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에 이어 이번 시즌에도 크리스 폴의 활약이 대단하다. 개인적으로 앤퍼니 하더웨이 이 후 이렇게나 번뜩이는 센스를 보여주는 포인트 가드는 참으로 오랜만인 것 같다. 작은 키로 인간 장대 숲을 헤치고 다니며 상대 수비진을 와해하는 모습은 가히 압권이다.

그런 폴을 처음 보았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난 선수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오늘의 주인공이다.
그는 레지 밀러처럼 단 한 팀만을 위해 플레이했던 선수는 아니지만 그에 못지않은 위대한 프랜차이즈 플레이어로 손꼽힌다. 그의 컴백은 마이클 조던처럼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지 못했지만 그에 못지않은 감동을 주었다.

"불꽃 선즈"라는 신조어를 낳으며, 이제는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는, "피닉스=공격" 이라는 공식을 처음 성립한 선수. 제이슨 키드, 스티브 내쉬가 활약하기 이전에 이미 피닉스의 돌격 대장으로 적진을 누비던 포인트 가드. 절정의 기량을 뽐내던 하킴 올라주원에게 6-1 이라는 작은 키로 인 유어 페이스 덩크슛을 작렬시킨 선수. 그리고 얼마 전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탄생할 무렵, 새크라멘토 역사상 최초의 흑인 시장으로 등극한 선수.

이번에 만나볼 '그 때 그 선수'는 바로 케빈 존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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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그리고 트레이드

1987년 NBA 드래프트. 당시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는 1라운드 7번 픽을 가지고 있었다.
앞서 5, 6번 순위로 훗날 전설이 될 스카티 피펜과 케니 스미스의 이름이 호명된 직후, 클리블랜드의 팬들과 전문가들은 팀이 취약 포지션인 스몰 포워드의 선수를 호명할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최고의 적임자로 앨라배마 출신의 데릭 맥키가 손꼽혔고 아직 그는 어느 팀에게도 지명되지 않은채 부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 기다림이 지나고, NBA 커미셔너 데이비드 스턴이 단상으로 올라와 입을 열었다.
"1987년 NBA 드래프트,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는... 캘리포니아 대학의 케빈 존슨을 지명했습니다."

순간 장내는 술렁이기 시작했고, 클리블랜드 팬들은 야유를 쏟아냈다. 드래프트 중계진들도 다소 의외의 선택이었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클리블랜드에는 이미 지난 드래프트에서 두 명의 공격형 가드를 선발했었기 때문이다. 바로 1년 전 1라운더 신인으로 영입했던 론 하퍼는 평균 22.9득점을 기록하며 신인왕 투표 2위를 차지했고, 2라운더 신인이던 마크 프라이스 역시 리그에서의 성공 가능성을 열어가고 있었다.

1년 앞서 MLB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에서 유격수로 지명되기도 했던 만능 스포츠맨이었으나 과감히 농구의 길을 선택한 존슨의 리그 데뷔는 그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1라운드 2번의 지명권으로 아몬 길리엄을 선발했던 피닉스 선즈는 야유를 받으며 클리블랜드의 모자를 받아든 작은 선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아니 지켜보기는 한 것일까? 훗날 피닉스의 전설이 될 그 선수의 등장을 말이다.

그렇게 데뷔한 존슨은 모두의 예상대로 난관에 부딪혔다. 특히 프라이스의 눈부신 성장은 존슨의 입지를 좁게만 만들었다. 신인으로써 준수한 활약을 보이고 있었음에도 좀처럼 그에겐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클리블랜드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던 그에게 커리어를 송두리째 바꾸어놓을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포인트 가드의 부재로 힘들어하던 피닉스 선즈가 부상으로 신음하던 스타플레이어 래리 낸스에 마이크 샌더스를 패키지로 클리블랜드의 케빈 존슨, 타이론 코빈, 마크 웨스트와의 2 : 3 트레이드에 합의했던 것이다. 신인 시즌을 마치기도 전에 새로운 팀으로 이적하게 된 존슨은 피닉스에서 눈부신 비상을 시작한다. 이적과 동시에 팀의 주전 가드 자리를 꿰찬 그는 연일 맹활약을 펼쳤고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


