를 시작했으며인근 공원과 소방서의 농구코트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녹록치 못한 가정형편 때문에 9살의 어린 나이에 아르바이트 생활을 시작했지만 농구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그는 외소한 체구를 지닌 말라깽이였다.


천부적인 운동능력이 돋보이기는 했으나
, 작은 키 때문에 자유투라인 밖에서의 슛은 항상 에어볼이 되기 일쑤였다고 한다. 작은 키 덕분에 픽업게임마다 포인트가드 외의 포지션은 아예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NBA 선수와는 다르게 프랜시스는 정식 농구 경험은 그리 많지 않다.

고등학교 입학 전까지 내내 길거리에서 농구를 했던 프랜시스는 고등학교에 입학하자 마자 농구부를 지망했지만
, 나쁜 성적때문에 학교측은 프랜시스의 경기 출전을 불허했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질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며 주기적으로 학교를 무단결석하였고 결국 농구부에서 퇴출되었다.

 

10학년때 다시 농구부에 입문한 프랜시스는 그의 첫 정식 농구 경험을 하게 된다. 그는 주로 후보로 출전하며 경기경험을 쌓았지만 그 1년이 끝이었다. 당시 문제아였던 프랜시스는 11학년때 나쁜 성적과 더불어 여러번 패싸움에 연루되며 퇴학당했고 결국 여러번 전학을 가야했다. 하지만 그가 가는 학교마다 프랜시스의 농구부 입문을 거부했는데 농구를 사랑했던 프랜시스에게 농구를 할 수 없는 현실은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다.

 

하지만 더 큰 충격은 프랜시스의 고등학교 졸업반(12학년) 때 찾아왔다.


프랜시스의 어머니 브렌다 윌슨이 암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 집안 형편때문에 병원 한번 가보지도 못한 채, 프랜시스를 떠나버린 것이었다. 그것은 가히 큰 충격이었고 졸지에 고아가 된 프랜시스는 그 이후로 농구공을 잡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손에 자란 프랜시스
, 아버지를 모른채 어머니만을 보고 살아온 그에게 어머니를 잃은 아픔은 너무나도 컸다.
이후 그는 방황했고, 결국 고등학교를 자퇴했다. 물론, 농구공은 그의 손에 없었다.

 

프랜시스의 1년이란 정식 농구경험은 팀 전술, 체계적인 훈련, 기본기등을 모두 습득하기에는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었으며 고등학교 자퇴 후 그에게 남은것은 제대로 된 코칭이 아닌 길거리에서 습득한 그만의 스타일이었다.

 

프랜시스는 결국 NBA 선수들 대부분이 경험했던 ABCD 캠프, AAU 토너먼트, 맥도날드 하이스쿨 올아메리칸 게임등은 고사하고, NCAA 1부리그 대학 팀들의 스카우트도 제의받지 못한 채 고등학교 생활을 마무리 하게된다.

 


농구를 버릴 수 없었던 청년


모든 영웅들은 한번씩 역경을 딛고 일어선다
. 프랜시스 역시 비슷한 유형의 영웅이었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3개월간 방황했던 프랜시스가 다시 농구를 시작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3개월 동안 프랜시스의 키는 부쩍 커졌다)

 

프랜시스는 매일 인근 소방서의 농구코트에서 픽업게임을 하며 그의 진가를 발휘했다. 이후 프랜시스는 길거리 농구의 레전드로써 그 유명세를 떨쳤다.


당시 매릴랜드
, 버지니아, 워싱턴 DC에서 수많은 길거리 농구선수들이 소방서를 찾아와 프랜시스에게 도전했지만 단 한명도 그를 이긴적은 없다고 한다.
그만큼 길거리 농구에서의 프랜시스는 독보적이었다.

 

그 와중 프랜시스의 재능을 알아본 매릴랜드 소속 AAU의 감독 루 윌슨은 프랜시스에게 팀 합류를 요청한다. 그는 프랜시스를 직접 찾아와 길거리 농구가 아닌 더 높은 세계로 도전하자고 권유했고, 프랜시스는 다시한번 정식 농구에 도전해보고 싶은 생각에 흔쾌히 승낙했다.

 

이 결정은 결국 프랜시스의 인생을 바꿔놓게 된다.

 

루 윌슨의 AAU 팀은 플로리다의 AAU 토너먼트에 참가했는데, 수많은 대학 코칭스탭들 앞에서 프랜시스는 맹활약 하며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경악케 했다. 스카우팅 리포트는 물론, 고등학교 유망주 리스트에도 없던 한 선수가 혼자 상대팀을 초토화 시켰으니 그럴만도 했다. 토너먼트 직후 텍사스에 위치한 샌 자신토(San Jacinto) 쥬니어 칼리지는 프랜시스에게 농구 장학금을 제의했다.

 

단 한번도 매릴랜드를 떠나본 적이 없던 매릴랜드 토박이 프랜시스는 결국 농구를 하기위해 텍사스로 항했다.


 

샌 재신토 쥬니어 칼리지 농구부는 NJCCA(전미 대학 농구리그인 NCAA의 하부리그) 에 속해있었다. 프랜시스로써는 첫 대학 농구경험이었지만, 여전히 NJCCA 무대는 그에게는 좁은 세계였다. 프랜시스는 샌 재신토 쥬니어 칼리지를 시즌 36연승에 NJCCA 토너먼트 결승전까지 이끌었다. 비록 샌 재신토 쥬니어 칼리지는 결승전에서 패했지만, 스티브 프랜시스는 대학농구 관계자들의 이목을 끌었다.

 

샌 재신토에서의 짜릿한 1년을 뒤로하고 스티브 프랜시스는 또다른 NCJAA 소속의 쥬니어 칼리지로의 편입을 결정했다. 프랜시스의 다음 행선지는 매릴랜드 주의 알레거니(Allegany) 쥬니어 칼리지였다. 프랜시스의 전설은 알레거니에서도 계속되었다. 그는 알레거니의 30연승을 이끌었고 이는 알레거니 대학 농구부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 무패 시즌이었다 (시즌 30승 무패) 매릴랜드 주는 프랜시스의 이름으로 들썩거렸고, 결국 그 이름은 매릴랜드 대학의 개리 윌리엄스 감독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결국 개리 윌리엄스 감독은 알레거니 쥬니어 칼리지의 홈 경기를 직접 관전하러 왔고, 그 경기에서 프랜시스는 단 하나의 샷도 놓치지 않는 활약을 펼쳣다. 윌리엄스 감독은 시즌 후 프랜시스에게 농구 장학금을 제의했고 알레거니에서의 1년 후 프랜시스는 매릴랜드 대학의 윌리엄스 사단에 합류하게 된다.

 


매릴랜드의 돌격대장
, 전국구 스타가 되다.


2
년간의 NJCCA 생활을 청산하고 드디어 프랜시스는 NCAA(전미 대학 농구리그)라는 더 큰 무대에 설 기회를 얻었다. 때는 바로 1998.

 

NJCCA에서 맹활약 했다지만 NCAA 경험이 전무했던 프랜시스의 실력을 과소평가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프랜시스의 가치를 인정받는 데에는 단 10경기만이 필요했다.

 

등번호 23번의 매릴랜드 주전 슈팅가드 스티브 프랜시스를 중심으로 매릴랜드 대학교는 첫 10경기에서 10연승을 거뒀다. 그중 전미 최고의 팀중 하나였던 스탠퍼드 대학을 상대로 거둔 승리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1998-1999 시즌 매릴랜드는 스티브 프랜시스, 로니 백스터, 후안 딕슨등이 팀의 주축이었다. 시즌이 지날수록 프랜시스의 주가는 상승했고, 매릴랜드 역시 전국구 강호로 거듭났다.

 

경기당 18 5어시스트를 기록한 프랜시스는 비록 매릴랜드를 NCAA 전국 토너먼트 (March Madness) 우승으로 이끌지는 못했지만 2nd Team All-American, John Wooden Award / Naismith’s Player of the Year Award 대상 후보에 이름을 올리는등 각종 개인 영예를 휩쓸었다.

**당시 매릴랜드 대학은 16강에서 론 아테스트의 세인트 조셉 대학과 연장까지 가는 사투끝에 석패했다.

 

명실부상 대학 최고의 선수중 한명으로 인정받은 스티브 프랜시스는 시즌 후 NBA 드래프트에 신청하며 결국 매릴랜드와의 결별을 결정했다. 지난 3년간 3개의 대학이란 험난한 길을 걸어왔던 프랜시스가 마지막에 빛을 보게되는 순간이었다.

 


프랜시스의 험난한
NBA 입성


1999
NBA 드래프트의 1순위 지명자 후보는 엘튼 브랜드와 스티브 프랜시스의 양강체제였다.
두명 다 1순위로써 손색이 없었지만, 프랜시스는 특히 1순위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수많은 역경을 딛고 일어섰다는 프라이드도 그 이유중 하나였겠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밴쿠버 그리즐리스에서 뛰기 싫었기 때문이다.

 

드래프트 전부터 많은 NBA 팀들은 스티브 프랜시스에 관심을 표명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밴쿠버 그리즐리스였다. 당시의 밴쿠버는 리그 최약체 중 하나였고 이미 1998년 포인트 가드 마이크 비비를 지명했던 팀이었다. 게다가 프랜시스의 집이 있는 매릴랜드와의 거리는 어마어마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밴쿠버 그리즐리스에서 뛰기 싫다는 프랜시스의 입장은 확고했다. 드래프트 이전 프랜시스는 언론에 공개적으로 밴쿠버가 자신을 뽑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내용의 인터뷰까지 하며 공개적으로 자신의 심정을 드러냈다.

 

프랜시스가 얼마나 그리즐리스를 거부했는지는 이 일화를 통해 알 수 있다.

드래프트 이전, 프랜시스는 시카고 불스(1위픽)와 샬럿 호넷츠(3위픽)의 개인 워크아웃에 자발적으로 참여했지만 그리즐리스와는 개인 워크아웃을 가지지 않았다.

당시 그리즐리스의 감독 브라이언 힐과 단장 스튜 잭슨은 프랜시스를 보기위해 직접 매릴랜드로 와야했다. 하지만 프랜시스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거의 모든 슛을 일부러 미스했다고 한다.

 

프랜시스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리즐리스는 끝내 1999 NBA 드래프트에서 2순위로 스티브 프랜시스를 지명했다. 프랜시스는 즉각 그리즐리스와의 계약을 거부했고 트레이드를 요청했다. 많은 여론들의 비판이 있었지만 프랜시스는 완고했다.

 

결국 밴쿠버 그리즐리스는 휴스턴 로켓츠와 올랜도 매직을 포함한 삼각 트레이드를 통해 프랜시스를 휴스턴 로켓츠로 이적시켰다 (밴쿠버, 휴스턴, 올랜도간의 삼각 트레이드는 총 11명의 선수들이 포함되었다).

 

1999년 드래프트 이후, 프랜시스와 밴쿠버간의 신경전은 꽤나 큰 이슈를 불러일으켰지만 결국 프랜시스는 어렵게나마 휴스턴 로켓츠와 3년 루키계약을 맺으며 NBA에 입성하게 되었다.

 


겁없는 신인 프랜시스의 화려했던 루키 시즌


트레이닝 캠프때 당시 휴스턴 로켓츠의 루디 톰쟈노비치 감독은 프랜시스를 보자마자 이 말을 건넸다고 한다
.

 

스티브, 너에게 공을 줄테니, 한번 마음껏 달려봐.”

 

그리고 프랜시스는 거침없이 달렸다.

 

상대가 누구던간에 그는 폭발적인 스피드와 극강의 운동능력으로 상대를 농락했다.

특히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있었던 프랜시스는 매 경기 엄청난 플레이로 매일 밤 하일라이트를 장식했다. 어느순간부터 크로스오버와 인 유어 페이스 덩크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있었다.

 

그는 1999-2000 시즌의 신인왕을 엘튼 브랜드와 공동수상했고, 2000 NBA 올스타 덩크 콘테스트에서 2위를 기록하며 (1위는 전설적인 덩크 퍼포먼스를 보였던 토론토 랩터스의 빈스 카터) 그의 실력을 입증했다. 또한 그는 당시 NBA 역사상 경기당 15-5리바운드-5어시스트를 기록한 7번째 신인이었다 (프랜시스의 루키 기록은 경기당 18.1-5.3리바운드-6.3어시스트)

 

프랜시스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로켓츠는 시즌 39 43패를 기록하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비록 하킴 올라주원과 찰스 바클리가 있었지만 그들은 이미 리그를 호령하던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또한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로 트레이드 되었던 스코티 피펜의 공백 역시 컸다. 팀 상황상 프랜시스가 팀의 중심이 될 수 있었지만, 반대로 그를 보좌할 선수들이 그의 절친 커티노 모블리를 제외하면 없다는 것이 팀의 마이너스 요소였다.

 

2000-2001 시즌의 프랜시스는 소포모어 징크스와는 관계없는 엄청난 활약으로 휴스턴 로켓츠를 시즌 45 37패로 이끌었다. 비록 팀은 플레이오프 진출에는 여전히 실패했지만, 프랜시스는 경기당 19.9, 6.9리바운드, 6.5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향상된 경기력을 선보였다.

                                                                                                

하지만 로켓츠의 플레이오프 진출은 멀기만 했다.


프랜시스의 세번째 시즌이었던
2001-2002 시즌, 프랜시스는 부상으로 57경기밖에 뛰지 못했으며 경기당 21.6, 7.0리바운드, 6.4어시스트라는 훌륭한 성적을 남기긴 했지만 팀 성적은 28 54패로 추락했다. 굴욕적인 팀 성적이었지만 이는 바로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고 만다. 휴스턴은 2002 NBA 드래프트에서 1순위 지명권리를 얻게되었고, 이는 결국 프랜시스와 야오밍의 만남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Stevie “Franchise”, Ming “Dynasty”
와 만나다.


2002
년 여름, 1순위 지명권을 얻은 휴스턴 로켓츠는 야오밍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복잡한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CBA(중국 농구협회)와 야오밍의 소속팀 샹하이 샥스가 야오밍의 NBA 진출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CBA와 샹하이 샥스는 야오밍을 보내는 적절한 댓가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현대 축구에서 자주 발생하는 일종의 이적료를 원했다).

 

비록 프리드래프트 캠프 참석과 당시 2순위 지명권을 가지고 있던 시카고 불스와 비공개 워크아웃을 가졌다고는 했지만, 그다지 인상깊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야오밍(당시 야오밍은 NBA 진출이 불확실 함에도 사비를 들여 미국에 입국했고, 입국하자마자 바로 다음날 워크아웃을 가졌기 때문에 자신의 진가를 제대로 발휘 할 수 없었을 것이다)에 대해 스티브 프랜시스도 비관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당시 스티브 프랜시스는 휴스턴의 단장 캐롤 더슨에게 1순위 픽을 트레이드 해서 베테랑 선수를 보강하자고 건의했을만큼 야오밍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야오밍이 휴스턴에 지명되자 그를 가장 먼저 반겼던 이도, 미국생활 적응에 가장 많은 도움을 준 이도 바로 스타 플레이어 스티브 프랜시스였다. 훗날 이 둘은 사이좋게 2003, 2004NBA 올스타전에 나란히 서부지구 선발로 출전하게 된다.


그가 야오밍에 대해 한 이 한마디는 프랜시스의 따뜻한 동료애를 대변한다.

 

저는 팀의 프랜차이즈(franchise, 프랜시스의 별명)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야오는 왕조(dynasty)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야오밍의 합류도 로켓츠를 바꾸지는 못했다.


2002-2003
시즌, 프랜시스는 81경기에 출전하며 평균 21, 6.2리바운드, 6.2어시스트, 1.7스틸을 기록하며 팀을 이끌었지만 결국 로켓츠는 시즌 43 39패로 다시한번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한편 야오밍은 루키로써 평균 13.5 8.2리바운드의 나쁘지 않은 시즌을 보냈지만 체력과 몸싸움이 아직 NBA 레벨이 아니라는것이 증명되었다.

 


문제아 프랜시스
vs 엄격한 밴 건디


2002-2003
시즌 도중 건강문제로 인해 중도 하차 했던 톰쟈노비치 감독은 시즌 직후 방광암이 발견됨에 따라 감독직에서 사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임은 팻 라일리의 후계자이며 전 뉴욕 닉스 감독이었던 제프 밴 건디였다.

 

밴 건디는 공수 밸런스를 가장 중요시 여겼으며 팻 라일리의 후계자 답게 센터중심의 하프코트 오펜스의 신봉자였다. 수비를 강조하던 그는 팀의 거의 모든 세트 플레이를 직접 지시하는 스타일의 감독이었기에 전술에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 팀의 공격을 해결하던 스티브 프랜시스와는 전혀 궁합이 맞지 않았다.

 

밴 건디는 예상대로 휴스턴의 시스템을 개편했고 서서히 팀의 중심은 프랜시스에서 야오밍으로 바뀌었다. 프랜시스의 영향력은 여전했지만, 더이상 그는 팀 공격의 선봉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는 프랜시스에게는 너무나 큰 변화였다. 프랜시스의 볼 점유율은 현저히 줄었고, 그의 슈팅 시도횟수 역시 줄었다. 결국 밴건디와 함께 한 2003-2004 시즌의 프랜시스는 전반적으로 스탯이 모두 하락했다. (평균 16.6, 5.5리바운드, 6.2어시스트)

 

하지만 프랜시스와 밴 건디 간의 문제는 단 한번도 수면 위로 떠오른 적이 없다. 프랜시스는 새로운 팀 시스템에 적응하기 위해 밴 건디가 주문한 스타일의 변화를 위해 노력했으며 밴 건디 역시 프랜시스를 팀을 위해 희생하는 그가 고맙고 존경스럽다라는 말로 화답했다. 프로 선수와 감독으로써 프랜시스와 밴 건디는 서로를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둘 사이에 충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팀의 질서를 중요시하는 밴 건디는 성실하지 못한 프랜시스의 훈련태도를 못마땅해 했으며 프랜시스 역시 세세한 규칙까지 중요시하는 밴 건디의 엄격한 팀 관리를 부담스러워 했다
.
프랜시스가 프로 미식축구(NFL) 올스타전을 관전하기 위해 원정경기를 떠나는 팀과 합류하지 않은 사태는 밴 건디의 프랜시스에 대한 마지막 신뢰마저 앗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시즌 도중 프랜시스와 밴 건디를 둘러싼 여러 잡음에도 불구하고 휴스턴은 밴 건디 체제에서 드디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프랜시스, 야오밍, 모블리를 토대로 안정적인 전력을 구축한 휴스턴은 2003-2004 시즌을 45 37, 서부지구 8위로 마치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다.

 

전당포” LA 레이커스와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맞붙게 된 휴스턴 로켓츠. 프랜시스는 시리즈 내내 팀의 에이스로써 맹활약 했지만 팀은 결국 1 4패로 조기 탈락하고 만다. 매 경기 접전 끝에 승부가 갈렸던 휴스턴과 LA 레이커스 간의 5경기 사투는 프랜시스의 처음이자 마지막 플레이오프 경험이기도 하다.

 


휴스턴과의 이별
, 모블리와의 이별


2004
년 여름, 휴스턴 로켓츠는 스티브 프랜시스와 커티노 모블리, 켈빈 케이토를 올랜도 매직의 트레이시 맥그레이디, 타이론 루, 주완 하워드, 리스 게인스와 맞바꿨다. 휴스턴과 올랜도 간의 트레이드는 프랜시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과거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여러번 옮겨다닌 기억이 있는 프랜시스에게는, 5년만에 소속팀을 바꿔야 한다는 현실이 받아들이기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또한 휴스턴은 프랜시스에게는 좋은 추억만이 담긴 도시다. 두 팀간의 트레이드 발표 후, 프랜시스는 인터뷰에서 서운한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만큼 그는 휴스턴을 떠나기 싫었 던 것이다.

