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 & COLUMNS/POINT GUARD 2008. 11. 21. 02:05

『그 때 그 선수』샌안토니오의 닌자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0년대 최고의 명문팀으로 손꼽히는 샌안토니오 스퍼스. 샌안토니오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데이비드 로빈슨이라는 이름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리그 최고의 센터로 활약하며 언제나 샌안토니오의 골밑을 지키던 그는 여러모로 프랜차이즈의 복덩이였다. 특히 부상과는 거리가 멀었던 그가 절묘한 시기에 시즌 아웃을 당하며 팀 던컨이라는 또 한 명의 전설이 팀에 합류할 수 있었던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한 것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로빈슨의 개점휴업 덕분에 샌안토니오에 합류한 '전설'이 던컨 이외에도 또 한 명이 더 있다는 사실이다.

로빈슨은 1987년 드래프트에서 샌안토니오에 호명되었으나 군복무 문제로 1989-90 시즌에나 데뷔를 할 수 있었다. 그 탓에 샌안토니오는 드래프트 1순위 신인을 지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로빈슨 없이 두 시즌을 더 고생해야 했는데 이 시기에 얻은 드래프트 픽으로 또 한 명의 '전설'을 지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89 드래프트를 통해 샌안토니오에 합류한 이 선수는 로빈슨과 함께 1989-90 시즌을 통해 데뷔했고, 이 둘의 데뷔를 기점으로 팀은 성공의 역사를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깔끔한 외모와 화려한 플레이로 로빈슨만큼이나 많은 팬을 보유했던 샌안토니오의 프랜차이즈 플레이어. NBA 역사상 최초로 신장 수술을 받고 난 뒤 복귀에 성공한 의지의 선수. 샌안토니오의 영원한 닌자.

이번에 만나볼 '그 때 그 선수'는 바로 션 엘리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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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리조나의 전설, 샌안토니오에 등장

션 엘리엇은 애리조나 대학 시절, 팀을 대표하는 최고의 슈퍼스타였다. 졸업반 시절 평균 22.3득점 7.2리바운드 4.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맹활약한 그는 통산 2557점을 득점하며 학교 신기록을 작성했다. 지금도 애리조나 대학 출신으로는 유일한 존 우든 어워드 수상자로 기록되어 있으며, 같은 해 전미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기도 했다. 더해서 Pac-10 올해의 선수에도 2년 연속 이름을 올리는 등, 엘리엇은 NCAA에서도 손꼽히는 최고의 선수였다.

이처럼 엄청난 기량을 가지고 있었던 엘리엇은 졸업 후 당연스럽게 1989년 NBA 드래프트에 참가했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 로빈슨을 지명하고도 그의 합류가 늦어져 부진을 면치 못하던 샌안토니오는 당시 1라운드 3번 픽으로 엘리엇의 이름을 호명했다.

엘리엇이 데뷔하던 1989-90 시즌은 로빈슨이 팀에 합류한 시즌이기도 했고, 그들은 전년도 대비 +35승이라는 업적을 세우며 팀의 성적을 수직 상승 시켰다. 비록 괴물 중고 신인으로 등장한 로빈슨에 가려져 그 임팩트가 약했을지는 모르나 올 루키 세컨드 팀에 이름을 올리며
평균 10득점 3.7리바운드, 1.9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이 후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샌안토니오의 핵심 멤버로 활약한 엘리엇의 커리어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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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를수록 엘리엇의 기량은 무르익어갔다. 데뷔 이 후 매년 성장을 거듭하며 1992-93 시즌 평균 17.2득점, 4.6어시스트, 3.8리바운드를 기록하며 로빈슨과 함께 샌안토니오의 원투 펀치 콤비로 자리를 확고히 다졌다.
엘리엇은 타고난 공격수였다. 그의 다양한 공격 스킬은 매치업 상대를 곤욕에 빠뜨리기 일쑤였다. 그 중 가장 강력한 무기는 바로 페네트레이션. 현란한 드리블 실력을 자랑하던 선수는 아니었으나 그에게는 누구보다 빠른 퍼스트 스텝이 있었다. 좌우 베이스라인을 타고 들어가며 돌파를 시도할 때면 엘리엇의 수비수들은 스쳐지나가는 그의 뒷모습만을 바라봐야 했다.

