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구단주 어브 레빈(Irv Levin)의 열망으로 인해 연고지를 수천마일 떨어진 샌디에이고(San Diego)로 옮긴 버팔로 브레이브스(Buffalo Braves)는 "샌디에이고 클리퍼스(San Diego Clippers - Clippers는 '쾌속선'을 가리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출항을 앞두게 되었다.

캘리포니아 주에 위치한 샌디에이고는 60년대 말에는 로케츠(Rockets)라는 구단의 연고지였다. 1967년에 탄생한 "샌디에이고 로케츠"는 성적이 그다지 신통치 못했고, 이로 인해 흥행 부진에 허덕이다가 결국 71년 휴스턴으로 연고지를 이전하며 지금의 "휴스턴 로케츠"가 되었다.

로케츠가 발사 된 뒤 잠시 쓸쓸했던 이 도시에 8년만에 새로운 NBA 팀이 항구로 찾아오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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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퍼스 호'의 첫 항해는 비교적 순탄한 편이었다. 연고지를 바꾸고 처음 맞은 78-79시즌, 비교적 어수선한 팀 분위기에서도 새 감독 진 슈(Gene Shue)는 팀을 그럭저럭 잘 이끌며 5할 이상의 호성적(43승 39패)을 기록했다. 

비록 안타깝게 두 경기 차로 6개팀에게만 주어지던 플레이오프 티켓을 따내는 데는 실패했지만, 버팔로 시절의 전 시즌보다 16승이나 향상된 제법 괜찮은 성과였다.

클리퍼스 호의 첫 일등항해사는 바로 월드 B. 프리(World B. Free)라는 4차원의 이름을 가진 선수였다. 필라델피아 76ers에서 뛰다가 오프시즌에 트레이드되어 클리퍼스에 합류한 프리는 무려 평균 28.8 득점을 올리며 조지 거빈(George Gervin)에 이어 리그 득점 2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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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는 그의 이름만큼이나 참 독특한 선수였다. 본명은 로이드 버나드 프리(Lloyd Bernard Free)였는데 일찍부터 뉴욕 길거리에서 그 이름을 날렸고, 그의 화려한 플레이에 반한 길거리의 팬들은 그에게 '월드(World)'란 별명을 붙어주었다. '세계 최고'라는 이 별명이 무척 맘에 들었는지 로이드 프리는 '월드'를 아예 자신의 본명처럼 사용했다.

프리는 필라델피아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는데, 당시 팀에는 쥴리어스 어빙(Julius Erving), 조지 매기니스(George McGinnis)같은 대선배들이 있었기에 그의 이름대로 자유로운 플레이를 펼치지는 못했다. 필라델피아 시절 그의 평균 득점은 15점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클리퍼스로 오자 상황이 달라졌다. 프리는 필리 시절 펼치지 못한 그야말로 프리-스타일(Free-style)의 농구를 맘껏 선보이며 팀을 들었다 놨다 했다. 그의 현란한 개인기와 폭발적인 외곽슛, 그리고 엄청난 운동능력은 팬들의 이목을 사로잡았고, 연일 화려한 득점 쇼가 이어졌다. 클리퍼스에서 일약 에이스가 된 프리는 그의 평균 득점을 거의 두 배 가까이 상승시키며 올-NBA 세컨드 팀에도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너무나도 자유로웠다. 프리는 농구가 5명이서 하는 스포츠라는 걸 무시한 선수였다. 그는 슛을 해서는 안될 상황에서도 자유롭게 슛을 했고, 했고, 또 했다. 그의 플레이는 자유의 단계를 넘어서 거의 방종 수준이었다. 팀 승리보다 개인 스탯 올리는 게 더 중요하다고 떠들어대던 선수기도 하니 오죽했을까.

또한 제멋대로인 그의 성격은 종종 라커룸 분위기를 흐리곤 했다. 팀 동료들은 그의 실력은 인정했지만 그의 뒤틀린 성격까지 인정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그는 매일 밤 1:9의 농구를 해댔다.

아무튼 프리의 득점 쇼와 버팔로 시절부터 터줏대감이었던 베테랑 랜디 스미스(Randy Smith)의 활약 하에 클리퍼스 호는 첫 항해에서 B+ 정도의 무난한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근데 보면 도박에 처음 손대는 초보자가 돈을 따는 경우가 흔히 있다. 그래서 그 초보자는 자부심에 찬 나머지 그 다음 판에서 대담한 베팅을 하다가 쪽박을 차곤 한다.

클리퍼스의 베팅도 대담했다. 그들이 올-인한 카드는 바로 빌 월튼(Bill Walton)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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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튼은 한때 NBA 최고의 선수였다. 76-77시즌 소속팀 포틀랜드를 NBA 우승으로 이끌었고, 이듬해에는 리그 MVP도 차지했다. 하지만 그는 77-78시즌 중에 치명적인 발 부상을 입어 78-79시즌을 통채로 쉬어야 했다. 그의 부상은 커리어 자체를 뒤흔들 수 있을 만큼 심각했고 재기가 불투명했다.

첫 해에 제법 괜찮은 성적을 올렸지만 흥행은 부진했던 클리퍼스는 티켓 판촉의 타개책으로 포틀에서 개점 휴업중인 월튼의 영입을 추진했다. UCLA 대학의 전설이었던 그는 캘리포니아 주의 농구 영웅이었고, 또한 샌디에이고에서 고등학교를 다녔었다. 그들은 샌디에이고가 배출한 역대 최고의 농구 선수라면 흥행과 성적 향상에 충분한 밑거름이 될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가 당한 심각한 부상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다.

월튼에 대해 반 포기상태였던 포틀랜드는 클리퍼스가 공짜로 월튼을 FA로 데려가는 것까진 용납하지 않았고, 결국 클리퍼스는 주전 파워포워드 커밋 워싱턴(Kermit Washington), 7풋의 백업 센터 케빈 커너트(Kevin Kunnert),  1라운드 픽과 35만불의 현금을 댓가로 바쳤다.

하지만 야심차게 영입한 월튼 카드는 알고보니 쪽박패였다. 긴 부상 공백으로 인해 그의 내구성은 실드 없는 아칸 수준에 불과했던 것이다. 결국 월튼은 79-80 시즌 고작 14경기밖에 뛰지 못한 채 또다시 부상으로 쓰러져버렸다.

프리가 평균 30.2득점을 올리며 2년 연속 리그 득점 2위에 랭크되었고, 쓰러진 월튼 대신 주전 센터로 활약한 스웬 네이터(Swen Nater)가 평균 15리바운드로 리그 리바운드 1위를 차지하며 선전했지만, 팀 성적은 오히려 전년보다 추락했다. 클리퍼스는 시즌 중반만 해도 한때 26승 21패의 호성적을 달리며 잘나가나 싶더니, 이후로는 겨우 9승을 추가하는 데 그치며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최종 성적은 35승 47패로 당연히 플레이오프 탈락이었다.

떨어진 팀 성적 만큼이나 팀 분위기는 가라앉았고 에이스 프리는 늘어나는 득점만큼이나 팀원들과 불화를 쌓아갔다. 특히나 부상으로 코트에 서지 못하는 월튼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결국 클리퍼스는 시즌이 끝나고 프리를 골든 스테이트로 트레이드하며 분위기 쇄신을 꾀했다. 리그 평균 득점 2위인 프리를 내준 댓가로 클리퍼스가 받은 건 필 스미스(Phil Smith)란 가드와 미래의 1라운드 픽이었다.

스미스는 과거 올스타 경력도 있는 좋은 선수였지만 당시 부상으로 하향세를 걷고 있었고 평균 득점은 프리의 절반에 불과했다. 프리같은 팀의 간판 스타를 내준 댓가 치고는 영 시원찮아 보였지만, 프리가 워낙에 팀 케미스트리 파괴자로 악명을 떨치다보니 울며 겨자먹기로 도매급 판매를 한 셈이다. 훗날 샌 안토니오가 데니스 로드맨(Dennis Rodman)을 내주는 댓가로 겨우 윌 퍼듀(Will Perdue)를 받아온 것과 비슷한 시츄에이션이었다.

