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NBA가 과거로부터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필자는 주저 없이 ‘격렬함과 터프함‘을 꼽을 것이다. 냉혹한 승부의 세계에서 반드시 지녀야할 덕목임에도 근대농구에서 그 자취를 감추고 있는 것은 개인적으로 무척 아쉬운 대목이다.

지난 날 NBA에는 성실한 일꾼들이 참으로 많았다. 구슬땀을 흘리며 코트 위를 누비고 있는 현역선수들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리그의 모든 팀들이 브루스 보웬 같은 선수들을 보유하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지금의 경기환경이 얼마나 유연해졌는지 수긍이 갈 것이다. 핸드체킹 룰이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에는 신체접족이 잦은 골밑은 하루하루가 전쟁과도 같아 박스아웃이나 스크린 같은 음지의 기술들을 잘 다루는 파워포워드의 가치가 매우 높았다. 때문에 투철한 경쟁의식은 물론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질 수 있는 진정한 사나이들이 넘쳐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파울 콜에 대한 수위가 높아지고 리그의 징계가 점차 강화되며 이 매력적인 남자들은 하나 둘씩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한때 NBA는 암묵적으로 난투극을 묵과하던 시기가 있었다. 물론 최악의 사태까지 수수방관하지 않았지만 누적되는 몸싸움으로 주먹다짐이 비일비재했다. 3심제가 도입되기 전에는 화의 근원이 될 만한 유치한 신경전도 미처 잡아내지 못했다. 그렇다고 마냥 울상만 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스스로가 마음을 독하게 먹고 생존법을 터득해야했다.

리바운드의 황제로 군림했던 데니스 로드맨은 ‘Bad as I wanna be'라는 자서전을 통하여 악명 높은 ’배드 보이즈‘에 대해 충격적인 사실들을 회고한 바 있다. 당시 로드맨은 “동료들 중 상당수가 거리의 싸움꾼 출신이었다. 어떻게 하면 상대에게 부상을 입힐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며 본인도 그에 대한 노하우(?)를 전수받았다는 후문이다. “마음만 먹으면 매일 밤 상대선수를 병원으로 보낼 수 있었을 것”이라는 로드맨의 증언은 과거의 NBA가 어떻게 돌아갔는지 생생하게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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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소개할 이는 승리를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투사 중에 투사였으며 미국 막노동꾼들을 일컫는데서 유래된 ‘블루컬러워커’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파워포워드이다. 그렇다. 눈치를 챈 분도 있겠지만 바로 찰스 오클리다. 그는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패트릭 유잉의 조력자로서 90년대 리그의 골밑을 누볐다. 특히 뉴욕 닉스의 원정 유니폼을 입는 날이면 영락없는 코트의 노동꾼 그 자체였다. 별명인 ‘Oak Tree' 역시 절묘한 작명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참나무는 단단한 재목으로 그 쓰임새가 매우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단단한 내구력과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던 오클리에게 더 없는 별명이다.

206cm의 키에 111kg의 몸무게로 기골이 장대했던 오클리의 신체적 단점은 탄력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의 경기에서는 덩크슛을 보기가 힘들었고 명장면만 모아놓은 하이라이트 필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공격리바운드에 의한 풋백 득점, 45도와 베이스라인의 중거리 슛이 주 득점수단일정도로 그는 수비에 특화된 선수였다. 

