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be Bryant Shooting Free Throws

Kobe Bryant Shooting Free Throws by compujeramey 저작자 표시


운명의 시즌 마지막 게임

때는 2004년 4월 14일, 리그 4연패에 실패한 충격을 '전당포'로 불렸던 호화멤버 구축을 통해 극복하고자 했던 LA 레이커스가 주전들의 잇따른 부상으로 플레이오프 상위시드를 따느냐 아니냐의 기로에 서 있던 시점이었다. 레이커스는 포틀랜드 트레일 블레이저스와의 시즌 82번째, 즉 마지막 경기만을 남겨두고 있었고, 레이커스의 퍼시픽 디비전 타이틀을 다투던 최고의 경쟁자였던 새크라멘토 킹스와는 81경기를 치른 시점까지 55승으로 동률. 킹스 역시 마지막 경기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당시 리그는 지금과는 달리 컨퍼런스당 2개씩의 디비전 뿐이었으며 서부는 미드웨스트 디비전과 퍼시픽 디비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퍼시픽 디비전은 똑같이 55승을 기록하고 있던 킹스와 레이커스중 수위를 차지한 구단이 디비전 리더가 되는 상황이었으며, 디비전 리더를 차지한 구단은 서부 전체 2번시드로 플레이오프에서 7위인 휴스턴 로켓츠와 만나게 되지만, 킹스-레이커스중 디비전 2위가 되는 구단은 전체 4번 시드가 돼 무려 52승을 거둔 최고의 5번 시드 댈러스 매버릭스와 부담스러운 일전을 벌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킹스와 레이커스의 정규시즌 상대 전적은 1승 3패로 레이커스의 열세여서 레이커스와 킹스가 동시에 승리할 경우 무조건 킹스가 디비전 리더를 가져가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레이커스로서는 우승을 위한 레이스로 보았을때 체력을 조금이라도 더 비축하기 위해서 단 한발짝도 양보할 수 없는 승부였던 것이다. 무조건 이기고 나서 킹스의 패배를 바라야 하는 상황이었다. 블레이저스 입장에서 비록 이기더라도 플레이오프에 나가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지난 2000년 플레이오프에서 아쉽게 패배한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호락호락하게 게임을 내 줄 수는 없었다. 시즌을 정리하는 마지막 게임이었기 때문에 블레이저스는 더욱 더 독하게 나왔다.



첫번째 반전

전반을 50-45, 5점차로 앞선 상태에서 마무리 한 블레이저스는 여세를 몰아 3쿼터에 2점을 더 벌리며 4쿼터를 7점 앞선 상태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하지만 코비 브라이언트가 4쿼터 시작하자마자 연속 2개의 야투를 성공시키며 바짝 따라왔고, 종료 4분을 남기고 페이튼의 3점으로 드디어 동점을 만들어낸다. 게임이 시작된 이래 레이커스가 처음으로 동점을 만들어 낸 순간이었다. 결국 종료 3분 20초를 남기고 코비의 3점으로 첫 역전에 성공한다. 그렇게 경기는 레이커스쪽으로 기우는 듯 했다.

그러나 데릭 앤더슨이 2개의 공격기회를 모두 득점으로 연결시키며 게임 스코어는 84-87로 3점차가 되었고, 그렇게 점수가 좁혀질 동안 브라이언트는 3번의 공격기회동안 1개의 야투실패, 트레블링 바이얼레이션, 2개의 자유투 실패라는 어이없는 플레이를 반복했다.

'앨리웁', '덩크슛'등의 용어를 만들었던 전설적인 캐스터 칙 헌과 수많은 중계를 했던 NBA 선수출신 레이커스 지역방송 해설가 스투 랜츠는 레이커스 경기때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코비의 야투가 0-15든, 0-20이든 중요한 순간이 되면 그가 활약한다"는 것이다. 모두가 브라이언트를 바라보고 있던 그 시점. 종료 14초를 남기고 그의 손에 공이 쥐어졌다. 브라이언트는 3점을 시도했으나 슈팅이 림을 돌아나왔고, 재크 랜돌프가 리바운드를 따내 달려나가는 루벤 패터슨에게 연결했고, 패터슨의 레이업 도중에 브라이언트는 그만 파울을 범하고 말았다. 모든 팬들이 경기가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그답지 않은 클러치 타임에의 무기력한 플레이.

하지만 반전은 거기부터였다. 패터슨은 어이없이 자유투 2개를 모두 실패했고, 레이커스는 리바운드를 따냈다. 인바운드 상황에서 브라이언트가 공을 넘겨받은 와중에, 그를 마크하는 수비수는 스스로 '코비 스타퍼'라 칭하기를 아끼지 않았던 루벤 패터슨. 코비를 막아서는 패터슨의 수비는 그날만큼은 정말 코비 스타퍼라 칭할만 했다. 코비의 방향 전환에 전혀 속지 않고 잽싼 좌우동작을 보여주던 패터슨, 브라이언트의 슈팅이 나올 찰나 손을 들어 그의 슈팅각을 아예 없애 버렸다.

그 순간, 브라이언트는 몸을 패터슨에게 기댄 상태에서 오른쪽으로 몸을 비틀어 말도 안되는 슈팅을 날렸다. 보면 볼 수록 과연 넣으려고 쏜 것일지 의문이 드는 샷 셀렉션. 브라이언트의 오른편에는 와이드 오픈된 동료선수가 있었지만 브라이언트는 쳐다도 보지 않았다. 브라이언트에게 자신이 경기 막판에 연속으로 실패했던 슈팅 따위는 이미 머릿속에서 새하얗게 지워져 있었다.

철썩. 믿을 수 없는 슛이 림에 꽂히는 순간, 군데군데 앉아있던 레이커스팬들은 환호성을, 홈관중들을 머리를 쥐어감았다. 남은 시간은 1초, 어시스턴트 코치 프랭크 햄블린이 내민 손에 강한 하이파이브를 날린 코비는 자신의 슈팅이 성공한 것에 대해 전혀 놀라워하지 않았다. 당연히 자신이 해내야 할 일은 해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기적

연장전은 4번의 공격중 3번을 성공시킨 샤킬 오닐의 완벽한 독무대였다. 하지만 재크 랜돌프 역시 3번의 공격을 성공시키며 동점으로 2차 연장에 돌입했다. 2차 연장 2분 25초를 남기고 97-97, 동점으로 팽팽하게 맞선 상황. 코비가 25풋 지점에서 공을 잡아 슈팅을 성공시키며 3점차로 벌렸다.

그때부터 다시 블레이저스의 반격이 시작됐다. 데이먼 스타더마이어가 무려 3번의 공격을 모두 성공시키며 종료 2.2초를 남기고 2점차로 오히려 앞서나가게 된 것. 레이커스의 타임아웃. 레이커스는 스크린 플레이를 통해 코비에게 공을 주려고 했다. 그러나 블레이저스의 강력한 방해로 인해 코비에게 제대로 공이 가지 못하고 경기는 그대로 끝나는 듯 했으나, 다시 레이커스에게 소유권을 선언한 심판 덕분에 기사회생한 레이커스.

넌-슈팅 파울이 인정된 상황. 상황은 더욱 나빠져 불과 1초를 남기고 레이커스가 공격을 성공시켜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레이커스의 타임아웃이 불리고, 여기서 필자가 아직도 잊지 못하는 코비의 자신감 철철 넘치는 대사가 작렬했다. "Give me a good pick, and we'll be going home with a 'W'." 즉, "내게 스크린을 잘 걸어준다면 이겨서 돌아갈 수 있다." 는 뜻이었다. 분명히 9초를 남기고 시도한 동점 상황에서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간 바 있으며, 그 이후 빠른 속공으로 인해 역전까지 당한 이후의 상황이었다. 게다가 직전의 인바운드 상황에서 파울이었지만 제대로 공조차 잡지 못하고 1초를 소비한 최악의 상황이었다.

휘슬이 불리고 재빨리 받은 공을 높디 높은 포물선으로 림을 향해 던졌다. 공이 손에서 떠나자마자 수비수의 손이 코비의 손을 강력하게 쳐내는 모션이 카메라에 적나라하게 잡히고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코비의 손에서 떠나간 공에 집중됐습다. 결과는 다들 알다시피 3점슛이 림에 그대로 빨려들어갔으며, 레이커스는 디비전 리더로 2번 시드를 배정받아 결국 파이널에서 패배하긴 했지만 또 다시 서부를 제패했다.

스투 랜츠의 말 처럼, 코비의 야투율이 어떻든 간에 무조건 게임을 뒤집어줄 수 있을 것 같은 신뢰를 주기까지는 이러한 여러가지 상황을 말도 안되는 슈퍼플레이로 극복한 역사가 있어왔던 것이다. 게임을 지켜보고 있는 모든 사람이 코비가 슛을 던질 것을 알지만, 유유히 그 공을 림에 집어넣고 포효한다.

코비 브라이언트가 이 게임보다 더 멋진 활약을 한 게임이 많지만, 이 게임만큼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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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교주의 자비로운 부활 메세지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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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2월의 어느 날, 골든 스테이트 워리어스의 홈구장 오라클 아레나.

