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 & COLUMNS/SPECIAL 2009. 10. 19. 12:05

2009-10 NBA 센트럴 디비전 프리뷰

BY 알 수 없는 사용자


글: 신호섭(heltant79)

센트럴 디비전은 샤킬 오닐을 영입해 다시 한 번 우승을 노리는 클리블랜드의 독주를 데릭 로즈가 2년차를 맞는 시카고가 추격하는 가운데 팀 재건중인 디트로이트와 인디애나, 진퇴양난에 빠진 밀워키가 경합을 벌일 것으로 전망된다.


▷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2008-09 시즌 성적 : 66승 16패)


In_ 앤쏘니 파커, 자마리오 문, 리온 포우, 샤킬 오닐, 다니엘 그린, 크리스찬 아잉가
Out_ 조 스미스, 벤 월라스, 샤샤 파블로비치, 태렌스 킨세이

지난 시즌 르브론 제임스가 MVP를, 마이크 브라운 감독이 올해의 감독상을 각각 수상하며 정규시즌 1위를 차지했던 클리블랜드는 마지막에 웃지 못했다.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올랜도를 만나 팀 수비가 붕괴되며 4-2로 패하고 만 것이다. 인사이드에서 드와이트 하워드를 전혀 제어하지 못했고, 히도 터콜루 등 장신 윙 플레이어를 막아내기에 클리블랜드의 윙 플레이어들은 너무 작았다.

이에 따라 클리블랜드는 빅맨과 윙 플레이어를 보강하기 위해 많은 변화를 주었다. 트레이드로 샤킬 오닐을 영입한 데 이어 앤써니 파커와 자마리오 문, 리온 포우를 FA로 영입한 것이다.

오닐의 가세는 클리블랜드의 게임을 근본부터 바꿀 것이다. 클리블랜드는 지금까지 인사이드 득점원이 사실상 제임스 하나뿐이었고 패싱 루트 역시 제임스의 돌파에 이은 킥아웃 패스로 한정됐던 것이다. 하지만 지난 10년간 가장 압도적인 골밑 득점원인 오닐은 제임스의 득점 부담을 크게 덜어줄 것이다. 또한 하워드의 올랜도, 파우 가솔과 앤드루 바이넘의 레이커스 등을 상대해야 하는 클리블랜드로서는 오닐의 사이즈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파커와 문은 지난 시즌까지 각각 토론토와 마이애미에서 주전으로 뛴 장신 윙 플레이어로 제임스의 수비 부담을 덜어줄 것이며 부상 재활중인 포우는 공수에서 인사이드에 힘을 더해줄 것이다.

제임스는 이번 시즌이 끝나면 FA 자격을 얻는다. 벌써부터 뉴욕 등 많은 구단이 제임스를 노리고 있다. 댄 길버트 구단주와 대니 페리 단장, 브라운 감독이 취임 5년째를 맞는 이번 시즌, 이들은 이번 시즌 우승이 제임스를 잡아놓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심판의 시즌‘을 맞은 클리블랜드의 선전을 기대해보자.


▷ 시카고 불스 (2008-09 시즌 성적 : 41승 41패)


In_
제임스 존슨, 타지 깁슨
Out_ 벤 고든, 팀 토마스, 앤쏘니 로버슨

지난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디펜딩 챔피언 보스턴과 역사에 남을 명승부를 치른 시카고는 이번 시즌에는 그 이상을 노린다. 2년차를 맞는 데릭 로즈를 중심으로 지난 10년 동안 지지부진하게 끌어온 팀 재건 과정을 마침내 마무리 짓겠다는 것이다. 지난 시즌 신인왕을 차지하며 순식간에 팀의 희망으로 자리 잡은 로즈는 이번 시즌에는 올스타 가드를 노리고 있다.

시카고의 최대 강점은 풍부한 백코트진이다. 지난 3년간 팀내 스코어링 리더였던 벤 고든이 팀을 떠났지만 로즈, 커크 하인릭, 존 샐먼스 등으로 이뤄진 백코트진은 리그 수위권을 자랑한다. 여기에 중거리슛의 대가 루올 뎅이 부상에서 돌아오는 시카고는 이번 시즌에도 이들 백코트진의 득점에 공격을 의존할 것이다.

시카고의 약점은 인사이드 득점 능력이다. 타이러스 토마스의 성장이 정체되면서 인사이드에서 1:1로 득점할 수 있는 자원이 크게 부족하다. 호아킴 노아와 애런 그레이는 수비형 선수고 브래드 밀러는 페인트존 밖에서 머무는 시간이 더 많다. 중장거리 슛에만 의존하는 농구는 한계에 부딪힐 가능성이 크다. 206cm의 신인 타지 깁슨의 활약이 기대되는 이유다.

지난 시즌 초보 감독에 대한 의구심을 말끔히 씻어버렸던 비니 델 니그로 감독은 취임 2년째를 맞아 한층 안정된 지도력을 보여줄 것이다. 강팀들의 전력이 한층 강해진 동부 컨퍼런스에서 별다른 전력 강화 없이 여름을 보낸 시카고는 젊은 감독 및 선수들의 성장과 융화를 바탕으로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 디트로이트 피스톤스  (2008-09 시즌 성적 : 39승 43패)


In_ 오스틴 데이, 드후안 섬머스, 찰리 빌라누에바, 벤 고든, 크리스 윌콕스, 벤 월라스
Out_ 알렌 아이버슨, 라쉬드 월라스, 안토니오 맥다이스, 아미르 존슨, 애론 아프랄로, 월터 샤프, 페브르시오 오베르토

2000년대 센트럴 디비전을 지배했던 디트로이트는 과도기를 지나는 중이다. ‘어느 정도의 전력을 유지하면서 팀을 재구축 하겠다’는 조 듀마스 사장의 계획에 따라 지난 시즌부터 팀을 대폭 개편하고 있다. 이에 따라 2004년 우승 멤버 중 현재까지 남아있는 선수는 리처드 해밀턴과 테이션 프린스, 그리고 여러 팀을 전전한 끝에 이번 시즌부터 다시 디트로이트 유니폼을 입게 된 벤 월러스 뿐이다.

팀 중심도 공격에서 수비로 옮겨졌다. FA로 영입한 벤 고든과 찰리 빌라누에바는 모두 공격 전문 선수이고 신임 존 쿠스터 감독도 클리블랜드에서 공격 코치를 역임한 바 있다. 적어도 슛을 던질 선수가 부족하지는 않은 셈이다. 문제는 이들에게 안정적으로 볼을 공급해야 할 포인트가드진의 부재다. 로드니 스터키와 윌 바이넘은 모두 공격형 포인트가드로 리딩 능력은 다소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듀마스 단장이 이들을 믿고 천시 빌럽스를 트레이드했고 쿠스터 감독도 볼 흐름을 중시하는 만큼 젊은 스터키와 바이넘이 분발해야 한다.

공격에 비해 수비에선 문제가 더 심각하다. 특히 지난 몇 년간 디트로이트의 인사이드를 지켜온 라시드 월러스와 안토니오 맥다이스가 팀을 떠나며 골밑 수비에 큰 구멍이 뚫렸다. 콰미 브라운과 닉 칼리슨으로는 역부족이고 벤 월라스는 더 이상 수비왕 시절의 월라스가 아니다.

따라서 이번 시즌 디트로이트의 목적은 공수 비율을 적절히 조합해서 디트로이트만의 팀 컬러를 확립하는 일이 될 것이다.


▷ 인디애나 페이서스  (2008-09 시즌 성적 : 36승 46패)


In_
타일러 핸스브로, A,J. 프라이스, 단테이 존스, 얼 왓슨, 솔로몬 존스
Out_ 마퀴스 다니엘스, 재럿 잭, 라쇼 네스트로비치

서부에 골든스테이트가 있다면 동부에는 인디애나가 있다. 지난 시즌 극단적인 공격 농구를 펼치며 홈에서 레이커스, 클리블랜드, 보스턴, 올랜도를 모두 잡는 기염을 토했다. 전 포지션에 슈팅 능력이 있기 때문에 이들의 슛이 한 번 터지면 막을 길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런앤건에만 의존하는 농구에는 한계가 있었고, 결국 디트로이트에 3게임을 뒤지며 아깝게 플레이오프행에 실패했다.

인디애나의 에이스는 대니 그레인저다. 지난 시즌 마침내 기량이 만개하며 MIP를 수상한 그레인저는 코트 어느 곳에서든 슛을 노릴 수 있는 전천후 득점기계가 됐다. 이번 시즌에도 트로이 머피와 함께 인디애나의 공격을 이끌 것이다. 부상으로 신음하던 마이크 던리비 주니어까지 돌아온다면 이들은 리그에서 가장 무서운 공격 트리오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인디애나가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센터진의 분발이 필수적이다. 로이 히버트는 2년 전 그렉 오든의 대항마로 각광받으며 입단했으나 성장이 정지한 느낌이다. 이번 시즌에도 라쇼 네스테로비치와 주전 경쟁을 벌여야 하는 히버트가 25분 이상씩 뛰며 수비리바운드를 책임져준다면 인디애나의 공격은 더욱 속도가 붙을 것이다.


▷ 밀워키 벅스  (2008-09 시즌 성적 : 34승 48패)


In_
브랜든 제닝스, 조디 믹스, 하킴 워릭, 어산 일랴소바, 카를로스 델피노, 커트 토마스, 월터 샤프, 로코 우킥
Out_ 페브르시오 오베르토, 찰리 빌라누에바, 라몬 세션스, 리차드 제퍼슨, 말릭 알렌, 아미르 존슨, 소니 윔스, 브루스 보웬

지난 몇 년간 연달아 잘못된 장기계약을 맺으며 수렁으로 빠져들어간 밀워키는 여름 내내 줄타기를 되풀이했다. 어렵게 얻은 리처드 제퍼슨을 샌안토니오로 보내고 받아온 선수들 중 커트 토마스만을 남기고 모두 방출했다. 지난 시즌 에이스 역할을 했던 찰리 빌라누에바를 조건 없이 풀어줬고 모 윌리암스를 포기할 정도로 기대를 걸었던 라몬 세션스도 미네소타로 보내버렸다. 밀워키가 재건 과정에 들어간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올 무렵 카를로스 델피노와 하킴 워릭을 영입했다. 이도저도 아닌 이상한 팀이 되어버린 것이다.

밀워키가 이런 움직임을 보인 것은 사치세 때문이다. 경제 한파로 인해 홈 관중이 갈수록 줄어드는 상황에서 시장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밀워키는 기존 선수들로 인한 사치세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울며 겨자 먹기로 지난 시즌 팀내 평균득점 2, 3, 4위를 모두 내보낸 밀워키는 이번 시즌 전력 약화가 불가피해 보인다.

하지만 밀워키에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 시즌에는 팀의 두 기둥인 마이클 레드와 앤드루 보거트가 나란히 40경기 이상씩을 결장하며 경기력을 100% 발휘하지 못했다. 외곽 슛으로는 리그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레드와 언젠가는 20득점-10리바운드를 기록할 것으로 기대되는 보거트가 건강하게 시즌을 소화할 수 있다면 지난 시즌처럼 쉽게 무너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레드의 부상으로 출장 기회를 잡으며 수비력을 인정받은 루크 음바무테와 해외파 델피노, 에르산 일야소바도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다.

취임 2년째를 맞은 스캇 스카일스 감독이 시카고 시절만큼 카리스마를 발휘할 수 있다면 밀워키는 센트럴 디비전의 다크호스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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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티 피펜, 그리고 토니 쿠코치.

마이클 조던과 함께 쓰리핏을 해낸 불스의 주역들입니다.

불스의 제리 크라우스 GM이 유럽시절의 쿠코치에 반해 그를 드래프트하는 순간부터 이들의 견원지간은 시작됐습니다.

일단, 쿠코치의 공격에서의 역할이나 포지션이 피펜과 겹쳤다는 점이 피펜의 자존심을 건드렸죠.

