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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A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한 개인상 타이틀과 그 주인공을 소개해 볼까 합니다.

바로 1987~88 시즌의 리바운드왕 쟁탈전입니다.

1978년 4월 9일, 정규시즌 마지막 날까지 계속됐던 "스카이워커" 데이빗 톰슨과 "아이스맨" 조지 거빈 간에 벌어진 득점왕 레이스 (톰슨은 73점을, 거빈은 63점을 득점했고, 거빈이 평균 27.22점을 마크하며 27.15점에 그친 톰슨을 따돌렸습니다)... 그리고 1994년 정규시즌 마지막 날에 "제독" 데이빗 로빈슨이 클리퍼스를 상대로 71득점을 하며 2년차 센세이션, 샤킬 오닐을 누르고 득점왕을 가져간 사실들은 익히 잘 알려져 있는 또 다른 치열했던 개인상 타이틀의 역사입니다.

저는 88년의 리바운드왕 타이틀이 위에 열거한 두 개의 득점왕 타이틀보다 "훨씬" 더 가치가 높았다고 봅니다.

이유는, 톰슨도, 거빈도, 오닐도, 로빈슨도... 모두 자신들의 소속팀에서 이 타이틀을 딸 수 있도록 전면적으로 협조를 해줬던 반면, (물론, 이것은 "밀어주기"가 아닙니다. 제가 정의하는 밀어주기란, 상대팀 또는 심판들까지도 어느 특정한 선수에게 관대함을 베풀며 개인상을 가져갈 수 있도록 암암리에 또는 대놓고 도와준 것을 의미하는데, 거빈의 경우에도, 또 로빈슨의 경우에도, 그런 "조작극"은 없었습니다. 있었다면 그것은 범죄죠. 단지 팀원들이 그들에게 득점할 기회를 끊임없이 제공해 줬다는 점이 평소와 달랐을 뿐입니다) 88년 리바운드왕의 경우엔 이런 협조나 도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리바운드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팀원들이 도와주거나 특수전략 등으로 도움을 줄 수는 없는 스탯이지 않습니까? 자기 스스로 처절한 몸싸움과 박스아웃을 통해 잡아내야만 하는 튄 공들에 대한 수치가 리바운드입니다. 멀리 튀어버리는 롱 리바운드가 자주 나오거나, 아무리 자리를 잘 확보해도 공이 림 안으로 들어가버리면 수포로 돌아가 버리는 게 리바운드기도 하죠. 그런 면에서, 마지막 날까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명승부가 펼쳐진 1988년의 리바운드왕 타이틀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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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던의 Bodyguard" 찰스 오클리와 "Mr. Windex"  마이클 케이지가 이 명승부의 주인공들입니다.

두 선수 모두 대학시절부터 리바운더로서 정평이 나있던 정통 블루칼라워커형 파워포워드 겸 센터였습니다 (옆의 GIF 파일은 86~87 시즌 중에 둘이서 몸싸움하다가 으르렁대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오클리는 이미 루키시즌부터 두자릿수에 가까운 리바운드를 하며 조던과 함께 불스의 핵심전력으로 자리를 잡았던 인물이고, 케이지는 첫 두 시즌을 벤치멤버로서 배운 후, 3년차 때에 평균 15.7점, 11.5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스타덤에 오른 클리퍼스의 기둥이었습니다.

오클리에 대해선 많이들 잘 아시겠지만, 케이지에 대해 잘 아시는 분들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마이클 케이지는 농구론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샌디애고 주립대학 출신입니다. 1학년 때 이미 13.7개의 리바운드를 잡아냈고, 3학년과 4학년 때도 평균 12.6개의 리바운드를 잡아냈던 케이지는, 80년대 초반에 발행된 웬만한 농구 전문잡지에서 빠지지 않고 다뤄지던 유망주였습니다. 농구명문 출신이 아니란 이유로 역대 최고의 드래프트라 불리우는 84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14번 픽까지 미끄러지기도 했지만, 그는 여전히 많은 NBA 팀들이 노리고 있던 내구력이 뛰어나고 힘이 좋은 떡대였습니다.

1983년엔 미국대표팀에 뽑혀 마이클 조던, 샘 퍼킨스, 크리스 멀린과 함께 조국에 미주 농구선수권 금메달을 선사하기도 했습니다. 84년 올림픽 팀에도 뽑힐 것으로 예상됐었으나, 주전과 후보를 명확히 하는 바비 나이트 감독의 선호도에 따라 막판에 바클리와 함께 탈락했습니다. 바비 나이트 감독은 베스트 12를 뽑는 감독이 아니라, 주전급 8~9명에 벤치워머급 3~4명을 뽑는 감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덕분에 제프 터너, 존 콘캑, 조 클라인 같은 허접한 선수들이 대신 나라를 대표했었지요.


케이지는 대학시절에 리바운드에 대한 장문의 칼럼들을 써서 전문 농구지에 올릴 정도로 필력 또한 뛰어났던 선수입니다. 케이지가 1982년도 The Sporting News 지에 쓴 칼럼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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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리바운드 하나에 제 인생을 걸려고 합니다. 이 세상엔 타고난 훌륭한 농구선수들이 넘쳐납니다. 그들과 경쟁하기엔 제게 없는 부분이 너무 많아요. 그러나, 리바운드는 특별한 재능을 필요로 하지 않지요. 리바운드에 있어 가장 중요한 덕목은 리바운드된 공을 잡겠다는 강렬한 의지와 포기할 줄 모르는 근성입니다. 피지컬한 부분들은 그냥 따라오는 거에요. 제가 프로에 가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바로 이 리바운드의 멘탈적인 부분에서 나태해지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세일 것입니다."