골든 스테이트의 벤치에 앉아 있던 약관의 루키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코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데뷔 이후 단 2경기에 교체 출장한 것에 그치고 있었고, 심지어 부상을 당하지 않았음에도 부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야했다. 좀처럼 코트에 나설 기회를 잡지 못하던 그는 코치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었다. 팀 훈련 때마다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음에도, 되레 자신보다 못한 기량을 선보인 베테랑들에게만 기회가 주어지고 있었다.

조금씩 자신감을 잃어갈 무렵, 그는 자신이 대학 시절 활약하던 모습이 담긴 테이프들을 돌려봤다. 그리고 확신했다. 자신이 NBA에서 성공할 수 있을만한 기량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는 변하기 시작했다. 비록 여전히 벤치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더 이상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코트를 바라보던 그는 없었다. 눈을 번뜩이며 팀원들의 움직임을 머릿속에 담기위해 노력했고, 수없이 이미지 트레이닝을 반복했다.

그 동안 소속팀인 골든 스테이트는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악의 부진에 빠져있었다. 결국 구단 프론트는 당시 코치였던 데이브 코웬스를 해임했고, 브라이언 윈터스를 신임 헤드코치로 임명했다. 원터스는 부임 이후 팀의 리빌딩을 위해 젊은 선수들에게 보다 많은 기회를 주기로 결정했다. 벤치에서 때를 기다리던 그에게도 조금씩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시작은 좋지 않았다. 교체 멤버로 꾸준히 코트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지만, 이렇다 할 결과물을 쉽사리 내어놓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조금씩 전진하고 있었다. 데뷔 이후 48경기 만에 첫 번째 선발 출장의 기회를 얻더니, 9경기 연속 두 자릿수 득점에 성공하기도 했다.

팀의 시즌 마지막 27경기에 연속 선발 출장하며 입지를 다진 그는 조금씩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시작했고 4월 한 달 동안 팀의 9경기에 모두 선발 출장, 평균 16.5득점, 4.7리바운드, 6.1어시스트, 3스틸을 기록하며 서부 컨퍼런스 이 달의 신인으로 선정되었다.

하지만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가 어떤 선수로 성장하게 될 지, 어떤 드라마틱한 장면들을 연출하게 될 지를 예측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의 이름은 길버트 제이 아레나스 주니어 (Gilbert Jay Arenas Jr.).

훗날 Agent Zero라는 닉네임으로 불리게 될 길버트 아레나스였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길버트 아레나스.

그는 1982년 LA의 San Fernando에서 태어났다. 아레나스의 어머니는 그가 어렸을 때 약물 중독에 빠졌고, 이후 그는 아버지 Gilbert Arenas Sr.와 함께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는 헐리웃에서 활동하던 근육질의 조연 배우였다. 배우로써 인상적인 경력을 쌓지는 못했지만, 몇 차례의 영화 출연과 CF 모델 활동 등으로 가정의 생계를 책임졌다. 동시에 어머니 없이 자라나고 있는 아들에게 무한한 사랑을 쏟았다. 어머니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아레나스가 탈선하거나 방황하지 않고 올곧게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아버지의 커다란 사랑이 있었다.

아레나스에게 처음 농구를 접하게 해준 인물 역시 아버지였다. 아레나스가 11살이 되던 해, 아버지로부터 농구공을 선물 받은 그는 농구의 매력에 매료되어갔다. 마이애미 대학에서 풋볼 선수로 활약하기도 했던 아버지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탓인지 아레나스는 뛰어난 운동 신경을 뽐내며 빠르게 실력을 키워갔다. 이후 Grant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농구 선수로의 삶을 시작했다.

고교 시절에도 그의 득점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아레나스는 입학 이후 연일 고득점 행진을 이어갔다. 신입생이던 해에 시즌 평균 22.5득점을 기록하더니 이후 29.8득점, 33.4득점으로 그 숫자를 늘려갔다. 졸업반이 되기도 전에 이미 교내 역대 최다 득점 기록을 갈아치운 그는 4년 동안 총 2124점을 득점하며 Grant 고교의 전설로 이름을 남겼다.

그러나 아레나스가 NCAA에서도 성공 스토리를 이어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모두가 의문을 가졌다. 우선 Grant 고교에서의 활약상만으로는 농구 팬들에게 커다란 인상을 줄 수 없었다. Grant 고교는 인근의 Fairfax나 Compton Dominguez 같은 농구 명문 고교에 비해 인지도가 떨어지는 학교였기에 그의 활약은 상대적으로 저평가 되고 있었다. 덧붙여 빠른 생일로 인해 동급생들보다 나이가 어렸기에 필연적으로 체격적인 부분에서 약점을 가지고 있었고, 학업에 무관심했던 탓에 대학에 입학할 수 있을만큼의 SAT 성적을 얻을 수 있을지에 대한 여부조차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당시 공격적인 리쿠르팅에 나섰던 농구 명문 애리조나 대학에 의해 졸업반이 되기도 전에 입학 제의를 받았고, 곧바로 제의를 받아들이며 진로를 최종 결정지은 아레나스였지만 대학에서의 활약은커녕 입학 가능성조차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모두가 아레나스에게 의심의 눈길을 보낼 때, 단 한 사람만은 그를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바로 그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아레나스가 농구는 물론이고 대학에 입학할 수 있을 만큼의 SAT 점수를 얻을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결국 아레나스는 대학 입학에 필요한 SAT 점수를 취득하게 됐고, 농구 명가 애리조나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백넘버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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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만고 끝에 애리조나 대학교 입성에 성공한 아레나스였으나 그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여전히 가시가 돋쳐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아레나스가 약체 팀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겉멋만 들었을 뿐, 실력은 형편 없을 거라며 그를 비웃었다. 심지어 몇몇 이들은 '주전 자리를 차지하기는커녕, 출장 시간이 0분에 그칠 것'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억측들은 아레나스를 무릎 꿇게 만들지 못했다. 되레 그는 자신의 백넘버를 0번으로 결정하며 보란 듯이 NCAA 무대로 뛰어들었다.

프리 시즌이 시작되자 아레나스를 비웃던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레나스는 프리 시즌 첫 경기에서 22득점을 퍼부으며 인상적인 데뷔에 성공했고, 이후에도 맹활약을 계속하며 프리 시즌 MVP에 등극해버렸던 것이다.

1999-2000 시즌의 애리조나는 로렌 우즈, 마이클 라이트, 리차드 제퍼슨과 같은 재학생들과 아레나스, 제이슨 가드너, 룩 월튼 등의 신입생들이 조화를 이루며 강력한 전력을 뽐냈다. 아레나스는 팀 내 두 번째로 많은 평균 32분의 출장 시간을 기록했고, 평균 15.4득점을 기록하며 우즈, 라이트와 함께 팀 내 스코어링 리더로 맹활약했다. 애리조나는 27승 7패를 기록하며 승승장구했다.

아레나스는 코트 안에서의 맹활약은 물론이고, 코트 밖에서의 재미있는 모습들로 많은 팬들을 거느리기 시작했다. 팀원들과 학우들에게 고대시를 인용한 이해할 수 없는 농담을 던지는가 하면, 교내 신문에 우스꽝스러운 메세지를 싣기도 하고, 유니폼을 마음대로 잘라 입고 나와서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소포모어 시즌이 되자 아레나스는 더욱 강해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2000-01 시즌 동안 평균 16.2득점을 기록하며 팀 내 최다 득점자가 되었고, 애리조나를 NCAA 토너먼트 파이널 무대에까지 올려놓았다. 하지만 아레나스는 정작 파이널 무대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힘없이 물러났다. 상대팀이었던 듀크 대학은 막강한 전력으로 애리조나를 물리치고 전미 챔피언이 되었다.

비록 파이널 무대에서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아레나스는 본능적으로 더 이상 대학 무대에서 이룰 것이 없음을 직감했다. 처음 애리조나에 입학할 당시에는 당연히 대학 졸업장을 받게 될 거라 생각했지만, 단 2년 만에 NCAA 파이널 무대를 밟아본 아레나스는 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짧았던 대학 생활을 청산하고 NBA 드래프트에 참가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수많은 이들이 그의 결정을 만료했지만, 아레나스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아레나스는 댄 페건을 에이전트로 고용하며 2001년 NBA 드래프트에 참가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좌절과 상처의 드래프트

'엄청난 사거리를 자랑하는 롱 레인지 점퍼와 훌륭한 운동 능력, 빠른 스피드와 타고난 득점 감각에 대한 부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슈팅 가드로 뛰기에는 신장이 너무 작고, 포인트 가드로 뛰기에는 지나치게 공격적인 성향을 가진 슛 퍼스트 마인드의 콤보 가드.'

