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 & COLUMNS/HELTANT79 2009. 9. 28. 16:57

칠전팔도-클리블랜드의 FA 영입

BY 알 수 없는 사용자

클리블랜드는 오프시즌이 시작될 무렵 지니고 있던 가장 큰 트레이드 자산인 벤 월러스/사샤 파블로비치의 만기계약 카드를 샤킬 오닐 영입에 올인했고, 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권을 소위 '알박기'에 썼다. 대니 페리 단장이 일부러 말할 것도 없이 누구든지 클리블랜드가 오프시즌 FA시장에서 활발히 쇼핑에 나설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드래프트를 마감한 시점에서 클리블랜드가 FA 영입에 쓸 수 있었던 '실탄'은 다음과 같았다.

  • 미드레벨 익셉션(약 5.8백만 달러)
  • 바이애뉴얼 익셉션(약 2백만 달러)
  • 베테랑 미니멈 익셉션(최대 약 1백만 달러)

클리블랜드는 이들 카드를 이용해 장신 윙 플레이어, 득점이 가능한 파워포워드, 베테랑 가드 등을 영입하려 했다. 또한 옵트아웃을 통해 비제한 FA가 될 수 있었던 앤더슨 바레장과의 재계약도 성사시켜야 했다.

클리블랜드가 FA 시장을 노리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선수들이 소문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중 상당수는 실제로 클리블랜드와 협상을 했고, 영입 성사 직전까지 간 선수들도 있었다. 하지만 여러 대내외적인 요인 때문에 클리블랜드는 창단 이후 가장 분주한 여름을 보내야 했다. 이번 순서에서는 전력 강화를 위해 페리 단장이 FA 시장에서 겪은 일들을 살펴본다.



Mavs-Bucks


찰리 빌라누에바


인사이드의 지배자인 오닐이 클리블랜드 유니폼을 입자 가장 먼저 거론된 이름은 찰리 빌라누에바(당시 밀워키 벅스)였다. 그동안 오닐과 호흡을 맞춘 파워포워드들은 모두 중거리슛이 가능한 선수들이었다. 올랜도 시절의 호레이스 그랜트, 레이커스 시절의 그랜트와 로버트 오리, 마이애미 시절의 유도니스 하슬렘은 모두 오닐이 만들어준 미들레인지 공간을 잘 활용하며 우승을 일궈낸 '스트레치 파워포워드'였다. 클리블랜드는 주전 파워포워드 바레장의 미들슛 능력이 전무했기 때문에, 오닐 영입의 이점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스트레치 파워포워드가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211cm의 신장에 3점슛까지 가능한 빌라누에바는 이런 클리블랜드의 요구에 딱 맞는 선수였다. 특히 지난 시즌 플레이오프에서 클리블랜드를 침몰시킨 올랜도의 라샤드 루이스에게는 최적의 대항마로 보였다. 팀의 에이스 르브론 제임스와는 어린 시절부터 또래 친구였으며 모리스 윌리암스와도 밀워키 시절 절친한 사이였음이 알려지며 빌라누에바 영입 가능성은 높아져갔다. 빌라누에바 역시 오닐이 클리블랜드로 트레이드된 직후 '클리블랜드는 나같은 선수를 원한다'는 글을 트위터에 올리는 등 클리블랜드 행에 큰 관심을 보였다. 퀄리파잉 오퍼 권한을 가졌던 밀워키가 재정 압박때문에 빌라누에바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자 클리블랜드가 5.8백만 달러의 미드레벨 익셉션을 모두 써서 빌라누에바를 영입할 것이란 추측이 기정사실화되기도 했다.

하지만 클리블랜드의 빌라누에바 영입 시도는 의외의 암초를 만나 좌절됐다. 당초 빌라누에바에게 미드레벨 익셉션 금액 이상을 제시할 수 있는 팀은 네 팀이었다. 이중 파워포워드가 필요한 팀은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였지만 조 듀마스 디트로이트 단장은 유타의 올스타 파워포워드 카를로스 부저 영입에 주력하고 있었다. FA가 될 수 있는 권리를 지니고 있던 부저는 새 팀과 거액의 계약을 맺을 걸로 예상되고 있었기 때문에, 클리블랜드의 빌라누에바 영입 경쟁 팀에 애시당초 디트로이트는 포함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 FA 시장에서 원하는 만큼의 큰 계약을 이끌어낼 수 없음을 알게 된 부저가 유타 잔류를 선언하자 모든 상황이 바뀌었다. 부저 영입 실패로 돈 쓸 곳이 없어진 디트로이트가 빌라누에바에게 연평균 8백만 달러의 장기계약을 제시했고, 벌써 클리블랜드 유니폼을 입은 것처럼 말하던 빌라누에바는 망설임 없이 디트로이트를 선택했다. 아직 젊은 빌라누에바는 금전적인 이익을 포기하면서까지 우승권 팀으로 갈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FA 시장에서 처음으로 노린 빌라누에바의 영입에 실패하면서 클리블랜드의 FA영입은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Pistons vs. Cavaliers


라쉬드 월러스/안토니오 맥다이스

어제의 숙적이 오늘의 동지로? 클리블랜드의 오랜 라이벌 디트로이트의 골밑을 지난 시즌까지 책임졌던 월러스와 맥다이스도 소문의 주인공이었다. 이들은 빌라누에바와 같은 수준의 중거리슛 능력을 지닌데다가 빌라누에바에게는 기대할 수 없는 수비력까지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이가 많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어차피 오닐을 영입한 시점에서 클리블랜드의 목표는 '지금 당장 우승하기'가 되었으므로, 이들에게 2년 이상의 미드레벨 익셉션 계약을 제시해서 오닐의 파트너로 쓸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FA 시장이 시작되 전부터 클리블랜드가 월러스에게 2년 계약을 제시했다는 말이 돌기도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페리 단장은 월러스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맥다이스에게는 다소 관심이 있었으나 미드레벨 익셉션을 모두 쓸 생각은 없었다. 보스턴 셀틱스의 빅3가 닥 리버스 감독과 함께 월러스를 방문해 보스턴행을 설득하는 동안 페리 단장은 월러스에게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 라스베거스에서 다음에 언급될 론 아테스트와 트레버 아리자 스카우트에 전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맥다이스에게도 2백만 달러 가량의 바이애뉴얼 익셉션을 쓸 생각은 있었지만 미드레벨 익셉션을 쓸 생각은 없었다. 그러는 사이 월러스는 보스턴과, 맥다이스는 샌안토니오 스퍼스와 다년계약을 맺으며 리그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Pacquiao and Cotto Press Conference


론 아테스트/트레버 아리자


FA 협상기간 첫 주동안 침묵을 지키던 페리 단장은 미국 독립기념일 주말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이크 브라운 감독과 함께 라스베거스로 날아가 여러 FA를 만난 것이다. 조쉬 칠드레스, 션 매리언 등 여러 이름이 나왔지만 페리 단장이 진심으로 노린 것은 론 아테스트(당시 휴스턴 로케츠)와 트레버 아리자(당시 LA 레이커스)였다. 두 선수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원소속팀을 떠날 예정이었기 때문에 페리 단장은 둘 중 하나에게 미드레벨 익셉션 전액을 제시하면 잡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2미터대의 신장으로 강력한 수비력을 지닌 이 두 선수는 클리블랜드의 약점 중 하나인 장신 윙플레이어 부재를 말끔히 해결해줄 수 있을 걸로 생각되었다.

페리 단장은 먼저 아테스트와 접촉했다. 라스베거스에서 아테스트의 매니저와 만난 페리 단장은 미드레벨 익셉션 전액을 제시했다. 그런데 여기에 레이커스가 끼어들었다.
라마 오덤의 재계약을 앞둔 레이커스는 아리자와의 재계약을 포기하고 대신 아테스트와 접촉했다. 레이커스가 제시할 수 있는 최대 금액은 클리블랜드와 같은 미드레벨 익셉션 전액 뿐이었다. 아테스트 급의 선수를 잡기에는 다소 부족한 금액이었으나 레이커스는 계약을 제안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아테스트 본인이 진작부터 레이커스행 의사를 공공연히 밝히곤 했기 때문이다. 오덤과 죽마고우이자 래퍼이기도 한 아테스트는 오덤과 헐리우드가 있는 LA를 동경하고 있었다. 2008 파이널에서 레이커스가 패배한 직후 샤워실에 들러 코비에게 '너를 우승시켜주겠다'고 말한 후 사라진 일화도 있었다. 아테스트는 클리블랜드행도 진지하게 고려했으나 결국 레이커스행을 선택했다. 오닐의 클리블랜드 입단식이 열렸던 6월 2일의 일이었다.

이제 레이커스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아리자는 클리블랜드를 비롯한 여러 팀과 협상을 벌였다. 클리블랜드는 아테스트 때와 똑같은 미드레벨 익셉션 전액을 제시했고, 주전 스윙맨 트레이스 맥드래디의 복귀가 불투명한 휴스턴 역시 똑같은 금액을 제시했다. 야오 밍까지 부상당한 휴스턴은 우승 전력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전년도 우승팀 출신 아리자가 승리를 위해 클리블랜드를 선택할 것이란 예측이 우세했다.

하지만 클리블랜드는 이번에도 헛물을 켰다. 아리자가 휴스턴행을 선택한 것이다. 올여름 FA 시장에서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계약을 이끌어낼 수 없다고 판단한 아리자는 다음 계약을 위해 조금이라도 많은 역할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우선시했고, 주전으로 나오더라도 르브론, 모리스 윌리암스, 오닐에 이어 네 번째 옵션에 불과할 클리블랜드보다는 팀의 기둥인 야오 밍과 맥그래디의 공백으로 많은 역할을 확보할 수 있는 휴스턴 쪽이 더 매력적이었다.

금전 문제도 클리블랜드의 발목을 잡았다. 클리블랜드와 휴스턴이 제시한 계약 조건은 5년간 34백만 달러로 같았지만, 소득세율 차이때문에 실수령액에서 차이를 보인 것이다. 클리블랜드가 속한 오하이오 주는 미국에서 소득세율이 가장 높은 주 중 하나인 반면, 휴스턴이 속한 텍사스 주는 소득세율이 가장 낮은 주 중 하나였다. 이에 따라 아리자가 클리블랜드로 올 경우 2백만 달러에 가까운 금전적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아테스트와 아리자의 계약 실패는 빌라누에바나 월러스/맥다이스 영입 실패 사례와는 성질이 달랐다. 빌라누에바는 불가항력에 가까운 연봉차이가 있었고 월러스와 맥다이스는 페리 단장 본인이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아테스트와 아리자는 페리 단장이 직접 영입 작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한 것이다. 그것도 경쟁 상대와 똑같은 조건을 제시하고도 밀려났다. 협상력 부족이라는 비판을 들어도 할 말이 없었다. 클리블랜드라는 팀, 클리블랜드라는 도시가 FA에게 외면받고 있다는 비관론이 쏟아졌다. 그 와중에 클리블랜드에 와서 워크샵을 가진 첫 선수엿던 채닝 프라이는 더 많은 출장 기회를 얻기 위해 피닉스행 비행기를 탔고, 올랜도 매직이 에너지 넘치는 인사이더 브랜드 배스를 영입하는 등 경쟁팀들의 전력은 갈수록 강해져갔다.

이러다 아무도 못 건진 채 새 시즌을 맞이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던 7월 중순, 페리 단장이 그때까지 잃었던 점수를 순식간에 만회하기 시작했다.


basquetebol
basquetebol by delima[dubem] 저작자 표시비영리


바레장 재계약


이번 여름 옵트아웃 권리를 가지고 있었던 바레장이 FA를 선언하자 적잖은 클리블랜드 팬들이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바레장은 2년 전에도 재계약에 난항을 겪은 끝에 시즌이 한참 진행된 다음에야 팀에 합류했고, 이때문에 클리블랜드 인사이드진에 전체적으로 과부하가 걸린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 바레장은 준수한 벤치 플레이어 수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연봉 천만 달러를 요구하며 버텼는데, 지난 시즌 주전 파워포워드로 올라서며 생애 최고의 활약을 펼친 직후 FA를 선언한 것이다. 게다가 바레장의 에이전트는 악명 높은 댄 페건이었다. 팬들의 우려가 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페건도 이번만큼은 무턱대고 뻗댈 수 없었다. 당초 바레장과 페건이 FA를 선언하면서 기대한 연봉은 평균 천만 달러였는데, 경제 한파와 '2010 프로젝트'로 인해 올 여름 바레장에게 그런 거액을 안겨줄 팀은 없었던 것이다. 클리블랜드보다 많은 금액을 제시한 팀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바레장에게 계약을 제시한 팀이 없을 정도였다. 페건은 울며 겨자먹기로 클리블랜드로 돌아와 페리 단장과 마주앉을 수밖에 없었다.
바레장 말고도 FA 여러 명과 계약을 추진하고 있었던 페리 단장도 바레장 재계약을 질질 끌 이유가 없었다. 결국 쿨할 필요가 있었던 페리와 페건은 협상 개시 며칠 만에 바레장 재계약을 쿨하게 발표했다.

바레장의 계약 조건은 6년 계약(마지막 해는 팀 옵션)에 총액 48.3백만 달러였다. 연평균 8백만 달러가 조금 넘는 금액이다. 다른 팀과의 계약에 실패하고 막다른 곳에 몰린 선수에게 너무 후하게 쳐줬다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페리 단장은 바레장이 2010년 이후 르브론 의 동료로써 손색이 없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마지막 해 9.8백만 달러 중 약 7백만 달러는 비보장이다. 다시 말해 클리블랜드는 이제 27세가 된 바레장의 전성기 5년을 연평균 7.7백만 달러에 쓰고, 32세가 될 마지막 해에는 7백만 달러짜리 샐러리 비우기 카드로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클리블랜드로써는 결코 나쁜 조건이 아니다. 다년 계약으로 심리적 안정을 얻은 바레장도 올 여름 3년만에 처음으로 브라질 국가대표에 가세, 모든 면에서 한 단계 발전한 모습을 보이며 브라질이 세계선수권 미주지역 예선에서 우승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바레장과 재계약함으로써 파워포워드 부재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한 페리 단장은 장신 윙맨 영입에 박차를 가했다.


Anthony Parker told us in Hebrew
Anthony Parker by Nir Nussbaum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앤써니 파커/자마리오 문


페리 단장의 가장 큰 강점은 항상 '플랜 B'를 준비해놓고 있다는 점이다. 아테스트와 아리자 영입에 실패한 후에도 어김없이 플랜 B를 가동했다. 목표는 WNBA 슈퍼스타 캔디스 파커의 오빠로 유명한 앤써니 파커(당시 토론토)였다.

1975년생으로 34세을 맞은 파커는 미국보다 유럽에서 더 유명한 선수다. 필라델피아와 올랜도에서 세 시즌을 보내고 유럽리그로 향한 파커는 이스라엘의 마카비 텔아비브에서 뛰며 이스라엘 챔피언십 5회, 이스라엘컵 5회, 유로리그 3회 우승을 이끌었다. 2005년에는 유로리그 MVP를 수상하기도 했다. 페리 단장은 파커가 유럽에 있을 때부터 파커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파커가 오랜 유럽 생활을 마치고 NBA로 돌아왔을 때 적극적인 영입 노력을 펼쳤지만 파커를 데려오는 데는 실패했었다. 그로부터 3년 후 파커가 토론토와의 계약을 끝마치고 FA 가 되자 마침내 파커를 영입한 것이다. 토론토도 파커를 놓치기 아까웠지만 히도 터콜루를 영입하는 과정에서 파커의 버드 권리를 포기하는 바람에 클리블랜드에 영입 기회가 온 것이다. 계약 조건은 미드레벨 익셉션의 일부인 2년간 총액 5백만 달러였다.

198cm의 스윙맨인 파커는 준수한 운동능력과 정교한 슈팅 능력, 견고한 수비력과 리딩까지도 가능한 패싱 능력을 모두 갖춘 선수다. 주 포지션은 슈팅가드지만 필요에 따라 스몰포워드와 포인트가드도 볼 수 있는 올 어라운드 플레이어다. 랜스 블랭스 부단장은 파커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효율적인 선수'라며 '힘든 영입 경쟁을 극복하고 파커를 얻어서 기쁘다'고 말했다. 파커 역시 클리블랜드에서 뛸 수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며 팀에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파커를 영입한 지 일주일 후, 페리 단장은 마이애미의 장신 스윙맨 자마리오 문을 영입하며 윙 플레이어 보강을 마쳤다. 문은 흔히 '빈자의 트레버 아리자'로 불리는 선수다. 아리자의 몸값(이번 여름 기준)보다 훨씬 싼 가격으로 비슷한 활약을 해주기 때문이다. 지난 시즌 르브론이 쉬는 동안 상대 스윙맨을 막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던 클리블랜드는 203cm의 장신에 뛰어난 운동능력과 수비력을 갖춘 문의 가세로 커다란 구멍을 메운 셈이다. 피닉스 선즈의 포워드 맷 반즈 역시 클리블랜드 행을 희망했지만, 페리 단장의 선택은 수비력이 더 나은 문이었다.

아테스트나 아리자 한 선수에게 썼을 돈으로 파커와 문이라는 준수한 윙 플레이어 두 명을 영입한 페리 단장은 이제 파워포워드 보강으로 눈을 돌렸다.


Boston Celtics vs Denver Nuggets in Denver


리온 포우


션 메이(당시 샬럿 밥캐츠)와 하킴 워릭(당시 멤피스 그리즐리스)을 모두 지나치며 파워포워드 자원 보강에 관심이 없는 듯했던 페리단장은 누구도 예상 못한 계약을 터뜨렸다. 보스턴의 백업 인사이더 리온 포우를 미니멈 계약으로 영입한 것이다.

지난 시즌 무릎에 큰 부상을 입어 내년 2월까지 출장이 불가능한 포우는 보스턴이 자신에게 일찌감치 재계약을 제안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포우의 재기 가능성을 확신하지 못한 보스턴은 포우에게 얼마를 제시해야 할 지 몰라 주저하고 있었고, 포우는 보스턴이 자신을 대우하는 방식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이런 사정을 감지한 페리 단장은 포우에게 미니멈 계약을 제시했다. 첫 해엔 0.84백만 달러, 2년째에는 비보장으로 0.91백만 달러라는 조건이었다. 달리 갈 곳이 없었던 포우는 승락 의사를 밝혔고, 그 후 포틀랜드와 댈러스, 멤피스, 그리고 보스턴이 뒤늦게 계약 의사를 타진했으나 스스로 남아일언 중천금을 외치는 포우의 결정을 되돌리지는 못했다.

