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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 시즌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10월 중순,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로스터에서 한 선수의 이름이 지워졌다. 지난 여름 팀에서 가장 늦게 3년 재계약 협상을 마무리했던 딜론테 웨스트였다. 지난 시즌까지 웨스트가 맡았던 포인트가드 포지션에 모리스 윌리암스가 가세했고 마이크 브라운 감독이 아직 결정되지 않았던 선발 슈팅가드 포지션 후보중 한 명으로 그를 고려하고 있던 시점이었기 때문에, 웨스트의 갑작스런 팀 이탈은 많은 팬들의 궁금증을 자아냈다. 구단에서도 명확한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팬들의 궁금증은 커져만 갔다.

이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두가 알고 있다. 웨스트는 팀을 떠나있던 2주 동안 평생에 걸쳐 그를 괴롭혀온 우울증과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본인의 노력과 동료들의 따뜻한 관심으로 팀에 복귀한 웨스트는 클리블랜드의 주전 슈팅가드로 낙점, 평소처럼 견실한 플레이를 펼치며 클리블랜드가 7연승을 거두는 데 공언하고 있다.

강팀에서 순탄하게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는 웨스트지만 그의 인생이 항상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다른 몇몇 선수들과 같이 웨스트도 평범한 생활을 위해 싸워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1983년생으로 홀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웨스트는 메릴렌드에서 어머니와 외가 친척들과 함께 자랐다. 그리 여유있는 생활은 아니었다. 친구들과 전화를 할 때도 항상 음식 이름으로 통화를 마칠 정도였다. 웨스트는 ‘바베큐 소스’를 좋아했고, 지금도 3점슛을 넣은 후에는 ‘바베큐 소스’라고 중얼거린다. 어렸을 때부터 농구에 소질을 보인 웨스트는 일찌감치 농부구에 들어갔지만, 다른 아이들이 농구 연습을 하거나 웨이트 트레이닝을 할 때 공사장에 나가 벽돌을 나르며 힘을 키워야 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영부인의 이름을 딴 엘리노어 루즈벨트 고등학교로 진학한 웨스트는 팀을 처음으로 주 챔피언십 결승에 올렸다. 비록 아깝게 준우승에 머무르긴 했지만, 졸업반 시절 단 한 경기를 제외하고 모두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한 웨스트는 NCAA 팀들의 스카우트 표적이 됐다. 웨스트는 평소 흠모하는 마이크 말론이 감독으로 재직하던 맨하탄 콜리지로 가고 싶었지만, 말론 감독 본인이 나서 웨스트를 설득한 끝에 마침내 명문 세인트 조셉 대학교의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3년 후, 주전 슈팅가드로 성장한 웨스트는 백코트 파트너인 자미어 넬슨과 함께 팀을 정규시즌 27승 무패로 이끌었다. 세인트 조셉 대학은 사상 처음으로 전미 랭킹 1위에 올랐다. 비록 넬슨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긴 했지만, 웨스트는 팀내 최고의 3점 슈터이자 수비수였다.

자신의 능력을 확신한 웨스트는 마침내 2004년 드래프트에 나섰다. 하지만 1라운드가 끝나갈 때까지 그의 이름은 불리지 않았다. 포인트가드로 쓰기에는 리딩 능력이 달리고, 슈팅가드로 쓰기에는 193센티미터에 불과한 신장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23명의 선수가 지명된 끝에 게리 페이튼의 백업 가드를 찾던 보스턴이 마침내 24번째 지명권을 웨스트에게 행사했다. 웨스트의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죠. 크리스 월러스 단장님이 지명자를 발표하기 전 저를 불러서 ‘보스턴 셀틱스 선수가 된 기분이 어떤가?’ 하고 물으셨어요. 마치 사나운 개가 저를 쫓아올 때 간이 오그라드는 기분이더군요. 하나님 맙소사, 꿈은 이루어지고 기도는 통한 거죠.”

대학 시절 15번을 달았던 웨스트는 보스턴의 영구 결번 선수 때문에 15번을 달 수 없게 되자, 의리 깊은 메릴렌드 사내답게 어린 시절 친구의 번호인 13번을 선택해 루키 시즌을 시작했다. 하지만 웨스트의 프로 첫 시즌은 그리 순탄하지 못했다. 스타팅 라인업에는 들지 못해도 식스맨으로 꽤 많은 출장시간을 얻을 것으로 기대됐지만, 오른손에 연달아 부상이 발생하면서 부상자 명단에 오르고 만 것이다. 웨스트는 이 부상 때문에 43경기를 결장해야 했다.

시즌 후반이 되어 부상에서 회복하자, 닥 리버스 감독은 웨스트의 출장 시간을 늘리기 시작했다. 때마침 주전 가드인 페이튼이 부상당하면서 웨스트가 선발 포인트가드로 나서기도 했다. 페이튼과 함께 웨스트를 장신 포인트가드로 쓰려는 리버스 감독의 구상 때문에 대학 시절과는 다른 포지션에서 뛰게 되었지만, 웨스트는 새로운 역할에 적응하려 노력했다. 웨스트의 성실성을 눈여겨본 리버스 감독은 이듬해 페이튼이 팀을 떠나자 주전 포인트가드로 웨스트를 선택했고, 웨스트는 막 리빌딩에 들어간 팀의 공격을 잘 이끌며 감독의 기대에 부응했다. 올스타 주간에 벌어진 루키 챌린지에는 대학 시절 콤비였던 넬슨이 부상당하면서 대신 참가하기도 했다. 이듬해 팀에 합류한 라존 론도나 세바스찬 텔페어와 함께 출장시간을 나눠갖기는 했지만, ‘리빌딩 팀 보스턴’의 첫 번째 포인트가드는 항상 웨스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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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에서 순탄하게 선수생활을 이어나갈 것 같았던 웨스트였지만, 2007년 드래프트 데이 아침에 벌어진 트레이드는 그의 운명을 바꾸어놓았다. 지속적인 리빌딩 대신 신속한 전력강화를 선택한 대니 에인지 보스턴 단장이 시애틀 슈퍼소닉스의 에이스 레이 앨런과 글렌 데이비스를 받는 대가로 웨스트와 신인 제프 그린, 월리 저비악을 시애틀로 보낸 것이다. 시애틀은 팀에는 얼 왓슨이 주전 포인트가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왓슨 못지않게 기대를 받고 있던 루크 리드노어도 있었기 때문에, 웨스트의 설 자리는 좁아져 갔다.

트레이드 마감일 직전에 웨스트는 또다시 팀을 옮겨야 했다. 시애틀이 클리블랜드, 시카고와의 3각 트레이드를 통해 도넬 마샬과 이라 뉴블, 애드리언 그리핀을 받는 대가로 월리 저비악과 함께 클리블랜드로 트레이드된 것이다. 웨스트는 새 팀 클리블랜드에서 선발 포인트가드 자리를 되찾았다. 에이스 르브론 제임스가 리딩을 도맡는 클리블랜드의 시스템에 적응하는 데 다소 시간이 걸렸지만, 정규 시즌이 끝나갈 즈음 웨스트는 팀의 승리에 빠질 수 없는 선수가 되었다.

1라운드에서 워싱턴을 누른 클리블랜드는 정규 시즌 최강팀 보스턴과 2라운드를 치르게 되었다. 1년만에 상전벽해의 변화를 이룬 친정팀을 만난 웨스트의 매치업 상대는 그가 보스턴에 있을 때 세 번째 포인트가드였던 론도였다. 하지만 빅3와 함께 한 시즌을 보낸 론도는 자신의 강점인 최대 강점인 숨막히는 수비력으로 웨스트를 압박했고, 웨스트는 보스턴에서 벌어진 1,2차전에서 야투율 20%에 그치는 최악의 부진을 보였다. 비록 3차전에서 21득점을 기록하며 위닝샷까지 넣기는 했지만, 웨스트는 시즌 내내 론도에게 고전해야 했다. 결국 친정팀과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패한 웨스트는 불과 1년 전까지 자신이 소속되어 있던 팀이 우승을 차지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그 시리즈 박스스코어가 아직까지 제 안주머니에 들어있어요. 지갑을 꺼낼 때마다 튀어나오죠. 볼 때마다 화가 나서 다시 집어넣곤 하는데, 이번 시즌 끝나면 없애버릴 겁니다.”

비록 우승팀에게 아깝게 패하기는 했지만, 클리블랜드 팬들은 르브론을 도울 가드를 얻었다는 데 만족했다. ‘전임자’ 래리 휴즈가 팀 시스템과 맞지 않았기 때문에, 포인트가드치곤 장신이면서 슈팅력도 좋은 편인 웨스트에게 기대를 건 것이다. 하지만 웨스트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 클리블랜드 프런트는 오프시즌 동안 밀워키에서 포인트가드 모리스 윌리암스를 데려왔고, 마침 재계약을 앞두고 있던 웨스트는 또다시 입지가 불안해졌다. 윌리암스는 웨스트보다 슈팅과 패싱이 뛰어났고 기존 멤버 중 전 시즌에 큰 발전을 이룬 대니얼 깁슨 또한 웨스트와 포지션이 겹쳤기 때문이다. 클리블랜드에서 웨스트와의 재계약을 포기하거나 트레이드 카드로 쓴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심지어 러시아 리그로 간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재계약 협상이 좀처럼 진척되지 않았기 때문에 소문은 점점 신빙성을 얻어갔다.

하지만 클리블랜드와 웨스트는 아직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클리블랜드는 부상 이력이 있는 윌리암스를 영입하면서 보조 리딩을 해줄 ‘보험’이 필요했고, 어렵게 자란 웨스트는 가족을 부양할 새 계약이 필요했던 것이다. 웨스트는 마침내 클리블랜드와 3년간 총액 1270만 달러의 계약에 합의했다. 웨스트의 능력이나 가능성에 비하면 그리 높은 금액은 아니었지만 웨스트는 만족했다. “재계약이 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이 돈으로 우리 어머니 집을 사드릴 거고, 외삼촌 이도 해드릴 겁니다. 여동생 대학 등록금도 댈 수 있게 됐죠. 저는 이제 농구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됐어요.”

하지만 웨스트가 농구에 집중하려면 넘어야 하는 벽이 남아있었다. 바로 평생 그를 괴롭혀온 우울증이었다. 첫 증상은 팀 자체 청백전 도중 나타났다. 심판을 보고 있던 웨스트의 고등학생 시절 심판과 웨스트 사이에 충돌이 일어난 것이다. 웨스트는 심판의 콜에 비정상적으로 화를 냈고, 좀처럼 평정심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웨스트 스스로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상태로는 팀 분위기에 해를 끼칠 가능성이 높았다. 우리나라보다 개방적이라는 미국에서도 우울증을 인지하고서도 치료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은데다가 운동선수가 정신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앞으로 선수생활을 하는 데 약점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웨스트는 무엇이 중요한지 아는 판단력과 해야 할 말을 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선수였다. 웨스트는 브라운 감독과 동료들에게 자신의 병을 솔직히 고백하고 치료를 위해 잠시 팀을 떠났다.

웨스트가 병과 싸우는 동안 팀에서는 웨스트를 위해 많은 배려를 했다. 웨스트 스스로가 말하기 전에는 그의 병에 대해 절대 언급하지 않았고 그의 사생활을 지켜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르브론과 앤더슨 바레장을 비롯한 동료들도 그에게 하루에도 몇 번씩 안부 전화를 하며 웨스트가 고독을 느끼지 않도록 노력했다.

2주 후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온 웨스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주전 슈팅가드’ 자리였다. 당초 이 자리에 나설 것으로 보이던 사샤 파블로비치가 좀처럼 컨디션을 회복하지 못하자 마이크 브라운 감독이 웨스트를 선택한 것이다. NBA에서 4년간 포인트가드로 뛰던 웨스트는 마침내 자신의 원래 포지션에서 뛰며 리딩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심리적 안정감은 곧바로 성적 향상으로 이어졌다. 윌리암스와 함께 뛰면서 그의 공격 우선순위는 선발 라인업에서 네 번째로 밀렸지만, 대신 왼손잡이의 특성을 최대한 살리며 확실한 찬스에서 부담 없이 슛을 던지는 등 공격 효율성을 크게 끌어올렸다. 51.4%의 야투율과 46.5%의 야투율은 커리어 최고 기록이고, 당초 출장시간이 줄어들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지난 시간보다 늘어난 평균 34.5분을 출장하고 있다. 코칭스태프가 그만큼 웨스트를 믿고 있다는 뜻이다. 팀 리더인 르브론 역시 ‘웨스트는 우리 팀에 꼭 필요한 선수다. 우리는 그가 없이는 우승할 수 없다’며 그를 칭찬했다.