리바운드에 있어서 탄력도 하나의 필요요소이지만 절대적 요구사항은 아니다. 오클리는 타고난 하체 힘과 노련한 위치 선정으로 이를 극복했고 대학무대와 NBA의 골밑을 평정할 수 있었다. 버지니아 유니온 재학시절에는 평균 20.3점과 14리바운드로 빼어난 성적을 거두었는데 특히 마지막 졸업 시즌에는 17.3리바운드로 2부 디비전 1위를 차지하며 전문 리바운더로서의 이름을 만천하에 알릴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황제의 보디가드를 자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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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릭 유잉의 드래프트로 불리는 1985년,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에 의해 전체 9번으로 지명된 오클리는 당일 같은 팀에 지명 된 캘빈 던컨과 함께 시카고 불스로 트레이드 된다. NCAA 2부 리그에 속한 이유로 인지도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었지만 13번에 지명된 유타 재즈의 칼 말론이나 L.A 레이커스의 A.C 그린 등을 뒤로하고 당당하게 NBA에 입성한다. 당시 시카고는 떠오르는 신성 마이클 조던과 올랜도 울리지라는 정상급 스윙맨 듀오를 보유했지만 취약했던 로포스트의 전력 보강이 절실했고 오클리는 마지막 조각으로 더 없는 선택이었다.  

데뷔전 이후로 올스타 브레이크까지 벤치를 지켰던 루키 오클리는 시즌 중반부터 선발 파워포워드의 중책을 맡으며 마침내 그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특히 3월 한 달 동안 15.5점 13.8리바운드의 기염을 토하며 ‘이달의 신인‘에 선정되는 한편 팀을 진두지휘 하였다. 시카고는 간판스타 조던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오프 행 8번 티켓을 끊었는데 이 겁 없는 신인 포워드가 없었다면 꿈도 못 꿀 결과였다. 또한 인구에 꾸준하게 회자되고 있는 조던의 63점 경기는 존재하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오클리의 성공적인 데뷔 시즌은 리그에서도 인정되었고 유잉, 말론, 듀마스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며 올NBA 루키 팀에 선정되는 영광을 안겨준다. 언론에 “조던을 건드는 이가 있다면 내가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며 리그의 모든 팀에 선포하며 에이스의 신임도 얻었다. 모두가 꺼려하는 힘들고 더러운 일도 일선에 나서는 오클리의 존재는 더 없이 든든했고 미래는 밝아만 보였다. 하지만 오클리의 시카고 생활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잘못된 일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일일이 지적해왔고 이러한 오클리의 당당한 언행은 윗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사게 돼 결국 리빌딩의 희생자로 낙점되고 만다.

1987-88시즌을 끝으로 뉴욕과의 트레이드에 의해 새 보금자리를 찾은 그는 시카고의 영원한 라이벌 도시에 그렇게 입성한다. 그의 등 뒤에는 오클리의 트레이드를 반대하는 조던의 격렬한 항의가 메아리치듯 울렸지만 한번 엎지른 물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깡마른 두 명의 신인 포워드가 오클리의 공백을 메웠지만 훗날 이들은 ‘죽여야만 사는‘ 얄궂은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화려한 조연배우의 전성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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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프트 동기 유잉과 함께 골밑 임무를 분담한 오클리의 역할은 시카고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유잉으로 인해 활동반경이 넓어졌고 장기인 중거리 슛의 위력도 배가됐다. 시카고에서 보낸 마지막 시즌 당시 아쉽게 리바운드 타이틀을 내준 그는 1988-89시즌 리그 전체 6위에 해당하는 10.5리바운드를 걷어내며 뉴욕 골밑의 새로운 살림꾼으로 입지를 다져갔다.

뉴욕은 당시 1987-88시즌 신인왕에 빛나는 마크 ‘액션’ 잭슨을 필두로 자니 뉴먼과 제럴드 윌킨스로 이어지는 탄탄한 선발멤버와 신구조화가 어우러진 벤치전력을 자랑하며 시카고와 함께 떠오르는 신흥강호였다. 오클리가 가세한 1988-89시즌은 친정팀 시카고와 악연의 고리를 만들게 된 시작이라 볼 수 있다. 양 팀은 이후 8년간 여섯 차례 플레이오프 무대에서 만나 격투기를 방불케 하는 경기를 펼치며 코트를 뜨겁게 달구었다.