역할이 완전히 겹치는 것은 아니었지만, 쿠코치의 유럽 전성기 시절의 역할이 "Initiator"(공을 소유한 채로, 지공이든, 속공이든, 자신이 팀의 공격을 풀어나가는 위치 - 장신 포인트 가드로 보시면 되겠습니다)였고, 제리 크라우스 매니저가 쿠코치에게 반한 점도 바로 그 부분이었다는 점에서, 포인트 포워드 역할을 맡았던 피펜이 쿠코치의 불스입성을 반길 수 만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르셀로나 올림픽 예선리그에서 크로아티아를 만난 미국팀의 조던과 피펜은 쿠코치를 대놓고 혼을 내줍니다.

그러나 이에 질세라 두 팀이 결승전에서 다시 만났을 때, 쿠코치는 자신에게만 유독 가해지는 피펜과 조던의 압박수비를 뚫고 18점, 8리바운드, 9어시스트로 맹활약을 했지요. 

이 경기가 끝났을 때 조던이 쿠코치에게 다가가 했던 말이 있습니다, "Welcome to the NBA !" 


그러나 쿠코치의 루키시즌이 시작되기 직전에 조던이 은퇴를 발표하면서, 이들 둘을 묶어줄 구심점은 사라지고 맙니다.

불스의 리더가 된 피펜은 쓰리핏 우승팀에서 돌아온 다른 멤버들과 함께 커리어 최고의 시즌을 보내며 팀을 이끌었고, 쿠코치는 나름대로 새 리그에 적응을 하며 쏠쏠한 활약을 펼쳤습니다.

쿠코치는 특히 정규시즌 네 경기에서 클러치 결승골을 터뜨림으로써 '한 방'이 있는 강심장임을 리그 전체에 알렸으며, 그의 수비를 신용하지 못하던 필 잭슨 감독도 이 해결사 기질 부분만큼은 인정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작된 1994년 플레이오프.

숙적 뉴욕 닉스와의 시리즈가 시작됐습니다.

1차전... 2차전... 거듭된 뉴욕 원정경기에서 완패를 하고 온 불스는 3차전부터의 반격을 위해 배수진을 쳤습니다.

그러나 패트릭 유잉이 이끈 닉스는 막강했고, 불스는 앞서나가던 큰 점수차를 모두 까먹은 채, 자칫하다간 3차전마저 닉스에게 내줄 지도 모르는 절대절명의 순간까지 왔습니다.

3차전 남은 시간은 1.8초.  점수는 동점.  공격권은 불스에게 있었습니다.

필 잭슨 감독은 정규시즌 네 경기에서 팀을 패배로부터 구해냈던 쿠코치를 마지막 슈터로 지목했습니다. 피펜은 분노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농구화를 벗고, 자신은 경기에 안 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필 잭슨 감독은 물론, 불스 선수들 전원이,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이 피펜의 행동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런 것을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죠.

경기는 속개됐고, 쿠코치는 1.8초를 남기고 공을 어렵게 잡아 고난도의 페이더웨이 턴어라운드 점프슛을 꽂아 버립니다.

불스는 자칫 잘못하면 닉스의 스윕으로 끝났을 수도 있었던 시리즈의 흐름을 자기들 쪽으로 가져올 수 있었고, 결국 승부를 7차전까지 끌고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이 멋진 슛을 집어넣은 쿠코치는 관중석을 향해 주먹을 흔들며 보란 듯이 자신의 해결사 기질을 뽐냈습니다.

그러나...... 이 슛이 불발되고, 불스가 일찌감치 닉스 앞에 무릎을 꿇었다면... 피펜의 팀 내 입지는 과연 어찌 됐을까요? 생각만 해도 아찔한 부분입니다.

스카티 피펜은 4차전이 시작되기에 앞서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인정했고, 팀 전체에 사과도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그가 맹활약함으로써, 불스는 4차전, 6차전, 홈에서의 승리도 나꿔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작된 1994-95 시즌.

호레이스 그랜트를 올랜도 매직에게 보내고, 쿠코치가 선발 라인업의 파워포워드 포지션에서 시작한 시즌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파워포워드가 없었던 불스는 그동안 시스템 농구로 버텨오던 팀 전력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소위 "약빨"이 다 된 것입니다.

경기에서 자꾸 지기 시작하니, 팀원들 간의 불화도 심해졌고, 결국엔 팀 케미스트리가 붕괴되기 일보직전까지 오게 됐습니다.

팀 전체가 이토록 삐걱이던 차에, 팬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멋진 플레이 하나가 이 피펜과 쿠코치에 의해 만들어 졌습니다.

상대는 필라델피아 76ers였습니다.

자유투라인에서 리바운드를 잡은 쿠코치가 마치 이미 약속이라도 한 듯이, 그 자리에서 냅다 상대팀 림을 향해 빨래줄 같은 공을 패스해 줬고, 림으로 달려들어가던 피펜이 공을 잡음과 동시에 연속동작으로 림까지 올라가며 앨리우프 덩크를 꽂아버린 것입니다.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이었지만, 너무도 멋진 그림같은 플레이였습니다.


 
80년대  쇼타임 레이커스 시절, 매직 존슨이 하프라인 근처에서 마이클 쿠퍼에게 넣어주는 앨리우프 플레이를 쿠퍼의 이름을 따 "Coop-a-Loop"이라 불렀습니다.

이 플레이는 그 수준을 훌쩍 뛰어 넘었습니다.

쿠코치의 패스가 나간 지점이 하프라인이 아닌 자유투라인이었습니다.

그리고 피펜은 그 먼 거리에서 날아오는 빠른 공을 림으로 점프해 올라가는 동작에서 잡아 덩크로까지 연결시켰습니다.

평생 견원지간이었던 두 선수가 만들어낸 플레이였기에 더더욱 값져 보인 플레이였습니다.


2002년도에 나온 한 잡지에서 쿠코치는 자신의 불스 시절 피펜과의 관계를 이렇게 밝힌 적이 있습니다.

"스카티 피펜... 솔직히 처음엔 싫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가 얼마나 위대한 선수인지도 알 수 있었다. 내가 NBA 리그에 들어온 이후로 나에게 가장 큰 영향과 배움을 준 선수는, 페트로비치도, 조던도 아닌, 스카티 피펜이었다."

아무튼... 둘 다 멋진 사나이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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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COLUMNS/JEFFREY23 2009. 6. 18. 08:20

90년대 시카고 불스의 오늘 모습은?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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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A는 그동안 수많은 풍파와 룰개정등을 거쳐 반세기가 넘는 리그로 성장했다. 시대마다 각기 다른 시스템이 도입됐으며 구단과 선수들은 마치 카멜레온 처럼 그에 맞는 색깔로 변화를 거듭해왔다. 때문에 '어느 시대의 팀이 더 뛰어나다'라는 주제에 답을 내놓으려면 최소한 경기의 규칙과 리그의 시스템 등의 동일 명제가 수반되어야 한다.

스포츠계에서 과거지향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새로운 기술과 전통의 창출은 어떠한 집단을 막론하고 통용되는 법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되돌아볼 이 팀은 어느 시대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불굴의 팀이었으며 동시에 승리에 목마른 오늘날의 모든 이들에게 성공의 영감을 주고 있다.

승리하는 팀의 노하우는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변치 않았다. 견고한 팀워크, 뚜렷한 팀 칼라. 그리고 확실하게 팀을 이끌수있는 수퍼스타가 있다면 금상첨화다. 하지만 이러한 사례는 시카고가 아닌 다른 팀에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시카고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단순히 농구를 잘했던 팀이라면 지천에 널렸다.

지구 최고의 농구선수와 스몰포워드의 개념을 정립한 만능 재주꾼. 엔터테이너이자 매일밤 가십거리를 쏟아내는 리바운드 챔피언. 여기에 영화배우 뺨치는 미남 유럽용병에 NBA역사상 가장 높은 3점슛 확률을 자랑하는 전문슈터까지..이 모든 캐릭터가 한 팀에 있었다면 믿겨지는가? 불과(라고 하기에 그리 멀지 않지만) 13년전에 그러한 팀이 있었다.

NBA 역사상 가장 많은 정규시즌 72승과 구단 4번째 우승이라는 경사를 맞은 시카고의 업적 이면에는 개개인의 화려함도 이어졌다. 2년여간의 외도 끝에 돌아온 마이클 조던은 MVP 3관왕과 함께 8번째 득점왕, 올 NBA팀과 수비팀에 모두 선정되며 황제의 귀환을 만천하에 알렸다. 코트의 악동 데니스 로드맨도 5년 연속 리바운드왕에 오르며 건재를 과시했다. 팀에 전에 없는 활력을 불어넣어 주며 주위의 우려를 불식시켰음은 물론 우승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들의 이룬 업적은 실로 대단하다. 하지만 그것이 오래도록 사랑받는 이유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추억은 조금씩 잠식되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하지만 때로는 애뜻하게 가슴한구석에 아련함이 남아 있는 추억들도 있기 마련이다. 필자에게는 1996년도 시카고 불스가 그러한 존재로 남아있다. 신인왕 데릭 로즈와 캡틴 커크 하인릭이 이끄는 현재의 시카고에 만족할 수 없고, 끊임없이 과거의 답습을 갈망하며 투영시키는 이유다.

전 세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이들의 현재 모습은 어떠할까?  


마이클 조던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시카고의 리더 마이클 조던. 조던은 1998년 6번째 우승이후 손가락 부상과 팀의 해체를 이유로 2번째 은퇴를 선언했고, 시카고와 영원한 이별을 고하였다.

이후 그의 고향 노스캐롤라이나 주에 소재한 샬럿 호네츠로 복귀가능성이 제기되며 팬들의 궁금증을 증폭시키도 하였다. 하지만 그가 택한 제2의 농구인생은 다름 아닌 워싱턴에서 이어졌다. 조던은 NBA 프로팀인 워싱턴 위저드와 아이스하키 리그인 NHL의 워싱턴 캐피털스의 소유 지분을 취득하며 구단주로서 새출발을 다짐했지만 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듬해인 2001년 단지 농구를 사랑해서, 농구가 그리워서 선수로 복귀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날 시카고에서 겪었던 성공적인 컴백신화는 쌓지 못했다. 남다른 그의 농구 열정에는 찬사가 쏟아졌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과 비난도 함께 했기 때문이다.

그가 맺은 2년 계약기간동안 팀을 플레이오프에 올려놓는데 실패했을뿐만 아니라 구단과 동료들에게도 박수를 이끌지 못할정도로 원만한 대인관계를 이끌지 못했다. 3번째 은퇴를 선언한 조던이 다시 한 번 구단주로 돌아오는데 실패한 이유도 워싱턴 선수단의 거센 반대가 한 몫했을 정도였다.

 


스카티 피펜



데니스 로드맨



토니 쿠코치



론 하퍼



룩 롱리



스티브 커



빌 웨닝턴



랜디 브라운


09/07/01 Chicago named Randy Brown director of player development

줃 버츨러



제이슨 카피


90년대 시카고 불스 주전멤버로 활약했던 론 하퍼가 한국을 방문한다.

사실 론 하퍼라는 이름은 NBA 농구에 심취한 열혈 매니아가 아니라면 다소 생소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흔한 포털사이트 인물사전에도 기록이 없는 선수이니 당연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도 시카고의 향수를 잊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하퍼의 존재가 가슴속 한 구석에 선명히 남아 있을 것이다.

하퍼는 과연 어떤 선수였을까?


최고의 스윙맨에서 나락으로

하퍼는 마이클 조던, 스카티 피펜, 데니스 로드맨 등 스타플레이어들과 함께 시카고의 3연패에 일조한 최고의 ‘조연’이었다. 하지만 그가 걸어온 농구인생을 되돌아보면 이보다 파란만장한 이야기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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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퍼는 마이애미 대학시절 공수에서 최고의 기량을 뽐내던 ‘주연‘이며 스타플레이어였다. 마이애미 재학시절 4년 동안 경기 당 19.8점을 기록한 하퍼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공격형 선수였다. 운동능력도 발군을 자랑하여 멋진 슬램덩크를 곧잘 성공시키던 하퍼를 두고 혹자들은 줄리어스 어빙과 비교하기도 하였다. 현역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어빙과의 첫 번째 대결을 꼽는 하퍼에게는 엄청난 영광이었다.
 
