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NBA를 접하게 된 것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통해서였다. 이 후 1992-93 시즌부터 지금까지 NBA를 즐기고 있다. 당시 아무런 사전 지식이 없던 상태에서 처음 NBA를 접했던 탓에 몇 몇 팀들에 대해 오해 아닌 오해를 했던 경우가 있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LA 레이커스였다.
당시 매직 존슨 은퇴 직 후의,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내던 그들이었으나 내게는 그저 그런 중위권 팀으로 보일 뿐이었던 것이다. 1년의 시간이 지난 뒤에서야 레이커스가 전통의 명문 구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레이커스의 경기 비디오 테입을 구하게 된 나는 한 명의 작은 선수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그는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경기장을 누볐다. 팀은 패배할 지언정 자신만은 패배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마저 느껴지는 듯 했다. 암흑기에 빠진 명문 구단을 홀로 일으켜세우리라 말하는 것 같았다. 얼마 뒤 그 선수의 별명이 "the Quick" 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 강렬함은 배가 되어 다가왔다.

1990년대 중반. 레이커스가 암흑기를 보내던 시절, 한 줄기 빛과도 같은 활약을 펼치던 선수. 그러나 팀이 전력을 재정비하여 다시금 챔피언 반지를 손에 넣을 무렵, 플레이오프 무대에 오르지도 못한 타 팀의 유니폼을 입고서 친정팀의 우승 퍼레이드를 TV로 지켜봐야만 했던 그 선수.

이번에 함께 만나볼 그 때 그 선수는 바로 닉 반 엑셀이다.


악동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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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 반 엑셀은 신시내티 대학 시절 부터 훌륭한 활약을 보였던 될 성 부른 떡잎이었다. 대학에서의 마지막 시즌에는 평균 18.3점 4.5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신시내티를 파이널 4 무대로까지 이끌었고 여세를 몰아 1993년 NBA 드래프트에 참가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시작이 그리 순탄하지는 못했다. 당시 올 아메리칸 3rd 팀에 이름을 올릴 만큼 후한 평가를 받고 있던 반 엑셀이었으나 워크 아웃 캠프에서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떨어뜨리는 행동을 보인 것이다. 불성실한 태도로 구단 관계자들과의 인터뷰에 임했고, 컨디션 난조를 이유로 캠프에 불참하기 일쑤였다. 결국 거만하며 예의가 없어 '프로 선수로 부적합한 자세를 가진 선수'라는 낙인이 찍혔다.
결국 본인이 가진 실력과 가능성에 비해 형편없는 드래프트 순위인 37번(2라운드 10번) 픽으로 LA 레이커스의 유니폼을 입게 됐다.

훗날, 실제로 커리어 동안 불성실한 마인드가 문제시되며 훌륭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 가치를 인정 받지 못하는 선수로 성장하는 반 엑셀은 그 등장부터 악동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Nick the Quick

하지만 그의 실력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데뷔 전에서 주전 멤버로 출장해 23득점 8어시스트를 기록, 경기를 접수했다.
이 후로도 그의 활약은 계속 되었다. 1993-94 시즌 동안 그는 신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30분 이상의 플레잉 타임을 기록하며 81경기에 출장했고, 그 중 80경기에 선발 멤버로 코트에 나섰을만큼 그를 향한 팀의 신뢰도 매우 높았다. 1994년 루키 세컨드 팀에 이름을 올리며 성공적인 첫 시즌을 보낸 반 엑셀은 매직 존슨이 떠난 레이커스의 새로운 희망으로 각광 받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994년, 드래프트를 통해 팀에 합류한 에디 존스와 함께 백코트를 구성하며 쇼타임 레이커스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당시 피닉스로부터 이적해 온 세드릭 세발로스까지 합세한 레이커스의 퍼리미터 공격진은 런앤건 공격을 주도하며 조금씩 과거의 영광을 되찾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한 지 단 1년 만에 다시금 5번 시드를 차지하며 플레이오프 무대로 복귀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두 번째 시즌에 임하고 있었던 풋내기 반 엑셀은 80경기에 모두 선발 출장해 16.9득점, 8.3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맹활약을 펼쳤다.

