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 & COLUMNS/POINT GUARD 2009. 10. 27. 09:47

길교주의 자비로운 부활 메세지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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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2월의 어느 날, 골든 스테이트 워리어스의 홈구장 오라클 아레나.

골든 스테이트의 벤치에 앉아 있던 약관의 루키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코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데뷔 이후 단 2경기에 교체 출장한 것에 그치고 있었고, 심지어 부상을 당하지 않았음에도 부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야했다. 좀처럼 코트에 나설 기회를 잡지 못하던 그는 코치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었다. 팀 훈련 때마다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음에도, 되레 자신보다 못한 기량을 선보인 베테랑들에게만 기회가 주어지고 있었다.

조금씩 자신감을 잃어갈 무렵, 그는 자신이 대학 시절 활약하던 모습이 담긴 테이프들을 돌려봤다. 그리고 확신했다. 자신이 NBA에서 성공할 수 있을만한 기량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는 변하기 시작했다. 비록 여전히 벤치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더 이상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코트를 바라보던 그는 없었다. 눈을 번뜩이며 팀원들의 움직임을 머릿속에 담기위해 노력했고, 수없이 이미지 트레이닝을 반복했다.

그 동안 소속팀인 골든 스테이트는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악의 부진에 빠져있었다. 결국 구단 프론트는 당시 코치였던 데이브 코웬스를 해임했고, 브라이언 윈터스를 신임 헤드코치로 임명했다. 원터스는 부임 이후 팀의 리빌딩을 위해 젊은 선수들에게 보다 많은 기회를 주기로 결정했다. 벤치에서 때를 기다리던 그에게도 조금씩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시작은 좋지 않았다. 교체 멤버로 꾸준히 코트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지만, 이렇다 할 결과물을 쉽사리 내어놓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조금씩 전진하고 있었다. 데뷔 이후 48경기 만에 첫 번째 선발 출장의 기회를 얻더니, 9경기 연속 두 자릿수 득점에 성공하기도 했다.

팀의 시즌 마지막 27경기에 연속 선발 출장하며 입지를 다진 그는 조금씩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시작했고 4월 한 달 동안 팀의 9경기에 모두 선발 출장, 평균 16.5득점, 4.7리바운드, 6.1어시스트, 3스틸을 기록하며 서부 컨퍼런스 이 달의 신인으로 선정되었다.

하지만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가 어떤 선수로 성장하게 될 지, 어떤 드라마틱한 장면들을 연출하게 될 지를 예측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의 이름은 길버트 제이 아레나스 주니어 (Gilbert Jay Arenas Jr.).

훗날 Agent Zero라는 닉네임으로 불리게 될 길버트 아레나스였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길버트 아레나스.

그는 1982년 LA의 San Fernando에서 태어났다. 아레나스의 어머니는 그가 어렸을 때 약물 중독에 빠졌고, 이후 그는 아버지 Gilbert Arenas Sr.와 함께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는 헐리웃에서 활동하던 근육질의 조연 배우였다. 배우로써 인상적인 경력을 쌓지는 못했지만, 몇 차례의 영화 출연과 CF 모델 활동 등으로 가정의 생계를 책임졌다. 동시에 어머니 없이 자라나고 있는 아들에게 무한한 사랑을 쏟았다. 어머니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아레나스가 탈선하거나 방황하지 않고 올곧게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아버지의 커다란 사랑이 있었다.

아레나스에게 처음 농구를 접하게 해준 인물 역시 아버지였다. 아레나스가 11살이 되던 해, 아버지로부터 농구공을 선물 받은 그는 농구의 매력에 매료되어갔다. 마이애미 대학에서 풋볼 선수로 활약하기도 했던 아버지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탓인지 아레나스는 뛰어난 운동 신경을 뽐내며 빠르게 실력을 키워갔다. 이후 Grant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농구 선수로의 삶을 시작했다.

고교 시절에도 그의 득점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아레나스는 입학 이후 연일 고득점 행진을 이어갔다. 신입생이던 해에 시즌 평균 22.5득점을 기록하더니 이후 29.8득점, 33.4득점으로 그 숫자를 늘려갔다. 졸업반이 되기도 전에 이미 교내 역대 최다 득점 기록을 갈아치운 그는 4년 동안 총 2124점을 득점하며 Grant 고교의 전설로 이름을 남겼다.

