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포인트 가드라는 포지션을 좋아한다. 개인 블로그의 이름은 물론이고, 즐겨 찾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사용 중인 닉네임 역시 포인트 가드와 관련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인지 간혹 '당신이 생각하는 최고의 포인트 가드를 꼽아보라'는 질문을 받기도 하는데 보통 대답을 피하곤 한다. 누가 더 잘하고 못하고를 판단하는 것은 너무나 주관적인 요소가 강하기에 섣불리 대답하기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고의' 라는 단어를 '좋아하는' 이라는 단어로 바꾼다면 몇몇 떠오르는 인물들이 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은 NBA의 매력에 빠져들게 해준 앤퍼니 하더웨이와 바로 오늘의 주인공이다. 그는 하더웨이처럼 엄청난 운동능력을 가졌거나 위력적인 득점력을 자랑하던 선수는 아니었다. 날카로운 외곽슛으로 상대팀 가슴에 비수를 꽂는 선수도 아니었으며, 철통 같은 수비력을 뽐내며 상대를 질식시키는 선수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오늘 날까지 뉴욕을 대표하는 포인트 가드로 회자되고 있고 개인적으로는 NBA 최후의 올드 스쿨 스트리트 스타일의 포인트 가드로 기억하고 있다. 그는 위대한 존 스탁턴의 10년 연속 어시스트 1위 등극에 제동을 걸어버린 선수이기도 하며, 커리어의 마지막에는 전설의 포인트 가드인 매직 존슨의 어시스트 기록을 넘어서 통산 1만개 이상의 어시스트 갯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뉴욕 최후의 올드스쿨 스트리트 볼러. 오늘의 주인공은 마크 잭슨이다.


마크 잭슨, MSG에 입성하다 !!


뉴욕 토박이였던 마크 잭슨이 NBA에 데뷔한 것은 1987년 드래프트를 통해서였다. 세인트 존스 대학 출신의 잭슨은 그의 3, 4학년 시즌을 통해 현란한 공격형 포인트 가드로 인정 받으며 1라운드 18번 픽으로 고향 팀인 뉴욕 닉스에 호명 되었다. 당시 뉴욕은 패트릭 유잉이라는 걸출한 센터가 팀의 중심으로 버티고 있었고, 도미닉 윌킨스의 동생으로 잘 알려진 제럴드 윌킨스가 주축 스윙맨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팀의 득점리더였던 버나드 킹이 워싱턴으로 떠났지만, 젊은 유잉을 중심으로 동부 컨퍼런스 다크호스로의 발돋음을 준비하던 시기였던 뉴욕은 때마침 팀을 이끌어 줄 포인트 가드가 필요한 상황이었고, 마크 잭슨은 뉴욕에게 꼭 필요한 선수였다. 그렇게 뉴욕에 입단한 잭슨은 루키 시즌부터 주전 멤버로 자리 잡으며 맹활약했다.

루키임에도 전 경기에 출장하며 40분 가량의 플레잉 타임을 소화했고, 시즌이 끝난 뒤 평균 13.6 득점 10.6 어시스트로 더블더블을 기록함과 동시에 4.8 리바운드, 2.5 스틸을 기록하며 스카티 피펜, 케니 스미스, 케빈 존슨, 호레이스 그랜트, 레지 밀러, 레지 루이스 등의 동기들을 제치고 그 해 신인왕에 등극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뉴욕을 떠나다

데뷔 이 후 줄곳 뉴욕의 주전 포인트 가드로 맹활약했던 잭슨이었지만 뉴욕에서의 생활은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화려했던 루키 시즌 이 후 각종 잔부상에 시달려야 했고 모리스 칙스, 로드 스트릭랜드 등의 동료 포인트 가드들에게 조금씩 입지를 빼앗기며 출장 시간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힘든 시간을 보내던 잭슨에게 또 한 차례의 기회가 다가오는 듯 했으니 그것은 바로 명장 팻 라일리의 등장이었다.

뉴욕이 본격적으로 동부 컨퍼런스의 강자로 올라선 것은 1991-92 시즌이었는데 그 해가 바로 라일리의 감독 취임 시기였던 것이다. 라일리의 첫 시즌에 뉴욕의 주전 포인트 가드로 활약하게 되면서 잭슨의 성적은 다시금 상승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평균 11.3 득점, 8.6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부활에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잭슨은 끝내 라일리가 원하는 선수가 되지는 못했다.

