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
현재 뉴올리언스 아레나의 천장에는 두 장의 유니폼이 영구 결번 되어 걸려있다. 한 장은 뉴올리언스로 연고지를 이전하면서 이벤트 형식을 빌려 영구 결번 시킨 뉴올리언스 농구의 영웅 피트 마라비치의 7번 유니폼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또 한 장의 유니폼이 걸려있다. 사실 마라비치가 호네츠 소속으로 플레이했던 적이 없었음을 떠올려본다면, 그야말로 구단 역사상 최초의 영구 결번 유니폼인 셈이다.

그 유니폼의 주인공은 마라비치 같은 전설적인 농구 스타는 아니었다. 화려한 플레이를 펼치던 스타플레이어도 아니었다. 공격 보다는 수비를, 화려함 보다는 궂은일을 도맡아 하던 선수였다. 하지만 코트 위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달렸고, 뜨거운 심장으로 게임에 임했으며, 카리스마 있는 캡틴이자 라커룸 리더였고, 홈팬들을 위해 지역 사회 봉사 활동에도 최선을 다하던 선수였다. 고교 시절부터 사귀어왔던 아내에게는 너무나 다정한 남편이었고, 한 가정의 듬직한 아버지였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모든 선수가 그러하듯 그 유니폼의 주인공 역시 더 이상 코트 위에 설 수 없게 된 날이 찾아왔고, 팀은 주저 없이 그의 유니폼을 영구 결번 시키기로 결정했다. 2000년 2월 9일, 그의 영구 결번식이 진행됐다. 그러나 모두의 박수 속에 열렸어야 할 축하 행사는 숙연하고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경기장을 가득 메운 팬들과 그를 아끼던 동료 선수들은 눈시울을 붉혔고, 영구 결번의 주인공은 행사에 참석하지도 못했다. 그의 어린 아들이 아버지를 대신해 유니폼을 경기장 하늘 높이에 걸어두었다.

영구 결번 행사로부터 꼭 4주 전이었던 2000년 1월 12일. 영구 결번의 주인공이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그 때 그 선수, 오늘의 주인공은 호네츠의 영원한 캡틴 바비 필스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1. 바비 필스, NBA 리거가 되다

바비 필스는 1969년 12월 20일 루이지애나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는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해외 노동자 생활을 하셨고, 어머니 역시 생활고에 시달리느라 필스를 제대로 돌볼 수 없었다. 해서 어린 필스는 보육원에서 성장했다. 하지만 필스는 강한 몸과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타고난 운동 신경을 뽐내며 농구에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고, 동시에 학업에도 소홀하지 않으며 훌륭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이후 서던 대학에 입학한 필스는 농구와 학업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며 멋진 대학 생활을 보낸다. 특히 졸업반이었던 1990-91 시즌에는 123개의 3점슛을 성공시키며 평균 28.4득점, 4.7리바운드, 1.9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자신의 위력을 뽐냈다. 대학 졸업장을 손에 든 필스는 NBA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약체 팀의 에이스였던 그를 주목하는 팀은 그리 많지 않았다. 1991년 드래프트에 참가한 필스는 2라운드 45번 픽으로 밀워키에 지명되며 가까스로 NBA 입성에 성공한다. 하지만 프로의 높은 벽을 실감하며 단 한 경기도 뛰어보지 못한 채 계약에 실패, 결국 프로로써의 첫 커리어는 CBA 선수로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필스는 좌절 앞에 쉽게 포기하는 나약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는 NBA를 향한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1991-92 시즌 도중 클리블랜드와 10일 계약을 맺는데 성공했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당시 클리블랜드는 결코 만만한 팀이 아니었다. 브래드 도허티, 마크 프라이스, 래리 낸스 등이 활약하던 동부 컨퍼런스의 강자였다. 그런 팀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스가 쏟았던 노력의 크기는 감히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크기였으리라.

필스는 도허티와 프라이스가 팀을 떠나고 테럴 브랜든을 중심으로 새롭게 전력을 재편될 무렵, 완벽히 리그에 적응을 끝마친 상태였다. 그는 이미 클리블랜드의 확고한 주전 가드로 입지를 공고히 하고 있었다.

어느 덧 당당한 NBA 리거가 된 필스는 1997년 여름 FA 자격을 얻게 됐다. 그리고 필스는 호네츠의 일원이 되었다. 당시 그는 높은 연봉 보다는 장기 계약을 원했다. 이는 선수로써의 이해관계도 포함된 결정이었지만, 가족들에게 보다 안정적인 생활을 안겨주고 싶다는 마음이 컸기 때문이었다. 필스가 합류하기 직전인 1996-97 시즌의 샬럿은 54승 28패로 당시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고 승률을 기록하며 장밋빛 미래를 펼치고 있었다. 샬럿은 리그의 강팀으로써 확실히 자리매김 하기 위해 필스를 영입하며 전력 강화를 시도한 것이다.



2. 샬럿 호네츠의 캡틴

필스는 팀에 합류하자마자 주전 슈팅 가드로 출장했다. 퍼리미터 디펜스의 중심이자 에이스 스타퍼로 맹활약했고, 때로는 공격의 선봉에도 나서며 전천후 플레이를 펼쳤다. 비록 포지션 대비 신장은 작은 편이었지만 엄청난 활동량과 뛰어난 근력, 그리고 누구보다 커다란 투지를 무기로 게임에 임했다. 수비 센스가 좋아서 패싱 레인을 잘라 들어오는 스틸에도 능했고, 공격 파울을 유도하는 솜씨도 일품이었다. 대학 시절 장기였던 3점슛은 여전히 강력한 공격 옵션이었으며 트랜지션 게임에서는 화끈한 덩크슛을 꽂아넣기도 했다.

필스가 샬럿에 합류한 첫 번째 시즌이었던 1997-98 시즌. 팀은 51승 31패를 기록하며 프랜차이즈 사상 최초로 2년 연속 50+승을 달성하는데 성공하며 동부 컨퍼런스 4번 시드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1라운드에서 애틀랜타를 3승 1패로 가볍게 물리친 샬럿은 2라운드에서 시카고를 상대하게 되었다. 당시 시카고는 2년 연속 NBA 정상에 오른 디펜딩 챔피언이었다. 이 때 두 팀의 대결에서 마이클 조던과 필스의 매치업이 시리즈 키포인트로 주목받았을 만큼 필스는 팀에서 큰 비중을 가진 선수가 되어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시리즈를 앞두고 필스는 조던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받게 되자 "Michael, Who?" 라고 대답하며 큰 화제를 낳았다. 조던에게 정면으로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물론 최후의 승자는 조던이었다. 하지만 조던을 그렇게 도발한 이후 실제로 그를 훌륭히 막아내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특히 시리즈 2차전에서는 조던을 단 22득점으로 봉쇄하기도 했다. 이 시리즈에서 조던은 경기당 평균 29.6득점을 기록했는데, 이는 조던이 1998년 플레이오프에서 유일하게 평균 30+득점을 넘어서지 못한 시리즈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것이 필스의 마지막 플레이오프 무대가 되었다. 이듬해였던 1998-99 시즌, 샬럿은 라이스 등의 주축 선수들이 연이어 부상을 당하며 큰 어려움에 빠졌고 레이커스의 에디 존스, 엘덴 캠벨을 얻기 위해 라이스, JR 리드 등을 떠나보내는 대형 트레이드를 성사시키며 리빌딩에 들어갔다. 당시만 하더라도 리그 탑레벨의 슈팅 가드였던 존스의 등장으로 인해 필스는 팀의 주전 라인업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어떤 불만도 표현하지 않았으며 되레 존스의 절친을 자청하며 라커룸 분위기를 주도했다.

새 천년이 열리던 1999-2000 시즌. 필스는 데이빗 웨슬리와 함께 팀의 캡틴이 되었다. 비록 스타플레이어는 아니었지만 그 동안 팀을 위해 보여주었던 헌신적인 모습을 인정받은 것이다.

샬럿의 분위기는 어느 때 보다 좋았다. 존스와 앤써니 메이슨 등이 이끄는 주전 라인업은 어느 때보다 견고해보였고 브래드 밀러, 리키 데이비스, 배런 데이비스와 같은 유망주들도 전 포지션에 걸쳐 두루 자리하고 있었으며 필스가 이끄는 벤치 멤버들 역시 탄탄한 전력을 뽐냈다. 비록 지난 시즌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긴 했지만 팀의 재정비가 끝이 난 시즌 막판에는 14승 4패를 기록하며 시즌을 마무리했기에 수많은 전문가들 역시 샬럿의 전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샬럿은 한 때 8연승을 질주하며 16승 7패로 시즌을 시작했다. 쾌조의 스타트였다. 하지만 12월에 들어서면서 최악의 스케줄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으니, 12월 30일부터 1월 10일에 걸치는 기간(12일) 동안 6경기 연속 원정 경기를 갖게 된 것이다. 샬럿은 마치 뭔가에 홀린 듯 패배하기 시작했고 6경기를 모두 내주고 말았다. 6연패의 늪에 빠진 것이다. 6연속 원정 경기를 마친 뒤 다음 경기를 준비하는 필스의 마음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캡틴으로써의 막중한 책임감은 패배를 견디지 못하는 그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3. 이별

사용자 삽입 이미지
2000년 1월 12일. 힘겨운 원정길에서 샬럿으로 돌아온 필스는 간단한 슈팅 훈련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 팀의 공동 캡틴이자 절친한 동료인 웨슬리와 대화를 나눴다.

웨슬리는 연패로 인한 스트레스로 힘들어 하던 필스에게 자동차 경주로 기분 전환을 해보지 않겠냐고 말했다. 평소 같았다면 언제나 바른 생활 사나이로 살아오던 필스가 응했을 리 없었던 제의.

하지만 계속되는 패배와 캡틴으로써의 중압감은 잠시 그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었다. 두 선수는 나란히 각자의 포르쉐를 몰고서 샬럿의 어느 산간 도로로 들어갔다. 그 도로는 평소에도 아마추어 레이서들의 레이스 코스로 종종 이용되던 곳이었는데 워낙 사고 위험이 높은 곳이었다.

맹렬한 속도로 달려 내려오던 필스의 포르쉐는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었고, 마주오던 차량과 3중 추돌 사고를 일으켰다. 필스는 현장에서 즉사했다.



갑작스러운 필스의 죽음은 샬럿과 리그 전체에 커다란 충격을 몰고 왔다. 샬럿의 모든 경기 일정은 무기한 연기 되었고 구단은 그의 백넘버 13번을 프랜차이즈 최초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2000년 2월 9일. 필스의 친정팀이었던 클리블랜드와의 경기 하프 타임을 통해 필스의 영구 결번식이 진행되었다. 이미 세상에 없는 필스를 대신해 그의 남동생이 코트로 걸어 나왔고, 그 어깨에는 필스의 둘째 아들이 올라있었다. 필스의 13번 유니폼은 어린 아들의 손에 의해 샬럿 콜로세움의 하늘 높이 올라갔다. 필스를 아끼던 수많은 동료들과 팬들은 그와의 이별을 슬퍼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필스가 곁을 떠난 후, 샬럿 선수들은 절치부심 힘을 내기 시작한다. 필스의 사망 이후 31승 16패를 기록하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또 한 명의 캡틴인 웨슬리는 시즌 내내 경찰 조사를 받으며 친구를 떠나보낸 죄책감에 힘들어 했고, 데릭 콜먼 등의 주축 선수들이 연이어 부상을 당하며 전력 누수가 심해졌다. 결국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앨런 아이버슨이 이끄는 필라델피아에게 1승 3패를 당하며 힘없이 시즌을 마무리했다.


4. 필스를 기억하며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는 리그 제일의 에이스 스타퍼이자 샬럿의 절대적인 캡틴이었다. 또한 농구 이외에 골프, 미식축구, 사이클 등에도 능했던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하지만 필스가 정말로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코트 밖에서 보여줬던 그의 모습들 때문이었다.

1998년 NBA Sportsmanship Award 수상자이기도 했던 필스는 자신을 응원해주는 팬들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무던히 애쓰던 사람이었다. 활발한 사회봉사 활동은 물론이거니와 다양한 장학 재단을 설립하기도 했다. 또한 팀 메이트들과 주변 지인들에게도 봉사 활동을 적극적으로 권장하며 스스로 앞장서 모범을 보였다. 코트 밖에서는 언제나 밝고 유쾌한 남자였으며 팬들에게 가장 호의적인 선수이기도 했다. 자신에게 사인을 요청하는 어린 팬들은 절대 그냥 지나치지 않았으며 비시즌 기간에도 소탈한 모습으로 샬럿의 사람들과 어울려지냈다. 거기에 수려한 외모까지 갖추고 있었으니 팬들은 이런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필스가 호네츠의 일원으로 플레이 한 것은 채 3년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팬들은 아직도 그를 그리워하고 있다. 코트 안에서 상대팀과 맞설 때는 누구보다 무서운 얼굴로 코트를 달렸지만, 코트 밖에서 팬들을 만날 때에는 누구보다 멋진 미소를 지어보이던 그를 기억하고 있다. 너무나 믿음직스러웠던 그의 뒷모습을, 팀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동료들을 다독이며 용기를 북돋아 주던 그를 추억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경기장 가장 높은 곳에서 후배들을 지켜보며 파이팅을 외치고 있을 필스. 그는 영원한 호네츠의 캡틴으로 기억될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는 영원한 저의 친구이며, 영원한 남편이고, 영원한 연인입니다."

- 필스의 장례식에서, 아내 켄들 필스

그 때 그 선수. 오늘의 주인공은 바비 필스였다.


Bobby Phills

사용자 삽입 이미지










통산 467경기 출장 (379선발)
평균 11.0득점, 3.1리바운드, 2.7어시스트, 1.3스틸

< 저작권자 ⓒ 뛰어(www.ddueh.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NEWS & COLUMNS/POINT GUARD 2009. 12. 22. 19:40

숫자로 보는 NBA의 크리스마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다들 크리스마스 계획은 잘 세우고 계신지? 멋진 이성 친구와의 데이트가 예정되어 있다면 참으로 축하할 일이다. 하지만 24일 아침에 잠이 들어 26일에 눈을 뜨겠다며 괴로워하고 있는 이들도 분명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 여러분들을 위해 준비했다. 이름 하여 "숫자로 보는 NBA의 크리스마스". 자고로 숙면을 유도하는데 숫자보다 좋은 게 또 어디 있겠나.

미국과의 시차로 인해 NBA의 크리스마스 경기는 우리 시각으로 26일 새벽에 펼쳐지게 된다. 24일 아침에 이 글을 읽고 단잠에 빠진 뒤, 26일 새벽 2시에 일어나 크리스마스 매치를 즐긴다면 2009년 크리스마스도 안전하게 넘길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럼 시작해볼까?


크리스마스 최고의 단골손님


24일 아침에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크리스마스 최고의 단골손님은 단연 '케빈'일 것이다. 그렇다면 NBA 팬들에게 크리스마스 최고의 단골손님은 누구일까?

크리스마스는 미국 최고의 축제 기간이다. 필연적으로 TV 시청률과 경기장을 찾는 이들의 발걸음이 늘어난다. 해서 리그 사무국은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가장 인기 있고 커다란 시장성을 가진 팀들의 경기를 주선한다. 크리스마스 단골손님이라는 것은 곧 가장 인기 있는 팀이라는 이야기로 해석해도 좋다는 것이다.

리그 역사상 크리스마스에 가장 많은 초대를 받은 귀하신 손님은 단연 뉴욕 닉스다. 1946년, NBA가 아닌 BAA라는 이름으로 처음 리그가 출범했을 당시부터 2008년까지 총 63번의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동안 무려 44회나 리그의 부름을 받았다. 그 때나 지금이나 뉴욕이라는 거대한 연고지를 등에 업은 그들은 리그 제일의 시장성을 가진 팀으로써의 위치를 확고히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뉴욕은 프랜차이즈의 두 번째 시즌이었던 1947년의 크리스마스부터 리그의 초대를 받았다. 당시 (지금은 사라져버린)'프로비던스 스팀롤러스와의 경기에서' 89-75로 승리를 거두며 크리스마스의 기쁨을 만끽했다.

뉴욕의 뒤를 잇는 팀은 LA 레이커스로 총 35회의 크리스마스 매치를 경험했다. 1949년의 크리스마스 매치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그들은 특히 최근 들어 더욱 자주 크리스마스의 단골손님으로 손꼽히고 있다. 뉴욕이 계속되는 부진에 빠진 사이 샤킬 오닐, 코비 브라이언트 등의 슈퍼스타들을 앞세워 단연 최고의 인기 팀으로 군림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닐과 브라이언트는 나란히 총 11회의 크리스마스 매치를 경험하며 크리스마스 최다 출연 기록을 가지고 있다. 특히 브라이언트의 경우 예정되어 있는 올 해의 크리스마스 매치까지 소화할 경우 무려 11년 연속 크리스마스에 얼굴을 보이며 리그 제일의 슈퍼스타임을 입증하고 있다.

반면 리그 제일의 명문 팀으로 손꼽히는 보스턴 셀틱스의 경우 크리스마스 매치 경험이 총 25회에 그치고 있다. 디트로이트 피스톤즈(32회), 필라델피아 76ers, 새크라멘토 킹스(이상 29회)등의 팀들보다도 적은 횟수에 불과한 수치다. 이는 시즌 일정이 지금보다 적었고, TV 중계 문화가 발달하기 이전에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는 점에서 약간의 손해를 보는 측면이 있고, 우수했던 성적에 비해 플레이 스타일이 화끈한 공격 농구와는 조금 거리가 있었던 탓에 상대적으로 크리스마스의 외면을 받아왔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크리스마스의 사랑을 듬뿍 받는 팀이 있는가 하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크리스마스 매치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팀들도 존재한다. 샬럿 밥캣츠, 멤피스 그리즐리스, 미네소타 팀버울브스가 그 주인공들. 이들의 공통점은 비교적 역사가 짧은 신생팀이라는 점, 그 동안의 성적이 신통치 못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하지만 세 팀 모두가 젊고 풍부한 가능성을 갖고 있는 팀이기에 머지않은 미래에 이들과 함께할 크리스마스가 찾아오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크리스마스의 강자와 약자

당대의 인기 팀들이 총 출동하는 크리스마스 매치인 만큼 그들의 승패 여부도 큰 관심사가 되곤 한다. 가장 많은 초대를 받은 뉴욕은 크리스마스 전적 20승 24패로 채 5할이 되지 않는 승률을 기록 중이다. 화려한 초대 경력에 비해 성적표는 조금 초라한 것이 사실. 그렇다면 크리스마스 최고의 강자는 누구일까?

물론 댈러스 매버릭스(2전 2승)처럼 100%의 승률을 기록하고 있는 팀도 존재하지만 그 표본이 너무 작다. 실질적인 크리스마스 최고의 강팀은 바로 포틀랜드 트레일 블레이저스다. 포틀랜드는 지금까지 총 15회의 크리스마스 매치를 치루며 무려 13승 2패라는 압도적인 승률을 기록 중이다. 특히 2008년의 크리스마스에 댈러스에게 패배하기 전까지는 크리스마스 12연승을 기록 중이었을 만큼 크리스마스만 되면 힘이 펄펄 나는 팀이다. 올 해의 크리스마스에도 초대를 받은 그들은 덴버 너게츠와의 경기를 준비 중이다. 과연 크리스마스 통산 14승째를 기록할 수 있을 것인지를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는 관전 포인트가 될 것이다.

이런 포틀랜드를 부럽게 바라보는 팀이 있으니 바로 오클라호마시티 썬더다. 시애틀 슈퍼소닉스 시절부터 총 11번의 크리스마스 매치에 초대받은 그들이지만 단 한 번도 승리하지 못하며 11전 전패를 기록 중이다. 2회 이상 크리스마스 매치를 경험한 팀들 중 유일하게 전패의 수모를 겪고 있는 팀이기도 하다. 1997년의 크리스마스를 마지막으로 계속해서 리그 사무국의 초대장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섭섭함 보다는 안도감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과연 오클라호마의 크리스마스 첫 승은 언제쯤 이뤄질까?


