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여름으로 기억한다. 서울 신세계 백화점 아래에 위치한 회현 지하상가를 지나고 있을 때였다. 한 비디오 대여점 쇼윈도우에 마치 흑인 보컬그룹을 연상시키는 사진 한 장이 비디오 케이스를 장식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영화제목은 ‘피츠버그의 행운아들’. 얼핏 보기에도 B급 영화같아 보였다. 그냥 지나치려던 순간, 비디오 케이스 앞면의 흑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줄리어스 어빙이었다. 70년대 중반부터 그토록 좋아했던 농구스타. 그가 출연한 영화였던 것이다.
무작정 대여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주인장께 다짜고짜 저 비디오를 팔라고 졸라댔다. 뭔가 이 비디오에 큰 가치가 있음을 간파한 주인장께서 터무니없는 값을 불렀다. 그 때 그 분이 부른 가격이 기억은 안나지만, 옆에 놓여있던 새로 나온 블록버스터급 영화의 비디오 소매가격과 거의 같았다. 더구나 이 비디오는 이미 대여가 많이 나갔던 중고 비디오. 그래도 샀다. 돈이 아깝지 않았다.
집에 오자마자 틀어보니, 역시나 줄리어스 어빙이 주연한 농구영화였다.
영화의 원제목은 “The Fish that Saved Pittsburgh”. 굳이 번역을 하자면, “피츠버그 시를 구해낸 물고기 자리 사나이들”이 되겠다. 아마도 1984년 당시를 기점으로 현재까지 한 30번은 넘게 본 것으로 기억된다.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애수” (1940년, 로버트 테일러, 비비안 리 주연) 다음으로 가장 많이 본 영화가 바로 이 영화다. 현재도 이 영화를, 당시에 구입한 비디오테이프, TV에서 녹화한 버젼, 그리고 오리지날 VHS 비디오테이프 원본으로 소장하고 있으니, 필자는 이 영화에 미친 사람임에 틀림없다.
이 영화는 1978년 길버트 모제스라는 한 흑인 감독에 의해 펜실바니아 주에 위치한 피츠버그 시에서 촬영이 됐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선지 영화의 개봉은 1979년 11월로 미뤄졌다. 영화의 시작부터 끝나는 순간까지 쉴 새 없이 디스코 음악이 배경음악으로 깔리기 때문에 영상이 대체적으로 어두움에도 분위기는 매우 흥겹다. 무엇보다도, 당시에 현역이었던 NBA 선수들이 무더기로 출연을 하기 때문에 눈요기 거리가 넘쳐난다.
당시에 최고 인기스타였던 줄리어스 어빙을 위시로 하여, 커림 압둘자바, 놈 닉슨, 커니 호킨스, 로니 셸튼, 루 헛슨, 밥 르니어, 스펜서 헤이우드, 돈 체이니, 크리스 포드, 세드릭 맥스웰, 마이컬 톰슨 등이 출연을 하고, 영화 “그리스”에서 올리비아 뉴튼 존의 날라리(?) 친구 역을 맡았던 스토카드 채닝과 3천여 명의 경쟁자를 뚫고 이 역할을 따낸 제임스 본드 3세라는 특이한 이름의 아역 흑인배우가 어빙과 함께 영화의 주연을 맡는다. 유명한 농구 캐스터, 마브 알버트와 칙 헌 씨도 찬조출연을 함으로써 영화를 빛내는데 일조를 했다.
이 영화의 플롯은 상당히 단순하고 어떤 면에서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유치하기까지 하다.
영화의 시작은 NBA 최약체 구단인 The Pittsburgh Pythons라는 팀의 경기영상과 함께 한다. 이 팀은 모제스 거쓰리 (줄리어스 어빙)라는 수퍼스타 한 명을 거느린 원맨팀이고, 팀 케미스트리가 좋지 못해 연패의 늪에 빠진 팀이다. 특히 모제스 거쓰리가 받는 리그 최고 연봉에 불만을 품은 루크 터커 (제리 체임버스)를 중심으로 대부분의 팀원들이 태업에 들어가거나 타 팀으로 떠나버린다.