선장도 새로 바꼈다. 진 슈 감독이 물러난 자리에 선수 시절 블루 워커로 이름을 날린 폴 사일러스(Paul Silas)가 새로 부임했다. 현역에서 은퇴한 지 곧바로 한 팀의 감독이란 중책을 맡은 사일러스는 당시만 해도 37살의 신출내기였다.

하지만 클리퍼스 호의 항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월튼은 여전히 회복 불가의 상태였고 또 한 시즌을 통으로 개점 휴업내야 했다. 월튼도 없고~ 프리도 없고~ 그나마 프리맨 윌리엄스(Freeman Williams)와 스웬 네이터가 분전해봤지만 결국 클리퍼스는 36승에 그치며 또다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계속된 성적 난조와 흥행 부진에 시달리던 구단주 어브 레빈은 결국 시즌 도중 클리퍼스 구단을 L.A의 갑부 도널드 스털링(Donald Sterling)에게 팔아버렸다. 클리퍼스와 스털링 간의 길고 긴 악연(?)은 바로 이때부터 맺어진 것이다.

법률가 출신의 스털링은 비버리 힐스 일대에서 부동산으로 떼돈을 번 수완가였다. 그런데 하루는 그의 고객이자 레이커스의 구단주인 제리 버스(Jerry Buss)가 NBA 구단을 운영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해왔고, 스털링은 자금난에 시달리던 클리퍼스를 12.5mil에 사들이며 어엿한 NBA 구단주가 되었다.

하지만 스털링이 보기에도 샌디에이고란 도시는 영 매력없는 프랜차이즈였다. 클리퍼스의 성적이 신통치 못한 점도 있었지만 리그에서 거의 매년 꼴찌를 다툴 정도로 티켓 판매가 부진했으니 말이다. 대신 스털링은 자신의 홈타운인 로스 앤젤레스(Los Angeles)로 연고지를 옮길 궁리를 하고 있었고, 이를 위해 본격적으로 로비에 들어갔다. 이제 샌디에이고에 또다시 NBA 팀이 사라지는 건 시간 문제였다.

81-82시즌은 클리퍼스에겐 악몽과도 같았다. 월튼은 2년 연속 개점 휴업 간판을 내걸었고, 월튼을 대신해 클리퍼스의 골밑을 수호하던 스웬 네이터마저 무릎 부상으로 쓰러져버렸다. 그들의 성적은 17승 65패로 처참했으며, 프랜차이즈가 출범한 이래 버팔로 시절까지 합쳐 최악의 부진이었다.

그나마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 유일한 희망은 드래프트 1라운드로 뽑은 루키 톰 체임버스(Tom Chambers)였다. 백인이었지만 놀라운 운동능력을 보유한 체임버스는 루키임에도 불구하고 평균 17.2득점으로 팀 내 득점 1위를 차지했다.

82-83시즌이 시작하자 드디어 그들의 잊혀진 영웅 빌 월튼이 컴백했다. 의사들도 한때 재기가 불가능하다고 포기했었지만 월튼은 굳은 의지로 여러 차례의 수술을 감내하며 다시금 코트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만신창이가 되버린 그의 몸은 메딕 없는 스팀팩 마린이었다. 경기를 연속으로 뛰게 되면 영영 쓰러질지도 모를 몸상태였기에 의사들은 윌튼에게 1주일에 1번만 경기에 뛰도록 허락했고, 그는 시즌 내내 고작 33경기에 출장해야 했다.

평균 14.1득점, 9.8리바운드, 3.6블록슛을 기록한 윌튼은 비록 부상으로 망가진 몸이었지만 코트에 서있는 시간만큼은 여전히 위력적인 센터였다. 그러나 제 아무리 잘해도 세 게임에 한 번 꼴로 출장해서는 팀 성적 향상에 별 보탬이 될 수 없었다.


한편 82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2위로 뽑힌 테리 커밍스(Terry Cummings)는 평균 23.7득점, 10.6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신인왕에 올랐고, 2년차인 체임버스는 17.6득점을 보탰다. 이 두 젊은 포워드들의 활약상은 놀라웠지만 어린 선수들에게만 의지해서는 리그에서 승수를 쌓기 힘들었고, 클리퍼스는 고작 25승에 그쳤다.

83-84시즌을 앞두고 클리퍼스호는 제법 큰 물갈이를 단행했다. 폴 사일러스는 NBA 감독 일이 힘들다는 경험치만 잔뜩 얻은 채 짐 라이넘(Jim Lynam)에게 바통을 넘겼다. 또한 두 차례의 큰 트레이드를 거치며 팀 구성원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첫번째로 그들은 시애틀에 포워드 톰 체임버스와 가드 알 우드(Al Wood), 그리고 드래프트 픽 몇 개를 넘기는 대가로 7-2의 거구의 센터 제임스 도날드슨(James Donaldson), 포워드 그렉 켈서(Greg Kelser)와 역시 드래프트 픽 몇 개를 받아왔다.

풀 시즌을 뛰지 못하는 월튼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앞날이 창창한 유망주 포워드 체임버스를 내주면서까지 장신 센터를 데려온 것이다. 하지만 도날드슨은 그저 키만 큰 꺽다리에 불과했고, 체임버스는 훗날 올스타 포워드가 되었다.

한편 매직 존슨(Magic Johnson)을 앞세워 80년대 초 두 차례나 우승을 차지한 전통 명문 옆동네 레이커스에서 약간의 알력 다툼이 있었다. 당시 레이커스의 주전 포인트가드를 흔히들 매직 존슨으로 알고 있지만 80년대 초반까지는 베테랑 놈 닉슨(Norm Nixon)이 주전 포가였고, 매직은 포지션은 지금의 르브론, 웨이드처럼 포인트가드가 아니면서도 팀 내 제 1의 컨트롤 타워 역할을 했다.

한마디로 80년대 초반 레이커스에는 실질적으로 두 명의 포인트가드가 코트 위에서 뛰는 셈이었다. 이 둘의 뛰어난 리딩에 힘입어 머리 둘 달린 용 레이크드래곤은 두 개의 챔피언 링을 차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매직은 자신이 본격적으로 풀타임 포인트가드가 되길 원했고, 그럴려면 닉슨을 몰아내야 했다. 당시 레이커스에서 매직의 입김은 절대적이었고, 결국 레이커스에서 6년이나 주전 포가로 활약한 닉슨은 매직에게 밀려나 정든 팀을 떠나야 했다.

닉슨 트레이드의 거래 대상이 바로 옆동네 클리퍼스였다. 클리퍼스는 닉슨과 에디 조던(Eddie Jordan), 2개의 2라운드 픽을 데려오는 댓가로 83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4번으로 뽑은 바이런 스캇(Byron Scott)과 부상으로 망가진 노장 센터 스웬 네이터를 보냈다.

클리퍼스에서 지명된 스캇은 이 트레이드로 레이커스에서 데뷔하게 되었고, 이후 레이커스의 주전 슈팅가드로 활약하며 3번의 우승에 훌륭한 조력자 역할을 해냈다.



클리퍼스에서 2년차 시즌을 맞게 된 테리 커밍스는 22.9득점, 9.6리바운드를 기록하며 팀의 확고한 에이스 자리를 지켰고, 새로 클리퍼스 호의 키를 잡게 된 조타수 닉슨은 그동안 매직에게 눌린 설움을 풀기라도 하듯 평균 11.1 어시스트로 매직에 이어 리그 어시스트 2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이들의 활약보다 더 고무적인 것은 월튼의 늘어난 출장 경기 수였다. 악몽같은 부상에서 복귀해 1주일에 1번만 뛰는 철저한 몸관리로 한 시즌을 무사히 마친 뒤 월튼의 몸상태는 더더욱 좋아졌고, 83-84 시즌에는 55경기나 뛸 수 있었다. 월튼 본인으로선 부상으로 시름한 지 5시즌 만에 50경기 이상을 소화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더이상 그의 실력은 팀 성적을 좌지우지할만한 슈퍼 스타급이 아니었고, 팀에서는 젊은 제임스 도날드슨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길 바랬다. 어렵게 건강을 찾은 월튼이었지만 대신 수많은 부상의 악령들과 싸우며 그의 천재적인 농구 재능은 거의 바닥나버린 것이었다.