 

하지만 프랜시스에게 이 트레이드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그 이유는 바로 그의 감독은 더이상 제프 밴 건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
당시 올랜도 매직의 감독 조니 데이비스는 밴 건디와는 달리 빠른 템포의 농구를 선호했다. 1996-1997 시즌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감독을 맡았었던 데이비스는 당시 신인이었던 앨런 아이버슨을 중용했던 스타일을 프랜시스에게 그대로 적용시키려 했던 것이다.

 

2004-2005 시즌, 프랜시스는 빠른 템포의 시스템에서 자신만의 경기력을 선보이며 부활했다. 그러나 또다른 이별이 프랜시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2004-2005 시즌 도중, 팀 수비력에 큰 문제가 있었던 올랜도 매직은 프랜시스의 백코트 파트너이자 절친인 커티노 모블리를 새크라멘토 킹스의 덕 크리스티와 맞바꾼 것이다.


프랜시스에게는 또 한번의 충격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트레이드 이후 그는 인터뷰에서 구단에 대한 실망감과 분노를 한꺼번에 표출했다. 인생 최고의 동반자였던 어머니를 잃었던 프랜시스에게는, 6년간 함께 백코트를 함께 누볐던 형제같와 같던 커티노 모블리와의 이별은 아마 정신적으로 큰 타격이 있었을 것이다.

 

결국 올랜도에서의 첫 시즌은 프랜시스에게는 최고의 한 해(평균 21.3, 5.8리바운드, 7.0어시스트 기록)였지만 모블리와의 이별로 인한 최악의 한 해 이기도 했다.

 


서서히 지는 프랜차이즈


2005-2006
시즌을 시작으로, 프랜시스는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조니 데이비스가 감독직에서 물러난 후 브라이언 힐이 새롭게 부임하면서 프랜시스의 역할은 다시 한번 축소된 것이다
.

 

브라이언 힐 감독은 프랜시스가 아닌 팀내 젊은 센터 드와잇 하워드를 중심으로 새롭게 팀을 개편했고, 떠오르는 신성 히도 터콜루의 성장, 그리고 2년차 백업 가드 저미어 넬슨의 육성을 중요시 했다. 프랜시스의 존재는 이들의 성장에 방해만 될 뿐이었던 것이다.

 

결국 불만에 쌓인 프랜시스는 브라이언 힐과의 관계가 최악에 이르렀고, 2005-2006 시즌 도중 올랜도 매직은 프랜시스를 뉴욕 닉스의 트레버 아리자와 앤퍼니 페니하더웨이의 만기계약으로 트레이드 하면서 프랜시스의 1년 반의 짧았던 올랜도 생활은 끝이 났다.

 

뉴욕 닉스는 이미 스테판 마버리가 포인트가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결국 프랜시스는 슈팅가드 포지션을 소화해야 했고, 루키시절부터 달아온 등번호 3번 역시 1번으로 바꿔야 했다. 그러나 프랜시스는 더이상 휴스턴 시절의 능력을 보여줄 수 없었다. 고질적인 무릎부상으로 인해 운동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스테판 마버리 역시 프랜시스와 비슷한 스타일의, 볼 소유욕이 강한 선수다. 마버리와 백코트를 나눠갖던탓에 프랜시스는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살리지 못했다.


프랜시스는 결국 닉스에서 자신의 진가를 제대로 보여주지도 못한 채 2007년 여름,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로 트레이드 된다. 트레이드 직후, 트레일블레이저스는 프랜시스의 남은 2년간 3000만불의 계약을 해지(buy out)하면서 그는 자유계약 선수가 되었다.

 

같은 해 여름 프랜시스는 고향팀 휴스턴 로켓츠와 2-600만불에 계약하며 귀환했다. 하지만 2007년의 휴스턴은 자신이 알던 예전의 휴스턴이 아니었다. 야오밍은 리그 정상급 센터로 성장했고 팀의 에이스는 자신의 트레이드 상대였던 트레이시 맥그레이디였다. 팀 내 주전 포인트가드는 자신이 아닌 레이퍼 알스턴이었으며 심지어 감독까지 제프 밴 건디가 아닌 릭 아델만이었다.

프랜시스의 기량 역시 예전의 그것이 아니었다. 거기다 대퇴근 부상까지 생기며 그의 몸상태는 NBA 경기를 소화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결국 프랜시스는 2007-2008 시즌 휴스턴 로켓츠 소속으로 단 10경기(3경기 선발출전)만을 소화한 후 더이상 NBA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2008년 겨울, 로켓츠는 프랜시스를 멤피스 그리즐리스의 2011 2라운드 픽과 트레이드 했고, 그리즐리스는 2009 1월에 프랜시스를 웨이브 했다. 루키시절, 그리즐리스를 거부했었던 프랜시스는 결국 그리즐리스에 의해 NBA 무대에서 초라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너무나도 특별했던 스티브 프랜시스
, 그의 파란만장했던 농구인생 총정리.


사람들은 그를 화려했던 공격형 가드라고 표현할 것이다
.
다른 몇몇은 그를 장단점이 극명하게 드러났던 한계가 있던 선수라고 말할 수도 있다. 올스타급 선수였으나 부상으로 인해 전성기가 짧았던 안타까운 선수라고 할 사람들도 있을것이며, 트러블 메이커라고 손가락질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농구선수가 아닌 한 인간으로 본다면 아마 필자는 그를 이렇게 평가하고 싶다.

 

"누구보다도 불리한 위치에서 시작했지만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기어이 자신의 꿈을 이루었던 불굴의 정신력을 지닌 인간승리의 표본"

 

물론 그는 트러블 메이커였다.


규칙 위반은 기본이었고
, 전국TV 생중계 하프타임 인터뷰에서 심판욕을 대놓고 할 정도의 다혈질적인 성격까지..프랜시스는 분명 결점이 있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꿈을 위해 그가 달려온 길을 돌이켜보자.


프랜시스는 단
1년만의 고등학교 정식 농구경험 외에는 길거리에서 그의 농구 실력을 갈고 닦았다. 덕분에 그는 대학교에서의 스카웃을 받지 못했고 고등학교 시절 어머니를 떠나보내며 당분간 농구공을 손에 잡지 않았다. 포기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NBA선수처럼 대학교 무대를 평정할 기회조차 없었다. 그가 NCAA 1부리그를 경험한 것은 3학년이 되고 나서부터였다. 대학교 1, 2학년은 4년제가 아닌 2년제 전문대에서 활약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매릴랜드 대학 소속으로 맹활약하며 NBA 드래프트 2순위로 리그에 입성한다. 필자는 프랜시스가 NBA 선수로 뛰는 것이 인간승리 그 자체라고 표현하고 싶다.

중도 포기할 수도 있었던 상황들을 프랜시스는 매번 이겨냈기 때문이다.

 

프랜시스가 달려온 길을 볼때마다 매번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과연 그가 어려서부터 길거리 농구가 아닌 체계적인 정식 농구 시스템에서 자라났다면 어땠을까? 대학교 1학년부터 NCAA 1부리그의 치열한 무대를 경험했다면 어땠을까?


그는 아마 현재 우리가 알고있는 것보다 훨씬 훌륭한 선수가 되지 않았을까
.

 

길거리 농구가 배출한 또 한명의 스타 플레이어, 3번의 올스타 선정에 2000년대 초반 공격형 포인트가드의 표본으로 떠올랐던 선수, 상대 센터를 앞에두고 인 유어 페이스 덩크를 무지막지하게 먹였던 극강의 운동능력의 소유자, 그리고 안타깝게 사라진 특별한 재능 스티브 프랜시스.

 

비록 아무도 모른게 쓸쓸히 사라졌으나 팬들은 스티브 프랜시스 그 이름을 기억 할 것이며 그가 남긴 전설은 NBA의 역사 속에 살아 숨쉴 것이다.


스티브 프랜시스(1999-2008)

생애통산 576경기 출전(543경기 선발)
평균 37.6분 출전 / 18.1점, 5.6리바운드, 6.0어시스트, 1.5스틸
1999-2000 시즌 신인왕 수상, 올스타 선정 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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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nswer' 알렌 아이버슨이 26일(한국시간) 코트와 이별을 고했다. 디트로이트 이적부터 멤피스 입단까지 순탄치 못한 행보 뒤에 들려온 소식이기에 팬들은 충격을 금치 못하고 있다. 어느 정도 예견된 결과지만 마이클 조던 이후 세대들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했던 그였기에 아쉬움은 적지 않다.

아이버슨은 왜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만 했을까? 첫 단추부터 잘못 꿴 아이버슨은 최근 “내 이력서를 본다면 내가 식스맨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것이다”라 말한 바 있다.

애초에 아이버슨과 멤피스는 시작부터 지향점이 달랐으며 결국 이들의 잘못된 만남은 단 세경기만에 끝나게 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이들의 의기투합은 왜 이리 일찍 끝나야 했을까. 그리고 어떠한 문제들이 이 둘의 사이를 갈라놓았을까.

 

그 이유는 바로 아이버슨의 활용방안에 대한 아이버슨과 구단의 이해관계가 달랐기 때문이다. 아이버슨은 자신이 아직도 주전을 보장받아야만 하는 슈퍼스타라 믿고있으며, 멤피스는 그런 아이버슨을 과거의 슈퍼스타로 인정할 지라도, 현재의 주전급 선수는 아니라고 평가했다.

 

우선 그가 말하는 이력서를 살펴보자.

 

1996-1997 시즌 신인왕, 2000-2001 시즌 MVP, 득점왕 4, 두번의 올스타 MVP, All NBA 1st Team 3, All NBA 2nd Team 3, All NBA 3rd Team 1, 커리어 평균 27.0득점 (통산 3) 등 화려한 실적을 남겼다.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상황에서던 득점이 가능했던 무서운 공격력의 소유자이며 농구에 대한 열정은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던 알렌 아이버슨. 하지만 그는 그의 이력서에 멤피스 그리즐리스를 마지막으로 추가한 채 코트를 떠났다.

 

물론, 이 상황은 어찌보면 쉽게 해결될 수 있다. 하지만 그 대상이 슈퍼스타 앨런 아이버슨이기 때문일까, 말처럼 쉽게 풀리지 않을 법 하다.

 



Iv3rson, 나는 식스맨을 용납할 수 없다.


아이버슨은 NBA 커리어 평생을 주전 선수로 뛰었다. 그는 자신만의 힘으로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를 NBA 파이널까지 이끌었고, 그 후에도 꾸준히 팀의 중심으로 세븐티식서스를 이끌었다. 신인왕, MVP, 득점왕, 수많은 올스타전 출장 등 말 그대로 NBA를 대표하는 슈퍼스타였다.

그의 실적만 본다면 그는 당연히 팀의 주전이 될 자격이 있다. 거기다 아이버슨은 프라이드가 강한 선수다. 좋게 본다면 자신감이요 나쁘게 본다면 고집이 센 것이겠지만 아이버슨같은 슈퍼스타가 벤치에서 출장한다는 사실은 아이버슨에게는 믿을 수 없는 상황일 것이다. 결국 아이버슨은 아직도 자신의 능력이 건재하다고 믿고있으며, 그가 무조건 주전으로써 경기에 나서야 한다는 입장이다.


NBA
를 대표하는 슈퍼스타가 벤치에서 출전한다니, 꽤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동시대의 스타였던 코비 브라이언트, 빈스 카터, 팀 던컨, 케빈 가넷, 제이슨 키드 등은 아직도 주전으로 출전하고 있으니 말이다.


 

멤피스 '선발 백코트는 콘리와 메이요'



하지만 멤피스의 입장은 다르다. 그가 NBA를 대표하는 슈퍼스타인 것은 당연한 사실이지만, 현재 팀의 상황과 그의 나이를 생각할때, 그를 주전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것. 게다가 디트로이트 피스톤스 시절의 아이버슨은, 과거의 아이버슨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구단 측의 판단이다.

나이도 많고, 예전만 하지 못한 아이버슨을 굳이 주전으로 써서 유망주들의 성장을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특히 멤피스는 마이크 콘리, OJ 메이요, 루디 게이, 마크 가솔 등 많은 유망주들의 성장을 필요로 하는 약팀이다. 스타일상 볼 소유욕이 높을 수 밖에 없는 아이버슨을 굳이 주전으로 쓸 이유가 없다. 차라리 그의 득점력이 아직 건재하다면, 식스맨으로 활용하는게 팀 사정상 나을 수도 있다. 거기다 아이버슨의 연봉은 350만불밖에 되지 않으니 소위 말하는 슈퍼스타 대우를 해줄 필요도 없다.



여기서 아이버슨과 구단 간의 소통 문제가 있었다. 2009년 여름, 자유계약 신분의 아이버슨은 멤피스 그리즐리스 구단주 마이클 하이즐리, 크리스 월래스 단장, 그리고 리오넬 홀린스 감독과 두어시간정도의 점심시간을 가진 바 있다.


ESPN
의 크리스 셰리던 기자에 의하면, 대화의 주 내용은 멤피스의 팀 시스템과 미래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아이버슨의 역할에 대한 것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멤피스 감독인 리오넬 홀린스는 아이버슨에게 주전 경쟁의 기회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아이버슨은 이를 자신의 주전 자리가 보장된다고 해석했던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아이버슨의 예상과는 달랐다. 멤피스 소속으로 출전한 세경기에서 아이버슨은 주전이 아닌 후보 선수로 출전했고, 결국 그는 팀에 대한 불만을 언론에 숨기지 않았다.

 

이에 대한 홀린스 감독의 반응은 냉담했다.

 

아이버슨은 트레이닝 캠프에서 부상을 당했고, 저는 그를 시험해 볼 기회조차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둘러싼 문제는 이미 시작전에 터진 것이지요. 우리의 보스 (구단주)가 아이버슨에게 유망주들의 스승으로써, 그리고 식스맨으로써 영입한거라고 말했을때도 그는 눈을 껌뻑 하지도 않았지요

 

또한 저는 그에게 콘리, 메이요와 주전 경쟁을 약속하겠다고 말했죠. 그리고 아이버슨이 팀 시스템과 맞는다면, 그에게 주전을 보장하겠다고 말했었죠. 그리고 만약 그가 벤치에서 출전해도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냐고 물어봤을때도 그는 눈을 껌뻑 하지도 않았습니다

 

아이버슨에게 너나 나나 둘다 고집이 세고 완고하다. 하지만 서로 협조하지 않으면 불이익만 있을 뿐이다라고 얘기했을때 그는 그저 웃기만 했습니다

 

결국 여러가지 정황 상, 아이버슨은 아직도 슈퍼스타 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의 주전 보장을 당연시 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멤피스 그리즐리스는 아이버슨을 주전으로 사용할 생각이 없었으며, 이 둘의 부족한 이해관계로 인한 팀 내 불화는 결국 식스맨 출전을 거부한 아이버슨이 팀을 이탈하고 멤피스가 그를 웨이브 함으로써 종결되었다.


 

아이버슨의 진정한 가치?



다시한번 자유계약 신분이 된 아이버슨이 올시즌 NBA로 복귀할 수 있을까?

뉴욕 닉스가 자유계약 신분이 된 아이버슨의 영입을 고려했지만 철회했다
.
아이버슨의 다음 행선지로 샬럿 밥캣츠가 물망에 올랐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과연 뉴욕와 샬럿을 포함해서, 아이버슨이 주전으로 뛸 수 있는 팀이 몇이나 될까?
아이버슨을 영입하려면 주전 출장을 보장해 줘야 하는데 과연 이 35세의 가드에게 도박을 할 구단이 있을까.

 

그렇다면 과연 앨런 아이버슨의 가치는 어느정도일까?

 

물론 이름값만 본다면 코비 브라이언트, 르브론 제임스와 견줄만 하다. 하지만 그의 나이와 최근 경기력을 볼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분명 그의 스피드와 민첩성은 예전만 하지 못하다. 그렇다고 슈팅능력이 갑자기 좋아진 것도 아니며, 그의 가공할만한 돌파력 역시 현저하게 줄었다. 멤피스 소속으로 출전한 세경기 모두 과거의 아이버슨이 아니었다.

 

상대를 헤집고 다니던 과거의 돌파력은 사라지고, 스크린을 이용한 픽앤 롤과 스팟업 점퍼가 그의 주 득점 루트였던 반면에 볼을 독점하는 그의 스타일은 여전했다. 멤피스 프리시즌 캠프에서는 훈련부족으로 인해 연습게임에서 하프코트로 볼을 운반하는 것에도 애를 먹었다고 한다.

 

여러가지 정황상, 아이버슨은 분명 노쇠하고 있다.

 

게다가 아이버슨은 팀 케미스트리를 해치는 선수로도 꽤나 정평이 나있다. 특히 그는 수많은 감독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는데, 그는 래리 브라운부터 시작해서, 짐 오브라이언, 크리스 포드, 랜디 아이어스, 모리스 칙스, 마이클 커리, 그리고 현재 멤피스 그리즐리스의 감독인 리오넬 홀린스까지 수많은 감독과의 충돌이 있었다. 특히 올시즌 시작 전부터 아이버슨과 홀린스는 단 한번도 제대로 대화를 나눈적이 없다고 한다.

 

경기 내외적으로 많은 문제점이 보이는 35세의 선수에게 주전 보장을 해줄만한 팀은 과연 있을까? 아마 현재의 아이버슨이라면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예전의 아이버슨이 아니라면, 하지만 그의 공격력과 센스가 아직도 살아있다면, 식스맨이라는 역할이 그에게 딱 맞는 보직일 것이다.

 

거기다 연봉으로 따지자면 아이버슨은 아마 베테랑 미니멈으로 계약을 해야 할 수도 있다. 경제 한파로 인해 각 구단들의 주머니가 줄어들었고, 멤피스와도 1 350만불의 값싼 계약을 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올 여름 아이버슨에게 계약을 제시했던 유일한 구단 역시 멤피스 그리즐리스였다. 그것도 아이버슨과의 개인 워크아웃 후에. 아이버슨같은 슈퍼스타가 워크아웃 후 계약을 제시받았다니 참 슬픈 현실이다.


 

아이버슨, 이제는 변화가 필요하다.


금일 대리인을 통해 발표된 성명에 따르면 아이버슨의 복귀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분명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결국 앨런 아이버슨이 계속 선수생활을 이어가고 싶었다면 그 스스로 변해야 했다
.
스타의식을 버리고, 주전 보장을 외칠게 아닌, 진취적인 참여의식을 가졌어야 했다.


그의 득점력이 사라지지 않을지라도
, 그가 예전 전성기때의 아이버슨이 아닌것은 사실이기 때문에다.

 

게다가 그는 35살의 노장이다. 예전 코트를 날뛰며 상대팀을 괴롭히던 젊고 생생한 시절의 아이버슨이 아니란 말이다. 최근들어 아이버슨이 상대 수비수를 시원하게 제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극강의 스피드로 속공을 일선에서 이끄는 모습은 도대체 언제적 이야기란 말인가
?

나이가 들어가면서 운동능력은 줄어들었지만 그의 스타일은 변하지 않았다.

패스보다는 슛을 먼저 생각하는 25살의 아이버슨이었다면 그를 원하는 팀이 많겠지만, 35살의 아이버슨이라면 과연 몇이나 그를 원할까?

 

이제는 자존심을 굽히고, 팀을 위해 변해야 한다. 팀이 원하는대로 맞춰나가야 그의 NBA 생활을 연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능력에는 의심이 여지가 없지만, 더이상 그를 주전으로 쓰기에는 무리가 있다.

 

과연 고집세고 자존심 강한 아이버슨이 갑작스런 변화를 선택할 지는 모르겠다. 해묵은 이 딜레마는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동안에도 요지부동이었다.

 

멤피스는 아이버슨을 영입하기 전에,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의 전 회장 겸 구단주였던 팻 크로치에게 자문을 구했던 적이 있다. 팻 크로치는 세븐티식서스 회장일 당시, 아이버슨을 중심으로 팀의 리빌딩을 전폭적으로 지원한 인물이다.