구단 자체가 문을 닫느냐 마느냐 하는 절대절명의 기로에서, 팀의 볼보이인 타이론 (제임스 본드 3세)이 한 점성술사를 찾아가 어떻게 하면 이 팀이 살아날 지를 의뢰한다. 미녀 점성술가인 모나 몬디유 (스토카드 채닝)는 희한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팀의 프랜차이즈 플레이어인 모제스 거쓰리 (줄리어스 어빙)의 별자리가 ‘물고기 자리’이므로, 생일이 물고기 자리인 선수들만을 모집해서 팀을 꾸리면, 엄청난 팀웤과 선수 간에 시너지 효과가 발생해 최고의 팀으로 우뚝 설 수 있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역주 - ‘물고기 자리’는 ‘Pisces’라고 하는데, 2월 19일에서 3월 20일 사이에 태어난 사람들이 이 별자리에 해당됩니다. 줄리어스 어빙은 실제로 1950년 2월 22일 생입니다. 여담이지만, 필자도 2월 28일 생입니다).
이 말도 안되는 점성술사의 해결책과 구단 볼보이의 제안이 구단 측에 받아들여지고, 구단은 새로운 선수들을 모집하는 광고를 낸다. 전국에 퍼져있는 온갖 어중이 떠중이들이 면접을 보고 공채시험을 본다. 특히 과거에 프로농구선수가 되고 싶어했으나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농구를 계속할 수 없어서 낙오되고만 사회의 폐인들, 심지어는 농구를 때려치우고 성직자의 길로 들어선 목사까지도 이 공채시험에 참가를 한다. 이들 중에서 오로지 생일이 물고기 자리이며 잡초같이 살아온 농구선수 출신들만 뽑아서 구성된 팀이 바로 Pittsburgh Pisces (피츠버그의 물고기들)다.
이렇게 급조된 파이시스 팀은, 점성술사인 모나가 예측한대로 엄청난 호흡과 팀웤을 자랑하며 승승장구하고, NBA의 모든 강팀들을 다 무너뜨린 후, NBA 파이널에서 압둘자바의 로스앤젤리스 레이커스를 만난다. 문제는, 결승전이 시작되는 시간대가 물고기 별자리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 별 힘을 못 쓰는 최악의 시간대였다는 것. 모나와 타이론은, 우승하기에는 레이커스가 너무 강했고, 반면 파이시스 선수들은 되는 것 하나 없는 졸전의 연속임을 보고, 경기를 거의 포기해버린다.
자신들의 별자리 운이 다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수들만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을 때였다. 4쿼터 몇 분을 남기고 마지막 작전타임을 부른 주장 모제스 거쓰리 (줄리어스 어빙)는 선수들을 불러모으고, 여기까지 그들이 얼마나 힘들게 왔는 지를 상기시키며 선수들을 독려한다. 거쓰리의 리더쉽에 힘을 얻은 선수들은 젖먹던 힘가지 다해가며 승부를 원점으로 돌려놓고, 1점 차로 뒤진 마지막 클럿치 상황에 주인공 모제스 거쓰리가 위닝샷을 넣으며 피츠버그 파이시스는 구단 사상 최초로 우승을 한다.
모제스 거쓰리는 우승과 함께 사랑도 얻는다. 볼보이 타이론의 누나와 눈이 맞은 것. 우승 축하파티가 코트 한 가운데에서 벌어지고, 거쓰리와 토비 (마가렛 애이브리)가 서로 포옹한 채 키스를 하며 영화의 막이 내린다.
어떠신가? 확실히 내용은 좀 진부한 편이다.
아무래도 농구 영화로는 첫 영화이다 보니 이런 저런 ‘옥에 티’들도 발견되고, 많은 에피소드들도 생기게 됐는데, 그 중 몇 가지만 소개를 해보고자 한다.
