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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 브라운 감독은 성공의 기쁨을 동료들과 나눌 줄 아는 사람이다. 클리블랜드에서 감독 경력을 시작한 지 4년 만에 처음으로 올스타전 감독으로 확정됐을 때도 브라운의 이같은 자세는 변함이 없었다.

“올스타전 감독으로 뽑힌 것은 전적으로 팀에게 주어진 상입니다. 선수들이 잘 해줘서 높은 승률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우리 선수들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이같은 영광을 누릴 수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선수들이 그렇게 잘 하게 해준 것이 브라운 본인이라는 것을 클리블랜드의 모든 선수들은 알고 있다. 팀 리더인 르브론 제임스는 브라운은 최고의 코치 중 한 명이며 올스타전 감독 뿐 아니라 올해의 코치상도 브라운이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브라운은 리그에서 선수들과의 관계를 가장 잘 유지하는 감독 중 한 명이다. 구단 자체 방송으로 매주 라이브 쇼를 진행할 정도로 매끄러운 화술과 경기에 많이 뛰지 못하는 가비지 타임 선수들의 열정까지 알아주는 자상함을 지니고 있다. 팀의 5번째 가드인 테런스 킨제이는 브라운의 세심함을 증언할 수 있는 선수다.

"지난 1월 포틀랜드 원정에서 선발 가드진이 일찍 파울트러블에 빠졌을 때 제가 감독님께 '감독님, 제게 기회를 주세요.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어요. 감독님은 그날 경기에는 저를 많이 쓰지 않으셨지만, 다음날 제가 연습하는 걸 눈여겨 보신 후 골든스테이트전에 저를 중용해주셨죠. 감독님께 정말 감사했습니다."

킨제이는 브라운이 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난조에 빠진 모리스 윌리암스를 대신해 11점을 올리며 승리에 큰 공헌을 했다.

선수들의 개인사까지 챙기는 브라운의 자상함은 리그 감독 중 세 번째로 젊은 나이와 짧은 감독 경력에도 불구하고 선수들에게 커다란 안정감을 주고 있다.

브라운의 이같은 친화력은 하루아침에 얻어진 것이 아니다. NBA는커녕 프로 선수 경험도 없는 브라운이 이 자리에 서기까지는 브라운 본인의 엄청난 노력뿐 아니라 훌륭한 스승들의 가르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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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클리블랜드가 속한 오하이오주에서 태어난 브라운은 아버지의 일 때문에 어린 시절을 해외에서 보냈다. 독일 뷔르츠부르크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브라운은 샌디에이고 대학으로 진학해 본격적으로 농구를 시작했다. 같은 해 포틀랜드 대학에 입학한 에릭 스포엘스트라 마이애미 감독과는 신입생 시절부터 라이벌이었다. 누가 많이 이겼을까?

“저희가 더 많이 이겼습니다. 저희가 이길 때마다 에릭이 굉장히 화를 내던 기억이 나네요.”

어느덧 졸업 학기를 맞게 된 브라운은 자신이 NBA에서 뛸 만한 재능이 없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농구에 대한 열정을 멈출 수는 없었기 때문에, 브라운은 행크 에건 감독의 사무실을 찾아 인턴 직원이라도 좋으니 자신이 NBA 팀에서 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물었다. 제자의 열정에 감동한 에건은 자신이 소개해줄 수 있는 NBA 팀들을 이야기해주며 어느 팀에 가고 싶냐고 물었다. 바로 그때 브라운의 눈에 띈 것이 에건의 책상 위에 놓여있던 농구 잡지였다. 표지에는 샌디에이고 대학 선배이며 NBA 선수생활을 하지 않고서도 당시 덴버 너게츠의 단장을 맡고 있던 버니 비커스태프의 사진이 있었다. 비커스태프는 브라운의 롤 모델이었던 것이다. 브라운은 잡지를 가리키며 ‘이 팀으로 보내달라’고 말했다. 브라운의 사회 경력이 시작한 계기가 된 그 잡지를 브라운은 아직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에건의 소개로 덴버 너게츠의 무급 인턴 자리를 얻게 된 브라운은 부모님이 주신 약간의 용돈만 지닌 채 덴버로 향했다. 졸업하려면 아직 한 학기가 남아있었지만 브라운은 개의치 않았다. 처음으로 경험한 프로농구의 세계가 꿈만 같았다. 브라운은 당시 덴버의 홈구장이었던 맥니콜스 아레나에서 살다시피 하며 무시무시한 속도로 구단 업무를 배워나갔다.

브라운의 성실한 업무태도와 농구에 대한 진지한 열정은 직원들 사이에서 금방 화제가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커스태프 단장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비커스태프는 농구에 미친 어린 후배에게 뭔가를 해주고 싶었다. 비커스태프는 대학 마지막 학기를 수료하기 위해 샌디에이고로 돌아가려던 브라운에게 졸업 후 덴버 구단의 정규직 비디오 분석가 자리를 제의했고, 무급임에도 불구하고 성실히 일한 보답으로 자비를 털어 1,500달러의 수표를 끊어주기도 했다. 경영학사 학위를 받고 졸업한 뒤 돌아온 브라운은 연봉 15,000달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브라운의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조건이었다.

“저는 스니커즈와 트레이닝복을 살 수 있을 만큼의 용돈만 벌 수 있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브라운이 당시의 감격을 떠올리며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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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이 처음으로 맡은 업무는 전국 각지의 농구 캠프와 대학을 찾아다니며 유망주들의 경기 모습을 촬영하는 것이었다. 브라운의 열정은 그가 맡은 ‘촬영’ 업무를 금세 ‘촬영 및 분석’ 업무로 바꿔버렸다. 어린 선수들의 플레이 하나하나를 비디오에 담으면서 브라운 나름의 방식으로 농구를 보는 눈을 갖게 된 것이다. 브라운이 제출하는 비디오에는 어느 샌가 브라운 자신이 작성한 스카우팅 리포트가 따라붙게 되었다. 브라운의 스카우팅 리포트가 쓸 만하다고 생각한 댄 이셀 덴버 감독은 브라운을 아예 정식으로 스카우트에 임명했다. 브라운은 덴버에서 5년간 스카우트로 재직하며 경기를 보는 안목을 키워나갔다. 아이러니하게도 전통적인 런앤건 팀이었던 덴버에서 브라운이 중점적으로 공부한 부분은 수비였다.

덴버는 브라운에게 직장 뿐 아니라 가정도 선물해줬다. 브라운은 덴버 아가씨인 카롤린과 결혼해서 두 아들을 뒀다. 브라운이 팀을 옮길 때마다 함께 이사를 다니는 이들 가족은 집에서 리틀 리그 운동 경기를 보며 시간을 보내곤 한다.

1997년 비커스태프가 워싱턴 감독으로 부임하며 덴버를 떠나게 되었을 때, 비커스태프는 ‘자기 사람’인 브라운을 떠올렸다. 비커스태프에게서 워싱턴 코치직을 제의받은 브라운에게 불만이 있을 리가 없었다. 브라운은 워싱턴에서 2년간 첫 코치직을 훌륭히 수행해내며 리그에서도 주목받는 젊은 인재로 성장했다.

1999년 워싱턴이 크리스 웨버와 미치 리치몬드를 트레이드하고 비커스태프를 해임하자, 브라운 역시 새로운 자리를 찾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 때마침 1998~1999시즌 우승팀인 샌안토니오 스퍼스의 그렉 포포비치 감독이 브라운에게 코치직을 제의했다. 포포비치는 브라운의 열정과 성실함, 그리고 수비 코칭 능력에 주목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실함을 중시하는 포포비치의 지도철학은 브라운과 꼭 맞았고, 브라운은 샌안토니오에서 본격적으로 코치 경력을 쌓아나가기 시작했다.

당시 샌안토니오에는 데이비드 로빈슨과 팀 던컨이라는 슈퍼스타가 있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한 바람직한 리더십이 팀을 지탱하고 있었다. 65년생인 로빈슨은 70년생인 브라운보다 다섯 살이나 연상이었다. 브라운은 로빈슨이 2003년 우승 반지를 끼고 던컨의 존경과 함께 은퇴하는 모습을 보며 프랜차이즈 스타나 슈퍼스타를 다루는 법, 그리고 그들을 상대로 어디까지 권위를 행사해야 하는지 등을 배워나갔다. 선수들 중에는 스티브 커 같이 팀 운영에 관심있는 노장 선수들도 있었기 때문에 이들과 자주 의견을 교환할 수 있었다. 훗날 클리블랜드에서 단장과 감독으로 다시 만나게 되는 대니 페리와도 이때 처음 만났다. 서머 리그에서는 샌안토니오 서머리그 팀의 감독을 맡으며 처음으로 감독 경험도 쌓았다.

2003년 샌안토니오가 LA 레이커스의 연속 우승을 끝내며 4년만에 우승을 차지한 직후, 브라운은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릭 칼라일 감독에게서 코치직을 제의받았다. 수비에 대한 전권을 위임한다는 조건이었다. 브라운은 제의를 받아들였고, 인디애나에서 리그 최고 성적인 61승과 동부컨퍼런스 파이널 진출에 공헌했다. 브라운이 전권을 위임받은 팀 수비에서 인디애나는 경기당 실점율 85.6점으로 리그에서 세 번째로 적은 점수를 허용했다.

브라운은 샌안토니오와 인디애나에서 강팀을 지도하는 법을 배웠다. 브라운이 코치로 재직하는 동안 브라운의 팀들은 평균 62.9%의 승률을 기록했고 4번의 디비전 우승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가 보고 배운 포포비치와 칼라일은 모두 올해의 감독상을 받은 명장이었다. 브라운은 최고의 팀에서 최고의 스승들에게 ‘이기는 법’을 배운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이기는 노하우’가 브라운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줬다.

2005년 초여름, 브라운은 클리블랜드로 가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신임 구단주였던 댄 길버트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 해 3월에 캐벌리어스를 인수한 길버트는 ‘미래의 아이콘’ 르브론 제임스가 속해있던 캐벌리어스를 대대적인 팀 개편을 통해 리그 엘리트 팀으로 만들려는 계획을 지니고 있었고, 젊지만 경험이 풍부한 코칭스태프를 찾고 있었다. 35세의 브라운은 그런 길버트의 조건에 딱 맞는 상대였다. 브라운과 대화를 나눠본 길버트는 브라운의 성실한 태도와 직업의식, 그리고 코치로서의 식견을 금방 알아보았다. 며칠 후인 6월 2일, 길버트는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17대 감독으로 브라운을 선임했음을 공식 발표했다. 그리고 27일에는 샌안토니오에서 브라운과 한솥밥을 먹었던 대니 페리를 단장으로 영입했다. 클리블랜드의 ‘페리-브라운 시대’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덴버에서 무급 인턴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13년, 브라운이 언제나 꿈꿔왔던 자리에 서게 된 것이다.

클리블랜드는 2003년 르브론이 입단한 후 전력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르브론의 입단과 함께 클리블랜드 감독을 맡았던 폴 사일러스는 채 2년을 못 버티고 팀을 떠났고 감독대행으로 뒤를 이은 브랜든 말론도 오래 버티지 못했다. 르브론과 함께 클리블랜드의 대들보가 될 것 같았던 카를로스 부저는 석연치 않은 과정을 거쳐 유타로 떠나버렸고, 대신 도녤 마셜과 래리 휴즈를 영입하는 등 팀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이런 상황에서 감독으로 부임한 브라운은 ‘우리는 모두 한 가족’이라 선언하고, ‘팀의 화합’을 팀 운영 원칙으로 정했다. NBA 팀 정도 되면 선수들의 재능에는 큰 차이가 없지만 이 차이를 크게 만드는 것은 팀이 얼마나 화합하고 있는지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브라운은 팀 구성원 모두가 자기 위치에서 최고의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도록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에게 최대한 권한을 위임했다. 팀의 중심인 르브론에게는 주장을 맡기며 다른 동료들을 이끌 것을 주문했다. 또한 벤치의 역할과 함께 수비를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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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 효과’는 금세 나타났다. 선수들은 르브론과 터줏대감인 지드루나스 일가우스카스를 중심으로 응집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휴즈같이 끝내 팀에 녹아들지 못한 선수도 있었지만 극소수에 불과했다. 모래알 같던 팀워크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선수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려 했으며, 특히 동료가 놓친 공격수를 대신 막아주는 방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브라운의 감독 첫 해 클리블랜드는 르브론 입단 이후 첫 50승과 첫 플레이오프 진출을 달성했다. 클리블랜드는 플레이오프 2라운드에서 강팀 디트로이트를 맞아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탈락했지만, 브라운의 클리블랜드가 보여준 강함은 그동안 감독 경력이 없는 브라운이 팀을 단기간에 강팀으로 만들지는 못할 것이라 말해온 비관주의자들의 입을 다물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듬해 브라운의 농구는 완전히 꽃을 피웠다. 클리블랜드는 경기당 실점율을 지난 시즌에 비해 3점이나 끌어내리며 리그 5위의 수비팀이 되었고, 2년 연속 50승을 거두며 동부 컨퍼런스 2위를 차지했다. 플레이오프에서 워싱턴과 뉴저지를 차례로 물리친 클리블랜드는 1991~1992시즌 이후 처음으로 컨퍼런스 파이널에 진출했다. 상대는 숙적 디트로이트. 클리블랜드는 르브론이 5차전에 믿을 수 없는 대활약을 펼치며 시리즈를 승리, 프랜차이즈 사상 처음으로 파이널에 진출했다. 비록 옛 스승 포포비치의 팀인 샌안토니오를 만나 압도적인 전력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시리즈 전적 4-0으로 완패했지만 부임 2년 만에 플레이오프에도 오르지 못하던 팀을 파이널에 올려놓은 브라운 감독의 지도력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르브론에 의존하는 공격전술의 부재를 지적하는 의견도 있었지만, 브라운은 자신의 신념을 꿋꿋하게 밀고나갔다.

2007~2008시즌은 브라운에게 새로운 도전이 닥친 한해였다. 시즌이 시작하기도 전에 계약 문제로 사샤 파블로비치와 앤더슨 바레장을 잃은 클리블랜드는 시즌 중 블록버스터 트레이드를 단행, 주전 5명 중 3명을 바꾼 것이다. 처음으로 한 팀이 된 선수들은 서로에 대해 완전히 알지 못했고, 특히 팀워크를 기반으로 하는 브라운식 수비에 적응하지 못했다. 브라운이 지난 2년간 쌓아온 것들 중 적잖은 부분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하지만 브라운은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하며 서서히 팀을 진정시켜갔고, 그 해 챔피언을 차지한 보스턴 셀틱스를 플레이오프 탈락 일보직전까지 몰아넣으며 가능성을 보였다. 브라운의 이러한 지도력은 길버트 구단주와 페리 단장이 지난 시즌 중반 브라운과 연장 계약을 체결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브라운의 코칭 철학은 간단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팀의 화합이고 화합은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며 팀 수비를 통해 나타난다는 것이다. 프리 시즌 캠프를 시작하며 브라운이 라커룸 칠판에 크게 적어놓은 말은 ‘팀워크=신뢰’였다.

신뢰는 대화를 통해 쌓여간다. 브라운은 선수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며 문제 해결 방법을 깨닫길 바랐고 프리 시즌 캠프에서도 자신의 말은 최대한 아끼며 선수들의 대화를 유도했다. 그 결과 클리블랜드는 벤치와 라커룸에서 가장 시끄러운 구단이 됐다. 선수들은 경기가 끝난 후에도 라커룸에서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며, 쉬는 날에는 식당과 영화관 등을 떼를 지어 돌아다닌다. 커다란 사내들이 시내를 함께 걷는 모습은 이제 클리블랜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 됐다.

브라운은 아예 팀 운영의 상당 부분을 선수들에게 위임하기도 한다. 클리블랜드의 특징은 감독과 일반 선수 사이에 ‘선수 위원회’라 불리는 대표조직이 있다는 것이다. 브라운은 르브론, 일가우스카스, 벤 월러스, 모리스 윌리암스로 이루어진 이 위원회를 통해 팀 운영 방침을 통보하거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받고 있다. 위원회는 일반 선수들의 의견을 수렴해 선수에 대한 팀내 자체 징계 수위나 원정 숙소 결정, 훈련 일정 등을 건의하고 이런 건의들은 대부분 받아들여진다. 위원회는 때에 따라서는 경기 중에 스스로 행동 지침을 정하기도 한다. 지난 12월 토론토와의 홈경기에서 전반에 난조를 보이자, 브라운은 하프타임 동안 선수들을 라커룸에 남겨둔 채 코칭스태프와 함께 자리를 떴다. 선수들은 비디오를 보며 토의한 끝에 수비 로테이션에서 문제를 발견했고, 선수들이 제안해 받아들여진 새로운 수비 로테이션은 3쿼터 초반 6분 동안 토론토에게 단 4점만 내줬다.

브라운의 권한 위임은 휘하 코치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클리블랜드의 코칭스태프에는 브라운의 대학 시절 은사인 행크 에건을 비롯하여 경험 있는 노장들이 많다. 젊은 축에 드는 코치들도 브라운과 동년배다. 브라운은 이들 코치들에게 각자 위치에서 최대한 넓은 재량권을 주었다. 코치들에게 전권을 부여하고 책임은 자신이 지는 운영 방식은 칼라일에게서 배운 것이다. 클리블랜드 코치들은 이러한 운영 방식 덕분에 자신들의 경험과 창의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다. 그동안 부족함을 지적받던 공격 전술도 과거 래리 브라운 감독 밑에서 공격 전술을 전담했던 존 쿠에스터에게 권권을 위임한 지 3년 만에 큰 결실을 보고 있다.

하지만 브라운이 선수와 코치들에게 모든 것을 맡겨둔 채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순간에는 스스로 판단해 결단을 내리기도 한다. 지난 크리스마스에 펼쳐진 워싱턴과의 홈경기가 좋은 예다.

브라운은 경기 종료 37초를 남기고 한 점을 뒤진 상황에서 공격력이 좋은 일가우스카스 대신 바레장을 넣었다. 모든 사람들이 의아해했지만, 바로 다음 공격에서 딜론테 웨스트가 3점슛을 실패하자 바레장이 빠른 풋워크를 이용해 공격리바운드를 낚아챈 후 파울을 얻었다. 발이 느린 일가우스카스였다면 워싱턴의 박스아웃을 제치지 못했을 것이다. 브라운은 곧바로 대니얼 깁슨을 빼고 월러스를 투입했다. 바레장의 자유투로 역전한 다음 맞은 워싱턴의 공격에서, 월러스는 마지막 공격을 맡은 캐런 버틀러에게 적절히 더블팀을 붙으며 공격자 파울을 유도해내 사실상 경기를 끝내버렸다.

브라운은 이런 적재적소의 용병술을 이번 시즌에만 여러 번 보여줬다. 브라운이 단지 슈퍼스타에 의지하는 감독이 아니며 스스로도 굉장히 우수한 코치라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다.

NBA 선수 경험도 없이 리그의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해서 리그 엘리트 팀의 감독이 된 브라운을 동경하는 젊은 코치 지망생들이 늘고 있다. 17년 전 브라운에게 비커스태프가 그랬던 것처럼 이제는 브라운이 그들의 롤 모델이 되고 있는 것이다. 브라운은 이 모든 것들을 훌륭한 스승 덕분으로 돌린다.