크리스마스 최고의 퍼포먼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한 경기 100득점이라는 거짓말 같은 기록을 가지고 있는 월트 체임벌린은 크리스마스에서도 그 괴물 같은 위력을 유감없이 뽐냈다. 그 중에서도 1961년의 크리스마스가 단연 백미였다. 당시 필라델피아 소속이었던 체임벌린은 1961년 크리스마스 매치에서 뉴욕을 상대로 59득점 36리바운드라는 어마어마한 활약을 펼쳤다. 비록 팀은 136-136으로 패배했지만 체임벌린이 잡아낸 36개의 리바운드는 지금까지도 크리스마스 역대 최다 리바운드 기록으로 남아있다.

59득점 역시 1984년 버나드 킹이 60득점을 기록하기 전까지 23년간 크리스마스 역대 최다 득점 기록으로 남아있었다(현재 2위). 재미있는 것은 당시 체임벌린의 기록을 깨뜨린 킹의 당시 소속팀이 뉴욕이었다는 점이다. 이래저래 체임벌린의 크리스마스는 뉴욕 때문에 김이 새버리는 느낌이다.

현역 선수들 중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인 이는 트레이시 맥그레디다. 그는 올랜도의 유니폼을 입고 총 3번의 크리스마스 매치를 경험했는데 그 때마다 최고의 컨디션을 자랑했다. 그의 첫 크리스마스 매치는 2000년 인디애나 페이서스와의 경기였다. 당시 팀은 93-103으로 패배했으나 맥그레디는 홀로 43득점 9리바운드를 기록하며 맹활약했다. 2002년의 크리스마스에 두 번째 초대를 받은 맥그레디는  디트로이트를 상대로 46득점을 퍼부으며 팀의 승리를 이끌었다. 이는 크리스마스 단일 경기 역대 최다 득점 부문 5위에 해당하는 수치다. 이 뿐만이 아니다.

바로 다음 해였던 2003년 크리스마스에서는 당시 최고의 신인이었던 르브론 제임스를 상대로 41득점, 8리바운드, 1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팀의 승리를 챙겼음은 물론이고 제임스의 첫 번째 크리스마스 매치를 혹독한 신고식의 장으로 만들어버렸다. 맥그레디는 크리스마스 커리어 평균 43.3득점을 기록 중인데 이는 리그 역대 최다 평균 득점 기록이기도 하다.

이쯤 되면 많은 이들이 마이클 조던의 크리스마스 평균 득점 기록에 대해 궁금해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던은 팬들의 기대와는 달리 겨우(?) 28.3득점을 기록하는데 그쳤다.


숫자로 보는 NBA의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최다 출전 : 뉴욕 닉스 44회
크리스마스 최다 승 : 뉴욕 닉스, LA 레이커스 20승
크리스마스 최다 패 : 뉴욕 닉스 24패
크리스마스 최다 연승 : 포틀랜드 트레일 블레이저스 12연승
크리스마스 최다 연패 : 오클라호마시티 썬더 11연패

크리스마스 통산 최다 득점 : 오스카 로버트슨 377점 (현역 : 코비 브라이언트 269점)
크리스마스 통산 최다 리바운드 : 빌 러셀 176개 (현역 : 샤킬 오닐 147개)
크리스마스 통산 최다 어시스트 : 오스카 로버트슨 145개 (현역 : 코비 브라이언트 60개)

크리스마스 평균 최다 득점 : 트레이시 맥그레디 43.3점
크리스마스 평균 최다 리바운드 : 월트 체임벌린 25.3개 (현역 : 샤킬 오닐 13.4개)
크리스마스 평균 최다 어시스트 : 오스카 로버트슨 12.1개 (현역 : 제이슨 키드 10.5개)

크리스마스 단일 경기 최다 득점 : 버나드 킹 60점 (1984년)
크리스마스 단일 경기 최다 리바운드 : 월트 체임벌린 36개 (1961년)
크리스마스 단일 경기 최다 어시스트 : 네이트 아치발드 (1972년) , 가이 로저스 (1966년) 18개


NBA는 농구라는 스포츠에 있어 꿈의 리그라고 할 수 있다. 그 꿈의 리그에서 뛰기 위해서는 반드시 드래프트라는 시험을 통과해야만 한다.

1988년의 드래프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의 꿈을 좇아 NBA의 문을 두드렸다. 당시 가장 먼저 호명되며 1번 픽의 영광을 차지했던 대니 매닝을 필두로 미치 리치몬드, 댄 멀리 등 미래에 수많은 팬들을 열광시키게 될 스타들이 NBA 리거로써의 첫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훗날 스스로가 마이클 조던의 라이벌임을 자처했던 오늘의 주인공은 그 누구에게도 선택받지 못한 채 드래프트에서 낙방하고 만다. 대학의 마지막 시즌을 앞두고 오클라호마 주립대학으로 전학을 오기 전까지 NCAA가 아닌 디비전 1리그에서 활약하던 그에게 눈길을 줄만한 팀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니, 그보다 애초에 그의 꿈도 농구 선수가 아니었다. 농구 보다는 미식축구 선수가 되기를 희망했던 그였지만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를 다니기 위해 농구 선수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도 SAT 성적이 좋지 않았던 탓에 NCAA에 소속된 학교가 아닌 2년 제 커뮤니티 칼리지에 진학하게 됐고, 무려 4번의 전학 끝에 오클라호마 주립대까지 오게 된 그였다.

너무나 먼 길을 돌아온 만큼 NBA 스카우터들에게 자신의 매력을 충분히 알릴 시간이 부족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드래프트에서 선택받지 못한 그는 수많은 서머 캠프들을 통해 NBA 데뷔를 시도했다. 무던한 노력 끝에 결국 1988-89 시즌의 개막을 앞두고 골든 스테이트에 초청 선수로 합류하는데 성공했지만 어이없게도 허리 부상을 당하며 퇴출당하게 된 그는 이 후 CBA리그를 전전하며 때를 기다렸다. NBA 무대를 누비게 될 그 날을 말이다.

CBA 출신 최고의 슈퍼스타로 기억되고 있는 오늘의 주인공. 훗날 마이클 조던의 라이벌을 자처했으며 패트릭 유잉과 함께 1990년대 뉴욕 농구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오늘의 주인공은 바로 존 스탁스다.




1. 1990년대 뉴욕의 대표 가드 등장

CBA에서 숨을 고르며 때를 기다리던 스탁스는 1990년 10월, 뉴욕과 임시 계약을 맺는데 성공한다. 임시 계약 선수에서 뉴욕의 정식 선수가 될 수 있었던 것에는 재미있는 뒷이야기가 있다. 스탁스는 뉴욕과의 임시 계약 직후 가졌던 연습 경기에서 부상을 당하게 됐는데, 연습이나 경기 중 부상을 입은 선수는 최소한 그 해 12월이 끝날 때까지 방출할 수 없다는 선수보호 조항 덕분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스탁스를 12월까지 남겨둘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12월까지 연명하는데 성공한 스탁스가 부상에서 완쾌될 무렵, 이번에는 절묘하게도 당시 뉴욕의 주전 슈팅 가드였던 제럴드 윌킨스가 부상을 당하게 됐다. 딱히 윌킨스의 빈자리를 채워줄 대안이 없었던 뉴욕은 스탁스를 주전 슈팅 가드로 기용하는 것 말고는 별 다른 도리가 없었다. 1990년대 뉴욕을 대표하는 가드로 성장할 스탁스라는 그렇게 수면 위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1990년대 NBA 최고의 라이벌리는 역시 시카고와 뉴욕이었다. 두 팀의 대결은 언제나 전쟁 같은 치열함 속에 펼쳐졌고, 모든 선수들은 자신의 능력을 120% 이끌어내어 경기에 임했다. 마치 아이스하키를 보는듯한 보디 체킹이 이어졌고, 심판의 눈을 피해 날아들던 파울들, 지옥과도 같았던 골밑. 하지만 최후의 승리는 언제나 시카고의 몫이었다. 그들에게는 조던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독 뉴욕을 방문할 때면 평소에 보여주던 것 이상의 엄청난 활약을 쏟아내던 조던은 뉴욕 팬들에게 악몽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그런 조던을 막아서던 것이 바로 스탁스였다. 당대의 명 센터 유잉이 뉴욕의 심장이었다고는 하나 포지션의 특성상 시카고의 조던, 스카티 피펜 콤비와 직접 맞붙게 되는 장면은 그리 많지 않았다.

실질적으로 그들과 맞대결을 펼치는 일은 스탁스의 일이었다. 사실, 당시의 조던을 막아설 수 있는 선수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엄청난 위용을 뽐내던 선수였다. 하지만 그런 조던을 향해 끝없이 도전하고 달려들며 지지 않으려 기를 썼던 선수들이 몇 몇 있었는데 그 중 최고는 단연 스탁스였다. 너무나 처절한 과정을 거치며 NBA 리거로 우뚝 선 스탁스는 더 이상 누구에게도 자신의 자리를 빼앗기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최고의 재능을 타고 났다는 조던을 상대로 끝까지 물러서지 않는 모습을 보이며 자신의 라이벌은 조던뿐이라 거침없이 말할 수 있었던 사나이는 스탁스 뿐이었다.




스탁스는 그를 전형적인 3점 슈터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 만큼 위력적인 외곽슛 능력을 가졌으며, 상황에 따라 백업 1번으로도 출장이 가능했던 볼 핸들링과 리딩 능력, 조던과의 맨투맨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수비력은 물론이고 멋진 돌파에 이은 슬램덩크로 하이라이트를 장식하기도 했던 선수였다. 다만 조금은 지나치다 싶은 느낌의 기복과, 슛을 아낄 줄 모르는 난사 기질을 지적받기도 했지만 승리하겠노라는 투지와 볼을 향한 열정 만큼은 리그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 선수였다.

전성기의 스탁스를 보며 당시의 농구 관계자들은 "스탁스가 기복만 없다만 당장이라도 드림팀 멤버로 선발될 것이다" 라고 평가하곤 했다. 이처럼 터프한 파이터 정신과 도전자 마인드로 똘똘 뭉친 스탁스는 질식 수비를 앞세워 동부 컨퍼런스의 강자로 군림하던 뉴욕의 팀 컬러에 꼭 들어맞는 선수였고, 팀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던 유잉과 더불어 뉴욕에서 가장 사랑받는 남자로 성장하게 된다.




2.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NBA 파이널

조던과 시카고의 벽에 막혀 번번이 좌절을 맛보던 뉴욕에게도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1993-94 시즌, 조던이 은퇴를 선언한 것이다. 당시 스탁스는 무릎과 허리에 부상을 입어 59경기에 출장하는데 그쳤지만 시즌 평균 19득점을 기록하며 맹활약했다. 많은 경기에 결장했음에도 총 217개의 3점 슛을 폭발시켰고 그 결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올스타 게임에 출장하는데 성공한다. 조던이 없는 동부 컨퍼런스에서 뉴욕을 막을 수 있는 팀은 없었다. 뉴욕은 플레이오프 무대에서 뉴저지, 시카고, 인디애나를 차례로 물리치며 꿈에 그리던 NBA 파이널 진출에 성공했다.

파이널 무대에서 뉴욕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하킴 올라주원을 앞세운 휴스턴이었다. 1994년의 파이널은 유잉과 올라주원의 센터 대결만큼이나, 불꽃같았던 양 팀의 슈팅 가드인 스탁스와 버논 맥스웰의 대결로도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파이널 시리즈에서의 스탁스는 이제껏 봐왔던 스탁스가 아닌 듯 했다. 유잉과 올라주원이 골밑에서 전쟁을 펼치고 있는 동안 스탁스가 내외곽을 오가며 득점포를 터뜨려줘야 했지만 그는 시리즈 내내 부진했다.

특히 뉴욕이 3승 2패로 앞서고 있었던 6차전에서 뉴욕에게 우승 트로피를 가져다 줄 수 있었던 마지막 슛을 올라주원에게 막히며 경기를 내줬고, 최후의 7차전에서는 모두 18개의 슛을 던져 단 2개만을 성공시키며 극도로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결국 최종전까지 가는 혈투 끝에 우승 트로피는 휴스턴의 차지가 되어 버리고, 뉴욕 팬들은 커다란 좌절에 빠졌다. 스탁스 역시 부진했던 자신의 모습에 실망스러움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이후 뉴욕은 결단을 내린다. 조던이 없는 NBA에서도 우승을 할 수 없다면 팀을 재편하기로 한 것이다. 결국 1995년 팻 라일리 감독이 마이애미로 떠나게 되고 돈 넬슨이 새로운 감독으로 부임하게 된다. 거기에 디트로이트에서 젊은 스타로 급부상 중이었던 앨런 휴스턴의 영입은 스탁스의 자리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결국 새로운 감독인 넬슨은 주전 가드로 스탁스가 아닌 휴스턴을 선택했다.

하지만 스탁스의 뉴욕에 대한 사랑과 승리에 대한 열정은 변함이 없었다. 벤치 멤버로 경기에 나설 지언정 팀의 패배를 바라볼 수 없었던 스탁스는 이 후 1996-97 시즌에 올 해의 식스맨으로 선정되며 제2의 전성기를 열었다. 하지만 1998년의 여름, 끝내 뉴욕은 골든 스테이트의 라트렐 스프리웰과 스탁스를 트레이드 하고 말았다. 영원한 뉴요커이고 싶었던 스탁스는 너무나 허무하게 리빌딩의 폭풍에 휩쓸려 뉴욕의 유니폼을 벗게 된다. 이후 스프리웰의 영입은 굉장한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휴스턴-스프리웰로 이어지는 트윈 테러를 결성하게 되고 훗날 "8번 시드의 기적"을 일으키며 8번 시드 최초의 파이널 진출이라는 역사적인 업적을 이루게 된다.




3. 뉴욕과의 이별, 쓸쓸한 은퇴

그렇게 뉴욕이 잘 나가는 동안 스탁스에게는 시련의 계절이 찾아왔다. 뉴욕의 유니폼을 벗은 스탁스는 더 이상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이어지는 트레이드를 통해 일생의 앙숙 관계였던 시카고 유니폼을 입게 되기도 했는데 팀의 일원이 되었음에도 시카고에 대한 반감을 숨기지 않았으며 시카고 팬들조차 스탁스를 "뉴욕의 스탁스"로 여기는 듯 야유를 쏟아냈다. 스탁스 본인조차 시카고에서 뛰기를 원치 않는다며 뉴욕으로의 복귀를 타진했지만 뉴욕은 끝내 그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이 후 2000-01 시즌, 유타로 둥지를 옮긴 뒤 칼 말론, 존 스탁턴과 함께 활약하기도 했지만 2002년에 쓸쓸히 은퇴를 선언하며 13시즌에 걸친 커리어를 마감했다.

1990년대의 뉴욕에 존 스탁스만큼 어울리는 선수는 없었다. 그 누구에게도 패배 당하기를 원치 않았으며, 그 어떤 강한 상대라도 두려움 없이 정면으로 맞서 싸우던 선수였다. 비록 4번의 편입을 거쳐 대학을 졸업했고, CBA를 전전하며 '비주류'의 삶을 살았던 스탁스였지만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했기에 더욱 전투적이고 강력한 파이터 마인드를 가질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벌써 수년째 부진에 빠져있는 뉴욕을 보고 있노라면 지금 뉴욕의 라커룸에는 누구도 아닌 스탁스와 같은 리더가 필요한 것 같다. 단 한 번의 패배조차 용납할 수 없을 만큼 불타는 경쟁심을 가진 그런 선수 말이다.

타고난 재능의 차이를 뜨거운 열정으로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오늘의 주인공, 존 스탁스였다.

존 스탁스(John Starks, 1989-2002)



생애통산 866경기 출장(420 선발)
평균 12.5득점, 2.5리바운드, 3.6어시스트

< 저작권자 ⓒ 뛰어(www.ddueh.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필자는 포인트 가드라는 포지션을 좋아한다. 개인 블로그의 이름은 물론이고, 즐겨 찾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사용 중인 닉네임 역시 포인트 가드와 관련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인지 간혹 '당신이 생각하는 최고의 포인트 가드를 꼽아보라'는 질문을 받기도 하는데 보통 대답을 피하곤 한다. 누가 더 잘하고 못하고를 판단하는 것은 너무나 주관적인 요소가 강하기에 섣불리 대답하기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고의' 라는 단어를 '좋아하는' 이라는 단어로 바꾼다면 몇몇 떠오르는 인물들이 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은 NBA의 매력에 빠져들게 해준 앤퍼니 하더웨이와 바로 오늘의 주인공이다. 그는 하더웨이처럼 엄청난 운동능력을 가졌거나 위력적인 득점력을 자랑하던 선수는 아니었다. 날카로운 외곽슛으로 상대팀 가슴에 비수를 꽂는 선수도 아니었으며, 철통 같은 수비력을 뽐내며 상대를 질식시키는 선수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오늘 날까지 뉴욕을 대표하는 포인트 가드로 회자되고 있고 개인적으로는 NBA 최후의 올드 스쿨 스트리트 스타일의 포인트 가드로 기억하고 있다. 그는 위대한 존 스탁턴의 10년 연속 어시스트 1위 등극에 제동을 걸어버린 선수이기도 하며, 커리어의 마지막에는 전설의 포인트 가드인 매직 존슨의 어시스트 기록을 넘어서 통산 1만개 이상의 어시스트 갯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뉴욕 최후의 올드스쿨 스트리트 볼러. 오늘의 주인공은 마크 잭슨이다.


마크 잭슨, MSG에 입성하다 !!


뉴욕 토박이였던 마크 잭슨이 NBA에 데뷔한 것은 1987년 드래프트를 통해서였다. 세인트 존스 대학 출신의 잭슨은 그의 3, 4학년 시즌을 통해 현란한 공격형 포인트 가드로 인정 받으며 1라운드 18번 픽으로 고향 팀인 뉴욕 닉스에 호명 되었다. 당시 뉴욕은 패트릭 유잉이라는 걸출한 센터가 팀의 중심으로 버티고 있었고, 도미닉 윌킨스의 동생으로 잘 알려진 제럴드 윌킨스가 주축 스윙맨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팀의 득점리더였던 버나드 킹이 워싱턴으로 떠났지만, 젊은 유잉을 중심으로 동부 컨퍼런스 다크호스로의 발돋음을 준비하던 시기였던 뉴욕은 때마침 팀을 이끌어 줄 포인트 가드가 필요한 상황이었고, 마크 잭슨은 뉴욕에게 꼭 필요한 선수였다. 그렇게 뉴욕에 입단한 잭슨은 루키 시즌부터 주전 멤버로 자리 잡으며 맹활약했다.

루키임에도 전 경기에 출장하며 40분 가량의 플레잉 타임을 소화했고, 시즌이 끝난 뒤 평균 13.6 득점 10.6 어시스트로 더블더블을 기록함과 동시에 4.8 리바운드, 2.5 스틸을 기록하며 스카티 피펜, 케니 스미스, 케빈 존슨, 호레이스 그랜트, 레지 밀러, 레지 루이스 등의 동기들을 제치고 그 해 신인왕에 등극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뉴욕을 떠나다

데뷔 이 후 줄곳 뉴욕의 주전 포인트 가드로 맹활약했던 잭슨이었지만 뉴욕에서의 생활은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화려했던 루키 시즌 이 후 각종 잔부상에 시달려야 했고 모리스 칙스, 로드 스트릭랜드 등의 동료 포인트 가드들에게 조금씩 입지를 빼앗기며 출장 시간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힘든 시간을 보내던 잭슨에게 또 한 차례의 기회가 다가오는 듯 했으니 그것은 바로 명장 팻 라일리의 등장이었다.