 

저는 멤피스에게 제가 앨런을 사랑한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그는 특별하기에, 잊지못할 존재라고도 이야기 했었죠. 그러나 그가 변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절대 아니에요. 멤피스에게 앨런이 한 두번정도는 패스를 할 수 있겠지만 팀원들이 그 패스를 득점으로 연결시키지 못한다면 앨런의 세번째 패스는 없을 것이라고 일러줬죠. 그가 생각하는대로 일이 안풀릴때면 그는 불만을 가지게 되죠”.

 

라며 아이버슨에 대해 평가한 크로치는 아이버슨을 선수로써 제대로 활용하려면 두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 첫번째는 그의 믿음이고, 두번째는 그를 위한 특별한 규칙입니다. 그를 자유롭게 풀어주기 시작하면 그는 계속해서 더 많은 것들을 원할것이며, 결국 팀에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를 풀어줬던 감독들은 결국 아이버슨과 충돌했고, 팀은 매번 아이버슨의 손을 들어주었죠. 결국 그를 적절히 이용하려면 계약을 주면서 그에 맞는 규칙도 줘야합니다

 

크로치의 말처럼, 앨런 아이버슨을 선수로써 장악했던 유일한 감독인 래리 브라운은 아이버슨의 모든것을 활용하며 그를 중심으로 한 세븐티식서스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다. 하지만 그 외의 다른 감독들은 덴버 너겟츠의 조지 칼 정도를 제외하면 모두 그와 충돌이 있었고 그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

 

현실을 직시하자. 그는 늙었고 더이상 팀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선수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팀에 도움이 될만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왜 주전만을 고집하는 것인가?

식스맨으로써도 충분히 그의 가치를 재평가 받을 수 있음에도 벤치에서 출전을 거부하였다. 잠시나마 초라한 무적 선수가 돼야 했던 아이버슨의 마지막이 아쉬운 이유다.

 

과거 애틀란타의 에이스였던 제이슨 테리는 댈러스 매버릭스로 이적하며 자연스레 팀내 에이스 자리를 포기했고, 2007-2008 시즌을 시작으로 팀 시스템을 위해 식스맨 롤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은 샌안토니오 스퍼스의 마누 지노빌리, 피닉스 선즈의 레안드로 발보사와 함께 리그의 대표 식스맨으로 여겨지고 있다(2008-09 시즌 식스맨 상 수상).

 

레이커스와 덴버 너겟츠에서 주전 포인트가드로 활약했던 닉 더퀵닉 밴 액샐은 어떠한가. 그는 우승을 위해 댈러스 매버릭스로의 이적을 선택했고, 스티브 내쉬의 백업 역할을 불만없이 소화해냈다.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의 에이스였던 앤투완 재미슨 역시 댈러스 매버릭스로 트레이드 된 후, 식스맨 롤을 경험한 바 있다. 그것도 프로선수로서 최고 황금기인 20대 중반에 말이다. 앤투완 워커의 백업이었지만, 그는 팀의 중요한 부분이었고 결국 재미슨은 식스맨 상을 수상하게 된다.

 

벤치에서 출전한다 해도 언제든지 팀의 중심이 될 수 있다. 게다가 위에 언급한 세명은 아이버슨보다 젊은 나이에 주전에서 식스맨으로의 변화를 수용했다. 불세출 스타 마이클 조던 역시 불혹의 나이에 6번째 역할을 받아들였으니 이 부분은 더 이상의 언급이 필요 없을 것 같다.


아이버슨의 나이는 이제 서른 다섯
, 이제 젊은 새싹들에게 주전 자리를 양보할 때도 되지 않았는가? 현재로써 주전 선수앨런 아이버슨을 원하는 팀은 없다. 하지만 식스맨앨런 아이버슨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는 여전히 볼만 잡으면 무서운 득점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아직도 주전을 원한다 해도, 우선 그 능력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 벤치 출전을 우선 수용하고, 그 실력의 건재함을 보여준 후 주전 보장을 외쳐도 되지 않는가. 과거의 향수에 젖어, 무조건적인 주전 보장을 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생각에 조금만 변화를 줘도 그를 원하는 팀이 배로 늘어날텐데 왜 스스로 복귀할 수 있는 기회를 차버렸을까?

 


어두운 아이버슨의 미래



어쨌든 아이버슨과 멤피스 간의 만남은 시작부터 잘못되었다. 구단은 아이버슨에게 주전 경쟁의 기회조차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리시즌 캠프에서 아이버슨이 부상을 당하기도 했지만, 구단 프론트의 행보와 정황을 미루어 애초에 아이버슨을 주전 선수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버슨을 웨이브 한 후 멤피스가 대체 선수로 영입한 자말 틴슬리에 대해 리오넬 홀린즈가 한 말이다.

 

저는 틴슬리에게 너가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면 너가 우리팀의 주전이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우선 팀 시스템과 맞는지 확인해 봐야겠죠.”

 

왠지 익숙하지 않은가?

 

어차피 멤피스 유니폼은 아이버슨에게는 애초부터 불편한 옷이었다.

그렇다면, 아이버슨의 다음 행선지는 어디인가?

 

뉴욕행이 무산된 후 거론된 샬럿이 주목을 받았었지만 전망은 밝지 않았다. 샬럿은 현재 D.J. 어거스틴, 레이몬드 펠튼과 에이씨 로우라는 젊고 유망한 가드진이 버티고 있고 여기에 스티븐 잭슨까지 가세한 상황이다. 포화상태였다.

 

아이버슨이 올시즌을 쉬어갈거라는 소문도 돌았다. 동기 스테판 마버리처럼 쓸쓸히 리그에서 사라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는 특별한 재능과 무수히 많은 경험을 쌓은 베테랑이다. 그를 더이상 볼 수 없다는 것은 팬에게도, NBA에게도 큰 손실이다. 계속 주전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기회의 창을 열어놓으면 일이 쉽게 풀리지 않았을까. 자존심을 조금만 굽히고, 우선 NBA에 복귀한 다음 그의 능력을 다시한번 증명해 줬음 하는 바램이다.

 

아직 많은 팬들은 그의 해답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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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내 핵심 선수들을 모두 잃었다.

팀을 이끌 베테랑은 없었으며, 리더라는 꼬리표를 달 만한 실력의 선수 역시 없다.

롤 플레이어들만으로 이루어진 로스터 가지고는 뭘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다.

 

위는 아마 리빌딩을 앞둔 팀들이 제일 많이 받는 평가일 것이다.

주축 선수가 없고, 베테랑과 리더의 부재, 게다가 로스터는 검증되지 않은 젊은 선수들로 가득 차 있다면 이는 리빌딩을 앞둔 팀이 갖춰야 할 최적의(?) 조건이 아닌가.

 

하지만 이러한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시즌 막판까지 플레이오프 진출을 위해 피말리는 혈투를 벌였던 제리 슬론과 그의 용사들을 소개하려 한다. 바로 2003-2004 시즌의 유타 재즈가 그 주인공이다.

 


화려했던 과거


1984
년 존 스탁턴, 1985년 칼 말론이 입단한 이후 유타 재즈는 꾸준히 강팀의 면모를 유지해 왔다. “스탁턴 to 말론이라는 용어가 생길 정도로 스탁턴과 말론은 유타 재즈는 물론, NBA를 대표하는 최고의 원투펀치였다 (물론, 조던과 피펜, 페이튼과 켐프 역시 동시대 최고의 콤비였다)

 

이들의 능력을 극대화 시킨 인물은 바로 지금까지 유타 재즈를 이끌고 있는 제리 슬론. 올해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바 있는 슬론 감독은 유타 재즈의 창단 이후 처음으로 팀을 50승 반열에 올려놓기도 한 명장이다 (1988년 유타 감독 부임 이후로 단 한시즌도 빠지지 않고 플레이오프 진출).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항상 존 스탁턴과 칼 말론이 있었다.


 

유타 재즈는 1997년과 1998년 연속으로 NBA Finals에 진출하였지만 두번 모두 조던의 시카고 불스에게 패하며 우승의 문턱에서 두번씩이나 무릎을 꿇어야 했다. 그 이후로도 유타 재즈는 매년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우승에 실패하며 서서히 유타 재즈 왕조의 침몰을 예고했다.


 

두 남자의 퇴장


2002-2003
시즌이 끝난 후, 오랜기간 유타 재즈를 지켜온 두 남자 존 스탁턴과 칼 말론은 동시에 팀을 떠나게 된다. 스탁턴은 은퇴를 선언했고, 말론은 그의 오랜 염원이었던 우승반지를 위해 샤킬 오닐, 코비 브라이언트, 게리 페이튼과 함께 전당포” LA 레이커스로의 이적을 결심했던 것이다. 비록 그 과정은 달랐지만, 두 사람은 많은 유타 팬들의 지지를 받으며 아름답게 떠났다.

 

하지만, 이 둘의 퇴장은 유타 재즈에게는 새로운 시작이었다. 18년만에 스탁턴과 말론 없이 시즌을 시작하게 된 재즈는 갑작스레 약팀의 전력으로 바뀌었다. 스탁턴과 말론의 부재는 곧 팀 전력의 반을 잃는 것과 다름없었으며, 리더의 부재라는 문제를 야기했다. 팀 내 유일한 베테랑 그렉 오스터텍은 리더십과는 거리가 먼 선수였으며, 그도 NBA 선수생활 8년이라는 그리 길지 않은 경력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스탁턴과 말론이 빠진 이후 팀의 구심점은 아무도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게다가 남아있는 선수들은 몇몇을 제외하곤 모두 젊고, 검증되지 않은, 경험이 많지 않은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팀의 상황에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전문가들은 물론, 심지어 팬들까지도 유타 재즈의 추락을 예상했다. 2003-2004 시즌의 리그 최하위 팀은 유타 재즈가 당연시되었고, 시즌 20승도 힘들다는 평가가 대부분이었다. 그만큼 스탁턴과 말론은 유타 재즈의 핵심이었다.

 

물론, 그나마 긍정적인 부분도 몇 있었다. 2002-2003 시즌의 약 5051만 달러의 팀 연봉에 비해 2003-2004 시즌의 팀 연봉은 약 4000만 달러로 줄었으며 (게다가 유타는 2003-2004 시즌 도중 트레이드를 통해 피닉스 선즈의 만기계약자인 톰 구글리오타와 2장의 1라운드 보호픽과 2005 2라운드 드래프트 픽 1장을 얻었다), 팀 내 평균 나이 역시 종전 시즌의 29.5세에서 25.9세로 대폭 하락했다. 리빌딩을 필요로 하는 팀이 갖춰야 할 최고의 조건들이었다.

 

결국, 스탁턴과 말론의 퇴장으로 인해 유타 재즈는 팀 전력의 절반을 잃었지만, 리빌딩을 위한 토대는 확실히 마련했다.

 


반전의 시작


아무도
2003-2004 시즌의 유타 재즈를 기대하지는 않았다. 아마 리그 최하위를 기록해 다음 해 드래프트에서 1픽을 얻은 후, 천천히 팀을 재건하는 것이 정상적인 시나리오겠지만, 제리 슬론과 그의 용사들은 그들의 예상을 뒤집어 엎는 새로운 드라마를 연출한다.

 

우선, 2003-2004 시즌 유타 재즈의 로스터를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스탁턴과 말론이 떠난 후 팀 내 에이스는 맷 하프링이었다. 2002년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를 떠나 유타에 합류한 이 젊은 백인 포워드는 스탁턴과 말론의 마지막 시즌에도 평균 17.6, 6.6 리바운드로 두 레전드들의 지원사격에 앞장선 바 있다. 거기다 갓 21살의 다듬어지지 않은 안드레 키릴렌코, NBA 2년차에 접어든 젊은 포인트가드 카를로스 아로요, 부상으로 루키시즌을 통째로 결장한 스페인의 신성 라울 로페즈, 역시 부상으로 루키시즌 전체를 날려버린 센터 커티스 보챠드, 몬테네그로 출신의 신인 사샤 파블로비치, 2라운드에서 뽑힌 신인 모리스 윌리엄스 (훗날, 모 윌리엄스로 불리게 된다), 2003년 여름 유타에 합류한 라쟈 벨, 고졸 출신의 유망주 데샨 스티븐슨, 25살의 젊은 센터 재런 콜린스 등이 있었다.

 

이처럼 유타 재즈는 젊고 검증되지 않은 유망주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었으며, 그나마 검증된 선수라고는 맷 하프링, 그렉 오스터택, 그리고 전년도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반짝 활약을 선보인 안드레 키릴렌코가 전부였다.

 


슬론의 용사들
, 기적을 이루다.


많은 전문가들이
2003-2004 시즌 최하위 팀으로 뽑은 유타 재즈.

심지어 ESPN 전문가 마크 스타인은 2003-2004 시즌 시작 전에

 

나는 제리 슬론이 포인트가드 자리의 카를로스 아로요와 파워포워드 자리의 키언 클락을 어떻게 감당해 낼것인지 궁금해. 유타 재즈의 경기마다 불쌍한 제리 슬론의 표정만을 찍는 카메라가 한대 필요할 것 같아

 

라며 유타 재즈의 전력에 대해 혹독한 비판을 늘어놨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이야기의 전개는 정 반대로 흘러갔다.

 

개막전에서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를 상대로 이길때만 해도 이변이라는 평가를 들었으나, 시즌 첫 10경기에서 5 5패를 마크하자 유타 재즈에 대한 평가는 뒤바뀌기 시작했다.

 

유타 재즈의 스타팅 라인업은 카를로스 아로요(PG) – 데샨 스티븐슨(SG) – 맷 하프링(SF) – 안드레 키릴렌코(PF) – 그렉 오스터택(C) 에 주요 후보선수로 라울 로페즈, 라쟈 벨, 재런 콜린스등이 있었는데, 겉으로만 보기에는 초라하기 그지 없는 라인업이었지만 제리 슬론의 지휘 하에 이들은 코트에서 자신들의 능력을 거침없이 발휘했다.

 

2003-2004 시즌 전, 최약체로 분류되었던 유타 재즈는 시즌 첫 30경기에서 16 14패를 기록, 아무도 예상치 못한 성과를 이뤄냈다.

 

그렇다면, 과연 스탁턴과 말론이 빠진 유타의 선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유타의 원동력은 크게 세가지로 볼 수 있다.

 

우선 첫번째로, 젊은 선수들을 위한 제리 슬론의 맞춤형 감독철학이다.

2003-2004 시즌, 제리 슬론은 단 한번도 팀의 승패결과 때문에 선수단에 화를 낸 적이 없다고 한다. 젊은 선수들이 많은 만큼, 그들을 다그치기 보다는 격려하면서 인내하는 것이 선수들의 성장을 위해 더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구단주 래리 밀러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팀의 경기력에 불만이 있으면 락커룸으로 뛰어들어와 선수들에게 불같이 화를 내던 그였지만, 2003-2004 시즌에는 단 한번도 팀의 행보에 관여한 적이 없다고 한다. 물론, 뒤에서의 지원사격은 여전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슬론은 선수들의 정신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따끔히 혼을 내며 가르쳤다.

재미있는 일화를 하나 소개하겠다. 2004 12 3, 유타 재즈는 휴스턴 로케츠와의 경기에서 4쿼터 리드를 지키지 못한 채 결국 연장전에서 107 101로 패했다. 경기 후 제리 슬론은 라쟈 벨을 심하게 혼냈다. 그 경기에서 라쟈 벨은 심한 부진을 보였는데, 4쿼터 동점 상황에서 마지막 버저비터마저 성공시키지 못했기에 많이 풀이죽어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슬론이 벨을 혼낸 이유는 마지막 슛의 실패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의 버저비터를 성공시키지 못해 팀이 연장전까지 돌입했다는 자책감 때문에 벨의 집중력이 연장전에서 확연히 떨어졌다는 게 이유였다. 그만큼 슬론은 팀의 승패가 아닌, 젊은 선수들의 정신력 강화를 통한 성장에 신경을 썼다.

 

두번째로는, 전술적 변화다. 이 역시 제리 슬론에게 공을 돌려야 한다. 슬론은 존 스탁턴과 칼 말론을 위한 하프코트 오펜스를 과감히 포기하면서 젊은 선수들을 위한, 특히 키릴렌코를 위한 런앤 건으로 새로운 팀 컬러를 만들었다. 존 스탁턴과 칼 말론이 군림하던 시절, 슬론은 이 두명의 픽앤 롤에서 파생되는 하프코트 오펜스를 철저히 중시했다. 하지만, 2003-2004 시즌의 유타는, 좀더 많이 달리는, 빠른 템포의 런앤 건 오펜스로 변신에 성공했다. 물론, 하프코트 오펜스가 아예 없어진 것은 아니다 (그만큼 슬론이 개방적인 사람도 아니다.) 기회가 있을때마다 달렸지만, 속공이 막힐때면 적절히 픽앤 롤 중심의 하프코트 오펜스를 운용하며 다이내믹한 경기운영에 성공했다.

 

마지막으로는 선수들의 동시다발적 활약이다. 그동안 유타 재즈는 존 스탁턴과 칼 말론의 활약 여부에 따라 승패가 갈리던 팀이었다. 하지만 2003-2004 시즌의 새로운 유타 재즈는 고른 활약을 하는 선수들이 많아지면서 에이스 의존증이 사라짐과 동시에, 여러 젊은 선수들의 성장과 활약이 조화되며 긍정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물론, 2003-2004 시즌의 유타가 과거의 유타보다 뛰어난 팀이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존 스탁턴과 칼 말론의 유타 재즈는 팀의 특성상 새로운 재능이 싹트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거의 모든 플레이가 스탁턴과 말론의 손에서 시작되고 끝났기 때문이다). 특히, 2000년대 초반의 유타 재즈는 두명의 나이 든 베테랑들의 체력 안배를 위해 팀 연습은 짧았으며, 경기템포 역시 느렸다. 하지만, 2003-2004 시즌에는 슬론의 전술적 변화속에 안드레이 키릴렌코, 카를로스 아로요, 라쟈 벨, 라울 로페즈, 재런 콜린스 등이 눈에띄게 발전된 기량을 선보였고, 결국 두 선수의 경기력에 승패가 갈렸던 과거의 그림자는 사라지고, 여러명의 고른 활약을 통해 승리를 챙기는 아름다운 농구의 그림이 솔트 레이크 시티에 자주 그려졌다.

 

존과 칼은 우리들의 역할을 좀더 쉽게 만들어줬어요. 하지만, 가끔씩 우리는 코트 위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들의 플레이만을 지켜볼때도 있었죠. 지금은 팀으로써 우리들 스스로 해결해야 할 수밖에 없어요. 그것이 우리들이 가야 할 새로운 방향이죠.”

 

2003-2004 시즌 당시 안드레 키릴렌코가 했던 이 한마디가 대변하듯, 유타 재즈에는 여러 재능들이 숨쉬고 있었다.

 


이러한 긍정적인 변화 덕분에 유타 재즈는 시즌 도중 맷 하프링이 부상으로 잔여경기를 모두 결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무너지지 않았다. 하프링의 공백은 마이클 러핀이 훌륭하게 메웠고, 아로요가 부상으로 결장하면 라울 로페즈와 모리스 윌리엄스가 안정적인 활약으로 대체했다. 또한, 시즌 도중 재즈는 데샨 스티븐슨을 올랜도의 고단 기리첵과 맞바꾸는 도박을 하게 되는데, 이는 훌륭한 결과를 이끌어냈다. 기리첵은 재즈에겐 없던 퍼리미터 슈터였고, 또한 (위에 언급된) 트레이드를 통해 합류한 백전노장 구글리오타의 합류로 인해 안드레이 키릴렌코가 스몰 포워드 자리로 이동하며 조금 더 자유롭게 플레이 할수 있게 되었다.