“저는 운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훌륭한 감독 밑에서 많은 것을 배웠죠. 칼라일에게서는 평정심과 권한 위임을, 포포비치에게서는 공/수 전술과 슈퍼스타를 지도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제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은 비커스태프입니다. 그는 아무 것도 증명할 수 없었던 시절 제 열정을 믿어줬고, 그 믿음을 끝까지 지켜줬죠. 비커스태프는 제게 이 업계에서는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는 가르쳐 줬고, 그 가르침이 저를 이 자리까지 이끌었습니다.”

아직 40도 되지 않은 이 젊은 감독의 능력은 이미 수많은 전문가들에 의해 인정받고 있다. 이제는 브라운의 진가를 팬들에게도 인정받을 차례다. 올스타전 감독을 맡은 이번 시즌은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브라운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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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브론과 함께 급부상하고 있는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고, 그동안 이 구단을 거쳐간 수퍼스타들로 Cavs All-Time Team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구단은 1970년에 신생팀으로서 창단되었습니다. 연고지는 29년 동안 한 번도 안 바뀌었지요. 첫 해에는 15승 67패를 기록함으로써 리그 최하위였고, 덕분에 당시 대학최고선수였던 '오스틴 카'를 드래프트할 수 있었습니다. 항상 성적이 하위권에서 맴돌았기에 거의 매년 대학 최고의 선수들을 영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1975-76 시즌에는 49승을 올리면서 구단 역사상 최초로 디비젼 타이틀을 따냅니다. 그 이후로는 다시 내리막 길이었죠. 80년대 중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다시 한 번 중흥의 길을 터보려 했던 이 팀의 발목을 매번 잡은 것은 마이클 조던의 불스였습니다. 그리고 20년후, 캐벌리어스는 르브론 제임스를 중심으로 구단 역사상 세번째의 중흥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캐벌리어스는 3명의 '명예의 전당' 선수들을 배출했습니다. 네이트 써몬드, 웨인 엠브리, 레니 윌킨스가 그들입니다. 하지만 이 선수들의 전성기는 클리블랜드 소속 시절이 아니었기에, 이 구단이 이 세 명의 인물들을 배출했다고 말하는 것은 말에 좀 어폐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캐벌리어스 소속으로 뛴 선수들 중 6명의 져지넘버가 영구결번 됐습니다 - 빙고 스미스 (7), 래리 낸스 (22), 마크 프라이스 (25), 오스틴 카 (34), 네이트 써몬드 (42), 브랫 도허티 (43). 네이트 써몬드는 그의 이름값 때문에 영구결번이 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말년에 두 시즌 벤치멤버로 뛰면서 팀에 그리 공헌한 것은 거의 없었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르브론 제임스가 별 이상없이 지금의 실력을 향후 4~5년간만 지속해 준다면, 명실공히 구단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자리매김 될 것입니다.

지금부터, 현역선수들을 제외한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All-Time Team을 구성해 보겠습니다.


Starting Five

센터 - 브랫 도허티(Brad Daugher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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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역대 캐벌리어스 선수들 전체를 대상으로 투표해도 별다른 이견없이 뽑힐만한 선수라 생각됩니다. 브랫 도허티는 1965년생이고, 키는 213cm입니다.

1986년 드래프트에서 전체순위 1번으로 영입됐습니다. 이 드래프트는 2번 픽으로 셀틱스에 의해 드래프트가 되자마자 사망한 '렌 바이어스' (사진 오른쪽에서 두번째)로 인해 더 유명해진 드래프트였죠. 이 드래프트에서 '론 하퍼'도 8번픽으로 뽑혀서 캐벌리어스 유니폼을 입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댈러스와의 트레이드로 인해 '마크 프라이스'까지 낚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존 “Hot Rod” 윌리암스'라는 뛰어난 USBL출신 파워포워드까지 영입한 캐벌리어스는 아마도 NBA 역사상 드래프트 당일날, 유능한 선수들을 한꺼번에 가장 많이 영입한 팀일 것입니다. 프라이스를 제외한 이들 모두는 86-87 All-Rookie 팀에도 이름을 올렸습니다.

마이클 조던과 함께 대학생활을 하며 딘 스미스 감독으로부터 철저한 기본기를 전수받은 도허티의 플레이는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실속있었고 효율적이었습니다. 현재의 팀 던컨과 아주 비슷한 스타일의 농구를 했었지요. 팀 던컨이 조금 더 몸이 크고 느려서 센터를 봐야만 했다면 영락없는 도허티입니다. 물론 수비력과 리더쉽에 있어서는 던컨이 훨씬 더 뛰어나지만요. 도허티는 올스타게임에 다섯번 출전하며 (88, 89, 91, 92, 93) 8시즌을 캐벌리어스의 일원으로 뛰었습니다. 커리어 평균은 19.0점, 9.5리바운드, 3.7어시스트입니다. 센터로서는 상당히 높은 어시스트 수치가 눈에 띄지요?

도허티는 1993-94 시즌을 끝으로 28세의 젊은 나이에 농구인생을 접어야만 했습니다. 고질적인 허리 디스크때문이었지요. 도허티가 건강했더라면 90년대 4대센터들의 각축전에도 뛰어들만한 실력의 선수였습니다. 현재는 기독교인으로서 수많은 사회봉사 일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파워포워드 - 존 '핫 로드' 윌리엄스(John "Hot Rod" Willia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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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Hot Rod” 윌리암스는 1962년생으로 신장 211cm의 전형적인 수비형 파워포워드였습니다. 1985-86년 시즌에 USBL에서 뛰었던 숨은 진주를 캐벌리어스가 건져낸 거였죠. 이 선수의 수비력과 블라킹 능력이 워낙 뛰어났기에, 상대적으로 이 부분들이 약했던 도허티를 드래프트하는데 있어서 별 고민을 하지 않았었다고 전해집니다. 1988-89 시즌에는 16.8점, 8.1리바운드, 2.1블락샷을 기록하며 식스맨으로서 맹활약하기도 했습니다.

존 윌리암스라는 이름이 워낙 흔한 이름이라서 그의 어렸을 적 별명인 "Hot Rod"를 미들네임처럼 사용했습니다. 당시에 해설자들도 그를 '핫 로드 윌리암스'라고 했지 '존 윌리암스'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Hot Rod는 어렸을때 윌리암스가 집안에서 자동차의 엔진소리를 내며 집안을 가로질러 뛰어다녔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입니다. 엔진이 밖으로 드러나서 엔진소리가 유난히 크게 나는 차를 가리켜 미국에선 Hot Rod라고 하거든요.

윌리암스는 9시즌을 캐벌리어스 유니폼을 입고 뛰었으며, 그의 1,200 블락샷과 20,802분의 출장시간, 그리고 1,620개의 공격리바운드는 아직도 프랜차이즈 올타임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윌리암스의 40분 대비 커리어 평균은 14.9점, 9.1리바운드, 2.4어시스트, 2.2블락샷입니다.


스몰포워드 - Larry Nance(래리 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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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닉스 선즈에서 프로생활을 시작한 낸스는 1988년부터 1994년까지 캐벌리어스의 일원으로 뛰었습니다. 1959년생이며 신장 208cm인 낸스는1981년 드래프트에서 전체순위 20번으로 드래프트 되었습니다.

올스타 게임에 3번(85, 89, 93) 출전했고, 1984년 슬램덩크 콘테스트에서는 줄리어스 어빙을 결승에서 누르고 NBA 첫 슬램덩크 우승자가 됐지요. 대학 졸업시의 서전트점프가 102cm였던 낸스는, 프로 초창기에는 주로 선즈의 칼 매이시의 앨리우프 패스만 받아먹는 단조로운 공격패턴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986-87 시즌에는 22.5득점을 기록하며, 더 이상 덩크만이 아닌 미드레인지 점퍼와 다양한 공격루트를 장착했음을 과시하기도 했습니다. 낸스는 또한 스타팅 멤버로 뛴 11시즌동안 매시즌 평균이 최소 16득점에 8리바운드로써 ‘꾸준함’에 있어서도 유명했던 선수였습니다. 1989년과 1992년, 93년에는 All-Defensive Team에도 뽑혔었죠.

1988년에 있었던 피닉스와 클리블랜드 (케빈 존슨, 댄 말리)의 트레이드로 인해 클리블랜드에 새 둥지를 튼 낸스는 젊은 피의 수혈로 점점 강해지던 캐브스를 당장에 파이널 컨텐더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허나, 두 가지 장벽이 도사리고 있었으니, 같은 컨퍼런스에 조던의 불스가 있었다는 점과, 이때부터 그의 고질적인 허리부상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는 점이었습니다.

3번부터 5번까지의 포지션을 모두 소화할 수 있었던 낸스의 커리어 평균은 17.1점, 8.0리바운드, 2.6어시스트, 2.2블락샷입니다.


슈팅가드 - 오스틴 카(Austin Car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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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틴 카는 클리블랜드가 창단 첫해에 리그의 쓴 맛을 본 덕분(?)에 다음 시즌인 1971년의 드래프트에서 전체순위 1번으로 뽑혔던 당시 대학 최고의 득점기계이자 대학 최우수선수상을 받은 선수였습니다. 1948년생이며 193cm였던 이 슈팅가드는 노틀댐 대학시절 34.5점이란 대학 커리어 평균을 해내 세상을 놀라게 했었지요. '"피스톨" 피트 마라비치'와 비견될 만한 득점기계였습니다. 코트 위의 어떠한 위치나 각도에서도 터지는 그의 슈팅레인지는 가공할 무기였습니다.

하지만 입단 첫 시즌부터 입은 발과 다리부상의 어두운 그림자는 커리어 내내 그를 괴롭혔고, 결국 그는 대학때의 명성에 걸맞지 않는 수준으로 농구인생을 마쳐야만 했습니다. 1973-74 시즌에는 21.9점, 3.6리바운드, 3.8어시스트에 86%의 자유투 성공률을 보이며 잠시나마 그가 어떠한 능력의 소유자인지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잠깐, 다음 시즌에 곧바로 무릎부상을 입으며 다시 힘든 커리어를 보내게 됩니다.

오스틴 카는 캐벌리어스의 일원으로 뛴 9시즌동안 16.2 평균득점을 기록했습니다. 계속되는 부상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도전하던 그의 모습은 많은 젊은 농구선수들에게 귀감이 되었고, 그래서 구단은 그의 져지넘버를 영구결번시켜 주었습니다.


포인트가드 - 마크 프라이스(Mark Pr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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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긴 것 부터가 남달리 영민하게 생긴 마크 프라이스는 "생긴대로" 플레이했던 뛰어난 포인트가드였습니다. 1964년생이며 농구명문 조지아 공대를 졸업한 프라이스는 182cm라는 작은 신장에도 불구하고 코트를 휘젓고 다니던 카리스마 넘치는 민완가드였죠. 너무 작고, 너무 느리고, 너무 정석적인 플레이만 한다며 그를 드래프트 2라운드까지 끌어내렸던 스카우터들의 안목을 비웃기라도 하듯, 프라이스는 보란 듯이 12시즌 동안 NBA 코트의 야전사령관 역활을 멋지게 해냈습니다.

이 글을 보시는 분들이 기억하실지 모르겠으나, 마크 프라이스의 플레이를 보다 보면 저의 고교 1년 선배셨던 유재학 감독님의 전성기적 플레이가 떠오르곤 합니다. 허재나 강동희같은 특출난 기술이 없었어도 언제 패스하고 언제 외곽슛을 날려야 할 지를 누구보다 빠르게 판단할 수 있었던 분이었죠. 낮고 불규칙한 드리블, 경기를 읽는 영리한 두뇌, 그리고 단신임에도 인사이드를 향해 치고 들어가며 완벽하게 빼주는 킥아웃 패스나 직접 시도하는 반박자 빠른 레이업 등이 그 분의 전매특허였습니다. 프라이스도 그러한 스타일의 농구를 했습니다. 키는 작았지만 드리블을 치다가 순간적으로 점프하며 높은 타점에서 터뜨리는 풀업점퍼는 예술이었죠. 그리고 강한 손목힘에서 비롯된 3점라인 훨씬 뒤에서의 안정된 롱슛이나 빠른 드리블과 함께 변칙적인 타이밍에서 발생되는 킬패스는 역대 최고수준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자유투 성공률도 커리어 평균이 90.4%에 달했고 3점슛 성공률도 40%를 상회했습니다. 1988-89 시즌에는 '야투성공률이 50%를 넘고, 3점슛이 40%를 넘으며, 자유투까지 90%의 성공률을 보인 180 클럽' (버드, 노빗츠키, 내쉬, 레지 밀러 등)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4번의 올스타 게임에 출전했던 프라이스는 1992-93 시즌에는 All-NBA First Team에 선출되기도 했지요. 프라이스의 40분 대비 커리어 평균은 20.4점, 9.0어시스트, 1.6스틸입니다.

1994년에는 세계농구선수권에서 샤킬 오닐, 숀 캠프, 레지 밀러등의 공격을 이끌어내며 미국에 금메달을 안기는데 있어 큰 공헌을 했던 주전 포인트가드 마크 프라이스. 그의 캐벌리어스 All-Time Team 선정에는 이견이 없을 듯 합니다.


벤치 멤버들

센터 겸 파워포워드 - 숀 켐프(Shawn Ke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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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다른 프로필이 필요치 않은 수퍼스타 숀 캠프의 클리블랜드에서의 3시즌은 상당히 화려했습니다. 1997년부터 2000년까지 캐벌리어스의 일원으로 활약하며 18~20점에 9~10리바운드를 기록해 줬지요. 1998-99 시즌에는 자신의 커리어 하이인 20.5점을 득점했습니다.

1998년에는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올스타 게임에 스타팅 멤버로 '선발출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클리블랜드에 온 후에 시작된 체중조절의 문제는 그의 커리어를 단축시키는 주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슈팅가드 겸 포인트가드 - 월드 B.프리(World B. F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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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시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원래의 이름은 Lloyd Free였는데, 나중에 커리어가 쌓임에 따라 자기는 이 세상을 품는 대인이 되겠다고 선언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World B. Free로 개명한 선수입니다 (가운데 B는 아무 의미가 없답니다.^^;)) 월드 비 프리는 1975년부터 1988년까지 활약했는데, 신장은 186cm였지만 44인치의 점프력을 이용해 가공할 덩크를 많이 보여줬던 선수입니다.

몸은 뚱뚱한(?)편으로 둔해보이기까지 했는데도 몸놀림은 무척 민첩했습니다. 79년과 80년에는 조지 거빈과 득점왕을 다툴 정도로 득점력도 뛰어났습니다. 커리어 평균은 20.3점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루키시즌과 말년 두시즌 동안에 많이 까먹은 수치고, 나머지 10시즌 동안에는 대체적으로 23점에서 30점 사이를 득점해줬죠. 클리블랜드에서는 82년부터 86년까지 뛰며 평균 23점을 득점했던 뛰어난 스코러였습니다.


스몰포워드 겸 슈팅가드 - 론 하퍼(Ron Har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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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시카고 불스에서 뛰던 선수로만 기억하실 분들이 계실텐데요.... 론 하퍼는 1985년에 입단할 때부터 '조던의 라이벌', '오렌지 조던'같은 수식어가 따라다닐 정도로 조던과 여러면에서 비슷한 선수였습니다.

훌륭한 점프력을 바탕으로 한 그의 올라운드 공격력은 클리블랜드에서의 루키시즌에 이미 평균 22.9점이라는 수치로 증명이 되었습니다. 클리블랜드에서의 3시즌을 보낸 뒤에 LA 클리퍼스에서 맹활약을 했던 하퍼. 그를 멈춘 것은 무릎부상이었습니다. 그 후, 레이커스와 불스에서 롤플레이어로 뛰며 우승반지를 5개나 챙겼지요.

무릎부상을 당하기 전인 클리블랜드와 LA 에서의 8시즌 동안엔 꾸준히 18점에서 23점 사이를 득점해주며 리바운드와 어시스트도 5~6개씩 해주던 올라운더였습니다.

이 외에도 로이 힌슨, 키이쓰 리, 타이론 힐, 마이크 밋첼, 빙고 스미스, 필 허바드, 테럴 브랜든과 같은 많은 좋은 선수들이 있었지만, 위에 언급된 선수들만큼 긴 시간동안 꾸준한 활약을 보이지는 못했다고 판단되어 All-Time Team에서는 제외시켰습니다. 이제 르브론을 중심으로 클리블랜드에 새 태양이 떠오를 것을 기대하며 여기서 글을 줄일까 합니다.


설 연휴, 의미있게 잘 보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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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COLUMNS/일반 뉴스 2009. 1. 11. 15:21

빅게임 리뷰: 보스턴@클리블랜드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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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가 1월 9일(이하 현지시각) 이번 시즌 최고 빅매치중 하나였던 보스턴과의 홈경기에서 완승을 거두며 동부 컨퍼런스 1위 자리를 굳게 지켰다. 보스턴을 1.5게임 뒤진 동부 3위로 밀어낸 클리블랜드는 홈경기 연승 횟수를 19로 늘렸다. 4쿼터 이전에 승부가 결정된 대승이 다수 포함되어있는 이 19경기중 최저 점수차는 지난 크리스마스 워싱턴전의 4점인데, 홈에서 최소 4점차 이상으로 19경기를 연속해서 이긴 것은 1966~67년 필리 이후로 처음이다.

이번 시즌 클리블랜드가 경기를 끝내면 보통은 선수들이 샤워를 마친 후 라커룸에 모여앉아 식사나 영화 약속 등을 잡으며 잡담을 나눴다. 하지만 7일 샬럿전과의 홈경기가 끝난 다음 클리블랜드 라커룸에는 마치 경기 시작 직전같은 긴장감이 감돌았다.선수들은 라커룸에 걸린 대형 평면TV를 통해 보스턴과 휴스턴의 경기 4쿼터를 시청하고 있었다. 굳은 표정으로 경기를 지켜보는 선수들 사이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간간이 보스턴의 경기력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는 말이 오가는 정도였다. 라커룸에서 긴장감이 없던 사람은 아버지 발치에서 글씨쓰기 연습을 하고 있던 르브론 주니어 뿐이었다. 클리블랜드 선수들은 이미 한 달 전부터 달력의 9일 부분에 동그라미를 치고 이 경기를 준비해왔다.

클리블랜드 선수들이 9일 경기에 이렇게 집중하고 있었던 것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먼저 동부 컨퍼런스에서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수 있는 팀들, 특히 1라운드 홈코트 어드벤티지를 받을 수 있는 팀들의 홈경기 승률이 굉장히 좋다. 8일까지 동부 1~5위팀들의 홈경기 성적은 클리블랜드 18-0, 보스턴 18-2, 올랜도 15-3, 애틀 15-3, 디트 12-5로, 이들의 홈경기 평균 승률은 무려 85%에 달했다. 서부 상위시드 팀들에 비해 크게 높은 수치다. 따라서 동부 플옵 컨텐더 팀들에게는 매 라운드 홈코트 어드벤티지가 굉장히 중요해졌다. 그중에서도 홈경기 승률, 평균점수차, 야투율, 야투허용율에서 리그 1위를 기록하며 홈에서 가장 강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클리블랜드가 파이널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홈코트 어드벤티지를 확보하는 게 필수적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특히 보스턴이나 올랜도같이 동부 1위 자리를 다투는 팀들과의 대결에서는 반드시 이겨서 승차를 벌려야 했다.