뉴욕이 본격적으로 동부 컨퍼런스의 강자로 올라선 것은 1991-92 시즌이었는데 그 해가 바로 라일리의 감독 취임 시기였던 것이다. 라일리의 첫 시즌에 뉴욕의 주전 포인트 가드로 활약하게 되면서 잭슨의 성적은 다시금 상승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평균 11.3 득점, 8.6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부활에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잭슨은 끝내 라일리가 원하는 선수가 되지는 못했다.

수비력이 취약했던 잭슨은 강력한 수비를 바탕으로 뉴욕을 동부의 패자로 만들려했던 라일리의 스타일에 부합하는 선수가 아니었다. 결국 잭슨은 당시 LA 클리퍼스에서 플레이하던 닥 리버스, 찰스 스미스와 트레이드 되며 뉴욕을 떠나게 되었다. 라일리의 판단은 멋지게 적중했다. 잭슨을 보낸 이 후 맞이한 1992-93 시즌의 닉스는 파이널 우승을 차지했던 1969-1970 시즌 이 후 최초로 60승 고지를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뉴욕의 팬들은 너무나도 빠르게 잭슨의 이름을 잊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잭슨이 합류한 클리퍼스의 상황은 정반대였다. 당시 엄청난 기대를 받았던 대니 매닝과 론 하퍼라는 젊은 콤비가 버티고 있었고 스탠리 로버츠, 로이 버트 등의 견실한 골밑 요원들이 출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리그의 수퍼스타였던 도미닉 윌킨스까지 팀에 가세했지만 연이은 주축 멤버들의 부상으로 인해 좌절의 계절을 맞이하고 있었다.


인디애나의 잭슨, 부메랑이 되어 뉴욕으로 날아들다!



클리퍼스에서의 힘들었던 2년이 지나고 잭슨은 인디애나로 날아가 페이서스의 일원이 된다. 당시 인디애나는 명장 래리 브라운의 지도하에 있던 팀이었다. 인디애나의 전설 레지 밀러가 전성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네덜란드의 거인 릭 스미츠가 활약하고 있었다. 데일 데이비스, 안토니오 데이비스가 골밑을 지켰으며 데릭 맥키 등도 위력을 뽐내던 시기였다. 다만 푸 리차드슨, 헤이우드 워크맨 등이 활약하고 있었던 포인트 가드 포지션이 약점으로 꼽히던 인디애나였기에 잭슨의 합류는 서로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잭슨이 합류하기 이전에도 이미 47승을 거둔 강팀이었던 인디애나는 잭슨 영입 이후 52승을 마크하며 단숨에 동부 컨퍼런스 센트럴 디비전 우승을 차지한다. 그리고 잭슨은 자신을 잊어버린 뉴욕의 팬들에게 엄청난 부메랑이 되어 날아가게 된다. 잭슨은 총 여섯 번의 시즌을 인디애나에서 보내게 되는데 그 중 다섯 시즌을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이 다섯 번의 플레이오프를 치루면서 1라운드에서 호크스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했던 1995-96 시즌을 제외한 네 번의 모든 플레이오프에서 뉴욕을 만나 겨루게 된다.

인디애나에의 첫 시즌이자 뉴욕과의 플레이오프 첫 대면이었던 1994-95 시즌 플레이오프는 그 유명한 '밀러 타임'이 터지며 7차전 접전 끝에 동부 준결승에서 뉴욕을 탈락시켰던 시즌이었다. 1997-98 시즌에는 플레이오프 4강 전에서 뉴욕을 만나 시리즈 스코어 4-1을 기록하며 다시 한 번 뉴욕을 울린다. 이후 1998-99 시즌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뉴욕에게 2-4 로 패배했지만, 1999-2000 시즌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4-2 로 승리를 거두며 곧장 복수에 성공한다.

플레이오프에서 뉴욕과 총 4차례 만남을 가지며 3승 1패의 성적을 거두었으니 자신을 내친 고향팀과 팬들에게 확실히 복수하는데 성공한 셈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편 뉴욕을 꺾고 진출했던 2000년 파이널에서는 샤킬 오닐과 코비 브라이언트가 버틴 LA 레이커스를 만나 분투했으나 결국 시리즈 스코어 2-4로 준우승에 그치게 된다)

하지만 인디애나와 함께하던 영광의 시간들도 영원하진 못했다. 인디애나에 합류한 이후 처음으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던 1996-1997 시즌, 감독이었던 브라운과의 불화가 깊어진 잭슨은 시즌 도중 덴버 너게츠로 트레이드 되고 만다.

아이러니한 것은 인디애나에서 내쳐진 이 시즌이 앞서 언급했던 스탁턴의 10년 연속 어시스트 왕 등극을 가로막은 시즌이었다는 점이다. 바로 스탁턴의 10년 연속 어시스트 왕 등극을 가로막은 시즌이었다는 점이다. 당시 잭슨은 경기당 평균 11.4 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10.5 개의 어시스트에 그친(!) 스탁턴을 제치고 리그 어시스트 리더 자리에 올랐다.


굴곡의 연속



인디애나 소속으로 시작해서 덴버의 유니폼을 손에 들고 마감했던 1996-97 시즌이 끝나고 1997-98 시즌이 시작됐다. 헌데 잭슨의 손에는 또 다시 인디애나의 유니폼이 들려있었다. 이유인 즉 잭슨과 불화를 일으켰던 브라운이 감독직에서 물러나고 래리 버드가 새로운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또 다시 잭슨을 영입한 것이다. 하지만 2000-01 시즌이 시작할 무렵에는 토론토 랩터스의 유니폼을 손에 들고 있었다.

버드가 떠나고 아이재이아 토마스가 신임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레지 밀러와 저메인 오닐을 주축으로 한 팀의 전력 재정비 과정의 일환으로 잭슨을 떠나보낸 것이다. 당시 리그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빈스 카터, 과거의 동료들이었던 안토니오 데이비스, 찰스 오클리 등과 재회한 잭슨이었으나 토론토에서의 생활도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또 한 번 시즌 중에 트레이드 되는 일을 겪게 되는데 잭슨이 당도한 곳은 처음 NBA 커리어를 시작했던 고향팀 바로 뉴욕이었다. 트레이드 이후 뉴욕의 주전 가드로 활약한 잭슨은 트레이드로 인한 스케줄 중복으로 '한 시즌 83경기 출장'이라는 독특한 경험을 하기도 한다. 잭슨의 굴곡 많은 커리어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 해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뉴욕의 1라운드 상대가 바로 토론토였던 것이다. 뉴욕은 토론토에게 시리즈 스코어 2-3으로 아쉽게 패배하며 시즌을 마무리했다. 잭슨으로써는 개막전 당시 소속되어 있었던 팀에게 패배하며 시즌이 종료된 것이었다.

이후로도 잭슨의 굴곡은 계속된다. 2001-02 시즌까지 뉴욕에서 활약하던 잭슨은 2002-03 시즌이 되어 또 다시 트레이드가 되는데, 이번에 그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스탁턴의 유타 재즈였다. 팬들의 입장에서는 역대 통산 어시스트 1, 2위를 기록 중인 선수들이 한 팀에서 뛰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였지만 잭슨에게는 주전 선수에서 백업 선수로의 보직 변경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자신의 어시스트 기록을 앞서 있는 유일한 선수에 의해 출장 시간을 빼앗기고 있는 형국이 되기도 했다. 유타에서의 생활을 단 1년만에 정리한 잭슨은 휴스턴 로케츠로 둥지를 옮기지만 조용히 시즌을 보낸 뒤 은퇴를 선언하며 굴곡 많은 커리어에 마침표를 찍었다.


잭슨, 그를 기억하다



마크 잭슨. 그는 위력적인 돌파 능력은 없었지만, 포스트 업에 능했으며 오픈 찬스에서 던지는 슈팅으로 팀에 득점을 보탰다. 넓은 시야로 코트를 바라보며 현란한 킬패스를 꽂아넣었고 안정적인 리딩 능력을 뽐냈으며 무엇보다 엄청나게 영리한 두뇌를 자랑하던 선수였다. 아무리 작은 틈이라해도 그것이 포착되는 즉시 그 약점을 파고드는 데는 귀신과도 같은 선수였다. 또한 작은 체구에도 경기당 3개 이상의 리바운드를 잡아내기도 했던 선수이기도 했다. 커리어 내내 문제로 지적되던 수비 측면의 보강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지만 1:1 수비에 약점을 보였던 것에 비해 픽앤롤의 수비나 더블팀, 트랩 등의 팀디펜스에 있어서는 두뇌 플레이를 즐기던 선수답게 썩 나쁘지 않은 응용력을 보여주던 선수였다.
 
NBA 통산 어시스트 2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전설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받은 개인 트로피는 신인왕 트로피가 유일무이 했고, 올스타 게임 출장 역시 1988-89 시즌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시즌 어시스트 리더에 이름을 올린 것도 단 한 차례 뿐이다. 그렇다고 '영원한 2위' 와 같은 비운의 닉네임조차 얻지 못했다. 수많은 사연들로 엉키고 설킨 트레이드의 역사까지 떠올려본다면 실로 한많고 탈많은 커리어를 보낸 전설 아닌 전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내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언제나 결혼반지를 농구화 신발끈에 끼우고 경기를 했다는 잭슨. 뉴욕에서는 유잉을, 인디애나에서는 밀러를, 토론토에서는 카터를, 유타에서는 스탁턴의 뒤를 받치며 커리어를 보냈다. 그는 단 한 번도 팀의 주연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러나 커리어가 끝난 뒤, 그의 이름은 포인트 가드의 1차 덕목이라 할 수 있는 어시스트 부문에서 매직 존슨의 이름보다 앞에 놓여져 있었다. 잭슨의 이름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확률은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아니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농구를 좋아하는 이라면, 1990년대 NBA 를 즐겨봤던 이라면 결코 그의 이름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리그 역사상 최고의 조연 포인트 가드, 굴곡 많은 커리어의 전설 아닌 전설. 바로 오늘의 주인공은 마크 잭슨이었다.


Mark Jackson (1988-2004)



생애통산 1296경기 출장 (1091선발)
평균 9.6득점, 3.8리바운드, 8.0어시스트
통산 어시스트 10334 개 (역대 2위)

< 저작권자 ⓒ 뛰어(www.ddueh.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NEWS & COLUMNS/POINT GUARD 2009. 11. 13. 15:31

바이런 스캇,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바이런 스캇이 경질 되었다. 현지 시각으로 지난 11월 11일에 있었던 피닉스와의 원정 경기에서 104-124로 패배한 직후 스캇의 경질 소식이 들려왔다. 현 GM 제프 바워가 스캇을 대신해 뉴올리언스의 지휘봉을 잡게 되었으며, 어시스턴트 코치로 팀 플로이드가 새로이 합류했다.

- 예상했다

Hornets Head Coach Byron Scott
Hornets Head Coach Byron Scott by PR _ Brands | Media | Lifestyle 저작자 표시변경 금지

예상했었다. "무조건 시즌 도중에 경질될 것"이라고 예상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가능성은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한계가 보였기 때문이다.

이번 시즌을 앞두고 뉴올리언스는 무려 6명의 새로운 선수를 영입했다. 로스터의 절반에 가까운 숫자가 새로운 구성원들로 대체된 것이다. 해서 시즌 개막 전에 뉴올리언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New Hornets"의 탄생을 기대하고 있노라 말했었다. 젊고 빠르며 공격적인 성향의 선수들이 대거 합류하면서 기존의 느린 템포와 수비 위주의 게임 플랜을 가진 팀에서 새로운 색깔을 가진 팀으로 변신할 수 있을거라 기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에 한 가지 단서를 달았다. "New Hornets의 탄생은 모두 스캇 손에 달렸다"고.

타이슨 챈들러가 떠나갔으니 새로운 수비 시스템을 구축해야 할 것이며, 젊고 빠른 선수들을 위해 보다 게임의 템포를 끌어올려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사실 복잡하게 말할 것 없이, 그저 새로운 얼굴에 맞는 새로운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했을 뿐이었다.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스캇은 변하지 않았다. 줄리안 라이트를 잠시 선발 멤버로 기용했던 것 말고는(그나마도 8경기만에 포기했지만) 전혀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팀은 너무나도 빠르게 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캇은 변하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말한다. 뉴올리언스 부진의 원인을 모두 스캇에게 물을 수는 없다고. 맞다. 시즌 초반 뉴올리언스가 부진한 성적을 거두고 있는 것이 스캇만의 책임은 아니다. 몇몇 선수들의 악몽과도 같은 퍼포먼스와 험난했던 초반 스케줄 등에서부터 부진의 원인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캇이 경질된 이유가 과연 성적 부진이라는 이유 단 하나 때문일까?

스캇이 경질된 진짜 이유는 '성적'이 아닌 '도태'라는 단어에서 찾아야 할 지도 모르겠다.

 
- 하지만 조금 이르다

New Orleans Hornets head coach Byron Scott and Chris paul talk during a time out in the second half against the New York Knicks at Madison Square Garden in New York

개인적으로 스캇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분법 적으로 나눈다면 좋은 코치 쪽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지금의 뉴올리언스와 크리스 폴이 있기까지 그의 공이 작다고는 할 수 없으니까. 분명 스캇은 폴을 리그의 슈퍼 스타로 만들었고 한 때 샌안토니오를 플레이오프 탈락 직전까지 몰아가기도 했다.

단지 뉴올리언스가 더이상 스캇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새로운 무언가가 남아있지 않았다. 자연스레 헤어질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어차피 올 해가 스캇의 계약이 끝나는 시즌이었기에, 뉴올리언스에서 시즌을 모두 치뤘다고 하더라도 결국 재계약을 하지는 않았을거라 생각한다.

문제는 스캇을 경질한 그 다음이다. 후임으로 GM 제프 바워가 지휘봉을 잡는다? GM으로써의 바워는 나쁘지 않은 평판을 얻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가 코치로써 어떤 모습을 보일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검증된 바가 없다. 더 재미있는 것은 팀 플로이드가 바워를 보좌하기 위해 어시스턴트 코치로 합류한다고 한다. 플로이드는 스캇이 지휘봉을 잡기 직전이었던 2003-04 시즌 뉴올리언스의 코치였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버린 기분이 드는 것은 나뿐인가? 여기에 기존의 어시스턴트 코치들은 보직을 그대로 유지하게 될 것이라 한다. 이로써 뉴올리언스는 무색무취의 팀이 되어버렸다. 당장 다음 경기부터 어떤 모습을 보여줄 것인지 예측할 수가 없다. 이렇게 급하게 스캇을 경질했어야만 했을까? 스캇 이후의 일들을 충분히 준비한 이후에 스캇을 끌어내렸어도 충분했을텐데 말이다.

- 크리스 폴의 반응



스캇의 경질 소식을 접한 직후 가장 궁금했던 것은 크리스 폴의 반응이었다. 평소 스캇에 대한 존경심을 감추지 않던 그였으며 스캇이 지휘봉을 놓기 바로 전날까지 함께 골프를 치며 친분을 돈독히하던 폴이었다. 스캇 역시 폴을 각별히 아꼈으며 두 사람은 사적으로도 많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였다.

그래서일까, 스캇에 대한 뉴스가 처음 보도 되었을 때에 폴은 인터뷰에 불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데이비드 웨스트가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영원히 입장 표명을 피할 수는 없는 노릇. 결국 폴은 지역 언론과의 전화 인터뷰를 통해 입을 열었다.

가장 먼저 나온 말은 "섭섭하다"는 것이었다. 폴은 자신조차 언론에서 보도되기 전까지 스캇 코치의 경질 여부를 알지 못했으며, 만약 팀에서 이런 움직임을 준비하고 있었다면 당연히 자신이나 웨스트 같은 선수들에게 사전에 의견을 묻거나 최소한의 정보를 알렸어야 했다고 말했다.

앞서 스캇 경질이 조금 성급했던 것이 아닌가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데, 이 부분 역시 프론트에서 실수를 한 것이라 본다. 스캇과 폴의 관계가 어떤 사이인지는 뉴올리언스 삼척동자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폴의 의견을 듣는 것이 부담스러웠다면 최소한의 귀띔 정도는 해줬어야 했다.

최근 많은 NBA 팬들이 홀로 고군분투하는 폴을 보며 "폴이 강팀으로 트레이드 됐으면 좋겠다"라고 이야기한다. 다른 몇몇은 "폴이 팀에 불만을 가질 것"이라고도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폴을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다. 폴은 '우리'라는 단어에 굉장히 민감한 선수다. 지난 시즌 라슈얼 버틀러가 트레이드 되었을 때, "루키 때부터 나를 돌봐준 동료는 이제 웨스트 밖에 남지 않았다."라며 떠나가는 동료에 대한 아쉬움을 감추지 않았던 폴이다. 또한 오프 시즌에는 "지금 우리 팀에 필요한 것은 새로운 누군가가 아니다. 새로워진 우리들이다." 라는 인터뷰를 갖기도 했다. 폴은 새로운 선수의 영입 등을 통해 팀이 강해지기 보다는, 기존의 동료들과 함께 훈련하고 강해지며 한 계단 한 계단 올라서는 것을 선호하는 선수다. 그런 그가 데뷔 이후 줄곧 함께하던 코치를 떠나보냈다. 물론 바워가 전혀 새로운 외부 인사는 아니지만, 유쾌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폴은 전화 인터뷰의 말미에 "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다. 나는 여전히 최선을 다해 코트를 달릴 뿐이다. 우리는 여전히 농구를 할 것이다. 나도, 웨스트도 마찬가지다." 라며 최선을 다해 게임에 임할 것을 다짐했다.

폴이 스캇의 경질을 이유로 경기에 집중하지 못하거나, 팀에 불만을 털어놓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뉴올리언스 프론트의 모습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다. 앞서 언급했지만, 너무 급하게 움직인 감이 없지 않다. PJ 브라운 이후 처음으로 유니폼에 캡틴 마크를 달고 있는 폴과 웨스트마저 언론 보도를 통해 스캇의 경질 소식을 접했다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고 본다.


- 내일의 태양은 내일에 뜬다


어찌 되었든 스캇이 물러나고 바워와 플로이드가 지휘봉을 잡게 되었다. 설마 당장 뉴올리언스의 성적이 수직 상승하며 승승장구 할 것이라 기대하는 이들은 없을거라 생각한다. 어쩌면 스캇이 함께할 때보다 더욱 부진한 모습을 보일지도 모른다. 정말로 2010년 드래프트 로터리 픽을 향해 달려갈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제는 정말로 'New Hornets'의 모습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스캇이 경질된 이유는 '성적'이 아닌 '도태' 때문이었을거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스캇의 경질은 곧 'New Hornets'라는 단어와 직접적으로 닿아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스캇이 경질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스윙맨 포지션은 구멍 투성이고, 외곽포는 끝모를 부진에서 허우적거릴 것이다. 주력 선수들의 크고 작은 부상이 사라지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 큰 기대는 금물이다. 그저 코치가 바뀐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편안한 마음으로 'New Hornets'를 즐기는 것 뿐이다.

당분간은.

<
저작권자 ⓒ 뛰어(www.ddueh.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NEWS & COLUMNS/POINT GUARD 2009. 10. 27. 09:47

길교주의 자비로운 부활 메세지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사용자 삽입 이미지

2001년 12월의 어느 날, 골든 스테이트 워리어스의 홈구장 오라클 아레나.

골든 스테이트의 벤치에 앉아 있던 약관의 루키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코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데뷔 이후 단 2경기에 교체 출장한 것에 그치고 있었고, 심지어 부상을 당하지 않았음에도 부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야했다. 좀처럼 코트에 나설 기회를 잡지 못하던 그는 코치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었다. 팀 훈련 때마다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음에도, 되레 자신보다 못한 기량을 선보인 베테랑들에게만 기회가 주어지고 있었다.

조금씩 자신감을 잃어갈 무렵, 그는 자신이 대학 시절 활약하던 모습이 담긴 테이프들을 돌려봤다. 그리고 확신했다. 자신이 NBA에서 성공할 수 있을만한 기량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는 변하기 시작했다. 비록 여전히 벤치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더 이상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코트를 바라보던 그는 없었다. 눈을 번뜩이며 팀원들의 움직임을 머릿속에 담기위해 노력했고, 수없이 이미지 트레이닝을 반복했다.

