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 4일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연습 구장은 침묵에 싸여 있었다. 클리블랜드는 4월의 첫 두 경기에서 워싱턴과 올랜도에게 잇따라 완패했다. 특히 플레이오프에서 맞붙을 가능성이 높았던 올랜도 원정에서의 29점차 대패는 이 팀이 시즌 내내 유지해왔던 자신감을 근본부터 뒤흔든 충격적인 패배였다. 게다가 다음날 상대는 서부의 강호 샌안토니오였다. 4월 초에 정규시즌 우승을 확정지으려던 클리블랜드에게 최대 위기가 닥친 것이다. 떠들썩하기로 유명한 클리블랜드의 연습 코트에 적막함만 감도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침통한 표정으로 훈련을 기다리고 있던 선수들 앞에서 한 선수가 상의를 벗기 시작했다. 얼마 전부터 벤 월러스를 대신해서 주전 파워포워드로 뛰고 있던 앤더슨 바레장이었다. 특유의 장난기 섞인 웃음을 띠며 옷을 벗은 바레장은 뒤로 돌아 등을 내보였다. 등에는 검은 색 매직 펜으로 'Chosen2'라는 글자가 커다랗게 씌어 있었다. 자신의 별명인 'Chosen One(선택받은 자)'를 등에 문신한 르브론을 패러디한 것이었다.


코트에 흐르던 침묵은 패러디 당사자인 르브론이 킥킥거리며 깨졌다
. 곧이어 모리스 윌리암스가 웃기 시작했고 지드루너스 일가우스카스와 멜빈 헌트 코치가 폭소를 터뜨렸다. 굳은 표정으로 연습장 문을 들어서던 마이크 브라운 감독은 바레장의 등을 보자마자 배꼽을 움켜쥐고 다시 뛰쳐나갔다. 선수들의 얼굴에 여유가 돌아왔고, 즐거운 분위기에서 훈련을 마친 선수들은 다음날 샌안토니오에게 대승을 거두며 정규시즌 1위를 위해 순항할 수 있었다.



 

바레장의 장난은 이 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브라운 감독의 통산 300승 경기 때는 브라운 감독과 맥도날드 캐릭터 'Grimace'를 합성한 이메일을 감독에게 보내 뚱뚱한 몸매를 놀려댄 적도 있다. 바레장은 일가우스카스와 함께 팀에서 가장 지독한 장난을 즐기는 선수다.

 

'Wild Thing' 바레장은 클리블랜드 팬들이 가장 사랑하는 선수 중 하나다. 팀을 위해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항상 에너지를 불어넣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레장의 고국이 브라질이라는 점 때문에 그의 열정은 가끔 '내킬 때만 열심히 하는 선수'로 비춰질 때도 있다. 하지만 바레장을 아는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이 오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바레장은 그 어떤 것보다도 농구를 먼저 생각하는 선수다. 그리고 자신의 농구를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선수다. 아주 오래 전, 그가 농구를 시작하던 무렵부터 그랬다.




형을 동경한 소년

 

바레장은 브라질 에스피리투 산토 주에 속한 카리아시카라는 도시에서 4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얼마 뒤 산타 테레사로 옮겼다가 열 살때부터 비토리아에서 살게 됐다. 그곳에서 처음 농구 팀에 들어갔고 지금도 가족이 그곳에 살고 있으니 바레장의 고향은 비토리아인 셈이다. 부모님은 프로 선수로 뛴 적은 없지만 각기 농구와 배구에 일가견이 있었다. 그래서 바레장 집안 남매들은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레 농구를 익힐 수 있었다.

