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 & COLUMNS/POINT GUARD 2009. 10. 27. 09:47

길교주의 자비로운 부활 메세지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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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2월의 어느 날, 골든 스테이트 워리어스의 홈구장 오라클 아레나.

골든 스테이트의 벤치에 앉아 있던 약관의 루키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코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데뷔 이후 단 2경기에 교체 출장한 것에 그치고 있었고, 심지어 부상을 당하지 않았음에도 부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야했다. 좀처럼 코트에 나설 기회를 잡지 못하던 그는 코치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었다. 팀 훈련 때마다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음에도, 되레 자신보다 못한 기량을 선보인 베테랑들에게만 기회가 주어지고 있었다.

조금씩 자신감을 잃어갈 무렵, 그는 자신이 대학 시절 활약하던 모습이 담긴 테이프들을 돌려봤다. 그리고 확신했다. 자신이 NBA에서 성공할 수 있을만한 기량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는 변하기 시작했다. 비록 여전히 벤치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더 이상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코트를 바라보던 그는 없었다. 눈을 번뜩이며 팀원들의 움직임을 머릿속에 담기위해 노력했고, 수없이 이미지 트레이닝을 반복했다.

그 동안 소속팀인 골든 스테이트는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악의 부진에 빠져있었다. 결국 구단 프론트는 당시 코치였던 데이브 코웬스를 해임했고, 브라이언 윈터스를 신임 헤드코치로 임명했다. 원터스는 부임 이후 팀의 리빌딩을 위해 젊은 선수들에게 보다 많은 기회를 주기로 결정했다. 벤치에서 때를 기다리던 그에게도 조금씩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시작은 좋지 않았다. 교체 멤버로 꾸준히 코트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지만, 이렇다 할 결과물을 쉽사리 내어놓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조금씩 전진하고 있었다. 데뷔 이후 48경기 만에 첫 번째 선발 출장의 기회를 얻더니, 9경기 연속 두 자릿수 득점에 성공하기도 했다.

팀의 시즌 마지막 27경기에 연속 선발 출장하며 입지를 다진 그는 조금씩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시작했고 4월 한 달 동안 팀의 9경기에 모두 선발 출장, 평균 16.5득점, 4.7리바운드, 6.1어시스트, 3스틸을 기록하며 서부 컨퍼런스 이 달의 신인으로 선정되었다.

하지만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가 어떤 선수로 성장하게 될 지, 어떤 드라마틱한 장면들을 연출하게 될 지를 예측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의 이름은 길버트 제이 아레나스 주니어 (Gilbert Jay Arenas Jr.).

훗날 Agent Zero라는 닉네임으로 불리게 될 길버트 아레나스였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길버트 아레나스.

그는 1982년 LA의 San Fernando에서 태어났다. 아레나스의 어머니는 그가 어렸을 때 약물 중독에 빠졌고, 이후 그는 아버지 Gilbert Arenas Sr.와 함께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는 헐리웃에서 활동하던 근육질의 조연 배우였다. 배우로써 인상적인 경력을 쌓지는 못했지만, 몇 차례의 영화 출연과 CF 모델 활동 등으로 가정의 생계를 책임졌다. 동시에 어머니 없이 자라나고 있는 아들에게 무한한 사랑을 쏟았다. 어머니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아레나스가 탈선하거나 방황하지 않고 올곧게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아버지의 커다란 사랑이 있었다.

아레나스에게 처음 농구를 접하게 해준 인물 역시 아버지였다. 아레나스가 11살이 되던 해, 아버지로부터 농구공을 선물 받은 그는 농구의 매력에 매료되어갔다. 마이애미 대학에서 풋볼 선수로 활약하기도 했던 아버지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탓인지 아레나스는 뛰어난 운동 신경을 뽐내며 빠르게 실력을 키워갔다. 이후 Grant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농구 선수로의 삶을 시작했다.

고교 시절에도 그의 득점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아레나스는 입학 이후 연일 고득점 행진을 이어갔다. 신입생이던 해에 시즌 평균 22.5득점을 기록하더니 이후 29.8득점, 33.4득점으로 그 숫자를 늘려갔다. 졸업반이 되기도 전에 이미 교내 역대 최다 득점 기록을 갈아치운 그는 4년 동안 총 2124점을 득점하며 Grant 고교의 전설로 이름을 남겼다.

그러나 아레나스가 NCAA에서도 성공 스토리를 이어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모두가 의문을 가졌다. 우선 Grant 고교에서의 활약상만으로는 농구 팬들에게 커다란 인상을 줄 수 없었다. Grant 고교는 인근의 Fairfax나 Compton Dominguez 같은 농구 명문 고교에 비해 인지도가 떨어지는 학교였기에 그의 활약은 상대적으로 저평가 되고 있었다. 덧붙여 빠른 생일로 인해 동급생들보다 나이가 어렸기에 필연적으로 체격적인 부분에서 약점을 가지고 있었고, 학업에 무관심했던 탓에 대학에 입학할 수 있을만큼의 SAT 성적을 얻을 수 있을지에 대한 여부조차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당시 공격적인 리쿠르팅에 나섰던 농구 명문 애리조나 대학에 의해 졸업반이 되기도 전에 입학 제의를 받았고, 곧바로 제의를 받아들이며 진로를 최종 결정지은 아레나스였지만 대학에서의 활약은커녕 입학 가능성조차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모두가 아레나스에게 의심의 눈길을 보낼 때, 단 한 사람만은 그를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바로 그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아레나스가 농구는 물론이고 대학에 입학할 수 있을 만큼의 SAT 점수를 얻을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결국 아레나스는 대학 입학에 필요한 SAT 점수를 취득하게 됐고, 농구 명가 애리조나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백넘버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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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만고 끝에 애리조나 대학교 입성에 성공한 아레나스였으나 그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여전히 가시가 돋쳐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아레나스가 약체 팀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겉멋만 들었을 뿐, 실력은 형편 없을 거라며 그를 비웃었다. 심지어 몇몇 이들은 '주전 자리를 차지하기는커녕, 출장 시간이 0분에 그칠 것'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억측들은 아레나스를 무릎 꿇게 만들지 못했다. 되레 그는 자신의 백넘버를 0번으로 결정하며 보란 듯이 NCAA 무대로 뛰어들었다.

프리 시즌이 시작되자 아레나스를 비웃던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레나스는 프리 시즌 첫 경기에서 22득점을 퍼부으며 인상적인 데뷔에 성공했고, 이후에도 맹활약을 계속하며 프리 시즌 MVP에 등극해버렸던 것이다.

1999-2000 시즌의 애리조나는 로렌 우즈, 마이클 라이트, 리차드 제퍼슨과 같은 재학생들과 아레나스, 제이슨 가드너, 룩 월튼 등의 신입생들이 조화를 이루며 강력한 전력을 뽐냈다. 아레나스는 팀 내 두 번째로 많은 평균 32분의 출장 시간을 기록했고, 평균 15.4득점을 기록하며 우즈, 라이트와 함께 팀 내 스코어링 리더로 맹활약했다. 애리조나는 27승 7패를 기록하며 승승장구했다.

아레나스는 코트 안에서의 맹활약은 물론이고, 코트 밖에서의 재미있는 모습들로 많은 팬들을 거느리기 시작했다. 팀원들과 학우들에게 고대시를 인용한 이해할 수 없는 농담을 던지는가 하면, 교내 신문에 우스꽝스러운 메세지를 싣기도 하고, 유니폼을 마음대로 잘라 입고 나와서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소포모어 시즌이 되자 아레나스는 더욱 강해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2000-01 시즌 동안 평균 16.2득점을 기록하며 팀 내 최다 득점자가 되었고, 애리조나를 NCAA 토너먼트 파이널 무대에까지 올려놓았다. 하지만 아레나스는 정작 파이널 무대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힘없이 물러났다. 상대팀이었던 듀크 대학은 막강한 전력으로 애리조나를 물리치고 전미 챔피언이 되었다.

비록 파이널 무대에서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아레나스는 본능적으로 더 이상 대학 무대에서 이룰 것이 없음을 직감했다. 처음 애리조나에 입학할 당시에는 당연히 대학 졸업장을 받게 될 거라 생각했지만, 단 2년 만에 NCAA 파이널 무대를 밟아본 아레나스는 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짧았던 대학 생활을 청산하고 NBA 드래프트에 참가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수많은 이들이 그의 결정을 만료했지만, 아레나스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아레나스는 댄 페건을 에이전트로 고용하며 2001년 NBA 드래프트에 참가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좌절과 상처의 드래프트

'엄청난 사거리를 자랑하는 롱 레인지 점퍼와 훌륭한 운동 능력, 빠른 스피드와 타고난 득점 감각에 대한 부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슈팅 가드로 뛰기에는 신장이 너무 작고, 포인트 가드로 뛰기에는 지나치게 공격적인 성향을 가진 슛 퍼스트 마인드의 콤보 가드.'

얼리 엔트리를 선언한 아레나스를 바라보는 시선들은 대개 이러했다. 지역 방어의 허용, 핸드 체킹 강화 등의 룰 개정으로 과거에 비해 콤보/듀얼 가드 성향의 선수들이 갖는 가치가 높아졌으나, 당시만 하더라도 새로운 룰이 막 도입되던 시기였기에 여전히 콤보/듀얼 가드 성향의 선수들을 기피하는 경향이 많이 남아있었다. (물론 지금도 이런 경향은 여전히 존재한다)

애리조나 재학 시절, 아레나스는 포인트 가드가 아닌 슈팅 가드로 플레이했었다. 걸출한 포인트 가드였던 가드너가 그의 동기였기 때문이다. 해서 드래프트를 목전에 둔 아레나스에게는 포인트 가드로의 포지션 전환에 대한 성공 여부 또한 커다란 이슈이자 성공의 걸림돌로 비춰졌다.

하지만 아레나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최선을 다해 각종 워크아웃에 임했다. 아레나스가 앞만 보고 달려갈 수 있었던 것에는 또 한 번 아버지의 존재가 큰 도움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아레나스가 얼리 엔트리를 선언함과 동시에 아들의 매니저 역할을 자청하며 동분서주 아들의 기량을 알리기 위해 움직였다. 그러는 동안 아레나스의 아버지는 헐리웃에서 비중 있는 조연으로 캐스팅 제의를 받게 되었는데, 아버지는 아들의 농구 인생을 위해 과감히 이를 거절했다 (아레나스의 아버지가 캐스팅을 거절했던 캐릭터에 최종 낙점된 인물은 Laurence Fishburne, 우리에게 '모피어스'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배우였다).

이처럼 아레나스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아버지 역시 아들의 성공적인 프로 데뷔를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 그 때 아레나스 부자에게 접근해오는 팀이 있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새크라멘토 킹스. 2001년 드래프트 당시 1라운드 25번 지명권을 보유하고 있었던 새크라멘토는 아레나스에게 '니가 25번 이후에 지명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아레나스와 아버지는 순조롭게 진행되는 드래프트 준비 과정에 만족했고 여유 있는 마음으로 드래프트 중계를 지켜봤다.

2001년 NBA 드래프트. 드디어 새크라멘토가 보유하고 있는 1라운드 25번 지명권의 주인공이 호명될 차례가 다가왔다. 짧지만 긴 침묵이 흐르고, NBA 커미셔너 데이비드 스턴의 입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Sacramento Kings select, Gerald Wallace from the University of Alabama."

결국 1라운드 지명권 행사가 모두 끝이 나도록 아레나스의 이름은 호명되지 않았고, 이후 2라운드 31번 픽으로 그를 지명한 골든 스테이트 워리어스에서 NBA 커리어를 시작하게 되었다.

아레나스에게도, 그의 아버지에게도 드래프트는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골든 스테이트의 풍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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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애리조나 대학에 입학했을 당시와 마찬가지로, NBA 데뷔 역시 순탄치 않았다. 워크아웃과 팀 훈련에서 좋은 모습을 보인 아레나스는 내심 NBA 데뷔에 대해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지만 팀은 계속해서 그를 외면했다. 2000-01 시즌 골든 스테이트의 4번 째 경기에 교체 출장하며 NBA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지만 겨우 3분을 플레이하는데 그쳤다. 이어진 경기에서 8분을 플레이하며 단 1개의 3점슛 시도를 마지막으로 그는 무려 이후의 25경기 동안 단 1초도 코트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코칭 스태프들은 계속해서 그를 외면했고, 심지어 부상을 당하지 않았음에도 부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언제나 팀 훈련에서는 맹활약했지만 정작 실전에 투입되는 기회는 베테랑들에게 돌아갈 뿐이었다.

언제나 많은 이들의 의심과 억측을 보기 좋게 날려버린 아레나스였지만 이번에는 그도 의기소침해질 수밖에 없었다. 드래프트에서의 상처가 채 아물지도 않은 시점에서 단순한 출장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아레나스의 가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코트에 내보내주기만 한다면, 충분한 기회만 준다면 얼마든지 자신의 기량을 입증시킬 수 있을 텐데. 끝내 자신을 모른척하던 코칭 스태프들과 구단 프론트를 원망하는 마음뿐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자신감을 잃어갔다. 어쩌면 정말로 기량이 형편없기 때문에 코트에 나설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우연히 대학 시절 자신의 활약상이 담긴 비디오테이프를 보게 된다. TV 속에서 플레이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아레나스는 자신이 NBA에서 성공할 수 있을만한 기량을 충분히 가지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의심의 눈길들을 멋지게 날려버리겠노라 다짐했다.

이후 그는 더욱 치열하게 훈련에 임했다. 팀 동료였던 마크 잭슨, 딘 올리버와 함께 가장 먼저 훈련장에 나와서 가장 늦게 훈련장을 빠져나갔다. 여전히 벤치에 앉아있는 신세였지만, 이전처럼 불만스럽게 코트를 바라보기 보다는 팀 동료들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연구했으며 코트를 누비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며 이미지 트레이닝을 이어갔다.

그 동안 골든 스테이트는 끝 모를 부진에 빠져있었다. 결국 구단 프론트는 당시 헤드코치였던 데이브 코웬스를 해임하고, 신임 헤드코치로 브라이언 윈터스를 내세웠다. 윈터스는 팀의 리빌딩을 위해서 젊은 선수들을 적극 기용할 것임을 천명했고 이는 아레나스에게 커다란 호재가 되었다.

하지만 윈터스 역시 곧바로 아레나스에게 기회를 준 것은 아니었다. 아레나스는 윈터스가 헤드코치로 임한 7번째 경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다시금 코트를 밟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출장 시간은 겨우 3분. 이후에도 간간히 교체 투입으로 경기에 임했을 뿐 단 한 번도 10분 이상의 출장 시간을 기록하지 못하고 있었다.

시즌 48번째 경기에 들어서 비로소 첫 선발 출장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아레나스는 조금씩 자신의 가능성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첫 선발 출장 이후의 9경기에서 연속으로 두 자릿수 이상의 득점에 성공한 것이다. 이후 아레나스는 팀의 마지막 27경기에서 연속으로 선발 출장하는데 성공했고, 충분한 기회를 얻자마자 이제껏 그래 왔듯이 모든 이들에게 자신의 기량을 입증하기 시작했다. 4월에는 서부 컨퍼런스 이달의 신인 선수로 선발되며 멋지게 신인 시즌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이듬해 2002-03 시즌. 아레나스는 본격적으로 성공 스토리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82경기에 모두 선발 출장, 평균 35분(팀 내 2위)을 플레이하며 18.3득점(팀 내 2위), 4.7리바운드, 6.3어시스트(팀 내 1위), 1.5스틸(팀 내 1위)을 기록하며 맹활약했다.

팀 내의 입지는 물론이거니와 리그 내에서도 그의 이름은 조금씩 무게를 갖기 시작했다. 루키 올스타 게임에 소포모어 팀의 일원으로 참가하며 대회 MVP로 선정되었고, 수직 상승한 개인 기록과 팀 내 공헌도로 인해 2002-03 시즌 MIP 수상자가 되는 영광을 맛보기도 했다.

아레나스의 급격한 성장은 2라운더 루키로 데뷔한 것을 전화위복으로 만들었다. 단 2년 만에 비제한적 FA의 권리를 갖게 된 것이다. 젊고 풍부한 가능성을 가진 그를 얻기 위해 많은 팀들이 아레나스에게 접근했다.

가장 적극적이었던 팀은 LA 클리퍼스와 워싱턴 위저즈. 두 팀의 제안을 놓고 고민하던 아레나스는 자신의 운명을 동전에 맡기기로 했다. 하지만 조금 독특하게도 10번 동전을 던져 많이 나온 팀이 아닌, 적게 나온 팀으로 자신의 행선지를 결정하기로 한 것이다. 그는 동전을 10번 던졌고 클리퍼스가 7번, 워싱턴이 3번 나왔다.

아레나스는 워싱턴과 6년간 63.7m의 거대 계약에 합의했고, 원 소속팀이었던 골든 스테이트가 이를 매치시키지 않으면서 워싱턴에 새로운 둥지를 트게 되었다.


Agent Z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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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랬듯이, 워싱턴에서의 시작도 평탄하지 않았다.

