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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 존스 코치, 게일 굳리치, 짐 클레몬스, 팻 라일리, 짐 맥밀란, 제리 웨스트, 플린 로빈슨, ?

키쓰 에릭슨, 해피 헤어스톤, 르로이 엘리스, 빌 샤만 감독, 켄트 쿡 구단주, 프렛 쇼우스 GM,
윌트 체임벌린 (13), 존 트랩, 엘진 베일러 (22)


 

정규시즌 33연승....

대단한 기록입니다.

 

대부분의 NBA 팬들은 지난 정규시즌 휴스턴 로켓츠의 22연승 신화를 목격했고, 그 연승기록이 얼마나 어려운 지도 보고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1972년의 레이커스는 33연승을 해냈습니다.

 

대체 이 팀은 어떠한 팀이었으며, 33연승의 원동력은 어디에 있었는 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 타임머신을 타고 1971년 오프시즌의 로스-앤젤리스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10여년 전부터 계속 이어져 온 파이널에서의 실패로 레이커스의 구단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참혹했습니다. 60년대 내내 빌 러셀의 셀틱스에게 번번이 고배를 마셨던 레이커스. 러셀과 셀틱스 주전들이 대거 은퇴한 1969년을 끝으로 이제 숨통이 좀 트이나 했더니, 이번에는 윌리스 리드의 뉴욕 닉스와 커림 압둘자바 (류 앨신도)의 밀워키 벅스가 리그의 강자로 떠올랐습니다. 두 팀 모두 레이커스에 상성을 갖고 있던 까다로운 팀들이었죠.

 

팀의 주축이었던 빅 3 - 제리 웨스트 (34), 엘진 베일러 (37), 윌트 체임벌린 (36)도 세월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 한 채, 노쇠화의 길에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이제 이들이 함께 뛰어봐야 1~2. 마지막 승부를 걸 시기가 온 것입니다. 웨스트는 본인이 우승을 한 번도 해보지 못 하고 은퇴한다면, 평생을 정신적인 공황상태에서 살 지도 모른다며 절치부심 각오를 다지고 있었습니다. 8번이나 파이널에 진출하고도 우승을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 한 불운의 사나이, 엘진 베일러의 마음은 또 어떠했겠습니까?

 

이 때, 레이커스의 구단주, 켄트 쿡 씨는 보스턴 셀틱스의 명 가드 출신인 빌 샤만 (사진 左) 씨와 K.C. 존스 씨를 레이커스의 감독과 어시스턴트 코치로 데리고 오는 용단을 내립니다. 밥 쿠지, 빌 러셀과 함께 5~60년대 셀틱스가 왕조를 이루는 데 있어서 1등 공신이었던 샤만 씨는, 본인이 현역으로 뛰던 당시의 셀틱스 팀 칼라를 1972년 레이커스에 접목시키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려면, 팀이 수비를 최우선으로 여기며, 하나의 유기체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기본조건들은 물론, 속공찬스만 나면 전원이 뛸 수 있는 기동력도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빌 러셀 역할을 해줄 수비형 센터와 밥 쿠지 역할을 해줄 플레이메이커, 그리고 하블리첵 역할을 해줄 빠른 스윙맨도 필수였습니다.

 

여기서 현실적인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당시의 레이커스에는 전형적인 포인트 가드가 없었습니다. 웨스트나 게일 굳리치는 둘 다 듀얼 가드로서 득점력이 좋은 슈팅가드들이었습니다. 말년에 수비에 더 주력을 한 체임벌린이었지만, 아무래도 그는 빌 러셀 스타일과는 거리가 먼 공격형 센터였습니다. 심한 무릎부상을 두 번이나 입었던 37세의 엘진 베일러는 기동력이 출중한 하블리첵 역할을 도저히 감당해 낼 수가 없었습니다.

 

새로 온 감독과 선수들은 함께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했습니다. 이미 시즌 오픈은 눈앞으로 다가온 시점이었습니다. 지금 있는 선수들로 무슨 혁신적인 변화를 일으켜야만 했던 절대절명의 순간이었습니다.

 

이 때 정적을 깨고 체임벌린이 입을 열었습니다. "제가 러셀 역할을 하겠습니다. 공격 시도를 최소화하며, 동시에 리바운드와 피벗에서의 패싱, 그리고 골밑 수비에만 주력하겠습니다."  

 

한 줄기 빛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곧이어 제리 웨스트도 말문을 열었습니다. "제가 포인트 가드 역할을 하죠. 저의 플레이메이킹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 올리겠습니다. 득점은 굳리치가 좀 더 분발해주면 될 것입니다."