그러나 아레나스가 NCAA에서도 성공 스토리를 이어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모두가 의문을 가졌다. 우선 Grant 고교에서의 활약상만으로는 농구 팬들에게 커다란 인상을 줄 수 없었다. Grant 고교는 인근의 Fairfax나 Compton Dominguez 같은 농구 명문 고교에 비해 인지도가 떨어지는 학교였기에 그의 활약은 상대적으로 저평가 되고 있었다. 덧붙여 빠른 생일로 인해 동급생들보다 나이가 어렸기에 필연적으로 체격적인 부분에서 약점을 가지고 있었고, 학업에 무관심했던 탓에 대학에 입학할 수 있을만큼의 SAT 성적을 얻을 수 있을지에 대한 여부조차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당시 공격적인 리쿠르팅에 나섰던 농구 명문 애리조나 대학에 의해 졸업반이 되기도 전에 입학 제의를 받았고, 곧바로 제의를 받아들이며 진로를 최종 결정지은 아레나스였지만 대학에서의 활약은커녕 입학 가능성조차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모두가 아레나스에게 의심의 눈길을 보낼 때, 단 한 사람만은 그를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바로 그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아레나스가 농구는 물론이고 대학에 입학할 수 있을 만큼의 SAT 점수를 얻을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결국 아레나스는 대학 입학에 필요한 SAT 점수를 취득하게 됐고, 농구 명가 애리조나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백넘버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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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만고 끝에 애리조나 대학교 입성에 성공한 아레나스였으나 그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여전히 가시가 돋쳐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아레나스가 약체 팀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겉멋만 들었을 뿐, 실력은 형편 없을 거라며 그를 비웃었다. 심지어 몇몇 이들은 '주전 자리를 차지하기는커녕, 출장 시간이 0분에 그칠 것'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억측들은 아레나스를 무릎 꿇게 만들지 못했다. 되레 그는 자신의 백넘버를 0번으로 결정하며 보란 듯이 NCAA 무대로 뛰어들었다.

프리 시즌이 시작되자 아레나스를 비웃던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레나스는 프리 시즌 첫 경기에서 22득점을 퍼부으며 인상적인 데뷔에 성공했고, 이후에도 맹활약을 계속하며 프리 시즌 MVP에 등극해버렸던 것이다.

1999-2000 시즌의 애리조나는 로렌 우즈, 마이클 라이트, 리차드 제퍼슨과 같은 재학생들과 아레나스, 제이슨 가드너, 룩 월튼 등의 신입생들이 조화를 이루며 강력한 전력을 뽐냈다. 아레나스는 팀 내 두 번째로 많은 평균 32분의 출장 시간을 기록했고, 평균 15.4득점을 기록하며 우즈, 라이트와 함께 팀 내 스코어링 리더로 맹활약했다. 애리조나는 27승 7패를 기록하며 승승장구했다.

아레나스는 코트 안에서의 맹활약은 물론이고, 코트 밖에서의 재미있는 모습들로 많은 팬들을 거느리기 시작했다. 팀원들과 학우들에게 고대시를 인용한 이해할 수 없는 농담을 던지는가 하면, 교내 신문에 우스꽝스러운 메세지를 싣기도 하고, 유니폼을 마음대로 잘라 입고 나와서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소포모어 시즌이 되자 아레나스는 더욱 강해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2000-01 시즌 동안 평균 16.2득점을 기록하며 팀 내 최다 득점자가 되었고, 애리조나를 NCAA 토너먼트 파이널 무대에까지 올려놓았다. 하지만 아레나스는 정작 파이널 무대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힘없이 물러났다. 상대팀이었던 듀크 대학은 막강한 전력으로 애리조나를 물리치고 전미 챔피언이 되었다.

비록 파이널 무대에서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아레나스는 본능적으로 더 이상 대학 무대에서 이룰 것이 없음을 직감했다. 처음 애리조나에 입학할 당시에는 당연히 대학 졸업장을 받게 될 거라 생각했지만, 단 2년 만에 NCAA 파이널 무대를 밟아본 아레나스는 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짧았던 대학 생활을 청산하고 NBA 드래프트에 참가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수많은 이들이 그의 결정을 만료했지만, 아레나스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아레나스는 댄 페건을 에이전트로 고용하며 2001년 NBA 드래프트에 참가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좌절과 상처의 드래프트

'엄청난 사거리를 자랑하는 롱 레인지 점퍼와 훌륭한 운동 능력, 빠른 스피드와 타고난 득점 감각에 대한 부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슈팅 가드로 뛰기에는 신장이 너무 작고, 포인트 가드로 뛰기에는 지나치게 공격적인 성향을 가진 슛 퍼스트 마인드의 콤보 가드.'

