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NBA 드래프트. 1순위로 지명된 선수는 포워드 같은 움직임을 선보이던 빅맨, 1순위 지명에 있어 의심의 여지가 없었던 하킴 올라주원이었다. 그리고 3순위로 지명된 선수는 엄청난 운동 능력의 만능가드, 훗날 농구의 신으로 불리우게 될 마이클 조던이었다. 이들 사이에 지명된 2순위 선수는? 훌륭한 높이를 가진 센터, 샘 보위였다. 그는 올라주원과 조던의 사이에 지명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필요 이상의 비난과 혹평에 시달려야 했다.
1993년 NBA 드래프트. 1순위로 지명된 선수는 가드 같은 움직임을 선보이던 빅맨, 1순위 지명에 있어 의심의 여지가 없었던 크리스 웨버였다. 그리고 3순위로 지명된 선수는 엄청난 운등 능력의 만능가드, 훗날 포스트 조던의 선두주자로 활약하게 될 앤퍼니 하더웨이였다. 이들 사이에 지명된 2순위 선수는?
그 역시 보위처럼, 아니 보위와 비교할 수 없을만큼 엄청난 높이를 가진 센터였다. 그 역시 보위처럼, 아니 보위와 비교할 수 없을만큼 엄청난 비웃음과 조롱에 시달리며 커리어를 이어가야했다. 물론 거기에는 부족했던 그의 농구 기량 탓도 있었겠지만, 보위와 비교할 수 없을만큼 '놀리기에 좋은 선수'였기 때문은 아닐까.
너무나 새하얀 피부, 깡마른 체구와 비정상적으로 큰 키, 부족한 근력, 그리고 그로 인해 필연적으로 수많은 스타 플레이어들의 하이라이트 필름에 찬조 출연했던, '인 마이 페이스'의 아이콘으로 불리우던 선수. 언제나 최선을 다해 코트 위를 달렸지만 우스꽝스러운 놀림거리가 되기 일쑤였던, 몇 번이고 튕겨져나간 다음에도 상대 선수가 슬램 덩크를 시도할 때면 어김 없이 슛을 쳐내기위해 맞서 싸웠던 선수.
이번에 만나볼 그 때 그 선수는 숀 브래들리다.
독일에서 날아온 유타州의 몰몬교도 장대 인간
브래들리의 고향은 미국이 아닌 독일이다. 놀랍지 않은가? 그 누구도 NBA에서 활약하던 용병을 이야기 할 때 브래들리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는 독일 국가대표 농구팀에서 활약하기도 했는데 말이다!) 독일에서 태어난 그는 유타주에 정착을 하면서 미국 생활을 시작하고 브리검 영 대학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무려 227cm에 육박하는 신장을 가진 그가 농구를 접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으며, 1부 리그 대학이 아닌 브리검 영 대학에서의 그는 엄청난 높이만으로도 팀에서 주요 선수로 활약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그가 신입생이던 1990-1991 시즌에는 평균 14.8득점, 7.7리바운드와 함께 5.21블록슛을 기록하는데, 이는 전미 1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으며 브래들리는 NCAA 역사상 가장 많은 단일 시즌 블록슛을 기록한 신입생으로 이름을 남긴다. 게다가 그의 높이에 힘을 얻은 브리검 영 대한은 NCAA 토너먼트에까지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 시기의 강렬한 임팩트는 훗날 그가 NBA에 데뷔를 할 수 있게된 계기가 된다.
재미있는 것은 그 이후 더 이상 대학 무대에서 농구 경험을 쌓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곧장 NBA에 데뷔한 것도 아니었다. 독실한 몰몬교도였던 브래들리는 2년간 몰몬교 선교사로써 호주를 향해 포교 활동을 떠난 것이다. 이제 막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한, 농구 선수로써 한참 성장가도를 달려야 할 시기에 그는 종교적 신념을 위해 과감히 모든 것을 등지고 떠났다.
2년간 농구 코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높이는 엄청난 매력으로 다가왔다. 결국 1993년 드래프트 2순위. 무려 앤퍼니 하더웨이를 뒤로 한 채 필라델피아에 의해 그 이름이 호명되었다.
그의 커리어는 시작부터 '브래들리'스러웠다.
