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구 명문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요즘 성적이 신통치 못한 뉴욕 닉스. 현재 자산 규모만 608 Million 달러인 이 부자구단은 1946년에 BAA 리그의 한 팀으로서 설립되었습니다. 닉스는 1950년에 넷 클리프튼이란 흑인선수와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리그에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리그 역사상 첫 흑인선수를 영입했던 이 구단은 그 이전인 1947년에 와따루 미사까라는 일본선수를 영입한 적도 있습니다.

 

파이널에 8번 진출했고, 70년과 73년에 걸쳐 두 번의 우승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구단입니다. 레이커스, 재즈와 더불어 아직까지 한 시즌에 60패를 해보지 않은 세 팀 중 하나인 닉스는 긴 역사에도 불구하고 리그 MVP는 단 한 명 밖에 배출하질 못 했습니다. 하지만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닉스 출신의 선수들은 무려 12명이나 됩니다. 그리고 9명이 닉스 구단에 의해 영구결번이 되어 있습니다 - 월트 프래지어 (#10), 딕 바넷 (#12), 얼 먼로우 (#15), 딕 맥과이어 (#15, 감독), 윌리스 리드 (#19), 데이브 드부셔 (#22), 빌 브래들리 (#24), 패트릭 유잉 (#33), 레드 홀즈만 (#613, 감독, 613승을 거뒀다는 의미입니다). 이 중, 프래지어, 먼로우, 리드, 드부셔, 유잉 등 다섯 명과 제리 루카스는 역대 최고 50인에도 선정이 됐습니다.

 

 

 

1973년도 우승팀 사진입니다.

빌 브래들리 (24), 필 잭슨 (18), 데이브 드부셔 (22), 윌리스 리드 (19), 제리 루카스 (32) 등이 뒤에 서있고, 앞선에 헨리 비비 (17, 마이크 비비의 아버지), 윌트 프래지어 (10), 레드 홀즈만 감독,
얼 먼로우 (15) 등의 모습도 보입니다.

 

 

, 그러면 이제 제가 선정한 All-Time 뉴욕 닉스팀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스타팅 5

 

포인트 가드 - 월트 프래지어 (Walt Frazier, 193cm, 1967~1977)

  

Walt Frazier vs Wilt Chamberlain
Walt Frazier vs Wilt Chamberlain by Vedia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1967 1라운드 드래프트 5번 픽으로 뉴욕에 둥지를 튼 프래지어는 All-NBA 팀에 6, All-NBA Defensive 퍼스트 팀에 7회 선정된 뉴욕 닉스 구단 사상 최고의 포인트 가드였습니다. 총 어시스트 수에서 아직도 깨지지 않는 닉스 구단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프래지어는 역대 포인트 가드 랭킹에서도 5위 안에 이름을 올리는 선수입니다.

 

커리어 평균으로 18.9, 5.9리바운드, 6.1어시스트, 1.9스틸, 49.0% 야투율을 기록한 프래지어의 플레이 스타일은 한 마디로 빨랐습니다. 포인트 가드로선 큰 편에 속했지만, 수비 스타일이 마치 고양이처럼 민첩했던 선수입니다. 프래지어는 장거리 외곽슛을 보유하지는 못 했습니다. 하지만, 스피드를 이용한 돌파나 미드레인지 점프슛. 턴어라운드 점프슛 등이 매우 정확했습니다. 화려한 묘기가 없이도 인기가 높았던 매우 효율적인 농구를 구사한 명 가드였습니다. 특히, 롤스로이즈를 몰고 다니며 항상 패션을 이끄는 모자와 외투 착용으로도 유명했던 레전드입니다. 1970년과 1973, 두 번에 걸쳐 우승의 영광을 누렸으며, 70년 파이널 7차전에선 36점에 19어시스트로 맹활약 했습니다.

 

 

슈팅 가드 - 얼 먼로우 (Earl "The Pearl" Monroe, 191cm, 1972~1980)

  

Calvin Murphy vs Earl Monroe
Calvin Murphy vs Earl Monroe by Vedia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스핀 무브와 헤지테이션 무브의 창시자, 얼 먼로우는 학창시절부터 필라델피아 시 길거리 농구의 신화로 알려져있던 인물입니다. 당시에 얻은 "블랙 지저스"라는 특이한 별명이 후에 덴젤 워싱턴 주연의 농구영화 'He Got Game'에서 레이 앨런의 영화 속 이름인 '지저스'로 인용되기도 했지요. 이 "흑인 구세주"의 농구인생은 화려했습니다.