하지만 이런 객관적인 이유 외에도 클리블랜드 선수들은 내일 경기를 절대 지면 안되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이 클리블랜드 선수들에게 이 경기가 리벤지 매치이기 때문이었다.

리더인 르브론 제임스는 아직도 지난 플레이오프를 잊지 못한다. 정말 간발의 차이로 보스턴에게 아깝게 졌기 때문이다. 특히 7차전 막판에 피어스와의 쇼다운에서 밀린 것은 여름 내내 르브론에게 동기부여가 됐다. 게다가 시즌 개막전에서 보스턴의 우승 배너 게양식을 보면서도 또 진 것은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그러니까 르브론이 9일 경기에 대해 '겨우 한 경기일 뿐이라고 말한다면 거짓말이다. 보스턴에게 도전할 날을 기다려왔다'고 말한 것도 당연했다.

모리스 윌리암스 역시 개막전 패배를 설욕하려 벼르고 있었다. 보스턴과의 개막전은 윌리암스의 클리블랜드 정규시즌 데뷰전이었다. 그런데 아직 팀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한 상태에서 과욕을 부리다가 보스턴의 라존 론도에게 봉쇄당하며 경기를 망쳤다. 데뷰전을 망친 윌리암스는 "보스턴에서는 그들이 승리를 가져갔다. 이젠 우리가 갚을 차례"라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딜론테 웨스트가 가지는 감정은 좀더 특별했다. 2004년 보스턴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고 2년 전까지 보스턴 유니폼을 입고 있던 웨스트는 빅3중 한 명인 알렌이 영입되는 과정에서 팀을 떠났고, 시즌중 다시 트레이드되어 클리블랜드 유니폼을 입고 친정팀 보스턴과 플레이오프에서 맞붙었다. 하지만 3차전에서 위닝샷을 터뜨리기도 했지만 중요한 순간마다 옛 후배 론도에게 밀리며 친정팀의 우승을 지켜봐야 했다. 웨스트의 주머니 속에는 아직도 지난 플레이오프 기록지가 들어있다. 지갑을 꺼낼 때마다 빠져나오게 해놨다. 지난 플레이오프 2라운드는 올시즌 커리어 최고의 농구를 하고 있는 웨스트에게 동기부여를 하고 있었다.

이밖에도 클리블랜드 선수들은 저마다 보스턴을 이겨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팀 전체로 봐도 보스턴과의 대결은 중요했다. 왜냐하면 클리블랜드는 지난 시즌 이맘때에 비해 무려 8명이 바뀐 '새 팀'이기 때문이다. 이번 시즌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고는 있지만, 아직도 서로를 알아가고, 발전하고 있는 팀이다. 그런 팀이 자신의 현주소를 명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디펜딩 챔피언 이상의 시험 상대가 없었다. 만약 9일 경기를 이길 수 있다면, 클리블랜드 선수들은 지난 시즌 패배에 대한 압박감을 털어버리고 팀의 미래에 대해 지금보다 더 큰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이 클리블랜드 팀 스스로가 보스턴과의 경기에 동기부여를 하고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9일 경기는 매우 중요했다.

필자는 9일 경기가 시작하기 전 아래 다섯 가지 항목을 각각 20점 만점으로 산정, 총점 100점 기준으로 클리블랜드의 경기력을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평가 결과 클리블랜드가 9일 보여준 경기력은 그리 좋은 것이 아니었지만 몇 가지 외부 효과로 인해 만점짜리 결과를 냈음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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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 기선 제압

클리블랜드는 수비팀이다. 그리고 보스턴 역시 수비팀이다. 수비팀끼리의 대결에서는 어느 쪽이 먼저 리드를 잡느냐가 대단히 중요하다. 게임의 나머지 시간 동안 얼마나 효율적인 경기를 할 수 있느냐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클리블랜드 선수들이 지난 며칠간 말해왔듯이 클리블랜드는 이 게임을 '플레이오프 모드'로 치르기로 했고, 1쿼터에 그런 집중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보스턴 선수들도 연패에서 벗어나려는 의지를 보였지만 클리블랜드의 의지가 더 강했다.

경기 초반 12점중 10점을 페인트존 득점으로 연결시킨 클리블랜드는 계속해서 페인트존으로 볼을 보내며 보스턴 수비를 흔들었고, 보스턴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보스턴도 훌륭한 패스워크로 클리블랜드의 페인트존을 공략했지만, 클리블랜드 수비진이 패싱루트에 서서히 적응하면서 슈팅 지점이 점점 밖으로 밀려났다. 1쿼터 후반에는 르브론의 드라이브인 공격까지 터지면서, 클리블랜드는 1쿼터에만 72.2%의 야투율을 보이며 33-23으로 리드할 수 있었다.

이 리드는 클리블랜드 승리의 초석이 됐다.
수비팀끼리의 대결에서 초반 리드를 빼앗기 팀이 따라잡으려고 무리한 공격을 하다 보면 원래 가지고 있는 수비력을 발휘하기 힘들어진다. 클리블랜드는 1쿼터부터 두자릿수 리드를 잡았기 때문에 이후 경기에서 부담없이 수비력을 발휘하며 이를 바탕으로 손쉬운 게임 운영을 할 수 있었다. 보스턴의 쿼터별 득점은 23, 17, 20, 23점이었다. 매 쿼터 클리블랜드의 수비력이 기복없이 작용했다는 걸 알 수 있다. 클리블랜드가 경기 내내 우위를 보인 데 가장 큰 몫을 한 것은 1쿼터 10점차 리드의 '저금' 이었다.

다만 2쿼터 초반부터 페인트존을 공략하지 못하고 수비에선 리온 포우에게 밀리면서 추격을 허용했던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2쿼터 초반 6분만 잘 뛰었으면 전반 끝나기 전에 승부를 결정지을 수도 있었다.

점수: 15점


론도 봉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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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도가 보스턴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적지 않다. 론도는 뛰어난 돌파력으로 상대 수비진을 흔들 수 있고 보스턴에서 상대 가드에게 압박을 가할 수 있는 유일한 포인트가드다. 클리블랜드 역시 론도에게 당한 적이 많았다. 지난 플레이오프 5차전에서는 3쿼터 초반 론도가 웨스트를 압박하면서 클블의 볼무빙이 멎어 역전당했고, 이번 개막전에서도 윌리암스와 깁슨이 론도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역전패했다. 이번 시즌 론도는 백코트에서 자신의 비중을 크게 늘리며 게임의 승패를 좌우할 정도의 선수로 성장했다.

클리블랜드는 론도를 잡기 위해 준비를 많이 해왔다. 먼저 론도의 드라이빙 경로를 사전차단하고 론도가 픽 공격을 할 때 적극적인 헷지 수비로 템포를 늦췄다. 또한 윌리암스가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론도를 막다가 때때로 웨스트가 붙어 압박하고, 르브론이 항상 헬프를 준비하고 있었다. 공격시에는 론도에게 압박당하지 않기 위해 아예 르브론이 볼을 운반했고, 윌리암스는 론도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집중해서 볼을 다뤘다.

이 모든 시도가 거의 모두 들어맞았다. 론도 봉쇄에 실패한 것은 3쿼터 초반 딱 한 번 뿐이었다.

보스턴은 3쿼터가 시작하자마자 론도를 이용한 픽 공격을 계속해서 시도했다. 그런데 클리블랜드 가드진이 잠시 집중력이 떨어진 사이 이 픽들이 모두 성공하면서 픽어를 수비하던 바레장이나 빅벤이 론도를 막는 스위치 상황이 생겼고, 론도는 이를 이용해 계속해서 파울을 얻거나 적절한 패스를 넣었다. 3쿼터 한때 점수차가 3점차까지 좁혀젔던 건 론도를 놓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간대를 빼면 론도에 대한 클리블랜드의 수비는 아주 좋았다. 피어스가 르브론에게 막혀있었기 때문에 보스턴에서 유일하게 슬래셔 역할을 맡아야 했던 론도에게 크게 휘둘리지 않은 것이다. 비록 론도가 전반에만 7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좋은 패싱능력을 보였지만, 그것은 오히려 보스턴의 패싱 루트를 단순화시켜 클리블랜드가 갈수록 손쉬운 수비를 하도록 해줬다.

클리블랜드가 보스턴을 이길 때는 항상 론도가 잘 해줬다. 따라서 론도를 잡은 것은 오늘 승리에 큰 몫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보스턴으로써는 론도의 역할을 나눠 수행해줄 토니 알렌이 빠졌다는 게 뼈아팠다. 알렌이 15분 정도 나오면서 개막전과 같이 공수에서 론도를 도와줬더라면 2쿼터 양상은 다르게 흘러갔을 것이다.

점수: 15


피어스에게 연속슈팅 허용은 금물

오늘 클리블랜드가 폴 피어스를 얼마나 잘 막았는지는 따로 얘기할 것이므로, 여기서는 피어스가 경기 내내 연속슈팅을 몇 번이나 했는지만 살펴보겠다.

피어스는 오늘 15개의 야투를 시도했는데, 이중 두 번 이상의 포제션에서 연속해서 야투를 시도한 것은 딱 한번 있었다. 4쿼터 초반 피어스가 레이업을 실패한 후 다시 리바운드를 잡아 또다시 레이업에 실패한 때이다(그 직후 다시 볼을 따낸 포우가 앤드원을 성공시켰다). 다시말해 클리블랜드는 피어스에게 연속 야투를 전혀 허용하지 않은 것이다.

피어스는 전형적인 리듬슈터이다. 계속 슛을 던지며 자기 리듬을 찾고, 한번 리듬을 타면 계속해서 슛을 꽂아넣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계속 부진하다가도 승부처에서 연속득점으로 팀을 승리로 이끄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피어스가 계속해서 슛을 던지며 감을 잡게 만들면 안된다. 하다못해 자유투 2구도 연속으로 던지게 하면 안된다. 클리블랜드는 이 부분에서 완벽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자유투도 두 개밖에 허용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슛을 던지지 못하며 경기 내내 르브론의 밀착수비에 고생한 피어스는 끝끝내 리듬을 회복하지 못했고, 최근 어려운 가운데서도 득점력을 발휘하며 팀을 이끌어왔던 피어스가 부진에 빠지자 보스턴은 추격 기회를 잡지 못했다.

점수: 20


보스턴의 헐거워진 수비 스페이싱 공략

절반의 성공이다. 1쿼터는 더할 나위 없는 대성공, 나머지는 실패, 르브론은 더할 나위 없는 대성공, 나머지는 실패다.

클리블랜드는 1쿼터에 적극적으로 페인트존을 공략하며 손쉬운 공격을 했습니다. 선수들의 오프더볼 무브가 워낙 좋았고 르브론과 윌리암스가 적절한 패스를 넣어줬다. 하지만 2쿼터부터 클리블랜드의 슈팅이 점점 밖으로 밀려났다. 클리블랜드 슈터진들의 감이 너무 좋았던 걸까? 클리블랜드 선수들은 구멍이 뻔히 보이는 보스턴의 페인트존으로 볼을 보내기보다는 점프슛를 더 선호했고, 이것이 클리블랜드 공격의 효율성을 떨어뜨렸다.

오늘 르브론은 보스턴의 수비진을 무인지경으로 헤집었다. 동료들의 픽 도움을 받아가며 보스턴 수비를 완전히 농락했다. 지난 플레이오프에서 보스턴이 르브론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은 피어스가 르브론의 첫 스텝을 따라가주고 캔드릭 퍼킨스나 리온 포우가 미들레인지로 들어오는 르브론의 두번째 스텝을 지연시킨 후 마지막으로 케빈 가넷의 높이를 이용해 터프샷을 유도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 보스턴의 수비는 두번째 과정이 사라졌다. 피어스가 못막으면 바로 최종수비가 골밑에서 르브론을 막아야 하는 상황이 이어진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 르브론 수비에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거의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페인트존에 들어온 르브론은 원하는 방법으로 마무리를 했고, 가넷의 높이가 아무리 높다고 해도 페인트존에서 편하게 슛하는 르브론을 막기는 힘들었다. 4쿼터 들어 포우가 르브론의 두번째 스텝을 막아보려고 달려들어봤지만, 르브론과 어깨가 부딪치자 마치 샷건을 맞은 터미네이터처럼 주욱 밀려났다. 르브론의 몸은 지난 시즌에 비해 더욱 탄탄해졌다.

르브론을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의 인사이드 공략은 별로 인상적이지 못했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르브론이 드라이브인을 할 때 위크사이드에서 점프슛을 노렸다. 사실 르브론의 드라이브인을 막다 보면 반대 사이드는 텅 비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위크사이드 점퍼를 노리는 게 현명한 선택일 수도 있다. 하지만 보다 효율적인 공격을 위해서는 좀더 많은 컷인이 필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바레장의 페인트존 움직임은 역시 뛰어났다. 경기 초반 계속해서 컷인을 성공시킨 것을 비롯해 꾸준히 페인트존으로 쇄도하며 파울을 얻어냈다. 높은 확률을 보여준 픽앤팝은 이런 골밑 움직임에 따르는 보너스 같은 것이었다.

점수: 10


페인트존에서 힉슨의 역할

J.J. 힉슨은 포우에게 심하게 밀렸다. 몸싸움에서 밀렸을 뿐 아니라 포우를 막기 위한 위치선정에도 실패했다. 그래도 공격시 큰 실수를 저지르지 않고 무난히 임무를 수행한 것은 평가해줄 부분이다.

점수: 5

위와 같은 기준으로 총점을 내보면, 오늘 클리블랜드의 경기력은 65점짜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65점짜리 경기력을 보였음에도 100점 만점짜리 결과를 낸 것은 다음과 같은 보너스 점수가 더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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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tra Point #1: 르브론의 수비

르브론의 루키 시즌부터 르브론의 경기를 계속 지켜봐 왔지만, 9일 경기같은 수비력을 보인 경기는 처음이었다. 르브론은 피어스를 야투 4/15, 11점으로 완벽하게 틀어막았다.

르브론의 피어스 수비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9일 경기에서 피어스가 기록한 11점 중 4점은 르브론이 벤치에 앉아있던 4쿼터 초반 웨스트와 월리 저비악을 상대로 얻은 점수이. 그러니까 르브론이 피어스를 막은 35분여 동안 피어스는 7점을 넣은 것이다. 그런데 이 7점을 다시 살펴보면 1쿼터 속공 상황에서 이지 덩크, 2쿼터 인바운드 상황에서 오픈 3점, 3쿼터 더블팀 온 저비악의 파울로 얻은 팀파울 자유투 2점이다. 모두 르브론과 1:1로 대치하지 않은 상황에서 득점한 것이다.

다시 말해, 피어스는 르브론과의 1:1에서 단 한 점도 뽑아내지 못했다.

르브론이 9일 경기에서 보여준 대인수비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피어스보다 뛰어난 사이즈와 운동능력을 바탕으로 피어스의 볼 캐치 과정부터 끊임없이 압박했고, 페이크에 속지도 않고 몸에 밀리지도 않으며 거의 매 순간 피어스를 자신의 수비범위 안에 두었다. 피어스가 픽을 이용해서 르브론을 떨쳐내려 하면 르브론은 리그에서 픽을 가장 잘 걸어주는 가넷의 픽을 뚫고 어느새 따라붙었고, 피어스가 픽앤팝 패스를 빼주면 '감사히 먹겠습니다' 수준으로 스틸을 성공시켰다. 파울을 얻어내보려 해도 르브론의 체크가 워낙 완벽했기 때문에 전혀 통하지 않았다. 오늘 피어스는 르브론과 대치한 35분 동안 야투를 11개밖에 던지지 못하며 그중 2개만을 성공시켰고, 자유투는 두 개만 얻어낸 반면 턴오버는 5개나 저질렀다. 특히 4쿼터에는 5분동안 야투 한개 시도에 그치며 무득점으로 묶였다. 이 정도면 철저히 눌렸다고 할 수 있다.
피어스가 그동안 르브론을 막지는 못해도 공격에서는 자신의 할 일을 다 했고 개막전에서도 3쿼터 연속득점으로 르브론에게 판정승을 거뒀음을 생각하면 오늘 르브론의 대인수비력은 완벽했다고밖에는 할 수 없다.

르브론은 대인수비만 보여준 게 아니다. 팀 수비도 완벽하게 해냈다. 르브론은 경기 후 인터뷰에서 피어스에 대한 수비를 묻는 질문에 '좋은 결과가 있으면 한 명의 공헌에 포커스가 집중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오늘 보인 수비력은 팀 전체가 노력한 결과'라며 겸손함을 보였지만, 사실 그 팀 수비에서도 르브론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9일 경기에서 르브론이 보여준 헬프수비는 충격적이었다. 이번 시즌 들어 멋진 헬핑블락을 자주 보여주긴 했지만, 9일 경기에서는 마치 분신술을 쓰는 것 같았다. 피어스를 완벽히 제어하면서 나머지 네 명의 수비까지 도와주고, 터프 리바운드를 잡아내는가 하면 상대 속공을 저지시키고, 계속해서 몸을 던지며 허슬플레이를 하는 모습은 38득점보다 훨씬 놀라운 것이었다. 4스틸 3블락이라는 스탯만으로는 르브론이 오늘 보여준 수비력을 설명할 수가 없다. 르브론은 오늘 수비면에서도 게임을 완전히 지배했다.

무엇보다 오늘 르브론이 보인 '단호한 결의'는 지난 며칠간 보스턴전 노래를 부른 것이 그냥 빈말이 아니었음을 여실히 보여줬다.


Extra Point #2: 보스턴의 작전 미스

오늘 보스턴은 가넷의 픽을 바탕으로 론도와 알렌, 피어스가 주로 공격을 하는 공격 전술을 시도했다. 그런데 이 작전이 완전히 실패했다.

사실 오늘 클리블랜드가 안고 있던 가장 큰 폭탄은 빅맨진의 선수층이 얇다는 것이었다. 주전 센터인 지드루나스 일가우스카스가 빠지고 바레장이 선발로 올라오면서 클리블랜드의 백업 빅맨은 루키인 힉슨과 다넬 잭슨, 그리고 감기로 고생하고 있던 라이트 뿐이었다. 따라서 가넷에게 볼을 주고 포스트업 공격을 시켰으면 클리블랜드 빅맨진에게 심각한 부담을 줄 수 있었다. 힉슨이 오늘 전혀 활약하지 못했음을 감안하면, 바레장과 빅벤중 한 명만 파울트러블에 걸리게 했어도 훨씬 쉽게 경기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보스턴은 쉬운 길을 택하지 않고 리그에서 산왕 다음으로 완벽한 2:2 로테이션 수비를 자랑하는 클리블랜드를 상대로 2:2 공격을 시도했다. 클리블랜드로써는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Extra Point #3: 관중의 서포트

MBC-ESPN의 최연길 해설위원에 따르면 오하이오 지역의 클리블랜드 경기 시청률이 7.5%에 달한다고 한다. 놀라운 수치가 아닐 수 없다. 9일 클리블랜드 홈구장인 퀴큰 론즈 아레나에서는 이런 통계상 수치가 실제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클리블랜드 관중들이 보여준 응원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선수들만 '플레이오프 모드'였던 게 아니다. 매진 사례를 기록한 20,562명의 관중들 역시 '플레이오프 모드'였다. 경기 시작 직전 엄청난 함성으로 선수들에게 힘을 실어줬고, 타임아웃 때마다 기립박수를 보내며 분위기를 띄웠다. 클리블랜드 관중들이 이 정도로 열광적인 응원을 펼치는 것은 2년 전 동부 파이널 6차전 이래 처음이었다. 선수와 관중이 목표의식을 완벽하게 공유하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장관이었다.