코트 위에서의 견실한 플레이와는 달리 농구화를 벗은 웨스트는 대단히 재미있는 남자다. 스스로를 ‘자유로운 영혼’이라 부르는 웨스트는 자신을 예술가라 생각하고 있으며, 틈만 나면 그림 그리기나 시 짓기에 열중한다. 기자들과 인터뷰할 때면 의도적으로 라임을 살리며 랩을 하듯 답변하고, 알아듣지 못할 말을 떠들어댄다. 라커룸에서는 ‘Get The Money' 같은 노래를 큰 소리로 불러댄다. 노래 실력? 팀 동료 테런스 킨제이의 평가다.

“못 들어주겠습니다. 윌리암스나 깁슨도 음치지만 웨스트를 따라갈 수는 없어요. 웬만하면 들어주려 하지만 정말 끔찍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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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는 이런 독특한 캐릭터 때문에 클리블랜드에 온 지 얼마 안 됐는데도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팀 리더인 르브론과는 달리 아직 독신이기 때문에 여성팬들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다. 이런 웨스트의 이상형은 어떨까? “제 영혼은 자유롭습니다. 어떤 스타일의 여성이라도 괜찮아요. 하지만 전 아직 젊고 농구선수로써의 인생을 좀더 즐기고 싶습니다.”

웨스트는 그리 순탄한 인생을 살아오지 못했다. 하지만 웨스트는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보고 진지하게 해결할 줄 아는 진정한 용기를 갖췄다. 모든 고난을 훌륭히 극복해온 웨스트는 이제 저 앞을 바라보고 있다. 그의 몸에 새겨진 문신 문구처럼 ‘Sunshine After Rain'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웨스트가 따스한 햇살을 느끼는 날, 무려 30여년간 어느 프로팀도 우승하지 못한 클리블랜드에도 마침내 성공의 빛이 찾아들 것이다. 그리고 그 날이 올 때까지 웨스트의 쉼없는 전진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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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농구를 접하신 분들도 7~80년대를 풍미했던 ‘아이스맨’ 조지 거빈과 그의 ‘핑거롤’에 관한 이야기 쯤은 익히 들어 잘 알고 계실 것이다. 조지 거빈은 줄리어스 어빙과 함께 70년대에 중학생이던 필자를 NBA의 세계로 빠지게 만들어준 장본인이다. 그동안 여러 농구팬들로부터 거빈에 관한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었지만, 이 선수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의 칼럼으로는 부족할 것 같았고, 또 막상 시리즈로 쓰자니 일이 너무 커질 것 같아서, 차일피일 미뤘던 것이다. 허나,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다는 I Love NBA 카페나 NBA 매니아와 같은 사이트에 조차도 거빈에 관한 칼럼 하나가 없음을 며칠 전에 발견하고는, 부족하지만 2부 정도의 부담없이 읽을만한 짧은 칼럼이라도 써서 이 선수를 국내에 소개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12년 연속 올스타 선정, 3년 연속 올스타 최다 팬득표, 3년 연속 (총 4년) 득점왕, 커리어 평균 야투 성공률 52%, 2년 연속 MVP 득표 2위, 7번의 All-NBA (퍼스트 팀 5회) 선정, 명예의 전당 헌액, 위대한 50인 선정 등등, 거빈의 선수로서의 업적과 위대함은 짧게 열거하기가 쉽지 않다. 역대 최고 슈팅가드들을 논할 때 항상 5위 안에 이름을 올리는 거빈. 그를 제대로 평가하려면 그의 전성기적 경기영상을 많이 봐야만 한다. 거빈의 플레이를 직접 본 팬들은 알 것이다. 스탯이나 수상경력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그만의 멋이 있었음을. 코트에 서있는 그가 얼마나 매력이 있었으며 카리스마 또한 넘쳤는지는 동시대를 살아가며 함께 호흡을 하지 않고는 사실 느낄 수 없는 부분일 것이다. 포지션이나 신장, 경기를 풀어나가는 모습으로만 미루어 비교한다면, 현 로켓츠의 트레이시 맥그레이디가 가장 많이 닮았다고 볼 수 있겠지만... 사실 거빈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정말로 특이하고 개성이 넘치는 고유의 색깔이 넘쳐나는 선수였다.

조지 거빈의 어린 시절은 몹시 불우했다. 디트로이트의 빈민굴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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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한 번도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자란 적이 없다. 거빈의 아버지가 그의 출생과 동시에 가족을 버리고 가출해버렸던 것이다. 거빈의 어머니는 이 철부지 육남매를 홀로 먹여 살려야만 했다. 공중화장실 청소로부터 종이봉투를 만드는 공장일까지... 거의 하루의 3분의 2를 막노동으로 보내며, 그녀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만 했다. 거빈이 회고하길, 자신의 집은 정말로 가난했지만, 6남매 모두 끼니를 거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그녀는 훌륭하고 강한 어머니였다. 이러한 어머니의 노고를 보며 자란 거빈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성공해서 어머니를 행복하게 해드리겠다는 각오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살던 주거지가 위험한 갱들이 득실거리던 지역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었어서, 어릴 적부터 마약, 술, 창녀, 폭력, 살인 등에 완전히 노출되었던 거빈이었지만, 프로농구선수가 되고자 하는 어릴 적 꿈을 좇아 그는 주변의 유혹을 이길 수 있었으며 착실히 농구에만 열중하는 청소년기를 보낼 수가 있었다. 많은 위대한 농구선수들의 레파토리처럼 들리시겠지만, 거빈은 농구를 하기엔 신장이 터무니없이 작았다. 그리고 몸은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것 같은 젓가락이었다. 그가 중학교 농구팀 감독으로부터 퇴짜를 맞은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거빈은 여기서 포기하지 않았다. 어머니로부터 영향을 받은 하나님을 향한 기독교 신앙은 어린 거빈을 더더욱 강하게 만들어줬고, 결국,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세 가지 응답을 받았다. 첫째, 그의 키가 갑자기 쑤욱쑤욱 자라기 시작한 것이다. 173cm였던 신장이 몇 개월 만에 193cm가 되었다. 둘째, 농구팀 감독으로부터는 퇴짜를 맞았지만, 그를 불쌍히 여긴 Meriweather 코치로부터 꾸준히 농구수업을 받는 특권을 누릴 수가 있었다. 셋째, 수줍고 내성적이었으나 심성이 착했던 거빈은 중학교 경비원 아저씨와 쉽게 친해질 수 있었고, 경비원은 밤에도 체육관을 사용할 수 있게끔 그에게만 특별히 허락을 해주었다.

거빈은 하늘이 그에게 내려준 이 세 가지 기회를 소중하게 여겼다. Meriweather 코치로부터 농구의 기본기와 전략 등을 상세히 배운 그는, 저녁시간만 되면 학교 체육관으로 가서 쉴 새 없이 그만의 슈팅연습을 했다. 그의 전매특허 ‘핑거롤’은 바로 이 때 그가 스스로 만들어낸 기술이다. 1년 365일 단 하루도 개인연습을 거른 적이 없어서, 매주 일요일에도 체육관 문을 열어주러 학교에 와야만 했다는 마음씨 착한 당시 경비원 아저씨의 증언에 따르면, 거빈은 매일같이 육백 개에서 일천 개에 달하는 슈팅을 마치고서야 집에 돌아갔다고 한다. 그의 중고등학교 시절은 이와 같이 오로지 농구 뿐인 인생이었다. 거빈은 선수시절에 한 TV 인터뷰에서, “몇 년 동안 매일같이 컴컴한 체육관에서 혼자 공을 드리블하며 슛을 쏴대는 나를 알아 준 이는 이 세상에 오직 하나님 뿐이셨다” 라며 당시의 힘들고 외로웠던 나날들을 짧고 담담하게 표현했다.

Eastern Michigan 대학시절의 거빈은 더이상 말라깽이 코흘리개가 아니었다. 그는 이제 신장도 201cm이었으며, 2학년 때는 평균 29.5점에 15.3개의 리바운드를 잡아내는 명 포워드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선수로서의 황금기에 청천벽력과 같은 사건이 하나 일어났으니, 바로 Roanoke 대학과의 토너먼트 경기 중에 거빈의 어머니를 입에 담아 트래쉬토킹을 한 상대선수에게 그가 정권을 날렸던 것. 거빈은 어릴 때부터 80년대말 프로생활을 청산할 때까지 누구와 싸우거나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어머니가 욕의 대상이 되자 그것만큼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큰 불상사였다. 거빈의 대학감독은 책임을 지고 사임해야 했으며, 거빈 자신도 NCAA 선수자격을 박탈당하고야 말았다. 졸지에 NBA 선수로서의 꿈을 접어야 했던 거빈은 EBA라는 한 마이너리그에서 밥벌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이 전화위복이 될 줄이야... 우연히 마이너리그 경기장에 왔다가 거빈의 실력을 꿰뚫어 본 ABA 버지니아 스콰이어스의 스카웃 담당자 죠니 커 씨가 거빈을 스카웃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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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조지 거빈은, 이미 일 년 전부터 버지니아 스콰이어스에서 뛰며 ABA 리그의 역사를 새롭게 쓰고 있던 Doctor J 줄리어스 어빙과 한 솥밥을 먹게 되었다. 나중에 한 번 더 언급하겠지만, 조지 거빈은 남들에게는 없는 아주 특이한 경력이 하나 있다. 줄리어스 어빙과 마이클 조던, 이 두 레전드들 모두와 한 팀에서 뛰어봤던 유일한 선수였다는 것.

조지 거빈은 슈팅 가드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본래의 포지션은 스몰 포워드였던 선수다. 줄리어스 어빙과 한 팀에서, 그것도 동포지션에서 뛰면서 충분한 출장시간을 얻어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둘이서 함께 뛴 1972~73 시즌에 줄리어스 어빙은 평균 31.9점을 득점하며 득점왕이 되었고, 어빙을 백업하며 슈팅 가드 역할까지 소화해야 했던 루키 거빈은 평균 23분의 출장시간을 기록하며 14.1점을 득점했다. 디트로이트 뒷골목 출신 말라깽이의 비교적 성공적인 프로 데뷔였다.

거빈은 정말 운대가 따라주는 인물이었다. 어빙이라는 훌륭한 수퍼스타와 함께 하며 프로 첫 시즌을 부담없이 무난히 보낼 수가 있었던 그에게 또다른 행운이 찾아온 것이다. 바로 줄리어스 어빙이 뉴욕 넷츠로 가게 된 것. 버지니아 스콰이어스의 주전 스몰 포워드 자리는 이제 그의 몫이었다. 거빈은 평균 23.4점, 8.4리바운드, 1.4스틸, 1.6블락샷을 기록하며 순식간에 팀의 에이스가 되었고, ABA리그의 새로운 수퍼스타 스윙맨으로 떠올랐다. 물론, 그는 생애 첫 올스타 게임에도 출전할 수 있었다.

거빈이 본인 특유의 ‘핑거롤’과 함께 수퍼스타로 떠오를 무렵인 1973년, 그의 팀메이트인 “Fatty” 테일러가 그에게 별명을 지어주었다. 이름하여 “Iceberg Slim”. 우리말로 굳이 표현하자면 “비쩍 마른 얼음 빙산”이 되겠다. 코트 위에서도 평상시에도 절대로 표정의 변화가 없는 차갑고 냉정해보이는 그의 얼굴표정때문에 붙여진 별명이었다. 거빈은 그랬다. 자신의 버저비터로 팀이 승리를 챙겨도, 상대선수가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어도, 그의 얼굴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필자는 거빈의 경기를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을 넘게 봐 왔지만, 한 번도 그가 코트 위에서 웃거나 화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불우하고 외로운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거빈은 감정을 표현할 줄을 몰랐다.

그다지 느낌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던 이 별명을 그의 팬들이 “The Iceman”으로 바꿔주었고, 그 때부터 거빈은 “얼음 사나이”의 이미지를 좇아 커리어 내내 ‘쿨’한 모습을 꾸준히 유지했다. 거빈의 몸동작은 굉장히 부드럽고 편안해 보였다. 영어로 표현하자면 effortless라고나 할까? 전혀 무리하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상상도 못할 각도와 거리에서도 불가능해 보이는 슛들을 너무 쉽게 성공시키곤 했다. 마치 피겨 스케이터들이 얼음을 지치듯, 코트 위에서 부드럽게 미끄러져 들어가는 그의 풋워크와 스탭들은 “The Iceman”이라는 별명과 너무나도 잘 맞아 떨어졌다.