203cm의 단신 파워포워드인 포우는 리그에서 가장 터프한 선수 중 하나이다. 신장은 작은 편이지만 탄탄한 근육에서 뿜어져나오는 힘이 강하기 때문에, 일단 골밑에서 볼을 잡으면 높은 확률로 득점으로 연결시킨다. 근성이 뛰어나 리바운드에도 능하고 탄탄한 몸을 이용한 골밑 수비에도 일가견이 있다.

포우는 현재 생애 세 번째 무릎 수술을 받고 재활중이다. 빨라야 1월 말에나 복귀할 수 있고 복귀한다고 해도 과거의 움직임을 보여줄 지는 미지수다. 따라서 페리 단장의 포우 영입은 일종의 도박인 셈이다. 다만 리스크는 적고 배당은 높은 도박이다. 포우가 재기에 실패한다해도 클리블랜드가 잃는 것은 0.84백만 달러의 이번 시즌 확정 연봉 뿐이다. 하지만 재기에 성공해 2008년 파이널 2차전에서 14분 동안 21점을 올리던 모습으로 돌아온다면, 플레이오프에서 클리블랜드 골밑은 그 어느 팀보다도 강한 골밑이 될 것이다.

물론 대가는 있었다. 포우가 활약할 경우 출장시간이 줄어들 것을 염려한 베테랑 파워포워드 조 스미스가 클리블랜드와의 재계약을 거부하고 애틀랜타로 향한 것이다. 팀에서 거의 유일한 '스트레치 파워포워드'였던 스미스의 이탈은 페리 단장에게 새로운 고민거리를 안겼다.


끝나지 않은 선수 영입

페리 단장은 우여곡절 끝에 장신 윙플레이어 두 명을 확보하는 한편 FA 선언을 한 바레장을 지켜냈다. 포우를 미니멈 계약으로 영입하며 모험수를 던지기도 했다. 굵직굵직한 FA들을 자의반 타의반으로 놓치긴 했지만, 이후 영입한 멤버들도 충분히 경쟁력 있는 선수들이다.

하지만 트레이닝 캠프를 맞이하면서도 페리 단장의 행보는 멈추지 않고 있다. 바레장, 포우와 계약했지만 아직 '스트레치 4번'의 공백은 남아있으므로 지난 시즌까지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서 뛰었던 2년차 포워드 랍 커즈를 비보장 계약으로 초청했고, 대럴 잭슨 등의 비보장 카드를 이용해 베테랑 가드와 사인앤트레이드를 추진한다는 소식도 들리고 있다.

2005년 클리블랜드 단장으로 취임한 이래 페리 단장은 '트레이드는 귀신, FA영입은 등신'이라는 소리를 들어왔다. 모리스 윌리암스 트레이드나 2008년의 빅딜 등으로 트레이드 능력은 인정받았지만, 래리 휴즈, 도넬 마샬, 데이먼 존스 등 이른바 '휴즈 패키지'와 장기계약을 맺는 등 FA 시장에서는 많은 오점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런 페리 단장이 이번 여름 드디어 승부수를 던지며 그 어느 때보다도 분주한 여름을 보냈다. 시즌이 시작되면 페리 단장의 FA 영입이 이번에는 '귀신'일지 '등신'일지 모두가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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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adams님이 촬영한 Go Cavs.

샤킬 오닐 트레이드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6월 25일(이하 미국 현지시각), 대니 페리 클리블랜드 단장은 기자들의 주목을 받으며 드래프트 행사장에 도착했다. 바로 전날 이루어진 대형 트레이드로 2009-2010 시즌 목표가 우승임을 분명히 한 페리 단장이 드래프트에서 클리블랜드의 1라운드 30번과 2라운드 46번 지명권보다 높은 순위의 지명권을 확보할 것이며, 전날 핵심 선수의 유출 없이 트레이드를 성사시킨 것은 이들을 드래프트 당일 트레이드에 쓰려 했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이번 드래프트는 유망주가 부족과 경제 불황 등의 이유로 반드시 필요한 선수가 아니면 신인을 로스터에 추가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그러다 보니 10순위 밖의 선수들은 평소같으면 충분히 뽑혔을 기량을 갖췄는데도 죽죽 미끄러졌다. 클리블랜드가 진작부터 노려오고 있었다는 피츠버그 대학의 샘 영을 비롯해 많은 유망주가 1라운드 후반까지 지명되지 않고 있었다.

마침내 1라운드 마지막 지명권을 클리블랜드가 행사할 시간이 돌아왔고, 클리블랜드 측에서 선수 이름을 써서 제출한 종이를 든 데이빗 스턴 총재가 단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스턴 총재는 1라운드 지명자만 직접 호명하므로 이것이 그날 스턴 총재의 마지막 호명이었다. 거의 모든 팬들이 당연히 샘 영의 이름이 불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198cm의 스윙맨인 영은 클리블랜드가 그토록 원했던 장신 스윙맨이었고 4학년을 마친 즉시전력감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피츠버그 대학 감독과 페리 단장은 친분이 돈독한 사이였고 대학농구 시즌 중에 영을 꾸준히 관찰해오기도 했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With the 30th pick, Cleveland Cavaliers select........." 순간 스턴 총재의 눈에 짜증 비슷한 곤혹스러움이 스쳐갔다. 종이에 적혀있는 선수 이름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난감했기 때문이다. 한참을 고민하던 스턴 총재는 1라운드 마지막 지명 선수의 이름을 힘들게 말했다.

"크리스천 아옝가(Christian Eyenga)!"



순간 행사장엔 적막이 흘렀다. 페리 단장의 선택을 납득할 수 없었다기보다는 아옝가가 누군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드래프트를 트위터로 생중계하고 있던 클리블랜드 전문기자조차도 '정보 없음, 현재 알아보는 중'이라는 글을 올린 뒤 침묵할 뿐이었다.

아옝가의 스카우팅 리포트에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설명들이 있다.

'인사이드 플레이가 없는 스몰포워드'
'점퍼 매커니즘이 확립되지 않은 슈팅가드'
'3점 슈터이지만 슛 부정확함'

마치 말장난같은 이런 평가야말로 아옝가가 베일에 싸인 미스터리 맨임을 증명해준다.

아옝가 지명으로 가장 놀란 것은 아옝가 자신이었다. 드래프트 전날까지 클리블랜드에서 자신을 지명할 거라는 어떠한 언질도 받지 못했고 스스로도 1라운드에서 뽑힐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영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아옝가는 단상에 올라가 스턴 총재와 악수를 하면서도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지난 시즌까지 스페인 DKV 유벤투트 산하의 유소년 팀에서 뛴 아옝가는 올해로 스무 살을 맞은 196cm의 스윙맨이다. 콩고의 수도 킨샤사 출신으로 지난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디켐베 무톰보의 고향 후배인 아옝가는 작년 여름 오클라호마 시티가 지명한 세르지 이바카와 함께 콩고 청소년 대표팀을 이끌었다. 당시엔 빅맨으로 뛰며 엄청난 운동능력을 발휘한 아옝가를 스페인 스카우트가 주목했고, 얼마 전까지 유럽 리그의 트렌드였던 아프리카 선수 수집의 막차를 타고 유벤투트에 입단할 수 있었다. 유벤투트는 아옝가를 스윙맨으로 키울 생각이었기 때문에 아옝가는 유소년 팀에서 스윙맨의 기술을 처음부터 다시 익혀야 했다. 아옝가의 스카우팅 리포트가 반전개그처럼 되어있는 이유는 이렇게 농구를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단계에 있기 때문이다. 당시 유소년팀에서 아옝가와 한솥밥을 먹었던 리키 루비오는 스페인 대표팀의 주전 포인트가드로 뛰며 올해 드래프트의 최고 이슈메이커가 되었다.

그런데 아옝가의 콩고 청소년 대표시절을 관찰했던 것은 스페인 스카우트만은 아니었다. 그 자리에는 클리블랜드의 스카우트도 있었다. 아옝가가 아니라 이바카를 관찰하기 위해서긴 했지만 말이다. 아옝가의 뛰어난 운동능력은 곧바로 페리 단장에게 보고되었고, 이번 드래프트에서 아옝가를 눈여겨보고 있었던 페리 단장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지명을 한 것이다.




하지만 페리 단장이 아옝가를 즉시전력감으로 쓰려고 뽑은 것은 아니었다. 스윙맨 역할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기본기가 떨어지기도 했고 무엇보다 영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등 미국 문화를 접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아옝가는 몇 년 후를 보고 뽑은 선수였다. 아니나다를까, 페리 단장은 2라운드 46번 지명권으로 노스캐롤라이나 출신의 스윙맨 대니 그린을 뽑았고, 같은 포지션의 두 선수 중 페리 단장이 계약한 것은 아옝가가 아니라 그린이었다. 서머리그에서 가능성을 보여준 아옝가는 유벤투트와의 계약을 3년 연장해 당분간 스페인에서 뛰게 됐다. 다만 매년 계약을 중단할 권한이 있어 언제든 클리블랜드에 합류할 수 있는 상태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처음부터 아옝가가 아니라 그린을 쓸 작정이었다면 어째서 1라운드 그린/2라운드 아옝가가 아니라 그 반대였나? 여긴 다음과 같은 사정이 있었다.

  • 페리 단장은 처음부터 1라운드 지명 선수는 당장 로스터에 넣지 않을 생각이었다. 1라운더는 2라운더보다 계약기간도 두 배나 길고 기본 연봉도 많이 줘야 하기 때문이다. 클리블랜드가 아무리 부자 팀이라도 재정 부담이 없을 수는 없다. 필요한 곳에 얼마든지 돈을 쓸 수 있는 것과 필요없는 데 돈을 낭비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2라운드에서 괜찮은 선수를 뽑을 수 있다면 굳이 1라운더를 계약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당장 쓰지 않을 아옝가를 1라운드로, 즉시전력인 그린을 2라운드로 지명한 것이다. 그리고 그린과 2라운드 계약을 하면서 클리블랜드는 1라운드 계약을 할 때에 비해 거의 0.8백만 달러를 절약하며, 전날 오닐을 데려오면서 피닉스에게 지급한 0.5백만 달러의 현금을 때우는 데 성공했다.

  • 지금 클리블랜드는 우승을 노리는 팀이고 루키를 두 명이나 15인 로스터에 넣을 수가 없다. 드래프트 당시 이번 시즌에 팀에 남을 것이 확실한 선수는 10명, 여기에 FA를 선언한 앤더슨 바레장과 재계약하면 11명이었다. 각종 익셉션 등으로 베테랑 두 명 정도를 더 영입할 예정인 클리블랜드로써는 이것만으로도 12인 로스터를 넘어버린다. 여기에 루키를 두 명이나 추가하면 쓰지도 않을 전력에 돈을 낭비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추가 FA 영입에 필요한 실탄을 아끼면서 로스터도 비울 필요가 있었다.

  • 위와 같은 사정이 있었다 해도 클블이 상위지명권을 얻을 수 있었다면 그걸로 즉시전력감을 뽑았을 것이다. 하지만 클리블랜드의 이러한 시도는 실패했고, 게다가 상위지명권을 얻어서라도 뽑으려던 선수들이 2라운드까지 밀려내려오니 굳이 1라운드 지명권으로 선수를 뽑는 걸 고집할 필요가 없었다.


이제 대니 그린이 클리블랜드 로스터에 합류한 유일한 신인이 되었다. 198cm의 스윙맨인 그린은 조던, 워디, 카터 등 NBA 슈퍼스타의 산실인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역사상 가장 많은 승리를 거둔 선수이자 대학 통산 1,000득점 500리바운드 250어시스트 150블록슛 150스틸을 모두 달성한 ACC 최초의 선수이기도 하다.

그린은 그리 유복하지 못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뉴욕 롱 아일랜드는 우범지대로 분류될 만큼 치안이 좋지 않은 곳이었다. 하지만 그린은 어렸을 때부터 성실한 아이로 자라났다. 뱀에게 큰 관심을 보인 어린 그린은 그때 산 암컷 붉은꼬리 도마뱀 '제이드'를 지금까지 소중히 키우고 있다. 180cm가 넘는 제이드는 조만간 클리블랜드에서 그린과 함께 살게 될 것이다. "짖지도 물지도 않고 털도 안 빠져요. 키우기도 쉽습니다." 그린이 제이드를 자랑하며 한 말이다.

유명한 덩커였던 제럴드 그린의 사촌동생이기도 한 그린은 찰리 빌라누에바가 속한 뉴욕 유소년 팀에서 뛰며 이름을 알려나가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졸업반 시절 팀을 25승 1패로 이끈 그린은 여러 대학의 스카우트 제이를 뿌리치고 전부터 동경해왔던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린은 고등학교 시절만큼 활약하지 못했다. 아버지 대니 그린 시니어가 마약 소지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위해 법정을 드나들어야 했던 그린은 농구에 집중하지 못했고, 타일러 핸스브로를 비롯한 동기들이 뛰는 모습을 벤치에서 지켜보는 시간이 늘어갔다. 하지만 아버지의 유죄가 확정되자 다시 농구에 매진, 졸업 시즌에는 처음으로 선발로 뛰며 팀의 NCAA 토너먼트 우승에 큰 공헌을 했다. 주포인 웨인 엘링턴이 다소 기복을 보였음에도 노스캐롤라이나의 경기력에 큰 변화가 없었던 것은 항상 꾸준한 슈팅을 보여주는 그린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린의 주특기는 외곽슛과 수비다. 끊임없는 연습을 통해 기본기를 갈고 닦았고, 매우 안정된 슛폼과 사이드스텝을 지니고 있다. 팀 수비에 대한 이해도가 뛰어나 ACC 수비팀에 선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페리 단장이 그린에게서 본 가장 큰 가능성은 끊임없이 노력하는 성실함과 팀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붓는 이타심이다. 드래프트 행사에 초청받지 못해 뉴욕의 한 호텔에서 자신의 지명 장면을 시청한 그린은 다음날 바로 클리블랜드 연습 코트를 찾아 개인 연습을 시작할 정도로 성실한 선수다. 동기들이 하나둘 앞서나가도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할 일을 해온 그린은 핸스브로와 함께 지난 시즌 노스캐롤라이나 농구팀의 정신적 지주였다. 이번 서머리그에서도 자신의 포지션에 신인이 두 명이나 들어온 데 위기감을 느낀 테런스 킨지가 그린에게 전혀 패스하지 않았지만, 그린은 슛을 보여줄 기회가 없음을 불평하지 않고 끊임없이 볼을 돌리며 수비를 했다. 서머리그를 마친 후 킨지는 떠나고 그린은 남은 이유다.

앤써니 파커와 자마리오 문이 새로 영입되면서 그린이 당장 이번 시즌부터 로테이션에 들어가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대학 때 보여줬던 대로 성실하게 기량을 쌓아나간다면 이르면 다음 시즌부터는 팀에 보탬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그린과 스타일이 비슷한 베테랑 파커를 보고 배울 필요가 있다.



페리 단장이 드래프트에서 보여준 선택은 클리블랜드가 FA 시장에서 활발한 선수 영입을 할 것임을 시사했다. 1라운드 하위 지명권만으로는 우승 가능 전력을 만들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에 따라 클리블랜드는 최근 몇 년 중 가장 시끌벅쩍했던 여름을 보내게 됐다.

다음 글에서는 페리 단장이 FA 시장에서 보여준 칠전팔도의 선수 영입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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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오프시즌에는 상위권 팀들의 전력 강화가 두드러졌다. 경제 한파 및 소위 '2010 프로젝트' 올인 등으로 인해 당장 우승을 노리지 않는 팀들은 이번 여름 돈을 쓰기보다는 미래를 위해 비용을 절감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수요자가 발을 뺀 오프시즌 시장에는 유례 없는 찬바람이 불었다.
하지만 이런 환경은 지금 당장 전력을 강화해 우승하고자 하는 우승권 팀들에게는 오히려 절호의 기회였다.

샐러리 절감을 노리는 팀들에게 만기계약자를 보내고 즉시전력감을 받아오거나 수요 부족으로 몸값이 크게 떨어진 자유계약선수들을 끌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라마 오돔을 지키면서도 론 아테스트를 미드레벨 익셉션만으로 영입한 지난 시즌 우승팀 LA 레이커스나 리처드 제퍼슨, 안토니오 맥다이스를 영입해 빈틈없는 라인업을 갖춘 샌안토니오 스퍼스, 히도 터콜루를 잃었지만 빈스 카터 등을 영입해 손익계산 플러스를 기록한 올랜도 매직, 라쉬드 월러스를 영입해 골밑을 강화한 보스턴 셀틱스 등이 이런 과정을 통해 슈퍼 팀으로 올라섰다.

그 중에서도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샤킬 오닐 영입은 오프시즌 초반 최대의 이슈였다. 6월 24일(이하 미국 현지시작) 대니 페리 클리블랜드 단장은 벤 월러스와 사샤 파블로비치, 2010년 2라운드 지명권과 약간의 현금을 피닉스 선즈에 보내고 오닐을 영입하는 대형 트레이드를 발표했다. 이번 오프시즌 클리블랜드가 가지고 있던 가장 큰 자산인 월러스+파블로비치 만기계약 카드를 오닐에게 쓴 것이다. 드래프트 전날 전해진 이 뉴스는 수많은 NBA 팬들을 전율케 했다.



영입 과정

사실 오닐의 클리블랜드 행은 지난 시즌부터 꾸준히 논의되어오고 있었다. 피닉스의 플레이오프 진출이 점점 멀어지던 지난 2월, 트레이드 마감일이 다가오자 오닐의 거대 계약을 부담스러워하는 피닉스를 상대로 페리 단장이 트레이드를 시도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과거 샌안토니오에서 한솥밥을 먹은 바 있는 페리 단장과 스티브 커 피닉스 단장은 클리블랜드의 만기계약 선수들과 오닐의 트레이드를 진지하게 논의했으나, 페리 단장이 아직 계약이 1년 남아있던 월러스를 제시한 반면 커 단장은 계약 마지막 해였던 월리 저비악을 원하는 바람에 난항을 맞았다. 두 단장은 한 테이블에 앉아 제3의 팀을 끌어들여 트레이드를 성사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 했지만 결국 결렬되고 말았다.