얼리 엔트리를 선언한 아레나스를 바라보는 시선들은 대개 이러했다. 지역 방어의 허용, 핸드 체킹 강화 등의 룰 개정으로 과거에 비해 콤보/듀얼 가드 성향의 선수들이 갖는 가치가 높아졌으나, 당시만 하더라도 새로운 룰이 막 도입되던 시기였기에 여전히 콤보/듀얼 가드 성향의 선수들을 기피하는 경향이 많이 남아있었다. (물론 지금도 이런 경향은 여전히 존재한다)

애리조나 재학 시절, 아레나스는 포인트 가드가 아닌 슈팅 가드로 플레이했었다. 걸출한 포인트 가드였던 가드너가 그의 동기였기 때문이다. 해서 드래프트를 목전에 둔 아레나스에게는 포인트 가드로의 포지션 전환에 대한 성공 여부 또한 커다란 이슈이자 성공의 걸림돌로 비춰졌다.

하지만 아레나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최선을 다해 각종 워크아웃에 임했다. 아레나스가 앞만 보고 달려갈 수 있었던 것에는 또 한 번 아버지의 존재가 큰 도움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아레나스가 얼리 엔트리를 선언함과 동시에 아들의 매니저 역할을 자청하며 동분서주 아들의 기량을 알리기 위해 움직였다. 그러는 동안 아레나스의 아버지는 헐리웃에서 비중 있는 조연으로 캐스팅 제의를 받게 되었는데, 아버지는 아들의 농구 인생을 위해 과감히 이를 거절했다 (아레나스의 아버지가 캐스팅을 거절했던 캐릭터에 최종 낙점된 인물은 Laurence Fishburne, 우리에게 '모피어스'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배우였다).

이처럼 아레나스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아버지 역시 아들의 성공적인 프로 데뷔를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 그 때 아레나스 부자에게 접근해오는 팀이 있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새크라멘토 킹스. 2001년 드래프트 당시 1라운드 25번 지명권을 보유하고 있었던 새크라멘토는 아레나스에게 '니가 25번 이후에 지명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아레나스와 아버지는 순조롭게 진행되는 드래프트 준비 과정에 만족했고 여유 있는 마음으로 드래프트 중계를 지켜봤다.

2001년 NBA 드래프트. 드디어 새크라멘토가 보유하고 있는 1라운드 25번 지명권의 주인공이 호명될 차례가 다가왔다. 짧지만 긴 침묵이 흐르고, NBA 커미셔너 데이비드 스턴의 입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Sacramento Kings select, Gerald Wallace from the University of Alabama."

결국 1라운드 지명권 행사가 모두 끝이 나도록 아레나스의 이름은 호명되지 않았고, 이후 2라운드 31번 픽으로 그를 지명한 골든 스테이트 워리어스에서 NBA 커리어를 시작하게 되었다.

아레나스에게도, 그의 아버지에게도 드래프트는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골든 스테이트의 풍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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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애리조나 대학에 입학했을 당시와 마찬가지로, NBA 데뷔 역시 순탄치 않았다. 워크아웃과 팀 훈련에서 좋은 모습을 보인 아레나스는 내심 NBA 데뷔에 대해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지만 팀은 계속해서 그를 외면했다. 2000-01 시즌 골든 스테이트의 4번 째 경기에 교체 출장하며 NBA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지만 겨우 3분을 플레이하는데 그쳤다. 이어진 경기에서 8분을 플레이하며 단 1개의 3점슛 시도를 마지막으로 그는 무려 이후의 25경기 동안 단 1초도 코트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코칭 스태프들은 계속해서 그를 외면했고, 심지어 부상을 당하지 않았음에도 부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언제나 팀 훈련에서는 맹활약했지만 정작 실전에 투입되는 기회는 베테랑들에게 돌아갈 뿐이었다.

언제나 많은 이들의 의심과 억측을 보기 좋게 날려버린 아레나스였지만 이번에는 그도 의기소침해질 수밖에 없었다. 드래프트에서의 상처가 채 아물지도 않은 시점에서 단순한 출장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아레나스의 가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코트에 내보내주기만 한다면, 충분한 기회만 준다면 얼마든지 자신의 기량을 입증시킬 수 있을 텐데. 끝내 자신을 모른척하던 코칭 스태프들과 구단 프론트를 원망하는 마음뿐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자신감을 잃어갔다. 어쩌면 정말로 기량이 형편없기 때문에 코트에 나설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우연히 대학 시절 자신의 활약상이 담긴 비디오테이프를 보게 된다. TV 속에서 플레이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아레나스는 자신이 NBA에서 성공할 수 있을만한 기량을 충분히 가지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의심의 눈길들을 멋지게 날려버리겠노라 다짐했다.

이후 그는 더욱 치열하게 훈련에 임했다. 팀 동료였던 마크 잭슨, 딘 올리버와 함께 가장 먼저 훈련장에 나와서 가장 늦게 훈련장을 빠져나갔다. 여전히 벤치에 앉아있는 신세였지만, 이전처럼 불만스럽게 코트를 바라보기 보다는 팀 동료들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연구했으며 코트를 누비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며 이미지 트레이닝을 이어갔다.

그 동안 골든 스테이트는 끝 모를 부진에 빠져있었다. 결국 구단 프론트는 당시 헤드코치였던 데이브 코웬스를 해임하고, 신임 헤드코치로 브라이언 윈터스를 내세웠다. 윈터스는 팀의 리빌딩을 위해서 젊은 선수들을 적극 기용할 것임을 천명했고 이는 아레나스에게 커다란 호재가 되었다.

하지만 윈터스 역시 곧바로 아레나스에게 기회를 준 것은 아니었다. 아레나스는 윈터스가 헤드코치로 임한 7번째 경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다시금 코트를 밟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출장 시간은 겨우 3분. 이후에도 간간히 교체 투입으로 경기에 임했을 뿐 단 한 번도 10분 이상의 출장 시간을 기록하지 못하고 있었다.

시즌 48번째 경기에 들어서 비로소 첫 선발 출장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아레나스는 조금씩 자신의 가능성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첫 선발 출장 이후의 9경기에서 연속으로 두 자릿수 이상의 득점에 성공한 것이다. 이후 아레나스는 팀의 마지막 27경기에서 연속으로 선발 출장하는데 성공했고, 충분한 기회를 얻자마자 이제껏 그래 왔듯이 모든 이들에게 자신의 기량을 입증하기 시작했다. 4월에는 서부 컨퍼런스 이달의 신인 선수로 선발되며 멋지게 신인 시즌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이듬해 2002-03 시즌. 아레나스는 본격적으로 성공 스토리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82경기에 모두 선발 출장, 평균 35분(팀 내 2위)을 플레이하며 18.3득점(팀 내 2위), 4.7리바운드, 6.3어시스트(팀 내 1위), 1.5스틸(팀 내 1위)을 기록하며 맹활약했다.

팀 내의 입지는 물론이거니와 리그 내에서도 그의 이름은 조금씩 무게를 갖기 시작했다. 루키 올스타 게임에 소포모어 팀의 일원으로 참가하며 대회 MVP로 선정되었고, 수직 상승한 개인 기록과 팀 내 공헌도로 인해 2002-03 시즌 MIP 수상자가 되는 영광을 맛보기도 했다.

아레나스의 급격한 성장은 2라운더 루키로 데뷔한 것을 전화위복으로 만들었다. 단 2년 만에 비제한적 FA의 권리를 갖게 된 것이다. 젊고 풍부한 가능성을 가진 그를 얻기 위해 많은 팀들이 아레나스에게 접근했다.

가장 적극적이었던 팀은 LA 클리퍼스와 워싱턴 위저즈. 두 팀의 제안을 놓고 고민하던 아레나스는 자신의 운명을 동전에 맡기기로 했다. 하지만 조금 독특하게도 10번 동전을 던져 많이 나온 팀이 아닌, 적게 나온 팀으로 자신의 행선지를 결정하기로 한 것이다. 그는 동전을 10번 던졌고 클리퍼스가 7번, 워싱턴이 3번 나왔다.

아레나스는 워싱턴과 6년간 63.7m의 거대 계약에 합의했고, 원 소속팀이었던 골든 스테이트가 이를 매치시키지 않으면서 워싱턴에 새로운 둥지를 트게 되었다.


Agent Z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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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랬듯이, 워싱턴에서의 시작도 평탄하지 않았다.

당시 워싱턴은 제리 스택하우스라는 걸출한 득점원을 보유하고 있었고, 팀의 미래로 손꼽히며 반드시 성장시켜야만 했던 콰미 브라운이 자리 잡고 있었다. 구단은 이들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퓨어 포인트 가드를 원했고, 이것이 아레나스를 영입한 이유였다.

하지만 이는 워싱턴의 계산 착오였다. 워싱턴에서의 아레나스는 이전에 비해 득점이 늘어난 반면 어시스트는 되레 줄어들고 있었다. 에디 조던 코치는 아레나스에게 제이슨 키드와 같은 플레이를 펼칠 것을 요구했지만, 아레나스는 언제나처럼 공을 들고 림으로 돌진하며 자신만의 플레이를 펼치려했다. 팀에서 가장 많은 출장 시간과 득점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조던과 아레나스 사이에는 알 수 없는 부조화의 기류가 흘렀다. 게다가 크고 작은 부상으로 인해 시즌 내내 고생하던 아레나스는 55경기에 출장하는 것에 워싱턴에서의 첫 시즌을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모습으로 마무리해야 했다.