클리퍼스는 팀에 많은 변화를 주었음에도 30승 52패란 암울한 성적에 그쳤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샌디에이고 클리퍼스에겐 고3 기말고사 성적표가 되고 말았다.

자신의 구단 클리퍼스를 L.A로 옮기려는 스털링의 로비는 끝내 성공했고, 클리퍼스 호는 샌디에이고 항구를 끝나 L.A 항구에 닻을 내릴 준비를 하게 되었다. 바야흐로 NBA 최악의 만년 꼴지 구단 L.A 클리퍼스 호가 진수식(進水式)을 눈앞에 둔 것이다. (3부에 계속)

샌디에이고 클리퍼스의 통산 성적

78-79시즌 43승 39패 승률 .524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감독 진 슈(43-39)
79-80시즌 35승 47패 승률 .427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감독 진 슈(35-47)
80-81시즌 36승 46패 승률 .439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감독 폴 사일러스(36-46)
81-82시즌 17승 65패 승률 .207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감독 폴 사일러스(17-65)
82-83시즌 25승 57패 승률 .305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감독 폴 사일러스(25-57)
83-84시즌 30승 52패 승률 .366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감독 짐 라이넘(30-52)

6시즌 통산 186승 306패 승률 .378 플레이오프 0회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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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디에이고에서 L.A로 연고지를 옮긴 클리퍼스는 트레이드로 지역 스타 마퀴스 존슨을 데려오며 야심차게 첫 시즌(84-85시즌)을 시작했다. 하지만 연승 뒤에 연패에 빠지는 젊은 팀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큰 성적 향상은 이뤄내지 못했다. 이듬해엔 보스턴의 스타 세드릭 맥스웰을 데려왔지만, 주전 슈팅가드 데릭 스미스가 부상으로 쓰러지며 또다시 좋지 못한 성적에 그쳤다.

엘진 베일러를 새 단장으로 임명한 클리퍼스는 86-87시즌을 앞두고 놈 닉슨이 부상당한데 이어 마퀴스 존슨마저 쓰러지며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되었다. 고작 12승에 그친 클리퍼스는 이듬해 명장 진 슈를 감독으로 임명했지만 놈 닉슨이 재차 부상당하는 등 악재가 끊이지 않으며 또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88 드래프트에서 프랜차이즈 사상 최초로 1픽을 거머쥔 클리퍼스는 대학 최고의 스타 대니 매닝을 지명했고 찰스 스미스, 게리 그랜트마저 뽑으며 최고의 드래프트 데이를 보냈지만, 부상의 악몽은 그치지 않았다. 매닝마저 시즌-아웃당한 클리퍼스는 무려 19연패에 빠지며 또다시 바닥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이듬해엔 89 드래프트 전체 2픽으로 뽑은 대니 페리가 클리퍼스로의 합류를 거부하며 이탈리아 리그로 가버리자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그를 클리블랜드로 트레이드하고 대신 론 하퍼를 받아왔는데 하퍼가 대활약을 펼치며 전화위복이 되었다. 하지만 하퍼 역시 잘나가다가 부상으로 중도에 아웃되었고 팀 성적 또한 동반 추락하며 끝없는 부진의 터널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의 터널

구단주 도널드 스털링(Donald Sterling)의 열망으로 인해 클리퍼스는 중소도시 샌디에이고(San Diego)를 떠나 빅 마켓 로스 앤젤레스(Los Angeles)에 새 둥지를 틀게 되었다. 바로 로스 앤젤레스 클리퍼스(Los Angeles Clippers)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1970-1971시즌 버팔로 브레이브스(Buffalo Braves)란 이름으로 리그에 첫 발을 디딘 이 프랜차이즈는 창단한 지 근 14년이 되어가지만 여전히 말년 하위팀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밥 맥아두(Bob McAdoo)와 잠깐 함께 했던 시절엔 플레이오프에 3년 연속 진출하기도 했지만, 호환, 마마보다도 더 나쁜 구단주 존 브라운(John Brown)이 맥아두를 팔아먹은 이후로 그들은 줄곧 플레이오프와 인연을 맺지 못했다.

연고지를 버팔로에서 수천마일 떨어진 샌디에이고로 옮기고, 클리퍼스(Clippers - 쾌속선)라는 멋들어진 새 이름까지 달았지만 상황은 별로 나아지지 못했고, 샌디에이고에서 머문 6년 동안 끝끝내 홈팬들에게 플레이오프 진출이라는 반가운 소식을 들려주지 못한 채 씁쓸히 그들은 L.A로 이삿짐을 꾸려야 했다.

1984-1985시즌, 드디어 L.A 클리퍼스 호가 역사적인 진수식(進水式)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들 앞에 펼쳐질 항로가 밝을지 어두울 지는 아직 아무도 몰랐지만...

새 팀에 부임한 신참 단장 칼 쉬어(Carl Scheer)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진부한 명언을 실천하기 위해 빅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바로 지난 2년간 팀의 리딩 스코어러 역할을 해 온 신예 포워드 테리 커밍스(Terry Cummings)를 보내고 대신 올스타 경력의 베테랑 포워드 마퀴스 존슨(Marques Johnson)을 데려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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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퀴스 존슨은 원조 "포인트 포워드(Point Foward)"로 불리는 다재다능한 선수로, 돈 넬슨(Don Nelson)이 이끌던 80년대 강호 밀워키 벅스(Milwaukee Bucks)에서 시드니 몽크리프(Sidney Moncrief)와 함께 선봉대장 역할을 해왔다. 4번이나 올스타에 오른 경력이 있는 실력자기도 했지만 또한 UCLA 대학 출신의 지역 스타라는 점이 쉬어 단장의 눈길을 끌었다.

클리퍼스는 이전 연고지인 버팔로 시절부터 만성적인 흥행 부진에 시달렸다. 버팔로에서 샌디에이고로 연고지를 옮기게 된 것도 흥행 부진이 한 몫을 했고, 샌디에이고 시절에도 부진은 여전했다.  

대도시 L.A로 연고지를 이전했으니 예전보다 상황은 좀 나아 보였지만, 단독 연고지도 아니고 L.A 레이커스(L.A Lakers)라는 터줏대감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 상황이니 L.A 시민들에게 어필할 만한 뭔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던진 비장의 흥행 카드가 바로 지역 출신 올스타 포워드 마퀴스 존슨이었던 것이다.

강력한 백코트 진에 비해 상대적으로 골밑이 약해 고전해야 했던 밀워키로선 20득점-10리바운드가 가능한 젊은 빅맨인 커밍스를 마다할 리 없었고, 결국 두 팀 간의 트레이드가 단행되었다. 클리퍼스는 테리 커밍스, 리키 피어스(Ricky Pierce), 크레익 호지스(Craig Hodges)를 밀워키로 보내고, 대신 마퀴스 존슨과 주니어 브릿지맨(Junior Bridgeman), 하비 캐칭스(Harvey Catchings)와 약간의 현금을 받아왔다.

이로써 전열을 정비한 클리퍼스는 베테랑 포인트가드 놈 닉슨(Norm Nixon)과 '포인트 포워드' 마퀴스 존슨, 그리고 전도유망한 슈팅가드 데릭 스미스(Derek Smith)로 1-2-3번 라인업을 꾸렸고, 건강을 되찾은 빌 월튼(Bill Walton)과 장신 센터 제임스 도날드슨(James Donaldson)이 골밑을 책임지게 되었다. 연고지도 옮겼겠다, 로스터도 갈아치웠겠다... 이제 그들에게 필요한 변화는 루징 팀을 위닝 팀으로 만드는 것 하나뿐이었다.

출발은 순탄했다. 첫 원정 두 경기에서 1승 1패를 거둔 클리퍼스는 그들의 홈구장인 L.A 메모리얼 스포츠 아레나(Los Angeles Memorial Sports Arena)에서 역사적인 첫 홈경기를 갖게 되었다. 1984년 11월 1일, 만 2천명의 홈팬들이 그들의 새 친구를 구경하기 위해 운집한 가운데, 클리퍼스는 동부의 강호 뉴욕 닉스(New York Knicks)를 107-105로 누르며 홈 승리의 첫 테이프를 끊었다.

