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돌했지만 한편으론 순진했던 한 NBA 선수가 있다.
아니, 있었다 라고 하는게 더 좋은 표현이겠다. 그는 이미 NBA에서 더이상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도 그가 NBA에서 뛰고 있는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건 왜일까.
2000년대 NBA 팬이라면 프랜시스의 화려한 전성기를 기억 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그 위치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아는 이는 드물다. 한 팀의 프랜차이즈로 영원히 남을 것만 같았던 특별한 재능, 바로 2000년대 공격형 포인트가드를 대표했던 스티브 프랜시스의 농구인생을 재조명 해보고자 한다.
불쌍한 청개구리
프랜시스는 1977년 2월 21일 워싱턴 DC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 프랜시스의 친아버지는 프랜시스가 2살때 가족을 버리고 떠났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어머니인 브렌다 윌슨이 혼자 한 가정을 책임져야 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증오했던 프랜시스에게 어머니란 존재는 소중함 그 자체였다.
유년시절을 매릴랜드 주의 타코마 파크 시티에서 보낸 프랜시스는 9살부터 농구를 시작했으며, 인근 공원과 소방서의 농구코트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녹록치 못한 가정형편 때문에 9살의 어린 나이에 아르바이트 생활을 시작했지만 농구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그는 외소한 체구를 지닌 말라깽이였다.
천부적인 운동능력이 돋보이기는 했으나, 작은 키 때문에 자유투라인 밖에서의 슛은 항상 에어볼이 되기 일쑤였다고 한다. 작은 키 덕분에 픽업게임마다 포인트가드 외의 포지션은 아예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타 NBA 선수와는 다르게 프랜시스는 정식 농구 경험은 그리 많지 않다.
고등학교 입학 전까지 내내 길거리에서 농구를 했던 프랜시스는 고등학교에 입학하자 마자 농구부를 지망했지만, 나쁜 성적때문에 학교측은 프랜시스의 경기 출전을 불허했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질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며 주기적으로 학교를 무단결석하였고 결국 농구부에서 퇴출되었다.
10학년때 다시 농구부에 입문한 프랜시스는 그의 첫 정식 농구 경험을 하게 된다. 그는 주로 후보로 출전하며 경기경험을 쌓았지만 그 1년이 끝이었다. 당시 문제아였던 프랜시스는 11학년때 나쁜 성적과 더불어 여러번 패싸움에 연루되며 퇴학당했고 결국 여러번 전학을 가야했다. 하지만 그가 가는 학교마다 프랜시스의 농구부 입문을 거부했는데 농구를 사랑했던 프랜시스에게 농구를 할 수 없는 현실은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다.
하지만 더 큰 충격은 프랜시스의 고등학교 졸업반(12학년) 때 찾아왔다.
프랜시스의 어머니 브렌다 윌슨이 암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집안 형편때문에 병원 한번 가보지도 못한 채, 프랜시스를 떠나버린 것이었다. 그것은 가히 큰 충격이었고 졸지에 고아가 된 프랜시스는 그 이후로 농구공을 잡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손에 자란 프랜시스, 아버지를 모른채 어머니만을 보고 살아온 그에게 어머니를 잃은 아픔은 너무나도 컸다. 이후 그는 방황했고, 결국 고등학교를 자퇴했다. 물론, 농구공은 그의 손에 없었다.
프랜시스의 1년이란 정식 농구경험은 팀 전술, 체계적인 훈련, 기본기등을 모두 습득하기에는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었으며 고등학교 자퇴 후 그에게 남은것은 제대로 된 코칭이 아닌 길거리에서 습득한 그만의 스타일이었다.
프랜시스는 결국 NBA 선수들 대부분이 경험했던 ABCD 캠프, AAU 토너먼트, 맥도날드 하이스쿨 올아메리칸 게임등은 고사하고, NCAA 1부리그 대학 팀들의 스카우트도 제의받지 못한 채 고등학교 생활을 마무리 하게된다.
농구를 버릴 수 없었던 청년
모든 영웅들은 한번씩 역경을 딛고 일어선다. 프랜시스 역시 비슷한 유형의 영웅이었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3개월간 방황했던 프랜시스가 다시 농구를 시작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 3개월 동안 프랜시스의 키는 부쩍 커졌다)
프랜시스는 매일 인근 소방서의 농구코트에서 픽업게임을 하며 그의 진가를 발휘했다. 이후 프랜시스는 길거리 농구의 레전드로써 그 유명세를 떨쳤다.