 

그 무렵 농구를 좋아하는 모든 아이들의 우상은 마이클 조던이었지만 바레장에게는 우상이 한 명 더 있었다. 바레장보다 11살이 많은 맏형 산드로였다. 산드로는 바레장이 유소년 농구팀에 들어가던 무렵에는 이미 미국 웨스트 버지니아 대학으로 농구 유학을 가 있었다. 막 농구에 재미를  붙여가던 바레장에게 산드로는 마이클 조던만큼이나 대단해보였다. 비싼 국제전화비 때문에 한 달에 두어 번 산드로에게서 전화가 올 때면 새벽까지 기다렸다가 가장 먼저 전화로 달려가곤 했다. 농구를 하다 궁금해진 것도 묻고 NBA 관련 용품을 보내달라고 조르기 위해서였다. 바레장이 부탁한 조던 브로마이드 대신 산드로가 보내준 것은 훗날 클리블랜드에서 한솥밥을 먹기도 한 도넬 마샬의 브로마이드였다.


방학을 맞아 산드로가 집을 찾으면 여지없이 바레장의 차지가 됐다
. 여독에 지친 형을 농구장으로 끌고 나가 하루 종일 농구를 한 것이다. 산드로는 어린 동생의 어리광 섞인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차근차근 슛과 리바운드를 가르쳤다. 훗날 바레장 연합군은 국가대표 베테랑과 신참으로 다시 만나게 된다.

 


덩크를 하고 싶었던 미운 오리새끼

 

바레장이 처음 들어간 농구팀은 고향 비토리아의 유소년 농구팀이었다. 훈련장에 천장이 없어 비가 오면 훈련이 취소될 정도로 시설이 열악한 팀이었다. 또래들 중에서는 키가 큰 편이었던 바레장은 첫 해에는 센터를 맡았지만 비쩍 마른 몸 때문에 몸싸움에서 밀리기 일쑤였다. 게다가 쑥쑥 자라는 친구들에 비해 성장이 더뎌 어느새 팀에서 작은 편에 들어가게 돼버렸다. 그래도 어렸을 때부터 형에게 배운 드리블 실력은 남아있었기 때문에 이듬해부터는 포인트가드로 뛰게 됐다. 지금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어린 시절의 바레장은 패스와 3점 슛이 장기인 명 포인트가드였다. 이런 전력을 알고 있는 브라질 대표팀에서는 지금도 바레장을 이용한 패스 플레이를 많이 시도한다.


간신히 몸에 익힌 포인트가드 역할에 슬슬 재미를 붙여가고 있을 무렵
, 바레장의 몸이 또다시 말썽을 부렸다. 이번에는 순식간에 키가 커버린 것이다. 더 이상 포인트가드는 무리였다. 다시 센터 자리로 돌아간 바레장은 골밑 몸싸움 기술을 처음부터 다시 익혀야 했다. 하지만 급하게 자라느라 근육이 전혀 붙지 못한 몸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한계가 있었다.

 

16살이 된 바레장은 198cm까지 자랐지만 여전히 팀에서 가장 마르고 약한 선수였다. 큰 키에도 불구하고 덩크를 하지 못해 친구들의 단골 놀림감이었다. 어느 날 청소년 대표팀이 바레장의 팀에 연습경기를 왔는데, 그들마저도 바레장을 놀려댔다.


그날 밤 바레장은 소파에 앉아 어떻게 하면 덩크를 할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했다
. 결국 잠을 이루지 못한 바레장은 새벽 일찍 훈련장을 찾았다. 아무도 없는 코트에서 계속해서 덩크를 시도했지만 볼은 계속해서 림을 돌아나올 뿐이었다. 한 시간이 넘게 진땀을 흘리던 중 적절한 타이밍에 점프가 이뤄졌고, 바레장은 마침내 생애 첫 덩크를 성공시킬 수 있었다. 훈련 시간에 바레장은 마침내 덩크를 할 수 있게 됐다고 자랑했지만 친구들은 거짓말 하지 말라며 비웃었다. 결국 점심 내기까지 건 뒤 멋지게 덩크를 성공시킨 바레장은 친구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버렸다. 이런 근성은 청소년 대표팀 감독의 마음을 움직였고, 바레장은 그의 추천으로 상 파울로 주에 위치한 프랑카 팀에 들어갈 수 있었다.