얼리 엔트리를 선언한 아레나스를 바라보는 시선들은 대개 이러했다. 지역 방어의 허용, 핸드 체킹 강화 등의 룰 개정으로 과거에 비해 콤보/듀얼 가드 성향의 선수들이 갖는 가치가 높아졌으나, 당시만 하더라도 새로운 룰이 막 도입되던 시기였기에 여전히 콤보/듀얼 가드 성향의 선수들을 기피하는 경향이 많이 남아있었다. (물론 지금도 이런 경향은 여전히 존재한다)

애리조나 재학 시절, 아레나스는 포인트 가드가 아닌 슈팅 가드로 플레이했었다. 걸출한 포인트 가드였던 가드너가 그의 동기였기 때문이다. 해서 드래프트를 목전에 둔 아레나스에게는 포인트 가드로의 포지션 전환에 대한 성공 여부 또한 커다란 이슈이자 성공의 걸림돌로 비춰졌다.

하지만 아레나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최선을 다해 각종 워크아웃에 임했다. 아레나스가 앞만 보고 달려갈 수 있었던 것에는 또 한 번 아버지의 존재가 큰 도움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아레나스가 얼리 엔트리를 선언함과 동시에 아들의 매니저 역할을 자청하며 동분서주 아들의 기량을 알리기 위해 움직였다. 그러는 동안 아레나스의 아버지는 헐리웃에서 비중 있는 조연으로 캐스팅 제의를 받게 되었는데, 아버지는 아들의 농구 인생을 위해 과감히 이를 거절했다 (아레나스의 아버지가 캐스팅을 거절했던 캐릭터에 최종 낙점된 인물은 Laurence Fishburne, 우리에게 '모피어스'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배우였다).

이처럼 아레나스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아버지 역시 아들의 성공적인 프로 데뷔를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 그 때 아레나스 부자에게 접근해오는 팀이 있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새크라멘토 킹스. 2001년 드래프트 당시 1라운드 25번 지명권을 보유하고 있었던 새크라멘토는 아레나스에게 '니가 25번 이후에 지명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아레나스와 아버지는 순조롭게 진행되는 드래프트 준비 과정에 만족했고 여유 있는 마음으로 드래프트 중계를 지켜봤다.

2001년 NBA 드래프트. 드디어 새크라멘토가 보유하고 있는 1라운드 25번 지명권의 주인공이 호명될 차례가 다가왔다. 짧지만 긴 침묵이 흐르고, NBA 커미셔너 데이비드 스턴의 입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Sacramento Kings select, Gerald Wallace from the University of Alabama."

결국 1라운드 지명권 행사가 모두 끝이 나도록 아레나스의 이름은 호명되지 않았고, 이후 2라운드 31번 픽으로 그를 지명한 골든 스테이트 워리어스에서 NBA 커리어를 시작하게 되었다.

아레나스에게도, 그의 아버지에게도 드래프트는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골든 스테이트의 풍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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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애리조나 대학에 입학했을 당시와 마찬가지로, NBA 데뷔 역시 순탄치 않았다. 워크아웃과 팀 훈련에서 좋은 모습을 보인 아레나스는 내심 NBA 데뷔에 대해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지만 팀은 계속해서 그를 외면했다. 2000-01 시즌 골든 스테이트의 4번 째 경기에 교체 출장하며 NBA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지만 겨우 3분을 플레이하는데 그쳤다. 이어진 경기에서 8분을 플레이하며 단 1개의 3점슛 시도를 마지막으로 그는 무려 이후의 25경기 동안 단 1초도 코트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코칭 스태프들은 계속해서 그를 외면했고, 심지어 부상을 당하지 않았음에도 부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언제나 팀 훈련에서는 맹활약했지만 정작 실전에 투입되는 기회는 베테랑들에게 돌아갈 뿐이었다.

언제나 많은 이들의 의심과 억측을 보기 좋게 날려버린 아레나스였지만 이번에는 그도 의기소침해질 수밖에 없었다. 드래프트에서의 상처가 채 아물지도 않은 시점에서 단순한 출장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아레나스의 가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코트에 내보내주기만 한다면, 충분한 기회만 준다면 얼마든지 자신의 기량을 입증시킬 수 있을 텐데. 끝내 자신을 모른척하던 코칭 스태프들과 구단 프론트를 원망하는 마음뿐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자신감을 잃어갔다. 어쩌면 정말로 기량이 형편없기 때문에 코트에 나설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우연히 대학 시절 자신의 활약상이 담긴 비디오테이프를 보게 된다. TV 속에서 플레이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아레나스는 자신이 NBA에서 성공할 수 있을만한 기량을 충분히 가지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의심의 눈길들을 멋지게 날려버리겠노라 다짐했다.