이후 클리퍼스는 잠시 주춤하다가 12월 중순에 내리 6연승을 달리며 14승 14패로 5할 승률을 기록, 일약 다크호스로 떠올랐다. 하지만 그들의 질주는 딱 거기까지였다. 이후 내리 7연패에 빠지며 상승세가 꺾인 클리퍼스는 한때 11연패까지 당하며 걷잡을 수 없는 지경까지 추락하고 말았다. 이 와중에 감독인 짐 라이넘(Jim Lynum)이 경질되고, 어시스트 코치인 돈 체이니(Don Chaney)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체이니는 그나마 남은 시즌을 9승 12패로 마치며 나름대로 선전했다. 최종 팀 성적은 31승 51패. 야심차게 시즌을 시작했지만 전년도 샌디에이고에서의 마지막 시즌(30승 52패)과 비교해 고작 1승을 추가하는 데 그친 것이다. 클리퍼스는 내리 연승을 하다가도 이내 연패를 하는 등 전형적인 젊은 팀의 한계를 드러내며 첫 데뷔 시즌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실패했다. 하지만 이 팀은 젊었고 희망이 있었다.

특히나 데릭 스미스의 활약은 눈부셨다. 3년차 슈팅가드인 그는 평균 22.1득점으로 팀 내 1위를 기록하며 일약 신성으로 떠올랐다. 전년도(9.8득점) 보다 득점을 두 배 이상 상승시켰으니 만약 이때 MIP 상이 있었으면 그가 따 놓은 당상이었을 것이다. 스미스에 대한 기대치가 어느 정도였냐면 당시 루키로서 돌풍을 일으킨 시카고 불스(Chicago Bulls)의 마이클 조던(Michael Jordan)과 신흥 라이벌로 불릴 정도였다.

빌 월튼은 커리어 최다인 67경기에 출장하며 부상의 악령은 이제 툴툴 털어버린 듯 했고, 놈 닉슨은 올스타로 선발되었다. 베테랑과 신예들이 잘 조화를 이룬 클리퍼스는 지금 당장보다 내후년이 기대되는 팀이었다.

1985-1986시즌을 앞두고 클리퍼스는 1985 드래프트 전체 3번픽으로 크레이튼(Creighton) 대학 출신의 7푸터 베누와 벤자민(Benoit Benjamin)을 지명했다. 당시만 해도 벤자민은 리그의 탑 센터로 성장할 재목이라는 평가를 받던 대단한 유망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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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의 미래를 책임질 센터감을 구한 쉬어 단장은 또 한 번 과감한 트레이드를 감행했다. 클리퍼스 시절 내내 부상 악몽에 시름했던 빌 월튼을 보스턴 셀틱스(Boston Celtics)로 보내고 대신 1980-1981 파이널 MVP 출신이자 보스턴의 주전 파워 포워드인 세드릭 맥스웰(Cedric Maxwell)을 데려온 것이다.

클리퍼스와 월튼이 함께 한 지난 6년은 애증의 세월이었다. 월튼은 심각한 부상으로 두 시즌이나 통째로 쉬어야 했고, 나머지 시즌에서도 부상으로 제대로 출장하지 못한 경우가 다반사였다. 6년 동안 169경기... 부지런한 선수가 2년 남짓 뛰면 출장할 수 있는 경기 수였지만 월튼에겐 무려 6년이 걸렸다.

그나마 막판엔 건강이 좀 나아지며 출장 경기수가 좀 늘어났지만, 잦은 부상은 한때 리그 MVP였던 그의 재능을 다 갉아먹은 채 평범한 주전 센터로 만들어버렸다. 요즘 팬들이 보기엔 그랜트 힐(Grant Hill)과 올란도 매직(Orlando Magic)의 관계라고 치면 이해가 빠를 거다.

아무튼 월튼은 부상으로 얼룩진 파란만장한 커리어를 뒤로 한 채 수천마일 떨어진 보스턴으로 떠났다. 하지만 그가 떠났어도 한 천재의 커리어를 망가뜨린 잔인한 '인저리 데빌(Injury Devil)'은 클리퍼스를 떠나지 않았다. 그 사악한 악마는 이제 월튼을 놓아둔 채 새로운 숙주를 찾아 L.A의 밤거리를 호시탐탐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끔찍한 클리퍼스 부상 병동의 암흑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85-86 시즌 클리퍼스의 시작은 특급 모터를 달은 듯 했다. 개막전 이후 무려 5연승을 달린 클리퍼스는 그 기간 동안 평균 116점을 퍼부으며 만인들을 놀라게 했지만, 5연승 뒤 다시 8연패라는 극악의 반전으로 전년도의 악습을 못 버리는 듯 보였다. 하지만 8연패보다도 더 뼈아픈 건 송두리째 잃어버린 팀의 미래였다. 떠오르는 스타 데릭 스미스가 11경기 만에 무릎 부상으로 쓰러져버리고 만 것이다. 그냥 단순한 부상이 아니라 스미스의 커리어를 통째로 망쳐버릴 만한 심각한 부상이었다.

팀의 리딩 스코어러이자 미래를 잃어버린 그들이 호성적을 거둘 리는 만무했다. 베테랑 마퀴스 존슨이 스미스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생애 5번째로 올스타에 오르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클리퍼스는 32승 50패를 기록하며 전년도보다 1승을 추가하는 데 그쳤다. 데릭 스미스가 건강하던 때 팀이 파죽의 연승을 달렸다는 걸 감안하면 그의 공백은 너무나도 뼈아팠다. 하지만 이게 앞으로 닥칠 클리퍼스의 끔찍한 부상 악몽의 전주곡이란 사실은 아직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팀이 2년 연속 부진한 성적에 그치자 단장인 칼 쉬어도 졸지에 물러나야 했다. 그리고 새 단장으로 예전 L.A 레이커스의 레전드인 엘진 베일러(Elgin Baylor)가 부임했다. 베일러와 클리퍼스 구단 간의 길고 긴 20여년의 악연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신임 단장 베일러가 부임하자마자 팀에 숭례문 화재급 악재가 일어났다. 주전 포인트가드 놈 닉슨이 공원에서 소프트볼을 즐기다가 무릎 부상을 당한 것이다. 상태가 심각해 수술이 불가피했고, 결국 닉슨은 시즌-아웃 판정을 받고 말았다. 그리고 이 황당한 부상은 과거 레이커스 시절 매직 존슨과 주전 포인트가드 자리를 다투기도 했던 민완 가드 닉슨의 커리어를 꺾어버리고 말았다.

주전 포인트가드 자리가 졸지에 공석이 되어버리자 베일러는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결국 부상 중인 젊은 스타 데릭 스미스와 베테랑 스윙맨 주니어 브릿지맨, 백업 가드 프랭클린 에드워즈(Franklin Edwards)를 새크라멘토 킹스(Sacramento Kings)로 보내고, 대신 포인트 가드 래리 드류(Larry Drew), 슈팅 가드 마이크 우드슨(Mike Woodson)과 미래의 1라운드 픽, 2라운드 픽을 각각 1장씩 받아왔다.

드류와 우드슨도 킹스에서 오랜 기간 활약한 베테랑들이지만 올스타 레벨의 닉슨과 스미스의 공백을 메우기엔 2% 부족했다. 그래도 일단 급한 불은 끈 클리퍼스는 뭔가 불안한 가운데 1986-1987 시즌을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데릭 스미스가 무릎을 부여잡고 쓰러진지 불과 1년여 만에 또 다른 부상의 악몽이 그들을 찾아왔다.

세번째 비극의 주인공은 마퀴스 존슨이었다. 존슨은 불과 시즌 10번째 경기에서 팀 동료 베누와 벤자민과 강하게 충돌하며 목 부위에 심각한 충격을 입었고, '원조 포인트 포워드'였던 그의 커리어도 이렇게 끝을 맺고 말았다.

