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시카고 불스의 백코트를 지휘했던 놈 반 리어의 사망소식이 알려진지 불과 2시간 후에 또 다른 비보가 울리며 시카고 시민들은 망연자실하였다. 전 시카고의 감독이자 지역 방송국 아나운서를 담당해온 조니 ‘레드’ 커는 오랫동안 전립선암과 투병해왔지만 76세를 일기로 그렇게 유명을 달리했다. 홈구장인 유나이티드센터에서 그의 기념식이 치러진지가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조니 ‘레드 커’는 시카고 불스의 아이콘이다” 구단주 제리 레인스도프의 말이다. 그는 이어서 “커의 위대함을 그리워 할 것이다. 그의 명복을 빌고, 유가족들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한다”며 비통함을 감추지 않았다.
NBA 마니아들이나 시카고 불스의 골수팬이 아니라면 그가 이름이 다소 생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이 활약하던 지난 90년대 경기를 떠올려보자. 시카고의 홈경기가 있을 때마다 조던은 어김없이 경기 전, 송진가루를 손바닥에 묻혀 털곤 했다. 마치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르브론 제임스처럼 말이다. 제임스의 화려한 퍼포먼스에는 열광하는 관중들의 함성이 뒤따랐지만, 조던의 행동에 늘 곤욕을 치룬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古 레드 커다. 가루가 흩날릴 때마다 익살스런 표정으로 쿨럭 대던 그의 모습을 기억한다면 이미 그에 대한 절반의 추억은 떠올린 셈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커가 이룬 업적과 족적을 모두 설명할 수 없다. 흔히 알고 있는 WGN(시카고 불스 지역방송국) 아나운서 자리는 그의 기나긴 농구여정의 종착역에 불과 했기 때문이다.
농구인의 첫걸음, 선수생활의 시작
1932년 7월 17일 세상에 태어난 레드 커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아버지 매튜와 스웨덴 출신의 어머니 플로렌스 사이에서 태어난 유럽혼혈아다. 하지만 아버지 매튜는 레드 커가 3살 때 폐렴으로 일찍이 세상을 등졌다.
레드 커의 근래, 생전 모습을 그야말로 주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온화한 할아버지 그 자체였다. 백발이 성하며 자켓 사이로 삐져나온 후덕한 뱃살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영광의 시절이 있었다. 레드 커는 고등학교와 대학 농구에서 뛰어난 선수였고, NBA 우승과 올스타 선발경험도 지니고 있다.
뉴욕에 소재한 틸든 고교에 입학한 레드 커는 졸업반에 오르기 직전 무려 22cm 가까이 성장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된다. 전 SBS 한창도 해설위원의 명언으로 익히 알려져 있는 스코티 피펜의 ‘경이로운 24cm'의 기적이 레드 커에게도 찾아온 셈이다. 이는 가장 좋아했던 축구 대신 농구를 택하게 만든 일대 사건이었다. 농구선수로서 최고의 날개를 달은 레드 커는 변화를 빠르게 받아들이며 곧바로 모교를 1950년 리그 우승팀으로 올려놓았다.
레드 커는 고교 졸업 직후 일리노이스 대학의 리쿠르팅으로 마침내 시카고와 연을 맺게 되었다. 일리노이스는 현재 마이클 조던의 장남인 제프리 조던이 소속되어 있는 학교로서 시카고 지역에서는 팬들의 지지도가 가장 높은 곳이다. 그가 NCAA(미 대학농구)에 남긴 업적은 굉장하다. 레드 커는 1952년 빅10 타이틀을 견인한데 이어 그 해 모든 대학농구선수들의 로망이자 꿈의 무대인 파이널포(역자주 : 토너먼트 4강전을 일컫는 말)를 밟는 기염을 토해냈다. 3년의 재학시절동안 그가 남긴 1299점은 모교 최다득점으로 남아있으며 컨퍼런스에서는 3번째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이러한 레드 커의 활약은 시카고 지역 언론인 트리뷴에서 9번째로 선정한 ‘빅10 실버 바스켓볼‘로 이어졌다.