이후 그는 더욱 치열하게 훈련에 임했다. 팀 동료였던 마크 잭슨, 딘 올리버와 함께 가장 먼저 훈련장에 나와서 가장 늦게 훈련장을 빠져나갔다. 여전히 벤치에 앉아있는 신세였지만, 이전처럼 불만스럽게 코트를 바라보기 보다는 팀 동료들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연구했으며 코트를 누비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며 이미지 트레이닝을 이어갔다.

그 동안 골든 스테이트는 끝 모를 부진에 빠져있었다. 결국 구단 프론트는 당시 헤드코치였던 데이브 코웬스를 해임하고, 신임 헤드코치로 브라이언 윈터스를 내세웠다. 윈터스는 팀의 리빌딩을 위해서 젊은 선수들을 적극 기용할 것임을 천명했고 이는 아레나스에게 커다란 호재가 되었다.

하지만 윈터스 역시 곧바로 아레나스에게 기회를 준 것은 아니었다. 아레나스는 윈터스가 헤드코치로 임한 7번째 경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다시금 코트를 밟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출장 시간은 겨우 3분. 이후에도 간간히 교체 투입으로 경기에 임했을 뿐 단 한 번도 10분 이상의 출장 시간을 기록하지 못하고 있었다.

시즌 48번째 경기에 들어서 비로소 첫 선발 출장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아레나스는 조금씩 자신의 가능성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첫 선발 출장 이후의 9경기에서 연속으로 두 자릿수 이상의 득점에 성공한 것이다. 이후 아레나스는 팀의 마지막 27경기에서 연속으로 선발 출장하는데 성공했고, 충분한 기회를 얻자마자 이제껏 그래 왔듯이 모든 이들에게 자신의 기량을 입증하기 시작했다. 4월에는 서부 컨퍼런스 이달의 신인 선수로 선발되며 멋지게 신인 시즌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이듬해 2002-03 시즌. 아레나스는 본격적으로 성공 스토리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82경기에 모두 선발 출장, 평균 35분(팀 내 2위)을 플레이하며 18.3득점(팀 내 2위), 4.7리바운드, 6.3어시스트(팀 내 1위), 1.5스틸(팀 내 1위)을 기록하며 맹활약했다.

팀 내의 입지는 물론이거니와 리그 내에서도 그의 이름은 조금씩 무게를 갖기 시작했다. 루키 올스타 게임에 소포모어 팀의 일원으로 참가하며 대회 MVP로 선정되었고, 수직 상승한 개인 기록과 팀 내 공헌도로 인해 2002-03 시즌 MIP 수상자가 되는 영광을 맛보기도 했다.

아레나스의 급격한 성장은 2라운더 루키로 데뷔한 것을 전화위복으로 만들었다. 단 2년 만에 비제한적 FA의 권리를 갖게 된 것이다. 젊고 풍부한 가능성을 가진 그를 얻기 위해 많은 팀들이 아레나스에게 접근했다.

가장 적극적이었던 팀은 LA 클리퍼스와 워싱턴 위저즈. 두 팀의 제안을 놓고 고민하던 아레나스는 자신의 운명을 동전에 맡기기로 했다. 하지만 조금 독특하게도 10번 동전을 던져 많이 나온 팀이 아닌, 적게 나온 팀으로 자신의 행선지를 결정하기로 한 것이다. 그는 동전을 10번 던졌고 클리퍼스가 7번, 워싱턴이 3번 나왔다.

아레나스는 워싱턴과 6년간 63.7m의 거대 계약에 합의했고, 원 소속팀이었던 골든 스테이트가 이를 매치시키지 않으면서 워싱턴에 새로운 둥지를 트게 되었다.


Agent Z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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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랬듯이, 워싱턴에서의 시작도 평탄하지 않았다.

당시 워싱턴은 제리 스택하우스라는 걸출한 득점원을 보유하고 있었고, 팀의 미래로 손꼽히며 반드시 성장시켜야만 했던 콰미 브라운이 자리 잡고 있었다. 구단은 이들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퓨어 포인트 가드를 원했고, 이것이 아레나스를 영입한 이유였다.