 

팀의 주득점원인 수퍼스타 두 명으로부터 너무나도 쉬운 응답을 받아낸 빌 샤만 감독은 그들의 자원하는 심정을 감사히 받으며 새 시즌을 새로운 각오로 맞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즌 시작은 그리 좋지 못 했습니다. 주전들이 나이를 먹어서였는지, 셀틱스의 속공농구 스타일이 팀 전술에 제대로 녹아들지를 못 했던 것입니다. 약팀들에게도 패배를 하면서, 우승을 향한 꿈은 점점 요원해지고만 있었습니다.

 

바로 이 때, 엘진 베일러(사진 右)가 큰 용단을 내립니다. 시즌 시작한 지 9경기를 소화했을 때였습니다. 베일러가 무릎부상으로 인해 느려진 자신이 팀의 바뀐 런앤건 스타일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 하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비록 37세의 나이였으나 베일러의 노련함과 위대함은 그를 아직도 쓸만한 포워드로 유지해 줄 수 있었고, 본인 자신도 오프시즌 동안에 많은 훈련을 했기에 한 시즌을 더 소화하는 데는 별 무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베일러는 이 순간 자신이 은퇴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힙니다. 자신이 은퇴를 하고 자리를 완전히 내줘야지만, 벤치멤버로서 운동능력과 스피드가 출중했던 짐 맥밀란이란 스윙맨이 더 클 수 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더군다나 맥밀란은 1972년 레이커스가 추구하고 있던 속공농구에 안성맞춤인 선수였습니다.

 

뼈에 사무치도록 원했던 우승의 꿈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7차전까지 가서야 패배한 숱한 파이널들을 경험한 선수였다면 더 더욱 그랬을 겁니다. 맨 정신이라면 여기서 어떻게 포기를 합니까? 하지만 베일러는 자신이 벤치에 앉아 있는 것조차 팀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임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시즌 중에 조촐한 은퇴식을 감행합니다.

 

 

베일러의 이 위대한 결정이, 이 위대한 희생이, 1972년 레이커스의 33연승 신화의 밑거름이 되었음을 아는 팬들은 많지 않습니다.

 

베일러의 은퇴와 함께, 빌 샤만 감독은 즉시로 벤치의 짐 맥밀란을 스타팅 스몰 포워드 자리로 올렸습니다. 베일러가 나감으로써 공백이 생길 수 있었던 보드 장악력에 대한 책임은 체임벌린과 파워 포워드, 해피 헤어스톤이 분담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전 시즌에 게임당 17.5점을 득점했던 게일 굳리치가 팀의 공격 1옵션으로서 거듭나게 됐습니다.

 

굳리치(사진 左)와 웨스트는 리그에서 가장 빠르고 화력이 좋은 백코트를 구축했습니다. 이 둘의 백코트 진은 게임당 무려 평균 52점에 15개의 어시스트를 만들어 냈습니다. 짐 맥밀란은 이들의 리딩을 받으며 거의 매 게임 하일라이트 덩크나 레이업을 양산해 냈으며, 체임벌린과 헤어스톤은 보드를 완전히 장악하고 수비 리바운드와 블락샷으로 끊임없는 속공찬스를 만들어 줬습니다.

 

빌 샤만 감독이 부임하는 순간부터 그려 왔던 바로 그 경기 패턴이 코트 위에서 실현되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레이커스는 승승장구하기 시작합니다. 베일러가 은퇴한 11월의 남은 경기에서 14승 무패, 12월 동안 16승 무패, 그리고 1972 1월의 첫 세 경기에서 모두 승리하며 33연승이란 금자탑을 세우게 된 것이죠. 압둘자바의 밀워키 벅스가 홈에서 레이커스를 120 104로 꺾으면서 연승행진이 멈추게 되지만, 이 기간동안의 레이커스의 위력이란 말이나 글로 표현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습니다. NBA 뿐만 아니라 모든 프로 스포츠를 통틀어 최장기 연승기록이었고, 아직도 이 기록은 어느 프로 구단에 의해서도 깨지지 않고 있습니다.

 

1996, 시카고 불스가 72승을 기록하며 시즌 최다승 기록을 경신하기까지, 1972년 레이커스의 시즌 69승 기록 또한 리그 최고기록으로 남아 있었죠.

 

 

그러나 정규시즌 기록이 아무리 뛰어난들, 우승을 못 하면 도로아미타불 아니겠습니까? 레이커스는 플레이오프에서도 막강했습니다. 컨퍼런스 준결승에서 만난 시카고 불스를 4 0으로 스윕한 레이커스는,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디펜딩 챔피언이자 자신들의 34연승에 제동을 걸었던 압둘자바의 밀워키 벅스도 4 2패로 꺾습니다.

