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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엄청난 인기를 한몸에 받았던 백인 선수가 있었다.

그는 에미넴을 연상시키는 수려한 외모와 화려함을 넘어선 예술적인 기술로 백인 선수들에 대한 편견을 무참히 깨버렸다. 누구도 표현해낼 수 없는 플레이를 그는 너무나도 쉽게 소화해냈으며 그가 뿌리는 패스마다 관중들은 탄성을 자아냈다.

길거리 농구 출신이기도 했던 그의 별명은 바로 화이트 초콜릿, 자신만의 특별한 상상력을 코트 위에서 자유자재로 연출해냈던 포인트가드 제이슨 윌리엄스(Jason Williams)다. 필자는 농구라는 스포츠를 예술로 표현해냈던 코트 위의 화가, 제이슨 윌리엄스의 농구 인생을 재조명 하고자 한다.


Before the Big Bang

미국 동부 웨스트 버지니아주의 벨레(Belle)라는 작은 동네에서 자란 윌리엄스는 어렸을때부터 농구와 미식축구에서 부각을 나타냈다. 하지만 소규모의 도시에서 자란 탓에 윌리엄스는 자신의 실력과 명성을 떨칠 기회가 없었으며 결국 Division I 대학교에서 스카우팅 제의 하나 받지 못한채, Marshall University라는 조그마한 대학교에서 농구생활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1996년, 플로리다 대학교에 새로 부임한 빌리 도노반(Billy Donovan) 감독은 윌리엄스의 재능을 알아봤고, 그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했다. 윌리엄스는 결국 도노반 감독의 러브콜에 응하며 플로리다 대학교에 편입하게 된다. 97-98시즌, 그는 평균 17.1점, 6.7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그의 재능을 꽃피웠다. 하지만 그의 대학생활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는 불법 약물복용으로 인해 농구부에서 퇴출당하고 만다. 그리고 그의 짧막한 대학농구 생활은 막을 내렸다.


킹스와의 특별한 인연, 그리고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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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윌리엄스는 플로리다 대학 농구부 퇴출사건을 기회삼아 1998 NBA 드래프트에 참가하게된다. 그리고 새크라멘토 킹스는 그를 7번째로 지명하게 된다. 드래프트 당시 윌리엄스는 득점력이 뛰어난 포인트가드라는 평가를 받았었다.
 
잦은 턴오버와 불안정한 리딩을 단점으로 지적받았지만 윌리엄스의 가능성은 전문가들에게서 긍정적인 평가를 이끌어냈었다 (실제로 윌리엄스는 1998-99시즌 루키 퍼스트팀에 선정되며 자신의 가능성과 가치를 증명해냈다.)

당시의 새크라멘토는 윌리엄스를 비롯해 크리스 웨버, 블라디 디박, 페쟈 스토야코비치 등 새로이 팀에 합류하게된 선수들을 많이 보유하고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킹스를 순식간에 강팀으로 변모시켰다.

팬들은 이러한 급격한 변화를 즐겁게 받아들였고, 윌리엄스의 존재 역시 팬들에게 서서히 부각되었다. 그 중심에는 윌리엄스의 화려한 플레이가 있었다. 멋들어진 킬패스, 크로스오버 드리블등 화려한 플레이를 선보인 윌리엄스는 전국구 스타가 되었으며 그와 함께 새크라멘토 역시 전국적인 인기를 얻게되었다.

팀 동료였던 크리스 웨버는 윌리엄스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었다. “그에게서 패스를 받으려면 단 한순간이라도 한눈을 팔면 안됩니다. 언제 어디서 패스가 들어올지 모르거든요.” 그만큼 윌리엄스의 패스는 예측불허였다.

샤킬 오닐은 윌리엄스를 “피스톨 핏의 힙합버전”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또한 그의 플레이는 거의 매일 스포츠뉴스 하일라이트의 단골이었다. 특히 대인마크의 달인인 게리 페이튼을 꼼짝 못하게 만든 돌파 장면은 윌리엄스의 대표적인 명장면이다. 루키-소포모어 올스타전 대결에서 선보인 팔꿈치 패스 역시 윌리엄스의 특별한 작품중 하나이다. 이 외에도 수없이 많은 송곳패스와 드리블 돌파 등등 새크라멘토 시절의 윌리엄스는 하일라이트 제조기라 불릴만큼 많은 명장면을 연출해냈다.