 

1967년 볼티모어 불렛츠에 의해 전체 2번픽으로 드래프트된 먼로우는 같은 해 드래프트된 뉴욕 닉스의 월트 프래지어와 치열한 라이벌 관계를 유지했었습니다. 그래서 71~72 시즌 중간에 그를 닉스로 데려온 결정은 큰 모험이었습니다. 대학에서나 프로에서나 언제나 팀의 에이스였던 선수가 과연 자신의 평생 라이벌이었던 프래지어와 호흡을 맞출 수 있겠는가? 이를 긍정적으로 바라본 시각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는 한낱 기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매 경기 20개를 웃도는 야투시도를 해왔던 먼로우는 닉스에서 철저히 자신을 죽이며 팀의 일원으로 녹아들었습니다. 평균득점(커리어 평균 18.8)은 눈에 띄게 줄었지만, 대신 닉스는 리그 전체를 파죽지세로 몰아붙일 수 있는 막강한 전력을 갖출 수가 있었습니다. 체임벌린과 웨스트의 레이커스도, 압둘자바와 오스카 로벗슨의 벅스도, 하블리첵과 코웬스의 식서스도, 닉스의 프래지어-먼로우-윌리스 리드-데이브 드부셔 등이 안팎에서 터뜨리는 파상공세엔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73년도의 우승은 그의 이런 희생에 대한 보상이었습니다. 68년 신인왕이었던 먼로우는 69년엔 All-NBA 퍼스트 팀에도 이름을 올렸던 닉스 역사상 최고의 슈팅 가드입니다.

 

 

스몰 포워드 - 버나드 킹 (Bernard King, 200cm, 1982~1987)

 

Bernard 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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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스 소속으로 뛴 시즌은 비록 4시즌 밖에 안 되지만, 80년대 초중반에 리그를 쥐고 호령했던 그의 강력한 카리스마와 무시무시한 역대 최고급의 공격력은 그를 닉스 올타임 팀의 선발진에 놓고도 남음이 있게 합니다. 버나드 킹, 그는 '불운과 의지'의 사나이였습니다. 루키시즌에 이미 24.2, 9.5리바운드를 기록하며 화려한 신고식을 한 킹은 프로 3년차 때 입은 심한 부상으로 선수생명에 위협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각고의 노력 끝에 다음 시즌에 화려하게 재기하며 'Comeback Player of the Year' 상의 주인공이 됩니다.

 

82년에 닉스로 트레이드된 후부터 그의 공격력은 거의 "언터쳐블" 수준으로 급상승합니다. 특히, 84년 올스타 게임 직후, 두 게임 연속으로 50득점을 한 후의 킹은, 당시 최고의 포워드라 불리웠던 래리 버드나 줄리어스 어빙 조차도 "현 리그의 진정한 MVP는 버나드 킹이다"라고 표현을 할 정도의 괴물이었습니다. 이름 그대로 '왕'이었죠. 현재 르브론 '킹' 제임스가 보여주는 리그 내 영향력이나 임팩트를 생각해보시면 얼추 비슷할 것 같습니다. 누구보다도 빠른 슛 타이밍을 자랑하던 그의 턴어라운드 점퍼는 압둘자바의 스카이 훅과 더불어 가장 막기 힘든 슛이었다는 평가도 받았습니다. 간발의 차이로 버드에게 84 MVP를 빼앗긴 킹은, 85년 시즌에도 평균득점 33점으로 승승장구 하고 있었으나, 시즌 55번째 게임에서 심각한 무릎부상을 당하고 맙니다. 28세의 나이로 최전성기에 들어가던 이 위대한 포워드의 전성기는 거기서 사실상 끝이 나고 맙니다. 수없이 많은 재활 끝에 1991년에 평균 28.4점을 기록하며 올스타와 All-NBA 팀에 뽑히는 재기에 성공하지만, 그의 나이는 이미 35세였습니다.