 

그리고 파이널에서 마주친 라이벌 뉴욕 닉스. 이번에는 하늘도 레이커스의 편을 들어줬습니다. 닉스의 레전드 센터, 윌리스 리드가 부상으로 파이널에서 뛸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제리 루카스라는 또 하나의 명예의 전당 센터와 체임벌린을 잘 막기로 소문났던 파워 포워드, 데이브 드부셔가 버티고 있던 닉스였으나, 리드없이 이 둘이서만 체임벌린을 당해내기란 역부족이었습니다. 레이커스는 다섯 게임만에 그토록 염원하던 우승을 하게 됩니다.

 

빌 샤만 감독의 영입으로 시작된 1972년 레이커스의 시즌은 이로써 폭발적인 정규시즌 전력이 포스트시즌에서까지 계속 이어지며 우승이라는 아름다운 열매로 마감하게 됩니다. 그리고 빌 샤만 감독은 '올해의 감독상' 수혜자가 되지요.

 

그러나 이와 같은 값진 열매가 맺어지기까지 초호화 수퍼스타들이 팀을 위해 보여준 그 희생정신이 잊혀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최근의 인터뷰에서 당시 레이커스의 팀내 득점 1위였던 게일 굳리치 씨는 '당시의 레이커스를 한 단어로 규명짓는다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에 서슴없이 'SACRIFICE(희생)'라고 답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포인트 가드 역할을 자원했던 제리 웨스트 9.7개라는 자신의 커리어 최다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팀의 공격을 지휘했거든요. 수비형 센터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던 체임벌린도 자신의 커리어 로우인 14.8점만을 득점하며 19.2개의 리바운드, 그리고 비공식이긴 하나 게임당 5~6개에 달하는 블락샷으로 골문을 굳건히 지켰습니다.

 

반면, 게일 굳리치는 자신의 평균득점을 이전 시즌의 17.5점에서 25.9점으로 끌어 올리며 팀의 리딩 스코러가 됐고, 플레이오프에서도 평균 23.8점으로 맹활약, 레이커스의 공격 선봉장이 되었습니다.

 

파워 포워드, 해피 헤어스톤도 본인의 커리어 하이인 13.1개의 리바운드를 잡으며, 베일러로 인해 생겨날 수 있었던 리바운드에서의 출혈을 막아주었고, 벤치 멤버들, 특히 나중에 레이커스의 감독이 될 팻 라일리 또한 벤치에서 나와 엄청난 허슬과 수비력을 보태며 팀의 활력소 역할을 잘 감당했습니다. 베일러의 빈 자리에 새로 영입된 존 트랩이란 선수도 식스맨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줬습니다.

 

그리고, 엘진 베일러의 용기있는 은퇴결정으로 졸지에 선발진에 등용된 프로 2년차 짐 맥밀란은 이전 시즌에 8.4점이었던 평균득점을 18.8점으로 향상시키며 레이커스 속공의 피니셔 역할을 잘 감당해 주었습니다. Most Improved Player(약칭 MIP: 기량발전상) 상이 당시 리그에 있었다면, 그 상의 임자는 의심의 여지없이 이 짐 맥밀란의 몫이었을 겁니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1972년 레이커스의 33연승, 시즌 69, 그리고 그들이 그토록 기다려 왔던 리그 우승은 그들의 스타파워가 가져온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 스타들이 자기 자신을 희생하면서 스스로를 낮췄기에 따라온 부산물이었던 것입니다.

 

 

최근 NBA를 돌아봐도 이 진리는 불변입니다. 특히, 작년 우승팀인 보스턴 셀틱스, 지난 10년간 4회 우승을 해낸 샌안토니오 스퍼스, 2004년에 소위 '전당포'라 불리우던 레이커스를 꺾은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이들 팀들을 보면 팀 내 스타들이 스스로 팀의 공격 1옵션이 되려 한 욕심을 찾아볼 수 없던 팀들입니다. 수퍼스타들이 강력한 카리스마를 뿜어대며 팀을 승리로 이끄는 모습도 멋이 있지만, 이렇게 서로서로가 이타적으로 하나의 유기체를 이뤄 플레이하는 팀들은 소리없이 강하고 그 저력 또한 대단하지요.

  
1972
년 레이커스의 신화... 그것은 '레전드들의 자기 희생 속에서 피어난 한 송이 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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