프랑카는
브라질 농구의 성지로 불릴 정도로 전통이 깊은 팀이었다. 바레장은 이 팀에서 3년간 뛰며 농구를 배워갔다. 그 무렵에는 신장에 어울릴 만큼 체격도 자랐기 때문에, 바레장은 가드 수준의 드리블과 패스를 할 수 있는 전천후 센터가 됐다. 어린 시절 가드도 센터도 아니었던 미운 오리새끼가 이제 올 어라운드 능력을 갖춘 백조로 변신한 것이다. 청소년 대표팀에서 맹활약하며 마침내 스페인 리그 스카우트의 눈에 띈 바레장은 강호 FC 바르셀로나에 입단하게 됐다. 바레장 인생 최초의 외국 경험이었다.

 


Magic-Cavs

기사단의 야생동물


바레장은  바르셀로나에서 성인 팀과 유소년 팀을 오가며 실력을 쌓아나갔다. 파우 가솔을 배출한 바 있는 바르셀로나는 후안 카를로스 나바로, 로베르토 두에녜즈, 로드리고 델라 푸엔테 등 유럽 농구의 영웅들이 즐비했고, 여기에 사루나스 야시케비셔스와 드쟌 보디로가 등을 영입해 유로리그 우승을 노리는 강팀이었다. 바르셀로나는 바레장에게 득점력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선수로 성장해갔다. 오늘날 클리블랜드에서 볼 수 있는 바레장의 플레이 스타일은 이때 확립된 것이다. 바레장은 바르셀로나에서 3년간 뛰며 2003년에는 스페인 리그와 유로리그 동시 우승에 공헌했다.

그 무렵 바레장을 눈여겨보던 한 NBA 스카우트가 그에게 NBA 행을 제안하자 바레장은 두말 없이 승낙했다. NBA 선수로 뛰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 간직해온 꿈이었기 때문이다. 스페인 리그를 뒤로 하고 2004년 NBA 드래프트의 문을 두드린 바레장은 2라운드 1순위로 올랜도 매직에 지명됐지만 곧바로 드류 구든, 스티븐 헌터와 함께 클리블랜드로 트레이드됐다. 클리블랜드는 여름에 팀을 떠난 카를로스 부저를 대신해 르브론과 호흡을 맞출 빅맨을 찾고 있었고, 바레장 역시 구든 등과 함께 클리블랜드의 부름을 받게 된 것이다.

센터와 파워포워드를 모두 소화하며 일가우스카스와 구든의 백업으로 첫 시즌을 보낸 바레장은 평균 16분을 뛰며 4.9득점과 4.8리바운드를 기록했다. 몸을 사리지 않는 허슬 플레이를 펼친 덕분에 특히 공격 리바운드에서 두각을 나타냈는데, 그의 48분당 평균 리바운드 기록(6.1개)은 리그 4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바레장은 야성미 넘치는 플레이와 독특한 곱슬머리는 금세 클리블랜드 팬들의 눈길을 끌었고 팬들은 바레장에게 'Wild Thing'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바레장이 NBA에 빨리 적응한 데는 일가우스카스의 도움이 컸다. 1996-1997 시즌부터 줄곧 클리블랜드에서만 뛰어온 터줏대감 일가우스카스는 팀에 새로 들어온 외국인 선수들에게 멘토 역할을 해오고 있었다. 바레장 역시 입단하자마자 일가우스카스의 특별 관리에 들어가 미국 생활과 NBA, 그리고 영어를 배워나갔다. 어떤 영어를 배웠을까? 일가우스카스가 팀에서 걸쭉한 욕을 가장 잘 하는 선수라는 것만 밝히겠다.

바레장은 이듬해부터 조금씩 팀내 비중을 늘려나갔다. 가드를 보던 시절 익힌 빠른 풋워크와 다소 과장된 동작을 바탕으로 공격자 파울을 유도해냈다. 컨퍼런스 세미파이널 4차전에서 디트로이트의 천시 빌럽스를 상대로 얻어낸 결정적인 공격자 파울은 이후 바레장의 수비를 상징하는 플레이가 되었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말이다.
2006-2007 시즌에는 경기당 24분만 뛰면서도 무려 99개의 공격자 파울을 얻어내 리그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출장시간 대비 리바운드 갯수도 점점 늘려간 바레장은 입단 3년만에 클리블랜드의 핵심 수비수가 되었다.