반 엑셀은 전형적인 공격형 포인트 가드였다. 현란한 개인기를 앞세워 스스로 득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전광석화 같은 스피드와 유려한 볼핸들링을 이용한 돌파는 물론이고, 비교적 작은 체구였음에도 포스트 업을 이용한 공격에도 능했던 선수였다. 전방위에서 쏘아 올리는 점퍼와 외곽슛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특히 훌륭한 클러치 플레이어이기도 했던 반 엑셀은 중요한 순간 승부의 물줄기를 바꾸는 3점슛을 종종 터뜨리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가 단순히 슛만을 즐기던 포인트 가드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그는 화려한 패싱 스킬을 가진 선수였으며, 플레이메이킹 능력도 준수한 수준이어서 그야말로 훌륭한 포인트 가드로 활약할 수 있었다. 또한 화려한 플레이 스타일에 비해 많은 실책을 저지르는 선수도 아니었기에 그야말로 쇼타임 레이커스에 가장 들어맞는 선수였다고 할 수 있겠다. (커리어 평균 어시스트 6.6개, 커리어 평균 실책 2.1개)

순발력이 좋고 높은 BQ를 가진 선수였기에 좋은 수비수가 될 수 있는 자질을 충분히 가진 선수이기도 했으나 수비에 있어서는 공격에서만큼 공을 들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가지고 있는 능력에 비해 평이한 수비수였던 그는 특히 팀 디펜스에 녹아들지 못했고, 패싱 레인을 읽는 것에 미숙해 빠른 손과 발을 가졌음에도 많은 스틸을 기록하지는 못했다. (커리어 평균 0.8개)

더해서 슈팅에 있어서 다소 기복이 있는 편이었고, 돌출행동을 일으키는 등 감정의 변화가 심한 선수였기에 컨트롤 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던 선수였다.

하지만 천부적인 농구 센스, 코트 위에서만큼은 강력한 빛을 발했던 리더쉽, 마법 같은 패스와 넓은 코트비전을 앞세워 레이커스를 이끌어갔다. 팬들은 반 엑셀이 제리 웨스트, 매직 존슨의 뒤를 잇는 레이커스의 에이스 가드로 성장해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 그를 가리켜 팬들은 "Nick the Quick" 이라는 멋진 애칭까지 붙여주었다. 반 엑셀과 레이커스의 미래는 황금빛으로 가득할 것만 같아 보였다.


굴러들어온 돌, 반 엑셀을 밀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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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후 레이커스는 조금씩 과거의 명성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한다. 1995-96 시즌 반 엑셀은 경기 중 판정에 거칠게 항의하다 심판을 떠밀게 되고, 출장 정지 징계를 받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다. 본인의 개인 성적은 다소 하락했으나 레이커스는 반 엑셀 데뷔 이 후 처음으로 50승 고지를 돌파하는 등 (53승) 성과를 거둔다. 그러나 홈코트 어드밴티지를 가지고 돌입한 플레이오프에서 1라운드 탈락이라는 기대 이하의 성적에 그친다.

1996-97 시즌을 앞둔 레이커스는 대대적인 전력 재편을 감행한다. 자유 계약 선수로 괴물 센터 샤킬 오닐을 영입했고, 그 전까지 팀의 주전 센터로 활약하던 블라데 디바치를 고졸 신인 코비 브라이언트와 트레이드 했다. 레이커스 팬들은 공격적인 팀의 행보에 열광했지만, 새로운 동료들을 바라보는 반 엑셀의 시선은 그리 편치만은 않아 보였다.
기존에 호흡을 함께 하던 에디 존스, 세드릭 세발로스의 경우 볼을 소유하는 시간이 적은 선수들이었기에 공에 대한 욕심이 많은 반 엑셀과 큰 무리 없이 조화를 이룰 수 있었으나 새로 가세한 오닐의 경우는 물론이고 풋내기로 밖에 보이지 않던 브라이언트마저 공에 대한 욕심이 강한 선수들이었다. 스스로를 레이커스 최고의 선수라 생각했던 반 엑셀로써는 '굴러들어온 돌'들이 좋게 보일리 만무했다.

상황을 악화시킨 것은 다름 아닌 팀의 감독으로 부임한 델 해리스였다. 주도권 싸움으로 묘한 팀원들의 분위기를 다독거리지는 못할 지언정, 선수단을 장악하는데 실패했고, 되레 특정 선수를 편애하는 모습까지 보이며 반 엑셀을 포함한 몇 몇 선수들의 불만을 샀다. 성격이 불같고 자존심이 강했던 반 엑셀과의 불화는 예정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리스와 반 엑셀 사이에 감정의 골은 깊어져만 갔고, 결국 1997-98 시즌을 마지막으로 반 엑셀은 LA를 떠나야했다. 덴버의 토니 배티와 당시 신인이었던 타이론 루에 대한 권리를 패키지로 하여 반 엑셀과의 2:1 트레이드가 성사된 것이다. 포스트 매직 존슨의 시대를 열어갈 것이라 기대를 받았던 반 엑셀의 퇴장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일어났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듬해인 1998-99 시즌이 시작되고 채 한달도 되지 않아 반 엑셀을 떠나게 만든 장본인, 해리스 코치가 경질된 것이다.