 

특히 유타 재즈의 이러한 선전에 안드레이 키릴렌코라는 이름을 빼 놓을수가 없는데, 키릴렌코는 하프링이 빠진 이후 팀의 에이스로 자리매김하며 평균 16.5, 8.1리바운드, 3.1어시스트, 1.9스틸, 2.8블록을 기록하며 그의 다재다능한 능력을 증명했고, 결국 2004년 올스타로 선정과 함께 NBA All-Defensive 2nd Team에 이름을 올리는 기염을 토했다. 특히 그는 재즈 수비력의 핵심이었는데, 긴 팔을 이용한 스틸능력과 극강의 헬핑 디펜스로 인해 재즈는 안정적인 포스트 디펜스를 갖출 수 있었다.


여러가지 긍적적인 요소들이 조화를 이뤘던 유타 재즈의 2003-2004 시즌. 슬론과 그의 용사들은 시즌 끝까지 플레이오프 막차 티켓을 위해 사투를 벌였지만, 안타깝게도 1경기차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고 만다 (2003-2004 시즌 서부지구 8위는 덴버 너게츠).

 


아름다운 피날레


비록 20년만에 처음으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지만
2003-2004 시즌의 유타 재즈는 불굴의 정신 그 자체였다.


시즌 전
, 거의 모든 전문가들에게 리그 최하위로 지목받았으며, 팬들조차 그들의 성공을 감히 예상하지 못했다. 시즌 도중 맷 하프링이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했고, 종종 주전 선수들의 크고작은 부상이 있었지만 그마저도 극복하며 꾸준히 좋은 성적을 냈다. 완전한 기적을 일구는데는 실패했으나, 그 시작과 과정마저도 기적이라고 봐야 할 수밖에 없다.


감독의 희생과 그에 대한 선수들의 반응이 이루어낸 결과물, 42 40. 꾸준해도 너무나 꾸준했던 그들의 경기력 (시즌 최다 4연승, 최다 5연패)이 돋보였던 2003-2004 시즌은 키릴렌코 개인에게도 의미있는 시즌이었으며 제리 슬론 역시 올해의 감독상 투표 2위를 기록하며 그의 능력을 다시한번 입증한 시즌이기도 했다.

 

42 40패라는 기록은 절대 눈에 띄지도 않는, 평범한 성적이라 할 수 있지만, 당시 유타 재즈의 상황을 고려해 볼때 그들이 이룬 이 성적표는 가히 기적이라고 표현하고 싶은 필자의 마음을 담으며 아름다웠던 2003-2004 시즌 유타 재즈의 재조명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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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과 실패, 뗄레야 뗄 수 없는 단어들이다.


NBA
드래프트 역시 성공과 실패로 나눠지게 되어있는데,
드래프트에서 성과를 이룬 구단들이 있는 반면, 실패를 맛본 구단 역시 있기 마련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구단이 드래프트에서 뽑은 선수가 스타 플레이어로 거듭난다면 이는 바로 성공이요, 정 반대의 결과가 나타난다면 그것이 바로 실패다. 하지만 드래프트 상위권의 픽으로 뽑은 선수가 기대치에 맞는, 즉 수준급의 선수로 성장했다면 이는 바로 성공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1997 NBA 드래프트 1순위로 뽑힌 팀 던컨은 4개의 우승을 경험했으며 현역 최고의 파워 포워드임과 동시에 은퇴 후 명예의 전당의 무혈입성이 사실상 확정이 된 스타 플레이어다. 하지만 던컨을 1번픽으로 뽑은 샌안토니오 스퍼스의 선택을 드래프트의 성공 사례라고는 볼 수 없다.

 

던컨은 “1번픽 드래프티의 기대치를 훌륭히 충족했을 뿐, 선수 자신에게는 성공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스퍼스 구단의 입장에서 볼때 던컨은 단순히 1번픽 다운 활약을 보여줬을 뿐이다. 가장 성공 가능성이 높은 선수를 1번픽으로 뽑는 것은 당연지사, 즉 스퍼스는 당시 누구나 드래프트 1순위로 예상했던 던컨을 뽑았을 뿐, 스퍼스 스카웃들의 안목이나 프런트진의 역량의 결과는 아니라는 것이다. 차라리 드래프트의 성공 사례를 언급하자면 2라운드 출신의 아레나스나 마이클 레드가 더 적합 한 예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실패의 기준은 무엇인가? 간단하다.


1
라운드 상위권 픽으로 뽑은 선수들이 미미한 활약을 보이거나 기량 저하로 NBA 무대에서 사라진 경우들이 바로 NBA 구단들의 드래프트 실패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선수를 잘못 뽑아서 구단들이 피해를 본 경우는 수없이 많다. 소위 말하는 드래프트 잔혹사를 살펴보도록 하자.

 

필자는 순위에 관계없이 NBA 구단들이 겪은 가장 치명적인 드래프트 잔혹사들을 나열해 보았다.

 



1984년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져스의 잘못된 선택


1984 NBA 드래프트는 NBA 역사상 최고의 드래프트라 불리기도 한다. 4명의 명예의 전당 입성자들을 배출한 드래프트 (마이클 조던, 하킴 올라주원, 존 스탁턴, 찰스 바클리)이기도 하며, 그 외에도 꽤 쏠쏠한 활약을 했던 선수들이 많이 배출된 드래프트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최악의 선택을 한 구단이 있었으니 바로 2번픽으로 샘 보위를 뽑은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져즈다.


비록 팀에는 조던과 같은 포지션의 클라이드 드렉슬러와 같은 해 여름 트레이드로 영입한 스윙맨 키키 밴더웨이가 있었기에 구단 입장에서는 빈약한 포스트를 채워줄 센터가 필요했겠지만
, 결과적으로 샘 보위를 뽑은것은 포틀랜드의 실수였다. 유리몸이었던 보위는 루키시즌을 제외하면 부상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코트가 아닌 벤치에서 보냈으며 결국 별다른 활약 없이 1989년 뉴저지 넷츠로 트레이드 되고 만다.

비록 포틀랜드는 드렉슬러와 벤더웨이를 앞세워
NBA Finals까지 도달했지만 단 한번도 우승을 경험하지 못했다. 1984년 드래프트에서 마이클 조던은 3, 찰스 바클리는 5번픽에 뽑혔는데 과연 포틀랜드가 보위 대신 이 둘중 하나라도 뽑았으면? 포틀랜드의 역사는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물론 좋은쪽으로.

 


1996
NBA 드래프트, 그리고 코비 브라이언트




1984 NBA 드래프트와 더불어 최고의 드래프트라고 불렸던 1996 NBA 드래프트.


매직 존슨 이후 포인트가드로써는 처음으로 앨런 아이버슨이
1번픽으로 뽑혔던 역사적인 드래프트이기도 했던 1996년 드래프트에서 코비 브라이언트의 재능을 못알아본 구단들이 있었다.


댈러스 매버릭스는
9번째로 사마키 워커를, 인디애나 페이서스는 10번째로 에릭 댐피어를, 골든 스테이트 워리어스는 11번째로 토드 풀러를,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는 12번째로 비탈리 포타펜코를 뽑은 최악의 도미노 사태가 벌어진 것. 그리고 13번픽으로 코비 브라이언트를 뽑은 샬럿 호넷츠마저 드래프트 당일 브라이언트를 레이커스의 블라디 디박과 트레이드 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결국 코비 브라이언트는
2000년대 레이커스 왕조 설립에 큰 기여를 했고 또한 2008년 레이커스 우승을 이끌며 최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현재 사마키 워커는 KBL에서 용병으로 활약중이고 토드 풀러와 비탈리 포타펜코는 NBA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에릭 댐피어가 그나마 그저그런 센터로 댈러스 매버릭스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참고로
1996년 드래프트에서 코비 브라이언트 이후에 뽑힌 선수들중에는 14번째픽의 페쟈 스토야코비치, 15번째픽의 스티브 내쉬, 그리고 17번째픽의 저메인 오닐이 있었으니 1996 NBA 드래프트 잔혹사를 경험한 해당 구단들은 그해 정말 잔혹한 여름을 보냈을 것이 확실하다.

 


2001
NBA 드래프트, 마이클 조던의 실패작




제목만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2001
년 드래프트 1번픽으로 콰미 브라운을 뽑은 워싱턴 위저즈가 바로 2001 NBA 드래프트 잔혹사의 주인공이다 (마이클 조던의 주도 하에)


축복받은 신체적 사이즈와 운동능력
, 그리고 드래프트 워크아웃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높은 평가를 받으며 1번픽에 뽑혔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별다른 성장세를 보이지 못한 그를 위저즈는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결국 레이커스로 트레이드 하게 된다 (하지만 레이커스로부터 카론 버틀러를 받아왔으니 전화위복이랄까).
 
같은 해 드래프트에 뽑힌 빅맨으로는 파우 가솔 (3번픽), 타이슨 챈들러 (2번픽), 잭 랜돌프 (19번픽) 등이 있었으니 위저즈로써는 정말 아쉬워 할 수 밖에. 도대체 마이클 조던은 브라운의 어디가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1998 NBA 드래프트, 밀워키 벅스의 황당한 트레이드




1998 NBA 드래프트에서 댈러스 매버릭스는 6번째 픽을 부여받았다. 여기서 당시의 매버릭스 감독 돈 넬슨은 뛰어난 트레이드 수완을 발휘하게 된다.

매러릭스를 제외한 로터리 팀들 중 노비츠키를 노리는 팀이
10번째 픽을 부여받은 보스턴 셀틱스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되자 넬슨은 9번째와 19번째 픽을 가지고 있던 밀워키 벅스와 트레이드 협상에 돌입하게 된다. 당시 벅스는 미시간 대학 출신의 포워드 로버트 트랙터트레일러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 넬슨은 피닉스 선즈의 백업 포인트가드 스티브 내쉬를 원했는데, 1998년 드래프트 행사권이 아예 없었던 선즈가 1라운드 후반대에 뽑힐거라 예상되었던 신인 팻 개리티를 원한다는 정보를 얻게 된다. 넬슨은 결국 매버릭스의 6번째 픽으로 트랙터트레일러를 뽑아주는 대신, 밀워키에 9번째 픽으로는 노비츠키를, 19번째 픽으로는 팻 개리티를 뽑아달라 요구하는 동시에 선즈에게는 팻 개리티와 스티브 내쉬와의 트레이드를 제안했다.

결국 매버릭스와 벅스간의 트레이드는 성사되었으며, 밀워키는 1라운드 9번픽과 19번픽으로 뽑은 노비츠키와 개리티를 매버릭스가 6번째 픽으로 뽑은 트랙터트레일러와 맞바꾼다. 그와 동시에 매버릭스는 팻 개리티를 얻자마자 선즈에 보내버리고 스티브 내쉬를 얻어왔으니 바로 넬슨의 구상대로 댈러스 빅 쓰리가 탄생되었다.

하지만 결국 넬슨의 농간에 놀아난 밀워키 벅스는 훗날 땅을 치며 후회하게 된다
. 수차례의 올스타 선정은 물론, MVP까지 수상한 노비츠키에 비해 트랙터트레일러는 비만에 기량미달로 출전시간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여러팀을 떠돌다가 쓸쓸히 은퇴했다. 참고로 벅스는 폴 피어스를 뽑을 수도 있었지만 매버릭스를 위해 노비츠키를 뽑아줬으니 결국 노비츠키, 피어스 대신 트랙터트레일러를 뽑았다고도 볼 수 있다 (폴 피어스는 결국 10번째 픽으로 보스턴 셀틱스로 입단했다)

 


1985
NBA 드래프트, 조던-피펜 대신 조던-말론이었다면?



다시 과거로 돌아가보자.

패트릭 유잉의 드래프트라고 불렸던
1985 NBA 드래프트. 1라운드 11번째 픽을 가지고 있던 시카고 불스는 칼 말론 대신 멤피스 대학의 키쓰 리의 이름을 호명한다.

말 그대로 잘못된 선택이었다
. 1984년 마이클 조던을 뽑은 시카고가 과연 1985년 칼 말론을 뽑았다면? 우리는 조던-피펜이 아닌 조던-말론 콤비에 열광했을지도 모른다. 생각만 해도 심장이 두근거리지 않는가? 마이클 조던과 칼 말론이 한 팀이라니.

물론
, 드래프트 당시 칼 말론은 그다지 뛰어난 선수는 아니었고 그의 성실함 역시 많은 의구심을 자아냈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알고있는 칼 말론은 최고의 파워포워드임과 동시에 노력파다. 결과적으로 만약 불스가 리 대신에 말론을 뽑았다면 조던은 조금 더 일찍 우승반지를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1987 NBA 드래프트, 밀러와 KJ는 어디로




샌안토니오 스퍼스가 1순위로 데이빗 로빈슨을 뽑은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 2, 3, 4번째 픽을 보유했던 피닉스 선즈, 뉴저지 넷츠, LA 클리퍼스의 선택은?
선즈는 아르몬 길리암을, 넷츠는 데니스 홉슨을, 클리퍼스는 레지 윌리엄스를 각각 차례대로 선택했다.

이 이후에 호명된 선수들을 나열해보자면
, 5번픽에 스코티 피펜, 7번픽에 케빈 존슨, 11번픽에 레지 밀러, 18번픽에 마크 잭슨등이 있다 (중간중간에도 케니 스미스, 호레이스 그랜트 등 준수한 선수들도 뽑혔다). 길리암과 윌리엄스는 그나마 오랜기간 선수생활을 지속했다지만 홉슨은 7시즌만에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어찌됬던 스코티 피펜, 레지 밀러, 마크 잭슨 등을 지나친 것은 큰 실수임이 틀림없다.


 

2004 NBA 드래프트, 너무나 일찍 사라진 그들..


2004
NBA 드래프트에서 유타 재즈,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토론토 랩터스 이 세 팀은 모두 각자 팀에 도움이 될했던 스윙맨들을 뽑았다. 진짜 도움이 될만한 스윙맨들을 눈앞에서 놓쳐버리고 말이다.

얼마나 이들의 선택이 잘못되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 유타 재즈는 1라운드 14번째 픽으로 크리스 험프리스, 16번째 픽으로 커크 스나이더를 뽑았다. 바로 뒤인 17번째로 애틀란타 호크스가 조쉬 스미스를 뽑았고 덴버 너겟츠는 18번째로 J.R. 스미스를 뽑았다. 두번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유타는 두명의 스미스들을 외면해 버렸다. 현재 크리스 험프리스는 저니맨으로 전락했고 커크 스나이더는 2007-2008 시즌을 끝으로 NBA에서 사라졌다.

토론토 랩터스는 1라운드 8번픽으로 브리검 영 대학의 유망한 센터였던라파엘 어라우죠를 뽑았다. 1라운드 9번픽은 바로? 필라델피아의 안드레 이궈달라였다. 이궈달라는 현재 필라델피아의 에이스로 자리매김했지만 라파엘 어라우죠는 단 세시즌만에 퇴출당하고 만다. 드래프트 당시 어라우죠는 이미 24살이었다. 과연 유리몸에 성장세마저 멈춘 어라우죠를 뽑은 랩터스의 의중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클리블랜드 역시
2004년 드래프트 잔혹사를 겪긴 마찬가지. 르브론 제임스의 파트너로 제 2의 래리 버드라고 불렸던 오레건 대학의 포워드 루크 잭슨을 뽑았으나 잭슨은 계속되는 부상으로 인해 커리어 4년동안 단 한 시즌도 절반을 채우지 못한 채 사라졌다. 잭슨 덕분에 백인 포워드들의 드래프트 가치는 더욱 떨어지고 만다. 참 슬픈 이야기다.


참고로
2004 NBA 드래프트의 승자는 새크라멘토 킹스. 킹스는 1라운드 26번째로 케빈 마틴을 뽑았다. 왜 다들 그당시 케빈 마틴의 잠재력을 알아보지 못했을까?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2003 NBA 드래프트, 킹 제임스와 멜로의 사이




2000년대 최고의 드래프트라고 불리던 2003 NBA 드래프트에는 무수히 많은 재능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중 단연 1번픽 르브론 제임스와 3번픽 카멜로 앤써니가 돋보이는데, 그 두 스타 플레이어들의 사이에 뽑힌 선수가 있었으니 바로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의 실패작 다르코 밀리시치다.

당시 라쉬드 월래스
, 벤 월래스, 안토니오 맥다이스, 메멧 오쿠어등 많은 빅맨 자원들이 있었기에 밀리시치의 출전시간은 당연히 적을 수 밖에 없었다. 미래의 가능성을 보고 뽑은 밀리시치였지만 적은 출장시간에 밀리시치가 불만을 내비치자 피스톤즈는 그를 과감히 올랜도 매직으로 트레이드 해버린다.

당시 피스톤스의 선택에 대해 많은 의견들이 엇갈렸는데, 결과적으로 볼때 밀리시치를 뽑은 것은 아쉬운 선택이었다. 카멜로 앤써니는 물론, 크리스 보쉬, 커크 하인릭, 드웨인 웨이드 등을 포기하면서까지 뽑은 밀리시치였기 때문에 많은 디트로이트 팬들이 조 듀마스를 원망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2002 NBA 드래프트, 아마레, 버틀러, 그리고 프린스



멤피스 그리즐리스의 GM이었던 제리 웨스트의 처음이자 마지막 실패는 바로 2002 NBA 드래프트 4번째 픽으로 아마레 스타더마이어가 아닌 드류 구든을 뽑은 것이다.

만약 아마레가 멤피스로 갔다면 아마레
가솔이라는 무서운 포스트 콤비를 볼 수도 있었다. 덴버 너겟츠는 5번째 픽으로 니콜로즈 츠키타빌리쉬를,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는 6번째 픽으로 드후안 와그너를 선택했다. 이 두팀 역시 아마레를 뽑았다면 더 좋은 결과를 얻었을지도 (물론, 너겟츠는 드래프트 직후 뉴욕이 7번째로 뽑았던 네네 힐라리오를 트레이드로 영입했으니 그다지 큰 타격은 아니었을 수도)


이들이 놓친것은 아마레 스타더마이어 뿐만이 아니었다
. 아마레 바로 뒷 순서인 10번째 픽의 주인공은 바로 캐런 버틀러. 아마레와 버틀러 둘다 올스타 출신들이다. 구든, 츠키티쉬빌리, 와그너의 올스타 출전 횟수는? 총 합쳐서 0번이다.

같은 해 1
라운드 후반대에도 잔혹사는 있었다.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져스는 21번째 픽으로 퀸텔 우즈를, 피닉스 선즈는 22번째 픽으로 케이시 제이콥슨을 뽑았는데 바로 다음 23번째 픽으로 디트로이트 피스톤즈는 테이션 프린스를 뽑았다. 우즈와 제이콥슨 둘다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며 NBA를 떠나게 된 반면, 프린스는 아직도 아우번 힐의 궁전 (디트로이트 홈 구장 이름)을 지키고 있다.

 


1998
NBA 드래프트, 클리퍼스에 내린 재앙




제목만 봐도 누구인지 짐작 갈 것이다. 바로 1998 LA 클리퍼스가 야심차게 1번픽으로 뽑은 마이클 올로워캔디가 바로 주인공이다. 이미 24살이던 그가 유망주라 불린 이유를 모르겠다. 그에게선 큰 키와 사이즈 외에는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클리퍼스는 믿을 구석이 있었는지, 올로워캔디를 1번픽으로 뽑았다.

결과는 참담했다
. 그가 클리퍼스에서 올린 최고의 성적은 평균 12.3, 9.1 리바운드, 2.2 블록. 그래도 같은 1번픽 콰미 브라운 (2001 NBA 드래프트)보다 나은 성적이긴 하다.

한편, 1998
NBA 드래프트 2번픽은 마이크 비비가 뽑혔는데, 올로워캔디보다야 비비가 훨씬 더 나은 선택이었다. 게다가 같은 해 드래프트 4번픽 앤투완 재미슨, 5번픽 빈스 카터, 9번픽 더크 노비츠키, 10번픽 폴 피어스, 심지어 25번픽의 알 해링턴도 올로워캔디보다는 나은 선택이 되었을 것이다. 참으로 안타깝다.