따라서 클리블랜드가 플레이오프에서 인사이드 파워의 약세를 드러내며 올랜도에게 패하자 오닐 루머가 고개를 든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오닐을 비롯해 마커스 캠비, 타이슨 챈들러, 라쉬드 월러스, 찰리 빌라누에바, 카를로스 부저 등 리그의 유수한 빅맨들이 클리블랜드와 관련된 루머에 휩싸였다. 페리 단장은 이 모든 루머를 부정하면서도 협상 가능성 자체는 부정하지 않는 묘한 여운을 남겼다.

보름 정도가 지나자 오닐의 행선지가 조만간 결정될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피닉스가 오닐을 원하는 팀들과 협상중인데, 클리블랜드를 비롯해 댈러스 매버릭스와 시카고 불스 등이 그 대상이라는 것이었다. 샐러리 절감 효과는 월러스/파블로비치를 내놓은 클리블랜드가, 전력 강화 효과는 브래드 밀러를 내놓은 시카고가 비교우위를 지니고 있었다. 피닉스는 댈러스 및  시카고와의 협상 사실을 지렛대 삼아 클리블랜드의 '2009년 히트상품' 딜론테 웨스트를 요구했고, 페리 단장은 당연히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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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54413 by Keith Allison 저작자 표시동일조건 변경허락

6월 22일, 라디오 방송에 출연한 클리블랜드 스포츠 전문기자 브라이언 윈드호스트가 '빅 딜이 임박했으며 수일 내로 성사될 것'이라는 소식을 전했고, 이제 팬들의 이목은 오닐 영입 가능성에 집중됐다. 페리 단장은 제3의 팀을 끌어들여 삼각 딜을 모색하는 한편, 오닐이 아닌 다른 선수의 영입 가능성을 흘리며 커 단장을 압박해갔다.

샌안토니오의 제퍼슨 영입 소식이 전해진 다음날인 6월 24일 오후 11시 50분, 트레이드 당사자인 오닐이 자신의 트위터에 '이제 (우승)반지 하나를 더 얻을 시간'이라는 글을 올리며 자신의 클리블랜드 행이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비판한 칼럼니스트 마크 잭슨을 비난했다. 오닐이 트레이드를 통보받은 게 아니냐는 추측이 나왔고, 곧이어 ESPN 홈페이지에 오닐의 클리블랜드 행 뉴스가 메인 기사로 올라왔다. 넉 달에 걸친 긴 협상이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입단 기자회견에 참석해 댄 길버트 구단주로부터 클리블랜드의 겨울을 뒤덮는 눈을 치울 대형 삽을 선물받은 오닐은 이번 시즌 목표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한 마디로 대답했다.

"Win a Ring for the King."

왕(르브론)의 팀에 우승하러 왔음을 분명히 한 입단 일성이었다.



손익평가

오닐 트레이드의 세부사항은 다음과 같다.

오닐(21백만 달러)<->월러스(14백만 달러)+파블로비치(4.9백만 달러)+2010년 2라운드 지명권+현금 0.5백만 달러

오닐을 데려오는 댓가로 클리블랜드가 내놓은 것 중 월러스는 하락세가 뚜렷했고 파블로비치는 사실상 로테이션 밖의 선수였으며, 선수층이 두터운 클리블랜드에서 내년 2라운드 지명권은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지도 미지수였다. 다시 말해 클리블랜드가 오닐 트레이드로 잃은 것은 사실상 없었던 셈이다. 당초 트레이드에 포함될 것으로 알려졌던 웨스트, J.J. 힉슨, 테런스 킨지, 2009년 드래프트 30번 지명권 중 아무 것도 잃지 않았다.

1972년생으로 가치 평가에 '건강하기만 하면'이라는 단서가 붙게 된 오닐은 그야말로 건강하기만 하면 클리블랜드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선수다. 인사이드 득점원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아온 클리블랜드에 오닐이 가세한 것은 분명히 전력 플러스 요인이다. 르브론 제임스는 자신의 프로 경력을 통틀어 최고의 센터와 경기할 수 있게 됐다며 이 트레이드를 크게 환영했다. 오프시즌에 오닐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그런 선수와 함께 뛰는 것 자체가 영광'이라고 할 정도다.

오닐의 영입은 클리블랜드의 게임을 크게 바꿀 것이다. 클리블랜드는 그동안 로포스트에서 볼을 잡고 움직일 수 있는 선수가 거의 없었는데, 그 자리에 지난 20년간 로포스트에서 가장 위력적이었던 선수가 가세한 것이다. 이제 클리블랜드는 르브론이나 모리스 윌리암스가 외곽에서 볼을 잡고 공격을 시작하는 대신 로포스트에 있는 오닐에게 볼을 넘긴 후 오프더볼 무브를 통해 공격을 운영할 수 있게 됐다.

리그 최고 수준을 자랑하던 클리블랜드 외곽슈터진은 그 위력을 한 단계 높일 수 있게 됐다. 오닐은 최고의 로포스트 득점원일 뿐아니라 킥아웃 능력에서도 리그 최고를 다투는 빅맨이기 때문이다. 지난 시즌 르브론의 골밑 돌파를 통해서만 볼을 받던 슈터진은 이제 오닐을 통해서도 슛찬스를 얻을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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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블랜드는 지난 시즌 골밑에서 1:1 수비를 해줄 수 있는 빅맨이 없어 고전해야 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리그 최고 수준의 헬프디펜스 능력을 키웠지만, 헬프디펜스 자체가 자기 수비수를 버려두고 하는 수비다보니 볼이 잘 도는 팀을 상대로는 어려움을 겪었다. 지난 플레이오프에서 올랜도에게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던 것도 골밑의 하워드에 너무 신경을 쓰다가 라샤드 루이스 등 올랜도 슈터진에게 무차별 폭격을 당했기 때문이다. 이번에 로포스트에서 여전히 강력한 1:1 수비력을 보여주는 오닐이 가세하면서 이런 문제점은 대폭 개선될 전망이다.

결과적으로 벤치가 강화된 것도 커다란 플러스 요인이다. 오닐에게 선발 자리를 넘겨주고 벤치에서 나오게 될 지드루너스 일가우스카스는 리그 대부분의 팀에서 주전 센터로 뛸 수 있는 선수다. 지난 시즌 벤치 멤버의 경기력 부재로 어려움을 겪었던 클리블랜드에게 일가우스카스의 벤치 출전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가장 큰 도움을 받을 선수는 에이스 르브론이다. 르브론과 오닐이 함께 뛴다는 것은 볼을 지니고 있을 때 더블팀을 해야 하는 선수 두 명이 동시에 코트에 있다는 걸 의미한다. 이제 과거처럼 스윙맨 두 명이 르브론을 더블팀하고 빅맨 한 명이 드라이브인 경로에 끼어들어 막는 것은 매우 힘들어졌다. 그 뒤에는 골밑 마무리 능력으로는 역대 최고를 다투는 오닐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오닐 역시 입단 기자회견에서 상대팀들에게 "이제 더블팀은 없다. 여기 밑줄 백 번 그어라. 이제 더 이상 더블팀 올 수는 없다." 고 강조했다. 시간이 흐르며 어느 정도 정립돼가던 르브론 수비법을 처음부터 다시 고민해야 한다는 사실은 상대팀들에게 커다란 골칫거리가 될 것이다.

잃은 것은 사실상 없는 반면 기대 수익은 크다는 점에서 클리블랜드의 이번 트레이드는 성공이라 할 수 있다.



새로 생긴 과제

오닐 영입은 분명히 팀 전력에 보탬이 됐지만 해결해야 할 과제도 생겼다.

상대의 2:2 플레이, 특히 하이포스트 픽앤롤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오닐은 전성기에도 2:2 수비에 매우 약한 모습을 보여줬다. 2:2 공격을 막으려면 빅맨의 기동력이 필수적인데 다소 발이 느린 오닐이 상대의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했던 것이다. 피닉스가 샌안토니오의 팀 던컨을 넘기 위해 야심차게 오닐을 영입했다가 실패한 이유도 던컨이 파커나 지노빌리와 2:2 플레이로 오닐을 괴롭혔기 때문이다. 클리블랜드가 오닐을 영입한 가장 큰 이유인 올랜도의 드와이트 하워드도 1:1 못지 않게 2:2 플레이를 많이 하는 편이다. 오닐을 도와줄 최적화된 수비 전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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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브론과 오닐이 최대의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는 전술도 필요하다. 르브론의 주무기는 어디까지나 골밑 돌파기 때문에 골밑에서 오닐과 동선이 겹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오닐은 르브론의 프로 시절 뿐아니라 농구 경력 전체를 통틀어서도, 유소년 리그 때 한 팀이었던 리온 포우 이후 처음으로 함께 뛰게 된 로포스트 득점원이다. 르브론 자신이 빅 센터와 함께 뛰는 법을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 오닐 역시 페니 하더웨이, 코비 브라이언트, 드웨인 웨이드 등 스윙맨을 가장 잘 살린 센터이긴 하지만 르브론처럼 돌파 비중이 높은 스윙맨과 뛰어본 적은 없다. 오닐이 르브론의 돌파 경로를 가로막고 볼을 요구하는 일이 많아질 경우 팀워크가 깨질 가능성도 있다.

이 둘을 조율해야 할 클리블랜드의 공격 코치는 현재 공석 상태다. 지난 시즌 볼무빙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며 클리블랜드가 효율적인 공격팀이 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존 쿠에스터 코치가 디트로이트 감독으로 영전했기 때문이다. 새 공격 코치 후보 0순위인 마이크 말론 코치가 이 과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오닐이 골밑으로 몰아준 수비진의 헛점을 공략할 수 있는 '스트레치 파워포워드' 부재도 과제다. 지금까지 오닐과 좋은 호흡을 보인 파워포워드는 모두 중거리 슛이 있는 선수들이었다. 올랜도 시절의 호레이스 그랜트, 레이커스 시절의 그랜트와 로버트 오리, 마이애미 시절의 유도니스 하슬렘 등은 모두 오닐을 막느라 쏠린 수비진을 공략할 수 있는 중거리 슛을 지니고 있었다. 피닉스에서 호흡을 맞췄던 아마레 스타더마이어의 경우 뛰어난 중겨리 슛 능력이 있었지만 오닐과 공격 템포를 맞추는 데 실패하며 시너지를 발휘하지 못했다.

이번 시즌 선발 파워포워드로 오닐과 함께 나올 앤더슨 바레장은 중거리슛 능력이 제로에 가깝다. 물론 올 여름 FIBA 아메리카 선수권대회에서 괜찮은 슈팅능력을 보여주긴 했지만 NBA에서도 같은 모습을 보여줄 지는 미지수다. 지난 시즌 클리블랜드의 파워포워드 중 유일하게 중거리 슛을 갖췄던 조 스미스는 애틀랜타 호크스에 새 둥지를 틀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인 법, 오닐이 확보해준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방안이 필요하다.



작년 여름 조 스미스, 데이먼 존스라는 만기계약 카드로 모 윌리암스를 얻어왔던 페리 단장은 올 여름엔 월러스, 파블로비치 만기계약 카드로 오닐을 데려와 2연타석 홈런을 쳤다. 르브론이 사실상 계약 마지막 해를 맞는 이번 시즌 오닐은 '반드시 우승' 모드인 클리블랜드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 'We are all Witness(우리 모두 산 증인)'라는 모토 아래 르브론의 왕좌등극의 목격자가 되기를 기대했으나 지난 시즌 뜻을 이루지 못한 클리블랜드 팬들에게 오닐은 'Witness Protection(증인 보호 프로그램)'이 되는 것이다.

클리블랜드의 오프시즌 첫 움직임이자 최대 자산을 이용한 움직임이 오닐 영입이었다는 것은 이후 전력 강화 움직임이 오닐이라는 대전제 아래 이뤄질 것이란 뜻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다음 순서에서는 클리블랜드가 오닐 이후 FA로 영입한 선수들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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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떠들썩했던 시즌은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로 끝났다. 르브론 제임스의 시즌 MVP 및 마이크 브라운 감독의 올해의 감독상 수상, 그리고 수많은 프랜차이즈 기록들은 정규시즌 1위라는 결과를 가져다줬고, 플레이오프 전 시리즈에서 홈코트 어드벤티지를 확보한 클리블랜드는 2라운드까지 파죽의 8연승을 거두며 순항했다.
 너무 빨리 달린 탓일까? 클리블랜드는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올랜도 매직을 만나 고전했고, 르브론의 믿을 수 없는 대활약에도 불구하고 시리즈 전적 2-4로 패배, 코비 브라이언트와 레이커스가 기다리고 있던 파이널 무대 바로 앞에서 주저앉았다.

 이 패배의 후유증은 컸다. 올랜도의 미스매치 공격에 대한 해법을 시리즈가 끝날 때까지 내놓지 못한 '수비형 감독' 브라운은 해임설에 시달렸고, 탈락이 확정된 직후 상대 선수와 악수하지 않고 경기장을 빠져나간 르브론도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시리즈 내내 부진을 면치 못한 주전 가드 모리스 윌리암스는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클리블랜드가 정규시즌에 거둔 성과에 비해 너무나도 쓰디쓴 결말이었다.

 파이널 진출 실패라는 사실은 현재 클리블랜드가 처한 상황을 명백히 보여줬다. 클리블랜드 로스터에는 아직도 구멍이 많이 남아있는 것이다. 이 구멍이 채워지지 않는 이상, 클리블랜드는 내년 시즌에도 우승을 장담할 수 없는 처지라는 것이 드러났다.
 따라서 클리블랜드의 이번 오프시즌은 이런 구멍들을 채우기 위해 숨막히게 진행될 예정이다. 이 시리즈는 클리블랜드의 오프시즌 행보를 추적하고, 앞질러 살펴보는 시간이 될 것이다.


2009-2010 시즌의 중요성

 2009-2010 시즌은 클리블랜드에게는 매우 중요한 시즌이다. 어쩌면 40년 프랜차이즈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시즌이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 르브론은 2009-2010 시즌이 끝나면 옵트아웃 권한을 갖게 된다. 즉 다음 시즌은 사실상 브롱의 계약 마지막 해이다. 그리고 르브론은 지난 시즌 정규리그 1위를 하고도 파이널 진출에 실패했다. 이 사실이 가지는 의미는 모두가 알고 있다.
  • 주전 센터 지드루너스 일가우스카스가 마지막 시즌을 맞는다. 일가우스카스가 이번 오프시즌에 옵트아웃하고 다년 연장계약을 하지 않는 이상 2009-2010 시즌이 일가우스카스의 마지막 시즌이다. 이미 발목에 4번의 대수술을 받아 걸어다니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는 소릴 듣고 있는 일가우스카스는 계약이 끝나면 은퇴할 가능성이 높다. 지난 시즌 기준 클리블랜드의 로테이션 빅맨진은 바레장을 제외하면 거의 모두가 은퇴를 앞두고 있는 베테랑이고 힉슨이나 잭슨은 주전급이 되려면 몇 년은 더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2009-2010 시즌이 지나면 클블은 갑자기 빅맨 공백이 생길 수 있다.
  • 브라운 감독 역시 계약 마지막 해를 맞는다. 2005년 클리블랜드에서 감독 생활을 시작한 마감독은 2008시즌까지 매시즌 나름대로 성공 및 발전을 이뤄냈다. 지난 시즌은 마감독 스스로가 실패와 좌절을 느낀 첫 시즌이다.
  • 클리블랜드 지분구조가 변동한 뒤 맞는 첫 시즌이다. 대주주인 댄 길버트는 글로벌 마케팅을 위해 중국계 자본에게 구단 지분의 10~15%를 매각했고, 그 대신 다른 마이너 주주의 지분을 사들였다. 따라서 2009-2010 시즌은 브롱과 클블이 본격적인 글로벌 마케팅에 나서는 첫 해가 될 것이다.

 위와 같은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이번 오프시즌을 맞는 페리 단장의 각오는 비장할 수밖에 없다. 이런 페리 단장 앞에는 팀의 운명을 결정지을 중대 선택이 기다리고 있다. 팀 운영의 초점을 2010시즌과 2011시즌 중 어느 쪽에 맞출 것인지 하는 것이다. 이것은 클리블랜드가 나름대로 추진해온 '2010 프로젝트'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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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블랜드의 2010년 프로젝트

 다른 많은 팀들도 마찬가지겠지만 클리블랜드가 지난 1~2년간 해온 딜에는 한 가지 원칙이 있었다. 2010년 이후에도 계약이 남는 베테랑 선수는 되도록 배제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두말 할 나위도 없이 2010년에 르브론을 지켜내면서 슈퍼스타 FA를 영입, 2010-2011 시즌에 우승권 전력을 만들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이 원칙을 잘 지키면서도 우승권 전력을 유지해온 페리 단장의 능력은 인정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현재로썬 르브론 외에 또다른 맥시멈급 선수를 잡을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클리블랜드 판 2010 프로젝트'에 수정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현재 클블의 2010년 확정 페이롤은 37.3백만 달러인데, 르브론이 옵트아웃할 경우 17백만 달러 정도가 빠져 약 20.1백만 달러가 된다. 르브론은 재계약시 최대연봉 계약이 확실하므로, 샐러리 캡의 30%에 해당하는 연봉을 받을 수 있다. 경제 위기를 감안해 샐캡을 58백만 달러 정도로 보면 17.4백만 달러 정도다. 오프시즌에 제한적 FA인 앤더슨 바레장을 아예 놔준다고 가정할 경우 2010년의 확정 샐러리는 다음과 같이 된다.

르브론: 17,400,000 (캡홀드 - 샐러리 캡의 30% )
대니얼 깁슨: 4,015,334
딜론테 웨스트: 4,500,000 (웨이브시 0.5백만 달러만 보장)
힉슨: 1,528,920 (팀 옵션)
잭슨: 854,389 (전액 비보장)
윌리암스: 9,300,000
2009년 1라운드 지명 선수: 1,063,200
2009년 2라운드 지명 선수: 762,195
2010년 1라운드 지명 선수: 1,020,960 (낮은 순위일 경우)
2010년 2라운드 지명 선수: 473,604
로스터 채우기용: 473,604
로스터 채우기용: 473,604
10일 계약 선수 세 명
----------------------------
합계: 41,865,810

예상 샐러리 캡 58백만 달러에서 위 연봉 합계를 빼면 16,134,190 달러가 남는다. 그런데 이 금액으로는 2010년에 풀리는 최대 연봉급 선수들인 드웨인 웨이드, 조 존슨, 크리스 보쉬, 아마레 스타더마이어, 야오 밍 등을 잡기에는 약간 부족하다. 총연봉이 샐러리캡 미만인 팀은 샐러리 캡을 초과하는 계약을 맺을 수가 없으므로, 약 6백만 달러와 2백만 달러 정도로 예상되는 미드레벨 익셉션 및 바이애뉴얼 익셉션으로는 이들 슈퍼스타들을 데려오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클리블랜드가 2010년에 최대 연봉급 슈퍼스타를 추가로 데려오기 위해서는 르브론이 재계약 연봉을 깎거나 현재 전력을 더 깎아내리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프랜차이즈 그 자체인 르브론의 최대 연봉 계약을 깎으면서 또다른 최대 연봉급 선수를 최대 연봉으로 데려오는 것을 르브론이 용납할 지도 의문이고, 바레장과 일가우스카스가 모두 사라진 저 전력에서 선수를 더 내보내면 과연 그게 우승할 수 있는 팀이 될지도 의문이다.