그러나 아레나스와 조던은 서로를 포기하지 않았다. 아레나스는 언제나 그랬듯이 치열하게 훈련에 임했고, 조던은 아레나스의 장점을 100% 활용할 수 있는 전술을 고안하기 위해 노력했다.

시즌 종료 후 워싱턴은 부상으로 26경기에 출장하는 것에 그쳤던 스택하우스를 댈러스 매버릭스의 앤투안 제이미슨과 트레이드했고, 아레나스 - 래리 휴즈 - 제이미슨으로 이어지는 트리오를 결성했다. 조던은 아레나스의 공격 본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었고, 아레나스는 코치의 주문을 성실히 이행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렇게 맞이한 2004-05 시즌. 아레나스와 워싱턴은 비상하기 시작했다. 아레나스는 80경기에 모두 선발 출장하며 평균 25.5득점, 4.7리바운드, 5.1어시스트, 1.7스틸을 기록하며 팀의 에이스로 우뚝 섰다. 제이미슨과 함께 생애 최초 올스타 멤버로 선정되기도 했으며 All NBA 3rd Team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아레나스의 활약은 개인의 성공에 머무르지 않고, 팀의 성공에도 큰 힘이 되었다. 워싱턴은 45승 37패를 기록하며 동부 컨퍼런스 5번 시드의 주인공이 되어 플레이오프 무대에 진출했다. 이는 8년 만의 플레이오프 진출이었으며 팀의 이름이 위저즈로 바뀐 이후 첫 플레이오프 진출이기도 했다. 아레나스에게도 생애 첫 플레이오프 진출이었기에 더욱 뜻 깊은 시즌이었다.

1라운드에서 만난 상대는 시카고 불스. 원정 2경기를 모두 내어준 워싱턴은 이후 홈2경기에서 모두 승리했고 시리즈 스코어가 2-2를 이룬 상황에서 5차전 승부에 돌입했다.

치열하게 전개된 경기는 종료 5초 가량이 남은 상황에서 110-110으로 동점을 이뤘고 마지막 공격권은 워싱턴이 가지고 있었다. 아레나스가 천천히 드리블을 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단숨에 커크 하인릭을 제치고 돌파를 시도했고, 헬프 디펜스를 시도하는 타이슨 챈들러를 앞에 두고 점퍼를 던졌다. 경기 종료와 함께 슛은 림을 갈랐고 112-110로 경기 종료. 워싱턴이 시리즈 스코어를 3-2로 뒤집는 순간이었다.

승기를 잡은 워싱턴은 여세를 몰아 이어진 6차전에서도 승리하며 시리즈 스코어 4-2로 단숨에 플레이오프 1라운드를 통과했다. 이후 2라운드에서 샤킬 오닐과 드웨인 웨이드가 이끄는 마이애미 히트를 만나 0-4로 스윕을 당하며 시즌을 마무리했지만, 이제는 어느 누구도 아레나스가 이끄는 워싱턴을 쉬운 상대로 생각할 수 없었다.

2005-06 시즌의 개막을 앞두고 워싱턴은 본격적으로 아레나스 중심의 팀을 만들기로 결정한다. 팀의 미래로 손꼽았던 콰미 브라운을 LA 레이커스로 보내며 아레나스의 사이드 킥으로 활약할 수 있는 캐론 버틀러를 영입한 것이다. 이로써 워싱턴은 아레나스 - 버틀러 - 제이미슨으로 이어지는 빅3 라인을 결성하는데 성공했다.

아레나스는 이에 화답하듯 80경기에 출장하며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낸다. 평균 29.3득점을 기록하며 득점 부문 리그 4위에 랭크되었고, 팀 내 최다인 6.1개의 어시스트와 2.0개의 스틸을 기록하며 워싱턴의 에이스로 확실히 자리매김 했다. 2년 연속 올스타 멤버와 All NBA 3rd 팀에 선발되며 전국구 스타로써의 발돋움에도 성공했다.

42승 40패의 성적으로 2년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한 워싱턴은 1라운드에서 르브론 제임스가 이끄는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를 상대하게 됐다. 아레나스와 제임스는 양 팀의 에이스로써 엄청난 대결을 펼쳤다. 아레나스는 시리즈 평균 34득점을 기록했고, 제임스는 평균 35득점을 기록하며 연일 화력 시위에 나섰다.

시리즈는 조금씩 클리블랜드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시리즈 스코어 2-3으로 플레이오프 탈락 위기에 놓인 워싱턴은 홈에서 6차전을 치렀다. 5차전에 이어 두 경기째 연속으로 연장까지 가는 혈전을 펼친 두 팀. 연장전 종료 15초를 남긴 상황에서 113-112로 워싱턴이 1점 차의 리드를 잡고 있었고, 파울을 얻은 아레나스는 2개의 자유투를 시도하려 하고 있었다.

그 때, 제임스가 아레나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만약 이번에 자유투를 놓치게 된다면 너희 팀은 지고 말거야.'

아레나스는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였으나 뭔가에 홀린 듯이 2개의 자유투를 모두 놓치고 말았다. 81%의 자유투 성공률을 자랑하던 아레나스가 2개의 자유투를 모두 놓치고 만 것이다. 이어진 클리블랜드의 공격에서 데이먼 존스가 베이스 라인 점퍼를 성공시켰고, 결국 113-114로 무릎을 꿇은 워싱턴은 플레이오프 1라운드의 벽을 넘지 못하고 시즌을 마무리해야 했다.

아레나스는 6차전이 끝난 뒤 곧바로 자유투 훈련을 시작했을 만큼 커다란 실망감에 사로 잡혔다. 하지만 전 세계 NBA 팬들의 뇌리에는 아레나스의 이름이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NBA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제임스와 정면으로 맞서며 결코 물러서지 않았던 사나이로써 말이다.


정상에서 입은 상처

2006-07 시즌은 그야말로 아레나스가 리그를 대표하는 스타플레이어로 자리 매김 하게 된 해였다. Agent Zero라는 멋진 닉네임과 함께 아레나스의 활약상은 연일 뜨거운 이슈로 언론의 주목을 끌었다.

2006년 12월 17일, 레이커스 원정 경기에서 코비 브라이언트의 마크를 뚫고서 60득점, 8리바운드, 8어시스트, 2스틸을 기록하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날 기록한 60득점은 워싱턴 프랜차이즈 역사상 단일 경기 최다 득점 신기록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12월 22일에는 피닉스 원정 경기에서 스티브 내쉬와 쇼다운을 펼치며 연장까지 가는 접전 끝에 54득점을 기록하며 피닉스를 침몰시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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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팬들에게 최고의 퍼포먼스로 기억되는 경기는 역시 2007년 1월 15일에 있었던 유타 재즈와의 경기였다. 경기 종료까지 11초가 남은 시점에서 111-111으로 동점을 이룬 양 팀. 인 바운드 패스를 받은 아레나스는 마지막 공격에 나섰으며 유타의 데론 윌리암스가 그 앞을 가로 막고 있었다. 한 차례 레그 스루 드리블을 통해 왼손으로 공을 옮겨 잡은 아레나스는 돌파를 시도할 듯이 모션을 취했고, 윌리암스는 재빨리 아레나스의 경로를 막아섰다. 하지만 아레나스는 더 이상 림을 향해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드리블을 멈춘 뒤 그대로 3점슛 라인 뒤에서 슛을 시도했다. 공이 림에 닿기도 전에 경기 종료 부저가 울렸고, 경기 종료 부저가 울리기도 전에 아레나스는 득점을 확신한 듯 두 팔을 들어 올리며 뒤돌아섰다. 잠시 뒤, 아레나스의 슛이 림을 가르며 114-111로 경기 종료. 그야말로 극적인 슈팅이었고, 더욱 극적인 퍼포먼스였다.

그러나 무서울 것이 없었던 아레나스와 워싱턴의 상승 곡선은 시즌 내내 지속되지는 못했다. 시즌이 막바지에 이른 2007년 4월 4일 샬럿 밥캣츠와의 경기에서 제럴드 월라스와 충돌을 하며 왼쪽 무릎이 뒤틀린 것이다. 이 부상으로 인해 아레나스는 시즌 아웃을 선언하게 된다. 드래프트에서 한 차례 아픔을 안겼던 월라스는 다시 한 번 아레나스에게 본의 아닌 상처를 주게 되었다.

워싱턴은 41승 41패를 기록하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지만 아레나스는 팀과 함께 할 수 없었다. 워싱턴은 2년 연속 클리블랜드와 1라운드에서 만나게 됐지만 아레나스가 없는 워싱턴은 제임스와 클리블랜드를 막기에 역부족이었다. 워싱턴은 힘없이 0-4로 스윕을 당하며 시즌을 마무리해야 했다.

지난 시즌의 아쉬움을 씻어 내기 위해 절치부심 맞이했던 2007-08 시즌. 워싱턴은 제이미슨의 꾸준한 활약과 날이 갈수록 성장하는 버틀러의 분전으로 43승 39패를 기록하며 4년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다. 하지만 거기에 아레나스의 모습은 없었다.

