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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뉴올리언스 아레나의 천장에는 두 장의 유니폼이 영구 결번 되어 걸려있다. 한 장은 뉴올리언스로 연고지를 이전하면서 이벤트 형식을 빌려 영구 결번 시킨 뉴올리언스 농구의 영웅 피트 마라비치의 7번 유니폼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또 한 장의 유니폼이 걸려있다. 사실 마라비치가 호네츠 소속으로 플레이했던 적이 없었음을 떠올려본다면, 그야말로 구단 역사상 최초의 영구 결번 유니폼인 셈이다.

그 유니폼의 주인공은 마라비치 같은 전설적인 농구 스타는 아니었다. 화려한 플레이를 펼치던 스타플레이어도 아니었다. 공격 보다는 수비를, 화려함 보다는 궂은일을 도맡아 하던 선수였다. 하지만 코트 위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달렸고, 뜨거운 심장으로 게임에 임했으며, 카리스마 있는 캡틴이자 라커룸 리더였고, 홈팬들을 위해 지역 사회 봉사 활동에도 최선을 다하던 선수였다. 고교 시절부터 사귀어왔던 아내에게는 너무나 다정한 남편이었고, 한 가정의 듬직한 아버지였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모든 선수가 그러하듯 그 유니폼의 주인공 역시 더 이상 코트 위에 설 수 없게 된 날이 찾아왔고, 팀은 주저 없이 그의 유니폼을 영구 결번 시키기로 결정했다. 2000년 2월 9일, 그의 영구 결번식이 진행됐다. 그러나 모두의 박수 속에 열렸어야 할 축하 행사는 숙연하고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경기장을 가득 메운 팬들과 그를 아끼던 동료 선수들은 눈시울을 붉혔고, 영구 결번의 주인공은 행사에 참석하지도 못했다. 그의 어린 아들이 아버지를 대신해 유니폼을 경기장 하늘 높이에 걸어두었다.

영구 결번 행사로부터 꼭 4주 전이었던 2000년 1월 12일. 영구 결번의 주인공이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그 때 그 선수, 오늘의 주인공은 호네츠의 영원한 캡틴 바비 필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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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비 필스, NBA 리거가 되다

바비 필스는 1969년 12월 20일 루이지애나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는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해외 노동자 생활을 하셨고, 어머니 역시 생활고에 시달리느라 필스를 제대로 돌볼 수 없었다. 해서 어린 필스는 보육원에서 성장했다. 하지만 필스는 강한 몸과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타고난 운동 신경을 뽐내며 농구에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고, 동시에 학업에도 소홀하지 않으며 훌륭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이후 서던 대학에 입학한 필스는 농구와 학업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며 멋진 대학 생활을 보낸다. 특히 졸업반이었던 1990-91 시즌에는 123개의 3점슛을 성공시키며 평균 28.4득점, 4.7리바운드, 1.9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자신의 위력을 뽐냈다. 대학 졸업장을 손에 든 필스는 NBA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약체 팀의 에이스였던 그를 주목하는 팀은 그리 많지 않았다. 1991년 드래프트에 참가한 필스는 2라운드 45번 픽으로 밀워키에 지명되며 가까스로 NBA 입성에 성공한다. 하지만 프로의 높은 벽을 실감하며 단 한 경기도 뛰어보지 못한 채 계약에 실패, 결국 프로로써의 첫 커리어는 CBA 선수로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필스는 좌절 앞에 쉽게 포기하는 나약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는 NBA를 향한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1991-92 시즌 도중 클리블랜드와 10일 계약을 맺는데 성공했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당시 클리블랜드는 결코 만만한 팀이 아니었다. 브래드 도허티, 마크 프라이스, 래리 낸스 등이 활약하던 동부 컨퍼런스의 강자였다. 그런 팀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스가 쏟았던 노력의 크기는 감히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크기였으리라.

필스는 도허티와 프라이스가 팀을 떠나고 테럴 브랜든을 중심으로 새롭게 전력을 재편될 무렵, 완벽히 리그에 적응을 끝마친 상태였다. 그는 이미 클리블랜드의 확고한 주전 가드로 입지를 공고히 하고 있었다.

어느 덧 당당한 NBA 리거가 된 필스는 1997년 여름 FA 자격을 얻게 됐다. 그리고 필스는 호네츠의 일원이 되었다. 당시 그는 높은 연봉 보다는 장기 계약을 원했다. 이는 선수로써의 이해관계도 포함된 결정이었지만, 가족들에게 보다 안정적인 생활을 안겨주고 싶다는 마음이 컸기 때문이었다. 필스가 합류하기 직전인 1996-97 시즌의 샬럿은 54승 28패로 당시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고 승률을 기록하며 장밋빛 미래를 펼치고 있었다. 샬럿은 리그의 강팀으로써 확실히 자리매김 하기 위해 필스를 영입하며 전력 강화를 시도한 것이다.