뛰어난 공격만큼이나마 수비도 빛이 났다. 스틸은 물론 리바운드와 블락에서도 웬만한 빅맨 급 이상의 기량을 발휘하여 하퍼는 공수에서 완벽한 스윙맨으로 거듭나있었다.

졸업 후 1986년 NBA 드래프트에 뛰어든 론 하퍼는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황금기를 이끌 브래드 도어티, 마크 프라이스와 함께 전체 8번 픽으로 프로에 입문한다.

루키 시즌은 하퍼에게 잊지 못할 한 해였다. 하퍼는 본인의 생애 최다 기록이자 루키 전체 1위인 경기 당 22.9점(리그 16위)으로 득점본능을 드러냈고 경기 당 2.6개의 볼을 훔치며 이 부문에도 리그 4위에 올라 신인왕을 예약한 듯 보였다. 하지만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척 퍼슨에게 밀려 결국 최종 투표는 2위로 마감, 아쉬움을 남겼다.

두 번째 시즌을 맞이한 하퍼는 개막 두 달 만에 심각한 발목부상으로 단 25경기나 결장했다. 공격빈도는 출장시간과 함께 다소 줄어들었지만 수비력 하나는 여전했다. 건강을 되찾은 하퍼는 훗날 몸담게 될 시카고 불스와 피할 수 없는 플레이오프 라이벌전을 시작하게 된다. 상대는 자신과 비슷한 신체조건을 지닌 마이클 조던이었다. 때문에 당시 하퍼는 클리블랜드의 원정 유니폼 색에서 착안된 ‘오렌지 조던’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됐다.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하퍼는 조던과 함께 수년 뒤 시카고에서 역사상 가장 강력한 백코트 수비군단의 핵심인물이 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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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클리블랜드 시절의 하퍼 역시 조던의 여느 라이벌들과 다를 바 없는 신세였다. 시카고는 당시 해마다 디트로이트의 괴롭힘에 고배를 들었지만 클리블랜드 역시 뉴욕 닉스와 함께 시카고의 조연에 머물렀다. 특히 클리블랜드에 유독 강한 면모를 보였던 조던의 활약에 하퍼는 ‘제2의’라는 수식어에 만족해야 했다.

줄리어스 어빙의 후계자, 제2의 에어조던 같은 칭송은 하퍼에게 있어 더 없는 영광이었지만 결국 팬들과 농구관계자들에게 실망만 안겨주었다. 좋은 선수임은 분명했지만 주위의 기대를 충족시키기에는 충분히 높이 날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빛났던 클리블랜드시절에는 남부럽지 않은 성적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올스타 무대를 밟아보지 못했다. 1987년부터 1988년까지 두 차례 슬램덩크 콘테스트에 참가하며 별들의 전쟁에 얼굴을 내밀었지만 쟁쟁한 공중곡예사들에 가려 이렇다할만한 인상도 심어주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프로생활의 첫 번째 전환점이 찾아왔다. 클리블랜드가 클리퍼스의 레지 윌리엄스와 신인 대니 페리를 받는 조건으로 하퍼와 미래의 드래프트 픽 3장을 넘기는데 합의한 것이다. 만년 약체팀으로 리그 모든 선수가 꺼리는 LA 클리퍼스에 새 둥지를 틀게 됐지만 전망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용꼬리보다는 뱀머리, 재능 앗아간 무릎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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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퍼스 입장에서 하퍼의 영입은 더 없는 선택이었다. 당시 클리퍼스는 대니 매닝와 찰스 스미스라는 전도유망한 선수들로 강력한 프론트라인을 구축하고 있었지만 백코트의 공격력 부재가 가장 큰 문제였다.

마지막 퍼즐을 채운 클리퍼스는 하퍼와 함께 새롭게 태어났다. 주장까지 담당하게 된 하퍼는 젊은 클리퍼스를 16년 만에 플레이오프 무대로 이끌며 마침내 ‘주역’으로 우뚝섰다. 1992-93시즌에는 클리퍼스 구단 기록인 단일 시즌 스틸 기록(177개)도 갈아치우며 승승장구 했다.

하지만 하퍼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클리퍼스에서 보낸 마지막 해에 팀이 와해된 것이다. 클리퍼스의 미래였던 매닝과 ‘덩크 아티스트‘ 도미니크 윌킨스의 트레이드가 불운의 시작이었다.

취지는 나쁘지 않았다. 구단 입장에서는 윌킨스가 전성기에 비해 운동신경이 다소 떨어졌지만 흥행 상승과 함께 당장의 전력에 큰 보탬이 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정작 윌킨스의 생각은 달랐다. 10여 년 동안 애틀랜타 호크스의 아이콘이자 NBA를 대표하는 슈퍼스타였기 때문에 클리퍼스 행은 그에게 있어 좌천과도 다름없었다.

프랜차이즈 스타와 함께 팀의 재건을 다짐했던 하퍼의 꿈은 그렇게 허물어졌다. 미래를 약속했던 젊은 유망주들은 하나 둘 팀을 떠났고, 주위에는 불만으로 가득 찬 베테랑 선수들과 은퇴를 앞둔 노장들, 이적을 기다리는 일회용 선수들로 득실댔다.

하퍼는 또 한 번의 멋진 시즌을 보냈지만 팀은 27승 55패를 거두며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994-95시즌을 앞둔 하퍼 인생에 일대 개혁의 바람이 일었다. 무릎수술과 시카고와의 계약. 두 번째 터닝포인트였다.


희생과 바꾼 6개의 우승반지 
 
시카고가 하퍼에게 원하는 것은 클리퍼스와 같았다. 조던의 돌연은퇴로 득점을 올려주는 공격형 슈팅가드를 물색하던 차에 눈에 띈 것이 하퍼였다. FA신분이었던 하퍼의 영입은 즉각 이루어졌다.

하지만 하퍼는 무릎수술로 인해 그가 가지고 있던 많은 재능을 잃은 상태였다. 스피드와 점프 등 그가 자랑했던 운동능력은 대부분 상실되었고 베테랑 선수들에게도 난해한 ‘트라이앵글 오펜스’의 적응까지 온갖 악재들이 그를 괴롭혔다. 시련의 연속이었다.

개인기록은 자연스레 전 카테고리에서 데뷔 이래 최저를 기록했다. 시카고의 필 잭슨 감독은 하퍼를 53경기에서 선발로 내세웠지만 출장시간은 20분 이하만 허락하였다. 경기 당 20점이 가능했던 올스타 급 가드가 평균 6.9점의 벤치선수로 전락하기까지 1년도 걸리지 않았다. 결국 두 자리 수 득점도 힘겨워 보이는 하퍼의 ‘조던화’는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야구로 외도한 조던이 극적으로 돌아왔다. 

조던이 되야 했던 하퍼는 조던의 쉬는 시간을 대신하는 벤치워머의 역할을 감내해야 했다. 조던의 컴백이 마냥 기쁠 수가 없었던 이는 아마도 하퍼가 유일했을 것이다.

역사적인 1995-96시즌을 앞둔 시카고는 더 이상 하퍼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조던은 연일 단내 나는 개인훈련으로 예전의 기량을 되찾고 있었으며 제 2옵션인 스카티 피펜 역시 언제든 20점이 가능한 올스타 포워드였다. 그 뒤를 잇는 토니 쿠코치는 두 시즌 동안 검증을 마치며 벤치에서 가장 신뢰받는 식스맨으로 시즌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하퍼의 역할에 변화가 불가피 했다. 잭슨은 결국 하퍼를 주전 포인트가드로 임명하고 조던과 피펜의 백코트에 보다 사이즈와 힘을 높였다. 198cm의 신장을 지녔던 하퍼는 예나 지금이나 포인트가드로서는 파격적인 높이의 이점을 십분 살렸다. 슈팅가드부터 스몰포워드까지 수비할 수 있는 하퍼의 폭넓은 매치범위는 조던과 피펜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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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하퍼는 비록 존 팩슨이나 B.J. 암스트롱 같은 선수들에 비해 슈팅능력이 부족했지만 NBA 역사상 가장 경쟁력 있는 백코트 수비의 한 축으로 그의 존재가치를 재조명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혹자들은 조던과 피펜 그리고 하퍼가 수비진영에 나란히 서 있으면 코트가 꽉 차 보일정도라고 하였다. 이들의 긴 팔에서 나오는 인터셉트와 발군의 수비능력은 24초 공격시간이 갱신되는 시점부터 상대팀을 압박했다.

‘전문수비수’로서 새로운 농구인생을 시작하게 된 하퍼는 점차 트라이앵글 시스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볼을 잡고 공격을 시작하고 주도했던 과거는 뒤로하고 공 없이 어떻게 움직여야하는지가 그의 최우선 과제였다. 하퍼는 기꺼이 동료들이 득점을 올리기 위한 발판이 되어 주었다. 이따금씩 재치 있는 컷인 플레이로 골밑 득점을 올리기도 하였고 위크사이드에서 더블팀에 빠져든 조던과 피펜에게 공을 받아 3점 슛도 넣어 주었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그에게 할당된 공격범위 내에서는 최선을 다 해주었다.

3연속 우승. 그를 빛내 주었던 재능을 반납한 댓가로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선물을 받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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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퍼는 이후 조던의 은퇴와 피펜의 이적, 잭슨 감독의 재계약 불발로 붕괴된 시카고를 떠나 다시 한 번 LA를 찾는다. 리그 대부분의 선수가 뛰길 원하며 새로운 왕조를 준비하고 있는 팀이라는 점에서 전과 달랐다. 그의 4번 째 팀은 바로 명문구단 레이커스였다. 은사 잭슨 감독의 간곡한 설득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레이커스는 시카고의 코칭스태프가 이동했기 때문에 유니폼 색만 제외하고는 낯설지가 않은 곳이었다.

하퍼는 정신적인 멘토역할을 자처하며 젊은 레이커스에 노련함을 가져다 주었다. 과거 경험을 토대로 트라이앵글 오펜스의 이해를 도왔고 젊은 코비에게는 정신적인 멘토역할을 수행했다. 

마침내 레이커스는 90년대의 긴 터널을 지나 밀레니엄의 첫 번째 왕좌에 오르며 3연속 우승을 일궈냈다. 하퍼는 늘 그랬듯이 밀레니엄 왕조의 탄생에 숨은 조연으로 다시 한 번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였다.

강요된 희생은 아니었지만 누구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운명은 아니었다. 필시 대개는 보이콧이나 이적을 요구하며 본연의 자아를 잃는 것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태업이나 젊은 나이에 은퇴하는 선수들을 종종 목격하기도 한다. 하퍼가 아직까지 추억되는 이유다.

금세기 최고의 농구팀으로 기억되는 90년대 시카고 불스. 그들과 함께 호흡하며 역사를 만들었던 인물을 만나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번 방한은 많은 올드팬들에게 남다른 의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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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시카고 불스의 백코트를 지휘했던 놈 반 리어의 사망소식이 알려진지 불과 2시간 후에 또 다른 비보가 울리며 시카고 시민들은 망연자실하였다. 전 시카고의 감독이자 지역 방송국 아나운서를 담당해온 조니 ‘레드’ 커는 오랫동안 전립선암과 투병해왔지만 76세를 일기로 그렇게 유명을 달리했다. 홈구장인 유나이티드센터에서 그의 기념식이 치러진지가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조니 ‘레드 커’는 시카고 불스의 아이콘이다” 구단주 제리 레인스도프의 말이다. 그는 이어서 “커의 위대함을 그리워 할 것이다. 그의 명복을 빌고, 유가족들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한다”며 비통함을 감추지 않았다.