아레나스는 시즌 개막 이후 8경기 연속 선발 출장했으나 부상의 여파가 남은 탓인지 컨디션 난조를 보였고, 팀마저 3승 5패로 부진에 빠졌다. 결국 팀은 아레나스에게 휴식을 권유했고 아레나스는 부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며 결장을 이어갔다.

그렇게 시즌은 후반으로 접어들었다. 플레이오프 진출을 향한 경쟁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졌고, 1라운드 돌파를 위해 어떻게 서든 홈코트 어드밴티지를 얻으려 했던 워싱턴은 38승 36패를 기록하며 클리블랜드와 동부 컨퍼런스 4번 시드를 놓고 치열한 순위 싸움을 전개하고 있었다.

결국 워싱턴은 시즌 종료까지 8경기를 남긴 상황에서 아레나스의 복귀를 전격 결정했다. 홈코트 어드밴티지를 얻기 위해서는 가용 가능한 모든 자원을 총동원 시켜야 했고, 팀의 에이스였던 아레나스의 복귀는 필연적인 것으로 보였다. 이후 아레나스는 5경기에서 교체 멤버로 경기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부상에서 완벽하게 회복되지 않았기에 오랜 시간을 플레이할 수 없었고, 그나마 플레이 하는 동안에도 기복이 심한 모습을 보였다.

워싱턴은 아레나스가 출장한 5경기에서 3승 2패, 팀의 마지막 8경기에서 5승 3패를 기록하며 선전했지만 결국 같은 기간 동안 4승 4패를 기록한 클리블랜드에게 홈코트 어드밴티지를 빼앗기고 말았다.

다시금 시작된 플레이오프. 워싱턴과 클리블랜드는 3년 연속 1라운드에서 맞붙게 되었다. 아레나스는 1,2차전에서 교체 멤버로 경기에 나섰으나 부진한 모습을 보이는데 그쳤고 팀은 2연패를 당했다. 결국 아레나스는 3차전부터 과감히 선발 출장을 감행했다. 하지만 단 10분을 플레이하는데 그쳐야 했다. 결국 4차전에서 무리하게 30분이 넘는 플레잉 타임을 소화한 아레나스는 경기가 끝나고 그대로 시즌 아웃 되고 만다. 워싱턴은 3년 연속 클리블랜드에게 무릎 꿇으며 시리즈 스코어 2-4로 플레이오프 1라운드 돌파에 실패했다.


또 한 번의 좌절

부상으로 힘든 1년을 보낸 아레나스였지만 팬들의 관심과 사랑은 끊이지 않았다. 아레나스는 언론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며 팬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고, 인기 블로거로써의 명성도 높아져갔다.

그러나 소속팀 워싱턴의 상황은 그리 즐겁지 못했다. 2008-09 시즌 개막을 앞둔 워싱턴의 최고 고민거리는 주축 멤버들과의 재계약이었다. 아레나스와 앤투안 제이미슨이 동시에 FA 자격을 얻게 된 것이다. 캐론 버틀러와 함께 팀 전력의 50% 이상을 책임지던 그들이었지만 두 선수와 모두 재계약에 성공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특히 제이미슨은 FA 시장에서 높은 인기를 보였고, 워싱턴의 전력 누수는 불가피한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이 때 아레나스가 입을 열었다. 그는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제이미슨과의 재계약에 실패한다면 나도 팀을 떠날 것'이라며 동료의 잔류를 희망했다. 결국 2008년 6월 30일, 워싱턴은 제이미슨과 4년간 50m에 달하는 재계약에 합의할 수 있었다.

이제 모든 관심은 Opt-Out을 선언하며 비제한적 FA가 된 아레나스에게로 집중됐다. 그가 원한대로 제이미슨과의 재계약에 성공한 워싱턴은 곧이어 아레나스와의 협상에 돌입했다.

그리고 2008년 7월 13일, 워싱턴 팬들의 환호성을 불러일으킬 뉴스가 전해졌다. 아레나스가 워싱턴과의 재계약에 동의한 것이다. 게다가 스스로 자신의 연봉을 감축시키며 팀의 샐러리 유동성 확보에 이바지하기도 했다. 그는 6년간 127m에 육박하는 거대 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지만, '팀에게 16m을 돌려주겠다. 맥시멈 계약으로 팀의 계획에 걸림돌이 되고 싶지 않다'는 말과 함께 6년 111m의 계약에 최종 사인했다.

팬들의 기대는 날로 높아져갔다. 주축 멤버들과의 재계약도 순탄히 마무리했으니, 멤버들이 건강하게만 뛰어준다면 이번에야말로 클리블랜드와 제임스에게 복수를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팬들의 기다림은 생각보다 길어졌다. 아레나스는 100% 회복된 모습으로 코트에 서고 싶다며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2009년 3월 28일, 디트로이트와의 홈경기를 통해 드디어 코트로 돌아온 아레나스. 하지만 30분 가량을 플레이하며 25%의 야투율을 기록하는데 그쳤다. 잠시 숨을 고른 그는 2009년 4월 2일, 어느 새 숙적이 되어가고 있는 클리블랜드와의 경기에 다시 한 번 선발 출장 했다. 하지만 33분을 플레이하며 27%의 야투율, 11득점을 기록하는데 그쳤다. 그리고 그는 또 한 번의 시즌 아웃을 선언했다.

아레나스가 없는 워싱턴은 좌초하기 시작했다. 와중에 버틀러마저 크고 작은 부상들에 시달려야 했고, 닉 영과 같은 영건들의 성장 그래프는 구단의 기대에 턱없이 모자란 수준이었다. 결국 2008-09 시즌 워싱턴의 최종 성적은 19승 63패. 구단이 워싱턴에 자리 잡은 이후 역대 두 번째로 저조한 승률을 기록했다.


다시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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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의 여름, 워싱턴은 크고 작은 움직임들을 꾸준히 보였다. 우선 그들은 코칭스태프의 면면을 대폭 물갈이 했다. 에디 조던을 해임하고 플립 선더스를 새로운 헤드 코치로 임명했다. 곧이어 샘 카셀과 랜디 휘트먼 등을 어시스턴트 코치로 영입하며 새로운 워싱턴을 만들기 위한 의지를 보였다.

그리고 그들의 2009년 드래프트 1라운드 5번 지명권을 트레이드 시장에 내놓았다. 아레나스가 건강하게 복귀한다는 가정 아래, 팀이 정상에 서기 위해서는 유망주 신인이 필요하기 보다는 즉시 전력으로 활약할 수 있는 베테랑들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워싱턴은 그들의 5번 지명권과 이탄 토마스, 다리우스 송가일라, 페체로프를 패키지로 만들어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의 랜디 포이, 마이크 밀러를 영입하기로 결정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워싱턴의 손을 들어주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으나 드래프트 당일이 되자 이야기는 엄청난 반전을 맞이했다. 한 때 1번 픽의 주인공으로도 점쳐졌던 스페인의 신성 리키 루비오가 5번 지명권을 통해 미네소타에 안착한 것이다. 물론 그의 NBA 데뷔는 좀 더 오랜 기다림의 시간을 필요로 하게 되었지만, 결과론적인 관점에서의 비판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아레나스의 건강에 대한 의구심을 표하는 이들도 조금씩 생겨났다. 사실상 2년을 부상으로 고생해야 했던 아레나스이기에 과연 그가 완벽한 부활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계속됐고, 어느 덧 리그의 에이스 레벨로 성장한 버틀러와의 볼 배분 문제, 새로 영입한 포이 등과 팀의 궁합, 영의 지지부진한 성장 곡선 등 걱정거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아레나스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듯하다. 뜨거운 이슈를 끝없이 쏟아내던 블로그 관리에 할애하던 시간을 줄이고, 보다 진지하게 게임에 임하겠노라 이야기했다.

르브론 제임스, 드웨인 웨이드, 코비 브라이언트, 크리스 폴, 드와이트 하워드... 수많은 스타플레이어들이 리그를 들끓게 하고, 전국 방송을 통해 자신의 기량을 뽐내는 모습을 보며 매순간 복수의 칼날을 갈아왔다는 길버트 아레나스.

돌아온 'Agent Zero'의 열풍이 워싱턴을 넘어 전미는 물론 전 세계를 강타하게 될 것인지, 혹은 부상으로 사라져간 스타플레이어들처럼 아레나스 역시 뒷걸음질을 치게 될 것인지...

복귀를 눈앞에 둔 아레나스의 활약상은 단연 2009-10 시즌 최고의 관전 포인트 중 하나다.

길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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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6일, 소셜 네트워크로 이루어진 iHOOPS.com(이하 아이훕스)가 정식오픈 하였다.

아이훕스는 NBA와 더불어 미 대학농구 NCAA의 관계자들이 모두 함께 할 수 있는 혁신적인 소통공간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선수들과 학부모, 코칭스태프, 심판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기술발전과 인생 상담 등 다양한 정보공유를 도모하는 것이 태생목적이다.