당시 워싱턴은 제리 스택하우스라는 걸출한 득점원을 보유하고 있었고, 팀의 미래로 손꼽히며 반드시 성장시켜야만 했던 콰미 브라운이 자리 잡고 있었다. 구단은 이들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퓨어 포인트 가드를 원했고, 이것이 아레나스를 영입한 이유였다.

하지만 이는 워싱턴의 계산 착오였다. 워싱턴에서의 아레나스는 이전에 비해 득점이 늘어난 반면 어시스트는 되레 줄어들고 있었다. 에디 조던 코치는 아레나스에게 제이슨 키드와 같은 플레이를 펼칠 것을 요구했지만, 아레나스는 언제나처럼 공을 들고 림으로 돌진하며 자신만의 플레이를 펼치려했다. 팀에서 가장 많은 출장 시간과 득점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조던과 아레나스 사이에는 알 수 없는 부조화의 기류가 흘렀다. 게다가 크고 작은 부상으로 인해 시즌 내내 고생하던 아레나스는 55경기에 출장하는 것에 워싱턴에서의 첫 시즌을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모습으로 마무리해야 했다.

그러나 아레나스와 조던은 서로를 포기하지 않았다. 아레나스는 언제나 그랬듯이 치열하게 훈련에 임했고, 조던은 아레나스의 장점을 100% 활용할 수 있는 전술을 고안하기 위해 노력했다.

시즌 종료 후 워싱턴은 부상으로 26경기에 출장하는 것에 그쳤던 스택하우스를 댈러스 매버릭스의 앤투안 제이미슨과 트레이드했고, 아레나스 - 래리 휴즈 - 제이미슨으로 이어지는 트리오를 결성했다. 조던은 아레나스의 공격 본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었고, 아레나스는 코치의 주문을 성실히 이행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렇게 맞이한 2004-05 시즌. 아레나스와 워싱턴은 비상하기 시작했다. 아레나스는 80경기에 모두 선발 출장하며 평균 25.5득점, 4.7리바운드, 5.1어시스트, 1.7스틸을 기록하며 팀의 에이스로 우뚝 섰다. 제이미슨과 함께 생애 최초 올스타 멤버로 선정되기도 했으며 All NBA 3rd Team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아레나스의 활약은 개인의 성공에 머무르지 않고, 팀의 성공에도 큰 힘이 되었다. 워싱턴은 45승 37패를 기록하며 동부 컨퍼런스 5번 시드의 주인공이 되어 플레이오프 무대에 진출했다. 이는 8년 만의 플레이오프 진출이었으며 팀의 이름이 위저즈로 바뀐 이후 첫 플레이오프 진출이기도 했다. 아레나스에게도 생애 첫 플레이오프 진출이었기에 더욱 뜻 깊은 시즌이었다.

1라운드에서 만난 상대는 시카고 불스. 원정 2경기를 모두 내어준 워싱턴은 이후 홈2경기에서 모두 승리했고 시리즈 스코어가 2-2를 이룬 상황에서 5차전 승부에 돌입했다.

치열하게 전개된 경기는 종료 5초 가량이 남은 상황에서 110-110으로 동점을 이뤘고 마지막 공격권은 워싱턴이 가지고 있었다. 아레나스가 천천히 드리블을 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단숨에 커크 하인릭을 제치고 돌파를 시도했고, 헬프 디펜스를 시도하는 타이슨 챈들러를 앞에 두고 점퍼를 던졌다. 경기 종료와 함께 슛은 림을 갈랐고 112-110로 경기 종료. 워싱턴이 시리즈 스코어를 3-2로 뒤집는 순간이었다.

승기를 잡은 워싱턴은 여세를 몰아 이어진 6차전에서도 승리하며 시리즈 스코어 4-2로 단숨에 플레이오프 1라운드를 통과했다. 이후 2라운드에서 샤킬 오닐과 드웨인 웨이드가 이끄는 마이애미 히트를 만나 0-4로 스윕을 당하며 시즌을 마무리했지만, 이제는 어느 누구도 아레나스가 이끄는 워싱턴을 쉬운 상대로 생각할 수 없었다.

2005-06 시즌의 개막을 앞두고 워싱턴은 본격적으로 아레나스 중심의 팀을 만들기로 결정한다. 팀의 미래로 손꼽았던 콰미 브라운을 LA 레이커스로 보내며 아레나스의 사이드 킥으로 활약할 수 있는 캐론 버틀러를 영입한 것이다. 이로써 워싱턴은 아레나스 - 버틀러 - 제이미슨으로 이어지는 빅3 라인을 결성하는데 성공했다.

아레나스는 이에 화답하듯 80경기에 출장하며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낸다. 평균 29.3득점을 기록하며 득점 부문 리그 4위에 랭크되었고, 팀 내 최다인 6.1개의 어시스트와 2.0개의 스틸을 기록하며 워싱턴의 에이스로 확실히 자리매김 했다. 2년 연속 올스타 멤버와 All NBA 3rd 팀에 선발되며 전국구 스타로써의 발돋움에도 성공했다.

42승 40패의 성적으로 2년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한 워싱턴은 1라운드에서 르브론 제임스가 이끄는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를 상대하게 됐다. 아레나스와 제임스는 양 팀의 에이스로써 엄청난 대결을 펼쳤다. 아레나스는 시리즈 평균 34득점을 기록했고, 제임스는 평균 35득점을 기록하며 연일 화력 시위에 나섰다.

시리즈는 조금씩 클리블랜드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시리즈 스코어 2-3으로 플레이오프 탈락 위기에 놓인 워싱턴은 홈에서 6차전을 치렀다. 5차전에 이어 두 경기째 연속으로 연장까지 가는 혈전을 펼친 두 팀. 연장전 종료 15초를 남긴 상황에서 113-112로 워싱턴이 1점 차의 리드를 잡고 있었고, 파울을 얻은 아레나스는 2개의 자유투를 시도하려 하고 있었다.

그 때, 제임스가 아레나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만약 이번에 자유투를 놓치게 된다면 너희 팀은 지고 말거야.'

아레나스는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였으나 뭔가에 홀린 듯이 2개의 자유투를 모두 놓치고 말았다. 81%의 자유투 성공률을 자랑하던 아레나스가 2개의 자유투를 모두 놓치고 만 것이다. 이어진 클리블랜드의 공격에서 데이먼 존스가 베이스 라인 점퍼를 성공시켰고, 결국 113-114로 무릎을 꿇은 워싱턴은 플레이오프 1라운드의 벽을 넘지 못하고 시즌을 마무리해야 했다.

아레나스는 6차전이 끝난 뒤 곧바로 자유투 훈련을 시작했을 만큼 커다란 실망감에 사로 잡혔다. 하지만 전 세계 NBA 팬들의 뇌리에는 아레나스의 이름이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NBA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제임스와 정면으로 맞서며 결코 물러서지 않았던 사나이로써 말이다.


정상에서 입은 상처

2006-07 시즌은 그야말로 아레나스가 리그를 대표하는 스타플레이어로 자리 매김 하게 된 해였다. Agent Zero라는 멋진 닉네임과 함께 아레나스의 활약상은 연일 뜨거운 이슈로 언론의 주목을 끌었다.

2006년 12월 17일, 레이커스 원정 경기에서 코비 브라이언트의 마크를 뚫고서 60득점, 8리바운드, 8어시스트, 2스틸을 기록하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날 기록한 60득점은 워싱턴 프랜차이즈 역사상 단일 경기 최다 득점 신기록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12월 22일에는 피닉스 원정 경기에서 스티브 내쉬와 쇼다운을 펼치며 연장까지 가는 접전 끝에 54득점을 기록하며 피닉스를 침몰시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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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팬들에게 최고의 퍼포먼스로 기억되는 경기는 역시 2007년 1월 15일에 있었던 유타 재즈와의 경기였다. 경기 종료까지 11초가 남은 시점에서 111-111으로 동점을 이룬 양 팀. 인 바운드 패스를 받은 아레나스는 마지막 공격에 나섰으며 유타의 데론 윌리암스가 그 앞을 가로 막고 있었다. 한 차례 레그 스루 드리블을 통해 왼손으로 공을 옮겨 잡은 아레나스는 돌파를 시도할 듯이 모션을 취했고, 윌리암스는 재빨리 아레나스의 경로를 막아섰다. 하지만 아레나스는 더 이상 림을 향해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드리블을 멈춘 뒤 그대로 3점슛 라인 뒤에서 슛을 시도했다. 공이 림에 닿기도 전에 경기 종료 부저가 울렸고, 경기 종료 부저가 울리기도 전에 아레나스는 득점을 확신한 듯 두 팔을 들어 올리며 뒤돌아섰다. 잠시 뒤, 아레나스의 슛이 림을 가르며 114-111로 경기 종료. 그야말로 극적인 슈팅이었고, 더욱 극적인 퍼포먼스였다.

그러나 무서울 것이 없었던 아레나스와 워싱턴의 상승 곡선은 시즌 내내 지속되지는 못했다. 시즌이 막바지에 이른 2007년 4월 4일 샬럿 밥캣츠와의 경기에서 제럴드 월라스와 충돌을 하며 왼쪽 무릎이 뒤틀린 것이다. 이 부상으로 인해 아레나스는 시즌 아웃을 선언하게 된다. 드래프트에서 한 차례 아픔을 안겼던 월라스는 다시 한 번 아레나스에게 본의 아닌 상처를 주게 되었다.

워싱턴은 41승 41패를 기록하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지만 아레나스는 팀과 함께 할 수 없었다. 워싱턴은 2년 연속 클리블랜드와 1라운드에서 만나게 됐지만 아레나스가 없는 워싱턴은 제임스와 클리블랜드를 막기에 역부족이었다. 워싱턴은 힘없이 0-4로 스윕을 당하며 시즌을 마무리해야 했다.

지난 시즌의 아쉬움을 씻어 내기 위해 절치부심 맞이했던 2007-08 시즌. 워싱턴은 제이미슨의 꾸준한 활약과 날이 갈수록 성장하는 버틀러의 분전으로 43승 39패를 기록하며 4년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다. 하지만 거기에 아레나스의 모습은 없었다.

아레나스는 시즌 개막 이후 8경기 연속 선발 출장했으나 부상의 여파가 남은 탓인지 컨디션 난조를 보였고, 팀마저 3승 5패로 부진에 빠졌다. 결국 팀은 아레나스에게 휴식을 권유했고 아레나스는 부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며 결장을 이어갔다.

그렇게 시즌은 후반으로 접어들었다. 플레이오프 진출을 향한 경쟁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졌고, 1라운드 돌파를 위해 어떻게 서든 홈코트 어드밴티지를 얻으려 했던 워싱턴은 38승 36패를 기록하며 클리블랜드와 동부 컨퍼런스 4번 시드를 놓고 치열한 순위 싸움을 전개하고 있었다.

결국 워싱턴은 시즌 종료까지 8경기를 남긴 상황에서 아레나스의 복귀를 전격 결정했다. 홈코트 어드밴티지를 얻기 위해서는 가용 가능한 모든 자원을 총동원 시켜야 했고, 팀의 에이스였던 아레나스의 복귀는 필연적인 것으로 보였다. 이후 아레나스는 5경기에서 교체 멤버로 경기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부상에서 완벽하게 회복되지 않았기에 오랜 시간을 플레이할 수 없었고, 그나마 플레이 하는 동안에도 기복이 심한 모습을 보였다.

워싱턴은 아레나스가 출장한 5경기에서 3승 2패, 팀의 마지막 8경기에서 5승 3패를 기록하며 선전했지만 결국 같은 기간 동안 4승 4패를 기록한 클리블랜드에게 홈코트 어드밴티지를 빼앗기고 말았다.

다시금 시작된 플레이오프. 워싱턴과 클리블랜드는 3년 연속 1라운드에서 맞붙게 되었다. 아레나스는 1,2차전에서 교체 멤버로 경기에 나섰으나 부진한 모습을 보이는데 그쳤고 팀은 2연패를 당했다. 결국 아레나스는 3차전부터 과감히 선발 출장을 감행했다. 하지만 단 10분을 플레이하는데 그쳐야 했다. 결국 4차전에서 무리하게 30분이 넘는 플레잉 타임을 소화한 아레나스는 경기가 끝나고 그대로 시즌 아웃 되고 만다. 워싱턴은 3년 연속 클리블랜드에게 무릎 꿇으며 시리즈 스코어 2-4로 플레이오프 1라운드 돌파에 실패했다.


또 한 번의 좌절

부상으로 힘든 1년을 보낸 아레나스였지만 팬들의 관심과 사랑은 끊이지 않았다. 아레나스는 언론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며 팬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고, 인기 블로거로써의 명성도 높아져갔다.

그러나 소속팀 워싱턴의 상황은 그리 즐겁지 못했다. 2008-09 시즌 개막을 앞둔 워싱턴의 최고 고민거리는 주축 멤버들과의 재계약이었다. 아레나스와 앤투안 제이미슨이 동시에 FA 자격을 얻게 된 것이다. 캐론 버틀러와 함께 팀 전력의 50% 이상을 책임지던 그들이었지만 두 선수와 모두 재계약에 성공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특히 제이미슨은 FA 시장에서 높은 인기를 보였고, 워싱턴의 전력 누수는 불가피한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이 때 아레나스가 입을 열었다. 그는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제이미슨과의 재계약에 실패한다면 나도 팀을 떠날 것'이라며 동료의 잔류를 희망했다. 결국 2008년 6월 30일, 워싱턴은 제이미슨과 4년간 50m에 달하는 재계약에 합의할 수 있었다.

이제 모든 관심은 Opt-Out을 선언하며 비제한적 FA가 된 아레나스에게로 집중됐다. 그가 원한대로 제이미슨과의 재계약에 성공한 워싱턴은 곧이어 아레나스와의 협상에 돌입했다.

그리고 2008년 7월 13일, 워싱턴 팬들의 환호성을 불러일으킬 뉴스가 전해졌다. 아레나스가 워싱턴과의 재계약에 동의한 것이다. 게다가 스스로 자신의 연봉을 감축시키며 팀의 샐러리 유동성 확보에 이바지하기도 했다. 그는 6년간 127m에 육박하는 거대 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지만, '팀에게 16m을 돌려주겠다. 맥시멈 계약으로 팀의 계획에 걸림돌이 되고 싶지 않다'는 말과 함께 6년 111m의 계약에 최종 사인했다.

팬들의 기대는 날로 높아져갔다. 주축 멤버들과의 재계약도 순탄히 마무리했으니, 멤버들이 건강하게만 뛰어준다면 이번에야말로 클리블랜드와 제임스에게 복수를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팬들의 기다림은 생각보다 길어졌다. 아레나스는 100% 회복된 모습으로 코트에 서고 싶다며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2009년 3월 28일, 디트로이트와의 홈경기를 통해 드디어 코트로 돌아온 아레나스. 하지만 30분 가량을 플레이하며 25%의 야투율을 기록하는데 그쳤다. 잠시 숨을 고른 그는 2009년 4월 2일, 어느 새 숙적이 되어가고 있는 클리블랜드와의 경기에 다시 한 번 선발 출장 했다. 하지만 33분을 플레이하며 27%의 야투율, 11득점을 기록하는데 그쳤다. 그리고 그는 또 한 번의 시즌 아웃을 선언했다.

아레나스가 없는 워싱턴은 좌초하기 시작했다. 와중에 버틀러마저 크고 작은 부상들에 시달려야 했고, 닉 영과 같은 영건들의 성장 그래프는 구단의 기대에 턱없이 모자란 수준이었다. 결국 2008-09 시즌 워싱턴의 최종 성적은 19승 63패. 구단이 워싱턴에 자리 잡은 이후 역대 두 번째로 저조한 승률을 기록했다.


다시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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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의 여름, 워싱턴은 크고 작은 움직임들을 꾸준히 보였다. 우선 그들은 코칭스태프의 면면을 대폭 물갈이 했다. 에디 조던을 해임하고 플립 선더스를 새로운 헤드 코치로 임명했다. 곧이어 샘 카셀과 랜디 휘트먼 등을 어시스턴트 코치로 영입하며 새로운 워싱턴을 만들기 위한 의지를 보였다.

그리고 그들의 2009년 드래프트 1라운드 5번 지명권을 트레이드 시장에 내놓았다. 아레나스가 건강하게 복귀한다는 가정 아래, 팀이 정상에 서기 위해서는 유망주 신인이 필요하기 보다는 즉시 전력으로 활약할 수 있는 베테랑들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워싱턴은 그들의 5번 지명권과 이탄 토마스, 다리우스 송가일라, 페체로프를 패키지로 만들어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의 랜디 포이, 마이크 밀러를 영입하기로 결정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워싱턴의 손을 들어주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으나 드래프트 당일이 되자 이야기는 엄청난 반전을 맞이했다. 한 때 1번 픽의 주인공으로도 점쳐졌던 스페인의 신성 리키 루비오가 5번 지명권을 통해 미네소타에 안착한 것이다. 물론 그의 NBA 데뷔는 좀 더 오랜 기다림의 시간을 필요로 하게 되었지만, 결과론적인 관점에서의 비판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아레나스의 건강에 대한 의구심을 표하는 이들도 조금씩 생겨났다. 사실상 2년을 부상으로 고생해야 했던 아레나스이기에 과연 그가 완벽한 부활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계속됐고, 어느 덧 리그의 에이스 레벨로 성장한 버틀러와의 볼 배분 문제, 새로 영입한 포이 등과 팀의 궁합, 영의 지지부진한 성장 곡선 등 걱정거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아레나스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듯하다. 뜨거운 이슈를 끝없이 쏟아내던 블로그 관리에 할애하던 시간을 줄이고, 보다 진지하게 게임에 임하겠노라 이야기했다.