하지만 이는 워싱턴의 계산 착오였다. 워싱턴에서의 아레나스는 이전에 비해 득점이 늘어난 반면 어시스트는 되레 줄어들고 있었다. 에디 조던 코치는 아레나스에게 제이슨 키드와 같은 플레이를 펼칠 것을 요구했지만, 아레나스는 언제나처럼 공을 들고 림으로 돌진하며 자신만의 플레이를 펼치려했다. 팀에서 가장 많은 출장 시간과 득점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조던과 아레나스 사이에는 알 수 없는 부조화의 기류가 흘렀다. 게다가 크고 작은 부상으로 인해 시즌 내내 고생하던 아레나스는 55경기에 출장하는 것에 워싱턴에서의 첫 시즌을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모습으로 마무리해야 했다.

그러나 아레나스와 조던은 서로를 포기하지 않았다. 아레나스는 언제나 그랬듯이 치열하게 훈련에 임했고, 조던은 아레나스의 장점을 100% 활용할 수 있는 전술을 고안하기 위해 노력했다.

시즌 종료 후 워싱턴은 부상으로 26경기에 출장하는 것에 그쳤던 스택하우스를 댈러스 매버릭스의 앤투안 제이미슨과 트레이드했고, 아레나스 - 래리 휴즈 - 제이미슨으로 이어지는 트리오를 결성했다. 조던은 아레나스의 공격 본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었고, 아레나스는 코치의 주문을 성실히 이행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렇게 맞이한 2004-05 시즌. 아레나스와 워싱턴은 비상하기 시작했다. 아레나스는 80경기에 모두 선발 출장하며 평균 25.5득점, 4.7리바운드, 5.1어시스트, 1.7스틸을 기록하며 팀의 에이스로 우뚝 섰다. 제이미슨과 함께 생애 최초 올스타 멤버로 선정되기도 했으며 All NBA 3rd Team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아레나스의 활약은 개인의 성공에 머무르지 않고, 팀의 성공에도 큰 힘이 되었다. 워싱턴은 45승 37패를 기록하며 동부 컨퍼런스 5번 시드의 주인공이 되어 플레이오프 무대에 진출했다. 이는 8년 만의 플레이오프 진출이었으며 팀의 이름이 위저즈로 바뀐 이후 첫 플레이오프 진출이기도 했다. 아레나스에게도 생애 첫 플레이오프 진출이었기에 더욱 뜻 깊은 시즌이었다.

1라운드에서 만난 상대는 시카고 불스. 원정 2경기를 모두 내어준 워싱턴은 이후 홈2경기에서 모두 승리했고 시리즈 스코어가 2-2를 이룬 상황에서 5차전 승부에 돌입했다.

치열하게 전개된 경기는 종료 5초 가량이 남은 상황에서 110-110으로 동점을 이뤘고 마지막 공격권은 워싱턴이 가지고 있었다. 아레나스가 천천히 드리블을 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단숨에 커크 하인릭을 제치고 돌파를 시도했고, 헬프 디펜스를 시도하는 타이슨 챈들러를 앞에 두고 점퍼를 던졌다. 경기 종료와 함께 슛은 림을 갈랐고 112-110로 경기 종료. 워싱턴이 시리즈 스코어를 3-2로 뒤집는 순간이었다.

승기를 잡은 워싱턴은 여세를 몰아 이어진 6차전에서도 승리하며 시리즈 스코어 4-2로 단숨에 플레이오프 1라운드를 통과했다. 이후 2라운드에서 샤킬 오닐과 드웨인 웨이드가 이끄는 마이애미 히트를 만나 0-4로 스윕을 당하며 시즌을 마무리했지만, 이제는 어느 누구도 아레나스가 이끄는 워싱턴을 쉬운 상대로 생각할 수 없었다.

2005-06 시즌의 개막을 앞두고 워싱턴은 본격적으로 아레나스 중심의 팀을 만들기로 결정한다. 팀의 미래로 손꼽았던 콰미 브라운을 LA 레이커스로 보내며 아레나스의 사이드 킥으로 활약할 수 있는 캐론 버틀러를 영입한 것이다. 이로써 워싱턴은 아레나스 - 버틀러 - 제이미슨으로 이어지는 빅3 라인을 결성하는데 성공했다.

아레나스는 이에 화답하듯 80경기에 출장하며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낸다. 평균 29.3득점을 기록하며 득점 부문 리그 4위에 랭크되었고, 팀 내 최다인 6.1개의 어시스트와 2.0개의 스틸을 기록하며 워싱턴의 에이스로 확실히 자리매김 했다. 2년 연속 올스타 멤버와 All NBA 3rd 팀에 선발되며 전국구 스타로써의 발돋움에도 성공했다.

42승 40패의 성적으로 2년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한 워싱턴은 1라운드에서 르브론 제임스가 이끄는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를 상대하게 됐다. 아레나스와 제임스는 양 팀의 에이스로써 엄청난 대결을 펼쳤다. 아레나스는 시리즈 평균 34득점을 기록했고, 제임스는 평균 35득점을 기록하며 연일 화력 시위에 나섰다.