 


2005
NBA 드래프트, 3번픽을 포기한 댓가를 치룬 포틀랜드



제목 그대로다. 2005 NBA 드래프트에서 당시 3번픽을 보유하고 있던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져스는 트레이드를 통한 픽다운(Pick Down)을 시도했다. 꽤나 좋은 선수들이 2005 NBA 드래프트에 쏟아져 나올 확률이 어느때보다 높았기 때문이다.

, 포틀랜드는 3번픽 하나를 행사하는 것 보다 더 낮은 2개의 1라운드 픽을 원했다. 결국 포틀랜드는 3번픽을 유타 재즈에 내주는 대신, 유타의 6번픽과 27번픽을 얻었다. 하지만 이는 포틀랜드의 돌이킬 수 없는 큰 실수였다.

유타 재즈는 포틀랜드로부터 확보한 3번픽으로 데론 윌리엄스를 뽑았고, 현재 윌리엄스는 유타 재즈의 에이스임과 동시에 리그에서 손꼽히는 포인트가드로 성장했다. 4번픽으로 뉴올리언즈 호넷츠에 뽑힌 크리스 폴 역시 현재 리그를 주름잡는 포인트가드 중 하나로 성장했다.

반면 포틀랜드는
6번픽으로 마텔 웹스터를, 27번픽으로 리나스 클레이자를 뽑은 후 클레이자를 덴버가 22번째로 뽑은 조지아 텍의 포인트가드 재럿 잭과 맞바꿨는데, 비록 스윙맨과 포인트가드를 한꺼번에 잡았다지만 3번픽의 타격은 너무나 컸다. 만약 포틀랜드가 기존에 있던 3번픽으로 데런 윌리엄스나 크리스 폴을 뽑았다면? 지금보다 훨씬 무서운 팀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이처럼 NBA 드래프트에서의 선택이 팀의 미래에 좋던 나쁘던 큰 영향을 끼친다.


이 외에도 수없이 많은
드래프트 잔혹사들은 존재하지만, 이 모두 결과론적 관점의 이야기들일 뿐, 누구를 원망할 수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도 없다. 다만, 한 순간의 선택에 의해 명암이 엇갈리는 팀들을 볼때마다 왠지모를 아쉬움이 남을 뿐.

 

드래프트 순위의 무의미함, 드래프트의 성공사례, 그리고 실패까지.


이 모든것들을 생각하며
NBA 드래프트를 시청한다면 앞으로 더 많은 재미와 흥미를 느낄 수 있을것이다. 더더욱 많은 팬들이 NBA 드래프트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면 하는 마음으로 NBA 드래프트 시리즈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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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the th pick in the 2002 NBA Draft, the Milwukee Bucks selects Michael Redd from Ohio State University”

 

NBA 부 커미셔너 러스 그래닉의 발표가 있은 후, 관중들은 술렁거렸다.


레드? 그가 누구지? 아 오하이오 스테이트의 그저그런 슈터?”


팬들은
NBA 드래프트 2라운드에 뽑힌 선수들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지는 않는다 (물론, 매니아층은 제외하고)
보통 2라운드는 즉시 전력감 보다는 미래를 위한 도박이라는 개념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물론, 2라운드에서 즉시 전력감의 신인들을 찾는게 쉬운일이 아니라 이런 개념이 생긴 것 일수도 있을 것이다.

 

오하이오 스테이트의 스타 플레이어였던 마이클 레드 역시 팬들의 무관심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대학교
2학년이었던 1999년 오하이오 스테이트를 NCAA 토너먼트 4 (Final Four) 으로 이끈 경험이 있었지만, 드래프트 당일 그에게 기대를 거는 팬들은 많지 않았다. NBA 전문가들 역시 당시 밀워키의 에이스였던 레이 앨런의 백업으로 평가했으니 그에 대한 기대치가 얼마나 낮았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다.

 

그럼 초라하게 NBA를 입성했던 이 친구의 현재 위상은 어느정도인지 알아보자.

현재 그는 밀워키 벅스와
6 9100만달러 계약을 이행중이다.
2004 NBA 올스타에 선정되기도 했으며 미국 국가대표 농구팀의 일원으로써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을 거머쥐기도 했다. 2라운드 출신 선수 치고는 그 이력서가 너무 화려하지 않은가?

 

마이클 레드는 바로 미래를 위한 도박의 성공작이라고 할수 있겠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2라운드 출신 선수들의 성공신화는 예전부터 계속 이어져 온 NBA의 전통이다. 이래서 NBA가 한편의 드라마 아니겠는가?

 

이 기회를 더불어 필자의 주관적인 NBA 최고의 2라운드 출신 선수들을 순위대로 나열해 보겠다.


 

The Top-10 Best 2nd Round Picks in the N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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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kVanExel1996SPHoloview by CoincidenceUNO 저작자 표시동일조건 변경허락

10: 닉 밴 액셀 (1993, 37번째 픽)

*1993-1994 시즌 All-Rookie 2nd Team 선정.

*1998년 올스타 선정.

 

닉 밴 액셀의 가능성을 알아본 제리 웨스트도 대단했지만, 더욱 대단했던것은 바로 이 별볼일 없는 신시내티 대학 출신 선수의 실력이었다.

1993
년 드래프트의 진정한 흙속의 진주였던 밴 액셀은 루키 시즌때부터 레이커스의 주전 포인트가드로써 두각을 나타냈다. 빠른 스피드, 현란한 드리블, 자로 잰듯한 송곳패스 등등 화려함과 어울리는 플레이를 했던 밴 액셀은 덴버와 댈러스에서 그의 전성기를 보내게 된다.

특히 댈러스 매버릭스 시절의 밴 액셀은 중요한 순간마다 대량득점을 해내는 무시무시한 식스맨으로 매버릭스의 최전성기를 이끈 주인공중의 하나였다
. 하지만 올해의 식스맨 상을 타지 못한게 옥의 티.


Vlade Divac y Anthony Mason (1996)
Vlade Divac y Anthony Mason (1996) by Vedia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9위
: 앤소니 메이슨 (1988, 53번째 픽)

*1994-1995 시즌 Sixth Man of the Year 선정

*1996-1997 시즌 All-NBA 3rd Team 선정

*1996-1997 시즌 All-Defensive 2nd Team 선정

*2001년 올스타 선정

 

90년대의 포인트-포워드라고 하면 바로 스코티 피펜과 앤소니 메이슨이 있다. 메이슨은 동시대의 스타 피펜과 함께 포인트-포워드의 개념을 대중화 시킨 장본인이다 (물론, “포인트 포워드의 창시자는 폴 프레시라고 알려져있다)

그는
88년 당시 58번째로 2라운드도 아닌 3라운드에 뽑혀 뉴저지 넷츠에서 NBA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루키시즌은 순탄하지는 않았다. 고작 21경기에 뛴 메이슨은 루키 시즌 도중 CBA로 내려갔고, 이듬해 덴버로 적을 옮겼지만 3경기만을 뛰고 방출당하는 시련을 겪었다. 결국 유럽 터키리그에서 그의 농구생명을 연장하다 1992년 자유계약으로 뉴욕 닉스에 합류한다. 메이슨은 팻 라일리의 지도 하에 패트릭 유잉, 찰스 스미스, 래리 존슨과 함께 닉스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샬럿 호넷츠로 이적한 후 그의 최전성기를 보낸 메이슨은 닉스시절 은사였던 팻 라일리를 따라
2000-2001 시즌 마이애미 히트로 이적하는데 그때 그는 생애 첫 올스타에 선정되기도 했다. 2라운드도 아닌 3라운드에서 뽑혀 식스맨 상 수상에 올스타까지. 이정도면 성공이라는 단어로도 부족하지 않을까?


Michael Redd of the Milwaukee Bucks

8: 마이클 레드 (2000, 43번째 픽)

*2003-2004 시즌 All-NBA 3rd Team 선정                                     

*2004년 올스타 선정

 

오하이오 스테이트를 NCAA 전미 토너먼트 4(March Madness Final Four) 까지 이끌었으나 아무도 그의 잠재력을 알아보지는 못했다. 당시 밀워키 벅스의 감독이었던 조지 칼 역시 레드의 잠재력을 일찍 알아보지 못한 자신이 안타까웠다고 시인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레이 앨런의 백업으로
NBA 커리어를 시작한 마이클 레드는 현재 미국 국가대표 농구팀의 일원이며 올스타 선수이기도 하다. 2008“Redeem Team” 이라고도 불렸던 미국 국가대표 농구팀의 일원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기도 했다.

2005
년 밀워키 벅스와 6 9100만달러의 장기계약을 체결한 그는 현재 밀워키 벅스의 리더로써 그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다. 2라운드 출신 선수가 억대연봉에 한 팀의 리더라고 말하면 믿을 수 있을까? 하지만 이 왼손잡이 슈터는 믿을수 없는 일들을 만들어나가고 있는, 진정한 2라운드의 전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Cavaliers vs. Magic

7: 라샤드 루이스 (1998, 32번째 픽)

*2004년 올스타 선정

*2009년 올스타 선정

 

NBA 드래프트 2라운드를 섵불리 무시하면 안되는 이유가 있다. 가까운 예로 2009 NBA Finals에서 맞붙었던 LA 레이커스와 올랜도 매직은 각자 드래프트 2라운드 출신의 주축 선수를 보유하고 있었다. 하나는 레이커스의 트레버 아리자,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바로 7위에 이름을 올린 라샤드 루이스다.

고졸 출신의 루이스는 큰 키에 스피드
, 그리고 슈팅 레인지까지 보유했지만 그를 1라운드에서 뽑은 팀은 없었다. 결국 시애틀 슈퍼소닉스가 2라운드에 그를 뽑았는데, 루이스는 2년차때부터 서서히 가능성을 보여주더니 결국 페이튼-켐프 이후 새로운 원투펀치로 시애틀 슈퍼소닉스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2007
년 올랜도 매직과 6 11800만달러의 초대박 계약을 체결한 루이스는 2009년 올랜도를 NBA Finals로 견인하며 2라운더로써 더 바랄게 없는 부와 명예를 둘다 챙겼다. 현재 저미어 넬슨, 드와잇 하워드와 함께 새로이 팀에 합류한 빈스 카터를 동료로 두고있는 루이스는 아직도 보여줄게 많은, 특별한 2라운더다.


NBA 2009: Lakers Beat Jazz 113-100

6: 카를로스 부저 (2002, 34번째 픽)

*2002-2003 시즌 All-Rookie 2nd Team 선정

*2007-2008 시즌 All-NBA 3rd Team 선정

*2007년 올스타 선정

*2008년 올스타 선정

 

“A Shame of Duke”, “Boozer? No, It’s Looser”,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에 의해 드래프트 될 당시 그가 들었던 조롱들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를 무시하는 팬들은 아무도 없다. 대학시절, 듀크를 미국 최정상의 자리로 견인했지만 팀 동료들(제이 윌리엄스, 마이크 던리비) 과는 달리 부저는 1라운드에서 외면받았다. 하지만 캐벌리어스 시절 All-Rookie 2nd Team 에 선정되더니, 이듬해 들어온 괴물 신인 르브론 제임스와 함께 원투펀치를 이루며 새로운 듀오의 탄생을 알렸다.

하지만 2004년 유타 재즈와 거액의 계약을 체결하면서 유니폼을 갈아입은 부저는 이후 2년간 부상에 시달리다 2006-2007 시즌 평균 20.9 11.7리바운드 3.0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칼 말론의 후계자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두번의 올스타 선정, 그리고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동메달과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 등 그는 NBA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커리어도 훌륭하다.

현재 데론 윌리엄스와 함께
“Stockton to Malone” 을 재현하고 있는 그의 나이는 이제 겨우 스물 일곱. 은퇴할때 즈음 되면 그의 이력은 아마 이보다 더 화려하지 않겠는가. 2라운드 출신으로 미국 국가대표 일원이 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두개의 올림픽 메달은 왜 부저를 루이스나 레드 대신 6위에 올려놔야됬는지를 설명해준다.


Gilbert Arenas Pregame
Gilbert Arenas Pregame by Keith Allison 저작자 표시동일조건 변경허락

5
: 길버트 아레나스 (2001, 30번째 픽)

*2002-2003 시즌 Most Improve Player Award 수상

*2004-2005 시즌 All-NBA 3rd Team 수상

*2005-2006 시즌 All-NBA 3rd Team 수상

*2006-2007 시즌 All-NBA 2nd Team 수상

*2005, 2006, 2007년 올스타 선정

 

아레나스 만한 선수라면 2라운드가 아닌 로터리, 로터리 중에서도 5순위 안에는 뽑혀야 했다. 물론, 결과론 적인 말로 들린다면 할수 없다. 애리조나 대학은 2001년에만 총 4명의 NBA 드래프티를 배출해냈다 (리차드 제퍼슨, 길버트 아레나스, 로렌 우즈, 마이클 라이트). 하지만 이중 1라운드 출신은 리차드 제퍼슨 뿐이다. 그러나 현재 시점에서 이 네명중 NBA에서 가장 성공한 선수는? 두말 할것 없이 단연 길버트 아레나스다.

골든 스테이트 워리어스에서 제이슨 리차드슨
, 래리 휴즈, 마이크 던리비, 트로이 머피등과 함께 성장했으며 2년차때 평균 18.3 6.3어시스트를 기록하며 기량 발전상을 수상했다. 2년간의 워리어스 생활을 청산하고 워싱턴 위저즈와 장기계약을 맺은 아레나스는 일취월장한 기량을 선보인다.

2005-2006
시즌에는 평균 29.3 6.3어시스트를 기록하였고 그해 플레이오프에서 평균 34점을 기록하며 르브론 제임스와 에이스 대결을 펼치기도 했다.
비록 플레이오프 1라운드밖에 경험하지 못했지만 그의 득점력은 2라운드 출신 선수들 중에 단연 최고다. 이미 워싱턴과 또 하나의 연장계약을 체결한 그가 과연 부활해서 잠잠했던 에이전트 제로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까.




4
: 마크 프라이스 (1986, 25번째 픽)

*1988-1989 시즌 All-NBA 3rd Team 선정

*1991-1992 시즌 All-NBA 3rd Team 선정

*1992-1993 시즌 All-NBA 1st Team 선정

*1993-1994 시즌 All-NBA 3rd Team 선정

*1989, 1992, 1993, 1994년 올스타 선정

 

1989년 동부지구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시카고 불스와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사투를 기억하는가. 당시 시카고는 5차전에서 마이클 조던의 버저비터가 성공하면서 101 100으로 클리블랜드를 힘겹게 꺽고 3 2패로 다음 라운드에 진출한다. 당시 클리블랜드를 이끌었던 주전 포인트가드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마크 프라이스다.

80
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 그중에서도 특히 1988-1989 시즌이 가장 아쉬웠었는데, 그당시 마크 프라이스를 비롯해 론 하퍼, 브래드 도허티, 핫 로드윌리엄스등이 주축이 된 우승후보였으나 마이클 조던의 한방에 의해 1라운드에서 탈락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에이스 마크 프라이스는 1988-1989 시즌을 기점으로 인생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네번의 올스타
, 네번의 All-NBA 수상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기록이 아니다. 특히 당시 NBA에는 마이클 조던, 존 스탁턴, 매직 존슨, 조 듀마스 등 실력이 출중한 가드들이 기라성같이 많았다. 그들을 제치고 All-NBA 1st Team 에 선정됬다 하면 그 실력은 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클리블랜드의 레전드가 된 이 조그마한 2라운드 출신의 백인은 4위에 이름을 올릴 자격이 있다. 물론 아무런 영향력 없는 필자의 주관적인 순위이긴 하지만.


Jeff Hornacek #14

3: 제프 호나섹 (1986, 46번째 픽)

*1992년 올스타 선정

 

사실 3위부터 5위까지 누구를 넣을지 많이 고민했다. 개인 수상만을 놓고 볼때는 마크 프라이스가 3위에 들어가는게 옳다. 순수 농구 실력만을 볼때면 길버트 아레나스의 손을 올려줘야 한다. 하지만 필자는 제프 호나섹이 3위에 오를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46
번째로 NBA에 드래프트 되었을때, 아무도 그의 실력을 존중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피닉스 선즈에서 데뷔 한 후 올스타에 선정될만큼 좋은 활약을 펼쳤고, 에이스로써 케빈 존슨, 댄 멀리와 함께 선즈를 서부의 강호로 변모시켰다. 워낙 유타 시절의 조력자 이미지가 강해서인지 그는 에이스와는 거리가 먼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는 찰스 바클리가 오기 전까지 피닉스의 에이스 노릇을 톡톡히 잘 해냈었다.

필라델피아를 거쳐 제리 슬론의 유타에 정착하면서 그에게 주어진 역할은 에이스가 아닌 제
3 옵션의 롤 플레이어 였지만 훌륭하게 소화해 내면서 유타 재즈가 2년연속 NBA Finals에 오르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유타 재즈 최전성기의 주력 멤버였던 그는 팀에서 스탁턴, 말론만큼 팀에 꼭 필요한 존재였다. 호나섹이 없는 유타 재즈를 상상해본적 있는가? 필자에게 호나섹이 없는 재즈는 상상할 수도 없다.

90
년대 후반 시카고 불스와 우승을 위해 끝까지 사투를 벌였던 팀 유타 재즈. 그리고 그 팀에서 없어서는 안될 조연. 아레나스와 프라이스와는 달리 호나섹은 그냥 강호가 아닌 한때 NBA를 주무르던 강팀에서 주전급 멤버로 성공을 한 전력이 있기에 3위에 놓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Dennis Rodman
Dennis Rodman by Vedia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2
: 데니스 로드맨 (1986, 27번째 픽)

*1991-1992 시즌 All NBA 3rd Team 수상

*1994-1995 시즌 All NBA 3rd Team 수상

*1989-1990, 1990-1991 시즌 NBA Defensive Player of the Year 수상

*1988-1989, 1989-1990, 1990-1991, 1992-1993, 1994-1995, 1995-1996 시즌 All-Defensive 1st Team 수상

*1993-1994 시즌 All-Defensive 2nd Team 수상

*1990, 1992년 올스타 선정

 

화려한 수상 실적, 5개의 반지, 각종 개인 타이틀

말이 필요한가? 놀랍지 않은가. 선수가 NBA 드래프트 2라운드 출신이라는것을 우선 배제하고 생각해봐도 이것은 놀라운 실적이다. 리바운드 하나로 NBA 제압한 사나이. 유명한 농구만화 슬램덩크 주인공의 실제 모델이었다던 데니스 로드맨 역시 드래프트 2라운드 출신이다.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의 Bad Boys 멤버중 하나였던 그는 2년연속 우승(1989, 1990) 맛보며 엘리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오직 수비적 능력에만 의존하던 로드맨은 결국 그의 능력만 가지고 NBA 제패했다. 그의 리바운딩 능력은 당시 디트로이트의 수장이었던 데일리가 신이 내린 재능 (God given talent)” 라고 극찬할 만큼 독보적이었으며 2년연속 Defensive Player of the Year 수상과 수많은 All-Defensive 1st Team 수상이 그의 수비력을 대변한다.

디트로이트
이후 샌안토니오 스퍼스를 잠시 거친 시카고에 합류한 로드맨은 조던, 피펜, 하퍼, 쿠코치 등과 함께 3년연속 우승을 함께 경험한다. 그와 함께했던 동료들 역시 그의 재능만큼이나 대단했다. 디트로이트 시절 아이재아 토마스, 듀마스 등과 함께했고, 샌안토니오 스퍼스 시절에는 제독데이빗 로빈슨과 스퍼스의 레전드 엘리엇, 에이버리 존슨과 함께했다. 불스 시절의 동료들 역시 대단한 이력을 지닌 선수들이기는 마찬가지. 2라운드 출신 선수중 로드맨같이 성공적이고 다이내믹한 커리어를 보낸 선수는 없을 것이다.