르브론 제임스, 드웨인 웨이드, 코비 브라이언트, 크리스 폴, 드와이트 하워드... 수많은 스타플레이어들이 리그를 들끓게 하고, 전국 방송을 통해 자신의 기량을 뽐내는 모습을 보며 매순간 복수의 칼날을 갈아왔다는 길버트 아레나스.

돌아온 'Agent Zero'의 열풍이 워싱턴을 넘어 전미는 물론 전 세계를 강타하게 될 것인지, 혹은 부상으로 사라져간 스타플레이어들처럼 아레나스 역시 뒷걸음질을 치게 될 것인지...

복귀를 눈앞에 둔 아레나스의 활약상은 단연 2009-10 시즌 최고의 관전 포인트 중 하나다.

길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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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6일, 소셜 네트워크로 이루어진 iHOOPS.com(이하 아이훕스)가 정식오픈 하였다.

아이훕스는 NBA와 더불어 미 대학농구 NCAA의 관계자들이 모두 함께 할 수 있는 혁신적인 소통공간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선수들과 학부모, 코칭스태프, 심판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기술발전과 인생 상담 등 다양한 정보공유를 도모하는 것이 태생목적이다.

CEO를 담당하고 있는 웨이버그는 “이 웹사이트는 유소년 농구가 성공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찾을 수 있도록 인도할 것이다”라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웹사이트 내에는 슈팅이나, 패스, 볼핸들링 등 기본적인 농구기술 뿐만 아니라 경기룰도 상세하게 저술돼있다. 선수들의 건강과 몸만들기에 대한 노하우 뿐 아니라 학교생활에 대한 토론의 장도 24시간 365일 열려있다.

회원가입만 해두면 팀 등록도 가능하다. 독립적인 팀 사이트가 아이훕스 안에 생성되는 것으로 로스터나 경기 일정 관리, 선수들의 사진 등록 등 기본적인 기능은 모두 갖추고 있다.

하지만 아이훕스가 노리는 전략적인 목표는 이러한 ‘웹 기능’이 전부가 아니다. 사용자 프로필과 블로그, 포럼 등 커뮤니티 기능이 거미줄처럼 엮여 있고, 가까운 시간 내에 3D 애니메이션 기술이 가미된 모바일 서비스가 오픈 될 예정이다.

소셜 네트워크의 대표주자인 트위터나 마이스페이스, 세계적인 UCC 사이트인 유투브와의 연동으로 젊은 선수들에 대한 배려심도 엿보인다. 특히 페이스북 계정을 갖고 있는 회원들은 팬(Fan) 등록이 가능하여 곧바로 이용이 가능하다. 

학부모들의 고충을 덜어줄 ‘Parent's Guide'도 눈길을 끈다. 아이훕스는 총 6개의 파트로 나누어진 가이드 북을 마련하여, 프로농구 선수를 꿈꾸는 자식들에 대한 교육 로드맵을 제시하고 있다. NBA의 전설적인 센터 빌 월튼은 “이 가이드는 유소년 농구선수를 키우는 여러 부모님들에게 좋은 청사진이 될 것이다. 농구가 게임이라는 것만 기억한다면 즐기면서 운동할 수 있을 것이다”며 메시지를 전했다.

사이트 개설에는 NBA 부총재를 맡고 있는 스투 잭슨과 듀크 대학의 감독 마이크 슈셉스키, NCAA의 부회장 그렉 샤힌 등이 힘을 보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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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COLUMNS/HELTANT79 2009. 10. 26. 00:00

창단 40주년 클리블랜드, 40개의 추억

BY 알 수 없는 사용자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가 창단 40주년을 맞는다. 1970년 버펄로 브레이브스(L.A. 클리퍼스의 전신),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와 함께 첫 발을 내딛은 클리블랜드는 지난 40년간 팬들과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눠왔다. 4명의 구단주와 18명의 감독을 맞이하는 동안 1460승 1706패를 기록한 클리블랜드는 컨퍼런스 우승 1회, 디비전 우승 2회를 경험했다.

클리블랜드 공식 홈페이지(http://www.nba.com/cavaliers)는 창단 40주년을 맞아 팀 역사 속 40개의 순간을 선정해 발표했다. 클리블랜드 팬들을 울리고 웃겼던 추억 속으로 들어가보자.


1. 2006-2007 시즌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 5차전, 르브론 제임스가 팀의 마지막 30득점 중 29점을 혼자 올렸다. 특히 마지막 25점은 모두 르브론의 득점이었다. 이날 2차 연장 끝에 109-107의 짜릿한 승리를 이끌어낸 르브론은 NBA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활약 중 하나를 펼쳤다. 48득점으로 경기를 마친 르브론은 6차전에서도 승리, 클리블랜드를 창단 이후 첫 파이널 무대로 이끌었다.

2. 전 시즌을 15승 67패로 끝낸 클리블랜드는 인근 애크런 출신의 한 소년에게 클리블랜드 유니폼을 입히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 소년은 전문가들 사이에서 ‘그의 세대 중 최고’로 평가 받고 있었다. 드래프트 순위 발표장에서 NBA 총재 대리 러스 그래닉이 멤피스 그리즐리스가 2순위 지명권을 얻었음을 발표했을 때(클리블랜드가 1순위를 따낸 순간), 클리블랜드의 운명은 완전히 바뀌었다.

3. 1992년 동부컨퍼런스 세미파이널 6차전에서 보스턴 셀틱스에게 일격을 당한 후, 클리블랜드는 60퍼센트에 육박하는 야투 성공률을 보이며 122-104로 대승을 거뒀다. 클리블랜드가 동부컨퍼런스 파이널 진출을 확정 지은 이 경기는 래리 버드의 화려했던 경력이 막을 내린 경기이기도 했다.

4. 1976년 4월 29일 ‘리치필드의 기적’이 완성됐다. 베테랑 가드 딕 스나이더가 워싱턴 불리츠의 웨스 언셀드를 제치고 5피트 슛을 성공시켰고, 87-85로 앞선 클리블랜드는 창단 이후 처음으로 진출한 플레이오프에서 동부컨퍼런스 파이널에 진출하게 됐다.

5. 휴스턴에서 열린 제 55회 올스타 전에서 르브론 제임스가 21점차로 뒤져 있던 동부컨퍼런스의 역전승을 이끌었다. 29득점 6리바운드를 기록한 르브론은 NBA 역사상 최연소인 21세에 올스타 전 MVP에 올랐다.


6. 66승 16패로 정규시즌 1위를 차지한 2008-2009 시즌, 르브론 제임스는 경기당 28.4득점 7.6리바운드 7.2어시스트를 올리며 팀 역사상 처음으로 MVP를 수상했다.

7. 르브론 제임스가 48득점을 올리며 승리를 거둔 다음 치른 2007년 동부컨퍼런스 파이널 6차전, 이번에는 신인 ‘부비’ 깁슨이 디트로이트를 침몰시켰다. 6차전 31득점 중 19점을 4쿼터에 집중시킨 깁슨의 활약으로 98-82 승리를 거둔 클리블랜드는 팀 역사상 처음으로 파이널 무대를 밟게 됐다.

8. 1986년 6월 19일, 클리블랜드는 웨인 엠브리를 단장으로 영입했다. 엠브리는 나중에 로이 힌슨과 현금을 필라델피아 76서스로 보내고 그 해 드래프트 1순위 지명권을 받는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그리고 이 지명권으로 노스캐롤라이나 대의 센터 브래드 도허티를, 8순위 지명권으로 마이애미 대 가드 론 하퍼를, 그리고 나중에 얻은 2라운드 지명권으로 조지아 공대 가드 마크 프라이스를 지명했다. 이 선수들은 1980년 말 클리블랜드의 중흥기를 일구어냈다.

9. 1984-1985 시즌, 클리블랜드는 9연패를 포함해 2승 19패로 최악의 부진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33세에 불과했던 조지 칼이 임시 감독에 오른 후부터 모든 것이 달라졌다. 마치 드라마와 같은 대역전극을 이뤄낸 클리블랜드는 4월 9일 7시즌 만의 플레이오프 진출을 확정 지었다.

10. 1979-1980 시즌, 클리블랜드는 홈경기 역사상 최고의 승리 중 하나를 거뒀다. 4차 연장의 혈전 끝에 승리한 상대는 그 해 우승팀 LA 레이커스였다. 클리블랜드의 마이크 미첼, 데이브 로비쉬, 랜디 스미스는 모두 30점 이상을 올렸다.

 
11. 창단 첫 시즌에서 단 15승에 그친 뒤 열린 1971년 드래프트에서 클리블랜드는 노틀담 대 출신의 득점기계 오스틴 카를 1순위로 지명했다. 대학 시절 경기당 34.5득점을 올렸던 카는 데뷔 후 첫 세 시즌 동안 경기당 21.2득점을 올렸다.

12. 개막 15연패로 창단 첫 시즌을 시작한 클리블랜드는 1970년 11월 12일 마침내 팀 역사상 첫 승리를 차지했다. 클리블랜드와 마찬가지로 창단 첫 시즌을 보내던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클리블랜드는 바로 다음 경기부터 또다시 15연패를 당했다.

13. 첫 네 시즌을 클리블랜드 시내에 위치한 클리블랜드 아레나에서 치른 클리블랜드는 구단주 닉 말리에티가 직접 지은 리치필드 콜로세움으로 홈 구장을 이전했다. 클리블랜드는 1974년 10월 29일에 열린 개장 경기에서 챔피언 보스턴에게 졌다. 하지만 클리블랜드는 그 해 41회의 홈경기 중 29경기에서 승리를 거뒀다.

14. 팀이 암흑기를 보내던 1981년 포워드 마이크 미첼이 올스타에 뽑히며 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리치필드 콜로세움에서 열린 올스타 전에서 미첼은 15분 동안 14득점을 올리며 홈 팬들의 성원에 보답했다.

15. 1975-1976시즌 49승 33패를 거두며 팀을 창단 이후 첫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킨 빌 피치가 올해의 코치상을 수상했다.


16. 창단 후 리그 최약체를 벗어나지 못하던 빌 피치의 클리블랜드는 1976년 3월 31일 뉴올리언즈 재즈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팀 역사상 처음으로 플레이오프 진출을 확정 지었다. 클리블랜드는 2주 뒤 전국 방송 경기에서 뉴욕 닉스에게 승리를 거두며 센트럴 디비전 1위에 올랐다.

17. 워싱턴 불리츠를 상대로 치른 1976년 플레이오프 2차전 경기는 초창기 클리블랜드를 미라클 팀이라고 부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바비 ‘빙고’ 스미스가 종료 2초를 남기고 30피트 거리에서 던진 슛이 림을 가르며 80-79를 만들었고, 클리블랜드는 팀 역사상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서 승리를 거뒀다.

18. ‘NBA 위대한 50인’이 클리블랜드의 홈 구장 군드 아레나에서 소개된 1997년 올스타 전은 농구 역사상 위대한 선수들의 모습이 가장 많이 보인 경기였다. 제리 웨스트, 줄리어스 어빙, 오스카 로버트슨 등 살아있는 전설들이 마이클 조던이나 샤킬 오닐 같은 새로운 세대의 선수와 자리를 함께 했다. 본 게임에서는 클리블랜드 가드 테럴 브랜든이 벤치에서 출격, 17분 동안 10득점을 올렸다.

19. 르브론 제임스와 부비 깁슨의 영웅적인 활약으로 디트로이트를 침몰시킨 클리블랜드는 팀 역사상 처음으로 파이널에 진출했다. 하지만 파이널 상대는 마이크 브라운 감독의 전 소속팀인 샌안토니오 스퍼스였고, 샌안토니오는 클리블랜드를 4-0으로 일축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20. 조지 군드와 고든 군드 형제가 팀을 인수한 후 새롭게 태어난 클리블랜드는 최고의 득점원 중 하나였던 월드 B. 프리와 계약했다. ‘공중의 왕자’는 클리블랜드에서 보낸 4시즌 동안 경기당 23득점을 기록하며 클리블랜드의 농구 인기를 유지했다.


21. 1998년 올스타 주간에 열린 루키 챌린지에는 클리블랜드의 지드루너스 일가우스카스, 세드릭 핸더슨, 브레빈 나이트, 데릭 앤더슨이 출전했다. 한 팀에서 네 명의 루키가 출전하는 루키 챌린지가 시작된 이후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게임에서는 18득점 7리바운드를 올린 일가우스카스가 MVP를 수상했다.

22. 클리블랜드 사령탑을 맡은 지 4년 만에 마이크 브라운 감독이 2008-2009 시즌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하며 빌 피치 이후 이 상을 받은 두 번째 클리블랜드 감독이 됐다. 브라운의 팀은 수비 여러 부문에서 리그 1위에 오르며 전 시즌에 비해 21승을 더 거두는 괴력을 발휘했다.

23. 1991년 12월 23일, 크레이그 일로가 팀 역사상 손꼽히는 명 장면을 만들어냈다. 일로는 유타 재즈와의 홈경기에서 짜릿한 3점 버저비터로 113-112 승리를 일궈내며 홈 팬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선사했다. 일로의 이날 활약은 클리블랜드 라디오 캐스터 조 태이트의 다음 멘트에 의해 영원히 기억 속에 남게 됐다. “그래요, 버지니아! 산타클로스는 있습니다! 텍사스 주 러벅(일로의 고향) 출신이라죠, 아마?”

24. 2009년 동부컨퍼런스 파이널 2차전, 종료 1초 전 히도 터콜루의 러닝 점프 슛으로 올랜도 매직이 95-93으로 앞서갔다. 하지만 인바운드 패스를 받은 르브론 제임스가 버저비터 3점 슛을 터뜨렸고, 96-95로 이긴 클리블랜드는 시리즈를 1-1 동률로 만들었다. 홈 구장을 가득 채운 20,562명의 홈 관중들을 열광에 빠뜨린 순간이었다.

25.  데뷔 후 두 시즌 동안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했던 르브론 제임스는 더크 노비츠키와댈러스 매버릭스를 상대로 46점을 폭발시키며 107-94 승리를 이끌었다. 지드루너스 일가우스카스의 데뷔 시즌 이후 8년 만의 플레이오프 진출을 확정 짓는 순간이었다. 클리블랜드는 이후 세 시즌 연속으로 1라운드에서 워싱턴을 상대하게 된다.



26.  오직 마이클 조던과 오스카 로버트슨만이 르브론 제임스와 마찬가지로 데뷔 시즌에 경기당 20득점 5리바운드 5어시스트 이상을 기록했다. 이러한 활약으로 르브론은 리그 역사상 최연소이자 팀 역사상 유일한 올해의 신인상을 수상했다. 르브론은 첫 시즌에 평균 21득점 6어시스트에 육박하는 기록을 올렸고 팀은 전년도에 비해 두 배 이상 많은 승리를 거뒀다.

27. 1975년 11월 27일, 훗날 명예의 전당에 오른 올스타 7회 출전자 네이트 써몬드가 영입되자, 클리블랜드의 젊은 선수들은 급격한 성장을 경험했다. 클리블랜드 인근 애크런 출신인 써몬드는 그러잖아도 강력했던 팀의 프런트라인에 힘을 더했고 팀 역사상 최초의 플레이오프 진출을 이끌었다.

28. 가드 마크 프라이스가 1993년과 1994년 올스타 전 3점슛 대회를 2연패하며 래리 버드, 크레이그 허지스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프라이스가 기록한 24점은 14년 후인 2008년 전 클리블랜드 선수인 제이슨 카포노가 25점을 기록할 때까지 대회 기록이었다.

29. 1993년 솔트레이크 시티 올스타 전, 전날 3점슛 대회에서 우승한 프라이스는 3점슛 9개 중 6개를 성공시키며 19득점을 올렸다. 래리 낸스와 브래드 도허티도 동부 올스타로 출전하며 지난 4년 동안 두 번째로 3인방이 모두 올스타에 뽑히는 영광을 안았다.

30. 2006년 플레이오프 1라운드, 클리블랜드 홈 구장인 퀴큰 론즈 아레나는 거의 10년 만의 플레이오프 경기로 열광에 싸여있었다. 생애 첫 플레이오프 경기에 출전한 르브론 제임스는 첫 슈팅을 에어볼로 시작했으나 32득점 11리바운드 11어시스트로 트리플 더블을 거두며 워싱턴을 상대로 97-86 승리를 이끌어냈다. 르브론은 1라운드 평균 35.7득점을 올렸다.


31. 2005년 1월 5일, 미국 최대의 온라인 모기지 업체 퀴큰 론즈의 소유주인 댄 길버트가 전 구단주 고든 군드로부터 3억 7천 5백만 달러에 팀을 인수했다. 이 모기지 재벌은 초보 감독과 단장인 마이크 브라운과 대니 페리를 고용하며 팀 문화를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길버트가 새 구단주가 된 후 재건축한 홈 구장이 퀴큰 론즈 아레나로 이름을 바꿨고 연습 구장이 새로 지어졌다. 결과는 팀이 처음 경험하는 성공이었다.