이런 거빈의 스타성을 알아본 ABA 리그의 신생 팀 샌안토니오 스퍼스는 연고지와 팀 명을 바꾼 후, 1973~74 시즌 중간에 그를 영입해 온다. 거빈의 나이 21세. 이제 바야흐로 샌안토니오의 전설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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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하이오 스테이트 대학 시절 콤비로 NCAA 무대를 휩쓸었던 그렉 오든과 마이크 콘리 주니어의 올 시즌 행보가 심상치 않다. 오랜 기간 동안 출격하기만을 기다렸던 오든은 개막전부터 인저리 리스트에 올라야 했고, 콘리 주니어는 발전은커녕 오히려 퇴보하는 양상을 띠고 있다. 동시에 부진을 겪고 있는, 우연치고는 신기한 이들의 시즌 초반을 들여다보았다.


오든과 부상은 결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가?


오든이 올 시즌을 임하는 각오는 그 어느 선수보다 결연했다. 뜻하지 않은 무릎부상으로 NBA 코트를 밟아보지도 못한 채 루키 시즌을 접어야 했기에 의욕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포틀랜드 블레이저스 또한 오든의 가세로 올 시즌 가장 주목해야 할 팀으로 꼽히며 지난 시즌과 같은 돌풍을 예고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새 시즌을 맞이하는 오든의 준비는 완벽했다. 하지만, 오든은 주전으로 출장한 LA 레이커스와의 개막전에서 또 다시 부상을 당하며 경기를 지켜본 많은 팬들을 실망시켰다.

오든은 1쿼터부터 앤드류 바이넘의 훅슛을 멋지게 블록하며 부활의 기지개를 켜는 듯 했으나 그것도 잠시, 부상은 또다시 오든을 찾아왔다. 레이커스 진영에서 리바운드를 다투고 있던 오든이 그만 데릭 피셔의 발 위로 착지하게 된 것이다. 오든의 오른발은 피셔의 움직임에 끌리듯 접질리게 되었고 결국 오든은 바로 교체되어 2쿼터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만 이미 발에 충격이 가해진 상태라 더 이상 뛰는 것은 불가능했다. 경기 후 오든에게는 2~4주간의 휴식 조치가 내려지게 된다. 시즌이 빨리 개막하기만을 바랐던 오든으로서는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데뷔전 최종성적은 12분 출장에 무득점, 5리바운드, 2턴오버, 2블록슛. 오든의 명성에 걸맞지 않은 초라한 기록이다. 오든의 복귀하기까지는 2주가 조금 넘게 걸렸다. 지난 12일 마이애미 히트와의 원정 경기를 통해 재기한 오든은 포틀랜드 선수들 중 세 번째로 적은 시간을 뛰었지만 비교적 괜찮은 활약을 펼치며 팀의 4연승을 도왔다. 일단 부상의 여파가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무엇보다 오든의 역할은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현재 포틀랜드는 원정 5연전을 맞아 첫 두 경기를 승리로 장식하며 상승세를 타고 있다. 이런 분위기를 더욱 끌어올리기 위해선 오든의 활약이 절대적이다. 그렇다고 초조하게 오든의 플레이를 바라볼 필요는 없다. 시즌은 아직 전반기의 반도 지나지 않았다. 오든이 제 기량을 보여주기 위한 시간은 넘쳐흐르고도 남았다.


지독한 소포모어 징크스를 겪고 있는 마이크 콘리 주니어


오든 못지않게 콘리 주니어 또한 혹독한 시즌 초반을 보내고 있다. 팀의 미래로 낙점 받았던 루키 시즌과는 다르게 저조한 성적을 올리고 있다. 출장시간은 오히려 지난 시즌보다 줄었고 거의 모든 수치가 하락세를 띠고 있다. 더욱 심각한 건 이러한 부진이 개막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는 점이다. 단순히 일시적인 슬럼프는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콘리 주니어의 부진이 길어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원인은 O.J 메이요의 등장이다.

생각보다 뛰어난 메이요의 기량이 콘리 주니어의 입지까지 좁아지게 한 것이다. 메이요는 USC에서 보여주었던 다양한 능력을 프로에서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별다른 적응기를 거치지 않고도 붙박이 주전을 무리 없이 소화해내는 것을 보면 여타 신인들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이다. 이는 당초 루디 게이-메이요-콘리 주니어 삼각편대를 형성하려던 멤피스 그리즐리스의 계획을 다소 수정하게 했다. 예상보다 더딘 콘리 주니어의 성장과 리그의 수준급 선수들과 견주어 봐도 전혀 부족함이 없는 메이요의 실력이 비교되면서 트리오의 시너지 효과를 포기하는 대신 메이요를 더욱 활용하는 방향으로 가져간 것이다.

이러한 멤피스의 선회는 실제로 메이요의 폭발력을 잘 이끌어내며 큰 효과를 거두고 있다. 하지만 메이요의 팀 내 비중이 커짐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콘리 주니어의 역할은 크게 축소되었다. 익숙지 않은 팀 환경도 콘리 주니어에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지난해와 비교해 슛 시도도 두 개 이상 줄어 자신감도 많이 결여된 모습이다. 하지만 콘리 주니어의 이런 사정과는 상관없이 멤피스는 현 체제에 크게 만족하고 있어 당분간은 팀에서 고립될 가능성이 크다. 콘리 주니어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현실에 안주하기 보다는 맞서 싸우라는 것이다. 메이요의 활약을 동기부여나 자극제로 삼아 지금의 위기를 기회로 바꿀 필요가 있다.


또 다른 오하이오 스테이트 대학 출신의 불운아, 마이클 레드

오든과 콘리 주니어의 선배이자 오하이오 스테이트가 배출한 최고의 슈터 레드도 후배들과 마찬가지로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시즌이 시작한지 단 4경기 만에 발목 부상으로 경기에 나서지 못하고 있는 것. 리차드 제퍼슨의 영입과 모 윌리엄스의 트레이드 등으로 팀을 새롭게 꾸린 첫 시즌임을 고려하면 레드의 이탈이 더욱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레드의 복귀는 14일 인디애나 페이서스 전으로 예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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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클리퍼스는 L.A 레이커스와 스테이플스 센터(Staples Center)를 홈구장으로 함께 쓰고 있는 구단이다. 하지만 기나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 구단 레이커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너무나도 초라한 팀 역사와 시원찮은 성적 때문에 대표적인 비인기구단, 만년 꼴지 구단으로 인식되어 왔다. 게다가 역대 구단주들의 형편없는 투자와 팀 경영때문에 '짠돌이 구단', '유망주들의 무덤'으로 인식되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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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NBA에 첫 발걸음을 드리운 건 70-71시즌으로,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가 그들과 NBA 입단 동기생 프랜차이즈들이다. 당시에는 뉴욕 근처 버팔로(Buffalo)라는 작은 도시를 프랜차이즈로 한 "버팔로 브레이브스(Buffalo Braves)"란 이름으로 출범을 했고, NHL의 버팔로 세이버스(Sabres)와 홈구장(Buffalo Memorial Auditorium)을 같이 썼다.

초대 감독은 과거 시라큐즈 내셔날즈(역주: Syracuse Nationals, 현 필라델피아 76ers의 전신)의 전설적인 선수였던 돌프 쉐이즈(Dolph Shayes)였다. 하지만 신생팀이 늘 그렇듯 그들의 초반 행보는 갓 전입온 이등병마냥 어리버리했다. 데뷔 첫 해 같은 내무반 동기생들인 이병 클블, 이병 포틀과 함께 리그 꼴찌 1, 2, 3등을 사이좋게 나눠가진 이병 버팔로는 첫 3시즌동안 도합 65승을 거두며 NBA 내무반 바닥을 열심히 닦았다. 72-73시즌, 팀 성적은 21승 61패에 그쳤지만, 향후 팀의 미래를 바꿔놓는 두 거목이 버팔로에 뿌리를 내렸다. 한 명은 훗날 포틀랜드를 NBA 우승으로 이끌기도 한 명장 잭 램지(Jack Ramsey) 감독, 그리고 또 한명은 그해 신인상을 수상하며 혜성같이 등장한 밥 맥아두(Bob McAdoo)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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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74시즌이 시작하자 버팔로는 이제 더이상 고참팀들의 갈굼에 시달리는 약체가 아니었다. 램지 감독의 뛰어난 지휘력 하에 시작된 버팔로의 질주는 맹렬했다. 이제 고작 2년차인 맥아두는 평균 득점 30점을 넘기며 리그 득점왕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고, 팀 성적은 전년도의 딱 두배인 42승으로 급상승했다. 창단 4년만에 플레이오프 무대에 처녀 출전한 버팔로는 비록 전통 명문 보스턴 셀틱스에게 컨퍼런스 준결승에서 2-4로 무릎을 꿇었지만 그들의 선전은 괄목상대할만했다.

용감한 소떼들의 질주는 이듬해에도 계속되었다. 맥아두는 여전히 발군의 득점력을 선보이며 평균 34.5득점을 넣어 2년 연속 득점왕에 올랐고, 시즌 MVP까지 차지하며 리그 최고의 선수로 우뚝 섰다. 버팔로는 리그에서 세번째로 많은 49승을 거두며 작년의 선전이 '리얼'임을 입증했다. 플레이오프에선 엘빈 헤이즈(Elvin Hayes), 웨스 언셀드(Wes Unseld)가 버티고있던 70년대 강호 워싱턴 불리츠와 컨퍼런스 준결승에서 혈전을 벌인 끝에 3-4로 아쉽게 패하고 말았지만, 그들의 미래는 참으로 밝아보였다.

75-76시즌에도 버팔로의 선전은 계속되었다. 팀 성적은 46승으로 전년도에 비해 약간 주춤하긴 했지만 3년 연속 플레이오프 출석부에 이름을 올렸고, 맥아두는 3년 연속 30+ 득점을 하며 또다시 득점왕에 올랐다. 플레이오프에선 1라운드에서 필라델피아 76ers를 꺾으며 컨퍼런스 준결승에서 보스턴과 격돌했지만 2년 전과 같이 2-4로 패해 탈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 전도유망한 용감한 소떼들에게 예기치못한 끔찍한 재난이 찾아왔다. 75-76시즌이 끝나고 당시 구단주였던 폴 스나이더(Paul Snyder)는 팀을 팔기 위해 매물로 내놨다. 팀 성적은 괜찮은 편이었지만 워낙에 버팔로가 스몰 마켓이다보니 티켓 판매만으로는 적자 운영을 면키 힘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스나이더는 버팔로 구단을 재력가인 존 브라운(John Brown)에게 팔았다. 존 브라운. 참 하찮고 평범한 미국식 이름이지만 농구계에 다시 있어서는 안될 해충같은 이름이기도 하다.

브라운은 KFC를 세계적인 패스트푸드 체인점으로 성장시킨 수완 좋은 사업가였고, ABA의 명문 구단 켄터키 콜로널스(Kentucky Colonels)를 소유한 경력도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농구란 혼이 담긴 스포츠가 아닌 그저 돈벌이 수단에 불과했다. 그는 팀 팔기에 여념이 없던 스나이더에게 버팔로 구단을, 지금으로 치면 NBA 선수 미드레벨 연봉 정도인 620만불이라는 제법 저렴한 가격에 사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헐값 매도의 배경에는 구단 운영으로 생기는 수익금 일부를 스나이더에게 나눠줘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있었다. 팀을 구한 브라운은 구단 운영으로는 돈벌기가 영 신통치 않은 걸 보고는 스나이더에게 줄 돈이 너무 아깝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자기 돈을 덜쓰고 스나이더 몫을 떼어 줄 수 있는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그의 계획은 너무나도 끔찍했다. 바로 팀 내에서 가장 시장 가치가 있는, 3년 연속 득점왕을 차지했던 팀의 심장인 슈퍼 스타 밥 맥아두를 딴 구단에 팔아먹는 것이었다.

