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직은 침착하게 엔트리 패스를 압둘자바에게 투입했고, 압둘자바는 잠깐 불완전한 드리블을 하다 이내 몸의 균형을 잡으며 회심의 스카이 훅을 이튼의 긴 팔 너머로 던졌습니다.
골인~
31,421번째 득점.
호언장담했던 체임벌린의 예언이 38세의 압둘자바에 의해 보기좋게 무너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너무나도 역사적인 순간이었어서, 주심은 작전타임도 없었는데 경기를 중단시켜 줬습니다.
온 유타 홈관중들이 압둘자바에게 기립박수를 보내줬고, 그에게 제일 먼저 달려가 포옹을 해준 선수는 역시나 매직 존슨이었습니다.
경기는 15분 동안이나 중단됐고, 경기 중에 기자들이 계속해서 압둘자바를 인터뷰하는 진풍경이 벌어졌습니다. 장내 아나운서는 체육관이 떠나가도록 압둘자바의 위대함과 그가 세운 깨지기 힘든 기록들을 관중들에게 소개해 줬습니다.
이와 연관된 또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이 기록경신에 대한 공식 축하파티는 레이커스가 홈으로 돌아온 이틀 후에 레이커스 홈구장인 포럼 경기장에서 성대하게 치뤄졌는데, 이 자리에 윌트 체임벌린이 직접 나와 압둘자바를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훈훈한 장면을 연출했다는 것이죠.
사실 체임벌린은 레이커스의 대 유타전에 공식적으로 초청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본인의 피치 못 할 사정으로 인해 자신의 기록이 깨지는 순간을 직접 목격하지는 못 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경기장에 오지 않았다는 무성한 신문보도들이 이어지기도 했지만, 체임벌린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레이커스 홈구장에서 압둘자바와 뜨거운 포옹을 하며 그의 위대함을 칭송해 주었습니다.
매직 존슨과 압둘자바 간의 보기 드문 찰떡 궁합, 그들이 만들어낸 깨지기 힘든 기록의 경신, 그리고 자신의 기록을 깬 선수를 뜨겁게 포옹해주며 진심으로 축하해준 체임벌린...
이들이 보여준 사나이들의 훈훈함과 뜨거운 우정이 추운 연말연시를 조금이나마 따뜻하게 해주었으면 합니다.
NBA는 농구라는 스포츠에 있어 꿈의 리그라고 할 수 있다. 그 꿈의 리그에서 뛰기 위해서는 반드시 드래프트라는 시험을 통과해야만 한다.
1988년의 드래프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의 꿈을 좇아 NBA의 문을 두드렸다. 당시 가장 먼저 호명되며 1번 픽의 영광을 차지했던 대니 매닝을 필두로 미치 리치몬드, 댄 멀리 등 미래에 수많은 팬들을 열광시키게 될 스타들이 NBA 리거로써의 첫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훗날 스스로가 마이클 조던의 라이벌임을 자처했던 오늘의 주인공은 그 누구에게도 선택받지 못한 채 드래프트에서 낙방하고 만다. 대학의 마지막 시즌을 앞두고 오클라호마 주립대학으로 전학을 오기 전까지 NCAA가 아닌 디비전 1리그에서 활약하던 그에게 눈길을 줄만한 팀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니, 그보다 애초에 그의 꿈도 농구 선수가 아니었다. 농구 보다는 미식축구 선수가 되기를 희망했던 그였지만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를 다니기 위해 농구 선수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도 SAT 성적이 좋지 않았던 탓에 NCAA에 소속된 학교가 아닌 2년 제 커뮤니티 칼리지에 진학하게 됐고, 무려 4번의 전학 끝에 오클라호마 주립대까지 오게 된 그였다.
너무나 먼 길을 돌아온 만큼 NBA 스카우터들에게 자신의 매력을 충분히 알릴 시간이 부족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드래프트에서 선택받지 못한 그는 수많은 서머 캠프들을 통해 NBA 데뷔를 시도했다. 무던한 노력 끝에 결국 1988-89 시즌의 개막을 앞두고 골든 스테이트에 초청 선수로 합류하는데 성공했지만 어이없게도 허리 부상을 당하며 퇴출당하게 된 그는 이 후 CBA리그를 전전하며 때를 기다렸다. NBA 무대를 누비게 될 그 날을 말이다.
CBA 출신 최고의 슈퍼스타로 기억되고 있는 오늘의 주인공. 훗날 마이클 조던의 라이벌을 자처했으며 패트릭 유잉과 함께 1990년대 뉴욕 농구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오늘의 주인공은 바로 존 스탁스다.