당시 매릴랜드, 버지니아, 워싱턴 DC에서 수많은 길거리 농구선수들이 소방서를 찾아와 프랜시스에게 도전했지만 단 한명도 그를 이긴적은 없다고 한다. 그만큼 길거리 농구에서의 프랜시스는 독보적이었다.
그 와중 프랜시스의 재능을 알아본 매릴랜드 소속 AAU의 감독 루 윌슨은 프랜시스에게 팀 합류를 요청한다. 그는 프랜시스를 직접 찾아와 길거리 농구가 아닌 더 높은 세계로 도전하자고 권유했고, 프랜시스는 다시한번 정식 농구에 도전해보고 싶은 생각에 흔쾌히 승낙했다.
이 결정은 결국 프랜시스의 인생을 바꿔놓게 된다.
루 윌슨의 AAU 팀은 플로리다의 AAU 토너먼트에 참가했는데, 수많은 대학 코칭스탭들 앞에서 프랜시스는 맹활약 하며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경악케 했다. 스카우팅 리포트는 물론, 고등학교 유망주 리스트에도 없던 한 선수가 혼자 상대팀을 초토화 시켰으니 그럴만도 했다. 토너먼트 직후 텍사스에 위치한 샌 자신토(San Jacinto) 쥬니어 칼리지는 프랜시스에게 농구 장학금을 제의했다.
단 한번도 매릴랜드를 떠나본 적이 없던 매릴랜드 토박이 프랜시스는 결국 농구를 하기위해 텍사스로 항했다.
샌 재신토 쥬니어 칼리지 농구부는 NJCCA(전미 대학 농구리그인 NCAA의 하부리그) 에 속해있었다. 프랜시스로써는 첫 대학 농구경험이었지만, 여전히 NJCCA 무대는 그에게는 좁은 세계였다. 프랜시스는 샌 재신토 쥬니어 칼리지를 시즌 36연승에 NJCCA 토너먼트 결승전까지 이끌었다. 비록 샌 재신토 쥬니어 칼리지는 결승전에서 패했지만, 스티브 프랜시스는 대학농구 관계자들의 이목을 끌었다.
샌 재신토에서의 짜릿한 1년을 뒤로하고 스티브 프랜시스는 또다른 NCJAA 소속의 쥬니어 칼리지로의 편입을 결정했다. 프랜시스의 다음 행선지는 매릴랜드 주의 알레거니(Allegany) 쥬니어 칼리지였다. 프랜시스의 전설은 알레거니에서도 계속되었다. 그는 알레거니의 30연승을 이끌었고 이는 알레거니 대학 농구부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 무패 시즌이었다 (시즌 30승 무패) 매릴랜드 주는 프랜시스의 이름으로 들썩거렸고, 결국 그 이름은 매릴랜드 대학의 개리 윌리엄스 감독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결국 개리 윌리엄스 감독은 알레거니 쥬니어 칼리지의 홈 경기를 직접 관전하러 왔고, 그 경기에서 프랜시스는 단 하나의 샷도 놓치지 않는 활약을 펼쳣다. 윌리엄스 감독은 시즌 후 프랜시스에게 농구 장학금을 제의했고 알레거니에서의 1년 후 프랜시스는 매릴랜드 대학의 윌리엄스 사단에 합류하게 된다.
매릴랜드의 돌격대장, 전국구 스타가 되다.
2년간의 NJCCA 생활을 청산하고 드디어 프랜시스는 NCAA(전미 대학 농구리그)라는 더 큰 무대에 설 기회를 얻었다. 때는 바로 1998년.
NJCCA에서 맹활약 했다지만 NCAA 경험이 전무했던 프랜시스의 실력을 과소평가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프랜시스의 가치를 인정받는 데에는 단 10경기만이 필요했다.