이듬해인 1954년 NBA 드래프트에서 행운은 계속되었다. 전체 6번째로 시라큐스 내셔널스(現 필라델피아 76ers)에 지명된 레드 커는 데뷔와 함께 훗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전설적인 선수와 호흡을 함께 하게 됐다. 돌프 쉐이즈는 프로통산 12차례나 NBA올스타와 리바운드왕을 지낸 스타플레이어였다. 루키시즌에서 경기 당 10.5점, 6.6리바운드를 수확한 레드 커는 처음이자 마지막 우승에 기여하였다.
이후 11시즌을 시라큐스와 필라델피아에서 보낸 레드 커는 1965-66시즌을 앞두고 볼티모어 불리츠(現 워싱턴 위저드)에서 커리어를 마감한다. 통산 905경기에 출장하여 12,480점과 10,092 리바운드를 남겼으며, 경기 당 13.8점, 11.2리바운드를 기록했다. 한 번의 리그 우승과 3번의 올스타 선정도 뒤따랐다. 결코 화려하진 않았지만 무관의 제왕들도 울고 갈 우승반지도 손가락에 끼워 보며 남부럽지 않은 프로경력을 마감한 그였다.
또한 한 가지 간과하면 안 될 것이 레드 커는 매일 밤 같은 디비전의 윌트 체임벌린과 빌 러셀과 마주해야 했다는 사실이다. 러셀과 체임벌린이 누군가? 눈뜨는 아침이면 NBA 역사책의 기록을 갈아버리는 괴물들이 아니었던가. 두 거인들의 틈바구니에서 무언가를 해본다는 것은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질 일이었지만 레드 커는 쉽사리 굴복하지 않았고 당당히 더블-더블 활약을 이어왔다.
팀 동료였던 쉐이즈는 지난 2월 치러진 레드 커의 기념식에서 “50년대 최고의 센터는 빌 러셀, 2번째는 윌트 체임벌린이었고 레드 커가 넘버3였다”며 오랜 친구를 치켜세우기도 하였다. 전성기 시절의 샤킬 오닐과 현재의 드와이트 하워드와 함께 같은 디비전에서 10년 넘도록 더블-더블을 기록해온 백인센터가 있다면 어떤 평가가 내려질까? 비현실적인 상상으로 치부 될 수도 있는 가정이지만 레드 커의 시대적 상황은 현실이었다.
844경기 연속 출장 기록도 그의 성실함을 뒷받침한다. 이 숫자는 훗날 랜디 스미스와 철인 A.C 그린에 의해 깨지기 전까지 그만이 보유했던 넘사벽의 기록이었다. 마이크를 잡았던 아나운서의 모습만으로 고인을 추억하기에는 그가 남긴 NBA의 족적은 결코 작지 않았다.
세계적인 프로스포츠 팀, 시카고 불스를 창조하다
구단프론트에 몸담았던 시절에는 뛰어난 업무수행능력을 발휘하였으며, 존경받는 아나운서였다. 하지만 후세에 그가 기억될 이유가 있다면 레드 커는 오로지 시카고 불스밖에 모르는 인물이었다는 사실이다.
시카고 불스가 탄생하기 전인 1966년, 연고지에는 이미 무수히 많은 프로스포츠 팀들이 존재하였다. NFL과 MLB, NHL등 대부분의 종목들이 한 자리씩 차고 있었다. 하지만 프로 농구팀을 창단하기 위한 여러 단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스의 탄생은 답보상태를 이어갔다. 이 가운데 레드 커가 구단프론트의 중책을 담당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신생팀 창단의 바람이 불자 타 구단들의 거센 반대로 난항을 겪었다. 하지만 레드 커는 현 미국 농구협회 이사회 회장을 지내고 있는 제리 콜란젤로를 위시하여 모든 실무진들과 힘을 뭉쳤고 결국 팀 창단에 성공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감독직을 자원한 레드 커는 젊은 황소군단을 진두지휘하였다. 33승 48패. NBA 역사상 존재했던 수많은 창단 팀들 가운데 최고기록이다. 뿐만 아니라 4대 메이저 스포츠로 불리는 NFL과 MLB, NHL에서도 전례가 없던 사건이다. 그 어떤 리그에서도 창단 첫 해 플레이오프에 오른 팀이 없었다. 레드 커의 올해의 감독상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시카고는 가드와 포워드를 겸하고 있는 제리 슬로안(現 유타 재즈 감독)이 팀 내 리바운드 리더를 차지할 정도로 단신 팀이었다. 이러한 핸디캡을 안고 있는 팀들의 해결책은 크게 다르지 않다. 팬들에게 “수비는 우리가 시합하는 방식”이라며 공약한 레드 커는 신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속공과 강력한 압박수비를 주문했고 선수들은 이를 잘 소화해냈다. 레드 커는 당시 이를 두고 “마치 YMCA 농구를 보는 듯 했다”며 만족스러워 한 바 있다.