CEO를 담당하고 있는 웨이버그는 “이 웹사이트는 유소년 농구가 성공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찾을 수 있도록 인도할 것이다”라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웹사이트 내에는 슈팅이나, 패스, 볼핸들링 등 기본적인 농구기술 뿐만 아니라 경기룰도 상세하게 저술돼있다. 선수들의 건강과 몸만들기에 대한 노하우 뿐 아니라 학교생활에 대한 토론의 장도 24시간 365일 열려있다.

회원가입만 해두면 팀 등록도 가능하다. 독립적인 팀 사이트가 아이훕스 안에 생성되는 것으로 로스터나 경기 일정 관리, 선수들의 사진 등록 등 기본적인 기능은 모두 갖추고 있다.

하지만 아이훕스가 노리는 전략적인 목표는 이러한 ‘웹 기능’이 전부가 아니다. 사용자 프로필과 블로그, 포럼 등 커뮤니티 기능이 거미줄처럼 엮여 있고, 가까운 시간 내에 3D 애니메이션 기술이 가미된 모바일 서비스가 오픈 될 예정이다.

소셜 네트워크의 대표주자인 트위터나 마이스페이스, 세계적인 UCC 사이트인 유투브와의 연동으로 젊은 선수들에 대한 배려심도 엿보인다. 특히 페이스북 계정을 갖고 있는 회원들은 팬(Fan) 등록이 가능하여 곧바로 이용이 가능하다. 

학부모들의 고충을 덜어줄 ‘Parent's Guide'도 눈길을 끈다. 아이훕스는 총 6개의 파트로 나누어진 가이드 북을 마련하여, 프로농구 선수를 꿈꾸는 자식들에 대한 교육 로드맵을 제시하고 있다. NBA의 전설적인 센터 빌 월튼은 “이 가이드는 유소년 농구선수를 키우는 여러 부모님들에게 좋은 청사진이 될 것이다. 농구가 게임이라는 것만 기억한다면 즐기면서 운동할 수 있을 것이다”며 메시지를 전했다.

사이트 개설에는 NBA 부총재를 맡고 있는 스투 잭슨과 듀크 대학의 감독 마이크 슈셉스키, NCAA의 부회장 그렉 샤힌 등이 힘을 보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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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COLUMNS/HELTANT79 2009. 10. 26. 00:00

창단 40주년 클리블랜드, 40개의 추억

BY 알 수 없는 사용자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가 창단 40주년을 맞는다. 1970년 버펄로 브레이브스(L.A. 클리퍼스의 전신),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와 함께 첫 발을 내딛은 클리블랜드는 지난 40년간 팬들과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눠왔다. 4명의 구단주와 18명의 감독을 맞이하는 동안 1460승 1706패를 기록한 클리블랜드는 컨퍼런스 우승 1회, 디비전 우승 2회를 경험했다.

클리블랜드 공식 홈페이지(http://www.nba.com/cavaliers)는 창단 40주년을 맞아 팀 역사 속 40개의 순간을 선정해 발표했다. 클리블랜드 팬들을 울리고 웃겼던 추억 속으로 들어가보자.


1. 2006-2007 시즌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 5차전, 르브론 제임스가 팀의 마지막 30득점 중 29점을 혼자 올렸다. 특히 마지막 25점은 모두 르브론의 득점이었다. 이날 2차 연장 끝에 109-107의 짜릿한 승리를 이끌어낸 르브론은 NBA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활약 중 하나를 펼쳤다. 48득점으로 경기를 마친 르브론은 6차전에서도 승리, 클리블랜드를 창단 이후 첫 파이널 무대로 이끌었다.

2. 전 시즌을 15승 67패로 끝낸 클리블랜드는 인근 애크런 출신의 한 소년에게 클리블랜드 유니폼을 입히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 소년은 전문가들 사이에서 ‘그의 세대 중 최고’로 평가 받고 있었다. 드래프트 순위 발표장에서 NBA 총재 대리 러스 그래닉이 멤피스 그리즐리스가 2순위 지명권을 얻었음을 발표했을 때(클리블랜드가 1순위를 따낸 순간), 클리블랜드의 운명은 완전히 바뀌었다.

3. 1992년 동부컨퍼런스 세미파이널 6차전에서 보스턴 셀틱스에게 일격을 당한 후, 클리블랜드는 60퍼센트에 육박하는 야투 성공률을 보이며 122-104로 대승을 거뒀다. 클리블랜드가 동부컨퍼런스 파이널 진출을 확정 지은 이 경기는 래리 버드의 화려했던 경력이 막을 내린 경기이기도 했다.

4. 1976년 4월 29일 ‘리치필드의 기적’이 완성됐다. 베테랑 가드 딕 스나이더가 워싱턴 불리츠의 웨스 언셀드를 제치고 5피트 슛을 성공시켰고, 87-85로 앞선 클리블랜드는 창단 이후 처음으로 진출한 플레이오프에서 동부컨퍼런스 파이널에 진출하게 됐다.

5. 휴스턴에서 열린 제 55회 올스타 전에서 르브론 제임스가 21점차로 뒤져 있던 동부컨퍼런스의 역전승을 이끌었다. 29득점 6리바운드를 기록한 르브론은 NBA 역사상 최연소인 21세에 올스타 전 MVP에 올랐다.


6. 66승 16패로 정규시즌 1위를 차지한 2008-2009 시즌, 르브론 제임스는 경기당 28.4득점 7.6리바운드 7.2어시스트를 올리며 팀 역사상 처음으로 MVP를 수상했다.

7. 르브론 제임스가 48득점을 올리며 승리를 거둔 다음 치른 2007년 동부컨퍼런스 파이널 6차전, 이번에는 신인 ‘부비’ 깁슨이 디트로이트를 침몰시켰다. 6차전 31득점 중 19점을 4쿼터에 집중시킨 깁슨의 활약으로 98-82 승리를 거둔 클리블랜드는 팀 역사상 처음으로 파이널 무대를 밟게 됐다.

8. 1986년 6월 19일, 클리블랜드는 웨인 엠브리를 단장으로 영입했다. 엠브리는 나중에 로이 힌슨과 현금을 필라델피아 76서스로 보내고 그 해 드래프트 1순위 지명권을 받는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그리고 이 지명권으로 노스캐롤라이나 대의 센터 브래드 도허티를, 8순위 지명권으로 마이애미 대 가드 론 하퍼를, 그리고 나중에 얻은 2라운드 지명권으로 조지아 공대 가드 마크 프라이스를 지명했다. 이 선수들은 1980년 말 클리블랜드의 중흥기를 일구어냈다.

9. 1984-1985 시즌, 클리블랜드는 9연패를 포함해 2승 19패로 최악의 부진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33세에 불과했던 조지 칼이 임시 감독에 오른 후부터 모든 것이 달라졌다. 마치 드라마와 같은 대역전극을 이뤄낸 클리블랜드는 4월 9일 7시즌 만의 플레이오프 진출을 확정 지었다.

10. 1979-1980 시즌, 클리블랜드는 홈경기 역사상 최고의 승리 중 하나를 거뒀다. 4차 연장의 혈전 끝에 승리한 상대는 그 해 우승팀 LA 레이커스였다. 클리블랜드의 마이크 미첼, 데이브 로비쉬, 랜디 스미스는 모두 30점 이상을 올렸다.

 
11. 창단 첫 시즌에서 단 15승에 그친 뒤 열린 1971년 드래프트에서 클리블랜드는 노틀담 대 출신의 득점기계 오스틴 카를 1순위로 지명했다. 대학 시절 경기당 34.5득점을 올렸던 카는 데뷔 후 첫 세 시즌 동안 경기당 21.2득점을 올렸다.

12. 개막 15연패로 창단 첫 시즌을 시작한 클리블랜드는 1970년 11월 12일 마침내 팀 역사상 첫 승리를 차지했다. 클리블랜드와 마찬가지로 창단 첫 시즌을 보내던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클리블랜드는 바로 다음 경기부터 또다시 15연패를 당했다.

13. 첫 네 시즌을 클리블랜드 시내에 위치한 클리블랜드 아레나에서 치른 클리블랜드는 구단주 닉 말리에티가 직접 지은 리치필드 콜로세움으로 홈 구장을 이전했다. 클리블랜드는 1974년 10월 29일에 열린 개장 경기에서 챔피언 보스턴에게 졌다. 하지만 클리블랜드는 그 해 41회의 홈경기 중 29경기에서 승리를 거뒀다.

14. 팀이 암흑기를 보내던 1981년 포워드 마이크 미첼이 올스타에 뽑히며 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리치필드 콜로세움에서 열린 올스타 전에서 미첼은 15분 동안 14득점을 올리며 홈 팬들의 성원에 보답했다.

15. 1975-1976시즌 49승 33패를 거두며 팀을 창단 이후 첫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킨 빌 피치가 올해의 코치상을 수상했다.


16. 창단 후 리그 최약체를 벗어나지 못하던 빌 피치의 클리블랜드는 1976년 3월 31일 뉴올리언즈 재즈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팀 역사상 처음으로 플레이오프 진출을 확정 지었다. 클리블랜드는 2주 뒤 전국 방송 경기에서 뉴욕 닉스에게 승리를 거두며 센트럴 디비전 1위에 올랐다.