NBA 마니아들이나 시카고 불스의 골수팬이 아니라면 그가 이름이 다소 생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이 활약하던 지난 90년대 경기를 떠올려보자. 시카고의 홈경기가 있을 때마다 조던은 어김없이 경기 전, 송진가루를 손바닥에 묻혀 털곤 했다. 마치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르브론 제임스처럼 말이다. 제임스의 화려한 퍼포먼스에는 열광하는 관중들의 함성이 뒤따랐지만, 조던의 행동에 늘 곤욕을 치룬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古 레드 커다. 가루가 흩날릴 때마다 익살스런 표정으로 쿨럭 대던 그의 모습을 기억한다면 이미 그에 대한 절반의 추억은 떠올린 셈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커가 이룬 업적과 족적을 모두 설명할 수 없다. 흔히 알고 있는 WGN(시카고 불스 지역방송국) 아나운서 자리는 그의 기나긴 농구여정의 종착역에 불과 했기 때문이다.


농구인의 첫걸음, 선수생활의 시작   

1932년 7월 17일 세상에 태어난 레드 커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아버지 매튜와 스웨덴 출신의 어머니 플로렌스 사이에서 태어난 유럽혼혈아다. 하지만 아버지 매튜는 레드 커가 3살 때 폐렴으로 일찍이 세상을 등졌다.  

레드 커의 근래, 생전 모습을 그야말로 주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온화한 할아버지 그 자체였다. 백발이 성하며 자켓 사이로 삐져나온 후덕한 뱃살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영광의 시절이 있었다. 레드 커는 고등학교와 대학 농구에서 뛰어난 선수였고, NBA 우승과 올스타 선발경험도 지니고 있다.

뉴욕에 소재한 틸든 고교에 입학한 레드 커는 졸업반에 오르기 직전 무려 22cm 가까이 성장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된다. 전 SBS 한창도 해설위원의 명언으로 익히 알려져 있는 스코티 피펜의 ‘경이로운 24cm'의 기적이 레드 커에게도 찾아온 셈이다. 이는 가장 좋아했던 축구 대신 농구를 택하게 만든 일대 사건이었다. 농구선수로서 최고의 날개를 달은 레드 커는 변화를 빠르게 받아들이며 곧바로 모교를 1950년 리그 우승팀으로 올려놓았다.

레드 커는 고교 졸업 직후 일리노이스 대학의 리쿠르팅으로 마침내 시카고와 연을 맺게 되었다. 일리노이스는 현재 마이클 조던의 장남인 제프리 조던이 소속되어 있는 학교로서 시카고 지역에서는 팬들의 지지도가 가장 높은 곳이다. 그가 NCAA(미 대학농구)에 남긴 업적은 굉장하다. 레드 커는 1952년 빅10 타이틀을 견인한데 이어 그 해 모든 대학농구선수들의 로망이자 꿈의 무대인 파이널포(역자주 : 토너먼트 4강전을 일컫는 말)를 밟는 기염을 토해냈다. 3년의 재학시절동안 그가 남긴 1299점은 모교 최다득점으로 남아있으며 컨퍼런스에서는 3번째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이러한 레드 커의 활약은 시카고 지역 언론인 트리뷴에서 9번째로 선정한 ‘빅10 실버 바스켓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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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인 1954년 NBA 드래프트에서 행운은 계속되었다. 전체 6번째로 시라큐스 내셔널스(現 필라델피아 76ers)에 지명된 레드 커는 데뷔와 함께 훗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전설적인 선수와 호흡을 함께 하게 됐다. 돌프 쉐이즈는 프로통산 12차례나 NBA올스타와 리바운드왕을 지낸 스타플레이어였다. 루키시즌에서 경기 당 10.5점, 6.6리바운드를 수확한 레드 커는 처음이자 마지막 우승에 기여하였다.

이후 11시즌을 시라큐스와 필라델피아에서 보낸 레드 커는 1965-66시즌을 앞두고 볼티모어 불리츠(現 워싱턴 위저드)에서 커리어를 마감한다. 통산 905경기에 출장하여 12,480점과 10,092 리바운드를 남겼으며, 경기 당 13.8점, 11.2리바운드를 기록했다. 한 번의 리그 우승과 3번의 올스타 선정도 뒤따랐다. 결코 화려하진 않았지만 무관의 제왕들도 울고 갈 우승반지도 손가락에 끼워 보며 남부럽지 않은 프로경력을 마감한 그였다.

또한 한 가지 간과하면 안 될 것이 레드 커는 매일 밤 같은 디비전의 윌트 체임벌린과 빌 러셀과 마주해야 했다는 사실이다. 러셀과 체임벌린이 누군가? 눈뜨는 아침이면 NBA 역사책의 기록을 갈아버리는 괴물들이 아니었던가. 두 거인들의 틈바구니에서 무언가를 해본다는 것은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질 일이었지만 레드 커는 쉽사리 굴복하지 않았고 당당히 더블-더블 활약을 이어왔다.

팀 동료였던 쉐이즈는 지난 2월 치러진 레드 커의 기념식에서 “50년대 최고의 센터는 빌 러셀, 2번째는 윌트 체임벌린이었고 레드 커가 넘버3였다”며 오랜 친구를 치켜세우기도 하였다. 전성기 시절의 샤킬 오닐과 현재의 드와이트 하워드와 함께 같은 디비전에서 10년 넘도록 더블-더블을 기록해온 백인센터가 있다면 어떤 평가가 내려질까? 비현실적인 상상으로 치부 될 수도 있는 가정이지만 레드 커의 시대적 상황은 현실이었다.

844경기 연속 출장 기록도 그의 성실함을 뒷받침한다. 이 숫자는 훗날 랜디 스미스와 철인 A.C 그린에 의해 깨지기 전까지 그만이 보유했던 넘사벽의 기록이었다. 마이크를 잡았던 아나운서의 모습만으로 고인을 추억하기에는 그가 남긴 NBA의 족적은 결코 작지 않았다.


세계적인 프로스포츠 팀, 시카고 불스를 창조하다

구단프론트에 몸담았던 시절에는 뛰어난 업무수행능력을 발휘하였으며, 존경받는 아나운서였다. 하지만 후세에 그가 기억될 이유가 있다면 레드 커는 오로지 시카고 불스밖에 모르는 인물이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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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불스가 탄생하기 전인 1966년, 연고지에는 이미 무수히 많은 프로스포츠 팀들이 존재하였다. NFL과 MLB, NHL등 대부분의 종목들이 한 자리씩 차고 있었다. 하지만 프로 농구팀을 창단하기 위한 여러 단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스의 탄생은 답보상태를 이어갔다. 이 가운데 레드 커가 구단프론트의 중책을 담당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신생팀 창단의 바람이 불자 타 구단들의 거센 반대로 난항을 겪었다. 하지만 레드 커는 현 미국 농구협회 이사회 회장을 지내고 있는 제리 콜란젤로를 위시하여 모든 실무진들과 힘을 뭉쳤고 결국 팀 창단에 성공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감독직을 자원한 레드 커는 젊은 황소군단을 진두지휘하였다. 33승 48패. NBA 역사상 존재했던 수많은 창단 팀들 가운데 최고기록이다. 뿐만 아니라 4대 메이저 스포츠로 불리는 NFL과 MLB, NHL에서도 전례가 없던 사건이다. 그 어떤 리그에서도 창단 첫 해 플레이오프에 오른 팀이 없었다. 레드 커의 올해의 감독상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시카고는 가드와 포워드를 겸하고 있는 제리 슬로안(現 유타 재즈 감독)이 팀 내 리바운드 리더를 차지할 정도로 단신 팀이었다. 이러한 핸디캡을 안고 있는 팀들의 해결책은 크게 다르지 않다. 팬들에게 “수비는 우리가 시합하는 방식”이라며 공약한 레드 커는 신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속공과 강력한 압박수비를 주문했고 선수들은 이를 잘 소화해냈다. 레드 커는 당시 이를 두고 “마치 YMCA 농구를 보는 듯 했다”며 만족스러워 한 바 있다. 

창단 첫 해 치고는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지만 이듬 해 29승 58로 저조한 성적을 남기며 팀을 떠난 레드 커는 당시 NBA의 인기를 능가했던 ABA로 눈을 돌리게 된다. 화려한 ABA에 매료된 그는 시카고의 어시스턴트 코치이자 오랜 친구인 알 비앙키와 함께 버지니아 스콰이어의 단장으로 취임하였다. 이후 레드 커는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닥터 J' 줄리어스 어빙과 첫 번째 계약을 맺는 행운을 누렸으며 핑거롤의 대명사인 '아이스 맨’ 조지 거빈을 EBA라는 마이너리그에서 건졌다. 특히 거빈은 폭력사태로 NCAA에서 선수자격을 박탈당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진흙 속에서 진주를 건진 것과 진배없었다. 운수 한 번 기가 막히게 좋은 인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ABA와 NBA가 리그합병이 되면서 설 자리를 잃어버린 것이다. 시카고로 돌아가야 할 것을 직감한 레드 커는 곧바로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레드 커는 당시 팻 윌리엄스 단장이의 공백을 채우기 보다는 감독직을 더 원했다. 하지만 딕 모타 감독이 버티고 있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의 손에 마이크가 들릴 시간이 온 것이다.


헤드셋과 마이크로 연 농구인생 3막, 그리고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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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나운서 경력 중 가장 자부할만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마이클 조던의 신성한 의식일 것이다. 조던은 경기 전 송진가루를 레드 커의 면전에 털곤 했는데 이것은 그가 신인 시절 처음 가졌던 연습경기부터 시작되었다. 조던은 훗날 “이 의식이 어떻게 시작됐는지는 잘 모르겠다. 처음 그를 봤을 때 멋진 정장이 눈에 띄었고, 조금 더럽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었던 것이 계기였던 것 같다”며 웃음 지었다.

레드 커가 방송인으로서 첫 발을 내딛은 것은 미국 스포츠 전문방송인 짐 더럼의 제안에 의해서였다. 이후 레드 커는 2007-08시즌까지 90년대 6회 우승과 함께 시카고와 울고 웃었다. 가까이서 까까머리의 젊은 청년이 시작했던 공중곡예를 모두 목격한 몇 안되는 인물인 셈이다.

이번 2008-09시즌에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시카고의 전반전 해설을 담당할 정도의 열의를 보였다. 암도 레드 커의 열정을 꺾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지난 2003년부터 2년에 걸쳐 모조 왼쪽 엉덩이에 의지하며 발가락 절단수술과 심장수술을 경험하였다. 모진 풍파를 견디면서 끝까지 시카고의 농구를 시청자들에게 전파하였다.

하지만 그도 결국 인간이었다. 육신을 잠식하는 암세포는 그를 휠체어에 앉혔고 이는 그가 사랑했던 시카고와 농구, 그리고 세상과 이별을 고할 시간이 가까워졌음을 암시하였다.

“제 손녀딸 아이 하나는 저를 무척이나 따릅니다. 농구랑은 상관없이요. 왠지 아십니까? 저는 노래도 부를 줄 알고 문워크도 할 줄 알거든요” 트레이드 마크인 윙크를 날리면서 레드 커가 생전에 남긴 말이다. 열혈 농구인이었지만 집에서는 인자한 할아버지의 모습도 보여주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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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니 ‘레드’ 커. 붉게 타오르는 그의 머리카락은 그의 별명으로 쓰였고 미들네임이 되었다. 마치 어빈 매직 존슨처럼 말이다. 정열의 붉은 색으로 대변되는 시카고 불스에는 그렇게 23번의 농구신에 가려진 진짜 ‘미스터 불스‘가 존재했었다.

그의 열정은 영원히 시카고와 불스팀에 살아 숨 쉴 것이며 왕조의 부활에도 함께 하리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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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불스가 27일(이하 한국시간) 유나이티드센터에서 열린 플레이오프 1라운드 4차전에서 2차 연장접전 끝에 121-118로 승리를 거두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집념이 만들어낸 값진 승리였다. 영웅은 없었다. 선수 한 명, 한 명이 맡은 바 소임을 해낸 결과였다.