등번호 23번의 매릴랜드 주전 슈팅가드 스티브 프랜시스를 중심으로 매릴랜드 대학교는 첫 10경기에서 10연승을 거뒀다. 그중 전미 최고의 팀중 하나였던 스탠퍼드 대학을 상대로 거둔 승리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1998-1999 시즌 매릴랜드는 스티브 프랜시스, 로니 백스터, 후안 딕슨등이 팀의 주축이었다. 시즌이 지날수록 프랜시스의 주가는 상승했고, 매릴랜드 역시 전국구 강호로 거듭났다.
경기당 18점 5어시스트를 기록한 프랜시스는 비록 매릴랜드를 NCAA 전국 토너먼트 (March Madness) 우승으로 이끌지는 못했지만 2nd Team All-American, John Wooden Award / Naismith’s Player of the Year Award 대상 후보에 이름을 올리는등 각종 개인 영예를 휩쓸었다.
**당시 매릴랜드 대학은 16강에서 론 아테스트의 세인트 조셉 대학과 연장까지 가는 사투끝에 석패했다.
명실부상 대학 최고의 선수중 한명으로 인정받은 스티브 프랜시스는 시즌 후 NBA 드래프트에 신청하며 결국 매릴랜드와의 결별을 결정했다. 지난 3년간 3개의 대학이란 험난한 길을 걸어왔던 프랜시스가 마지막에 빛을 보게되는 순간이었다.
프랜시스의 험난한 NBA 입성
1999년 NBA 드래프트의 1순위 지명자 후보는 엘튼 브랜드와 스티브 프랜시스의 양강체제였다. 두명 다 1순위로써 손색이 없었지만, 프랜시스는 특히 1순위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수많은 역경을 딛고 일어섰다는 프라이드도 그 이유중 하나였겠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밴쿠버 그리즐리스에서 뛰기 싫었기 때문이다.
드래프트 전부터 많은 NBA 팀들은 스티브 프랜시스에 관심을 표명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밴쿠버 그리즐리스였다. 당시의 밴쿠버는 리그 최약체 중 하나였고 이미 1998년 포인트 가드 마이크 비비를 지명했던 팀이었다. 게다가 프랜시스의 집이 있는 매릴랜드와의 거리는 어마어마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밴쿠버 그리즐리스에서 뛰기 싫다는 프랜시스의 입장은 확고했다. 드래프트 이전 프랜시스는 언론에 공개적으로 밴쿠버가 자신을 뽑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내용의 인터뷰까지 하며 공개적으로 자신의 심정을 드러냈다.
프랜시스가 얼마나 그리즐리스를 거부했는지는 이 일화를 통해 알 수 있다.
드래프트 이전, 프랜시스는 시카고 불스(1위픽)와 샬럿 호넷츠(3위픽)의 개인 워크아웃에 자발적으로 참여했지만 그리즐리스와는 개인 워크아웃을 가지지 않았다.
당시 그리즐리스의 감독 브라이언 힐과 단장 스튜 잭슨은 프랜시스를 보기위해 직접 매릴랜드로 와야했다. 하지만 프랜시스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거의 모든 슛을 일부러 미스했다고 한다.
프랜시스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리즐리스는 끝내 1999년 NBA 드래프트에서 2순위로 스티브 프랜시스를 지명했다. 프랜시스는 즉각 그리즐리스와의 계약을 거부했고 트레이드를 요청했다. 많은 여론들의 비판이 있었지만 프랜시스는 완고했다.
결국 밴쿠버 그리즐리스는 휴스턴 로켓츠와 올랜도 매직을 포함한 삼각 트레이드를 통해 프랜시스를 휴스턴 로켓츠로 이적시켰다 (밴쿠버, 휴스턴, 올랜도간의 삼각 트레이드는 총 11명의 선수들이 포함되었다).
1999년 드래프트 이후, 프랜시스와 밴쿠버간의 신경전은 꽤나 큰 이슈를 불러일으켰지만 결국 프랜시스는 어렵게나마 휴스턴 로켓츠와 3년 루키계약을 맺으며 NBA에 입성하게 되었다.
겁없는 신인 프랜시스의 화려했던 루키 시즌
트레이닝 캠프때 당시 휴스턴 로켓츠의 루디 톰쟈노비치 감독은 프랜시스를 보자마자 이 말을 건넸다고 한다.
“스티브, 너에게 공을 줄테니, 한번 마음껏 달려봐.”