1988년도에 제작된 시카고 불스의 ‘하이그라운드‘라는 시즌 리뷰 비디오를 보면 오클리의 코트 안팎의 모습을 잠시나마 들여다 볼 수 있다. 애송이에 불과했던 스카티 피펜을 라커룸 벽에 세워놓고 이등병 대하듯 고참행세를 하며 만면에 웃음을 짓던 그런 모습 말이다. 그는 절대로 뒤끝이 없어 한 번 혼쭐을 내어도 큰 형처럼 다독이는 넓은 마음씨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적어도 코트에서의 오클리는 천사일 수 없었다. 피펜이나 그랜트에게 거친 파울을 수차례 범하면서도 손 한번 내밀지 않는 냉혹한 승부사로 변해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는 어느 팀에 몸을 담고 있던 상대방에 대한 변하지 않는 그만의 철학이었다.  

하지만 친정팀에게 번번이 고배를 든 오클리는 먼발치에서 그들의 우승 잔치에 쓰린 속을 부여잡아야 했다. 1991-92시즌 새 사령탑으로 부임한 팻 라일리 감독이 앤쏘니 메이슨을 중용하며 출장시간도 줄어들었다. 물론 코트위에 서 있는 순간에는 최선을 다하는 선수였고 여전히 거친 허슬플레이어였다. 하락한 개인 성적도 개의치 않는 오클리였지만 가슴 한구석의 공허감을 달래기 위해서는 역시 우승이 필요했다.

농구 황제 조던 없이 맞이한 1993-94시즌은 오클리에게 있어 제2의 전성기나 다름없는 해였다. 생애 최초로 올스타에 선정되는 영광을 맛본데 이어 올NBA 퍼스트 수비팀에 당당이 이름을 올렸다. 3년 만에 더블-더블 기록도 되찾았으니 개인적으로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하킴 올라주원의 휴스턴 로케츠에 고배를 든 뉴욕은 이듬해 NBA에 돌아온 조던에 의해 다시 한 번 가로막히며 좌절을 거듭하게 된다. 1997-98시즌에는 설상가상으로 유잉의 시즌아웃이라는 악재가 겹치며 변화의 시간을 재촉하였다.

결국 사상초유의 선수노조 파업사태가 불어 닥친 1998년 오프시즌을 맞이하여 구단은 대대적인 수술의 칼을 들게 됐고 36세의 노장 포워드는 토론토 랩터스의 마커스 캠비와의 맞트레이드로 팀의 미래에서 제외되는 불운을 겪고야 만다. 이듬해 뉴욕은 NBA 역사상 최초로 8번 시드 파이널 진출을 이룩하며 돌풍을 일으켰는데 오클리가 떠난 팀마다 성공을 일궈내는 묘한 운명은 계속 이어졌다. 11년간의 파란만장했던 뉴욕생활은 그렇게 초라하게 막을 내렸다.


역마살이 깃든 노장의 마지막 여정

창단 3년 만에 새로운 유니폼과 홈구장을 선보인 토론토는 오클리의 가세로 노련미 넘치는 로포스트를 구축하게 된다. 오클리는 베테랑 센터 케빈 윌리스와 함께 녹슬지 않은 기량을 뽐내며 토론토가 신생팀의 이미지를 벗는데 일조하였다. 농구선수로서 이미 황혼기에 접어든 그였지만 투지 넘치는 플레이는 세월을 무색케 하였다.

화려한 고공플레이로 이른바 ‘에어 캐나다’ 센세이션을 일으킨 빈스 카터는 지난 날 붉은 색 유니폼의 23번 사나이를 떠올리게 만들었지만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팀의 에이스를 무조건 감싸기 보다는 더 나은 선수가 되라며 채찍을 들었던 것이다. 들쑥날쑥한 카터의 슈팅기복과 취약한 장거리 슈팅능력, 오른쪽 돌파만을 선호하던 습관 등을 지적하며 쓴 소리를 아끼지 않은 오클리는 맏형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특히 출장시간에 대해 불만을 표했던 트레이시 맥그레이디에게는 “어린 선수가 너무 많은 것을 바란다”며 일침을 놓기도 하였다. 