클리블랜드는 사흘을 쉰 다음, 서부 원정 4연전을 비롯해 7경기중 6경기를 원정으로 치르는 강행군을 펼치게 된다. 클리블랜드는 9일 승리를 위해 스스로 동기부여를 하고 복수의 칼을 갈아왔고, 마침내 승리하면서 앞으로의 힘든 일정에 자신감을 가지고 임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큰 목표를 달성하고 나면 방심하기 쉬운 법, 팀이 침체기에 빠지거나 선수가 부상당하는 등의 악재는 이런 방심을 뒤따라오게 마련이다. 클리블랜드 선수들이 흥분을 가라앉히기에 사흘 휴식은 알맞은 기회다. 푹 쉬고, 다시 긴장감을 회복하고, 자신감만 가지고 남은 일정에 임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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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COLUMNS/HELTANT79 2008. 12. 29. 00:57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2008년 10대 뉴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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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블랜드의 2008년이 끝나가고 있다.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고의 성적을 거두며 순항하고 있는 클리블랜드는 28일(이하 현지시각)과 30일 마이애미 히트와의 2연전을 마지막으로 2008년 일정을 마무리하게 된다.

클리블랜드는 두 번의 대형 트레이드를 통해 2005년 이후 이어져오던 시스템을 전면 개편하고 2010년 이후를 위한 포석을 밟아나가기 시작했다. 2008년은 '팀 르브론' 클리블랜드가 진정한 리그 엘리트 팀으로 나아가는 첫 걸음이 된 셈이다.

클리블랜드의 다사다난했던 2008년을 수놓은 사건 10가지를 살펴본다.


10. 2007-2008 플레이오프 2라운드 탈락

우승팀 보스턴을 상대로 7차전 승부를 펼치며 동부 디펜딩 챔피언의 저력을 보여줬지만 끝내 원맨팀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 
1차전 원정경기에서 클리블랜드는 에이스 르브론이 12득점 10턴오버로 철저히 틀어막히면서 패배를 맛보아야 했고 2차전 역시 대패해 조기 탈락하는듯 했다. 하지만 클리블랜드는 홈에서 펼쳐진 3,4차전에서 승리를 거둔 후 5,6차전을 나눠가져 승부를 최종전까지 끌고갔다.
보스턴에서 펼쳐진 운명의 7차전, 르브론은 45점을 올리며 분전했지만 상대팀 에이스인 피어스가 41점으로 함께 폭발하며 힘든 경기를 펼쳤고, 결국 막판 집중력 부족으로 2년 연속 파이널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시즌중 대형 트레이드로 팀워크를 완전히 다지지 못한 클리블랜드에게 '올해의 수비수' 케빈 가넷이 이끄는 보스턴의 수비는 넘기 힘든 벽이었다.


9. 바레장, 파블로비치의 난조-잘못 끼운 첫 단추

2007-2008 시즌이 개막했을 때 클리블랜드의 로스터에는 팀이 2007년 파이널에 진출하는 데 크게 공헌했던 두 선수의 이름이 없었다. 두 명 모두 팀과의 재계약 실패로 경기에 나서지 못한 것이다. 핵심 롤 플레이어인 두 사람의 공백은 클리블랜드의 시즌 운영에 굉장한 부담을 주었다.
앤더슨 바레장의 에이전트는 터무니없는 금액을 요구하기로 악명 높은 댄 페건이다. 페건은 겨우 20분 남짓 출전하는 바레장에게 연간 1,000만 달러를 지급해달라고 요구했는데 이것은 팀으로써는 받아들이기 힘든 금액이었다. 결국 12월 중순에야 복귀한 바레장은 프리 시즌을 소화하지 않은 몸의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부상, 2월의 거의 모든 경기를 결장해야 했다. 바레장의 공백은 32살의 노장 센터 지드루나스 일가우스카스의 체력 부담을 연결되었고, 결국 일가우스카스마저 부상을 겪에 되었다. 바레장이 초래한 클리블랜드 인사이드진의 이러한 부담은 프런트가 월러스와 스미스를 영입하는 블록버스터 트레이드를 단행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파블로비치는 바레장에 비해 빨리 계약을 마무리지어 시즌 초반부터 출장했지만, 연봉 협상 기간 동안 전혀 농구를 접하지 않은 몸은 NBA의 힘든 일정을 견뎌내지 못했다. 결국 부상과 컨디션 난조로 1월 말부터 경기에 나서지 못한 파블로비치는 3월 중순에야 복귀할 수 있었고, 이것은 휴즈를 떠나보낸 클리블랜드 백코트진의 부담으로 이어졌다. 파블로비치는 이번 시즌에도 컨디션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클리블랜드와 2010년까지 계약되어있다. 하지만 바레장은 이번 시즌이 끝나면 FA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얻고 파블로비치는 코칭스태프의 눈 밖으로 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앞으로도 클리블랜드 유니폼을 입게 될지는 미지수다.



8. 르브론, 마침내 생애 첫 득점왕 등극

2007-2008 시즌은 르브론이 또 한 단계 발전한 시즌으로 기록될 것이다. 경기당 30점을 기록하며 데뷔 5년만에 처음으로 득점왕에 오른 르브론은 야투율, 리바운드, 어시스트, 블록슛에서 모두 커리어 하이를 기록하며 개인 기록 면에서는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하지만 이것은 클리블랜드가 그만큼 원맨팀이라는 사실 역시 반증했다. 르브론 외에 확실한 득점원이 없었던 클리블랜드는 시종일관 답답한 경기를 펼쳐야 했고, 리그 득점왕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득점력 빈곤에 시달려야 했다. 게다가 주축 선수들의 잦은 부상과 블록버스터 트레이드로 인한 어수선한 팀 상황은 모두 리더 르브론의 부담으로 연결됐고, 르브론은 시즌이 진행될 수록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번 시즌 완벽하게 정비된 팀에서 확실한 조력자들과 함께 뛰고 있는 르브론은 지난 시즌에 비해 개인 기록이 크게 떨어졌다. 하지만 르브론은 개인 기록에는 연연하지 않는 눈치다. 르브론에게는 4쿼터에 10점씩을 올리면서 힘든 경기를 해야 했던 지난 시즌보다 벤치에서 춤을 추며 동료들을 응원할 수 있는 이번 시즌이 더 행복할 것이다.


7. 기록의 시대-일가우스카스와 르브론의 프랜차이즈 기록 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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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9일은 클리블랜드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같은 날 두 개의 프랜차이즈 통산 신기록이 수립됐기 때문이다. 12월 9일 토론토와의 홈경기에서 르브론은 경기 시작 1분여만에 두 개의 스틸을 기록, 마크 프라이스가 가지고 있던 734개의 통산 스틸 기록을 넘어섰다. 그로부터 20여분 뒤, 이번에는 팀의 터줏대감 일가우스카스가 그날 4개째의 리바운드를 잡아내며 브래드 도허티가 가지고 있던 5,227개의 통산 리바운드 기록을 2위로 밀어냈다.
르브론과 일가우스카스는 클리블랜드의 통산 기록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이름들이다. 르브론은 2월 27일 보스턴 원정경기에서 도허티의 통산 득점 기록(10,389점)을 넘어섰고, 9672점을 기록하고 있는 일가우스카스도 이번 시즌 내로 팀 통산 4번째로 1만점을 돌파할 전망이다.


6. 르브론 올림픽 금메달 획득-더이상 르브론'즈'가 아니다!

르브론이 국제대회 도전 세 번째만에 마침내 우승의 기쁨을 맛봤다. 르브론은 베이징 올림픽의 주전 멤버로 활약하며 미국에 8년만의 금메달을 안겼다.
르브론은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았던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 출전했지만 동메달에 그쳤다. 2년 뒤 미국 대표팀의 공동 주장을 맡아 세계선수권에 출전했지만 이번에도 준결승에서 그리스에 패하며 동메달에 그쳐야 했다. 리그를 대표하는 선수로써 굉장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르브론에게 이번 올림픽은 반드시 우승할 필요가 있는 대회였다. 시즌 MVP 코비 브라이언트와 국제대회 무패 제이슨 키드등 최고의 라인업으로 올림픽에 출전한 미국 대표팀은 매경기 상대를 압도하며 결승에 진출, 스페인을 명승부 끝에 제압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팀 리더 중 한 명이었던 르브론은 대회 평균 18.2득점과 3.6리바운드 4.7어시스트를 기록했고, 팀내 최고인 76%의 야투 성공율과 62.2%의 3점 성공율을 기록했다. 최고의 선수들과 함께 하며 리더로써 한 단계 발전했다고 말하는 르브론은 대표팀에서 얻은 자산을 이번 시즌 소속팀에서 마음껏 발휘하고 있다.


5. 딜론테 웨스트, 우울증으로 팀 이탈-전화위복

10월 중순 웨스트가 팀을 갑자기 이탈했을 때 팬들은 우려 섞인 시선으로 그를 기다렸다. 팀에서는 웨스트의 이탈 이유를 발표하지 않았기 때문에 온갖 소문들이 돌아다녔다.
사실 웨스트는 우울증을 앓아오고 있었다. NBA 선수가 된 다음에도 우울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팀 자체 청백전을 뛰고 있었던 웨스트는 갑자기 심판과 크게 싸우기 시작했고, 우울증이 심각해졌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치료를 위해 팀을 떠났다.
웨스트가 우울증과 싸운 2주 동안 클리블랜드의 팀 동료들은 수시로 전화를 걸어 그를 염려해줬다. 또한 웨스트 스스로 밝힐 때까지는 웨스트의 증상을 언론으로부터 철저히 감싸줬다. 마침내 우울증을 극복하고 시즌 개막 직전 복귀한 웨스트는 클리블랜드의 주전 슈팅가드로써 뛰어난 활약을 보이고 있다. 또한 웨스트를 배려하는 과정에서 팀 전체가 똘똘 뭉치게 됐다. 지난 시즌에 비해 로스터 대부분이 교체되어 서로가 생소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웨스트의 이탈은 팀 캐미스트리를 다지는 좋은 계기가 됐다.
현재 클리블랜드의 팀 분위기는 최고다. 르브론이 '내가 입단한 이래 이렇게 분위기가 좋았던 적은 없었다'고 말할 정도다. 지난 시즌에는 래리 휴즈등 몇몇 선수가 팀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선수들이 경기 끝나고 어디를 함께 갈지가 화제에서 빠지지 않을 정도로 개인적으로도 친해진 상태다. 클리블랜드의 이번 시즌 전망을 밝게 하는 이유다.


4. 블록버스터 트레이드 단행-2010 프로젝트의 초석

좀처럼 대형 트레이드를 하지 않는 대니 페리 단장이 모처럼 '한 건'을 터뜨렸다. 클리블랜드는 2월 22일 시카고 및 시애틀과의 3각 트레이드를 발표했다. 클리블랜드는 래리 휴즈와 드류 구든, 섀넌 브라운, 세드릭 시몬스를 시카고 불스로 보내고 벤 월러스, 조 스미스, 드래프트 2라운드 지명권을 받았으며 도넬 마샬, 이라 뉴블을 시애틀 슈퍼소닉스로 보내고 딜론테 웨스트와 월리 저비악을 받았다.
클리블랜드의 이 트레이드는 2005-2006시즌부터 진행해온 '래리 휴즈 2인자 프로젝트'의 포기를 선언하는 것이었다. 클리블랜드에서 팀 시스템 적응 실패와 부상으로 제 몫을 하지 못하던 휴즈를 보내면서 휴즈와 함께 계약한 마샬 등을 처분한 것이다. 대신 수비왕 4회에 빛나는 월러스를 비롯해서 클리블랜드 시스템에 잘 맞는 선수들을 모아왔다. 이 트레이드로 클리블랜드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 중 조 스미스를 제외한 모든 선수들이 현재 클리블랜드의 주축 선수로 활약하고 있다.
한편 이같은 블록버스터 트레이드와 잦은 부상 등의 여파로 클리블랜드는 2007-2008시즌에만 리그에서 가장 많은 23명의 선수가 로스터에 이름을 올려, 조직력을 다지는 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3. '모 윌' 영입-마침내 르브론의 조력자를 얻다?

클리블랜드의 팀 개편 노력은 오프시즌에도 이어졌다.
베이징 올림픽이 한창이던 8월 13일, 클리블랜드는 공격형 포인트가드인 모리스 윌리암스를 영입했다고 발표했다. 클리블랜드는 조 스미스를 오클라호마 시티에, 데이먼 존스를 밀워키에 보내고 밀워키는 윌리암스를 클리블랜드에, 데스먼드 메이슨을 오클라호마 시티에 보냈으며, 오클라호마 시티는 루크 리드노어와 애드리언 그리핀을 밀워키에 보내는 삼각 트레이드였다.
트레이드의 핵심은 클리블랜드 유니폼을 입게 된 모리스 윌리암스였다. 유타와 밀워키에서 선수생활을 한 6년차 포인트가드 윌리암스는 뛰어난 볼핸들링과 공격력으로 그간 원맨팀의부담을 혼자 짊어져왔던 르브론의 조력자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베이징에서 트레이드 소식을 들은 르브론 역시 '윌리암스는 매우 뛰어난 포인트가드'라며 트레이드에 'A'를 주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시즌이 1/3 정도 진행된 시점에서 윌리암스는 이러한 팀의 기대를 100% 만족시켜주고 있다. 윌리암스는 르브론과 함께 뛸 때는 르브론의 리딩 부담을 덜어주고, 르브론이 벤치에서 휴식을 취할 때는 스스로 공격 찬스를 만들어내며 르브론의 공백을 완벽하게 메워주고 있다. 윌리암스의 가세로 클리블랜드는 르브론 외에 또다른 '컨트롤 타워'를 얻게 되어 르브론만 막으면 이길 수 있는 팀이라는 소리를 더이상 듣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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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010 프로젝트' 파동-리그의 이목을 모은 르브론의 거취

11월 내내 리그를 후끈 달군 이슈는 레이커스의 엄청난 상승세도 보스턴의 여전한 강세도 아니었다. 심지어 이번 시즌에 일어난 일도 아니었다. 20개월이나 남은 2010년 이적시장에 대한 기사가 홍수처럼 쏟아졌고, 그 모든 논란 한가운데 르브론이 있었다.
리그의 몇몇 팀들은 벌써부터 2010년을 대비해서 샐러리캡을 비우고 있고, 공공연히 르브론을 노리고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르브론 자신이 2010년 이후 자신의 거취에 대해 확답을 주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각 팀의 '2010 프로젝트'는 점점 과열 양상을 띠고 있다. 그 와중에 TNT 해설위원인 찰스 바클리가 '르브론은 입을 닥쳐야 한다. 2010년 거취에 대해 자꾸 떠드는 것은 팀 동료와 팬들을 생각치 않는 처사'라며 르브론을 비난했고, 르브론이 '난 두 아이의 아버지다. 바클리에게 그런 소릴 들을 이유가 없다. 바클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다. 끝!'이라며 받아치는 사건까지 있었다.
르브론에게도 2010년의 거취를 질문받는 것은 고역임에 틀림없다. 프로 선수가 지금 당장도 아닌 2년 후의 계약 문제에 대해 못박아 대답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르브론은 어린 나이답지 않은 노련한 언론 플레이로 오히려 언론을 가지고 놀며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기회로 삼고 있다.
이미 여러 팀이 '2010 프로젝트'를 선언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르브론의 행보에 대한 추측은 계속될 것이다. 르브론 스스로가 '아직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고 있는 만큼, NBA 팬은 '2010 프로젝트'를 향한 각 팀 단장들의 머리싸움을 2년간 즐길 수 있을 전망이다.


1. 팀 역사상 최고의 시즌?

클리블랜드는 12월 28일 현재 25승 4패로 보스턴에 1경기 뒤진 리그 2위를 달리고 있다. 25승 4패의 성적은 당연히 팀 역사상 최고의 초반 성적이고, 득실 마진(+12.72), 최소실점(89.24) 등에서 리그 1위를 달리고 있다. 또한 홈경기 15승 무패로 리그 유일의 홈경기 무패팀으로 남아있다. 시즌 개막 전 50승도 안되는 성적으로 동부 4위권에도 오르지 못할 것이라던 전문가들의 예측을 무색케 하는 선전이다.
클리블랜드가 리그 엘리트 팀으로 발돋움한 것은 지난 시즌 대폭 물갈이된 선수들이 프리시즌 캠프를 함께하면서 팀워크를 다졌고, 모리스 윌리암스의 합류로 공격이 훨씬 부드러워졌으며, 마이크 브라운 감독이 수비에서뿐 아니라 공격에서도 뛰어난 지도력을 보이며 한단계 성장했기 때문이다. 팀 스타일이 탄탄한 수비력과 결실한 팀 플레이에 의존하기 때문에 남은 시즌도 기복없는 경기력을 유지할 전망이다.
클리블랜드는 르브론 입단 후 꾸준히 발전해왔지만 지금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르브론 본인도 예상 밖이라고 말할 정도로 큰 발전을 이뤘다. 시즌 MVP 후보 0순위로 꼽히고 있는 르브론이 이끄는 클리블랜드가 이번 시즌 어디까지 발전할지, 과연 르브론의 선언대로 파이널 우승을 달성할 수 있을지, 모든 것이 결정될 2009년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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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 랩터스의 슈터 제이슨 카포노의 3점 슛이 림을 돌아 나오자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르브론 제임스와 지드루나스 일가우스카스가 리바운드를 잡기 위해 점프했다. 토론토 선수들은 공격리바운드를 포기하고 모두 백코트 했기 때문에 둘 중 하나는 분명히 리바운드를 잡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20여 분 전 이미 클리블랜드의 프랜차이즈 스틸 기록을 경신한 르브론은 일가우스카스를 흘끔 바라본 후 손을 내렸고, 일가우스카스는 볼을 한 번 바운드한 후 경기 네 개째의 리바운드를 잡아냈다. 마이크 브라운 클리블랜드 감독은 곧바로 타임아웃을 신청해 경기를 중단시켰고, 2만여 명의 홈 관중들은 일가우스카스에게 기립박수를 보냈다. 일가우스카스는 덤덤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답례했다. 통산 리바운드 5,228개. 구부정한 등을 지닌 리투아니아 출신의 이 센터가 프랜차이즈 통산 최다 리바운드 기록을 세우는 순간이었다.

일가우스카스는 큰 키(221cm)를 제외하면 그렇게 눈에 띄는 선수는 아니다 그는 르브론처럼 높이 점프하지도 않고 벤 월러스처럼 강렬하지도 않다. 득점도 호쾌한 슬램덩크보다는 점프슛이 대부분이다. 하다못해 팀 후배 앤더슨 바레장처럼 특이한 헤어스타일을 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를 아는 사람은 그의 인간성에 대한 찬사의 말을 아끼지 않는다. 2007년 클리블랜드의 첫 번째 파이널 진출이 확정된 직후 일가우스카스에게 달려가 안겼던 르브론은 ‘그런 인간성을 지닌 선수와 같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말했고, 브라운 감독은 ’그를 지닌 우리 팀은 정말 운이 좋은 것‘이라며 ’그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한 마디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라 말했다. 