그리고 프랜시스는 거침없이 달렸다.
상대가 누구던간에 그는 폭발적인 스피드와 극강의 운동능력으로 상대를 농락했다.
특히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있었던 프랜시스는 매 경기 엄청난 플레이로 매일 밤 하일라이트를 장식했다. 어느순간부터 크로스오버와 인 유어 페이스 덩크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있었다.
그는 1999-2000 시즌의 신인왕을 엘튼 브랜드와 공동수상했고, 2000년 NBA 올스타 덩크 콘테스트에서 2위를 기록하며 (1위는 전설적인 덩크 퍼포먼스를 보였던 토론토 랩터스의 빈스 카터) 그의 실력을 입증했다. 또한 그는 당시 NBA 역사상 경기당 15점-5리바운드-5어시스트를 기록한 7번째 신인이었다 (프랜시스의 루키 기록은 경기당 18.1점-5.3리바운드-6.3어시스트)
프랜시스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로켓츠는 시즌 39승 43패를 기록하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비록 하킴 올라주원과 찰스 바클리가 있었지만 그들은 이미 리그를 호령하던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또한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로 트레이드 되었던 스코티 피펜의 공백 역시 컸다. 팀 상황상 프랜시스가 팀의 중심이 될 수 있었지만, 반대로 그를 보좌할 선수들이 그의 절친 커티노 모블리를 제외하면 없다는 것이 팀의 마이너스 요소였다.
2000-2001 시즌의 프랜시스는 소포모어 징크스와는 관계없는 엄청난 활약으로 휴스턴 로켓츠를 시즌 45승 37패로 이끌었다. 비록 팀은 플레이오프 진출에는 여전히 실패했지만, 프랜시스는 경기당 19.9점, 6.9리바운드, 6.5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향상된 경기력을 선보였다.
하지만 로켓츠의 플레이오프 진출은 멀기만 했다.
프랜시스의 세번째 시즌이었던 2001-2002 시즌, 프랜시스는 부상으로 57경기밖에 뛰지 못했으며 경기당 21.6점, 7.0리바운드, 6.4어시스트라는 훌륭한 성적을 남기긴 했지만 팀 성적은 28승 54패로 추락했다. 굴욕적인 팀 성적이었지만 이는 바로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고 만다. 휴스턴은 2002년 NBA 드래프트에서 1순위 지명권리를 얻게되었고, 이는 결국 프랜시스와 야오밍의 만남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Stevie “Franchise”, Ming “Dynasty”와 만나다.
2002년 여름, 1순위 지명권을 얻은 휴스턴 로켓츠는 야오밍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복잡한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CBA(중국 농구협회)와 야오밍의 소속팀 샹하이 샥스가 야오밍의 NBA 진출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CBA와 샹하이 샥스는 야오밍을 보내는 적절한 댓가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현대 축구에서 자주 발생하는 일종의 “이적료”를 원했다).
비록 프리드래프트 캠프 참석과 당시 2순위 지명권을 가지고 있던 시카고 불스와 비공개 워크아웃을 가졌다고는 했지만, 그다지 인상깊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야오밍(당시 야오밍은 NBA 진출이 불확실 함에도 사비를 들여 미국에 입국했고, 입국하자마자 바로 다음날 워크아웃을 가졌기 때문에 자신의 진가를 제대로 발휘 할 수 없었을 것이다)에 대해 스티브 프랜시스도 비관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당시 스티브 프랜시스는 휴스턴의 단장 캐롤 더슨에게 1순위 픽을 트레이드 해서 베테랑 선수를 보강하자고 건의했을만큼 야오밍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야오밍이 휴스턴에 지명되자 그를 가장 먼저 반겼던 이도, 미국생활 적응에 가장 많은 도움을 준 이도 바로 스타 플레이어 스티브 프랜시스였다. 훗날 이 둘은 사이좋게 2003년, 2004년 NBA 올스타전에 나란히 서부지구 선발로 출전하게 된다.
그가 야오밍에 대해 한 이 한마디는 프랜시스의 따뜻한 동료애를 대변한다.
“저는 팀의 프랜차이즈(franchise, 프랜시스의 별명)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야오는 왕조(dynasty)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야오밍의 합류도 로켓츠를 바꾸지는 못했다.
