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 & COLUMNS/POINT GUARD 2009. 12. 22. 19:40

숫자로 보는 NBA의 크리스마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다들 크리스마스 계획은 잘 세우고 계신지? 멋진 이성 친구와의 데이트가 예정되어 있다면 참으로 축하할 일이다. 하지만 24일 아침에 잠이 들어 26일에 눈을 뜨겠다며 괴로워하고 있는 이들도 분명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 여러분들을 위해 준비했다. 이름 하여 "숫자로 보는 NBA의 크리스마스". 자고로 숙면을 유도하는데 숫자보다 좋은 게 또 어디 있겠나.

미국과의 시차로 인해 NBA의 크리스마스 경기는 우리 시각으로 26일 새벽에 펼쳐지게 된다. 24일 아침에 이 글을 읽고 단잠에 빠진 뒤, 26일 새벽 2시에 일어나 크리스마스 매치를 즐긴다면 2009년 크리스마스도 안전하게 넘길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럼 시작해볼까?


크리스마스 최고의 단골손님


24일 아침에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크리스마스 최고의 단골손님은 단연 '케빈'일 것이다. 그렇다면 NBA 팬들에게 크리스마스 최고의 단골손님은 누구일까?

크리스마스는 미국 최고의 축제 기간이다. 필연적으로 TV 시청률과 경기장을 찾는 이들의 발걸음이 늘어난다. 해서 리그 사무국은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가장 인기 있고 커다란 시장성을 가진 팀들의 경기를 주선한다. 크리스마스 단골손님이라는 것은 곧 가장 인기 있는 팀이라는 이야기로 해석해도 좋다는 것이다.

리그 역사상 크리스마스에 가장 많은 초대를 받은 귀하신 손님은 단연 뉴욕 닉스다. 1946년, NBA가 아닌 BAA라는 이름으로 처음 리그가 출범했을 당시부터 2008년까지 총 63번의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동안 무려 44회나 리그의 부름을 받았다. 그 때나 지금이나 뉴욕이라는 거대한 연고지를 등에 업은 그들은 리그 제일의 시장성을 가진 팀으로써의 위치를 확고히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뉴욕은 프랜차이즈의 두 번째 시즌이었던 1947년의 크리스마스부터 리그의 초대를 받았다. 당시 (지금은 사라져버린)'프로비던스 스팀롤러스와의 경기에서' 89-75로 승리를 거두며 크리스마스의 기쁨을 만끽했다.

뉴욕의 뒤를 잇는 팀은 LA 레이커스로 총 35회의 크리스마스 매치를 경험했다. 1949년의 크리스마스 매치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그들은 특히 최근 들어 더욱 자주 크리스마스의 단골손님으로 손꼽히고 있다. 뉴욕이 계속되는 부진에 빠진 사이 샤킬 오닐, 코비 브라이언트 등의 슈퍼스타들을 앞세워 단연 최고의 인기 팀으로 군림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닐과 브라이언트는 나란히 총 11회의 크리스마스 매치를 경험하며 크리스마스 최다 출연 기록을 가지고 있다. 특히 브라이언트의 경우 예정되어 있는 올 해의 크리스마스 매치까지 소화할 경우 무려 11년 연속 크리스마스에 얼굴을 보이며 리그 제일의 슈퍼스타임을 입증하고 있다.

반면 리그 제일의 명문 팀으로 손꼽히는 보스턴 셀틱스의 경우 크리스마스 매치 경험이 총 25회에 그치고 있다. 디트로이트 피스톤즈(32회), 필라델피아 76ers, 새크라멘토 킹스(이상 29회)등의 팀들보다도 적은 횟수에 불과한 수치다. 이는 시즌 일정이 지금보다 적었고, TV 중계 문화가 발달하기 이전에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는 점에서 약간의 손해를 보는 측면이 있고, 우수했던 성적에 비해 플레이 스타일이 화끈한 공격 농구와는 조금 거리가 있었던 탓에 상대적으로 크리스마스의 외면을 받아왔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크리스마스의 사랑을 듬뿍 받는 팀이 있는가 하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크리스마스 매치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팀들도 존재한다. 샬럿 밥캣츠, 멤피스 그리즐리스, 미네소타 팀버울브스가 그 주인공들. 이들의 공통점은 비교적 역사가 짧은 신생팀이라는 점, 그 동안의 성적이 신통치 못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하지만 세 팀 모두가 젊고 풍부한 가능성을 갖고 있는 팀이기에 머지않은 미래에 이들과 함께할 크리스마스가 찾아오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크리스마스의 강자와 약자

당대의 인기 팀들이 총 출동하는 크리스마스 매치인 만큼 그들의 승패 여부도 큰 관심사가 되곤 한다. 가장 많은 초대를 받은 뉴욕은 크리스마스 전적 20승 24패로 채 5할이 되지 않는 승률을 기록 중이다. 화려한 초대 경력에 비해 성적표는 조금 초라한 것이 사실. 그렇다면 크리스마스 최고의 강자는 누구일까?

물론 댈러스 매버릭스(2전 2승)처럼 100%의 승률을 기록하고 있는 팀도 존재하지만 그 표본이 너무 작다. 실질적인 크리스마스 최고의 강팀은 바로 포틀랜드 트레일 블레이저스다. 포틀랜드는 지금까지 총 15회의 크리스마스 매치를 치루며 무려 13승 2패라는 압도적인 승률을 기록 중이다. 특히 2008년의 크리스마스에 댈러스에게 패배하기 전까지는 크리스마스 12연승을 기록 중이었을 만큼 크리스마스만 되면 힘이 펄펄 나는 팀이다. 올 해의 크리스마스에도 초대를 받은 그들은 덴버 너게츠와의 경기를 준비 중이다. 과연 크리스마스 통산 14승째를 기록할 수 있을 것인지를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는 관전 포인트가 될 것이다.

이런 포틀랜드를 부럽게 바라보는 팀이 있으니 바로 오클라호마시티 썬더다. 시애틀 슈퍼소닉스 시절부터 총 11번의 크리스마스 매치에 초대받은 그들이지만 단 한 번도 승리하지 못하며 11전 전패를 기록 중이다. 2회 이상 크리스마스 매치를 경험한 팀들 중 유일하게 전패의 수모를 겪고 있는 팀이기도 하다. 1997년의 크리스마스를 마지막으로 계속해서 리그 사무국의 초대장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섭섭함 보다는 안도감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과연 오클라호마의 크리스마스 첫 승은 언제쯤 이뤄질까?


크리스마스 최고의 퍼포먼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한 경기 100득점이라는 거짓말 같은 기록을 가지고 있는 월트 체임벌린은 크리스마스에서도 그 괴물 같은 위력을 유감없이 뽐냈다. 그 중에서도 1961년의 크리스마스가 단연 백미였다. 당시 필라델피아 소속이었던 체임벌린은 1961년 크리스마스 매치에서 뉴욕을 상대로 59득점 36리바운드라는 어마어마한 활약을 펼쳤다. 비록 팀은 136-136으로 패배했지만 체임벌린이 잡아낸 36개의 리바운드는 지금까지도 크리스마스 역대 최다 리바운드 기록으로 남아있다.

59득점 역시 1984년 버나드 킹이 60득점을 기록하기 전까지 23년간 크리스마스 역대 최다 득점 기록으로 남아있었다(현재 2위). 재미있는 것은 당시 체임벌린의 기록을 깨뜨린 킹의 당시 소속팀이 뉴욕이었다는 점이다. 이래저래 체임벌린의 크리스마스는 뉴욕 때문에 김이 새버리는 느낌이다.

현역 선수들 중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인 이는 트레이시 맥그레디다. 그는 올랜도의 유니폼을 입고 총 3번의 크리스마스 매치를 경험했는데 그 때마다 최고의 컨디션을 자랑했다. 그의 첫 크리스마스 매치는 2000년 인디애나 페이서스와의 경기였다. 당시 팀은 93-103으로 패배했으나 맥그레디는 홀로 43득점 9리바운드를 기록하며 맹활약했다. 2002년의 크리스마스에 두 번째 초대를 받은 맥그레디는  디트로이트를 상대로 46득점을 퍼부으며 팀의 승리를 이끌었다. 이는 크리스마스 단일 경기 역대 최다 득점 부문 5위에 해당하는 수치다. 이 뿐만이 아니다.

바로 다음 해였던 2003년 크리스마스에서는 당시 최고의 신인이었던 르브론 제임스를 상대로 41득점, 8리바운드, 1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팀의 승리를 챙겼음은 물론이고 제임스의 첫 번째 크리스마스 매치를 혹독한 신고식의 장으로 만들어버렸다. 맥그레디는 크리스마스 커리어 평균 43.3득점을 기록 중인데 이는 리그 역대 최다 평균 득점 기록이기도 하다.

이쯤 되면 많은 이들이 마이클 조던의 크리스마스 평균 득점 기록에 대해 궁금해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던은 팬들의 기대와는 달리 겨우(?) 28.3득점을 기록하는데 그쳤다.


숫자로 보는 NBA의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최다 출전 : 뉴욕 닉스 44회
크리스마스 최다 승 : 뉴욕 닉스, LA 레이커스 20승
크리스마스 최다 패 : 뉴욕 닉스 24패
크리스마스 최다 연승 : 포틀랜드 트레일 블레이저스 12연승
크리스마스 최다 연패 : 오클라호마시티 썬더 11연패

크리스마스 통산 최다 득점 : 오스카 로버트슨 377점 (현역 : 코비 브라이언트 269점)
크리스마스 통산 최다 리바운드 : 빌 러셀 176개 (현역 : 샤킬 오닐 147개)
크리스마스 통산 최다 어시스트 : 오스카 로버트슨 145개 (현역 : 코비 브라이언트 60개)

크리스마스 평균 최다 득점 : 트레이시 맥그레디 43.3점
크리스마스 평균 최다 리바운드 : 월트 체임벌린 25.3개 (현역 : 샤킬 오닐 13.4개)
크리스마스 평균 최다 어시스트 : 오스카 로버트슨 12.1개 (현역 : 제이슨 키드 10.5개)

크리스마스 단일 경기 최다 득점 : 버나드 킹 60점 (1984년)
크리스마스 단일 경기 최다 리바운드 : 월트 체임벌린 36개 (1961년)
크리스마스 단일 경기 최다 어시스트 : 네이트 아치발드 (1972년) , 가이 로저스 (1966년) 18개


NBA는 농구라는 스포츠에 있어 꿈의 리그라고 할 수 있다. 그 꿈의 리그에서 뛰기 위해서는 반드시 드래프트라는 시험을 통과해야만 한다.

1988년의 드래프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의 꿈을 좇아 NBA의 문을 두드렸다. 당시 가장 먼저 호명되며 1번 픽의 영광을 차지했던 대니 매닝을 필두로 미치 리치몬드, 댄 멀리 등 미래에 수많은 팬들을 열광시키게 될 스타들이 NBA 리거로써의 첫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훗날 스스로가 마이클 조던의 라이벌임을 자처했던 오늘의 주인공은 그 누구에게도 선택받지 못한 채 드래프트에서 낙방하고 만다. 대학의 마지막 시즌을 앞두고 오클라호마 주립대학으로 전학을 오기 전까지 NCAA가 아닌 디비전 1리그에서 활약하던 그에게 눈길을 줄만한 팀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니, 그보다 애초에 그의 꿈도 농구 선수가 아니었다. 농구 보다는 미식축구 선수가 되기를 희망했던 그였지만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를 다니기 위해 농구 선수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도 SAT 성적이 좋지 않았던 탓에 NCAA에 소속된 학교가 아닌 2년 제 커뮤니티 칼리지에 진학하게 됐고, 무려 4번의 전학 끝에 오클라호마 주립대까지 오게 된 그였다.

너무나 먼 길을 돌아온 만큼 NBA 스카우터들에게 자신의 매력을 충분히 알릴 시간이 부족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드래프트에서 선택받지 못한 그는 수많은 서머 캠프들을 통해 NBA 데뷔를 시도했다. 무던한 노력 끝에 결국 1988-89 시즌의 개막을 앞두고 골든 스테이트에 초청 선수로 합류하는데 성공했지만 어이없게도 허리 부상을 당하며 퇴출당하게 된 그는 이 후 CBA리그를 전전하며 때를 기다렸다. NBA 무대를 누비게 될 그 날을 말이다.

CBA 출신 최고의 슈퍼스타로 기억되고 있는 오늘의 주인공. 훗날 마이클 조던의 라이벌을 자처했으며 패트릭 유잉과 함께 1990년대 뉴욕 농구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오늘의 주인공은 바로 존 스탁스다.




1. 1990년대 뉴욕의 대표 가드 등장

CBA에서 숨을 고르며 때를 기다리던 스탁스는 1990년 10월, 뉴욕과 임시 계약을 맺는데 성공한다. 임시 계약 선수에서 뉴욕의 정식 선수가 될 수 있었던 것에는 재미있는 뒷이야기가 있다. 스탁스는 뉴욕과의 임시 계약 직후 가졌던 연습 경기에서 부상을 당하게 됐는데, 연습이나 경기 중 부상을 입은 선수는 최소한 그 해 12월이 끝날 때까지 방출할 수 없다는 선수보호 조항 덕분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스탁스를 12월까지 남겨둘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12월까지 연명하는데 성공한 스탁스가 부상에서 완쾌될 무렵, 이번에는 절묘하게도 당시 뉴욕의 주전 슈팅 가드였던 제럴드 윌킨스가 부상을 당하게 됐다. 딱히 윌킨스의 빈자리를 채워줄 대안이 없었던 뉴욕은 스탁스를 주전 슈팅 가드로 기용하는 것 말고는 별 다른 도리가 없었다. 1990년대 뉴욕을 대표하는 가드로 성장할 스탁스라는 그렇게 수면 위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1990년대 NBA 최고의 라이벌리는 역시 시카고와 뉴욕이었다. 두 팀의 대결은 언제나 전쟁 같은 치열함 속에 펼쳐졌고, 모든 선수들은 자신의 능력을 120% 이끌어내어 경기에 임했다. 마치 아이스하키를 보는듯한 보디 체킹이 이어졌고, 심판의 눈을 피해 날아들던 파울들, 지옥과도 같았던 골밑. 하지만 최후의 승리는 언제나 시카고의 몫이었다. 그들에게는 조던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독 뉴욕을 방문할 때면 평소에 보여주던 것 이상의 엄청난 활약을 쏟아내던 조던은 뉴욕 팬들에게 악몽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그런 조던을 막아서던 것이 바로 스탁스였다. 당대의 명 센터 유잉이 뉴욕의 심장이었다고는 하나 포지션의 특성상 시카고의 조던, 스카티 피펜 콤비와 직접 맞붙게 되는 장면은 그리 많지 않았다.

실질적으로 그들과 맞대결을 펼치는 일은 스탁스의 일이었다. 사실, 당시의 조던을 막아설 수 있는 선수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엄청난 위용을 뽐내던 선수였다. 하지만 그런 조던을 향해 끝없이 도전하고 달려들며 지지 않으려 기를 썼던 선수들이 몇 몇 있었는데 그 중 최고는 단연 스탁스였다. 너무나 처절한 과정을 거치며 NBA 리거로 우뚝 선 스탁스는 더 이상 누구에게도 자신의 자리를 빼앗기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최고의 재능을 타고 났다는 조던을 상대로 끝까지 물러서지 않는 모습을 보이며 자신의 라이벌은 조던뿐이라 거침없이 말할 수 있었던 사나이는 스탁스 뿐이었다.




스탁스는 그를 전형적인 3점 슈터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 만큼 위력적인 외곽슛 능력을 가졌으며, 상황에 따라 백업 1번으로도 출장이 가능했던 볼 핸들링과 리딩 능력, 조던과의 맨투맨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수비력은 물론이고 멋진 돌파에 이은 슬램덩크로 하이라이트를 장식하기도 했던 선수였다. 다만 조금은 지나치다 싶은 느낌의 기복과, 슛을 아낄 줄 모르는 난사 기질을 지적받기도 했지만 승리하겠노라는 투지와 볼을 향한 열정 만큼은 리그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 선수였다.