그 동안 소속팀인 골든 스테이트는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악의 부진에 빠져있었다. 결국 구단 프론트는 당시 코치였던 데이브 코웬스를 해임했고, 브라이언 윈터스를 신임 헤드코치로 임명했다. 원터스는 부임 이후 팀의 리빌딩을 위해 젊은 선수들에게 보다 많은 기회를 주기로 결정했다. 벤치에서 때를 기다리던 그에게도 조금씩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시작은 좋지 않았다. 교체 멤버로 꾸준히 코트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지만, 이렇다 할 결과물을 쉽사리 내어놓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조금씩 전진하고 있었다. 데뷔 이후 48경기 만에 첫 번째 선발 출장의 기회를 얻더니, 9경기 연속 두 자릿수 득점에 성공하기도 했다.

팀의 시즌 마지막 27경기에 연속 선발 출장하며 입지를 다진 그는 조금씩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시작했고 4월 한 달 동안 팀의 9경기에 모두 선발 출장, 평균 16.5득점, 4.7리바운드, 6.1어시스트, 3스틸을 기록하며 서부 컨퍼런스 이 달의 신인으로 선정되었다.

하지만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가 어떤 선수로 성장하게 될 지, 어떤 드라마틱한 장면들을 연출하게 될 지를 예측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의 이름은 길버트 제이 아레나스 주니어 (Gilbert Jay Arenas Jr.).

훗날 Agent Zero라는 닉네임으로 불리게 될 길버트 아레나스였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길버트 아레나스.

그는 1982년 LA의 San Fernando에서 태어났다. 아레나스의 어머니는 그가 어렸을 때 약물 중독에 빠졌고, 이후 그는 아버지 Gilbert Arenas Sr.와 함께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는 헐리웃에서 활동하던 근육질의 조연 배우였다. 배우로써 인상적인 경력을 쌓지는 못했지만, 몇 차례의 영화 출연과 CF 모델 활동 등으로 가정의 생계를 책임졌다. 동시에 어머니 없이 자라나고 있는 아들에게 무한한 사랑을 쏟았다. 어머니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아레나스가 탈선하거나 방황하지 않고 올곧게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아버지의 커다란 사랑이 있었다.

아레나스에게 처음 농구를 접하게 해준 인물 역시 아버지였다. 아레나스가 11살이 되던 해, 아버지로부터 농구공을 선물 받은 그는 농구의 매력에 매료되어갔다. 마이애미 대학에서 풋볼 선수로 활약하기도 했던 아버지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탓인지 아레나스는 뛰어난 운동 신경을 뽐내며 빠르게 실력을 키워갔다. 이후 Grant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농구 선수로의 삶을 시작했다.

고교 시절에도 그의 득점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아레나스는 입학 이후 연일 고득점 행진을 이어갔다. 신입생이던 해에 시즌 평균 22.5득점을 기록하더니 이후 29.8득점, 33.4득점으로 그 숫자를 늘려갔다. 졸업반이 되기도 전에 이미 교내 역대 최다 득점 기록을 갈아치운 그는 4년 동안 총 2124점을 득점하며 Grant 고교의 전설로 이름을 남겼다.

그러나 아레나스가 NCAA에서도 성공 스토리를 이어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모두가 의문을 가졌다. 우선 Grant 고교에서의 활약상만으로는 농구 팬들에게 커다란 인상을 줄 수 없었다. Grant 고교는 인근의 Fairfax나 Compton Dominguez 같은 농구 명문 고교에 비해 인지도가 떨어지는 학교였기에 그의 활약은 상대적으로 저평가 되고 있었다. 덧붙여 빠른 생일로 인해 동급생들보다 나이가 어렸기에 필연적으로 체격적인 부분에서 약점을 가지고 있었고, 학업에 무관심했던 탓에 대학에 입학할 수 있을만큼의 SAT 성적을 얻을 수 있을지에 대한 여부조차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당시 공격적인 리쿠르팅에 나섰던 농구 명문 애리조나 대학에 의해 졸업반이 되기도 전에 입학 제의를 받았고, 곧바로 제의를 받아들이며 진로를 최종 결정지은 아레나스였지만 대학에서의 활약은커녕 입학 가능성조차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모두가 아레나스에게 의심의 눈길을 보낼 때, 단 한 사람만은 그를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바로 그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아레나스가 농구는 물론이고 대학에 입학할 수 있을 만큼의 SAT 점수를 얻을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결국 아레나스는 대학 입학에 필요한 SAT 점수를 취득하게 됐고, 농구 명가 애리조나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백넘버 '0'

사용자 삽입 이미지




























천신만고 끝에 애리조나 대학교 입성에 성공한 아레나스였으나 그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여전히 가시가 돋쳐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아레나스가 약체 팀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겉멋만 들었을 뿐, 실력은 형편 없을 거라며 그를 비웃었다. 심지어 몇몇 이들은 '주전 자리를 차지하기는커녕, 출장 시간이 0분에 그칠 것'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억측들은 아레나스를 무릎 꿇게 만들지 못했다. 되레 그는 자신의 백넘버를 0번으로 결정하며 보란 듯이 NCAA 무대로 뛰어들었다.

프리 시즌이 시작되자 아레나스를 비웃던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레나스는 프리 시즌 첫 경기에서 22득점을 퍼부으며 인상적인 데뷔에 성공했고, 이후에도 맹활약을 계속하며 프리 시즌 MVP에 등극해버렸던 것이다.

1999-2000 시즌의 애리조나는 로렌 우즈, 마이클 라이트, 리차드 제퍼슨과 같은 재학생들과 아레나스, 제이슨 가드너, 룩 월튼 등의 신입생들이 조화를 이루며 강력한 전력을 뽐냈다. 아레나스는 팀 내 두 번째로 많은 평균 32분의 출장 시간을 기록했고, 평균 15.4득점을 기록하며 우즈, 라이트와 함께 팀 내 스코어링 리더로 맹활약했다. 애리조나는 27승 7패를 기록하며 승승장구했다.

아레나스는 코트 안에서의 맹활약은 물론이고, 코트 밖에서의 재미있는 모습들로 많은 팬들을 거느리기 시작했다. 팀원들과 학우들에게 고대시를 인용한 이해할 수 없는 농담을 던지는가 하면, 교내 신문에 우스꽝스러운 메세지를 싣기도 하고, 유니폼을 마음대로 잘라 입고 나와서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소포모어 시즌이 되자 아레나스는 더욱 강해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2000-01 시즌 동안 평균 16.2득점을 기록하며 팀 내 최다 득점자가 되었고, 애리조나를 NCAA 토너먼트 파이널 무대에까지 올려놓았다. 하지만 아레나스는 정작 파이널 무대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힘없이 물러났다. 상대팀이었던 듀크 대학은 막강한 전력으로 애리조나를 물리치고 전미 챔피언이 되었다.

비록 파이널 무대에서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아레나스는 본능적으로 더 이상 대학 무대에서 이룰 것이 없음을 직감했다. 처음 애리조나에 입학할 당시에는 당연히 대학 졸업장을 받게 될 거라 생각했지만, 단 2년 만에 NCAA 파이널 무대를 밟아본 아레나스는 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짧았던 대학 생활을 청산하고 NBA 드래프트에 참가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수많은 이들이 그의 결정을 만료했지만, 아레나스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아레나스는 댄 페건을 에이전트로 고용하며 2001년 NBA 드래프트에 참가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좌절과 상처의 드래프트

'엄청난 사거리를 자랑하는 롱 레인지 점퍼와 훌륭한 운동 능력, 빠른 스피드와 타고난 득점 감각에 대한 부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슈팅 가드로 뛰기에는 신장이 너무 작고, 포인트 가드로 뛰기에는 지나치게 공격적인 성향을 가진 슛 퍼스트 마인드의 콤보 가드.'

얼리 엔트리를 선언한 아레나스를 바라보는 시선들은 대개 이러했다. 지역 방어의 허용, 핸드 체킹 강화 등의 룰 개정으로 과거에 비해 콤보/듀얼 가드 성향의 선수들이 갖는 가치가 높아졌으나, 당시만 하더라도 새로운 룰이 막 도입되던 시기였기에 여전히 콤보/듀얼 가드 성향의 선수들을 기피하는 경향이 많이 남아있었다. (물론 지금도 이런 경향은 여전히 존재한다)

애리조나 재학 시절, 아레나스는 포인트 가드가 아닌 슈팅 가드로 플레이했었다. 걸출한 포인트 가드였던 가드너가 그의 동기였기 때문이다. 해서 드래프트를 목전에 둔 아레나스에게는 포인트 가드로의 포지션 전환에 대한 성공 여부 또한 커다란 이슈이자 성공의 걸림돌로 비춰졌다.

하지만 아레나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최선을 다해 각종 워크아웃에 임했다. 아레나스가 앞만 보고 달려갈 수 있었던 것에는 또 한 번 아버지의 존재가 큰 도움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아레나스가 얼리 엔트리를 선언함과 동시에 아들의 매니저 역할을 자청하며 동분서주 아들의 기량을 알리기 위해 움직였다. 그러는 동안 아레나스의 아버지는 헐리웃에서 비중 있는 조연으로 캐스팅 제의를 받게 되었는데, 아버지는 아들의 농구 인생을 위해 과감히 이를 거절했다 (아레나스의 아버지가 캐스팅을 거절했던 캐릭터에 최종 낙점된 인물은 Laurence Fishburne, 우리에게 '모피어스'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배우였다).

이처럼 아레나스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아버지 역시 아들의 성공적인 프로 데뷔를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 그 때 아레나스 부자에게 접근해오는 팀이 있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새크라멘토 킹스. 2001년 드래프트 당시 1라운드 25번 지명권을 보유하고 있었던 새크라멘토는 아레나스에게 '니가 25번 이후에 지명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아레나스와 아버지는 순조롭게 진행되는 드래프트 준비 과정에 만족했고 여유 있는 마음으로 드래프트 중계를 지켜봤다.

2001년 NBA 드래프트. 드디어 새크라멘토가 보유하고 있는 1라운드 25번 지명권의 주인공이 호명될 차례가 다가왔다. 짧지만 긴 침묵이 흐르고, NBA 커미셔너 데이비드 스턴의 입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Sacramento Kings select, Gerald Wallace from the University of Alabama."

결국 1라운드 지명권 행사가 모두 끝이 나도록 아레나스의 이름은 호명되지 않았고, 이후 2라운드 31번 픽으로 그를 지명한 골든 스테이트 워리어스에서 NBA 커리어를 시작하게 되었다.

아레나스에게도, 그의 아버지에게도 드래프트는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골든 스테이트의 풍운아

사용자 삽입 이미지





























처음 애리조나 대학에 입학했을 당시와 마찬가지로, NBA 데뷔 역시 순탄치 않았다. 워크아웃과 팀 훈련에서 좋은 모습을 보인 아레나스는 내심 NBA 데뷔에 대해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지만 팀은 계속해서 그를 외면했다. 2000-01 시즌 골든 스테이트의 4번 째 경기에 교체 출장하며 NBA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지만 겨우 3분을 플레이하는데 그쳤다. 이어진 경기에서 8분을 플레이하며 단 1개의 3점슛 시도를 마지막으로 그는 무려 이후의 25경기 동안 단 1초도 코트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코칭 스태프들은 계속해서 그를 외면했고, 심지어 부상을 당하지 않았음에도 부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언제나 팀 훈련에서는 맹활약했지만 정작 실전에 투입되는 기회는 베테랑들에게 돌아갈 뿐이었다.

언제나 많은 이들의 의심과 억측을 보기 좋게 날려버린 아레나스였지만 이번에는 그도 의기소침해질 수밖에 없었다. 드래프트에서의 상처가 채 아물지도 않은 시점에서 단순한 출장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아레나스의 가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코트에 내보내주기만 한다면, 충분한 기회만 준다면 얼마든지 자신의 기량을 입증시킬 수 있을 텐데. 끝내 자신을 모른척하던 코칭 스태프들과 구단 프론트를 원망하는 마음뿐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자신감을 잃어갔다. 어쩌면 정말로 기량이 형편없기 때문에 코트에 나설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우연히 대학 시절 자신의 활약상이 담긴 비디오테이프를 보게 된다. TV 속에서 플레이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아레나스는 자신이 NBA에서 성공할 수 있을만한 기량을 충분히 가지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의심의 눈길들을 멋지게 날려버리겠노라 다짐했다.

이후 그는 더욱 치열하게 훈련에 임했다. 팀 동료였던 마크 잭슨, 딘 올리버와 함께 가장 먼저 훈련장에 나와서 가장 늦게 훈련장을 빠져나갔다. 여전히 벤치에 앉아있는 신세였지만, 이전처럼 불만스럽게 코트를 바라보기 보다는 팀 동료들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연구했으며 코트를 누비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며 이미지 트레이닝을 이어갔다.

그 동안 골든 스테이트는 끝 모를 부진에 빠져있었다. 결국 구단 프론트는 당시 헤드코치였던 데이브 코웬스를 해임하고, 신임 헤드코치로 브라이언 윈터스를 내세웠다. 윈터스는 팀의 리빌딩을 위해서 젊은 선수들을 적극 기용할 것임을 천명했고 이는 아레나스에게 커다란 호재가 되었다.

하지만 윈터스 역시 곧바로 아레나스에게 기회를 준 것은 아니었다. 아레나스는 윈터스가 헤드코치로 임한 7번째 경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다시금 코트를 밟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출장 시간은 겨우 3분. 이후에도 간간히 교체 투입으로 경기에 임했을 뿐 단 한 번도 10분 이상의 출장 시간을 기록하지 못하고 있었다.

시즌 48번째 경기에 들어서 비로소 첫 선발 출장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아레나스는 조금씩 자신의 가능성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첫 선발 출장 이후의 9경기에서 연속으로 두 자릿수 이상의 득점에 성공한 것이다. 이후 아레나스는 팀의 마지막 27경기에서 연속으로 선발 출장하는데 성공했고, 충분한 기회를 얻자마자 이제껏 그래 왔듯이 모든 이들에게 자신의 기량을 입증하기 시작했다. 4월에는 서부 컨퍼런스 이달의 신인 선수로 선발되며 멋지게 신인 시즌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이듬해 2002-03 시즌. 아레나스는 본격적으로 성공 스토리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82경기에 모두 선발 출장, 평균 35분(팀 내 2위)을 플레이하며 18.3득점(팀 내 2위), 4.7리바운드, 6.3어시스트(팀 내 1위), 1.5스틸(팀 내 1위)을 기록하며 맹활약했다.

팀 내의 입지는 물론이거니와 리그 내에서도 그의 이름은 조금씩 무게를 갖기 시작했다. 루키 올스타 게임에 소포모어 팀의 일원으로 참가하며 대회 MVP로 선정되었고, 수직 상승한 개인 기록과 팀 내 공헌도로 인해 2002-03 시즌 MIP 수상자가 되는 영광을 맛보기도 했다.

아레나스의 급격한 성장은 2라운더 루키로 데뷔한 것을 전화위복으로 만들었다. 단 2년 만에 비제한적 FA의 권리를 갖게 된 것이다. 젊고 풍부한 가능성을 가진 그를 얻기 위해 많은 팀들이 아레나스에게 접근했다.

가장 적극적이었던 팀은 LA 클리퍼스와 워싱턴 위저즈. 두 팀의 제안을 놓고 고민하던 아레나스는 자신의 운명을 동전에 맡기기로 했다. 하지만 조금 독특하게도 10번 동전을 던져 많이 나온 팀이 아닌, 적게 나온 팀으로 자신의 행선지를 결정하기로 한 것이다. 그는 동전을 10번 던졌고 클리퍼스가 7번, 워싱턴이 3번 나왔다.

아레나스는 워싱턴과 6년간 63.7m의 거대 계약에 합의했고, 원 소속팀이었던 골든 스테이트가 이를 매치시키지 않으면서 워싱턴에 새로운 둥지를 트게 되었다.


Agent Zero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언제나 그랬듯이, 워싱턴에서의 시작도 평탄하지 않았다.

당시 워싱턴은 제리 스택하우스라는 걸출한 득점원을 보유하고 있었고, 팀의 미래로 손꼽히며 반드시 성장시켜야만 했던 콰미 브라운이 자리 잡고 있었다. 구단은 이들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퓨어 포인트 가드를 원했고, 이것이 아레나스를 영입한 이유였다.

하지만 이는 워싱턴의 계산 착오였다. 워싱턴에서의 아레나스는 이전에 비해 득점이 늘어난 반면 어시스트는 되레 줄어들고 있었다. 에디 조던 코치는 아레나스에게 제이슨 키드와 같은 플레이를 펼칠 것을 요구했지만, 아레나스는 언제나처럼 공을 들고 림으로 돌진하며 자신만의 플레이를 펼치려했다. 팀에서 가장 많은 출장 시간과 득점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조던과 아레나스 사이에는 알 수 없는 부조화의 기류가 흘렀다. 게다가 크고 작은 부상으로 인해 시즌 내내 고생하던 아레나스는 55경기에 출장하는 것에 워싱턴에서의 첫 시즌을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모습으로 마무리해야 했다.

그러나 아레나스와 조던은 서로를 포기하지 않았다. 아레나스는 언제나 그랬듯이 치열하게 훈련에 임했고, 조던은 아레나스의 장점을 100% 활용할 수 있는 전술을 고안하기 위해 노력했다.

시즌 종료 후 워싱턴은 부상으로 26경기에 출장하는 것에 그쳤던 스택하우스를 댈러스 매버릭스의 앤투안 제이미슨과 트레이드했고, 아레나스 - 래리 휴즈 - 제이미슨으로 이어지는 트리오를 결성했다. 조던은 아레나스의 공격 본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었고, 아레나스는 코치의 주문을 성실히 이행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렇게 맞이한 2004-05 시즌. 아레나스와 워싱턴은 비상하기 시작했다. 아레나스는 80경기에 모두 선발 출장하며 평균 25.5득점, 4.7리바운드, 5.1어시스트, 1.7스틸을 기록하며 팀의 에이스로 우뚝 섰다. 제이미슨과 함께 생애 최초 올스타 멤버로 선정되기도 했으며 All NBA 3rd Team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아레나스의 활약은 개인의 성공에 머무르지 않고, 팀의 성공에도 큰 힘이 되었다. 워싱턴은 45승 37패를 기록하며 동부 컨퍼런스 5번 시드의 주인공이 되어 플레이오프 무대에 진출했다. 이는 8년 만의 플레이오프 진출이었으며 팀의 이름이 위저즈로 바뀐 이후 첫 플레이오프 진출이기도 했다. 아레나스에게도 생애 첫 플레이오프 진출이었기에 더욱 뜻 깊은 시즌이었다.

1라운드에서 만난 상대는 시카고 불스. 원정 2경기를 모두 내어준 워싱턴은 이후 홈2경기에서 모두 승리했고 시리즈 스코어가 2-2를 이룬 상황에서 5차전 승부에 돌입했다.

치열하게 전개된 경기는 종료 5초 가량이 남은 상황에서 110-110으로 동점을 이뤘고 마지막 공격권은 워싱턴이 가지고 있었다. 아레나스가 천천히 드리블을 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단숨에 커크 하인릭을 제치고 돌파를 시도했고, 헬프 디펜스를 시도하는 타이슨 챈들러를 앞에 두고 점퍼를 던졌다. 경기 종료와 함께 슛은 림을 갈랐고 112-110로 경기 종료. 워싱턴이 시리즈 스코어를 3-2로 뒤집는 순간이었다.

승기를 잡은 워싱턴은 여세를 몰아 이어진 6차전에서도 승리하며 시리즈 스코어 4-2로 단숨에 플레이오프 1라운드를 통과했다. 이후 2라운드에서 샤킬 오닐과 드웨인 웨이드가 이끄는 마이애미 히트를 만나 0-4로 스윕을 당하며 시즌을 마무리했지만, 이제는 어느 누구도 아레나스가 이끄는 워싱턴을 쉬운 상대로 생각할 수 없었다.