너무나도 끔찍했다. 불과 1년 여만에 팀의 간판스타 세 명이 모두 커리어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부상을 당하며 쓰러져버렸으니 말이다. 스미스는 부상 이후 평범한 스윙맨으로 전락한 뒤 29살의 젊은 나이에 리그를 떠나야 했고, 닉슨과 존슨은 부상 이후 두 시즌 넘게 재활과 씨름하다가 겨우 복귀했지만 예전의 기량을 다 잃어버린 채 둘 다 1년 만에 은퇴해야 했다. 이 정도라면 저주라고 불러도 이상할 게 없다.

빌 월튼과 함께 했던 샌디에이고 시절부터 따라다니던 지긋지긋한 부상 악령... 이제 연고지도 L.A로 옮기고 월튼도 떠났건만 여전히 악성 댓글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클리퍼스를 괴롭히는 것이었다.

너무나도 황당한 부상으로 두 명의 간판스타를 연이어 잃은 클리퍼스는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12승 70패라는 최악의 성적으로 시즌을 마감해야 했다. 1972-1973 시즌 필라델피아 76ers가 9승 73패를 거둔 이후 두 번째로 나쁜 시즌 성적이었다. 훗날 달라스(1992-1993시즌)와 덴버(1997-1998시즌)가 각각 11승을 기록하며 나중엔 2위 자리를 내주게 되지만 말이다.

팀이 헤어 나올 수 없는 나락으로 빠진 가운데 베일러는 대놓고 리빌딩을 시작했다. 어차피 그른 시즌이라고 보고는 팀의 간판 베테랑들을 팔아버리고 대신 드래프트 픽을 잔뜩 얻어온 것이다.

주전 파워포워드 세드릭 맥스웰은 휴스턴 로케츠의 1라운드 픽, 2라운드 픽과 엿바꿔먹었고, 백업 빅맨 커트 님피우스(Kurt Nimphius)는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의 1라운드 픽, 2라운드 픽과 엿바꿔먹었다. 안그래도 팀이 어려운데 베테랑들을 이렇게 시즌 도중에 팔아먹었으니 12승이란 성적도 감지덕지할 정도다.

팀이 최악의 퍼포먼스를 펼친 와중에 감독의 모가지가 온전할 리 만무했다. 결국 돈 체이니는 경질되었고 베일러는 새 선장을 찾아 나섰다. 전임 감독들인 짐 라이넘과 돈 체이니가 감독 경력 초짜들이라 어리버리댔던 점을 감안해 이번엔 노련한 베테랑 감독을 노려보기로 했고, 그 대상은 바로 진 슈(Gene Shue)였다.

슈는 리그에서 무려 20년의 경력을 지닌 명장 중의 명장이었다. 통산 757승으로 그때 당시만 해도 통산 승리 4위에 랭크되어 있었고, 올해의 감독상을 두 차례나 수상한 바 있었다. 또한 예전에 성적이 바닥권이었던 볼티모어 불레츠(Baltimore Bullets)와 필라델피아 76ers(Philadelphia 76ers)를 모두 파이널로 이끌며 이른바 '리빌딩의 거장'으로 불리던 감독이었다. 또한 슈는 이전 샌디에이고 클리퍼스에서도 잠깐 지휘봉을 잡으며 1978-1979 시즌엔 5할 이상의 호성적을 기록한 적도 있었다. 이처럼 슈는 당시 클리퍼스의 어려운 상황을 타개해 줄 구세주처럼 보였다.

한편 베일러의 적극적인 세일즈 덕에 1987 드래프트에서 클리퍼스는 무려 3장의 1라운드 픽(4번, 13번, 19번)을 쥐고 있었다.

우선 4픽으로 클리퍼스는 조지타운(Georgetown) 대학의 에이스 레지 윌리엄스(Reggie Williams)를 선발했다. 윌리엄스는 1984년 패트릭 유잉(Patrick Ewing)과 함께 조지타운 호야스(Georgetown Hoyas)를 NCAA 챔피언으로 이끌었으며, 유잉이 떠난 뒤로는 팀의 독보적인 에이스로 활약했다. 13픽으론 노스 캐롤라이나(North Carolina) 대학의 조 울프(Joe Wolf)를, 19픽으론 일리노이(Illinois) 대학의 켄 노먼(Ken Norman)을 각각 지명하며 알찬 신인 보강을 마쳤다.

그러나 1987-1988 시즌 개막을 앞두고 클리퍼스에겐 또다시 안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부상에서 회복해 절치부심하던 놈 닉슨이 시즌 개막 이틀을 앞두고 연습 도중에 아킬레스건이 파열되고 만 것이다.

부상의 악령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특급 신인으로 큰 기대를 받았던 레지 윌리엄스마저 무릎 부상으로 고작 35경기밖에 출장하지 못했고, 조 울프도 42경기 출장에 그쳤다.

부상자들이 속출하며 팀이 어지럽게 표류하자 명장 진 슈 감독도 속수무책이었다. 야심찬 감독 영입과 신인 지명이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간 클리퍼스는 17승 65패로 2년 연속 리그 최하위에 머물러야 했다.

그나마 이런 암울한 가운데 클리퍼스 팬들에게 한 줄기 등불은 주전 파워포워드 마이클 케이지(Michael Cage)의 폭풍 리바운드 쇼였다. 케이지는 시카고의 찰스 오클리(Charles Oakley)와 리바운드 타이틀을 놓고 마지막까지 피말리는 승부를 벌렸고, 결국 시즌 최종 경기에서 30리바운드를 기록한 케이지가 오클리를 누르고 소수점 차이로 리바운드 왕에 올랐다. (케이지 13.03개, 오클리 13.00개)

감독도 바꿔보고 트레이드도 해보고 드래프트 픽도 모아보고... 어떻게든 루징 팀에서 벗어나보려는 클리퍼스의 노력은 눈물겨웠지만 결과는 또다시 최악이었다.

그러던 중 프랜차이즈 역사상 일생일대의 찬스가 찾아왔다. 바로 1988 드래프트 전체 1번 픽을 클리퍼스가 거머쥐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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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드래프트는 이른바 '매닝 드래프트'였다. 당시 대학 최고의 선수인 대니 매닝(Danny Manning)이 바로 이론의 여지가 없는 확실한 1픽 후보였던 것이다.

매닝의 소속팀 캔자스(Kansas) 대학은 그야말로 매닝의 원맨팀이었고 매닝 이외의 나머지 동료들은 형편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닝은 캔자스 대학을 NCAA 우승으로 이끄는 대파란을 연출했다.

4학년 때 시즌 평균 24.8득점과 9리바운드를 기록한 매닝은 코트 위에서 모든 걸 다 할 수 있는 최고의 올라운더였다. 6-10의 빅맨이 가드처럼 드리블하고 패스하고 슛을 하며 그야말로 대학 농구 코트를 지배했으니 말이다. 결국 네이스미스 상(Naismith Award), 우든 상(Wooden Award) 등 최고의 대학 선수에게 주어지는 상들을 싹쓸이한 매닝은 1988 드래프트에서 전체 1픽으로 클리퍼스의 지명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베일러 단장은 최고의 대학 스타를 얻은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전년도 리바운드 1위였던 마이클 케이지를 시애틀 슈퍼소닉스(Seattle Supersonics)로 보내는 대신 1988 드래프트 전체 15번 픽으로 지명한 게리 그랜트(Gary Grant)와 미래의 1라운드 픽을 얻어왔고, 6번 픽으로 지명한 허시 호킨스(Hersey Hawkins)와 시애틀로부터 얻은 1라운드 픽을 필라델피아로 보내고, 대신 전체 3번 픽으로 지명한 찰스 스미스(Charles Smith)를 데려왔다.

이렇게 드래프트 데이에 무려 3명의 대학 스타를 데려오며 희망차게 1988-1989 시즌을 시작한 클리퍼스는 하지만 또 한 번 부상 악령에 눈물을 삼켜야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초로 얻은 1번 픽으로 뽑은 특급 신인 대니 매닝이 고작 26경기만 뛴 채 아킬레스 건 부상으로 시즌 아웃되고만 것이다.

만약 우리나라였다면 정말 무당 불러 굿이라도 한판 했을 것이다. 아니면 어메리칸 스타일로 엑소시즘이라도 하던가... 도대체 팀의 간판스타 내지는 미래를 책임질 슈퍼 루키들이 벌써 몇 시즌 째 부상으로 연달아 쓰러지는 건지...