시리즈는 조금씩 클리블랜드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시리즈 스코어 2-3으로 플레이오프 탈락 위기에 놓인 워싱턴은 홈에서 6차전을 치렀다. 5차전에 이어 두 경기째 연속으로 연장까지 가는 혈전을 펼친 두 팀. 연장전 종료 15초를 남긴 상황에서 113-112로 워싱턴이 1점 차의 리드를 잡고 있었고, 파울을 얻은 아레나스는 2개의 자유투를 시도하려 하고 있었다.

그 때, 제임스가 아레나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만약 이번에 자유투를 놓치게 된다면 너희 팀은 지고 말거야.'

아레나스는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였으나 뭔가에 홀린 듯이 2개의 자유투를 모두 놓치고 말았다. 81%의 자유투 성공률을 자랑하던 아레나스가 2개의 자유투를 모두 놓치고 만 것이다. 이어진 클리블랜드의 공격에서 데이먼 존스가 베이스 라인 점퍼를 성공시켰고, 결국 113-114로 무릎을 꿇은 워싱턴은 플레이오프 1라운드의 벽을 넘지 못하고 시즌을 마무리해야 했다.

아레나스는 6차전이 끝난 뒤 곧바로 자유투 훈련을 시작했을 만큼 커다란 실망감에 사로 잡혔다. 하지만 전 세계 NBA 팬들의 뇌리에는 아레나스의 이름이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NBA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제임스와 정면으로 맞서며 결코 물러서지 않았던 사나이로써 말이다.


정상에서 입은 상처

2006-07 시즌은 그야말로 아레나스가 리그를 대표하는 스타플레이어로 자리 매김 하게 된 해였다. Agent Zero라는 멋진 닉네임과 함께 아레나스의 활약상은 연일 뜨거운 이슈로 언론의 주목을 끌었다.

2006년 12월 17일, 레이커스 원정 경기에서 코비 브라이언트의 마크를 뚫고서 60득점, 8리바운드, 8어시스트, 2스틸을 기록하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날 기록한 60득점은 워싱턴 프랜차이즈 역사상 단일 경기 최다 득점 신기록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12월 22일에는 피닉스 원정 경기에서 스티브 내쉬와 쇼다운을 펼치며 연장까지 가는 접전 끝에 54득점을 기록하며 피닉스를 침몰시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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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팬들에게 최고의 퍼포먼스로 기억되는 경기는 역시 2007년 1월 15일에 있었던 유타 재즈와의 경기였다. 경기 종료까지 11초가 남은 시점에서 111-111으로 동점을 이룬 양 팀. 인 바운드 패스를 받은 아레나스는 마지막 공격에 나섰으며 유타의 데론 윌리암스가 그 앞을 가로 막고 있었다. 한 차례 레그 스루 드리블을 통해 왼손으로 공을 옮겨 잡은 아레나스는 돌파를 시도할 듯이 모션을 취했고, 윌리암스는 재빨리 아레나스의 경로를 막아섰다. 하지만 아레나스는 더 이상 림을 향해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드리블을 멈춘 뒤 그대로 3점슛 라인 뒤에서 슛을 시도했다. 공이 림에 닿기도 전에 경기 종료 부저가 울렸고, 경기 종료 부저가 울리기도 전에 아레나스는 득점을 확신한 듯 두 팔을 들어 올리며 뒤돌아섰다. 잠시 뒤, 아레나스의 슛이 림을 가르며 114-111로 경기 종료. 그야말로 극적인 슈팅이었고, 더욱 극적인 퍼포먼스였다.

그러나 무서울 것이 없었던 아레나스와 워싱턴의 상승 곡선은 시즌 내내 지속되지는 못했다. 시즌이 막바지에 이른 2007년 4월 4일 샬럿 밥캣츠와의 경기에서 제럴드 월라스와 충돌을 하며 왼쪽 무릎이 뒤틀린 것이다. 이 부상으로 인해 아레나스는 시즌 아웃을 선언하게 된다. 드래프트에서 한 차례 아픔을 안겼던 월라스는 다시 한 번 아레나스에게 본의 아닌 상처를 주게 되었다.

워싱턴은 41승 41패를 기록하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지만 아레나스는 팀과 함께 할 수 없었다. 워싱턴은 2년 연속 클리블랜드와 1라운드에서 만나게 됐지만 아레나스가 없는 워싱턴은 제임스와 클리블랜드를 막기에 역부족이었다. 워싱턴은 힘없이 0-4로 스윕을 당하며 시즌을 마무리해야 했다.