2002-2003 시즌, 프랜시스는 81경기에 출전하며 평균 21점, 6.2리바운드, 6.2어시스트, 1.7스틸을 기록하며 팀을 이끌었지만 결국 로켓츠는 시즌 43승 39패로 다시한번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한편 야오밍은 루키로써 평균 13.5점 8.2리바운드의 나쁘지 않은 시즌을 보냈지만 체력과 몸싸움이 아직 NBA 레벨이 아니라는것이 증명되었다.
문제아 프랜시스 vs 엄격한 밴 건디
2002-2003 시즌 도중 건강문제로 인해 중도 하차 했던 톰쟈노비치 감독은 시즌 직후 방광암이 발견됨에 따라 감독직에서 사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임은 팻 라일리의 후계자이며 전 뉴욕 닉스 감독이었던 제프 밴 건디였다.
밴 건디는 공수 밸런스를 가장 중요시 여겼으며 팻 라일리의 후계자 답게 센터중심의 하프코트 오펜스의 신봉자였다. 수비를 강조하던 그는 팀의 거의 모든 세트 플레이를 직접 지시하는 스타일의 감독이었기에 전술에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 팀의 공격을 해결하던 스티브 프랜시스와는 전혀 궁합이 맞지 않았다.
밴 건디는 예상대로 휴스턴의 시스템을 개편했고 서서히 팀의 중심은 프랜시스에서 야오밍으로 바뀌었다. 프랜시스의 영향력은 여전했지만, 더이상 그는 팀 공격의 선봉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는 프랜시스에게는 너무나 큰 변화였다. 프랜시스의 볼 점유율은 현저히 줄었고, 그의 슈팅 시도횟수 역시 줄었다. 결국 밴건디와 함께 한 2003-2004 시즌의 프랜시스는 전반적으로 스탯이 모두 하락했다. (평균 16.6점, 5.5리바운드, 6.2어시스트)
하지만 프랜시스와 밴 건디 간의 문제는 단 한번도 수면 위로 떠오른 적이 없다. 프랜시스는 새로운 팀 시스템에 적응하기 위해 밴 건디가 주문한 “스타일의 변화”를 위해 노력했으며 밴 건디 역시 프랜시스를 “팀을 위해 희생하는 그가 고맙고 존경스럽다”라는 말로 화답했다. 프로 선수와 감독으로써 프랜시스와 밴 건디는 서로를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둘 사이에 충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팀의 질서를 중요시하는 밴 건디는 성실하지 못한 프랜시스의 훈련태도를 못마땅해 했으며 프랜시스 역시 세세한 규칙까지 중요시하는 밴 건디의 엄격한 팀 관리를 부담스러워 했다. 프랜시스가 프로 미식축구(NFL) 올스타전을 관전하기 위해 원정경기를 떠나는 팀과 합류하지 않은 사태는 밴 건디의 프랜시스에 대한 마지막 신뢰마저 앗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시즌 도중 프랜시스와 밴 건디를 둘러싼 여러 잡음에도 불구하고 휴스턴은 밴 건디 체제에서 드디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프랜시스, 야오밍, 모블리를 토대로 안정적인 전력을 구축한 휴스턴은 2003-2004 시즌을 45승 37패, 서부지구 8위로 마치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다.
“전당포” LA 레이커스와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맞붙게 된 휴스턴 로켓츠. 프랜시스는 시리즈 내내 팀의 에이스로써 맹활약 했지만 팀은 결국 1승 4패로 조기 탈락하고 만다. 매 경기 접전 끝에 승부가 갈렸던 휴스턴과 LA 레이커스 간의 5경기 사투는 프랜시스의 처음이자 마지막 플레이오프 경험이기도 하다.
휴스턴과의 이별, 모블리와의 이별
2004년 여름, 휴스턴 로켓츠는 스티브 프랜시스와 커티노 모블리, 켈빈 케이토를 올랜도 매직의 트레이시 맥그레이디, 타이론 루, 주완 하워드, 리스 게인스와 맞바꿨다. 휴스턴과 올랜도 간의 트레이드는 프랜시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과거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여러번 옮겨다닌 기억이 있는 프랜시스에게는, 5년만에 소속팀을 바꿔야 한다는 현실이 받아들이기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또한 휴스턴은 프랜시스에게는 좋은 추억만이 담긴 도시다. 두 팀간의 트레이드 발표 후, 프랜시스는 인터뷰에서 서운한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만큼 그는 휴스턴을 떠나기 싫었 던 것이다.