브라운의 말이 맞다. 일가우스카스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하려면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는 NBA에서 첫 경기를 치르는 것부터 실력에 비해 훨씬 가혹한 운명과 싸워야 했다.

일가우스카스는 1975년 발트 3국 중의 하나인 리투아니아에서 태어났다. 1990년 소련에서 독립한 인구 350만의 이 작은 나라는 어린아이들이 매 처음 농구선수를 꿈꾸고, 자신에게 가능성이 없다는 걸 깨달으면 의사나 변호사를 꿈꿀 만큼 농구의 인기가 높은 나라다. 일가우스카스는 농구의 나라인 이 나라에서 축구선수를 꿈꾸던 아이였다. 지금도 그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경기를 꼬박꼬박 챙겨보는 열혈 축구팬이고, 집에서 키우는 개 이름도 ‘베컴’이다.

하지만 너무 빨리 자란 키 때문에 축구를 포기해야 했던 일가우스카스는 고향 카우나스 선배이자 세계적인 농구선수였던 아비다스 사보니스의 경기를 보고 농구선수가 되기로 결심했다. 맨 처음 맡은 포지션은 포인트가드였다. 당시 유럽은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출전했던 드림팀 I의 영향으로 NBA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높아지고 있었다. 리투아니아에서도 TV를 틀면 항상 NBA 경기를 볼 수 있었고, 이제 리투아니아의 농구소년들은 그냥 농구 선수가 아닌 NBA 선수를 꿈꾸게 되었다. 일가우스카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이미 210cm가 넘게 자란 일가우스카스는 NBA 선수가 되기 위해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

일가우스카스는 미국 대학에 입학하기로 했다. 미국에서 고등학교 졸업 경력을 얻고 영어를 익히기 위해 리투아니아의 고등학교 마지막 학년을 일부러 유급하기도 했다. 미국에 있는 동안 그를 관리해줄 에이전트와도 계약했다.

하지만 리투아니아에 닥친 경제위기가 그의 꿈을 가로막았다. 버스 기사였던 아버지와 엔지니어였던 어머니가 모두 직장을 잃었고, 일가우스카스는 미국 대학에 다니기는커녕 부모님과 여동생의 생활을 돌보아야 할 처지가 되어버렸다. 일가우스카스는 미국 유학을 포기하고 고향 카우나스의 신생 농구팀인 아틀레타스에 입단해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다행히 첫 팀에서의 경력은 순조로웠고,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리투아니아 국가대표로 뽑히기도 했다.

그 무렵 리투아니아 대표 팀은 켄터키 대학의 초청을 받아 미국에서 시범경기를 가지게 되었다. 켄터키 대학의 홈구장에서 열린 이 경기에서 일가우스카스는 26득점 19리바운드 4블록슛 2스틸을 기록하면서 33점차 대승을 이끌었다. 깜짝 놀란 릭 피티노 당시 켄터키 감독은 친구인 마이크 프라텔로 당시 클리블랜드 감독에게 연락해서 ‘제2의 사보니스가 등장했다’며 흥분했고, 일가우스카스는 몇몇 NBA 관계자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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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감을 얻은 일가우스카스는 1995년 NBA 드래프트에 참가했고, 켄터키 대학과의 경기 비디오를 본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던 케빈 맥헤일 단장은 일가우스카스를 시험해보기 위해 미네소타 팀버울브즈의 워크아웃에 일가우스카스를 초청했다. 일가우스카스의 머리 위에서 카메라를 설치하던 촬영기사가 삼각대를 떨어뜨려 죽을 뻔 하기도 했지만, 아무튼 그는 이틀 동안 진행된 워크아웃에서 맥헤일에게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 지명 가능성을 높였다. 하지만 오른발에 갑자기 통증이 느껴졌고, 결국 발이 부러진 것으로 확인된 일가우스카스는 NBA 입성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프로 생활을 시작한 후 처음으로 겪은 부상이었다.

이듬해인 1996년 열린 드래프트는 앨런 아이버슨과 코비 브라이언트, 스티브 내쉬등이 참가한 NBA 역사상 최고의 드래프트 중 하나였다. 일가우스카스는 2라운드에라도 뽑히면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프라텔로의 이야기를 들은 웨인 엠브리 클리블랜드 단장이 20번째 지명권을 그에게 사용했다. 12번째 지명권을 일가우스카스와 같은 센터인 비탈리 포타펜코에게 썼음에도 불구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다른 팀들은 미국 농구를 경험하지 못한 데다 부상 경력까지 있는 일가우스카스를 외면했지만, 엠브리는 큰 키에 걸맞지 않은 부드러운 슛터치에 주목했다. 일가우스카스의 NBA 경력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운명은 NBA 데뷔전을 쉽사리 허용하지 않았다. 첫 시즌을 앞두고 맹연습을 하던 중 또다시 오른발이 부러진 일가우스카스는 NBA 데뷔전을 또다시 1년 후로 연기해야 했다.

그래도 일가우스카스가 크게 낙담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리그에 갓 입단한 신인으로써 모든 것에 호기심을 보였고, 팀 분위기에 빠르게 적응해갔다. 영어 실력도 많이 늘었다. 비록 가장 먼저 배운 게 욕이었지만 말이다. 일가우스카스와 함께 뛰었던 선수들은 누구든 그의 걸쭉한 농담에 대해 이야기하며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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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가우스카스는 1997-1998시즌 마침내 첫 경기를 치렀다. 개막전에서 16득점 16리바운드 2블록슛을 기록하며 화려하게 데뷔한 일가우스카스는 시즌 전 경기를 뛰며 평균 13.9득점과 8.9리바운드를 기록, 클리블랜드의 주전 센터로 확실히 자리 잡았다. 올스타 루키 챌린지에도 선발 출장해서 루키 챌린지 MVP가 된 첫 번째 클리블랜드 선수가 되었다.

이듬해, 순조롭게 흘러갈 것 같은 두 번째 시즌이었지만 또다시 부상 악령이 찾아왔다. 이번에는 왼쪽 발목이 부러진 일가우스카스는 단 6경기만 뛰고 시즌을 접어야 했고, 이듬해에도 코트에 나서지 못했다. 일가우스카스는 크게 낙담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용기를 찾았다. 힘든 재활과정을 견뎌나가는 그의 성실함은 팀 관계자들을 감동시켰다.

2년여의 공백 끝에 코트에 돌아온 2000-2001 시즌, 일가우스카스는 첫 23경기에서 11.7점과 6.8리바운드를 올리며 부활을 알렸다. 팀도 15승 8패로 선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시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일가우스카스는 시즌 최다득점인 24점을 올린 다음 경기였던 마이애미 전에서 점프슛을 던진 후 왼발에 엄청난 통증을 느꼈다. 수많은 부상을 당해봤지만 결코 느끼지 못했던 통증이었다. 의료진이 달려오는 짧은 시간 동안 일가우스카스는 공포에 질려있었다.

그의 왼발이 또다시 부러진 것이다. 이번에는 분쇄골절이었다. 발등 뼈가 산산조각 나버렸다.

클리블랜드의 모든 팀 관계자들은 깊은 슬픔에 빠졌다. 일가우스카스가 다시 코트에 서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왔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동료 선수들은 남은 시즌 결과에 신경을 쓸 수 없을 정도로 그의 부상을 슬퍼했다. 8년이 지난 지금도 클리블랜드 관계자들은 그 일을 떠올릴 때면 눈물짓곤 한다.

하지만 일가우스카스 본인의 절망은 훨씬 컸다. 지금까지 수많은 시련도 잘 이겨내 왔지만 이번만은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수술을 해도, 재활을 해도 다시 코트에 설 수 있다는 보장이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또다시 가만히 앉아서 동료들이 뛰는 모습을 구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농구선수 생활을 계속해야 할지 회의마저 들었다. 하지만 일가우스카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클리블랜드 프로 스포츠 역사에서 최악의 거품 선수로 기록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그를 다시 분발케 했다. 그는 마침내 재건 수술을 받기로 결심했다. 왼발 뼈의 대부분을 금속제 인조 뼈대로 바꾸는 대수술이었다. 나중에 ‘의술이라기보다는 예술에 가까웠다’는 평을 받은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난 다음에는 혹독한 재활 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발의 고통은 이제는 친숙해질 정도였고, 진통제를 군것질거리처럼 달고 다녀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자리에서 일어난 일가우스카스는 더 이상 발의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가우스카스는 2001-2002 시즌 기적적으로 복귀했다. 처음에는 크리스 밈의 백업으로 출전했지만 금방 선발진으로 올라섰다. 그는 62경기에 출장하며 11.1득점 5.4리바운드를 기록했다. 이듬해에는 생애 처음으로 올스타에도 선정됐다. 2003년 르브론이 입단하자 팀 전체가 르브론에 맞춰 개편됐지만 일가우스카스는 여전히 클리블랜드의 주전 센터로 남아있었다. 건강을 되찾은 일가우스카스가 르브론과 함께 힘을 발휘하면서 클리블랜드의 성적도 점점 나아졌다. 2004년 결혼한 일가우스카스는 2005년 다시 한 번 올스타에 선정되었고 팀과 5년간의 장기계약을 맺기도 했다. 이제 모든 시련은 끝난 듯했다.

2007년 2월, 클리블랜드 로스터에서 일가우스카스의 이름이 갑자기 사라졌다. 원정 3연전을 앞두고 그의 아내 제니퍼가 쌍둥이를 유산한 것이다. 일가우스카스 부부의 첫 아이들이었다. 일가우스카스는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지금까지 당한 그 어떤 부상보다도 심한 아픔이 가슴을 때렸다. 아내가 고통 받을 때 같이 있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도 그를 괴롭혔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고통을 이겨내고 다시 돌아왔다. 지금까지 그를 믿고 기다려준 팀을 어려움에 빠뜨릴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아내가 일가우스카스가 코트에서 뛰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다. 네 경기 만에 복귀한 일가우스카스는 클리블랜드의 첫 파이널 진출을 이끌었다.

NBA 13시즌 째를 맞고 있는 일가우스카스는 이번 시즌 26분간만 출장, 15.1득점과 7.5리바운드를 올리고 있다. 53%의 야투율은 생애 최고이고, 평소에도 넓었던 슈팅 범위를 더욱 늘려 올시즌에만 벌써 6개를 성공, 지난 시즌까지 성공시킨 3점슛 갯수(5개)를 이미 넘어섰다. 우리 나이로 35세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발전을 멈추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일가우스카스가 수많은 시련을 딛고 계속 발전할 수 있는 것은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 때문이다. 몇 주 전 필라델피아 원정 경기에서 왼발 부상을 당해 라커룸으로 향했을 때, 엑스레이 사진을 찍은 필라델피아 의료진들은 깜짝 놀랐다. 재건 수술을 받을 때 집어넣은 인공뼈가 발을 온통 뒤덮고 있어서 부상 부위가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묻는 의료진들에게 일가우스카스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음, 그거 설명하자면 좀 긴데요."
지난 주 미네소타 원정 경기에서 일가우스카스는 맥헤일 미네소타 단장과 재회했다. 맥헤일이 사진기사의 실수로 일가우스카스가 죽을 뻔했던 것을 떠올리자 일가우스카스가 대답했다. "만약 그때 제가 죽었으면, (미네소타 홈 구장인) 타겟 센터는 이름이 (저를 기념해서) Z 센터로 바뀌었을 걸요?" 일가우스카스에게는 시련조차도 유머의 소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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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가우스카스는 스스로가 동료들의 모범이 될 뿐 아니라 어린 선수들이 리그에 적응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기도 한다. 특히 외국인 선수들이 겪는 문화적 어려움을 잘 이해하고 그들이 미국 생활에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앤더슨 바레장이나 사샤 파블로비치같은 선수들은 일가우스카스가 베푼 엉망진창 유머가 섞인 따뜻한 배려 덕분에 팀에 쉽게 녹아들 수 있었다. 유순해 보이는 외모와는 다르게 상대팀과 몸싸움이 벌어지면 가장 먼저 달려가 동료들을 보호하기도 한다.

일가우스카스의 따뜻한 시선은 팀 동료뿐 아니라 자신에게 기회를 준 지역사회까지 미친다. 팀 내 지역봉사활동 모임의 일원으로써 클리블랜드와 오하이오 주를 돌며 봉사활동을 펴기도 하고, 특히 건강이 좋지 않은 아이들을 돌보는 데 관심이 많다. 클리블랜드 아동병원을 방문하는 것은 그가 자주 하는 활동 중 하나다. 일가우스카스는 클리블랜드 홈 팬들의 마음에 이미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일가우스카스가 클리블랜드에서 선수 생활을 한 13년 동안 그는 2명의 구단주, 2명의 단장, 7명의 감독, 그리고 118명의 선수들과 함께했다. 일가우스카스 개인적으로나 팀으로써나 쉽지만은 않은 세월이었다. 하지만 그는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 클리블랜드의 각종 통산 기록에 빠짐없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얼마 전 일가우스카스는 내년에 FA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스스로 포기하고 클리블랜드에 남기로 했다. 르브론이 말한 것과 같이, 일가우스카스는 클리블랜드에서 영구 결번될 것이다.

일가우스카스가 2010년 후에도 선수생활을 계속할 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언제 은퇴하건, 클리블랜드 팬들은 그가 겪은 시련과 이를 극복한 그의 열정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경제적 어려움도, 거듭된 부상도, 아이를 잃은 아픔조차도 농구에 대한 그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일가우스카스가 마지막 경기를 마치는 날, 팬들은 그가 보여준 것만큼의 열정을 담아 박수를 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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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A의 간판스타 르브론 제임스와 크리스 폴이 2일(이하 한국시간) 발표된 2008-09 NBA 11월의 선수로 나란히 선정됐다. 르브론은 개막 후 한 달 동안 총 15경기에 출장하여 평균 28.7점에 7.1리바운드와 6.2어시스트를 보태며 멀티 플레이어의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폴은 11.6어시스트와 2.8개의 스틸로 이 부문 NBA 전체 선두를 달리며 맹위를 떨쳤다.

르브론은 개인성적도 출중했지만 무엇보다 팀을 상위권으로 이끈 공로가 컸다. 클리블랜드는 현재까지의 홈경기에서 9전 전승으로 유례없는 안방불패의 팀으로 변신했다. 원정경기를 포함하면 14승 3패로 보스턴 셀틱스에 이어 동부 2위, 리그 통틀어서는 3위에 해당하는 성적이다. 이 수치들은 구단 11월 역사상 최고 기록으로, 르브론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번 시즌 들어 개인 기록면에서 소폭 하락된 수치를 보여주고 있지만, 최근 한 달 동안 진귀한 기록들을 갱신하며 신화를 쌓아가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최단 기간, 최연소의 타이틀이 붙은 10000득점, 2500개의 리바운드와 어시시트, 그리고 700스틸, 300블락 클럽이다. 얼핏 보면 베테랑 선수들의 몫으로 보이는 이 기록은 이제 23세에 불과한 르브론의 전유물로 남게 됐다.

득점부문에서도 새로운 기록들이 쏟아져 나왔다. 지난 1991년 마이클 조던이 작성한 11월 41점 기록(3경기)은, 17년 만에 르브론의 손에 봉인해제 되었다. 특히 6일과 9일에 시카고 불스와의 백투백 경기에서 각각 41점씩을 기록하며 이 부문 NBA 타이를 이루었다. 르브론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전 기록 보유자는 현재 유타 재즈의 감독인 제리 슬로언 감독이다. 슬로언 감독이 시카고 불스 현역시절에 작성한 기록임을 감안하면 참 묘한 운명이다. 

한편 시카고는 르브론의 득점신화에 빠질 수 없는 조연으로 남을 전망이다. 현재까지 시카고와의 경기에서 7경기 연속 30점을 올린 르브론은 이 부문(한 팀과의 전적), 역대 3위에 올라있다. 1위는 단신 스코어러의 효시인 네이트 아치볼드가 1972년~1973년 사이에 작성한 9경기이며 2위는 스카이 훅슛의 창시자 카림 압둘자바의 8경기이다.

앞으로의 스케줄을 보면 기록달성의 전망은 밝다. 시카고와의 잔여경기가 1월에만 2경기가 편성돼있어 당일 컨디션과 부상만 피할 수 있다면 아치볼드의 1위 자리는 어렵지 않게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폴 역시 개인과 팀 성적을 모두 만족시키며 영예를 안았다. 특히 리그 최고의 격전지로 꼽히는 사우스웨스트 디비전에서 뉴올리언즈 호네츠를 9승 6패로 이끈 점이 심사위원단의 마음을 흔들었다. 폴은 “서부컨퍼런스에 뛰고 있는 훌륭한 선수들을 제치고 상을 수여해 영광스럽다. 우승을 위해 정진하고 있는 코칭스태프와 동료들에게 공을 돌리고 싶다”며 소감을 밝혔다. 한 지붕 아래 자리하고 있는 휴스턴과 샌안토니오, 댈러스 등 전통의 강호들이 연일 진흙탕 싸움을 벌이고 있어 폴의 활약은 앞으로도 더울 빛날 전망이다.

지난 시즌 20득점 10어시스트의 명맥을 살린 폴의 올 시즌 기세는 대단하다. 현재까지 두 번의 트리플더블을 포함하여 총 10차례의 더블더블을 작성한 폴은 이 부문 2위에 올라 정상급 빅맨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뉴올리언즈의 감독인 바이런 스캇은 “폴은 리그 최고의 선수이자 팀의 리더다. 이 상을 받을만한 자격은 충분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르브론과 폴은 지난 시즌 정규시즌 MVP를 두고 경쟁을 펼친 바 있다. 이들 두 선수는 올해 역시 코비 브라이언트와 함께 다시 한 번 뜨겁게 코트를 달굴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어 앞으로의 활약에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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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COLUMNS/HELTANT79 2008. 12. 1. 16:01

클리블랜드 11월 결산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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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가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고의 스타트를 끊으며 시즌을 시작했다. 11월 29일(이하 현지시각) 밀워키 벅스와의 원정경기에서 97-85로 승리를 거둔 클리블랜드는 개막후 14승 3패를 기록, 1976~77시즌 세운 11월까지의 승패 기록(15승 4패)를 경신했다.

클리블랜드는 오프시즌 영입한 모리스 윌리암스가 활약하며 르브론 제임스에게 의존하던 공격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지드루나스 일가우스카스, 딜론테 웨스트 등이 고감도 슈팅을 뽐내며 리그 최고의 공격팀 중 하나로 거듭났다. 또한 홈경기에서 9승무패를 기록, 프랜차이즈 홈 개막 연승기록과 타이를 이루었다.
동부에서 보스턴에 1.5경기 뒤진 2위를 달리고 있는 클리블랜드의 시즌 초반을 점검해본다.


팀 성적: 14승 4패(센트럴 디비전 1위, 동부 컨퍼런스 2위, 리그 3위)

       클리블랜드         상대팀           마진
 득점 103.6(4) 92.64(4) 10.94(2)
 야투율 48.4%(3) 42.1%(2)  -
 3점 성공률 33.9(18) 36.3%(20)  -
 자유투 성공률 76.9(11) 80.2(28)  -
 리바운드 42.64(10) 37.35(2) 5.29(2)
 어시스트 12.76(12) 18.11(5) 2.64(6)
 블록슛 5.94(6) 3.7(2) 2.23(3)
 스틸 7.41(17) 6.47(7) 0.94(10)
 턴오버 13.0(28) 14.88(7) -1.88(28)

비고: 괄호 안은 리그 순위, 단 상대팀 순위는 올림차순


윌리암스 영입으로 인한 팀 공격력 어떤 기여를 했나?