매닝의 부상 소식과 함께 이 팀의 희망도 다 사라져버린 듯 보였다. 매닝 부상 전까지 10승 19패를 거두며 그나마 3할대 승률을 기록하고 있던 클리퍼스는 충격의 연패 행진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보는 이들을 애처롭게 했다. 결국 11연패 만에 감독인 진 슈가 짤리고 어시스턴트 코치 돈 케이시(Don Casey)가 주저주저 바통을 이어받았지만 이후로도 8패를 더해 무려 19연패를 기록하고 말았다.

다행히 돈 케이시 감독대행이 연패 뒤에 팀을 잘 추스려 마지막 20경기에서 5할 승률을 거두며 21승 61패로 시즌을 마친 클리퍼스는 신생팀 마이애미 히트(15승 67패), 샬럿 호네츠(20승 62패)라는 착한 동생들 덕에 다행히 3년 연속 리그 꼴찌는 면하게 되었다.

그래도 젊은 선수들의 분전은 인상적이었다. 2년차 포워드 켄 노먼은 평균 18.1득점, 8.3리바운드로 팀을 이끌었고, 루키인 찰스 스미스는 16.3득점을 보태며 올-루키 퍼스트 팀에 올랐다. 매닝의 부상과 19연패의 악몽은 팀을 또 한 번 나락으로 떨어뜨렸지만 시즌 후반에 보여준 선전과 젊은 선수들의 활약은 침몰해가는 클리퍼스 호에게 한 줄기 희망의 등대불이었다.

NBA는 참 공평한 리그이다. 클리퍼스처럼 몇 년 째 바닥에서 허덕이는 팀들을 구제하기 위해 귀중한 로터리 픽들을 마구잡이로 풀어주니 말이다. 대학 최고의 스타를 뽑고도 부상에 울어야 했던 클리퍼스는 1989 드래프트에선 전체 2픽을 손에 넣으며 한 번 더 대박을 터뜨릴 기회를 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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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선택은 듀크 대학의 에이스인 대니 페리(Danny Ferry)였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돌발 사태가 벌어졌다. 페리가 "클리퍼스같은 팀에선 뛰기 싫다."며 계약을 거부하더니 급기야 이탈리아 리그로 날라버린 것이다.

세상에 얼마나 싫었으면 모든 선수들이 선망하는 L.A같은 빅 마켓을 연고지로 둔 팀을 다 마다했을까. 그만큼 당시 클리퍼스는 리그에서 공인된 최악의 팀이었다. 또한 클리퍼스에서 뛰는 선수들 마다 끔찍한 부상에 시달리는 것도 꽤나 꺼림칙했을 것이다.

게다가 클리퍼스에는 페리의 포지션에 이미 대니 매닝, 찰스 스미스, 켄 노먼같은 젊은 유망주들이 득실거렸다. 듀크대같은 명문 팀에서 웰빙 선수 생활을 하던 페리로선 부상신의 저주를 받은 클리퍼스같은 깜깜한 동네에서 가뜩이나 벤치 노릇을 해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으리라. 머리로는 괘씸해도 마음으로는 이해가 간다.

페리의 도주 퍼포먼스에 당황하던 베일러 단장은 결국 못 먹는 감 남 주는 수밖에 없었다. 클리퍼스는 도주범 대니 페리와 부상 이후 영 시원찮던 레지 윌리엄스를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로 보내고, 대신 민완 가드 론 하퍼와 2장의 1라운드 픽, 1장의 2라운드픽을 받아왔다.

하지만 인생지사 새옹지마라던가. 여태껏 트레이드로 별 재미를 못 본 클리퍼스지만 울며 겨자 먹기로 한 이번 트레이드만큼은 결과가 꽤 좋았다.

페리는 클리블랜드 이적 후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했지만 그저 그런 평범한 선수에 그치며 대학 시절 명성에 먹칠을 하고 말았다. 반면에 론 하퍼는 이후 클리퍼스의 에이스로 올스타급 활약을 펼쳤다. 비록 운이 따르지 않아 끝내 올스타에 선발되진 못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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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블랜드 시절부터 탁월한 기량을 과시하던 만능 가드 론 하퍼는 이적하자마자 일약 팀의 에이스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또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저번 시즌 아킬레스 건 부상으로 시즌-아웃되었던 대니 매닝이 건강한 모습으로 이번 시즌 초반에 복귀한 것이다. 매닝은 복귀 뒤에도 부상 악령을 완전히 떨친 듯 괜찮은 모습을 보여주며 팀 관계자들의 시름을 한 숨 놓게 했다.

2년차 포인트가드 게리 그랜트가 팀을 전두 지휘하는 가운데 론 하퍼와 찰스 스미스가 내외곽에서 평균 20점 이상의 고감도 득점포를 가동하고, 대니 매닝, 켄 노먼 등 준수한 포워드들이 뒤를 받쳤으며, 베테랑 센터 베누와 벤자민이 골밑을 든든하게 지킨 클리퍼스는 말년 동네북 신세에서 벗어나 이제 제법 주목할 만한 젊은 팀으로 거듭난 듯 보였다. 시즌 초반 16승 19패를 기록한 그들에게는 어느덧 5할 승률도 꿈 속 이야기가 아닌것 같았다.

하지만 이렇게 해피하다면 절대 클리퍼스 스토리가 아니다. 대놓고 클리퍼스만 다굴하는 지긋지긋한 부상의 악령은 이번엔 평균 23득점을 기록하며 팀의 상승세를 이끌던 에이스 론 하퍼의 무릎을 탁 걷어차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한 달도 채 못 되어 평균 두 자릿수 어시스트를 기록하던 주전 포인트가드 '제네랄(General)' 게리 그랜트마저 악령에게 피격당하고 말았다.

지난 몇 년간의 암흑의 터널에서 모처럼 빠져나오나 싶었던 클리퍼스의 야심찬 89-90시즌도 결국 이처럼 비극으로 끝을 맺고 말았다. 최종 성적은 30승 52패. 전년도보다 9승을 더하긴 했지만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시즌이었다.

4대 비극보다 더 슬픈 클리퍼스의 부상 악몽은 과연 언제쯤 끝나는 것일까? 어쨌든 클리퍼스는 이렇게 암흑의 80년대를 마치고 90년대로 진입하게 되었다.

버팔로 브레이브스 시절인 1975-1976 시즌 이후로 무려 14년간 계속되어온 플레이오프 탈락의 징크스는 과연 90년대에는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 것인지... 새로운 시대가 왔지만 여전히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검은 안개는 쉽사리 걷히지 않을 듯 보였다. (3부에서 계속됩니다)


L.A 클리퍼스 80년대 성적

1984-1985시즌 31승 51패 승률 .378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감독 짐 라이넘(22-39), 돈 체이니(9-12)
1985-1986시즌 32승 50패 승률 .390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감독 돈 체이니(32-50)
1986-1987시즌 12승 70패 승률 .146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감독 돈 체이니(12-70)
1987-1988시즌 17승 65패 승률 .207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감독 진 슈(17-65)
1988-1989시즌 21승 61패 승률 .256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감독 진 슈(10-28), 돈 케이시(11-33)
1989-1990시즌 30승 52패 승률 .366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감독 돈 케이시(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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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클리퍼스는 L.A 레이커스와 스테이플스 센터(Staples Center)를 홈구장으로 함께 쓰고 있는 구단이다. 하지만 기나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 구단 레이커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너무나도 초라한 팀 역사와 시원찮은 성적 때문에 대표적인 비인기구단, 만년 꼴지 구단으로 인식되어 왔다. 게다가 역대 구단주들의 형편없는 투자와 팀 경영때문에 '짠돌이 구단', '유망주들의 무덤'으로 인식되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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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NBA에 첫 발걸음을 드리운 건 70-71시즌으로,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가 그들과 NBA 입단 동기생 프랜차이즈들이다. 당시에는 뉴욕 근처 버팔로(Buffalo)라는 작은 도시를 프랜차이즈로 한 "버팔로 브레이브스(Buffalo Braves)"란 이름으로 출범을 했고, NHL의 버팔로 세이버스(Sabres)와 홈구장(Buffalo Memorial Auditorium)을 같이 썼다.