비록
코트의 괴짜라는 이미지가 강하긴 하지만, 그의 실력과 열정만큼은 존중해 줘야한다. 그는 모든 감독들이 프론트 코트에 세우고 싶어했던 선수라는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SPURS HORNETS

1
: 마누 지노빌리 (1999, 57번째 픽)

*2002-2003 시즌 All-Rookie 2nd Team 선정

*2007-2008 시즌 All-NBA 3rd Team 선정

*2007-2008 시즌 Sixth Man of the Year 수상

*2005년 올스타 선정

 

그의 성공 가능성을 점친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1999년 최하위에 가까운 57번째로 샌안토니오 스퍼스에 뽑힌 지노빌리는 3년 후인 2002 NBA에 등장해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아르헨티나 출신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은 이 루키는 결국 스퍼스의 중요한 전력으로 성장하며 2003, 2005, 그리고 2007년 스퍼스를 정상으로 올려놨다.

또한 그는 유로리그
, 올림픽, NBA 우승을 경험한 유일한 선수이기도 하다. 슈팅 능력도 출중하지만 그가 제일 무서울때는 바로 유로스텝에 의한 돌파. 아르헨티나 국가대표의 에이스이자 오랜기간 강자로 군림해왔던 샌안토니오의 해결사인 지노빌리를 1위에 올려놓은 이유는 그가 가장 낮은 픽에 뽑혔기 때문이다.

57
번째로 지노빌리를 뽑은것은 NBA 드래프트 역사상 최고의 스틸 픽이다. 앞으로 과연 57번째 픽이 지노빌리 만큼의 커리어를 쌓을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이것이 바로 필자가 지노빌리를 1위에 올린 이유다.


And the Others..

이 외에도
NBA에서 활약한 2라운드 출신들은 많다.

은퇴한 선수들 중 몇몇 나열해 보자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드라젠 페트로비치, 아이버슨의 영혼의 파트너에릭 스노우, 샤킬 오닐에 대항했던 새크라멘토 킹스의 블라디 디박, 길게 꾸준히 활약한 클리포드 로빈슨이 있다.


현재 활약하고 있는 현역
2라운드 출신 선수들 역시 많다.

폴 밀샙, 메멧 오쿠어, 모 윌리엄스, 몬타 엘리스, 스티븐 잭슨, 바비 시몬스, 자자 파출리아, 앤더슨 바레죠우 등이 현재 NBA에서 안정적인 활약을 펼치고 있다.

 

이처럼 NBA 드래프트 2라운드 출신들의 성공신화는 계속 이어지고있다.

일종의 전통이라 할 수 있을정도로 2라운드 출신 슈퍼스타들이 탄생하는데 이것 때문에라도 아무리 NBA 드래프트라지만 2라운드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앞으로도 2라운드 드래프티들의 성공신화를 기대하며 NBA 드래프트의 두번째 이야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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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adraft07
nbadraft07 by Paulo C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마이클 조던, 샘 카셀, 레지 밀러, 루크 잭슨, 마이클 올로워캔디..

이 다섯명의 공통점은 딱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이들 모두 NBA 선수들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들이 모두 드래프트를 통해 NBA에 입성했다는 사실이다.

 

마이클 조던은 3픽으로 시카고에 뽑혀 NBA에 진출해 농구 황제가 되었고, 샘 카셀은 1라운드 치고는 비교적 낮은 24번째로 뽑혔지만 꽤나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냈다. 11번픽으로 뽑힌 레지 밀러는 인디애나 팬들의 야유를 받으며 NBA에 입성했지만 명예의 전당 후보로 거론될만큼의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냄으로써 팬들이 틀렸다는것을 증명해냈고, 루크 잭슨과 마이클 올로워캔디는 높은 순위와는 다르게 부상과 실력부족등의 이유로 NBA 무대에서 사라졌다.

2005 IPL 500 Festival Parade
2005 IPL 500 Festival Parade by jenniferrt66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데뷔 당시 인디애나 팬들에게 많은 야유를 받았던 레지 밀러, 그러나 그는 현재 인디애나의 레전드다.

이렇듯 드래프트를 통해 많은 신인들이 등장하지만
, 훌륭한 선수로 성장하는 선수들이 있는 반면, 끝도없이 추락하는 선수들도 있기 마련이다.

 

NBA 드래프트는 또한 서로 경쟁하는 신인들의 실력을 가늠할 수 있는 무대이기도 하다. 예를들어 드래프트 1번픽으로 뽑힌 선수는 프로 지망생중 가장 유망한 선수라고 할 수 있으며 2라운드 후반대에 뽑힌 선수들은 경쟁자들에 비해 실력이 떨어지는 선수라고 볼 수 있다. 물론, NBA 드래프트에 뽑힌 것 만으로도 대단한 성과이긴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드래프트 순위가 선수들의 잠재력이나 실력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언제나 실수하기 마련이며 결국 NBA 드래프트 역시 NBA 스카웃들의 능력에 의해 정해지기 때문에 드래프트 순위는 기대치의 많고 적음의 척도이지 선수들의 잠재력과 재능의 절대적 기준은 될 수가 없다.

 

농구황제 마이클 조던은 1순위가 아닌 3순위로 뽑혔으며, 현재 NBA 최고의 플레이어인 코비 브라이언트 역시 1픽이 아닌 13번픽으로 뽑혔다. 현재 올랜도의 그저그런 백업 센터인 아도날 포일은 8번픽으로 NBA에 입성했다. 그의 커리어와 비교하면 터무니없이 높은 순번이다.

 

낮은 순위로 뽑힌 선수들이 스타가 되고, 높은 기대치를 받았던 선수들이 사라지는 현상이 NBA 드래프트의 묘미가 아닐까. 그래서 필자는 이번 기회에 NBA 드래프트의 묘미를 좀더 자세하게 펼쳐보려 한다.

 


1
번픽 출신이 MVP가 될 확률은?

 

드래프트 1순위는 대개 최약체 팀이 보유하기 마련이다. 물론 드래프트 로터리를 통해 그 순위가 변경되기는 하지만 그 확률은 상대적으로 낮다. 잠시 드래프트 로터리를 설명하겠다.

해당
NBA 시즌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한 14개의 팀들은 추첨을 통하여 다음 시즌 NBA 드래프트 순위를 정하게 된다. 14개 팀들 중 승률이 낮은 팀일수록 1순위에 당첨될 확률이 높게 되어있다. 하지만 종종 최저승률을 보유한 팀이 1순위에 당첨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중요한것은, 드래프트 1순위를 보유한 팀은 리빌딩을 필요로 하는 팀이라는 것이다. , 팀의 재건을 위해 팀의 중심이 될만한 선수를 드래프트 1순위로 뽑는것이 정설이다. 샌안토니오 스퍼스의 팀 던컨,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의 앨런 아이버슨이 좋은 예다.

 

우선 1980년부터 2005년까지의 NBA 드래프트 1순위들을 보자.

(필자는 최근 25년을 통계의 토대로 사용했다)

 

2005

MIL

Andrew Bogut

Utah

2004

ORL

Dwight Howard

Southwest Christian Acad. (GA)

2003

CLE

LeBron James

St. Mary / St. Vincent (ohio) HS

2002

HOU

Yao Ming

Shanghai Sharks

2001

WAS

Kwame Brown

Glynn Academy, HS

2000

NJN

Kenyon Martin

Cincinnati

1999

CHI

Elton Brand

Duke

1998

LAC

Michael Olowokandi

Pacific

1997

SAS

Tim Duncan

Wake Forest

1996

PHI

Allen Iverson

Georgetown

1995

GSW

Joe Smith

Maryland

1994

MIL

Glenn Robinson

Purdue

1993

ORL

Chris Webber

Michigan

1992

ORL

Shaquille ONeal

Louisiana State

1991

CHA

Larry Johnson

Nevada-Las Vegas

1990

NJN

Derrick Coleman

Syracuse

1989

SAC

Pervis Ellison

Louisville

1988

LAC

Danny Manning

Kansas

1987

SAS

David Robinson

Navy

1986

CLE

Brad Daugherty

North Carolina

1985

NYK

Patrick Ewing

Georgetown

1984

HOU

Akeem Olajuwon

Houston

1983

HOU

Ralph Sampson

Virginia

1982

LAL

James Worthy

North Carolina

1981

DAL

Mark Aguirre

DePaul

1980

GSW

Joe Carroll

Purdue

 

이들 중 과연 시즌 MVP에 선정된 선수들은 과연 몇이나 될까.

정답은 바로 르브론 제임스, 팀 던컨, 샤킬 오닐, 앨런 아이버슨, 하킴 올라주원, 데이빗 로빈슨 등 6명밖에 안된다. 최근 25년간 1순위 출신들 중 MVP가 될 확률은 대략 24%였다. 물론, 2000년대 드래프트 1순위 출신 선수들은 아직도 나이가 젊기때문에 이것이 정확한 통계라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최고의 유망주라도 최고의 선수가 된다는 보장은 없다고는 자신있게 말 할수 있을 것 같다.


Tim Duncan
Tim Duncan by themmg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1
번픽 출신과 신인왕의 관계

 

1순위로 뽑힌 신인들이 신인왕을 탈 확률을 한번 알아보자.

랄프 샘슨, 패트릭 유잉, 데이빗 로빈슨, 데릭 콜맨, 래리 존슨, 샤킬 오닐, 크리스 웨버, 앨런 아이버슨, 팀 던컨, 엘튼 브랜드, 르브론 제임스까지 총 11명이 최근 25년간 (1980년부터 2005년까지) 1순위 출신으로 신인왕을 거머쥐었다 (데이빗 로빈슨은 1987년에 1순위로 뽑혔지만 군복무로 인해 1989년에 데뷔했다) 1순위 출신들이 MVP보다는 신인왕을 탈 확률이 더 높은것이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MVP NBA 에 소속된 모든 선수들과 경쟁을 해야 하지만 신인왕 수상은 1년차들만이 경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숫자부터 차이가 나기때문에 확률적 비교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1순위라고 무조건 신인왕을 탄다는 공식 역시 성립이 불가능하다.

1987-1988 시즌의 신인왕인 마크 잭슨은 1987 NBA 드래프트 1라운드 18번째로 뽑혔다. 2002-2003 시즌의 신인왕 아마레 스타더마이어 역시 2002 NBA 드래프트 1라운드 9번픽이었다. 불행하게도, 2라운더 출신의 신인왕은 없지만, 드래프트 순위가 낮다고 해당 선수의 능력이 낮아지는 것은 아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진 비운의
1라운더


이제는 이야기의 초점을
1순위 픽에서 좀더 포괄적인 1라운드로 바꿔보겠다.
1라운드 출신 선수들의 성공시대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기에, 높은 기대치에 비해 너무나도 쉽게, 너무나도 안타깝게 무너져 내린 1라운드 출신 선수들의 이야기를 좀더 해보려 한다.

 

2002 1라운드 2번픽으로 시카고 불스에 입단한 제이슨 윌리엄스 (훗날 제이 윌리엄스로 개명)는 성공적인 루키 시즌을 보냈다. 신인으로써 트리플 더블까지 기록한 그는 당시 최약체 팀이었던 시카고 불스의 재건을 이끌 재목으로 많은 기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다음 해 오프시즌 도중 윌리엄스는 오토바이 사고로 인해 왼쪽 무릎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고, 2003 NBA 드래프트에서 불스는 윌리엄스의 공백을 위해 포인트가드 커크 하인릭을 드래프트 하게 된다. 신인계약 조항에 오토바이에 대한 금지 조항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토바이 사고를 냈던 제이 윌리엄스는 결국 웨이브 당하면서 NBA 무대에서 사라지게 된다 (물론 간간히 그는 컴백을 시도했지만, 번번히 무산되고 말았다)




1986년으로 돌아가 보자. 1986 NBA 드래프트에서 2번픽으로 전년도 챔피언인 보스턴 셀틱스에 뽑힌 렌 바이어스가 드래프트 직후 마약 (코카인으로 추정됨) 과다복용으로 인해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다. 렌 바이어스는 NBA 자체에서 밀어줬던 유망주이기도 했다. 마이클 조던의 라이벌로 유명세를 떨쳤던 그는 프로 계약을 맺기도 전에 아이다스와 전속계약을 맺을만큼 실력과 스타성을 겸비한 선수였다. 하지만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때문에 바이어스는 그 재능의 꽃을 피우지도 못한채 생애를 마감하게 된다.

**1986년은 저주의 드래프트라고도 불리게 된다. 바이어스 바로 다음으로 뽑힌 크리스 워시번 역시 약물 과다복용으로 인해 2년만에 NBA에서 영구 퇴출당했기 때문이다. 약물덕분에 NBA는 두명의 안타까운 재능을 잃고 말았다. 물론, 워시번의 NBA에서의 활약은 미미했지만 말이다.

 

레지 루이스 역시 젊은 나이에 생애를 마감한 안타까운 케이스다. 1988 22번째로 보스턴 셀틱스에 입단한 그는 줄곧 셀틱스에서 뛰어왔다. 농구 명문과는 거리가 먼 노스웨스턴 대학출신의 이 포워드는 2년차때부터 두각을 보이며 셀틱스의 주축 선수로 자리매김했지만 1993년 여름에 갑작스런 호흡곤란 증세에 이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특히 그의 마지막 시즌이었던 1992년에 올스타로 선정되었기에 그의 갑작스런 죽음은 더욱 더 안타까워 보일수밖에 없었다. 루이스의 사망은 셀틱스에게는 악몽이었으며, NBA로써도 재능있는 선수를 잃었기에 타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훗날 그의 등번호는 셀틱스에서 영구결번 되었는데 이는 보스턴이 우승팀 멤버가 아닌 선수의 번호를 영구결번시킨 두번째 케이스였다. 그 첫번째는 바로 에드 맥컬리.

 

농구 외적의 문제들로 인해 사라진 선수들이 있는반면 농구 실력 자체의 문제때문에 사라진 선수들 역시 많다.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는 바로 1998 LA 클리퍼스가 1번픽으로 뽑은 마이클 올로워캔디다. 올로워캔디는 기본기 부족이라는 단점을 지니고 있었지만, 축복받은 사이즈와 젊은 나이때문에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결국 그 잠재력을 단 한번도 뿜어내지 못한채 현재 NBA에서 모습을 감춘지 오래다.

 

2004 1라운드 8번픽으로 토론토에 입단한 라파엘 아라우죠 역시 올로워캔디와 비슷한 케이스다. 신체적 사이즈와 잠재력만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던 아라우죠는 몇시즌 NBA에서 버티지 못한 채 자취를 감췄다.

 

필자에게 가장 아쉬운 1라운더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조나단 벤더라고 말할 것이다.

1999 5번째로 드래프트에 호명된 축복받은 운동능력의 소유자는 힘과 기술을 둘다 보유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었다. 어떤 이는 벤더를 제 2의 페니 하더웨이, 또 다른 이는 제 2의 케빈 가넷이라고 불렀지만, 벤더는 결국 둘다 되지 못하고 계속되는 부상에 견디지 못해 2006년에 은퇴를 선언하게 된다.

 

이 외에도 높은 드래프트 순위에 비해 실망스러운 모습으로 NBA를 떠난 선수들은 수없이 많다. 그 이유가 어떠하던, 이는 드래프트 순위가 NBA 루키들의 실력을 입증할 수 없다는 것을 방증한다.

 


NBA
드래프트에 대한 필자의 시각

 

이미 언급했듯이 필자는 NBA 드래프트 순위가 그다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론, 순위가 높을수록 해당 선수에 대한 기대치는 점점 높아진다. 하지만 순위가 절대로 기량의높고 낮음을 결정할 수 없다. 높은 순위로 드래프트된 신인들 중 성공한 케이스가 있는 반면, 실패한 케이스 역시 많기 때문이다. 또한, 각 팀이 필요로하는 부분들이 다르기 때문에 드래프트 순위의 변동은 쉽게 볼수 없는 현상도 아니다.

 

결국 NBA 드래프트 순위는 해당 선수의 절대적 실력이 아닌, NBA 관계자와 전문가들의 주관적 평가에 따른 순위라고 하는것이 더 맞는 표현이 아닐까.

 

NBA 드래프트 순위에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고 해도, NBA 드래프트 그 자체는 여러가지 의미가 담겨진 무대다. 프로 지망생들에게는 꿈과 같은 무대이며, 구단들에게는 전력을 보강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이기도 하다. 또한, 새로운 스타의 탄생을 기대하는 팬들에게는 드래프트 순위보다 더 흥미로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스포츠는 항상 예측 가능하지 못한 반전이 있기 마련이다. 이것이 바로 NBA 드래프트의 진정한 묘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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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A
최고의 상품이라고 할수있는 올스타전이 다가온다. NBA 올스타전에는 최고의 슈퍼스타들이 한곳에 모여 자웅을 겨룬다. 현재 NBA에는 450여명의 선수들이 등록되어 있다. 올스타전에 뛰는 26명의 선수들은 최고중의 최고가 아닐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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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우선 올스타전에 대한 정의를 필자가 내려보겠다. 필자에게 올스타전이란 최고의 스타 플레이어들이 한자리에 모여 팬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는 무대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볼거리" 란 바로 농구다. 최고급 선수들이 함께 모여 농구하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전율이 흐를만큼 짜릿하다.

그럼 NBA 올스타전 멤버가 어떻게 선발되는지 함께 알아보도록 하자. NBA 올스타전은 동부지구와 서부지구, 두 팀으로 나뉘어져 있다. 각 팀마다 13명의 선수들이 선발된다. 물론, 동부지구 올스타 팀에는 동부지구에 소속된 선수들이, 서부지구 올스타 팀에는 서부지구에 소속된 선수들이 선발된다.

각 팀의 스타팅 멤버 다섯명은 팬들이 온라인 투표를 통해서 선발된다. 스타팅 멤버 선발에는 가드 부문에서 두명, 포워드 부문에서 두명, 센터 부문에서 1명씩 선발된다. 즉, 쉽게 말하자면 가드 부문에서 최다득표 1,2위 선수들이 올스타전 스타팅 멤버가 되는것이다. 포워드와 센터 역시 똑같은 방식으로 선발된다.

올스타전은 팬들을 위한 축제와 같다. 그때문에 팬들에게 올스타팀 선발권을 온라인 투표를 통해 부여하는 것이다. 팬들 각각 자신만의 스타팅 라인업을 상상할게 아닌가?

하지만 이 온라인 투표가 때로는 오용될 수 있다. 최소한 팬들의 투표권의 의미와는 거리가 먼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필자는 2009년 올스타전과 이 치엔리엔에 대한 문제를 파헤쳐보려 한다.

1월 14일 NBA가 발표한 올스타전 온라인 투표 중간집계 결과를 볼때 서부지구 가드 부문에는 LA 레이커스의 코비 브라이언트와 휴스턴 로켓츠의 트레이시 맥그레이디가 1,2위를 기록했다. 포워드 부문은 샌안토니오 스퍼스의 팀 던컨의 독식과 함께 덴버 너겟츠의 카멜로 앤써니가 2위를 차지했고, 센터 부문에서는 야오밍이 압도적인 득표수로 1위를 차지했다. 그럼 동부지구로 가보자. 동부지구 가드 부문은 마이애미 히트의 드웨인 웨이드와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의 앨런 아이버슨이 1,2위를, 포워드 부문은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르브론 제임스와 보스턴 셀틱스의 케빈 가넷이 1,2위를 고수중이다. 센터 부문에서는 올랜도 매직의 드와이트 하워드가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따로 있다. 동부지구 올스타 포워드 부문에서 중국 출신의 포워드 이 치엔리엔이 포워드 부문에서 득표수 3위를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재 그는 포워드 부문 2위의 가넷을 약 15만표 차이로 따라붙고 있다. 올스타전이 2월 15일임을 고려해보면 이 치엔리엔이 가넷을 제치고 2위로 등극할 가능성도 있다.  15만표는 그리 큰 차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치엔리엔의 득표수는 큰 논란거리다. 왜냐하면 그의 득표수는 거의 대부분이 중국 네티즌들이 던진 표이기 때문이다. 일명, 중국의 인해전술이 만들어낸 기이한 결과가 바로 이 치엔리엔이 올스타전 득표수 3위에 등극한 상황이다.