클리블랜드는 지난 시즌까지 르브론 제임스를 보유하고도 리그 최저수준의 공격력을 보였다. 르브론이 득점왕을 차지하며 최고의 공격력을 뽐냈지만 르브론을 도와 팀의 공격력을 배가시킬 '세컨 옵션'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공격이 르브론에게서만 시작하다보니 상대팀이 클리블랜드의 공격전술을 간파하기 쉬웠고, 클리블랜드는 잘 준비된 상대 수비진 앞에서 고전해야 했다. 그 결과 클리블랜드는 팀 야투율 43.9%를 기록하며 리그에서 세 번째로 나쁜 모습을 보였고, 팀의 전반적인 득점력을 나타내는 '100포제션당 득점'에서도 107.6점으로 20위에 그쳤다.
보스턴과의 플레이오프 2라운드에서 르브론에 의존하는 공격의 한계를 깨달은 클리블랜드 프런트는 오프시즌 내내 르브론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는 선수를 찾았고, 마침내 밀워키의 주전 포인트가드이던 모리스 윌리암스를 영입하는 데 성공했다.
코칭스태프는 윌리암스에게 르브론의 리딩 부담을 덜어주고 르브론이 벤치에 있을 때는 '두 번째 에이스'로써 스스로 공격을 이끌 것을 주문했다. 당초 공격성향이 강한 윌리암스가 과연 르브론과 조화를 이룰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윌리암스는 적어도 지금까지는 코칭스태프의 주문을 100% 만족시키고 있다.

윌리암스의 가세가 클리블랜드에 가져다준 가장 큰 이점은 르브론이 지고 있던 공격 부담이 대폭 줄었다는 것이다. 르브론이 윙으로 내려가도 앞선에서 대신 리딩을 해줄 가드가 생겼기 때문에, 상대 수비진이 르브론에게 수비를 집중시키지 못하게 됐다. 또한 르브론이 보다 림과 가까운 곳에서 볼을 잡는 일이 많아지면서 상대 수비진이 느끼는 부담이 높아졌고, 르브론은 포스트업 등 그간 보여주지 못했던 오프더볼 무브를 마음껏 선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번 시즌 클리블랜드가 비장의 카드로 들고 나온 스몰라인업이 가동될 때도 르브론이 전혀 부담없이 파워포워드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됐다. 게다가 르브론이 볼을 가지고 있는 스트롱사이드만 사용하던 지난 시즌과는 달리, 윌리암스가 위크사이드에 버티고 있는 이번 시즌에는 코트 전체를 모두 사용하게 되어 패싱 루트의 다양성이 더욱 커졌다. 또한 작년보다 경기 템포가 빨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더 적은 턴오버를 범하면서 코칭스태프가 구상한 공격 전술을 펼치기도 용이해졌다.
이와 함께 평소에는 슛을 자제하던 윌리암스가 르브론이 벤치에 있는 동안 공격을 집중시키면서, 이제 클리블랜드 경기에서 지난 시즌같이 르브론이 없을 때 공격력이 크게 떨어지는 모습은 보기 힘들어졌다. 돌파와 중거리슛, 2:2 플레이가 모두 뛰어난 윌리암스가 공격을 이끌기 때문이다. 르브론과 다른 동선을 보이는 윌리암스의 게임 리딩에 상대 수비진은 큰 혼란을 느끼곤 한다.

윌리암스의 활약은 그에게 포인트가드 자리를 넘겨주고 슈팅가드로 출전하고 있는 딜론테 웨스트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스스로 슈팅가드 자리가 더 맞는다고 생각해온 웨스트가 리딩 부담에서 벗어나면서 준수한 공격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웨스트는 르브론과 웨스트에게 수비가 몰리는 점을 이용해 50%가 넘는 야투율과 40%가 넘는 3점 성공률을 기록하고 있다.

위와 같이 윌리암스가 클리블랜드의 공격에 크게 기여했기 때문에, 이번 시즌 클리블랜드는 48.4%의 팀 야투율로 리그 3위에 올라있으며, 100포제션당 득점은 111.8점으로 리그 1위를 달리고 있다. 지난 시즌에 비해 큰 발전을 이룬 것이다.


가드진의 수비 불안, 해법은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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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암스와 웨스트가 선발로 나선 백코트 콤비는 공격면에서는 대성공했지만 수비면에서는 '절반의 성공'에 그쳤다. 윌리암스 영입 당시 제기됐던 상대 포인트가드 수비문제가 그대로 나타난데다 201cm의 사샤 파블로비치 대신 웨스트가 선발기용되며 장신 가드에 대한 약점도 노출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약점은 그대로 팀 패배와 연결됐다.

클리블랜드는 보스턴과의 개막전을 비롯해서 뉴올리언즈와 디트로이트에게만 패배했는데, 이 팀들은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페네트레이션 능력이 뛰어난 빠른 포인트가드와 장신의 외곽 플레이어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클리블랜드는 보스턴전에서는 라존 론도와 토니 알렌의 빠른 돌파와 압박수비에 고전하며 역전패했고, 뉴올리언즈전에서는 크리스 폴에게 농락당하고 라슈얼 버틀러와 제임스 포지에게 무더기 외곽포를 허용하며 무너졌다. 그리고 디트로이트전에서는 앨런 아이버슨이 코트를 휘저었고 리차드 해밀턴이 효율적인 포스트업으로 클리블랜드의 가드진을 공략하며 대역전패를 허용했다.

클리블랜드 가드진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문제점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 경기가 11월 19일 벌어진 디트로이트 원정경기다. 전반을 11점차로 뒤진 채 후반을 맞은 디트로이트는 아이버슨과 해밀턴에게 공격을 집중시켰고, 아이버슨의 페네트레이션과 해밀턴의 포스트업 공격을 막아내지 못한 윌리암스와 웨스트는 금세 파울트러블에 몰렸다. 그들을 대신해 들어간 대니얼 깁슨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결국 디트로이트 가드진에게 철저히 당한 클리블랜드는 전체적인 수비 밸런스가 무너져갔고, 4쿼터에는 아이버슨의 드라이브인-킥아웃에 이은 라쉬드 월러스의 3점까지 허용하며 역전패했다. 디트로이트는 클리블랜드를 후반 스코어 58-40으로 압도했다.
물론 윌리암스와 웨스트가 좋은 수비력을 보여준 경기도 있었다. 빈스 카터를 12점으로 묶은 뉴저지전이나 조 존슨을 단 4점으로 틀어막은 애틀랜타전에서는 이들의 수비력이 돋보였다. 웨스트가 포인트가드를 볼 때는 상대 포인트가드를 꼼짝 못하게 하는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기에서는 상대팀 가드들이 좋은 모습을 보였다. 이런 모습은 선수들의 컨디션이 아니라 신장-기본 수비능력등 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가드진의 수비력 문제는 코칭스태프의 골칫거리가 될 전망이다. 특히 레이커스의 코비 브라이언트나 휴스턴의 트레이시 맥그래디 등 장신 스윙맨 에이스를 보유한 팀과 맞붙게 되면 상당히 고전할 것으로 예상된다.

클리블랜드에게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슬럼프에서 벗어날 줄 모르는 파블로비치가 20분 이상 뛰어주는 것이다. 파블로비치가 2006~07시즌 보여줬던 수비력을 다시 찾는다면 마이크 브라운 감독을 비롯한 코칭스태프는 한시름 덜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거의 전력외로 분류되고 있는 파블로비치가 갑자기 제 컨디션을 되찾을 가능성이 별로 없기 때문에, 클리블랜드 프런트는 다시 한 번 트레이드를 시도할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월리 저비악의 1,300만 달러짜리 만기계약이 도움이 될 것이다.


르브론 제임스는 2010년 여름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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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내내 리그를 후끈 달군 이슈는 레이커스의 엄청난 상승세도 보스턴의 여전한 강세도 아니었다. 심지어 이번 시즌에 일어난 일도 아니었다. 20개월이나 남은 2010년 이적시장에 대한 기사가 홍수처럼 쏟아졌고, 그 모든 논란 한가운데 르브론이 있었다.

2010년 선수 옵션을 써서 FA가 되는 르브론을 잡기 위해 뉴욕 닉스를 비롯한 수많은 팀이 움직이고 있다. 뉴욕은 11월 중순 빅 트레이드를 통해 2010년 총연봉을 1,800만 달러까지 줄이는 데 성공했고, 2010년 르브론과 함께 FA가 되는 드웨인 웨이드나 크리스 보쉬까지 영입해 단숨에 우승권 전력을 만들겠다는 꿈에 부풀어있다. 뉴저지는 르브론의 친구이자 구단 공동 출자자 중 한 명인 제이 지를 내세워 2010년 브루클린으로 이적 예정인 팀의 새출발을 르브론에게 걸고 있고, 최근 천시 빌럽스와 안토니오 맥다이스(맥다이스는 다시 복귀)를 덴버로 보내고 이번 시즌 계약이 끝나는 아이버슨을 데려오는 트레이드를 감행한 디트로이트 역시 2010년을 노리는 것 아니냐는 말을 듣고 있다. 한 보도에 의하면 2010년 르브론을 데려올 수 있는 팀은 무려 18개 팀에 달한다고 한다.

그중 가장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는 팀은 뉴욕이다. 뉴욕은 르브론 스스로가 '농구의 메카'라고 말할 만큼 커다란 시장인데다가 충분한 자금원이 있고, 무엇보다 르브론 자신이 뉴욕이라는 도시를 좋아하는 듯한 발언을 계속 하면서 논란을 부추기고 있다. 뉴욕 언론의 기사만 보면 르브론의 2010년 뉴욕 이적은 벌써 기정사실이 된 것 같다.

하지만 2010년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뉴욕 언론의 생각처럼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2010년 뉴욕의 샐러리가 1,800만달러까지 빠진다지만 그것은 확정 계약자가 네 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간과한 수치다. 게다가 현재 팀의 주축인 데이빗 리나 네이트 로빈슨, 크리스 듀혼 등과는 재계약을 하거나 비슷한 수준의 선수를 데려와야 한다. 그들과 전년도 연봉 그대로 재계약한다 해도 1,000만 달러 이상을 채워야 한다. 이대로라면 윌리암스, 웨스트, 깁슨, 힉슨 등 현재 높은 성적을 이끌고 있는 주축 멤버들을 데리고도 뉴욕과 똑같이 1,800만 달러의 연봉 총액만을 기록하게 될 클리블랜드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다. 르브론 자신이 '2010년 팀 선택 기준은 우승 가능성'이라고 못박았기 때문에, 르브론을 노리는 팀들은 필연적으로 연봉 총액 비우기와 팀 전력의 반비례 관계라는 딜레마를 겪게 되는 것이다.

르브론의 어중간한 행보도 반드시 뉴욕에 유리하지만은 않다. 르브론은 자신을 두고 벌어지는 이런 식의 쟁탈전에 아주 익숙한 선수다. 또한 결론을 유보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데에도 통달한 훌륭한 홍보가이기도 하다. 뉴욕 언론들은 르브론이 양키스 모자를 쓰고 '빅 애플' 농구화를 신는 것을 보고 흥분하지만, 그런 행동은 르브론이 고등학생일 때부터 종종 쓰던 홍보 전략이다.

예를 들어 곧 NBA에 진출할 르브론을 두고 나이키와 아디다스, 리복이 쟁탈전을 벌이던 무렵, 르브론은 뉴저지에서 열린 아디다스 농구 캠프에 참가해 '나이키 농구화를 신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모두가 르브론의 마음이 나이키로 기울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르브론은 불과 하루 뒤 인디애나에서 열린 나이키 캠프에 참가해서 똑같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다른 점은 나이키 캠프에서 대담하게 아디다스 농구화를 신었다는 것이다. 몇 달 후에 벌진 경기에서는 아디다스와 나이키 관계자가 지켜보는 앞에서 리복 농구화를 신고 플레이했다. 르브론이 움직일 때마다 각종 예상들이 범람했고 세 회사가 제기한 계약 금액은 천정부지로 솟아올랐다. 르브론이 전국적인 미디어의 조명을 받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때다. 마침내 리복과 아디다스는 스포츠 역사상 신인에게 제시한 최고 스폰서 금액인 1억 달러를 제시했다. 하지만 르브론이 선택한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나이키였다. 르브론이 말한 선택 이유는 '편하니까' 였다.

NBA에 데뷰하고 2년이 지나자 사람들은 '만약 프로로 오지 않았으면 어느 대학을 갔을까'가 화제가 되었다. 르브론은 디트로이트에 가서는 '미시간 대학', 올랜도에 가서는 '플로리다 대학', 샬럿에 가서는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이라고 말했다. 심지어 포틀랜드 원정경기에서는 라커룸에서 오레곤 대학의 풋볼팀 티셔츠를 입고 있기도 했다. 르브론이 가는 곳마다 '그가 프로로 가지 않았으면 우리 지역 대학으로 왔을 것'이라는 기사가 지역 신문에 실렸다.  따라서 현재 리그가 보이고 있는 '2010년 프로젝트'에 대한 이상 과열 양상은 미디어를 이용해서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르브론이 바라마지 않는 것이며, 한 걸음 나아가서는 르브론의 애매한 언행은 바로 이런 과열 양상을 노린 르브론의 언론플레이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2010년 여름 르브론은 어떤 결정을 내릴까? 아직 르브론 자신도 이에 대한 결론은 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르브론은 빠른 시간 내에 우승을 하고 싶어하고, 그러려면 2010년 르브론을 위한 최고의 전력을 만들어야 하며, 현재로써는 그러한 경쟁에서 클리블랜드가 가장 앞서나가고 있다는 것 뿐이다.


선수별 평가

르브론 제임스_ 27.8득점 7.2리바운드 6.4어시스트
데뷰 이래 10위권을 벗어난 적이 없던 그의 출장시간 순위가 이번 시즌에는 36위까지 내려갔다. 그가 뛰고 있는 35분의 출장시간은 커리어에서 가장 낮은 수치다. 지난주에는 세 경기 연속 4쿼터를 쉬었고, 특히 오클라호마전에서는 단 17분만을 뛰며 커리어 로우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각종 기록도 동반하락했지만, '르브론 농구'의 완성도는 훨씬 진행된 느낌이다. 4쿼터에는 변함없이 게임을 지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고, 상대 에이스와의 쇼다운에서도 완승을 거두고 있다. 자유투 성공률은 지난 시즌에 비해 6.2퍼센트나 상승, 이제 르브론에게 파울작전은 더이상 통하지 않는다. 두 차례에 걸쳐 NBA '금주의 선수'에 선정됐다.
평점: A0

모리스 윌리암스_ 15.7득점 2.7리바운드 4.6어시스트
클리블랜드가 그토록 찾아헤메던 '르브론의 공격 파트너'로써 완벽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공격 전반을 효율적으로 이끌고 있으며, 르브론이 없을 때는 에이스로써의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 다만 아주 가끔 보여주는 무리한 공격과 부족한 수비력은 보완이 필요하다.
평점: A0

지드루나스 일가우스카스_ 15.6점 7.4리바운드 1.6어시스트
클리블랜드의 터줏대감. 선수 부족으로 혹사당했던 작년 11월과는 달리 출장시간을 철저히 관리받으며 데뷰 이래 최고의 효율성을 보이고 있다. 르브론과의 픽앤팝 점퍼는 이미 경지에 오른 느낌이며, 최근에는 슛레인지를 3점 라인 바깥까지 늘렸다. 상대가 스몰라인업을 쓰면 골밑에서 가차없는 응징을 가하기도 한다. 11월 29일 밀워키전에서는 21득점(시즌 하이) 17리바운드로 대활약했다.
평점: A0

딜론테 웨스트_ 11.4득점 3.6리바운드 3.1어시스트
11월 클리블랜드의 숨겨진 비수. 4옵션의 듀얼가드가 해낼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냈다. 리딩 부담에서 벗어나며 51.4%의 야투율과 43.7%의 3점성공률을 자랑하고 있다. 클리블랜드가 새롭게 구사하고 있는 빠른 농구에 없어서는 안 될 선수. 수비에서도 강한 승부욕을 보이며 기대 이상의 활약을 해주고 있다.
평점: A+

대니얼 깁슨_ 8.4득점 2.4리바운드 1.8어시스트
가장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준 선수 중 한 명. 벤치 3점 슈터로써 기대를 모았으나 전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 데뷰 이후 2년 연속으로 40% 이상을 기록하던 3점 성공률은 26%에 그치고 있다. 수비시에도 전혀 활약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시즌에 비해 크게 달라진 가드진 로테이션에 적응하지 못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클리블랜드가 상승세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리그에서 가장 깔끔한 슛폼을 지닌 그의 부활이 필수적이다.
평점: C-

앤더슨 바레장_ 7.7득점 6.4리바운드 1.1어시스트
더이상 수비 전문 선수가 아니다. 오프 시즌 점프슛과 픽앤롤을 가다듬으며 이제는 팀의 당당한 공격무기로 자리잡았다. 공격력을 장착한 바레장은 팀에 엄청난 이점을 가져다줬다. 르브론과의 픽 플레이에서 대단한 효율성을 보이고 있다. 수비력과 보드 장악력도 여전하다.
평점: B+

월리 저비악_ 7.4득점 2.4리바운드 0.8어시스트
시즌 초반 난조를 보였으나 아버지의 심장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자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르브론이 벤치에 있을 때는 스몰포워드로, 스몰라인업을 가동할 때는 파워포워드를 맡는 등 굳은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당초 트레이드될 것이 확실해 보였으나 기대 이상의 모습을 보이면서 대니 페리 단장에게 새로운 고민거리를 안긴 선수.
평점: B0

J.J. 힉슨_ 3.6득점 1.6리바운드 0.1어시스트
아직 갈 길이 멀다. 오클라호마 시티전에서 31분을 뛰며 커리어 하이인 14득점을 기록했지만 대부분의 득점이 덩크로 제한되어있다. 무엇보다 수비와 박스아웃에서 문제점을 보이고
있는 게 문제. 구단은 그에게 하이라이트 필름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성실성에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2010년 이후 르브론의 파트너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더 발전해야 한다.
평점: C+

벤 월러스_ 2.8득점 7.2리바운드 0.7어시스트
'비스트'가 부활했다. 오랜만에 정상적인 몸상태로 시즌을 시작한 월러스는 자신이 뛰는 동안 강력한 수비와 보드장악력으로 골밑 수비를 이끌고 있다. 단 23분만 출장하면서도 7.2리바운드와 1.8블록슛을 기록했다. 벤치 자원이 약하다면 적은 출장시간이 문제될 수도 있지만 바레장을 보유한 클리블랜드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다. 2.9개에 달하는 공격리바운드는 팀내 최다를 기록, '리바운드 왕국' 클리블랜드에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50%를 기록하고 있는 자유투도 커리어 최고다.
평점: B+

대럴 잭슨_ 2.7득점 3.3리바운드 0.3어시스트
부상으로 마지막 주에 프로 첫 경기를 가졌다. 대학에서 충준히 기량을 갈고 닦았기 때문에 안정된 점퍼를 지니고 있다. 운동능력은 힉슨보다 떨어지지만 박스아웃 능력은 오히려 더 좋다. 꾸준히 성장한다면 일가우스카스의 뒤를 이어 르브론의 픽앤팝 파트너로 성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장은 '잭슨은 가비지 타임에만 나온다'고 선언한 브라운 감독의 시선을 끄는 것이 급선무.
평점: C0

사샤 파블로비치_ 2.4득점 1.0리바운드 0.5득점
가장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는 선수다. 저조한 기록도 문제지만 9분에 불과한 출장시간은 코칭스태프가 그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최근에는 경기에 대한 열정과 집중력마저 잃어가는 모습이다. 그를 어떻게 할 것인가. 프런트가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
평점: F

테런스 킨제이_ 2.2득점 0.7리바운드 0.2어시스트
주로 가비지타임에 나왔다. 나쁘지 않은 공격본능을 지니고 있지만 수비에서 문제점을 드러냈다. 그가 팀에 뭔가 기여를 하기 위해서는 좀더 시간이 필요할 듯.
평점: C0

로렌젠 라이트_ 1.0득점 0.7리바운드 0.2어시스트
두 명의 빅맨 루키 힉슨과 잭슨에게 출장기회를 주려는 브라운 감독의 복안에 따라 인액티브 리스트에 올라있다. 하지만 전혀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어린 빅맨들의 멘토가 되려 하는 모습은 코칭스태프가 그에 대해 공개적으로 존경을 표하게 만들었다. 우승을 노리는 팀에는 반드시 필요한 베테랑이다.
평점: C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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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간판스타 르브론 제임스가 향후 거취에 관해 입을 열었다. 르브론은 20일(이하 한국시간) AP와의 인터뷰에서 “나의 경력에 최선이 무엇인지 생각해 봤다”며 조심스러운 입장을 밝혔다. “코트에서 열심히 뛰는 것이 소속팀에 대한 충성이다”며 운을 뗀 르브론은, 올해 불거져 나온 갖가지 소문들을 일축했다.