32. 2008년 3월 26일, 팀 창단 이래 ‘클리블랜드의 목소리’로 불렸던 조 태이트가 통산 3,000번째 클리블랜드 게임을 중계했다. 뉴저지와 시카고에서 각각 한 시즌씩을 보낸 후 1983-1984 시즌에 복귀한 태이트는 이후 줄곧 라디오 중계를 진행하고 있다.

33. 조지 칼의 지휘 아래 시즌 초반 2승 19패의 부진을 극복하고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클리블랜드는 1985년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전년도 우승팀 보스턴 셀틱스를 상대했다. 월드 B. 프리의 경기당 26.3득점에도 불구하고 클리블랜드는 보스턴에게 네 경기만에 탈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클리블랜드가 진 세 경기는 모두 3점차 이내의 패배였다.

34. 1986년 6월 16일, 루이지애나 주 배심원단은 존 ‘핫로드’ 윌리암스의 승부조작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윌리암스는 전년도 드래프트 2라운드에서 클리블랜드의 지명을 받은 상태였다. 윌리암스는 클리블랜드에서 9시즌을 뛰며 리바운드, 블록슛, 출장 시간 등에서 팀 내 기록을 세웠다.

35. 1982-1983 시즌에 거둔 23승 59패의 성적은 구단주 테드 스테피엔이 팀을 팔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4월 7일, 콜로세움 구장의 소유자인 조지와 고든 군드 형제는 옵션을 행사해서 클리블랜드를 매입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리그 구단주들이 최악의 상황을 맞은 클리블랜드를 돕기 위해 1983, 84, 85, 86년 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권을 추가로 주기로 했고, 군드 형제는 이 권리를 모두 행사했다.


36. 데이먼 존스는 클리블랜드에서 세 시즌만을 뛰었지만 팀 최고의 순간에 포함될 자격이 있다. 2006년 5월 5일 워싱턴과의 플레이오프 1라운드 6차전, 벤치에서 출전한 존스는 연장전 종료 4.8초를 남기고 슛을 성공시키며 114-113 승리를 이끌었다. 1라운드에서 승리를 거둔 클리블랜드는 13년 만에 2라운드에 진출했다.

37. 여러 번 발에 수술을 받은 지두르너스 일가우스카스는 한때 다시는 농구를 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기적과 같이 재활에 성공한 일가우스카스는 2002-2003 시즌에 그의 경력에서 가장 뛰어난 성적을 거뒀다. 팀은 17승 65패에 그쳤지만, 경기당 17.2득점 7.5리바운드를 올린 일가우스카스는 생애 처음으로 올스타에 선정됐다.

38. 새크라멘토에서 열린 개막전을 시청하던 회의주의자들은 매스컴의 집중 조명이 르브론 제임스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2003년 10월 29일에 벌어진 이 경기에서 ‘선택 받은 자’는 첫 공식 경기부터 모두의 입을 다물게 했다. 르브론은 25득점 6리바운드 9어시스트를 올렸는데, 25득점은 고졸 선수가 데뷔 전에서 세운 역대 최다 득점 기록이었다.

39. 팀 창단 25주년 경기를 승리로 장식한 직후인 1994년 11월 8일, 클리블랜드는 새로 지은 군드 아레나로 홈 구장을 옮겼다. 20,562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군드 아레나는 훗날 퀴큰 론즈 아레나로 이름을 바꿨고, 현재까지 클리블랜드 홈 구장으로 쓰이고 있다.

40. 드와이트 하워드의 올랜도에게 동부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무릎을 꿇은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드래프트 하루 전 대형 사고를 쳤다. 클리블랜드는 벤 월러스와 사샤 파블로비치를 내보내고 15회 올스타이자 미래의 명예의 전당 헌액자 샤킬 오닐을 영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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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2009-10시즌을 앞두고 4개의 NBA팀이 새 유니폼을 선보였다.

오프시즌 동안 샬럿 밥캐츠는 스프라이트가 가미된 ‘홈져지’를 발표했고, 댈러스와 멤피스는 3번째 유니폼이라 불리는 ‘얼트네이트 져지‘를 공개하였다. 필라델피아는 과거 80년대 디자인을 복원한 ’하드우드 클래식 져지‘를 제작하며 팬들의 호응을 이끌었다.

해마다 새로운 종류의 유니폼이 출시되는 것은 수익창출과 차기시즌에 대한 구단의 의지를 반영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유니폼은 단순한 ‘옷’이나 ‘농구용품’ 이상의 역할수행을 해내는 매개체다.

NBA.com은 그 동안 공식스폰서의 판매집계를 통해 순위발표를 해왔다. 이 성적표는 그간 선수 개개인의 인기와 연고지의 시장크기 등을 가늠할 수 있는 대표적인 지표로 자리매김했다.

      좌측부터 나이키社 하승진, 챔피언社 하킴 올라주원, 리복社 트레이시 맥그레이디


하나를 알면 둘이 보인다

트레이시 맥그레이디는 팀 동료 야오밍 효과에 힘입어 한동안 중국내 유니폼 판매순위 상위에 랭크되는 반사이익을 누린 바 있다. 스테판 매버리는 뉴욕 닉스 시절 오랜 부진 속에서도 탑10에 이름을 올리며 뉴욕의 방대한 시장성을 증명하기도 했다. 지난 2003년 성폭행 사건에 연루됐던 코비 브라이언트는 소송기간 이후 부진한 판매율을 보였지만 득점왕과 우승을 거머쥐며 유니폼 업계의 블루칩으로 돌아왔다. 팬심의 움직임까지 방증하는 데이터인 것이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20년 전만해도 ‘먼 나라 이야기’에 불과했다. 90년대 중반 본격적으로 NBA 용품이 상륙하기 전까지는 구매루트가 전무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현재는 공식 스폰서로 지정된 매장이나 인터넷 시장 등지에서 어렵지 않게 구매가 가능하지만 이러한 시장이 형성된 것도 채 10년이 안됐다.

점프볼의 한준희 컬럼니스트는 “확실치는 않지만 80년대에도 이태원에 일부 NBA 유니폼을 판매하는 곳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우리들이 입는다 해도 광대취급을 받았을 거라는 인식이 강했고, 유니폼을 입고 거리를 활보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며 회고하였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유니폼의 소비 형태는 점차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득점기계로 80년대를 풍미한 버나드 킹의 져지. 은퇴선수들의 져지만을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미첼엔네스사의  제품으로 소비자가가 무려 200불 이상을 호가한다.


수집 마니아들의 효자 품목 ‘NBA 져지’

유니폼은 패션 아이템의 기능을 탈피하여, 이제는 마니아들 사이에서 고급 수집품목으로 각광받고 있다. 좋아하는 선수만 모으는 팬부터 응원하는 팀의 선수들을 모으는 수집가까지 취향도 각양각색이다.

일부 수집가들은 전문가 못지않은 식견을 자랑하며 입문에서 이미테이션 판별까지 도우미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이중에서도 네이버 카페 ‘져지매니아’는 군계일학의 커뮤니티로 인정받는 공간이다. 가입절차가 다소 까다롭지만 목마른 자가 우물을 찾는 법이니 정회원이 되었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다.

2004년 개설된 져지매니아(www.naver.com/jersey)는 그간 수집가와 마니아들의 허브역할을 담당하며 회원들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아왔다. 정보공유 외에도 물물교환을 목적으로 한 서브카페가 엄격하게 운영하고 있어 유니폼 커뮤니티의 ‘본좌‘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카페 스탭으로 종횡무진 활약 중인 신혜지씨를 만나 져지 속 이야기를 들어보자.

Q_ 보기 드문 여성 수집가인데, 특별한 계기가 있는지?
A_ 중학교 때 알렌 아이버슨의 실착(실제착용) 유니폼을 선물 받으며 매력에 빠져들었다. 평소 힙합문화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낯설지가 않았다. 초보였기 때문에 당시에는 집에서 험하게 입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최상급인 ‘어센틱’ 제품이더라(웃음).

Q_ 소장하고 있는 콜렉션이 정말 어마어마하다. 특별한 수집 노하우가 있다면?
A_ 중, 고등학생이었기 때문에 집에서 받는 용돈을 모아서 차근차근 수집해왔다. 많은 비용을 들여 무리하게 구입을 한다면 수집본연의 즐거움을 상실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조급함을 버린다면 어느 새 자신만의 멋진 콜렉션을 볼 수 있을 것이다.

Q_ 트레이딩 카드나 농구화 등 수집할 수 있는 용품의 종류는 많다. 왜 하필 져지인가?
A_ NBA는 꿈의 무대다. 팬이라면 한 번쯤 나도 저 코트에 설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라는 상상을 펼쳐봤을 것이다. 져지는 이러한 욕구를 대리만족 시켜줄 수 있는 훌륭한 아이템이다. 조던의 유니폼을 입는다고 조던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잠시라도 그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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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_ 저렴한 값의 중국산 이미테이션 제품을 구별할 수 있는 노하우가 있는가?
A_ 과거에는 정품과 구분되는 특징이 비교적 뚜렸했지만, 점차 그 정교함이 더해지고 있다. 싼 가격에 현혹되지 말고 베테랑 수집가들의 조언을 듣는 신중함이 필요하다. 기본적으로 바느질의 차이나 브랜드 탭의 위치나 디자인 위치를 꼼꼼이 따져보는 것도 중요하다.

Q_ 져지매니아는 두 개의 카페로 운영되고 있는데 어떠한 차이를 두고 운영되는가?
A_ 보다 체계적인 관리를 위해 매매장터 메뉴를 독립시켰다. 현금이 오고가는 만큼 엄격한 관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여서 장터카페의 분위기가 딱딱하다는 인식이 있는 것 같다.

거래상에 발생하는 문제들을 카페스탭들의 철저한 사전관리로 방지하고자함이니 운영진들의 고충도 조금만 이해해주었으면 한다. 또한 무작정 쇼핑만 할 것이 아니라 본 카페에서 적극적인 커뮤니티 활동을 통해 양질의 정보도 얻고 사람간의 소통이 선행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수집, 그 이상의 즐거움



올해는 NBA 유니폼뿐 아니라 KBL 유니폼도 보다 쉽게 접할 수 있을 전망이다. NBA의 공식 스폰서를 담당하고 있는 아디다스가 이번 2009-10시즌부터 판매용 KBL 유니폼 제작에 두 팔을 걷어 올렸기 때문이다.

KBL은 그간 구단마다 독자적인 제작 및 판매를 진행해왔기 때문에 대중에 어필하기에는 어느 정도의 한계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당장에 큰 수익을 기대하기는 힘들겠지만 붐 조성에 긍정적인 여파를 미칠 것은 분명하다. 유니폼이 갖고 있는 또 하나의 나비효과다.

유니폼은 선수들의 땀이 깃든 신성한 제복이다. 아마추어 선수들에겐 프로리그 유니폼이 목적이자 꿈이요, 프로선수들은 국가대표 유니폼이 평생의 영광이다. 그 본질은 시대가 흘러도 변함이 없지만, 이제는 선수와 구단, 팬이 모두 함께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인 법이다.

고이 모셔둔 유니폼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과감하게 입어보자. 그리고 농구장으로 향하라. 목이 터져라 응원하고 내가 흘린 땀으로 유니폼을 적실 때의 희열은 유니폼의 가치를 보다 높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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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A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한 개인상 타이틀과 그 주인공을 소개해 볼까 합니다.

바로 1987~88 시즌의 리바운드왕 쟁탈전입니다.

1978년 4월 9일, 정규시즌 마지막 날까지 계속됐던 "스카이워커" 데이빗 톰슨과 "아이스맨" 조지 거빈 간에 벌어진 득점왕 레이스 (톰슨은 73점을, 거빈은 63점을 득점했고, 거빈이 평균 27.22점을 마크하며 27.15점에 그친 톰슨을 따돌렸습니다)... 그리고 1994년 정규시즌 마지막 날에 "제독" 데이빗 로빈슨이 클리퍼스를 상대로 71득점을 하며 2년차 센세이션, 샤킬 오닐을 누르고 득점왕을 가져간 사실들은 익히 잘 알려져 있는 또 다른 치열했던 개인상 타이틀의 역사입니다.

저는 88년의 리바운드왕 타이틀이 위에 열거한 두 개의 득점왕 타이틀보다 "훨씬" 더 가치가 높았다고 봅니다.

이유는, 톰슨도, 거빈도, 오닐도, 로빈슨도... 모두 자신들의 소속팀에서 이 타이틀을 딸 수 있도록 전면적으로 협조를 해줬던 반면, (물론, 이것은 "밀어주기"가 아닙니다. 제가 정의하는 밀어주기란, 상대팀 또는 심판들까지도 어느 특정한 선수에게 관대함을 베풀며 개인상을 가져갈 수 있도록 암암리에 또는 대놓고 도와준 것을 의미하는데, 거빈의 경우에도, 또 로빈슨의 경우에도, 그런 "조작극"은 없었습니다. 있었다면 그것은 범죄죠. 단지 팀원들이 그들에게 득점할 기회를 끊임없이 제공해 줬다는 점이 평소와 달랐을 뿐입니다) 88년 리바운드왕의 경우엔 이런 협조나 도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리바운드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팀원들이 도와주거나 특수전략 등으로 도움을 줄 수는 없는 스탯이지 않습니까? 자기 스스로 처절한 몸싸움과 박스아웃을 통해 잡아내야만 하는 튄 공들에 대한 수치가 리바운드입니다. 멀리 튀어버리는 롱 리바운드가 자주 나오거나, 아무리 자리를 잘 확보해도 공이 림 안으로 들어가버리면 수포로 돌아가 버리는 게 리바운드기도 하죠. 그런 면에서, 마지막 날까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명승부가 펼쳐진 1988년의 리바운드왕 타이틀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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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던의 Bodyguard" 찰스 오클리와 "Mr. Windex"  마이클 케이지가 이 명승부의 주인공들입니다.

두 선수 모두 대학시절부터 리바운더로서 정평이 나있던 정통 블루칼라워커형 파워포워드 겸 센터였습니다 (옆의 GIF 파일은 86~87 시즌 중에 둘이서 몸싸움하다가 으르렁대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오클리는 이미 루키시즌부터 두자릿수에 가까운 리바운드를 하며 조던과 함께 불스의 핵심전력으로 자리를 잡았던 인물이고, 케이지는 첫 두 시즌을 벤치멤버로서 배운 후, 3년차 때에 평균 15.7점, 11.5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스타덤에 오른 클리퍼스의 기둥이었습니다.

오클리에 대해선 많이들 잘 아시겠지만, 케이지에 대해 잘 아시는 분들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마이클 케이지는 농구론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샌디애고 주립대학 출신입니다. 1학년 때 이미 13.7개의 리바운드를 잡아냈고, 3학년과 4학년 때도 평균 12.6개의 리바운드를 잡아냈던 케이지는, 80년대 초반에 발행된 웬만한 농구 전문잡지에서 빠지지 않고 다뤄지던 유망주였습니다. 농구명문 출신이 아니란 이유로 역대 최고의 드래프트라 불리우는 84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14번 픽까지 미끄러지기도 했지만, 그는 여전히 많은 NBA 팀들이 노리고 있던 내구력이 뛰어나고 힘이 좋은 떡대였습니다.

1983년엔 미국대표팀에 뽑혀 마이클 조던, 샘 퍼킨스, 크리스 멀린과 함께 조국에 미주 농구선수권 금메달을 선사하기도 했습니다. 84년 올림픽 팀에도 뽑힐 것으로 예상됐었으나, 주전과 후보를 명확히 하는 바비 나이트 감독의 선호도에 따라 막판에 바클리와 함께 탈락했습니다. 바비 나이트 감독은 베스트 12를 뽑는 감독이 아니라, 주전급 8~9명에 벤치워머급 3~4명을 뽑는 감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덕분에 제프 터너, 존 콘캑, 조 클라인 같은 허접한 선수들이 대신 나라를 대표했었지요.


케이지는 대학시절에 리바운드에 대한 장문의 칼럼들을 써서 전문 농구지에 올릴 정도로 필력 또한 뛰어났던 선수입니다. 케이지가 1982년도 The Sporting News 지에 쓴 칼럼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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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리바운드 하나에 제 인생을 걸려고 합니다. 이 세상엔 타고난 훌륭한 농구선수들이 넘쳐납니다. 그들과 경쟁하기엔 제게 없는 부분이 너무 많아요. 그러나, 리바운드는 특별한 재능을 필요로 하지 않지요. 리바운드에 있어 가장 중요한 덕목은 리바운드된 공을 잡겠다는 강렬한 의지와 포기할 줄 모르는 근성입니다. 피지컬한 부분들은 그냥 따라오는 거에요. 제가 프로에 가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바로 이 리바운드의 멘탈적인 부분에서 나태해지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세일 것입니다."

"리바운드가 오늘날의 저를 있게 했습니다. 그래서 프로에 가더라도 리바운드로 제 이름을 남기고 싶습니다. 이를테면, NBA 리바운드왕 타이틀을 따내는 것이랄까요? 그것이 제 희망사항입니다."


