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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를 붉은 색으로 물들였던 시카고 불스가 슬픔에 잠겼다. 70년대 현 유타 재즈의 감독인 제리 슬로언과 함께 팀을 이끌었던 놈 반 리어와 시카고의 감독을 비롯, 지역 아나운서로 활동해온 조니 ‘레드’ 커는 한국시간으로 27일 불과 몇 시간을 두고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특히 커는 2009년 명예의 전당 입성을 코앞에 두던 터라 안타까움을 더했다.

첫 번째 비보는 반 리어의 몫이었다. 컴앤캐스트 방송사에서 시카고 불스의 하프타임 리포트를 맡아온 반 리어는 지난 26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등 건강악화의 조짐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방송사 동료이자 전 NBA 스타였던 켄달 길은 “평상시 반 리어는 최소한 1시간 30분 전에는 미리 와 있었고 언제나 같은 자리에 앉았다”며 “내가 도착 했을 때 그가 보이지 않아서 분장실에 있거나 휴게실에 있는 줄 알았다. 주위를 둘러보며 ‘반 리어 본 사람 없습니까?’라고 물어봤지만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며 비통함을 전했다.

컴앤캐스트 방송사의 데스크 매니저를 담당하고 있는 팀 포크씨가 다음 날 직접 반 리어의 아파트를 찾아갔지만, 불행하게도 바라지 않았던 일을 목격하고 말았다. 반복해서 문을 두들긴 포크씨는 거실의 TV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만 어떤 응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포크씨는 긴급전화로 경찰서와 소방서등 공공기관에 신고를 하기에 이르렀고, 출동한 경찰과 소방대원들이 문을 부수고 투입되어서야 상황은 종료됐다. 반 리어는 미동도 없이 조용히 바닥에 쓰러진 채 발견되었다. 아직까지 정확한 사인은 발표되지 않은 상태다.

향년 61세. 현역 시절 강직함과 터프함으로 무장하며 슬로언과 함께 리그에서 가장 견고한 백코트를 꾸려갔던 반 리어의 생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짧은 만남과 이별, 그리고 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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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반 리어는 순도 100% 시카고의 프랜차이저라고 부를 수 없다. 왜냐하면 신시내티 로얄스에서 데뷔무대를 가졌기 때문이다. 시카고는 1969년 당시 3라운드 전체 34번 픽을 반 리어에게 행사하였지만 곧바로 신시내티 로얄스의 센터 월트 웨슬리와 트레이드하였다. 냉정하게 말해서 비즈니스적인 측면으로 볼 때 얼마든지 납득이 갈만한 사안이지만 반 리어로서는 섭섭한 마음을 가질 만도 한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반 리어는 이미 대학시절부터 시카고 행이 유력할 만큼 구단의 남다른 관심 속에 성장하였다.

반 리어는 펜실베니아 주(州)의 피츠버그에서 미드랜드 고교를 챔피언으로 이끌며 지역스타로 발돋음 하였다. 대학진학을 앞두고 미식축구팀을 보유한 각 대학들이 그를 데려가기 위한 리쿠르팅이 활발할 정도로 그는 다재다능한 스포츠맨이었다. 하지만 그는 명문농구팀이 있는 학교를 원했고 세인트 샌프란시스코는 더 없는 선택이었다.

시카고의 스카우터를 담당하고 있던 제리 크라우저는 반 리어를 보기 위해 무려 2000(3218km)마일이 넘는 거리를 장작 30시간 동안 운전하며 찾아갔다. 당시에는 자동차를 수단삼아 대륙횡단을 하는 것이 대부분의 스카우터들에게 익숙한 터라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이 정도 지극정성이면 시카고가 얼마나 반 리어를 원했는지 짐작이 간다.