즉 클리블랜드가 2010년에 연봉을 비워서 샐러리 캡 내에서 전력을 강화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많은 과제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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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프로젝트를 포기할 경우

그렇다면 여기서 발상의 전환을 꾀해볼 수 있다. 트레이드를 통해 현재의 총연봉을 유지해가며 전력을 강화하자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오프시즌을 보내게 되면 샐러리 캡을 뛰어넘는 규모의 전력을 유지하며 당장 다음 시즌부터 우승에 도전할 수 있다.

페리 단장이 이 방법을 선택할 경우 다음과 같은 움직임이 이어질 것이다.

  • 바레장과 재계약하거나 사인앤트레이드
  • 벤 월러스+사샤 파블로비치 만기계약 카드를 이용해서 2010년 이후에도 계약이 남아있는 올스타급 선수 영입
  • 미드레벨 익셉션급 선수와 2년 정도 계약
  • 만약 샤킬 오닐을 영입할 경우 곧바로 연장 계약
  • 이번 드래프트에서 픽업 또는 픽 구매

 위와 같은 과정에서 클리블랜드의 젊은 선수 중 한두 명이 팀을 떠날 수도 있다.

다만 이런 방법을 쓸 경우, 2010 프로젝트는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웨이드, 보쉬, 야오, 조 존슨 등과 계약할 가능성은 더이상 없다. 페리 단장이 이쪽 길을 선택한다는 것은 미래를 포기하는 것이므로, 2009-2010 시즌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우승해야 한다.


갈림길에 선 페리의 선택은?

 페리 단장은 단장직을 맡은 이래 가장 중대한 선택을 해야 한다. 연봉 여유분을 지키며 2010년을 노릴 것인가, 연봉 여유분을 포기하면서 당장 우승을 위해 전력 강화를 할 것인가? 둘다 선택할 수는 없고 어느 쪽이든 리스크가 존재한다. 페리 단장이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클블의 오프시즌 계획은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드래프트 하루 전, 페리 단장은 월러스, 파블로비치, 2010년 2라운드 지명권 및 현금 50만 달러로 피닉스 선즈의 샤킬 오닐을 영입하는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페리가 선택한 길은 두 번째 길이었던 것이다.

다음 순서에서는 샤킬 오닐 영입 과정과 그 영향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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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시카고 불스 주전멤버로 활약했던 론 하퍼가 한국을 방문한다.

사실 론 하퍼라는 이름은 NBA 농구에 심취한 열혈 매니아가 아니라면 다소 생소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흔한 포털사이트 인물사전에도 기록이 없는 선수이니 당연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도 시카고의 향수를 잊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하퍼의 존재가 가슴속 한 구석에 선명히 남아 있을 것이다.

하퍼는 과연 어떤 선수였을까?


최고의 스윙맨에서 나락으로

하퍼는 마이클 조던, 스카티 피펜, 데니스 로드맨 등 스타플레이어들과 함께 시카고의 3연패에 일조한 최고의 ‘조연’이었다. 하지만 그가 걸어온 농구인생을 되돌아보면 이보다 파란만장한 이야기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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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퍼는 마이애미 대학시절 공수에서 최고의 기량을 뽐내던 ‘주연‘이며 스타플레이어였다. 마이애미 재학시절 4년 동안 경기 당 19.8점을 기록한 하퍼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공격형 선수였다. 운동능력도 발군을 자랑하여 멋진 슬램덩크를 곧잘 성공시키던 하퍼를 두고 혹자들은 줄리어스 어빙과 비교하기도 하였다. 현역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어빙과의 첫 번째 대결을 꼽는 하퍼에게는 엄청난 영광이었다.
 
뛰어난 공격만큼이나마 수비도 빛이 났다. 스틸은 물론 리바운드와 블락에서도 웬만한 빅맨 급 이상의 기량을 발휘하여 하퍼는 공수에서 완벽한 스윙맨으로 거듭나있었다.

졸업 후 1986년 NBA 드래프트에 뛰어든 론 하퍼는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황금기를 이끌 브래드 도어티, 마크 프라이스와 함께 전체 8번 픽으로 프로에 입문한다.

루키 시즌은 하퍼에게 잊지 못할 한 해였다. 하퍼는 본인의 생애 최다 기록이자 루키 전체 1위인 경기 당 22.9점(리그 16위)으로 득점본능을 드러냈고 경기 당 2.6개의 볼을 훔치며 이 부문에도 리그 4위에 올라 신인왕을 예약한 듯 보였다. 하지만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척 퍼슨에게 밀려 결국 최종 투표는 2위로 마감, 아쉬움을 남겼다.

두 번째 시즌을 맞이한 하퍼는 개막 두 달 만에 심각한 발목부상으로 단 25경기나 결장했다. 공격빈도는 출장시간과 함께 다소 줄어들었지만 수비력 하나는 여전했다. 건강을 되찾은 하퍼는 훗날 몸담게 될 시카고 불스와 피할 수 없는 플레이오프 라이벌전을 시작하게 된다. 상대는 자신과 비슷한 신체조건을 지닌 마이클 조던이었다. 때문에 당시 하퍼는 클리블랜드의 원정 유니폼 색에서 착안된 ‘오렌지 조던’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됐다.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하퍼는 조던과 함께 수년 뒤 시카고에서 역사상 가장 강력한 백코트 수비군단의 핵심인물이 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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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클리블랜드 시절의 하퍼 역시 조던의 여느 라이벌들과 다를 바 없는 신세였다. 시카고는 당시 해마다 디트로이트의 괴롭힘에 고배를 들었지만 클리블랜드 역시 뉴욕 닉스와 함께 시카고의 조연에 머물렀다. 특히 클리블랜드에 유독 강한 면모를 보였던 조던의 활약에 하퍼는 ‘제2의’라는 수식어에 만족해야 했다.

줄리어스 어빙의 후계자, 제2의 에어조던 같은 칭송은 하퍼에게 있어 더 없는 영광이었지만 결국 팬들과 농구관계자들에게 실망만 안겨주었다. 좋은 선수임은 분명했지만 주위의 기대를 충족시키기에는 충분히 높이 날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빛났던 클리블랜드시절에는 남부럽지 않은 성적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올스타 무대를 밟아보지 못했다. 1987년부터 1988년까지 두 차례 슬램덩크 콘테스트에 참가하며 별들의 전쟁에 얼굴을 내밀었지만 쟁쟁한 공중곡예사들에 가려 이렇다할만한 인상도 심어주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프로생활의 첫 번째 전환점이 찾아왔다. 클리블랜드가 클리퍼스의 레지 윌리엄스와 신인 대니 페리를 받는 조건으로 하퍼와 미래의 드래프트 픽 3장을 넘기는데 합의한 것이다. 만년 약체팀으로 리그 모든 선수가 꺼리는 LA 클리퍼스에 새 둥지를 틀게 됐지만 전망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용꼬리보다는 뱀머리, 재능 앗아간 무릎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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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퍼스 입장에서 하퍼의 영입은 더 없는 선택이었다. 당시 클리퍼스는 대니 매닝와 찰스 스미스라는 전도유망한 선수들로 강력한 프론트라인을 구축하고 있었지만 백코트의 공격력 부재가 가장 큰 문제였다.

마지막 퍼즐을 채운 클리퍼스는 하퍼와 함께 새롭게 태어났다. 주장까지 담당하게 된 하퍼는 젊은 클리퍼스를 16년 만에 플레이오프 무대로 이끌며 마침내 ‘주역’으로 우뚝섰다. 1992-93시즌에는 클리퍼스 구단 기록인 단일 시즌 스틸 기록(177개)도 갈아치우며 승승장구 했다.

하지만 하퍼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클리퍼스에서 보낸 마지막 해에 팀이 와해된 것이다. 클리퍼스의 미래였던 매닝과 ‘덩크 아티스트‘ 도미니크 윌킨스의 트레이드가 불운의 시작이었다.

취지는 나쁘지 않았다. 구단 입장에서는 윌킨스가 전성기에 비해 운동신경이 다소 떨어졌지만 흥행 상승과 함께 당장의 전력에 큰 보탬이 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정작 윌킨스의 생각은 달랐다. 10여 년 동안 애틀랜타 호크스의 아이콘이자 NBA를 대표하는 슈퍼스타였기 때문에 클리퍼스 행은 그에게 있어 좌천과도 다름없었다.

프랜차이즈 스타와 함께 팀의 재건을 다짐했던 하퍼의 꿈은 그렇게 허물어졌다. 미래를 약속했던 젊은 유망주들은 하나 둘 팀을 떠났고, 주위에는 불만으로 가득 찬 베테랑 선수들과 은퇴를 앞둔 노장들, 이적을 기다리는 일회용 선수들로 득실댔다.

하퍼는 또 한 번의 멋진 시즌을 보냈지만 팀은 27승 55패를 거두며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994-95시즌을 앞둔 하퍼 인생에 일대 개혁의 바람이 일었다. 무릎수술과 시카고와의 계약. 두 번째 터닝포인트였다.


희생과 바꾼 6개의 우승반지 
 
시카고가 하퍼에게 원하는 것은 클리퍼스와 같았다. 조던의 돌연은퇴로 득점을 올려주는 공격형 슈팅가드를 물색하던 차에 눈에 띈 것이 하퍼였다. FA신분이었던 하퍼의 영입은 즉각 이루어졌다.

하지만 하퍼는 무릎수술로 인해 그가 가지고 있던 많은 재능을 잃은 상태였다. 스피드와 점프 등 그가 자랑했던 운동능력은 대부분 상실되었고 베테랑 선수들에게도 난해한 ‘트라이앵글 오펜스’의 적응까지 온갖 악재들이 그를 괴롭혔다. 시련의 연속이었다.

개인기록은 자연스레 전 카테고리에서 데뷔 이래 최저를 기록했다. 시카고의 필 잭슨 감독은 하퍼를 53경기에서 선발로 내세웠지만 출장시간은 20분 이하만 허락하였다. 경기 당 20점이 가능했던 올스타 급 가드가 평균 6.9점의 벤치선수로 전락하기까지 1년도 걸리지 않았다. 결국 두 자리 수 득점도 힘겨워 보이는 하퍼의 ‘조던화’는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야구로 외도한 조던이 극적으로 돌아왔다. 

조던이 되야 했던 하퍼는 조던의 쉬는 시간을 대신하는 벤치워머의 역할을 감내해야 했다. 조던의 컴백이 마냥 기쁠 수가 없었던 이는 아마도 하퍼가 유일했을 것이다.

역사적인 1995-96시즌을 앞둔 시카고는 더 이상 하퍼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조던은 연일 단내 나는 개인훈련으로 예전의 기량을 되찾고 있었으며 제 2옵션인 스카티 피펜 역시 언제든 20점이 가능한 올스타 포워드였다. 그 뒤를 잇는 토니 쿠코치는 두 시즌 동안 검증을 마치며 벤치에서 가장 신뢰받는 식스맨으로 시즌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하퍼의 역할에 변화가 불가피 했다. 잭슨은 결국 하퍼를 주전 포인트가드로 임명하고 조던과 피펜의 백코트에 보다 사이즈와 힘을 높였다. 198cm의 신장을 지녔던 하퍼는 예나 지금이나 포인트가드로서는 파격적인 높이의 이점을 십분 살렸다. 슈팅가드부터 스몰포워드까지 수비할 수 있는 하퍼의 폭넓은 매치범위는 조던과 피펜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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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하퍼는 비록 존 팩슨이나 B.J. 암스트롱 같은 선수들에 비해 슈팅능력이 부족했지만 NBA 역사상 가장 경쟁력 있는 백코트 수비의 한 축으로 그의 존재가치를 재조명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혹자들은 조던과 피펜 그리고 하퍼가 수비진영에 나란히 서 있으면 코트가 꽉 차 보일정도라고 하였다. 이들의 긴 팔에서 나오는 인터셉트와 발군의 수비능력은 24초 공격시간이 갱신되는 시점부터 상대팀을 압박했다.

‘전문수비수’로서 새로운 농구인생을 시작하게 된 하퍼는 점차 트라이앵글 시스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볼을 잡고 공격을 시작하고 주도했던 과거는 뒤로하고 공 없이 어떻게 움직여야하는지가 그의 최우선 과제였다. 하퍼는 기꺼이 동료들이 득점을 올리기 위한 발판이 되어 주었다. 이따금씩 재치 있는 컷인 플레이로 골밑 득점을 올리기도 하였고 위크사이드에서 더블팀에 빠져든 조던과 피펜에게 공을 받아 3점 슛도 넣어 주었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그에게 할당된 공격범위 내에서는 최선을 다 해주었다.

3연속 우승. 그를 빛내 주었던 재능을 반납한 댓가로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선물을 받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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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퍼는 이후 조던의 은퇴와 피펜의 이적, 잭슨 감독의 재계약 불발로 붕괴된 시카고를 떠나 다시 한 번 LA를 찾는다. 리그 대부분의 선수가 뛰길 원하며 새로운 왕조를 준비하고 있는 팀이라는 점에서 전과 달랐다. 그의 4번 째 팀은 바로 명문구단 레이커스였다. 은사 잭슨 감독의 간곡한 설득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레이커스는 시카고의 코칭스태프가 이동했기 때문에 유니폼 색만 제외하고는 낯설지가 않은 곳이었다.

하퍼는 정신적인 멘토역할을 자처하며 젊은 레이커스에 노련함을 가져다 주었다. 과거 경험을 토대로 트라이앵글 오펜스의 이해를 도왔고 젊은 코비에게는 정신적인 멘토역할을 수행했다. 

마침내 레이커스는 90년대의 긴 터널을 지나 밀레니엄의 첫 번째 왕좌에 오르며 3연속 우승을 일궈냈다. 하퍼는 늘 그랬듯이 밀레니엄 왕조의 탄생에 숨은 조연으로 다시 한 번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였다.

강요된 희생은 아니었지만 누구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운명은 아니었다. 필시 대개는 보이콧이나 이적을 요구하며 본연의 자아를 잃는 것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태업이나 젊은 나이에 은퇴하는 선수들을 종종 목격하기도 한다. 하퍼가 아직까지 추억되는 이유다.

금세기 최고의 농구팀으로 기억되는 90년대 시카고 불스. 그들과 함께 호흡하며 역사를 만들었던 인물을 만나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번 방한은 많은 올드팬들에게 남다른 의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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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heltant79

르브론의 첫 우승, 이루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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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브론 제임스에게 2008-2009 시즌은 매우 특별한 시즌이었다. 작년 8월 ’리딤 팀‘의 일원으로 베이징 올림픽에 출전, 생애 처음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국제대회 세 번째 도전 끝에 얻은 결실이었다. 르브론은 귀국 후 인터뷰에서 ’올림픽을 통해 한 단계 발전했으며 시즌이 시작되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 장담했다. 그리고 그 장담은 현실이 되었다.

르브론이 이끈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는 전 시즌보다 21승이나 더 많은 66승(16패)을 올리며 2008-2009 정규시즌 1위에 올랐다. 클리블랜드는 평균 득실차 9.1점으로 리그 최고를 기록했으며, 평균 실점(91.35점), 야투 허용율(43.1%), 3점슛 허용율(33.3%) 등에서 모두 리그 최저를 기록하는 압도적인 수비력을 선보였다. 또한 홈경기 성적 39승 2패로 NBA 역사상 두 번째로 높은 승률을 올리며 ‘안방 불패‘를 뽐냈다.

르브론은 정규 시즌 최고의 팀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르브론은 평균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스틸 부문에서 모두 팀 내 1위를 기록했는데, 리그 역사상 60승 이상을 거둔 팀에서 이들 부문 팀 내 1위에 오른 선수는 1985-1986 시즌의 래리 버드뿐이다. 가드 모 윌리암스의 영입으로 득점 부담이 줄자 그동안 약점으로 지적받던 수비에 집중하며 All-NBA 디펜시브 퍼스트 팀에 거론될 정도로 뛰어난 수비력을 선보였다. 트리플더블도 리그 최다인 7번이나 기록한 르브론은 생애 첫 MVP 등극이 확실시되고 있다.

최고의 시즌을 보낸 르브론에게 이제 남은 목표는 챔피언 트로피뿐이다. 클리블랜드는 1964년 이후 어떤 프로 팀도 우승 기념 퍼레이드를 해보지 못했다. 과연 르브론은 클리블랜드 시민들의 염원을 실현시키며 오하이오 주가 낳은 최고의 스포츠 스타로 등극할 수 있을까?


적지에서 플레이오프를 시작하는 디트로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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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로이트 피스톤즈는 지난 7시즌 동안 6번이나 센트럴 디비전 1위를 차지한 플레이오프의 터줏대감이었다. 디트로이트는 이 기간 동안 우승 1회, 파이널 진출 2회, 컨퍼런스 파이널 진출 6회 등을 기록하며 동부 컨퍼런스 엘리트 팀의 자리를 지켜왔다. 릭 칼라일, 래리 브라운, 필립 손더스 등 명장들의 지도하에 천시 빌럽스, 라쉬드 월러스, 리차드 해밀턴 등 이타적인 선수들의 헌신이 뒷받침된 결과였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디트로이트에게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닥쳤다. 조 듀마스 단장은 선수들의 노쇠화로 미래가 밝지 않은 팀에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팀의 심장이었던 2004년 파이널 MVP 빌럽스를 만기계약자인 앨런 아이버슨과 트레이드했고, 젊은 마이클 커리를 감독에 임명했다. 당장의 성적 하락을 감수하며 내린 결정이었다.

변화의 대가는 컸다. 빌럽스의 공백을 메우기에 로드니 스터키는 너무 어렸고, 아이버슨은 수년간 자리잡아온 디트로이트의 팀플레이에 적응하지 못했다. 팀 안팎에서 불화설이 흘러나왔고 신참인 커리 감독은 팀을 전혀 장악하지 못했다. 정규 시즌 최종 성적은 39승 43패, 동부 8위로 간신히 플레이오프에 턱걸이했다. 디트로이트가 5할 승률 달성에 실패한 것은 2000-2001 시즌 이후 처음이다.