다가올 2009-10시즌을 마치면 르브론을 포함하여 드웨인 웨이드, 카멜로 앤쏘니, 크리스 보쉬 등 제법 굵직한 스타선수들이 FA시장에 쏟아져 나올 예정이다. 때문에 2년이란 시간이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세간의 시선은 온통 2010년으로 쏠려 있다.
 
르브론은 “사업적인 측면에서 볼 때 참 힘든 문제다. 하지만 선수가 제몫을 해낸다면 팀은 그만큼의 보상을 받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구단이 선수를 포기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열심히 뛰는 것만이 최선이다”며 클리블랜드의 잔류 가능성도 시사했다. 지난 2006-07시즌, 파이널 진출의 쾌거를 이루었지만 이듬해 플레이오프에서 고배를 들었다. 하지만 이번 시즌만큼은 다르다. 8연승에 마침표를 찍었지만, 알찬 오프시즌을 보내며 동부컨퍼런스의 패권에 도전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르브론의 데뷔 이래 가장 강력한 전력을 구축했다는 평가도 지배적이다.

그는 지난 2006년, 플레이어 옵션을 포함한 5년 장기계약에 합의한 바 있다. 이론적으로 2010-11시즌까지 클리블랜드와 함께 해야 하지만 플레이어 옵션을 행사할 경우 어디든 떠날 수 있다. 이른바 ‘갑부구단’들의 마음을 뒤흔들며 리그에 큰 태풍을 몰고 온 것이다. 때문에 어지간한 구단들은 일찌감치 팀 샐러리 정리에 들어가며 르브론 모시기에 나서고 있다.

지난 수요일, 뉴저지 네츠와의 원정경기 전에 가진 기자회견장에서도 최고의 화두는 역시 그의 이적 문제였다. 르브론은 반복되는 질문에 힘겨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최대현안은 바로 이곳 클리블랜드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것”이라며 “이적문제는 생각에도 없다”고 못 박아 말했다. 대통령선거도 클리블랜드에서 참여한 르브론은, 선거당일 “나는 클리블랜드와 오하이오를 사랑한다. 그 어디에도 가지 않겠다”며 재차 고향사랑을 드러냈다.

사실 르브론은 최근 1년여 동안, 오해의 소지를 불러일으킬만한 가십거리를 수차례 언론에 제공하여 빈축을 산 바 있다. 지난 2007년에는 뉴욕 양키스의 모자를 쓰고 고향 팀인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방문하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밖에 뮤지션인 제이-지와의 돈독한 친분을 공공연하게 과시하며 뉴욕 이적 설을 증폭시키기도 하였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지역 언론도 그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기 힘들었다.       

이러한 모든 비난들이 수그러들고 ‘리더 르브론‘으로 돌아온 것이 불과 최근이다. 현재 클리블랜드는 연일 폭발적인 공격력을 앞세워 승승장구 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어김없이 르브론이 서있다. 힘들었던 시간은 지나고 진지하게 우승을 노릴 때가 온 것이다.

때문에 그는 2010년의 해답은 ‘우승’이라 말한다. 르브론은 “결정의 시간이 온다면 선택의 전제는 챔피언이다. 클리블랜드가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면 나는 이곳에 머물 것이다. 이적이 불가피하다면 가능한 한 모든 옵션을 살펴보겠다”며 정상등극에 대한 열망을 감추지 않았다.

일찌감치 신인왕과 득점왕등 개인적인 영예를 모두 누린 르브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 성적이 족쇄가 되어 받지 못한 두 가지 트로피가 있다. 바로 MVP와 우승 트로피다. 과연 그가 클리블랜드에서 두 마리 토끼를 잡고, 농구경력의 화룡점정을 찍을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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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 시즌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10월 중순,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로스터에서 한 선수의 이름이 지워졌다. 지난 여름 팀에서 가장 늦게 3년 재계약 협상을 마무리했던 딜론테 웨스트였다. 지난 시즌까지 웨스트가 맡았던 포인트가드 포지션에 모리스 윌리암스가 가세했고 마이크 브라운 감독이 아직 결정되지 않았던 선발 슈팅가드 포지션 후보중 한 명으로 그를 고려하고 있던 시점이었기 때문에, 웨스트의 갑작스런 팀 이탈은 많은 팬들의 궁금증을 자아냈다. 구단에서도 명확한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팬들의 궁금증은 커져만 갔다.

이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두가 알고 있다. 웨스트는 팀을 떠나있던 2주 동안 평생에 걸쳐 그를 괴롭혀온 우울증과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본인의 노력과 동료들의 따뜻한 관심으로 팀에 복귀한 웨스트는 클리블랜드의 주전 슈팅가드로 낙점, 평소처럼 견실한 플레이를 펼치며 클리블랜드가 7연승을 거두는 데 공언하고 있다.

강팀에서 순탄하게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는 웨스트지만 그의 인생이 항상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다른 몇몇 선수들과 같이 웨스트도 평범한 생활을 위해 싸워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1983년생으로 홀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웨스트는 메릴렌드에서 어머니와 외가 친척들과 함께 자랐다. 그리 여유있는 생활은 아니었다. 친구들과 전화를 할 때도 항상 음식 이름으로 통화를 마칠 정도였다. 웨스트는 ‘바베큐 소스’를 좋아했고, 지금도 3점슛을 넣은 후에는 ‘바베큐 소스’라고 중얼거린다. 어렸을 때부터 농구에 소질을 보인 웨스트는 일찌감치 농부구에 들어갔지만, 다른 아이들이 농구 연습을 하거나 웨이트 트레이닝을 할 때 공사장에 나가 벽돌을 나르며 힘을 키워야 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영부인의 이름을 딴 엘리노어 루즈벨트 고등학교로 진학한 웨스트는 팀을 처음으로 주 챔피언십 결승에 올렸다. 비록 아깝게 준우승에 머무르긴 했지만, 졸업반 시절 단 한 경기를 제외하고 모두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한 웨스트는 NCAA 팀들의 스카우트 표적이 됐다. 웨스트는 평소 흠모하는 마이크 말론이 감독으로 재직하던 맨하탄 콜리지로 가고 싶었지만, 말론 감독 본인이 나서 웨스트를 설득한 끝에 마침내 명문 세인트 조셉 대학교의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3년 후, 주전 슈팅가드로 성장한 웨스트는 백코트 파트너인 자미어 넬슨과 함께 팀을 정규시즌 27승 무패로 이끌었다. 세인트 조셉 대학은 사상 처음으로 전미 랭킹 1위에 올랐다. 비록 넬슨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긴 했지만, 웨스트는 팀내 최고의 3점 슈터이자 수비수였다.

자신의 능력을 확신한 웨스트는 마침내 2004년 드래프트에 나섰다. 하지만 1라운드가 끝나갈 때까지 그의 이름은 불리지 않았다. 포인트가드로 쓰기에는 리딩 능력이 달리고, 슈팅가드로 쓰기에는 193센티미터에 불과한 신장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23명의 선수가 지명된 끝에 게리 페이튼의 백업 가드를 찾던 보스턴이 마침내 24번째 지명권을 웨스트에게 행사했다. 웨스트의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죠. 크리스 월러스 단장님이 지명자를 발표하기 전 저를 불러서 ‘보스턴 셀틱스 선수가 된 기분이 어떤가?’ 하고 물으셨어요. 마치 사나운 개가 저를 쫓아올 때 간이 오그라드는 기분이더군요. 하나님 맙소사, 꿈은 이루어지고 기도는 통한 거죠.”

대학 시절 15번을 달았던 웨스트는 보스턴의 영구 결번 선수 때문에 15번을 달 수 없게 되자, 의리 깊은 메릴렌드 사내답게 어린 시절 친구의 번호인 13번을 선택해 루키 시즌을 시작했다. 하지만 웨스트의 프로 첫 시즌은 그리 순탄하지 못했다. 스타팅 라인업에는 들지 못해도 식스맨으로 꽤 많은 출장시간을 얻을 것으로 기대됐지만, 오른손에 연달아 부상이 발생하면서 부상자 명단에 오르고 만 것이다. 웨스트는 이 부상 때문에 43경기를 결장해야 했다.

시즌 후반이 되어 부상에서 회복하자, 닥 리버스 감독은 웨스트의 출장 시간을 늘리기 시작했다. 때마침 주전 가드인 페이튼이 부상당하면서 웨스트가 선발 포인트가드로 나서기도 했다. 페이튼과 함께 웨스트를 장신 포인트가드로 쓰려는 리버스 감독의 구상 때문에 대학 시절과는 다른 포지션에서 뛰게 되었지만, 웨스트는 새로운 역할에 적응하려 노력했다. 웨스트의 성실성을 눈여겨본 리버스 감독은 이듬해 페이튼이 팀을 떠나자 주전 포인트가드로 웨스트를 선택했고, 웨스트는 막 리빌딩에 들어간 팀의 공격을 잘 이끌며 감독의 기대에 부응했다. 올스타 주간에 벌어진 루키 챌린지에는 대학 시절 콤비였던 넬슨이 부상당하면서 대신 참가하기도 했다. 이듬해 팀에 합류한 라존 론도나 세바스찬 텔페어와 함께 출장시간을 나눠갖기는 했지만, ‘리빌딩 팀 보스턴’의 첫 번째 포인트가드는 항상 웨스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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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에서 순탄하게 선수생활을 이어나갈 것 같았던 웨스트였지만, 2007년 드래프트 데이 아침에 벌어진 트레이드는 그의 운명을 바꾸어놓았다. 지속적인 리빌딩 대신 신속한 전력강화를 선택한 대니 에인지 보스턴 단장이 시애틀 슈퍼소닉스의 에이스 레이 앨런과 글렌 데이비스를 받는 대가로 웨스트와 신인 제프 그린, 월리 저비악을 시애틀로 보낸 것이다. 시애틀은 팀에는 얼 왓슨이 주전 포인트가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왓슨 못지않게 기대를 받고 있던 루크 리드노어도 있었기 때문에, 웨스트의 설 자리는 좁아져 갔다.

트레이드 마감일 직전에 웨스트는 또다시 팀을 옮겨야 했다. 시애틀이 클리블랜드, 시카고와의 3각 트레이드를 통해 도넬 마샬과 이라 뉴블, 애드리언 그리핀을 받는 대가로 월리 저비악과 함께 클리블랜드로 트레이드된 것이다. 웨스트는 새 팀 클리블랜드에서 선발 포인트가드 자리를 되찾았다. 에이스 르브론 제임스가 리딩을 도맡는 클리블랜드의 시스템에 적응하는 데 다소 시간이 걸렸지만, 정규 시즌이 끝나갈 즈음 웨스트는 팀의 승리에 빠질 수 없는 선수가 되었다.

1라운드에서 워싱턴을 누른 클리블랜드는 정규 시즌 최강팀 보스턴과 2라운드를 치르게 되었다. 1년만에 상전벽해의 변화를 이룬 친정팀을 만난 웨스트의 매치업 상대는 그가 보스턴에 있을 때 세 번째 포인트가드였던 론도였다. 하지만 빅3와 함께 한 시즌을 보낸 론도는 자신의 강점인 최대 강점인 숨막히는 수비력으로 웨스트를 압박했고, 웨스트는 보스턴에서 벌어진 1,2차전에서 야투율 20%에 그치는 최악의 부진을 보였다. 비록 3차전에서 21득점을 기록하며 위닝샷까지 넣기는 했지만, 웨스트는 시즌 내내 론도에게 고전해야 했다. 결국 친정팀과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패한 웨스트는 불과 1년 전까지 자신이 소속되어 있던 팀이 우승을 차지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그 시리즈 박스스코어가 아직까지 제 안주머니에 들어있어요. 지갑을 꺼낼 때마다 튀어나오죠. 볼 때마다 화가 나서 다시 집어넣곤 하는데, 이번 시즌 끝나면 없애버릴 겁니다.”

비록 우승팀에게 아깝게 패하기는 했지만, 클리블랜드 팬들은 르브론을 도울 가드를 얻었다는 데 만족했다. ‘전임자’ 래리 휴즈가 팀 시스템과 맞지 않았기 때문에, 포인트가드치곤 장신이면서 슈팅력도 좋은 편인 웨스트에게 기대를 건 것이다. 하지만 웨스트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 클리블랜드 프런트는 오프시즌 동안 밀워키에서 포인트가드 모리스 윌리암스를 데려왔고, 마침 재계약을 앞두고 있던 웨스트는 또다시 입지가 불안해졌다. 윌리암스는 웨스트보다 슈팅과 패싱이 뛰어났고 기존 멤버 중 전 시즌에 큰 발전을 이룬 대니얼 깁슨 또한 웨스트와 포지션이 겹쳤기 때문이다. 클리블랜드에서 웨스트와의 재계약을 포기하거나 트레이드 카드로 쓴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심지어 러시아 리그로 간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재계약 협상이 좀처럼 진척되지 않았기 때문에 소문은 점점 신빙성을 얻어갔다.

하지만 클리블랜드와 웨스트는 아직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클리블랜드는 부상 이력이 있는 윌리암스를 영입하면서 보조 리딩을 해줄 ‘보험’이 필요했고, 어렵게 자란 웨스트는 가족을 부양할 새 계약이 필요했던 것이다. 웨스트는 마침내 클리블랜드와 3년간 총액 1270만 달러의 계약에 합의했다. 웨스트의 능력이나 가능성에 비하면 그리 높은 금액은 아니었지만 웨스트는 만족했다. “재계약이 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이 돈으로 우리 어머니 집을 사드릴 거고, 외삼촌 이도 해드릴 겁니다. 여동생 대학 등록금도 댈 수 있게 됐죠. 저는 이제 농구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됐어요.”

하지만 웨스트가 농구에 집중하려면 넘어야 하는 벽이 남아있었다. 바로 평생 그를 괴롭혀온 우울증이었다. 첫 증상은 팀 자체 청백전 도중 나타났다. 심판을 보고 있던 웨스트의 고등학생 시절 심판과 웨스트 사이에 충돌이 일어난 것이다. 웨스트는 심판의 콜에 비정상적으로 화를 냈고, 좀처럼 평정심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웨스트 스스로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상태로는 팀 분위기에 해를 끼칠 가능성이 높았다. 우리나라보다 개방적이라는 미국에서도 우울증을 인지하고서도 치료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은데다가 운동선수가 정신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앞으로 선수생활을 하는 데 약점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웨스트는 무엇이 중요한지 아는 판단력과 해야 할 말을 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선수였다. 웨스트는 브라운 감독과 동료들에게 자신의 병을 솔직히 고백하고 치료를 위해 잠시 팀을 떠났다.

웨스트가 병과 싸우는 동안 팀에서는 웨스트를 위해 많은 배려를 했다. 웨스트 스스로가 말하기 전에는 그의 병에 대해 절대 언급하지 않았고 그의 사생활을 지켜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르브론과 앤더슨 바레장을 비롯한 동료들도 그에게 하루에도 몇 번씩 안부 전화를 하며 웨스트가 고독을 느끼지 않도록 노력했다.

2주 후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온 웨스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주전 슈팅가드’ 자리였다. 당초 이 자리에 나설 것으로 보이던 사샤 파블로비치가 좀처럼 컨디션을 회복하지 못하자 마이크 브라운 감독이 웨스트를 선택한 것이다. NBA에서 4년간 포인트가드로 뛰던 웨스트는 마침내 자신의 원래 포지션에서 뛰며 리딩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심리적 안정감은 곧바로 성적 향상으로 이어졌다. 윌리암스와 함께 뛰면서 그의 공격 우선순위는 선발 라인업에서 네 번째로 밀렸지만, 대신 왼손잡이의 특성을 최대한 살리며 확실한 찬스에서 부담 없이 슛을 던지는 등 공격 효율성을 크게 끌어올렸다. 51.4%의 야투율과 46.5%의 야투율은 커리어 최고 기록이고, 당초 출장시간이 줄어들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지난 시간보다 늘어난 평균 34.5분을 출장하고 있다. 코칭스태프가 그만큼 웨스트를 믿고 있다는 뜻이다. 팀 리더인 르브론 역시 ‘웨스트는 우리 팀에 꼭 필요한 선수다. 우리는 그가 없이는 우승할 수 없다’며 그를 칭찬했다.

코트 위에서의 견실한 플레이와는 달리 농구화를 벗은 웨스트는 대단히 재미있는 남자다. 스스로를 ‘자유로운 영혼’이라 부르는 웨스트는 자신을 예술가라 생각하고 있으며, 틈만 나면 그림 그리기나 시 짓기에 열중한다. 기자들과 인터뷰할 때면 의도적으로 라임을 살리며 랩을 하듯 답변하고, 알아듣지 못할 말을 떠들어댄다. 라커룸에서는 ‘Get The Money' 같은 노래를 큰 소리로 불러댄다. 노래 실력? 팀 동료 테런스 킨제이의 평가다.

“못 들어주겠습니다. 윌리암스나 깁슨도 음치지만 웨스트를 따라갈 수는 없어요. 웬만하면 들어주려 하지만 정말 끔찍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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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는 이런 독특한 캐릭터 때문에 클리블랜드에 온 지 얼마 안 됐는데도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팀 리더인 르브론과는 달리 아직 독신이기 때문에 여성팬들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다. 이런 웨스트의 이상형은 어떨까? “제 영혼은 자유롭습니다. 어떤 스타일의 여성이라도 괜찮아요. 하지만 전 아직 젊고 농구선수로써의 인생을 좀더 즐기고 싶습니다.”