1. 1990년대 뉴욕의 대표 가드 등장
CBA에서 숨을 고르며 때를 기다리던 스탁스는 1990년 10월, 뉴욕과 임시 계약을 맺는데 성공한다. 임시 계약 선수에서 뉴욕의 정식 선수가 될 수 있었던 것에는 재미있는 뒷이야기가 있다. 스탁스는 뉴욕과의 임시 계약 직후 가졌던 연습 경기에서 부상을 당하게 됐는데, 연습이나 경기 중 부상을 입은 선수는 최소한 그 해 12월이 끝날 때까지 방출할 수 없다는 선수보호 조항 덕분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스탁스를 12월까지 남겨둘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12월까지 연명하는데 성공한 스탁스가 부상에서 완쾌될 무렵, 이번에는 절묘하게도 당시 뉴욕의 주전 슈팅 가드였던 제럴드 윌킨스가 부상을 당하게 됐다. 딱히 윌킨스의 빈자리를 채워줄 대안이 없었던 뉴욕은 스탁스를 주전 슈팅 가드로 기용하는 것 말고는 별 다른 도리가 없었다. 1990년대 뉴욕을 대표하는 가드로 성장할 스탁스라는 그렇게 수면 위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1990년대 NBA 최고의 라이벌리는 역시 시카고와 뉴욕이었다. 두 팀의 대결은 언제나 전쟁 같은 치열함 속에 펼쳐졌고, 모든 선수들은 자신의 능력을 120% 이끌어내어 경기에 임했다. 마치 아이스하키를 보는듯한 보디 체킹이 이어졌고, 심판의 눈을 피해 날아들던 파울들, 지옥과도 같았던 골밑. 하지만 최후의 승리는 언제나 시카고의 몫이었다. 그들에게는 조던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독 뉴욕을 방문할 때면 평소에 보여주던 것 이상의 엄청난 활약을 쏟아내던 조던은 뉴욕 팬들에게 악몽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그런 조던을 막아서던 것이 바로 스탁스였다. 당대의 명 센터 유잉이 뉴욕의 심장이었다고는 하나 포지션의 특성상 시카고의 조던, 스카티 피펜 콤비와 직접 맞붙게 되는 장면은 그리 많지 않았다.
실질적으로 그들과 맞대결을 펼치는 일은 스탁스의 일이었다. 사실, 당시의 조던을 막아설 수 있는 선수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엄청난 위용을 뽐내던 선수였다. 하지만 그런 조던을 향해 끝없이 도전하고 달려들며 지지 않으려 기를 썼던 선수들이 몇 몇 있었는데 그 중 최고는 단연 스탁스였다. 너무나 처절한 과정을 거치며 NBA 리거로 우뚝 선 스탁스는 더 이상 누구에게도 자신의 자리를 빼앗기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최고의 재능을 타고 났다는 조던을 상대로 끝까지 물러서지 않는 모습을 보이며 자신의 라이벌은 조던뿐이라 거침없이 말할 수 있었던 사나이는 스탁스 뿐이었다.
스탁스는 그를 전형적인 3점 슈터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 만큼 위력적인 외곽슛 능력을 가졌으며, 상황에 따라 백업 1번으로도 출장이 가능했던 볼 핸들링과 리딩 능력, 조던과의 맨투맨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수비력은 물론이고 멋진 돌파에 이은 슬램덩크로 하이라이트를 장식하기도 했던 선수였다. 다만 조금은 지나치다 싶은 느낌의 기복과, 슛을 아낄 줄 모르는 난사 기질을 지적받기도 했지만 승리하겠노라는 투지와 볼을 향한 열정 만큼은 리그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 선수였다.
전성기의 스탁스를 보며 당시의 농구 관계자들은 "스탁스가 기복만 없다만 당장이라도 드림팀 멤버로 선발될 것이다" 라고 평가하곤 했다. 이처럼 터프한 파이터 정신과 도전자 마인드로 똘똘 뭉친 스탁스는 질식 수비를 앞세워 동부 컨퍼런스의 강자로 군림하던 뉴욕의 팀 컬러에 꼭 들어맞는 선수였고, 팀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던 유잉과 더불어 뉴욕에서 가장 사랑받는 남자로 성장하게 된다.
2.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NBA 파이널
조던과 시카고의 벽에 막혀 번번이 좌절을 맛보던 뉴욕에게도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1993-94 시즌, 조던이 은퇴를 선언한 것이다. 당시 스탁스는 무릎과 허리에 부상을 입어 59경기에 출장하는데 그쳤지만 시즌 평균 19득점을 기록하며 맹활약했다. 많은 경기에 결장했음에도 총 217개의 3점 슛을 폭발시켰고 그 결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올스타 게임에 출장하는데 성공한다. 조던이 없는 동부 컨퍼런스에서 뉴욕을 막을 수 있는 팀은 없었다. 뉴욕은 플레이오프 무대에서 뉴저지, 시카고, 인디애나를 차례로 물리치며 꿈에 그리던 NBA 파이널 진출에 성공했다.
파이널 무대에서 뉴욕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하킴 올라주원을 앞세운 휴스턴이었다. 1994년의 파이널은 유잉과 올라주원의 센터 대결만큼이나, 불꽃같았던 양 팀의 슈팅 가드인 스탁스와 버논 맥스웰의 대결로도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파이널 시리즈에서의 스탁스는 이제껏 봐왔던 스탁스가 아닌 듯 했다. 유잉과 올라주원이 골밑에서 전쟁을 펼치고 있는 동안 스탁스가 내외곽을 오가며 득점포를 터뜨려줘야 했지만 그는 시리즈 내내 부진했다.
