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

마이크 브라운 감독은 성공의 기쁨을 동료들과 나눌 줄 아는 사람이다. 클리블랜드에서 감독 경력을 시작한 지 4년 만에 처음으로 올스타전 감독으로 확정됐을 때도 브라운의 이같은 자세는 변함이 없었다.

“올스타전 감독으로 뽑힌 것은 전적으로 팀에게 주어진 상입니다. 선수들이 잘 해줘서 높은 승률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우리 선수들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이같은 영광을 누릴 수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선수들이 그렇게 잘 하게 해준 것이 브라운 본인이라는 것을 클리블랜드의 모든 선수들은 알고 있다. 팀 리더인 르브론 제임스는 브라운은 최고의 코치 중 한 명이며 올스타전 감독 뿐 아니라 올해의 코치상도 브라운이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브라운은 리그에서 선수들과의 관계를 가장 잘 유지하는 감독 중 한 명이다. 구단 자체 방송으로 매주 라이브 쇼를 진행할 정도로 매끄러운 화술과 경기에 많이 뛰지 못하는 가비지 타임 선수들의 열정까지 알아주는 자상함을 지니고 있다. 팀의 5번째 가드인 테런스 킨제이는 브라운의 세심함을 증언할 수 있는 선수다.

"지난 1월 포틀랜드 원정에서 선발 가드진이 일찍 파울트러블에 빠졌을 때 제가 감독님께 '감독님, 제게 기회를 주세요.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어요. 감독님은 그날 경기에는 저를 많이 쓰지 않으셨지만, 다음날 제가 연습하는 걸 눈여겨 보신 후 골든스테이트전에 저를 중용해주셨죠. 감독님께 정말 감사했습니다."

킨제이는 브라운이 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난조에 빠진 모리스 윌리암스를 대신해 11점을 올리며 승리에 큰 공헌을 했다.

선수들의 개인사까지 챙기는 브라운의 자상함은 리그 감독 중 세 번째로 젊은 나이와 짧은 감독 경력에도 불구하고 선수들에게 커다란 안정감을 주고 있다.

브라운의 이같은 친화력은 하루아침에 얻어진 것이 아니다. NBA는커녕 프로 선수 경험도 없는 브라운이 이 자리에 서기까지는 브라운 본인의 엄청난 노력뿐 아니라 훌륭한 스승들의 가르침이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1970년 클리블랜드가 속한 오하이오주에서 태어난 브라운은 아버지의 일 때문에 어린 시절을 해외에서 보냈다. 독일 뷔르츠부르크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브라운은 샌디에이고 대학으로 진학해 본격적으로 농구를 시작했다. 같은 해 포틀랜드 대학에 입학한 에릭 스포엘스트라 마이애미 감독과는 신입생 시절부터 라이벌이었다. 누가 많이 이겼을까?

“저희가 더 많이 이겼습니다. 저희가 이길 때마다 에릭이 굉장히 화를 내던 기억이 나네요.”

어느덧 졸업 학기를 맞게 된 브라운은 자신이 NBA에서 뛸 만한 재능이 없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농구에 대한 열정을 멈출 수는 없었기 때문에, 브라운은 행크 에건 감독의 사무실을 찾아 인턴 직원이라도 좋으니 자신이 NBA 팀에서 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물었다. 제자의 열정에 감동한 에건은 자신이 소개해줄 수 있는 NBA 팀들을 이야기해주며 어느 팀에 가고 싶냐고 물었다. 바로 그때 브라운의 눈에 띈 것이 에건의 책상 위에 놓여있던 농구 잡지였다. 표지에는 샌디에이고 대학 선배이며 NBA 선수생활을 하지 않고서도 당시 덴버 너게츠의 단장을 맡고 있던 버니 비커스태프의 사진이 있었다. 비커스태프는 브라운의 롤 모델이었던 것이다. 브라운은 잡지를 가리키며 ‘이 팀으로 보내달라’고 말했다. 브라운의 사회 경력이 시작한 계기가 된 그 잡지를 브라운은 아직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에건의 소개로 덴버 너게츠의 무급 인턴 자리를 얻게 된 브라운은 부모님이 주신 약간의 용돈만 지닌 채 덴버로 향했다. 졸업하려면 아직 한 학기가 남아있었지만 브라운은 개의치 않았다. 처음으로 경험한 프로농구의 세계가 꿈만 같았다. 브라운은 당시 덴버의 홈구장이었던 맥니콜스 아레나에서 살다시피 하며 무시무시한 속도로 구단 업무를 배워나갔다.