2005-06 시즌의 개막을 앞두고 워싱턴은 본격적으로 아레나스 중심의 팀을 만들기로 결정한다. 팀의 미래로 손꼽았던 콰미 브라운을 LA 레이커스로 보내며 아레나스의 사이드 킥으로 활약할 수 있는 캐론 버틀러를 영입한 것이다. 이로써 워싱턴은 아레나스 - 버틀러 - 제이미슨으로 이어지는 빅3 라인을 결성하는데 성공했다.

아레나스는 이에 화답하듯 80경기에 출장하며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낸다. 평균 29.3득점을 기록하며 득점 부문 리그 4위에 랭크되었고, 팀 내 최다인 6.1개의 어시스트와 2.0개의 스틸을 기록하며 워싱턴의 에이스로 확실히 자리매김 했다. 2년 연속 올스타 멤버와 All NBA 3rd 팀에 선발되며 전국구 스타로써의 발돋움에도 성공했다.

42승 40패의 성적으로 2년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한 워싱턴은 1라운드에서 르브론 제임스가 이끄는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를 상대하게 됐다. 아레나스와 제임스는 양 팀의 에이스로써 엄청난 대결을 펼쳤다. 아레나스는 시리즈 평균 34득점을 기록했고, 제임스는 평균 35득점을 기록하며 연일 화력 시위에 나섰다.

시리즈는 조금씩 클리블랜드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시리즈 스코어 2-3으로 플레이오프 탈락 위기에 놓인 워싱턴은 홈에서 6차전을 치렀다. 5차전에 이어 두 경기째 연속으로 연장까지 가는 혈전을 펼친 두 팀. 연장전 종료 15초를 남긴 상황에서 113-112로 워싱턴이 1점 차의 리드를 잡고 있었고, 파울을 얻은 아레나스는 2개의 자유투를 시도하려 하고 있었다.

그 때, 제임스가 아레나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만약 이번에 자유투를 놓치게 된다면 너희 팀은 지고 말거야.'

아레나스는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였으나 뭔가에 홀린 듯이 2개의 자유투를 모두 놓치고 말았다. 81%의 자유투 성공률을 자랑하던 아레나스가 2개의 자유투를 모두 놓치고 만 것이다. 이어진 클리블랜드의 공격에서 데이먼 존스가 베이스 라인 점퍼를 성공시켰고, 결국 113-114로 무릎을 꿇은 워싱턴은 플레이오프 1라운드의 벽을 넘지 못하고 시즌을 마무리해야 했다.

아레나스는 6차전이 끝난 뒤 곧바로 자유투 훈련을 시작했을 만큼 커다란 실망감에 사로 잡혔다. 하지만 전 세계 NBA 팬들의 뇌리에는 아레나스의 이름이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NBA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제임스와 정면으로 맞서며 결코 물러서지 않았던 사나이로써 말이다.


정상에서 입은 상처

2006-07 시즌은 그야말로 아레나스가 리그를 대표하는 스타플레이어로 자리 매김 하게 된 해였다. Agent Zero라는 멋진 닉네임과 함께 아레나스의 활약상은 연일 뜨거운 이슈로 언론의 주목을 끌었다.

2006년 12월 17일, 레이커스 원정 경기에서 코비 브라이언트의 마크를 뚫고서 60득점, 8리바운드, 8어시스트, 2스틸을 기록하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날 기록한 60득점은 워싱턴 프랜차이즈 역사상 단일 경기 최다 득점 신기록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12월 22일에는 피닉스 원정 경기에서 스티브 내쉬와 쇼다운을 펼치며 연장까지 가는 접전 끝에 54득점을 기록하며 피닉스를 침몰시키기도 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수많은 팬들에게 최고의 퍼포먼스로 기억되는 경기는 역시 2007년 1월 15일에 있었던 유타 재즈와의 경기였다. 경기 종료까지 11초가 남은 시점에서 111-111으로 동점을 이룬 양 팀. 인 바운드 패스를 받은 아레나스는 마지막 공격에 나섰으며 유타의 데론 윌리암스가 그 앞을 가로 막고 있었다. 한 차례 레그 스루 드리블을 통해 왼손으로 공을 옮겨 잡은 아레나스는 돌파를 시도할 듯이 모션을 취했고, 윌리암스는 재빨리 아레나스의 경로를 막아섰다. 하지만 아레나스는 더 이상 림을 향해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드리블을 멈춘 뒤 그대로 3점슛 라인 뒤에서 슛을 시도했다. 공이 림에 닿기도 전에 경기 종료 부저가 울렸고, 경기 종료 부저가 울리기도 전에 아레나스는 득점을 확신한 듯 두 팔을 들어 올리며 뒤돌아섰다. 잠시 뒤, 아레나스의 슛이 림을 가르며 114-111로 경기 종료. 그야말로 극적인 슈팅이었고, 더욱 극적인 퍼포먼스였다.

그러나 무서울 것이 없었던 아레나스와 워싱턴의 상승 곡선은 시즌 내내 지속되지는 못했다. 시즌이 막바지에 이른 2007년 4월 4일 샬럿 밥캣츠와의 경기에서 제럴드 월라스와 충돌을 하며 왼쪽 무릎이 뒤틀린 것이다. 이 부상으로 인해 아레나스는 시즌 아웃을 선언하게 된다. 드래프트에서 한 차례 아픔을 안겼던 월라스는 다시 한 번 아레나스에게 본의 아닌 상처를 주게 되었다.

워싱턴은 41승 41패를 기록하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지만 아레나스는 팀과 함께 할 수 없었다. 워싱턴은 2년 연속 클리블랜드와 1라운드에서 만나게 됐지만 아레나스가 없는 워싱턴은 제임스와 클리블랜드를 막기에 역부족이었다. 워싱턴은 힘없이 0-4로 스윕을 당하며 시즌을 마무리해야 했다.

지난 시즌의 아쉬움을 씻어 내기 위해 절치부심 맞이했던 2007-08 시즌. 워싱턴은 제이미슨의 꾸준한 활약과 날이 갈수록 성장하는 버틀러의 분전으로 43승 39패를 기록하며 4년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다. 하지만 거기에 아레나스의 모습은 없었다.

아레나스는 시즌 개막 이후 8경기 연속 선발 출장했으나 부상의 여파가 남은 탓인지 컨디션 난조를 보였고, 팀마저 3승 5패로 부진에 빠졌다. 결국 팀은 아레나스에게 휴식을 권유했고 아레나스는 부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며 결장을 이어갔다.

그렇게 시즌은 후반으로 접어들었다. 플레이오프 진출을 향한 경쟁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졌고, 1라운드 돌파를 위해 어떻게 서든 홈코트 어드밴티지를 얻으려 했던 워싱턴은 38승 36패를 기록하며 클리블랜드와 동부 컨퍼런스 4번 시드를 놓고 치열한 순위 싸움을 전개하고 있었다.

결국 워싱턴은 시즌 종료까지 8경기를 남긴 상황에서 아레나스의 복귀를 전격 결정했다. 홈코트 어드밴티지를 얻기 위해서는 가용 가능한 모든 자원을 총동원 시켜야 했고, 팀의 에이스였던 아레나스의 복귀는 필연적인 것으로 보였다. 이후 아레나스는 5경기에서 교체 멤버로 경기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부상에서 완벽하게 회복되지 않았기에 오랜 시간을 플레이할 수 없었고, 그나마 플레이 하는 동안에도 기복이 심한 모습을 보였다.

워싱턴은 아레나스가 출장한 5경기에서 3승 2패, 팀의 마지막 8경기에서 5승 3패를 기록하며 선전했지만 결국 같은 기간 동안 4승 4패를 기록한 클리블랜드에게 홈코트 어드밴티지를 빼앗기고 말았다.

다시금 시작된 플레이오프. 워싱턴과 클리블랜드는 3년 연속 1라운드에서 맞붙게 되었다. 아레나스는 1,2차전에서 교체 멤버로 경기에 나섰으나 부진한 모습을 보이는데 그쳤고 팀은 2연패를 당했다. 결국 아레나스는 3차전부터 과감히 선발 출장을 감행했다. 하지만 단 10분을 플레이하는데 그쳐야 했다. 결국 4차전에서 무리하게 30분이 넘는 플레잉 타임을 소화한 아레나스는 경기가 끝나고 그대로 시즌 아웃 되고 만다. 워싱턴은 3년 연속 클리블랜드에게 무릎 꿇으며 시리즈 스코어 2-4로 플레이오프 1라운드 돌파에 실패했다.


또 한 번의 좌절

부상으로 힘든 1년을 보낸 아레나스였지만 팬들의 관심과 사랑은 끊이지 않았다. 아레나스는 언론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며 팬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고, 인기 블로거로써의 명성도 높아져갔다.

그러나 소속팀 워싱턴의 상황은 그리 즐겁지 못했다. 2008-09 시즌 개막을 앞둔 워싱턴의 최고 고민거리는 주축 멤버들과의 재계약이었다. 아레나스와 앤투안 제이미슨이 동시에 FA 자격을 얻게 된 것이다. 캐론 버틀러와 함께 팀 전력의 50% 이상을 책임지던 그들이었지만 두 선수와 모두 재계약에 성공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특히 제이미슨은 FA 시장에서 높은 인기를 보였고, 워싱턴의 전력 누수는 불가피한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이 때 아레나스가 입을 열었다. 그는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제이미슨과의 재계약에 실패한다면 나도 팀을 떠날 것'이라며 동료의 잔류를 희망했다. 결국 2008년 6월 30일, 워싱턴은 제이미슨과 4년간 50m에 달하는 재계약에 합의할 수 있었다.

이제 모든 관심은 Opt-Out을 선언하며 비제한적 FA가 된 아레나스에게로 집중됐다. 그가 원한대로 제이미슨과의 재계약에 성공한 워싱턴은 곧이어 아레나스와의 협상에 돌입했다.

그리고 2008년 7월 13일, 워싱턴 팬들의 환호성을 불러일으킬 뉴스가 전해졌다. 아레나스가 워싱턴과의 재계약에 동의한 것이다. 게다가 스스로 자신의 연봉을 감축시키며 팀의 샐러리 유동성 확보에 이바지하기도 했다. 그는 6년간 127m에 육박하는 거대 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지만, '팀에게 16m을 돌려주겠다. 맥시멈 계약으로 팀의 계획에 걸림돌이 되고 싶지 않다'는 말과 함께 6년 111m의 계약에 최종 사인했다.

팬들의 기대는 날로 높아져갔다. 주축 멤버들과의 재계약도 순탄히 마무리했으니, 멤버들이 건강하게만 뛰어준다면 이번에야말로 클리블랜드와 제임스에게 복수를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팬들의 기다림은 생각보다 길어졌다. 아레나스는 100% 회복된 모습으로 코트에 서고 싶다며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2009년 3월 28일, 디트로이트와의 홈경기를 통해 드디어 코트로 돌아온 아레나스. 하지만 30분 가량을 플레이하며 25%의 야투율을 기록하는데 그쳤다. 잠시 숨을 고른 그는 2009년 4월 2일, 어느 새 숙적이 되어가고 있는 클리블랜드와의 경기에 다시 한 번 선발 출장 했다. 하지만 33분을 플레이하며 27%의 야투율, 11득점을 기록하는데 그쳤다. 그리고 그는 또 한 번의 시즌 아웃을 선언했다.

아레나스가 없는 워싱턴은 좌초하기 시작했다. 와중에 버틀러마저 크고 작은 부상들에 시달려야 했고, 닉 영과 같은 영건들의 성장 그래프는 구단의 기대에 턱없이 모자란 수준이었다. 결국 2008-09 시즌 워싱턴의 최종 성적은 19승 63패. 구단이 워싱턴에 자리 잡은 이후 역대 두 번째로 저조한 승률을 기록했다.


다시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인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2009년의 여름, 워싱턴은 크고 작은 움직임들을 꾸준히 보였다. 우선 그들은 코칭스태프의 면면을 대폭 물갈이 했다. 에디 조던을 해임하고 플립 선더스를 새로운 헤드 코치로 임명했다. 곧이어 샘 카셀과 랜디 휘트먼 등을 어시스턴트 코치로 영입하며 새로운 워싱턴을 만들기 위한 의지를 보였다.

그리고 그들의 2009년 드래프트 1라운드 5번 지명권을 트레이드 시장에 내놓았다. 아레나스가 건강하게 복귀한다는 가정 아래, 팀이 정상에 서기 위해서는 유망주 신인이 필요하기 보다는 즉시 전력으로 활약할 수 있는 베테랑들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워싱턴은 그들의 5번 지명권과 이탄 토마스, 다리우스 송가일라, 페체로프를 패키지로 만들어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의 랜디 포이, 마이크 밀러를 영입하기로 결정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워싱턴의 손을 들어주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으나 드래프트 당일이 되자 이야기는 엄청난 반전을 맞이했다. 한 때 1번 픽의 주인공으로도 점쳐졌던 스페인의 신성 리키 루비오가 5번 지명권을 통해 미네소타에 안착한 것이다. 물론 그의 NBA 데뷔는 좀 더 오랜 기다림의 시간을 필요로 하게 되었지만, 결과론적인 관점에서의 비판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아레나스의 건강에 대한 의구심을 표하는 이들도 조금씩 생겨났다. 사실상 2년을 부상으로 고생해야 했던 아레나스이기에 과연 그가 완벽한 부활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계속됐고, 어느 덧 리그의 에이스 레벨로 성장한 버틀러와의 볼 배분 문제, 새로 영입한 포이 등과 팀의 궁합, 영의 지지부진한 성장 곡선 등 걱정거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아레나스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듯하다. 뜨거운 이슈를 끝없이 쏟아내던 블로그 관리에 할애하던 시간을 줄이고, 보다 진지하게 게임에 임하겠노라 이야기했다.

르브론 제임스, 드웨인 웨이드, 코비 브라이언트, 크리스 폴, 드와이트 하워드... 수많은 스타플레이어들이 리그를 들끓게 하고, 전국 방송을 통해 자신의 기량을 뽐내는 모습을 보며 매순간 복수의 칼날을 갈아왔다는 길버트 아레나스.

돌아온 'Agent Zero'의 열풍이 워싱턴을 넘어 전미는 물론 전 세계를 강타하게 될 것인지, 혹은 부상으로 사라져간 스타플레이어들처럼 아레나스 역시 뒷걸음질을 치게 될 것인지...

복귀를 눈앞에 둔 아레나스의 활약상은 단연 2009-10 시즌 최고의 관전 포인트 중 하나다.

길렐루야!

< 저작권자 ⓒ 뛰어(www.ddueh.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NEWS & COLUMNS/POINT GUARD 2009. 9. 28. 15:55

뉴올리언스의 내일?

BY 알 수 없는 사용자


트레이닝 캠프 개막을 목전에 둔 지금, 새로운 뉴올리언스에 대한 팬들의 기대는 그 어느 때보다 높다. 그들이 강력한 챔피언 컨텐더이기 때문이 아니다. 한 때 샐러리 문제로 심각한 위기에 봉착한 것으로 보이던 뉴올리언스의 팬들에게는 '새로움'이라는 단어만으로도 충분히 설레이는 오프 시즌이 되고 있다. 과연, 새로운 뉴올리언스의 "내일"은 어떤 모습일까?


Okafor Holds Off Nesterovič
Okafor Holds Off Nesterovič by FLC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1. 에메카 오카포

에매카 오카포. 아마도 시즌 개막을 기다리고 있는 뉴올리언스 팬들에게 가장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선수일 것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오카포는 타이슨 챈들러와의 맞트레이드로 뉴올리언스에 합류했다. 챈들러가 뉴올리언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생각해본다면, 수많은 팬들의 기대와 우려는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과연 오카포는 뉴올리언스 팬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리바운드
오카포가 가장 먼저 해결해줘야 하는 문제는 바로 리바운드다. 지난 시즌, 챈들러가 부상으로 사실상 전력외 선수가 되면서 가장 큰 문제가 된 것이 바로 리바운드였다. 45경기 출장에 그친 챈들러를 제외하면, 팀 내 가장 많은 리바운드를 기록한 선수는 데이비드 웨스트로 경기당 평균 8.5개의 리바운드를 잡아냈다. 웨스트 다음으로 많은 리바운드를 잡아낸 선수는 다름 아닌 크리스 폴. 그는 경기당 평균 5.5개의 리바운드를 잡아냈다.

6-0의 폴이 팀 내 리바운드 2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건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다. 웨스트가 리바운드에 강점을 가진 선수는 아니라는 점을 떠올려 본다면, 오카포는 팀 내 메인 리바운더로써의 역할을 수행해줘야 한다.

오카포는 데뷔 이후 매년 경기당 평균 10개 이상의 리바운드를 기록하고 있다. 비록 리그 리바운드 수위 자리를 놓고 다투는 수준의 수치는 아니지만, "꾸준함"이라는 덕목에 있어서는 높은 점수를 줄 수 있겠다. 그리고 바로 이 "꾸준함"이야 말로 뉴올리언스가 바라고 원하는 것이다. 사실상 챈들러가 부상 없이 "꾸준한" 활약을 해줬다면 오카포를 영입할 이유가 없다.
챈들러와의 연장 계약을 논의하고, 그가 계속해서 팀의 메인 리바운더로써 군림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챈들러는 또 다시 건강상의 문제를 일으키고 말았고, 팀은 더이상 불안한 외줄타기를 계속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

오카포는 챈들러처럼 폭발적인 리바운더는 아니지만, 매년 꾸준히 일정 수치 이상의 리바운드를 잡아줄 수 있는 선수다. 오카포는 팬들의 시선을 사로 잡을만큼 압도적인 리바운더의 모습을 보이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 뉴올리언스의 골밑에 안정감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선수이며, 가랑비에 옷 젖듯이 시나브로 10개 이상의 리바운드를 잡아내는 오카포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몇몇 이들은 오카포 역시 부상 전력이 있는 불안한 선수라고 말하지만, 소포모어 시즌(26경기 출장)을 제외하고는 제법 꾸준히 경기에 나서고 있으며 특히 지난 2년간 연속으로 82경기에 모두 출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내일의 일은 누구도 알 수 없지만, 당장 지금의 모습만을 놓고 본다면 건강상의 이유로 팀을 이탈할 확률은 그리 높아보이지 않는다.

덧붙이자면, 이번 시즌 오카포는 리바운드에 있어서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낼 지도 모르겠다. 지난 시즌 동안 오카포의 골밑 파트너들은 나즈 모하메드, 사가나 좁 같은 이들이었다. 웨스트, 힐튼 암스트롱, 션 막스 같은 선수들과 함께 플레이하던 챈들러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리바운드를 기록할 수 있는 확률이 적다고 할 수 있겠다. 특히 공격 리바운드 같은 경우, 챈들러는 팀의 거의 모든 공격 리바운드를 전담하다시피 하며 팀 내 ORB% 부문에 있어서 압도적인 1위를 유지해오던 것에 반해, 오카포는 팀 내 ORB% 수치가 매년 3~4위 수준에 머물러왔다.

커리어 평균 3.7개의 공격 리바운드를 잡아내고 있는 오카포에게 공격 리바운드를 잡아내는 재주가 없다는 말은 실례다. 골밑 파트너들과 공격 리바운드를 나눠잡았다고 해석하는 쪽이 무리가 덜할 것이다. 뉴올리언스 입장에서는 조금 씁쓸한 이야기지만, 이번 시즌의 오카포는 자의든 타의든 더이상 리바운드를 나눠잡을 수 없는 상황이다.

