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BA는 농구라는 스포츠에 있어 꿈의 리그라고 할 수 있다. 그 꿈의 리그에서 뛰기 위해서는 반드시 드래프트라는 시험을 통과해야만 한다.

1988년의 드래프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의 꿈을 좇아 NBA의 문을 두드렸다. 당시 가장 먼저 호명되며 1번 픽의 영광을 차지했던 대니 매닝을 필두로 미치 리치몬드, 댄 멀리 등 미래에 수많은 팬들을 열광시키게 될 스타들이 NBA 리거로써의 첫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훗날 스스로가 마이클 조던의 라이벌임을 자처했던 오늘의 주인공은 그 누구에게도 선택받지 못한 채 드래프트에서 낙방하고 만다. 대학의 마지막 시즌을 앞두고 오클라호마 주립대학으로 전학을 오기 전까지 NCAA가 아닌 디비전 1리그에서 활약하던 그에게 눈길을 줄만한 팀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니, 그보다 애초에 그의 꿈도 농구 선수가 아니었다. 농구 보다는 미식축구 선수가 되기를 희망했던 그였지만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를 다니기 위해 농구 선수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도 SAT 성적이 좋지 않았던 탓에 NCAA에 소속된 학교가 아닌 2년 제 커뮤니티 칼리지에 진학하게 됐고, 무려 4번의 전학 끝에 오클라호마 주립대까지 오게 된 그였다.

너무나 먼 길을 돌아온 만큼 NBA 스카우터들에게 자신의 매력을 충분히 알릴 시간이 부족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드래프트에서 선택받지 못한 그는 수많은 서머 캠프들을 통해 NBA 데뷔를 시도했다. 무던한 노력 끝에 결국 1988-89 시즌의 개막을 앞두고 골든 스테이트에 초청 선수로 합류하는데 성공했지만 어이없게도 허리 부상을 당하며 퇴출당하게 된 그는 이 후 CBA리그를 전전하며 때를 기다렸다. NBA 무대를 누비게 될 그 날을 말이다.

CBA 출신 최고의 슈퍼스타로 기억되고 있는 오늘의 주인공. 훗날 마이클 조던의 라이벌을 자처했으며 패트릭 유잉과 함께 1990년대 뉴욕 농구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오늘의 주인공은 바로 존 스탁스다.




1. 1990년대 뉴욕의 대표 가드 등장

CBA에서 숨을 고르며 때를 기다리던 스탁스는 1990년 10월, 뉴욕과 임시 계약을 맺는데 성공한다. 임시 계약 선수에서 뉴욕의 정식 선수가 될 수 있었던 것에는 재미있는 뒷이야기가 있다. 스탁스는 뉴욕과의 임시 계약 직후 가졌던 연습 경기에서 부상을 당하게 됐는데, 연습이나 경기 중 부상을 입은 선수는 최소한 그 해 12월이 끝날 때까지 방출할 수 없다는 선수보호 조항 덕분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스탁스를 12월까지 남겨둘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12월까지 연명하는데 성공한 스탁스가 부상에서 완쾌될 무렵, 이번에는 절묘하게도 당시 뉴욕의 주전 슈팅 가드였던 제럴드 윌킨스가 부상을 당하게 됐다. 딱히 윌킨스의 빈자리를 채워줄 대안이 없었던 뉴욕은 스탁스를 주전 슈팅 가드로 기용하는 것 말고는 별 다른 도리가 없었다. 1990년대 뉴욕을 대표하는 가드로 성장할 스탁스라는 그렇게 수면 위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1990년대 NBA 최고의 라이벌리는 역시 시카고와 뉴욕이었다. 두 팀의 대결은 언제나 전쟁 같은 치열함 속에 펼쳐졌고, 모든 선수들은 자신의 능력을 120% 이끌어내어 경기에 임했다. 마치 아이스하키를 보는듯한 보디 체킹이 이어졌고, 심판의 눈을 피해 날아들던 파울들, 지옥과도 같았던 골밑. 하지만 최후의 승리는 언제나 시카고의 몫이었다. 그들에게는 조던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독 뉴욕을 방문할 때면 평소에 보여주던 것 이상의 엄청난 활약을 쏟아내던 조던은 뉴욕 팬들에게 악몽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그런 조던을 막아서던 것이 바로 스탁스였다. 당대의 명 센터 유잉이 뉴욕의 심장이었다고는 하나 포지션의 특성상 시카고의 조던, 스카티 피펜 콤비와 직접 맞붙게 되는 장면은 그리 많지 않았다.