1승 2패로 리드를 내준 상황에서 홈 2연전 마지막 경기였기 때문에 시카고에게 있어 오늘 승리는 절실했다. 이로서 시카고는 보스턴의 홈에서 치러지는 5차전을 내주더라도 홈에서 다시 한 번 업셋의 가능성을 타진해 볼 수 있게 됐다.

양 팀은 금일 경기에서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며 치열한 시리즈 분위기를 이어갔다.

5점차로 뒤진 채 4쿼터를 맞이한 시카고는 주장 커크 하인릭(18점, 3스틸)의 3점 슛으로 포문을 열며 본격적인 추격에 나섰다. 하프코트 프레스로 수비 강도를 높인 시카고는 3분 동안 보스턴의 필드골을 묶는 한편, 신인 데릭 로즈(23점 11리바운드 9어시스트)가 잇따른 레이업 득점을 성공시키며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로즈는 4쿼터에서만 14점을 몰아넣으며 추격의 불씨를 놓았다. 지난 2, 3차전의 부진을 말끔히 씻는 대활약이었다. 특히 보스턴의 야전 사령관 레이전 론도와의 1대1 대결을 정면으로 돌파하며 신인왕의 위용을 과시하였다.

시카고는 경기 종료 16여초 전, 95-93으로 앞선 상황에서 타이러스 토마스(14점 10리바운드)가 자유투 2개를 얻으며 승리에 한 발짝 다가선 듯 보였다. 하지만 첫 번째 자유투를 놓친 토마스의 실수로 보스턴은 동점의 기회를 잡았다.

예상대로 보스턴의 마지막 선택은 해결사 레이 알렌(28점)이었다. 알렌은 더블스크린을 돌아 완벽한 오픈찬스를 만들며 3점 슛을 시도하였다. 조아 킴 노아(12점 10리바운드, 3블락)가 뒤늦게 손을 뻗어 보았지만 공은 이미 알렌의 손에서 떠난 뒤였다. 결과는 지난 2차전과 같았다. 알렌이 다시 한 번 같은 조연과 함께 드라마를 써낸 것이다.

연장전에 돌입한 보스턴은 쌍포 폴 피어스(29점 7리바운드)와 알렌의 야투가 살아나며 역전승을 눈앞에 두는 듯 했다. 벤 고든(22점, 6리바운드)이 공을 잡기 전까지 말이다. 고든은 경기 종료 4.5초를 남기고 극적인 동점 3점 슛을 터트리며 경기장을 가득 메운 홈팬들을 열광시켰다.

2차 연장전을 맞이한 양 팀 선수들은 힘든 기색이 역력했다. 피로로 다리가 떨리고 눈은 움푹 들어갈 만큼 체력고갈이 눈에 띄었다. 강인한 정신력과 고도의 집중력 요구되는 시간이었다.

때문에 두 번째 시즌을 맞이한 노아의 허슬 플레이는 경기를 장식하는 피날레로 부족함이 없었다. 노아는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된 2차 연장전에서 고비 때마다 결정적인 블락을 성공시키며 리바운드를 장악하는 등 숨은 주역이 되었다.

보스턴은 피어스가 경기 종료와 함께 던진 회심의 3점 슛이 존 샐몬스(20점, 3스틸, 3블락)에게 저지당하며 무거운 귀향길에 오르게 됐다. 피어스는 경기 후반에 선전했지만 하인릭의 전담마크에 고전을 면치 못하며 부진한 야투 성공률(29개 시도 중 9개)을 남겼다.

한편 론도(25점 11리바운드 11어시스트)는 시리즈 2번 째로 트리플더블을 찍는 기염을 토해냈지만 팀 패배로 빛이 바랬다.

다음 5차전은 29일 보스턴의 홈구장인 TD뱅크노스가든으로 돌아가 치러질 예정이다. 시카고는 다음 경기에서 승리한다면 지난 2005-06시즌에 이어 2번째로 전년도 우승팀 업셋을 기대해 볼 수 있을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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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만에 플레이오프에 모습을 드러낸 시카고 불스가 디펜딩 챔피언 보스턴을 105-103으로 격파하며 적지에서 소중한 1승을 거두었다. 보스턴은 2년차 조아 킴 노아(11점)에게 무려 17개의 리바운드를 허용하는 등 제공권 장악에 실패하며 가넷의 부상공백이 아쉬운 한 판이었다. 예상치 못한 원정승리의 기수는 다름 아닌 신인 데릭 로즈였다.

로즈는 폭발적인 스피드를 이용한 돌파로 보스턴의 골밑을 유린하며 36점(11어시스트)을 기록, 플레이오프 데뷔전을 자축했다. 이는 지난 1970-71시즌 루 앨신더(카림 압둘자바 改名전 이름)가 작성한 신인 데뷔전 득점기록과 타이다. 무려 38년 만에 깨어난 대기록이다. 비록 올스타 포워드 한 명이 빠지긴 했지만 우승팀 보스턴을 상대로 거둔 성과이기에 그 의미는 컸다.

양 팀은 시종일관 치열한 공방전을 펼치며 접전을 예고했다. 4쿼터 들어서도 승리를 장담하기 힘든 상황 속에서 시카고의 반격은 거셌다. 주전 슈팅가드를 담당하고 있는 벤 고든(20점 5어시스트)은 3점 플레이를 포함한 두 방을 꽂아 넣으며 팽팽한 분위기를 이끌었다. 93-92, 1점차 리드를 지키던 시카고는 경기 종료를 37초 앞두고 피어스에게 자유투 2개를 헌납하며 역전을 허용하였다.

곧바로 타임아웃을 신청한 시카고의 선택은 로즈의 1대1이었다. 어차피 한골승부였기 때문에 파울만 얻어내더라도 성공이라는 판단이었다. 로즈를 제외한 4명의 선수는 베이스라인으로 물러나며 그를 위한 로테이션공간을 만들어주었다. 이 겁 없는 신인은 단 3초 만에 전광석화같이 레이업 슛을 성공시키며 기대에 부응하였다. 폴 피어스(23점 7리바운드)가 다급하게 림 아래로 흐르는 공을 쳐냈지만 이미 그물을 가른 뒤였다.

이어진 보스턴의 공격은 해결사 레이 알렌(4점)의 몫이었다. 하지만 알렌의 3점 슛은 림을 외면하였고 공격리바운드를 걷어낸 레이전 론도(29점 9리바운드)가 점프슛을 성공시켰다. 승기는 보스턴으로 기우는 듯 보였다.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은 시카고는 위기에 강한 고든에게 마지막 칼자루를 쥐어주었다. 하지만 골밑에 수비를 집중시킨 보스턴에 저지당하며 공은 론도에게 흘러가고 말았다. 플루어에 몸을 던진 커크 하인릭의 허슬플레이로 다시 한 번 기회가 돌아간 시카고는, 순간 천당과 지옥을 모두 경험하였다.

다급해진 샐몬이 부정확한 드리블 모션을 취했고, 심판의 휘슬은 이를 놓치지 않은 것이다. 시카고에 패배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순간이었다. 하지만 판정이 번복되며 다시 한 번 기회를 맞이한 시카고는 로즈의 자유투 2개에 힘입어 경기를 뒤집었다.

남은 시간은 불과 9초. 이번에는 또 한명의 해결사 폴 피어스가 팔을 걷었다. 시카고는 뛰어난 대인방어 능력을 자랑하는 하인릭을 전담마크맨으로 내세우며 피어스를 저지하려 했다. 하지만 시카고의 노아가 무리한 블락을 시도하며 파울이 선언되었다. 승부를 결정지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첫 번째 자유투를 침착하게 성공시킨 피어스는 이어진 두 번째 슛을 놓치며 손안에 들어왔던 승리를 날려버리고 말았다.

글렌 데이비스의 리버스 레이업 득점으로 포문을 연 보스턴은 이 후 간판스타들의 극심한 슛 난조로 고개를 숙여야했다. 피어스는 연장 들어 4번의 슛을 모두 놓쳤으며 알렌 역시 종료 1초전 시도한 마지막 슛이 끝끝내 림을 외면하며 명성에 걸맞지 않는 활약의 아쉬움을 남겼다. 특히 알렌은 이날 경기에서 총 12개의 야투 중 11개를 놓치는 등 좀처럼 공격의 활로를 개척하지 못했다.

시카고는 연장전을 맞이하여 로즈와 고든이 무득점에 그쳤지만 6점을 몰아넣은 타이러스 토마스의 활약에 힘입어 짜릿한 1승을 챙겼다.

로즈는 경기 종료 후 인터뷰에서 “압둘자바의 기록과 나란히 하게 되어 기쁘다. 론도는 정말 좋은 선수고 그와의 매치업을 즐겼다”며 대범함을 드러내는 한 편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다음 2차전은 한국시간으로 21일 TD뱅크노스가든에서 치러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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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COLUMNS/HELTANT79 2009. 4. 8. 01:31

마이클 조던의 작은 선행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로베르토 거레이가 미래를 내다볼 수 있었다면 그날은 평소보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출근했을 것이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1987년 8월의 어느 날, 시카고 시경에서 근무하던 거레이는 신고 전화를 받고 시카고 남부에 위치한 한 아파트로 출동했다. 꼬마 아이가 의식불명 상태로 있다는 것이었다. 응급구조대와 함께 현관문을 연 거레이는, 이후로도 계속해서 그를 괴롭히는 악몽을 만나야 했다.
방 안에는 다섯 살도 안 돼 보이는 아이가 발목에 심한 상처를 입은 채로 누워있었다. 끈으로 오랜 시간 동안 졸려있을 때나 생길 수 있는 상처였다. 호흡을 확인하기 위해 아이의 셔츠를 걷어올리자 훨씬 끔찍한 상처가 나타났다. 아이의 가슴이 화상으로 완전히 문드러져 있엇던 것이다.

“살덩어리가 완전히 문드러져서 흘러내리고 있었죠. 말도 안되는 광경이었어요. 제 평생 그런 끔찍한 모습은 처음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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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살짜리 레티 맥기의 참혹한 죽음은 시카고 시민들을 경악시켰다. 도대체 누가, 무슨 이유로 이런 어린아이를 이렇게 잔인하게 죽였을까? 시카고 언론은 레티의 사망을 주요 기사로 보도했고, 시민들은 범인이 밝혀질 때까지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레티의 친엄마 앨리시아 에이브러햄과 그녀의 남자친구 죠니 캠벨이 체포될 때까지 말이다.

에이브러햄과 캠벨은 그해 여름 내내 레티를 학대했다. 레티의 목소리가 너무 높다는 것이그 이유였다. 캠벨은 레티를 ‘계집애같다’고 나무라며 주먹과 몽둥이로 두들겼다. 담뱃불로 살갗을 지지는 것도 모자라서 다리미까지 동원했다. 에이브러햄에게서 받은 바늘로 계속해서 레티를 찔러댔다. 나중에는 끓는 물을 끼얹기도 했다. 밤에는 더 끔찍한 학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캠벨은 레티의 발목을 묶어 옷장 옷걸이에 밤새 거꾸로 매달아버렸다. 애타게 엄마를 찾았지만 소용없었다. 전에도 시 복지국으로부터 아동 방치에 대한 경고를 받은 적이 있었던 에이브러햄은 레티가 아무리 울부짖어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캠벨은 레티의 입에 헝겊 조각을 물린 뒤 감자껍데기로 눈을 비벼댔다. 레티가 죽기 전날 레티는 이미 폐렴 증세를 보이고 있었고, 쇄골과 골반이 부러져 있었다.

운명의 날, 캠벨이 레티를 풀어주자 레티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목이 마르다고 했다. 캠벨이 사내답게 스스로 찾아먹으라고 소리치자, 몸무게가 12킬로그램도 안 되는 레티는 혼자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캠벨이 게으름 피우지 말라고 소리치는 순간 마침내 레티의 고통도 끝이 났다. 레티가 학대의 손길에서 벗어나 영원한 안식을 찾았을 때, 레티의 친엄마 에이브러햄은 바로 옆에 앉아서 ‘헐크’를 보고 있었다.