17. 워싱턴 불리츠를 상대로 치른 1976년 플레이오프 2차전 경기는 초창기 클리블랜드를 미라클 팀이라고 부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바비 ‘빙고’ 스미스가 종료 2초를 남기고 30피트 거리에서 던진 슛이 림을 가르며 80-79를 만들었고, 클리블랜드는 팀 역사상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서 승리를 거뒀다.

18. ‘NBA 위대한 50인’이 클리블랜드의 홈 구장 군드 아레나에서 소개된 1997년 올스타 전은 농구 역사상 위대한 선수들의 모습이 가장 많이 보인 경기였다. 제리 웨스트, 줄리어스 어빙, 오스카 로버트슨 등 살아있는 전설들이 마이클 조던이나 샤킬 오닐 같은 새로운 세대의 선수와 자리를 함께 했다. 본 게임에서는 클리블랜드 가드 테럴 브랜든이 벤치에서 출격, 17분 동안 10득점을 올렸다.

19. 르브론 제임스와 부비 깁슨의 영웅적인 활약으로 디트로이트를 침몰시킨 클리블랜드는 팀 역사상 처음으로 파이널에 진출했다. 하지만 파이널 상대는 마이크 브라운 감독의 전 소속팀인 샌안토니오 스퍼스였고, 샌안토니오는 클리블랜드를 4-0으로 일축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20. 조지 군드와 고든 군드 형제가 팀을 인수한 후 새롭게 태어난 클리블랜드는 최고의 득점원 중 하나였던 월드 B. 프리와 계약했다. ‘공중의 왕자’는 클리블랜드에서 보낸 4시즌 동안 경기당 23득점을 기록하며 클리블랜드의 농구 인기를 유지했다.


21. 1998년 올스타 주간에 열린 루키 챌린지에는 클리블랜드의 지드루너스 일가우스카스, 세드릭 핸더슨, 브레빈 나이트, 데릭 앤더슨이 출전했다. 한 팀에서 네 명의 루키가 출전하는 루키 챌린지가 시작된 이후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게임에서는 18득점 7리바운드를 올린 일가우스카스가 MVP를 수상했다.

22. 클리블랜드 사령탑을 맡은 지 4년 만에 마이크 브라운 감독이 2008-2009 시즌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하며 빌 피치 이후 이 상을 받은 두 번째 클리블랜드 감독이 됐다. 브라운의 팀은 수비 여러 부문에서 리그 1위에 오르며 전 시즌에 비해 21승을 더 거두는 괴력을 발휘했다.

23. 1991년 12월 23일, 크레이그 일로가 팀 역사상 손꼽히는 명 장면을 만들어냈다. 일로는 유타 재즈와의 홈경기에서 짜릿한 3점 버저비터로 113-112 승리를 일궈내며 홈 팬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선사했다. 일로의 이날 활약은 클리블랜드 라디오 캐스터 조 태이트의 다음 멘트에 의해 영원히 기억 속에 남게 됐다. “그래요, 버지니아! 산타클로스는 있습니다! 텍사스 주 러벅(일로의 고향) 출신이라죠, 아마?”

24. 2009년 동부컨퍼런스 파이널 2차전, 종료 1초 전 히도 터콜루의 러닝 점프 슛으로 올랜도 매직이 95-93으로 앞서갔다. 하지만 인바운드 패스를 받은 르브론 제임스가 버저비터 3점 슛을 터뜨렸고, 96-95로 이긴 클리블랜드는 시리즈를 1-1 동률로 만들었다. 홈 구장을 가득 채운 20,562명의 홈 관중들을 열광에 빠뜨린 순간이었다.

25.  데뷔 후 두 시즌 동안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했던 르브론 제임스는 더크 노비츠키와댈러스 매버릭스를 상대로 46점을 폭발시키며 107-94 승리를 이끌었다. 지드루너스 일가우스카스의 데뷔 시즌 이후 8년 만의 플레이오프 진출을 확정 짓는 순간이었다. 클리블랜드는 이후 세 시즌 연속으로 1라운드에서 워싱턴을 상대하게 된다.



26.  오직 마이클 조던과 오스카 로버트슨만이 르브론 제임스와 마찬가지로 데뷔 시즌에 경기당 20득점 5리바운드 5어시스트 이상을 기록했다. 이러한 활약으로 르브론은 리그 역사상 최연소이자 팀 역사상 유일한 올해의 신인상을 수상했다. 르브론은 첫 시즌에 평균 21득점 6어시스트에 육박하는 기록을 올렸고 팀은 전년도에 비해 두 배 이상 많은 승리를 거뒀다.

27. 1975년 11월 27일, 훗날 명예의 전당에 오른 올스타 7회 출전자 네이트 써몬드가 영입되자, 클리블랜드의 젊은 선수들은 급격한 성장을 경험했다. 클리블랜드 인근 애크런 출신인 써몬드는 그러잖아도 강력했던 팀의 프런트라인에 힘을 더했고 팀 역사상 최초의 플레이오프 진출을 이끌었다.

28. 가드 마크 프라이스가 1993년과 1994년 올스타 전 3점슛 대회를 2연패하며 래리 버드, 크레이그 허지스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프라이스가 기록한 24점은 14년 후인 2008년 전 클리블랜드 선수인 제이슨 카포노가 25점을 기록할 때까지 대회 기록이었다.

29. 1993년 솔트레이크 시티 올스타 전, 전날 3점슛 대회에서 우승한 프라이스는 3점슛 9개 중 6개를 성공시키며 19득점을 올렸다. 래리 낸스와 브래드 도허티도 동부 올스타로 출전하며 지난 4년 동안 두 번째로 3인방이 모두 올스타에 뽑히는 영광을 안았다.

30. 2006년 플레이오프 1라운드, 클리블랜드 홈 구장인 퀴큰 론즈 아레나는 거의 10년 만의 플레이오프 경기로 열광에 싸여있었다. 생애 첫 플레이오프 경기에 출전한 르브론 제임스는 첫 슈팅을 에어볼로 시작했으나 32득점 11리바운드 11어시스트로 트리플 더블을 거두며 워싱턴을 상대로 97-86 승리를 이끌어냈다. 르브론은 1라운드 평균 35.7득점을 올렸다.


31. 2005년 1월 5일, 미국 최대의 온라인 모기지 업체 퀴큰 론즈의 소유주인 댄 길버트가 전 구단주 고든 군드로부터 3억 7천 5백만 달러에 팀을 인수했다. 이 모기지 재벌은 초보 감독과 단장인 마이크 브라운과 대니 페리를 고용하며 팀 문화를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길버트가 새 구단주가 된 후 재건축한 홈 구장이 퀴큰 론즈 아레나로 이름을 바꿨고 연습 구장이 새로 지어졌다. 결과는 팀이 처음 경험하는 성공이었다.

32. 2008년 3월 26일, 팀 창단 이래 ‘클리블랜드의 목소리’로 불렸던 조 태이트가 통산 3,000번째 클리블랜드 게임을 중계했다. 뉴저지와 시카고에서 각각 한 시즌씩을 보낸 후 1983-1984 시즌에 복귀한 태이트는 이후 줄곧 라디오 중계를 진행하고 있다.

33. 조지 칼의 지휘 아래 시즌 초반 2승 19패의 부진을 극복하고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클리블랜드는 1985년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전년도 우승팀 보스턴 셀틱스를 상대했다. 월드 B. 프리의 경기당 26.3득점에도 불구하고 클리블랜드는 보스턴에게 네 경기만에 탈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클리블랜드가 진 세 경기는 모두 3점차 이내의 패배였다.

34. 1986년 6월 16일, 루이지애나 주 배심원단은 존 ‘핫로드’ 윌리암스의 승부조작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윌리암스는 전년도 드래프트 2라운드에서 클리블랜드의 지명을 받은 상태였다. 윌리암스는 클리블랜드에서 9시즌을 뛰며 리바운드, 블록슛, 출장 시간 등에서 팀 내 기록을 세웠다.

35. 1982-1983 시즌에 거둔 23승 59패의 성적은 구단주 테드 스테피엔이 팀을 팔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4월 7일, 콜로세움 구장의 소유자인 조지와 고든 군드 형제는 옵션을 행사해서 클리블랜드를 매입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리그 구단주들이 최악의 상황을 맞은 클리블랜드를 돕기 위해 1983, 84, 85, 86년 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권을 추가로 주기로 했고, 군드 형제는 이 권리를 모두 행사했다.


36. 데이먼 존스는 클리블랜드에서 세 시즌만을 뛰었지만 팀 최고의 순간에 포함될 자격이 있다. 2006년 5월 5일 워싱턴과의 플레이오프 1라운드 6차전, 벤치에서 출전한 존스는 연장전 종료 4.8초를 남기고 슛을 성공시키며 114-113 승리를 이끌었다. 1라운드에서 승리를 거둔 클리블랜드는 13년 만에 2라운드에 진출했다.