창단 첫 해 치고는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지만 이듬 해 29승 58로 저조한 성적을 남기며 팀을 떠난 레드 커는 당시 NBA의 인기를 능가했던 ABA로 눈을 돌리게 된다. 화려한 ABA에 매료된 그는 시카고의 어시스턴트 코치이자 오랜 친구인 알 비앙키와 함께 버지니아 스콰이어의 단장으로 취임하였다. 이후 레드 커는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닥터 J' 줄리어스 어빙과 첫 번째 계약을 맺는 행운을 누렸으며 핑거롤의 대명사인 '아이스 맨’ 조지 거빈을 EBA라는 마이너리그에서 건졌다. 특히 거빈은 폭력사태로 NCAA에서 선수자격을 박탈당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진흙 속에서 진주를 건진 것과 진배없었다. 운수 한 번 기가 막히게 좋은 인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ABA와 NBA가 리그합병이 되면서 설 자리를 잃어버린 것이다. 시카고로 돌아가야 할 것을 직감한 레드 커는 곧바로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레드 커는 당시 팻 윌리엄스 단장이의 공백을 채우기 보다는 감독직을 더 원했다. 하지만 딕 모타 감독이 버티고 있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의 손에 마이크가 들릴 시간이 온 것이다.
헤드셋과 마이크로 연 농구인생 3막, 그리고 이별
그의 아나운서 경력 중 가장 자부할만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마이클 조던의 신성한 의식일 것이다. 조던은 경기 전 송진가루를 레드 커의 면전에 털곤 했는데 이것은 그가 신인 시절 처음 가졌던 연습경기부터 시작되었다. 조던은 훗날 “이 의식이 어떻게 시작됐는지는 잘 모르겠다. 처음 그를 봤을 때 멋진 정장이 눈에 띄었고, 조금 더럽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었던 것이 계기였던 것 같다”며 웃음 지었다.
레드 커가 방송인으로서 첫 발을 내딛은 것은 미국 스포츠 전문방송인 짐 더럼의 제안에 의해서였다. 이후 레드 커는 2007-08시즌까지 90년대 6회 우승과 함께 시카고와 울고 웃었다. 가까이서 까까머리의 젊은 청년이 시작했던 공중곡예를 모두 목격한 몇 안되는 인물인 셈이다.
이번 2008-09시즌에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시카고의 전반전 해설을 담당할 정도의 열의를 보였다. 암도 레드 커의 열정을 꺾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지난 2003년부터 2년에 걸쳐 모조 왼쪽 엉덩이에 의지하며 발가락 절단수술과 심장수술을 경험하였다. 모진 풍파를 견디면서 끝까지 시카고의 농구를 시청자들에게 전파하였다.
하지만 그도 결국 인간이었다. 육신을 잠식하는 암세포는 그를 휠체어에 앉혔고 이는 그가 사랑했던 시카고와 농구, 그리고 세상과 이별을 고할 시간이 가까워졌음을 암시하였다.
“제 손녀딸 아이 하나는 저를 무척이나 따릅니다. 농구랑은 상관없이요. 왠지 아십니까? 저는 노래도 부를 줄 알고 문워크도 할 줄 알거든요” 트레이드 마크인 윙크를 날리면서 레드 커가 생전에 남긴 말이다. 열혈 농구인이었지만 집에서는 인자한 할아버지의 모습도 보여주었던 모양이다.
조니 ‘레드’ 커. 붉게 타오르는 그의 머리카락은 그의 별명으로 쓰였고 미들네임이 되었다. 마치 어빈 매직 존슨처럼 말이다. 정열의 붉은 색으로 대변되는 시카고 불스에는 그렇게 23번의 농구신에 가려진 진짜 ‘미스터 불스‘가 존재했었다.
그의 열정은 영원히 시카고와 불스팀에 살아 숨 쉴 것이며 왕조의 부활에도 함께 하리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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