결국 브라운은 자신의 호주머니를 지키기 위해 맥아두를 76-77 시즌 도중 뉴욕으로 현금 + @를 받고 트레이드해버렸다. +@로 받아온 선수는 뉴욕의 주전 센터 존 지아넬리(John Gianelli)였는데, 그의 시즌 기록은 평균 10득점, 9리바운드였다. 3년 연속 리그 득점왕에 MVP도 차지했던, 당대 최고의 슈퍼 스타를 데려 온 댓가가 바로 평범한 센터 하나와 구단주 뱃속으로 들어갈 모종의 현금이 되버린 것이다.

상상해보시라. 만약 클리블랜드가 르브론 제임스를 뉴욕으로 팔아넘기면서 그 댓가로 데이빗 리를 얻어온다면? 레이커스가 코비 브라이언트를 시카고로 팔아넘기면서 그 댓가로 드류 구든을 얻어온다면? 그리고 이런 말도 안되는 거래를 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구단주의 개인 재산 부풀리기때문라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 않은가! 맥아두의 활약 속에 3년 연속 호성적을 거뒀던 버팔로의 성적은 30승 52패로 곤두박질쳤고, 플옵 연속 진출은 3년으로 끝나고 말았다. 어처구니없는 트레이드에 분노한 팬들은 모두 등을 돌렸고, 맥아두가 한창 뛰던 시절 리그 흥행에서 상위권을 차지했던 버팔로의 티켓 판매는 리그 최하위 수준으로 추락해버렸다.

브라운이 몰고 온 재난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브라운은 구단주에 취임하자마자 팀을 3년동안 잘 이끈 명장 잭 램지를 해고하고 대신 조 멀라니(Joe Mullaney)를 감독에 앉혔다. 멀라니는 전 ABA 켄터키 콜로널스 감독 출신으로, 브라운과는 이전부터 구단주와 감독으로 인연을 맺었었다. 이른바 낙하산 식 코드 인사인 것이다. 명장 램지를 내친 낙하산 인사의 결과는 과연 어땠을까? 멀라니는 29경기에서 11승 18패의 초라한 성적만 기록한 채 경질되었고, 이후 두 명의 감독이 잇달아 팀을 맡았지만 팀의 추락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구단주 하나 잘못 온 덕분에 불과 1년만에 팀의 좌우 기둥이던 감독과 에이스가 모두 사라져버린 것이다.

또한 시즌 초 버팔로는 ABA의 파산으로 인한 확장 드래프트를 통해 NBA의 포틀랜드에 지명되었던 젊은 모제스 말론(Moses Malone)을 트레이드로 데려왔지만, 말론은 단 두 게임만 뛴 채 미래의 1라운드 픽 2개를 얻는 조건으로 다시 휴스턴 로케츠으로 트레이드되었다. 그리고 바로 두 시즌 뒤에 말론은 휴스턴에서 MVP에 등극하며 리그 역사상 손꼽히는 레전드 센터가 되었다. 시즌 도중 맥아두를 잃었지만 드래프트에서 애드리안 댄틀리(Adrian Dantley)라는 괜찮은 신인을 뽑았고, 댄틀리는 4년전 맥아두가 그랬던 것처럼 신인왕을 차지하며 맥아두를 잃은 슬픔에 빠진 버팔로에 한줄기 희망이 되나 싶었다.

하지만 이게 웬걸... 댄틀리는 76-77 시즌 종료 후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빌리 나이트(Billy Knight)와 트레이드되고 말았다. 물론 그때 당시만 해도 나이트는 리그 득점 2위(26.6득점)을 기록했던 특급 스윙맨으로 루키 댄틀리보다 가치가 떨어지는 선수는 아니었다. 결국 나이트는 버팔로에서 불과 1시즌만 뛴 채 트레이드되었고, 이후 평범한 스윙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에 반해 댄틀리는 훗날 유타에서 득점왕까지 올랐고 얼마전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되었다. 

비록 말론과 댄틀리의 이적은 앞서 맥아두처럼 꼭 돈을 노리고 저지른 일은 아니었지만 팀에 꼭 필요한 트레이드라고는 볼 수 없었다. 또한 70년대에는 구단주의 파워가 지금보다 훨씬 막강했었고, 이런 뻘짓 무브들의 배경에는 분명 브라운의 저주받을 입김이 작용했을 터이다.

이처럼 한때 잘나가던 신생팀 버팔로는 존 브라운이라는 해충 구단주가 온지 1년여만에 그만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다. 멀쩡한 감독을 낙하산 인사로 바꾸었고, 구단주 개인 재산을 아끼기 위해 간판스타를 다른 팀으로 팔아넘기길 주저하지 않았다. 이뿐인가. 미래에 명전에 오를 젊은 유망주를 1년 안에 둘씩이나 트레이드 해버렸다. 결국 구단주가 안티였던 버팔로는 급속히 몰락의 길을 걸었다. 만신창이가 된 팀의 에이스 자리는 버팔로 주립대 출신으로 드래프트 7라운드의 전설인 랜디 스미스(Randy Smith)가 이어받았지만 맥아두의 공백을 메우긴 역부족이었다.

77-78시즌 27승에 그친 버팔로는 여전히 브라운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만행으로 텅텅 비어버린 관중석을 바라보던 브라운은 이 돈벌이 안되는 구단을 팔아버릴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마치 잠자리 날개, 다리 다 떼어놓고는 이제 시시하다고 발로 밟아버리는 잔인한 9살짜리 꼬마처럼 말이다.

장사 수완 만큼은 얄미우리만치 좋았던 그는 보스턴의 구단주 어브 레빈(Irv Levin)에게 손길을 뻗쳤다. 영화 제작자 출신인 레빈은 가능하면 자신의 사업장인 헐리우드에 가까운 서부 지역에 자신의 농구단을 가지기를 원했지만 그렇다고 전통 명문인 보스턴 프랜차이즈를 서부로 옮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를 간파한 브라운은 자신이 소유한 버팔로 구단과 레빈이 소유한 보스턴 구단을 서로 맞바꾸는 제안을 했다. 레빈 입장에서 보스턴 구단은 연고지 이전이 사실상 불가능하지만, 신생팀인데다가 연고지가 스몰 마켓인 버팔로 구단은 맘만 먹으면 서부 지역으로 옮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버팔로 구단과 버팔로 시 측은 예전에 구단의 티켓 판매가 일정 기준에 미달할 경우, 연고지를 옮길 수도 있다는 계약을 맺은 바도 있었기에 명분은 충분했다.

재밌는 사실은 두 구단주간의 스와핑 거래에서 중간에 다리를 놓은 인물이 바로 훗날 NBA 총재가 되는 데이빗 스턴(David Stern)이라는 점이다. 당시 스턴은 리그에서 컨설턴트로 활약하고 있었다. 결국 거래는 성사되어 브라운은 보스턴의 구단주로, 그리고 레빈은 버팔로의 구단주로 서로 자리를 맞바꿨다. '재앙신' 브라운의 이적은 버팔로 구단에겐 마치 앓던 이가 빠진 것과 같은 환희의 순간이었으나, 동시에 정든 버팔로 시와의 씁쓸한 이별의 예고편이기도 했다.

그럼 보스턴으로 건너간 브라운의 행보는 이후 어땠을까? 브라운은 버팔로에 이어 보스턴까지 제멋대로 말아먹으려고 마수를 뻗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소유했던 버팔로 구단에서 입맛에 맞았던 선수들을 데려오기 위해 기존의 보스턴 선수들과 대규모 트레이드를 단행해버렸다. 팀의 단장인 레드 아워백(Red Auerbach)과는 단 한마디 상의도 없이 말이다. 갓 부임한 풋내기 구단주가 셀틱스의 상징과도 같은 자신을 무시한데 대해 아워백은 분노했고, 이런 더러운 인간 밑에서 단장 노릇하느니 뉴욕 닉스의 단장으로 가버릴까 하는 고민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만류로 생각을 고쳐먹은 아워백은 대신 구단주 퇴진운동을 주도하며 자신을 건드린 댓가를 톡톡히 보여주기로 했다. 결국 브라운은 1년도 채 못채우고 보스턴 구단주 자리에서 떠밀리듯 물러나야 했다. 고소하기가 참 카라멜콘과 땅콩이다.

이후 브라운은 정치인으로 켄터키 주지사에 당선되는 등 성공한 정치가이자 재력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적어도 농구팀 구단주로서 그는 역사상 최악의 인물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버팔로에서 불과 2년 동안 구단주로 있으면서 그가 저지른 만행을 다시 한번 정리해보자.

1. 팀을 3년 연속 플옵으로 이끈 명장 잭 램지 감독을 내치고 자신의 측근을 낙하산 감독으로 데려옴.
2. 자기 재산 아끼기 위해 3년 연속 득점왕을 차지한 팀의 슈퍼 스타 밥 맥아두를 뉴욕에 팔아먹음.
3. 모제스 말론을 포틀랜드에서 애써 데려오고도 이내 휴스턴으로 트레이드해버림.
4. 신인왕 애드리안 댄틀리를 고작 한 시즌만에 인디애나로 트레이드해버림.

이런 일들이 자신이 응원하는 팀에 불과 2년 사이에 마구 벌어진다고 상상해보자. 당시에는 아직 인터넷 개통 전이던게 브라운에겐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다시 버팔로 얘기로 돌아와서... 새로 버팔로를 인수한 신임 구단주 레빈은 자신의 바램대로 연고지를 서부 지역의 샌디에이고(San Diego)로 이전했다. 그러면서 프랜차이즈 이름도 태평양을 가로질러 항해하는 범선이라는 뜻의 "클리퍼스(Clippers)"로 바뀌게 되었다. 과연 샌디에이고 클리퍼스는 과거 버팔로 시절 존 브라운의 악몽에서 벗어나 새출발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의 출항은 막 돛을 드리웠지만 웬지 앞으로의 항해도 만만하지 않아 보였다. (2부에서 계속됩니다)


버팔로 브레이브스의 통산 성적

70-71시즌 22승 60패 승률 .268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감독 돌프 쉐이즈(22-60)
71-72시즌 22승 60패 승률 .268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감독 돌프 쉐이즈(0-1), 조니 맥카티, 22-59)
72-73시즌 21승 61패 승률 .256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감독 잭 램지(21-61) * 밥 맥아두의 데뷔 시즌
73-74시즌 42승 40패 승률 .512 플레이오프 컨퍼런스 준결승 진출, 감독 잭 램지(42-40)
74-75시즌 49승 33패 승률 .598 플레이오프 컨퍼런스 준결승 진출, 감독 잭 램지(49-33) *밥 맥아두의 MVP시즌
75-76시즌 46승 36패 승률 .561 플레이오프 컨퍼런스 준결승 진출, 감독 잭 램지(46-36)
76-77시즌 30승 52패 승률 .366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감독 조 멀라니(11-18), 밥 맥키넌(3-4), 테이츠 로크(16-30) *존 브라운이 구단주로 부임, 밥 맥아두를 뉴욕으로 트레이드한 시즌
77-78시즌 27승 55패 승률 .329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감독 코튼 피츠시몬즈(27-55)

8시즌 통산 259승 397패 승률 .395, 플레이오프 3회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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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스포츠 중계방송을 시청하면서 관심을 갖는 것 가운데 하나가 '어느 방송사에서 중계를 하며, 캐스터와 해설자는 누구인가'하는 점이다.

지난 베이징올림픽에서 공중파 3사 모두가 각자 야구경기를 중계방송한 가운데서도 한 방송사의 시청률이 압도적으로 높았던 부분에서 알 수 있듯, 같은 경기를 지켜보더라도 중계진이 어떻게 게임의 내용을 설명하느냐에 따라 시청자가 받아들이는 느낌은 달라지게 된다. 가령 상황전달에만 치중하는 캐스터보다 적당히 우스갯소리를 곁들여가며 맛깔나게 이야기하는 캐스터가 더 좋은 반응을 얻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NBA의 경우에도 공중파, 케이블, 그밖에 수많은 지역방송사의 캐스터들이 중계를 담당하고 있지만, 오랫동안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고, 또 기억에 남는 이는 매우 드물다. 지금부터 그러한 캐스터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나가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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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전 면도를 받고 있는 젊은 마브 알버트의 모습


마브 앨버트(TNT, YES 메인 캐스터)

NBA Live 게임 시리즈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이기도 한 그는 1941년에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대학 졸업 후 1965년부터 NHL 팀인 뉴욕 레인저스의 라디오중계를 맡게 되면서 오랜 커리어를 시작했다. 2년 후에는 뉴욕 닉스의 라디오중계를 담당하며 NBA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농구 외에도 다양한 스포츠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던 앨버트는 라디오와 TV를 넘나들며 야구, 미식축구, 아이스하키, 테니스, 복싱 등 여러 종목의 중계방송을 훌륭하게 소화해내며 명성을 쌓아나갔다.