8년 만에 홈 코트 어드벤티지 없이 플레이오프에 나서는 디트로이트에 남은 것은 경험이다. 아이버슨이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하지만 월러스, 해밀턴, 테이션 프린스, 안토니오 맥다이스 등으로 이루어진 베테랑 선수진은 풍부한 플레이오프 경험을 자랑한다. 이들이 노련미를 발휘하고 젊은 선수들이 활약해준다면 디트로이트 농구의 위력을 다시 한 번 과시할 수도 있다. 1라운드 상대는 디비전 라이벌 클리블랜드. 디트로이트가 센트럴 디비전의 새 패자 클리블랜드에게 순순히 대관식을 허용할 것인지, 팬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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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COLUMNS/HELTANT79 2009. 3. 11. 01:16

두 번째 기적을 꿈꾸는 오스틴 카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이번 시즌 창단 이래 최고의 성적을 기록하고 있는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는 관심도와 상업적인 성공 면에서도 커다란 발전을 이루고 있다. 대부분의 홈경기가 매진사례를 이루고 있는 캐벌리어스는 평균 20,477명의 홈 관중 수를 기록, 이 추세대로라면 구단 역사상 한 시즌 최다 홈관중 기록을 경신하게 된다. 그들 중 27%는 클리블랜드가 속한 오하이오 주 밖에서 온 관중이다. 창단 40여 년 만에 드디어 전국적인 관심을 받는 팀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캐벌리어스에게 클리블랜드와 오하이오 주의 팬들이 보내는 성원은 훨씬 더 열광적이다. 2008년 오하이오 주의 케이블 TV 프로그램 중 가장 점유율이 높았던 프로그램은 폭스 스포츠 오하이오에서 방송하는 캐벌리어스의 경기였다. 8.2에 이르는 시청자 지수는 리그 평균보다 2.4배나 높으며, 13%의 점유율은 미국 최고 인기드라마인 ‘LOST'보다도 높은 수치다. 우리나라에 비유하자면 울산에서 울산 모비스의 농구경기 시청률이 ’아내의 유혹‘보다도 높은 것과 같다.

보다 많은 팬들이 캐벌리어스의 경기를 시청하게 되면서 클리블랜드 지역방송에서 캐벌리어스 경기 해설을 맡고 있는 오스틴 카(Austin Carr)의 인기도 함께 높아지고 있다. 재즈 가수를 연상시키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대놓고 편파방송을 하는 카는 자신만의 독특한 추임새로도 유명하다. 예를 들어 캐벌리어스 선수가 슬램덩크를 성공시키면 ‘Throws the hammer down(해머를 내리칩니다)!' 하고 소리친다. 블락을 하면 ’Get that weak stuff outta here(엉덩이 이리 대)!‘, 3점을 성공시키면 ‘Deep at the Q(퀴큰 론즈 아레나 깊숙한 곳에서 성공)!'이다. 르브론 제임스에게 ’L-Train'이라는 별명을 처음 붙인 것도 카다.

Cleveland Cavaliers announcer Austin Carr

오스틴 카가 직접 들려주는 'L-train! Throws the hammer down!'


카의 독특한 멘트는 오하이오 지역에 수많은 팬들을 만들어냈다. 심지어 클리블랜드에서는 ‘오스틴 카 술 마시기 게임’이라는 게임도 유행하고 있다. 친구들끼리 캐벌리어스 경기를 보면서 카가 특정 멘트를 할 때마다 술을 ‘원샷’ 하는 것이다. ‘Shoot Boobie, shoot!' 이란 멘트에는 두 잔, ’What in the world is going on!‘에는 넉 잔 하는 식이다. 경기 중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라디오 뉴스를 통해 그런 게임이 있다는 사실을 안 카는 팬들에게 새로운 즐거움을 준 것을 기뻐했다.

올해로 39년째 캐벌리어스와 인연을 맺고 있는 카는 클리블랜드를 대표하는 스포츠 스타다. 처음에는 선수로, 은퇴 후에는 구단 홍보 담당자와 TV 해설자로, 또한 지역사회사업가로, 카는 언제나 클리블랜드 시민들과 함께 해왔다. 한 세대가 넘는 오랜 시간 동안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카와 클리블랜드 시민들이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추억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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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농구 최고의 득점기계

오스틴 카는 1948년 3월 10일, 국방성 자재부 직원인 아버지와 간호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카의 부모님은 다섯 자녀를 엄격한 가톨릭 방식으로 키웠고, 카는 주위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는 예의바른 아이로 자랐다. 부모님의 직장이 있던 워싱턴 D.C.에서 소년시절을 보낸 카는 그리 크지 않은 키에도 불구하고 민첩한 몸놀림과 정교한 슈팅으로 고교 농구계를 주름잡았다. 고등학교 마지막 학년에 아티스 길모어 등과 함께 All-America에 선정된 카는 체육 특기자로 대학에 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카의 아버지는 집에 밀려든 수많은 대학홍보물 중에서 노트르담 대학과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을 놓고 고민했다. 그는 자신의 능력에도 불구하고 학력 부족 때문에 번번이 승진 인사에서 탈락했던 아픔을 가지고 있었다. 아들에게는 똑같은 아픔을 맛보게 하고 싶지 않았던 그는 아들을 엄격한 가톨릭 학풍을 지닌 노트르담 대학으로 진학시키기로 했다.

카는 아버지의 바람과는 달리 첫 학기에 신통찮은 성적에 그쳤다. 처음으로 가족과 멀리 떨어져서 생활하게 된 데다 모든 것을 혼자서 계획해야 하는 대학 생활에도 적응하지 못했던 것이다. 곤경에 빠진 카에게 손을 내민 것은 교수들이었다. 교수들은 카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을 뿐 학습능력도 의지도 부족하지 않은 학생이라는 것을 알고 카가 공부에 집중할 수 있도록 여러 모로 배려해줬다. 마음을 다잡은 카는 점점 성적을 올리기 시작했고, 경제학사 학위를 받은 졸업학기에는 우등생 명단에까지 들었다.

카는 대학농구에도 순조롭게 적응했다. 당시에는 1학년이 경기에 뛸 수 없었기 때문에 카의 NCAA 데뷔는 2학년에 이루어졌는데, 이때부터 3년 동안 카는 장거리 슈터임에도 불구하고 60%의 야투율로 경기당 34.5점을 올리는 최고의 대학 스타로 성장했다. 신장은 193cm로 그렇게 크지 않았지만 이를 상쇄할 만한 민첩성을 가지고 있었고, 오늘날의 3점슛 라인보다 훨씬 먼 곳에서 마치 레이업을 넣듯이 꽂아넣는 폭발적인 장거리 슛은 카를 막을 수 없는 득점기계로 만들어 주었다. 카는 3학년과 4학년 시즌에 각기 1,000득점 이상을 올렸는데, 그때까지 한 시즌에 1,000득점을 올린 대학선수는 피트 마라비치 뿐이었다.

카의 득점력은 플레이오프 같은 중요한 경기에서 더 빛을 발했다. 1970년 NCAA 토너먼트에서 카는 오하이오 대학을 상대로 무려 61점을 몰아넣었는데, 이는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NCAA 토너먼트 한 경기 득점 기록이다. 카는 이날 경기에서 한 경기 최다 야투성공(25개) 및 야투시도(44개)를 기록했으며, 카가 NCAA 토너먼트 7경기에서 기록한 평균 50득점은 앞으로도 깨지기 힘든 불멸의 기록으로 남아있다.

“저도 그 경기를 다시 보고 싶은데 경기 영상을 구할 수가 없군요. (그 경기를 중계한) CBS 방송국 여러분, 경기 영상이 남아있으면 보내주시겠습니까? 우리 아이들에게 제 한창때 모습을 보여주고 싶군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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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올해의 대학 선수상을 수상한 카는 대학 시절 통산 2,560득점으로 역대 통산득점 5위의 성적을 남겼고, 훗날 대학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이제 남은 것은 NBA 도전 뿐이었다. 대학 농구 영웅 카는 1971년 드래프트에서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에게 1순위로 지명되며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신생팀의 희망, 그리고 부상

클리블랜드는 카가 지명되기 1년 전 리그에 가입한 신생팀이었다. 당시 클리블랜드 시는 파산상태였고, 클리블랜드의 젊은이는 일자리를 찾아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다. 클리블랜드 출신 사업가이며 MLB 구단인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소유주기도 했던 닉 말리에티는 스포츠를 통해 시민들의 자긍심을 높이려 했고, 마침 NBA에서 팀을 늘리려고 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곧바로 유치 신청을 했다.

팀 유치 목적이 클리블랜드 시민 단합이었기 때문에, 클리블랜드의 신생팀은 처음부터 철저하게 지역 사회와의 유대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말리에티는 신생팀 이름을 시민 공모로 결정하기로 했고, 14,000여 개의 응모작 중 기병대(Cavaliers)를 신생팀의 이름으로 정했다. 개척시대에 인디언과 미국 기병대가 클리블랜드 지역에서 사투를 벌였던 역사에 착안한 것이었다. 유니폼 색깔도 클리블랜드에 위치한 말리에티의 모교인 존 애덤스 고등학교 유니폼의 색깔을 그대로 정했다. 오늘날 캐벌리어스의 별칭이자 특별한 경기에 입고 나오는 '와인 앤드 골드‘ 유니폼이다. 말리에티는 자신의 모교인 보울링 그린 대학교 농구 코치였던 빌 피치를 단장겸 감독으로 영입하면서 ’시민 친화형 구단‘ 구성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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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말리에티의 기대와는 달리, 혹은 예상대로, 신생팀 캐벌리어스의 시작은 처참했다. 1970-71시즌, 캐벌리어스는 15승 67패의 성적으로 리그 꼴찌를 기록했다. 함께 창단된 버펄로 브레이브스보다도 7승이나 뒤진 성적이었다. 관중 동원도 뒤에서 두 번째였다.
하지만 모든 일이 나쁘기만 할 수는 없는 법. 최악의 성적은 최고의 신인지명순위로 연결됐고, 캐벌리어스는 1971년 1순위 지명권을 획득하게 됐다. 오스틴 카는 바로 이 1순위 지명권으로 구단의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프로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카의 프로 생활은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카는 프리 시즌에 다리가 부러지며 데뷔전을 미뤄야 했다. 한 달 후에 복귀했지만 이번에는 반대쪽 발을 다쳐 또다시 7주간 치료를 받아야 했다. 결국 첫 시즌을 제대로 치르게 된 것은 시즌이 반 가까이 지난 후였다. 카의 선수경력 내내 발목을 잡았으며, 이후 캐벌리어스 출신 선수들에게 지긋지긋하게 따라붙게 되는 부상의 시작이었다.

일단 뛰기 시작하자 카의 득점력은 금세 두각을 나타냈다. 부치 비어드와 함께 백코트를 이룬 카는 43경기를 소화하며 팀 내 최다인 경기당 21.2득점을 올렸다. 출장경기 수 부족으로 포틀랜드의 시드니 윅스에게 신인왕을 넘겨줬지만 올 루키 퍼스트 팀에 들기에는 충분한 성적이었다.

이듬해인 1972-1973시즌 캐벌리어스는 비어드를 시애틀로 보내고 베테랑 민완가드인 레니 윌킨스를 영입했다. 훗날 캐벌리어스와 드림팀 III의 감독을 역임하며 명예의 전당에 오른 윌킨스는 당시 35세의 노장이었지만 올스타에 8번이나 오른 적이 있는 명가드였다. 카와 윌킨스는 멋진 조화를 이루며 40.1점과 11.8어시스트를 합작했고, 팀 성적도 3년 연속 상승세를 보였다. 카는 윌킨스를 보면서 득점을 하지 않고도 팀에 공헌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워나갔다. 이듬해 노쇠 기미를 보인 윌킨스 대신 팀을 이끌게 된 카는 커리어 최다인 21.9점과 3.6리바운드, 3.8어시스트를 올리며 마침내 올스타에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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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1975시즌을 앞둔 캐벌리어스는 어느 때보다도 기대에 들떠있었다. 카와 포워드 빙고 스미스가 네 시즌째 호흡을 맞추며 탄탄한 기반을 이루고 있었고, 윌킨스가 팀을 떠났지만 짐 클레몬스가 훌륭히 포인트가드 자리를 이었기 때문이다. 캐벌리어스는 또한 ABA 파산 드래프트로 센터 짐 쵼스를, 트레이드로 베테랑 스윙맨 딕 스나이더를, 드래프트로 캠피 러셀과 푸츠 워커를 영입하는 등 알찬 전력보강을 했다. 홈구장도 최신 시설을 갖춘 리치필드 콜로세움으로 옮겼다.
캐벌리어스는 시즌 첫 경기를 4차 연장 끝에 분패하는 등 3연패로 시즌을 시작했지만, 이후 연승 가도를 달리며 팀 역사상 처음으로 5할 이상의 승률을 올리고 있었다.

불행이 닥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캔사스 시티와의 홈경기에서 카가 치명적인 무릎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대수술을 받은 카는 시즌 막판 복귀했지만, 이미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폭발적인 운동능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뒤였다. 나머지 선수들이 분전한 캐벌리어스는 휴스턴 로케츠와 마지막까지 플레이오프 진출을 놓고 경합을 벌였지만,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단 한 점 차이로 분패, 역시 단 한 경기 차이로 창단 이후 첫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카 개인에게는 참담한 한 해였지만 캐벌리어스에게는 가능성을 보인 한 해였다. 창단 이후 줄곧 팀을 이끌어온 빌 피치 감독은 모든 선수들이 공격과 수비에 참가하는 농구를 추구했고, 피치 감독의 이러한 철학은 지난 5년간 팀에 완전히 녹아들었다. 대부분 젊은 선수들로 이루어진 로스터에는 다재다능한 선수들이 많았고, 피치 감독이 단장까지 맡고 있던 프런트 역시 전력강화를 위한 노력을 그치지 않았다.

구단주 말리에티 역시 캐벌리어스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스포츠를 통해 ‘파산 도시’ 클리블랜드의 자긍심을 높이고자 노력한 말리에티의 꾸준한 노력은 1974년 리치필드 콜로세움 완공으로 그 결실을 보았다. 이전 시즌까지 홈 구장이었던 클리블랜드 아레나는 관중석이 8,000여 석에 불과한 낡은 경기장이었다. 이런 구장에서는 관중을 모을 수 없겠다고 생각한 말리에티는 클리블랜드 외곽 20여 킬로미터에 있는 부지를 매입해 다목적 대형 구장을 짓기 시작했다. 농구장 기준 20,273석의 관중석을 보유한 리치필드 콜로세움은 농구뿐 아니라 아이스하키, 콘서트 등 여러 목적으로 쓰일 수 있었으며, 귀빈석을 도입한 최초의 실내 경기장이기도 했다.

말리에티는 새 구장을 홍보하기 위해 처음부터 큰 이벤트를 많이 개최했다. 개관식을 겸해 프랭크 시내트라 콘서트를 유치했고, 이듬해 당대 최고의 복서 무하마드 알리와 애송이 척 웨프너간에 펼쳐진 대혈전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무명 배우였던 실베스터 스텔론은 TV로 이 경기를 시청한 후 영감을 얻어 ‘록키’의 대본을 썼고, 자신이 직접 주연을 맡으며 스타덤에 오르기도 했다.

캐벌리어스 역시 새 경기장에서 새로운 모습을 보이며 점점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이전 시즌까지는 8,000석 작은 경기장의 반도 채우기 힘들었지만, 리치필드 콜로세움에서 치른 첫 시즌에는 그 두 배의 관중을 모았다. 팀 전체가 활력에 차있었고, 누구나 다음 시즌을 기대했다.


마지막 퍼즐 조각 써몬드

기대와는 달리 캐벌리어스의 1975-1976시즌 초반은 그리 좋지 못했다. 공수 모두 안정적인 경기를 하는데도 번번이 2%가 부족한 모습을 보이며 6승 11패에 그쳤다. 그 이유를 쵼스 혼자서 맡고 있던 빅맨진의 부족에서 찾은 피치 감독은 트레이드로 훗날 명예의 전당에 오르게 되는 네이트 써몬드를 영입했다. 리치필드 콜로세움에서 불과 30여 킬로미터 떨어진 애크런에서 태어난 써몬드는 당시 34세로 오랜 시간을 뛰지 못하는 노장이었지만, 바로 전 시즌 리그 역사상 최초로 쿼트러플 더블을 기록할 정도로 능력 있는 선수였다. 피치 감독은 선발로 쵼스를 30분 가량 기용하면서 나머지 18분을 써몬드가 책임져주길 기대했다.

써몬드는 피치 감독의 기대에 잘 부응했다. 아니, 기대를 훨씬 뛰어넘었다. 써몬드는 캐벌리어스 센터진의 18분을 책임졌을 뿐만 아니라 라커룸에서 최고의 리더 역할을 해냈다.
카의 회상에 따르면, 처음 팀에 합류한 써몬드는 라커룸에 들어서자마자 후배들을 모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희들은 너희들이 얼마나 뛰어난 선수들인지 모르고 있어. 이제 힘을 모아 뛰기만 하면 돼. 내가 앞으로 우승을 위해 뛸 수 있는 시간은 1,2년에 불과하겠지만, 여기서는 우승할 수 있을 것 같아.”

캐벌리어스 선수들은 산전수전 다 겪은 대선배의 격려에 큰 자신감을 얻었고 서로를 믿기 시작했다. 그리고 코트 위에서 그러한 믿음을 남김없이 표출했다. 캐벌리어스는 이후 승리를 거듭하며 전반기를 21승 20패로 마쳤다. 후반기로 접어들자 캐벌리어스의 상승세는 최고조에 달했다. 캐벌리어스는 후반기에만 28승 13패를 거두며 리그 최고 성적을 올렸고, 49승 33패의 성적으로 창단 이후 첫 디비전 우승을 차지했다.

1975-1976시즌의 캐벌리어스는 팀 플레이의 극한을 보여줬다. 최다득점자인 쵼스의 평균득점이 15.8점에 불과했지만, 그해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한 피치 감독이 주로 기용한 9명중 7명이 두 자릿수 득점을 올린 것이다. 모든 선수들이 팀을 위해 개인을 희생했다. 슈팅 갯수나 득점, 출장시간 등에 대해 불평하는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카도 팀을 위해 식스맨 자리를 자청, 생애 최저인 경기당 19.7분 출장과 10.1득점에 그쳤지만, 중요한 순간마다 벤치에서 나와서 득점을 성공시켰다.