방황의 프로 초년기
제 아무리 기량이 부족하다 한들 227cm 라는 신장이 있는한 그를 얕볼 수는 없었다. 최소한 슛블록커로써의 위력만큼은 쉽게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루키 시즌 나름의 기대를 받으며 주전 센터로 활약하던 그는 평균 10.3득점 6.2리바운드 3블록슛을 기록하며 순항하고 있었다. 하지만 49경기째 연속 출장을 하고 있던 그는 하비 그랜트와 충돌하며 무릎 부상을 당하게 되었고, 그렇게 허무하게 루키 시즌을 마무리해야했다.
비록 루키 세컨드 팀에 이름을 올리긴 했지만 그의 앞뒤로 이름이 호명된 웨버와 하더웨이가 연일 맹활약을 하던 것에 비해 초라한 성과를 거두는데 그쳐야했다. 팬들은 벌써부터 필라델피아의 드래프트를 비난하기 시작했고 브래들리에게 조소를 보내기 시작했다. 팬들은 경기당 3개의 블록슛을 기록하던 브래들리 보다는 루키 시즌 두 번째 경기에서 샤킬 오닐에게 연신 튕겨져나가던 브래들리만을 기억할 뿐이었다.
프로 두 번째 시즌, 브래들리는 82경기에 모두 출장하며 평균 3.3블록슛을 기록했고 총 274개의 블록슛을 기록하며 필라델피아 단일 시즌 프랜차이즈 최다 블록슛을 기록한 선수로 이름을 남긴다. 그러나 팀의 성적은 계속해서 하위권을 전전하고 있었으며, 브래들리도 시즌 파울 1위(338개)를 기록했을만큼 파울 트러블에 고생을 했다. 18번의 파울 아웃, 심각한 파울 트러블로 인해 골밑을 지킬 수 없는 수비형 센터에게 돌아오는 것은 또 다시 조롱뿐이었다.
세 번째 시즌, 그는 결국 짧았던 필라델피아 생활을 청산하고 뉴저지로 둥지를 옮긴다. 뉴저지에서의 첫 시즌에는 팀의 주전 센터로 활약하며 평균 12.5득점 3.7블록슛을 기록했다. 블록슛 부문 리그 2위를 기록하는가 하면 생애 최초의 트리플 더블에도 성공하며 조금씩 자리를 잡는가 싶었지만 이내 또 다시 트레이드에 휩쓸리게 된다. 애초에 브래들리를 트레이드 하던 당시 맞상대로 데릭 콜먼 등을 제시했던 뉴저지는 리빌딩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1996-1997 시즌, 짐 잭슨 등 무려 9명이 팀을 옮긴 대형 트레이드에 휩쓸려 댈러스로까지 흘러간 브래들리였다.
기회의 땅, 댈러스 매버릭스
댈러스로의 트레이드는 브래들리에게 있어 커다란 기회였다. 출발부터 산뜻했다. 트레이드로 시즌 중도에 합류하긴 했지만 꾸준히 활약하며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개인 스탯 시즌 1위를 기록한다. 평균 3.4개의 블록슛으로 해당 부문 1위를 기록한 것. 이것은 댈러스 프랜차이즈 역사상 처음으로 개인 스탯 시즌 1위를 달성한 것으로, 브래들리는 또 한 번 역사에 자그마한 이름을 남기게 된다.
댈러스 소속으로 플레이했던 33경기에서는 무려 14.6득점을 기록하며 공격에서의 공헌도도 무시할 수 없었고 야투율도 46%에 육박하는가 하면 출장 시간도 32분을 훌쩍 넘기며 생애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1996-1997 시즌은 그의 커리어 하이 시즌으로 기록된다.
이 후 1997-1998 시즌에도 브래들리는 NBA의 역사에 본인의 이름을 각인시킨다. 1998년 4월 7일 포틀랜드와의 경기에서 22득점 22리바운드 13블록슛을 기록한 것이다. 한 경기에서 20+득점 20+리바운드 10+블록슛을 기록한 것은 리그 역사상 브래들리를 포함해 단 5명 뿐이다. (다른 4명의 이름은 엘빈 헤이즈, 카림 압둘 자바, 하킴 올라주원, 샤킬 오닐이라고 한다.) 당시 그가 기록한 13개의 블록슛은 본인의 한 경기 최다 기록인 동시에 댈러스 프랜차이즈 역사상 한 경기 최다 블록슛으로 기록된다.