(1) 농구 경기들을 찍으려면 가장 큰 문제는 관중동원이 아닐까 싶다. 만 오천에서 이만 가량되는 액스트라를 동원할 수도 없고, 지금 같으면 CG를 이용해 충분히 숫자를 불릴 수 있겠지만, 당시로서는 불가능했던 사안이다. 역시나 이 영화의 경기 장면들을 보면 실제 NBA 경기 (대체로 워싱턴 불렛츠의 경기 장면들이다) 중계장면과 짜집기를 한 모습이 역력히 보이는데, 예를 들면, 방금 전만 해도 훵하니 비어있던 관중석이 몇 초 후에는 빈자리없이 꽉 차있는 모습으로 둔갑해있는 장면들이다.
(2) 영화가 개봉된 후에도 영화 자체보다는 영화의 OST, 즉, 디스코 풍의 주제가 레코드 판들이 더 잘 팔려나간 영화였다. 음반의 타이틀이 ‘The Fish’였는데, 지금도 EBay와 같은 곳에서는 이 레코드 판들이 심심치않게 올라오고 있고, 또 구매도도 상당히 높은 편이다.
(3) 이 영화의 아역을 맡은 제임스 본드 3세는 30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발탁됐다. 주연배우로 낙점받은 후 영화 스튜디오에 있는 화장실에서 이 아이가 줄리어스 어빙과 맞닥뜨렸는데, 어빙을 알아보지 못한 제임스 曰, “키가 되게 크시네요?” 이에 어빙이 “너는 내가 누군지 모르니?”라고 묻자, “이 영화에 출연하려고 테스트 받으신 분들 중 하나 아니세요?”
(4) 줄리어스 캐리 (영화에서 아랍 스타일의 흰 천 '고트라'를 머리에 두르고 나오는 자말 트루쓰 역할)는 농구를 배워본 적이 없고, 해본 운동이라곤 가라데와 태권도 밖에 없었다는데, 이 영화에서 놀라운 운동능력을 선보이며 멋진 덩크들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해내는 바람에 많은 농구 구단들에서 접촉이 들어왔다고 한다.
(5) 최근에 미국의 영화 평론가들이 수백, 수천개에 달하는 “스포츠 관련” 영화나 다큐들을 통틀어 작품성 등을 중심으로 순위를 매겨보는 시간을 가졌다는데, 이 영화를 역대 순위 75번 째에 올려 놓았다. 상당히 높이 평가받았다고 봐진다. 거의 과대평가 수준이다.
(6)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모제스 거쓰리 (어빙)가 선수들을 독려하며 “점성술은 허상이야. 우리의 운명은, 별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스스로의 땀과 노력, 그리고 자긍심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라네. 나는 그것을 믿고 나가 싸워 이길 것이야. 다들 별자리만 믿고 여기서 주저앉을 건가? 아니면 나를 믿고 따르겠는가?”라는 멋진 대사를 읊는데, 이 말때문에 점성가들을 비롯한 그 쪽 계통(?) 일에 종사하는 많은 분들이 줄리어스 어빙의 안티가 되기도 했다.
(7) 이 영화의 감독 이름이 길버트 ‘모제스’인데, 영화 속 주인공의 이름도 ‘모제스’ 거쓰리다. 이 ‘모제스’ 역을 맡았던 어빙은 몇 년 후에 ‘모제스’ 말론을 팀원으로 맞아, 영화 속에서의 결승전 상대였던 커림 압둘자바의 로스앤젤리스 레이커스를 실제 상황에서 꺾고 우승의 감격을 누린다. 묘한 우연이 아닐 수 없다.
아카데미는 물론 어느 영화제에도 출품될 수가 없었던 이 B급 영화, NBA 선수들이 보여주는 어색한 연기들,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는 디스코 음악...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농구 팬들이 DVD로 소장하고픈 영화가 바로 이 영화일 것이다. 70년대 NBA 레전드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으며, 특히나 70년대를 살았던 세대들에겐 당시의 의상이나 음악, 헤어 스타일 등이 추억으로 다가올 영화이기 때문이다.
농구영화의 효시였던 “The Fish that Saved Pittsburgh”... 최소한 필자에게는 하나의 클래식과 같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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