지난 시즌의 아쉬움을 씻어 내기 위해 절치부심 맞이했던 2007-08 시즌. 워싱턴은 제이미슨의 꾸준한 활약과 날이 갈수록 성장하는 버틀러의 분전으로 43승 39패를 기록하며 4년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다. 하지만 거기에 아레나스의 모습은 없었다.

아레나스는 시즌 개막 이후 8경기 연속 선발 출장했으나 부상의 여파가 남은 탓인지 컨디션 난조를 보였고, 팀마저 3승 5패로 부진에 빠졌다. 결국 팀은 아레나스에게 휴식을 권유했고 아레나스는 부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며 결장을 이어갔다.

그렇게 시즌은 후반으로 접어들었다. 플레이오프 진출을 향한 경쟁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졌고, 1라운드 돌파를 위해 어떻게 서든 홈코트 어드밴티지를 얻으려 했던 워싱턴은 38승 36패를 기록하며 클리블랜드와 동부 컨퍼런스 4번 시드를 놓고 치열한 순위 싸움을 전개하고 있었다.

결국 워싱턴은 시즌 종료까지 8경기를 남긴 상황에서 아레나스의 복귀를 전격 결정했다. 홈코트 어드밴티지를 얻기 위해서는 가용 가능한 모든 자원을 총동원 시켜야 했고, 팀의 에이스였던 아레나스의 복귀는 필연적인 것으로 보였다. 이후 아레나스는 5경기에서 교체 멤버로 경기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부상에서 완벽하게 회복되지 않았기에 오랜 시간을 플레이할 수 없었고, 그나마 플레이 하는 동안에도 기복이 심한 모습을 보였다.

워싱턴은 아레나스가 출장한 5경기에서 3승 2패, 팀의 마지막 8경기에서 5승 3패를 기록하며 선전했지만 결국 같은 기간 동안 4승 4패를 기록한 클리블랜드에게 홈코트 어드밴티지를 빼앗기고 말았다.

다시금 시작된 플레이오프. 워싱턴과 클리블랜드는 3년 연속 1라운드에서 맞붙게 되었다. 아레나스는 1,2차전에서 교체 멤버로 경기에 나섰으나 부진한 모습을 보이는데 그쳤고 팀은 2연패를 당했다. 결국 아레나스는 3차전부터 과감히 선발 출장을 감행했다. 하지만 단 10분을 플레이하는데 그쳐야 했다. 결국 4차전에서 무리하게 30분이 넘는 플레잉 타임을 소화한 아레나스는 경기가 끝나고 그대로 시즌 아웃 되고 만다. 워싱턴은 3년 연속 클리블랜드에게 무릎 꿇으며 시리즈 스코어 2-4로 플레이오프 1라운드 돌파에 실패했다.


또 한 번의 좌절

부상으로 힘든 1년을 보낸 아레나스였지만 팬들의 관심과 사랑은 끊이지 않았다. 아레나스는 언론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며 팬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고, 인기 블로거로써의 명성도 높아져갔다.

그러나 소속팀 워싱턴의 상황은 그리 즐겁지 못했다. 2008-09 시즌 개막을 앞둔 워싱턴의 최고 고민거리는 주축 멤버들과의 재계약이었다. 아레나스와 앤투안 제이미슨이 동시에 FA 자격을 얻게 된 것이다. 캐론 버틀러와 함께 팀 전력의 50% 이상을 책임지던 그들이었지만 두 선수와 모두 재계약에 성공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특히 제이미슨은 FA 시장에서 높은 인기를 보였고, 워싱턴의 전력 누수는 불가피한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이 때 아레나스가 입을 열었다. 그는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제이미슨과의 재계약에 실패한다면 나도 팀을 떠날 것'이라며 동료의 잔류를 희망했다. 결국 2008년 6월 30일, 워싱턴은 제이미슨과 4년간 50m에 달하는 재계약에 합의할 수 있었다.

이제 모든 관심은 Opt-Out을 선언하며 비제한적 FA가 된 아레나스에게로 집중됐다. 그가 원한대로 제이미슨과의 재계약에 성공한 워싱턴은 곧이어 아레나스와의 협상에 돌입했다.