특히 뉴욕이 3승 2패로 앞서고 있었던 6차전에서 뉴욕에게 우승 트로피를 가져다 줄 수 있었던 마지막 슛을 올라주원에게 막히며 경기를 내줬고, 최후의 7차전에서는 모두 18개의 슛을 던져 단 2개만을 성공시키며 극도로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결국 최종전까지 가는 혈투 끝에 우승 트로피는 휴스턴의 차지가 되어 버리고, 뉴욕 팬들은 커다란 좌절에 빠졌다. 스탁스 역시 부진했던 자신의 모습에 실망스러움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이후 뉴욕은 결단을 내린다. 조던이 없는 NBA에서도 우승을 할 수 없다면 팀을 재편하기로 한 것이다. 결국 1995년 팻 라일리 감독이 마이애미로 떠나게 되고 돈 넬슨이 새로운 감독으로 부임하게 된다. 거기에 디트로이트에서 젊은 스타로 급부상 중이었던 앨런 휴스턴의 영입은 스탁스의 자리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결국 새로운 감독인 넬슨은 주전 가드로 스탁스가 아닌 휴스턴을 선택했다.
하지만 스탁스의 뉴욕에 대한 사랑과 승리에 대한 열정은 변함이 없었다. 벤치 멤버로 경기에 나설 지언정 팀의 패배를 바라볼 수 없었던 스탁스는 이 후 1996-97 시즌에 올 해의 식스맨으로 선정되며 제2의 전성기를 열었다. 하지만 1998년의 여름, 끝내 뉴욕은 골든 스테이트의 라트렐 스프리웰과 스탁스를 트레이드 하고 말았다. 영원한 뉴요커이고 싶었던 스탁스는 너무나 허무하게 리빌딩의 폭풍에 휩쓸려 뉴욕의 유니폼을 벗게 된다. 이후 스프리웰의 영입은 굉장한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휴스턴-스프리웰로 이어지는 트윈 테러를 결성하게 되고 훗날 "8번 시드의 기적"을 일으키며 8번 시드 최초의 파이널 진출이라는 역사적인 업적을 이루게 된다.
3. 뉴욕과의 이별, 쓸쓸한 은퇴
그렇게 뉴욕이 잘 나가는 동안 스탁스에게는 시련의 계절이 찾아왔다. 뉴욕의 유니폼을 벗은 스탁스는 더 이상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이어지는 트레이드를 통해 일생의 앙숙 관계였던 시카고 유니폼을 입게 되기도 했는데 팀의 일원이 되었음에도 시카고에 대한 반감을 숨기지 않았으며 시카고 팬들조차 스탁스를 "뉴욕의 스탁스"로 여기는 듯 야유를 쏟아냈다. 스탁스 본인조차 시카고에서 뛰기를 원치 않는다며 뉴욕으로의 복귀를 타진했지만 뉴욕은 끝내 그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이 후 2000-01 시즌, 유타로 둥지를 옮긴 뒤 칼 말론, 존 스탁턴과 함께 활약하기도 했지만 2002년에 쓸쓸히 은퇴를 선언하며 13시즌에 걸친 커리어를 마감했다.
1990년대의 뉴욕에 존 스탁스만큼 어울리는 선수는 없었다. 그 누구에게도 패배 당하기를 원치 않았으며, 그 어떤 강한 상대라도 두려움 없이 정면으로 맞서 싸우던 선수였다. 비록 4번의 편입을 거쳐 대학을 졸업했고, CBA를 전전하며 '비주류'의 삶을 살았던 스탁스였지만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했기에 더욱 전투적이고 강력한 파이터 마인드를 가질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벌써 수년째 부진에 빠져있는 뉴욕을 보고 있노라면 지금 뉴욕의 라커룸에는 누구도 아닌 스탁스와 같은 리더가 필요한 것 같다. 단 한 번의 패배조차 용납할 수 없을 만큼 불타는 경쟁심을 가진 그런 선수 말이다.
타고난 재능의 차이를 뜨거운 열정으로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오늘의 주인공, 존 스탁스였다.
르브론 제임스는 오늘날 NBA에서 가장 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고 있는 선수들 중 하나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뉴스의 주요 소재가 되고 있고 매년 르브론에 대한 책들이 쏟아져나온다. 고등학교 시절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More Than A Game'은 올가을 각종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본 칼럼에서 소개될 'LeBron James: The Making of an MVP'는 그동안 발표된 르브론의 전기들과 큰 차이를 보인다. 기존 전기들이 전기 전문 작가들의 헐리우드식 영웅주의에 따라 르브론의 일생을 수박 겉핥기 식으로 훑어냈다면, 'The Making of an MVP'는 르브론의 고향인 오하이오 주 스포츠 기자들이 르브론의 어린 시절부터 지켜본 그대로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공동 저자인 테리 플루토와 브라이언 윈드호스트는 클리블랜드 지역일간지이자 이 책의 출판사인 '플레인 딜러'에서 스포츠 전문기자로 활약하고 있다. 플루토는 지난 30여 년간 클리블랜드 지역의 스포츠 뉴스를 다루며 다수의 기자상을 받았고, 윈드호스트는 르브론의 고등학교 선배로 오직 르브론에 대한 전문기사만으로 25세라는 나이에 미국 최연소 프로팀 전국 수행 기자가 됐다. 르브론의 고등학교 시절 경기들을 직접 취재한 바 있는 이들은 르브론의 출생부터 2008-2009 시즌 MVP 수상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뛰어에서는 'The Making of an MVP'의 내용 중 르브론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몇 가지를 요약해 소개한다.