페인트존에서의 움직임도 훌륭해 로빈슨이 만들어내는 공간을 활용하며 득점을 올리곤 했다. 또한 트랜지션 게임에 강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빠른 발을 이용한 속공 마무리 능력은 일품이었다. 스팟업 슈터로써의 능력도 훌륭해서 중거리 페이스업 점퍼는 물론이고 안정적인 3점슛 슈터로도 활약할 수 있었다. (생애 통산 3점슛 성공률 37.5%) 더해서 볼에 대한 욕심이 없고, 공을 갖지 않은 상태에서의 움직임이 훌륭했기에 그 어떤 선수와도 융화될 수 있는 공격수였다.

엘리엇은 수비에서도 적지 않은 활약을 펼쳤다. 비록 몸싸움을 즐기는 타입이 아니었기에 장신의 매치업 상대를 만나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워낙에 순발력이 좋고 BQ가 뛰어난 선수였기에 영리한 수비를 펼치는 선수였다. 무엇보다 결코 수비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매치업 상대를 끈질기게 쫓아다니는 수비수였다. 특히 조용히 나타나 상대 공격수의 볼을 채가는 모습은 샌안토니오 팬로부터 "닌자"라는 별명을 얻게 해주었다. ("닌자"라는 별명을 얻게 된 이유는 일본인 2세인 아내를 얻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이렇듯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던 엘리엇이었으나 의외의 상황이 발생한다. 그의 기량이 절정에 오르기 시작했던 1992-93 시즌, 전통적인 수비팀이었던 샌안토니오의 수비가 무너진 것이다. 해당 시즌 팀은 평균 109.6득점 / 106.8실점을 기록했는데, 득점부분은 리그 6위의 성적을 올렸으나 실점부분에서 리그 10위를 기록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그 전년도였던 1991-92 시즌까지만 하더라도 평균 103.3실점을 기록하며 리그 최고의 수비팀으로 기록되었던 그들이었다.
구단 프론트진은 그 이유를 골밑 장악 능력의 부재라는 결론을 내렸다. 1991-92 시즌 팀의 주전 파워 포워드로 활약하며 7.8개의 리바운드를 잡아주던 테리 커밍스가 부상으로 1992-93 시즌을 8경기 출장에 그치며 팀의 실점이 늘어난 것은 물론, 리바운드 마진이 마이너스 수치를 기록했기 때문이었다. 샌안토니오는 팀의 리바운드와 골밑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디트로이트의 데니스 로드맨을 영입하기로 결정한다. 당시 로드맨은 2년 연속 리바운드왕에 오르며 본격적으로 리바운드 머신의 면모를 뽐내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로드맨의 영입을 위해 샌안토니오가 제시한 카드는 바로 엘리엇이었다. 디트로이트로써는 아이재이아 토마스가 부상으로 신음하고 있었기에 팀의 공격을 이끌어 줄 선수가 필요했고, 두 팀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면서 로드맨과 엘리엇은 서로 유니폼을 갈아입게 되었다.


귀환, 샌안토니오

디트로이트 유니폼을 입은 엘리엇은 예전과 전혀 다른 선수 같았다. 모든 카테고리에서의 크게 성적이 떨어졌고, 디트로이트 농구에 적응하지 못했다. 시즌 도중 디트로이트는 휴스턴의 로버트 오리, 맷 불라드, 2라운드 2장과 엘리엇을 트레이드하려 했으나 엘리엇이 신체 검사를 통과하지 못하며 트레이드가 무산되는 굴욕을 겪기도 한다. 단 한 시즌(1993-94)동안 디트로이트의 일원으로 플레이하던 그는 시즌이 종료되고 얼마 있지 않아 1994년 드래프트에서 샌안토니오가 1라운드에서 지명한 빌 커리, 미래(1997년)의 2라운드 픽과 트레이드 되어 친정팀으로 돌아온다.
샌안토니오로 돌아온 1994-95 시즌, 엘리엇은 거짓말처럼 부활했다. 1년 뒤인 1995-96 시즌에는 평균 20득점, 5.1리바운드, 2.7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낸다.