동부 컨퍼런스의 정상권을 노려볼만한 위치에 이른 토론토는 간판스타 카터의 부상으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결국 오클리는 몰락하는 팀의 운명을 뒤로하고 모든 여정의 시작이었던 시카고로 돌아온다. 토론토에서 마지막으로 보낸 2000-01시즌 당시 득점과 리바운드에서 더블-더블급 활약을 펼쳤던 그의 마지막 불꽃은 점차 희미해지고 있었다.

타이틀에 대한 미련도, 개인적인 영예의 욕심도 모두 버린 오클리는 오로지 경기에 대한 열정으로 선수생활을 버텨나갔다. 불혹의 나이에도 그가 코트에 설 수 있었던 이유다. 농구경력을 시작했던 곳에서 마지막을 생각하고 있을 시기에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단짝인 마이클 조던이 코트로 돌아왔다. 조던의 간절한 설득에 마음을 돌린 오클리는 워싱턴과 베테랑 최저 연봉액수에 합의하며 절친한 동료의 마지막 길동무가 돼주었다. 결국 조던의 은퇴로 워싱턴에 남을 이유가 없어진 오클리는 2003-04시즌 휴스턴에서 단 7경기만을 뛰며 NBA 이력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의 경력을 돌이켜볼 때 우승반지는 물론 변변한 개인수상의 경력하나 없는 평범한 프로선수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록지의 숫자로 평가할 수 없는 선수가 바로 이 찰스 오클리였으며 많은 이들이 이면에 드리워진 그의 모습을 사랑했다. 필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매직 존슨이나 클라이드 드렉슬러와 같은 화려한 슈퍼스타에 대한 그리움. 그것은 타이론 힐이나 오티스 도프, 오클리, 로드맨과 같이 코트 사이드를 뒹굴며 흙먼지를 뒤집어 쓴 터프가이들에 대한 그리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계속 되는 도전, 그리고 두 얼굴의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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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트를 떠난 지 만 3년이 되던 지난 2007년 오클리의 복귀 설이 모락모락 피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는 불혹을 넘겨 43세였다. 그 해 드래프트 1순위인 오든이 갓난아기라면 오클리는 할아버지뻘인 셈이었다.

지난 3년 전 바닥을 드러낸 오클리는 이제 더 이상 플레이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음에도 자긍심 하나는 여전했다. “하찮은 액수의 계약금으로는 뛰지 않을 것”이라 공언하며 리그에서 장려하는 베테랑 미니멈의 경로혜택을 마다한 것이다. 은퇴와 복귀를 두 차례 반복했던 절친 조던은 “제대로 된 대우가 없다면 뛸 필요 없다”며 오클리를 지지했고 그 역시 본인의 입장을 고수했다. “좋은 연봉여건에서 뛸 것이다. 어느 구단도 나를 돈으로 살 수 없으며 돈도 나를 지배할 수 없다. 터무니없는 베테랑 최저연봉으로는 코트에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며 다시 한 번 본인의 의지를 피력했다. 결국 오클리의 복귀는 무산됐지만 그의 뚝심과 담대함을 재차 확인 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샤킬 오닐이나 찰스 바클리처럼 본인이 내뱉은 말로 곤욕을 치루는 이도 있지만 오클리의 말은 무게감이 틀렸다. 가볍고 무모한 호언장담이 아닌 누군가는 맸어야 할 총대와도 같은 사안들은 언제나 오클리의 몫이었다. 그리고 현재는 일선에서 한 발짝 물러났지만 필요할 때는 쓴 소리를 아끼지 않을 정도로 리그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고 있다.