1970년대에는 그런 능력을 인정받아 공중파 방송사인 NBC와 계약을 맺고 전국구 캐스터로서의 입지를 다져나갔다. 하지만 당시에는 CBS가 NBA의 전국중계를 맡고 있었으므로 앨버트는 NBC에서 야구와 미식축구 경기에 중점적으로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뉴욕에 기반을 둔 스포츠팀을 전담한 MSG 네트워크와의 관계를 계속 이어나가며 뉴욕 닉스의 경기는 항상 그의 목소리를 통해 방송되었다.

1989년부터 NBC는 'NBA on NBC'라는 제목하에 NBA의 공중파 중계를 담당하게 되었고, 메인 캐스터로 마브 앨버트가 낙점되며 본격적으로 그의 시대가 열렸다. 우리들에게도 친숙한 <Roundball Rock>이라는 테마송으로 시작되는 NBC의 NBA 중계방송은 그와 함께 신화를 써내려갔다. 적당히 탁한 목소리에 중요한 순간마다 약간의 흥분이 섞인 하이톤으로 '예스!'를 외쳤던 그의 음성은 수많은 명승부와 더불어 팬들의 기억 속에 자리잡게 되었다. 마침 도래한 마이클 조던의 시대와 겹치면서 그가 맡고 있던 NBC의 시청률은 연일 기록을 경신해나갔다. 공교롭게도 그가 가장 사랑했던 뉴욕 닉스는 플레이오프에서 번번히 조던의 불스에 패해 무릎을 꿇었지만.

영원할 것 같던 마브 앨버트의 시대는 그가 1997년에 섹스스캔들에 휘말리게 되면서 막을 내리고 말았다. 이로 인해 그는 캐스터 인생에 있어 최악의 오점을 남겼으며, 1997 파이널이 끝난 후 NBC로부터도 해고를 당하며 큰 불행을 겪어야했다. 그를 대신해 마이크를 잡은 사람은 경기 시작전에 프리게임을 진행하던 밥 코스타스였다. 1998 파이널 유타와 시카고의 대결 역시 나름대로 명진행자였던 코스타스가 중계를 담당했지만, 위대했던 농구황제의 '더샷'을 마브 앨버트가 특유의 하이톤으로 설명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불명예는 남겼지만 매력적인 목소리와 능력에는 변함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케이블방송사인 TNT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1999년부터 커리어를 다시 이어나갔다. 조던의 은퇴 후 시청률 하락으로 고심하던 NBC는 2000-01 시즌에 앨버트를 메인 캐스터로 복직시켜 마이크를 잡게 했다. 이듬해 NBC가 NBA 중계에서 손을 뗄 때까지 마브 앨버트는 NBA on NBC의 처음과 끝을 함께 했다.

이후 2002-03 시즌부터 그는 다시 TNT의 메인 캐스터로서 명성을 이어나가고 있다. 2004-05 시즌까지 뉴욕 닉스와 함께 했던 그는 뉴욕의 부진한 성적의 원인을 놓고 구단 경영진에 대해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가 해고당하며 40년에 가까운 뉴욕 닉스와의 인연을 청산했다. 대신 2005-06 시즌부터는 YES 네트워크를 통해 뉴저지 넷츠의 경기를 중계해오고 있다.


칙 헌(1916~2002. LA 레이커스 전담 캐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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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레이커스, 피닉스 선즈, 댈러스 매버릭스, 마이애미 히트에서 활약했던 A.C. 그린은 역대 최고인 1,192경기 연속출장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MLB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스타였던 칼 립켄 주니어는 2,632경기 연속출전으로 이 부문 최고기록을 가진 선수이다. 두 선수 모두 각자의 종목에서 철인으로 불릴만큼 경이적인 기록을 남긴 이들이지만, 지금 소개할 칙 헌은 그보다도 더 위대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1965년 11월 21일부터 2001-02 시즌 중반까지 3,338경기를 연속으로 중계하며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대기록을 수립했다. 무려 36년간 단 한 경기도 빠지지 않고 마이크를 잡은 것이다.

그밖에도 칙 헌은 농구용어 창안에 있어서도 선구자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슬램덩크, 앨리웁, 에어볼, 가비지 타임, 핑거롤, 트리플더블, 기브 앤 고 등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용어를 만들어냈으며, 각종 비유적인 표현으로 경기를 더욱 재미있게 중계하는 데 있어 1인자였다. 게임이 레이커스의 승리로 기울어졌다고 판단됐을 때 그가 즐겨 사용했던 멘트인 "This game's in the refrigerator, the door is closed, the lights are out, the eggs are cooling, the butter's getting hard, and the Jell-O's jigglin'!"은 그의 팬들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문구로 뽑힌바 있다.

훨씬 나이가 어렸던 선수들과도 스스럼없이 지냈고, 윌트 체임벌린에게 'The Stilt'라는 별명을 지어준 것도 그였으며, 제임스 워디에게 'Big Game James'라는 닉네임을 선사한 것도 그였다. 1961년에 처음 레이커스와 인연을 맺게 되어 2002 파이널에서 레이커스가 뉴저지 넷츠를 꺾고 3연패에 성공할 때까지 칙 헌은 엘진 베일러, 제리 웨스트, 윌트 체임벌린, 게일 굿리치, 카림 압둘자바, 매직 존슨, 제임스 워디, 샤킬 오닐, 코비 브라이언트 등 레이커스를 빛낸던 스타, 레전드들과 영광의 순간을 함께 했다.

3연패의 기쁨이 채 가시지않았던 8월, 칙 헌은 자택에서 머리에 심각한 부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되었고, 두 차례나 뇌수술을 받았으나, 8월 5일에 향년 85세로 세상과 이별을 고했다.

그는 전국방송의 캐스터는 아니었지만, 탁월한 자기관리와 그 누구보다도 뜨거운 열정으로 40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LA 레이커스와 함께 하며 전설적인 캐스터로서 이름을 날렸다. 1991년에 명예의 전당에도 올랐던 그의 이름은 스포츠 캐스터의 귀감으로서 영원히 기억에 남을 것이다.


쟈니 모스트(1923~1990. 보스턴 셀틱스 전담 캐스터)

이외에도 1953년부터 1990년까지 보스턴 셀틱스의 경기를 중계했으며, 1965년 동부컨퍼런스 파이널 필라델피아 76ers와의 7차전에서의 "Havlicek stole the ball! Havlicek stole the ball! It’s all over! It’s all over!"이라는 코멘트로 잘 알려진 쟈니 모스트는 보스턴의 팬들이 TV로 경기를 지켜보면서도 소리를 끄고 그의 라디오 중계를 들었을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캐스터였다.

현재 보스턴 경기의 중계진은 중립적이기보다는 편파적이기로 악명이 높은데, 이는 모스트가 캐스터를 맡았던 시절부터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일이다. 게다가 그는 매우 공격적이기까지 했다.

1980년대 배드보이스 시절의 디트로이트 피스톤스 선수들이 피지컬한 플레이로 보스턴 선수들을 넘어뜨릴 때마다 그는 디트로이트 선수들을 맹비난했으며, 보스턴과 레이커스의 경기에서 매직 존슨이 심판에게 장시간동안 어필하자 모스트는 매직에게 '울보'라는 별명을 붙이고 80년대 내내 이를 써먹었다. "울보가 노룩패스를 했습니다", "울보가 리바운드를 잡았습니다"하는 식이었다.

다 쉰듯하지만 힘있는 목소리로 셀틱스 왕조의 승리를 전달했던 쟈니 모스트는1990년 마이크를 놓을 때까지 열정적으로 방송에 참여했던 캐스터계의 레전드였다. 1993년 1월 3일, 심장마비로 인해 69세의 나이로 타계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앞으로도 보스턴의 영광스러운 장면들과 함께 팬들의 뇌리에 남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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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 포워드 안토니오 맥다이스가 친정팀 디트로이트 피스톤스로 돌아갈 전망이다. 지난 4일 덴버와의 트레이드로부터 정확히 일주일 만이다.

덴버는 알렌 아이버슨을 대가로 첸시 빌럽스와 안토니오 맥다이스를 영입했지만 결국 두 마리 토끼를 잡는데는 실패했다. 그간 맥다이스를 위해 주완 하워드까지 방출하는 성의를 보여 왔지만 결국 강경한 본인 의지에 의해 방출 절차를 밟았다.

에이전트 앤디 밀러는 덴버에서 뛸 가능성에 대해 “가능성은 제로”라 밝히며 은퇴까지 불사하겠다는 맥다이스의 의견을 따랐다. NBA 규정에 의해 전 소속팀과의 계약은 30일 뒤에나 가능하여 디트로이트 복귀는 빨라야 12월 말에나 이루어 질 것으로 보인다. 마이클 커리 감독은 일찌감치 “맥다이스의 트레이드로 팀이 허전했다. 그가 돌아오길 진심으로 바란다”며 그의 복귀를 시사했다.

이렇게까지 결정을 내린 배경에는 맥다이스와 덴버의 악연이 한 몫 했다. 지난 1995년 덴버에서 데뷔한 맥다이스는 폭발적인 운동신경으로 장래가 촉망되던 유망주였다. 세 번째 시즌을 맞이하여 피닉스 선즈로 이적한 그는 이듬 해 덴버로 돌아왔지만 부상으로 인해 재 트레이드 되는 악몽을 겪었다. 때문에 친정팀에 좋은 감정을 가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번 시즌 출장한 2경기에서 평균 7점 4리바운드로 건재를 과시한 맥다이스의  복귀는 아이버슨이 가세한 디트로이트의 전력에 적잖은 힘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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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타 재즈의 주전 센터를 담당하고 있는 메멧 오쿠어가 11일(이하 한국시간) 고향 터키로 돌아갔다.

따라서 가족의 건강문제로 출국길에 오른 오쿠어의 출장은 당분간 어렵게 됐다. 유타 구단측은 정확한 내막과 복귀시기에 대해 일체 함구하고 있다.

오쿠어는 이번 시즌 경기당 15.5점과 6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좋은 활약을 이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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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엄청난 인기를 한몸에 받았던 백인 선수가 있었다.

그는 에미넴을 연상시키는 수려한 외모와 화려함을 넘어선 예술적인 기술로 백인 선수들에 대한 편견을 무참히 깨버렸다. 누구도 표현해낼 수 없는 플레이를 그는 너무나도 쉽게 소화해냈으며 그가 뿌리는 패스마다 관중들은 탄성을 자아냈다.

길거리 농구 출신이기도 했던 그의 별명은 바로 화이트 초콜릿, 자신만의 특별한 상상력을 코트 위에서 자유자재로 연출해냈던 포인트가드 제이슨 윌리엄스(Jason Williams)다. 필자는 농구라는 스포츠를 예술로 표현해냈던 코트 위의 화가, 제이슨 윌리엄스의 농구 인생을 재조명 하고자 한다.


Before the Big Bang

미국 동부 웨스트 버지니아주의 벨레(Belle)라는 작은 동네에서 자란 윌리엄스는 어렸을때부터 농구와 미식축구에서 부각을 나타냈다. 하지만 소규모의 도시에서 자란 탓에 윌리엄스는 자신의 실력과 명성을 떨칠 기회가 없었으며 결국 Division I 대학교에서 스카우팅 제의 하나 받지 못한채, Marshall University라는 조그마한 대학교에서 농구생활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1996년, 플로리다 대학교에 새로 부임한 빌리 도노반(Billy Donovan) 감독은 윌리엄스의 재능을 알아봤고, 그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했다. 윌리엄스는 결국 도노반 감독의 러브콜에 응하며 플로리다 대학교에 편입하게 된다. 97-98시즌, 그는 평균 17.1점, 6.7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그의 재능을 꽃피웠다. 하지만 그의 대학생활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는 불법 약물복용으로 인해 농구부에서 퇴출당하고 만다. 그리고 그의 짧막한 대학농구 생활은 막을 내렸다.


킹스와의 특별한 인연, 그리고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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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윌리엄스는 플로리다 대학 농구부 퇴출사건을 기회삼아 1998 NBA 드래프트에 참가하게된다. 그리고 새크라멘토 킹스는 그를 7번째로 지명하게 된다. 드래프트 당시 윌리엄스는 득점력이 뛰어난 포인트가드라는 평가를 받았었다.
 