2. 샬럿 호네츠의 캡틴

필스는 팀에 합류하자마자 주전 슈팅 가드로 출장했다. 퍼리미터 디펜스의 중심이자 에이스 스타퍼로 맹활약했고, 때로는 공격의 선봉에도 나서며 전천후 플레이를 펼쳤다. 비록 포지션 대비 신장은 작은 편이었지만 엄청난 활동량과 뛰어난 근력, 그리고 누구보다 커다란 투지를 무기로 게임에 임했다. 수비 센스가 좋아서 패싱 레인을 잘라 들어오는 스틸에도 능했고, 공격 파울을 유도하는 솜씨도 일품이었다. 대학 시절 장기였던 3점슛은 여전히 강력한 공격 옵션이었으며 트랜지션 게임에서는 화끈한 덩크슛을 꽂아넣기도 했다.

필스가 샬럿에 합류한 첫 번째 시즌이었던 1997-98 시즌. 팀은 51승 31패를 기록하며 프랜차이즈 사상 최초로 2년 연속 50+승을 달성하는데 성공하며 동부 컨퍼런스 4번 시드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1라운드에서 애틀랜타를 3승 1패로 가볍게 물리친 샬럿은 2라운드에서 시카고를 상대하게 되었다. 당시 시카고는 2년 연속 NBA 정상에 오른 디펜딩 챔피언이었다. 이 때 두 팀의 대결에서 마이클 조던과 필스의 매치업이 시리즈 키포인트로 주목받았을 만큼 필스는 팀에서 큰 비중을 가진 선수가 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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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를 앞두고 필스는 조던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받게 되자 "Michael, Who?" 라고 대답하며 큰 화제를 낳았다. 조던에게 정면으로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물론 최후의 승자는 조던이었다. 하지만 조던을 그렇게 도발한 이후 실제로 그를 훌륭히 막아내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특히 시리즈 2차전에서는 조던을 단 22득점으로 봉쇄하기도 했다. 이 시리즈에서 조던은 경기당 평균 29.6득점을 기록했는데, 이는 조던이 1998년 플레이오프에서 유일하게 평균 30+득점을 넘어서지 못한 시리즈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것이 필스의 마지막 플레이오프 무대가 되었다. 이듬해였던 1998-99 시즌, 샬럿은 라이스 등의 주축 선수들이 연이어 부상을 당하며 큰 어려움에 빠졌고 레이커스의 에디 존스, 엘덴 캠벨을 얻기 위해 라이스, JR 리드 등을 떠나보내는 대형 트레이드를 성사시키며 리빌딩에 들어갔다. 당시만 하더라도 리그 탑레벨의 슈팅 가드였던 존스의 등장으로 인해 필스는 팀의 주전 라인업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어떤 불만도 표현하지 않았으며 되레 존스의 절친을 자청하며 라커룸 분위기를 주도했다.

새 천년이 열리던 1999-2000 시즌. 필스는 데이빗 웨슬리와 함께 팀의 캡틴이 되었다. 비록 스타플레이어는 아니었지만 그 동안 팀을 위해 보여주었던 헌신적인 모습을 인정받은 것이다.

샬럿의 분위기는 어느 때 보다 좋았다. 존스와 앤써니 메이슨 등이 이끄는 주전 라인업은 어느 때보다 견고해보였고 브래드 밀러, 리키 데이비스, 배런 데이비스와 같은 유망주들도 전 포지션에 걸쳐 두루 자리하고 있었으며 필스가 이끄는 벤치 멤버들 역시 탄탄한 전력을 뽐냈다. 비록 지난 시즌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긴 했지만 팀의 재정비가 끝이 난 시즌 막판에는 14승 4패를 기록하며 시즌을 마무리했기에 수많은 전문가들 역시 샬럿의 전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샬럿은 한 때 8연승을 질주하며 16승 7패로 시즌을 시작했다. 쾌조의 스타트였다. 하지만 12월에 들어서면서 최악의 스케줄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으니, 12월 30일부터 1월 10일에 걸치는 기간(12일) 동안 6경기 연속 원정 경기를 갖게 된 것이다. 샬럿은 마치 뭔가에 홀린 듯 패배하기 시작했고 6경기를 모두 내주고 말았다. 6연패의 늪에 빠진 것이다. 6연속 원정 경기를 마친 뒤 다음 경기를 준비하는 필스의 마음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캡틴으로써의 막중한 책임감은 패배를 견디지 못하는 그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3.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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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월 12일. 힘겨운 원정길에서 샬럿으로 돌아온 필스는 간단한 슈팅 훈련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 팀의 공동 캡틴이자 절친한 동료인 웨슬리와 대화를 나눴다.