캐벌리어스 선수들의 동료애는 코트 밖에서 더 잘 나타났다. 선수들은 경기가 끝난 후에도 항상 함께 다녔다. 피치 감독이 쉬는 날 선수들을 소집할 일이 있으면 전화를 한 통만 걸면 될 정도였다. 어차피 전화 거는 곳에 전원이 모여있었기 때문이다.

캐벌리어스의 선전은 클리블랜드를 비롯한 오하이오주 북동부 주민들의 폭발적인 지지를 얻어냈다. 평균 관중 수는 지난해에 비해 또다시 50% 증가한 12,000여 명을 기록했고, 팬들은 클리블랜드의 새로운 자랑거리로 캐벌리어스를 꼽기 시작했다. MLB의 대표적인 약체 팀인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나 최악의 성적을 내고 있던 NFL팀 클리블랜드 브라운스 대신 캐벌리어스가 클리블랜드를 상징하기 시작한 것이다. 젊은이들의 캐벌리어스에 대한 사랑은 광적이었다. 암울한 지역 경제 때문에 방황하던 그들은 ‘젊은 캐벌리어스‘의 선전에서 자신들의 희망을 발견한 것이다.

열정적인 구단주와 우수한 감독, 팀워크로 똘똘 뭉친 선수들, 그리고 열광적인 팬들까지. '기적'을 위한 모든 요소가 갖춰졌다.


'리치필드의 기적'
 
창단 후 처음으로 플레이오프 무대를 밟은 캐벌리어스가 1라운드에서 마주친 상대는 워싱턴 불리츠였다. 그해에는 비록 48승에 그쳤지만, 불리츠는 바로 전 시즌만 해도 60승을 올리며 파이널에 올랐던 강팀이었다. 윌트 체임벌린과 함께 신인왕과 MVP를 동시 수상한 유이한 선수인 웨스 언셀드를 중심으로, 훗날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엘빈 헤이스와 데이브 빙이 언셀드를 보조하고 있었다. 정규시즌 성적은 캐벌리어스가 앞섰지만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워싱턴의 승리를 점쳤다.

하지만 캐벌리어스의 팬들은 생각이 달랐다. 리치필드 콜로세움에서 벌어진 1차전은 19,974명의 관중이 몰리며 플레이오프 관중동원 신기록을 세웠다. 비록 캐벌리어스가 95-100으로 분패하긴 했지만, 팬들은 클리블랜드의 자랑에게 아낌없는 성원을 보냈다. 캐벌리어스도 팬들의 성원에 화답하듯 2차전에서 짜릿한 역전승을 거뒀다. 워싱턴에서 벌어진 2차전에서 캐벌리어스는 종료 6초전까지 79-78로 뒤졌으나 종료 직전 터진 빙고 스미스의 장거리 슛으로 한 점차 승리를 거뒀다. 스미스의 슛이 림을 가를 때 오늘날까지도 캐벌리어스의 라디오 중계 캐스터로 일하고 있는 조 타이트는 ‘빙고!’라고 소리쳤다. 본명이 로버트인 스미스에게 ‘빙고’라는 별칭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기세를 탄 캐벌리어스는 홈에서 펼쳐진 3차전에서도 낙승을 거뒀으나 4차전 원정에서 패하며 시리즈 전적 2-2 동률을 이뤘다.

클리블랜드에서 열린 5차전도 마지막까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명승부였다. 캐벌리어스는 종료 7초전까지 90-91로 뒤진데다 엘빈 헤이스에게 자유투까지 내줬지만, 헤이스는 클리블랜드 관중들의 필사적인 방해공작(?) 때문인지 두 개의 자유투를 모두 실패했다. 캐벌리어스는 타임아웃 후 시도한 공격에서 2차전의 영웅 스미스가 에어볼을 던졌으나 베이스라인을 파고든 짐 클레몬스가 천금같은 공격리바운드를 잡아낸 후 버저비터 리버스 레이업까지 성공시켰다. 92-91, 캐벌리어스의 승리였다.

워싱턴도 홈에서 열린 6차전을 연장 끝에 잡아내 시리즈 전적 3-3. 양팀 모두 벼랑 끝에 선 가운데 운명의 7차전이 다가왔다.

4월 29일, 리치필드 콜로세움에서 열린 7차전을 앞두고 클리블랜드의 팬들은 캐벌리어스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기로 한 것처럼 보였다. 카는 그날의 열정적인 성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경기 시작이 두 시간이나 남았는데도 수천 명의 팬들이 이미 입장해 있었어요. 그리고 두 시간 내내 연습하는 우리들에게 ‘우리는 캐브스를 원한다’며 응원을 보내줬죠. 저는 클리블랜드에서 40년 가까이 살고 있지만 그런 열정적인 응원은 본 적이 없습니다.”

경기 시작이 다가옴에 따라 관중들은 계속해서 몰려들었다. 표를 구하지 못한 팬들도 어떻게든 입장하려고 갖가지 방법을 동원했다. 구단 직원들이 제지해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고, 결국 20,273석의 수용인원을 훨씬 넘는 관중들이 통로를 꽉 채운 채 열광적인 응원을 보냈다. 오하이오 북동부의 주민들이 모두 모인 것 같았다. 공식적으로는 그날의 관중 수가 새로운 플레이오프 관중 기록인 21,564명으로 기록되긴 했지만, 실제로 몇 명이 들어왔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들이 외치는 응원의 함성이 어찌나 컸던지, 네이트 써몬드는 그날 녹음한 응원소리를 평생 지니고 다니며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마다 듣곤 한다.

경기는 시종일관 접전 양상을 보였고, 팬들은 점점 더 큰 목소리로 ‘Let's Go Cavs!!!'를 외치기 시작했다. 오늘날 캐벌리어스의 홈구장에서 울려퍼지곤 하는 구호가 바로 이때 탄생했다. 종료 1분 30초 전 85-83으로 앞서고 있던 캐벌리어스는 헤이즈가 5차전에 이어 또다시 자유투 두 개를 모두 실패하며 승기를 잡는 듯 했지만, 9초를 남기고 워싱턴의 필 체니어에게 점프슛을 얻어맞아 동점을 허용했다. 시리즈를 승리하기 위해서는 남은 9초 동안 반드시 득점을 성공시켜야 했다. 타임아웃을 부른 피치 감독은 슈터인 딕 스나이더에게 마지막 공격을 맡겼다. 단, 점프슛이 아니라 드라이브인 공격을 주문했다. 워싱턴 수비진의 의표를 찌르기 위해서였다.

모든 것이 걸린 마지막 공격, 사이드라인에서 클레몬스에게 인바운드 패스를 건네받은 스나이더는 슛을 막으러 나온 언셀드를 제치고 페인트존으로 파고들었다. 스나이더가 4초를 넘기고 던진 한 손 플로터는 백보드를 한 번 맞추고 림으로 빨려들어갔다. 캐벌리어스가 87-85로 앞서는 순간이었다. 워싱턴은 마지막 공격에서 언셀드가 골밑으로 롱패스를 시도했으나 스나이더에게 걸렸고, 체니어가 던진 마지막 슛도 림을 외면했다. 경기를 중계하던 조 타이트가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캐벌리어스 승리! 캐벌리어스 승리!” 플레이오프에 첫 진출한 캐벌리어스가 강호 워싱턴에게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는 순간이었다.

승리가 확정되는 순간 리치필드 콜로세움을 가득 메운 관중들이 코트로 쏟아져들어왔다. 그들은 기쁨의 함성을 지르며 선수들을 끌어안았다. 이미 선수도 관중도 없었다. 놀라운 일체감을 보여주며 서로를 위해 헌신한 기적의 주인공들이 있을 뿐이었다. NBA 역사에 ‘리치필드의 기적’이라 기록되는 캐벌리어스 역사상 최고의 순간이었다.


'리치필드의 기적'

카는 그날의 감격을 떠올리며 지그시 눈을 감는다.
“팬들이 우리가 지는 걸 허락하지 않았어요. 그날 우리가 치른 경기를 기적이라고들 하는데, 진짜 기적은 그날 경기장에 있었던 팬 여러분들입니다. 그런 응원을 받으면 누구든지 힘을 낼 수밖에 없을 겁니다.”

기세가 하늘 끝가지 오른 캐벌리어스는 컨퍼런스 파이널 상대인 보스턴을 맞아 전의를 다지고 있었다. 하지만 크나큰 불행이 캐벌리어스를 덮쳤다. 보스턴과의 1차전을 이틀 앞두고 가진 훈련시간에 주전 센터인 쵼스가 러셀의 발을 잘못 밟으며 발목이 부러진 것이다. 캐벌리어스에게는 너무나 큰 손실이었다. 존 하블리첵과 데이브 코웬스가 이끄는 보스턴에게 쵼스 없이 이기기는 너무나 힘들었다.

캐벌리어스는 보스턴에서 펼쳐진 1,2차전을 예상대로 모두 내줬다. 하지만 기적의 여운은 아직 남아있었다. 클리블랜드에서 펼쳐진 3,4차전에서는 또다시 플레이오프 관중 신기록이 세워졌고, 캐벌리어스는 홈 팬들의 열광적인 응원에 힘입어 3,4차전에서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주전 센터 없이 상대하기에는 보스턴의 골밑이 너무 높았다. 신장의 열세 때문에 시리즈를 계속할수록 체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결국 써몬드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5,6차전을 모두 내준 캐벌리어스는 파이널 진출 일보직전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파이널에서 만날 수도 있었던 피닉스에게는 시즌 전적 3-1로 앞서있었기 때문에 아쉬움이 더했다.

비록 파이널에 진출하지 못하고 보스턴의 우승을 지켜봐야 했지만, 캐벌리어스는 우승보다 값진 것을 얻었다. 창단 6년 만에 클리블랜드의 일부로 자리잡은 것이다. 스포츠를 통해 클리블랜드 시민들의 자긍심을 높이려던 말리에티 구단주의 꿈이 마침내 이루어졌다.

                           1975-1976시즌 '기적의 팀' 캐벌리어스.
                                  아래 왼쪽에서 두 번째가 카


부상, 그리고 은퇴

기적은 한 번만 일어나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일까? 캐벌리어스는 이듬해에도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나 1라운드에서 복수의 칼을 갈고 있던 워싱턴에게 탈락했고 이듬해에도 뉴욕에게 2전 전패로 탈락하는 등 1라운드의 벽을 넘지 못했다. 팀의 구심점이었던 맏형 써몬드는 은퇴했고 캐벌리어스는 더 이상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하는 팀이 되었다. 카는 세 시즌 연속 전경기를 출장했지만 팀의 몰락을 막지 못했다. 결국 1978-1979시즌 30승 52패에 그친 피치 감독이 물러났고, 이듬해에는 팀 자체가 팔렸다. 캐벌리어스에 긴 암흑기가 다가온 것이다. 이후 6년 동안 캐벌리어스는 세 명의 구단주와 아홉 명의 감독이 바뀌어야 했다. 연고지 이전 파동을 두 번이나 겪으며 버림받을 뻔한 팬들도 등을 돌렸다. 한때 만원사례를 이뤘던 리치필드 콜로세움에는 정원의 1/4도 안 되는 관중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캐벌리어스의 암흑기는 1986년 고든 군드가 팀을 인수한 뒤 과거 캐벌리어스 선수였던 레니 윌킨스를 감독으로 앉히고 브래드 도허티와 마크 프라이스를 영입한 뒤에야 끝나게 된다.

어느덧 30대에 접어든 카의 선수인생에도 마지막이 다가왔다. 무릎에 또다시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 카는 선수인생 세 번째로 대수술을 받아야 했다. 의사는 카가 두 발로 설 수 있을 것이란 말 외에는 어떤 긍정적인 약속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카는 포기하지 않았다. 재활치료가 끝난 뒤에도 매일 18kg의 기구를 발에 묶고 들어올리는 훈련을 반복했다. 결국 카는 기적적으로 돌아와 코트 위에서 은퇴할 수 있었다. 비록 그 사이에 댈러스를 거쳐 워싱턴으로 트레이드되는 바람에 정든 홈코트에서 은퇴할 수는 없었지만, 카의 초인적인 재활노력과 감동적인 복귀는 리그의 후배들에게 큰 감동을 줬다.

카는 NBA에서 10시즌간 뛰며 평균 15.4득점 2.9리바운드 2.8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대학 시절 받았던 기대에는 한참 미치지 못한 성적이었지만, 캐벌리어스가 클리블랜드 시민들의 마음속에 정착한 첫 10년을 상징하기에는 충분했다. 캐벌리어스는 카가 마지막 시즌을 끝내기도 전인 1981년 1월 카의 34번 저지를 영구결번시켰다. 카와 영광의 시절을 함께 했던 빙고 스미스와 네이트 써몬드도 캐벌리어스 역사상 단 6명뿐인 영구결번의 영예를 안았다. 오늘날까지도 캐벌리어스 통산 출장경기 5위, 득점 3위, 야투시도 및 성공 1위, 어시스트 8위 등에 올라있는 카는 1999년 클리블랜드 팬들이 뽑은 올타임 캐벌리어스 베스트 5에 선정되기도 했다.


제2의 고향에서 새 인생을 시작하다


비록 선수로써의 인연은 끝났어도 카와 클리블랜드의 인연은 끝나지 않았다. 선수시절부터 클리블랜드에서 사회사업에 헌신해 1980년 NBA가 지역사회에 공헌한 선수에게 주는 ‘월터 케네디 스포츠맨십 상’을 수상하기도 한 카는 은퇴 후에 클리블랜드로 돌아와 제2의 고향과의 인연을 이어갔다. 카는 클리블랜드 아동들을 상대로 농구 교실을 열어 팀플레이 중심의 교육을 했다. 카는 오늘날 사회가 각박해져가고 있는 이유가 어릴 때부터 자신만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며 자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저는 한때 전국 최고의 대학 선수였지만 저 혼자 특별대우를 받거나 연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재능은 신이 주셨지만 그 재능을 연마해 사용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죠. 어렸을 때부터 ‘나는 노력할 필요가 없어’라고 생각하며 자라게 되면 어른이 돼서도 그런 태도를 지니고 살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태도는 함께 살아가야 하는 세상에서는 용납될 수 없죠.”

카는 이런 교육방침을 자신의 가정에도 그대로 적용시켰다. 클리블랜드에서 결혼한 아내 샤론과의 사이에 1남1녀를 두고 있는 카는 자녀들에게 남을 위해 헌신하는 자세를 가르쳤고, 클리블랜드에서 줄곧 자라난 카의 자녀들은 모두 지역 사회를 위해 여러 가지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카가 클리블랜드에서 펼쳐온 사회사업에는 때때로 ‘기적의 해’ 동료들이 함께하기도 한다. 캐벌리어스에는 은퇴 선수들과 전임 구단주가 참석한 가운데 자선 골프대회를 여는 전통이 있다. 카가 은퇴한 후 구단주가 여러 번 바뀌었지만, 댄 길버트 현 구단주를 비롯한 역대 구단주들은 이 전통을 30여 년째 지켜오고 있다. 골프대회에는 핸디 6의 ‘명 골퍼’ 카를 비롯해 말리에티 전 구단주, 빌 피치 전 감독, 빙고 스미스, 네이트 써몬드 등 캐벌리어스의 여명기를 함께 한 전우들이 자리를 빛낸다. 노장들의 대화는 항상 ‘기적의 해’로 거슬러 올라간다. ‘만약 보스턴과의 컨퍼런스 파이널을 앞두고 쵼스의 다리가 부러지지 않았더라면‘ 하는 가정 말이다. 노장들은 한껏 기세를 올린다. “쵼스만 있었으면 우리가 최고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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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단의 심장

카가 클리블랜드에서 펼친 여러 사회사업은 클리블랜드 시민과 카 사이에 굳건한 유대감을 형성했다. 시민들은 카와 함께하며 어려웠던 시절 클리블랜드에 희망을 줬던 ‘기적의 해’를 떠올린다. 그로부터 30여 년, 이제 기적이 이루어졌던 리치필드 콜로세움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캐벌리어스는 1994년 새 구장인 군드 아레나(현 퀴큰 론즈 아레나)로 홈구장을 옮겼고, 사명을 다 한 리치필드 콜로세움은 1999년 클리블랜드 시민의 애도 속에 철거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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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들이 함께한 추억은 와인 & 골드 옛 유니폼을 입은 리그의 새로운 아이콘이 코트를 질주하고 있는 오늘날에도 세대를 건너 이어져오고 있다. 카가 퀴큰 론즈 아레나의 중계석에 앉으면 캐벌리어스 팬들은 따뜻한 박수를 보낸다. ‘기적의 해’를 함께 한 올드팬도, 카의 농구 교실에서 농구를 배운 젊은 팬도 말이다. 팬들은 카 뿐 아니라 클리블랜드 지역방송국에서 하프타임 리포트를 진행하는 캠피 러셀이나 경기 후 라디오 분석을 하는 짐 쵼스에게도 갈채를 보낸다. 캐벌리어스가 어려운 일을 겪었을 때나 큰 도전을 만났을 때, ‘리치필드의 기적’은 선수와 팬 모두의 마음속에서 등불처럼 빛나곤 했다.

‘기적의 해’ 이후 처음으로 센트럴 디비전 왕좌를 눈앞에 두고 있는 오늘날의 캐벌리어스를 카는 어떻게 생각할까?

“무엇보다 선수들의 자부심과 의지가 대단합니다. 모든 스포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죠.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선수들이 잘 어울리고 있습니다. 라커룸 분위기도 최고고요. 마치 ‘기적의 해’ 시절같은 분위기입니다. 이런 팀은 언제든 이길 기회를 갖게 됩니다.”

오스틴 카는 스포츠가 스포츠를 넘어 지역 사회에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 그의 생애를 통해 대답했다. 그는 캐벌리어스의 여명기를 상징하는 선수였을 뿐 아니라 클리블랜드 시민이 어려운 시절에도 잃지 않았던 용기와 희망의 상징이기도 했다.

캐벌리어스 후배들이 마침내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날, 카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캐벌리어스와 함께 할 것이다. 자신과 동료들이 못다 이룬 기적이 이뤄진 현장에서 카만의 푸근한 목소리로 소리칠 것이다.

“Yes! Young men, Boom Boom.... It's 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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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A 트레이드 데드라인이 지났다. 클리블랜드는 마지막까지 논의됐던 샤킬 오닐 영입을 포기하면서, 주전 5명 중 3명을 바꿨던 작년과는 달리 어떤 트레이드도 하지 않은 채 후반기에 임하게 됐다. 아무 것도 얻지 않은 대신 아무 것도 잃지 않은 것이다.