브라운의 성실한 업무태도와 농구에 대한 진지한 열정은 직원들 사이에서 금방 화제가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커스태프 단장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비커스태프는 농구에 미친 어린 후배에게 뭔가를 해주고 싶었다. 비커스태프는 대학 마지막 학기를 수료하기 위해 샌디에이고로 돌아가려던 브라운에게 졸업 후 덴버 구단의 정규직 비디오 분석가 자리를 제의했고, 무급임에도 불구하고 성실히 일한 보답으로 자비를 털어 1,500달러의 수표를 끊어주기도 했다. 경영학사 학위를 받고 졸업한 뒤 돌아온 브라운은 연봉 15,000달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브라운의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조건이었다.

“저는 스니커즈와 트레이닝복을 살 수 있을 만큼의 용돈만 벌 수 있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브라운이 당시의 감격을 떠올리며 한 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브라운이 처음으로 맡은 업무는 전국 각지의 농구 캠프와 대학을 찾아다니며 유망주들의 경기 모습을 촬영하는 것이었다. 브라운의 열정은 그가 맡은 ‘촬영’ 업무를 금세 ‘촬영 및 분석’ 업무로 바꿔버렸다. 어린 선수들의 플레이 하나하나를 비디오에 담으면서 브라운 나름의 방식으로 농구를 보는 눈을 갖게 된 것이다. 브라운이 제출하는 비디오에는 어느 샌가 브라운 자신이 작성한 스카우팅 리포트가 따라붙게 되었다. 브라운의 스카우팅 리포트가 쓸 만하다고 생각한 댄 이셀 덴버 감독은 브라운을 아예 정식으로 스카우트에 임명했다. 브라운은 덴버에서 5년간 스카우트로 재직하며 경기를 보는 안목을 키워나갔다. 아이러니하게도 전통적인 런앤건 팀이었던 덴버에서 브라운이 중점적으로 공부한 부분은 수비였다.

덴버는 브라운에게 직장 뿐 아니라 가정도 선물해줬다. 브라운은 덴버 아가씨인 카롤린과 결혼해서 두 아들을 뒀다. 브라운이 팀을 옮길 때마다 함께 이사를 다니는 이들 가족은 집에서 리틀 리그 운동 경기를 보며 시간을 보내곤 한다.

1997년 비커스태프가 워싱턴 감독으로 부임하며 덴버를 떠나게 되었을 때, 비커스태프는 ‘자기 사람’인 브라운을 떠올렸다. 비커스태프에게서 워싱턴 코치직을 제의받은 브라운에게 불만이 있을 리가 없었다. 브라운은 워싱턴에서 2년간 첫 코치직을 훌륭히 수행해내며 리그에서도 주목받는 젊은 인재로 성장했다.

1999년 워싱턴이 크리스 웨버와 미치 리치몬드를 트레이드하고 비커스태프를 해임하자, 브라운 역시 새로운 자리를 찾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 때마침 1998~1999시즌 우승팀인 샌안토니오 스퍼스의 그렉 포포비치 감독이 브라운에게 코치직을 제의했다. 포포비치는 브라운의 열정과 성실함, 그리고 수비 코칭 능력에 주목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실함을 중시하는 포포비치의 지도철학은 브라운과 꼭 맞았고, 브라운은 샌안토니오에서 본격적으로 코치 경력을 쌓아나가기 시작했다.