불꽃 선즈의 돌격 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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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시작된 두 번째 커리어 1988-89 시즌. 존슨은 81경기에 모두 선발 출장하며 결국 사고를 치고 만다. 시즌 평균 20.4 득점, 12.2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이전까지 단 세 명만이 성공했던 '20-10 슈퍼 포인트 가드' 패밀리의 일원이 된 것이다. 존슨 이전에 시즌 평균 20득점-10어시스트를 기록했던 세 명의 선수들은 오스카 로버트슨, 매직 존슨, 아이재이아 토마스였다.
2008년 11월 현재까지도 시즌 평균 20득점-10어시스트를 기록한 선수는 단 다섯 명뿐이다. 존슨 이 후 팀 하더웨이(1991-92, 1992-93)와 크리스 폴(2007-08)만이 20-10 클럽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단연 압도적인 활약을 펼친 존슨은 당당히 MIP(최고 기량 발전상)을 수상하며 NBA 세컨드 팀에 이름을 올렸고, MVP 투표에서도 8위에 이름을 올리며 당당히 자신의 전성시대를 열어가기 시작했다. 이어진 1989-90, 1990-91 시즌에서도 연속으로 평균 20득점-10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로버트슨, 토마스와 함께 리그 역사상 단 세 명뿐인 '세 시즌 연속 20-10에 성공한 선수'로 기록 되었다.

존슨의 20-10 기록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를 해보자면
앞서 말했듯이 세 시즌 연속 20-10을 달성했고, 1989-90 시즌에는 매직 존슨과 더불어 유이하게 50+%의 필드골 성공률을 기록한 20-10 멤버가 되었으며 (50.5%), 1990-91 시즌에는 리그 역사상 유일하게 20-10을 달성하는 동시에 2개 이상의 스틸을 기록한 선수로 기록되기도 했다. (2.1개)
(훗날 2007-08 시즌의 크리스 폴이 20-10과 함께 2.7개의 스틸을 기록하며 존슨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이런 존슨의 눈부신 성장과 함께 피닉스의 성적도 수직 상승하기 시작했다. 존슨을 영입한 이 후 28승을 기록하던 팀은 단숨에 55승을 기록하며 전년도 대비 +27 승을 기록했고, 플레이오프에 출전조차 하지 못했던 팀이 곧바로 2년 연속 컨퍼런스 파이널에 진출하는 강팀으로 성장했다. "불꽃 선즈"로 일컬어지며 런앤건을 주 무기로 하는 리그 최고의 공격 팀으로 거듭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존슨이 처음 피닉스에 합류하던 1987-88 시즌 당시, 팀은 평균 107점을 득점하며 팀득점 부문 리그 14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으나 바로 이듬해인 1988-89 시즌에 평균 113.1점을 득점하며 단숨에 리그 2위의 득점력을 자랑하는 공격 팀으로 거듭났다. 그 중심에 케빈 존슨이 있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존슨의 공격은 오직 "돌파"였다. 그의 커리어 통산 3점슛 성공률은 30.5%에 그칠 만큼 정교한 외곽 슛을 가진 선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에겐 리그 역사상 최고로 손꼽히는 돌파 능력이 있었다. 지금도 그의 돌파를 회상하며 추억에 잠기는 팬들이 많으리라 생각한다. 현란한 드리블링과 번개와도 같았던 스피드를 이용한 돌파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는 전장과도 같았던 골밑을 향해 돌격하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작은 체구의 존슨은 몇 번이고 넘어지고 넘어지면서도 돌파를 감행했고, 이는 곧 득점으로 이어졌다.