수비력이 취약했던 잭슨은 강력한 수비를 바탕으로 뉴욕을 동부의 패자로 만들려했던 라일리의 스타일에 부합하는 선수가 아니었다. 결국 잭슨은 당시 LA 클리퍼스에서 플레이하던 닥 리버스, 찰스 스미스와 트레이드 되며 뉴욕을 떠나게 되었다. 라일리의 판단은 멋지게 적중했다. 잭슨을 보낸 이 후 맞이한 1992-93 시즌의 닉스는 파이널 우승을 차지했던 1969-1970 시즌 이 후 최초로 60승 고지를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뉴욕의 팬들은 너무나도 빠르게 잭슨의 이름을 잊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잭슨이 합류한 클리퍼스의 상황은 정반대였다. 당시 엄청난 기대를 받았던 대니 매닝과 론 하퍼라는 젊은 콤비가 버티고 있었고 스탠리 로버츠, 로이 버트 등의 견실한 골밑 요원들이 출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리그의 수퍼스타였던 도미닉 윌킨스까지 팀에 가세했지만 연이은 주축 멤버들의 부상으로 인해 좌절의 계절을 맞이하고 있었다.


인디애나의 잭슨, 부메랑이 되어 뉴욕으로 날아들다!



클리퍼스에서의 힘들었던 2년이 지나고 잭슨은 인디애나로 날아가 페이서스의 일원이 된다. 당시 인디애나는 명장 래리 브라운의 지도하에 있던 팀이었다. 인디애나의 전설 레지 밀러가 전성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네덜란드의 거인 릭 스미츠가 활약하고 있었다. 데일 데이비스, 안토니오 데이비스가 골밑을 지켰으며 데릭 맥키 등도 위력을 뽐내던 시기였다. 다만 푸 리차드슨, 헤이우드 워크맨 등이 활약하고 있었던 포인트 가드 포지션이 약점으로 꼽히던 인디애나였기에 잭슨의 합류는 서로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잭슨이 합류하기 이전에도 이미 47승을 거둔 강팀이었던 인디애나는 잭슨 영입 이후 52승을 마크하며 단숨에 동부 컨퍼런스 센트럴 디비전 우승을 차지한다. 그리고 잭슨은 자신을 잊어버린 뉴욕의 팬들에게 엄청난 부메랑이 되어 날아가게 된다. 잭슨은 총 여섯 번의 시즌을 인디애나에서 보내게 되는데 그 중 다섯 시즌을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이 다섯 번의 플레이오프를 치루면서 1라운드에서 호크스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했던 1995-96 시즌을 제외한 네 번의 모든 플레이오프에서 뉴욕을 만나 겨루게 된다.

인디애나에의 첫 시즌이자 뉴욕과의 플레이오프 첫 대면이었던 1994-95 시즌 플레이오프는 그 유명한 '밀러 타임'이 터지며 7차전 접전 끝에 동부 준결승에서 뉴욕을 탈락시켰던 시즌이었다. 1997-98 시즌에는 플레이오프 4강 전에서 뉴욕을 만나 시리즈 스코어 4-1을 기록하며 다시 한 번 뉴욕을 울린다. 이후 1998-99 시즌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뉴욕에게 2-4 로 패배했지만, 1999-2000 시즌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4-2 로 승리를 거두며 곧장 복수에 성공한다.

플레이오프에서 뉴욕과 총 4차례 만남을 가지며 3승 1패의 성적을 거두었으니 자신을 내친 고향팀과 팬들에게 확실히 복수하는데 성공한 셈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편 뉴욕을 꺾고 진출했던 2000년 파이널에서는 샤킬 오닐과 코비 브라이언트가 버틴 LA 레이커스를 만나 분투했으나 결국 시리즈 스코어 2-4로 준우승에 그치게 된다)

하지만 인디애나와 함께하던 영광의 시간들도 영원하진 못했다. 인디애나에 합류한 이후 처음으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던 1996-1997 시즌, 감독이었던 브라운과의 불화가 깊어진 잭슨은 시즌 도중 덴버 너게츠로 트레이드 되고 만다.

아이러니한 것은 인디애나에서 내쳐진 이 시즌이 앞서 언급했던 스탁턴의 10년 연속 어시스트 왕 등극을 가로막은 시즌이었다는 점이다. 바로 스탁턴의 10년 연속 어시스트 왕 등극을 가로막은 시즌이었다는 점이다. 당시 잭슨은 경기당 평균 11.4 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10.5 개의 어시스트에 그친(!) 스탁턴을 제치고 리그 어시스트 리더 자리에 올랐다.


굴곡의 연속



인디애나 소속으로 시작해서 덴버의 유니폼을 손에 들고 마감했던 1996-97 시즌이 끝나고 1997-98 시즌이 시작됐다. 헌데 잭슨의 손에는 또 다시 인디애나의 유니폼이 들려있었다. 이유인 즉 잭슨과 불화를 일으켰던 브라운이 감독직에서 물러나고 래리 버드가 새로운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또 다시 잭슨을 영입한 것이다. 하지만 2000-01 시즌이 시작할 무렵에는 토론토 랩터스의 유니폼을 손에 들고 있었다.