실질적으로 그들과 맞대결을 펼치는 일은 스탁스의 일이었다. 사실, 당시의 조던을 막아설 수 있는 선수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엄청난 위용을 뽐내던 선수였다. 하지만 그런 조던을 향해 끝없이 도전하고 달려들며 지지 않으려 기를 썼던 선수들이 몇 몇 있었는데 그 중 최고는 단연 스탁스였다. 너무나 처절한 과정을 거치며 NBA 리거로 우뚝 선 스탁스는 더 이상 누구에게도 자신의 자리를 빼앗기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최고의 재능을 타고 났다는 조던을 상대로 끝까지 물러서지 않는 모습을 보이며 자신의 라이벌은 조던뿐이라 거침없이 말할 수 있었던 사나이는 스탁스 뿐이었다.




스탁스는 그를 전형적인 3점 슈터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 만큼 위력적인 외곽슛 능력을 가졌으며, 상황에 따라 백업 1번으로도 출장이 가능했던 볼 핸들링과 리딩 능력, 조던과의 맨투맨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수비력은 물론이고 멋진 돌파에 이은 슬램덩크로 하이라이트를 장식하기도 했던 선수였다. 다만 조금은 지나치다 싶은 느낌의 기복과, 슛을 아낄 줄 모르는 난사 기질을 지적받기도 했지만 승리하겠노라는 투지와 볼을 향한 열정 만큼은 리그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 선수였다.

전성기의 스탁스를 보며 당시의 농구 관계자들은 "스탁스가 기복만 없다만 당장이라도 드림팀 멤버로 선발될 것이다" 라고 평가하곤 했다. 이처럼 터프한 파이터 정신과 도전자 마인드로 똘똘 뭉친 스탁스는 질식 수비를 앞세워 동부 컨퍼런스의 강자로 군림하던 뉴욕의 팀 컬러에 꼭 들어맞는 선수였고, 팀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던 유잉과 더불어 뉴욕에서 가장 사랑받는 남자로 성장하게 된다.




2.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NBA 파이널

조던과 시카고의 벽에 막혀 번번이 좌절을 맛보던 뉴욕에게도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1993-94 시즌, 조던이 은퇴를 선언한 것이다. 당시 스탁스는 무릎과 허리에 부상을 입어 59경기에 출장하는데 그쳤지만 시즌 평균 19득점을 기록하며 맹활약했다. 많은 경기에 결장했음에도 총 217개의 3점 슛을 폭발시켰고 그 결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올스타 게임에 출장하는데 성공한다. 조던이 없는 동부 컨퍼런스에서 뉴욕을 막을 수 있는 팀은 없었다. 뉴욕은 플레이오프 무대에서 뉴저지, 시카고, 인디애나를 차례로 물리치며 꿈에 그리던 NBA 파이널 진출에 성공했다.

파이널 무대에서 뉴욕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하킴 올라주원을 앞세운 휴스턴이었다. 1994년의 파이널은 유잉과 올라주원의 센터 대결만큼이나, 불꽃같았던 양 팀의 슈팅 가드인 스탁스와 버논 맥스웰의 대결로도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파이널 시리즈에서의 스탁스는 이제껏 봐왔던 스탁스가 아닌 듯 했다. 유잉과 올라주원이 골밑에서 전쟁을 펼치고 있는 동안 스탁스가 내외곽을 오가며 득점포를 터뜨려줘야 했지만 그는 시리즈 내내 부진했다.