평균 10개 이상의 어시스트를 기록하기도 했던 만큼 그는 훌륭한 패서이기도 했다. 상대 수비진을 완벽히 농락하는 돌파를 성공시킨 뒤 킥아웃 패스를 연결하는 것은 물론이고 노룩 패스, 비하인드 백패스 같은 고난이도 패스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운동 능력 역시 엄청난 것이어서 리그 최고의 스피드와 순발력을 자랑했고, 고무공 같은 탄력을 뽐내며 상대팀의 장신 센터들을 앞에 두고 폭발적인 덩크슛을 터뜨리기도 했다.

훌륭한 플레이메이커이기도 했던 존슨은 수비수로써도 훌륭한 선수였다. 상대팀 가드들은 빠른 발과 엄청난 활동량을 앞세운 존슨의 프레싱에 곤욕을 치르곤 했다. 퍼리미터 디펜스 능력도 준수해서 상대 선수의 외곽 슛을 효과적으로 봉쇄했으며 패싱레인을 자르는 가로채기 능력도 훌륭했다. 작은 키에 비해 훌륭한 리바운더이기도 했다.

돌파를 시도할 때면 시선을 아래로 향하는 버릇이 있어 코트 비전에 다소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지만, 전성기의 존슨이 보여주던 돌파는 그런 것쯤은 가볍게 상쇄하고도 남을 위력을 가진 것이었다.

그가 가진 문제는 외곽슛 능력과 기복이 있었던 득점력, 그리고 부상뿐이었다. 특히 작은 체구를 이끌고 인간 장대 숲을 향해 돌격하고 돌격하던 플레이 스타일 탓에 크고 작은 부상은 언제나 그를 괴롭혔다. 이런 측면에서 그의 부족한 외곽슛 능력은 더욱 아쉽게 다가온다. 만약 존슨에게 예리한 외곽슛 능력이 있었다면 그의 커리어가 조금은 더 길어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빛과 그림자

피닉스는 존슨을 중심으로 성장하며 서부 컨퍼런스의 강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챔피언십을 노리기에는 어딘지 부족한 느낌을 지우지 못했다.
1992-93 시즌을 앞둔 피닉스는 엄청난 결단을 내린다. 새로운 사령탑으로 폴 웨스트폴 감독을 선임함과 동시에 팀의 스코어링 리더였던 제프 호너섹, 스타팅 빅맨이었던 팀 페리와 앤드류 랭을 트레이드 패키지로 하여 필라델피아의 찰스 바클리와 3:1 트레이드를 단행한 것이다. 물론 바클리가 엄청난 스타플레이어이긴 했으나, 팀의 주축으로 활약하던 세 선수와 단 한 명의 선수를 트레이드 시킨 것은 당시 커다란 이슈가 되었다.
이 엄청난 도박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팀은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고의 시즌을 보내며 62승 20패를 기록, 정규 시즌 우승팀이 되었고 바클리는 피닉스가 NBA에 가입한 이 후 최초의 MVP 수상자가 되었다.

하지만 피닉스의 상징과도 같았던 존슨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는 데뷔 이 후 가장 많은 결장을 기록해야 했다. 시즌 초반부터 부상으로 인해 잦은 결장을 계속해야 했고, 이는 결국 커리어 내내 그를 괴롭히던 부상 악몽의 시작이 되었다.
(이 후 그는 1996-97 시즌을 제외하고, 단 한 차례도 70경기 이상 출장하지 못한다.)
더해서 1993년 3월 23일 뉴욕과의 경기에서 언쟁을 일으켜 두 경기 출장 정지를 당하기도 하는가 하면, 팀의 중심이 자신에게서 바클리로 이동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하지만 존슨은 진정한 팀플레이어였고 누구보다 강한 선수였다. 그는 조금도 팀에 불만을 갖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되레 조금씩 다가오는 챔피언십 트로피를 향한 각오를 다질 뿐이었다.
피닉스의 기세는 플레이오프에서도 계속됐다. 1라운드에서 레이커스를 맞아 3-2로 승리한 그들은, 2라운드에서 샌안토니오를 상대로 4-2의 승리를 기록했고,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시애틀을 만나 최종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꿈에 그리던 파이널 진출에 성공한다. 그들의 마지막 상대는 그 어마어마한 마이클 조던의 시카고. 당시 바클리와 조던의 격돌은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고 두 팀은 연일 혈전을 펼쳤다.