초대 감독은 과거 시라큐즈 내셔날즈(역주: Syracuse Nationals, 현 필라델피아 76ers의 전신)의 전설적인 선수였던 돌프 쉐이즈(Dolph Shayes)였다. 하지만 신생팀이 늘 그렇듯 그들의 초반 행보는 갓 전입온 이등병마냥 어리버리했다. 데뷔 첫 해 같은 내무반 동기생들인 이병 클블, 이병 포틀과 함께 리그 꼴찌 1, 2, 3등을 사이좋게 나눠가진 이병 버팔로는 첫 3시즌동안 도합 65승을 거두며 NBA 내무반 바닥을 열심히 닦았다. 72-73시즌, 팀 성적은 21승 61패에 그쳤지만, 향후 팀의 미래를 바꿔놓는 두 거목이 버팔로에 뿌리를 내렸다. 한 명은 훗날 포틀랜드를 NBA 우승으로 이끌기도 한 명장 잭 램지(Jack Ramsey) 감독, 그리고 또 한명은 그해 신인상을 수상하며 혜성같이 등장한 밥 맥아두(Bob McAdoo)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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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74시즌이 시작하자 버팔로는 이제 더이상 고참팀들의 갈굼에 시달리는 약체가 아니었다. 램지 감독의 뛰어난 지휘력 하에 시작된 버팔로의 질주는 맹렬했다. 이제 고작 2년차인 맥아두는 평균 득점 30점을 넘기며 리그 득점왕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고, 팀 성적은 전년도의 딱 두배인 42승으로 급상승했다. 창단 4년만에 플레이오프 무대에 처녀 출전한 버팔로는 비록 전통 명문 보스턴 셀틱스에게 컨퍼런스 준결승에서 2-4로 무릎을 꿇었지만 그들의 선전은 괄목상대할만했다.

용감한 소떼들의 질주는 이듬해에도 계속되었다. 맥아두는 여전히 발군의 득점력을 선보이며 평균 34.5득점을 넣어 2년 연속 득점왕에 올랐고, 시즌 MVP까지 차지하며 리그 최고의 선수로 우뚝 섰다. 버팔로는 리그에서 세번째로 많은 49승을 거두며 작년의 선전이 '리얼'임을 입증했다. 플레이오프에선 엘빈 헤이즈(Elvin Hayes), 웨스 언셀드(Wes Unseld)가 버티고있던 70년대 강호 워싱턴 불리츠와 컨퍼런스 준결승에서 혈전을 벌인 끝에 3-4로 아쉽게 패하고 말았지만, 그들의 미래는 참으로 밝아보였다.

75-76시즌에도 버팔로의 선전은 계속되었다. 팀 성적은 46승으로 전년도에 비해 약간 주춤하긴 했지만 3년 연속 플레이오프 출석부에 이름을 올렸고, 맥아두는 3년 연속 30+ 득점을 하며 또다시 득점왕에 올랐다. 플레이오프에선 1라운드에서 필라델피아 76ers를 꺾으며 컨퍼런스 준결승에서 보스턴과 격돌했지만 2년 전과 같이 2-4로 패해 탈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 전도유망한 용감한 소떼들에게 예기치못한 끔찍한 재난이 찾아왔다. 75-76시즌이 끝나고 당시 구단주였던 폴 스나이더(Paul Snyder)는 팀을 팔기 위해 매물로 내놨다. 팀 성적은 괜찮은 편이었지만 워낙에 버팔로가 스몰 마켓이다보니 티켓 판매만으로는 적자 운영을 면키 힘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스나이더는 버팔로 구단을 재력가인 존 브라운(John Brown)에게 팔았다. 존 브라운. 참 하찮고 평범한 미국식 이름이지만 농구계에 다시 있어서는 안될 해충같은 이름이기도 하다.

브라운은 KFC를 세계적인 패스트푸드 체인점으로 성장시킨 수완 좋은 사업가였고, ABA의 명문 구단 켄터키 콜로널스(Kentucky Colonels)를 소유한 경력도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농구란 혼이 담긴 스포츠가 아닌 그저 돈벌이 수단에 불과했다. 그는 팀 팔기에 여념이 없던 스나이더에게 버팔로 구단을, 지금으로 치면 NBA 선수 미드레벨 연봉 정도인 620만불이라는 제법 저렴한 가격에 사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헐값 매도의 배경에는 구단 운영으로 생기는 수익금 일부를 스나이더에게 나눠줘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있었다. 팀을 구한 브라운은 구단 운영으로는 돈벌기가 영 신통치 않은 걸 보고는 스나이더에게 줄 돈이 너무 아깝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자기 돈을 덜쓰고 스나이더 몫을 떼어 줄 수 있는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그의 계획은 너무나도 끔찍했다. 바로 팀 내에서 가장 시장 가치가 있는, 3년 연속 득점왕을 차지했던 팀의 심장인 슈퍼 스타 밥 맥아두를 딴 구단에 팔아먹는 것이었다.

결국 브라운은 자신의 호주머니를 지키기 위해 맥아두를 76-77 시즌 도중 뉴욕으로 현금 + @를 받고 트레이드해버렸다. +@로 받아온 선수는 뉴욕의 주전 센터 존 지아넬리(John Gianelli)였는데, 그의 시즌 기록은 평균 10득점, 9리바운드였다. 3년 연속 리그 득점왕에 MVP도 차지했던, 당대 최고의 슈퍼 스타를 데려 온 댓가가 바로 평범한 센터 하나와 구단주 뱃속으로 들어갈 모종의 현금이 되버린 것이다.

상상해보시라. 만약 클리블랜드가 르브론 제임스를 뉴욕으로 팔아넘기면서 그 댓가로 데이빗 리를 얻어온다면? 레이커스가 코비 브라이언트를 시카고로 팔아넘기면서 그 댓가로 드류 구든을 얻어온다면? 그리고 이런 말도 안되는 거래를 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구단주의 개인 재산 부풀리기때문라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 않은가! 맥아두의 활약 속에 3년 연속 호성적을 거뒀던 버팔로의 성적은 30승 52패로 곤두박질쳤고, 플옵 연속 진출은 3년으로 끝나고 말았다. 어처구니없는 트레이드에 분노한 팬들은 모두 등을 돌렸고, 맥아두가 한창 뛰던 시절 리그 흥행에서 상위권을 차지했던 버팔로의 티켓 판매는 리그 최하위 수준으로 추락해버렸다.

브라운이 몰고 온 재난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브라운은 구단주에 취임하자마자 팀을 3년동안 잘 이끈 명장 잭 램지를 해고하고 대신 조 멀라니(Joe Mullaney)를 감독에 앉혔다. 멀라니는 전 ABA 켄터키 콜로널스 감독 출신으로, 브라운과는 이전부터 구단주와 감독으로 인연을 맺었었다. 이른바 낙하산 식 코드 인사인 것이다. 명장 램지를 내친 낙하산 인사의 결과는 과연 어땠을까? 멀라니는 29경기에서 11승 18패의 초라한 성적만 기록한 채 경질되었고, 이후 두 명의 감독이 잇달아 팀을 맡았지만 팀의 추락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구단주 하나 잘못 온 덕분에 불과 1년만에 팀의 좌우 기둥이던 감독과 에이스가 모두 사라져버린 것이다.

또한 시즌 초 버팔로는 ABA의 파산으로 인한 확장 드래프트를 통해 NBA의 포틀랜드에 지명되었던 젊은 모제스 말론(Moses Malone)을 트레이드로 데려왔지만, 말론은 단 두 게임만 뛴 채 미래의 1라운드 픽 2개를 얻는 조건으로 다시 휴스턴 로케츠으로 트레이드되었다. 그리고 바로 두 시즌 뒤에 말론은 휴스턴에서 MVP에 등극하며 리그 역사상 손꼽히는 레전드 센터가 되었다. 시즌 도중 맥아두를 잃었지만 드래프트에서 애드리안 댄틀리(Adrian Dantley)라는 괜찮은 신인을 뽑았고, 댄틀리는 4년전 맥아두가 그랬던 것처럼 신인왕을 차지하며 맥아두를 잃은 슬픔에 빠진 버팔로에 한줄기 희망이 되나 싶었다.