그리고 운명의 1996-97 시즌이 샌안토니오를 찾아왔다. 팀의 중심인 로빈슨이 부상으로 단 6경기에 출장하는 것에 그치며 샌안토니오가 '던컨 드래프트'의 승자로 급부상 할 무렵, 엘리엇에게도 부상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시즌을 치루며 양 쪽 무릎에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 것이다. 이 부상은 커리어 내내 엘리엇을 괴롭혔고, 그로 인해 엘리엇은 조금씩 하향세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팀의 원투 펀치를 잃은 샌안토니오는 20승을 거두는데 그치고, 그 시련은 팀 던컨을 손에 넣는 것으로 보상 받았다.


Memorial Day Miracle

1997-98 시즌을 앞둔 엘리엇은 무릎 부상으로 인해 과거와 같은 플레이를 할 수 없게 되었지만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비록 폭발적인 퍼스트 스텝을 잃었지만, 던컨이라는 새로운 동료도 얻었기에 과거와 같이 골밑을 향해 돌격할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결국 자신의 플레이 스타일을 외곽 위주의 공격을 구사하는 형태로 변화시켰고, 던컨에게 공격 옵션 2번의 자리도 양보했다. 로빈슨, 엘리엇 같은 선배들의 지원속에 던컨은 기대 이상으로 성장했고 신인왕에 등극했다.

직장 폐쇄로 인해 총 50경기를 치루는 단축 시즌으로 진행된 1998-99 시즌. NBA에 완벽히 적응한 던컨은 로빈슨과 짝을 이뤄 막강한 트윈 타워를 구축했고, 엘리엇 역시 전 경기에 선발 출장하며 두 선수의 뒤를 잇는 3번째 공격수로써 제 몫을 다했다. 샌안토니오는 37승 13패를 기록하며 유타와 함께 리그 최다승 팀으로 올라섰다. 플레이오프에 들어서도 그들의 쾌속 질주는 계속 됐다. 그들은 패배를 모르는 듯 계속해서 승리했고, 결국 파이널 무대에 올라 뉴욕을 4-1로 잠재우며 프랜차이즈 사상 첫 우승의 쾌거를 이루는 감격을 맛본다.

특히 엘리엇은 당시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 2차전 포틀랜드와의 경기에서 훗날 "Memorial Day Miracle" 로 기억되는 클러치 슛을 성공시키며 팀을 구해내 커리어 사상 최고의 순간을 경험한다.
샌안토니오의 홈경기로 열린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 2차전. 경기 종료까지 12초가 남은 상황. 83-85 로 포틀랜드가 2점을 리드하고 있었다. 샌안토니오는 타임 아웃을 요청한 뒤 하프 라인에서 공격이 시작했다. 치열한 몸싸움 중, 로빈슨의 스크린을 타고 엘리엇이 사이드 라인을 향해 달려나왔고, 당시 인바운드 패서였던 마리오 엘리는 엘리엇에게 패스를 연결했다. 당시 엘리엇의 수비수였던 스테이시 오그먼은 스크린에 걸려 잠시 엘리엇을 놓쳤으나 금새 그의 뒤를 쫓아왔고 엘리의 패스를 향해 몸을 날리며 스틸을 시도했다. 다행히 공은 아슬아슬하게 오그먼을 스쳐지나갔고 엘리엇이 힘겹게 공을 손에 넣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급하게 몸을 돌리느라 신체 밸런스가 완전히 무너졌고, 그의 몸은 사이드 라인 밖으로 쓰러지려 하고 있었다.
순간, 엘리엇이 몸을 일으켰다. 그의 발은 이미 절반이 사이드 라인 밖으로 나가버렸지만 엘리엇은 극적으로 뒷꿈치를 들어올리며 라인 아웃을 피했다. 위기를 느낀 포틀랜드의 라쉬드 월라스가 재빨리 도움 수비에 나섰고, 동시에 엘리엇은 3점슛을 던졌다. 왈라스는 있는 힘껏 뛰어 올라 블록슛을 시도했지만 공은 그의 손보다 더 높은 궤적을 그리며 림을 향해 날아갔다.
찰나의 시간이 지나자 점수는 86-85로 역전 되어 있었다. 샌안토니오는 그렇게 2차전을 승리할 수 있었고, 여세를 몰아 4연승으로 시리즈를 마무리했다.