버드가 떠나고 아이재이아 토마스가 신임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레지 밀러와 저메인 오닐을 주축으로 한 팀의 전력 재정비 과정의 일환으로 잭슨을 떠나보낸 것이다. 당시 리그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빈스 카터, 과거의 동료들이었던 안토니오 데이비스, 찰스 오클리 등과 재회한 잭슨이었으나 토론토에서의 생활도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또 한 번 시즌 중에 트레이드 되는 일을 겪게 되는데 잭슨이 당도한 곳은 처음 NBA 커리어를 시작했던 고향팀 바로 뉴욕이었다. 트레이드 이후 뉴욕의 주전 가드로 활약한 잭슨은 트레이드로 인한 스케줄 중복으로 '한 시즌 83경기 출장'이라는 독특한 경험을 하기도 한다. 잭슨의 굴곡 많은 커리어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 해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뉴욕의 1라운드 상대가 바로 토론토였던 것이다. 뉴욕은 토론토에게 시리즈 스코어 2-3으로 아쉽게 패배하며 시즌을 마무리했다. 잭슨으로써는 개막전 당시 소속되어 있었던 팀에게 패배하며 시즌이 종료된 것이었다.

이후로도 잭슨의 굴곡은 계속된다. 2001-02 시즌까지 뉴욕에서 활약하던 잭슨은 2002-03 시즌이 되어 또 다시 트레이드가 되는데, 이번에 그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스탁턴의 유타 재즈였다. 팬들의 입장에서는 역대 통산 어시스트 1, 2위를 기록 중인 선수들이 한 팀에서 뛰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였지만 잭슨에게는 주전 선수에서 백업 선수로의 보직 변경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자신의 어시스트 기록을 앞서 있는 유일한 선수에 의해 출장 시간을 빼앗기고 있는 형국이 되기도 했다. 유타에서의 생활을 단 1년만에 정리한 잭슨은 휴스턴 로케츠로 둥지를 옮기지만 조용히 시즌을 보낸 뒤 은퇴를 선언하며 굴곡 많은 커리어에 마침표를 찍었다.


잭슨, 그를 기억하다



마크 잭슨. 그는 위력적인 돌파 능력은 없었지만, 포스트 업에 능했으며 오픈 찬스에서 던지는 슈팅으로 팀에 득점을 보탰다. 넓은 시야로 코트를 바라보며 현란한 킬패스를 꽂아넣었고 안정적인 리딩 능력을 뽐냈으며 무엇보다 엄청나게 영리한 두뇌를 자랑하던 선수였다. 아무리 작은 틈이라해도 그것이 포착되는 즉시 그 약점을 파고드는 데는 귀신과도 같은 선수였다. 또한 작은 체구에도 경기당 3개 이상의 리바운드를 잡아내기도 했던 선수이기도 했다. 커리어 내내 문제로 지적되던 수비 측면의 보강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지만 1:1 수비에 약점을 보였던 것에 비해 픽앤롤의 수비나 더블팀, 트랩 등의 팀디펜스에 있어서는 두뇌 플레이를 즐기던 선수답게 썩 나쁘지 않은 응용력을 보여주던 선수였다.
 
NBA 통산 어시스트 2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전설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받은 개인 트로피는 신인왕 트로피가 유일무이 했고, 올스타 게임 출장 역시 1988-89 시즌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시즌 어시스트 리더에 이름을 올린 것도 단 한 차례 뿐이다. 그렇다고 '영원한 2위' 와 같은 비운의 닉네임조차 얻지 못했다. 수많은 사연들로 엉키고 설킨 트레이드의 역사까지 떠올려본다면 실로 한많고 탈많은 커리어를 보낸 전설 아닌 전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내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언제나 결혼반지를 농구화 신발끈에 끼우고 경기를 했다는 잭슨. 뉴욕에서는 유잉을, 인디애나에서는 밀러를, 토론토에서는 카터를, 유타에서는 스탁턴의 뒤를 받치며 커리어를 보냈다. 그는 단 한 번도 팀의 주연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러나 커리어가 끝난 뒤, 그의 이름은 포인트 가드의 1차 덕목이라 할 수 있는 어시스트 부문에서 매직 존슨의 이름보다 앞에 놓여져 있었다. 잭슨의 이름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확률은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아니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농구를 좋아하는 이라면, 1990년대 NBA 를 즐겨봤던 이라면 결코 그의 이름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리그 역사상 최고의 조연 포인트 가드, 굴곡 많은 커리어의 전설 아닌 전설. 바로 오늘의 주인공은 마크 잭슨이었다.


Mark Jackson (1988-2004)



생애통산 1296경기 출장 (1091선발)
평균 9.6득점, 3.8리바운드, 8.0어시스트
통산 어시스트 10334 개 (역대 2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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