하지만 이게 웬걸... 댄틀리는 76-77 시즌 종료 후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빌리 나이트(Billy Knight)와 트레이드되고 말았다. 물론 그때 당시만 해도 나이트는 리그 득점 2위(26.6득점)을 기록했던 특급 스윙맨으로 루키 댄틀리보다 가치가 떨어지는 선수는 아니었다. 결국 나이트는 버팔로에서 불과 1시즌만 뛴 채 트레이드되었고, 이후 평범한 스윙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에 반해 댄틀리는 훗날 유타에서 득점왕까지 올랐고 얼마전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되었다. 

비록 말론과 댄틀리의 이적은 앞서 맥아두처럼 꼭 돈을 노리고 저지른 일은 아니었지만 팀에 꼭 필요한 트레이드라고는 볼 수 없었다. 또한 70년대에는 구단주의 파워가 지금보다 훨씬 막강했었고, 이런 뻘짓 무브들의 배경에는 분명 브라운의 저주받을 입김이 작용했을 터이다.

이처럼 한때 잘나가던 신생팀 버팔로는 존 브라운이라는 해충 구단주가 온지 1년여만에 그만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다. 멀쩡한 감독을 낙하산 인사로 바꾸었고, 구단주 개인 재산을 아끼기 위해 간판스타를 다른 팀으로 팔아넘기길 주저하지 않았다. 이뿐인가. 미래에 명전에 오를 젊은 유망주를 1년 안에 둘씩이나 트레이드 해버렸다. 결국 구단주가 안티였던 버팔로는 급속히 몰락의 길을 걸었다. 만신창이가 된 팀의 에이스 자리는 버팔로 주립대 출신으로 드래프트 7라운드의 전설인 랜디 스미스(Randy Smith)가 이어받았지만 맥아두의 공백을 메우긴 역부족이었다.

77-78시즌 27승에 그친 버팔로는 여전히 브라운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만행으로 텅텅 비어버린 관중석을 바라보던 브라운은 이 돈벌이 안되는 구단을 팔아버릴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마치 잠자리 날개, 다리 다 떼어놓고는 이제 시시하다고 발로 밟아버리는 잔인한 9살짜리 꼬마처럼 말이다.

장사 수완 만큼은 얄미우리만치 좋았던 그는 보스턴의 구단주 어브 레빈(Irv Levin)에게 손길을 뻗쳤다. 영화 제작자 출신인 레빈은 가능하면 자신의 사업장인 헐리우드에 가까운 서부 지역에 자신의 농구단을 가지기를 원했지만 그렇다고 전통 명문인 보스턴 프랜차이즈를 서부로 옮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를 간파한 브라운은 자신이 소유한 버팔로 구단과 레빈이 소유한 보스턴 구단을 서로 맞바꾸는 제안을 했다. 레빈 입장에서 보스턴 구단은 연고지 이전이 사실상 불가능하지만, 신생팀인데다가 연고지가 스몰 마켓인 버팔로 구단은 맘만 먹으면 서부 지역으로 옮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버팔로 구단과 버팔로 시 측은 예전에 구단의 티켓 판매가 일정 기준에 미달할 경우, 연고지를 옮길 수도 있다는 계약을 맺은 바도 있었기에 명분은 충분했다.

재밌는 사실은 두 구단주간의 스와핑 거래에서 중간에 다리를 놓은 인물이 바로 훗날 NBA 총재가 되는 데이빗 스턴(David Stern)이라는 점이다. 당시 스턴은 리그에서 컨설턴트로 활약하고 있었다. 결국 거래는 성사되어 브라운은 보스턴의 구단주로, 그리고 레빈은 버팔로의 구단주로 서로 자리를 맞바꿨다. '재앙신' 브라운의 이적은 버팔로 구단에겐 마치 앓던 이가 빠진 것과 같은 환희의 순간이었으나, 동시에 정든 버팔로 시와의 씁쓸한 이별의 예고편이기도 했다.

그럼 보스턴으로 건너간 브라운의 행보는 이후 어땠을까? 브라운은 버팔로에 이어 보스턴까지 제멋대로 말아먹으려고 마수를 뻗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소유했던 버팔로 구단에서 입맛에 맞았던 선수들을 데려오기 위해 기존의 보스턴 선수들과 대규모 트레이드를 단행해버렸다. 팀의 단장인 레드 아워백(Red Auerbach)과는 단 한마디 상의도 없이 말이다. 갓 부임한 풋내기 구단주가 셀틱스의 상징과도 같은 자신을 무시한데 대해 아워백은 분노했고, 이런 더러운 인간 밑에서 단장 노릇하느니 뉴욕 닉스의 단장으로 가버릴까 하는 고민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만류로 생각을 고쳐먹은 아워백은 대신 구단주 퇴진운동을 주도하며 자신을 건드린 댓가를 톡톡히 보여주기로 했다. 결국 브라운은 1년도 채 못채우고 보스턴 구단주 자리에서 떠밀리듯 물러나야 했다. 고소하기가 참 카라멜콘과 땅콩이다.

이후 브라운은 정치인으로 켄터키 주지사에 당선되는 등 성공한 정치가이자 재력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적어도 농구팀 구단주로서 그는 역사상 최악의 인물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버팔로에서 불과 2년 동안 구단주로 있으면서 그가 저지른 만행을 다시 한번 정리해보자.

1. 팀을 3년 연속 플옵으로 이끈 명장 잭 램지 감독을 내치고 자신의 측근을 낙하산 감독으로 데려옴.
2. 자기 재산 아끼기 위해 3년 연속 득점왕을 차지한 팀의 슈퍼 스타 밥 맥아두를 뉴욕에 팔아먹음.
3. 모제스 말론을 포틀랜드에서 애써 데려오고도 이내 휴스턴으로 트레이드해버림.
4. 신인왕 애드리안 댄틀리를 고작 한 시즌만에 인디애나로 트레이드해버림.

이런 일들이 자신이 응원하는 팀에 불과 2년 사이에 마구 벌어진다고 상상해보자. 당시에는 아직 인터넷 개통 전이던게 브라운에겐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다시 버팔로 얘기로 돌아와서... 새로 버팔로를 인수한 신임 구단주 레빈은 자신의 바램대로 연고지를 서부 지역의 샌디에이고(San Diego)로 이전했다. 그러면서 프랜차이즈 이름도 태평양을 가로질러 항해하는 범선이라는 뜻의 "클리퍼스(Clippers)"로 바뀌게 되었다. 과연 샌디에이고 클리퍼스는 과거 버팔로 시절 존 브라운의 악몽에서 벗어나 새출발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의 출항은 막 돛을 드리웠지만 웬지 앞으로의 항해도 만만하지 않아 보였다. (2부에서 계속됩니다)


버팔로 브레이브스의 통산 성적

70-71시즌 22승 60패 승률 .268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감독 돌프 쉐이즈(22-60)
71-72시즌 22승 60패 승률 .268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감독 돌프 쉐이즈(0-1), 조니 맥카티, 22-59)
72-73시즌 21승 61패 승률 .256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감독 잭 램지(21-61) * 밥 맥아두의 데뷔 시즌
73-74시즌 42승 40패 승률 .512 플레이오프 컨퍼런스 준결승 진출, 감독 잭 램지(42-40)
74-75시즌 49승 33패 승률 .598 플레이오프 컨퍼런스 준결승 진출, 감독 잭 램지(49-33) *밥 맥아두의 MVP시즌
75-76시즌 46승 36패 승률 .561 플레이오프 컨퍼런스 준결승 진출, 감독 잭 램지(46-36)
76-77시즌 30승 52패 승률 .366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감독 조 멀라니(11-18), 밥 맥키넌(3-4), 테이츠 로크(16-30) *존 브라운이 구단주로 부임, 밥 맥아두를 뉴욕으로 트레이드한 시즌
77-78시즌 27승 55패 승률 .329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감독 코튼 피츠시몬즈(27-55)

8시즌 통산 259승 397패 승률 .395, 플레이오프 3회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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