팀 도너기 심판파동으로 소란스러웠던 올 해 여름, 오클리는 분노를 금치 못하였다. “분명 저 너머에는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이 숨겨져 있다. 책을 통해 모든 전말이 공개 되는 날이 올 것”이라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그는 “지난 시즌 브렌트 베리의 파울만 봐도 알 것이다. 누가 봐도 명백한 파울이었음에도 휘슬은 울리지 않았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경기조작”이라며 흥분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룰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고 매 시즌마다 새로운 영웅이 만들어진다. 이는 속임수나 다름없는 짓”이라며 리그 행정부에 따끔한 충고를 건냈다.

오클리의 쭉 찢어진 눈, 고집을 담은 두툼한 입술은 마치 마이크 타이슨을 방불케 하는 외모로 기억된다. 터프가이로 한 평생을 살아온 그였지만 가슴 따뜻한 ‘인간 오클리‘를 아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왼팔이 하는 일을 오른팔이 모르게 하라”는 옛말도 있다. 하지만 오클리가 실행해온 수많은 자선행사들은 그가 얼마나 배려 깊은 남자인지 알려주는 좋은 자료다.

1993-94시즌에는 리바운드 한 개당 1달러의 기부금을 적립했고 팀 동료 존 스탁스가 이를 본받아 3점 슛 한 개당 5달러의 기부금을 내게끔 만들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고향 버지니아 유니언에서는 재단을 운영하며 오랜 세월동안 불우아동 단체를 지원하고 있고 클리블랜드 등지에서 무료 여름캠프를 개최하며 꿈나무들의 육성을 돕고 있다.

이러한 오클리의 자선활동은 폭넓은 개인사업의 확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6개의 세차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그는 남다른 사업수완을 발휘하여 성공적인 자산증식을 이끌었다는 후문이다. 외모에 걸맞지 않는 탁월한 패션 감각도 오클리가 가진 또 하나의 능력이었다. 특히 1997년 패션 전문 매거진 ‘GQ'에서는 과소평가 받은 드레서로 선정되며 다양한 끼를 발산했다.

   
마치며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선수와 팬으로서의 관계를 영원히 지속시키고픈 인물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해왔다. 줄리어스 어빙이 그랬으며 매직 존슨과 마이클 조던 같은 팬의 사랑을 듬뿍 받은 영웅들도 좋은 예가 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없으면 못살 것 같던 슬픔과 인연의 끝에 맛보는 아쉬움은 한 순간에 사라진다. 마치 물레방아처럼 떠나는 이의 자리는 누군가가 항상 채워왔기 때문이다.

NBA 총재 데이빗 스턴도 말한다 “리그는 슈퍼스타의 은퇴로 위기에 처할 때마다 항상 새로운 누군가가 등장하곤 했다. 윌트 체임벌린이 사라지자 카림 압둘자바가 데뷔했고 어빙이 퇴장하니 조던이 혜성처럼 등장했다. 덕분에 우리는 문제를 극복해나갈 수 있었다”고 말이다. 어디 국내뿐이겠냐 만은 NBA의 전파에 혁혁한 공을 세운 조던의 존재도 차츰 잊혀져  가고 있다. 심지어는 그가 누구인지 모르는 젊은 팬들도 생겨나고 있을 정도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치유되는 만병통치약 ‘시간’은 시대를 풍미한 영웅도 지울 수 있는 날카로운 검인 셈이다. 이치가 이러한데 별다른 족적 없이 사라진 많은 선수들의 추억은 오죽할까?

찰스 오클리는 몇 년 안에 많은 팬들의 머릿속에서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필자에게 있어서 그는 좋은 추억으로 남은 영화한편에 대한 회상과도 같은 존재다. 재밌는 영화는 흥행에 성공하지만 좋은 영화는 가슴에 남는 이유와도 상통한다. 그렇다. 오클리는 과거의 담습을 유쾌하게 만들어 준 그런 선수였다. 농구 이상의 감동을 선사해 준 그가 오늘따라 무척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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