그러나 정작 존슨은 꿈에 그리던 파이널 무대에서 최악의 부진을 겪고 있었다. 파이널 6게임을 치루는 동안 존슨의 평균 필드골 성공률은 시즌 기록에 한참 못 미치는 42%에 머물렀고 평균 17.1 득점, 3 리바운드, 6.5 어시스트와 함께 4.3 개의 턴오버를 기록하는데 그쳤다. 1992-93 시즌 당시 부진하다는 평을 듣던 존슨의 정규 시즌 기록이 16.1 득점, 2.1 리바운드, 7.8어시스트, 3.1 턴오버, 필드골 성공률 49.9% 였음을 감안해본다면 기대에 크게 못 미치는 활약이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팬들의 야유를 사게 된 것은 파이널의 마지막 장면 때문이었다. 흔히 1993년 파이널은 시카고 존 팩슨의 역전 3점슛과 함께 끝이 난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 뒤에 아주 조금의 이야기가 더 남아 있다.
팩슨의 역전 슛이 성공되고 나서도 경기 종료까지는 3.9초가 더 남아있었다. 타임아웃 이 후 하프 라인에서 공격을 시도한 피닉스의 선택은 케빈 존슨이었다.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던 존슨의 돌파를 믿은 것이다. 파울로 슛을 끊어버린다 하더라도 걱정 없었다. 존슨은 정확한 자유투 슈터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장면이 연출됐다. 경기 내내 1득점 7리바운드를 잡는데 그쳤던 호레이스 그랜트가 존슨의 공을 블록한 것이다. 존슨은 슛을 제대로 시도해보기도 전에 공을 빼앗겨 버렸고 피닉스의 시즌은 그대로 종료되고 말았다.

팬들은 존슨을 향해 커다란 야유를 보냈다. 바클리는 "존슨을 욕하는 이들은 팬이 될 자격이 없다. 존슨이 없었다면 우리는 파이널까지 올라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라며 존슨을 옹호했지만 결국 그 이 후 바클리도, 존슨도 다시는 파이널 무대를 밟지 못했다.


조용히 돌아서다

아쉬운 파이널을 뒤로 하고 맞이한 1993-94 시즌. 마이클 조던의 은퇴와 함께 춘추 전국 시대가 열렸다.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는 단연 전년도 준우승 팀 피닉스.
비록 그들은 2년 연속 휴스턴의 벽에 가로막혀 플레이오프 2라운드에서 눈물을 삼켜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빈 존슨은 지난 파이널의 부진을 씻어내며 1993-94 시즌을 통해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1994년 여름에는 드림팀 2의 일원으로 세계 농구 선수권 대회에 참가하여 금메달을 목에 걸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을 마지막으로 조금씩 하향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부상이었다.

1996-97 시즌을 앞두고, 더 이상 피닉스에서 우승을 노릴 수 없음을 직감한 바클리는 휴스턴으로 떠나갔다. 존슨은 다시 한 번 팀의 중심이 되어 평균 20.1 득점, 9.3 어시스트를 기록, 전성기에 버금가는 활약을 펼치지만 이듬해인 1997-98 시즌을 부상으로 인해 50경기에 출장하는 것에 그치며 쓸쓸히 은퇴를 선언했다.
당시 피닉스는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샌안토니오에게 패배하며 시즌을 마감했고, 팀의 중심은 댈러스에서 이적해온 제이슨 키드의 몫이었다.