전성기의 스탁스를 보며 당시의 농구 관계자들은 "스탁스가 기복만 없다만 당장이라도 드림팀 멤버로 선발될 것이다" 라고 평가하곤 했다. 이처럼 터프한 파이터 정신과 도전자 마인드로 똘똘 뭉친 스탁스는 질식 수비를 앞세워 동부 컨퍼런스의 강자로 군림하던 뉴욕의 팀 컬러에 꼭 들어맞는 선수였고, 팀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던 유잉과 더불어 뉴욕에서 가장 사랑받는 남자로 성장하게 된다.




2.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NBA 파이널

조던과 시카고의 벽에 막혀 번번이 좌절을 맛보던 뉴욕에게도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1993-94 시즌, 조던이 은퇴를 선언한 것이다. 당시 스탁스는 무릎과 허리에 부상을 입어 59경기에 출장하는데 그쳤지만 시즌 평균 19득점을 기록하며 맹활약했다. 많은 경기에 결장했음에도 총 217개의 3점 슛을 폭발시켰고 그 결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올스타 게임에 출장하는데 성공한다. 조던이 없는 동부 컨퍼런스에서 뉴욕을 막을 수 있는 팀은 없었다. 뉴욕은 플레이오프 무대에서 뉴저지, 시카고, 인디애나를 차례로 물리치며 꿈에 그리던 NBA 파이널 진출에 성공했다.

파이널 무대에서 뉴욕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하킴 올라주원을 앞세운 휴스턴이었다. 1994년의 파이널은 유잉과 올라주원의 센터 대결만큼이나, 불꽃같았던 양 팀의 슈팅 가드인 스탁스와 버논 맥스웰의 대결로도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파이널 시리즈에서의 스탁스는 이제껏 봐왔던 스탁스가 아닌 듯 했다. 유잉과 올라주원이 골밑에서 전쟁을 펼치고 있는 동안 스탁스가 내외곽을 오가며 득점포를 터뜨려줘야 했지만 그는 시리즈 내내 부진했다.

특히 뉴욕이 3승 2패로 앞서고 있었던 6차전에서 뉴욕에게 우승 트로피를 가져다 줄 수 있었던 마지막 슛을 올라주원에게 막히며 경기를 내줬고, 최후의 7차전에서는 모두 18개의 슛을 던져 단 2개만을 성공시키며 극도로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결국 최종전까지 가는 혈투 끝에 우승 트로피는 휴스턴의 차지가 되어 버리고, 뉴욕 팬들은 커다란 좌절에 빠졌다. 스탁스 역시 부진했던 자신의 모습에 실망스러움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이후 뉴욕은 결단을 내린다. 조던이 없는 NBA에서도 우승을 할 수 없다면 팀을 재편하기로 한 것이다. 결국 1995년 팻 라일리 감독이 마이애미로 떠나게 되고 돈 넬슨이 새로운 감독으로 부임하게 된다. 거기에 디트로이트에서 젊은 스타로 급부상 중이었던 앨런 휴스턴의 영입은 스탁스의 자리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결국 새로운 감독인 넬슨은 주전 가드로 스탁스가 아닌 휴스턴을 선택했다.

하지만 스탁스의 뉴욕에 대한 사랑과 승리에 대한 열정은 변함이 없었다. 벤치 멤버로 경기에 나설 지언정 팀의 패배를 바라볼 수 없었던 스탁스는 이 후 1996-97 시즌에 올 해의 식스맨으로 선정되며 제2의 전성기를 열었다. 하지만 1998년의 여름, 끝내 뉴욕은 골든 스테이트의 라트렐 스프리웰과 스탁스를 트레이드 하고 말았다. 영원한 뉴요커이고 싶었던 스탁스는 너무나 허무하게 리빌딩의 폭풍에 휩쓸려 뉴욕의 유니폼을 벗게 된다. 이후 스프리웰의 영입은 굉장한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휴스턴-스프리웰로 이어지는 트윈 테러를 결성하게 되고 훗날 "8번 시드의 기적"을 일으키며 8번 시드 최초의 파이널 진출이라는 역사적인 업적을 이루게 된다.




3. 뉴욕과의 이별, 쓸쓸한 은퇴

그렇게 뉴욕이 잘 나가는 동안 스탁스에게는 시련의 계절이 찾아왔다. 뉴욕의 유니폼을 벗은 스탁스는 더 이상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이어지는 트레이드를 통해 일생의 앙숙 관계였던 시카고 유니폼을 입게 되기도 했는데 팀의 일원이 되었음에도 시카고에 대한 반감을 숨기지 않았으며 시카고 팬들조차 스탁스를 "뉴욕의 스탁스"로 여기는 듯 야유를 쏟아냈다. 스탁스 본인조차 시카고에서 뛰기를 원치 않는다며 뉴욕으로의 복귀를 타진했지만 뉴욕은 끝내 그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이 후 2000-01 시즌, 유타로 둥지를 옮긴 뒤 칼 말론, 존 스탁턴과 함께 활약하기도 했지만 2002년에 쓸쓸히 은퇴를 선언하며 13시즌에 걸친 커리어를 마감했다.

1990년대의 뉴욕에 존 스탁스만큼 어울리는 선수는 없었다. 그 누구에게도 패배 당하기를 원치 않았으며, 그 어떤 강한 상대라도 두려움 없이 정면으로 맞서 싸우던 선수였다. 비록 4번의 편입을 거쳐 대학을 졸업했고, CBA를 전전하며 '비주류'의 삶을 살았던 스탁스였지만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했기에 더욱 전투적이고 강력한 파이터 마인드를 가질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벌써 수년째 부진에 빠져있는 뉴욕을 보고 있노라면 지금 뉴욕의 라커룸에는 누구도 아닌 스탁스와 같은 리더가 필요한 것 같다. 단 한 번의 패배조차 용납할 수 없을 만큼 불타는 경쟁심을 가진 그런 선수 말이다.

타고난 재능의 차이를 뜨거운 열정으로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오늘의 주인공, 존 스탁스였다.

존 스탁스(John Starks, 1989-2002)



생애통산 866경기 출장(420 선발)
평균 12.5득점, 2.5리바운드, 3.6어시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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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COLUMNS/떠돌이검사 2009. 12. 16. 14:44

잊혀진 남자 스티브 프랜시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당돌했지만 한편으론 순진했던 한 NBA 선수가 있다.

아니, 있었다 라고 하는게 더 좋은 표현이겠다. 그는 이미 NBA에서 더이상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도 그가 NBA에서 뛰고 있는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건 왜일까.
 
아마 그만큼 그는 특별했기 때문이 아닐까.
 

2000년대 NBA 팬이라면 프랜시스의 화려한 전성기를 기억 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그 위치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아는 이는 드물다. 한 팀의 프랜차이즈로 영원히 남을 것만 같았던 특별한 재능, 바로 2000년대 공격형 포인트가드를 대표했던 스티브 프랜시스의 농구인생을 재조명 해보고자 한다.

 


불쌍한 청개구리


프랜시스는
1977 2 21일 워싱턴 DC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 프랜시스의 친아버지는 프랜시스가 2살때 가족을 버리고 떠났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어머니인 브렌다 윌슨이 혼자 한 가정을 책임져야 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증오했던 프랜시스에게 어머니란 존재는 소중함 그 자체였다.

 

유년시절을 매릴랜드 주의 타코마 파크 시티에서 보낸 프랜시스는 9살부터 농구를 시작했으며인근 공원과 소방서의 농구코트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녹록치 못한 가정형편 때문에 9살의 어린 나이에 아르바이트 생활을 시작했지만 농구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그는 외소한 체구를 지닌 말라깽이였다.


천부적인 운동능력이 돋보이기는 했으나
, 작은 키 때문에 자유투라인 밖에서의 슛은 항상 에어볼이 되기 일쑤였다고 한다. 작은 키 덕분에 픽업게임마다 포인트가드 외의 포지션은 아예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NBA 선수와는 다르게 프랜시스는 정식 농구 경험은 그리 많지 않다.

고등학교 입학 전까지 내내 길거리에서 농구를 했던 프랜시스는 고등학교에 입학하자 마자 농구부를 지망했지만
, 나쁜 성적때문에 학교측은 프랜시스의 경기 출전을 불허했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질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며 주기적으로 학교를 무단결석하였고 결국 농구부에서 퇴출되었다.

 

10학년때 다시 농구부에 입문한 프랜시스는 그의 첫 정식 농구 경험을 하게 된다. 그는 주로 후보로 출전하며 경기경험을 쌓았지만 그 1년이 끝이었다. 당시 문제아였던 프랜시스는 11학년때 나쁜 성적과 더불어 여러번 패싸움에 연루되며 퇴학당했고 결국 여러번 전학을 가야했다. 하지만 그가 가는 학교마다 프랜시스의 농구부 입문을 거부했는데 농구를 사랑했던 프랜시스에게 농구를 할 수 없는 현실은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다.

 

하지만 더 큰 충격은 프랜시스의 고등학교 졸업반(12학년) 때 찾아왔다.


프랜시스의 어머니 브렌다 윌슨이 암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 집안 형편때문에 병원 한번 가보지도 못한 채, 프랜시스를 떠나버린 것이었다. 그것은 가히 큰 충격이었고 졸지에 고아가 된 프랜시스는 그 이후로 농구공을 잡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손에 자란 프랜시스
, 아버지를 모른채 어머니만을 보고 살아온 그에게 어머니를 잃은 아픔은 너무나도 컸다.
이후 그는 방황했고, 결국 고등학교를 자퇴했다. 물론, 농구공은 그의 손에 없었다.

 

프랜시스의 1년이란 정식 농구경험은 팀 전술, 체계적인 훈련, 기본기등을 모두 습득하기에는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었으며 고등학교 자퇴 후 그에게 남은것은 제대로 된 코칭이 아닌 길거리에서 습득한 그만의 스타일이었다.

 

프랜시스는 결국 NBA 선수들 대부분이 경험했던 ABCD 캠프, AAU 토너먼트, 맥도날드 하이스쿨 올아메리칸 게임등은 고사하고, NCAA 1부리그 대학 팀들의 스카우트도 제의받지 못한 채 고등학교 생활을 마무리 하게된다.

 


농구를 버릴 수 없었던 청년


모든 영웅들은 한번씩 역경을 딛고 일어선다
. 프랜시스 역시 비슷한 유형의 영웅이었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3개월간 방황했던 프랜시스가 다시 농구를 시작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3개월 동안 프랜시스의 키는 부쩍 커졌다)

 

프랜시스는 매일 인근 소방서의 농구코트에서 픽업게임을 하며 그의 진가를 발휘했다. 이후 프랜시스는 길거리 농구의 레전드로써 그 유명세를 떨쳤다.


당시 매릴랜드
, 버지니아, 워싱턴 DC에서 수많은 길거리 농구선수들이 소방서를 찾아와 프랜시스에게 도전했지만 단 한명도 그를 이긴적은 없다고 한다.
그만큼 길거리 농구에서의 프랜시스는 독보적이었다.

 

그 와중 프랜시스의 재능을 알아본 매릴랜드 소속 AAU의 감독 루 윌슨은 프랜시스에게 팀 합류를 요청한다. 그는 프랜시스를 직접 찾아와 길거리 농구가 아닌 더 높은 세계로 도전하자고 권유했고, 프랜시스는 다시한번 정식 농구에 도전해보고 싶은 생각에 흔쾌히 승낙했다.

 

이 결정은 결국 프랜시스의 인생을 바꿔놓게 된다.

 

루 윌슨의 AAU 팀은 플로리다의 AAU 토너먼트에 참가했는데, 수많은 대학 코칭스탭들 앞에서 프랜시스는 맹활약 하며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경악케 했다. 스카우팅 리포트는 물론, 고등학교 유망주 리스트에도 없던 한 선수가 혼자 상대팀을 초토화 시켰으니 그럴만도 했다. 토너먼트 직후 텍사스에 위치한 샌 자신토(San Jacinto) 쥬니어 칼리지는 프랜시스에게 농구 장학금을 제의했다.

 

단 한번도 매릴랜드를 떠나본 적이 없던 매릴랜드 토박이 프랜시스는 결국 농구를 하기위해 텍사스로 항했다.


 

샌 재신토 쥬니어 칼리지 농구부는 NJCCA(전미 대학 농구리그인 NCAA의 하부리그) 에 속해있었다. 프랜시스로써는 첫 대학 농구경험이었지만, 여전히 NJCCA 무대는 그에게는 좁은 세계였다. 프랜시스는 샌 재신토 쥬니어 칼리지를 시즌 36연승에 NJCCA 토너먼트 결승전까지 이끌었다. 비록 샌 재신토 쥬니어 칼리지는 결승전에서 패했지만, 스티브 프랜시스는 대학농구 관계자들의 이목을 끌었다.

 

샌 재신토에서의 짜릿한 1년을 뒤로하고 스티브 프랜시스는 또다른 NCJAA 소속의 쥬니어 칼리지로의 편입을 결정했다. 프랜시스의 다음 행선지는 매릴랜드 주의 알레거니(Allegany) 쥬니어 칼리지였다. 프랜시스의 전설은 알레거니에서도 계속되었다. 그는 알레거니의 30연승을 이끌었고 이는 알레거니 대학 농구부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 무패 시즌이었다 (시즌 30승 무패) 매릴랜드 주는 프랜시스의 이름으로 들썩거렸고, 결국 그 이름은 매릴랜드 대학의 개리 윌리엄스 감독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결국 개리 윌리엄스 감독은 알레거니 쥬니어 칼리지의 홈 경기를 직접 관전하러 왔고, 그 경기에서 프랜시스는 단 하나의 샷도 놓치지 않는 활약을 펼쳣다. 윌리엄스 감독은 시즌 후 프랜시스에게 농구 장학금을 제의했고 알레거니에서의 1년 후 프랜시스는 매릴랜드 대학의 윌리엄스 사단에 합류하게 된다.

 


매릴랜드의 돌격대장
, 전국구 스타가 되다.


2
년간의 NJCCA 생활을 청산하고 드디어 프랜시스는 NCAA(전미 대학 농구리그)라는 더 큰 무대에 설 기회를 얻었다. 때는 바로 1998.

 

NJCCA에서 맹활약 했다지만 NCAA 경험이 전무했던 프랜시스의 실력을 과소평가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프랜시스의 가치를 인정받는 데에는 단 10경기만이 필요했다.

 

등번호 23번의 매릴랜드 주전 슈팅가드 스티브 프랜시스를 중심으로 매릴랜드 대학교는 첫 10경기에서 10연승을 거뒀다. 그중 전미 최고의 팀중 하나였던 스탠퍼드 대학을 상대로 거둔 승리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1998-1999 시즌 매릴랜드는 스티브 프랜시스, 로니 백스터, 후안 딕슨등이 팀의 주축이었다. 시즌이 지날수록 프랜시스의 주가는 상승했고, 매릴랜드 역시 전국구 강호로 거듭났다.

 

경기당 18 5어시스트를 기록한 프랜시스는 비록 매릴랜드를 NCAA 전국 토너먼트 (March Madness) 우승으로 이끌지는 못했지만 2nd Team All-American, John Wooden Award / Naismith’s Player of the Year Award 대상 후보에 이름을 올리는등 각종 개인 영예를 휩쓸었다.

**당시 매릴랜드 대학은 16강에서 론 아테스트의 세인트 조셉 대학과 연장까지 가는 사투끝에 석패했다.

 

명실부상 대학 최고의 선수중 한명으로 인정받은 스티브 프랜시스는 시즌 후 NBA 드래프트에 신청하며 결국 매릴랜드와의 결별을 결정했다. 지난 3년간 3개의 대학이란 험난한 길을 걸어왔던 프랜시스가 마지막에 빛을 보게되는 순간이었다.

 


프랜시스의 험난한
NBA 입성


1999
NBA 드래프트의 1순위 지명자 후보는 엘튼 브랜드와 스티브 프랜시스의 양강체제였다.
두명 다 1순위로써 손색이 없었지만, 프랜시스는 특히 1순위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수많은 역경을 딛고 일어섰다는 프라이드도 그 이유중 하나였겠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밴쿠버 그리즐리스에서 뛰기 싫었기 때문이다.