2006-07 시즌 이후 처음으로 평균 11개 이상의 리바운드를 기록할 확률이 높으며, 앞서 언급했듯이 리바운드 부문 커리어 하이를 작성할 지도 모른다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이는 단순한 수치 비교를 통해 "챈들러가 오카포보다 위력적인 리바운더다"라고 쉽게 단정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Perkins Guarding Paul
Perkins Guarding Paul by Eric Kilby 저작자 표시동일조건 변경허락

공격
2008-09 시즌의 뉴올리언스가 가장 처참한 실패를 맛보았던 것이 바로 '공격'에 관한 것들이다. 크리스 폴의 과부하 현상을 방지하고자 여러가지 패턴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오카포의 가세는 다소 정체되어 가는 뉴올리언스의 공격에 새로운 가능성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오카포의 영입이 확정된 이후, 공격 측면에서 적잖은 기대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러자 많은 이들이 "오카포에게 득점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아닌가?" 라는 반문을 해왔다. 맞다. 오카포에게 "스코어링"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당장 오카포가 20-10을 기록해줄 것이라고는 조금도 기대하지 않는다. 내가 말하는 것은 오카포의 "스코어링"이 아닌, 뉴올리언스의 "공격"에 대한 것이다.

오카포로 인한 공격 파생 효과를 이야기 할 때면, "오카포는 단독으로 로우 포스트를 공략할 수 있다" 라는 말을 즐겨한다. 이 말은 오카포가 샤킬 오닐이나 팀 던컨처럼 포스트 업을 통해 20~25점을 득점해 줄 것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말 그대로 '혼자서 공을 가지고 골밑을 공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할 수 있다"는 부분이다. 이게 무슨 대수냐고?

지난 08-09 시즌 뉴올리언스가 '공격' 부문에 있어 처참하게 무너져 내린 이유는 새로운 패턴을 만들어내는데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공격 패턴의 개발은 폴의 과부하 현상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시작 되었다.

해서 팀이 꺼내든 카드는 로우 포스트 플레이어들의 새로운 활용법들이었다. 이 중 챈들러의 활용에 있어서 팀은 두 가지 새로운 시도를 감행했다. 하나는 챈들러의 컨트롤 타워化, 다른 하나는 챈들러의 단독 로우 포스트 공략이었다. 그 결과는 모두가 알다시피 '실패'였다. 특히 단독 로우 포스트 공략은 그야말로 암담했다. 포스트업 스킬은 좀처럼 향상되지 않았고, 불안한 드리블링은 이내 실책으로 이어지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이런 스캇이 고집스럽게 챈들러를 통한 로우 포스트 공략을 시도한 것은, 모 TV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의 구호처럼 "안되도 되야하는" 미션이었기 때문이다.

00056717
00056717 by Keith Allison 저작자 표시동일조건 변경허락

챈들러가 팀의 공격에 공헌하는 장면은 폴과의 콤비 플레이,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폴과의 픽앤롤 플레이를 통해 이뤄지는 것이 거의 전부였다. 바꿔 말하면, 챈들러가 팀의 공격에 공헌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폴이 함께 해야만 했다. 그것도 단순히 엔트리 패스를 넣어주는 수준이 아닌, 픽앤롤 플레이가 시전되었을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폴과 챈들러의 픽앤롤 플레이가 시작되고 멋진 앨리웁으로 공격이 마무리 될 때면, 챈들러의 경우 상대팀의 포인트 가드(폴의 매치업 상대)를 등에 지고 뛰어오르거나 완벽한 노마크 찬스를 포착하여 득점에 성공해왔다. 하지만 그 반대쪽에서 드리블을 하는 폴은 상대팀의 센터(챈들러의 매치업 상대)를 끌어 안으며 드리블을 하거나, 자신에게 더블 팀/트리플 팀을 붙여놓고서야 노마크가 된 챈들러에게 패스를 할 수 있었다. 분명 폴에게 적잖은 부담이 될 수 밖에 없는 장면이다 (워낙에 폴이 쉽게 플레이를 성공시킨 탓에 편해보이는 것 뿐이다).

그나마도 폴이 벤치에 앉아있는 상황에서는 활용 불가능한 패턴이기에, 폴이 휴식을 취하는 동안 챈들러의 공격 공헌도는 '0'에 수렴하기 시작한다. 오카포는 다르다. 그에게 공을 맡겨 놓고 그 다음을 생각할 수 있다. 직접 로우 포스트 득점을 시도해도 되고, 오카포가 볼을 지키는 동안 다른 선수들이 득점을 노릴 수도 있다.

폴도 마찬가지다. 오카포에게 엔트리 패스를 넣어주고 기회를 엿보거나, 제2/제3의 패턴 플레이를 지시할 수 있는 것이다. 좀 더 간결하게 말하자면, 팀의 주전 센터를 활용하기 위해 굳이 스크린을 타고 페인트 존으로 돌격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다. 좋지 아니한가?

게다가 오카포는 반드시 폴과 함께 해야 하는 타입의 선수도 아니다. 데런 칼리슨도, 바비 브라운도, 모리스 피터슨이나 데빈 브라운도 오카포와 함께 공격할 수 있다. 엔트리 패스를 넣어주고, 빈 자리를 향해 움직일 수 있는 가드라면 누구든지 오카포와 함께 공격할 수 있다. 폴이 벤치에 앉아있는 상황에서도 팀의 주전 센터를 활용한 공격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오카포는 폴이 1차적으로 수비진을 흔들어주지 않아도, 이미 세팅이 되어 있는 상대 수비진을 상대로도 공격을 시도할 수 있는 선수다. 어찌보면 참 단순하고 기본적인 것이지만, 그 동안의 뉴올리언스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웠던 일들이 이제는 가능하게 되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오카포가 20-10을 기록하며 팀 내 골밑 득점을 전담하리라 기대하진 않는다. 잘해봐야 폴과 웨스트에 이은 팀의 세 번째 공격 옵션에 지나지 않을 선수다. 화려한 무브먼트로 팀의 공격을 이끌 선수는 분명 아니다. 공격에 있어서 가시적인 성과를 기대하기란 힘들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팀공격에 있어 높은 활용도를 갖는 선수라는 점에는 지금도 많은 기대를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챈들러와의 픽앤롤 플레이가 사라지면, 폴이 예전만 못한 모습을 보일 것이라는 예측을 하는 이들에게 말씀드린다. 사실 폴은 이미 08-09 시즌에 챈들러와의 2:2 플레이를 배제한채 플레이했다. 실제로 많은 뉴올리언스 팬들이 "왜 픽앤롤을 하지 않는 것이냐!" 라는 성토를 하곤 했다. 하지만... 지난 시즌의 폴이 어떤 모습을 보였던가? 챈들러의 부재로, 픽앤롤 플레이의 실종으로 인해 무너져내렸던가?

물론 챈들러의 존재가 폴을 보다 높은 단계로 이끌어줬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겠다. 하지만 챈들러가 없다고해서 폴이 힘없이 주저 앉을만한 선수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폴을 너무 우습게 보는 것이다. 사실 데뷔할 당시의 폴은 오픈 코트 활용과 트랜지션 게임 능력을 높이 평가 받던 선수였다. 하지만 지금은 리그에서 손꼽히는 지공 팀인 뉴올리언스에 완벽히 녹아들어 플레이하고 있지 않은가? 챈들러의 부재로 인한 폴의 부진을 우려하는 것은 필요 이상의 걱정이다. 아, 그리고. 오카포 역시 픽앤롤에 능한 선수다.


Julian Wright
Julian Wright by Keith Allison 저작자 표시동일조건 변경허락

2. 줄리안 라이트

오카포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니 다음 순서는 응당 이 친구에 대한 이야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줄리안 라이트. 수많은 뉴올리언스 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영건. 팀 내 유일의 스카이워커. 하지만 기대만큼의 실망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끼게 했던 애증의 존재.

트레이드나 드래프트 소식을 제외한다면, 오프 시즌 동안 가장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소식은 단연 라이트에 관한 것이었다. 서머 리그가 시작될 무렵, 스캇이 인터뷰를 통해 라이트에 대한 이야기를 남겼다. 그것은 페자 스토야코비치를 대신해 스타팅 포워드로 게임에 임할 가능성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라슈얼 버틀러가 트레이드 된 이후 슈팅 가드로 전향하는 것이 아니냐는 루머가 나돌기도 했지만, 최근 트레이닝 캠프를 앞두고 다시 한 번 스캇 코치가 라이트에 대해 입을 열었다. 라이트는 팀의 주전 스몰 포워드로 출장할 가능성이 있으며, 이에 대해서 스토야코비치와 이야기를 나눠볼 생각이라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이로써 확실해 진 것은 두 가지. 더이상 라이트가 듀얼 포워드로 기용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과(스몰 포워드로의 정착), 이번 시즌에야말로 충분한 기회를 부여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평소 라이트의 기용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던 불만들을 한 번에 해소시킬 수 있는 움직임이다.

라이트의 플레이가 다소 불안정했던 것은 사실이다. 공격의 경우 컨디션에 따라서 엄청난 폭발력을 보여주다가도, 평범한 미들점퍼를 에어볼로 날려버리기도 했다. 한 두차례의 작은 실수에 크게 위축되어 자신감 없는 모습으로 슛찬스를 잃기도 했다. 수비도 마찬가지. 날로 향상되는 대인 방어에 비해 팀디펜스에 대한 움직임은 다소 미흡했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본인의 실수로 오픈 찬스를 내준 뒤에는 어김 없이 수비 실수를 범하곤 했다. 강점을 보이는 대인 방어 역시 기복이 심했다. 하지만 이럴 수록 보다 많은 기회를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나 다소 자신감이 없어보이는 라이트의 경우는 몇 차례 실수를 하더라도 자신있게 플레이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캇은 라이트가 실책을 저지르기 무섭게 그를 벤치로 불러들였다. 엎친 데 덮친격으로, 메인 포지션인 스몰 포워드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도 마련되지 않았다.

'새로운 시도'라는 명목하에 때로는 스몰 포워드, 때로는 파워 포워드로 출장했으며 지난 서머 리그에서는 포인트 가드의 롤까지 테스트 받아야 했다. 제한된 출장 시간, 한 두 차례의 실수에도 곧바로 벤치에 주저 앉게 되는 상황에서 다양한 포지션에 대한 테스트까지 이뤄졌으니 뭔가를 보여줄래야 보여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계속되는 악순환의 고리 속에 실망스러운 시즌 종료를 맞이했던 라이트였다. 그의 더딘 성장 곡선에도 아직까지 그를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이다.

만약 라이트가 스스로의 가능성을 폭발시키며 한 단계 도약하는 시즌을 보낸다면, 뉴올리언스는 지난 수년간 그토록 염원하던 '운동 능력 넘치는 슬래셔'를 보유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정적이고 폴의 드리블링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팀공격에 있어 새로운 활력소가 되어줄 것이다. 이미 대인 방어에 있어서는 실전력으로써의 검증을 끝마치고 있는 단계이기에, 팀을 대표하는 또 한 명의 얼굴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거기에 라이트가 주전 멤버로 자리를 잡게 된다면, 스토야코비치를 벤치 득점원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된다. 이는 그동안 약점으로 지적되던 벤치 뎁스와 팀공격력을 동시에 보완할 수 있는 움직임이다. 그아말로 "라이트만 터져준다면" 뉴올리언스는 또 다른 가능성을 가진 팀으로 업그레이드 될 것이다. 2009-10 시즌, 뉴올리언스의 개막전 주전 스몰 포워드는 과연 누구일까? 스토야코비치? 라이트?


Hornets Head Coach Byron Scott
Hornets Head Coach Byron Scott by Schröder+Schömbs PR _ Brands | Media | Lifestyle 저작자 표시변경 금지

3. 젊은 농구, 공격 농구... 스캇의 선택은?

베테랑을 중요시하고, 선수 기용에 변화의 폭이 매우 적으며, 좀처럼 젊은 선수들에게는 기회를 주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바이런 스캇. 하지만 그런 스캇도 이번 시즌만큼은 고집을 꺾을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팀에는 새로운 얼굴들이 6명이나 되고, 수많은 베테랑들이 팀을 떠났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던 '라이트의 주전 출장 가능성'에 대한 인터뷰도 이런 변화를 반증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설령 라이트가 주전 포워드로 출장하지 못하더라도, 지난 시즌에 비해 월등히 많은 기회를 부여받을 것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여기에 폴의 백업이자 팀 내 두 번째 포인트 가드 자리에는 루키 칼리슨이 자리하고 있고, 마커스 쏜튼 역시 버틀러가 떠나간 슈팅 가드 포지션에서 적잖은 임무를 부여받을 것으로 보인다. (이 두 선수는 아마도 스캇의 아래에서 플레이했던 루키들 중 리차드 제퍼슨과 폴 이후 가장 많은 기회를 부여받을 선수들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어린 선수들을 활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팀컬러에도 조금의 변화가 생겨날 것으로 보인다.

그 동안 철저한 지공과 수비 위주의 경기를 펼치던 뉴올리언스였으나, 다가오는 09-10 시즌에는 보다 공격적이고 빠른 템포의 농구를 보여주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지금의 뉴올리언스는 특유의 팀디펜스(무한 더블팀 - 로테이션)에 필수불가결 요소였던 챈들러가 팀을 이탈했기에 팀디펜스를 전반적으로 손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이런 지금, 새로이 합류한 선수들의 면면이나 서머 리그에서의 모습들을 보건데 이전에 비해 (상대적으로)공격의 비중을 상향 조정하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서머 리그에서의 모습들을 되뇌여보자. 칼리슨의 경우, 수비에 강점이 있으며 안정적인 농구를 한다는 장점을 가진 선수로 알려졌었다. 하지만 서머 리그에서의 칼리슨은 세간의 평가와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였다. 과감한 드리블로 상대의 페인트 존을 노렸으며, 돌파에 이은 플로터로 직접 득점을 마무리하기도 했다.

폴의 백업으로써 에릭 스노우 같은 스타일의 선수가 될 것이라던 스카우팅 리포트가 무색하게도, 서머 리그에서의 칼리슨은 차라리 앨런 아이버슨의 모습을 보는 듯 했다. 게다가 이것이 철저히 벤치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은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쏜튼도 마찬가지. 쏜튼은 서머 리그 루키 득점 1위를 차지하며 공격력을 뽐냈다. 쏜튼은 본래 공격력이 좋은 선수가 아니었냐고? 맞다.

쏜튼에게서 발견한 특이점은 단순한 득점력이 아닌, 포인트 가드로써의 롤을 수행하는 모습이 종종 보였다는 것이다. 쏜튼이 대학시절 포인트 가드로 플레이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NBA 레벨에서 포인트 가드의 역할을 소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치 않는다. 그런 쏜튼에게 포인트 가드의 롤을 시험했다는 것 역시 나름의 시사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기억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스캇은 점수 쟁탈전을 펼칠 때면 반드시 두 명의 볼핸들러를 기용하곤 했다. 한 때 지겹도록 언급했던 "보조 볼핸들러"라는 존재가 그것이다. 제이슨 키드에겐 케리 키틀즈가 있었고, 배런 데이비스에겐 스피디 클랙스턴이 있었으며, 폴에게는 자네로 파고가 있었다.

스캇은 두 명의 볼핸들러를 기용하며 순간적으로 게임의 템포를 끌어올리는 방법으로 점수 쟁탈전을 펼치곤 했다. 하지만 지난 시즌에는 "보조 볼핸들러"로 활약해줬어야 했던 선수들(안토니오 다니엘스, 데빈 브라운)이 모두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해서 스캇은 나름의 공격 전술을 시도해 볼 겨를조차 없었다. 칼리슨과 쏜튼이 서머 리그에서 보여준 모습은, 여차 하면 폴과 함께 코트에 나서서 "보조 볼핸들러"의 역할을 수행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특히 쏜튼의 경우, 과거 파고가 수행하던 역할을 그대로 이어받을 수 있는 유닛이라고 생각한다)

그 외에 최근 팀에 합류한 바비 브라운 역시 빠른 스피드와 드리블을 통한 페네트레이션을 주무기로 하는 공격형 선수다. 다리우스 송가일라 역시 공격에 강점을 보이는 선수이며, 아이크 디오구 역시 공격형 선수다.

09-10 시즌의 뉴올리언스는 보다 젋고 빠르고 공격적인 농구를 구사할 수 있는 팀이 되었다. 남은 것은 스캇 코치의 결단이다. 이번 시즌은 스캇과 뉴올리언스의 계약이 만료되는 해이다. 과연 스캇이 임기 마지막 시즌에 어떤 모습을 보일 것인지도 재미있는 관전 포인트라 할 수 있겠다. 평소처럼 베테랑 위주의 안전한 플레이를 펼칠 것인지, 과감하게 젊은 선수들을 기용하며 보다 에너지 넘치는 농구를 보여줄 것인지...

일단 최소한의 필요 요소들은 충족되었다. 09-10 시즌의 뉴올리언스는 보다 높이 뛰어오르고, 보다 빠르게 달릴 수 있는 팀이 되었다. 결국 모든 것은 스캇의 손에 달린 셈이다. 과연 우리는 '달리는 뉴올리언스'를 볼 수 있을까?


4. 마치며

09-10 시즌의 개막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전혀 새로운 '신상'팀이 되어 돌아올 뉴올리언스. 기대만큼 우려도 크고,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임은 틀림 없다. 하지만 한 때 샐러리 문제로 팀이 공중 분해 되는 것은 아닐까 노심 초사 하던 것에 비하면, 너무나 멋진 선수들과 함께 시즌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만으로도 이번 시즌은 뉴올리언스 팬들에게 충분히 즐거운 1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제 모든 걱정 근심은 접어두고, 즐거운 마음으로 시즌 개막을 기다려보자!

<
저작권자 ⓒ 뛰어(www.ddueh.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1984년 NBA 드래프트. 1순위로 지명된 선수는 포워드 같은 움직임을 선보이던 빅맨, 1순위 지명에 있어 의심의 여지가 없었던 하킴 올라주원이었다. 그리고 3순위로 지명된 선수는 엄청난 운동 능력의 만능가드, 훗날 농구의 신으로 불리우게 될 마이클 조던이었다. 이들 사이에 지명된 2순위 선수는? 훌륭한 높이를 가진 센터, 샘 보위였다. 그는 올라주원과 조던의 사이에 지명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필요 이상의 비난과 혹평에 시달려야 했다.

1993년 NBA 드래프트. 1순위로 지명된 선수는 가드 같은 움직임을 선보이던 빅맨, 1순위 지명에 있어 의심의 여지가 없었던 크리스 웨버였다. 그리고 3순위로 지명된 선수는 엄청난 운등 능력의 만능가드, 훗날 포스트 조던의 선두주자로 활약하게 될 앤퍼니 하더웨이였다. 이들 사이에 지명된 2순위 선수는?

그 역시 보위처럼, 아니 보위와 비교할 수 없을만큼 엄청난 높이를 가진 센터였다. 그 역시 보위처럼, 아니 보위와 비교할 수 없을만큼 엄청난 비웃음과 조롱에 시달리며 커리어를 이어가야했다. 물론 거기에는 부족했던 그의 농구 기량 탓도 있었겠지만, 보위와 비교할 수 없을만큼 '놀리기에 좋은 선수'였기 때문은 아닐까.

너무나 새하얀 피부, 깡마른 체구와 비정상적으로 큰 키, 부족한 근력, 그리고 그로 인해 필연적으로 수많은 스타 플레이어들의 하이라이트 필름에 찬조 출연했던, '인 마이 페이스'의 아이콘으로 불리우던 선수. 언제나 최선을 다해 코트 위를 달렸지만 우스꽝스러운 놀림거리가 되기 일쑤였던, 몇 번이고 튕겨져나간 다음에도 상대 선수가 슬램 덩크를 시도할 때면 어김 없이 슛을 쳐내기위해 맞서 싸웠던 선수.