당시 샌안토니오에는 데이비드 로빈슨과 팀 던컨이라는 슈퍼스타가 있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한 바람직한 리더십이 팀을 지탱하고 있었다. 65년생인 로빈슨은 70년생인 브라운보다 다섯 살이나 연상이었다. 브라운은 로빈슨이 2003년 우승 반지를 끼고 던컨의 존경과 함께 은퇴하는 모습을 보며 프랜차이즈 스타나 슈퍼스타를 다루는 법, 그리고 그들을 상대로 어디까지 권위를 행사해야 하는지 등을 배워나갔다. 선수들 중에는 스티브 커 같이 팀 운영에 관심있는 노장 선수들도 있었기 때문에 이들과 자주 의견을 교환할 수 있었다. 훗날 클리블랜드에서 단장과 감독으로 다시 만나게 되는 대니 페리와도 이때 처음 만났다. 서머 리그에서는 샌안토니오 서머리그 팀의 감독을 맡으며 처음으로 감독 경험도 쌓았다.

2003년 샌안토니오가 LA 레이커스의 연속 우승을 끝내며 4년만에 우승을 차지한 직후, 브라운은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릭 칼라일 감독에게서 코치직을 제의받았다. 수비에 대한 전권을 위임한다는 조건이었다. 브라운은 제의를 받아들였고, 인디애나에서 리그 최고 성적인 61승과 동부컨퍼런스 파이널 진출에 공헌했다. 브라운이 전권을 위임받은 팀 수비에서 인디애나는 경기당 실점율 85.6점으로 리그에서 세 번째로 적은 점수를 허용했다.

브라운은 샌안토니오와 인디애나에서 강팀을 지도하는 법을 배웠다. 브라운이 코치로 재직하는 동안 브라운의 팀들은 평균 62.9%의 승률을 기록했고 4번의 디비전 우승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가 보고 배운 포포비치와 칼라일은 모두 올해의 감독상을 받은 명장이었다. 브라운은 최고의 팀에서 최고의 스승들에게 ‘이기는 법’을 배운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이기는 노하우’가 브라운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줬다.

2005년 초여름, 브라운은 클리블랜드로 가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신임 구단주였던 댄 길버트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 해 3월에 캐벌리어스를 인수한 길버트는 ‘미래의 아이콘’ 르브론 제임스가 속해있던 캐벌리어스를 대대적인 팀 개편을 통해 리그 엘리트 팀으로 만들려는 계획을 지니고 있었고, 젊지만 경험이 풍부한 코칭스태프를 찾고 있었다. 35세의 브라운은 그런 길버트의 조건에 딱 맞는 상대였다. 브라운과 대화를 나눠본 길버트는 브라운의 성실한 태도와 직업의식, 그리고 코치로서의 식견을 금방 알아보았다. 며칠 후인 6월 2일, 길버트는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17대 감독으로 브라운을 선임했음을 공식 발표했다. 그리고 27일에는 샌안토니오에서 브라운과 한솥밥을 먹었던 대니 페리를 단장으로 영입했다. 클리블랜드의 ‘페리-브라운 시대’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덴버에서 무급 인턴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13년, 브라운이 언제나 꿈꿔왔던 자리에 서게 된 것이다.