하지만 윌리엄스는 감독에게까지 사랑받는 플레이어는 아니었다. 화려한 플레이를 추구하는 대신, 그는 잦은 턴오버를 범했다. 특히 경기의 흐름을 깨는 플레이 덕분에 주전 포인트가드임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순간 항상 벤치를 지킬때가 많아졌다. 특히 2000년 LA 레이커스와의 플레이오프 시리즈에서 윌리엄스는 5경기 모두 4쿼터를 뛰지 못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잦은 턴오버는 그의 고질적인 문제였으며 1999-00 시즌에는 평균 7.3 어시스트라는 준수한 수치를 기록하긴 했으나 경기당 턴오버가 3.65에 육박할만큼 그는 불안정한 리딩을 선보였다. 이 모든것이 화려함에 치중한 그의 플레이 스타일의 결과물이었다.

결국 새크라멘토는 윌리엄스의 한계를 느꼈고 밴쿠버 그리즐리스와 트레이드를 단행하게 된다. 킹스는 윌리엄스와 닉 앤더슨을 그리즐리스에 내주는 대신, 포인트가드 마이크 비비와 3점슈터 브렌트 프라이스를 영입했다. 짧지만 화려했던 윌리엄스의 전성기가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멤피스, 그리고 변화의 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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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드 확정 이후, 밴쿠버는 멤피스로 연고를 옮기게된다. 윌리엄스는 멤피스 그리즐리스의 원년멤버로써 시즌을 시작하게 되었다. 윌리엄스의 이적으로 인해 멤피스 역시 팬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정작 윌리엄스 그 자신은 경기력의 발전이 더뎠다. 멤피스에서의 첫 시즌인 2001-02시즌, 평균 14.8득점 8.0어시스트를 기록하긴 했지만 턴오버 역시 평균 3.25로 고질적인 턴오버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2002-03시즌, 멤피스는 휴비 브라운을 새로운 감독으로 임명한다. 그리고 이것은 윌리엄스에게 큰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베테랑 감독이던 브라운은 10인 로테이션을 가동하며 윌리엄스의 출전시간을 제한했다. 그리고 그는 윌리엄스에게 변화를 요구했다. 윌리엄스는 그 변화를 받아들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슬슬 윌리엄스는 화려한 플레이 대신 안정적인 플레이를 선보였다. 더이상 윌리엄스에게서 하일라이트 성 플레이가 나오지 않자 몇몇 팬들은 실망하기도 했지만 브라운 감독은 오히려 흐뭇해했다. 02-03시즌 윌리엄스의 경기당 턴오버 갯수는 2.23, 그리고 그 다음해에는 평균 1.89 턴오버를 기록하며 자신의 변화를 증명해냈다.

윌리엄스의 각성과 함께 멤피스 역시 고공행진을 이어갔다. 2003-04시즌, 팀 역사상 최다승인 리그 50승을 기록하며 창단 이후 첫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며, 이후 3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이라는 쾌거를 달성하게 된다. 만년꼴지에서 서부의 신흥강호가 되기까지에는 윌리엄스의 공이 컸다.

윌리엄스는 플레이오프에서도 그 실력을 발휘했다. 특히 2005년 피닉스 선즈와의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윌리엄스는 실질적인 에이스로 평균 17점을 기록하였다. 특히 선즈와의 1라운드 4차전에서 스티브 내쉬(Steve Nash)를 농락하던 장면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것이다.

멤피스는 윌리엄스와 2시즌 연속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기는 했으나 단 한번도 이기지 못한채 1라운드에서 탈락했다. 결국 구단은 더욱 더 강력한 팀을 만들기 위해 팀내 주축이었던 윌리엄스와 제임스 포지를 마이애미 히트의 에디 존스와 트레이드를 하게 된다. 멤피스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윌리엄스였지만 또 한번 팀을 옮길 수 밖에 없었다.


마이애미와 함께한 황혼기, 그리고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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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애미는 드웨인 웨이드의 원활한 플레이를 위해 그를 보좌해줄수 있는 포인트가드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웨이드의 백코트 파트너로 그들은 제이슨 윌리엄스를 점찍었고 결국은 윌리엄스를 데려오는데 성공했다.

윌리엄스의 합류로 인해 마이애미는 2005-06 시즌의 강력한 우승후보로 떠올랐다. 당시 윌리엄스의 트레이드에는 샤킬 오닐의 입김이 작용했다고 한다. 그 이유야 어찌됬건 윌리엄스는 웨이드, 샤킬오닐등과 함께 마이애미를 우승으로 견인했다.