마이클 케이지의 그 희망사항이 현실화 된 것은 그로부터 6년 후인 1988년이었습니다.

이 1988년 시즌은 센터보다 파워포워드들이 리바운드들로서 이름을 떨치던 시기입니다. 리그 탑 5리바운더만 보더라도 올라주원을 제외한 나머지 네 명이 모두 포워드였습니다 - 벅 윌리암스, 칼 말론, 찰스 오클리, 그리고 마이클 케이지.

올스타 게임이 끝난 시즌 후반기부터 이 리바운드왕 타이틀에 대한 이야기들이 모락모락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시작은 오클리였습니다. 전년도 리바운드왕이었던 찰스 바클리를 항상 의식하고 있던 오클리는 공공연하게 현 리그의 최고 리바운더는 이제 본인임을 인터뷰들을 통해 피력했고, 또 실제로도 오클리는 시즌 대부분에 걸쳐 리바운드 수위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때에 소리소문없이 리바운드를 야금야금 잡아내며 오클리를 추격했던 선수가 바로 케이지입니다. 12월, 1월, 2월에 걸쳐 간혹 20개 이상씩의 리바운드를 잡아내던 그가 시즌이 종반으로 치닫던 3월부터 피치를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타고난 체력과 내구력도 한 몫을 했습니다. 이맘 때 쯤이면 많은 선수들이 누적된 피로와 잔부상 등의 여파로 지치게 마련인데, 케이지는 이 때부터 오히려 더 팔팔하게 살아났습니다.

15-14-13-16-23-16-21-19-21-23.

시즌의 한 경기 만을 남겨놓은 상태에서 케이지가 잡아낸 정규시즌 마지막 열 경기의 리바운드 스탯입니다. 시즌 대부분에 걸쳐 오클리에게 평균 1개 이상으로 뒤쳐져 있던 리바운드 수치였는데, 이제 코앞까지 쫓아 왔습니다. 당시의 CNN 스포츠 뉴스에서도 이 둘의 리바운드 스탯을 매일같이 보도하며 흥미롭게 지켜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선수는 오클리였습니다.

오클리도 뒤질세라 마지막 여섯 경기에서 21-14-17-17-35-21개의 리바운드를 잡아내며, 근소하게 리드를 지켰습니다. 사실, 오클리가 시즌 마지막 두 번째 경기였던 클리블랜드 전에서 35개의 리바운드를 잡아냈을 때 (오펜스 리바운드만 16개),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역시 오클리!" 하며 리바운드왕 타이틀이 그의 것으로 거의 굳혀졌다고 보았습니다.

1988년 4월 24일,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를 끝으로 오클리는 정확하게 13.00개의 평균 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시즌을 마쳤습니다.

이제 주사위는 케이지의 큼지막한 손 안에 쥐어져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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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경기는 시애틀 수퍼소닉스 전이었습니다. 케이지가 오클리를 따돌리려면 이 경기에서 28개의 리바운드를 잡아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케이지는 프로 커리어에서 그 정도의 리바운드를 잡아낸 적이 없었습니다. 감독도, 팀원들도, 그를 도울 수 있는 길은 없었습니다. 그나마 감독이 배려해 준 것이 48분 내내 출장시킨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마지막 경기를 앞둔 심정이 어땠었냐는 기자의 질문에, 케이지는 "두렵고 떨렸다"고 솔직하게 답한 적이 있습니다. 어쩌면 본인의 커리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리바운드왕 타이틀의 기회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케이지는, 코트 위에서 죽겠다란 각오로 뛰었습니다. 자신의 농구인생에 있어서 어쩌면 가장 중요할 수도 있었던 그 날의 소닉스 전에서 그는 자신의 모든 혼과 땀을 쏟아 부었습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경기장에 와 응원해주던 노모 한 분의 기도 만이 그의 유일한 위안이었습니다.

그리고 케이지는 해냈습니다...... 리바운드 30개. 그의 리바운드 평균이 13.03개가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한 경기로 인해 그에게는 "Mr. Windex"란 별명이 붙여졌습니다. 백보드를 깨끗이 정리하고 닦아 버린다는 뜻이죠.

불행히도 이 날의 경기는 TV 중계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리그 꼴찌이자 제일 인기가 없었던 클리퍼스 경기였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케이지의 인터뷰 내용을 빌어보면, 경기가 끝나는 순간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을 정도로 탈진이 됐다고 합니다. 본인의 그 날 컨디션으로만 보면 리바운드 한 10개 정도 잡을 수 있는 날이었답니다. 그다지 몸이 가볍지 않았었다는 얘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투혼으로 30개를 잡아내고 코트에 쓰러졌습니다.

6년 전에 그가 가졌던 소박한 희망사항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처음 농구공을 잡는 순간부터 2000년을 끝으로 16시즌이라는 NBA 커리어를 마치는 순간까지, 케이지는 항상 몸을 사리지 않고 코트에 혼을 쏟아부은 리바운더였습니다. 리바운더로서 이름을 남기겠다는 그의 꿈은 1988년의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리바운드왕 쟁취로 이루어질 수 있었고, 그의 성실함과 겸손함, 그리고 투혼과 열정은 후세에 많은 젊은이들에게 귀감이 되었습니다.

은퇴 후, 케이지는 자신의 아내와 함께 많은 불우한 청소년들의 복지를 위해 전력을 다 해 일해오고 있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못 하는 일을 일찌감치 잘 분별해내어 할 수 있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후회없는 인생을 사는 마이클 케이지.... 그가 진짜로 멋진 싸나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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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과 실패, 뗄레야 뗄 수 없는 단어들이다.


NBA
드래프트 역시 성공과 실패로 나눠지게 되어있는데,
드래프트에서 성과를 이룬 구단들이 있는 반면, 실패를 맛본 구단 역시 있기 마련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구단이 드래프트에서 뽑은 선수가 스타 플레이어로 거듭난다면 이는 바로 성공이요, 정 반대의 결과가 나타난다면 그것이 바로 실패다. 하지만 드래프트 상위권의 픽으로 뽑은 선수가 기대치에 맞는, 즉 수준급의 선수로 성장했다면 이는 바로 성공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1997 NBA 드래프트 1순위로 뽑힌 팀 던컨은 4개의 우승을 경험했으며 현역 최고의 파워 포워드임과 동시에 은퇴 후 명예의 전당의 무혈입성이 사실상 확정이 된 스타 플레이어다. 하지만 던컨을 1번픽으로 뽑은 샌안토니오 스퍼스의 선택을 드래프트의 성공 사례라고는 볼 수 없다.

 

던컨은 “1번픽 드래프티의 기대치를 훌륭히 충족했을 뿐, 선수 자신에게는 성공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스퍼스 구단의 입장에서 볼때 던컨은 단순히 1번픽 다운 활약을 보여줬을 뿐이다. 가장 성공 가능성이 높은 선수를 1번픽으로 뽑는 것은 당연지사, 즉 스퍼스는 당시 누구나 드래프트 1순위로 예상했던 던컨을 뽑았을 뿐, 스퍼스 스카웃들의 안목이나 프런트진의 역량의 결과는 아니라는 것이다. 차라리 드래프트의 성공 사례를 언급하자면 2라운드 출신의 아레나스나 마이클 레드가 더 적합 한 예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실패의 기준은 무엇인가? 간단하다.


1
라운드 상위권 픽으로 뽑은 선수들이 미미한 활약을 보이거나 기량 저하로 NBA 무대에서 사라진 경우들이 바로 NBA 구단들의 드래프트 실패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선수를 잘못 뽑아서 구단들이 피해를 본 경우는 수없이 많다. 소위 말하는 드래프트 잔혹사를 살펴보도록 하자.

 

필자는 순위에 관계없이 NBA 구단들이 겪은 가장 치명적인 드래프트 잔혹사들을 나열해 보았다.

 



1984년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져스의 잘못된 선택


1984 NBA 드래프트는 NBA 역사상 최고의 드래프트라 불리기도 한다. 4명의 명예의 전당 입성자들을 배출한 드래프트 (마이클 조던, 하킴 올라주원, 존 스탁턴, 찰스 바클리)이기도 하며, 그 외에도 꽤 쏠쏠한 활약을 했던 선수들이 많이 배출된 드래프트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최악의 선택을 한 구단이 있었으니 바로 2번픽으로 샘 보위를 뽑은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져즈다.


비록 팀에는 조던과 같은 포지션의 클라이드 드렉슬러와 같은 해 여름 트레이드로 영입한 스윙맨 키키 밴더웨이가 있었기에 구단 입장에서는 빈약한 포스트를 채워줄 센터가 필요했겠지만
, 결과적으로 샘 보위를 뽑은것은 포틀랜드의 실수였다. 유리몸이었던 보위는 루키시즌을 제외하면 부상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코트가 아닌 벤치에서 보냈으며 결국 별다른 활약 없이 1989년 뉴저지 넷츠로 트레이드 되고 만다.

비록 포틀랜드는 드렉슬러와 벤더웨이를 앞세워
NBA Finals까지 도달했지만 단 한번도 우승을 경험하지 못했다. 1984년 드래프트에서 마이클 조던은 3, 찰스 바클리는 5번픽에 뽑혔는데 과연 포틀랜드가 보위 대신 이 둘중 하나라도 뽑았으면? 포틀랜드의 역사는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물론 좋은쪽으로.

 


1996
NBA 드래프트, 그리고 코비 브라이언트




1984 NBA 드래프트와 더불어 최고의 드래프트라고 불렸던 1996 NBA 드래프트.


매직 존슨 이후 포인트가드로써는 처음으로 앨런 아이버슨이
1번픽으로 뽑혔던 역사적인 드래프트이기도 했던 1996년 드래프트에서 코비 브라이언트의 재능을 못알아본 구단들이 있었다.


댈러스 매버릭스는
9번째로 사마키 워커를, 인디애나 페이서스는 10번째로 에릭 댐피어를, 골든 스테이트 워리어스는 11번째로 토드 풀러를,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는 12번째로 비탈리 포타펜코를 뽑은 최악의 도미노 사태가 벌어진 것. 그리고 13번픽으로 코비 브라이언트를 뽑은 샬럿 호넷츠마저 드래프트 당일 브라이언트를 레이커스의 블라디 디박과 트레이드 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결국 코비 브라이언트는
2000년대 레이커스 왕조 설립에 큰 기여를 했고 또한 2008년 레이커스 우승을 이끌며 최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현재 사마키 워커는 KBL에서 용병으로 활약중이고 토드 풀러와 비탈리 포타펜코는 NBA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에릭 댐피어가 그나마 그저그런 센터로 댈러스 매버릭스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참고로
1996년 드래프트에서 코비 브라이언트 이후에 뽑힌 선수들중에는 14번째픽의 페쟈 스토야코비치, 15번째픽의 스티브 내쉬, 그리고 17번째픽의 저메인 오닐이 있었으니 1996 NBA 드래프트 잔혹사를 경험한 해당 구단들은 그해 정말 잔혹한 여름을 보냈을 것이 확실하다.

 


2001
NBA 드래프트, 마이클 조던의 실패작




제목만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2001
년 드래프트 1번픽으로 콰미 브라운을 뽑은 워싱턴 위저즈가 바로 2001 NBA 드래프트 잔혹사의 주인공이다 (마이클 조던의 주도 하에)


축복받은 신체적 사이즈와 운동능력
, 그리고 드래프트 워크아웃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높은 평가를 받으며 1번픽에 뽑혔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별다른 성장세를 보이지 못한 그를 위저즈는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결국 레이커스로 트레이드 하게 된다 (하지만 레이커스로부터 카론 버틀러를 받아왔으니 전화위복이랄까).
 
같은 해 드래프트에 뽑힌 빅맨으로는 파우 가솔 (3번픽), 타이슨 챈들러 (2번픽), 잭 랜돌프 (19번픽) 등이 있었으니 위저즈로써는 정말 아쉬워 할 수 밖에. 도대체 마이클 조던은 브라운의 어디가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1998 NBA 드래프트, 밀워키 벅스의 황당한 트레이드




1998 NBA 드래프트에서 댈러스 매버릭스는 6번째 픽을 부여받았다. 여기서 당시의 매버릭스 감독 돈 넬슨은 뛰어난 트레이드 수완을 발휘하게 된다.

매러릭스를 제외한 로터리 팀들 중 노비츠키를 노리는 팀이
10번째 픽을 부여받은 보스턴 셀틱스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되자 넬슨은 9번째와 19번째 픽을 가지고 있던 밀워키 벅스와 트레이드 협상에 돌입하게 된다. 당시 벅스는 미시간 대학 출신의 포워드 로버트 트랙터트레일러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 넬슨은 피닉스 선즈의 백업 포인트가드 스티브 내쉬를 원했는데, 1998년 드래프트 행사권이 아예 없었던 선즈가 1라운드 후반대에 뽑힐거라 예상되었던 신인 팻 개리티를 원한다는 정보를 얻게 된다. 넬슨은 결국 매버릭스의 6번째 픽으로 트랙터트레일러를 뽑아주는 대신, 밀워키에 9번째 픽으로는 노비츠키를, 19번째 픽으로는 팻 개리티를 뽑아달라 요구하는 동시에 선즈에게는 팻 개리티와 스티브 내쉬와의 트레이드를 제안했다.

결국 매버릭스와 벅스간의 트레이드는 성사되었으며, 밀워키는 1라운드 9번픽과 19번픽으로 뽑은 노비츠키와 개리티를 매버릭스가 6번째 픽으로 뽑은 트랙터트레일러와 맞바꾼다. 그와 동시에 매버릭스는 팻 개리티를 얻자마자 선즈에 보내버리고 스티브 내쉬를 얻어왔으니 바로 넬슨의 구상대로 댈러스 빅 쓰리가 탄생되었다.

하지만 결국 넬슨의 농간에 놀아난 밀워키 벅스는 훗날 땅을 치며 후회하게 된다
. 수차례의 올스타 선정은 물론, MVP까지 수상한 노비츠키에 비해 트랙터트레일러는 비만에 기량미달로 출전시간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여러팀을 떠돌다가 쓸쓸히 은퇴했다. 참고로 벅스는 폴 피어스를 뽑을 수도 있었지만 매버릭스를 위해 노비츠키를 뽑아줬으니 결국 노비츠키, 피어스 대신 트랙터트레일러를 뽑았다고도 볼 수 있다 (폴 피어스는 결국 10번째 픽으로 보스턴 셀틱스로 입단했다)

 


1985
NBA 드래프트, 조던-피펜 대신 조던-말론이었다면?



다시 과거로 돌아가보자.

패트릭 유잉의 드래프트라고 불렸던
1985 NBA 드래프트. 1라운드 11번째 픽을 가지고 있던 시카고 불스는 칼 말론 대신 멤피스 대학의 키쓰 리의 이름을 호명한다.

말 그대로 잘못된 선택이었다
. 1984년 마이클 조던을 뽑은 시카고가 과연 1985년 칼 말론을 뽑았다면? 우리는 조던-피펜이 아닌 조던-말론 콤비에 열광했을지도 모른다. 생각만 해도 심장이 두근거리지 않는가? 마이클 조던과 칼 말론이 한 팀이라니.

물론
, 드래프트 당시 칼 말론은 그다지 뛰어난 선수는 아니었고 그의 성실함 역시 많은 의구심을 자아냈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알고있는 칼 말론은 최고의 파워포워드임과 동시에 노력파다. 결과적으로 만약 불스가 리 대신에 말론을 뽑았다면 조던은 조금 더 일찍 우승반지를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1987 NBA 드래프트, 밀러와 KJ는 어디로




샌안토니오 스퍼스가 1순위로 데이빗 로빈슨을 뽑은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 2, 3, 4번째 픽을 보유했던 피닉스 선즈, 뉴저지 넷츠, LA 클리퍼스의 선택은?
선즈는 아르몬 길리암을, 넷츠는 데니스 홉슨을, 클리퍼스는 레지 윌리엄스를 각각 차례대로 선택했다.

이 이후에 호명된 선수들을 나열해보자면
, 5번픽에 스코티 피펜, 7번픽에 케빈 존슨, 11번픽에 레지 밀러, 18번픽에 마크 잭슨등이 있다 (중간중간에도 케니 스미스, 호레이스 그랜트 등 준수한 선수들도 뽑혔다). 길리암과 윌리엄스는 그나마 오랜기간 선수생활을 지속했다지만 홉슨은 7시즌만에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어찌됬던 스코티 피펜, 레지 밀러, 마크 잭슨 등을 지나친 것은 큰 실수임이 틀림없다.


 

2004 NBA 드래프트, 너무나 일찍 사라진 그들..


2004
NBA 드래프트에서 유타 재즈,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토론토 랩터스 이 세 팀은 모두 각자 팀에 도움이 될했던 스윙맨들을 뽑았다. 진짜 도움이 될만한 스윙맨들을 눈앞에서 놓쳐버리고 말이다.

얼마나 이들의 선택이 잘못되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 유타 재즈는 1라운드 14번째 픽으로 크리스 험프리스, 16번째 픽으로 커크 스나이더를 뽑았다. 바로 뒤인 17번째로 애틀란타 호크스가 조쉬 스미스를 뽑았고 덴버 너겟츠는 18번째로 J.R. 스미스를 뽑았다. 두번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유타는 두명의 스미스들을 외면해 버렸다. 현재 크리스 험프리스는 저니맨으로 전락했고 커크 스나이더는 2007-2008 시즌을 끝으로 NBA에서 사라졌다.