르브론의 숨겨진 가족 워커 가
르브론은 16살의 미혼모였던 글로리아 제임스에게서 태어났다. 글로리아는 미용사였던 홀어머니 밑에서 르브론이 세 살때까지 함께 살았지만, 어머니가 심장마비로 사망한 뒤로는 르브론과 함께 힘든 삶을 살아야 했다. 5년 동안 10번이나 집을 옮겼고, 집은 옮길 때마다 작아지고 나빠져갔다. 이사할 때마다 학교를 옮겼으며 그나마도 결석하는 일이 잦았던 르브론도 제대로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 어린 나이에 아들을 키워야 하는 부담으로 히스테리를 부리는 어머니와 함께 오전 늦게까지 TV만 보던 르브론은 생활의 안정도, 본보기가 될 어른도, 삶의 비전도 갖지 못한 채 자라고 있었다.
그런 르브론이 초등학교 풋볼팀에서 경기하는 모습이 풋볼팀 감독인 프랭키 워커의 눈에 띄었다. 워커는 이 비쩍 마른 소년에게 안정적인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글로리아에게 자신이 르브론을 맡겠다고 제안했다. 아들을 보고 싶으면 아무 때나 찾아와도 좋으며 일자리와 거처를 마련해주겠다는 조건이었다.
르브론은 초등학교 5학년부터 프랭키 워커와 부인 팸 워커, 그리고 세 명의 아이들과 함께 살게 됐다. 워커 부부는 르브론에게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하기, 학교에 제 시간에 가기, 옷 단정히 입기 등을 가르쳤고, 르브론은 워커 집안 3남매와 함께 집안일을 하며 새로운 생활에 적응해갔다. 정에 굶주렸던 르브론은 워커 부부의 칭찬을 받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려 했고, 처음으로 가정의 따뜻함을 맛볼 수 있었다. 지역 명사이던 워커 집안에서 처음으로 공부의 필요성을 느끼며 1년 후에는 개근상과 전과목 B 이상을 받는 모범생이 됐다.
르브론은 '부모님이 항상 주위에 있고 형과 누나가 있는 일상생활은 믿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며 그 경험이 자신을 슈퍼스타로 이끌었고 현재 자신의 태도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르브론은 프로 입단 후 동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고 새로 입단한 선수들을 편하게 해주려 노력하는 자세로 NBA에서 가장 친밀한 팀 문화를 이끌고 있는데, 정에 굶주렸던 어린 시절 경험이 큰 작용을 했다는 것이다.
군기반장 르브론
애크런 시에 위치한 가톨릭 고등학교인 세인트 빈센트-세인트 메리(SVSM)에 진학한 르브론은 사람들의 사랑과 가정의 안정을 바라는 소년으로 성장해있었다. 르브론은 학교 도서관 컴퓨터로 자신의 이름을 검색하곤 했는데, 2학년때 19건에 불과했던 검색 결과는 졸업반 때는 수만건으로 늘어났다.
학교 농구팀이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수업에 자주 빠져야 했지만 르브론은 절대 숙제를 거르지 않는 학생이었다. 선생님에게 칭찬받고 친구들에게 모범생으로 기억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르브론의 은사 중 한 명인 도서관 관리인 바버라 우드에 따르면, 르브론은 매일 아침 6시 30분에 학교 도서관에 와서 공부하고 방과후 농구 훈련을 하기 전에도 도서관에서 숙제를 했다. 르브론은 쉬는 시간마다 우드의 책상에 걸터앉아 잡담을 나누는 것을 즐기곤 했다
르브론은 자신이 좋아하는 선생님의 수업시간에는 스스로 열심히 수업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선생님이 가르치는 것을 도와주려 했다. 르브론이 가장 좋아했던 베스 하몬의 영어 시간에는 항상 큰 소리로 책을 읽고, 수업에 열심히 참여하지 않는 친구들에게 주의를 주기도 했다. 언젠가 르브론을 야단친 하몬 선생님이 맹장염으로 몇 주를 결근한 뒤 돌아오자, 다시는 선생님을 잃지 않겠다는 듯 수업의 모든 과정을 도우려 했다. 난폭한 학생 두어 명이 하몬을 위협했을 때는 르브론이 이들을 제압하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정에 굶주렸던 르브론은 학교를 워커 씨 집안과 같은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고등학교때 이미 슈퍼스타가 된 르브론은 해마다 중요한 상을 휩쓸었지만 트로피를 들고 집에 가도 축하해줄 가족이 없었다. 어머니인 글로리아는 돈을 버느라 항상 집을 비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르브론은 학교를 돌아다니며 트로피를 자랑하곤 했다. 한 집의 자녀가 받은 상이 그 집 전체의 기쁨이듯이 자신의 수상으로 학교 전체가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NBA 직행이 현실화되고 부와 명성이 눈앞에 있었지만 르브론은 긴장을 풀지 않았다. 르브론은 마지막 학기까지 평점 3.0 이상 학생에게 주는 'Honor Roll'을 받았고 다른 친구들의 공부를 방해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방과 후에는 하몬 선생님의 사무실에 캔디를 한 움큼 안고 들러 성적표 처리를 도와주기도 했다. NBA에서 발표한 드래프트 참가자 공동 인터뷰 날짜가 학교 졸업식과 겹치자 르브론은 졸업식에 참석하겠다고 선언했다. NBA보다 그동안 가족과도 같았던 선생님, 친구들과의 졸업식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르브론은 세계적인 슈퍼스타가 된 지금도 이따금 혼자서 학교를 찾는다. 고등학교 시절과 똑같이 도서관을 찾아 바버라 우드의 책상에 걸터앉고 베스 하몬의 방에 캔디를 가져간다. SVSM 고등학교는 르브론의 '마음의 고향'인 것이다.