이번에 만나볼 그 때 그 선수는 숀 브래들리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독일에서 날아온 유타州의 몰몬교도 장대 인간

브래들리의 고향은 미국이 아닌 독일이다. 놀랍지 않은가? 그 누구도 NBA에서 활약하던 용병을 이야기 할 때 브래들리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는 독일 국가대표 농구팀에서 활약하기도 했는데 말이다!) 독일에서 태어난 그는 유타주에 정착을 하면서 미국 생활을 시작하고 브리검 영 대학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무려 227cm에 육박하는 신장을 가진 그가 농구를 접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으며, 1부 리그 대학이 아닌 브리검 영 대학에서의 그는 엄청난 높이만으로도 팀에서 주요 선수로 활약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그가 신입생이던 1990-1991 시즌에는 평균 14.8득점, 7.7리바운드와 함께 5.21블록슛을 기록하는데, 이는 전미 1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으며 브래들리는 NCAA 역사상 가장 많은 단일 시즌 블록슛을 기록한 신입생으로 이름을 남긴다. 게다가 그의 높이에 힘을 얻은 브리검 영 대한은 NCAA 토너먼트에까지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 시기의 강렬한 임팩트는 훗날 그가 NBA에 데뷔를 할 수 있게된 계기가 된다.

재미있는 것은 그 이후 더 이상 대학 무대에서 농구 경험을 쌓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곧장 NBA에 데뷔한 것도 아니었다. 독실한 몰몬교도였던 브래들리는 2년간 몰몬교 선교사로써 호주를 향해 포교 활동을 떠난 것이다. 이제 막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한, 농구 선수로써 한참 성장가도를 달려야 할 시기에 그는 종교적 신념을 위해 과감히 모든 것을 등지고 떠났다.

2년간 농구 코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높이는 엄청난 매력으로 다가왔다. 결국 1993년 드래프트 2순위. 무려 앤퍼니 하더웨이를 뒤로 한 채 필라델피아에 의해 그 이름이 호명되었다.

그의 커리어는 시작부터 '브래들리'스러웠다.


방황의 프로 초년기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제 아무리 기량이 부족하다 한들 227cm 라는 신장이 있는한 그를 얕볼 수는 없었다. 최소한 슛블록커로써의 위력만큼은 쉽게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루키 시즌 나름의 기대를 받으며 주전 센터로 활약하던 그는 평균 10.3득점 6.2리바운드 3블록슛을 기록하며 순항하고 있었다. 하지만 49경기째 연속 출장을 하고 있던 그는 하비 그랜트와 충돌하며 무릎 부상을 당하게 되었고, 그렇게 허무하게 루키 시즌을 마무리해야했다.

비록 루키 세컨드 팀에 이름을 올리긴 했지만 그의 앞뒤로 이름이 호명된 웨버와 하더웨이가 연일 맹활약을 하던 것에 비해 초라한 성과를 거두는데 그쳐야했다. 팬들은 벌써부터 필라델피아의 드래프트를 비난하기 시작했고 브래들리에게 조소를 보내기 시작했다. 팬들은 경기당 3개의 블록슛을 기록하던 브래들리 보다는 루키 시즌 두 번째 경기에서 샤킬 오닐에게 연신 튕겨져나가던 브래들리만을 기억할 뿐이었다.

프로 두 번째 시즌, 브래들리는 82경기에 모두 출장하며 평균 3.3블록슛을 기록했고 총 274개의 블록슛을 기록하며 필라델피아 단일 시즌 프랜차이즈 최다 블록슛을 기록한 선수로 이름을 남긴다. 그러나 팀의 성적은 계속해서 하위권을 전전하고 있었으며, 브래들리도 시즌 파울 1위(338개)를 기록했을만큼 파울 트러블에 고생을 했다. 18번의 파울 아웃, 심각한 파울 트러블로 인해 골밑을 지킬 수 없는 수비형 센터에게 돌아오는 것은 또 다시 조롱뿐이었다.

세 번째 시즌, 그는 결국 짧았던 필라델피아 생활을 청산하고 뉴저지로 둥지를 옮긴다. 뉴저지에서의 첫 시즌에는 팀의 주전 센터로 활약하며 평균 12.5득점 3.7블록슛을 기록했다. 블록슛 부문 리그 2위를 기록하는가 하면 생애 최초의 트리플 더블에도 성공하며 조금씩 자리를 잡는가 싶었지만 이내 또 다시 트레이드에 휩쓸리게 된다. 애초에 브래들리를 트레이드 하던 당시 맞상대로 데릭 콜먼 등을 제시했던 뉴저지는 리빌딩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1996-1997 시즌, 짐 잭슨 등 무려 9명이 팀을 옮긴 대형 트레이드에 휩쓸려 댈러스로까지 흘러간 브래들리였다.


기회의 땅, 댈러스 매버릭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댈러스로의 트레이드는 브래들리에게 있어 커다란 기회였다. 출발부터 산뜻했다. 트레이드로 시즌 중도에 합류하긴 했지만 꾸준히 활약하며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개인 스탯 시즌 1위를 기록한다. 평균 3.4개의 블록슛으로 해당 부문 1위를 기록한 것. 이것은 댈러스 프랜차이즈 역사상 처음으로 개인 스탯 시즌 1위를 달성한 것으로, 브래들리는 또 한 번 역사에 자그마한 이름을 남기게 된다.

댈러스 소속으로 플레이했던 33경기에서는 무려 14.6득점을 기록하며 공격에서의 공헌도도 무시할 수 없었고 야투율도 46%에 육박하는가 하면 출장 시간도 32분을 훌쩍 넘기며 생애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1996-1997 시즌은 그의 커리어 하이 시즌으로 기록된다.

이 후 1997-1998 시즌에도 브래들리는 NBA의 역사에 본인의 이름을 각인시킨다. 1998년 4월 7일 포틀랜드와의 경기에서 22득점 22리바운드 13블록슛을 기록한 것이다. 한 경기에서 20+득점 20+리바운드 10+블록슛을 기록한 것은 리그 역사상 브래들리를 포함해 단 5명 뿐이다. (다른 4명의 이름은 엘빈 헤이즈, 카림 압둘 자바, 하킴 올라주원, 샤킬 오닐이라고 한다.) 당시 그가 기록한 13개의 블록슛은 본인의 한 경기 최다 기록인 동시에 댈러스 프랜차이즈 역사상 한 경기 최다 블록슛으로 기록된다.

그러나 댈러스가 브래들리에게 기회의 땅이 된 것은 1998-1999 시즌부터였다. 브래들리와 같이 독일에서 날아온 장신의 선수가 댈러스에 합류했으니 그의 이름을 덕 노비츠키. 독일에서 막 미국에 도착한 노비츠키에게 브래들리의 존재는 큰 형과 같은 것이었다. 훗날 댈러스 최고의 에이스 플레이어이자 리그 MVP로 성장할 노비츠키의 NBA 적응에 있어 큰 역할을 했음을 부인할 수 있는 이는 없을거라 생각한다. 실제로 브래들리는 굉장히 훌륭한 라커룸 메이트였다.

98-99 시즌 댈러스를 찾은 새 식구는 노비츠키뿐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캐나다 출신의 가드가 그 주인공으로 역시 훗날 리그 MVP로 이름을 남길 스티브 내쉬가 그 주인공이었다. 노비츠키보다 한 시즌 앞서 1997-1998 시즌 중반부터 팀의 지휘봉을 잡은 돈 넬슨의 존재 역시 브래들리에겐 호재였다. 엽기적인 전술을 구사하는 것으로 유명한 넬슨과 브래들리라는 유니크 유닛의 궁합은 종종 기대 이상의 결과를 낳기도 했다.

노비츠키, 내쉬, 넬슨과 함께 '브래들리의 댈러스'는 조금씩 강팀의 반열에 오르기 시작한다. 내쉬가 MVP의 떡잎을 보이기 시작한 2000-2001 시즌. 댈러스는 내쉬의 스피드와 노비츠키의 외곽포를 중심으로 한 런앤건 농구를 시작했고 스피드에 약점이 있었던 브래들리는 조금씩 벤치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래들리는 82경기에 모두 모습을 드러내며 평균 2.8개의 블록슛을 기록, 여전히 위력적인 슛블록커로 활약했다.

그리고 댈러스는 무려 11년만에 플레이오프 무대에 진출하는 쾌거를 맛봤으며 이는 브래들리 커리어 사상 최초의 플레이오프 진출이기도 했다. 1라운드에서 제2의 고향과도 같은 유타를 상대하게 된 브래들리는 넬슨의 깜짝 기용으로 칼 말론을 수비하기도 했는데 특별히 높이의 강점을 갖고 있지 않았던 말론이 브래들리를 상대로 공격을 시도하는 모습은 아직도 인상적으로 머릿속에 남아있다.

비록 2라운드에서 샌안토니오에게 무릎을 꿇고 말았지만 댈러스는 분명 브래들리에게 기회의 땅이 되었다.


시련의 계절

2000-2001 시즌 이 후 브래들리의 농구 인생에 본격적인 굴곡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시즌 종료 후 여름에는 팀메이트인 노비츠키와 함께 독일 국가대표로 활약하며 팀을 유럽 4위에 올려놓았으며 댈러스와의 재계약에도 성공한다. 하늘을 찌를 것 같던 그의 기세는 부상이라는 암초를 만나 허무하게 무너져내린다. 시한 폭탄과도 같았던 무릎이 말썽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팀은 라예프 라프렌츠라는 새로운 주전 센터를 영입했고 브래들리는 생애 처음으로 2개 미만의 평균 블록슛을 기록한다. 국가 대표팀의 영예를 맛보고 시작된 그의 2001-2002 시즌은 너무나 허무하게 흘러가버렸다.

2002-2003 시즌, 브래들리에게는 또 다시 기회가 찾아온다. 공격만으로는 우승을 할 수 없다는 계산 아래 팀의 수비를 재정비하기 시작한 넬슨은 블록슛 능력이 뛰어난 브래들리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경쟁자 라프렌츠가 부상의 늪에 빠지는 호재(?)를 맡기도 했다. 결국 01-02 시즌 무려 81경기에 출장하며 다시금 2.1개의 블록슛을 기록, 댈러스 팀디펜스의 주축으로 맹활약했다.

그러나 환희도 잠시. 그의 무릎은 어느 덧 고질병이 되어있었고 기대했던 2003-2004 시즌은 다시금 부상에 시달려야 했다. 애초에 출장 자체가 힘에 겨웠기에 팀에서의 비중이 줄어든 것은 당연지사. 당시 댈러스는 엄청난 센터난에 허덕이고 있었지만 브래들리는 더이상 과거와 같은 도움을 주지 못했다.

어쩌면 그 해, 브래들리는 "은퇴"라는 단어를 머릿속에서 떠올리기 시작했을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순간도 '브래들리'처럼

2004-2005 시즌. 더이상 브래들리에게 팀의 주력 슛블록커로 활약해주기를 기대하는 이는 없었다. '남바투' 에릭 댐피어의 백업으로 경기에 나선 브래들리는 총 77경기에 출장하며 평균 11.5분의 플레잉 타임 동안 0.8개의 블록슛을 기록한다.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평균 1개 미만의 블록슛 수치였다.

댈러스는 더 이상 브래들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강팀이었다. 무려 58승을 기록한 댈러스는 브래들리 없이도 쉽게 플레이오프 무대에 진출했고 1라운드에서 트레이시 맥그레디가 이끄는 휴스턴을 만나 4승 3패로 2라운드 진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2라운드에서 과거의 동지였던 내쉬가 이끄는 피닉스에게 일격을 당하며 시리즈 스코어 2-4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브래들리는 은퇴를 선언했다. 생애 마지막 플레이오프에서 그의 이름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그의 마지막이 된 경기는 2라운드 6차전이 아니었다. 브래들리의 시즌은 시리즈 4차전을 끝으로 이미 막을 내린 것이었다.

생애 마지막 경기에서 그는 단 2분을 출장하며 1개의 공격 리바운드와 1개의 수비 리바운드를 기록했고, 1개의 야투를 시도했으나 성공시키진 못했다. 상징과도 같았던 블록슛을 기록하기에는 주어진 시간이 너무나 모자랐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하지만 사람들이 기억하는 브래들리의 마지막 장면은 전혀 다른 것이다. 1라운드 휴스턴과의 경기에서 하늘을 날아오른 맥그레디에게 엄청난 인 유어 페이스를 당하며 "2005 플레이오프 최고의 하이라이트"에 조연으로 출연했던 것이 사람들의 뇌리에 기억된 브래들리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리그 역사상 열 손가락에 꼽히는 최고급 전문 슛블록커로 활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누구도 그의 블록슛을 기억하지 않는다. 거인증을 의심케하는 신장을 가진 선수들 중에서 가장 탁월한 기동력을 가진 선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누구도 그만의 질주를 기억하지 않는다. 부족한 근력으로 인해 자리는 내어줄 지언정, 긴 팔만은 끝끝내 상대 선수의 슛을 향해 휘두르던 그의 투지를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자신보다 훨씬 작은 선수들에게 무참히 인 유어 페이스를 당하며 힘없이 쓰러지던 브래들리의 모습 뿐이다. 쓰러지자마자 곧바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 또 다시 블록슛을 시도하던 그의 모습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맥그레디에게 당한 덩크슛으로 마지막 순간을 각인시키며 코트를 떠난 것은 그래서 너무나도 '브래들리'스러운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네이트 로빈슨이 드와잇 하워드를 뛰어넘는 모습을 보며 환호성을 지른다. 나보다도 작은 선수가 당당히 NBA 무대를 누비는 모습에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단신의 선수가 블록슛을 당하거나 코트를 나뒹굴때면 안타까움의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반대로, 필요 이상의 큰 키를 가짐으로써 힘들어했던 선수들에 대해서는 유달리 박한 평가를 내린다. 마뉴트 볼의 가느다란 팔 다리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고, 조지 무레션의 얼굴을 보며 조소를 날렸다.

브래들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스스로를 가누기에도 힘겨울만큼 필요 이상으로 컸던 몸을 이끌고 세계 제일의 빅맨들을 상대해야 했던 그에게 돌아온 것은 놀림과 비웃음, 인 마이 페이스의 아이콘이라는 우스꽝스러운 별명 뿐이었다.

그는 분명 어색하고 우스운 모습의 선수였다. 하지만 브래들리는 단지 그것만으로 평가하기엔 아까운, 훌륭한 전사였다. 막을 수 없을 것을 알면서도 손을 뻗었고, 밀려나게 될 것을 알면서도 자세를 낮추던 그는 훌륭한 전사였다.

브래들리는 은퇴 이 후 유타로 돌아가 West Ridge Academy 에서 청소년 상담 교사로 활약하고 있다. 그는 은퇴 후에도 자신보다 작고 어린 친구들 백업하고 그들을 위한 블록킹에 열중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 역시도 너무나 '브래들리'스럽지 않은가?

오늘의 주인공, 숀 브래들리였다.

Shawn Bradley (1994 - 2002)

사용자 삽입 이미지











생애 통산 832경기 출장 (484선발)
평균 8.1득점, 6.3리바운드, 2.55블록슛(역대 11위)

< 저작권자 ⓒ 뛰어(www.ddueh.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내가 처음 NBA를 접하게 된 것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통해서였다. 이 후 1992-93 시즌부터 지금까지 NBA를 즐기고 있다. 당시 아무런 사전 지식이 없던 상태에서 처음 NBA를 접했던 탓에 몇 몇 팀들에 대해 오해 아닌 오해를 했던 경우가 있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LA 레이커스였다.
당시 매직 존슨 은퇴 직 후의,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내던 그들이었으나 내게는 그저 그런 중위권 팀으로 보일 뿐이었던 것이다. 1년의 시간이 지난 뒤에서야 레이커스가 전통의 명문 구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레이커스의 경기 비디오 테입을 구하게 된 나는 한 명의 작은 선수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그는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경기장을 누볐다. 팀은 패배할 지언정 자신만은 패배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마저 느껴지는 듯 했다. 암흑기에 빠진 명문 구단을 홀로 일으켜세우리라 말하는 것 같았다. 얼마 뒤 그 선수의 별명이 "the Quick" 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 강렬함은 배가 되어 다가왔다.

1990년대 중반. 레이커스가 암흑기를 보내던 시절, 한 줄기 빛과도 같은 활약을 펼치던 선수. 그러나 팀이 전력을 재정비하여 다시금 챔피언 반지를 손에 넣을 무렵, 플레이오프 무대에 오르지도 못한 타 팀의 유니폼을 입고서 친정팀의 우승 퍼레이드를 TV로 지켜봐야만 했던 그 선수.

이번에 함께 만나볼 그 때 그 선수는 바로 닉 반 엑셀이다.


악동의 등장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닉 반 엑셀은 신시내티 대학 시절 부터 훌륭한 활약을 보였던 될 성 부른 떡잎이었다. 대학에서의 마지막 시즌에는 평균 18.3점 4.5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신시내티를 파이널 4 무대로까지 이끌었고 여세를 몰아 1993년 NBA 드래프트에 참가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시작이 그리 순탄하지는 못했다. 당시 올 아메리칸 3rd 팀에 이름을 올릴 만큼 후한 평가를 받고 있던 반 엑셀이었으나 워크 아웃 캠프에서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떨어뜨리는 행동을 보인 것이다. 불성실한 태도로 구단 관계자들과의 인터뷰에 임했고, 컨디션 난조를 이유로 캠프에 불참하기 일쑤였다. 결국 거만하며 예의가 없어 '프로 선수로 부적합한 자세를 가진 선수'라는 낙인이 찍혔다.
결국 본인이 가진 실력과 가능성에 비해 형편없는 드래프트 순위인 37번(2라운드 10번) 픽으로 LA 레이커스의 유니폼을 입게 됐다.

훗날, 실제로 커리어 동안 불성실한 마인드가 문제시되며 훌륭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 가치를 인정 받지 못하는 선수로 성장하는 반 엑셀은 그 등장부터 악동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Nick the Quick

하지만 그의 실력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데뷔 전에서 주전 멤버로 출장해 23득점 8어시스트를 기록, 경기를 접수했다.
이 후로도 그의 활약은 계속 되었다. 1993-94 시즌 동안 그는 신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30분 이상의 플레잉 타임을 기록하며 81경기에 출장했고, 그 중 80경기에 선발 멤버로 코트에 나섰을만큼 그를 향한 팀의 신뢰도 매우 높았다. 1994년 루키 세컨드 팀에 이름을 올리며 성공적인 첫 시즌을 보낸 반 엑셀은 매직 존슨이 떠난 레이커스의 새로운 희망으로 각광 받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994년, 드래프트를 통해 팀에 합류한 에디 존스와 함께 백코트를 구성하며 쇼타임 레이커스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당시 피닉스로부터 이적해 온 세드릭 세발로스까지 합세한 레이커스의 퍼리미터 공격진은 런앤건 공격을 주도하며 조금씩 과거의 영광을 되찾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한 지 단 1년 만에 다시금 5번 시드를 차지하며 플레이오프 무대로 복귀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두 번째 시즌에 임하고 있었던 풋내기 반 엑셀은 80경기에 모두 선발 출장해 16.9득점, 8.3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맹활약을 펼쳤다.

반 엑셀은 전형적인 공격형 포인트 가드였다. 현란한 개인기를 앞세워 스스로 득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전광석화 같은 스피드와 유려한 볼핸들링을 이용한 돌파는 물론이고, 비교적 작은 체구였음에도 포스트 업을 이용한 공격에도 능했던 선수였다. 전방위에서 쏘아 올리는 점퍼와 외곽슛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특히 훌륭한 클러치 플레이어이기도 했던 반 엑셀은 중요한 순간 승부의 물줄기를 바꾸는 3점슛을 종종 터뜨리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가 단순히 슛만을 즐기던 포인트 가드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그는 화려한 패싱 스킬을 가진 선수였으며, 플레이메이킹 능력도 준수한 수준이어서 그야말로 훌륭한 포인트 가드로 활약할 수 있었다. 또한 화려한 플레이 스타일에 비해 많은 실책을 저지르는 선수도 아니었기에 그야말로 쇼타임 레이커스에 가장 들어맞는 선수였다고 할 수 있겠다. (커리어 평균 어시스트 6.6개, 커리어 평균 실책 2.1개)

순발력이 좋고 높은 BQ를 가진 선수였기에 좋은 수비수가 될 수 있는 자질을 충분히 가진 선수이기도 했으나 수비에 있어서는 공격에서만큼 공을 들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가지고 있는 능력에 비해 평이한 수비수였던 그는 특히 팀 디펜스에 녹아들지 못했고, 패싱 레인을 읽는 것에 미숙해 빠른 손과 발을 가졌음에도 많은 스틸을 기록하지는 못했다. (커리어 평균 0.8개)

더해서 슈팅에 있어서 다소 기복이 있는 편이었고, 돌출행동을 일으키는 등 감정의 변화가 심한 선수였기에 컨트롤 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던 선수였다.