그러나 댈러스가 브래들리에게 기회의 땅이 된 것은 1998-1999 시즌부터였다. 브래들리와 같이 독일에서 날아온 장신의 선수가 댈러스에 합류했으니 그의 이름을 덕 노비츠키. 독일에서 막 미국에 도착한 노비츠키에게 브래들리의 존재는 큰 형과 같은 것이었다. 훗날 댈러스 최고의 에이스 플레이어이자 리그 MVP로 성장할 노비츠키의 NBA 적응에 있어 큰 역할을 했음을 부인할 수 있는 이는 없을거라 생각한다. 실제로 브래들리는 굉장히 훌륭한 라커룸 메이트였다.
98-99 시즌 댈러스를 찾은 새 식구는 노비츠키뿐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캐나다 출신의 가드가 그 주인공으로 역시 훗날 리그 MVP로 이름을 남길 스티브 내쉬가 그 주인공이었다. 노비츠키보다 한 시즌 앞서 1997-1998 시즌 중반부터 팀의 지휘봉을 잡은 돈 넬슨의 존재 역시 브래들리에겐 호재였다. 엽기적인 전술을 구사하는 것으로 유명한 넬슨과 브래들리라는 유니크 유닛의 궁합은 종종 기대 이상의 결과를 낳기도 했다.
노비츠키, 내쉬, 넬슨과 함께 '브래들리의 댈러스'는 조금씩 강팀의 반열에 오르기 시작한다. 내쉬가 MVP의 떡잎을 보이기 시작한 2000-2001 시즌. 댈러스는 내쉬의 스피드와 노비츠키의 외곽포를 중심으로 한 런앤건 농구를 시작했고 스피드에 약점이 있었던 브래들리는 조금씩 벤치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래들리는 82경기에 모두 모습을 드러내며 평균 2.8개의 블록슛을 기록, 여전히 위력적인 슛블록커로 활약했다.
그리고 댈러스는 무려 11년만에 플레이오프 무대에 진출하는 쾌거를 맛봤으며 이는 브래들리 커리어 사상 최초의 플레이오프 진출이기도 했다. 1라운드에서 제2의 고향과도 같은 유타를 상대하게 된 브래들리는 넬슨의 깜짝 기용으로 칼 말론을 수비하기도 했는데 특별히 높이의 강점을 갖고 있지 않았던 말론이 브래들리를 상대로 공격을 시도하는 모습은 아직도 인상적으로 머릿속에 남아있다.
비록 2라운드에서 샌안토니오에게 무릎을 꿇고 말았지만 댈러스는 분명 브래들리에게 기회의 땅이 되었다.
시련의 계절
2000-2001 시즌 이 후 브래들리의 농구 인생에 본격적인 굴곡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시즌 종료 후 여름에는 팀메이트인 노비츠키와 함께 독일 국가대표로 활약하며 팀을 유럽 4위에 올려놓았으며 댈러스와의 재계약에도 성공한다. 하늘을 찌를 것 같던 그의 기세는 부상이라는 암초를 만나 허무하게 무너져내린다. 시한 폭탄과도 같았던 무릎이 말썽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팀은 라예프 라프렌츠라는 새로운 주전 센터를 영입했고 브래들리는 생애 처음으로 2개 미만의 평균 블록슛을 기록한다. 국가 대표팀의 영예를 맛보고 시작된 그의 2001-2002 시즌은 너무나 허무하게 흘러가버렸다.
2002-2003 시즌, 브래들리에게는 또 다시 기회가 찾아온다. 공격만으로는 우승을 할 수 없다는 계산 아래 팀의 수비를 재정비하기 시작한 넬슨은 블록슛 능력이 뛰어난 브래들리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경쟁자 라프렌츠가 부상의 늪에 빠지는 호재(?)를 맡기도 했다. 결국 01-02 시즌 무려 81경기에 출장하며 다시금 2.1개의 블록슛을 기록, 댈러스 팀디펜스의 주축으로 맹활약했다.
그러나 환희도 잠시. 그의 무릎은 어느 덧 고질병이 되어있었고 기대했던 2003-2004 시즌은 다시금 부상에 시달려야 했다. 애초에 출장 자체가 힘에 겨웠기에 팀에서의 비중이 줄어든 것은 당연지사. 당시 댈러스는 엄청난 센터난에 허덕이고 있었지만 브래들리는 더이상 과거와 같은 도움을 주지 못했다.