 

 

센터 - 패트릭 유잉 (Patrick Ewing, 213 cm, 1985~2000)

  

EWING /NEW YORK KNICKS - SAN ANTONIO SPURS 93-80

특별한 설명이 필요가 없는 선수죠. 국내에선 90년대 4대 센터 중 한 명이었다는 소리를 듣는 위대한 센터입니다. 대학 초년생 시절부터 이미 빌 러셀과 압둘자바의 대를 이을 재목이라는 평을 받았던 유잉은 대학 4년 동안 조지타운 대를 3번이나 파이널에 올려 놓은 전적도 있습니다. 유잉은 대학 최고의 센터란 소리를 들으며 뉴욕 시민들의 기대를 한 몸에 안고 프로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초창기는 그리 평탄치 않았습니다. 팀엔 이미 올스타에도 뽑힌 적이 있었던 센터, 빌 카트라이트가 버티고 있었고, 유잉은 자신만의 특별한 공격무기를 개발하지 못 했으며, 리바운드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 했습니다. 프로 5년차였던 1989~90 시즌에 맞춰서 턴어라운드 점퍼를 주무기로 장착했고, 또 이 때쯤 되서야 리바운드에도 눈을 떴지요. 이 때부터가 유잉의 전성기입니다. 문제는 같은 컨퍼런스의 마이클 조던과 불스도 그 때부터 전성기로 돌입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번번이 우승의 문턱에서 주저앉아야만 했던 유잉이었습니다. 94년 파이널에서도 6차전, 7차전 모두 간발의 차이로 승리를 내줬고, 이후에도 레지 밀러의 인디애나에게 무릎을 꿇는 등, 유잉은 실력에 비해 정말로 우승복이 없는 선수였습니다. 1986년 신인왕, 1990 All-NBA 퍼스트 팀을 포함 All-NBA 팀 총 10회 선정, 올스타 11회에 빛나는 유잉의 커리어 평균은 21.0, 9.8리바운드, 2.4블락샷입니다.

 

 

파워 포워드 / 센터 - 윌리스 리드 (Willis Reed, 206cm, 1964~1974)

  

Chamberlain vs Willis Reed
Chamberlain vs Willis Reed by Vedia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윌리스 리드는 뉴욕 닉스의 심장과 같은 선수입니다. 뉴욕의 올드팬들은 지금도 윌리스 리드를 닉스 구단 사상 최고의 선수로 꼽는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센터로서는 단신이었으나 탄탄한 몸과 근성, 배짱으로 체임벌린, 빌 러셀, 압둘자바, 데이브 코웬스, 웨스 언셀드와 같은 동시대 최고의 센터들과의 싸움에서 항상 우위를 점했던 빅맨입니다. 큰 경기에서 유독 강했고, 플레이오프에서 만난 레전드급 센터들과의 대결을 대부분 승리로 이끌었던 역전의 용사였습니다. 대퇴부와 허벅지 부상으로 출전이 불가능했던 70년 파이널의 7차전에서 절룩거리는 상태로 등장해 체임벌린과 점프볼을 했고, 닉스에게 경기의 첫 두 골을 선사하며 팀의 사기를 끌어올린 그를 가리켜 닉스팬들은 '수퍼맨'이라 불렀습니다.

 

65년 신인왕이기도 했던 리드는 70년과 73년 두 번의 우승 시즌에 모두 파이널 MVP를 탔으며, 70년엔 리그 MVP와 올스타게임 MVP로까지 선정되어 3관왕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습니다. 동시즌에 All-NBA Defensive 퍼스트 팀에도 이름을 올렸었지요. 리드는 커리어에 걸쳐 18.7, 12.9리바운드를 기록했는데, 블락샷이 기록이 되질 않았어서 그렇지 블라킹도 아주 잘했던 선수입니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기동력도 좋았고, 훅 슛이나 중거리 슛에도 능했습니다. 무엇보다 풋워크가 좋아서 현란한 포스트업 무브로 상대팀 센터들을 페인트존 안에서 농락할 수 있는 기술까지 보유하고 있었죠. 닉스 사상 최고의 선수인 리드를 유잉과 함께 올-타임 팀 선발진의 더블 포스트에 추대합니다.