 

드래프트 전부터 많은 NBA 팀들은 스티브 프랜시스에 관심을 표명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밴쿠버 그리즐리스였다. 당시의 밴쿠버는 리그 최약체 중 하나였고 이미 1998년 포인트 가드 마이크 비비를 지명했던 팀이었다. 게다가 프랜시스의 집이 있는 매릴랜드와의 거리는 어마어마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밴쿠버 그리즐리스에서 뛰기 싫다는 프랜시스의 입장은 확고했다. 드래프트 이전 프랜시스는 언론에 공개적으로 밴쿠버가 자신을 뽑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내용의 인터뷰까지 하며 공개적으로 자신의 심정을 드러냈다.

 

프랜시스가 얼마나 그리즐리스를 거부했는지는 이 일화를 통해 알 수 있다.

드래프트 이전, 프랜시스는 시카고 불스(1위픽)와 샬럿 호넷츠(3위픽)의 개인 워크아웃에 자발적으로 참여했지만 그리즐리스와는 개인 워크아웃을 가지지 않았다.

당시 그리즐리스의 감독 브라이언 힐과 단장 스튜 잭슨은 프랜시스를 보기위해 직접 매릴랜드로 와야했다. 하지만 프랜시스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거의 모든 슛을 일부러 미스했다고 한다.

 

프랜시스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리즐리스는 끝내 1999 NBA 드래프트에서 2순위로 스티브 프랜시스를 지명했다. 프랜시스는 즉각 그리즐리스와의 계약을 거부했고 트레이드를 요청했다. 많은 여론들의 비판이 있었지만 프랜시스는 완고했다.

 

결국 밴쿠버 그리즐리스는 휴스턴 로켓츠와 올랜도 매직을 포함한 삼각 트레이드를 통해 프랜시스를 휴스턴 로켓츠로 이적시켰다 (밴쿠버, 휴스턴, 올랜도간의 삼각 트레이드는 총 11명의 선수들이 포함되었다).

 

1999년 드래프트 이후, 프랜시스와 밴쿠버간의 신경전은 꽤나 큰 이슈를 불러일으켰지만 결국 프랜시스는 어렵게나마 휴스턴 로켓츠와 3년 루키계약을 맺으며 NBA에 입성하게 되었다.

 


겁없는 신인 프랜시스의 화려했던 루키 시즌


트레이닝 캠프때 당시 휴스턴 로켓츠의 루디 톰쟈노비치 감독은 프랜시스를 보자마자 이 말을 건넸다고 한다
.

 

스티브, 너에게 공을 줄테니, 한번 마음껏 달려봐.”

 

그리고 프랜시스는 거침없이 달렸다.

 

상대가 누구던간에 그는 폭발적인 스피드와 극강의 운동능력으로 상대를 농락했다.

특히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있었던 프랜시스는 매 경기 엄청난 플레이로 매일 밤 하일라이트를 장식했다. 어느순간부터 크로스오버와 인 유어 페이스 덩크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있었다.

 

그는 1999-2000 시즌의 신인왕을 엘튼 브랜드와 공동수상했고, 2000 NBA 올스타 덩크 콘테스트에서 2위를 기록하며 (1위는 전설적인 덩크 퍼포먼스를 보였던 토론토 랩터스의 빈스 카터) 그의 실력을 입증했다. 또한 그는 당시 NBA 역사상 경기당 15-5리바운드-5어시스트를 기록한 7번째 신인이었다 (프랜시스의 루키 기록은 경기당 18.1-5.3리바운드-6.3어시스트)

 

프랜시스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로켓츠는 시즌 39 43패를 기록하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비록 하킴 올라주원과 찰스 바클리가 있었지만 그들은 이미 리그를 호령하던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또한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로 트레이드 되었던 스코티 피펜의 공백 역시 컸다. 팀 상황상 프랜시스가 팀의 중심이 될 수 있었지만, 반대로 그를 보좌할 선수들이 그의 절친 커티노 모블리를 제외하면 없다는 것이 팀의 마이너스 요소였다.

 

2000-2001 시즌의 프랜시스는 소포모어 징크스와는 관계없는 엄청난 활약으로 휴스턴 로켓츠를 시즌 45 37패로 이끌었다. 비록 팀은 플레이오프 진출에는 여전히 실패했지만, 프랜시스는 경기당 19.9, 6.9리바운드, 6.5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향상된 경기력을 선보였다.

                                                                                                

하지만 로켓츠의 플레이오프 진출은 멀기만 했다.


프랜시스의 세번째 시즌이었던
2001-2002 시즌, 프랜시스는 부상으로 57경기밖에 뛰지 못했으며 경기당 21.6, 7.0리바운드, 6.4어시스트라는 훌륭한 성적을 남기긴 했지만 팀 성적은 28 54패로 추락했다. 굴욕적인 팀 성적이었지만 이는 바로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고 만다. 휴스턴은 2002 NBA 드래프트에서 1순위 지명권리를 얻게되었고, 이는 결국 프랜시스와 야오밍의 만남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Stevie “Franchise”, Ming “Dynasty”
와 만나다.


2002
년 여름, 1순위 지명권을 얻은 휴스턴 로켓츠는 야오밍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복잡한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CBA(중국 농구협회)와 야오밍의 소속팀 샹하이 샥스가 야오밍의 NBA 진출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CBA와 샹하이 샥스는 야오밍을 보내는 적절한 댓가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현대 축구에서 자주 발생하는 일종의 이적료를 원했다).

 

비록 프리드래프트 캠프 참석과 당시 2순위 지명권을 가지고 있던 시카고 불스와 비공개 워크아웃을 가졌다고는 했지만, 그다지 인상깊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야오밍(당시 야오밍은 NBA 진출이 불확실 함에도 사비를 들여 미국에 입국했고, 입국하자마자 바로 다음날 워크아웃을 가졌기 때문에 자신의 진가를 제대로 발휘 할 수 없었을 것이다)에 대해 스티브 프랜시스도 비관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당시 스티브 프랜시스는 휴스턴의 단장 캐롤 더슨에게 1순위 픽을 트레이드 해서 베테랑 선수를 보강하자고 건의했을만큼 야오밍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야오밍이 휴스턴에 지명되자 그를 가장 먼저 반겼던 이도, 미국생활 적응에 가장 많은 도움을 준 이도 바로 스타 플레이어 스티브 프랜시스였다. 훗날 이 둘은 사이좋게 2003, 2004NBA 올스타전에 나란히 서부지구 선발로 출전하게 된다.


그가 야오밍에 대해 한 이 한마디는 프랜시스의 따뜻한 동료애를 대변한다.

 

저는 팀의 프랜차이즈(franchise, 프랜시스의 별명)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야오는 왕조(dynasty)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야오밍의 합류도 로켓츠를 바꾸지는 못했다.


2002-2003
시즌, 프랜시스는 81경기에 출전하며 평균 21, 6.2리바운드, 6.2어시스트, 1.7스틸을 기록하며 팀을 이끌었지만 결국 로켓츠는 시즌 43 39패로 다시한번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한편 야오밍은 루키로써 평균 13.5 8.2리바운드의 나쁘지 않은 시즌을 보냈지만 체력과 몸싸움이 아직 NBA 레벨이 아니라는것이 증명되었다.

 


문제아 프랜시스
vs 엄격한 밴 건디


2002-2003
시즌 도중 건강문제로 인해 중도 하차 했던 톰쟈노비치 감독은 시즌 직후 방광암이 발견됨에 따라 감독직에서 사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임은 팻 라일리의 후계자이며 전 뉴욕 닉스 감독이었던 제프 밴 건디였다.

 

밴 건디는 공수 밸런스를 가장 중요시 여겼으며 팻 라일리의 후계자 답게 센터중심의 하프코트 오펜스의 신봉자였다. 수비를 강조하던 그는 팀의 거의 모든 세트 플레이를 직접 지시하는 스타일의 감독이었기에 전술에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 팀의 공격을 해결하던 스티브 프랜시스와는 전혀 궁합이 맞지 않았다.

 

밴 건디는 예상대로 휴스턴의 시스템을 개편했고 서서히 팀의 중심은 프랜시스에서 야오밍으로 바뀌었다. 프랜시스의 영향력은 여전했지만, 더이상 그는 팀 공격의 선봉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는 프랜시스에게는 너무나 큰 변화였다. 프랜시스의 볼 점유율은 현저히 줄었고, 그의 슈팅 시도횟수 역시 줄었다. 결국 밴건디와 함께 한 2003-2004 시즌의 프랜시스는 전반적으로 스탯이 모두 하락했다. (평균 16.6, 5.5리바운드, 6.2어시스트)

 

하지만 프랜시스와 밴 건디 간의 문제는 단 한번도 수면 위로 떠오른 적이 없다. 프랜시스는 새로운 팀 시스템에 적응하기 위해 밴 건디가 주문한 스타일의 변화를 위해 노력했으며 밴 건디 역시 프랜시스를 팀을 위해 희생하는 그가 고맙고 존경스럽다라는 말로 화답했다. 프로 선수와 감독으로써 프랜시스와 밴 건디는 서로를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둘 사이에 충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팀의 질서를 중요시하는 밴 건디는 성실하지 못한 프랜시스의 훈련태도를 못마땅해 했으며 프랜시스 역시 세세한 규칙까지 중요시하는 밴 건디의 엄격한 팀 관리를 부담스러워 했다
.
프랜시스가 프로 미식축구(NFL) 올스타전을 관전하기 위해 원정경기를 떠나는 팀과 합류하지 않은 사태는 밴 건디의 프랜시스에 대한 마지막 신뢰마저 앗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시즌 도중 프랜시스와 밴 건디를 둘러싼 여러 잡음에도 불구하고 휴스턴은 밴 건디 체제에서 드디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프랜시스, 야오밍, 모블리를 토대로 안정적인 전력을 구축한 휴스턴은 2003-2004 시즌을 45 37, 서부지구 8위로 마치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다.

 

전당포” LA 레이커스와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맞붙게 된 휴스턴 로켓츠. 프랜시스는 시리즈 내내 팀의 에이스로써 맹활약 했지만 팀은 결국 1 4패로 조기 탈락하고 만다. 매 경기 접전 끝에 승부가 갈렸던 휴스턴과 LA 레이커스 간의 5경기 사투는 프랜시스의 처음이자 마지막 플레이오프 경험이기도 하다.

 


휴스턴과의 이별
, 모블리와의 이별


2004
년 여름, 휴스턴 로켓츠는 스티브 프랜시스와 커티노 모블리, 켈빈 케이토를 올랜도 매직의 트레이시 맥그레이디, 타이론 루, 주완 하워드, 리스 게인스와 맞바꿨다. 휴스턴과 올랜도 간의 트레이드는 프랜시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과거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여러번 옮겨다닌 기억이 있는 프랜시스에게는, 5년만에 소속팀을 바꿔야 한다는 현실이 받아들이기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또한 휴스턴은 프랜시스에게는 좋은 추억만이 담긴 도시다. 두 팀간의 트레이드 발표 후, 프랜시스는 인터뷰에서 서운한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만큼 그는 휴스턴을 떠나기 싫었 던 것이다.

 

하지만 프랜시스에게 이 트레이드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그 이유는 바로 그의 감독은 더이상 제프 밴 건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
당시 올랜도 매직의 감독 조니 데이비스는 밴 건디와는 달리 빠른 템포의 농구를 선호했다. 1996-1997 시즌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감독을 맡았었던 데이비스는 당시 신인이었던 앨런 아이버슨을 중용했던 스타일을 프랜시스에게 그대로 적용시키려 했던 것이다.

 

2004-2005 시즌, 프랜시스는 빠른 템포의 시스템에서 자신만의 경기력을 선보이며 부활했다. 그러나 또다른 이별이 프랜시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2004-2005 시즌 도중, 팀 수비력에 큰 문제가 있었던 올랜도 매직은 프랜시스의 백코트 파트너이자 절친인 커티노 모블리를 새크라멘토 킹스의 덕 크리스티와 맞바꾼 것이다.


프랜시스에게는 또 한번의 충격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트레이드 이후 그는 인터뷰에서 구단에 대한 실망감과 분노를 한꺼번에 표출했다. 인생 최고의 동반자였던 어머니를 잃었던 프랜시스에게는, 6년간 함께 백코트를 함께 누볐던 형제같와 같던 커티노 모블리와의 이별은 아마 정신적으로 큰 타격이 있었을 것이다.

 

결국 올랜도에서의 첫 시즌은 프랜시스에게는 최고의 한 해(평균 21.3, 5.8리바운드, 7.0어시스트 기록)였지만 모블리와의 이별로 인한 최악의 한 해 이기도 했다.

 


서서히 지는 프랜차이즈


2005-2006
시즌을 시작으로, 프랜시스는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조니 데이비스가 감독직에서 물러난 후 브라이언 힐이 새롭게 부임하면서 프랜시스의 역할은 다시 한번 축소된 것이다
.

 

브라이언 힐 감독은 프랜시스가 아닌 팀내 젊은 센터 드와잇 하워드를 중심으로 새롭게 팀을 개편했고, 떠오르는 신성 히도 터콜루의 성장, 그리고 2년차 백업 가드 저미어 넬슨의 육성을 중요시 했다. 프랜시스의 존재는 이들의 성장에 방해만 될 뿐이었던 것이다.

 

결국 불만에 쌓인 프랜시스는 브라이언 힐과의 관계가 최악에 이르렀고, 2005-2006 시즌 도중 올랜도 매직은 프랜시스를 뉴욕 닉스의 트레버 아리자와 앤퍼니 페니하더웨이의 만기계약으로 트레이드 하면서 프랜시스의 1년 반의 짧았던 올랜도 생활은 끝이 났다.

 

뉴욕 닉스는 이미 스테판 마버리가 포인트가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결국 프랜시스는 슈팅가드 포지션을 소화해야 했고, 루키시절부터 달아온 등번호 3번 역시 1번으로 바꿔야 했다. 그러나 프랜시스는 더이상 휴스턴 시절의 능력을 보여줄 수 없었다. 고질적인 무릎부상으로 인해 운동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스테판 마버리 역시 프랜시스와 비슷한 스타일의, 볼 소유욕이 강한 선수다. 마버리와 백코트를 나눠갖던탓에 프랜시스는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살리지 못했다.


프랜시스는 결국 닉스에서 자신의 진가를 제대로 보여주지도 못한 채 2007년 여름,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로 트레이드 된다. 트레이드 직후, 트레일블레이저스는 프랜시스의 남은 2년간 3000만불의 계약을 해지(buy out)하면서 그는 자유계약 선수가 되었다.

 

같은 해 여름 프랜시스는 고향팀 휴스턴 로켓츠와 2-600만불에 계약하며 귀환했다. 하지만 2007년의 휴스턴은 자신이 알던 예전의 휴스턴이 아니었다. 야오밍은 리그 정상급 센터로 성장했고 팀의 에이스는 자신의 트레이드 상대였던 트레이시 맥그레이디였다. 팀 내 주전 포인트가드는 자신이 아닌 레이퍼 알스턴이었으며 심지어 감독까지 제프 밴 건디가 아닌 릭 아델만이었다.

프랜시스의 기량 역시 예전의 그것이 아니었다. 거기다 대퇴근 부상까지 생기며 그의 몸상태는 NBA 경기를 소화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결국 프랜시스는 2007-2008 시즌 휴스턴 로켓츠 소속으로 단 10경기(3경기 선발출전)만을 소화한 후 더이상 NBA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2008년 겨울, 로켓츠는 프랜시스를 멤피스 그리즐리스의 2011 2라운드 픽과 트레이드 했고, 그리즐리스는 2009 1월에 프랜시스를 웨이브 했다. 루키시절, 그리즐리스를 거부했었던 프랜시스는 결국 그리즐리스에 의해 NBA 무대에서 초라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너무나도 특별했던 스티브 프랜시스
, 그의 파란만장했던 농구인생 총정리.


사람들은 그를 화려했던 공격형 가드라고 표현할 것이다
.
다른 몇몇은 그를 장단점이 극명하게 드러났던 한계가 있던 선수라고 말할 수도 있다. 올스타급 선수였으나 부상으로 인해 전성기가 짧았던 안타까운 선수라고 할 사람들도 있을것이며, 트러블 메이커라고 손가락질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농구선수가 아닌 한 인간으로 본다면 아마 필자는 그를 이렇게 평가하고 싶다.