에이브러햄과 캠벨을 체포하긴 했지만 어려움은 남아있었다. 두 사람의 혐의에는 정황증거만이 뚜렷할 뿐, 결정적인 목격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혐의를 극구 부인했고, 아파트 주민 중에는 레티의 울음소리를 들은 사람조차도 나타나지 않았다. 대부분의 아동 학대 사건이 겪는 ‘증인 불명’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담당 검사인 제임스 비고네스가 이 최악의 살인자들이 법의 심판을 받도록 최선을 다 하겠다고 천명했지만 사건은 장기화 조짐을 보였고, 어쩌면 살인마들이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날 수도 있었다.
두 사람의 희망은 큰 오산이었다. 레티가 뒤늦게 발견되던 날, 그 아파트에는 레티 말고도 아이 한 명이 더 있었던 것이다. 레티보다 한 살 많은 형인 코르넬리우스 에이브러햄은 그해 여름 내내 레티가 학대받는 모습을 지켜봤고 그 끔찍한 형벌 중 몇 가지는 함께 고통받기도 했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에이브러햄과 캠벨의 혐의를 입증할 수 있는 증인은 코르넬리우스뿐이었다.

하지만 코르넬리우스가 증언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당시 다섯 살에 불과했던 코르넬리우스가 그날 있었던 일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경우 배심원들이 얼마나 믿어줄지 의문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코르넬리우스가 살인자 두 명과 또다시 대면하는 일에 극도의 공포를 나타냈던 것이다.
하지만 비고네스 검사는 포기하지 않았다. 비고네스는 코르넬리우스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코르넬리우스가 심리적으로 안정을 찾도록 해주는 한편, 동생을 위해서라도 법정에서 진실을 밝혀야 한다며 코르넬리우스를 설득했다.

코르넬리우스는 마침내 용기를 내 법정에 섰다. 평소 농구와 함께 책읽기를 가장 좋아하는 소년이었던 코르넬리우스는 두 살인자의 얼굴을 마주보며, 배심원들에게 책을 읽어주듯이 그해 여름에 있었던 일을 또박또박 설명해줬다. 정의는 승리했다. 2년여의 재판 끝에 에이브러햄과 캠벨은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두 살인자는 절망으로 고개를 떨궜다.

살인자는 죗값을 치렀지만 살아남은 자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코르넬리우스는 부모의 사랑이 가장 필요한 나이에 엄마로부터 ‘너는 필요 없는 녀석이야. 너 같은 녀석은 죽어버려야 해’라는 말을 들으며 학대받아왔다. 다섯 살은 엄마가 검은 것을 희다고 하면 희다고 믿는 나이다. 이제는 더 이상 그런 말을 듣지 않아도 됐지만, 어린 코르넬리우스는 자신이 계속 살아가도 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코르넬리우스는 극도로 조용하고 주위에 무관심한 아이가 되었다.
비고네스 검사도 코르넬리우스가 법정에 서야 할 이유를 설명해줄 수는 있었지만, 어째서 계속 살아가야 하는지, 살아가는 게 세상에 무슨 도움이 되는지 설명해줄 수는 없었다. 비고네스는 살인에서 재판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심층 취재한 시카고 트리뷴의 밥 그린 기자와 함께 코르넬리우스에게 웃음을 찾아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굳게 닫힌 문을 여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린 기자는 시카고 불스 프런트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코르넬리우스가 농구를 좋아한다니 일요일에 열리는 마이애미 히트와의 경기를 볼 수 있게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이미 그날 경기는 매진되었지만 특별히 자리를 마련해주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1990년 4월 1일, 코르넬리우스는 그린, 비고네스와 함께 태어나서 처음으로 시카고 스타디움을 찾았다.

아무리 마음의 문을 닫았어도 코르넬리우스는 한창 호기심 많은 여덟 살이었다. 하물며 코르넬리우스는 지금 마음속의 신전이었던 시카고 스타디움에 와 있는 것이다. 경기장 복도를 걷고 있는 지금도 자신이 걷고 있는 곳이 시카고 스타디움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비고네스와 그린이 코르넬리우스를 라커룸 앞으로 데려가는 동안, 코르넬리우스는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로 경기장 구석구석을 돌아봤다. 하지만 문이 열리고 정장을 입은 한 남자가 걸어나오는 걸 본 순간, 코르넬리우스는 입을 크게 벌릴 수밖에 없었다. 입뿐 아니라 눈도 놀라움과 경이로움으로 가득 찼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눈앞에 마음속 신전의 주인이 서 있었던 것이다.
코르넬리우스는 입을 뻐끔거리며 뭔가를 말하려 했지만 도무지 제대로 된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남자가 먼저 말을 걸어야 했다.


“안녕, 코르넬리우스. 나는 마이클 조던이다.”

조던은 무릎을 꿇고 앉아서 조용히 얘기를 시작했다. 몇 가지 조크를 섞어가며 농구 이야기를 들려줬지만 결코 대답을 재촉하지는 않았다. 코르넬리우스가 겪었던 일을 위로하지도 않았다. 신문에서 코르넬리우스와 레티의 이야기를 읽고 코르넬리우스가 불스 경기를 보러 온다는 소식을 듣자, 구단 관계자에게 부탁해서 이 모든 것을 준비한 조던이었이다. 조던은 코르넬리우스를 도울 계획을 나름대로 생각해놓고 있었다.
경기 준비를 위해 라커룸으로 들어가면서, 조던은 코르넬리우스에게 말했다. “오늘 우리 팀을 응원해주지 않을래? 우리가 이기려면 너의 도움이 필요하단다.”

그날 불스는 코르넬리우스의 도움을 정말 많이 필요로 하는 것 같았다. 불스의 붉은 저지를 입은 코르넬리우스는 다른 볼보이들과 함께 선수들이 연습하는 동안 정신없이 볼을 챙겼고, 마침내 경기가 시작되자 불스 벤치에 앉아서 경기를 지켜봤다. 코르넬리우스에게 주어진 자리는 조던 바로 옆자리였다. 조던이 벤치에서 쉬는 동안 코르넬리우스는 조던 옆에 앉아 있다가, 조던이 다시 코트로 들어가면 조던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경기는 불스가 리드를 잡은 가운데 마이애미의 거센 추격이 이어졌다. 하지만 언제나와 같이 조던이 경기를 끝냈다. 이날 69%의 야투율로 47득점 6리바운드 7어시스트 3스틸 3블록슛을 기록한 조던은 경기 막판 승부를 결정짓는 강력한 슬램덩크를 꽂아넣었다. 그리고 불과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는, 그날 하루 종일 ‘필요한 사람’이었던 코르넬리우스가 기쁨에 겨워 마구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경기가 끝난 후 그린은 기자 생활 처음으로 불스 라커룸으로 향했다. 그린 역시 불스 경기를 본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항상 수많은 기자들에 둘러싸여 있던 조던은 모든 인터뷰를 끝내고 막 짐을 챙겨 라커룸을 빠져나가려 하고 있었다. 라커룸 문 쪽으로 걸어오던 조던은 그린을 발견하고 발걸음을 멈췄다. 그린은 조던에게 말했다.

“오늘 당신이 해준 일을 코르넬리우스가 얼마나 고마워하고 있는지 말해주려고 들렀습니다.”

그 말을 들은 조던은 한참동안 말없이 서있었다. 조던은 그에게 그런 감사를 한 후 새로운 부탁을 하려 했던 사람들을 많이 만나봤던 것이다. 그린을 한참이나 지켜보고 있던 조던이 말했다.

“그냥 그 말을 하려고 온 겁니까?”
“음, 당신이 선물한 하루가 코르넬리우스에게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잘 모르는 것 같군요.”
“아뇨, 저는 단지 당신이 그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내려온 것에 놀랐을 뿐입니다.”

그린은 미소지으며 대답했다.“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우리 어머니가 절 죽이려 했을 겁니다. 우리 어머니는 저를 올바르게 자라도록 키우셨거든요.”
조던도 웃으며 말했다.“우리 어머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린이 조던과 악수를 나누고 돌아서는데 조던이 물었다.

“경기장에는 자주 오십니까?”

“아뇨, 오늘이 처음입니다.”

“흠, 그럼 꼭 다시 한번 오세요.”


그날의 경험이 코르넬리우스에게 온전히 행복을 가져다준 것은 아니다. 코르넬리우스는 친아버지와 함께 살게 됐지만 친아버지 역시 코르넬리우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코르넬리우스를 사랑으로 돌봐줄 양부모가 나타날 때까지 코르넬리우스는 보호시설에서 살아야 했다.
하지만 이제 코르넬리우스는 더 이상 왜 사는지 모르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는 필요한 사람이었으니까. 코르넬리우스 마음속 신전의 주인이 그렇게 말해줬으니까. 그날 시카고 스타디움에서의 경험은 코르넬리우스에게 어떤 역경에도 맞서 싸울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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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고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한 코르넬리우스는 노던 일리노이 대학에 입학, 컴퓨터 공학도의 길을 선택했다. YMCA 시카고 지부 청소년 상담 분과는 학대를 딛고 어린이에게 희망을 준 사람에게 주는 ‘코르넬리우스 S. 에이브러햄 상’의 첫 수상자로 코르넬리우스를 선정했다.

플레이오프라는 전쟁터에 임하게 될 전사들이여, 명심하라. 그대들이 써나갈 이야기는 그대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누군가는 그대들의 모습을 보고 삶을 살아갈 용기를 얻을 수도 있다. 그대들은 그들 마음속 신전의 주인으로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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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그대들의 마음속에 있는 마이클 조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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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를 붉은 색으로 물들였던 시카고 불스가 슬픔에 잠겼다. 70년대 현 유타 재즈의 감독인 제리 슬로언과 함께 팀을 이끌었던 놈 반 리어와 시카고의 감독을 비롯, 지역 아나운서로 활동해온 조니 ‘레드’ 커는 한국시간으로 27일 불과 몇 시간을 두고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특히 커는 2009년 명예의 전당 입성을 코앞에 두던 터라 안타까움을 더했다.

첫 번째 비보는 반 리어의 몫이었다. 컴앤캐스트 방송사에서 시카고 불스의 하프타임 리포트를 맡아온 반 리어는 지난 26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등 건강악화의 조짐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방송사 동료이자 전 NBA 스타였던 켄달 길은 “평상시 반 리어는 최소한 1시간 30분 전에는 미리 와 있었고 언제나 같은 자리에 앉았다”며 “내가 도착 했을 때 그가 보이지 않아서 분장실에 있거나 휴게실에 있는 줄 알았다. 주위를 둘러보며 ‘반 리어 본 사람 없습니까?’라고 물어봤지만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며 비통함을 전했다.

컴앤캐스트 방송사의 데스크 매니저를 담당하고 있는 팀 포크씨가 다음 날 직접 반 리어의 아파트를 찾아갔지만, 불행하게도 바라지 않았던 일을 목격하고 말았다. 반복해서 문을 두들긴 포크씨는 거실의 TV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만 어떤 응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포크씨는 긴급전화로 경찰서와 소방서등 공공기관에 신고를 하기에 이르렀고, 출동한 경찰과 소방대원들이 문을 부수고 투입되어서야 상황은 종료됐다. 반 리어는 미동도 없이 조용히 바닥에 쓰러진 채 발견되었다. 아직까지 정확한 사인은 발표되지 않은 상태다.