신인 시절 왕따를 당하다
르브론이 2003년 드래프트 1순위로 지명돼 고향팀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로 향했을 때, 클리블랜드는 리그 최악의 팀이었다. 지난 5년간 감독을 4번이나 갈아치웠고 그동안 승률 50% 이상이나 플레이오프 진출은 꿈도 꾸지 못했다. NBA 선수 중 클리블랜드에서 뛰고 싶거나 클리블랜드에 남고 싶어하는 선수는 아무도 없을 정도로 외면받고 있었다.
선수들의 정신상태도 엉망이었다. 2002-2003시즌 팀의 간판으로 내세웠던 대리어스 마일스와 리키 데이비스는 시즌 첫 기자회견장에 각각 '늦잠 자서' '클리블랜드에 없어서'라는 이유로 무단 결석했다. 팀의 기둥으로 키우려던 지드루너스 일가우스카스는 부상에서 막 회복한 상태였고 대부분의 선수들이 패배의식에 빠져있었다. 시즌 17승 65패에 그치며 1순위 지명권을 '획득'한 것도 당연했다.
이런 상황에서 NBA 역사상 최고의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입단한 르브론은 몇몇 선배들의 질시를 한몸에 받아야 했다. 그들은 팀 승리보다는 올해 좋은 활약을 펼쳐 내년에 다른 팀과 좋은 계약을 맺기만을 바랐기 때문에 자신들이 활약할 기회를 빼앗아간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들은 훈련 첫날부터 겨우 18세에 불과한 르브론에게 노골적인 적의를 보이며 대화를 거부해버렸다. 고등학교까지 자신이 속한 팀이 가족이란 생각으로 농구를 해온 르브론은 농구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외톨이가 되었다.
사실 선배들의 불만에는 어느 정도 근거가 있었다. 르브론은 고등학교때부터 프로 선수들을 제치고 지역 최고 스타 자리를 지켜왔고 선수들은 홈 경기에서 '르브론을 위해(1순위 지명권을 얻으려면) 져라!'라는 응원(?)을 들으며 뛰어왔던 것이다. 당시 르브론은 나이키로부터 이미 1억달러에 가까운 돈을 받기로 결정되어있었으며 18세의 나이에 '킹'이라 불리고 있었다. 르브론을 우쭐한 꼬마라고 생각하는 것도 일리가 있었다.
짐 팩슨 단장은 르브론을 팀 승리의 중심으로 키워내려면 르브론과 나머지 선수들 모두를 다잡을 수 있는 강력한 카리스마가 필요하다고 판단, 얼마전 뉴올리언즈 호네츠 감독직을 사임한 폴 사일러스를 새 감독으로 임명했다. 선수시절부터 터프가이로 유명했던 사일러스는 선수들에게 반론을 허락하지 않을 정도의 엄격한 카리스마로 유명한 감독이었다. 팩슨은 사일러스에게 르브론의 인성 교육과 팀 분위기 쇄신을 명령했다.
사일러스는 곧바로 '르브론 길들이기' 작업에 착수했다. 기자들 앞에서 르브론에 대한 칭찬을 최대한 삼가며 엄격한 개인지도에 들어갔다. 훈련이 끝난 후에도 '나쁜 취미'에 빠져있던 몇몇 팀 선배들과 어울리지 못하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특별대우는커녕 르브론을 훨씬 혹독하게 몰아붙이는 사일러스 앞에서는 그동안 르브론에게 불평을 쏟아내던 선배들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사일러스가 르브론 왕따를 해결하기 위해 제시한 또다른 방법은 르브론을 포인트가드로 기용하는 것이었다. 팀에 제대로 된 포인트가드가 없었기 때문에 내려진 결정이기도 했다. 덕분에 르브론은 생소한 포지션인 포인트가드 역할에 적응해야 했지만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많은 득점을 올리고 싶어 르브론을 왕따시켰던 선수들이 이제 르브론의 패스를 받아야 득점을 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들은 하나둘 르브론에게 손을 내밀기 시작했고, 이들의 서슬에 질려 르브론을 가까이 하지 못했던 다른 선수들도 르브론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르브론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리키 데이비스같은 선수들은 시즌중 트레이드됐다.
농구 인생 처음으로 외로움을 느꼈던 18세의 신인 르브론은 사일러스의 지도력 아래 빠른 속도로 자리잡아갔으며, 덴버 너게츠의 고교 시절 라이벌 카멜로 앤써니를 제치고 신인왕에 선정됐다.