하지만 프랜시스에게 이 트레이드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그 이유는 바로 그의 감독은 더이상 제프 밴 건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 올랜도 매직의 감독 조니 데이비스는 밴 건디와는 달리 빠른 템포의 농구를 선호했다. 1996-1997 시즌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감독을 맡았었던 데이비스는 당시 신인이었던 앨런 아이버슨을 중용했던 스타일을 프랜시스에게 그대로 적용시키려 했던 것이다.
2004-2005 시즌, 프랜시스는 빠른 템포의 시스템에서 자신만의 경기력을 선보이며 부활했다. 그러나 또다른 이별이 프랜시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2004-2005 시즌 도중, 팀 수비력에 큰 문제가 있었던 올랜도 매직은 프랜시스의 백코트 파트너이자 절친인 커티노 모블리를 새크라멘토 킹스의 덕 크리스티와 맞바꾼 것이다.
프랜시스에게는 또 한번의 충격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트레이드 이후 그는 인터뷰에서 구단에 대한 실망감과 분노를 한꺼번에 표출했다. 인생 최고의 동반자였던 어머니를 잃었던 프랜시스에게는, 6년간 함께 백코트를 함께 누볐던 형제같와 같던 커티노 모블리와의 이별은 아마 정신적으로 큰 타격이 있었을 것이다.
결국 올랜도에서의 첫 시즌은 프랜시스에게는 최고의 한 해(평균 21.3점, 5.8리바운드, 7.0어시스트 기록)였지만 모블리와의 이별로 인한 최악의 한 해 이기도 했다.
서서히 지는 프랜차이즈
2005-2006 시즌을 시작으로, 프랜시스는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조니 데이비스가 감독직에서 물러난 후 브라이언 힐이 새롭게 부임하면서 프랜시스의 역할은 다시 한번 축소된 것이다.
브라이언 힐 감독은 프랜시스가 아닌 팀내 젊은 센터 드와잇 하워드를 중심으로 새롭게 팀을 개편했고, 떠오르는 신성 히도 터콜루의 성장, 그리고 2년차 백업 가드 저미어 넬슨의 육성을 중요시 했다. 프랜시스의 존재는 이들의 성장에 방해만 될 뿐이었던 것이다.
결국 불만에 쌓인 프랜시스는 브라이언 힐과의 관계가 최악에 이르렀고, 2005-2006 시즌 도중 올랜도 매직은 프랜시스를 뉴욕 닉스의 트레버 아리자와 앤퍼니 “페니” 하더웨이의 만기계약으로 트레이드 하면서 프랜시스의 1년 반의 짧았던 올랜도 생활은 끝이 났다.
뉴욕 닉스는 이미 스테판 마버리가 포인트가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결국 프랜시스는 슈팅가드 포지션을 소화해야 했고, 루키시절부터 달아온 등번호 3번 역시 1번으로 바꿔야 했다. 그러나 프랜시스는 더이상 휴스턴 시절의 능력을 보여줄 수 없었다. 고질적인 무릎부상으로 인해 운동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스테판 마버리 역시 프랜시스와 비슷한 스타일의, 볼 소유욕이 강한 선수다. 마버리와 백코트를 나눠갖던탓에 프랜시스는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살리지 못했다.
프랜시스는 결국 닉스에서 자신의 진가를 제대로 보여주지도 못한 채 2007년 여름,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로 트레이드 된다. 트레이드 직후, 트레일블레이저스는 프랜시스의 남은 2년간 3000만불의 계약을 해지(buy out)하면서 그는 자유계약 선수가 되었다.
같은 해 여름 프랜시스는 고향팀 휴스턴 로켓츠와 2년-600만불에 계약하며 귀환했다. 하지만 2007년의 휴스턴은 자신이 알던 예전의 휴스턴이 아니었다. 야오밍은 리그 정상급 센터로 성장했고 팀의 에이스는 자신의 트레이드 상대였던 트레이시 맥그레이디였다. 팀 내 주전 포인트가드는 자신이 아닌 레이퍼 알스턴이었으며 심지어 감독까지 제프 밴 건디가 아닌 릭 아델만이었다.