향년 61세. 현역 시절 강직함과 터프함으로 무장하며 슬로언과 함께 리그에서 가장 견고한 백코트를 꾸려갔던 반 리어의 생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짧은 만남과 이별, 그리고 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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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반 리어는 순도 100% 시카고의 프랜차이저라고 부를 수 없다. 왜냐하면 신시내티 로얄스에서 데뷔무대를 가졌기 때문이다. 시카고는 1969년 당시 3라운드 전체 34번 픽을 반 리어에게 행사하였지만 곧바로 신시내티 로얄스의 센터 월트 웨슬리와 트레이드하였다. 냉정하게 말해서 비즈니스적인 측면으로 볼 때 얼마든지 납득이 갈만한 사안이지만 반 리어로서는 섭섭한 마음을 가질 만도 한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반 리어는 이미 대학시절부터 시카고 행이 유력할 만큼 구단의 남다른 관심 속에 성장하였다.

반 리어는 펜실베니아 주(州)의 피츠버그에서 미드랜드 고교를 챔피언으로 이끌며 지역스타로 발돋음 하였다. 대학진학을 앞두고 미식축구팀을 보유한 각 대학들이 그를 데려가기 위한 리쿠르팅이 활발할 정도로 그는 다재다능한 스포츠맨이었다. 하지만 그는 명문농구팀이 있는 학교를 원했고 세인트 샌프란시스코는 더 없는 선택이었다.

시카고의 스카우터를 담당하고 있던 제리 크라우저는 반 리어를 보기 위해 무려 2000(3218km)마일이 넘는 거리를 장작 30시간 동안 운전하며 찾아갔다. 당시에는 자동차를 수단삼아 대륙횡단을 하는 것이 대부분의 스카우터들에게 익숙한 터라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이 정도 지극정성이면 시카고가 얼마나 반 리어를 원했는지 짐작이 간다.

어찌 되었든 빅맨 자원이 절실했던 시카고로서는 어쩔 수 없는 수순이었지만 이는 중대한 실수를 범한 것이었다. 웨슬리는 시카고에 둥지를 틀고 그 해 경기 당 9.5점, 6.3리바운드를 기록하며 백업센터로는 만족스러운 시즌을 보냈다. 하지만 웨슬리는 이듬 해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가 창단하며 실시한 확장 드래프트로 인해 팀을 떠났다. 첫 두 시즌은 커리어 최고의 활약을 펼친 그였지만 이후 은퇴할 때까지 단 한 번도 경기당 5득점, 4리바운드를 넘기지 못할 정도로 초라한 내리막길을 걸었다. 반면 반 리어는 데뷔 후 2년 만에 리그 어시스트왕을 거머쥐며 트레이드의 설움을 날리는 한 편 탄탄대로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만약 반 리어가 시카고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불스는 땅을 치고 후회했을 것이다. 하지만 반 리어는 거짓말 같이 시카고에 컴백했다. 신시내티는 1970년 드래프트에서 또 한 명의 전설적인 가드인 네이트 아치볼드를 선택하였는데 두 명의 유망주를 두고 행복한 고민에 빠진 신시내티의 선택은 결국 아치볼드였다. 센터 영입을 위해 시카고의 짐 폭스를 받는  대신 ‘과분한‘ 잉여자원 반 리어를 보냄에 따라 시카고는 다시 잃어버렸던 자식을 품에 안을 수 있었다. 터프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제리 슬로언(現 유타 재즈 감독)과 반 리어가 마침내 재회하며 리그에서 가장 터프한 백코트 콤비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두려움을 모르는 남자 그리고 두 명의 파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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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들의 만남은 처음이 아니었다. 슬로언은 반 리어가 팀에 합류하자 “나와 싸울 수 있을 정도로 깡이 있는 선수니 함께 뛸 수 있다”는 말을 남긴 바 있는데 이 일화는 좀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반 리어는 생전에 워싱턴 포스트지에서 “신시내티 시절에 시카고 불스와 연습경기를 가진 적이 있다. 장소는 아마도 일리노이스 주립대학 캠퍼스였을 것이다”며 슬로언과의 만남을 회고하였다.

“난리도 아니었다. 우리는 경기 내내 서로 밀치고 내동댕이치면서 거칠게 플레이했다. 그리고 경기가 끝난 후 둘이 못 끝낸 승부(?)를 마무리 하러 둘만의 시간을 가졌다”며 이어서 “체육관 복도로 돌아간 우리는 남자들의 대화를 나누었는데 팝콘기계에 부딪힌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NBA 역사상 가장 지독하고 사나운 백코트의 탄생배경이다.

슬로언은 “반 리어와 함께 뛸 수 있어서 정말 기뻤다. 그는 훌륭한 동반자이자 경쟁자였다”며 고인을 기리는 한편 “우리는 매일같이 지독하게 훈련을 했다. 그리고 반 리어는 팀 동료들에게 이와 같은 훈련 참여에 대해 말 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 모두가 우리가 이 자리에 서기 위해 한 일이다”며 지난 날의 일을 떠올렸다. 

당시 시카고의 단장을 담당하던 팻 윌리엄스는 "반 리어와 슬로언은 뛰어난 재능을 지니지는 못했다. 하지만 루즈볼을 잡기 위해 다이빙도 서슴지 않는 코트위에서의 열정은 리그에서 그 어떤 이들도 따라갈 수 없었다. 시카고에 사는 오랜 농구팬이라면 그들이 매일 밤 가져왔던 열정과 격렬함을 잊지 못할 것“이라며 고인과 그의 오랜 친구의 공을 치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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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리어와 적지 않은 시간을 함께 한 밥 러브도 과거를 회상하며 그를 추억했다. 러브는 마이클 조던, 스카티 피펜, 그리고 슬로언과 함께 시카고 불스에서 유일하게 영구결번 된 인물이다. “반 리어는 그 누구도 겁내지 않는 진정한 싸움꾼이었다”며 운을 뗀 러브는 “포틀랜드 블레이저스에 시드니 윅스란 선수가 있었는데 204cm, 108kg의 거구였고 반 리어는 고작 184cm에 74kg에 불과했다. 윅스에게 거친 파울을 당한 반 리어는 의자를 집어 들었고 윅스는 코트 주위를 달리며 도망 다녔다. 지금 생각해보니 만약 의자로 윅스를 쳤다면 반 리어를 제압해서라도 말렸을 것이다”며 추억을 떠올렸다. 당시 시카고의 감독을 담당하고 있던 딕 모타도 박장대소하며 “반 리어가 단지 앉기 위해 의자로 향한 것이 아님을 직감했다”며 고인을 추억했다.

소위 말해 깡따구 좋은 선수로 기억되는 반 리어의 기행은 현역에서 그치지 않았다. 반 리어는 워싱턴 위저드와 시카고 불스의 지역중계를 담당하고 있는 컴앤캐스트에 입사하며 여전한 시카고 사랑을 과시해 왔다. 특히 지난 2006년 플레이오프에서 시카고의 가드 커크 하인릭과 마이애미의 제임스 포지의 설전에 뛰어들며 눈길을 끌기도 했다. 당시 3차전이 진행되는 가운데 포지는 하인릭에게 거친 파울을 범했고 이것이 화근이 되었다. 반 리어는 포지에게 “라커룸 밖에서 자네를 만나 혼 줄을 내줄테니 그리 알라”며 엄포를 놓았다. 대부 같은 반 리어의 성품을 다시 한 번 확인 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무조건 성질만 부리고 도구를 휘두르는 파이터가 아닌 내 식구도 챙길 줄 아는 그런 사나이가 바로 반 리어였다. 예외는 없었다. 자신과 한 배를 탄 사람이더라도 잘못된 언동을 본다면 언제 어디서든 바로 잡았다. 


시카고에 의해 시카고를 위한 삶

2002년 개봉한 영화 ‘우리 동네 이발소에 무슨 일이(원제_ Barbershop)’에 반 리어가 출연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저예산 영화로 작품성에서 호평을 받은 이 영화의 배경은 역시 시카고다. 만약 다른 도시를 배경으로 촬영이 진행됐다면 아마도 반 리어는 출연을 거절 했을 것이다. 그만큼 시카고에 대한 반 리어의 사랑은 절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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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사 동료인 길은 “그는 마치 불스를 아이들 보듯 하였다. 잘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하고 경기가 풀리지 않는 날이면 제 일인 냥 슬퍼하였다”며 고인의 생전 모습을 꺼냈다.

시카고를 아끼는 마음도 좋고 경기에 대한 열정들도 훌륭한 것은 지겹게 들어 알겠다. 헌데 과연 반 리어에 대한 흔적은 단지 추상적인 것들뿐일까? 어시스트왕 1회, 3번의 올스타 선정, 8번의 NBA 수비팀. 반 리어가 남긴 수상기록들이다.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수비팀 기록이다. 허슬플레이의 대가답게 1970-71시즌부터 8년 동안 수비팀을 놓치지 않았다. 반 리어의 가치는 수비의 달인 브루스 보웬과 같이 스틸이나 블락 등 기록지의 숫자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과거 팀 동료였던 러브는 말 한다 “1대1 수비는 그가 최고다. 아마 당신을 잡아먹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그를 ‘작은 쥐’라고 부를 것이다. 반 리어에게는 농구가 치즈조각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이렇다할만한 슈퍼스타의 부재 속에서도 70년대 나름의 입지를 다져온 시카고의 원동력이다. 물론 반 리어의 진가는 표면적인 성과로 드러나지 못했다. 그가 위대한 50인이나 훗날 찾아올 NBA를 빛낼 100인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무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구단차원에서 ‘프랜차이즈를 빛낸 선수‘의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만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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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우승트로피를 가져다주진 못했지만 1984년 마이클 조던이 등장하기 전까지 시카고 스타디움을 달군 이는 반 리어였다. 지금껏 수많은 지인들의 고증과 역사적 기록을 살펴보면 반 리어는 조던, 피펜과 같이 시카고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다. 하지만 수많은 젊은 팬들과 오늘날 그를 기억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하다 못 해 비슷한 시기에 활약한 러브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유나이티드 센터 홈구장을 찾는 관중을 비롯하여 시카고 경기중계를 보는 시청자들은 경기장 천장에 걸려있는 러브의 영구결번 유니폼으로 러브의 존재를 인지하고 다시금 각인하곤 한다. 때문에 구단에서는 적잖은 족적을 남긴 반 리어의 업적을 기리고자 영구결번식을 검토할 것으로 전망된다. 최근 시카고 트리뷴 홈페이지에서 실시되고 있는 반 리어의 2번 유니폼 영구결번에 관한 투표에서 5000명이 넘는 참가자중 87% 가까운 지지율을 얻으며 그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불스가 자신을 제대로 대우해주는 것 같지 않다며 영구결번에 대해 늘 아쉬움을 토로하였다”며 운을 뗀 방송사 동료 길도 “더 늦기 전에 구단에서 그에 대한 예우를 갖추어 주었으면 한다. 사람들이 영구결번 유니폼을 보고 그를 추억하길 바란다”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반 리어는 아내 수잔과의 사이에서 슬하에 2명의 딸과 손녀딸을 두었다.


놈 반 리어(Norm Van Lier, 1947-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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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통산 746경기 출장
평균 11.8득점, 4.8리바운드, 7.0어시스트(구단 역대 1위), 1.8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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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COLUMNS/일반 뉴스 2009. 2. 19. 21:52

한 눈에 보는 오늘의 NBA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작성: jeffrey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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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애나 94-103 샬럿

25점 10리바운드, 7어시스트로 만점 활약을 펼친 제랄드 월라스가 팀 승리를 이끌었다. 선발 가드 레이먼드 펠튼과 이적생 블라드미르 라드마노비치도 31점을 합작하며 승리를 도왔다. 인디애나는 트로이 머피(16리바운드)와 재럿 잭이 각각 18점을 넣으며 분전했지만 팀의 패배로 빛이 바랬다. 이로서 샬럿은 22승 32패를 기록하며 변함없이 싸우스웨스트 디비전 4위에, 인디애나는 22승 34패로 센트럴디비전 꼴찌를 지켰다.