그리고 2008년 7월 13일, 워싱턴 팬들의 환호성을 불러일으킬 뉴스가 전해졌다. 아레나스가 워싱턴과의 재계약에 동의한 것이다. 게다가 스스로 자신의 연봉을 감축시키며 팀의 샐러리 유동성 확보에 이바지하기도 했다. 그는 6년간 127m에 육박하는 거대 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지만, '팀에게 16m을 돌려주겠다. 맥시멈 계약으로 팀의 계획에 걸림돌이 되고 싶지 않다'는 말과 함께 6년 111m의 계약에 최종 사인했다.

팬들의 기대는 날로 높아져갔다. 주축 멤버들과의 재계약도 순탄히 마무리했으니, 멤버들이 건강하게만 뛰어준다면 이번에야말로 클리블랜드와 제임스에게 복수를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팬들의 기다림은 생각보다 길어졌다. 아레나스는 100% 회복된 모습으로 코트에 서고 싶다며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2009년 3월 28일, 디트로이트와의 홈경기를 통해 드디어 코트로 돌아온 아레나스. 하지만 30분 가량을 플레이하며 25%의 야투율을 기록하는데 그쳤다. 잠시 숨을 고른 그는 2009년 4월 2일, 어느 새 숙적이 되어가고 있는 클리블랜드와의 경기에 다시 한 번 선발 출장 했다. 하지만 33분을 플레이하며 27%의 야투율, 11득점을 기록하는데 그쳤다. 그리고 그는 또 한 번의 시즌 아웃을 선언했다.

아레나스가 없는 워싱턴은 좌초하기 시작했다. 와중에 버틀러마저 크고 작은 부상들에 시달려야 했고, 닉 영과 같은 영건들의 성장 그래프는 구단의 기대에 턱없이 모자란 수준이었다. 결국 2008-09 시즌 워싱턴의 최종 성적은 19승 63패. 구단이 워싱턴에 자리 잡은 이후 역대 두 번째로 저조한 승률을 기록했다.


다시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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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의 여름, 워싱턴은 크고 작은 움직임들을 꾸준히 보였다. 우선 그들은 코칭스태프의 면면을 대폭 물갈이 했다. 에디 조던을 해임하고 플립 선더스를 새로운 헤드 코치로 임명했다. 곧이어 샘 카셀과 랜디 휘트먼 등을 어시스턴트 코치로 영입하며 새로운 워싱턴을 만들기 위한 의지를 보였다.

그리고 그들의 2009년 드래프트 1라운드 5번 지명권을 트레이드 시장에 내놓았다. 아레나스가 건강하게 복귀한다는 가정 아래, 팀이 정상에 서기 위해서는 유망주 신인이 필요하기 보다는 즉시 전력으로 활약할 수 있는 베테랑들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워싱턴은 그들의 5번 지명권과 이탄 토마스, 다리우스 송가일라, 페체로프를 패키지로 만들어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의 랜디 포이, 마이크 밀러를 영입하기로 결정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워싱턴의 손을 들어주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으나 드래프트 당일이 되자 이야기는 엄청난 반전을 맞이했다. 한 때 1번 픽의 주인공으로도 점쳐졌던 스페인의 신성 리키 루비오가 5번 지명권을 통해 미네소타에 안착한 것이다. 물론 그의 NBA 데뷔는 좀 더 오랜 기다림의 시간을 필요로 하게 되었지만, 결과론적인 관점에서의 비판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아레나스의 건강에 대한 의구심을 표하는 이들도 조금씩 생겨났다. 사실상 2년을 부상으로 고생해야 했던 아레나스이기에 과연 그가 완벽한 부활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계속됐고, 어느 덧 리그의 에이스 레벨로 성장한 버틀러와의 볼 배분 문제, 새로 영입한 포이 등과 팀의 궁합, 영의 지지부진한 성장 곡선 등 걱정거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아레나스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듯하다. 뜨거운 이슈를 끝없이 쏟아내던 블로그 관리에 할애하던 시간을 줄이고, 보다 진지하게 게임에 임하겠노라 이야기했다.

르브론 제임스, 드웨인 웨이드, 코비 브라이언트, 크리스 폴, 드와이트 하워드... 수많은 스타플레이어들이 리그를 들끓게 하고, 전국 방송을 통해 자신의 기량을 뽐내는 모습을 보며 매순간 복수의 칼날을 갈아왔다는 길버트 아레나스.

돌아온 'Agent Zero'의 열풍이 워싱턴을 넘어 전미는 물론 전 세계를 강타하게 될 것인지, 혹은 부상으로 사라져간 스타플레이어들처럼 아레나스 역시 뒷걸음질을 치게 될 것인지...

복귀를 눈앞에 둔 아레나스의 활약상은 단연 2009-10 시즌 최고의 관전 포인트 중 하나다.

길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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