 

"누구보다도 불리한 위치에서 시작했지만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기어이 자신의 꿈을 이루었던 불굴의 정신력을 지닌 인간승리의 표본"

 

물론 그는 트러블 메이커였다.


규칙 위반은 기본이었고
, 전국TV 생중계 하프타임 인터뷰에서 심판욕을 대놓고 할 정도의 다혈질적인 성격까지..프랜시스는 분명 결점이 있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꿈을 위해 그가 달려온 길을 돌이켜보자.


프랜시스는 단
1년만의 고등학교 정식 농구경험 외에는 길거리에서 그의 농구 실력을 갈고 닦았다. 덕분에 그는 대학교에서의 스카웃을 받지 못했고 고등학교 시절 어머니를 떠나보내며 당분간 농구공을 손에 잡지 않았다. 포기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NBA선수처럼 대학교 무대를 평정할 기회조차 없었다. 그가 NCAA 1부리그를 경험한 것은 3학년이 되고 나서부터였다. 대학교 1, 2학년은 4년제가 아닌 2년제 전문대에서 활약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매릴랜드 대학 소속으로 맹활약하며 NBA 드래프트 2순위로 리그에 입성한다. 필자는 프랜시스가 NBA 선수로 뛰는 것이 인간승리 그 자체라고 표현하고 싶다.

중도 포기할 수도 있었던 상황들을 프랜시스는 매번 이겨냈기 때문이다.

 

프랜시스가 달려온 길을 볼때마다 매번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과연 그가 어려서부터 길거리 농구가 아닌 체계적인 정식 농구 시스템에서 자라났다면 어땠을까? 대학교 1학년부터 NCAA 1부리그의 치열한 무대를 경험했다면 어땠을까?


그는 아마 현재 우리가 알고있는 것보다 훨씬 훌륭한 선수가 되지 않았을까
.

 

길거리 농구가 배출한 또 한명의 스타 플레이어, 3번의 올스타 선정에 2000년대 초반 공격형 포인트가드의 표본으로 떠올랐던 선수, 상대 센터를 앞에두고 인 유어 페이스 덩크를 무지막지하게 먹였던 극강의 운동능력의 소유자, 그리고 안타깝게 사라진 특별한 재능 스티브 프랜시스.

 

비록 아무도 모른게 쓸쓸히 사라졌으나 팬들은 스티브 프랜시스 그 이름을 기억 할 것이며 그가 남긴 전설은 NBA의 역사 속에 살아 숨쉴 것이다.


스티브 프랜시스(1999-2008)

생애통산 576경기 출전(543경기 선발)
평균 37.6분 출전 / 18.1점, 5.6리바운드, 6.0어시스트, 1.5스틸
1999-2000 시즌 신인왕 수상, 올스타 선정 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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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COLUMNS/HELTANT79 2009. 11. 5. 15:45

2010년 여름, 르브론의 선택은?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이 주제가 지겹다는 걸 알고 있다. 솔직히 필자도 지겹다.

하지만 르브론 제임스의 2010년 거취는 벌써 2년째 리그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다. 뉴욕의 거대 언론들은 매일같이 '르브론 뉴욕행 가능성' 기사를 쏟아내고 있고, 많은 팬들이 그런 기사에 관심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말이 말을 낳으며 잘못된 사실에 기반한 어이없는 소문이 만들어지고, 이런 소문이 또다시 기사로 재포장되는 일이 되풀이된다. 여기에 르브론 본인이 어떤 방식으로도 확답을 주지 않고 있어 논란은 갈수록 증폭되고 있다.

'뜨거운 감자' 르브론의 2010년 여름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



일단 억측은 배제하자

Lebron James with halo
Lebron James with halo by Craig Hatfield 저작자 표시

'부자 구단' 뉴욕 닉스는 르브론에게 훨씬 많은 연봉을 안겨줄 수 있다
- 사실이 아니다. NBA 규정상 한 선수에게 무한정 많은 연봉을 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연차별로 연봉 상한액이 정해져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뉴욕이나 클리블랜드나 르브론에게 줄 수 있는 연봉은 리그 규정에 의한 최고 연봉 뿐이고, 양측 모두 기꺼이 최고 연봉을 줄 용의가 있다.

르브론이 뉴욕으로 가면 나이키가 거액의 보너스를 선사할 것이다
- 몇 년 전까지는 사실이었지만 지금은 사실이 아니다. 2003년 데뷔할 때 나이키와 맺은 계약에는 '뉴욕 등 대도시로 이적할 경우 인센티브 제공'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2006년 여름 재계약을 맺을 때는 위의 조항이 삭제되었다. 다시 말해 르브론이 뉴욕으로 이적한다 해도 나이키가 르브론에게 보너스를 줘야 할 이유는 없다.

르브론이 뉴욕 양키스를 좋아하므로 뉴욕으로 갈 것이다
- 르브론이 좋아하는 스포츠 팀을 꼽아보자. 물론 르브론은 양키스의 팬이다. 고향 팀인 클리블랜드 인디언스가 양키스와 경기를 할 때 양키스 모자를 쓰고 나타났던 것은 유명한 일화다. 하지만 양키스는 르브론이 좋아하는 팀의 일부에 불과하다. 고등학교 2학년까지 풋볼 선수로도 활약했던 르브론이 가장 좋아하는 NFL 팀은 댈러스 카우보이스다. 르브론은 댈러스 원정을 갈 때마다 카우보이스의 열성 팬임을 밝혀왔다. 만약 대학을 갔다면 어느 대학으로 갔을 것이냐는 질문에는 무려 10개 이상의 대학 이름을 댔다.
자, 르브론은 2010년 어디로 향할 것인가? 뉴욕인가, 댈러스인가? 아니면 미시건 대학의 디트로이트? 오레건 주립대의 포틀랜드는 어떤가?

르브론은 친구 제이 지가 지분을 갖고 있는 뉴저지 네츠나 C.C. 사바시아가 추천한 뉴욕으로 갈 것이다
- 친구는 클리블랜드에도 많다. 얼마 전 다큐멘터리 영화에도 함께 나온 죽마고우들은 모두 클리블랜드가 속한 오하이오 주에 살고 있다. 그들은 제이 지나 사바시아보다 르브론과의 관계가 훨씬 깊은 친구들이다.
설사 르브론이 우정을 중시한다 해도, 자신의 인생이 걸린 문제를 단지 우정에 따라 결정할까? 단지 친구가 있기 때문에 직장을 옮기려 하는 사람은 극히 적을 것이다. 당사자인 제이 지부터가 '우정과 비즈니스는 별개'라고 말하고 있다.

르브론은 줄곧 뉴욕이란 도시에 호감을 표시해왔다. 르브론 뉴욕행의 강력한 증거다.
- 르브론은 뉴욕을 사랑한다. 대다수의 미국인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게다가 뉴욕은 NBA 선수에게 가장 큰 시장이다. 그런데 뉴욕에 원정 가서 '뉴욕이 싫다'라고 말하는 선수가 있을까?
지난 여름 르브론은 뉴욕에서 자신의 다큐멘터리 영화 '모어 댄 어 게임' 시사회를 가지면서 '(뉴욕 홈구장인)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뛰는 것은 커다란 영광'이라고 말했고, 뉴욕 언론은 이를 일제히 대서특필하며 르브론이 뉴욕행을 선택할 징조라고 보도했다. 글쎄, 적어도 필자는 우리나라에 영화 홍보하러 와서 '한국 극장은 별로군요'라고 말하는 헐리우드 스타를 본 적이 없다.

르브론은 이번 오프시즌에 클리블랜드와 계약 연장을 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부했다. 또한 2010년 이후 자신의 거취에 대해서도 함구하고 있다. 이것은 르브론의 마음이 클리블랜드에서 떠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2010년에 FA 자격을 얻는 다른 선수들은 어떻게 했는지 알아보자.
드웨인 웨이드: 연장 계약 거절, 2010년은 생각지 않고 일단 이번 시즌에 집중하겠다고 답변.
크리스 보쉬: 연장 계약 거절, 팀의 현 상황에 만족하며 이적 가능성에 대해서는 노 코멘트.
아마레 스타더마이어: 연장 계약 논의하지 않음, 정말로 피닉스 선즈를 사랑하지만 비즈니스는 비즈니스이므로 2010년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고 답변.
마이애미 히트와 토론토 랩터스, 피닉스는 내년 여름에 웨이드, 보쉬, 스타더마이어를 잃게 되는 걸까?
이들이 계약 연장을 하지 않고 있는 이유는 뒤에 설명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이들이 팀에서 마음이 떠났다고 단정지을 수 없다.

위의 소문들은 르브론의 2010년 거취에 대해 알려진 소문 중 사실과 다른 대표적인 것들이다. 이런 사실무근의 소문들이 아니더라도 뉴욕이 르브론 영입을 부르짖을 이유는 충분히 있고, 클리블랜드 역시 르브론을 지킬 수 있다고 자신할 이유가 있다. 먼저 르브론의 이야기부터 들어보자.



르브론이 밝힌 '르브론 계약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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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AAA2633 by Keith Allison 저작자 표시동일조건 변경허락

르브론이 어떤 선택을 하겠다고 공언한 적은 없지만 몇 가지 단서는 남긴 바 있다. 르브론이 밝힌 자신의 계약 조건은 다음과 같다.

우승 가능성이 있을 것
- 르브론은 NBA 우승을 열망하고 있다. 특히 마이클 조던이 처음으로 우승한 데뷔 7년째를 맞는 이번 시즌은 더더욱 그렇다. 르브론은 클리블랜드가 우승권 전력을 갖추도록 팀 프런트에 계속해서 압력을 가해왔고 이는 르브론을 영입하려 하는 다른 팀들도 마찬가지다. 이미 작년 인터뷰에서 '팀 선택의 기준은 다년간 우승 가능성'임을 언급한 바 있다.

자신이 리더일 것
- 지난 시즌 MVP에 오른 르브론은 다음 계약 기간이 자신의 전성기임을 알고 있다. 르브론은 이 기간 동안 NBA 역사에 영원히 남을 업적을 올리고 싶어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팀이 필요하다.

경제적 이익이 최고 수준일 것
- 르브론은 인터뷰에서 자신의 꿈이 세계 프로스포츠 역사상 최초의 억만 장자(Billionaire)임을 밝힌 바 있다. 르브론은 자신이 갖는 상품 가치를 잘 알고 있으며 이를 높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다. 조던이 그랬던 것처럼 스포츠 스타의 범주를 뛰어넘는 경제적 영향력을 가질 수 있다면 르브론의 마음도 움직일 것이다.

클리블랜드와 뉴욕 모두 르브론이 밝힌 위와 같은 조건들을 자신들이 충족시켜줄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다. 이들이 르브론 계약을 자신하는 이유를 알아보자.



뉴욕이 르브론 영입을 자신하는 이유


NBA 규정상 르브론은 현 속팀인 클리블랜드에 남을 경우 더 많은 연봉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뉴욕이 줄 수 있는 돈은 연봉 뿐이 아니다. 뉴욕은 세계에서 가장 큰 스포츠 시장이다. 아무리 성적이 떨어져도 입장 수익, 방송 중계권료, 광고료 등으로 항상 흑자를 챙긴다. 선수도 마찬가지로, 뉴욕에서 별다른 활약을 펼치지 못했던 스테픈 마버리조차 미국 저지 판매 5위로 만들어준 바 있다. 리그에서 가장 각광받고 있는 르브론이 뉴욕에 입성한다면 그 경제효과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뉴욕 닉스의 모기업에서는 벌써부터 르브론에게 케이블 채널 하나를 통째로 안겨주겠다고 공언한 상황이다.

비록 2010년을 위해 당장의 전력 강화를 포기해 팀 성적이 떨어져 있지만, 2010년 이후 뉴욕의 가능성은 높은 편이다. 높은 잠재력을 지닌 다닐로 갈리날리와 윌슨 챈들러 등이 루키 계약에 묶여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2010년 확정 연봉이 2,700만 달러에 불과해 르브론에게 최고 연봉을 안겨준 후에도 추가 선수 영입이 가능하다. 또한 야오 밍, 카멜로 앤써니 등이 FA로 풀리는 2011년에는 자레드 제프리스와 에디 커리의 합계 1,800만 달러의 연봉도 빠진다. 게다가 뉴욕은 농구선수에게 클리블랜드보다 훨씬 매력이 큰 시장이다. 클리블랜드는 이번 여름 소속 도시의 매력이 떨어져 론 아테스트와 트레버 아리자를 모두 놓친 바 있다.

르브론은 뉴욕에서 1년만 기다리면 된다. 1년만 기다리면 프런트가 최고의 FA들을 영입해줄 것이고, 르브론은 최고의 프랜차이즈에서 최고의 전력으로 최고의 부와 명예를 향해 달려나갈 수 있다. 1년을 기다리는 보상으로는 충분하지 않은가?


클리블랜드가 르브론 재계약을 자신하는 이유

뉴욕에 간다고 해서 무조건 부와 명예를 보장받는 것은 아니다. 큰 기대를 받고 간 선수들 중에는 오히려 자신의 상품가치를 추락시킨 선수도 있다. MLB 월드 시리즈에서 맹활약하고 있는 알렉스 로드리게스가 작년까지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생각하면 쉽게 알 수 있다. 르브론도 뉴욕에 가서 지금보다 많은 승리를 거두지 못할 경우 '돈 때문에 고향팀을 저버린 선수'로 이미지가 추락할 수도 있다.

따라서 100% 확실한 수입인 연봉이 불확실한 '빅마켓 효과'보다 중요해진다. 현행 NBA 규정은 원 소속팀과 재계약할 경우 더 많은 연봉과 더 긴 계약기간을 보장한다. 르브론이 2010년 여름 FA선언을 한 후 클리블랜드와 5년간 재계약할 경우 뉴욕으로 가는 것에 비해 764만 달러를 더 받을 수 있다. 또한 뉴욕행을 선택할 경우 보장받을 수 없는 6년째 계약도 맺을 수 있으며, 그 해의 연봉은 최고 2,615만 달러에 달한다. NBA는 연차 수에 비례해 최고연봉액이 높아지므로 2010년 FA 선언 후 2년간 재계약하고 10년차 기준 최고연봉액을 받을 수 있을 때 또다시 재계약하면 훨씬 많은 연봉을 받을 수도 있다.

클리블랜드는 2010년 이후 팀 전력도 결코 뉴욕에 뒤지지 않는다. 모 윌리암스, 딜론테 웨스트, 앤더슨 바레장 등 지난 시즌 정규리그 1위를 함께 했던 선수들이 고스란히 남는다. 여기에 새로 영입한 자마리오 문과 앤써니 파커의 계약 역시 남아있게 된다. 경험이 쌓인 J.J. 힉슨은 팀의 핵심 빅맨으로 성장할 것이다. 2011년에는 르브론에게 최고 연봉을 주더라도 총연봉이 4,000만 달러에 불과해 2011년 FA인 야오, 앤써니, 파우 가솔, 데이비드 웨스트 등을 최고 연봉으로 입할 수 있다. 또한 뉴욕이 FA 선수들에게 매력적인 시장인 것과 마찬가지로 르브론이 재계약한 클리블랜드 역시 매력적인 팀이 될 것이다. 뉴욕이 2010년 이후 FA 영입 여유가 큰 것은 사실이지만 수비를 중시하는 르브론의 취향으로 볼 때 뉴욕은 별로 매력적인 팀이 아니다. 게다가 뉴욕은 2010년 신인 지명권도 없다.

르브론은 이미 2006년 클리블랜드와 연장 계약을 해본 경험이 있다. 만약 르브론이 확고하게 뉴욕행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연장 계약을 하지 않고 2008년 비제한 FA가 됐을 것이다. 르브론이나 웨이드, 보쉬 등이 2006년 단기 재계약에 그친 이유는 자신의 미래 가치를 믿고, 당장의 안정성보다는 몇 년 후의 '빅 딜'이나 현 소속팀에 대한 무언의 압력 가능성을 높이려 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클리블랜드와 토론토는 르브론과 보쉬를 지키려 이번 여름 공격적인 투자를 했으며 웨이드의 마이애미 역시 2010년을 노리고 준비중이다.