Anderson Varejao, aka Wild Thing
Anderson Varejao, aka Wild Thing by emotionaltoothpaste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오해와 비난

2007년 여름 제한적 FA가 된 바레장은 클리블랜드와 재계약 협상을 시작했다. 하지만 바레장의 에이전트 댄 페건과 대니 페리 클리블랜드 단장 사이에는 커다란 의견 차이가 있었다. 페건이 바레장을 주전 선수급으로 대우해줄 것을 요구한 반면 페리 단장은 쏠쏠한 벤치 선수 이상 대우해줄 생각은 없음을 못박은 것이다. 둘의 의견 차이는 여름 내내 좁혀지지 않았고, 바레장은 결국 트레이닝 캠프에 참가하지 못했다.

재계약 불발은 바레장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혔다. 페건이 협상용 허풍으로 언론에 흘린 '바레장은 연봉 천만 달러를 받을 수 있는 선수'라는 발언 때문에 돈만 밝히는 선수라는 비난을 받은 것이다. 그때까지 바레장을 응원하는 팬들이 모두 등을 돌렸다. 바레장이 성적 못지 않게 이미지에도 신경써야 하는 프로 선수인 것을 감안하면 정말로 천만 달러의 연봉을 받더라도 만회할 수 없는 손해를 본 셈이다.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던 재계약 공방은 시즌이 개막하고도 한참이 지난 12월에야 마무리됐다. 클리블랜드를 제외하고 바레장과 계약해줄 팀을 찾던 페건이 샬럿 밥캐츠와 2년간 1천 1백만 달러의 계약을 맺자, 같은 금액만 보장하면 바레장을 잡아둘 수 있었던 페리 단장이 다음날 바레장 잔류를 선언한 것이다.

계속해서 클리블랜드 유니폼을 입게 됐지만 이미 싸늘하게 식어버린 팬들의 마음은 돌아오지 않았다. 팬들은 바레장이 복귀하는 인디애나 페이서스와의 홈경기에서 바레장을 야유할 것임을 공공연히 밝히고 다녔다. 그러자 이번에는 동료들이 바레장을 돕기로 했다.

바레장의 복귀전은 지난 6경기 동안 손가락 부상으로 결장했던 르브론의 복귀전이기도 했다. 클리블랜드는 르브론이 결장한 6경기를 모두 졌기 때문에 그의 복귀는 관중들의 큰 환호를 받을 것이 확실했다. 르브론은 이 점을 이용, 마이크 브라운 감독에게 자신을 바레장과 함께 벤치에서 내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자신에게 환호를 보내면서 동시에 바레장에게 야유를 보낼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문제는 그럴 경우 르브론이 데뷔 이후 332경기째 이어오던 연속 선발 출장 기록이 깨진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르브론은 동료를 위해 자신의 기록을 기꺼이 희생했다.

르브론의 계획은 멋지게 적중해서, 바레장은 르브론이 평소보다 과장된 몸짓으로 관중에게 인사를 보내는 사이 야유 없이 코트에 들어설 수 있었다. 바레장은 이날 경기에서 23분간 리바운드 9개를 잡아내며 속죄와 보답을 동시에 해냈다.