언론을 상대하다
지난 2009년 플레이오프에서 올랜도 매직에 패배한 후 악수와 기자회견을 거부해 비난을 받은 르브론이지만 평소에는 NBA에서 언론을 가장 잘 다루는 선수로 유명하다. 24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노련한 언론 대응법을 익힐 수 있었던 이유는 르브론이 고등학교 시절부터 언론과 빚어온 크고작은 갈등에서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하이오 지역 유망주에 불과했던 르브론이 전국적인 스타로 발돋움한 계기는 고등학교 2학년때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SI) 지의 표지모델로 선정된 것이었다. '지금 당장 NBA 드래프트에 나와도 1순위로 지명받을 수 있다'는 전문가의 극찬과 함께 '선택받은 자'라는 별명을 얻게 된 사건이었다. 르브론이 유명해지자 각지에서 인터뷰 요청이 밀려들었고, 학교 선생님과 농구팀 감독은 르브론을 앉혀놓고 기자들의 질문에 공손하게 대답하는 법을 가르쳤다. 어려서부터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것을 좋아했던 르브론은 인터뷰를 즐겼고 사람들이 우편물로 사인을 요청해도 오히려 기뻐하며 모두 들어줬다.
하지만 르브론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의 쓴맛을 봐야 했다. 르브론에게 사인을 받아낸 몇몇 어른들이 인터넷에 사인을 팔기 시작했고 르브론이 이를 알아챈 것이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 가족을 부양하는 문제를 일찍부터 고민하고 있던 르브론의 눈에 자기 이름을 팔아 엉뚱한 곳에서 이익을 가로채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큰 충격이었다. 은사 바버라 우드 앞에서 인터넷 화면을 가리키며 울부짖던 르브론은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고, 카메라 앞에서 거친 행동을 일삼기 시작했다.
전국 언론과의 불화도 겪었다. 졸업반을 맞은 르브론이 농구계 최고의 화제가 되자 미국 최고의 스포츠 언론사 중 하나인 ESPN이 SVSM 고등학교의 경기를 생중계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르브론과 학교측은 별 생각 없이 승락했지만 곧 크게 당황해야 했다. 중계진이 경기 직전 라커룸에 허가없이 들어가 집중을 방해했고 경기전 분석 시간에는 '고등학교가 중계권료를 벌기 위해 학생을 착취한다'는 말이 방송됐던 것이다. ESPN측에서 요청한 대로 해줬을 뿐인 르브론과 학교측으로써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이었다. 르브론의 어머니 글로리아는 NBA 입성을 앞두고 있던 아들이 받을 부담을 염려해 공개적으로 중계를 반대하기도 했다. 결국 학교는 ESPN의 다음 경기 중계 요청을 거부해야 했다.
ESPN은 전국 언론의 잔인함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글로리아의 반대로 중계가 무산됐다고 판단하자 곧바로 글로리아의 사생활을 문제삼기 시작한 것이다. 어려운 상황에서 아들을 키워야 했던 글로리아는 몇 가지 사소한 사건에 연루되어있었다. ESPN은 이를 근거로 글로리아가 슈퍼스타의 어머니로써 자격이 없다고 공격했으며, 나아가 르브론의 인성마저 폄하했다. 전국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ESPN이 연일 르브론을 공격하자 르브론을 바라보는 언론의 시선이 갑자기 싸늘해졌고, 학교측은 한동안 르브론의 언론 노출을 금지해야 했다.
르브론이 클리블랜드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한 후에도 부담은 사라지지 않았다. 당시 클리블랜드는 3년 동안 전국 중계를 한 번도 타지 못하며 관중 동원 꼴찌를 달리던 최악의 비인기 구단이었다. 매달 백만 달러에 가까운 손해를 보고 있던 클리블랜드에게 르브론은 구세주와도 같은 존재였다. 구단은 르브론을 언론에 가능한 모든 방법을 써서 노출시키려 했고, 르브론은 프로 첫 경기를 시작하기 전부터 유례 없는 플래시 세례에 시달려야 했다. 시즌이 시작되자 그때까지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경기일마다 3회 인터뷰'가 기다리고 있었다. 18세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짐이었다.
고등학교까지 좋은 스승들에게 교육받은 인성과 고향팀에 대한 책임감을 동시에 지니고 있던 르브론은 한동안 묵묵히 임무를 수행했다. 하지만 가끔은 피로를 못이겨 폭발하기도 했다. 크리스마스 경기에서 올랜도를 상대하게 된 르브론은 당대 최고 스타 트레이시 맥그래디를 상대로 선전했지만 팀은 연장 끝에 패하고 말았다. 기분이 상한 르브론은 ABC 방송과 가지기로 돼있던 인터뷰를 거절했다. 그 인터뷰는 다음 경기 직전 전국방송인 ABC 전파를 타고 중계될 예정이었다. ABC는 NBA와 중계권료 협상을 맺은지 불과 1년밖에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사색이 된 구단 관계자가 뛰어내려와 르브론을 설득했지만 르브론은 요지부동이었다.