르브론은 바보가 아니다. 지금까지 르브론이 보인 행보는 20대 초반의 젊은이가 아니라 차라리 노련한 비즈니스맨을 떠오르게 했다. 불확실한 대박을 위해 모든 것이 갖춰진 현실을 외면하는 것, 자신의 가치를 올릴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며 미래를 못박아버리는 것 등은 모두 '비즈니스맨' 르브론이 할 일이 아니다.



2010년의 경쟁자, 우리도 있다


뉴저지는 클리블랜드와 뉴욕을 제외한 르브론 영입 경쟁팀 중 가장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르브론의 절친한 친구인 제이 지가 지분을 소유한 뉴저지는 최근 러시아 재벌이 대주주가 되며 뉴욕 브루클린으로 연고지를 옮길 예정이다. 뉴욕행을 원하는 선수들에게 뉴욕 닉스 말고도 대안이 생기는 셈이다. 올스타 가드 데빈 해리스를 비롯해 브룩 로페즈, 코트니 리 등 젊고 재능있는 선수들이 포진한 뉴저지는 르브론이 충분히 관심을 가질 만한 팀이다.

저메인 오닐의 계약이 끝나는 마이애미도 2010년의 큰 손이 될 것이다. 웨이드, 마이클 비즐리, 마리오 찰머스 등을 모두 데리고도 총연봉이 2,800만 달러에 불과하다. 게다가 마이애미가 속한 플로리다 주는 소득세율이 낮기로 유명하다. 르브론이 웨이드와 리더십을 공유할 생각만 있다면 마이애미행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데릭 로즈와 루올 뎅, 커크 하인릭 등이 건재한 시카고 불스도 요주의 대상이다. 마이클 조던의 업적을 뛰어넘으려 하는 르브론이 조던의 그늘이 가장 강한 곳에서 뛰려 할 지는 의문이지만 팀 연봉 상황과 현재 전력 면에서는 결코 매력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밖에 트레이시 맥그래디의 계약이 만료되는 휴스턴 로케츠, 한때 클리블랜드의 숙적이었던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등이 르브론에게 최고 연봉을 줄 수 있으면서도 팀 전력을 유지할 수 있는 팀으로 꼽힌다.



'2010년 기사'를 즐기는 팬의 자세


르브론은 2010년 여름 어떤 선택을 할 지 아직까지 결정을 내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이미 결정을 내려놓고도 자신의 상품 가치를 위해 확언을 하지 않고 있을 수도 있다. 단지 뉴욕행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시그니처 농구화인 '줌 르브론' 시리즈의 뉴욕 양키스 버전을 발매, 뉴욕에서 엄청난 수익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르브론은 고등학생 시절부터 이런 식의 마케팅에 본능적인 감각을 보여왔다.

르브론 말고도 많은 스타들이 FA로 풀리는 2010년이기 때문에 소위 '2010년 프로젝트'에 대한 관심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높다.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따르는 법. 수많은 매체들이 2010년 FA가 되는 선수들의 한 마디라도 따내기 위해 혈안이 돼 있고, 이들의 입에서 나온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크고 작은 과장을 거쳐 기사화된다. 7일(한국시각) 이번 시즌 한 번밖에 없는 뉴욕 원정을 떠난 르브론 역시 기자들의 질문 세례를 각오해야 한다.

이렇게 쏟아져나오는 2010년 기사들을 접한 NBA 팬은 자칫 혼란에 빠질 수도 있다. 한 선수에게서 나온 똑같은 발언이 전혀 다르게 해석돼 기사화되기 때문이다. 지난 여름에 르브론이 '고향 애크런에 대한 내 충성심은 확고하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클리블랜드 언론은 '(애크런 옆에 위치한) 클리블랜드 잔류 의사를 밝힌 것'으로, 뉴욕 거대 언론은 '르브론의 고향은 애크런이지 클리블랜드가 아니므로 클리블랜드에는 아무 의무감이 없음을 시사한 것'으로 각각 보도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2010년 기사'의 당사자를 응원하는 팬들이 이런 기사에 혼란을 받거나 오해를 갖지 않으려면 먼저 출처를 정확히 살펴야 한다. 지역지가 출처인 경우 자기 지역 팀에 유리하게 해석된 기사일 가능성이 높다. 최근에는 미국 현지의 인터넷 팬 포럼에서 나온 트레이드 아이디어가 '트레이드 임박' 기사로 둔갑하는 어이없는 일도 종종 벌어지기 때문에 출처를 살피는 일은 큰 도움이 된다. 기사 내용 중 선수가 직접 한 말과 이를 통한 기자의 평론 및 추측을 구분해서 받아들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2010년 여름, 하지만 팬들은 그만큼 즐겁다. 머리를 싸쥐는 일은 선수와 프런트, 그리고 기자들에게 맡기고, 최고의 선수로써 2010년 여름을 맞이하기 위해 모든 것을 코트에 쏟아붓는 르브론의 열정을 즐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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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COLUMNS/SPECIAL 2009. 10. 19. 12:00

2009-10 NBA 애틀란틱 디비전 프리뷰

BY 알 수 없는 사용자


글: 조지형(헤드코치)

다가올 2009-2010시즌, 애틀랜틱 디비전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각양각색'이다.

우승을 노리는 보스턴 셀틱스를 비롯해서 리빌딩에 돌입한 뉴저지 네츠, 팀 성적보다는 '2010 르브론 제임스 잡기 프로젝트'에 더 관심이 많은 뉴욕 닉스, 유럽파 선수들이 주축을 이룬 토론토 랩터스, 엘튼 브랜드가 돌아온 필라델피아 76ers 등 팀별 전력과 지향점이 제각각이다. 그래서 더욱 흥미로운 애틀랜틱 디비전 다섯 팀의 2009-10시즌을 전망해보았다.


▷ 보스턴 셀틱스 (2008-09시즌 성적 : 62승 20패)


In_
라쉬드 월라스, 셸든 윌리엄스, 마퀴스 다니엘스, 레스터 허드슨
Out_ 리온 포우, 미키 무어, 게이브 프루트

라이벌 팀, LA 레이커스가 론 아테스트를 영입하며 2연패에 열을 올리자 보스턴도 이에 뒤질세라 라쉬드 월라스, 마퀴스 다니엘스를 데려오며 만만치 않은 전력을 구축했다. 특히 월라스의 가세는 기존의 빅3에 대한 의존도를 퍽 줄여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예전처럼 함부로 가넷에게 집중 수비를 하는 장면도 쉽게 보긴 어려울 전망. 또한 빅3와 함께 주전으로 뛰고 있는 레이존 론도와 켄드릭 퍼킨스의 성장도 눈여겨 볼 부분이다. 2008년 우승 멤버이자 FA였던 글렌 데이비스와 에디 하우스는 그대로 팀에 잔류하면서 리온 포우의 이적에 대한 아쉬움을 덜었다. 보스턴이 조심해야 할 점이라면 주축 선수들의 건강뿐이다.
 

▷ 토론토 랩터스 (2008-09시즌 성적 : 33승 49패)


In_
더마 데로잔, 히도 터콜루, 데븐 조지, 앤트완 라이트, 재럿 잭, 레지 에반스, 아미르 존슨, 소니 윔스
Out_ 앤쏘니 파커, 제이슨 카포노, 숀 매리언, 크리스 험프리즈, 나단 자와이, 로코 우직

오프 시즌 동안의 성적표는 훌륭하다. 물론 이번에도 유럽 출신 선수들을 대거 영입했지만 취약한 부분을 메우는데 초점을 맞췄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히도 터콜루에 대한 기대가 크다. 호세 칼데론-크리스 보쉬의 픽-앤-롤에 의존도가 높았던 공격에 다양성을 더해줄 것으로 보인다.

골밑에는 저메인 오닐보다 내구성이 좋은 라쇼 네스트로비치가 들어왔고, 토론토의 미래로 자리매김한 안드레아 바르냐니의 성장도 주목할 만 한 부분이다. 지난 시즌에 비해 확실히 팀의 면면이 좋아졌다. 포지션별 역할 분배만 잘 이뤄진다면 '태풍의 눈'이 될 가능성도 크다.


▷ 필라델피아 76ers (2008-09시즌 성적 : 41승 41패)


In_
즈루 할리데이, 제이슨 카포노, 로드니 카니, 프리모즈 브레첵
Out_ 안드레 밀러, 레지 에반스

브랜드가 돌아오면서 골 밑의 무게감은 더해졌지만 안드레 밀러가 떠나면서 백코트의 깊이는 얇아졌다. 밀러의 빈자리를 채울 루이스 윌리엄스의 역할이 중요하다. 윌리엄스가 보여줄 영향력에 따라 팀 성적도 크게 달라질 것이다.

다행히 새로 부임한 에디 조던 감독이 모션 오펜스에 능하고, 팀에 운동능력이 좋은 선수들도 많아 빨리 안정을 찾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접전 상황에서는 다소 약점을 드러낼 가능성이 높다.


▷ 뉴욕 닉스 (2008-09시즌 성적 : 32승 50패)


In_ 조던 힐, 게이브 프루트, 다르코 밀리시치, 토니 더글라스, 쑨예
Out_ 크리스 윌콕스, 퀸튼 리차드슨

FA였던 데이비드 리와 네이트 로빈슨이 팀에 잔류하긴 했지만 이렇다 할 변화는 없었다. 모든 이가 알다시피 뉴욕은 2010년 여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기 때문에 당장의 2009-2010시즌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다.

문제는 선수들도 팀의 그러한 심산을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선수들의 팀에 대한 충성심을 충분히 의심하게 한다. 최악의 경우 꼴찌 팀으로 추락할 수도 있다. 뭐 그래도 뉴욕 프런트는 눈 한 번 깜빡이고 말겠지만.


▷ 뉴저지 네츠 (2008-09시즌 성적 : 34승 48패)


In_ 테렌스 윌리엄스, 래퍼 앨스튼, 토니 배티, 코트니 리
Out_ 빈스 카터

리그에서 전력 약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팀 가운데 하나다. 빈스 카터가 팀을 옮기면서 데빈 해리스의 어깨가 무거워졌다. 이로서 해리스는 팀의 에이스로서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해리스와 브룩 로페즈를 제외하면 기량이 출중한 선수는 부족하지만 쓸 만한 자원은 많은 편이다.

3점슛, 리바운드, 블록슛 등등 부문별로 장점을 가진 선수들을 보유하고 있긴 하지만 문제는 세기가 약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조직력을 다지는데 더욱 심혈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다양한 능력들이 적재적소에 잘만 발휘된다면 플레이오프도 충분히 노려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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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 명문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요즘 성적이 신통치 못한 뉴욕 닉스. 현재 자산 규모만 608 Million 달러인 이 부자구단은 1946년에 BAA 리그의 한 팀으로서 설립되었습니다. 닉스는 1950년에 넷 클리프튼이란 흑인선수와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리그에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리그 역사상 첫 흑인선수를 영입했던 이 구단은 그 이전인 1947년에 와따루 미사까라는 일본선수를 영입한 적도 있습니다.

 

파이널에 8번 진출했고, 70년과 73년에 걸쳐 두 번의 우승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구단입니다. 레이커스, 재즈와 더불어 아직까지 한 시즌에 60패를 해보지 않은 세 팀 중 하나인 닉스는 긴 역사에도 불구하고 리그 MVP는 단 한 명 밖에 배출하질 못 했습니다. 하지만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닉스 출신의 선수들은 무려 12명이나 됩니다. 그리고 9명이 닉스 구단에 의해 영구결번이 되어 있습니다 - 월트 프래지어 (#10), 딕 바넷 (#12), 얼 먼로우 (#15), 딕 맥과이어 (#15, 감독), 윌리스 리드 (#19), 데이브 드부셔 (#22), 빌 브래들리 (#24), 패트릭 유잉 (#33), 레드 홀즈만 (#613, 감독, 613승을 거뒀다는 의미입니다). 이 중, 프래지어, 먼로우, 리드, 드부셔, 유잉 등 다섯 명과 제리 루카스는 역대 최고 50인에도 선정이 됐습니다.

 

 

 

1973년도 우승팀 사진입니다.

빌 브래들리 (24), 필 잭슨 (18), 데이브 드부셔 (22), 윌리스 리드 (19), 제리 루카스 (32) 등이 뒤에 서있고, 앞선에 헨리 비비 (17, 마이크 비비의 아버지), 윌트 프래지어 (10), 레드 홀즈만 감독,
얼 먼로우 (15) 등의 모습도 보입니다.

 

 

, 그러면 이제 제가 선정한 All-Time 뉴욕 닉스팀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스타팅 5

 

포인트 가드 - 월트 프래지어 (Walt Frazier, 193cm, 1967~1977)

  

Walt Frazier vs Wilt Chamberlain
Walt Frazier vs Wilt Chamberlain by Vedia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1967 1라운드 드래프트 5번 픽으로 뉴욕에 둥지를 튼 프래지어는 All-NBA 팀에 6, All-NBA Defensive 퍼스트 팀에 7회 선정된 뉴욕 닉스 구단 사상 최고의 포인트 가드였습니다. 총 어시스트 수에서 아직도 깨지지 않는 닉스 구단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프래지어는 역대 포인트 가드 랭킹에서도 5위 안에 이름을 올리는 선수입니다.

 

커리어 평균으로 18.9, 5.9리바운드, 6.1어시스트, 1.9스틸, 49.0% 야투율을 기록한 프래지어의 플레이 스타일은 한 마디로 빨랐습니다. 포인트 가드로선 큰 편에 속했지만, 수비 스타일이 마치 고양이처럼 민첩했던 선수입니다. 프래지어는 장거리 외곽슛을 보유하지는 못 했습니다. 하지만, 스피드를 이용한 돌파나 미드레인지 점프슛. 턴어라운드 점프슛 등이 매우 정확했습니다. 화려한 묘기가 없이도 인기가 높았던 매우 효율적인 농구를 구사한 명 가드였습니다. 특히, 롤스로이즈를 몰고 다니며 항상 패션을 이끄는 모자와 외투 착용으로도 유명했던 레전드입니다. 1970년과 1973, 두 번에 걸쳐 우승의 영광을 누렸으며, 70년 파이널 7차전에선 36점에 19어시스트로 맹활약 했습니다.

 

 

슈팅 가드 - 얼 먼로우 (Earl "The Pearl" Monroe, 191cm, 1972~1980)

  

Calvin Murphy vs Earl Monr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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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핀 무브와 헤지테이션 무브의 창시자, 얼 먼로우는 학창시절부터 필라델피아 시 길거리 농구의 신화로 알려져있던 인물입니다. 당시에 얻은 "블랙 지저스"라는 특이한 별명이 후에 덴젤 워싱턴 주연의 농구영화 'He Got Game'에서 레이 앨런의 영화 속 이름인 '지저스'로 인용되기도 했지요. 이 "흑인 구세주"의 농구인생은 화려했습니다.

 

1967년 볼티모어 불렛츠에 의해 전체 2번픽으로 드래프트된 먼로우는 같은 해 드래프트된 뉴욕 닉스의 월트 프래지어와 치열한 라이벌 관계를 유지했었습니다. 그래서 71~72 시즌 중간에 그를 닉스로 데려온 결정은 큰 모험이었습니다. 대학에서나 프로에서나 언제나 팀의 에이스였던 선수가 과연 자신의 평생 라이벌이었던 프래지어와 호흡을 맞출 수 있겠는가? 이를 긍정적으로 바라본 시각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는 한낱 기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매 경기 20개를 웃도는 야투시도를 해왔던 먼로우는 닉스에서 철저히 자신을 죽이며 팀의 일원으로 녹아들었습니다. 평균득점(커리어 평균 18.8)은 눈에 띄게 줄었지만, 대신 닉스는 리그 전체를 파죽지세로 몰아붙일 수 있는 막강한 전력을 갖출 수가 있었습니다. 체임벌린과 웨스트의 레이커스도, 압둘자바와 오스카 로벗슨의 벅스도, 하블리첵과 코웬스의 식서스도, 닉스의 프래지어-먼로우-윌리스 리드-데이브 드부셔 등이 안팎에서 터뜨리는 파상공세엔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73년도의 우승은 그의 이런 희생에 대한 보상이었습니다. 68년 신인왕이었던 먼로우는 69년엔 All-NBA 퍼스트 팀에도 이름을 올렸던 닉스 역사상 최고의 슈팅 가드입니다.