윌리엄스는 포인트가드로써 마이애미의 공격을 원활하게 이끌었고, 녹슬지 않은 돌파와 패싱능력을 선보이기도 했다. 마이애미에서의 3년동안 윌리엄스의 평균 턴오버 수치는 채 2개가 되지 않았다. 이는 얼마나 윌리엄스의 안정된 경기운영능력을 대변한다.

우승한 그 다음 시즌인 2006-07시즌, 마이애미는 다시한번 강력한 동부지구 우승후보로 떠올랐으나 동부지구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시카고 불스에게 스윕을 당하고 만다. 불스와의 1라운드에서 윌리엄스는 최악의 부진을 겪었으며 (평균 5.8점 3.5 어시스트) 그의 NBA 커리어 마지막 시즌인 2007-08시즌에는 부상과 경기력 저하로 인해 최악의 시즌을 겪었다.

2008년 여름, 자유계약선수(FA)로 풀린 윌리엄스는 클리퍼스와 계약하며 팬들의 기대를 모았지만 돌연 은퇴를 선언, 10년간의 NBA 선수생활을 마감하게 되었다. 은퇴 이유는 동료 선수들과 감독은 물론 구단 관계자들도 모른다고 한다. 32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선언한 은퇴이기에 필자를 포함 수많은 팬들이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A Little Extra

윌리엄스는 잦은 구설수에 오른 선수였다.

2001년 2월 8일, 새크라멘토 소속이던 윌리엄스는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와의 원정경기에서 어느 한 중국인 팬에게 인종차별적 발언으로 말다툼을 벌였다. 결국 NBA는 그에게 $15,000의 벌금을 물렸다. 이 사건 이후, 나이키는 예정되있던 윌리엄스의 TV 캠페인을 취소하기까지 했다. 또한 윌리엄스는 샌안토니오와의 원정경기에서도 어느 한 팬과 강도높은 말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또한 그는 금지약물 치료제 복용으로 인해 2000-01시즌 5경기 출장정지 조치를 받기도 했다.

그는 새크라멘토에서 멤피스로 트레이드 되었을때, “We suck” 이라는 강도높은 발언을 포함, 그는 당시 리그 최약체로 꼽혔던 멤피스로 트레이드 되는것에 대한 불만을 언론에 토로했으며, 2005년 피닉스와의 플레이오프 시리즈 이후 “난 행복하다. 난 드디어 집에가서 아내와 아이들을 볼수 있게 된다. 이 모든것들은 나에게는 우선순위가 아니다” (“I'm happy. I go home and see my kids and my wife and I'm OK. All of this shit is secondary to me.”) 그의 프로의식에 대해 많은 비판을 받아야 했다.

윌리엄스가 코트 내에서 악동이었다면 코트 외에서는 조용한 신사였다. 그는 자신의 사생활이 언론에 노출되는것을 꺼려했으며 실제로 윌리엄스의 사생활에 언론에 직접적으로 노출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또한 윌리엄스는 좋은 팀동료라는 평가를 받는다. 멤피스에서 윌리엄스의 팀 동료이기도 했던 윌 솔로몬은 윌리엄스를 최고의 동료(“The best teammate ever)로 꼽기도 했다.


Writer’s Note

한때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데뷔했던 당돌한 악동 제이슨 윌리엄스. 독보적 인기를 얻기도 했으며, 수많은 하일라이트를 장식했지만 결국 그도 NBA를 떠났다. 사실 위대한 선수로 기억되는 일은 쉽지가 않다. 그럼 제이슨 윌리엄스는 NBA 팬들에게 어떠한 선수로 기억될까?

물론 윌리엄스는 위대한 선수는 아니었다. 스탯만 보고 평가하면 윌리엄스는 평범한 포인트가드다. 하지만 필자는 그가 특별한 선수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그는 “스포츠 = 팬서비스” 의 공식을 직접 몸으로 실천했으며 좋은 경기력을 보여줌과 동시에 관중들의 눈을 즐겁게 할줄 아는 선수였다. 이런 특별한 선수의 플레이를 더이상 볼수 없다니 아쉽기만 하다. 필자는 근 10년간 NBA에서 고생한 윌리엄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며 이 글을 마친다.


제이슨 윌리엄스(1998~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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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통산 679경기 출장(649선발)
평균 11.4득점, 2.4리바운드, 6.3어시스트, 31.2분 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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