불타는 석양

새로운 밀레니엄을 여는 1999-2000 시즌, 피닉스는 올랜도로부터 슈퍼스타 앤퍼니 하더웨이를 영입하며 다시 한 번 우승에 도전했다. 특히 당시 키드와 하더웨이의 만남은 "백코트 2000" 이라는 신조어를 낳을 정도로 큰 기대를 받았다. 두 선수가 번갈아가며 잦은 부상에 시달리느라 그들의 조합을 자주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둘은 서로가 함께 했던 42경기에서 무려 30승을 거두며 7할대의 승률을 기록, 기대에 부응하고 있었다.

그러던 2000년 3월 22일. 새크라멘토와의 경기에서 사고가 나고 말았다. 키드가 부상을 당하며 남은 정규 시즌을 포기해야 한다는 판정을 받은 것이다. 남은 잔여 시즌 경기는 무려 15경기에 달했다. 하더웨이와 콤비를 이룰 주전 포인트 가드는 고사하고 백업 자원조차 부족했던 피닉스에겐 작지 않은 위기였다.

이 때 조용히 나타난 선수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2년 전에 은퇴를 선언했던 케빈 존슨이었다. 팀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홀연히 컴백한 그는 남은 15경기 중 6경기에 출장하며 6.7 득점, 4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활약했다. 비록 전성기와 같은 모습을 보여 주진 못했지만, 팀의 전설과도 같은 그의 합류는 선수들에게 큰 자극제가 되었다.
이 후 플레이오프에서는 키드의 복귀로 경기당 3분여의 시간만을 출장할 수 있었고, 훗날 결국 우승을 차지한 레이커스에게 플레이오프 2라운드에서 패배하며 시즌을 마무리했다.

시즌 종료 후, 다시 한 번 피닉스를 위해 뛰어주길 원하는 팬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존슨은 조용히 두 번째 은퇴를 선언하며 영원히 코트를 떠났다.


영원한 피닉스의 태양 KJ

두 번째 은퇴 직 후인 2000-01 시즌. 피닉스는 존슨의 고향 팀인 새크라멘토와의 경기가 열린 2001년 3월 7일, 그의 영구 결번식 행사를 가졌다. 얄궂게도 당일 경기에서 피닉스는 크리스 웨버에게 무려 41점을 내어주며 89-100 으로 대패했는데, 도무지 존슨과 피닉스의 궁합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클리블랜드에서 가려있던 존슨이 피닉스로 이적하며 화려하게 비상한 것을 보면 환상의 궁합을 자랑하는 것 같지만, 정작 팀이 파이널 무대에 진출했을 때 존슨이 극악의 부진을 보인 것이나 영구 결번식 행사를 가진 날에 팀이 대패하는 등 묘하게 어긋나고 있는 것도 같다.

은퇴 직 후인 2000-01 시즌에 NBA on NBC 중계 진으로 활약하기도 했던 존슨은, 이 후 자신의 재단을 설립하여 청소년들의 교육과 지역 주민들을 위한 자선 사업을 펼치고 있다. 최근에는 정계에도 진출해 얼마 전 새크라멘토 사상 최초의 흑인 시장이 되었다고 한다. 코트 밖에서도 열정적인 그의 '돌파'는 계속 되고 있는 셈이다.

화려한 돌파로 대표되는 자신의 플레이처럼 짧지만 강렬한 커리어를 보낸 케빈 존슨. 수상 경력이라고는 MIP 트로피가 전부인 그이기에, 어쩌면 코트 위 그의 모습이 조금은 빠르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갈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더욱 그의 모습을 또렷하게 간직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불꽃 선즈"의 초대 돌격 대장이 코트를 질주하던 모습을 말이다.


Kevin Johnson (1988-199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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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통산 1051경기 출장(727선발)
평균 17.9득점, 3.3리바운드, 9.1어시스트, 34.1분 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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