37. 여러 번 발에 수술을 받은 지두르너스 일가우스카스는 한때 다시는 농구를 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기적과 같이 재활에 성공한 일가우스카스는 2002-2003 시즌에 그의 경력에서 가장 뛰어난 성적을 거뒀다. 팀은 17승 65패에 그쳤지만, 경기당 17.2득점 7.5리바운드를 올린 일가우스카스는 생애 처음으로 올스타에 선정됐다.

38. 새크라멘토에서 열린 개막전을 시청하던 회의주의자들은 매스컴의 집중 조명이 르브론 제임스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2003년 10월 29일에 벌어진 이 경기에서 ‘선택 받은 자’는 첫 공식 경기부터 모두의 입을 다물게 했다. 르브론은 25득점 6리바운드 9어시스트를 올렸는데, 25득점은 고졸 선수가 데뷔 전에서 세운 역대 최다 득점 기록이었다.

39. 팀 창단 25주년 경기를 승리로 장식한 직후인 1994년 11월 8일, 클리블랜드는 새로 지은 군드 아레나로 홈 구장을 옮겼다. 20,562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군드 아레나는 훗날 퀴큰 론즈 아레나로 이름을 바꿨고, 현재까지 클리블랜드 홈 구장으로 쓰이고 있다.

40. 드와이트 하워드의 올랜도에게 동부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무릎을 꿇은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드래프트 하루 전 대형 사고를 쳤다. 클리블랜드는 벤 월러스와 사샤 파블로비치를 내보내고 15회 올스타이자 미래의 명예의 전당 헌액자 샤킬 오닐을 영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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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2009-10시즌을 앞두고 4개의 NBA팀이 새 유니폼을 선보였다.

오프시즌 동안 샬럿 밥캐츠는 스프라이트가 가미된 ‘홈져지’를 발표했고, 댈러스와 멤피스는 3번째 유니폼이라 불리는 ‘얼트네이트 져지‘를 공개하였다. 필라델피아는 과거 80년대 디자인을 복원한 ’하드우드 클래식 져지‘를 제작하며 팬들의 호응을 이끌었다.

해마다 새로운 종류의 유니폼이 출시되는 것은 수익창출과 차기시즌에 대한 구단의 의지를 반영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유니폼은 단순한 ‘옷’이나 ‘농구용품’ 이상의 역할수행을 해내는 매개체다.

NBA.com은 그 동안 공식스폰서의 판매집계를 통해 순위발표를 해왔다. 이 성적표는 그간 선수 개개인의 인기와 연고지의 시장크기 등을 가늠할 수 있는 대표적인 지표로 자리매김했다.

      좌측부터 나이키社 하승진, 챔피언社 하킴 올라주원, 리복社 트레이시 맥그레이디


하나를 알면 둘이 보인다

트레이시 맥그레이디는 팀 동료 야오밍 효과에 힘입어 한동안 중국내 유니폼 판매순위 상위에 랭크되는 반사이익을 누린 바 있다. 스테판 매버리는 뉴욕 닉스 시절 오랜 부진 속에서도 탑10에 이름을 올리며 뉴욕의 방대한 시장성을 증명하기도 했다. 지난 2003년 성폭행 사건에 연루됐던 코비 브라이언트는 소송기간 이후 부진한 판매율을 보였지만 득점왕과 우승을 거머쥐며 유니폼 업계의 블루칩으로 돌아왔다. 팬심의 움직임까지 방증하는 데이터인 것이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20년 전만해도 ‘먼 나라 이야기’에 불과했다. 90년대 중반 본격적으로 NBA 용품이 상륙하기 전까지는 구매루트가 전무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현재는 공식 스폰서로 지정된 매장이나 인터넷 시장 등지에서 어렵지 않게 구매가 가능하지만 이러한 시장이 형성된 것도 채 10년이 안됐다.

점프볼의 한준희 컬럼니스트는 “확실치는 않지만 80년대에도 이태원에 일부 NBA 유니폼을 판매하는 곳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우리들이 입는다 해도 광대취급을 받았을 거라는 인식이 강했고, 유니폼을 입고 거리를 활보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며 회고하였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유니폼의 소비 형태는 점차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득점기계로 80년대를 풍미한 버나드 킹의 져지. 은퇴선수들의 져지만을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미첼엔네스사의  제품으로 소비자가가 무려 200불 이상을 호가한다.


수집 마니아들의 효자 품목 ‘NBA 져지’

유니폼은 패션 아이템의 기능을 탈피하여, 이제는 마니아들 사이에서 고급 수집품목으로 각광받고 있다. 좋아하는 선수만 모으는 팬부터 응원하는 팀의 선수들을 모으는 수집가까지 취향도 각양각색이다.

일부 수집가들은 전문가 못지않은 식견을 자랑하며 입문에서 이미테이션 판별까지 도우미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이중에서도 네이버 카페 ‘져지매니아’는 군계일학의 커뮤니티로 인정받는 공간이다. 가입절차가 다소 까다롭지만 목마른 자가 우물을 찾는 법이니 정회원이 되었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다.

2004년 개설된 져지매니아(www.naver.com/jersey)는 그간 수집가와 마니아들의 허브역할을 담당하며 회원들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아왔다. 정보공유 외에도 물물교환을 목적으로 한 서브카페가 엄격하게 운영하고 있어 유니폼 커뮤니티의 ‘본좌‘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카페 스탭으로 종횡무진 활약 중인 신혜지씨를 만나 져지 속 이야기를 들어보자.

Q_ 보기 드문 여성 수집가인데, 특별한 계기가 있는지?
A_ 중학교 때 알렌 아이버슨의 실착(실제착용) 유니폼을 선물 받으며 매력에 빠져들었다. 평소 힙합문화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낯설지가 않았다. 초보였기 때문에 당시에는 집에서 험하게 입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최상급인 ‘어센틱’ 제품이더라(웃음).

Q_ 소장하고 있는 콜렉션이 정말 어마어마하다. 특별한 수집 노하우가 있다면?
A_ 중, 고등학생이었기 때문에 집에서 받는 용돈을 모아서 차근차근 수집해왔다. 많은 비용을 들여 무리하게 구입을 한다면 수집본연의 즐거움을 상실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조급함을 버린다면 어느 새 자신만의 멋진 콜렉션을 볼 수 있을 것이다.

Q_ 트레이딩 카드나 농구화 등 수집할 수 있는 용품의 종류는 많다. 왜 하필 져지인가?
A_ NBA는 꿈의 무대다. 팬이라면 한 번쯤 나도 저 코트에 설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라는 상상을 펼쳐봤을 것이다. 져지는 이러한 욕구를 대리만족 시켜줄 수 있는 훌륭한 아이템이다. 조던의 유니폼을 입는다고 조던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잠시라도 그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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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_ 저렴한 값의 중국산 이미테이션 제품을 구별할 수 있는 노하우가 있는가?
A_ 과거에는 정품과 구분되는 특징이 비교적 뚜렸했지만, 점차 그 정교함이 더해지고 있다. 싼 가격에 현혹되지 말고 베테랑 수집가들의 조언을 듣는 신중함이 필요하다. 기본적으로 바느질의 차이나 브랜드 탭의 위치나 디자인 위치를 꼼꼼이 따져보는 것도 중요하다.

Q_ 져지매니아는 두 개의 카페로 운영되고 있는데 어떠한 차이를 두고 운영되는가?
A_ 보다 체계적인 관리를 위해 매매장터 메뉴를 독립시켰다. 현금이 오고가는 만큼 엄격한 관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여서 장터카페의 분위기가 딱딱하다는 인식이 있는 것 같다.

거래상에 발생하는 문제들을 카페스탭들의 철저한 사전관리로 방지하고자함이니 운영진들의 고충도 조금만 이해해주었으면 한다. 또한 무작정 쇼핑만 할 것이 아니라 본 카페에서 적극적인 커뮤니티 활동을 통해 양질의 정보도 얻고 사람간의 소통이 선행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수집, 그 이상의 즐거움



올해는 NBA 유니폼뿐 아니라 KBL 유니폼도 보다 쉽게 접할 수 있을 전망이다. NBA의 공식 스폰서를 담당하고 있는 아디다스가 이번 2009-10시즌부터 판매용 KBL 유니폼 제작에 두 팔을 걷어 올렸기 때문이다.

KBL은 그간 구단마다 독자적인 제작 및 판매를 진행해왔기 때문에 대중에 어필하기에는 어느 정도의 한계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당장에 큰 수익을 기대하기는 힘들겠지만 붐 조성에 긍정적인 여파를 미칠 것은 분명하다. 유니폼이 갖고 있는 또 하나의 나비효과다.

유니폼은 선수들의 땀이 깃든 신성한 제복이다. 아마추어 선수들에겐 프로리그 유니폼이 목적이자 꿈이요, 프로선수들은 국가대표 유니폼이 평생의 영광이다. 그 본질은 시대가 흘러도 변함이 없지만, 이제는 선수와 구단, 팬이 모두 함께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인 법이다.

고이 모셔둔 유니폼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과감하게 입어보자. 그리고 농구장으로 향하라. 목이 터져라 응원하고 내가 흘린 땀으로 유니폼을 적실 때의 희열은 유니폼의 가치를 보다 높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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