레이커스 왕조의 부활, "Nick the Quick" 은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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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2000 시즌, 레이커스는 오닐과 브라이언트를 앞세워 정상의 자리를 탈환했다. 하지만 반 엑셀은 더 이상 레이커스의 선수가 아니었다. 그는 덴버의 유니폼을 입고 플레이하고 있었다.

그가 처음 덴버에 합류했던 1998-99 시즌, 덴버는 14승을 기록하는데 그친 최약체 팀이었다. 밑바닥에서 출발한 반 엑셀은 안토니오 맥다이스, 라예프 라프렌츠 등과 함께 팀의 성적을 조금씩 끌어올렸다. 이 후 덴버는 35승, 40승을 차례로 기록하며 가파른 상승 곡선을 그렸다.
그러나 반 엑셀의 마음은 결코 즐겁지 않았다. 같은 기간 동안 자신의 팀이라 생각했던 레이커스가 2연속 우승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우승을 노릴 수 있는 팀으로의 이적을 원했고, 2001-02 시즌 도중 댈러스로 둥지를 옮겼다. 당시 댈러스는 덕 노비츠키, 스티브 내쉬, 마이클 핀리로 이어지는 삼각 편대가 이끌어가던 팀이었다. 내쉬의 존재로 인해 반 엑셀은 데뷔 이 후 처음으로 주전 가드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우승 하나만을 바라보며 자존심을 굽히고 식스맨으로 대활약했던 당시의 반 엑셀은 어딘지 처절함마저 느껴졌다.
그러나 댈러스는 크리스 웨버, 마이크 비비 등이 이끌던 새크라멘토에 의해 플레이오프 2라운드에서 시즌을 종료해야 했고 설상가상으로 친정팀인 레이커스는 3연속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쌓아올리며 반 엑셀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했다.
2002-03 시즌 역시 팀의 식스맨으로 최선을 다해보지만,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샌안토니오를 만나 또 한 번 우승의 꿈이 물거품으로 날아가버린다.

반 엑셀은 2003-04 시즌을 앞두고 골든스테이트와 댈러스의 5:4 트레이드에 패키지로 포함되어 골든스테이트로 둥지를 옮겨야 했다. 비록 약체팀이라고는 해도, 다시 한 번 주전 멤버로 발돋움 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으나 부상으로 인해 시즌을 거의 모두 날려버렸다. 단 39경기에 출장했던 것을 마지막으로 짧았던 골든스테이트에서의 시간은 끝이 나버렸다.

이 후 2004-05 시즌 포틀랜드를 거쳐 마지막으로 우승을 노리며 샌안토니오로 합류하지만
안타깝게도 2005-06 시즌은 샌안토니오의 안식년이었고, 결국 쓸쓸히 커리어를 마감해야만 했다.


"Van Excellent"?  "半 Excellent"...

레이커스가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낼 무렵, 단신의 몸으로 한 줄기 빛과 같은 활약을 보여주던 그는 곱상한 외모와 화려한 플레이로 LA의 새로운 스타가 될 가능성이 충분했다. 그런 그를 보며 팬들은 수많은 애칭을 붙여주었다. 반 엑셀은 가장 유명한 애칭인 "Nick the Quick" 못지 않은 멋진 애칭이 한 가지 더 있었다. 그것은 바로 "Van Excellent". 그의 이름을 재치있게 사용한 애칭이다. 하지만 결국 반 엑셀의 LA 생활은 Excellent 하지 못했다.

화려하게 데뷔를 하고, 암흑기에 빠진 팀에게 구원의 손길이 되어줬던 그였으나 결국 드높은 콧대와 말썽 유전자가 가득했던 성격으로 인해 레이커스와의 원치 않은 작별을 고해야했다.
만약 그가 보다 성숙한 마인드를 가진 선수였다면, 아니 볼에 대한 욕심만 조금 덜한 선수였다면 어땠을까? 뉴 밀레니엄 레이커스 왕조의 멤버로 우승에 큰 공헌을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결국 그는 스스로를 무너뜨리고 말았다. 데뷔를 앞두고 드래프트 캠프에서 스스로의 가치를 깎아내린 것처럼 말이다.

너무나 화려했던 커리어의 초창기에는 팀이 그를 받쳐주지 못했고, 훗날 팀이 그를 받쳐줄 만큼 성장했을 무렵에는 본인의 성숙하지 못한 태도가 앞을 가로막았다. 결국 반 엑셀은 "Van Excellent" 가 아닌 "半 Excellent" 에 그쳐야만 했다. 누구보다 뛰어난 선수였던 스스로를 끝내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의 주인공, 닉 반 엑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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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k Van Exel (1994-2006)

생애통산 880경기 출장(670선발)
평균 14.4득점, 2.9리바운드, 6.6어시스트, 32.9분 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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