어찌 되었든 빅맨 자원이 절실했던 시카고로서는 어쩔 수 없는 수순이었지만 이는 중대한 실수를 범한 것이었다. 웨슬리는 시카고에 둥지를 틀고 그 해 경기 당 9.5점, 6.3리바운드를 기록하며 백업센터로는 만족스러운 시즌을 보냈다. 하지만 웨슬리는 이듬 해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가 창단하며 실시한 확장 드래프트로 인해 팀을 떠났다. 첫 두 시즌은 커리어 최고의 활약을 펼친 그였지만 이후 은퇴할 때까지 단 한 번도 경기당 5득점, 4리바운드를 넘기지 못할 정도로 초라한 내리막길을 걸었다. 반면 반 리어는 데뷔 후 2년 만에 리그 어시스트왕을 거머쥐며 트레이드의 설움을 날리는 한 편 탄탄대로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만약 반 리어가 시카고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불스는 땅을 치고 후회했을 것이다. 하지만 반 리어는 거짓말 같이 시카고에 컴백했다. 신시내티는 1970년 드래프트에서 또 한 명의 전설적인 가드인 네이트 아치볼드를 선택하였는데 두 명의 유망주를 두고 행복한 고민에 빠진 신시내티의 선택은 결국 아치볼드였다. 센터 영입을 위해 시카고의 짐 폭스를 받는  대신 ‘과분한‘ 잉여자원 반 리어를 보냄에 따라 시카고는 다시 잃어버렸던 자식을 품에 안을 수 있었다. 터프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제리 슬로언(現 유타 재즈 감독)과 반 리어가 마침내 재회하며 리그에서 가장 터프한 백코트 콤비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두려움을 모르는 남자 그리고 두 명의 파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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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들의 만남은 처음이 아니었다. 슬로언은 반 리어가 팀에 합류하자 “나와 싸울 수 있을 정도로 깡이 있는 선수니 함께 뛸 수 있다”는 말을 남긴 바 있는데 이 일화는 좀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반 리어는 생전에 워싱턴 포스트지에서 “신시내티 시절에 시카고 불스와 연습경기를 가진 적이 있다. 장소는 아마도 일리노이스 주립대학 캠퍼스였을 것이다”며 슬로언과의 만남을 회고하였다.

“난리도 아니었다. 우리는 경기 내내 서로 밀치고 내동댕이치면서 거칠게 플레이했다. 그리고 경기가 끝난 후 둘이 못 끝낸 승부(?)를 마무리 하러 둘만의 시간을 가졌다”며 이어서 “체육관 복도로 돌아간 우리는 남자들의 대화를 나누었는데 팝콘기계에 부딪힌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NBA 역사상 가장 지독하고 사나운 백코트의 탄생배경이다.

슬로언은 “반 리어와 함께 뛸 수 있어서 정말 기뻤다. 그는 훌륭한 동반자이자 경쟁자였다”며 고인을 기리는 한편 “우리는 매일같이 지독하게 훈련을 했다. 그리고 반 리어는 팀 동료들에게 이와 같은 훈련 참여에 대해 말 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 모두가 우리가 이 자리에 서기 위해 한 일이다”며 지난 날의 일을 떠올렸다. 

당시 시카고의 단장을 담당하던 팻 윌리엄스는 "반 리어와 슬로언은 뛰어난 재능을 지니지는 못했다. 하지만 루즈볼을 잡기 위해 다이빙도 서슴지 않는 코트위에서의 열정은 리그에서 그 어떤 이들도 따라갈 수 없었다. 시카고에 사는 오랜 농구팬이라면 그들이 매일 밤 가져왔던 열정과 격렬함을 잊지 못할 것“이라며 고인과 그의 오랜 친구의 공을 치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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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리어와 적지 않은 시간을 함께 한 밥 러브도 과거를 회상하며 그를 추억했다. 러브는 마이클 조던, 스카티 피펜, 그리고 슬로언과 함께 시카고 불스에서 유일하게 영구결번 된 인물이다. “반 리어는 그 누구도 겁내지 않는 진정한 싸움꾼이었다”며 운을 뗀 러브는 “포틀랜드 블레이저스에 시드니 윅스란 선수가 있었는데 204cm, 108kg의 거구였고 반 리어는 고작 184cm에 74kg에 불과했다. 윅스에게 거친 파울을 당한 반 리어는 의자를 집어 들었고 윅스는 코트 주위를 달리며 도망 다녔다. 지금 생각해보니 만약 의자로 윅스를 쳤다면 반 리어를 제압해서라도 말렸을 것이다”며 추억을 떠올렸다. 당시 시카고의 감독을 담당하고 있던 딕 모타도 박장대소하며 “반 리어가 단지 앉기 위해 의자로 향한 것이 아님을 직감했다”며 고인을 추억했다.

