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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애미 히트의 베테랑 센터 알론조 모닝(38, 마이애미 히트)이 23일(이하 한국시간) 공식적인 은퇴절차를 밟으며 현역에서 물러났다. 90년대 NBA를 주름잡았던 ‘정통센터 1세대’의 한축을 담당했던 모닝의 은퇴로 이제는 샤킬 오닐(37, 피닉스 선즈) 정도만이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됐다.

센터로는 다소 작은 208cm의 키로 10년 넘게 골밑을 누빈 모닝. 모닝은 상대 공격수에게는 높디높은 산이었으며 동료들에게는 믿음직한 맏형이었다. 큼직한 눈망울을 지닌 모닝은 나름의 수려했던 외모와는 달리 그렇게 파이팅 넘치는 투사기질로 오늘날까지 많은 후배 선수들에게 귀감을 사왔다. 종종 난투극 현장의 주범으로 언론에 입에 오르내렸지만 모닝의 남다른 승부근성을 대변하는 사건들이다.
신장이식 수술로 저하된 신체능력은 불굴의 투지와 의지로 이겨냈다. 부상을 이겨내고 코트에 선 마지막 순간까지 투혼을 불사르던 그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가 왜 ‘전사‘로 불렸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부상으로 인해 재능을 피우지 못하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많은 스타플레이어들과는 겪을 달리한 인간승리였다.

올스타 선발, 세계 선수권대회 금메달, 올해의 수비왕 등 남부럽지 않은 경력을 쌓은 모닝은 뉴저지 네츠를 거쳐 친정팀으로 복귀한 지난 2005-06시즌, 180도 다른 모습으로 돌아왔다. 팀의 기둥은 이미 타인의 몫이었지만 자존심은 내던진 지 오래였다. 입단 동기이자 라이벌이었던 오닐의 백업을 자처한 모닝은 그 해 평생 바라왔던 타이틀을 차지하며 이력의 마지막을 채웠다.

필자에게 있어 모닝의 노년투혼은 감동과 슬픔이 교차하는 시간들이었다. 이른바 4대 센터로 90년대 리그의 골밑을 평정했던 라이벌들에 비해 모닝은 상대적으로 저평가 받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던 모닝이 한껏 날개를 펼 즈음 부상의 악령이 찾아왔고 더 이상의 도약은 없었다. 그에게서 블락과 골밑 수비 능력을 앗아간다면 더 이상 남아있을 것이 없다는 사실이 그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 건강만 잃지 않았다면 더 크게 뻗어 나갈 만한 재목임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때문에 2005-06시즌 우승 트로피를 품에 안은 모닝의 모습은 앤퍼니 하더웨이나 그랜트 힐에게서 맛보았던 아쉬움을 해소시켜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전성기를 보내야 할 시기에 부상과의 싸움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는 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보냈기 때문이다. 1년이 걸리든 10년이 걸리든 말이다. 예전처럼 20득점이나 두 자리 수의 리바운드를 걷어내지는 못했지만 우승에 기여한 모닝의 공로는 결코 작지 않았고, 그 사실에 많은 팬들이 기뻐했고 감사해하였다.

한국 나이로 불혹을 맞이한 알론‘Zo' 모닝의 40년 인생을 다시 한 번 조명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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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의 불운한 탄생, 그리고 농구

1970년 2월 8월, 버지니아 주(州)에 소재한 체서피크의 한 병원에서 우렁찬 신생아의 울음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이 아기를 맞이한 것은 따듯한 부모의 품이 아닌 차가운 양육원 건물이었다. 그의 부모는 그가 태어나던 시기에 10대 청소년에 불과했으니 모닝의 양육원행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어렸을 때는 소극적이면서 반항아였다. 툭하면 싸움을 벌여 벌을 받곤 했다”며 유년시절을 회고하였다. 10살이 되던 해에 모닝은 변화가 필요한 시점임을 느꼈다. 부모가 있고 따뜻한 집이 있는 제대로 된 안식처 말이다. 하지만 어렵사리 찾은 모닝의 부모가 모닝이 12살이 되던 해에 이혼을 결정하면서 소년의 꿈은 다시 한 번 산산조각 났다.

“정말 화가 났었다. 집과 가정을 갖고 싶다는 생각은 사라지고, 양육원에서 다신 나오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모닝의 말이다. 이후 모닝은 부모의 친구였던 패니 쓰리트라는 이웃집으로 보내졌다. 이후 부모의 이혼을 받아들이며 힘겨운 시간을 보낸 어린 모닝은, 학교 선생님과 주위 친구들의 권유로 농구공을 잡게 된다. 또래 아이들에 비해 월등히 큰 키를 자랑했던 모닝이었지만 농구가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정말 서투르고 실력도 형편없었다”며 농구와의 첫 만남을 회상한 모닝은 “사람들은 나를 비웃었지만 그것이 나를 더 연습에 몰두하게 만들었다”며 유년시절의 추억을 이어갔다.
어둠으로 점철됐던 모닝의 과거는 남다른 승부근성의 토대가 되었고 갖가지 자선활동과 무료 농구캠프에 열을 올리는 동기가 되었다. 특히 고아들에 대한 모닝의 관심은 남달랐다. 아마도 부모님 대신 그의 울타리가 돼주었던 양육원 생활의 추억들이 지금의 모닝을 만들었을 것이다. 모닝은 해마다 오프시즌이 되면 마이애미 등지에서 팀 하더웨이 같은 과거 동료들을 초청하여 자선 올스타전을 열어왔다.