 

 

스몰 포워드 - 버나드 킹 (Bernard King, 200cm, 1982~1987)

 

Bernard 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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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스 소속으로 뛴 시즌은 비록 4시즌 밖에 안 되지만, 80년대 초중반에 리그를 쥐고 호령했던 그의 강력한 카리스마와 무시무시한 역대 최고급의 공격력은 그를 닉스 올타임 팀의 선발진에 놓고도 남음이 있게 합니다. 버나드 킹, 그는 '불운과 의지'의 사나이였습니다. 루키시즌에 이미 24.2, 9.5리바운드를 기록하며 화려한 신고식을 한 킹은 프로 3년차 때 입은 심한 부상으로 선수생명에 위협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각고의 노력 끝에 다음 시즌에 화려하게 재기하며 'Comeback Player of the Year' 상의 주인공이 됩니다.

 

82년에 닉스로 트레이드된 후부터 그의 공격력은 거의 "언터쳐블" 수준으로 급상승합니다. 특히, 84년 올스타 게임 직후, 두 게임 연속으로 50득점을 한 후의 킹은, 당시 최고의 포워드라 불리웠던 래리 버드나 줄리어스 어빙 조차도 "현 리그의 진정한 MVP는 버나드 킹이다"라고 표현을 할 정도의 괴물이었습니다. 이름 그대로 '왕'이었죠. 현재 르브론 '킹' 제임스가 보여주는 리그 내 영향력이나 임팩트를 생각해보시면 얼추 비슷할 것 같습니다. 누구보다도 빠른 슛 타이밍을 자랑하던 그의 턴어라운드 점퍼는 압둘자바의 스카이 훅과 더불어 가장 막기 힘든 슛이었다는 평가도 받았습니다. 간발의 차이로 버드에게 84 MVP를 빼앗긴 킹은, 85년 시즌에도 평균득점 33점으로 승승장구 하고 있었으나, 시즌 55번째 게임에서 심각한 무릎부상을 당하고 맙니다. 28세의 나이로 최전성기에 들어가던 이 위대한 포워드의 전성기는 거기서 사실상 끝이 나고 맙니다. 수없이 많은 재활 끝에 1991년에 평균 28.4점을 기록하며 올스타와 All-NBA 팀에 뽑히는 재기에 성공하지만, 그의 나이는 이미 35세였습니다.

 

 

센터 - 패트릭 유잉 (Patrick Ewing, 213 cm, 1985~2000)

  

EWING /NEW YORK KNICKS - SAN ANTONIO SPURS 93-80

특별한 설명이 필요가 없는 선수죠. 국내에선 90년대 4대 센터 중 한 명이었다는 소리를 듣는 위대한 센터입니다. 대학 초년생 시절부터 이미 빌 러셀과 압둘자바의 대를 이을 재목이라는 평을 받았던 유잉은 대학 4년 동안 조지타운 대를 3번이나 파이널에 올려 놓은 전적도 있습니다. 유잉은 대학 최고의 센터란 소리를 들으며 뉴욕 시민들의 기대를 한 몸에 안고 프로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초창기는 그리 평탄치 않았습니다. 팀엔 이미 올스타에도 뽑힌 적이 있었던 센터, 빌 카트라이트가 버티고 있었고, 유잉은 자신만의 특별한 공격무기를 개발하지 못 했으며, 리바운드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 했습니다. 프로 5년차였던 1989~90 시즌에 맞춰서 턴어라운드 점퍼를 주무기로 장착했고, 또 이 때쯤 되서야 리바운드에도 눈을 떴지요. 이 때부터가 유잉의 전성기입니다. 문제는 같은 컨퍼런스의 마이클 조던과 불스도 그 때부터 전성기로 돌입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번번이 우승의 문턱에서 주저앉아야만 했던 유잉이었습니다. 94년 파이널에서도 6차전, 7차전 모두 간발의 차이로 승리를 내줬고, 이후에도 레지 밀러의 인디애나에게 무릎을 꿇는 등, 유잉은 실력에 비해 정말로 우승복이 없는 선수였습니다. 1986년 신인왕, 1990 All-NBA 퍼스트 팀을 포함 All-NBA 팀 총 10회 선정, 올스타 11회에 빛나는 유잉의 커리어 평균은 21.0, 9.8리바운드, 2.4블락샷입니다.

 

 

파워 포워드 / 센터 - 윌리스 리드 (Willis Reed, 206cm, 1964~1974)

  

Chamberlain vs Willis Reed
Chamberlain vs Willis Reed by Vedia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윌리스 리드는 뉴욕 닉스의 심장과 같은 선수입니다. 뉴욕의 올드팬들은 지금도 윌리스 리드를 닉스 구단 사상 최고의 선수로 꼽는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센터로서는 단신이었으나 탄탄한 몸과 근성, 배짱으로 체임벌린, 빌 러셀, 압둘자바, 데이브 코웬스, 웨스 언셀드와 같은 동시대 최고의 센터들과의 싸움에서 항상 우위를 점했던 빅맨입니다. 큰 경기에서 유독 강했고, 플레이오프에서 만난 레전드급 센터들과의 대결을 대부분 승리로 이끌었던 역전의 용사였습니다. 대퇴부와 허벅지 부상으로 출전이 불가능했던 70년 파이널의 7차전에서 절룩거리는 상태로 등장해 체임벌린과 점프볼을 했고, 닉스에게 경기의 첫 두 골을 선사하며 팀의 사기를 끌어올린 그를 가리켜 닉스팬들은 '수퍼맨'이라 불렀습니다.

 

65년 신인왕이기도 했던 리드는 70년과 73년 두 번의 우승 시즌에 모두 파이널 MVP를 탔으며, 70년엔 리그 MVP와 올스타게임 MVP로까지 선정되어 3관왕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습니다. 동시즌에 All-NBA Defensive 퍼스트 팀에도 이름을 올렸었지요. 리드는 커리어에 걸쳐 18.7, 12.9리바운드를 기록했는데, 블락샷이 기록이 되질 않았어서 그렇지 블라킹도 아주 잘했던 선수입니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기동력도 좋았고, 훅 슛이나 중거리 슛에도 능했습니다. 무엇보다 풋워크가 좋아서 현란한 포스트업 무브로 상대팀 센터들을 페인트존 안에서 농락할 수 있는 기술까지 보유하고 있었죠. 닉스 사상 최고의 선수인 리드를 유잉과 함께 올-타임 팀 선발진의 더블 포스트에 추대합니다.

 

 

 


벤치 멤버들

 

 

파워 포워드 - 데이브 드부셔 (Dave DeBusschere, 200cm, 1968~1974)

 

Dave Debusschere
Dave Debusschere by Vedia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서 커리어의 상반기를 보낸 드부셔는 폴 사일러스와 함께 NBA 최초의 블루칼라워커 형 파워 포워드였다고 칭할 만한 원조 터프가이 중 하나였습니다. 사실, 사일러스와 드부셔의 골밑 몸싸움 대결은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무시무시하고 처절했었어요.

 

디트로이트 시절에도 All-Defensive 팀 제도가 있었다면, 아마도 커리어 내내 All-Defensive 퍼스트팀에만 오르다가 은퇴했을 명 수비수였기도 하지요. 69년부터 74년까지 6년 연속으로 All-Defensive 퍼스트팀에 선정된 직후 은퇴를 했습니다. 그러나 16.1, 11.0리바운드라는 커리어 평균이 말해주듯이 드부셔는 득점력도 뛰어난 수비수였습니다. 그를 디트로이트에서 데려오는 순간, 닉스의 우승 퍼즐이 다 들어 맞았다는 평가를 받았지요. 리드-프래지어-드부셔로 이어지는 삼각편대가 완성됐던 것입니다. 신장은 작았으나 체임벌린을 가장 잘 막았던 선수인 드부셔는 올스타에도 8회나 선정이 됐습니다.

 

 

슈팅 가드 - 앨런 휴스턴 (Allan Houston, 198 cm, 1996~2005)

 

BASKETBALL: Allan HOUSTON

닉스 구단에서 9시즌을 뛰고 은퇴한 휴스턴은 레지 밀러와 더불어 명실공히 90년대 최고의 외곽슈터였습니다. 커리어 3점 성공률이 40%를 넘는 휴스턴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견고한 슈팅 폼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2000년과 2001, 2년 연속으로 올스타에도 선정된 훌륭한 슈팅 가드였습니다.

 

1999년엔 8번 시드의 닉스를, 대들보인 유잉 없이, 스프리웰, 래리 존슨과 함께 파이널로 견인한 바도 있지요. 닉스의 라이벌, 마이애미 히트를 1라운드 5차전에서 회심의 버저비터 중거리 슛으로 꺾고 주먹을 불끈 쥐었던 그의 모습을 기억하는 국내 팬들도 많으실 겁니다. 휴스턴의 커리어 평균은 17.3점이고 플레이오프 평균은 19.3점입니다.

 


콤보 가드
- 존 스탁스
(John Starks, 195cm, 1990~1998)


패트릭 유잉의 전성기와 함께 했던 열정의 가드, 존 스탁스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식품점 배달원을 하며 생활하다가 뒤늦게서야 오클라호마 주립대를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NBA에 드래프트되지도 못 했고, 25세가 되던 1990년에 뉴욕 닉스의 트라이 아웃에 참가해서 눈에 띄이게 됐습니다. 연습시합 중 유잉의 위로 인-유어-페이스 덩크를 시도하던 찰나에 유잉이 밀쳐내면서 무릎부상을 당하게 됩니다. 부상으로부터의 완쾌가 지연되면서 어영부영 닉스의 멤버가 된 그는 92~93 시즌부터 선발진으로 승격이 됩니다. 역시 '인생 한 방' 입니다.

 

숱한 명승부를 연출해내며, 닉스의 백코트를 이끈 스탁스는 94년엔 올스타에, 97년엔 올해의 식스맨에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3점이 매우 뛰어난 선수였으나, 94년 파이널 6차전 막판, 회심의 슛이 올라주원에게 블락을 당했고, 7차전에선 최악의 야투율을 보여서 보기에 안타까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스윙맨 - 빌 브래들리 (Bill Bradley, 196cm, 1967~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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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래들리는 명문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한 수재였습니다. 영국 옥스포드 대학으로부터 장학생 자격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후, 미국 대통령 선거에 후보로 출마까지 했던 인물입니다. 대학시절엔 3년 연속으로 All-America팀에 선정되고, 65년엔 대학 MVP로까지 선정됐습니다.

 

프로 전 커리어를 뉴욕 닉스에서만 보냈던 브래들리는 수비력과 패싱력이 뛰어난 스몰 포워드였습니다 (대학시절엔 가드였습니다). 특히, 속공 상황에서의 연결고리 역할을 누구보다 잘 수행했으며, 중장거리 뱅크샷이 주특기였던 선수입니다. 70년과 73년 우승시즌 때 팀에 없어서는 안 되었을 감초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파워 포워드 - 찰스 오클리 (Charles Oakley, 206cm, 1988~1998)

  


유잉이 카트라이트와 포지션이 겹쳐있는 비효율적인 라인업에 카트라이트 대신 진정한 블루칼라워커 리바운드로서 영입된 빅맨이었죠. 88년에 오클리가 팀에 합류하자마자 닉스의 성적은 전년도의 38승에서 52승으로 훌쩍 뛰었고, 유잉은 자유롭게 자신의 센터 역할에만 충실할 수가 있었습니다.

 

오클리는 꾸준히 두자릿수 리바운드를 잡아주며 유잉의 보디가드 역할을 해주었고, 자신만의 터프한 수비력도 꾸준히 향상시켜 나갔습니다. 94년엔 올스타와 All-Defensive 퍼스트팀에도 선정이 됐습니다. 내구성이 좋아서 웬만하면 부상을 당하는 일이 없던 오클리는 닉스의 90년대 중흥에 반드시 필요했던 선수였습니다.

 

 

포인트 가드 - 마크 잭슨 (Mark Jackson, 186cm, 1987~1992, 2000~2002)

  


마크 잭슨은 닉스 구단에서 총 6시즌 반을 뛰었던 선수로서, 유잉, 오클리와 함께 닉스를 플레이오프 컨텐더로 만들었던 정통 포인트 가드였습니다. 루키시즌에 이미 13.6, 10.6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올해의 신인왕'을 수상했는데, 이는 1라운드 18번픽으로 뽑힌 선수로선 역사에 남을 업적이었습니다.

 

자유투를 던지기 직전 림을 향해 팔을 뻗어보며 마치 거리를 재는 듯한 이상한 습관을 갖고 있기도 했지만, 그의 패싱력은 최고였습니다. 특히 뒤에서 따라오는 선수에게 정확하게 넣어주는 No-look 패스가 일품이었죠. 89년에 올스타에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파워 포워드 / 센터 - 제리 루카스 (Jerry Lucas, 203cm, 1971~1974)

  


by Jeffrey Guterman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1960년 로마 올림픽 금메달의 주역, 제리 루카스는 자신의 커리어 말년 세 시즌만 닉스와 함께 했습니다. 한 구단의 올-타임 팀에 넣기엔 활약한 시즌이 많지가 않았지만, 닉스가 리그를 장악했던 70년대 초반, 팀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는 상징성때문에 백업 빅맨으로 이 팀에 그의 이름을 올렸습니다.

 

시즌 평균 20득점, 20리바운드를 두 번이나 기록했던 신시내티 로열즈 시절이 선수로서의 최전성기였으나, 닉스 시절에도 윌리스 리드와 데이브 드부셔를 보좌하며 리그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프런트라인을 구축하는 데에 일조를 했습니다. 72년 시즌 초반에 리드가 부상으로 시즌을 마감하자, 팀의 주전 센터로서 평균 17, 13리바운드, 4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팀을 파이널로까지 이끌기도 했지요. 루카스는 초창기엔 훅 슛과 플로터 등이 주 공격루트였는데, 닉스 시절엔 중장거리 점프슛까지 장착을 했었습니다. 체임벌린, 러셀 등과 동시대를 뛰었으면서도 All-NBA 팀에 5, 올스타에 7회 선정됐으며, 1996년에 선정된 역대 50인에도 당당히 이름을 올린 레전드 빅맨입니다.

 

 

 

이 외에도 닉스를 거쳐간 수많은 스타 플레이어들이 있습니다. 초창기 선수로는 리치 게린, 해리 갤러틴, 리차드 맥과이어, 밥 맥카두, 마이클 레이 리차드슨, 빌 카트라이트 등이 있겠고, 최근 선수로는 래리 존슨, 라트렐 스프리웰, 스테판 마버리 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닉스에서 뛴 햇수가 너무 적었거나, 구단에 미친 임팩트 면에서 위에 올린 선수들에 비해 약간 밀린다고 판단되어서 제외시켰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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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A의 메카 뉴욕 시티에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30개 구단중 연봉 지출 1위를 달리고있는 뉴욕 닉스에서 가장 많은 연봉을 받고있는 선수가 단 한 경기도 뛰지 못한 채 벤치를 지키고 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스테반 마버리.
한때 NBA를 대표하는 공격형 포인트가드였던 마버리였지만 올시즌 단 한번도 코트를 밟지 못했다.

그의 몸상태에 문제가 있어서도 아니다.
그의 결장 사유는 다름아닌 구단과의 불화 때문이다.
작년 부상으로 시즌 대부분을 벤치에서 지킨 마버리는 올 시즌을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피닉스에서 영입된 댄토니 감독의 영입을 제일 먼저 반긴 선수이기도 했다.
하지만 댄토니 감독은 시즌 전, 마버리는 자신의 계획에 없다고 공언했으며 프리시즌 경기에서도 아주 짧은 출전 시간만을 마버리에게 할애했다. 마버리는 굉장한 허탈감을 느꼈을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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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것은 비극의 시작에 불과했다.
닉스는 마버리에게 트레이드나 웨이브 대신 바이아웃을 제시했다. 바이아웃(Buy-out) 이란 선수 연봉의 일부분만을 지급하고 계약을 해지하는 것이다. 뉴욕은 페이롤을 줄이면서 마버리를 FA로 풀어주려는 복안이었고, 이것이 닉스 구단에게는 최선의 방법이기도 했다 (닉스가 마버리를 웨이브 하려면 마베리에게 총 연봉을 고스란히 지불해야 한다. 또한 트레이드 역시 선수들간의 연봉이 어느정도 맞아 떨어져야 가능함으로, 웨이브나 트레이드 둘다 닉스의 페이롤을 줄이지 못한다)

마버리의 올시즌 연봉은 2290만불에 달한다. 닉스는 처음에는 마버리에게 적은 바이아웃 액수를 제시했다. 하지만 마버리는 자신을 뛰게하던지, 아니면 웨이브를 하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결국 닉스가 마지막으로 제시한 바이아웃 액수는 그의 연봉보다 100만불 낮은 2190만불이었다. 즉, 쉽게 말하자면 닉스는 마버리에게 총 연봉보다 100만불이 낮은 2190만불을 줄테니 계약을 해지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닉스는 쓰지도 않을 마버리에게 고액의 연봉을 전부 지불하고 내쫒느니, 몇푼이라도 아끼자는 심정에서 파격적인 바이아웃 조건을 내걸었다. 하지만 마버리는 이것마저 거절하였다.