토론토 랩터스는 1라운드 8번픽으로 브리검 영 대학의 유망한 센터였던라파엘 어라우죠를 뽑았다. 1라운드 9번픽은 바로? 필라델피아의 안드레 이궈달라였다. 이궈달라는 현재 필라델피아의 에이스로 자리매김했지만 라파엘 어라우죠는 단 세시즌만에 퇴출당하고 만다. 드래프트 당시 어라우죠는 이미 24살이었다. 과연 유리몸에 성장세마저 멈춘 어라우죠를 뽑은 랩터스의 의중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클리블랜드 역시
2004년 드래프트 잔혹사를 겪긴 마찬가지. 르브론 제임스의 파트너로 제 2의 래리 버드라고 불렸던 오레건 대학의 포워드 루크 잭슨을 뽑았으나 잭슨은 계속되는 부상으로 인해 커리어 4년동안 단 한 시즌도 절반을 채우지 못한 채 사라졌다. 잭슨 덕분에 백인 포워드들의 드래프트 가치는 더욱 떨어지고 만다. 참 슬픈 이야기다.


참고로
2004 NBA 드래프트의 승자는 새크라멘토 킹스. 킹스는 1라운드 26번째로 케빈 마틴을 뽑았다. 왜 다들 그당시 케빈 마틴의 잠재력을 알아보지 못했을까?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2003 NBA 드래프트, 킹 제임스와 멜로의 사이




2000년대 최고의 드래프트라고 불리던 2003 NBA 드래프트에는 무수히 많은 재능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중 단연 1번픽 르브론 제임스와 3번픽 카멜로 앤써니가 돋보이는데, 그 두 스타 플레이어들의 사이에 뽑힌 선수가 있었으니 바로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의 실패작 다르코 밀리시치다.

당시 라쉬드 월래스
, 벤 월래스, 안토니오 맥다이스, 메멧 오쿠어등 많은 빅맨 자원들이 있었기에 밀리시치의 출전시간은 당연히 적을 수 밖에 없었다. 미래의 가능성을 보고 뽑은 밀리시치였지만 적은 출장시간에 밀리시치가 불만을 내비치자 피스톤즈는 그를 과감히 올랜도 매직으로 트레이드 해버린다.

당시 피스톤스의 선택에 대해 많은 의견들이 엇갈렸는데, 결과적으로 볼때 밀리시치를 뽑은 것은 아쉬운 선택이었다. 카멜로 앤써니는 물론, 크리스 보쉬, 커크 하인릭, 드웨인 웨이드 등을 포기하면서까지 뽑은 밀리시치였기 때문에 많은 디트로이트 팬들이 조 듀마스를 원망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2002 NBA 드래프트, 아마레, 버틀러, 그리고 프린스



멤피스 그리즐리스의 GM이었던 제리 웨스트의 처음이자 마지막 실패는 바로 2002 NBA 드래프트 4번째 픽으로 아마레 스타더마이어가 아닌 드류 구든을 뽑은 것이다.

만약 아마레가 멤피스로 갔다면 아마레
가솔이라는 무서운 포스트 콤비를 볼 수도 있었다. 덴버 너겟츠는 5번째 픽으로 니콜로즈 츠키타빌리쉬를,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는 6번째 픽으로 드후안 와그너를 선택했다. 이 두팀 역시 아마레를 뽑았다면 더 좋은 결과를 얻었을지도 (물론, 너겟츠는 드래프트 직후 뉴욕이 7번째로 뽑았던 네네 힐라리오를 트레이드로 영입했으니 그다지 큰 타격은 아니었을 수도)


이들이 놓친것은 아마레 스타더마이어 뿐만이 아니었다
. 아마레 바로 뒷 순서인 10번째 픽의 주인공은 바로 캐런 버틀러. 아마레와 버틀러 둘다 올스타 출신들이다. 구든, 츠키티쉬빌리, 와그너의 올스타 출전 횟수는? 총 합쳐서 0번이다.

같은 해 1
라운드 후반대에도 잔혹사는 있었다.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져스는 21번째 픽으로 퀸텔 우즈를, 피닉스 선즈는 22번째 픽으로 케이시 제이콥슨을 뽑았는데 바로 다음 23번째 픽으로 디트로이트 피스톤즈는 테이션 프린스를 뽑았다. 우즈와 제이콥슨 둘다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며 NBA를 떠나게 된 반면, 프린스는 아직도 아우번 힐의 궁전 (디트로이트 홈 구장 이름)을 지키고 있다.

 


1998
NBA 드래프트, 클리퍼스에 내린 재앙




제목만 봐도 누구인지 짐작 갈 것이다. 바로 1998 LA 클리퍼스가 야심차게 1번픽으로 뽑은 마이클 올로워캔디가 바로 주인공이다. 이미 24살이던 그가 유망주라 불린 이유를 모르겠다. 그에게선 큰 키와 사이즈 외에는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클리퍼스는 믿을 구석이 있었는지, 올로워캔디를 1번픽으로 뽑았다.

결과는 참담했다
. 그가 클리퍼스에서 올린 최고의 성적은 평균 12.3, 9.1 리바운드, 2.2 블록. 그래도 같은 1번픽 콰미 브라운 (2001 NBA 드래프트)보다 나은 성적이긴 하다.

한편, 1998
NBA 드래프트 2번픽은 마이크 비비가 뽑혔는데, 올로워캔디보다야 비비가 훨씬 더 나은 선택이었다. 게다가 같은 해 드래프트 4번픽 앤투완 재미슨, 5번픽 빈스 카터, 9번픽 더크 노비츠키, 10번픽 폴 피어스, 심지어 25번픽의 알 해링턴도 올로워캔디보다는 나은 선택이 되었을 것이다. 참으로 안타깝다.

 


2005
NBA 드래프트, 3번픽을 포기한 댓가를 치룬 포틀랜드



제목 그대로다. 2005 NBA 드래프트에서 당시 3번픽을 보유하고 있던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져스는 트레이드를 통한 픽다운(Pick Down)을 시도했다. 꽤나 좋은 선수들이 2005 NBA 드래프트에 쏟아져 나올 확률이 어느때보다 높았기 때문이다.

, 포틀랜드는 3번픽 하나를 행사하는 것 보다 더 낮은 2개의 1라운드 픽을 원했다. 결국 포틀랜드는 3번픽을 유타 재즈에 내주는 대신, 유타의 6번픽과 27번픽을 얻었다. 하지만 이는 포틀랜드의 돌이킬 수 없는 큰 실수였다.

유타 재즈는 포틀랜드로부터 확보한 3번픽으로 데론 윌리엄스를 뽑았고, 현재 윌리엄스는 유타 재즈의 에이스임과 동시에 리그에서 손꼽히는 포인트가드로 성장했다. 4번픽으로 뉴올리언즈 호넷츠에 뽑힌 크리스 폴 역시 현재 리그를 주름잡는 포인트가드 중 하나로 성장했다.

반면 포틀랜드는
6번픽으로 마텔 웹스터를, 27번픽으로 리나스 클레이자를 뽑은 후 클레이자를 덴버가 22번째로 뽑은 조지아 텍의 포인트가드 재럿 잭과 맞바꿨는데, 비록 스윙맨과 포인트가드를 한꺼번에 잡았다지만 3번픽의 타격은 너무나 컸다. 만약 포틀랜드가 기존에 있던 3번픽으로 데런 윌리엄스나 크리스 폴을 뽑았다면? 지금보다 훨씬 무서운 팀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이처럼 NBA 드래프트에서의 선택이 팀의 미래에 좋던 나쁘던 큰 영향을 끼친다.


이 외에도 수없이 많은
드래프트 잔혹사들은 존재하지만, 이 모두 결과론적 관점의 이야기들일 뿐, 누구를 원망할 수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도 없다. 다만, 한 순간의 선택에 의해 명암이 엇갈리는 팀들을 볼때마다 왠지모를 아쉬움이 남을 뿐.

 

드래프트 순위의 무의미함, 드래프트의 성공사례, 그리고 실패까지.


이 모든것들을 생각하며
NBA 드래프트를 시청한다면 앞으로 더 많은 재미와 흥미를 느낄 수 있을것이다. 더더욱 많은 팬들이 NBA 드래프트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면 하는 마음으로 NBA 드래프트 시리즈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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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COLUMNS/SPECIAL 2009. 10. 19. 12:25

2009-10 NBA 퍼시픽 디비전 프리뷰

BY 알 수 없는 사용자

글: 이승보(Gold&Purple)

디펜딩 챔피언 LA 레이커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리그 최하위 그룹을 담당하는 팀이 무려 3팀이나 소속되어 있어 불균형을 이루는 퍼시픽 디비전이다.

올 한 해는 레이커스의 독보적인 선두질주가 예상되는 가운데 8번 시드를 얻으려는 피닉스의 분투와 클리퍼스의 부활 날개짓, 그리고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와 세크라멘토 킹스의 눈물겨운 탈꼴지 경합으로 요약 될 수 있겠다.


LA 레이커스 (2008-09시즌 성적 : 65승 17패)


In_ 론 아테스트
Out_ 트레버 아리자, 쑨예

론 아테스트가 2-3-4번 모든 포지션에서 플레이 가능하기에 빠른팀과 느린팀 모두 적절한 대응을 하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라인업 유동성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코비 브라이언트는 한살을 더 먹었지만, 만 2년만에 여름을 쉬면서 보냈고 우승반지는 네 개가 되었다.

올시즌 레이커스는 리그 최고의 수비팀에 도전할 정도로 강력한 라인업을 갖췄다. 오돔-가솔-바이넘의 위력은 이미 증명이 끝났고, 시범경기에서 보여준 코비-아테스트의 협력 수비는 조던-피펜을 떠올리게 하기 충분했다. 아테스트는 클러치 타임 외곽 공격에도 팀의 숨통이 틔워주기에 충분하다. 문제는 포인트가드다.

피셔는 4시즌 연속으로 82경기 전경기에 출장했으며 시즌 30분 가까이 뛰고 있지만, 이제 발도 느려지고 있고 벌써 서른 다섯이 되었다. 올해 안에 피셔를 완벽하게 대체할 수 있을거라 기대했던 파마는 이제 재계약도 불투명한 상태. 섀넌 브라운이 기대만큼 그 둘을 뒷받침 해줄 수 없다면 레이커스는 포인트가드 문제 때문에 시즌 내내 골치를 썩을것이다.

레이커스와의 경기에서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팀은 아무도 없다. 부상 선수가 한두명 생기더라도 시즌 전체로 봤을때 서부 컨퍼런스 1위를 차지할 공산이 높다. 72승 기록을 깨지 않겠느냐는 소리 레지 밀러는 그러하리라고 답했다. 레이커스가 1999-00시즌 이후, 10년만의 리그 승률 1위를 탈환할 수 있을까. 또 72승은 어떨까.


피닉스 선즈 (2008-09시즌 성적 : 46승 36패)

In_ 얼 클락, 채이닝 프라이, 테일러 그리핀
Out_ 맷 반스, 샤킬 오닐

샤킬 오닐이 떠났지만 선즈 농구의 핵심인 SSOL(7 Seconds or less:7초이내에 공격을 마무리)이 부활할 조짐이 보인다. 신임 감독인 앨빈 젠트리가 화끈한 공격 농구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샤킬 오닐 대신 센터로 뛸 채닝 프라이는 누구보다 잘 달릴 수 있는 센터다. 내쉬와 힐은 나란히 계약을 2년 연장했다.

이 디비젼의 팀들은 모두 엄청난 공격력을 자랑한다. 스티브 내쉬, 제이슨 리차드슨, 레안드로 바보사는 설명이 필요 없을테고, 그랜트 힐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37세 선수임에 틀림없다. 농구가 수비없이 공격만 하는 종목이었다면 이미 내쉬는 양손에 반지를 끼우고 있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레의 인사이드 파트너를 채닝 프라이로 낙점한 그 순간부터 인사이드 수비 문제는 선즈가 감수해야만 할 운명이 되었다. 프라이가 수비에서 심각한 문제점을 보인다면 아마레가 다시 센터로 뛸 확률이 높다. 과연 이들이 ‘선골동놀’의 꼬리표를 뗄 수 있을지가 관심사.

그러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돌격대장 내쉬가 이끄는 피닉스의 돌격대가 서부 판도를 뒤집어 놓을 것이다. 플레이오프는 물론이고 모든 강팀들은 피닉스를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서부팀들이 전체적으로 강해졌지만, 휴스턴의 몰락으로 인해 피닉스를 플레이오프 경쟁에서 떨어뜨릴 팀은 보이지 않는다.


LA 클리퍼스 (2008-09시즌 성적 : 19승 63패)

*파란색은 신인 NCAA성적*

In_ 블레이크 그리핀, 라슈얼 버틀러, 세바스찬 텔페어, 크레익 스미스
Out_ 재크 랜돌프, 퀸튼 리차드슨

에릭 고든의 성장과 블레이크 그리핀의 합류로 지난해보다 훨씬 짜임새 있는 팀이 되었다.

그리핀-캠비-케이먼은 과연 오덤-가솔-바이넘과 흡사한 활약을 해줄 수 있을까. 지금까지 클리퍼스의 문제점은 기량이 아니라, 맞지 않는 손발이었다.

 마커스 캠비와 크리스 케이먼은 이미 검증을 끝마친 좋은 선수들이고, 블레이크 그리핀은 던컨 이후 가장 여유있게 드래프트에서 1번으로 뽑혔다. 7피트의 신장을 자랑하는 디안드레 조던은 지난 시즌 35분 기준, 11.3 리바운드와 2.75 블락을 기록했다. 운동능력 덕분에 앞으로 성장 가능성은 충분하다. 하지만 클리퍼스의 화두는 언제나 부상이다.

배런 데이비스는 최근 7시즌간 평균 61경기 출장에 그치고 있으며, 지난 시즌 31분간 62경기를 출장한 캠비의 나이는 이제 서른 다섯살이다. 케이먼은 이제 전성기에 들어설테지만 최근 2시즌간 87경기 출장하는 데 그치고 있다. 또 주전 선수들이 부상에 시달린다면 좋은 성적을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다.

화려한 겉보기로만 놓고 볼때는 플레이오프를 걱정할 팀이 아니지만, 올 시즌 서부는 동부의 빅3를 상대할 만큼 강해진 팀도 있고 하위권 팀들 역시 상당한 전력 보강을 한 상태라 성적이 크게 뛰어오르리라 단언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선수들의 부상이 심각하지 않다는 전제하에 플레이오프는 모르더라도 놀림거리에서는 벗어나리라 본다.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2008-09시즌 성적 : 29-53)

 
In_ 스피디 클랙스턴, 스테판 커리, 데븐 조지, 에씨 로, 미키 무어
Out_ 마르코 벨리넬리, 자말 크로포드

이제는 더 이상 돈 넬슨 감독이 이끄는 전사들은 도깨비팀 이상을 바라볼 수 없다. 스티븐 잭슨은 절대 기아 타이거즈의 이종범처럼 베테랑으로서 선수들을 모아 승리로 이끌 수 없는 선수다. 설상가상으로 몬타 엘리스와 스테판 커리의 사이도 좋지 않다. 유망주야 원체 넘쳐나는 팀이라 벨리넬리를 트레이드 한 것이 방향성에서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니었지만, 받아온 선수가 데븐 조지라서야 영 밑지는 장사를 했다는 느낌이다.

백코트 공격력만큼은 리그에서도 손꼽힐만큼 강력하다. 잭슨은 개인 공격력에 있어서 중요 순간에도 빛을 발할 수 있는 뛰어난 옵션이고, 엘리스와 새로 합류한 커리 역시 대단한 공격력과 스피드를 지닌 가드다. 거기에 자유투 얻어내기 ‘달인’의 위치에 올랐다는 평가를 듣는 코리 매거티까지 있으니 부상 악령이 덮치지만 않는다면 올해도 팀 득점 상위권에서 워리어스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수비력, 특히 골밑 수비가 문제다. 엘리스가 공격하느라 지친 몸을 수비때 쉬게 하는 동안, 돌파하는 상대 선수들을 포워드-센터들이 도맡아 처리해야 한다. 그러나 이 팀의 프런트코트 라인은 자기 몸 건사하기도 바쁘다. 토니 파커가 돌파하고 있을 때 파커는 커녕 던컨과 맥다이스도 제대로 막지 못하고 있을테니 말이다.

커리와 엘리스의 출장 시간 분배는 꽤 골치 아픈 문제다. 건강하다고 무조건 성적이 오르는 것은 아니지만 지난해보다 낮은 성적을 조심스럽게 예상한다. 제대로 된 중량급 인사이더를 데려올 수 없다면 올해도 판타지 전용 스탯 놀이팀 신세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나마 판타지에서라도 인기 있는 팀이라는 것이 다행이 아닐수 없다.