Miracle Again

창단 후 첫 우승의 감격이 채가시기도 전에 엘리엇은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왔다. 자신은 그 동안 심각한 신장 질환을 겪어왔고, 이제는 수술을 받아야만 한다는 소식이었다. 결국 그는 1999년 8월 16일, 친형인 노엘 엘리엇으로부터 신장 이식 수술을 받았다. 파이널 무대에서 우승의 환희를 경험한 지 채 6개월도 되지 않은 때였다.

모든 이들은 그렇게 엘리엇이 은퇴를 할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껏 그 누구도 신장 수술 이 후 코트로 돌아온 적이 없었으며, 수술 직 후 그의 선수생명은 끝난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신장 수수을 받은 그가 다시금 치열한 NBA 무대로 돌아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엘리엇은 강하게 복귀를 향한 의욕을 보이며 운동을 재개했다. 그리고 2000년 3월 14일. 샌안토니오 홈팬들은 또 한 번의 기적을 경험한다. 애틀란타와의 홈경기에서 엘리엇이 복귀한 것이다. 비록 12분만을 플레이하며 2득점, 1리바운드, 1어시스트에 그쳤지만 그는 존재 자체만으로 팬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이 경기에서 성공시킨 단 한 번의 득점은 무려 덩크슛으로 기록한 것이었는데, 훗날 팀의 감독인 그렉 포포비치는 "내가 기억하는 엘리엇의 가장 멋진 모습" 이었다며 이 날의 덩크슛을 회상하기도 했다. 이 후 2000-01 시즌까지 선수 생활을 이어갔지만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몸놀림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32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조용히 은퇴를 선언했다.


기적의 사나이로 영원히 기억되다

2005년 3월 6일. 유타와의 홈경기에서 샌안토니오는 엘리엇의 백넘버인 32번을 영구 결번하는 행사를 가졌다. 그의 유니폼은 자신과 함께 샌안토니오를 이끌던 로빈슨의 50번 유니폼과 나란히 걸리게 되었다.
샌안토니오에서 시작된 커리어 내내 로빈슨의 뒤를 잇는 2번 옵션으로 혹은 던컨의 뒤를 받쳐주는 세 번째 선수로 활약해왔다. 덕분에 그는 그 어떤 개인 트로피도 들어올리지 못했다. 단 두 차례의 올스타 게임 출장 경험만이 엘리엇의 유일한 족적으로 남을 것 같다. 전미 최고 수준의 선수로 손꼽히던 대학 시절에 비해 너무나 조연에 익숙해져버린 자신의 프로 경력에 불만을 가진 적은 없었을까? 자신의 영구 결번식에서 가진 인터뷰 내용으로 이 궁금증에 대한 대답을 제시하며 마친다.

"15년 전, 스퍼스에 입단할 때는 저의 유니폼이 조지 거빈, 데이비드 로빈슨과 같은 선수들과 함께 걸릴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너무나 큰 영광입니다. 정말로 기쁩니다. 무엇보다 저의 가족, 저와 함께했던 동료들, 코치, 그리고 많은 추억을 주신 팬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Sean Elliott (1990-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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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통산 742경기 출장(712선발)
평균 14.2득점, 4.3리바운드, 2.6어시스트, 33분 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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