잦은 턴오버와 불안정한 리딩을 단점으로 지적받았지만 윌리엄스의 가능성은 전문가들에게서 긍정적인 평가를 이끌어냈었다 (실제로 윌리엄스는 1998-99시즌 루키 퍼스트팀에 선정되며 자신의 가능성과 가치를 증명해냈다.)

당시의 새크라멘토는 윌리엄스를 비롯해 크리스 웨버, 블라디 디박, 페쟈 스토야코비치 등 새로이 팀에 합류하게된 선수들을 많이 보유하고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킹스를 순식간에 강팀으로 변모시켰다.

팬들은 이러한 급격한 변화를 즐겁게 받아들였고, 윌리엄스의 존재 역시 팬들에게 서서히 부각되었다. 그 중심에는 윌리엄스의 화려한 플레이가 있었다. 멋들어진 킬패스, 크로스오버 드리블등 화려한 플레이를 선보인 윌리엄스는 전국구 스타가 되었으며 그와 함께 새크라멘토 역시 전국적인 인기를 얻게되었다.

팀 동료였던 크리스 웨버는 윌리엄스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었다. “그에게서 패스를 받으려면 단 한순간이라도 한눈을 팔면 안됩니다. 언제 어디서 패스가 들어올지 모르거든요.” 그만큼 윌리엄스의 패스는 예측불허였다.

샤킬 오닐은 윌리엄스를 “피스톨 핏의 힙합버전”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또한 그의 플레이는 거의 매일 스포츠뉴스 하일라이트의 단골이었다. 특히 대인마크의 달인인 게리 페이튼을 꼼짝 못하게 만든 돌파 장면은 윌리엄스의 대표적인 명장면이다. 루키-소포모어 올스타전 대결에서 선보인 팔꿈치 패스 역시 윌리엄스의 특별한 작품중 하나이다. 이 외에도 수없이 많은 송곳패스와 드리블 돌파 등등 새크라멘토 시절의 윌리엄스는 하일라이트 제조기라 불릴만큼 많은 명장면을 연출해냈다.

하지만 윌리엄스는 감독에게까지 사랑받는 플레이어는 아니었다. 화려한 플레이를 추구하는 대신, 그는 잦은 턴오버를 범했다. 특히 경기의 흐름을 깨는 플레이 덕분에 주전 포인트가드임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순간 항상 벤치를 지킬때가 많아졌다. 특히 2000년 LA 레이커스와의 플레이오프 시리즈에서 윌리엄스는 5경기 모두 4쿼터를 뛰지 못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잦은 턴오버는 그의 고질적인 문제였으며 1999-00 시즌에는 평균 7.3 어시스트라는 준수한 수치를 기록하긴 했으나 경기당 턴오버가 3.65에 육박할만큼 그는 불안정한 리딩을 선보였다. 이 모든것이 화려함에 치중한 그의 플레이 스타일의 결과물이었다.

결국 새크라멘토는 윌리엄스의 한계를 느꼈고 밴쿠버 그리즐리스와 트레이드를 단행하게 된다. 킹스는 윌리엄스와 닉 앤더슨을 그리즐리스에 내주는 대신, 포인트가드 마이크 비비와 3점슈터 브렌트 프라이스를 영입했다. 짧지만 화려했던 윌리엄스의 전성기가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멤피스, 그리고 변화의 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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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드 확정 이후, 밴쿠버는 멤피스로 연고를 옮기게된다. 윌리엄스는 멤피스 그리즐리스의 원년멤버로써 시즌을 시작하게 되었다. 윌리엄스의 이적으로 인해 멤피스 역시 팬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정작 윌리엄스 그 자신은 경기력의 발전이 더뎠다. 멤피스에서의 첫 시즌인 2001-02시즌, 평균 14.8득점 8.0어시스트를 기록하긴 했지만 턴오버 역시 평균 3.25로 고질적인 턴오버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2002-03시즌, 멤피스는 휴비 브라운을 새로운 감독으로 임명한다. 그리고 이것은 윌리엄스에게 큰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베테랑 감독이던 브라운은 10인 로테이션을 가동하며 윌리엄스의 출전시간을 제한했다. 그리고 그는 윌리엄스에게 변화를 요구했다. 윌리엄스는 그 변화를 받아들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슬슬 윌리엄스는 화려한 플레이 대신 안정적인 플레이를 선보였다. 더이상 윌리엄스에게서 하일라이트 성 플레이가 나오지 않자 몇몇 팬들은 실망하기도 했지만 브라운 감독은 오히려 흐뭇해했다. 02-03시즌 윌리엄스의 경기당 턴오버 갯수는 2.23, 그리고 그 다음해에는 평균 1.89 턴오버를 기록하며 자신의 변화를 증명해냈다.

윌리엄스의 각성과 함께 멤피스 역시 고공행진을 이어갔다. 2003-04시즌, 팀 역사상 최다승인 리그 50승을 기록하며 창단 이후 첫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며, 이후 3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이라는 쾌거를 달성하게 된다. 만년꼴지에서 서부의 신흥강호가 되기까지에는 윌리엄스의 공이 컸다.

윌리엄스는 플레이오프에서도 그 실력을 발휘했다. 특히 2005년 피닉스 선즈와의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윌리엄스는 실질적인 에이스로 평균 17점을 기록하였다. 특히 선즈와의 1라운드 4차전에서 스티브 내쉬(Steve Nash)를 농락하던 장면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것이다.

멤피스는 윌리엄스와 2시즌 연속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기는 했으나 단 한번도 이기지 못한채 1라운드에서 탈락했다. 결국 구단은 더욱 더 강력한 팀을 만들기 위해 팀내 주축이었던 윌리엄스와 제임스 포지를 마이애미 히트의 에디 존스와 트레이드를 하게 된다. 멤피스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윌리엄스였지만 또 한번 팀을 옮길 수 밖에 없었다.


마이애미와 함께한 황혼기, 그리고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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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애미는 드웨인 웨이드의 원활한 플레이를 위해 그를 보좌해줄수 있는 포인트가드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웨이드의 백코트 파트너로 그들은 제이슨 윌리엄스를 점찍었고 결국은 윌리엄스를 데려오는데 성공했다.

윌리엄스의 합류로 인해 마이애미는 2005-06 시즌의 강력한 우승후보로 떠올랐다. 당시 윌리엄스의 트레이드에는 샤킬 오닐의 입김이 작용했다고 한다. 그 이유야 어찌됬건 윌리엄스는 웨이드, 샤킬오닐등과 함께 마이애미를 우승으로 견인했다.

윌리엄스는 포인트가드로써 마이애미의 공격을 원활하게 이끌었고, 녹슬지 않은 돌파와 패싱능력을 선보이기도 했다. 마이애미에서의 3년동안 윌리엄스의 평균 턴오버 수치는 채 2개가 되지 않았다. 이는 얼마나 윌리엄스의 안정된 경기운영능력을 대변한다.

우승한 그 다음 시즌인 2006-07시즌, 마이애미는 다시한번 강력한 동부지구 우승후보로 떠올랐으나 동부지구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시카고 불스에게 스윕을 당하고 만다. 불스와의 1라운드에서 윌리엄스는 최악의 부진을 겪었으며 (평균 5.8점 3.5 어시스트) 그의 NBA 커리어 마지막 시즌인 2007-08시즌에는 부상과 경기력 저하로 인해 최악의 시즌을 겪었다.

2008년 여름, 자유계약선수(FA)로 풀린 윌리엄스는 클리퍼스와 계약하며 팬들의 기대를 모았지만 돌연 은퇴를 선언, 10년간의 NBA 선수생활을 마감하게 되었다. 은퇴 이유는 동료 선수들과 감독은 물론 구단 관계자들도 모른다고 한다. 32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선언한 은퇴이기에 필자를 포함 수많은 팬들이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A Little Extra

윌리엄스는 잦은 구설수에 오른 선수였다.

2001년 2월 8일, 새크라멘토 소속이던 윌리엄스는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와의 원정경기에서 어느 한 중국인 팬에게 인종차별적 발언으로 말다툼을 벌였다. 결국 NBA는 그에게 $15,000의 벌금을 물렸다. 이 사건 이후, 나이키는 예정되있던 윌리엄스의 TV 캠페인을 취소하기까지 했다. 또한 윌리엄스는 샌안토니오와의 원정경기에서도 어느 한 팬과 강도높은 말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또한 그는 금지약물 치료제 복용으로 인해 2000-01시즌 5경기 출장정지 조치를 받기도 했다.

그는 새크라멘토에서 멤피스로 트레이드 되었을때, “We suck” 이라는 강도높은 발언을 포함, 그는 당시 리그 최약체로 꼽혔던 멤피스로 트레이드 되는것에 대한 불만을 언론에 토로했으며, 2005년 피닉스와의 플레이오프 시리즈 이후 “난 행복하다. 난 드디어 집에가서 아내와 아이들을 볼수 있게 된다. 이 모든것들은 나에게는 우선순위가 아니다” (“I'm happy. I go home and see my kids and my wife and I'm OK. All of this shit is secondary to me.”) 그의 프로의식에 대해 많은 비판을 받아야 했다.

윌리엄스가 코트 내에서 악동이었다면 코트 외에서는 조용한 신사였다. 그는 자신의 사생활이 언론에 노출되는것을 꺼려했으며 실제로 윌리엄스의 사생활에 언론에 직접적으로 노출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또한 윌리엄스는 좋은 팀동료라는 평가를 받는다. 멤피스에서 윌리엄스의 팀 동료이기도 했던 윌 솔로몬은 윌리엄스를 최고의 동료(“The best teammate ever)로 꼽기도 했다.


Writer’s Note

한때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데뷔했던 당돌한 악동 제이슨 윌리엄스. 독보적 인기를 얻기도 했으며, 수많은 하일라이트를 장식했지만 결국 그도 NBA를 떠났다. 사실 위대한 선수로 기억되는 일은 쉽지가 않다. 그럼 제이슨 윌리엄스는 NBA 팬들에게 어떠한 선수로 기억될까?

물론 윌리엄스는 위대한 선수는 아니었다. 스탯만 보고 평가하면 윌리엄스는 평범한 포인트가드다. 하지만 필자는 그가 특별한 선수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그는 “스포츠 = 팬서비스” 의 공식을 직접 몸으로 실천했으며 좋은 경기력을 보여줌과 동시에 관중들의 눈을 즐겁게 할줄 아는 선수였다. 이런 특별한 선수의 플레이를 더이상 볼수 없다니 아쉽기만 하다. 필자는 근 10년간 NBA에서 고생한 윌리엄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며 이 글을 마친다.


제이슨 윌리엄스(1998~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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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통산 679경기 출장(649선발)
평균 11.4득점, 2.4리바운드, 6.3어시스트, 31.2분 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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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NBA가 과거로부터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필자는 주저 없이 ‘격렬함과 터프함‘을 꼽을 것이다. 냉혹한 승부의 세계에서 반드시 지녀야할 덕목임에도 근대농구에서 그 자취를 감추고 있는 것은 개인적으로 무척 아쉬운 대목이다.

지난 날 NBA에는 성실한 일꾼들이 참으로 많았다. 구슬땀을 흘리며 코트 위를 누비고 있는 현역선수들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리그의 모든 팀들이 브루스 보웬 같은 선수들을 보유하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지금의 경기환경이 얼마나 유연해졌는지 수긍이 갈 것이다. 핸드체킹 룰이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에는 신체접족이 잦은 골밑은 하루하루가 전쟁과도 같아 박스아웃이나 스크린 같은 음지의 기술들을 잘 다루는 파워포워드의 가치가 매우 높았다. 때문에 투철한 경쟁의식은 물론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질 수 있는 진정한 사나이들이 넘쳐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파울 콜에 대한 수위가 높아지고 리그의 징계가 점차 강화되며 이 매력적인 남자들은 하나 둘씩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한때 NBA는 암묵적으로 난투극을 묵과하던 시기가 있었다. 물론 최악의 사태까지 수수방관하지 않았지만 누적되는 몸싸움으로 주먹다짐이 비일비재했다. 3심제가 도입되기 전에는 화의 근원이 될 만한 유치한 신경전도 미처 잡아내지 못했다. 그렇다고 마냥 울상만 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스스로가 마음을 독하게 먹고 생존법을 터득해야했다.