세크라멘토 킹스 (2008-09시즌 성적 : 17승 65패)


In_ 타이레케 에반스, 션 메이, 데스먼드 메이슨
Out_ 이케 디오구

지난 시즌 1할대 승률을 간신히 벗어난 팀 치고는 오프시즌에 너무나 조용했다. FA영입이라고는 최소연봉의 두명밖에 없었으며, 그외에 팀의 약점을 보완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팀내 얼마 없는 성실한 수비수 프랜시스코 가르시아가 부상으로 인해 시즌의 절반 이상을 결장하게 되어 더 이상 성적을 기대할 수는 없어보인다. 단 한가지 호재는 폴 웨스트폴 감독이 유망주 조련에는 일가견이 있다는 거다.

케빈 마틴이나 타이릭 에반스 모두 좋은 돌파력을 지니고 있어 공격에서만큼은 좋은 활약을 할 수 있다. 부상때문에 당분간은 보지 못하겠지만 부상에서 돌아온다면 가르시아 역시 좋은 활약을 해줄 수 있는 선수다. 하지만 이 팀은 총체적으로 다들 수비에 신경쓰지 않으며, 근본적으로도 제대로 수비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사이즈는 좋은 편이지만, 그 사이즈를 전혀 살리지 못하며 파울이 너무나 많다. 상대팀에게 쉬운 슛을 많이 허용하고, 세크라멘토와 만나는 팀은 모든 선수가 스티브 내쉬나 제이슨 카포노처럼 3점슛을 성공시킨다. 큰 사이즈에도 불구하고 리바운드 마진이 매우 좋지 않다.

미리 언급했듯이 신임감독의 유망주 육성은 장점이지만, 당장 성적을 기대할 만큼 클 수 있는 선수가 많지 않다. 마틴이 자신의 득점 뿐 아니라 팀을 위한 플레이를 생각하고, 수비에 신경쓰면서 팀을 다독이지 않는 한 이 팀은 10승대를 면하기 어려워 보인다. 당장의 성적은 포기하고 3~4년 후를 바라보는 것 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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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COLUMNS/SPECIAL 2009. 10. 19. 12:20

2009-10 NBA 노쓰웨스트 디비전 프리뷰

BY 알 수 없는 사용자


글: 안태진(Dream Time)

'3강 2약'으로 귀결되던 노쓰웨스트 디비전의 모습은 올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전망이다. 지난 시즌 첸시 빌럽스의 영입으로 돌풍을 일으킨 덴버 너게츠에 이어 포틀랜드 블레이저스와 유타 재즈의 치열한 2위 다툼이 예상된다.

오클라호마 시티나 미네소타의 성장통이나 깜짝 이변보다는 꾸준함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포틀랜드와 유타가 과연 덴버의 대항마로 나설수 있을지에 더 귀추가 주목된다.  


▷ 덴버 너게츠 (2008-09시즌 성적 : 54승 28패)


In_ 타이 로슨, 아론 아프랄로, 말릭 알렌
Out_ 단테이 존스, 리너스 클레이자, 소니 윔스, 월터 샤프, 스티븐 헌터

지난 시즌 알렌 아이버슨과 첸시 빌럽스를 맞바꾸는 결단을 내린 덴버 너게츠는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고 성적인 54승과 서부 컨퍼런스 결승 진출이라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올리며 시즌을 끝마쳤다. 오프시즌 동안 큰 변화를 시도하지 않은 데는 이러한 성공으로 인한 자신감이 큰 몫을 차지했을 것이다.

덴버는 빌럽스 영입 이후 공-수 양면에 걸쳐 특별한 약점이 없는 팀으로 거듭났다. 득점왕 타이틀만 없을 뿐 자타공인 리그 최고의 득점기계 중 하나인 카멜로 앤쏘니는 빌럽스를 만나 더 효율적이고 쉽게 득점을 올릴 수 있게 되었고, J.R. 스미스 역시 더욱 위력적인 공격옵션으로 발전 중이다. 프런트 코트의 네네-마틴 콤비 역시 높이와 사이즈, 공격과 수비를 겸비한 리그 최고 수준의 인사이드 듀오이기 때문에 어떤 팀을 상대로도 매치업에서의 우위를 점할 수 있다. 게다가 이번 시즌에는 오프시즌부터 모든 선수들이 손발을 맞췄기 때문에 더욱 다양한 공격전술과 한결 안정된 수비력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팀에도 불안요소는 남아있다. 우선 조지 칼 감독이 강력하게 잔류시키기를 원했던 리나스 클레이자와 단테이 존스의 이탈로 인해 벤치가 얇아졌다. 아론 아프랄로와 타이 로슨이 새로 가세했지만, 이들이 수비적인 측면에서 기존 선수들의 역할을 얼마나 잘 대신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또한, 매 시즌 부상으로 고생했던 네네와 마틴이 지난 시즌처럼 큰 부상 없이 시즌을 보낼 수 있을지도 관건이다.


▷ 포틀랜드 트레일 블레이저스 (2008-09 시즌 성적 : 54승 28패)


In_ 안드레 밀러, 제프 펜더그래프, 빅토르 클래버, 단테 커닝햄
Out_ 세르지오 로드리게스, 채이닝 프라이

부상으로 1년을 통째로 쉰 슈퍼루키 그렉 오든의 데뷔 시즌은 기대에 한참 못 미쳤지만 포틀랜드는 2002-03시즌 이후 6년 만에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며 성공적인 한 해를 보냈다. 이번 오프시즌 동안에도 포틀랜드의 선수 영입노력은 계속됐다. 비록 최우선 영입대상이었던 히도 터콜루는 놓쳤지만, 베테랑 포인트 가드 안드레 밀러를 영입하며 팀 내 취약 포지션을 보완하는 데 성공했다. 팀의 두 기둥인 브랜든 로이와 라마커스 앨드리지가 건재한 가운데, 밀러의 가세는 다른 선수들에게도 커다란 힘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포틀랜드의 가장 큰 장점은 팀의 기둥인 로이와 앨드리지를 비롯하여 선수들 대부분이 젊고 성장 중이라는 점이다. 손발을 맞추면 맞출수록, 경기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팀의 경기력이 상승하는 데다 팀 내부적으로도 유망주들 간의 주전경쟁이 치열하게 펼쳐지고 있기 때문에 정신적으로도 강인한 선수들이 많다. 지난 시즌 실점순위 4위에 올랐을 만큼 젊은 팀답지 않게 수비에 강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는 점도 긍정적이다.

지난 시즌 이 팀의 최대 약점이었던 ‘로이가 막히면 공격이 전혀 이루어지질 않는다’는 문제점마저 밀러의 영입으로 해결했기 때문에, 주축 선수들의 부상만 조심한다면 지난 시즌 보다 더 좋은 결과를 남길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 유타 재즈 (2008-09시즌 성적 : 48승 34패)


In_ 에릭 매이너, 고란 서튼
Out_ X

지난 시즌 개막 당시 서부 정상까지도 노려볼 만 했던 유타의 상승세는 에이스 데론 윌리엄스의 발목 부상으로 인해 한풀 꺾이고 말았다. 새 시즌을 앞두고 윌리엄스가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이번엔 팀의 또 다른 기둥이었던 카를로스 부저가 이적을 요구하면서 말썽을 부리고 있다. 물론, 미래를 확신할 수 없는 부저를 전력외의 선수로 분류한다 하더라도 유타의 전력은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 윌리엄스는 이미 리그 Top3 포인트 가드 중 한 명이며 전성기는 지났지만 안드레이 키릴렌코는 여전히 빼어난 수비수이다. 게다가 지난 시즌 유타의 최대 소득이었던 폴 밀샙의 성장은 유타가 부저를 내보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다.

그러나 서부 컨퍼런스 결승전에 진출했던 2006-07시즌 이후 계속해서 성적이 하락하고 있다는 점, 얇아진 벤치와 2번 포지션, 그리고 부저 문제를 감안하면 디비전 내 경쟁자들인 덴버와 포틀랜드가 저만치 앞서나간 가운데, 불과 2시즌 전만 해도 노스웨스트 디비전에서 가장 미래가 밝아보였던 유타는 이번 시즌에도 ‘디비전 3인자’에 그칠 확률이 높아 보인다.


▷ 미네소타 팀버울브즈 (2008-09시즌 성적 : 24승 58패)


In_ 조니 플린, 웨인 엘링턴, 헨크 노렐, 라이언 홀린스, 알렉산더 파블로비치, 라몬 세션스, 올렉사이 페체로브, 처키 앳킨스, 안토니오 다니엘스, 대미언 윌킨스, 마크 블런트
Out_ 제이슨 콜린스, 케빈 올리, 셸든 윌리엄스, 바브 브라운, 마이크 밀러, 랜디 포이, 마크 매드슨, 세바스찬 텔페어, 크레익 스미스, 대리우스 송가일라, 이탄 토마스, 퀸튼 리차드슨

오프 시즌 내내 미네소타는 전 세계 농구팬들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았다. 전체 1순위 신인 블레이크 그리핀보다 더 많은 주목을 받아온 스페인의 리키 루비오를 선발했기 때문이다. 결국 루비오는 바이아웃 금액 문제로 NBA 데뷔를 2년 뒤로 미뤘지만, 마치 미네소타 프런트는 모든 것을 예상했다는 듯이 또 다른 포인트 가드 유망주 조니 플린을 함께 선발한 데 이어 FA 라몬 세션스까지 영입하며 포인트 가드 문제를 확실하게 해결했다.

이미 알 제퍼슨-케빈 러브라는 뛰어난 프런트 코트 라인을 보유하고 있던 가운데 재기 넘치는 포인트 가드 유망주까지 영입한 미네소타는, 지난 시즌보다 한층 더 안정된 전력을 보여줄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플레이메이킹의 중책을 맡게 될 플린과 세션스는 서로 스타일이 다르고 각자 다른 장점을 지녔기 때문에 미네소타의 공격전술 다변화에도 공헌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물론, 미네소타가 당장 최하위권 에서 벗어나 플레이오프에 도전할 정도의 전력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적어도 지난 시즌보다는 더욱 성장한 모습을 보여줄 것임에 틀림없다.


▷ 오클라호마시티 썬더 (2008-09시즌 성적 : 23승 59패)


In_ 로버트 바든, 제임스 하든, B.J. 뮬렌스, 케빈 올리, 이탄 토마스
Out_ 데스먼드 메이슨, 처키 앳킨스, 데미언 윌킨스

시애틀 슈퍼소닉스 시절의 강력함은 이제 흔적조차 남지 않았지만 오클라호마시티는 뛰어난 유망주들과 함께 새로운 연고지에서 성공적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 팀의 중심 케빈 듀란트와 제프 그린의 변함없는 성장세가 예상되는 가운데, 러셀 웨스트브룩의 백코트 파트너로 낙점된 제임스 하든의 가세는 팀의 기본적인 틀을 완성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오클라호마시티는 미네소타처럼 리빌딩의 초석으로 삼을만한 정통 빅맨 유망주를 보유하진 못했지만, 뛰어난 운동능력과 두 세 개의 포지션을 겸할 수 있는 멀티 플레이어들을 앞세워 인사이드의 열세를 만회하고 있다. 빼어난 기량의 빅맨 한 명이 아쉬운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지난 시즌 총리바운드 개수 6위에 올랐을 만큼 대비책을 잘 세워 두고 있는 편이다.

이 팀에서 가장 주목해야할 선수인 듀란트는 데뷔 2년 만에 리그 최고의 득점기계로 성장했는데, 사실상 팀 전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선수인 만큼 득점 외에도 패스나 수비에서의 발전이 요구된다. 오클라호마시티 역시 미네소타와 마찬가지로 당장의 가시적인 성과가 기대되는 팀은 아니지만 젊은 팀인 만큼 기세를 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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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COLUMNS/SPECIAL 2009. 10. 19. 12:15

2009-10 NBA 싸우스웨스트 디비전 프리뷰

BY 알 수 없는 사용자


글: 정진영(떠돌이 검사)

2008-2009 시즌의 사우스 웨스트 디비젼은 춘추 전국시대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치열했다.

싸우스 웨스트 소속 다섯 개 팀 중 네 팀이 모두 승률 6할 언저리의 성적을 내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디비전 1위 샌안토니오 스퍼스와 4위 뉴올리언스 호네츠의 경기차는 겨우 5게임이었던 만큼 시즌 끝까지 순위쟁탈전이 이루어졌었다. 이번 시즌 역시 다르지는 않을 듯 보인다.

팀 내 원투펀치를 모두 부상으로 잃은 휴스턴 로케츠의 추락이 예상되지만, 멤피스 그리즐리스는 오히려 눈에 띄는 전력보강으로 상위권 도약의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기 때문. 거기다 샌안토니오, 뉴올리언스, 그리고 댈러스 매버릭스는 아직까지 건재하다. 꾸준히 팀들 간 전력이 상향평준화 되어왔던 싸우스웨스트 디비젼. 올 시즌 역시 이러한 현상은 지속될 것으로 보이며, 아마 우리들은 시즌 끝까지 치열한 순위경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 샌안토니오 스퍼스 (2008-09시즌 : 54승 28패)


In_ 드후안 블레어, 난도 데 콜로, 마커스 헤이슬립, 리차드 제퍼슨, 잭 맥클린턴, 안토니오 맥다이스, 티오 레틀리프, 키스 보건스
Out_ 브루스 보웬, 드류 구든, 페브리시오 오베르토, 커트 토마스

팀 던컨, 마누 지노빌리, 토니 파커의 트리오는 올 시즌 역시 그 위력을 발휘할 것 이다, 지난 시즌, 팀의 한 축이었던 지노빌리가 부상으로 결장함에 따라 던컨과 파커만을 앞세운 스퍼스는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댈러스 매버릭스에게 1승 4패로 무참히 탈락했다. 지노빌리의 결장도 있었지만, 더 큰 문제는 던컨, 파커의 뒤를 받쳐줄 득점원이 전무했다는 것. 이는 스퍼스의 고질적 약점이기도 했다(그 단점을 최소화하기 위해 포포비치 감독은 지노빌리를 주로 식스맨으로 중용했다).

하지만 올 시즌은 분명히 다르다. 리차드 제퍼슨의 합류로 인해 스퍼스는 또 다른 득점 옵션이 생겼으며, 안토니오 맥다이스와 테오 래트리프의 가세, 그리고 루키 포워드 드후안 블레어가 시범경기에서 훌륭한 모습을 보여줌에 따라, 스퍼스의 골밑은 더더욱 탄탄해질 것으로 보인다.

스퍼스의 수비력은 언제나 훌륭했다. 키쓰 보건스의 수비력은 떠나간 브루스 보웬의 공백을 메울 것이며, 이와 상관없이 던컨은 항상 골밑을 지키고 있다. 알찬 오프시즌을 보낸 스퍼스에게 더 이상의 약점은 보이지 않는다. 부상이라는 악재만 조심한다면 올 시즌 스퍼스는 싸우스웨스트 디비전의 강력한 1위 후보임과 동시에, 우승후보이기도 하다.


▷ 휴스턴 로케츠 (2008-09 시즌: 53승 29패)


In_ 트레버 아리자, 데이비드 안데르센, 팝스 멘사-본수, 채이스 버딘거, 세르지오 룰, 저메인 테일러, 액셀 허벨
Out_ 론 아테스트, 본 와퍼, 제임스 화이트

지난 시즌, 팀 내 주축이었던 트레이시 맥그레이디와 야오밍이 번갈아 부상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휴스턴 로케츠는 서부의 강자로 군림했다. 시즌 22연승을 기록했으며, 11년만의 플레이오프 1라운드 통과 등 휴스턴에게는 꽤나 의미 있는 시즌이었다.

하지만 올 시즌의 휴스턴은 그리 밝아보이지는 않다. 주전센터 야오밍이 부상으로 시즌 아웃을 선언했고, 맥그레이디 역시 무릎부상으로 언제 NBA에 복귀할지 모르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결국 휴스턴은 올 시즌을 원투펀치(야오밍과 맥그레이디) 없이 시작하게 된다. 또 다른 악재는 론 아테스트의 이적이다. 훌륭한 수비수이자 좋은 공격수인 아테스트까지 잃은 휴스턴은 마치 선장 잃은 배와 같은 꼴이라 할 수 있다. 비록 트레버 아리자를 영입했다지만, 아리자는 아테스트 만큼의 득점력을 선사하지는 못한다. 젊은 포인트가드 애런 브룩스의 괄목한 성장이 눈에 띄지만, 그가 팀의 공격력을 책임지기에는 부담이 너무 크다. 또한 야오밍의 이탈로 인한 포스트 플레이어의 부재는 도대체 누가 메울 것인가?

하지만 희망을 잃지는 말자. 칼 말론의 이적과 존 스탁턴의 은퇴로 인해 역사상 최고의 찰떡 콤비를 잃은 2003-2004시즌의 유타 재즈는, 안드레이 키릴렌코라는 새로운 신데렐라의 활약에 힘입어 42승 40패라는 훌륭한 성적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과연 올 시즌 휴스턴의 신데렐라는 누가 될 것인가?


▷ 댈러스 매버릭스 (2008-09 시즌: 50승 32패)


In_ 숀 매리언, 크리스 험프리즈, 퀸튼 로스, 팀 토마스, 드류 구든, 나단 자와이, 로드리그 뷰보이스, B.J. 뮬렌스, 아마드 니빈스
Out_ 브랜든 배스, 라이언 홀린스, 제리 스택하우스, 앤투완 라이트, 데븐 조지, 그렉 벅너

샌안토니오의 오프시즌 보강도 눈에 띄지만 댈러스 매버릭스 역시 알찬 여름을 보냈다.