클리블랜드 93-76 토론토
기사단의 3총사가 클리블랜드의 승리를 견인했다. 베테랑 센터 지드루나스 일가우스카스는 팀 내 최다인 22점을 올리며 공격을 주도했고 간판스타, 르브론 제임스도 20점 14리바운드로 뒤를 받쳤다. 토론토는 주득점원인 크리스 보쉬의 결장 속에 이렇다할만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며 17점차 대패를 당하였다. 클리블랜드(41승 11패)는 오늘 승리로 동부컨퍼런스 1위인 보스턴 셀틱스와의 격차를 1게임 반으로 줄이며 추격의 불씨를 당겼다. 최근 트레이드와 부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토론토는 21-35를 기록하며 플레이오프 합류 가능성이 점차 희박해지고 있다.

미네소타 111-104 마이애미
세바스찬 텔페어가 30점 8어시스트로 활약하며 5연패의 수렁에 빠진 팀을 구해냈다. 기대주 라이언 곰즈도 20점 7리바운드를 보태며 승리를 도왔다. 마이애미 히트는 리그 개인득점 선두를 달리고 있는 드웨인 웨이드가 37점 12어시스트로 대활약을 펼쳤지만, 리바운드의 압도적인 열세(49-24)로 고개를 숙였다. 미네소타는 값진 원정승과 함께 18승 35패를 기록하며 서부컨퍼런스 탑10 진입을 눈앞에 두게 됐다. 갈 길 바쁜 마이애미는 동부컨퍼런스 6위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에 반 게임차로 추격을 당하며 5위에 머물렀다. 

시카고 113-104 밀워키
명가 시카고 불스가 원정경기에서 승리하며 플레이오프 가시권에 한 발짝 가까이 섰다. 승리의 주역은 이번 시즌 들어 벤치로 내려간 커크 하인릭(31점 4어시스트)이었다. 이밖에 포워드 루올 뎅이 21점을 보태며 공격을 도왔고, 특급신인 데릭 로즈와 선발로 올라온 벤 고든이 각각 18점을 올리며 뒤를 받쳤다. 간판스타 마이클 레드를 잃은 밀워키는, 리차드 제퍼슨(32점)의 분전과 제공권 장악에도 불구하고, 3할대의 팀 야투율로 자멸하였다. 시카고는 오늘 승리로 24승 30패를 기록, 8위 밀워키 벅스(27승 30패)와의 격차를 1경기 반차로 좁혔다.     

올랜도 85-117 뉴올리언즈
뉴올리언즈 호네츠가 동부컨퍼런스의 강호 올랜도를 32점차로 대파하며 2연승 휘파람을 불었다. 올스타 가드 크리스 폴은 36점 6리바운드, 10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위용을 과시했다. 라슈얼 버틀러와 데이비드 웨스트는 각각 15점과 14점을 넣으며 힘을 보탰다. 올랜도는 라샤드 루이스가 17점으로 체면치례를 했지만 간판스타 드와이트 하워드가 12점 8리바운드에 그치며 좀처럼 공격의 활로를 뚫지 못한 것이 뼈아팠다. 뉴올리언즈는 연일 계속되는 싸우스웨스트의 진흙탕 싸움에서 소중한 1승을 추가하며 32승 20패(디비전 2위, 서부컨퍼런스 5위)를 기록했고, 올랜도는 39승 14패로  변함없이 동부컨퍼런스 3위를 지켰다.

덴버 101-89 필라델피아
차세대 포워드 카멜로 앤쏘니와 베테랑 가드 첸시 빌럽스가 팀 득점의 절반에 가까운 48점을 합작하며 팀 승리를 이끌었다. 앤쏘니는 리바운드도 14개나 곁들이며 공수에서 몸을 아끼지 않았고, 주전센터 네네 힐라리오도 17점 7리바운드로 골밑을 지켰다.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필라델피아는 주전 포인트가드를 담당하고 있는 안드레 밀러가 17점 7리바운드로 분전했지만 팀의 연패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덴버는 오늘 승리로 37승 17패를 기록하며 3연승의 가파른 상승세를 이어갔고, 필라델피아는 27승 26패로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에 동부컨퍼런스 6위를 내주었다.

뉴저지 98-113 댈러스
3쿼터에만 40점을 집중시킨 댈러스 매버릭스(32승 21패)가 홈경기를 승리로 장식했다. 수훈갑은 24점 10리바운드를 기록한 포워드 조쉬 하워드였다. ‘캡틴’ 제이슨 키드는 23점 10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모처럼 적극적인 득점가담에 나서며 친정팀에 비수를 꽂았고 독일병정 덕 노비츠키도 23점 9리바운드로 이름값을 해냈다. 뉴저지 네츠(24승 31패)는 날쌘돌이 데빈 해리스가 18점 7어시스트로 분전했지만, 야투 난조를 보이며 지원사격에 실패한 빈스 카터의 부진이 아쉬웠다.

애틀랜타 105-100 세크라멘토
최근 트레이드로 어수선한 분위기를 맞고 있는 세크라멘토가 홈경기를 내주며 시즌 44패째(11승)를 기록했다. 애틀랜타는 마이크 비비(29점 5리바운드)와 간판스타 조 존슨(20점)의 슛이 호조를 보인데다 2년차 센터 알 호포드가 18점 18리바운드로 더블더블 활약을 펼치며 선승을 거두었다. 에이스 케빈 마틴이 32점 11리바운드로 선전한 세크라멘토는 오늘 패배로 6연패의 수렁에 빠지며 사실상 플레이오프 진출이 어렵게 됐다. 애틀랜타는 32승 22패로 변함없이 동부컨퍼런스 4위를 지켰다.

레이커스 129-121 골든스테이트
LA 레이커스가 ‘미스터 81‘ 코비 브라이언트(30점 9리바운드)의 활약에 힘입어 연승가도를 달렸다. 스페인 용병 파우 가솔은 24점 13리바운드 5어시스트를 찍으며 연이틀 좋은 활약을 이어갔다. 식스맨 라마 오돔도 단 27분 동안 22점 7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선발선수들 못지않은 활약을 펼쳤다. 골든스테이트는 스티븐 잭슨과 코리 매거티가 각각 24점씩 기록하며 대항했지만, 선수단 전원이 고른 득점을 기록한 레이커스와의 득점 쟁탈전에서 결국 밀렸다. 이로서 레이커스는 44승 10패로 리그 전체 1위 자리를 굳게 지켰고, 골든스테이트는 19승 36패로 희망의 불씨를 살리는데 실패했다.

피닉스 142-119 클리퍼스
‘공격농구의 부활’을 선포한 피닉스 선즈(30승 23패)가 연이틀 엄청난 화력을 뿜어내며 연승행진을 이어갔다. 올스타 포워드 아마레 스타더마이어는 42점 11리바운드로 활약하며 팀의 상승세와 더불어 절정의 득점력을 뽐냈다. 신바람 농구로 회귀한 피닉스의 화려한 부활을 씁쓸하게 지켜보는 이는 LA 클리퍼스뿐만 아니다. 올스타 브레이크가 끝나기가 무섭게 경질된 테리 포터 감독은 재임직후 팀 체질개선에 들어가며 지공농구로의 변화를 주도해 왔지만 결과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클리퍼스(13승 42패)는 2경기 연속 굴욕을 당함에 따라 ‘불사조의 귀환‘의 조연으로 이름을 올리게 됐다.

멤피스 90-94 포틀랜드
신흥강호 포틀랜드 블레이저스가 시즌 33승(20패) 고지를 밟았다. 간판스타 브랜든 로이는 24점 5리바운드에 어시스트 9개를 보태며 공격을 진두지휘 하였다. 멤피스 그리즐리스의 떠오르는 듀오 루디 게이와 O.J. 메이요는 39점을 합작하며 진가를 발휘했지만 막판 집중력의 부족으로 아쉬운 1패를 기록하였다. 한편 지난 시즌 포틀랜드에서 방출된 대리우스 마일스는 노골적인 관중야유로 눈길을 이끌었는데 정작 본인은 “포틀랜드 유니폼을 입었을때도 들어왔던 야유다. 처음있는 일도 아니다”며 담담한 모습을 보였다.

부상-트레이드-계약-징계현황 업데이트
시카고 불스(드류 구든, 안드레스 노시오니, 마이클 루핀) <-> 세크라멘토 킹스(브래드 밀러, 존 샐몬스, 세드릭 시몬스)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이케 디오구) <-> 세크라멘토 킹스(마이클 루핀)
LA 레이커스(크리스 밈) <-> 멤피스 그리즐리스(미래의 드래프트 픽)
재크 랜돌프(LA 클리퍼스)_ 2게임 출장중지(사유/주먹 사용)
제이슨 리차드슨(피닉스 선즈)_ 징계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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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ruary 18, 1961
세인트루이스 호크스(現 애틀랜타 호크스)가 밥 페티트가 커리어하이 기록인 57점에 힘입어  디트로이트 피스톤스를 141-138로 꺾었다.
 
February 18, 1964
윌트 체임벌린이 디트로이트와의 경기에서 52점을 넣으며 개인통산 2번째로 백투백 50점 기록을 달성했다.

February 18, 1972
1983년 3월 말, 906경기 연속 출장의 대기록을 수립한 랜디 스미스가 버팔로 브레이브스 소속으로 기록의 첫발을 내딛었다. 스미스의 기록은 1997년 11월 20일, 댈러스 매버릭스의 A.C. 그린이 907연속 경기에 출장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February 18, 1983
필라델피아의 모제스 말론이 휴스턴과의 경기에서 NBA 400만점 득점(리그전체 통산득점)의 주인공이 됐다. 진귀한 이 기록은 1쿼터에 말론이 본인이 놓친 슛을 팁인으로 넣으며 작성됐다.

February 18, 1984
전 뉴욕 닉스의 포워드이자 미국 상원의원을 지낸 빌 브래들리의 24번 유니폼이, 영구결번 되어 메디슨스퀘어 가든의 천장에 걸렸다. 

February 18, 1986
샌안토니오 스퍼스의 앨빈 로벗슨이 네이트 써몬드에 이어 NBA 2번째로 쿼드러플더블의 주인공이 됐다. 20점 11리바운드 10어시스트와 함께 10스틸을 추가하며 진기록을 달성한 로벗슨의 활약에 힘입어 샌안토니오는 피닉스를 120-114로 격파했다. 쿼드러플더블은 훗날 하킴 올라주원과 데이비드 로빈슨이 추가로 기록하며 현재까지 4명만이 작성한 불멸의 기록으로 남아있다.

February 18, 1993
NBA의 대표행사 중 하나인 ‘잼 세션’이 트레이딩카드 전문회사인 플리어의 후원을 등에 업고 1993년 솔트레이크시티 올스타전에서 첫 선을 보였다. 잼 세션은 팬들이 은퇴선수와 현역선수들과 함께 모두 어우러져 다양한 농구 이벤트를 즐기는 큰 축제로 올스타전에서 빠질 수 없는 대표적인 이벤트로 자리매김했다.

February 18, 1995
15어시스트를 기록한 존 스탁튼의 활약에 힘입어 유타 재즈가 보스턴 셀틱스를 108-98로 꺾었다. 스탁튼은 이날 경기로 NBA 역사상 최초로 10000 어시스트 고지를 밟았다.

February 18, 1996
시카고 불스의 마이클 조던(44점)과 스카티 피펜(40점)이 84점을 합작하며 인디애나와의 원정경기를 승리로 이끌었다(110-102). 조던과 피펜이 기록한 2명의 득점합산 기록은 역대 9위에 기록됐고, 연장전을 제외한다면 6위에 해당한다.

Happy Birhdays~♬
현역_ 마이크 밀러(1980~ , NBA,  2001~2009/올랜도-멤피스-미네소타), 코스타 페로비치(1985~ , NBA, 2009/유타), 자와드 윌리엄스(1983~ , NBA, 2009/클리블랜드)

은퇴_ 치코 본(1940~ , NBA-ABA, 1962~1970/세인트루이스-디트로이트-피츠버그-미네소타), 자히디 화이트(1976~ , NBA, 1999~2005/워싱턴-피닉스-샬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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