르브론은 이와 같이 언론과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이른 나이에 겪은 어려움은 르브론에게 나이에 걸맞지 않은 언론 대처 능력을 심어줬다. 르브론은 자신의 매니지먼트 회사인 LRMR을 설립해 죽마고우들을 경영자로 앉혔고 홍보 전문가의 도움을 받기 시작했다. 오프라 윈프리 쇼를 비롯해 미국 유수의 토크쇼에 출연해 노련한 입담을 과시했으며 유명 시사 프로그램 '60분'에서는 스티브 크로프트 기자를 상대로 인터뷰의 정석을 보이기도 했다. GQ 등 남성 패션지에도 모습을 드러낸 르브론은 2008년 보그 지 116년 역사상 세 번째, 운동선수 중에는 처음으로 남자 표지모델로 발탁되기도 했다.
아니, 있었다 라고 하는게 더 좋은 표현이겠다. 그는 이미 NBA에서 더이상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도 그가 NBA에서 뛰고 있는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건 왜일까. 아마 그만큼 그는 특별했기 때문이 아닐까.
2000년대 NBA 팬이라면 프랜시스의 화려한 전성기를 기억 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그 위치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아는 이는 드물다. 한 팀의 프랜차이즈로 영원히 남을 것만 같았던 특별한 재능, 바로 2000년대 공격형 포인트가드를 대표했던 스티브 프랜시스의 농구인생을 재조명 해보고자 한다.
불쌍한 청개구리
프랜시스는 1977년 2월 21일 워싱턴 DC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 프랜시스의 친아버지는 프랜시스가 2살때 가족을 버리고 떠났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어머니인 브렌다 윌슨이 혼자 한 가정을 책임져야 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증오했던 프랜시스에게 어머니란 존재는 소중함 그 자체였다.
유년시절을 매릴랜드 주의 타코마 파크 시티에서 보낸 프랜시스는 9살부터 농구를 시작했으며, 인근 공원과 소방서의 농구코트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녹록치 못한 가정형편 때문에 9살의 어린 나이에 아르바이트 생활을 시작했지만 농구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그는 외소한 체구를 지닌 말라깽이였다.
천부적인 운동능력이 돋보이기는 했으나, 작은 키 때문에 자유투라인 밖에서의 슛은 항상 에어볼이 되기 일쑤였다고 한다. 작은 키 덕분에 픽업게임마다 포인트가드 외의 포지션은 아예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타 NBA 선수와는 다르게 프랜시스는 정식 농구 경험은 그리 많지 않다. 고등학교 입학 전까지 내내 길거리에서 농구를 했던 프랜시스는 고등학교에 입학하자 마자 농구부를 지망했지만, 나쁜 성적때문에 학교측은 프랜시스의 경기 출전을 불허했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질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며 주기적으로 학교를 무단결석하였고 결국 농구부에서 퇴출되었다.
10학년때 다시 농구부에 입문한 프랜시스는 그의 첫 정식 농구 경험을 하게 된다. 그는 주로 후보로 출전하며 경기경험을 쌓았지만 그 1년이 끝이었다. 당시 문제아였던 프랜시스는 11학년때 나쁜 성적과 더불어 여러번 패싸움에 연루되며 퇴학당했고 결국 여러번 전학을 가야했다. 하지만 그가 가는 학교마다 프랜시스의 농구부 입문을 거부했는데 농구를 사랑했던 프랜시스에게 농구를 할 수 없는 현실은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다.
하지만 더 큰 충격은 프랜시스의 고등학교 졸업반(12학년) 때 찾아왔다.
프랜시스의 어머니 브렌다 윌슨이 암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집안 형편때문에 병원 한번 가보지도 못한 채, 프랜시스를 떠나버린 것이었다. 그것은 가히 큰 충격이었고 졸지에 고아가 된 프랜시스는 그 이후로 농구공을 잡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손에 자란 프랜시스, 아버지를 모른채 어머니만을 보고 살아온 그에게 어머니를 잃은 아픔은 너무나도 컸다. 이후 그는 방황했고, 결국 고등학교를 자퇴했다. 물론, 농구공은 그의 손에 없었다.
프랜시스의 1년이란 정식 농구경험은 팀 전술, 체계적인 훈련, 기본기등을 모두 습득하기에는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었으며 고등학교 자퇴 후 그에게 남은것은 제대로 된 코칭이 아닌 길거리에서 습득한 그만의 스타일이었다.
프랜시스는 결국 NBA 선수들 대부분이 경험했던 ABCD 캠프, AAU 토너먼트, 맥도날드 하이스쿨 올아메리칸 게임등은 고사하고, NCAA 1부리그 대학 팀들의 스카우트도 제의받지 못한 채 고등학교 생활을 마무리 하게된다.
농구를 버릴 수 없었던 청년
모든 영웅들은 한번씩 역경을 딛고 일어선다. 프랜시스 역시 비슷한 유형의 영웅이었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3개월간 방황했던 프랜시스가 다시 농구를 시작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 3개월 동안 프랜시스의 키는 부쩍 커졌다)
프랜시스는 매일 인근 소방서의 농구코트에서 픽업게임을 하며 그의 진가를 발휘했다. 이후 프랜시스는 길거리 농구의 레전드로써 그 유명세를 떨쳤다.