클리블랜드는 2003년 르브론이 입단한 후 전력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르브론의 입단과 함께 클리블랜드 감독을 맡았던 폴 사일러스는 채 2년을 못 버티고 팀을 떠났고 감독대행으로 뒤를 이은 브랜든 말론도 오래 버티지 못했다. 르브론과 함께 클리블랜드의 대들보가 될 것 같았던 카를로스 부저는 석연치 않은 과정을 거쳐 유타로 떠나버렸고, 대신 도녤 마셜과 래리 휴즈를 영입하는 등 팀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이런 상황에서 감독으로 부임한 브라운은 ‘우리는 모두 한 가족’이라 선언하고, ‘팀의 화합’을 팀 운영 원칙으로 정했다. NBA 팀 정도 되면 선수들의 재능에는 큰 차이가 없지만 이 차이를 크게 만드는 것은 팀이 얼마나 화합하고 있는지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브라운은 팀 구성원 모두가 자기 위치에서 최고의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도록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에게 최대한 권한을 위임했다. 팀의 중심인 르브론에게는 주장을 맡기며 다른 동료들을 이끌 것을 주문했다. 또한 벤치의 역할과 함께 수비를 강조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브라운 효과’는 금세 나타났다. 선수들은 르브론과 터줏대감인 지드루나스 일가우스카스를 중심으로 응집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휴즈같이 끝내 팀에 녹아들지 못한 선수도 있었지만 극소수에 불과했다. 모래알 같던 팀워크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선수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려 했으며, 특히 동료가 놓친 공격수를 대신 막아주는 방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브라운의 감독 첫 해 클리블랜드는 르브론 입단 이후 첫 50승과 첫 플레이오프 진출을 달성했다. 클리블랜드는 플레이오프 2라운드에서 강팀 디트로이트를 맞아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탈락했지만, 브라운의 클리블랜드가 보여준 강함은 그동안 감독 경력이 없는 브라운이 팀을 단기간에 강팀으로 만들지는 못할 것이라 말해온 비관주의자들의 입을 다물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듬해 브라운의 농구는 완전히 꽃을 피웠다. 클리블랜드는 경기당 실점율을 지난 시즌에 비해 3점이나 끌어내리며 리그 5위의 수비팀이 되었고, 2년 연속 50승을 거두며 동부 컨퍼런스 2위를 차지했다. 플레이오프에서 워싱턴과 뉴저지를 차례로 물리친 클리블랜드는 1991~1992시즌 이후 처음으로 컨퍼런스 파이널에 진출했다. 상대는 숙적 디트로이트. 클리블랜드는 르브론이 5차전에 믿을 수 없는 대활약을 펼치며 시리즈를 승리, 프랜차이즈 사상 처음으로 파이널에 진출했다. 비록 옛 스승 포포비치의 팀인 샌안토니오를 만나 압도적인 전력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시리즈 전적 4-0으로 완패했지만 부임 2년 만에 플레이오프에도 오르지 못하던 팀을 파이널에 올려놓은 브라운 감독의 지도력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르브론에 의존하는 공격전술의 부재를 지적하는 의견도 있었지만, 브라운은 자신의 신념을 꿋꿋하게 밀고나갔다.

2007~2008시즌은 브라운에게 새로운 도전이 닥친 한해였다. 시즌이 시작하기도 전에 계약 문제로 사샤 파블로비치와 앤더슨 바레장을 잃은 클리블랜드는 시즌 중 블록버스터 트레이드를 단행, 주전 5명 중 3명을 바꾼 것이다. 처음으로 한 팀이 된 선수들은 서로에 대해 완전히 알지 못했고, 특히 팀워크를 기반으로 하는 브라운식 수비에 적응하지 못했다. 브라운이 지난 2년간 쌓아온 것들 중 적잖은 부분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하지만 브라운은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하며 서서히 팀을 진정시켜갔고, 그 해 챔피언을 차지한 보스턴 셀틱스를 플레이오프 탈락 일보직전까지 몰아넣으며 가능성을 보였다. 브라운의 이러한 지도력은 길버트 구단주와 페리 단장이 지난 시즌 중반 브라운과 연장 계약을 체결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브라운의 코칭 철학은 간단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팀의 화합이고 화합은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며 팀 수비를 통해 나타난다는 것이다. 프리 시즌 캠프를 시작하며 브라운이 라커룸 칠판에 크게 적어놓은 말은 ‘팀워크=신뢰’였다.

신뢰는 대화를 통해 쌓여간다. 브라운은 선수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며 문제 해결 방법을 깨닫길 바랐고 프리 시즌 캠프에서도 자신의 말은 최대한 아끼며 선수들의 대화를 유도했다. 그 결과 클리블랜드는 벤치와 라커룸에서 가장 시끄러운 구단이 됐다. 선수들은 경기가 끝난 후에도 라커룸에서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며, 쉬는 날에는 식당과 영화관 등을 떼를 지어 돌아다닌다. 커다란 사내들이 시내를 함께 걷는 모습은 이제 클리블랜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 됐다.

