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지 한 우물만 파야 하는 우리나라나 일본의 학원 스포츠와는 달리 미국에서는 재능만 있다면 적어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자신이 원하는 복수의 종목에 참여하고 활동하는 것이 자유롭게 보장되는 편이다. 알렌 아이버슨이 고교 시절 농구와 미식축구에서 팀을 주 챔피언으로 이끌었던 것은 이러한 환경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학창시절에는 여러 종목을 다양하게 경험할 수 있는 미국이라도, 졸업 후 프로로 진출할 때에 선수는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다재다능한 선수만이 경험할 수 있는 비애라고 보면 될까. 하지만 끝내 두 가지의 꿈 모두를 포기하지 못하고 두 종목 모두에 발을 들여놓은 NBA 선수들이 있다. 지금부터 그 주인공들을 만나보도록 하자.


데이브 드부셔

NBA 선수로 12시즌을 뛰는 동안 2차례의 우승을 경험했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위대한 50인'에 선정될 정도로 NBA 역사에 이름을 남겼던 선수이다.

그랬던 그조차도 야구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투수로 활약했던 시기가 있었다. 1962년 시카고 화이트삭스와 계약하고 2년간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했던 것.

NBA의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의 선수로서 처음 데뷔를 한 것은 그해 겨울이었으니, 오히려 데뷔는 야구 쪽이 빨랐다. 하지만 농구에서와는 달리 야구에서는 그리 뛰어난 성적을 올리지 못했다. 2년간 36경기에 등판, 3승 4패를 기록한 것이 전부였다. 이후 그는 화이트삭스 산하 마이너리그팀에서 2년을 더 활동했지만, 디트로이트의 플레잉 헤드코치가 된 후 야구의 길을 포기하고 말았다.


대니 에인지


현재 보스턴 셀틱스의 단장으로 팬들에게 친숙한 대니 에인지도 여러 종목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고교 시절에는 야구, 풋볼, 농구 모두 퍼스트팀에 선정되어 미국 스포츠 역사에서도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긴 바 있는 선수다. 스스로의 다재다능함을 주체하지 못한 그는 고교 졸업 후에도 특이한 경력을 가졌는데, 1977년부터 브리검 영 대학에서 농구선수로 활약함과 동시에 같은 해 드래프트에서 MLB의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지명을 받아 1979년부터 3시즌간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선수로 활동했다.

투수와 포수, 1루수를 제외한 모든 수비 포지션을 경험해 언뜻 보면 대단한 수비능력을 가진 것으로 오인하게 하지만, 사실 상당히 많은 에러를 범했던 선수였다. 팀이 1977년에 창단되어 선수층이 얇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통산 타율은 2할 2푼에 불과했고, 1981년에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투수 렌 바커의 퍼펙트 게임의 희생양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NCAA에서 그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4년 평균 20.9 득점이라는 기록과 1981년도 존 우든 어워드 수상자라는 경력이 말해주듯 농구선수로서의 에인지는 점점 스스로의 주가를 높여갔다. 그는 결국 1981년을 끝으로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NBA로 발길을 돌렸다.


마크 헨드릭슨

206cm의 큰 키를 자랑하는 플로리다 말린스의 투수 마크 헨드릭슨은 고교 시절 야구와 농구, 테니스에서 수준급의 실력을 가졌던 선수였다.

농구에서는 팀을 두 차례나 주 챔피언으로 이끌었고, 야구에서도 준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다재다능함을 과시했던 것. 워싱턴 주립대학에 진학한 후 매년 드래프트에서 MLB 팀들의 지명을 받으며 스카우터들의 관심을 끌었던 그는 일단 NBA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1996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31순위로 필라델피아 76ers에 지명된 그는 새크라멘토 킹스, 뉴저지 네츠,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등 여러 팀을 전전한 끝에 평균 3.3 득점, 2.8 리바운드라는 초라한 성적만을 남긴 채 4시즌만에 꿈을 접고 말았다.

하지만 이미 헨드릭슨은 1998년에 MLB의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입단 계약을 체결하고 마이너리그에서 투수로 활동을 해오던 상황이었고, 본격적으로 야구에 전념하기 시작하면서 등판 기회를 늘려나가며 한 계단 한 계단씩 발전해나갔다. 마침내 2002년에 MLB 무대에 입성한 그는 선발과 롱릴리프를 오가며 현재까지 통산 50승 63패를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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