리바운드의 황제로 군림했던 데니스 로드맨은 ‘Bad as I wanna be'라는 자서전을 통하여 악명 높은 ’배드 보이즈‘에 대해 충격적인 사실들을 회고한 바 있다. 당시 로드맨은 “동료들 중 상당수가 거리의 싸움꾼 출신이었다. 어떻게 하면 상대에게 부상을 입힐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며 본인도 그에 대한 노하우(?)를 전수받았다는 후문이다. “마음만 먹으면 매일 밤 상대선수를 병원으로 보낼 수 있었을 것”이라는 로드맨의 증언은 과거의 NBA가 어떻게 돌아갔는지 생생하게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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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소개할 이는 승리를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투사 중에 투사였으며 미국 막노동꾼들을 일컫는데서 유래된 ‘블루컬러워커’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파워포워드이다. 그렇다. 눈치를 챈 분도 있겠지만 바로 찰스 오클리다. 그는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패트릭 유잉의 조력자로서 90년대 리그의 골밑을 누볐다. 특히 뉴욕 닉스의 원정 유니폼을 입는 날이면 영락없는 코트의 노동꾼 그 자체였다. 별명인 ‘Oak Tree' 역시 절묘한 작명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참나무는 단단한 재목으로 그 쓰임새가 매우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단단한 내구력과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던 오클리에게 더 없는 별명이다.

206cm의 키에 111kg의 몸무게로 기골이 장대했던 오클리의 신체적 단점은 탄력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의 경기에서는 덩크슛을 보기가 힘들었고 명장면만 모아놓은 하이라이트 필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공격리바운드에 의한 풋백 득점, 45도와 베이스라인의 중거리 슛이 주 득점수단일정도로 그는 수비에 특화된 선수였다. 

리바운드에 있어서 탄력도 하나의 필요요소이지만 절대적 요구사항은 아니다. 오클리는 타고난 하체 힘과 노련한 위치 선정으로 이를 극복했고 대학무대와 NBA의 골밑을 평정할 수 있었다. 버지니아 유니온 재학시절에는 평균 20.3점과 14리바운드로 빼어난 성적을 거두었는데 특히 마지막 졸업 시즌에는 17.3리바운드로 2부 디비전 1위를 차지하며 전문 리바운더로서의 이름을 만천하에 알릴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황제의 보디가드를 자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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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릭 유잉의 드래프트로 불리는 1985년,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에 의해 전체 9번으로 지명된 오클리는 당일 같은 팀에 지명 된 캘빈 던컨과 함께 시카고 불스로 트레이드 된다. NCAA 2부 리그에 속한 이유로 인지도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었지만 13번에 지명된 유타 재즈의 칼 말론이나 L.A 레이커스의 A.C 그린 등을 뒤로하고 당당하게 NBA에 입성한다. 당시 시카고는 떠오르는 신성 마이클 조던과 올랜도 울리지라는 정상급 스윙맨 듀오를 보유했지만 취약했던 로포스트의 전력 보강이 절실했고 오클리는 마지막 조각으로 더 없는 선택이었다.  

데뷔전 이후로 올스타 브레이크까지 벤치를 지켰던 루키 오클리는 시즌 중반부터 선발 파워포워드의 중책을 맡으며 마침내 그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특히 3월 한 달 동안 15.5점 13.8리바운드의 기염을 토하며 ‘이달의 신인‘에 선정되는 한편 팀을 진두지휘 하였다. 시카고는 간판스타 조던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오프 행 8번 티켓을 끊었는데 이 겁 없는 신인 포워드가 없었다면 꿈도 못 꿀 결과였다. 또한 인구에 꾸준하게 회자되고 있는 조던의 63점 경기는 존재하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오클리의 성공적인 데뷔 시즌은 리그에서도 인정되었고 유잉, 말론, 듀마스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며 올NBA 루키 팀에 선정되는 영광을 안겨준다. 언론에 “조던을 건드는 이가 있다면 내가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며 리그의 모든 팀에 선포하며 에이스의 신임도 얻었다. 모두가 꺼려하는 힘들고 더러운 일도 일선에 나서는 오클리의 존재는 더 없이 든든했고 미래는 밝아만 보였다. 하지만 오클리의 시카고 생활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잘못된 일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일일이 지적해왔고 이러한 오클리의 당당한 언행은 윗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사게 돼 결국 리빌딩의 희생자로 낙점되고 만다.

1987-88시즌을 끝으로 뉴욕과의 트레이드에 의해 새 보금자리를 찾은 그는 시카고의 영원한 라이벌 도시에 그렇게 입성한다. 그의 등 뒤에는 오클리의 트레이드를 반대하는 조던의 격렬한 항의가 메아리치듯 울렸지만 한번 엎지른 물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깡마른 두 명의 신인 포워드가 오클리의 공백을 메웠지만 훗날 이들은 ‘죽여야만 사는‘ 얄궂은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화려한 조연배우의 전성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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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프트 동기 유잉과 함께 골밑 임무를 분담한 오클리의 역할은 시카고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유잉으로 인해 활동반경이 넓어졌고 장기인 중거리 슛의 위력도 배가됐다. 시카고에서 보낸 마지막 시즌 당시 아쉽게 리바운드 타이틀을 내준 그는 1988-89시즌 리그 전체 6위에 해당하는 10.5리바운드를 걷어내며 뉴욕 골밑의 새로운 살림꾼으로 입지를 다져갔다.

뉴욕은 당시 1987-88시즌 신인왕에 빛나는 마크 ‘액션’ 잭슨을 필두로 자니 뉴먼과 제럴드 윌킨스로 이어지는 탄탄한 선발멤버와 신구조화가 어우러진 벤치전력을 자랑하며 시카고와 함께 떠오르는 신흥강호였다. 오클리가 가세한 1988-89시즌은 친정팀 시카고와 악연의 고리를 만들게 된 시작이라 볼 수 있다. 양 팀은 이후 8년간 여섯 차례 플레이오프 무대에서 만나 격투기를 방불케 하는 경기를 펼치며 코트를 뜨겁게 달구었다.

1988년도에 제작된 시카고 불스의 ‘하이그라운드‘라는 시즌 리뷰 비디오를 보면 오클리의 코트 안팎의 모습을 잠시나마 들여다 볼 수 있다. 애송이에 불과했던 스카티 피펜을 라커룸 벽에 세워놓고 이등병 대하듯 고참행세를 하며 만면에 웃음을 짓던 그런 모습 말이다. 그는 절대로 뒤끝이 없어 한 번 혼쭐을 내어도 큰 형처럼 다독이는 넓은 마음씨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적어도 코트에서의 오클리는 천사일 수 없었다. 피펜이나 그랜트에게 거친 파울을 수차례 범하면서도 손 한번 내밀지 않는 냉혹한 승부사로 변해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는 어느 팀에 몸을 담고 있던 상대방에 대한 변하지 않는 그만의 철학이었다.  

하지만 친정팀에게 번번이 고배를 든 오클리는 먼발치에서 그들의 우승 잔치에 쓰린 속을 부여잡아야 했다. 1991-92시즌 새 사령탑으로 부임한 팻 라일리 감독이 앤쏘니 메이슨을 중용하며 출장시간도 줄어들었다. 물론 코트위에 서 있는 순간에는 최선을 다하는 선수였고 여전히 거친 허슬플레이어였다. 하락한 개인 성적도 개의치 않는 오클리였지만 가슴 한구석의 공허감을 달래기 위해서는 역시 우승이 필요했다.

농구 황제 조던 없이 맞이한 1993-94시즌은 오클리에게 있어 제2의 전성기나 다름없는 해였다. 생애 최초로 올스타에 선정되는 영광을 맛본데 이어 올NBA 퍼스트 수비팀에 당당이 이름을 올렸다. 3년 만에 더블-더블 기록도 되찾았으니 개인적으로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하킴 올라주원의 휴스턴 로케츠에 고배를 든 뉴욕은 이듬해 NBA에 돌아온 조던에 의해 다시 한 번 가로막히며 좌절을 거듭하게 된다. 1997-98시즌에는 설상가상으로 유잉의 시즌아웃이라는 악재가 겹치며 변화의 시간을 재촉하였다.

결국 사상초유의 선수노조 파업사태가 불어 닥친 1998년 오프시즌을 맞이하여 구단은 대대적인 수술의 칼을 들게 됐고 36세의 노장 포워드는 토론토 랩터스의 마커스 캠비와의 맞트레이드로 팀의 미래에서 제외되는 불운을 겪고야 만다. 이듬해 뉴욕은 NBA 역사상 최초로 8번 시드 파이널 진출을 이룩하며 돌풍을 일으켰는데 오클리가 떠난 팀마다 성공을 일궈내는 묘한 운명은 계속 이어졌다. 11년간의 파란만장했던 뉴욕생활은 그렇게 초라하게 막을 내렸다.


역마살이 깃든 노장의 마지막 여정

창단 3년 만에 새로운 유니폼과 홈구장을 선보인 토론토는 오클리의 가세로 노련미 넘치는 로포스트를 구축하게 된다. 오클리는 베테랑 센터 케빈 윌리스와 함께 녹슬지 않은 기량을 뽐내며 토론토가 신생팀의 이미지를 벗는데 일조하였다. 농구선수로서 이미 황혼기에 접어든 그였지만 투지 넘치는 플레이는 세월을 무색케 하였다.

화려한 고공플레이로 이른바 ‘에어 캐나다’ 센세이션을 일으킨 빈스 카터는 지난 날 붉은 색 유니폼의 23번 사나이를 떠올리게 만들었지만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팀의 에이스를 무조건 감싸기 보다는 더 나은 선수가 되라며 채찍을 들었던 것이다. 들쑥날쑥한 카터의 슈팅기복과 취약한 장거리 슈팅능력, 오른쪽 돌파만을 선호하던 습관 등을 지적하며 쓴 소리를 아끼지 않은 오클리는 맏형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특히 출장시간에 대해 불만을 표했던 트레이시 맥그레이디에게는 “어린 선수가 너무 많은 것을 바란다”며 일침을 놓기도 하였다. 

동부 컨퍼런스의 정상권을 노려볼만한 위치에 이른 토론토는 간판스타 카터의 부상으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결국 오클리는 몰락하는 팀의 운명을 뒤로하고 모든 여정의 시작이었던 시카고로 돌아온다. 토론토에서 마지막으로 보낸 2000-01시즌 당시 득점과 리바운드에서 더블-더블급 활약을 펼쳤던 그의 마지막 불꽃은 점차 희미해지고 있었다.

타이틀에 대한 미련도, 개인적인 영예의 욕심도 모두 버린 오클리는 오로지 경기에 대한 열정으로 선수생활을 버텨나갔다. 불혹의 나이에도 그가 코트에 설 수 있었던 이유다. 농구경력을 시작했던 곳에서 마지막을 생각하고 있을 시기에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단짝인 마이클 조던이 코트로 돌아왔다. 조던의 간절한 설득에 마음을 돌린 오클리는 워싱턴과 베테랑 최저 연봉액수에 합의하며 절친한 동료의 마지막 길동무가 돼주었다. 결국 조던의 은퇴로 워싱턴에 남을 이유가 없어진 오클리는 2003-04시즌 휴스턴에서 단 7경기만을 뛰며 NBA 이력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의 경력을 돌이켜볼 때 우승반지는 물론 변변한 개인수상의 경력하나 없는 평범한 프로선수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록지의 숫자로 평가할 수 없는 선수가 바로 이 찰스 오클리였으며 많은 이들이 이면에 드리워진 그의 모습을 사랑했다. 필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매직 존슨이나 클라이드 드렉슬러와 같은 화려한 슈퍼스타에 대한 그리움. 그것은 타이론 힐이나 오티스 도프, 오클리, 로드맨과 같이 코트 사이드를 뒹굴며 흙먼지를 뒤집어 쓴 터프가이들에 대한 그리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계속 되는 도전, 그리고 두 얼굴의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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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트를 떠난 지 만 3년이 되던 지난 2007년 오클리의 복귀 설이 모락모락 피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는 불혹을 넘겨 43세였다. 그 해 드래프트 1순위인 오든이 갓난아기라면 오클리는 할아버지뻘인 셈이었다.