브라운은 아예 팀 운영의 상당 부분을 선수들에게 위임하기도 한다. 클리블랜드의 특징은 감독과 일반 선수 사이에 ‘선수 위원회’라 불리는 대표조직이 있다는 것이다. 브라운은 르브론, 일가우스카스, 벤 월러스, 모리스 윌리암스로 이루어진 이 위원회를 통해 팀 운영 방침을 통보하거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받고 있다. 위원회는 일반 선수들의 의견을 수렴해 선수에 대한 팀내 자체 징계 수위나 원정 숙소 결정, 훈련 일정 등을 건의하고 이런 건의들은 대부분 받아들여진다. 위원회는 때에 따라서는 경기 중에 스스로 행동 지침을 정하기도 한다. 지난 12월 토론토와의 홈경기에서 전반에 난조를 보이자, 브라운은 하프타임 동안 선수들을 라커룸에 남겨둔 채 코칭스태프와 함께 자리를 떴다. 선수들은 비디오를 보며 토의한 끝에 수비 로테이션에서 문제를 발견했고, 선수들이 제안해 받아들여진 새로운 수비 로테이션은 3쿼터 초반 6분 동안 토론토에게 단 4점만 내줬다.

브라운의 권한 위임은 휘하 코치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클리블랜드의 코칭스태프에는 브라운의 대학 시절 은사인 행크 에건을 비롯하여 경험 있는 노장들이 많다. 젊은 축에 드는 코치들도 브라운과 동년배다. 브라운은 이들 코치들에게 각자 위치에서 최대한 넓은 재량권을 주었다. 코치들에게 전권을 부여하고 책임은 자신이 지는 운영 방식은 칼라일에게서 배운 것이다. 클리블랜드 코치들은 이러한 운영 방식 덕분에 자신들의 경험과 창의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다. 그동안 부족함을 지적받던 공격 전술도 과거 래리 브라운 감독 밑에서 공격 전술을 전담했던 존 쿠에스터에게 권권을 위임한 지 3년 만에 큰 결실을 보고 있다.

하지만 브라운이 선수와 코치들에게 모든 것을 맡겨둔 채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순간에는 스스로 판단해 결단을 내리기도 한다. 지난 크리스마스에 펼쳐진 워싱턴과의 홈경기가 좋은 예다.

브라운은 경기 종료 37초를 남기고 한 점을 뒤진 상황에서 공격력이 좋은 일가우스카스 대신 바레장을 넣었다. 모든 사람들이 의아해했지만, 바로 다음 공격에서 딜론테 웨스트가 3점슛을 실패하자 바레장이 빠른 풋워크를 이용해 공격리바운드를 낚아챈 후 파울을 얻었다. 발이 느린 일가우스카스였다면 워싱턴의 박스아웃을 제치지 못했을 것이다. 브라운은 곧바로 대니얼 깁슨을 빼고 월러스를 투입했다. 바레장의 자유투로 역전한 다음 맞은 워싱턴의 공격에서, 월러스는 마지막 공격을 맡은 캐런 버틀러에게 적절히 더블팀을 붙으며 공격자 파울을 유도해내 사실상 경기를 끝내버렸다.

브라운은 이런 적재적소의 용병술을 이번 시즌에만 여러 번 보여줬다. 브라운이 단지 슈퍼스타에 의지하는 감독이 아니며 스스로도 굉장히 우수한 코치라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다.

NBA 선수 경험도 없이 리그의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해서 리그 엘리트 팀의 감독이 된 브라운을 동경하는 젊은 코치 지망생들이 늘고 있다. 17년 전 브라운에게 비커스태프가 그랬던 것처럼 이제는 브라운이 그들의 롤 모델이 되고 있는 것이다. 브라운은 이 모든 것들을 훌륭한 스승 덕분으로 돌린다.

“저는 운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훌륭한 감독 밑에서 많은 것을 배웠죠. 칼라일에게서는 평정심과 권한 위임을, 포포비치에게서는 공/수 전술과 슈퍼스타를 지도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제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은 비커스태프입니다. 그는 아무 것도 증명할 수 없었던 시절 제 열정을 믿어줬고, 그 믿음을 끝까지 지켜줬죠. 비커스태프는 제게 이 업계에서는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는 가르쳐 줬고, 그 가르침이 저를 이 자리까지 이끌었습니다.”

아직 40도 되지 않은 이 젊은 감독의 능력은 이미 수많은 전문가들에 의해 인정받고 있다. 이제는 브라운의 진가를 팬들에게도 인정받을 차례다. 올스타전 감독을 맡은 이번 시즌은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브라운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 저작권자 ⓒ 뛰어(www.ddueh.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