그럼 마버리의 진심은 어디에 있는것인가? 코트에 다시 돌아올 생각이 없는것인가?
아니면 받을연봉 다 받겠다는 심산으로 땡깡을 부리는것인가?
하지만 우리는 마버리의 자존심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마버리는 시즌 전 여름동안 재활훈련을 열심히 해왔던걸로 알려져 있다.
부상에서 돌아와 팬들 앞에서 닉스를 이끄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특히 댄토니의 런앤건 시스템은 공격형 가드인 마버리에게 최적의 시스템일 수도 있을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희망사항들은 댄토니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결국 마버리는 자신보다 실력면에서나 연봉면에서나 떨어지는 선수들이 주전으로 도약하는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마버리의 눈에는 자신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은 채 나아가는 닉스의 행보가 좋게 비춰질리 없다. 또한 바이아웃은 구단과 선수간의 합의가 있어야 한다. 결국 선수측에서 하기 싫으면 그만이라는 뜻이다. 결국 마버리는 바이아웃을 포기하고 닉스의 선수로 남기로 결정했다. 결국 웨이브 아니면 트레이드라는 조건으로 닉스와 대립한 것이다. 어찌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결정이기도 하다. 자신의 연봉인 2290만불 중 100만불만 포기하고 FA가 될수 있는 기회를 차버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닉스의 행보 역시 기이한 것은 마찬가지. 닉스는 결국 팀내 최고연봉의 선수에게 연봉을 그대로 지급하면서 그를 벤치에만 앉혀두기로 결정했다. 마버리의 결정에 “맞불”을 놓은것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마버리를 팀 훈련에서 제외시켰고 팀 락커룸과 클럽하우스의 출입 역시 금지시켰다. 마버리는 오직 팀이 원정경기를 나갔을 때만 클럽하우스 출입이 허용된다. 그러나 닉스는 지금까지도 마버리에게 연봉을 꼬박꼬박 지급하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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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버리와 닉스의 무언의 전쟁 도중 댄토니 감독과 마버리 사이의 불화설이 있었다.
닉스와 마버리 간의 협상 도중 마버리가 댄토니의 출전 명령을 거부했다는 것.
진실 여부를 떠나서 이 사건 때문에 마버리와 닉스간의 골은 더더욱 깊어졌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하다. 시즌 도중 닉스와 골든 스테이트 워리어스간의 대형 트레이드가 이루어졌고 닉스의 주전 슈팅가드 자말 크로포드 역시 이 딜에 포함되었다. 디트로이트와의 경기를 앞두고 닉스의 가드진은 부상병동이었고 닉스로 트레이드 된 가드 커티노 모블리 역시 출전이 불투명한 상태였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댄토니는 슈팅가드로써 경기에 투입시킬 선수가 필요했고 결국은 마버리를 경기에 투입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마버리는 디트로이트와의 경기에 출전하지 않았고 닉스는 그 경기에서 패배 했다.

이 상황에 대해 댄토니는 가드진의 상황이 절박하여 마버리에게 경기 투입을 지시했지만 마버리가 단번에 거절했다고 했다. 하지만 마버리의 말은 달랐다. 마버리는 댄토니가 자신에게 “오늘 30분에서 35분 가량의 출전시간이 있으니 경기에 뛰고싶다면 투입시켜 주겠다” 라는 제안을 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마버리는 댄토니가 “오늘 출전한다고 해서 자신이 댄토니의 계획에 다시 합류하게 된것은 절대 아니다” 라고 못박았다고 했다. 결국 계획에도 없는 팀을 위해 뛴다는 자체가 불편해서 그 제안을 거절한 것이라고 했다. 마버리는 결국 예 와 아니오 사이에서 아니오를 선택했을 뿐 이라고 반박했다.

현재 많은 팬들은 마버리를 비난하고 있다.
마버리의 프로의식에 의문점을 던지고 있으며 일부는 마버리를 돈밖에 모르는 고집쟁이라고 몰아붙이고 있다. 하지만 최소한 필자의 눈에는 마버리가 돈때문에 이러한 싸움을 시작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카트리나 피해 복구를 위해 가장 많은 액수의 돈을 기부한 선수중의 하나인 마버리가 과연 돈밖에 모르는 선수일까? 그 외에도 현재 마버리는 수많은 자선 활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자신의 시그내쳐 신발을 15달러에 팔 만큼 돈에 연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왔다.

필자는 마버리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마버리는 엄연히 닉스가 장기 계약을 안겨주고 고용한 선수이며 해마다 계약에 따른 연봉을 지급하기로 계약서에 서명했다. 당연히 마버리는 계약에 명시된 대로 총액을 지급받을 권리가 있으며 이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마버리가 비난받을 이유는 단 하나도 없는 것이다. 닉스의 바이아웃 제안을 왜 마버리가 받아들여야 하는가? 물론 마버리가 닉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닉스에게도, 또한 마버리에게도 좋은 결과를 얻을수 있을것이다. 닉스는 연봉지출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으며 마버리 역시 새로운 팀을 찾아 코트로 복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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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버리가 무조건 바이아웃 협상에 응해야 하는가? 절대 아니다.
이것은 순수한 마버리의 권리이며, 마버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를 행사했을 뿐이다.
마버리의 결단은 비난받을 만한 일이 절대 아니다. 닉스는 마버리와 계약하였으며 이제는 마버리와의 계약을 해지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닉스의 입장이며 마버리는 닉스와의 계약을 중도해지 하고 싶지 않은것이다. 이 결정을 가지고 누가 뭐라고 비난할 것인가? 닉스에게 피해를 입힌다고? 닉스가 마버리에게 입힌 피해 역시 크다.

이 문제의 발단은 마버리도 아니면 댄토니 감독도 아니다. 필자는 이 문제의 시발점을 닉스의 도니 월시 회장이라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댄토니 감독을 영입한것도 월시의 결정이기 때문이다. 가정이지만, 만약 월시가 댄토니가 아닌 다른 감독을 영입했다면 마버리 역시 중용될 수 있을것 아닌가? 댄토니는 마버리를 자신의 계획에서 배제시켰고 닉스는 쓰지않을 마버리에게 높은 연봉을 지급하면서 팀에 잔류시킬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마버리와 바이아웃 협상을 가진게 아닌가.

하지만 마버리 사건때문에 댄토니의 농구 철학이 잘못됬다는 것은 아니다. 댄토니는 팀을 이끄는 감독이며 팀에 대한 전권은 댄토니가 쥐고있다. 댄토니의 철학에는 마버리가 안맞았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문제의 발단은 마버리도, 댄토니도 아닌 바로 닉스의 월시라고 하는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또 한가지 덧붙이자면, 댄토니는 피닉스 감독 시절에도 마버리와 불편한 관계였고 심한 마찰을 일으켰었다. 월시 역시 NBA에 몸담는 사람으로써 이 사실을 알고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시는 댄토니를 닉스 감독으로 영입한 사람이다.

뉴욕 시티의 파국의 최대 피해자는 바로 마버리라고 생각한다. 마버리가 여러 여론들, 그리고 팬들에 의해 마녀사냥을 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버리의 행동 역시 비즈니스 차원에서는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NBA는 비즈니스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구단은 구단대로 이익을 챙기고 선수는 선수대로 또 이익을 챙기는 곳이 바로 NBA라는 곳이다. 마버리의 행동 역시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결정이라고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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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닉스의 베테랑 가드 쿠엔틴 리차드슨이 스테판 매버리에 대해 입을 열었다. 평소 불편한 관계를 이어오던 두 선수의 갈등이 팀의 부진으로 폭발한 것이다.

최근 LA 클리퍼스,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와의 트레이드로 대대적인 팀 개편에 나선 뉴욕은 연패의 늪에 빠지며 디비전 꼴찌로 내려앉았다. 주득점원이었던 자말 크로포드의 공백으로 잉여 가드자원의 활용은 절실했지만 매버리의 출전은 여전히 답보상태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마이크 댄토니 감독이 고심 끝에 내린 결정임에도 선수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리차드슨은 지난 경기에서 X-레이 촬영이 불가피한 타박상을 입었음에도 4쿼터에 코트로 돌아와야 했다. 

이번 시즌 뉴욕은 재크 랜돌프의 20득점-10리바운드의 활약과 크로포드의 활약에 힘입어 초반 5승 2패의 호성적을 거두었다. 하지만 구단의 장기적인 계획으로 간판스타들은 팀을 떠나게 됐다. 이 결정은 다가오는 2010년, FA시장에 쏟아져 나올 슈퍼스타들의 영입을 위한 포석이었지만 100% 성공할지는 미지수다.

오로지 가능성만 바라보고 행한 구단의 이 같은 결정은 최근 6경기에서 5패를 당하는 결과를 초래했고 모처럼 오른 사기를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몇 년간 찌들었던 패배의식이 다시 한 번 고개를 든 것이다.

리차드슨은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매버리를 내 동료라 생각할 수가 없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이어서 “그는 지금껏 우리와 한 차례도 뛰지 않았다. 아마도 우리랑 뛰기 싫어하는 것 같다”며 운을 뗀 리차드슨은 “나는 그를 팀 동료로 보지 않는다. 팀 동료라면 이럴 수는 없다”며 신랄한 비판을 토해냈다.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다. 댄토니 감독의 심중도 알 길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댄토니 감독은 매버리의 문제는 말을 아꼈지만 당장에 새로 합류한 알 해링턴과 팀 토마스에 새로운 전술을 주입시키는 일에 여념이 없다. 이는 도니 월시 단장과 구단의 전폭적인 신뢰를 얻고 있는 해링턴의 조련이 더 시급하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거액의 장기계약자들 처분문제로 수년간 머리를 싸맸던 뉴욕입장에서는 매버리의 존재가 여간 껄끄러운 게 아니다. 과연 매버리가 계륵으로 남을지, 환골탈태하여 팀과 팬들에게 돌아올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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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COLUMNS/일반 뉴스 2008. 11. 22. 21:10

뉴욕 닉스, 대대적 트레이드 단행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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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구단 뉴욕 닉스의 행보가 심상치 않다. 뉴욕은 22일(이하 한국시간) 2개의 트레이드를 잇 따라 성사시키며 본격적인 리빌딩에 착수했다. 이번 트레이드에 포함된 선수는 팀의 간판스타였던 재크 랜돌프와 자말 크로포드다. 수년간 지적받아온 거액의 장기계약자 문제를 일거에 해결한 것이다. 2010 프로젝트에 반드시 필요했던 샐러리 유동성을 확보함에 따라 명가재건의 발판은 확실하게 다진 셈이다.  

도니 월시 단장는 공공연하게 탐내오던 알 해링턴을 받는 조건으로 크로포드를 내주는데 합의했다. 해링턴은 센터부터 스몰포워드까지 폭넓은 기용이 가능하여 일찌감치 눈도장을 찍은 선수였다. 3점 슛까지 가능한 전형적인 멀티플레이어로서 댄토니 농구에 잘 부합할 것으로 전망된다.

크로포드 역시 최근 몬타 엘리스의 공백에 고심하고 있는 골든스테이트에 최고의 대안이 될 것으로 보인다. 크로포드는 슈팅가드와 포인트가드를 모두 소화할 수 있는 듀얼가드로서 이번 시즌 경기 당 19.6점을 기록하고 있다.

후속 트레이드 역시 오래 걸리지 않았다. 뉴욕은 단 몇 시간 후에 랜돌프까지 클리퍼스로 보내며 과거를 청산했다. 벤치 선수 마디 콜린스가 포함된 뉴욕의 트레이드 대상은, 클리퍼스의 베테랑 가드 쿠티노 모블리와 포워드 팀 토마스가 낙점됐다.

이번 시즌 20득점 10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전성기를 맞이한 랜돌프의 손실은 아쉽지만, 처치곤란으로 고심했던 구단입장에서는 앓던 이가 빠진 셈이다. 젊은 뉴욕의 선수단에 풍부한 경험도 더할 수 있어 플레이오프 같은 큰 무대에서는 적지 않은 힘이 될 것이다.

클리퍼스는 기존의 마커스 캠비와 크리스 케이먼에 랜돌프까지 가세하며 강력한 프론트 코트를 구축하게 됐다. 올스타급의 인사이더들을 무려 3명이나 보유하게 된 클리퍼스의 행보는 좀 더 두고 봐야겠지만, 마이크 던리비의 희망대로 이번 시즌에는 이들 모두 코트에서 볼 가능성이 크다.

최근 몇 년 동안 골칫거리 고액연봉자의 문제들이 해결되기까지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끊임없이 불거져 나오는 르브론 제임스의 영입을 위한 뉴욕의 야심이 내포된 것일까? 과연 이번 트레이드로 리그의 판도가 어떻게 변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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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NBA가 과거로부터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필자는 주저 없이 ‘격렬함과 터프함‘을 꼽을 것이다. 냉혹한 승부의 세계에서 반드시 지녀야할 덕목임에도 근대농구에서 그 자취를 감추고 있는 것은 개인적으로 무척 아쉬운 대목이다.

지난 날 NBA에는 성실한 일꾼들이 참으로 많았다. 구슬땀을 흘리며 코트 위를 누비고 있는 현역선수들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리그의 모든 팀들이 브루스 보웬 같은 선수들을 보유하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지금의 경기환경이 얼마나 유연해졌는지 수긍이 갈 것이다. 핸드체킹 룰이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에는 신체접족이 잦은 골밑은 하루하루가 전쟁과도 같아 박스아웃이나 스크린 같은 음지의 기술들을 잘 다루는 파워포워드의 가치가 매우 높았다. 때문에 투철한 경쟁의식은 물론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질 수 있는 진정한 사나이들이 넘쳐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파울 콜에 대한 수위가 높아지고 리그의 징계가 점차 강화되며 이 매력적인 남자들은 하나 둘씩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한때 NBA는 암묵적으로 난투극을 묵과하던 시기가 있었다. 물론 최악의 사태까지 수수방관하지 않았지만 누적되는 몸싸움으로 주먹다짐이 비일비재했다. 3심제가 도입되기 전에는 화의 근원이 될 만한 유치한 신경전도 미처 잡아내지 못했다. 그렇다고 마냥 울상만 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스스로가 마음을 독하게 먹고 생존법을 터득해야했다.

리바운드의 황제로 군림했던 데니스 로드맨은 ‘Bad as I wanna be'라는 자서전을 통하여 악명 높은 ’배드 보이즈‘에 대해 충격적인 사실들을 회고한 바 있다. 당시 로드맨은 “동료들 중 상당수가 거리의 싸움꾼 출신이었다. 어떻게 하면 상대에게 부상을 입힐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며 본인도 그에 대한 노하우(?)를 전수받았다는 후문이다. “마음만 먹으면 매일 밤 상대선수를 병원으로 보낼 수 있었을 것”이라는 로드맨의 증언은 과거의 NBA가 어떻게 돌아갔는지 생생하게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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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소개할 이는 승리를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투사 중에 투사였으며 미국 막노동꾼들을 일컫는데서 유래된 ‘블루컬러워커’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파워포워드이다. 그렇다. 눈치를 챈 분도 있겠지만 바로 찰스 오클리다. 그는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패트릭 유잉의 조력자로서 90년대 리그의 골밑을 누볐다. 특히 뉴욕 닉스의 원정 유니폼을 입는 날이면 영락없는 코트의 노동꾼 그 자체였다. 별명인 ‘Oak Tree' 역시 절묘한 작명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참나무는 단단한 재목으로 그 쓰임새가 매우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단단한 내구력과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던 오클리에게 더 없는 별명이다.