소위 말해 깡따구 좋은 선수로 기억되는 반 리어의 기행은 현역에서 그치지 않았다. 반 리어는 워싱턴 위저드와 시카고 불스의 지역중계를 담당하고 있는 컴앤캐스트에 입사하며 여전한 시카고 사랑을 과시해 왔다. 특히 지난 2006년 플레이오프에서 시카고의 가드 커크 하인릭과 마이애미의 제임스 포지의 설전에 뛰어들며 눈길을 끌기도 했다. 당시 3차전이 진행되는 가운데 포지는 하인릭에게 거친 파울을 범했고 이것이 화근이 되었다. 반 리어는 포지에게 “라커룸 밖에서 자네를 만나 혼 줄을 내줄테니 그리 알라”며 엄포를 놓았다. 대부 같은 반 리어의 성품을 다시 한 번 확인 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무조건 성질만 부리고 도구를 휘두르는 파이터가 아닌 내 식구도 챙길 줄 아는 그런 사나이가 바로 반 리어였다. 예외는 없었다. 자신과 한 배를 탄 사람이더라도 잘못된 언동을 본다면 언제 어디서든 바로 잡았다. 


시카고에 의해 시카고를 위한 삶

2002년 개봉한 영화 ‘우리 동네 이발소에 무슨 일이(원제_ Barbershop)’에 반 리어가 출연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저예산 영화로 작품성에서 호평을 받은 이 영화의 배경은 역시 시카고다. 만약 다른 도시를 배경으로 촬영이 진행됐다면 아마도 반 리어는 출연을 거절 했을 것이다. 그만큼 시카고에 대한 반 리어의 사랑은 절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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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사 동료인 길은 “그는 마치 불스를 아이들 보듯 하였다. 잘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하고 경기가 풀리지 않는 날이면 제 일인 냥 슬퍼하였다”며 고인의 생전 모습을 꺼냈다.

시카고를 아끼는 마음도 좋고 경기에 대한 열정들도 훌륭한 것은 지겹게 들어 알겠다. 헌데 과연 반 리어에 대한 흔적은 단지 추상적인 것들뿐일까? 어시스트왕 1회, 3번의 올스타 선정, 8번의 NBA 수비팀. 반 리어가 남긴 수상기록들이다.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수비팀 기록이다. 허슬플레이의 대가답게 1970-71시즌부터 8년 동안 수비팀을 놓치지 않았다. 반 리어의 가치는 수비의 달인 브루스 보웬과 같이 스틸이나 블락 등 기록지의 숫자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과거 팀 동료였던 러브는 말 한다 “1대1 수비는 그가 최고다. 아마 당신을 잡아먹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그를 ‘작은 쥐’라고 부를 것이다. 반 리어에게는 농구가 치즈조각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이렇다할만한 슈퍼스타의 부재 속에서도 70년대 나름의 입지를 다져온 시카고의 원동력이다. 물론 반 리어의 진가는 표면적인 성과로 드러나지 못했다. 그가 위대한 50인이나 훗날 찾아올 NBA를 빛낼 100인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무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구단차원에서 ‘프랜차이즈를 빛낸 선수‘의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만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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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우승트로피를 가져다주진 못했지만 1984년 마이클 조던이 등장하기 전까지 시카고 스타디움을 달군 이는 반 리어였다. 지금껏 수많은 지인들의 고증과 역사적 기록을 살펴보면 반 리어는 조던, 피펜과 같이 시카고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다. 하지만 수많은 젊은 팬들과 오늘날 그를 기억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하다 못 해 비슷한 시기에 활약한 러브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유나이티드 센터 홈구장을 찾는 관중을 비롯하여 시카고 경기중계를 보는 시청자들은 경기장 천장에 걸려있는 러브의 영구결번 유니폼으로 러브의 존재를 인지하고 다시금 각인하곤 한다. 때문에 구단에서는 적잖은 족적을 남긴 반 리어의 업적을 기리고자 영구결번식을 검토할 것으로 전망된다. 최근 시카고 트리뷴 홈페이지에서 실시되고 있는 반 리어의 2번 유니폼 영구결번에 관한 투표에서 5000명이 넘는 참가자중 87% 가까운 지지율을 얻으며 그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불스가 자신을 제대로 대우해주는 것 같지 않다며 영구결번에 대해 늘 아쉬움을 토로하였다”며 운을 뗀 방송사 동료 길도 “더 늦기 전에 구단에서 그에 대한 예우를 갖추어 주었으면 한다. 사람들이 영구결번 유니폼을 보고 그를 추억하길 바란다”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반 리어는 아내 수잔과의 사이에서 슬하에 2명의 딸과 손녀딸을 두었다.


놈 반 리어(Norm Van Lier, 1947-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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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통산 746경기 출장
평균 11.8득점, 4.8리바운드, 7.0어시스트(구단 역대 1위), 1.8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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