웨슬리는 연패로 인한 스트레스로 힘들어 하던 필스에게 자동차 경주로 기분 전환을 해보지 않겠냐고 말했다. 평소 같았다면 언제나 바른 생활 사나이로 살아오던 필스가 응했을 리 없었던 제의.

하지만 계속되는 패배와 캡틴으로써의 중압감은 잠시 그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었다. 두 선수는 나란히 각자의 포르쉐를 몰고서 샬럿의 어느 산간 도로로 들어갔다. 그 도로는 평소에도 아마추어 레이서들의 레이스 코스로 종종 이용되던 곳이었는데 워낙 사고 위험이 높은 곳이었다.

맹렬한 속도로 달려 내려오던 필스의 포르쉐는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었고, 마주오던 차량과 3중 추돌 사고를 일으켰다. 필스는 현장에서 즉사했다.



갑작스러운 필스의 죽음은 샬럿과 리그 전체에 커다란 충격을 몰고 왔다. 샬럿의 모든 경기 일정은 무기한 연기 되었고 구단은 그의 백넘버 13번을 프랜차이즈 최초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2000년 2월 9일. 필스의 친정팀이었던 클리블랜드와의 경기 하프 타임을 통해 필스의 영구 결번식이 진행되었다. 이미 세상에 없는 필스를 대신해 그의 남동생이 코트로 걸어 나왔고, 그 어깨에는 필스의 둘째 아들이 올라있었다. 필스의 13번 유니폼은 어린 아들의 손에 의해 샬럿 콜로세움의 하늘 높이 올라갔다. 필스를 아끼던 수많은 동료들과 팬들은 그와의 이별을 슬퍼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필스가 곁을 떠난 후, 샬럿 선수들은 절치부심 힘을 내기 시작한다. 필스의 사망 이후 31승 16패를 기록하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또 한 명의 캡틴인 웨슬리는 시즌 내내 경찰 조사를 받으며 친구를 떠나보낸 죄책감에 힘들어 했고, 데릭 콜먼 등의 주축 선수들이 연이어 부상을 당하며 전력 누수가 심해졌다. 결국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앨런 아이버슨이 이끄는 필라델피아에게 1승 3패를 당하며 힘없이 시즌을 마무리했다.


4. 필스를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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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리그 제일의 에이스 스타퍼이자 샬럿의 절대적인 캡틴이었다. 또한 농구 이외에 골프, 미식축구, 사이클 등에도 능했던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하지만 필스가 정말로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코트 밖에서 보여줬던 그의 모습들 때문이었다.

1998년 NBA Sportsmanship Award 수상자이기도 했던 필스는 자신을 응원해주는 팬들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무던히 애쓰던 사람이었다. 활발한 사회봉사 활동은 물론이거니와 다양한 장학 재단을 설립하기도 했다. 또한 팀 메이트들과 주변 지인들에게도 봉사 활동을 적극적으로 권장하며 스스로 앞장서 모범을 보였다. 코트 밖에서는 언제나 밝고 유쾌한 남자였으며 팬들에게 가장 호의적인 선수이기도 했다. 자신에게 사인을 요청하는 어린 팬들은 절대 그냥 지나치지 않았으며 비시즌 기간에도 소탈한 모습으로 샬럿의 사람들과 어울려지냈다. 거기에 수려한 외모까지 갖추고 있었으니 팬들은 이런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필스가 호네츠의 일원으로 플레이 한 것은 채 3년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팬들은 아직도 그를 그리워하고 있다. 코트 안에서 상대팀과 맞설 때는 누구보다 무서운 얼굴로 코트를 달렸지만, 코트 밖에서 팬들을 만날 때에는 누구보다 멋진 미소를 지어보이던 그를 기억하고 있다. 너무나 믿음직스러웠던 그의 뒷모습을, 팀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동료들을 다독이며 용기를 북돋아 주던 그를 추억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경기장 가장 높은 곳에서 후배들을 지켜보며 파이팅을 외치고 있을 필스. 그는 영원한 호네츠의 캡틴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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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영원한 저의 친구이며, 영원한 남편이고, 영원한 연인입니다."

- 필스의 장례식에서, 아내 켄들 필스

그 때 그 선수. 오늘의 주인공은 바비 필스였다.


Bobby Phil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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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산 467경기 출장 (379선발)
평균 11.0득점, 3.1리바운드, 2.7어시스트, 1.3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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