 

 

 


벤치 멤버들

 

 

파워 포워드 - 데이브 드부셔 (Dave DeBusschere, 200cm, 1968~1974)

 

Dave Debusschere
Dave Debusschere by Vedia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서 커리어의 상반기를 보낸 드부셔는 폴 사일러스와 함께 NBA 최초의 블루칼라워커 형 파워 포워드였다고 칭할 만한 원조 터프가이 중 하나였습니다. 사실, 사일러스와 드부셔의 골밑 몸싸움 대결은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무시무시하고 처절했었어요.

 

디트로이트 시절에도 All-Defensive 팀 제도가 있었다면, 아마도 커리어 내내 All-Defensive 퍼스트팀에만 오르다가 은퇴했을 명 수비수였기도 하지요. 69년부터 74년까지 6년 연속으로 All-Defensive 퍼스트팀에 선정된 직후 은퇴를 했습니다. 그러나 16.1, 11.0리바운드라는 커리어 평균이 말해주듯이 드부셔는 득점력도 뛰어난 수비수였습니다. 그를 디트로이트에서 데려오는 순간, 닉스의 우승 퍼즐이 다 들어 맞았다는 평가를 받았지요. 리드-프래지어-드부셔로 이어지는 삼각편대가 완성됐던 것입니다. 신장은 작았으나 체임벌린을 가장 잘 막았던 선수인 드부셔는 올스타에도 8회나 선정이 됐습니다.

 

 

슈팅 가드 - 앨런 휴스턴 (Allan Houston, 198 cm, 1996~2005)

 

BASKETBALL: Allan HOUSTON

닉스 구단에서 9시즌을 뛰고 은퇴한 휴스턴은 레지 밀러와 더불어 명실공히 90년대 최고의 외곽슈터였습니다. 커리어 3점 성공률이 40%를 넘는 휴스턴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견고한 슈팅 폼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2000년과 2001, 2년 연속으로 올스타에도 선정된 훌륭한 슈팅 가드였습니다.

 

1999년엔 8번 시드의 닉스를, 대들보인 유잉 없이, 스프리웰, 래리 존슨과 함께 파이널로 견인한 바도 있지요. 닉스의 라이벌, 마이애미 히트를 1라운드 5차전에서 회심의 버저비터 중거리 슛으로 꺾고 주먹을 불끈 쥐었던 그의 모습을 기억하는 국내 팬들도 많으실 겁니다. 휴스턴의 커리어 평균은 17.3점이고 플레이오프 평균은 19.3점입니다.

 


콤보 가드
- 존 스탁스
(John Starks, 195cm, 1990~1998)


패트릭 유잉의 전성기와 함께 했던 열정의 가드, 존 스탁스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식품점 배달원을 하며 생활하다가 뒤늦게서야 오클라호마 주립대를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NBA에 드래프트되지도 못 했고, 25세가 되던 1990년에 뉴욕 닉스의 트라이 아웃에 참가해서 눈에 띄이게 됐습니다. 연습시합 중 유잉의 위로 인-유어-페이스 덩크를 시도하던 찰나에 유잉이 밀쳐내면서 무릎부상을 당하게 됩니다. 부상으로부터의 완쾌가 지연되면서 어영부영 닉스의 멤버가 된 그는 92~93 시즌부터 선발진으로 승격이 됩니다. 역시 '인생 한 방' 입니다.

 

숱한 명승부를 연출해내며, 닉스의 백코트를 이끈 스탁스는 94년엔 올스타에, 97년엔 올해의 식스맨에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3점이 매우 뛰어난 선수였으나, 94년 파이널 6차전 막판, 회심의 슛이 올라주원에게 블락을 당했고, 7차전에선 최악의 야투율을 보여서 보기에 안타까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스윙맨 - 빌 브래들리 (Bill Bradley, 196cm, 1967~1977)

  


by Jeffrey Guterman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브래들리는 명문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한 수재였습니다. 영국 옥스포드 대학으로부터 장학생 자격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후, 미국 대통령 선거에 후보로 출마까지 했던 인물입니다. 대학시절엔 3년 연속으로 All-America팀에 선정되고, 65년엔 대학 MVP로까지 선정됐습니다.