그 무렵 바레장은 고국 브라질 국민들로부터도 비난을 받았다. 재계약이 난항을 겪는 상황에서 부상으로 선수 가치를 떨어뜨릴 수도 있는 국가대표 소집을 거부한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이듬해에도 계약 마지막 시즌임을 들어 올림픽 참가를 거부하자 팬들의 비난은 극에 달했다. 리안드로 발보사(피닉스 선즈), 네네 힐라리오(덴버 너게츠) 등과 함께 브라질의 황금 세대로 불리던 바레장이었기에 팬들의 실망은 이만전만이 아니었다. 아예 바레장을 국가대표에서 영구 제명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하지만 바레장은 이 모든 비난을 실적으로 극복해나갔다. 2007-2008 시즌 48경기 중 13경기에서 선발로 나와 평균 10.1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재계약 협상 기간 동안 놀고 있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바레장과 마찬가지로 재계약이 지연되는 동안 고향의 휴양지에서 일광욕을 즐겼던 팀 동료 사샤 파블로비치와는 달랐다. 지난 시즌에는 부상당한 벤 월러스를 대신해 주전 파워포워드로 올라서며 6년간 4천 2백만 달러의 장기 계약에 성공했다.

국가대표에도 복귀한 바레장은 지난 여름 푸에르토리코에서 열린 FIBA 미주선수권 대회에 출전했다. 10경기에 모두 선발 센터로 출장한 바레장은 평균 30.4분 동안 13.6득점(전체 14위) 8.4리바운드(전체 5위) 1.9블록슛(전체 1위) 1.9스틸(전체 6위)을 올렸다. 득점은 에이스 발보사에 이은 팀내 2위고 리바운드, 블록슛, 스틸은 모두 팀내 1위였다. 예선에서 맞붙은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는 대회 MVP 루이스 스콜라를 상대로 대등한 활약을 펼치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바레장과 발보사, 티아고 스플리터 등이 맹활약한 브라질은 결승에서 홈팀 푸에르토리코를 1점차로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다. 바레장이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은 후 처음 맛본 우승이었다.

국가대표에 복귀하자 브라질 국민들의 원성도 다시 응원으로 바뀌었다. 지난 8월 리우 데 자이네이루에서 바레장과 발보사가 공동 주최한 자선 농구대회에서는 10만 달러를 모금했다. 성금은 브라질 아이들을 위한 농구장을 짓는 데 사용될 것이다. 바레장은 조만간 브라질 어린이들을 위한 만화책의 주인공으로도 그려질 예정이다.  



르브론의 파트너

클리블랜드 유니폼을 입은 지 6년째를 맞는 이번 시즌, 바레장은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주전 보직을 받고 트레이닝 캠프에 참가했다. 벤치에서 바레장 대신 나올 J.J. 힉슨과 대럴 잭슨이 모두 2년차로 경험이 적고 리온 포우는 무릎 수술로 2월 이후에나 출장할 수 있기 때문에 바레장의 책임이 그 어느 때보다 막중하다. 일부에서는 바레장의 중거리슛 능력이 없음을 들어 르브론과 새로 영입한 샤킬 오닐의 파트너로는 부적합함을 지적하기도 한다. 하지만 바레장은 크게 걱정하지 않는 눈치다.

"언제나 제가 해야 하는 일을 할 겁니다. 이 팀에서 제 역할은 수비와 리바운드지 슛이 아니죠. 그리고 공격시에는 르브론과 오닐을 막느라 비어있는 틈으로 달려들면 되는 겁니다."

르브론 역시 이에 동의하고 있다. 그는 클리블랜드에서 바레장을 가장 좋아하는 선수이기도 하다. 지난 5년간 자신의 수비부담을 덜어주고 공격시에는 자신이 움직이기 편하도록 좋은 스크린을 걸어준 점을 높이 사고 있다. 이번 바레장 재계약이 일사천리로 이뤄진 것도 르브론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82년생으로 곧 27세를 맞는 바레장은 앞으로 르브론의 파트너로써 전성기를 보내게 될 것이다.

형을 동경하며 NBA를 꿈꿔왔던 소년은 어느새 형을 뛰어넘어 NBA 최고 스타의 파트너가 되었다. 천장도 없는 농구장에서 땀을 흘리며 키운 꿈이 마침내 현실이 된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도전을 뛰어넘기 위해 최선을 다해오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늘날 바레장은 클리블랜드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다. 그리고 그동안 흘려온 땀과 눈물이 우승으로 보답받는 날, 바레장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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