이 치엔리엔이 득표수로 제친 선수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더더욱 경악할 것이다. 이 치엔리엔의 뒤를 쫒고 있는 선수들은 토론토 랩터스의 크리스 보쉬, 보스턴 셀틱스의 폴 피어스, 올랜도 매직의 히도 터콜루, 마이애미 히트의 션 매리언,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대니 그레인저 등이다. 이 치엔리엔과 비교해볼때 위에 언급한 선수들의 경력은 확연히 차이가 난다. 크리스 보쉬는 시즌 초 엄청난 활약으로 MVP 후보로까지 거론되었던 인물이다.
폴 피어스는 작년 보스턴을 우승으로 이끈 스타 플레이어임과 동시에 여러차례 올스타전에 출전했던 엄청난 경력의 소유자다. 히도 터콜루 역시 현재 올랜도의 에이스 플레이어며 션 매리언 역시 여러차례 올스타전에 출전했던 선수이다. 대니 그레인저 역시 묵직한 플레이로 인디애나를 이끌고 있는 신성이다. 이 모든 선수들을 제치고 이 치엔리엔이 득표수라는 제도를 통해 올스타전에 선발 출전하는 장면이 상상이나 되는가? 현재의 상황만 놓고 본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치엔리엔이 올스타전에 출전 할만한 자격을 갖추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올스타전은 영어로 All Star Game 이다. 단어 그대로 해석하자면 All Star, 즉 모두의 스타들이 한자리에 모인 농구경기다. 여기서 모두란 무엇일까. 바로 팬들이다. 즉 팬들이 원하는 스타들의 무대가 바로 올스타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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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잠깐 다시 필자가 언급했던 올스타전의 정의를 보자.

필자는 올스타전이 최고의 선수들이 모여 그동안 농구경기에서 보지 못했던 신선하고 짜릿한 경기를 팬들에게 보여주는 무대라고 생각한다.

필자의 정의와 올스타전이라는 단어의 해석에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올스타전의 주인공들은 스타 플레이어들이라는 것이다. 물론 올스타전의 진정한 주인공은 팬이라는 문구가 있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필자에게는 팬들을 존중하기 위한, 입에 바른 예의상 발언이라고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어찌됬던 올스타전을 빛낼 이들은 바로 NBA 선수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지엔리엔이 올스타전을 빛낼 수 있는 자격이 있는가?

기량만 본다면 당연히 아니다. 그는 팬들의 이목을 살 만한 능력을 지금까지 단 한번도 보여주지 못했다.

잠시 2003년으로 돌아가 보자.  2003년은 르브론 제임스와 카멜로 앤써니의 데뷔 시즌이었다. 그들은 루키임에도 불구하고 올스타급 활약을 하며 거물 루키가 무엇인지를 확실히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들이 2003년 올스타전에 초청되지 않았을때 당사자들은 물론 수많은 팬들이 NBA에 의문점과 함께 불만을 표출했다. (물론, 사태는 커지지 않았다.) 제임스와 앤써니 역시 언론에 자신들은 꼭 뽑힐줄 알았다면서 아쉬움과 함께 약간의 불만을 드러냈다. 이 사태에 대해 트레이시 맥그레이디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물론 그들이(르브론 제임스와 카멜로 앤써니) 좋은 선수라는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들 역시 올스타가 될 자격을 갖추고 있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올스타 선수들이 명단에서 빠져야 하는가? 올스타전에 초청된 선수들 역시 올스타 자격이 있어 초청된것이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스타가 아니라는것을 알아야 한다." (I know they’re good players and all, but does that make them kick out some of the all star players who were invited? Come on, these men are here because they are an all star. They gotta know their places, they’re not the only stars in the league.”)

하지만 이 지엔리엔은 어떠한가? 팬투표 결과 하나때문에 이 지엔리엔이 다른 스타 플레이어들의 자리를 차지할 자격은 없다. 그는 올스타에 어울리는 선수도 아니며, NBA 주전 라인업에 어울리는 선수도 아니다. 현재의 그는 롤 플레이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를 깊게 평가하고 싶지 않지만, 간단하게 그에 대한 평가를 내리자면 그는 올스타급 선수는 절대 아니다. 그는 올스타전에서 뛰지 말아야 한다. 기량이 급성장한 수년 후라면 모를까.

물론 수많은 반론들이 있을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올스타전의 의미에 대한 여러가지 해석이다. 우선적으로 올스타전이라 함은 NBA에 많은 성원을 보내준 팬들에 대한 선수들의 특별한 무대다. 즉 팬들을 위한 퍼포먼스가 바로 올스타전이라는 것이다. 다만 필자는 그 무대를 펼치는 선수들의 기량이 최고급, 아니면 최소한 올스타 기준에는 근접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의 기준에 이 치엔리엔은 올스타전에 출전할 자격이 없다. 그의 기량은 올스타급은 커녕, NBA 팀의 주전급에도 못미친다. 그의 잠재력은 인정하지만 현재기량만 따지고 볼때 그는 그저그런 벤치 플레이어일 뿐이다.

그러나 필자의 주장에도 모순이 포함되어있다. 그 이유는 바로 NBA가 올스타전은 팬들을 위한 무대임을 어떠한 기준도 두지 않은채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는 NBA가 매 해 올스타전 선발 라인업의 전권을 온라인 투표라는 제도를 통해 팬들에게 쥐어줌으로써 증명되었다. 특히 아무런 올스타전 출전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내놓지 않았기 때문에 NBA가 올스타전 선발 라인업에 대해서는 100% 팬들의 요구를 지지한다고 해석하는게 맞다. 온라인 투표제를 현지 내의 팬들에게만 적용하면 되지 않느냐? 대답은 바로 “NO” 다. 이는 NBA는 물론 데이빗 스턴 커미셔너의 명성에도 크게 해를 입힐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스턴은 수년간 NBA의 세계화를 주장해왔다. 그리고 그 계획을 조금씩 현실화시켜왔다. 몇몇 NBA 팀들은 트레이닝 캠프와 시범경기를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서 실시했으며, NBA 스타들이 꾸준히 중국과 우리나라 등을 방문했기 때문이다. 또한 NBA는 NBA 정규리그 중계권인 NBA League Pass를 우리나라를 포함해서 각국에 팔아서 이익을 봤다. 이는 NBA가 현지 팬들만이 아닌 타국의 팬들까지 인정한다는 의미다. 이런 상황에서 타국 팬들의 온라인 투표를 제한한다면 수많은 팬들의 원성을 살것이며 이는 NBA의 명성에 큰 타격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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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다시 이 지엔리엔으로 돌아가 보 자.현재 그는 동부지구 올스타전 포워드 부문 득표 3위를 달리고 있다. 그러나 득표수 중 대부분이 중국 네티즌들 덕분(?)인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중국인들에게는 자국의 스타가 NBA 올스타전에 출전하는 모습을 보고싶어 할 것이다. 현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활약하고 있는 박지성의 활약을 보고싶어 하는 대한민국 국민들처럼.

물론 예외는 있다. 마이클 조던은 은퇴 후 워싱턴 위저즈에 복귀하는 동시에 올스타전에 선발되었다. 하지만 그는 온라인 득표수가 아닌 감독추천에 의해 올스타전에 선발되었다. 마이클 조던의 그해 성적만 본다면 어쩌면 그는 올스타감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의 활약상이 최고급의 수준이라고는 말하기 어려운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NBA 역사상 최고의 선수였고 황제의 복귀와 동시에 그를 올스타전에서 보고 싶어하는 팬들이 많았다. 비록 황제의 귀환이라는 메리트가 있었지만 그동안 쌓아둔 업적과 그의 나이를 고려하면 그의 올스타전 출전은 당연하다고 볼 수도 있다. 또한 같은 동부지구 올스타전 선발 라인업에 포함된 선수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주전 자리를 조던에게 양보하겠다며 황제에 대한 예우를 갖추었다.
결국 조던은 올스타전에 당당히 선발로 출전했고 많은 팬들은 그의 선발출전에 흡족해 했다. 하지만 이 지엔리엔의 출전은 조던의 예와 같이 적용해서는 안된다. 그가 그동안 NBA에 보여준게 있는가? 그는 농구 황제도 아니며 MVP 나 All-NBA First Team등 수상 한번 못해본 수준 미달의 2년차다. 그의 현재 기량은 당시 조던의 기량에 비교할 때 훨씬 떨어진다. 만약 이 예를 들어 이 치엔리엔의 올스타전 출전을 지지한다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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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지엔리엔과 NBA는 커다란 숙제를 안고있다. 만약 이 지엔리엔이 동부 포워드부문 득표에서 케빈 가넷을 제치고 새롭게 2위로 등극한다면 그는 올스타전에 뛰어야 한다. NBA가 만들어 놓은 올스타전 선발 제도 때문이다. 하지만 백조 사이에 까마귀가 뛰어노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중국 팬들을 제외한 다른 팬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십중팔구 이 지엔리엔이 올스타전에 뛰는 것을 좋게 보지는 않을 것이다.

NBA 역시 처지는 마찬가지다. 이 문제를 어떻게 수습하냐에 따라 팬들의 반응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NBA는 어떻게든 팬들의 원성을 사게되는 처지에 놓여있다. 단, 이 치엔리엔이 득표율 2위를 차지했을 때의 상황이긴 하지만. 만약 이 치엔리엔이 득표수 2위를 차지했다고 가정해보자. 과연 NBA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NBA가 공언한 제도를 따라 이 지엔리엔에게 동부지구 올스타 선발 한자리를 내줘야 한다면 이는 중국팬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팬들의 원성을 사게 될 것이다. 이 지엔리엔의 퀄리티는 다른 올스타 레벨 선수들에 비해 극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필자의 주장대로 NBA가 과감히 이 치엔리엔을 올스타전에서 제외한다면 중국 팬들의 비난이 쏟아질 것이다. 여기서 필자가 NBA에게 제시할 수 있는 한가지 방법이 있다. 만약 이 지엔리엔이 동부지구 포워드 부문에서 득표수 2위를 차지했다면, NBA가 최종 득표순위를 발표하기 전에 그 결과를 교묘히 바꾸는 것이다. 이 방법은 이 지엔리엔을 올스타전 출전에 제외시키는 한편, 팬들의 비난을 최소화 할 수 있을것이다. 다만, 이 방법이 매해 통할지는 미지수다.

필자는 여러 칼럼을 통해 NBA의 흥미요소를 강조해 왔다. 현재의 상황 역시 NBA의 또다른 흥미요소라고 할 수 있다. 남은 올스타전까지 이 상황의 전개를 지켜보는것 역시 또다른 재미가 아니겠는가? 필자 역시 NBA와 이 지엔리엔이 이 어려운 숙제를 원만하게 풀어나가길 기대하면서 이 칼럼을 마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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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A의 메카 뉴욕 시티에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30개 구단중 연봉 지출 1위를 달리고있는 뉴욕 닉스에서 가장 많은 연봉을 받고있는 선수가 단 한 경기도 뛰지 못한 채 벤치를 지키고 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스테반 마버리.
한때 NBA를 대표하는 공격형 포인트가드였던 마버리였지만 올시즌 단 한번도 코트를 밟지 못했다.

그의 몸상태에 문제가 있어서도 아니다.
그의 결장 사유는 다름아닌 구단과의 불화 때문이다.
작년 부상으로 시즌 대부분을 벤치에서 지킨 마버리는 올 시즌을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피닉스에서 영입된 댄토니 감독의 영입을 제일 먼저 반긴 선수이기도 했다.
하지만 댄토니 감독은 시즌 전, 마버리는 자신의 계획에 없다고 공언했으며 프리시즌 경기에서도 아주 짧은 출전 시간만을 마버리에게 할애했다. 마버리는 굉장한 허탈감을 느꼈을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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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것은 비극의 시작에 불과했다.
닉스는 마버리에게 트레이드나 웨이브 대신 바이아웃을 제시했다. 바이아웃(Buy-out) 이란 선수 연봉의 일부분만을 지급하고 계약을 해지하는 것이다. 뉴욕은 페이롤을 줄이면서 마버리를 FA로 풀어주려는 복안이었고, 이것이 닉스 구단에게는 최선의 방법이기도 했다 (닉스가 마버리를 웨이브 하려면 마베리에게 총 연봉을 고스란히 지불해야 한다. 또한 트레이드 역시 선수들간의 연봉이 어느정도 맞아 떨어져야 가능함으로, 웨이브나 트레이드 둘다 닉스의 페이롤을 줄이지 못한다)

마버리의 올시즌 연봉은 2290만불에 달한다. 닉스는 처음에는 마버리에게 적은 바이아웃 액수를 제시했다. 하지만 마버리는 자신을 뛰게하던지, 아니면 웨이브를 하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결국 닉스가 마지막으로 제시한 바이아웃 액수는 그의 연봉보다 100만불 낮은 2190만불이었다. 즉, 쉽게 말하자면 닉스는 마버리에게 총 연봉보다 100만불이 낮은 2190만불을 줄테니 계약을 해지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닉스는 쓰지도 않을 마버리에게 고액의 연봉을 전부 지불하고 내쫒느니, 몇푼이라도 아끼자는 심정에서 파격적인 바이아웃 조건을 내걸었다. 하지만 마버리는 이것마저 거절하였다.

그럼 마버리의 진심은 어디에 있는것인가? 코트에 다시 돌아올 생각이 없는것인가?
아니면 받을연봉 다 받겠다는 심산으로 땡깡을 부리는것인가?
하지만 우리는 마버리의 자존심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마버리는 시즌 전 여름동안 재활훈련을 열심히 해왔던걸로 알려져 있다.
부상에서 돌아와 팬들 앞에서 닉스를 이끄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특히 댄토니의 런앤건 시스템은 공격형 가드인 마버리에게 최적의 시스템일 수도 있을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희망사항들은 댄토니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결국 마버리는 자신보다 실력면에서나 연봉면에서나 떨어지는 선수들이 주전으로 도약하는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마버리의 눈에는 자신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은 채 나아가는 닉스의 행보가 좋게 비춰질리 없다. 또한 바이아웃은 구단과 선수간의 합의가 있어야 한다. 결국 선수측에서 하기 싫으면 그만이라는 뜻이다. 결국 마버리는 바이아웃을 포기하고 닉스의 선수로 남기로 결정했다. 결국 웨이브 아니면 트레이드라는 조건으로 닉스와 대립한 것이다. 어찌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결정이기도 하다. 자신의 연봉인 2290만불 중 100만불만 포기하고 FA가 될수 있는 기회를 차버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닉스의 행보 역시 기이한 것은 마찬가지. 닉스는 결국 팀내 최고연봉의 선수에게 연봉을 그대로 지급하면서 그를 벤치에만 앉혀두기로 결정했다. 마버리의 결정에 “맞불”을 놓은것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마버리를 팀 훈련에서 제외시켰고 팀 락커룸과 클럽하우스의 출입 역시 금지시켰다. 마버리는 오직 팀이 원정경기를 나갔을 때만 클럽하우스 출입이 허용된다. 그러나 닉스는 지금까지도 마버리에게 연봉을 꼬박꼬박 지급하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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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버리와 닉스의 무언의 전쟁 도중 댄토니 감독과 마버리 사이의 불화설이 있었다.
닉스와 마버리 간의 협상 도중 마버리가 댄토니의 출전 명령을 거부했다는 것.
진실 여부를 떠나서 이 사건 때문에 마버리와 닉스간의 골은 더더욱 깊어졌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하다. 시즌 도중 닉스와 골든 스테이트 워리어스간의 대형 트레이드가 이루어졌고 닉스의 주전 슈팅가드 자말 크로포드 역시 이 딜에 포함되었다. 디트로이트와의 경기를 앞두고 닉스의 가드진은 부상병동이었고 닉스로 트레이드 된 가드 커티노 모블리 역시 출전이 불투명한 상태였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댄토니는 슈팅가드로써 경기에 투입시킬 선수가 필요했고 결국은 마버리를 경기에 투입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마버리는 디트로이트와의 경기에 출전하지 않았고 닉스는 그 경기에서 패배 했다.

이 상황에 대해 댄토니는 가드진의 상황이 절박하여 마버리에게 경기 투입을 지시했지만 마버리가 단번에 거절했다고 했다. 하지만 마버리의 말은 달랐다. 마버리는 댄토니가 자신에게 “오늘 30분에서 35분 가량의 출전시간이 있으니 경기에 뛰고싶다면 투입시켜 주겠다” 라는 제안을 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마버리는 댄토니가 “오늘 출전한다고 해서 자신이 댄토니의 계획에 다시 합류하게 된것은 절대 아니다” 라고 못박았다고 했다. 결국 계획에도 없는 팀을 위해 뛴다는 자체가 불편해서 그 제안을 거절한 것이라고 했다. 마버리는 결국 예 와 아니오 사이에서 아니오를 선택했을 뿐 이라고 반박했다.

현재 많은 팬들은 마버리를 비난하고 있다.
마버리의 프로의식에 의문점을 던지고 있으며 일부는 마버리를 돈밖에 모르는 고집쟁이라고 몰아붙이고 있다. 하지만 최소한 필자의 눈에는 마버리가 돈때문에 이러한 싸움을 시작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카트리나 피해 복구를 위해 가장 많은 액수의 돈을 기부한 선수중의 하나인 마버리가 과연 돈밖에 모르는 선수일까? 그 외에도 현재 마버리는 수많은 자선 활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자신의 시그내쳐 신발을 15달러에 팔 만큼 돈에 연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왔다.

필자는 마버리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마버리는 엄연히 닉스가 장기 계약을 안겨주고 고용한 선수이며 해마다 계약에 따른 연봉을 지급하기로 계약서에 서명했다. 당연히 마버리는 계약에 명시된 대로 총액을 지급받을 권리가 있으며 이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마버리가 비난받을 이유는 단 하나도 없는 것이다. 닉스의 바이아웃 제안을 왜 마버리가 받아들여야 하는가? 물론 마버리가 닉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닉스에게도, 또한 마버리에게도 좋은 결과를 얻을수 있을것이다. 닉스는 연봉지출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으며 마버리 역시 새로운 팀을 찾아 코트로 복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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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버리가 무조건 바이아웃 협상에 응해야 하는가? 절대 아니다.
이것은 순수한 마버리의 권리이며, 마버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를 행사했을 뿐이다.
마버리의 결단은 비난받을 만한 일이 절대 아니다. 닉스는 마버리와 계약하였으며 이제는 마버리와의 계약을 해지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닉스의 입장이며 마버리는 닉스와의 계약을 중도해지 하고 싶지 않은것이다. 이 결정을 가지고 누가 뭐라고 비난할 것인가? 닉스에게 피해를 입힌다고? 닉스가 마버리에게 입힌 피해 역시 크다.

이 문제의 발단은 마버리도 아니면 댄토니 감독도 아니다. 필자는 이 문제의 시발점을 닉스의 도니 월시 회장이라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댄토니 감독을 영입한것도 월시의 결정이기 때문이다. 가정이지만, 만약 월시가 댄토니가 아닌 다른 감독을 영입했다면 마버리 역시 중용될 수 있을것 아닌가? 댄토니는 마버리를 자신의 계획에서 배제시켰고 닉스는 쓰지않을 마버리에게 높은 연봉을 지급하면서 팀에 잔류시킬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마버리와 바이아웃 협상을 가진게 아닌가.