프랜시스의 기량 역시 예전의 그것이 아니었다. 거기다 대퇴근 부상까지 생기며 그의 몸상태는 NBA 경기를 소화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결국 프랜시스는 2007-2008 시즌 휴스턴 로켓츠 소속으로 단 10경기(3경기 선발출전)만을 소화한 후 더이상 NBA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2008년 겨울, 로켓츠는 프랜시스를 멤피스 그리즐리스의 2011년 2라운드 픽과 트레이드 했고, 그리즐리스는 2009년 1월에 프랜시스를 웨이브 했다. 루키시절, 그리즐리스를 거부했었던 프랜시스는 결국 그리즐리스에 의해 NBA 무대에서 초라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너무나도 특별했던 스티브 프랜시스, 그의 파란만장했던 농구인생 총정리.
사람들은 그를 화려했던 공격형 가드라고 표현할 것이다. 다른 몇몇은 그를 장단점이 극명하게 드러났던 한계가 있던 선수라고 말할 수도 있다. 올스타급 선수였으나 부상으로 인해 전성기가 짧았던 안타까운 선수라고 할 사람들도 있을것이며, 트러블 메이커라고 손가락질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농구선수가 아닌 “한 인간”으로 본다면 아마 필자는 그를 이렇게 평가하고 싶다.
"누구보다도 불리한 위치에서 시작했지만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기어이 자신의 꿈을 이루었던 불굴의 정신력을 지닌 인간승리의 표본"
물론 그는 트러블 메이커였다.
규칙 위반은 기본이었고, 전국TV 생중계 하프타임 인터뷰에서 심판욕을 대놓고 할 정도의 다혈질적인 성격까지..프랜시스는 분명 결점이 있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꿈을 위해 그가 달려온 길을 돌이켜보자.
프랜시스는 단 1년만의 고등학교 정식 농구경험 외에는 길거리에서 그의 농구 실력을 갈고 닦았다. 덕분에 그는 대학교에서의 스카웃을 받지 못했고 고등학교 시절 어머니를 떠나보내며 당분간 농구공을 손에 잡지 않았다. 포기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타 NBA선수처럼 대학교 무대를 평정할 기회조차 없었다. 그가 NCAA 1부리그를 경험한 것은 3학년이 되고 나서부터였다. 대학교 1, 2학년은 4년제가 아닌 2년제 전문대에서 활약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매릴랜드 대학 소속으로 맹활약하며 NBA 드래프트 2순위로 리그에 입성한다. 필자는 프랜시스가 NBA 선수로 뛰는 것이 인간승리 그 자체라고 표현하고 싶다.
중도 포기할 수도 있었던 상황들을 프랜시스는 매번 이겨냈기 때문이다.
프랜시스가 달려온 길을 볼때마다 매번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과연 그가 어려서부터 길거리 농구가 아닌 체계적인 정식 농구 시스템에서 자라났다면 어땠을까? 대학교 1학년부터 NCAA 1부리그의 치열한 무대를 경험했다면 어땠을까?
그는 아마 현재 우리가 알고있는 것보다 훨씬 훌륭한 선수가 되지 않았을까.
길거리 농구가 배출한 또 한명의 스타 플레이어, 3번의 올스타 선정에 2000년대 초반 공격형 포인트가드의 표본으로 떠올랐던 선수, 상대 센터를 앞에두고 인 유어 페이스 덩크를 무지막지하게 먹였던 극강의 운동능력의 소유자, 그리고 안타깝게 사라진 특별한 재능 스티브 프랜시스.
비록 아무도 모른게 쓸쓸히 사라졌으나 팬들은 스티브 프랜시스 그 이름을 기억 할 것이며 그가 남긴 전설은 NBA의 역사 속에 살아 숨쉴 것이다.
스티브 프랜시스(1999-2008)
생애통산 576경기 출전(543경기 선발)
평균 37.6분 출전 / 18.1점, 5.6리바운드, 6.0어시스트, 1.5스틸
1999-2000 시즌 신인왕 수상, 올스타 선정 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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