특히 뉴욕이 3승 2패로 앞서고 있었던 6차전에서 뉴욕에게 우승 트로피를 가져다 줄 수 있었던 마지막 슛을 올라주원에게 막히며 경기를 내줬고, 최후의 7차전에서는 모두 18개의 슛을 던져 단 2개만을 성공시키며 극도로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결국 최종전까지 가는 혈투 끝에 우승 트로피는 휴스턴의 차지가 되어 버리고, 뉴욕 팬들은 커다란 좌절에 빠졌다. 스탁스 역시 부진했던 자신의 모습에 실망스러움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이후 뉴욕은 결단을 내린다. 조던이 없는 NBA에서도 우승을 할 수 없다면 팀을 재편하기로 한 것이다. 결국 1995년 팻 라일리 감독이 마이애미로 떠나게 되고 돈 넬슨이 새로운 감독으로 부임하게 된다. 거기에 디트로이트에서 젊은 스타로 급부상 중이었던 앨런 휴스턴의 영입은 스탁스의 자리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결국 새로운 감독인 넬슨은 주전 가드로 스탁스가 아닌 휴스턴을 선택했다.

하지만 스탁스의 뉴욕에 대한 사랑과 승리에 대한 열정은 변함이 없었다. 벤치 멤버로 경기에 나설 지언정 팀의 패배를 바라볼 수 없었던 스탁스는 이 후 1996-97 시즌에 올 해의 식스맨으로 선정되며 제2의 전성기를 열었다. 하지만 1998년의 여름, 끝내 뉴욕은 골든 스테이트의 라트렐 스프리웰과 스탁스를 트레이드 하고 말았다. 영원한 뉴요커이고 싶었던 스탁스는 너무나 허무하게 리빌딩의 폭풍에 휩쓸려 뉴욕의 유니폼을 벗게 된다. 이후 스프리웰의 영입은 굉장한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휴스턴-스프리웰로 이어지는 트윈 테러를 결성하게 되고 훗날 "8번 시드의 기적"을 일으키며 8번 시드 최초의 파이널 진출이라는 역사적인 업적을 이루게 된다.




3. 뉴욕과의 이별, 쓸쓸한 은퇴

그렇게 뉴욕이 잘 나가는 동안 스탁스에게는 시련의 계절이 찾아왔다. 뉴욕의 유니폼을 벗은 스탁스는 더 이상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이어지는 트레이드를 통해 일생의 앙숙 관계였던 시카고 유니폼을 입게 되기도 했는데 팀의 일원이 되었음에도 시카고에 대한 반감을 숨기지 않았으며 시카고 팬들조차 스탁스를 "뉴욕의 스탁스"로 여기는 듯 야유를 쏟아냈다. 스탁스 본인조차 시카고에서 뛰기를 원치 않는다며 뉴욕으로의 복귀를 타진했지만 뉴욕은 끝내 그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이 후 2000-01 시즌, 유타로 둥지를 옮긴 뒤 칼 말론, 존 스탁턴과 함께 활약하기도 했지만 2002년에 쓸쓸히 은퇴를 선언하며 13시즌에 걸친 커리어를 마감했다.

1990년대의 뉴욕에 존 스탁스만큼 어울리는 선수는 없었다. 그 누구에게도 패배 당하기를 원치 않았으며, 그 어떤 강한 상대라도 두려움 없이 정면으로 맞서 싸우던 선수였다. 비록 4번의 편입을 거쳐 대학을 졸업했고, CBA를 전전하며 '비주류'의 삶을 살았던 스탁스였지만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했기에 더욱 전투적이고 강력한 파이터 마인드를 가질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벌써 수년째 부진에 빠져있는 뉴욕을 보고 있노라면 지금 뉴욕의 라커룸에는 누구도 아닌 스탁스와 같은 리더가 필요한 것 같다. 단 한 번의 패배조차 용납할 수 없을 만큼 불타는 경쟁심을 가진 그런 선수 말이다.

타고난 재능의 차이를 뜨거운 열정으로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오늘의 주인공, 존 스탁스였다.

존 스탁스(John Starks, 1989-2002)



생애통산 866경기 출장(420 선발)
평균 12.5득점, 2.5리바운드, 3.6어시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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