웨스트는 그리 순탄한 인생을 살아오지 못했다. 하지만 웨스트는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보고 진지하게 해결할 줄 아는 진정한 용기를 갖췄다. 모든 고난을 훌륭히 극복해온 웨스트는 이제 저 앞을 바라보고 있다. 그의 몸에 새겨진 문신 문구처럼 ‘Sunshine After Rain'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웨스트가 따스한 햇살을 느끼는 날, 무려 30여년간 어느 프로팀도 우승하지 못한 클리블랜드에도 마침내 성공의 빛이 찾아들 것이다. 그리고 그 날이 올 때까지 웨스트의 쉼없는 전진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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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에 이어 이번 시즌에도 크리스 폴의 활약이 대단하다. 개인적으로 앤퍼니 하더웨이 이 후 이렇게나 번뜩이는 센스를 보여주는 포인트 가드는 참으로 오랜만인 것 같다. 작은 키로 인간 장대 숲을 헤치고 다니며 상대 수비진을 와해하는 모습은 가히 압권이다.

그런 폴을 처음 보았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난 선수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오늘의 주인공이다.
그는 레지 밀러처럼 단 한 팀만을 위해 플레이했던 선수는 아니지만 그에 못지않은 위대한 프랜차이즈 플레이어로 손꼽힌다. 그의 컴백은 마이클 조던처럼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지 못했지만 그에 못지않은 감동을 주었다.

"불꽃 선즈"라는 신조어를 낳으며, 이제는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는, "피닉스=공격" 이라는 공식을 처음 성립한 선수. 제이슨 키드, 스티브 내쉬가 활약하기 이전에 이미 피닉스의 돌격 대장으로 적진을 누비던 포인트 가드. 절정의 기량을 뽐내던 하킴 올라주원에게 6-1 이라는 작은 키로 인 유어 페이스 덩크슛을 작렬시킨 선수. 그리고 얼마 전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탄생할 무렵, 새크라멘토 역사상 최초의 흑인 시장으로 등극한 선수.

이번에 만나볼 '그 때 그 선수'는 바로 케빈 존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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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그리고 트레이드

1987년 NBA 드래프트. 당시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는 1라운드 7번 픽을 가지고 있었다.
앞서 5, 6번 순위로 훗날 전설이 될 스카티 피펜과 케니 스미스의 이름이 호명된 직후, 클리블랜드의 팬들과 전문가들은 팀이 취약 포지션인 스몰 포워드의 선수를 호명할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최고의 적임자로 앨라배마 출신의 데릭 맥키가 손꼽혔고 아직 그는 어느 팀에게도 지명되지 않은채 부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 기다림이 지나고, NBA 커미셔너 데이비드 스턴이 단상으로 올라와 입을 열었다.
"1987년 NBA 드래프트,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는... 캘리포니아 대학의 케빈 존슨을 지명했습니다."

순간 장내는 술렁이기 시작했고, 클리블랜드 팬들은 야유를 쏟아냈다. 드래프트 중계진들도 다소 의외의 선택이었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클리블랜드에는 이미 지난 드래프트에서 두 명의 공격형 가드를 선발했었기 때문이다. 바로 1년 전 1라운더 신인으로 영입했던 론 하퍼는 평균 22.9득점을 기록하며 신인왕 투표 2위를 차지했고, 2라운더 신인이던 마크 프라이스 역시 리그에서의 성공 가능성을 열어가고 있었다.

1년 앞서 MLB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에서 유격수로 지명되기도 했던 만능 스포츠맨이었으나 과감히 농구의 길을 선택한 존슨의 리그 데뷔는 그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1라운드 2번의 지명권으로 아몬 길리엄을 선발했던 피닉스 선즈는 야유를 받으며 클리블랜드의 모자를 받아든 작은 선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아니 지켜보기는 한 것일까? 훗날 피닉스의 전설이 될 그 선수의 등장을 말이다.

그렇게 데뷔한 존슨은 모두의 예상대로 난관에 부딪혔다. 특히 프라이스의 눈부신 성장은 존슨의 입지를 좁게만 만들었다. 신인으로써 준수한 활약을 보이고 있었음에도 좀처럼 그에겐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클리블랜드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던 그에게 커리어를 송두리째 바꾸어놓을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포인트 가드의 부재로 힘들어하던 피닉스 선즈가 부상으로 신음하던 스타플레이어 래리 낸스에 마이크 샌더스를 패키지로 클리블랜드의 케빈 존슨, 타이론 코빈, 마크 웨스트와의 2 : 3 트레이드에 합의했던 것이다. 신인 시즌을 마치기도 전에 새로운 팀으로 이적하게 된 존슨은 피닉스에서 눈부신 비상을 시작한다. 이적과 동시에 팀의 주전 가드 자리를 꿰찬 그는 연일 맹활약을 펼쳤고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


불꽃 선즈의 돌격 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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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시작된 두 번째 커리어 1988-89 시즌. 존슨은 81경기에 모두 선발 출장하며 결국 사고를 치고 만다. 시즌 평균 20.4 득점, 12.2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이전까지 단 세 명만이 성공했던 '20-10 슈퍼 포인트 가드' 패밀리의 일원이 된 것이다. 존슨 이전에 시즌 평균 20득점-10어시스트를 기록했던 세 명의 선수들은 오스카 로버트슨, 매직 존슨, 아이재이아 토마스였다.
2008년 11월 현재까지도 시즌 평균 20득점-10어시스트를 기록한 선수는 단 다섯 명뿐이다. 존슨 이 후 팀 하더웨이(1991-92, 1992-93)와 크리스 폴(2007-08)만이 20-10 클럽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단연 압도적인 활약을 펼친 존슨은 당당히 MIP(최고 기량 발전상)을 수상하며 NBA 세컨드 팀에 이름을 올렸고, MVP 투표에서도 8위에 이름을 올리며 당당히 자신의 전성시대를 열어가기 시작했다. 이어진 1989-90, 1990-91 시즌에서도 연속으로 평균 20득점-10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로버트슨, 토마스와 함께 리그 역사상 단 세 명뿐인 '세 시즌 연속 20-10에 성공한 선수'로 기록 되었다.

존슨의 20-10 기록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를 해보자면
앞서 말했듯이 세 시즌 연속 20-10을 달성했고, 1989-90 시즌에는 매직 존슨과 더불어 유이하게 50+%의 필드골 성공률을 기록한 20-10 멤버가 되었으며 (50.5%), 1990-91 시즌에는 리그 역사상 유일하게 20-10을 달성하는 동시에 2개 이상의 스틸을 기록한 선수로 기록되기도 했다. (2.1개)
(훗날 2007-08 시즌의 크리스 폴이 20-10과 함께 2.7개의 스틸을 기록하며 존슨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이런 존슨의 눈부신 성장과 함께 피닉스의 성적도 수직 상승하기 시작했다. 존슨을 영입한 이 후 28승을 기록하던 팀은 단숨에 55승을 기록하며 전년도 대비 +27 승을 기록했고, 플레이오프에 출전조차 하지 못했던 팀이 곧바로 2년 연속 컨퍼런스 파이널에 진출하는 강팀으로 성장했다. "불꽃 선즈"로 일컬어지며 런앤건을 주 무기로 하는 리그 최고의 공격 팀으로 거듭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존슨이 처음 피닉스에 합류하던 1987-88 시즌 당시, 팀은 평균 107점을 득점하며 팀득점 부문 리그 14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으나 바로 이듬해인 1988-89 시즌에 평균 113.1점을 득점하며 단숨에 리그 2위의 득점력을 자랑하는 공격 팀으로 거듭났다. 그 중심에 케빈 존슨이 있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존슨의 공격은 오직 "돌파"였다. 그의 커리어 통산 3점슛 성공률은 30.5%에 그칠 만큼 정교한 외곽 슛을 가진 선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에겐 리그 역사상 최고로 손꼽히는 돌파 능력이 있었다. 지금도 그의 돌파를 회상하며 추억에 잠기는 팬들이 많으리라 생각한다. 현란한 드리블링과 번개와도 같았던 스피드를 이용한 돌파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는 전장과도 같았던 골밑을 향해 돌격하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작은 체구의 존슨은 몇 번이고 넘어지고 넘어지면서도 돌파를 감행했고, 이는 곧 득점으로 이어졌다.

평균 10개 이상의 어시스트를 기록하기도 했던 만큼 그는 훌륭한 패서이기도 했다. 상대 수비진을 완벽히 농락하는 돌파를 성공시킨 뒤 킥아웃 패스를 연결하는 것은 물론이고 노룩 패스, 비하인드 백패스 같은 고난이도 패스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운동 능력 역시 엄청난 것이어서 리그 최고의 스피드와 순발력을 자랑했고, 고무공 같은 탄력을 뽐내며 상대팀의 장신 센터들을 앞에 두고 폭발적인 덩크슛을 터뜨리기도 했다.

훌륭한 플레이메이커이기도 했던 존슨은 수비수로써도 훌륭한 선수였다. 상대팀 가드들은 빠른 발과 엄청난 활동량을 앞세운 존슨의 프레싱에 곤욕을 치르곤 했다. 퍼리미터 디펜스 능력도 준수해서 상대 선수의 외곽 슛을 효과적으로 봉쇄했으며 패싱레인을 자르는 가로채기 능력도 훌륭했다. 작은 키에 비해 훌륭한 리바운더이기도 했다.

돌파를 시도할 때면 시선을 아래로 향하는 버릇이 있어 코트 비전에 다소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지만, 전성기의 존슨이 보여주던 돌파는 그런 것쯤은 가볍게 상쇄하고도 남을 위력을 가진 것이었다.

그가 가진 문제는 외곽슛 능력과 기복이 있었던 득점력, 그리고 부상뿐이었다. 특히 작은 체구를 이끌고 인간 장대 숲을 향해 돌격하고 돌격하던 플레이 스타일 탓에 크고 작은 부상은 언제나 그를 괴롭혔다. 이런 측면에서 그의 부족한 외곽슛 능력은 더욱 아쉽게 다가온다. 만약 존슨에게 예리한 외곽슛 능력이 있었다면 그의 커리어가 조금은 더 길어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빛과 그림자

피닉스는 존슨을 중심으로 성장하며 서부 컨퍼런스의 강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챔피언십을 노리기에는 어딘지 부족한 느낌을 지우지 못했다.
1992-93 시즌을 앞둔 피닉스는 엄청난 결단을 내린다. 새로운 사령탑으로 폴 웨스트폴 감독을 선임함과 동시에 팀의 스코어링 리더였던 제프 호너섹, 스타팅 빅맨이었던 팀 페리와 앤드류 랭을 트레이드 패키지로 하여 필라델피아의 찰스 바클리와 3:1 트레이드를 단행한 것이다. 물론 바클리가 엄청난 스타플레이어이긴 했으나, 팀의 주축으로 활약하던 세 선수와 단 한 명의 선수를 트레이드 시킨 것은 당시 커다란 이슈가 되었다.
이 엄청난 도박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팀은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고의 시즌을 보내며 62승 20패를 기록, 정규 시즌 우승팀이 되었고 바클리는 피닉스가 NBA에 가입한 이 후 최초의 MVP 수상자가 되었다.

하지만 피닉스의 상징과도 같았던 존슨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는 데뷔 이 후 가장 많은 결장을 기록해야 했다. 시즌 초반부터 부상으로 인해 잦은 결장을 계속해야 했고, 이는 결국 커리어 내내 그를 괴롭히던 부상 악몽의 시작이 되었다.
(이 후 그는 1996-97 시즌을 제외하고, 단 한 차례도 70경기 이상 출장하지 못한다.)
더해서 1993년 3월 23일 뉴욕과의 경기에서 언쟁을 일으켜 두 경기 출장 정지를 당하기도 하는가 하면, 팀의 중심이 자신에게서 바클리로 이동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하지만 존슨은 진정한 팀플레이어였고 누구보다 강한 선수였다. 그는 조금도 팀에 불만을 갖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되레 조금씩 다가오는 챔피언십 트로피를 향한 각오를 다질 뿐이었다.
피닉스의 기세는 플레이오프에서도 계속됐다. 1라운드에서 레이커스를 맞아 3-2로 승리한 그들은, 2라운드에서 샌안토니오를 상대로 4-2의 승리를 기록했고,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시애틀을 만나 최종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꿈에 그리던 파이널 진출에 성공한다. 그들의 마지막 상대는 그 어마어마한 마이클 조던의 시카고. 당시 바클리와 조던의 격돌은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고 두 팀은 연일 혈전을 펼쳤다.

그러나 정작 존슨은 꿈에 그리던 파이널 무대에서 최악의 부진을 겪고 있었다. 파이널 6게임을 치루는 동안 존슨의 평균 필드골 성공률은 시즌 기록에 한참 못 미치는 42%에 머물렀고 평균 17.1 득점, 3 리바운드, 6.5 어시스트와 함께 4.3 개의 턴오버를 기록하는데 그쳤다. 1992-93 시즌 당시 부진하다는 평을 듣던 존슨의 정규 시즌 기록이 16.1 득점, 2.1 리바운드, 7.8어시스트, 3.1 턴오버, 필드골 성공률 49.9% 였음을 감안해본다면 기대에 크게 못 미치는 활약이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팬들의 야유를 사게 된 것은 파이널의 마지막 장면 때문이었다. 흔히 1993년 파이널은 시카고 존 팩슨의 역전 3점슛과 함께 끝이 난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 뒤에 아주 조금의 이야기가 더 남아 있다.
팩슨의 역전 슛이 성공되고 나서도 경기 종료까지는 3.9초가 더 남아있었다. 타임아웃 이 후 하프 라인에서 공격을 시도한 피닉스의 선택은 케빈 존슨이었다.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던 존슨의 돌파를 믿은 것이다. 파울로 슛을 끊어버린다 하더라도 걱정 없었다. 존슨은 정확한 자유투 슈터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장면이 연출됐다. 경기 내내 1득점 7리바운드를 잡는데 그쳤던 호레이스 그랜트가 존슨의 공을 블록한 것이다. 존슨은 슛을 제대로 시도해보기도 전에 공을 빼앗겨 버렸고 피닉스의 시즌은 그대로 종료되고 말았다.

팬들은 존슨을 향해 커다란 야유를 보냈다. 바클리는 "존슨을 욕하는 이들은 팬이 될 자격이 없다. 존슨이 없었다면 우리는 파이널까지 올라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라며 존슨을 옹호했지만 결국 그 이 후 바클리도, 존슨도 다시는 파이널 무대를 밟지 못했다.


조용히 돌아서다

아쉬운 파이널을 뒤로 하고 맞이한 1993-94 시즌. 마이클 조던의 은퇴와 함께 춘추 전국 시대가 열렸다.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는 단연 전년도 준우승 팀 피닉스.
비록 그들은 2년 연속 휴스턴의 벽에 가로막혀 플레이오프 2라운드에서 눈물을 삼켜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빈 존슨은 지난 파이널의 부진을 씻어내며 1993-94 시즌을 통해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1994년 여름에는 드림팀 2의 일원으로 세계 농구 선수권 대회에 참가하여 금메달을 목에 걸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을 마지막으로 조금씩 하향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부상이었다.

1996-97 시즌을 앞두고, 더 이상 피닉스에서 우승을 노릴 수 없음을 직감한 바클리는 휴스턴으로 떠나갔다. 존슨은 다시 한 번 팀의 중심이 되어 평균 20.1 득점, 9.3 어시스트를 기록, 전성기에 버금가는 활약을 펼치지만 이듬해인 1997-98 시즌을 부상으로 인해 50경기에 출장하는 것에 그치며 쓸쓸히 은퇴를 선언했다.
당시 피닉스는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샌안토니오에게 패배하며 시즌을 마감했고, 팀의 중심은 댈러스에서 이적해온 제이슨 키드의 몫이었다.


불타는 석양

새로운 밀레니엄을 여는 1999-2000 시즌, 피닉스는 올랜도로부터 슈퍼스타 앤퍼니 하더웨이를 영입하며 다시 한 번 우승에 도전했다. 특히 당시 키드와 하더웨이의 만남은 "백코트 2000" 이라는 신조어를 낳을 정도로 큰 기대를 받았다. 두 선수가 번갈아가며 잦은 부상에 시달리느라 그들의 조합을 자주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둘은 서로가 함께 했던 42경기에서 무려 30승을 거두며 7할대의 승률을 기록, 기대에 부응하고 있었다.

그러던 2000년 3월 22일. 새크라멘토와의 경기에서 사고가 나고 말았다. 키드가 부상을 당하며 남은 정규 시즌을 포기해야 한다는 판정을 받은 것이다. 남은 잔여 시즌 경기는 무려 15경기에 달했다. 하더웨이와 콤비를 이룰 주전 포인트 가드는 고사하고 백업 자원조차 부족했던 피닉스에겐 작지 않은 위기였다.

이 때 조용히 나타난 선수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2년 전에 은퇴를 선언했던 케빈 존슨이었다. 팀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홀연히 컴백한 그는 남은 15경기 중 6경기에 출장하며 6.7 득점, 4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활약했다. 비록 전성기와 같은 모습을 보여 주진 못했지만, 팀의 전설과도 같은 그의 합류는 선수들에게 큰 자극제가 되었다.
이 후 플레이오프에서는 키드의 복귀로 경기당 3분여의 시간만을 출장할 수 있었고, 훗날 결국 우승을 차지한 레이커스에게 플레이오프 2라운드에서 패배하며 시즌을 마무리했다.

시즌 종료 후, 다시 한 번 피닉스를 위해 뛰어주길 원하는 팬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존슨은 조용히 두 번째 은퇴를 선언하며 영원히 코트를 떠났다.


영원한 피닉스의 태양 KJ

두 번째 은퇴 직 후인 2000-01 시즌. 피닉스는 존슨의 고향 팀인 새크라멘토와의 경기가 열린 2001년 3월 7일, 그의 영구 결번식 행사를 가졌다. 얄궂게도 당일 경기에서 피닉스는 크리스 웨버에게 무려 41점을 내어주며 89-100 으로 대패했는데, 도무지 존슨과 피닉스의 궁합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클리블랜드에서 가려있던 존슨이 피닉스로 이적하며 화려하게 비상한 것을 보면 환상의 궁합을 자랑하는 것 같지만, 정작 팀이 파이널 무대에 진출했을 때 존슨이 극악의 부진을 보인 것이나 영구 결번식 행사를 가진 날에 팀이 대패하는 등 묘하게 어긋나고 있는 것도 같다.

은퇴 직 후인 2000-01 시즌에 NBA on NBC 중계 진으로 활약하기도 했던 존슨은, 이 후 자신의 재단을 설립하여 청소년들의 교육과 지역 주민들을 위한 자선 사업을 펼치고 있다. 최근에는 정계에도 진출해 얼마 전 새크라멘토 사상 최초의 흑인 시장이 되었다고 한다. 코트 밖에서도 열정적인 그의 '돌파'는 계속 되고 있는 셈이다.

화려한 돌파로 대표되는 자신의 플레이처럼 짧지만 강렬한 커리어를 보낸 케빈 존슨. 수상 경력이라고는 MIP 트로피가 전부인 그이기에, 어쩌면 코트 위 그의 모습이 조금은 빠르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갈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더욱 그의 모습을 또렷하게 간직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불꽃 선즈"의 초대 돌격 대장이 코트를 질주하던 모습을 말이다.


Kevin Johnson (1988-199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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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통산 1051경기 출장(727선발)
평균 17.9득점, 3.3리바운드, 9.1어시스트, 34.1분 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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