하지만 천부적인 농구 센스, 코트 위에서만큼은 강력한 빛을 발했던 리더쉽, 마법 같은 패스와 넓은 코트비전을 앞세워 레이커스를 이끌어갔다. 팬들은 반 엑셀이 제리 웨스트, 매직 존슨의 뒤를 잇는 레이커스의 에이스 가드로 성장해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 그를 가리켜 팬들은 "Nick the Quick" 이라는 멋진 애칭까지 붙여주었다. 반 엑셀과 레이커스의 미래는 황금빛으로 가득할 것만 같아 보였다.


굴러들어온 돌, 반 엑셀을 밀어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후 레이커스는 조금씩 과거의 명성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한다. 1995-96 시즌 반 엑셀은 경기 중 판정에 거칠게 항의하다 심판을 떠밀게 되고, 출장 정지 징계를 받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다. 본인의 개인 성적은 다소 하락했으나 레이커스는 반 엑셀 데뷔 이 후 처음으로 50승 고지를 돌파하는 등 (53승) 성과를 거둔다. 그러나 홈코트 어드밴티지를 가지고 돌입한 플레이오프에서 1라운드 탈락이라는 기대 이하의 성적에 그친다.

1996-97 시즌을 앞둔 레이커스는 대대적인 전력 재편을 감행한다. 자유 계약 선수로 괴물 센터 샤킬 오닐을 영입했고, 그 전까지 팀의 주전 센터로 활약하던 블라데 디바치를 고졸 신인 코비 브라이언트와 트레이드 했다. 레이커스 팬들은 공격적인 팀의 행보에 열광했지만, 새로운 동료들을 바라보는 반 엑셀의 시선은 그리 편치만은 않아 보였다.
기존에 호흡을 함께 하던 에디 존스, 세드릭 세발로스의 경우 볼을 소유하는 시간이 적은 선수들이었기에 공에 대한 욕심이 많은 반 엑셀과 큰 무리 없이 조화를 이룰 수 있었으나 새로 가세한 오닐의 경우는 물론이고 풋내기로 밖에 보이지 않던 브라이언트마저 공에 대한 욕심이 강한 선수들이었다. 스스로를 레이커스 최고의 선수라 생각했던 반 엑셀로써는 '굴러들어온 돌'들이 좋게 보일리 만무했다.

상황을 악화시킨 것은 다름 아닌 팀의 감독으로 부임한 델 해리스였다. 주도권 싸움으로 묘한 팀원들의 분위기를 다독거리지는 못할 지언정, 선수단을 장악하는데 실패했고, 되레 특정 선수를 편애하는 모습까지 보이며 반 엑셀을 포함한 몇 몇 선수들의 불만을 샀다. 성격이 불같고 자존심이 강했던 반 엑셀과의 불화는 예정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리스와 반 엑셀 사이에 감정의 골은 깊어져만 갔고, 결국 1997-98 시즌을 마지막으로 반 엑셀은 LA를 떠나야했다. 덴버의 토니 배티와 당시 신인이었던 타이론 루에 대한 권리를 패키지로 하여 반 엑셀과의 2:1 트레이드가 성사된 것이다. 포스트 매직 존슨의 시대를 열어갈 것이라 기대를 받았던 반 엑셀의 퇴장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일어났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듬해인 1998-99 시즌이 시작되고 채 한달도 되지 않아 반 엑셀을 떠나게 만든 장본인, 해리스 코치가 경질된 것이다.


레이커스 왕조의 부활, "Nick the Quick" 은 어디에?

사용자 삽입 이미지
1999-2000 시즌, 레이커스는 오닐과 브라이언트를 앞세워 정상의 자리를 탈환했다. 하지만 반 엑셀은 더 이상 레이커스의 선수가 아니었다. 그는 덴버의 유니폼을 입고 플레이하고 있었다.

그가 처음 덴버에 합류했던 1998-99 시즌, 덴버는 14승을 기록하는데 그친 최약체 팀이었다. 밑바닥에서 출발한 반 엑셀은 안토니오 맥다이스, 라예프 라프렌츠 등과 함께 팀의 성적을 조금씩 끌어올렸다. 이 후 덴버는 35승, 40승을 차례로 기록하며 가파른 상승 곡선을 그렸다.
그러나 반 엑셀의 마음은 결코 즐겁지 않았다. 같은 기간 동안 자신의 팀이라 생각했던 레이커스가 2연속 우승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우승을 노릴 수 있는 팀으로의 이적을 원했고, 2001-02 시즌 도중 댈러스로 둥지를 옮겼다. 당시 댈러스는 덕 노비츠키, 스티브 내쉬, 마이클 핀리로 이어지는 삼각 편대가 이끌어가던 팀이었다. 내쉬의 존재로 인해 반 엑셀은 데뷔 이 후 처음으로 주전 가드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우승 하나만을 바라보며 자존심을 굽히고 식스맨으로 대활약했던 당시의 반 엑셀은 어딘지 처절함마저 느껴졌다.
그러나 댈러스는 크리스 웨버, 마이크 비비 등이 이끌던 새크라멘토에 의해 플레이오프 2라운드에서 시즌을 종료해야 했고 설상가상으로 친정팀인 레이커스는 3연속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쌓아올리며 반 엑셀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했다.
2002-03 시즌 역시 팀의 식스맨으로 최선을 다해보지만,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샌안토니오를 만나 또 한 번 우승의 꿈이 물거품으로 날아가버린다.

반 엑셀은 2003-04 시즌을 앞두고 골든스테이트와 댈러스의 5:4 트레이드에 패키지로 포함되어 골든스테이트로 둥지를 옮겨야 했다. 비록 약체팀이라고는 해도, 다시 한 번 주전 멤버로 발돋움 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으나 부상으로 인해 시즌을 거의 모두 날려버렸다. 단 39경기에 출장했던 것을 마지막으로 짧았던 골든스테이트에서의 시간은 끝이 나버렸다.

이 후 2004-05 시즌 포틀랜드를 거쳐 마지막으로 우승을 노리며 샌안토니오로 합류하지만
안타깝게도 2005-06 시즌은 샌안토니오의 안식년이었고, 결국 쓸쓸히 커리어를 마감해야만 했다.


"Van Excellent"?  "半 Excellent"...

레이커스가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낼 무렵, 단신의 몸으로 한 줄기 빛과 같은 활약을 보여주던 그는 곱상한 외모와 화려한 플레이로 LA의 새로운 스타가 될 가능성이 충분했다. 그런 그를 보며 팬들은 수많은 애칭을 붙여주었다. 반 엑셀은 가장 유명한 애칭인 "Nick the Quick" 못지 않은 멋진 애칭이 한 가지 더 있었다. 그것은 바로 "Van Excellent". 그의 이름을 재치있게 사용한 애칭이다. 하지만 결국 반 엑셀의 LA 생활은 Excellent 하지 못했다.

화려하게 데뷔를 하고, 암흑기에 빠진 팀에게 구원의 손길이 되어줬던 그였으나 결국 드높은 콧대와 말썽 유전자가 가득했던 성격으로 인해 레이커스와의 원치 않은 작별을 고해야했다.
만약 그가 보다 성숙한 마인드를 가진 선수였다면, 아니 볼에 대한 욕심만 조금 덜한 선수였다면 어땠을까? 뉴 밀레니엄 레이커스 왕조의 멤버로 우승에 큰 공헌을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결국 그는 스스로를 무너뜨리고 말았다. 데뷔를 앞두고 드래프트 캠프에서 스스로의 가치를 깎아내린 것처럼 말이다.

너무나 화려했던 커리어의 초창기에는 팀이 그를 받쳐주지 못했고, 훗날 팀이 그를 받쳐줄 만큼 성장했을 무렵에는 본인의 성숙하지 못한 태도가 앞을 가로막았다. 결국 반 엑셀은 "Van Excellent" 가 아닌 "半 Excellent" 에 그쳐야만 했다. 누구보다 뛰어난 선수였던 스스로를 끝내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의 주인공, 닉 반 엑셀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Nick Van Exel (1994-2006)

생애통산 880경기 출장(670선발)
평균 14.4득점, 2.9리바운드, 6.6어시스트, 32.9분 출장

< 저작권자 ⓒ 뛰어(www.ddueh.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NBA 정규 시즌 상반기 최고의 흥행 카드, 크리스마스 매치!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어느 덧 2008년의 크리스마스도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미국인들에게 크리스마스 연휴는 연중 가장 큰 축제 기간의 하나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 시기이다. 이는 NBA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다. 크리스마스에 펼쳐지는 ‘크리스마스 매치’는 NBA 정규 시즌 상반기의 최고 흥행 카드이다. 그렇기에 리그에서도 매년 크리스마스의 매치업 카드를 결정하는데 특별히 신경을 쓰고 있다.

크리스마스 매치에 초청을 받게 되는 팀들은 슈퍼스타가 포함되어 있음을 넘어 리그 전체에서 가장 흥행성이 높다고 평가되는 팀, 혹은 팬들의 이목을 가장 끌어당기는 라이벌전 등의 경우에 해당된다. 실제로 리그를 대표하는 슈퍼스타이나 상대적으로 흥행성이 떨어진다는 평을 받고 있는 샌안토니오의 팀 던컨은, 2008-2009시즌을 포함해 총 12번의 시즌을 보내는 동안 언제나처럼 리그의 지배자로 군림하고 있으나 크리스마스 매치 경험은 단 두 차례에 그치고 있다(2003년, 2005년). 반면 언제나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LA 레이커스의 경우 올 해 크리스마스에도 어김없이 모습을 드러내며 10년 연속 크리스마스 매치에 등장하고 있다(1999년~2008년).


그 때의 크리스마스를 기억하나요?


그렇다면 최근 NBA 팬들을 가장 가슴 설레게 했던 크리스마스 매치는 언제였을까? 신세대 NBA 팬들에게 가장 많이 추억되고 있는 크리스마스 매치는 역시 2003년에 있었던 클리블랜드와 올랜도의 경기가 아닐까.

당시 클리블랜드에는 괴물 신인 르브론 제임스가 데뷔하여 연일 멋진 활약을 보이고 있었고, 올랜도에는 마이클 조던 이 후 최초로 시즌 개인 평균 30득점의 벽을 무너뜨리며 리그 역사상 최연소 득점왕의 자리에 오른 트레이시 맥그레디가 버티고 있었다. 겁 없이 선배들에게 도전해오던 괴물 신인과 전년도 득점왕의 대결은 전 세계 NBA팬들의 이목을 끌기에 모자람이 없었고, 두 선수 역시 그 기대에 부족함이 없는 대활약을 펼쳤다.

2003년의 크리스마스, 처음 선전포고를 날린 선수는 제임스였다. 경기 시작과 동시에 오른쪽 베이스라인을 돌파하며 플로터로 첫 득점에 성공한 제임스는 곧이어 3점 슛까지 작렬시키며 연속 5득점을 기록했다. 상황이 이쯤 되자 맥그레디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어진 두 번의 공격에서 엄청난 슬램덩크를 연이어 터뜨리며 이 날의 명승부를 예고했다. 이 후부터 두 선수의 화려한 쇼다운이 펼쳐진다. 제임스가 맥그레디에게 가는 공을 뺏어내며 2연속 점프슛을 성공시키자 맥그레디는 곧바로 환상적인 공중동작을 뽐내며 득점에 성공했고, 제임스가 앨리웁 덩크를 터뜨리면 맥그레디는 정교한 외곽슛으로 맞불을 지폈다.

경기를 지켜보던 이들이 숨을 죽이며 바라보던 정면 승부의 최종 승자는 ‘선배’ 맥그레디였다. 맥그레디는 연장전까지 가는 대접전을 펼친 끝에 무려 50분을 플레이하며 41득점 11어시스트 8리바운드를 기록,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반면 제임스 역시 47분 동안 코트를 누비며 34득점 6어시스트로 부족함이 없는 활약을 펼쳤지만 크리스마스 매치라는 중압감에 긴장한 탓인지 루키 시즌 한 경기 최다인 8개의 실책을 기록했으며 몇 차례 에어볼을 던지는 등 평소 그답지 못했던 작은 실수로 패배의 쓴맛을 봐야만 했다.


NBA의 케빈, 크리스마스 최고의 단골 손님은?

이토록 화려한 슈퍼스타들의 대결이 펼쳐지는 크리스마스에 가장 많이 등장한 현역 선수는 누구일까? 앞서 크리스마스의 단골손님으로 언급했던 레이커스를 이끌고 있는 코비 브라이언트가 그 주인공이다.

브라이언트는 루키 시즌이었던 1996년 크리스마스에 첫 등장을 했으나 당시에는 단 5분을 플레이하는데 그쳤다. 팀의 주축으로 성장한 그는 1999년 다시금 크리스마스 매치에 복귀했는데 이 후 9년 연속 크리스마스의 부름을 받았으며 올 해 2008년에도 어김없이 크리스마스 매치에 등장하게 됨으로써 10년 연속 크리스마스 매치 출장이라는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하지만 그 성적은 그리 신통치 못한데, 루키 시즌의 것을 포함해 총 10번의 크리스마스 매치를 경험하는 동안 4승 6패를 기록하는데 그치고 있다.

특히 2003년부터 2006년에 걸쳐 기록한 크리스마스 3연패는 뼈아픈 것이었다. 가장 강력한 파트너였던 동시에 팀의 에이스 자리를 놓고 끊이지 않는 불화설을 양산했던 샤킬 오닐에게 당한 패배들이었기 때문이다.

리그 4연속 우승에 실패한 뒤 팀을 떠나게 된 오닐은 드웨인 웨이드와 함께 마이애미를 순식간에 리그 우승 후보로 끌어올렸다. 희비가 교차되는 두 선수의 라이벌전을 리그에서 놓칠 리 없었고 이는 레이커스와 마이애미의 3연속 크리스마스 매치라는 결과물을 낳게 되었다. 브라이언트는 2004년과 2005년에 각각 42득점과 37득점을 퍼부었지만 끝내 오닐을 무릎 꿇게 하진 못했다. 전성기를 지났다는 평가를 듣던 오닐이 유독 브라이언트와의 맞대결에서는 힘을 냈던 이유도 있었지만 그 옆에서 오닐을 보좌했던 웨이드의 맹활약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의 마지막 크리스마스 매치였던 2006년에는 오닐이 결장을 했는데, 오닐의 결장으로 동기부여가 되지 않았던 탓인지 브라이언트는 신인 시절의 크리스마스를 제외한 9번의 경기들 중 가장 적은 16득점에 그친 반면 어느덧 마이애미의 에이스로 우뚝 선 웨이드는 홀로 40득점을 기록하며 손쉬운 승리를 기록했다.


Happy Holiday! 크리스마스가 가장 즐거운 팀은?

그러면 그 동안 가장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보냈던 팀은 어떤 팀일까? 마이클 조던의 시카고? 매직 존슨의 레이커스? 래리 버드의 보스턴? 정답은 다소 의외인 포틀랜드다.

포틀랜드는 1972년 시애틀에게 3점차 승리를 기록한 이 후 2007년 시애틀에게 89-79의 승리를 거두며 크리스마스 12연승을 기록 중이다. 그들은 이번 2008년에도 댈러스와의 크리스마스 매치가 예정되어 있다. 과연 그들이 크리스마스 13연승을 기록할 수 있을까?
덧붙여 포틀랜드는 1983년 레이커스와의 크리스마스 매치에서 무려 141득점을 기록하며 크리스마스 최다 득점 팀의 영예마저 독차지했다.


산타 클로스의 선택을 받은 자, 누구인가?

이번에는 크리스마스가 가장 즐거웠던 선수에 대한 이야기다. 가장 먼저 머릿속을 스쳐가는 선수는 역시 조던. 조던은 총 6번의 크리스마스 매치 경험이 있는데 1986년 커리어 첫 번째 크리스마스 매치에서 뉴욕에게 패배를 당한 이 후 모든 경기에서 승리하며 5승 1패를 기록했다. 그러나 6번의 크리스마스 매치 동안 평균 28.3득점 8리바운드 4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다소 평범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쳤다.

그러나 진짜 산타의 선택을 받은 선수는 바로 그 옆에 있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조던의 영원한 파트너 스카티 피펜. 피펜은 총 7번의 크리스마스 매치를 치루며 단 한 차례의 패배도 기록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매치 승률 100%를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기억에 남는 피펜의 크리스마스 매치는 1994년 뉴욕과의 경기다. 조던의 충격적인 은퇴 발표 이 후 ‘타도 시카고’를 외치며 이를 갈고 있던 뉴욕과 크리스마스에 처음으로 맞대결을 하게 된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두 팀의 경기는 명승부로 이어졌고, 언제나 그랬듯이 승리의 여신은 시카고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연장까지 가는 접전 끝에 피펜은 자신이 단순한 ‘조력자’ 이상의 선수임을 스스로 증명했다. 무려 53분을 플레이하며 경기 최다인 36득점을 기록한 동시에 16개의 리바운드를 기록한 것이다. 뉴욕의 패트릭 유잉은 30득점 12리바운드로 맹활약했으나 ‘조력자’였던 존 스탁스가 단 8득점에 그치며 패배의 쓴맛을 봐야만 했다.


2008년의 크리스마스 메뉴

올 해 2008년의 크리스마스에는 총 다섯 경기가 준비되어 있다. 가장 큰 관심을 끄는 경기는 역시 전통의 라이벌이자 강력한 우승 후보들인 보스턴과 레이커스의 경기. 브라이언트의 10년 연속 크리스마스 매치이기도한 이 경기는 미리 보는 결승전이라 해도 무방한 만큼 치열한 접전이 예상된다.

동부 컨퍼런스의 새로운 라이벌 구도를 만들어가고 있는 워싱턴과 클리블랜드의 경기도 흥미진진하지만 워싱턴의 길버트 아레나스가 출장하지 못하는 탓에 기대만큼의 명승부는 나오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크리스마스 매치의 시작을 알리는 뉴올리언즈와 올랜도의 경기 역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크리스 폴과 드와잇 하워드라는, 리그의 미래를 짊어질 포인트 가드와 센터의 대결이 펼쳐질 이 경기는 신세대 NBA 팬들의 관심이 집중될 것으로 보인다.

폴과 하워드의 경기가 신세대 NBA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면 10년 이상 NBA를 지켜봐온 중견 팬들을 위한 경기도 준비되어 있다. 2000년대 초반을 양분했던 오닐과 던컨의 대결이자 대표적인 공격 팀과 수비 팀의 만남이기도 한 피닉스와 샌안토니오의 경기가 그것이다. 오닐과 던컨의 맞대결 말고도 마누 지노빌리와 아마레 스타더마이어의 득점 대결, 토니 파커와 스티브 내쉬의 만남 등 여러 가지 재미있는 요소들을 갖고 있는 경기이기에 결코 소외시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앞서 언급했듯 크리스마스 매치 13연승에 도전하는 포틀랜드와 이를 저지하려는 댈러스의 경기가 크리스마스 매치의 대미를 장식할 것이다.

과연 2008년 크리스마스에는 어떤 선수가 대활약을 할 지, 어떤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생겨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아! 크리스마스 매치는 시차로 인해 우리 시각으로 12월 26일에 방송 된다. 여자친구와의 약속으로 재미있는 경기를 놓칠까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 저작권자 ⓒ 뛰어(www.ddueh.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