 

프로 전 커리어를 뉴욕 닉스에서만 보냈던 브래들리는 수비력과 패싱력이 뛰어난 스몰 포워드였습니다 (대학시절엔 가드였습니다). 특히, 속공 상황에서의 연결고리 역할을 누구보다 잘 수행했으며, 중장거리 뱅크샷이 주특기였던 선수입니다. 70년과 73년 우승시즌 때 팀에 없어서는 안 되었을 감초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파워 포워드 - 찰스 오클리 (Charles Oakley, 206cm, 1988~1998)

  


유잉이 카트라이트와 포지션이 겹쳐있는 비효율적인 라인업에 카트라이트 대신 진정한 블루칼라워커 리바운드로서 영입된 빅맨이었죠. 88년에 오클리가 팀에 합류하자마자 닉스의 성적은 전년도의 38승에서 52승으로 훌쩍 뛰었고, 유잉은 자유롭게 자신의 센터 역할에만 충실할 수가 있었습니다.

 

오클리는 꾸준히 두자릿수 리바운드를 잡아주며 유잉의 보디가드 역할을 해주었고, 자신만의 터프한 수비력도 꾸준히 향상시켜 나갔습니다. 94년엔 올스타와 All-Defensive 퍼스트팀에도 선정이 됐습니다. 내구성이 좋아서 웬만하면 부상을 당하는 일이 없던 오클리는 닉스의 90년대 중흥에 반드시 필요했던 선수였습니다.

 

 

포인트 가드 - 마크 잭슨 (Mark Jackson, 186cm, 1987~1992, 2000~2002)

  


마크 잭슨은 닉스 구단에서 총 6시즌 반을 뛰었던 선수로서, 유잉, 오클리와 함께 닉스를 플레이오프 컨텐더로 만들었던 정통 포인트 가드였습니다. 루키시즌에 이미 13.6, 10.6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올해의 신인왕'을 수상했는데, 이는 1라운드 18번픽으로 뽑힌 선수로선 역사에 남을 업적이었습니다.

 

자유투를 던지기 직전 림을 향해 팔을 뻗어보며 마치 거리를 재는 듯한 이상한 습관을 갖고 있기도 했지만, 그의 패싱력은 최고였습니다. 특히 뒤에서 따라오는 선수에게 정확하게 넣어주는 No-look 패스가 일품이었죠. 89년에 올스타에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파워 포워드 / 센터 - 제리 루카스 (Jerry Lucas, 203cm, 1971~1974)

  


by Jeffrey Guterman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1960년 로마 올림픽 금메달의 주역, 제리 루카스는 자신의 커리어 말년 세 시즌만 닉스와 함께 했습니다. 한 구단의 올-타임 팀에 넣기엔 활약한 시즌이 많지가 않았지만, 닉스가 리그를 장악했던 70년대 초반, 팀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는 상징성때문에 백업 빅맨으로 이 팀에 그의 이름을 올렸습니다.

 

시즌 평균 20득점, 20리바운드를 두 번이나 기록했던 신시내티 로열즈 시절이 선수로서의 최전성기였으나, 닉스 시절에도 윌리스 리드와 데이브 드부셔를 보좌하며 리그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프런트라인을 구축하는 데에 일조를 했습니다. 72년 시즌 초반에 리드가 부상으로 시즌을 마감하자, 팀의 주전 센터로서 평균 17, 13리바운드, 4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팀을 파이널로까지 이끌기도 했지요. 루카스는 초창기엔 훅 슛과 플로터 등이 주 공격루트였는데, 닉스 시절엔 중장거리 점프슛까지 장착을 했었습니다. 체임벌린, 러셀 등과 동시대를 뛰었으면서도 All-NBA 팀에 5, 올스타에 7회 선정됐으며, 1996년에 선정된 역대 50인에도 당당히 이름을 올린 레전드 빅맨입니다.

 

 

 

이 외에도 닉스를 거쳐간 수많은 스타 플레이어들이 있습니다. 초창기 선수로는 리치 게린, 해리 갤러틴, 리차드 맥과이어, 밥 맥카두, 마이클 레이 리차드슨, 빌 카트라이트 등이 있겠고, 최근 선수로는 래리 존슨, 라트렐 스프리웰, 스테판 마버리 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닉스에서 뛴 햇수가 너무 적었거나, 구단에 미친 임팩트 면에서 위에 올린 선수들에 비해 약간 밀린다고 판단되어서 제외시켰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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