클리블랜드를 둘러싼 여러 가지 루머 중 어제 마지막까지 논의되던 것은 뜻밖에도 오닐을 데려오는 딜이었다. 클리블랜드에서 벤 월러스와 사샤 파블로비치를 보내고 피닉스에서 오닐을 데려오는 딜이었다. 그런데 피닉스에서 저비악, 파블로비치와 J.J. 힉슨 또는 1라운드픽을 제시했고, 클리블랜드 측에서 제3의 팀을 끌어들여보려 했지만 실패하며 협상이 결렬됐다.

이 딜에 대해 필자가 어떻게 느끼는지는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협상과정을 통해 클리블랜드 프런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추론할 수 있다.


첫째, 아무리 클리블랜드라도 무한정으로 돈을 쓸 수 있는 팀은 아니다.

클리브랜드의 현재 총연봉은 약 9,000만 달러로 리그에서 세 번째로 많다. 세계 경제 침체로 리그 전체에 불고 있는 비용 감축 바람은 클리블랜드도 예외가 아니다. 게다가 클리블랜드의 구단주 댄 길버트의 주력 회사인 퀴큰 론즈는 미국발 금융위기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회사다. 구단마다 당장 내년 총연봉을 줄이려 안간힘을 쓰는 바람에 만기계약자의 가치가 이례적으로 뛰어올랐지만, 만기계약자가 아쉬운 것은 클리블랜드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클리블랜드에서 월러스를 제시했는데 피닉스가 월러스 대신 저비악을 원했다는 건 피닉스가 내년에 계약이 끝나는 선수보다는 당장 올해 계약이 끝나는 선수를 원했다는 걸 의미한다. 하지만 클리블랜드는 저비악 트레이드를 거부했다. 이것은 월러스의 선수로서의 가치가 저비악보다 떨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클리블랜드 역시 올해 계약이 끝나는 선수가 필요했다는 뜻이다. 사실 파블로비치 역시 내년 만기연봉 490만 달러 중 보장되어 있는 것은 180만 달러에 불과하기 때문에 만기카드로 봐도 되는데, 클리블랜드는 만기 카드 두 장의 가치가 오닐보다 크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올해 7.3밀의 만기계약자인 스노우의 이름이 이 딜에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스노우의 계약은 부상으로 인한 은퇴가 확정될 경우 대부분을 보험처리할 수 있는 '슈퍼 만기 계약'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클리블랜드는 이 카드를 쓸 생각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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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블랜드가 내년 저비악과 스노우의 연봉 2,000만 달러가 빠지더라도 샐러리캡이 넘음을 들어 어차피 FA를 영입할 수 없을 바에는 이번에 누군가를 데려와야 했다는 의견이 있다. 그런데 클리블랜드는 지금 FA 영입에 신경쓸 여유가 없다. 이번 시즌이 끝나고 옵트아웃이 확실시되는 바레장과의 재계약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미국 경제가 어렵더라도, 바레장의 에이전트인 댄 페건은 최소한 1,000만 달러는 부르고 협상을 시작할 것이다. 클리블랜드로써는 바레장을 잡기 위한 자금을 아껴놓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클리블랜드는 이번 트레이드 시장에서 전력을 보강하기보다는 그 여력으로 현 전력을 보존하는 길을 택한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 클리블랜드는 힉슨을 트레이드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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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 페리 단장에 따르면 클리블랜드에게 오퍼를 넣은 팀 대부분이 힉슨을 달라고 했다. 사실 클리블랜드에서 거의 유일한 유망주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단장들 사이에서 힉슨의 잠재력이 그만큼 인정받고 있다는 뜻도 된다. 그리고 페리는 그런 단장들 중에서도 힉슨에게 가장 큰 기대를 걸고 있는 사람이다. 신인 드래프트 전 워크아웃에서 힉슨과 워크아웃을 가진 페리가 이후 워크아웃 일정을 모조리 취소해버린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페리는 힉슨이 2010년 이후 르브론 제임스의 골밑 파트너가 돼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생각해봐도 힉슨은 클리블랜드의 미래에 반드시 필요한 선수다.

클리블랜드의 최대 강점 중 하나는 벤치에서 나오는 바레장으로, 바레장은 클리블랜드가 보드 장악력과 수비력에서 우위를 보이는 요인 중 하나다. 그런데 바레장이 이번 시즌 종료 후 클리블랜드와 장기계약을 맺으면, 빠르면 다음 시즌, 늦어도 그 다음 시즌에는 주전으로 올라갈 가능성이 높다. 현재 주전인 지드루나스 일가우스카스와 월러스 모두 고령이고 2010년에 계약이 끝나는데다가 1,000만 달러 내외를 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바레장을 벤치에서 내보내긴 아깝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벤치에서 지금의 바레장과 같은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선수는 힉슨 뿐이다.

페리 단장은 르브론과 재계약한 재작년부터 2010년을 계획해온 사람이다. 그런 페리에게 2010년 이후 골밑을 책임져줄 수 있는 힉슨은 쉽게 버릴 수 없는 카드였을 것이다.

셋째, 가장 중요한 점이지만, 페리를 비롯한 클리블랜드 팀 전체가 이번 트레이드 시장에 소극적이었다.

데드라인 종료 후 페리가 한 말이 현재 클리블랜드가 트레이드에 대해 느끼는 바를 가장 잘 표현해준다.

"We felt no pressure to make changes."

실제로 페리나 마이크 브라운 감독이나 선수들이나 트레이드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난 수개월간 저비악 만기카드를 둘러싸고 나온 루머는 거의 모두가 상대팀에게서 나온 것이었고, 브라운 감독이야 원래 트레이드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니 둘째치더라도 선수들중 트레이드를 원하는 선수는 한명도 없었다.

작년 이맘때를 돌이켜보면, 당시에는 팀의 모든 구성원이 트레이드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모두가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래리 휴즈패키지‘, 좋지 않은 팀 캐미스트리, 키드 영입을 강력히 워한 르브론 등, 뭔가 분위기를 바꾸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팀 구성원 모두가 자신감에 차있고 실제로 성적도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고승률을 달리고 있다. 브라운 감독의 전술은 클리블랜드에 온전히 뿌리내렸고 선수들은 서로를 좋아한다. 팀의 알파요 오메가인 르브론은 '현재 팀에 만족한다'며 거듭거듭 만족을 표하고 있다. 과연 이런 팀을 깰 만큼 강심장인 GM이 리그에 몇이나 있을까? 아무리 팀 전력을 높여줄 수 있는 트레이드라도 그것이 팀 캐미스트리를 깰 경우 좋은 결과를 내긴 힘들다. 따라서 페리가 트레이드 시장에 적극적이고 공격적으로 임하기에는 처음부터 많은 제약이 있었다.

그렇다면 데드라인 이전 며칠간 페리가 보인 수많은 움직임은 무엇인가? 필자는 그것들이 전형적인 '되면 좋고 안되면 그만' 류의 움직임이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페리가 제시한 딜들을 보면 정말 딜을 할 생각이 있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황당한 찔러보기가 많았다. 전혀 페리답지 않은 제안들이었다. 페리는 트레이드 데드라인 몇 달 전에는 황당한 얘길 많이 하지만 트레이드 데드라인을 며칠 앞두고는 누구보다도 현실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막판까지 황당한 딜을 계속 제시했다는 건 애시당초 별로 성의가 없었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이에 대해 몇 달 전 페리 단장 자신이 직접 한 말이 있다. 제랄드 월러스 영입 얘기가 막 나올 무렵이었는데, 당시 페리는 시즌 중 트레이드에 대해 '맥시멈급 젊은 슈퍼스타를 데려올 수 있으면 모르되 아니면 별로 움직일 마음이 없다'고 한 적이 있다. 이번 ‘노 딜’은 그 마인드가 데드라인까지 그대로 이어진 것일 뿐이다.

따라서, 애시당초 페리는 팀에 재정압박을 주면서까지 무리수를 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클리블랜드의 전력 보강은 이걸로 끝인가? 필자는 그렇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클리블랜드에는 아직 FA 영입이란 한 수가 남아있다. 특히 빅맨 물량을 보충하기 위해 여러 움직임이 있을 걸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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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생각해볼 수 있는 게 조 스미스다. 뉴올리언즈 호네츠와의 트레이드 불발로 오클라호마 썬더스로 돌아온 후 끝내 트레이드되지 않으면서, 조수미는 바이아웃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아직은 오클라호마를 떠나지 않겠다고 단언하고 있지만, FA로 영입한 선수가 플레이오프에 뛸 수 있는 제한선인 2월 말까지 그것이 유지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만약 스미스가 바이아웃될 경우 여러 우승권 팀들이 스미스를 노릴 걸로 예상되는데, 클리블랜드는 이 싸움에서 실탄을 가장 넉넉하게 보유하고 있는 팀이다.

클리블랜드가 현재 보유하고 있는 익셉션은 총 510만 달러에 달한다. 스미스가 올시즌 받고 있는 480만 달러보다도 많으며 플레이오프 상위시드권 팀들 중에서는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와 함께 가장 많은 축에 속한다. 특히 유력한 경쟁팀인 보스턴보다는 쓸 수 있는 돈이 훨씬 많습니다. 최근 스미스의 목적지로 거론되던 보스턴 셀틱스는 마이키 무어와 스테판 마버리를 영입하면서 전력 보강을 끝냈다. 또한 스미스는 두달 전까지만 해도 'FA가 되면 클리블랜드에서 뛰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510만 달러는 스미스를 데려오기에 부족하지 않은 금액이다.

스미스 다음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카드는 로버트 오리와 크리스 밈이다. 플레이오프에서 수많은 빅샷을 터뜨려 ‘빅샷 랍’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는 오리는 샌안토니오 스퍼스에서 뛴 지난 시즌 이후 한 경기도 뛰지 않고 있다. 파워포워드와 센터를 볼 수 있는 오리가 클리블랜드에 가세한다면 마지막 순간 가동할 수 있는 무기가 하나 더 늘어나게 된다. 오리는 샌안토니오 시절 한솥밥을 먹은 페리 단장 및 마이크 브라운 감독과도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밈은 7피트의 신장을 바탕으로 골밑 수비가 가능하며, 파이널에서 만날 수도 있는 레이커스에서 최근까지 뛰었기 때문에 경기 감각도 살아있는 상태다. 밈은 르브론의 프로 초창기 시절 클리블랜드에서 함께 뛴 경험도 있다.

이번주까지 방출된 선수는 FA 계약 후에도 플레이오프에서 뛸 수 있기 때문에, 클리블랜드의 움직임은 좀더 두고봐야 할 전망이다.

필자는 오닐을 데려오는 것이 클리블랜드의 전력 강화에 큰 도움이 안될 것이라 생각했다. 일가우스카스와 포지션이 겹치며 2:2 수비에 약점을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닐 루머가 돌기 시작한 이후로 오닐이 르브론과 함께 뛸 수도 있다는 생각에 데드라인 전날 잠을 이루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2000년대를 대표하는 선수이며 페니 하더웨이, 코비 브라이언트, 드웨인 웨이드 등 당대 최고 스윙맨과 호흡을 맞춰온 오닐이 2010년대를 대표할 르브론과 함께 커리어 마지막 우승을 일궈내는 모습, 애증의 대상인 코비와 2000년대 최고의 라이벌이었던 던컨과의 마지막 승부..... NBA 팬이라면 누구든 떠올렸음직한 즐거운 상상이다.
하지만 오닐은 클리블랜드로 오지 않았고, 앞으로 올 가능성도 사라졌다. 클리블랜드는 새로운 전력 보강 없이 후반기에 임하게 됐지만, 주전 슈팅가드 딜론테 웨스트를 비롯한 부상 선수들이 복귀하게 되면 최고의 전력을 가동할 수 있게 될 것이다.

NBA 파이널까지 약 4개월, 르브론이 생애 두 번째 도전에서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게 된다면 클리블랜드의 ‘노 딜’은 팬들게서 옳은 선택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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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COLUMNS/SPECIAL 2009. 2. 8. 00:39

2008-09 NBA 전반기 리포트 - Who's Hot / Not?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농구블로그 웹진 DDUEH(이하 뛰어)에서는 2009 피닉스 올스타전을 앞둔 현재, 블로거 필진 4인과 함께 2008-09 NBA 전반기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참여해 주신 블로거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을 전한다.

리포트 주제는 크게 3가지로 나누었다. 첫 번째 주제는 베스트 팀 탑16으로, 상위 다섯 개 팀은 블로거 4명의 의견을 여과없이 담았고, 6위~16위 팀은 의견을 취합하여 정리하였다. 2번 째 주제는 기대 이상으로 선전한 팀/기대 이하의 팀에 관해 썰을 풀어 보았으며 마지막으로 각종 타이틀을 미리 예상해 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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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ffrey23
_ 시즌 전만 해도 마이애미의 플레이오프 진출을 예상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샤킬 오닐의 공백은커녕 웬만한 팀의 주전감도 못되는 변변치 못한 함량미달의 센터가 즐비했고 제이슨 윌리엄스는 LA 클리퍼스로 이적했기 때문이다. 올스타 듀오 드웨인 웨이드와 숀 메리언, 거기에 신인 마이클 비즐리가 기대를 충족시킨다 한들 마이애미의 앞날은 어두워 보였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현재 마이애미는 당당히 동부컨퍼런스 6위를 질주하며 플레이오프 가시권에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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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Time_ 지난 시즌에도 애틀랜타는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었고, 발전가능성을 엿보이며 미래를 기약하게 했었다. 그러나 오프시즌 도중 팀의 핵심 벤치 멤버였던 조쉬 칠드리스가 유럽으로 떠나면서 로스터의 깊이가 눈에 띄게 얕아졌고, 네임 밸류에 비해 실망스러운 한 해를 보였던 마이크 비비의 활약여부도 미지수였다.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시작된 새 시즌이 중반으로 접어들고 있는 지금, 애틀랜타는 에이스 조 존슨의 All-NBA 팀 선정 페이스와 함께 동부 4위를 질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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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2karl
_ 파워 랭킹에 언급했다시피 마이애미의 선전은 필자에게 있어 의외다. 크리스 보쉬와 저메인 오닐의 조합이 실패한 이 시점에서 토론토와의 트레이드로 저메인 오닐을 얻어온다면 샤킬 오닐이 있었던 동부의 강자로 올라갈 수도 있을 것이다. 단 저메인 오닐이 최근 회춘모드를 발동한 샤킬 오닐만큼 해준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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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코치_ 리그에서 이 정도 높이로 5할 승률 이상의 성적을 거두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마이애미는 5할 승률도 모자라 플레이오프까지 노리고 있다. 물론 마이애미가 여기까지 오르는 데에는 드웨인 웨이드의 존재가 결정적이었다. 올 시즌 새로 들어온 루키들의 활약도 팀에 큰 보탬이 되고 있다. 마이크 비즐리는 드래프트 순위에 걸맞는 실력을 보여주고 있고 마리오 챌머스 역시 기대 이상의 성적을 올려주고 있다. 팀 내 입지가 불안한 숀 메리언을 매물로 수준급 빅맨을 영입할 수만 있다면 마이이매의 리빌딩은 생각보다 짧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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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녀석
_ 이 리스트에 리그 1,2위를 다투는 클리블랜드를 올리는 것은 어찌보면 미친 짓일지도 모른다. 35승 9패. 잘 할 줄은 알았지만 모 윌리엄스의 등장으로 이렇게 잘 나갈 줄은 상상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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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ffrey23
_ 9승 30패. 20-10에 가까운 엘리트 포워드와 리바운드와 블락에서 리그 1,2위를 다투는 정상급 센터를 보유한 팀의 성적이다. 컴백홈을 외친 배런 데이비스를 필두로 하여 실로 오랜만에(?) 적극적인 리빌딩에 나섰던 클리퍼스의 행보는 밝아 보였다. 구단의 적극적인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구단 내력인 패배주의에 찌든 클리퍼스의 모습은, 당초 기대와는 달리 너무나도 실망스러운 것이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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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Time
_ 한 팀이 지닌 총체적인 탤런트라는 측면에서 클리퍼스는 절대로 이 자리에 언급되서는 안 될 팀이다. 3년 연속 블록슛 타이틀과 DPOY까지 수상한 리그 최고의 수비형 센터에 뛰어난 공격력을 지닌 정통파 백인 센터, 그것도 모자라 ‘20-10 머신’으로 통하는 강력한 포워드까지 인사이드를 지키고 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들을 이끌며 팀을 통솔하고 있는 이는 리그 Top 5 포인트 가드 중 한 명이자 8번 시드의 기적을 만들어냈던 배런 데이비스다. 그러나 현실은 게임과는 달랐다. 클리퍼스는 현재 리그 최하위 레이스에서도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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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2karl
_ 팀 전력에 핵심이 되는 선수들이 부상 경력이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이 팀의 청사진은 나름대로 괜찮았었다. 하지만 재크 랜돌프, 크리스 케이먼, 베론 데이비스, 마커스 캠비가 차례로 부상을 당해버리는 불운으로 패배를 쌓아가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 상태라면 주전들이 대거 복귀해서 미친 듯이 승수를 쌓는다고 해도 플레이오프 티켓을 얻을지도 의문이다. 플레이오프 8번 티켓을 위한 진흙탕 대전의 초대 여부도 불투명한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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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코치
_ 저메인 오닐, 크리스 보쉬, 호세 칼데론 그리고 드래프트 1순위에 빛나는 안드레아 바르냐니까지. 로스터만 보면 부러울 것이 없는 토론토의 올 시즌 성적은 19승 30패다. 과연 이게 개막 전 우승까지 노리던 팀의 성적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감독 경질까지 불사했지만 여전히 순위는 리그 하위권에 머물러 있다. 일찌감치 오닐의 영입이 실패로 드러나면서 팀 색깔이 불분명해진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이것에 대한 해결책으로 다시 오닐을 트레이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곤 있지만 내구성과 고액 연봉 문제로 이마저도 힘들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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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녀석
_ 팀뿐 아니라 리그의 미래까지 책임질 데론 윌리엄스의 수직성장과 올스타 포워드 카를로스 부저, 올해의 식스맨 유력후보로 떠오른 폴 밀샙의 성장까지 이번 시즌 유타에 대한 필자의 기대감은 그 어느 해보다 컸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크다. 플레이오프 진출 조차 장담하기 힘든 지금의 상황을 보면 유타의 이름이 이 목록에 오를 이유는 충분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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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블로그 웹진 DDUEH(이하 뛰어)에서는 2009 피닉스 올스타전을 앞둔 현재, 블로거 필진 4인과 함께 2008-09 NBA 전반기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참여해 주신 블로거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을 전한다.