제리 스택하우스, 데븐 조지, 앤투안 라이트를 트레이드로 내보냈지만, 토론토와의 2대 3 트레이드로 숀 매리언 영입에 성공했다. 이미 예전 피닉스 선즈 시절, 제이슨 키드와 같이 뛰어본 만큼 빠른 적응력이 기대된다. 특히 뛰어난 속공 마무리를 자랑하는 매리언의 능력은 댈러스의 속공은 그 위력이 배가 될 것이다.

하지만 매리언의 진정한 가치는 앞으로 수비에서 평가될 전망이다. 수준급의 대인마크와 리바운딩 능력을 지닌 매리언으로 인해 댈러스의 수비력은 한층 안정적이게 될 것이다. 새로 합류한 파워포워드 드류 구든 역시 덕 노비츠키의 짐을 덜어줄 것이다. 댈러스는 위에 언급한 샌안토니오나 휴스턴과는 다르게 노비츠키 한명에게서 파생되는 효과를 살려야 하는 팀이다. 즉, 노비츠키를 보좌할 수 있는 선수들의 보강이 시급했는데, 이 점에서는 올 여름의 변화가 성공적이라 말할 수 있겠다.

단, 릭 칼라일 감독의 시스템에 얼마나 선수들이 적응을 하느냐가 관건이다. 비록 지난 시즌에도 50승을 돌파하긴 했지만, 선수들이 자주 전술적으로 헤매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많은 문제점들이 수비에서 지적되었는데, 수비를 우선적으로 지향하는 릭 칼라일 감독의 스타일에 적응하도록 선수들의 노력이 필요하다(2008-09 시즌, 댈러스는 경기당 99.8점을 허용했다. 리그 15위에 해당하는 기록) 제이슨 키드와 조쉬 하워드의 기복 역시 댈러스로써는 해결해야 할 문제다. 특히 하워드의 경기력이 승패와 직결된다는 것은 지난 시즌 덴버 너게츠와의 플레이오프 서부지구 준결승전에서 증명되었다.

골밑의 중량감이 적다는 것이 단점이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댈러스는 공수 밸런스가 잘 맞춰진 팀이다. 키드의 노쇠화, 그리고 부상만 피할 수 있다면 싸우스웨스트 디비전에서 샌안토니오와 1위 다툼을 대등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 뉴올리언즈 호네츠 (2008-09 시즌 : 49승 33패)


In_ 대런 콜리슨, 이케 디오구, 이메카 오카포, 마커스 쏜튼, 바비 브라운, 대리우스 송가일라
Out_ 라슈얼 버틀러, 타이슨 챈들러, 안토니오 다니엘스

싸우스웨스트 디비전 팀들 중 가장 팀 전력의 변화가 없던 팀이 바로 뉴올리언스 호네츠다.
주전 센터 타이슨 챈들러가 나가는 대신, 샬럿 밥캐츠의 주전 센터 이메카 오카포가 들어왔고 워싱턴의 후보 선수 대리어스 송가일라가 새로 합류했다. 미완의 대기 오카포는 챈들러를 대체할 것이고, 송가일라는 벤치의 깊이를 더해 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미미한 변화를 제외하면 뉴올리언즈의 전력은 사실상 작년과 비교해 볼 때 그다지 큰 차이는 없다. 하지만 지난 시즌과 올 시즌의 전력 차이를 만들어 낼 요소는 분명히 있다. 바로 크리스 폴의 성장, 그리고 페쟈 스토야코비치의 부활이다. 이미 올스타 레벨의 선수이긴 하지만 폴은 이제 겨우 24살로 무궁무진한 발전을 이룰 수 있는 선수다. 전력의 50%를 차지하는 선수인 만큼 폴의 성장은 팀 성적에도 큰 영향을 끼칠게 분명하다. 스토야코비치는 지난 시즌 슈팅 성공률과 3점슛 성공률이 30%대에 머물면서 그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부진했다. 뉴올리언즈의 퍼리미터 오펜스를 책임져야할 선수이기에 팀의 선전을 위해서는 그의 부활이 절실하다.

뉴올리언즈의 가장 큰 단점은 스타팅 라인업은 강팀으로 보기에 손색이 없지만 벤치의 전력은 강팀의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선수층이 얇다는 것이 뉴올리언즈의 최대 단점. 이 부분에서 루키 대런 콜리슨의 활약을 기대해 볼 수도 있다. 강력한 우승 후보가 되기에는 부족한 점들이 있지만 폴, 데이비드 웨스트, 오카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뉴올리언즈는 충분히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수 있는 서부의 강호다. 바이런 스캇 감독이 과연 팀을 어디까지 끌고 갈지 지켜보도록 하자.


▷ 멤피스 그리즐리스 (2008-09 시즌 성적 : 24승 58패)


In_ 하심 타빗, 드매어 캐롤, 샘 영, 알렌 아이버슨, 재크 랜돌프, 스티븐 헌터
Out_ 퀸튼 로스, 하킴 워릭, 다르코 밀리시치, 그렉 벅너, 퀸튼 리차드슨, 제리 스택하우스

오프시즌 최대 화두는 바로 앨런 아이버슨과 잭 랜돌프의 이적이었다. 이 두 명의 슈퍼스타는 멤피스의 전력을 한층 강화시켜 줄 것이며, 잃어버린 팬들 역시 되찾아 줄 것이다. 사실 이번 시즌 멤피스는 더 이상 떨어질 곳도 없는 팀이다. 마이크 콘리, O.J. 메이요, 루디 게이, 마크 가솔 등 팀의 주축 선수들은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닌 실력 있는 유망주 들이다. 이들의 성장과 함께 아이버슨과 랜돌프의 경험이 합친다면? 꽤나 즐거운 그림이 그려질 수도 있다.

디트로이트에서의 실패는 잠시 잊어버리자. 아이버슨은 여전히 볼만 지니면 무서운 득점원이 될 수 있으며 랜돌프 역시 여전히 매 경기 20득점-10리바운드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멤피스는 이들로 인해 퍼리미터와 골밑을 한꺼번에 보강하게 된다. 이들의 역할은 그 다음 문제다.

멤피스의 성공열쇠는 다름 아닌 수비에 있다. 현재 팀의 로스터를 살펴보면 수비에 일가견이 있는 선수는 아무도 없다. 아니나 다를까, 작년 멤피스의 수비력은 가히 최악이라 할 만큼 엉성했다. 감독 리오넬 홀린스가 러닝게임을 중시하는 만큼, 팀의 수비력은 올 시즌에도 취약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현재의 공격력에 안정적인 수비가 더해진다면? 멤피스는 아마 올 시즌 큰 사고를 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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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COLUMNS/SPECIAL 2009. 10. 19. 12:10

2009-10 NBA 싸우스이스트 디비전 프리뷰

BY 알 수 없는 사용자


글: 김준우(jeffrey23)

이번 시즌 동부컨퍼런스 최고의 격전지는 바로 싸우스이스트 디비전이 될 것이다.

싸우스이스트 디비전은 지난 시즌 컨퍼런스 챔피언인 올랜도 매직을 필두로 '동부 3강'을 제외한 최강자의 입지를 다져가고 있는 애틀랜타 호크스, 그리고 돌아온 '길교주' 길버트 아레나스의 워싱턴 위저드가 소속되어 있다.

여기에 득점왕 드웨인 웨이드가 버티는 마이애미 히트도 언제든 플레이오프 행 열차에 탑승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고 동부컨퍼런스의 떠오르는 신흥강호 샬럿 밥캐츠도 호시탐탐 순위경쟁에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 올랜도 매직 (2008-09시즌 성적 : 59승 23패)


In_ 브랜든 배스, 맷 반스, 빈스 카터, 라이언 앤더슨, 제이슨 윌리엄스
Out_ 히도 터콜루, 코트니 리, 래퍼 앨스튼, 토니 배티

지난 시즌, MVP 르브론 제임스가 이끄는 클리블랜드를 따돌리고 프랜차이즈 역사상 2번째로 파이널 진출의 쾌거를 달성했다. 하지만 플레이오프 기간 동안 팀의 승부를 손에 쥐다 시피한 히도 터콜루의 이적으로 큰 손실이 될 전망이다.

먼저 간판스타 드와이트 하워드는 새로운 도전 과제를 맞이하게 됐다. 올랜도가 파이널 진출을 넘어 우승을 이루기 위해서는 샤킬 오닐과 케빈 가넷이라는 커다란 산을 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수비왕에 오른 하워드라 하더라도 이 둘의 존재는 적지 않은 부담이 될 것이다.
생애 첫 올스타 시즌을 날린 자밀 넬슨의 부상도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화이트 초콜릿' 제이슨 윌리엄스가 복귀했지만, 한 시즌의 공백기를 극복할 시간이 필요하며 앤쏘니 존슨의 한계는 지난 시즌 플레이오프에서 확인한 바 있다.

전체적인 팀 컬러가 크게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적생 빈스 카터의 활약 여부에 따라 운명이 결정될 공산이 크다. 스탠 밴 건디 감독은 “플레이오프 4쿼터에서 믿고 맡길 수 있는 선수”라며 카터에 대한 깊은 신뢰를 드러냈다.

젊은 선수를 독려하고 팀의 모든 것을 이끌어야 했던 뉴저지 시절과는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카터가 토론토 시절의 적극성과 터프함을 더한다면, 올랜도는 다시 한 번 정상등극을 노려볼 수 있을 것이다.


▷ 애틀랜타 호크스 (2008-09 시즌 성적 : 47승 35패)


In_ 제프 티구, 서지 글래다이르, 조 스미스, 제이슨 콜린스, 자말 크로포드
Out_ 솔로몬 존스, 에씨 로, 스피디 클랙스턴, 플립 머레이

지난 시즌 클리블랜드와의 컨퍼런스 준결승전에서 4전 전패의 수모를 겪었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발전을 이어가고 있는 애틀랜타다.

시즌에 앞서 주전멤버와 식스맨급 벤치선수는 모두 지키고, 알짜배기 롤플레이어의 영입을 이뤄내며 성공적인 여름을 보냈다. 특히 지난 시즌 뉴욕 닉스의 공격을 주도했던 스코어링 리더 자말 크로포드와 베테랑 포워드 조 스미스의 영입은 큰 힘이 될 전망이다. 무엇보다 마이크 비비를 제외한 주전 선수 대부분이 20대 중 후반으로 전성기에 접어들고 있는데다, 데뷔 후 쭉 호흡을 맞춰왔기 때문에 절정의 경기력이 기대된다.

이번 시즌 최대쟁점은 단연 로포스트다. 알 호포드와 조쉬 스미스, 그리고 자자 파출리아는 지난 시즌 39경기 결장을 합작하며 신음해야 했다. 때문에 하워드와 케빈 가넷, 샤킬 오닐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이들 프론트코트의 건강이 필수적이다.

간판스타 조 존슨이 차기 시즌 종료 후, 플레이어 옵션을 행사할 것이라 공언했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는 구단의 노력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워싱턴 위저드 (2008-09시즌 성적 : 19승 63패)


In_ 패브리시오 오베르토, 마이크 밀러, 랜디 포이
Out_ 이탄 토마스, 대리우스 송가일라, 올렉시 페체로브

지난 시즌에 올린 19승은 구단 역사상 3번째로 적은 숫자였다. 창단 첫해를 제외하면 2번째에 해당하는 부끄러운 기록이었다. 이는 재앙에 가까웠던 선수들의 줄 부상 때문이었고 전력의 반 이상을 차지했던 삼총사의 붕괴가 특히나 뼈아팠다. 하지만 팀의 정신적 지주인 길버트 아레나스가 무릎부상과 이별을 고하며 차기 시즌에 대한 전망을 밝히고 있다.

여기에 드래프트 1라운드 픽을 포기하는 대가로 공격에서의 약점마저 해결했다. 마이크 밀러와 랜디 포이의 가세로 외곽 슛의 기복을 줄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주전으로 발돋움한 닉 영 또한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어 백코트의 경쟁력은 한 층 돋보인다.

하지만 리그 29위에 머무른 팀 실점에서 드러나듯, 수비에서 갖가지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지난 시즌 리바운드 허용률 20위, 3점슛 허용률 27위에 오르며 내외각에서 허점을 노출시켰다. 주전들의 잇따른 부상이탈에 따른 결과지만 팀 수비의 개선이 따르지 않는 한, 플레이오프 진출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 마이애미 히트 (2008-09시즌 성적 : 43승 39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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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_ 로버트 도지어, 패트릭 베버리, 마커스 쏜튼
Out_ 자마리오 문, 마크 블런트

이제 마이애미 히트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1년뿐이다. 드웨인 웨이드는 내년 여름 자유의 몸이 될 예정이며 새 보금자리를 찾아 떠날 수도 있을 것이다.

지난 시즌의 마이애미는 웨이드의, 웨이드에 의해, 웨이드를 위한 한 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승패로 직결될 만큼 웨이드의 비중은 절대적이었고, 이는 올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전망이다. 때문에 이렇다할만한 수확 없이 보낸 이번 여름농사는 큰 아쉬움을 남겼다.

애석한 현실이지만 다시 한 번 웨이드의 활약에 기대를 걸어야하는 상황인 만큼, 동료들의 전폭적인 지원이 절실하다. 특히 지난 시즌 ‘흙속의 진주‘로 거듭난 2라운더 마리오 찰머스는 보다 더 나은 코트 지휘능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찰머스가 스스로 팀 공격을 전개할 수 있다면 공 소유시간을 늘려줄 수 있고, 이는 공수에서 진두지휘하는 웨이드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좋은 방편이 될 수 있다. 또한 새 식구 퀸튼 리차드슨을 비롯하여 백업 스윙맨은 풍족한 편이라 적절한 로테이션으로 체력 안배를 꾀한다면 웨이드의 롱런에 큰 힘이 될 수 있다.

조던과 코비, 웨이드의 트레이너를 담당했던 팀 글로버와 함께 구슬땀을 흘린 저메인 오닐의 재기여부도 관심을 끌고 있다. 이미 30살을 넘기며 전성기와 멀어지고 있지만, 수비에서는 여전히 쏠쏠하게 공헌해 줄 수 있는 선수기 때문이다.

여기에 나름의 성공적인 루키시즌을 보낸 마이클 비즐 리가 2년차 징크스를 넘어 확실한 스몰포워드로 정착할 수 있다면, 플레이오프로 가는 길이 어둡지만은 않을 것이다.


▷ 샬럿 밥캐츠 (2008-09시즌 성적 : 35승 47패)

In_ 제럴드 핸더슨, 데릭 브라운, 타이슨 챈들러, 플립 머레이
Out_ 션 메이, 이메카 오카포, 주완 하워드

창단 5년째를 맞이한 지난 시즌, 구단 최다승을 달성하며 수직상승 중이다. 올 여름, 프랜차이즈의 첫 번째 얼굴이나 다름없는 이메카 오카포를 보내는 강수를 두며 본격적인 플레이오프 도전에 나섰다.

지난 시즌 피닉스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영입했던 보리스 디아우와 라자 벨이, 오프시즌을 통해 기존의 멤버들과 완벽하게 호흡을 맞추면서 팀의 색깔이 제법 선명해졌다. 하지만 디비전 내에서 샬럿을 제외한 모든 팀이 플레이오프 가시권에 속해있기 때문에, 순탄치 않은 시즌이 될 전망이다.

샬럿의 최대 약점은 바로 해결사의 부재다. 팀 내 최다 득점에 이름을 올린 제럴드 월라스는 자타가 공인하는 올어라운드 플레이어지만, 데뷔부터 꾸준하게 지적받아온 외곽 슛의 약점을 안고 있는 반쪽짜리 공격수다. 가장 많은 필드골 시도를 기록한 레이먼드 펠튼은 4할을 간신히 넘는 저효율 슈팅으로 신뢰가 떨어지고, 라자 벨 역시 스스로 득점을 올리는 능력은 부족하다. 오카포의 자리를 대신 할 챈들러는 찰떡호흡을 자랑했던 크리스 폴 없이 시험무대에 서야한다.

이 모든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인물은 다름 아닌 래리 브라운 감독이다. 한국나이로 70살을 맞이한 브라운은 특별한 슈퍼스타 없이도 승리할 수 있는 철학과 전술을 지닌 명장이기 때문이다. 레지 밀러나 리차드 해밀턴은 공 없이도 위력적인 공격무기로 재조명 받았고, 이는 브라운 없이 불가능한 일이었다. 브라운의 지휘봉이 기대되는 이유다.

터줏대감 펠튼과 신예 D.J 어거스틴의 공존문제도 암초다. 활동반경이 겹치는데다가 볼 소유욕이 남다른 두 선수가 합의점을 찾지 못한다면 결국 한 명이 떠나야 하는 상황도 배제할 수 없다

약체의 이미지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지만, 구단 역사상 최초의 플레이오프 진출을 자신하기에는 여전히 의문부호가 따른다. 최근 명예의 전당 연설문에서 구설수에 오른 마이클 조던이 과연 명예 회복에 성공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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