어쩌면 그 해, 브래들리는 "은퇴"라는 단어를 머릿속에서 떠올리기 시작했을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순간도 '브래들리'처럼
2004-2005 시즌. 더이상 브래들리에게 팀의 주력 슛블록커로 활약해주기를 기대하는 이는 없었다. '남바투' 에릭 댐피어의 백업으로 경기에 나선 브래들리는 총 77경기에 출장하며 평균 11.5분의 플레잉 타임 동안 0.8개의 블록슛을 기록한다.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평균 1개 미만의 블록슛 수치였다.
댈러스는 더 이상 브래들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강팀이었다. 무려 58승을 기록한 댈러스는 브래들리 없이도 쉽게 플레이오프 무대에 진출했고 1라운드에서 트레이시 맥그레디가 이끄는 휴스턴을 만나 4승 3패로 2라운드 진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2라운드에서 과거의 동지였던 내쉬가 이끄는 피닉스에게 일격을 당하며 시리즈 스코어 2-4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브래들리는 은퇴를 선언했다. 생애 마지막 플레이오프에서 그의 이름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그의 마지막이 된 경기는 2라운드 6차전이 아니었다. 브래들리의 시즌은 시리즈 4차전을 끝으로 이미 막을 내린 것이었다.
생애 마지막 경기에서 그는 단 2분을 출장하며 1개의 공격 리바운드와 1개의 수비 리바운드를 기록했고, 1개의 야투를 시도했으나 성공시키진 못했다. 상징과도 같았던 블록슛을 기록하기에는 주어진 시간이 너무나 모자랐다.
하지만 사람들이 기억하는 브래들리의 마지막 장면은 전혀 다른 것이다. 1라운드 휴스턴과의 경기에서 하늘을 날아오른 맥그레디에게 엄청난 인 유어 페이스를 당하며 "2005 플레이오프 최고의 하이라이트"에 조연으로 출연했던 것이 사람들의 뇌리에 기억된 브래들리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리그 역사상 열 손가락에 꼽히는 최고급 전문 슛블록커로 활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누구도 그의 블록슛을 기억하지 않는다. 거인증을 의심케하는 신장을 가진 선수들 중에서 가장 탁월한 기동력을 가진 선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누구도 그만의 질주를 기억하지 않는다. 부족한 근력으로 인해 자리는 내어줄 지언정, 긴 팔만은 끝끝내 상대 선수의 슛을 향해 휘두르던 그의 투지를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자신보다 훨씬 작은 선수들에게 무참히 인 유어 페이스를 당하며 힘없이 쓰러지던 브래들리의 모습 뿐이다. 쓰러지자마자 곧바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 또 다시 블록슛을 시도하던 그의 모습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맥그레디에게 당한 덩크슛으로 마지막 순간을 각인시키며 코트를 떠난 것은 그래서 너무나도 '브래들리'스러운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네이트 로빈슨이 드와잇 하워드를 뛰어넘는 모습을 보며 환호성을 지른다. 나보다도 작은 선수가 당당히 NBA 무대를 누비는 모습에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단신의 선수가 블록슛을 당하거나 코트를 나뒹굴때면 안타까움의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반대로, 필요 이상의 큰 키를 가짐으로써 힘들어했던 선수들에 대해서는 유달리 박한 평가를 내린다. 마뉴트 볼의 가느다란 팔 다리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고, 조지 무레션의 얼굴을 보며 조소를 날렸다.
브래들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스스로를 가누기에도 힘겨울만큼 필요 이상으로 컸던 몸을 이끌고 세계 제일의 빅맨들을 상대해야 했던 그에게 돌아온 것은 놀림과 비웃음, 인 마이 페이스의 아이콘이라는 우스꽝스러운 별명 뿐이었다.
그는 분명 어색하고 우스운 모습의 선수였다. 하지만 브래들리는 단지 그것만으로 평가하기엔 아까운, 훌륭한 전사였다. 막을 수 없을 것을 알면서도 손을 뻗었고, 밀려나게 될 것을 알면서도 자세를 낮추던 그는 훌륭한 전사였다.
브래들리는 은퇴 이 후 유타로 돌아가 West Ridge Academy 에서 청소년 상담 교사로 활약하고 있다. 그는 은퇴 후에도 자신보다 작고 어린 친구들 백업하고 그들을 위한 블록킹에 열중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 역시도 너무나 '브래들리'스럽지 않은가?
오늘의 주인공, 숀 브래들리였다.
Shawn Bradley (1994 - 2002)
생애 통산 832경기 출장 (484선발)
평균 8.1득점, 6.3리바운드, 2.55블록슛(역대 1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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