리포트 주제는 크게 3가지로 나누었다. 첫 번째 주제는 베스트 팀 탑16으로, 상위 다섯 개 팀은 블로거 4명의 의견을 여과없이 담았고, 6위~16위 팀은 의견을 취합하여 정리하였다. 2번 째 주제는 기대 이상으로 선전한 팀/기대 이하의 팀에 관해 썰을 풀어 보았으며 마지막으로 각종 타이틀을 미리 예상해 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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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ffrey23
_ 수년 동안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던 ‘르브론과 아이들’ 혹은 ‘르브론의 캐벌리어스’라는 이미지는 완전히 벗은 듯하다. 팀 클리블랜드로 거듭난 이 팀은 이제 챔피언 컨덴더로 그 입지를 다져가고 있다. 제 2옵션으로 영입한 모 윌리엄스와 많은 출장시간의 부담을 벗은 르브론 제임스의 활약이 지속되는 한 이 자리는 기사단의 것이다. 적어도 정규시즌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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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Time_ 르브론 제임스 원맨팀 시절에도 클리블랜드는 샌안토니오 스퍼스를 모델로 삼아 팀 디펜스를 체계화하고 전체적인 롤 플레이어들의 수비력을 신장시키는 데 힘을 기울여 왔다. 어차피 르브론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공격은 어느 정도 해결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지금, 리그 최고의 속공 피니셔인 르브론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섣불리 런앤건 위주의 팀으로 방향을 잡지 않았던 수뇌부의 판단이 옳았음이 입증되고 있다. 실점 1위, 득실차 1위. ‘최강’ 클리블랜드의 성공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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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2karl_ 코비가 나홀로 쇼타임을 하지 않아도 이길 수 있는 강팀이 되어버렸다. 최상의 라인업으로 주전을 채우고 벤치 에이스 라마 오돔과 나머지 선수들 또한 팀에 녹아들고 있다. 혹자들은 수비 불안과 1번의 불안함을 내세우고 있지만 강한 공격력과 돌아오는 조던 파머로 불안감을 상쇄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필 잭슨의 감독 임기가 내년시즌까지기 때문에 올해는 그의 열 손가락에 반지를 다 채워줄지 아닐지를 결정할 중요한 시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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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코치_ 충격의 4연패로 디펜딩 챔피언의 위용을 잠시 잃기도 했지만 여전히 보스턴은 강력한 우승후보 중 하나다. 작년에도 불안요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보스턴은 그것을 이겨내고 NBA 왕좌에 올랐다. 경쟁 팀들의 전력이 강해지긴 했지만 빅3가 건재하고 유망주들의 성장이 눈에 띄는 보스턴도 한층 단단해졌음을 잊지 말자. 무엇보다 그들에겐 ‘경험’ 이란 소중한 자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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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녀석
_ 트레버 아리자, 조던 파머, 샤샤 부야치치 등 한층 강해진 벤치멤버, 그리고 서서히 살아나고 있는 코비 브라이언트의 킬러 본능이 7년 만의 우승탈환에 청신호의 빛을 발하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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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ffrey23
_ 이타적인 모습으로 변신하며, 지난 시즌 파이널 진출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한 코비는 올 시즌도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 라마 오돔의 보직변경과 함께 아리자, 부야치치 등 롤플레이어들의 활약이 더해지며 벤치의 깊이는 한층 두터워졌다. 하지만 들쭉날쭉한 레이커스의 팀 수비와 함께 상승세에 있던 앤드류 바이넘의 전력이탈은 레이커스의 1위 표를 고민하게 만든 가장 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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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Time_ 탤런트라는 측면에서는 단연 리그 최고의 팀이다. 대표적인 하프코트 공격 전술인 트라이앵글 오펜스로 대변되는 팀임에도 불구하고 이번 시즌 평균득점 1위를 기록하고 있을 만큼 가공할만한 공격력을 자랑한다. 높이와 기동력, BQ를 고루 갖춘 로스터로 득점쟁탈전과 초 단위 전략대결, 인사이드 게임과 아웃사이드 게임에서 모두 상대를 제압할 수 있을만한 능력이 충분하다. 그러나 여전히 수비에서 허점이 엿보인다는 점이 최대의 약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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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2karl_ 물론 보스턴이 1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지만 개인적인 기준으로 인해 2위로 내려버렸다. NBA 역사 중에 수많은 반지 원정대가 있었지만 이 팀만이 우승반지를 얻었고 핵심 멤버가 그대로 로스터에 남아 있다는 것만으로 이 팀은 리그 최상위권의 팀이다. 처음 이 멤버로 팀이 만들어졌을 때는 개인적인 반발심과 반지 원정대의 성공이 없었다는 역사적인 사실때문에 이 팀을 좋아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실패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작년 챔피언이고 2번째 반지를 노리는 강력한 후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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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코치_ 보스턴에 밀려 2순위를 차지하긴 했지만 사실 1순위라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지난 시즌 아쉽게 준우승에 머물긴 했지만 오히려 우승 가능성은 올 시즌이 더 높다. 코비 브라이언트도 이런 팀의 능력을 잘 알고 있기에 손가락 수술까지 미루며 우승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다만 몇몇 주축 선수들의 부상과 언제 문제가 발생할지 모르는 코비의 손가락 등의 위험요소는 레이커스가 보스턴보다 더 신경써야 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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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녀석
_ 제임스가 없는 순간에도 잘 돌아 간다는 점은 이전까지와는 다른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임스가 코트에 나서면 상대진영이 초토화 된다는 점은 경악스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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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ffrey_ 지난 시즌 22년 만에 우승트로피를 들어 올린 디펜딩 챔피언 보스턴. 팀 역사에 길이 남을 19연승과 함께 시즌 초반 돌풍을 일으켰으나, 1월 들어 잇따른 원정경기 패배와 함께 2연패에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식스맨 제임스 포지의 이탈로 벤치전력의 약화가 우려됐으나 리온 포우, 글렌 데이비스 등, 패기 넘치는 유망주들의 성장으로 이를 만회하고 있는 보스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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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Time_ 디펜딩 챔피언 보스턴은 시즌 초반, 패배를 모르는 무시무시한 연승행진으로 구단 연승기록을 새로 쓰기도 했지만, 그 이후 페이스가 조금 떨어진 상태다. 최근 들어 다시 연승행진을 이어나가고 있긴 하지만 우려했던 대로 제임스 포지의 공백이 눈에 띈다. 정규시즌보다 플레이오프에 더 중점을 두고 있는 팀이긴 하지만 최상위권 팀들의 시드 경쟁이 치열한 만큼, 후반기에는 좀 더 분발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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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2karl_ 전반기 클리브랜드의 모습은 성공적으로 보인다. 예전 80년대 후반 조던만의 시카고에서 점점 발전, 우승을 차지한 강력했던 90년대 시카고의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처럼 유기적인 팀 시스템을 보여주고 있다. 아직까지 르브론에 대한 비중이 높다는 것이 불안요소지만 지금처럼 승리를  해나간다면 팬들이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를 시청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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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코치_ 줄곧 팀의 약점으로 자리 잡았던 ‘르브론 제임스 조력자 부재’ 문제가 해결되면서 점점 챔피언 컨텐더 팀으로서의 면모를 갖춰가고 있다. 르브론이 마음 편하게 뛸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클리블랜드의 올 시즌은 성공이라 할 수 있다. 앞으로의 과제라면 현재의 페이스를 얼마나 오래 유지할 수 있는가가 될 것이다. 특히 홈경기 무패 행진이 여기에 어떻게 작용하게 될지도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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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녀석
_ 보스턴은 강하다. 하지만 승리와 우승공식의 명제인 수비의 구심점, 케빈 가넷의 노쇠화가 눈에 띈다. 플레이오프와 같은 무대에서는 가넷을 포함한 노장들의 체력안배가 절실하게 요구되지만 가는 세월을 그 누구가 잡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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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ffrey23
_ 어느 덧 리그 최고의 센터로 자리매김한 드와이트 하워드의 존재는, 올랜도의 화력을 뒷받침 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로 자리 잡았다. 외각에는 라샤드 루이스와 히도 터콜루가 언제든 지원사격을 준비하고 있고, 사령관 자밀 넬슨은 생애 최고의 한 해를 보내고 있다. 지금의 올랜도를 보면 마치 오닐과 페니가 활약했던 90년대의 팀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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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Time
_ 앞선 세 팀과 함께 정규시즌 우승을 두고 경쟁중인 매직은 한 단계 더 성장한 또 다른 괴물 드와잇 하워드를 중심으로 지난 시즌보다 훨씬 발전한 모습을 선보이고 있다. 공-수 밸런스가 대단히 좋고 역할분담이 매우 잘 되어 있기 때문에 상대와 무관하게 자신들의 농구를 펼칠 수 있다는 것이 올랜도의 최고 장점이다. 에이스 하워드뿐만 아니라 루이스, 터콜루, 넬슨 등 주축선수들이 언제든지 20점 이상 득점할 수 있어 가장 수비하기 어려운 팀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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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2karl_ 슈퍼맨은 혼자였지만 드와이트 하워드는 혼자가 아니다. 다양한 공격패턴은 없다고들 하지만  꾸준히 20득점 13리바운드 3블락을 찍어주는 하워드는 최고의 센터라고 할 수 있다. 오버페이라고 불리며 비난 아닌 비난을 받지만 라샤드 루이스와 작년 MIP 히도 터컬루, 자미어 넬슨은 아무리 과소평가해도 자신들의 수비수를 하워드에게 더블팀을 가지 않게 만드는 선수이고 이것만으로도 이 팀은 경쟁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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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코치_ 드와이트 하워드를 중심으로 한 팀 시스템이 올 시즌 절정에 달했다. ‘물이 올랐다’는 표현이 올랜도처럼 잘 맞는 팀이 있을까? 기존의 전력에서 다양하게 보강 작업을 꾀한 것이 확실히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팀 컬러가 더욱 선명하게 빛을 발하는 과정에서 자미어 넬슨의 발전이 두드러진 점도 눈여겨볼 만 하다. 비록 우승에 오르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전 시즌보다는 훨씬 좋은 성적표를 받아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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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녀석
_ 20득점 13리바운드 3.2스틸 1.0 스틸. 샤킬 오닐이나 야오 밍의 기록이 아닌 '성가대소년'의 시즌 성적표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정통 아메리칸 센터를 기다려 왔던가. 14년 전 흑상어 오닐이 그랬듯이 하워드도 올랜도를 약속의 땅으로 인도할 것이다. 비록 우승은 이들 스스로의 몫일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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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ffrey23
_ 밀레니엄 들어 홀수해가 다가오면 늘 샌안토니오의 우승을 점치는 호사가들이 입방아를 찧어왔다. 하지만 구단 역사상 최악의 스타트와 함께 키 플레이어들의 잇따른 부상악재가 뒤따르며 암울한 행보를 보여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팀은 늘 그래왔듯 소리없이 조용하게 승수를 쌓아가고 있다. 포커 페이스 던컨은 묵묵히 팀을 이끌고 파커와 지노빌리가 건강하게 돌아온 이상 샌안토니오의 '굿 징크스'는 언제든 찾아 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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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Time
_ 악몽같은 11월을 거치면서 거짓말 같은 상승세를 보이고 있는 샌안토니오의 부활비결은 탄탄한 팀 조직력과 이타적인 선수단의 마인드, 그리고 노련함일 것이다. 이는 수년간 반복되어 나온 노쇠화를 극복할 수 있는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우승청부사 로버트 오리의 혼이 투영된 듯 보이는 로저 메이슨의 클러치 능력 역시 이제는 샌안토니오에 빠질 수 없는 힘이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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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2karl_ 시즌 초반 불안했던 스퍼스는 시간이 지나자 원래 있어야할 자리로 돌아왔다. 그들은 2002-03시즌 챔피언 이후 2004-05시즌, 2006-07시즌 홀수 시즌에 언제나 챔피언이 된 전통이 있고 이번 시즌 역시 그 전통을 4번째로 이어나갈지 관심이 높다. 에이스 마누 지노블리가 서서히 살아나고 있다는 점과 예전 같지 않은 비주전의 활약은 이번 시즌을 기대하게 만드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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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녀석
_  누가 샌안토니오를 늙다리 팀이라 했던가? 시즌 초반 한 때 부진한모습을 보였지만 이팀은 정말 무섭다. 어느새 서부 2위라니..샌안토니오의 저력에는 그저 혀를 내두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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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위. 덴버 너게츠
_  '아이버슨과 빌럽스' 대형 트레이드의 승자는 현재까진 덴버 너게츠라고 말할 수 있다. 빌럽스는 디트로이트에서 보여준 끈끈한 경기력을 덴버에 가져오며 고공비행을 이어가고 있다. 아이버슨 팬들에게는 대단히 미안한 얘기지만 그가 나가면서 덴버는 한 층 업그레이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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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위. 휴스턴 로케츠
_ 트레이시 맥그레이디와 론 아테스트가 부상에서 돌아오자 이번엔 야오밍이 부상을 당했다. 가벼운 통증이라고 발표됐지만 로케츠 주전들의 부상은 수년간 반복 되어온 팀의 징크스을 대변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이 팀의 놀라운 점은 그러한 상황에서도 어떻게 해서든지 팀은 좋은 성적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지난 시즌 야오밍이 시즌 아웃을 당한 상태에서도 22연승을 보여주었고 이번 시즌 그 모습의 반만 보인다면 안정적으로 플레이오프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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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위. 포틀랜드 블레이져스
_ 비록 그렉 오든이 드와이트 하워드같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 하더라도 브랜든 로이를 중심으로 이 팀의 선수들은 승리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공격만큼 수비가 견고하지 못하다는 것과 서부 컨퍼런스 팀들과의 경기와 같은 디비전의 팀들과의 경기에서 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블레이져스의 순위를 위협하는 요소다. 하지만 현재와 함께 이 팀의 미래는 밝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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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위. 뉴올리언즈 호네츠
_ 리그 최고의 격전지인 싸우스웨스트 디비전에 소속되 있는 상황만 놓고 보면 분명 뉴올리언즈는 더 높은 자리에 위치할 자격이 충분하다. 하지만 타이슨 챈들러와 데이비드 웨스트에 이어 크리스 폴까지 주전 선수들의 고른(?) 부상으로 팀 분위기는 예년만 못한 것이 사실이다. 크리스 폴은 이미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것 이상을 보여주고 있다. 팀이 더 앞으로 나아가길 원한다면 롤플레이어들이 분발이 촉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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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위. 마이애미 히트
_ 2005/06시즌 우승이후에 샤킬 오닐의 이적, 드웨인 웨이드의 부상등으로 바람 잘날 없었던 히트는 건강히 돌아온 드웨인 웨이드와 마이클 비즐리, 숀 메리언의 조합으로 예상외의 성공적인 시즌을 보내고 있다. 강력한 외곽에 비해 작은 사이즈의 한계에서 오는 인사이드의 약점을 보강하기위해 토론토의 오닐을 영입하려는 시도가 있다는 루머가 파다하게 퍼져 있고 성사만 된다면 좀 더 안정된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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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위. 애틀랜타 호크스
_ 지난 시즌 5할도 안 되는 승률로 플레이오프에 올라 챔피언 보스턴의 혼을 빼놓았던 애틀랜타는 이번 시즌, 발전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폭발력 있는 슈퍼스타는 없지만 젊고 재능 넘치는 선수들로 이루어진 애틀랜타는 이대로만 간다면 2년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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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위. 피닉스 선즈
_ 런앤건만으로는 챔피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선즈는 그들의 스승이었던 댄토니가 뉴욕 '피'닉스로 떠난 현재까지도 변화중이다. 기록만 본다면 내쉬, 아마레와 샤킬 오닐의 조합은 성공적으로 보일수도 있지만 경기를 실제로 보면 스탯이 모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런앤건과 하프코트 시스템이 작년 시즌보다 잘 어우러졌지만 완벽하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며 이 팀의 고질적인 수비불안의 약점은 개선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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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위. 유타 재즈
_ 이 팀이 플레이오프를 진출을 걱정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얘기다. 하지만 주축 선수들의 부상으로 이 팀의 자랑인 픽엔롤은 코트에서 사라졌으며 벤치 에이스였던 키릴렌코마져도 부상으로 한동안 코트에서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완벽하게 회복되진 않았지만 데론 윌리엄스가 돌아왔고, 폴 밀샙, CJ 마일스, 로니 브루어 등의 활약으로 꾸준히 승률 5할은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서부에서 5할은 플레이오프 출전권을 장담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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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위. 댈러스 매버릭스
_ 2006/07 정규시즌 당시 67승 15패라는 성적으로 플레이오프 1번째 시드를 얻었지만 8번째 시드인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게 충격의 업셋을 당한 후에 정점에서 점점 내려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팀에 변화를 주기위해 제이슨 키드까지 영입했지만 무언가 부족한 것이 현실. 지금부터 승리를 쌓지 않으면 한 때 서부 1,2를 다투었던 이 팀은 그들만의 리그라 불리는 서부 컨퍼런스에서 자칫 도태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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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위. 디트로이트 피스톤스
_ 정교한 피스톤의 움직임을 바탕으로 한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의 엔진은 금융위기로 프랜차이즈 도시가 흔들리고 있는 것처럼 코트에서도 흔들리고 있다. 피스톤을 컨트롤 하는 기어였던 첸시 빌럽스를 보내고 강력한 윤활류인 아이버슨을 영입했지만 엔진의 견고함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 현실. 리차드 해밀턴이 아이버슨과의 공존 실패로 벤치 에이스로 출정하기로 한 이 시점에서 이 팀이 실패할 경우 아이버슨에게 지워질 부담감은 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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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위. 필라델피아 76ers
_ 야심차게 영입한 엘튼 브랜드와의 영입은 부상의 악령과 함께 허무하게 막을 내리고 말았다. 최근 부상에서 돌아온 브랜드와 기존 선수들간에 호흡을 맞춰 볼 기회조차 가지지 못한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한가지 위안거리가 있다면 필라델피아는 위기에 강한 면모를 보이는 팀인데다 지난 시즌 후반기에 보여준 놀라운 반전은 현재 브랜드 없이도 일궈낸 성과였다. 하지만 플레이오프 이상을 원한다면 무언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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