지역 고등학교인 인디안 리버 고교에 입학한 모닝은 농구선수의 재능을 마음껏 펼쳤다. 입학하던 해에 모교의 51연승을 주도한 모닝은 2학년이 되자 경기당 25점 15리바운드 12블락을 기록하며 마침내 진가를 발휘해 보였다. 센터임에도 준수한 중거리 슛 능력과 다양한 포스트 업 기술을 자랑했던 모닝은 수비에서는 이미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선수로 성장해 있었다. 혹자들은 이런 모닝을 두고 전설적인 센터 카림 압둘자바의 젊은 시절을 연상케 한다며 입을 모았다.

대학입학을 앞둔 모닝의 선택은 다름 아닌 조지타운이었다. 조지타운은 그가 존경했던 패트릭 유잉을 배출한 명문대학이었기에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조지타운 입학 전 모닝은 1988 서울올림픽 국가대표팀 트라이아웃에 초청되었지만 아깝게 탈락하였는데 연습경기에서 동문선배인 유잉과의 맞대결로 아쉬움을 달랬다. 신입생 시절 전미 블락왕 타이틀을 거머쥔 모닝은 졸업반이 되던 해에 올-아메리칸 팀에 선정되며 명실상부 전국구 스타로 거듭났다.


고아 농구선수의 ‘Dream come tr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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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A행을 외친 지난 1992년, 또 한명의 대어였던 오닐에 밀리며 전체 2위로 살럿 호네츠(現 뉴올리언즈 호네츠)에 입단한 모닝. 모닝은 리복의 모델도 아니었고, 힙합 패션을 즐기며 랩 앨범을 발매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사각의 코트에서는 오닐에 필적하는 성적표를 남겼다. 특히 플레이오프 같은 큰 무대에서 모닝의 담대함은 빛을 발하였다. 전공인 수비력은 일찌감치 인정을 받아 모닝은 훗날, 공격력까지 겸비한 빌 러셀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었다.
모닝의 혼자 힘으로 쌓은 것은 아니지만 코트 밖에서는 샬럿의 유니폼 판매율이 상한가를 치며 비인기 약체 팀과 신생구단의 이미지를 벗는데도 일조하였다.

전직 권투선수라는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 래리 존슨과 전 세계 어린이들의 팬心 을 사로잡은 리그 최단신 가드(160cm) 타이론 보그스의 존재는 모닝과 함께 팀의 미래를 밝혀주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4년의 신인 계약 만료기간이 다가옴에 따라 구단은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했다. 모닝과 존슨을 모두 잡기에는 무리라는 판단아래 트레이드를 물색했고 매물 대상은 다름 아닌 모닝이었다. 샬럿은 마이애미 히트의 글렌 라이스, 맷 가이거를 받는 조건으로 지난 3년 동안 팀을 이끈 모닝을 내주었다.

위기는 기회라고 했던가? 당시 마이애미의 선장은 팻 라일리 감독이었다. 라일리는 80년대 ‘스카이 훅슛의 달인‘ 카림 압둘자바에 이어 90년대 킹콩‘패트릭 유잉’을 키워낸 센터 조련사로 이름난 감독이었다. 특히 숨 막히는 압박수비 시스템을 뉴욕 닉스에 투영시키며 본격적인 수비농구시대를 연 인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라일리 감독의 성향은 모닝과도 잘 부합하였고 이들은 빠른 시간 내에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었다. 모닝과 P.J. 브라운이 버티는 마이애미의 골밑은 리그에서 가장 공략하기 까다로운 공간이었으며 백코트 역시 끈끈한 수비로 이름난 댄 멀리와 팀 하더웨이가 버티고 있어 물 샐 틈 없는 수비진용이 구축됐다.

모닝은 주위의 기대를 결코 저버리지 않았다. 매 경기 20점에 가까운 득점을 뽑아내면서도 10개의 리바운드와 4개의 블락을 함께 조달하며 공수에서 팀을 이끌었다. 하지만 모닝도 천하의 농구 황제 앞에서는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신흥강호로 급부상한 마이애미는 2년 연속 시카고 불스에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번번이 고배를 들며 자리를 내주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고 팀 분위기도 좋았지만 마이클 조던과 시카고의 벽은 너무나도 높아 보였다.

그리고 찾아든 선수 노조파업과 직장폐쇄. 승승장구 할 것 같던 조던과 시카고가 마침내 해체됨에 따라 모닝은 수많은 무관의 제왕들과 함께 우승의 꿈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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