"리바운드가 오늘날의 저를 있게 했습니다. 그래서 프로에 가더라도 리바운드로 제 이름을 남기고 싶습니다. 이를테면, NBA 리바운드왕 타이틀을 따내는 것이랄까요? 그것이 제 희망사항입니다."


마이클 케이지의 그 희망사항이 현실화 된 것은 그로부터 6년 후인 1988년이었습니다.

이 1988년 시즌은 센터보다 파워포워드들이 리바운드들로서 이름을 떨치던 시기입니다. 리그 탑 5리바운더만 보더라도 올라주원을 제외한 나머지 네 명이 모두 포워드였습니다 - 벅 윌리암스, 칼 말론, 찰스 오클리, 그리고 마이클 케이지.

올스타 게임이 끝난 시즌 후반기부터 이 리바운드왕 타이틀에 대한 이야기들이 모락모락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시작은 오클리였습니다. 전년도 리바운드왕이었던 찰스 바클리를 항상 의식하고 있던 오클리는 공공연하게 현 리그의 최고 리바운더는 이제 본인임을 인터뷰들을 통해 피력했고, 또 실제로도 오클리는 시즌 대부분에 걸쳐 리바운드 수위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때에 소리소문없이 리바운드를 야금야금 잡아내며 오클리를 추격했던 선수가 바로 케이지입니다. 12월, 1월, 2월에 걸쳐 간혹 20개 이상씩의 리바운드를 잡아내던 그가 시즌이 종반으로 치닫던 3월부터 피치를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타고난 체력과 내구력도 한 몫을 했습니다. 이맘 때 쯤이면 많은 선수들이 누적된 피로와 잔부상 등의 여파로 지치게 마련인데, 케이지는 이 때부터 오히려 더 팔팔하게 살아났습니다.

15-14-13-16-23-16-21-19-21-23.

시즌의 한 경기 만을 남겨놓은 상태에서 케이지가 잡아낸 정규시즌 마지막 열 경기의 리바운드 스탯입니다. 시즌 대부분에 걸쳐 오클리에게 평균 1개 이상으로 뒤쳐져 있던 리바운드 수치였는데, 이제 코앞까지 쫓아 왔습니다. 당시의 CNN 스포츠 뉴스에서도 이 둘의 리바운드 스탯을 매일같이 보도하며 흥미롭게 지켜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선수는 오클리였습니다.

오클리도 뒤질세라 마지막 여섯 경기에서 21-14-17-17-35-21개의 리바운드를 잡아내며, 근소하게 리드를 지켰습니다. 사실, 오클리가 시즌 마지막 두 번째 경기였던 클리블랜드 전에서 35개의 리바운드를 잡아냈을 때 (오펜스 리바운드만 16개),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역시 오클리!" 하며 리바운드왕 타이틀이 그의 것으로 거의 굳혀졌다고 보았습니다.

1988년 4월 24일,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를 끝으로 오클리는 정확하게 13.00개의 평균 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시즌을 마쳤습니다.

이제 주사위는 케이지의 큼지막한 손 안에 쥐어져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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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경기는 시애틀 수퍼소닉스 전이었습니다. 케이지가 오클리를 따돌리려면 이 경기에서 28개의 리바운드를 잡아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케이지는 프로 커리어에서 그 정도의 리바운드를 잡아낸 적이 없었습니다. 감독도, 팀원들도, 그를 도울 수 있는 길은 없었습니다. 그나마 감독이 배려해 준 것이 48분 내내 출장시킨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마지막 경기를 앞둔 심정이 어땠었냐는 기자의 질문에, 케이지는 "두렵고 떨렸다"고 솔직하게 답한 적이 있습니다. 어쩌면 본인의 커리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리바운드왕 타이틀의 기회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케이지는, 코트 위에서 죽겠다란 각오로 뛰었습니다. 자신의 농구인생에 있어서 어쩌면 가장 중요할 수도 있었던 그 날의 소닉스 전에서 그는 자신의 모든 혼과 땀을 쏟아 부었습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경기장에 와 응원해주던 노모 한 분의 기도 만이 그의 유일한 위안이었습니다.

그리고 케이지는 해냈습니다...... 리바운드 30개. 그의 리바운드 평균이 13.03개가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한 경기로 인해 그에게는 "Mr. Windex"란 별명이 붙여졌습니다. 백보드를 깨끗이 정리하고 닦아 버린다는 뜻이죠.

불행히도 이 날의 경기는 TV 중계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리그 꼴찌이자 제일 인기가 없었던 클리퍼스 경기였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케이지의 인터뷰 내용을 빌어보면, 경기가 끝나는 순간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을 정도로 탈진이 됐다고 합니다. 본인의 그 날 컨디션으로만 보면 리바운드 한 10개 정도 잡을 수 있는 날이었답니다. 그다지 몸이 가볍지 않았었다는 얘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투혼으로 30개를 잡아내고 코트에 쓰러졌습니다.

6년 전에 그가 가졌던 소박한 희망사항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처음 농구공을 잡는 순간부터 2000년을 끝으로 16시즌이라는 NBA 커리어를 마치는 순간까지, 케이지는 항상 몸을 사리지 않고 코트에 혼을 쏟아부은 리바운더였습니다. 리바운더로서 이름을 남기겠다는 그의 꿈은 1988년의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리바운드왕 쟁취로 이루어질 수 있었고, 그의 성실함과 겸손함, 그리고 투혼과 열정은 후세에 많은 젊은이들에게 귀감이 되었습니다.

은퇴 후, 케이지는 자신의 아내와 함께 많은 불우한 청소년들의 복지를 위해 전력을 다 해 일해오고 있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못 하는 일을 일찌감치 잘 분별해내어 할 수 있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후회없는 인생을 사는 마이클 케이지.... 그가 진짜로 멋진 싸나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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