206cm의 키에 111kg의 몸무게로 기골이 장대했던 오클리의 신체적 단점은 탄력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의 경기에서는 덩크슛을 보기가 힘들었고 명장면만 모아놓은 하이라이트 필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공격리바운드에 의한 풋백 득점, 45도와 베이스라인의 중거리 슛이 주 득점수단일정도로 그는 수비에 특화된 선수였다. 

리바운드에 있어서 탄력도 하나의 필요요소이지만 절대적 요구사항은 아니다. 오클리는 타고난 하체 힘과 노련한 위치 선정으로 이를 극복했고 대학무대와 NBA의 골밑을 평정할 수 있었다. 버지니아 유니온 재학시절에는 평균 20.3점과 14리바운드로 빼어난 성적을 거두었는데 특히 마지막 졸업 시즌에는 17.3리바운드로 2부 디비전 1위를 차지하며 전문 리바운더로서의 이름을 만천하에 알릴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황제의 보디가드를 자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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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릭 유잉의 드래프트로 불리는 1985년,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에 의해 전체 9번으로 지명된 오클리는 당일 같은 팀에 지명 된 캘빈 던컨과 함께 시카고 불스로 트레이드 된다. NCAA 2부 리그에 속한 이유로 인지도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었지만 13번에 지명된 유타 재즈의 칼 말론이나 L.A 레이커스의 A.C 그린 등을 뒤로하고 당당하게 NBA에 입성한다. 당시 시카고는 떠오르는 신성 마이클 조던과 올랜도 울리지라는 정상급 스윙맨 듀오를 보유했지만 취약했던 로포스트의 전력 보강이 절실했고 오클리는 마지막 조각으로 더 없는 선택이었다.  

데뷔전 이후로 올스타 브레이크까지 벤치를 지켰던 루키 오클리는 시즌 중반부터 선발 파워포워드의 중책을 맡으며 마침내 그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특히 3월 한 달 동안 15.5점 13.8리바운드의 기염을 토하며 ‘이달의 신인‘에 선정되는 한편 팀을 진두지휘 하였다. 시카고는 간판스타 조던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오프 행 8번 티켓을 끊었는데 이 겁 없는 신인 포워드가 없었다면 꿈도 못 꿀 결과였다. 또한 인구에 꾸준하게 회자되고 있는 조던의 63점 경기는 존재하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오클리의 성공적인 데뷔 시즌은 리그에서도 인정되었고 유잉, 말론, 듀마스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며 올NBA 루키 팀에 선정되는 영광을 안겨준다. 언론에 “조던을 건드는 이가 있다면 내가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며 리그의 모든 팀에 선포하며 에이스의 신임도 얻었다. 모두가 꺼려하는 힘들고 더러운 일도 일선에 나서는 오클리의 존재는 더 없이 든든했고 미래는 밝아만 보였다. 하지만 오클리의 시카고 생활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잘못된 일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일일이 지적해왔고 이러한 오클리의 당당한 언행은 윗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사게 돼 결국 리빌딩의 희생자로 낙점되고 만다.

1987-88시즌을 끝으로 뉴욕과의 트레이드에 의해 새 보금자리를 찾은 그는 시카고의 영원한 라이벌 도시에 그렇게 입성한다. 그의 등 뒤에는 오클리의 트레이드를 반대하는 조던의 격렬한 항의가 메아리치듯 울렸지만 한번 엎지른 물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깡마른 두 명의 신인 포워드가 오클리의 공백을 메웠지만 훗날 이들은 ‘죽여야만 사는‘ 얄궂은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화려한 조연배우의 전성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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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프트 동기 유잉과 함께 골밑 임무를 분담한 오클리의 역할은 시카고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유잉으로 인해 활동반경이 넓어졌고 장기인 중거리 슛의 위력도 배가됐다. 시카고에서 보낸 마지막 시즌 당시 아쉽게 리바운드 타이틀을 내준 그는 1988-89시즌 리그 전체 6위에 해당하는 10.5리바운드를 걷어내며 뉴욕 골밑의 새로운 살림꾼으로 입지를 다져갔다.

뉴욕은 당시 1987-88시즌 신인왕에 빛나는 마크 ‘액션’ 잭슨을 필두로 자니 뉴먼과 제럴드 윌킨스로 이어지는 탄탄한 선발멤버와 신구조화가 어우러진 벤치전력을 자랑하며 시카고와 함께 떠오르는 신흥강호였다. 오클리가 가세한 1988-89시즌은 친정팀 시카고와 악연의 고리를 만들게 된 시작이라 볼 수 있다. 양 팀은 이후 8년간 여섯 차례 플레이오프 무대에서 만나 격투기를 방불케 하는 경기를 펼치며 코트를 뜨겁게 달구었다.

1988년도에 제작된 시카고 불스의 ‘하이그라운드‘라는 시즌 리뷰 비디오를 보면 오클리의 코트 안팎의 모습을 잠시나마 들여다 볼 수 있다. 애송이에 불과했던 스카티 피펜을 라커룸 벽에 세워놓고 이등병 대하듯 고참행세를 하며 만면에 웃음을 짓던 그런 모습 말이다. 그는 절대로 뒤끝이 없어 한 번 혼쭐을 내어도 큰 형처럼 다독이는 넓은 마음씨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적어도 코트에서의 오클리는 천사일 수 없었다. 피펜이나 그랜트에게 거친 파울을 수차례 범하면서도 손 한번 내밀지 않는 냉혹한 승부사로 변해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는 어느 팀에 몸을 담고 있던 상대방에 대한 변하지 않는 그만의 철학이었다.  

하지만 친정팀에게 번번이 고배를 든 오클리는 먼발치에서 그들의 우승 잔치에 쓰린 속을 부여잡아야 했다. 1991-92시즌 새 사령탑으로 부임한 팻 라일리 감독이 앤쏘니 메이슨을 중용하며 출장시간도 줄어들었다. 물론 코트위에 서 있는 순간에는 최선을 다하는 선수였고 여전히 거친 허슬플레이어였다. 하락한 개인 성적도 개의치 않는 오클리였지만 가슴 한구석의 공허감을 달래기 위해서는 역시 우승이 필요했다.

농구 황제 조던 없이 맞이한 1993-94시즌은 오클리에게 있어 제2의 전성기나 다름없는 해였다. 생애 최초로 올스타에 선정되는 영광을 맛본데 이어 올NBA 퍼스트 수비팀에 당당이 이름을 올렸다. 3년 만에 더블-더블 기록도 되찾았으니 개인적으로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하킴 올라주원의 휴스턴 로케츠에 고배를 든 뉴욕은 이듬해 NBA에 돌아온 조던에 의해 다시 한 번 가로막히며 좌절을 거듭하게 된다. 1997-98시즌에는 설상가상으로 유잉의 시즌아웃이라는 악재가 겹치며 변화의 시간을 재촉하였다.

결국 사상초유의 선수노조 파업사태가 불어 닥친 1998년 오프시즌을 맞이하여 구단은 대대적인 수술의 칼을 들게 됐고 36세의 노장 포워드는 토론토 랩터스의 마커스 캠비와의 맞트레이드로 팀의 미래에서 제외되는 불운을 겪고야 만다. 이듬해 뉴욕은 NBA 역사상 최초로 8번 시드 파이널 진출을 이룩하며 돌풍을 일으켰는데 오클리가 떠난 팀마다 성공을 일궈내는 묘한 운명은 계속 이어졌다. 11년간의 파란만장했던 뉴욕생활은 그렇게 초라하게 막을 내렸다.


역마살이 깃든 노장의 마지막 여정

창단 3년 만에 새로운 유니폼과 홈구장을 선보인 토론토는 오클리의 가세로 노련미 넘치는 로포스트를 구축하게 된다. 오클리는 베테랑 센터 케빈 윌리스와 함께 녹슬지 않은 기량을 뽐내며 토론토가 신생팀의 이미지를 벗는데 일조하였다. 농구선수로서 이미 황혼기에 접어든 그였지만 투지 넘치는 플레이는 세월을 무색케 하였다.

화려한 고공플레이로 이른바 ‘에어 캐나다’ 센세이션을 일으킨 빈스 카터는 지난 날 붉은 색 유니폼의 23번 사나이를 떠올리게 만들었지만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팀의 에이스를 무조건 감싸기 보다는 더 나은 선수가 되라며 채찍을 들었던 것이다. 들쑥날쑥한 카터의 슈팅기복과 취약한 장거리 슈팅능력, 오른쪽 돌파만을 선호하던 습관 등을 지적하며 쓴 소리를 아끼지 않은 오클리는 맏형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특히 출장시간에 대해 불만을 표했던 트레이시 맥그레이디에게는 “어린 선수가 너무 많은 것을 바란다”며 일침을 놓기도 하였다. 

동부 컨퍼런스의 정상권을 노려볼만한 위치에 이른 토론토는 간판스타 카터의 부상으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결국 오클리는 몰락하는 팀의 운명을 뒤로하고 모든 여정의 시작이었던 시카고로 돌아온다. 토론토에서 마지막으로 보낸 2000-01시즌 당시 득점과 리바운드에서 더블-더블급 활약을 펼쳤던 그의 마지막 불꽃은 점차 희미해지고 있었다.

타이틀에 대한 미련도, 개인적인 영예의 욕심도 모두 버린 오클리는 오로지 경기에 대한 열정으로 선수생활을 버텨나갔다. 불혹의 나이에도 그가 코트에 설 수 있었던 이유다. 농구경력을 시작했던 곳에서 마지막을 생각하고 있을 시기에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단짝인 마이클 조던이 코트로 돌아왔다. 조던의 간절한 설득에 마음을 돌린 오클리는 워싱턴과 베테랑 최저 연봉액수에 합의하며 절친한 동료의 마지막 길동무가 돼주었다. 결국 조던의 은퇴로 워싱턴에 남을 이유가 없어진 오클리는 2003-04시즌 휴스턴에서 단 7경기만을 뛰며 NBA 이력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의 경력을 돌이켜볼 때 우승반지는 물론 변변한 개인수상의 경력하나 없는 평범한 프로선수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록지의 숫자로 평가할 수 없는 선수가 바로 이 찰스 오클리였으며 많은 이들이 이면에 드리워진 그의 모습을 사랑했다. 필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매직 존슨이나 클라이드 드렉슬러와 같은 화려한 슈퍼스타에 대한 그리움. 그것은 타이론 힐이나 오티스 도프, 오클리, 로드맨과 같이 코트 사이드를 뒹굴며 흙먼지를 뒤집어 쓴 터프가이들에 대한 그리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계속 되는 도전, 그리고 두 얼굴의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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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트를 떠난 지 만 3년이 되던 지난 2007년 오클리의 복귀 설이 모락모락 피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는 불혹을 넘겨 43세였다. 그 해 드래프트 1순위인 오든이 갓난아기라면 오클리는 할아버지뻘인 셈이었다.

지난 3년 전 바닥을 드러낸 오클리는 이제 더 이상 플레이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음에도 자긍심 하나는 여전했다. “하찮은 액수의 계약금으로는 뛰지 않을 것”이라 공언하며 리그에서 장려하는 베테랑 미니멈의 경로혜택을 마다한 것이다. 은퇴와 복귀를 두 차례 반복했던 절친 조던은 “제대로 된 대우가 없다면 뛸 필요 없다”며 오클리를 지지했고 그 역시 본인의 입장을 고수했다. “좋은 연봉여건에서 뛸 것이다. 어느 구단도 나를 돈으로 살 수 없으며 돈도 나를 지배할 수 없다. 터무니없는 베테랑 최저연봉으로는 코트에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며 다시 한 번 본인의 의지를 피력했다. 결국 오클리의 복귀는 무산됐지만 그의 뚝심과 담대함을 재차 확인 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샤킬 오닐이나 찰스 바클리처럼 본인이 내뱉은 말로 곤욕을 치루는 이도 있지만 오클리의 말은 무게감이 틀렸다. 가볍고 무모한 호언장담이 아닌 누군가는 맸어야 할 총대와도 같은 사안들은 언제나 오클리의 몫이었다. 그리고 현재는 일선에서 한 발짝 물러났지만 필요할 때는 쓴 소리를 아끼지 않을 정도로 리그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고 있다.

팀 도너기 심판파동으로 소란스러웠던 올 해 여름, 오클리는 분노를 금치 못하였다. “분명 저 너머에는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이 숨겨져 있다. 책을 통해 모든 전말이 공개 되는 날이 올 것”이라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그는 “지난 시즌 브렌트 베리의 파울만 봐도 알 것이다. 누가 봐도 명백한 파울이었음에도 휘슬은 울리지 않았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경기조작”이라며 흥분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룰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고 매 시즌마다 새로운 영웅이 만들어진다. 이는 속임수나 다름없는 짓”이라며 리그 행정부에 따끔한 충고를 건냈다.

오클리의 쭉 찢어진 눈, 고집을 담은 두툼한 입술은 마치 마이크 타이슨을 방불케 하는 외모로 기억된다. 터프가이로 한 평생을 살아온 그였지만 가슴 따뜻한 ‘인간 오클리‘를 아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왼팔이 하는 일을 오른팔이 모르게 하라”는 옛말도 있다. 하지만 오클리가 실행해온 수많은 자선행사들은 그가 얼마나 배려 깊은 남자인지 알려주는 좋은 자료다.

1993-94시즌에는 리바운드 한 개당 1달러의 기부금을 적립했고 팀 동료 존 스탁스가 이를 본받아 3점 슛 한 개당 5달러의 기부금을 내게끔 만들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고향 버지니아 유니언에서는 재단을 운영하며 오랜 세월동안 불우아동 단체를 지원하고 있고 클리블랜드 등지에서 무료 여름캠프를 개최하며 꿈나무들의 육성을 돕고 있다.

이러한 오클리의 자선활동은 폭넓은 개인사업의 확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6개의 세차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그는 남다른 사업수완을 발휘하여 성공적인 자산증식을 이끌었다는 후문이다. 외모에 걸맞지 않는 탁월한 패션 감각도 오클리가 가진 또 하나의 능력이었다. 특히 1997년 패션 전문 매거진 ‘GQ'에서는 과소평가 받은 드레서로 선정되며 다양한 끼를 발산했다.

   
마치며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선수와 팬으로서의 관계를 영원히 지속시키고픈 인물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해왔다. 줄리어스 어빙이 그랬으며 매직 존슨과 마이클 조던 같은 팬의 사랑을 듬뿍 받은 영웅들도 좋은 예가 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없으면 못살 것 같던 슬픔과 인연의 끝에 맛보는 아쉬움은 한 순간에 사라진다. 마치 물레방아처럼 떠나는 이의 자리는 누군가가 항상 채워왔기 때문이다.

NBA 총재 데이빗 스턴도 말한다 “리그는 슈퍼스타의 은퇴로 위기에 처할 때마다 항상 새로운 누군가가 등장하곤 했다. 윌트 체임벌린이 사라지자 카림 압둘자바가 데뷔했고 어빙이 퇴장하니 조던이 혜성처럼 등장했다. 덕분에 우리는 문제를 극복해나갈 수 있었다”고 말이다. 어디 국내뿐이겠냐 만은 NBA의 전파에 혁혁한 공을 세운 조던의 존재도 차츰 잊혀져  가고 있다. 심지어는 그가 누구인지 모르는 젊은 팬들도 생겨나고 있을 정도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치유되는 만병통치약 ‘시간’은 시대를 풍미한 영웅도 지울 수 있는 날카로운 검인 셈이다. 이치가 이러한데 별다른 족적 없이 사라진 많은 선수들의 추억은 오죽할까?

찰스 오클리는 몇 년 안에 많은 팬들의 머릿속에서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필자에게 있어서 그는 좋은 추억으로 남은 영화한편에 대한 회상과도 같은 존재다. 재밌는 영화는 흥행에 성공하지만 좋은 영화는 가슴에 남는 이유와도 상통한다. 그렇다. 오클리는 과거의 담습을 유쾌하게 만들어 준 그런 선수였다. 농구 이상의 감동을 선사해 준 그가 오늘따라 무척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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