하지만 마버리 사건때문에 댄토니의 농구 철학이 잘못됬다는 것은 아니다. 댄토니는 팀을 이끄는 감독이며 팀에 대한 전권은 댄토니가 쥐고있다. 댄토니의 철학에는 마버리가 안맞았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문제의 발단은 마버리도, 댄토니도 아닌 바로 닉스의 월시라고 하는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또 한가지 덧붙이자면, 댄토니는 피닉스 감독 시절에도 마버리와 불편한 관계였고 심한 마찰을 일으켰었다. 월시 역시 NBA에 몸담는 사람으로써 이 사실을 알고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시는 댄토니를 닉스 감독으로 영입한 사람이다.

뉴욕 시티의 파국의 최대 피해자는 바로 마버리라고 생각한다. 마버리가 여러 여론들, 그리고 팬들에 의해 마녀사냥을 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버리의 행동 역시 비즈니스 차원에서는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NBA는 비즈니스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구단은 구단대로 이익을 챙기고 선수는 선수대로 또 이익을 챙기는 곳이 바로 NBA라는 곳이다. 마버리의 행동 역시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결정이라고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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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COLUMNS/떠돌이검사 2008. 12. 11. 06:07

악동들의 숨겨진 영향력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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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들 없이는 NBA도 없다”

오래전 NBA 커미셔너 데이빗 스턴이 언론에 했던 말이다.

그렇다. 여타 다른 스포츠 리그들이 그러하듯, NBA 역시 팬 서비스를 중요시 한다. 미국 내 다른 스포츠 리그중에서도 NBA는 특히 팬 서비스에 신경을 많이 쓰는 리그로 거듭나고 있다.

선수들의 의무적 봉사활동, 정장 착용 등 팬들을 위한 여러가지 정책을 시도중에 있다. 이러한 변화에 팬들 역시 나쁘지 않다는 반응이다.

NBA가 근래 들어 여러가지 제도에 변화를 주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NBA의 이미지 때문이다.

그동안 NBA에서 풍겼던 힙합과 갱스터류의 이미지를 순화시켜 더욱 많은 팬들을 끌어모으자는것이 스턴과 NBA의 주 목적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들이 과연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을까? 이 문제는 잠시 후에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필자가 NBA의 이미지 개선 관련 정책을 언급한 이유는 바로 팬 서비스의 아이러니함을 토론해 보고자 함이다.

2000년대 들어 NBA의 이미지는 최악에 이르렀다.

코트 내에서의 격한 싸움이 잦았으며, 코트 밖에서의 여러가지 트러블까지, 선수들은 자신들이 공인이라는것을 마치 잊은 듯 행동하였다. 물론 모든 선수들이 그러한 것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소위 “악동” 들이 NBA의 이미지를 부정적으로 바꿔놓았다.(최소한 스턴은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물론 팬들에게 진정한 농구의 묘미와 맛을 선보이는것이 이상적인 팬 서비스라 할수 있다. 이것과 더불어 팀들간 혹은 선수들간의 라이벌 관계(예: 매직 존슨과 래리 버드), 스타 플레이어들의 탄생(예: 마이클 조던), 신기록 수립 등등, 여러가지 요소들 역시 NBA가 팬들에게 제공하는 서비스이기도 하다. 이 모든것들이 팬들의 NBA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고있다. 좋은 예가 바로 한국의 NBA 팬들이다. 마이클 조던이나 앨런 아이버슨과 같은 스타 플레이어들 때문에 NBA에 발을 들여놓은 팬들이 있는가 하면, 농구 자체의 아름다움에 감탄해 NBA를 두드려보는 팬들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필자가 생각하는 NBA의 또다른 흥미유발 요소가 있다.

그것은 바로 “악동” 이다.

실제로 신체접촉이 불가피한 농구같은 스포츠에서는 선수들간의 말다툼, 몸싸움, 크게로는 난투극이 종종 일어난다. 선수와 심판간의 트러블 역시 유발될 수 있으며 팬들과 선수들간의 다툼 역시 일어날 수 있다. 코트 외에서도 마찬가지다. 구단과 선수간의 트러블이 있는가하면, 서로 불만을 품는 선수와 감독들 역시 우리는 종종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 자주 연결되는 선수들을 우리는 “악동” 이라고 부른다.

실제로 악동 출현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언론이 대중화 된 시대에서는 악동의 일거수일투족이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쉽다. 이들이 일으키는 문제는 NBA 팬들이 아닌 사람들의 이목을 이끌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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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론 아테스트와 한 팬과의 난투극


수년 전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와 인디애나 페이서스 선수들간의 난투극을 기억하는가?

경기 종료 직전 피스톤스의 벤 월러스와 페이서스의 론 아테스트의 몸싸움에서 시작한 이 난투극은 여러 선수들의 주먹다툼으로 번졌고, 결국 아테스트가 팬을 가격하는 사태로 번졌다. 아테스트는 이 사건 이후로 전 경기 출장정지라는 무거운 징계를 받았다.

이 사건은 지금까지도 크게 화자되고있다. 그 사건 이후 한동안 많은 사람들이 그 사건에 관심을 기울였고, 이는 한동안 잠잠했던 NBA의 또다른 흥미로움을 유발했다. 실제로 난투극이 벌어진 이후 몇주동안 NBA 전국방송 시청률이 크게 올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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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시절의 라시드 월러스는 어떠한가? 당시 월러스는 2000-2001 시즌에 40개의 테크니컬 파울을 받는 진기록(?)을 세웠다.

한 시즌이 82경기임을 감안하면, 40개의 테크니컬 파울은 정말 진귀한 기록이다. 월러스를 비롯, 본지 웰스와 데이먼 스타더마이어등 악동 이미지로 굳어버린 선수들이 주축을 이룬 트레일블레이저스를 미국 언론은 감옥이라는 뜻을 지닌 제일블레이저스(Jailblazers) 라고 풍자하곤 했다. 월래스는 농구에 관심없는 사람들도 NBA를 대표하는 악동이라고 알만큼 그 유명세를 떨쳤었다.

팀 내에서의 트러블 역시 대중들에게 노출되곤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앨런 아이버슨이다. 아이버슨은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시절 팀 훈련에 자주 불참하곤 했다. 감독이었던 래리 브라운이 언론에 불만을 토로하자 아이버슨 역시 그 유명한 “Practice? Practice?” 라는 말과 함께 자신은 연습에 불참해도 경기력에는 아무런 영향을 안받는다는 인터뷰를 했었다. 당시 아이버슨은 NBA 최고의 스타였으므로 스타와 감독간의 마찰은 대중들에게도 유명해졌고, 아이버슨을 생각하면 “Practice” 라는 문구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이같이 NBA에서 일어나는 작은 트러블도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물론 악동들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NBA 광팬이 된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하지만 가끔씩 일어나는 트러블은 잠시만이라도 사람들이 NBA에 관심을 가질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다른 스포츠 리그가 그러하듯, NBA의 현실적 목표는 무엇이겠는가? 사람들의 관심을 최대한 끌어모아 이익을 있는대로 창출하는 것이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대로 스타 플레이어, 팀들과 플레이어들간의 상관관계, 순수한 농구의 아름다움 등, 모두 NBA가 제공하는 최상의 팬서비스다. 이것들로 인해 NBA는 오늘날 거대한 팬들을 보유할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악동들 역시 NBA의 인기를 위해 필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가끔씩 터지는 악동들의 기이한 행동들은 팬들에게 새로운 흥미를 제공할 수 있으며, 대중들에게 NBA를 어필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스턴이 원하는 방향은 아니지만 말이다.

현재 NBA가 추구하는 이미지 순화와 악동들이 제공하는 새로운 흥미요소, 스턴이 추구하는 이미지 순화를 통한 팬 베이스를 구축하는 것과 NBA 내외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트러블들이 가져오는 팬들의 관심, 정말 아이러니 한 상황이다.

물론 선수들이 코트 외에서의 트러블로 인해 대중들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없어야 한다. 스티븐 잭슨과 자말 틴즐리는 예전 클럽에서 총기난사 사건에 연류됬었다.

왕년의 리바운드 스타 제이슨 윌리엄스는 총기난사로 인한 살인 혐의를 받기도 했다.

이는 스턴이 제기하는 문제이며, 이로 인해 생긴 NBA의 어두운 이미지는 당연히 순화되어야 한다. 하지만, 농구로 인한, 농구에 관련된 악동들은 팬들에게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해 줌과 동시에 NBA가 농구뿐만이 아닌 심오한 시스템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다.

실제로 NBA는 악동들을 마케팅용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난투극의 주인공 론 아테스트가 학교 교장실로 끌려가는 광고가 있다.

아테스트를 학교의 문제아로 가장한 이 선전은 NBA가 아테스트의 악동기질을 NBA가 제공하는 또다른 흥미요소로 인정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럼 위에 언급했던 문제의 답을 한번 찾아보자.

스턴이 추구하는 이미지 순화만이 NBA가 팬들을 끌어모으기 위한 팬서비스라고 볼수 있을까? 물론 큰 틀에서 볼때 답은 맞다.

하지만 악동은 단순한 필요악이 아니다. 악동은 NBA가 팬들에 제공할 수 있는 특별한 서비스라고 말하고 싶다. 긍정적이던 부정적이던, 악동은 충분히 대중들의 이목을 끌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악동의 출현을 절대 부정적으로 보지 말자. 또다른 볼거리가 생겼다는 시각으로 본다면 NBA를 보는 즐거움이 배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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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는 흑인들의 스포츠라는 말이 있다.

그도 그럴것이, 스피드와 탄력이 중요시되는 농구는 신체적 능력이 유난히 뛰어난 흑인들에게 유리할 수 밖에 없는 스포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1946년, NBA의 출범 이후, 정작 NBA를 주무른것은 흑인이 아닌 백인이었다.(이는 농구 뿐만이 아닌, 미국의 모든 스포츠에 해당된다)

여기서 인종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다.

스포츠가 대중화 되었던 20세기 초중반에는 인종차별이 당연시 되던 사회였다. 백인 우월주의가 판을 쳤으며 흑인들은 항상 백인들의 그늘에 눌려살 수 밖에 없었다.

이같은 사회적 분위기는 스포츠에도 영향을 끼치고 말았다. NBA 출범 이후 수십년간, 각 NBA 구단주부터 시작해 구단 직원, 감독, 코칭스탭, 선수, 그리고 관중들까지 NBA에 관련된 거의 모든 사람들은 백인이었다.

1950년, 척 쿠퍼는 역사상 최초로 NBA 드래프트에서 뽑힌 흑인이었고(그는 보스턴에 의해 뽑혔다) 같은 해 뉴욕의 냇 클리프턴은 NBA 구단과 계약한 최초의 흑인이었으며 역시 같은 해 얼 로이드는 역사상 최초로 코트를 밟게 된 흑인이 되었다. 역사적인 사건이 3번 연달아 터진 1950년 이후, 빌 러셀, 윌트 챔벌레인, 얼 먼로, 윌리스 리드 등 뛰어난 흑인 농구선수들이 차차 등장하게 된다. 러셀과 챔벌레인은 극강의 라이벌로써 NBA의 50년대와 60년대를 장악했고, 먼로와 윌리스 역시 뉴욕에서 무적의 콤비를 이루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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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70년대를 중심으로 수많은 흑인 플레이어들이 등장했고, 80년대들어 흑인들이 리그를 장악하기 시작했다(극히 주관적인 생각이다. 다른 시각에서 보는 분들 역시 많으리라 믿는다.) 웬만한 농구팬들이라면 알만한 마이클 조던, 매직 존슨, 레지 밀러, 패트릭 유잉, 하킴 올라주원, 찰스 바클리, 칼 말론 등, 리그를 점령했던 수많은 흑인 선수들이 80년대에 등장했으며 이같은 현상은 90년대, 그리고 현재까지 이어졌다.

선수들 뿐만이 아니다. 흑인 감독과 코칭스탭 역시 현재의 NBA에서는 기이한 현상이 아니다. 심지어 구단 프론트 오피스 역시 흑인들이 차지하고 있는가 하면, 흑인들이 경기를 중계하는 현상까지 볼수 있다. 샬럿 밥캣츠의 구단주인 마이클 조던,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의 단장 조 듀마스, TNT 중계석의 레지 밀러, 찰스 바클리, 케니 스미스가 좋은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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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필자는 흑인 플레이어들의 증가를 이야기 하자는게 아니다.

NBA에서 흑인들의 비율이 많아졌지만 반면 백인들은 어떤가? 특히 순수 백인(여기서 순수 백인이란 미국 국적의 백인들을 말한다. 말 그대로 “Pure White American”) 플레이어들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90년대를 기점으로 미국 출신의 순수 백인들이 리그에서 사라지고 있다. 과연 이 시점에서 제 2의 래리 버드를 찾을수 있을것인가? 필자는 거의 불가능이라고 말하고 싶다.

실로 보스턴의 레전드 래리 버드와 케빈 맥해일, 유타 재즈의 존 스탁턴 이후 뚜렷한 족적을 남긴 백인 선수가 없는게 사실이다. 피닉스의 스티브 내쉬가 백인이기는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미국출신 “순수 백인”이 아니므로 이 논의에서는 배제하겠다.(내쉬는 캐나다 출신이지 미국 출신이 아니다)
 
제이슨 키드나 마이크 비비는 혼혈이지 순수 백인은 아니다.

또 생각나는 선수가 있는가? 댄 멀리? 제프 호나섹? 그들은 실력있는 슈터였지 리그를 주름잡는 대형 선수는 아니었다. 마크 프라이스? 물론 그는 뛰어난 포인트 가드였다. 하지만 그가 혼자서 경기를 뒤집을 수 있는 능력을 지녔을까? 필자는 아니라고 본다. 빌 레임비어? 마크 이튼? 좋은 센터였다. 하지만 그들은 조력자에 불과했다. 스콧 스카일스? 한경기 30 어시스트라는 불멸의 기록을 쓰기는 했지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저 준수한 포인트가드였을 뿐.

위에 언급한 선수들은 80년대 혹은 90년대에 활동했던 선수들이었다.

그럼 2000년대로 가보자. 안타깝게도, 2000년대에는 아예 순수 백인 선수들의 베이스가 없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순수 백인 플레이어 그 숫자 자체가 적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현재의 NBA에는 뛰어난 순수 백인 플레이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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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잠시나마 반짝였던 순수 백인 플레이어는 여럿 있었다.

키쓰 밴 혼은 리그 입성 후 첫 2년동안 굉장한 임팩트를 선보이며 포스트 래리 버드라는 찬사를 받았었다. 하지만 그 이후 밴혼은 롤 플레이어로 전락했고 결국은 쓸쓸히 리그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올 시즌을 앞두고 은퇴한 제이슨 윌리엄스 역시 비슷한 길을 걸었다. 화려한 패스를 중심으로 순식간에 인기를 얻었지만 그 역시 조용히 사라졌다. 샬럿 밥캣츠의 아담 모리슨 역시 래리 버드의 후계자라는 언론의 평가를 받으며 리그에 입성했지만 벌써부터 유리몸 기질을 보이며 아무런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과연 현재 뛰고있는 순수 백인플레이어들 중 특출한 능력을 지닌 선수가 한명이라도 있는가? 그럼 올스타급 백인 플레이어들은? 좀더 기준을 낮춰서 풀타임 주전급의 백인 선수를 찾아보라 하면 그 숫자는 몇 안되는게 현실이다.

현 시점에서 두각을 보이는 백인 선수들을 꼽으라면 미네소타의 마이크 밀러, 뉴욕의 데이빗 리, 유타 재즈의 카일 코버, 포틀랜드의 스티브 블레이크, 세크라멘토의 스펜서 허즈 정도가 되겠다. 특히 필자는 마이크 밀러를 현재 NBA에서 뛰고있는 최고의 순수 백인 플레이어라고 칭하고 싶다. 그는 정확한 슈팅력과 탁월한 시야를 지녔으며, 6-8의 사이즈를 이용한 리바운딩 능력까지 지니고 있다. 하지만 과거 리그를 점령했던 백인 선수들의 이름값에  비해 마이크 밀러라는 이름은 꽤 많이 초라해 보인다.

순수 백인 플레이어들이 사라진다는 것은 절대 나쁜 현상이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할수 있을까. 인종 차별을 하려는것이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필자가 보기에 가장 이상적인 NBA는 미국 국적의 선수들, 즉 흑인들과 순수 백인들이 함께 리그를 호령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NBA는 흑인들만의 잔치가 되어버렸다.

그럼 왜 순수 백인 플레이어들이 NBA라는 무대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일까?

그 첫번째 이유는 바로 운동능력의 차이다.

흑인들에 비해 백인들의 운동능력은 상당히 떨어진다. 힘과 탄력이 요구되는 NBA에서 백인들이 밀릴수밖에 없다. 선천적 능력에서의 차이는 극복하기 쉽지 않은것이 현실이다.

그 두번째 이유는 바로 환경이다.

대부분의 흑인 농구선수들의 배경은 가난과 함께했다. 흑인들의 가정 형편은 백인들에 비해 좋지 않다는것이 정설이다. 농구는 공과 골대만 있으면 즐길 수 있는 운동이다. 그다지 많은 비용이 들어가지 않는다. 이렇기에 흑인들이 농구라는 스포츠에 몰릴 수밖에 없고 많은 부를 얻기위해 농구에 인생을 거는 흑인들이 많다. 하지만 가정형편이 좋은 백인들은 농구 외에도 접할수 있는 스포츠가 많아서 농구 외 다른 스포츠 종목으로 빠져나간다고 한다 (물론, 이는 평균적 이론일 뿐, 모든 백인들의 형편이 좋은것은 아니다) 이는 유망주 발굴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점점 많은 흑인들이 농구에 몰리면서 자연스레 실력있는 유망주도 대부분이 흑인들 사이에서 발견되곤 한다. 결국 많은 대학 농구부들이 흑인 유망주들을 스카우트 해버리는 현상이 벌어졌다. 실력있는 백인 유망주가 있다면 당연히 뽑아야 하겠지만, 그 숫자가 흑인 유망주들에 비해 적기 때문에 어쩔수 없는 선택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제 2의 래리 버드를 볼 수 있을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 역시 극히 낮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을 막을 방법은 없다. 왜냐하면 현재의 르브론, 코비 브라이언트, 앨런 아이버슨 등 신화를 써내려가고 있는 선수들은 전부 흑인이기 때문이다. 이들을 목표로 하는 흑인 유망주들 역시 많이 양산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백인들은 어떠한가? 과연 현재의 순수 백인 플레이어들 중 롤 모델로 삼을 만한 선수가 있는가? 그렇지 않다. 결국 NBA가 해야 할 일은 기다리는 것 뿐이다.

앞으로 제 2의 래리 버드, 제 2의 존 스탁턴이 출현하기만을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NBA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직도 많다. 만약 제 2의 래리 버드가 훗날 출현한다면, NBA는 적극적인 선수 마케팅으로 이 백인 플레이어들을 돋보이게 하고 감싸줘야 한다. 인종차별적 발언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흑인과 백인이 어우러져 리그를 호령했던 80년대 그리고 90년대의 NBA로 회귀하려면 백인 선수들에 치중된 마케팅 전략으로 선회할 수 밖에 없다. 이 역시 필자가 원하는 것이다.

NBA는 미국인들이 창시한 프로 리그다. 물론 NBA가 흑인들만의 잔치로 이어지는것은 나쁘지 않다. 현재 NBA 커미셔너 데이빗 스턴은 선수들의 인종적 다양성, 그리고 NBA 세계화를 강조하고 있다. 흑인, 아시안, 유러피언, 그리고 백인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NBA를 빛낸다는것,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일까. 현재의 NBA는 코비, 르브론, 가넷, 던컨, 아이버슨등의 흑인 스타들, 아시아를 대표하는 스타 야오밍, 그리고 파우 가솔, 더크 노비츠키등의 유러피언 스타들까지..다양성과 세계화에 가까워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미국을 대표하는 백인 스타가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았다는게 안타깝다.

기다림은 미덕이라고 했던가. 훗날 제 2의 래리 버드가 나타나 조금 더 리그를 흥미롭게 했으면 하는 바램으로 이 칼럼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