지난 3년 전 바닥을 드러낸 오클리는 이제 더 이상 플레이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음에도 자긍심 하나는 여전했다. “하찮은 액수의 계약금으로는 뛰지 않을 것”이라 공언하며 리그에서 장려하는 베테랑 미니멈의 경로혜택을 마다한 것이다. 은퇴와 복귀를 두 차례 반복했던 절친 조던은 “제대로 된 대우가 없다면 뛸 필요 없다”며 오클리를 지지했고 그 역시 본인의 입장을 고수했다. “좋은 연봉여건에서 뛸 것이다. 어느 구단도 나를 돈으로 살 수 없으며 돈도 나를 지배할 수 없다. 터무니없는 베테랑 최저연봉으로는 코트에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며 다시 한 번 본인의 의지를 피력했다. 결국 오클리의 복귀는 무산됐지만 그의 뚝심과 담대함을 재차 확인 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샤킬 오닐이나 찰스 바클리처럼 본인이 내뱉은 말로 곤욕을 치루는 이도 있지만 오클리의 말은 무게감이 틀렸다. 가볍고 무모한 호언장담이 아닌 누군가는 맸어야 할 총대와도 같은 사안들은 언제나 오클리의 몫이었다. 그리고 현재는 일선에서 한 발짝 물러났지만 필요할 때는 쓴 소리를 아끼지 않을 정도로 리그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고 있다.

팀 도너기 심판파동으로 소란스러웠던 올 해 여름, 오클리는 분노를 금치 못하였다. “분명 저 너머에는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이 숨겨져 있다. 책을 통해 모든 전말이 공개 되는 날이 올 것”이라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그는 “지난 시즌 브렌트 베리의 파울만 봐도 알 것이다. 누가 봐도 명백한 파울이었음에도 휘슬은 울리지 않았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경기조작”이라며 흥분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룰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고 매 시즌마다 새로운 영웅이 만들어진다. 이는 속임수나 다름없는 짓”이라며 리그 행정부에 따끔한 충고를 건냈다.

오클리의 쭉 찢어진 눈, 고집을 담은 두툼한 입술은 마치 마이크 타이슨을 방불케 하는 외모로 기억된다. 터프가이로 한 평생을 살아온 그였지만 가슴 따뜻한 ‘인간 오클리‘를 아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왼팔이 하는 일을 오른팔이 모르게 하라”는 옛말도 있다. 하지만 오클리가 실행해온 수많은 자선행사들은 그가 얼마나 배려 깊은 남자인지 알려주는 좋은 자료다.

1993-94시즌에는 리바운드 한 개당 1달러의 기부금을 적립했고 팀 동료 존 스탁스가 이를 본받아 3점 슛 한 개당 5달러의 기부금을 내게끔 만들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고향 버지니아 유니언에서는 재단을 운영하며 오랜 세월동안 불우아동 단체를 지원하고 있고 클리블랜드 등지에서 무료 여름캠프를 개최하며 꿈나무들의 육성을 돕고 있다.

이러한 오클리의 자선활동은 폭넓은 개인사업의 확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6개의 세차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그는 남다른 사업수완을 발휘하여 성공적인 자산증식을 이끌었다는 후문이다. 외모에 걸맞지 않는 탁월한 패션 감각도 오클리가 가진 또 하나의 능력이었다. 특히 1997년 패션 전문 매거진 ‘GQ'에서는 과소평가 받은 드레서로 선정되며 다양한 끼를 발산했다.

   
마치며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선수와 팬으로서의 관계를 영원히 지속시키고픈 인물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해왔다. 줄리어스 어빙이 그랬으며 매직 존슨과 마이클 조던 같은 팬의 사랑을 듬뿍 받은 영웅들도 좋은 예가 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없으면 못살 것 같던 슬픔과 인연의 끝에 맛보는 아쉬움은 한 순간에 사라진다. 마치 물레방아처럼 떠나는 이의 자리는 누군가가 항상 채워왔기 때문이다.

NBA 총재 데이빗 스턴도 말한다 “리그는 슈퍼스타의 은퇴로 위기에 처할 때마다 항상 새로운 누군가가 등장하곤 했다. 윌트 체임벌린이 사라지자 카림 압둘자바가 데뷔했고 어빙이 퇴장하니 조던이 혜성처럼 등장했다. 덕분에 우리는 문제를 극복해나갈 수 있었다”고 말이다. 어디 국내뿐이겠냐 만은 NBA의 전파에 혁혁한 공을 세운 조던의 존재도 차츰 잊혀져  가고 있다. 심지어는 그가 누구인지 모르는 젊은 팬들도 생겨나고 있을 정도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치유되는 만병통치약 ‘시간’은 시대를 풍미한 영웅도 지울 수 있는 날카로운 검인 셈이다. 이치가 이러한데 별다른 족적 없이 사라진 많은 선수들의 추억은 오죽할까?

찰스 오클리는 몇 년 안에 많은 팬들의 머릿속에서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필자에게 있어서 그는 좋은 추억으로 남은 영화한편에 대한 회상과도 같은 존재다. 재밌는 영화는 흥행에 성공하지만 좋은 영화는 가슴에 남는 이유와도 상통한다. 그렇다. 오클리는 과거의 담습을 유쾌하게 만들어 준 그런 선수였다. 농구 이상의 감동을 선사해 준 그가 오늘따라 무척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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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LOVE를 소개합니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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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NBA를 즐겨 보시는 분들이라면 ‘케빈 러브’라는, 특이한 이름의 백인 빅맨에 대한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들어보셨을 것이다.

비록 하위 팀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소속이지만, 고교시절부터 화제를 몰고 다녔던 전국구스타였던 데다가 오랜만에 등장한 순수 미국산 엘리트 백인 빅맨이라는 점, 그리고 저스틴 팀버레이크를 닮은 외모 등 농구 내외적인 요소로 관심을 끌고 있는 선수이다.

고교 시절과 대학시절의 괴물같았던 활약을 뒤로 하고, 열아홉살이라는 (드래프트 당시) 어린 나이에 NBA무대에 도전하기로 결심한 그는 전체 5픽이라는 높은 순위로 멤피스 그리즐리스에 드래프트된 후 당일에 마이크 밀러, 제이슨 칼린스, 브라이언 카디널 등과 함께 미네소타 팀버울브스로 트레이드되었다.

언더사이즈 백인센터가 Top5로 NBA에 입성한 것은 사실 정말 이례적인 일이다. 대학무대에서는 1학년 때부터 각종 상을 휩쓸었지만, NBA는 대학보다 훨씬 더 피지컬하고 빠른 무대이기에 그의 성공 가능성에 대해서는 많은 전문가들의 의견이 엇갈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데뷔 초반 기대 이상의 모습으로 5경기만에 주전 자리를 꿰찼다. 주전으로 출장한 첫 경기에서 20-10에 준하는 기록을 남기며 자신이 NBA에서도 충분히 엘리트 빅맨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한 케빈 러브. 오늘은 그에 대해서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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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조건_신장은 신발 신고 6-10. 정확히는 207 cm를 기록했다. 사실 센터보다는 파워포워드에 더 어울리는 신장이다. 체중은 드래프트 당시 255파운드 (115.7kg) 를 기록했다. 윙스팬은 6-11.25 (211.45cm) 로서 빅맨치고 딱히 길지도 짧지도 않다.

많은 사람들을 예상을 빗나가게 했던 것이 바로 그의 운동능력인데, 의외로 대단한 운동능력을 지니고 있다. 35인치(89cm)라는 높은 버티컬 점프를 가지고 있으며, 스피드와 순발력을 측정하는 레인 어질리티와 3/4 코트 스프린트에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훌륭한 수치를 기록했다. 그의 높은 픽 순위에는 이러한 좋은 운동능력이 많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정리하자면, 평범한 6-10 파워포워드의 신체이지만 운동능력은 상당히 뛰어난 편인 독특한 백인 빅맨이라 할 수 있겠다. 지난 시즌 3순위로 뽑혔던 애틀랜타의 알 호포드와 놀라우리만치 흡사한 신체의 소유자이다.


강점_‘케빈 러브’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것이 바로 ‘탄탄한 기본기와 높은 BQ’이다.

스무살의 루키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노련한 움직임을 보여준다. 넓은 몸을 잘 이용하는 좋은 스크리너이며, 스크린 후의 동작도 능숙하다. 가드들이 활동할 공간을 잘 창출해주는 타입. 주로 힘을 이용한 포스트 업 플레이를 즐기지만, 뛰어난 슈팅능력과 순발력의 소유자이기에 페이스 업으로도 쏠쏠히 재미를 본다. 시야가 넓고 무리한 플레이가 적다는 것도 강점.

탄탄한 기본기의 소유자답게 철저한 박스아웃 개념을 가지고 있어 보드장악력도 강력하다. 대학시절부터 매 경기 두자리수의 리바운드를 꼬박꼬박 기록하던 좋은 리바운더. NBA에서도 25분동안 평균 6.6개 (오펜스 리바운드 3개) 라는 좋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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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던컨과의 매치업에서 드러났듯이, 1:1에서는 생각 이상으로 좋은 수비력을 가지고 있다. 힘과 풋워크가 좋아 매치업 상대가 득점하기 편한 자리를 잘 내주지 않는 선수. 대단한 블락커는 아니지만 그래도 매 경기 한 개 이상의 블락은 꾸준히 기록하고 있다. 전문가들의 찬사를 자아내는 아웃렛 패스는 다른 선수와는 차별화되는 러브만의 시그내쳐 무브. (일각에서는 그의 아웃렛 패스를 매직존슨의 그것에 비견하기도 한다.)


약점_케빈 러브의 소프트웨어는 그의 나이에 걸맞지 않지만, 체력은 그의 나이에 걸맞다. 아직 48분 내내 자신의 100%를 보여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체력이다. 데뷔 후 체지방율을 많이 줄이고 웨이트 트레이닝에 힘쓰기는 했지만, 확실한 엘리트 빅맨의 대열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꾸준한 몸만들기와 체력 훈련이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맨투맨 상황때와는 달리 헬핑 수비에는 아직 미숙한 점을 보이고 있는 것도 아쉬운 부분. BQ가 높은 선수이니만큼 이 점은 경험이 쌓일수록 자연히 발전할 것이라 믿는다.


제2의 래리 버드? No!! 제1의 케빈 러브!

리그에 많은 기대를 받으며 입성한 백인 포워드들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타이틀이 하나 있다. ‘제 2의 래리 버드’가 바로 그것.

백인 선수들이 부족한 신체조건을 뛰어난 슈팅력과 BQ로 메우는 경우가 많았기에, 그 분야에서 가히 역대 최고의 능력을 보여준 래리 버드와 비교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제2의 마이클 조던’ 만큼이나 제2의 래리 버드도 현재까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멀리는 키스 밴 혼부터 가깝게는 애덤 모리슨까지 그 누구도 버드의 위명에는 미치지 못하며 그저 그런 활약에 그치고 있다.

오랜만에 등장한 백인스타, 케빈 러브 역시 그 꼬리표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그러나 러브 본인도 밝혔듯이, 그의 우상은 버드가 아닐 뿐더러 플레이 스타일 역시 버드와는 너무나도 다르다.

러브의 롤 모델이자 우상은 바로 전설의 언더사이즈 센터. 웨스 언셀드이다. 러브의 미들네임인 ‘언셀드’는 바로 웨스 언셀드에게서 따온 것이라 한다. (언셀드와 러브 가문은 원래부터 깊은 친분을 가지고 있다.) 러브의 자로 잰 듯한 정확한 아웃렛 패스 역시 언셀드의 그것을 빼다 박았다는 평이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러브는 백인 빅맨으로서는 이례적인 선수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백인 빅맨들은 아주 큰 키 (브래들리) 혹은 포지션 대비 좋은 신장과 긴 슛 거리 (라프렌츠, 키스 밴 혼), 그리고 공통적으로 높은 BQ를 핵심역량으로 삼아 NBA에서 활약했다.

언더사이즈 센터이자 평범한 신장의 파워포워드인 러브는 그들처럼 높이의 축복을 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역대 백인 빅맨들 중 러브만큼 파워, 운동능력, BQ, 슈팅능력이 잘 조화된 선수는 찾아보기 힘들다. 가히 백인 빅맨의 뉴 타입이라 할 수 있겠다.

아직은 청년이라기보다 소년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약관의 나이다.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세계 최고의 선수들과 당당히 대적하며 백인 빅맨의 새 지평을 열고 있는 ‘소년’ 케빈 러브. 그의 빛나는 내일을 기약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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