당시 매릴랜드, 버지니아, 워싱턴 DC에서 수많은 길거리 농구선수들이 소방서를 찾아와 프랜시스에게 도전했지만 단 한명도 그를 이긴적은 없다고 한다. 그만큼 길거리 농구에서의 프랜시스는 독보적이었다.
그 와중 프랜시스의 재능을 알아본 매릴랜드 소속 AAU의 감독 루 윌슨은 프랜시스에게 팀 합류를 요청한다. 그는 프랜시스를 직접 찾아와 길거리 농구가 아닌 더 높은 세계로 도전하자고 권유했고, 프랜시스는 다시한번 정식 농구에 도전해보고 싶은 생각에 흔쾌히 승낙했다.
이 결정은 결국 프랜시스의 인생을 바꿔놓게 된다.
루 윌슨의 AAU 팀은 플로리다의 AAU 토너먼트에 참가했는데, 수많은 대학 코칭스탭들 앞에서 프랜시스는 맹활약 하며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경악케 했다. 스카우팅 리포트는 물론, 고등학교 유망주 리스트에도 없던 한 선수가 혼자 상대팀을 초토화 시켰으니 그럴만도 했다. 토너먼트 직후 텍사스에 위치한 샌 자신토(San Jacinto) 쥬니어 칼리지는 프랜시스에게 농구 장학금을 제의했다.
단 한번도 매릴랜드를 떠나본 적이 없던 매릴랜드 토박이 프랜시스는 결국 농구를 하기위해 텍사스로 항했다.
샌 재신토 쥬니어 칼리지 농구부는 NJCCA(전미 대학 농구리그인 NCAA의 하부리그) 에 속해있었다. 프랜시스로써는 첫 대학 농구경험이었지만, 여전히 NJCCA 무대는 그에게는 좁은 세계였다. 프랜시스는 샌 재신토 쥬니어 칼리지를 시즌 36연승에 NJCCA 토너먼트 결승전까지 이끌었다. 비록 샌 재신토 쥬니어 칼리지는 결승전에서 패했지만, 스티브 프랜시스는 대학농구 관계자들의 이목을 끌었다.
샌 재신토에서의 짜릿한 1년을 뒤로하고 스티브 프랜시스는 또다른 NCJAA 소속의 쥬니어 칼리지로의 편입을 결정했다. 프랜시스의 다음 행선지는 매릴랜드 주의 알레거니(Allegany) 쥬니어 칼리지였다. 프랜시스의 전설은 알레거니에서도 계속되었다. 그는 알레거니의 30연승을 이끌었고 이는 알레거니 대학 농구부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 무패 시즌이었다 (시즌 30승 무패) 매릴랜드 주는 프랜시스의 이름으로 들썩거렸고, 결국 그 이름은 매릴랜드 대학의 개리 윌리엄스 감독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결국 개리 윌리엄스 감독은 알레거니 쥬니어 칼리지의 홈 경기를 직접 관전하러 왔고, 그 경기에서 프랜시스는 단 하나의 샷도 놓치지 않는 활약을 펼쳣다. 윌리엄스 감독은 시즌 후 프랜시스에게 농구 장학금을 제의했고 알레거니에서의 1년 후 프랜시스는 매릴랜드 대학의 윌리엄스 사단에 합류하게 된다.
매릴랜드의 돌격대장, 전국구 스타가 되다.
2년간의 NJCCA 생활을 청산하고 드디어 프랜시스는 NCAA(전미 대학 농구리그)라는 더 큰 무대에 설 기회를 얻었다. 때는 바로 1998년.
NJCCA에서 맹활약 했다지만 NCAA 경험이 전무했던 프랜시스의 실력을 과소평가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프랜시스의 가치를 인정받는 데에는 단 10경기만이 필요했다.
등번호 23번의 매릴랜드 주전 슈팅가드 스티브 프랜시스를 중심으로 매릴랜드 대학교는 첫 10경기에서 10연승을 거뒀다. 그중 전미 최고의 팀중 하나였던 스탠퍼드 대학을 상대로 거둔 승리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1998-1999 시즌 매릴랜드는 스티브 프랜시스, 로니 백스터, 후안 딕슨등이 팀의 주축이었다. 시즌이 지날수록 프랜시스의 주가는 상승했고, 매릴랜드 역시 전국구 강호로 거듭났다.
경기당 18점 5어시스트를 기록한 프랜시스는 비록 매릴랜드를 NCAA 전국 토너먼트 (March Madness) 우승으로 이끌지는 못했지만 2nd Team All-American, John Wooden Award / Naismith’s Player of the Year Award 대상 후보에 이름을 올리는등 각종 개인 영예를 휩쓸었다.
**당시 매릴랜드 대학은 16강에서 론 아테스트의 세인트 조셉 대학과 연장까지 가는 사투끝에 석패했다.
명실부상 대학 최고의 선수중 한명으로 인정받은 스티브 프랜시스는 시즌 후 NBA 드래프트에 신청하며 결국 매릴랜드와의 결별을 결정했다. 지난 3년간 3개의 대학이란 험난한 길을 걸어왔던 프랜시스가 마지막에 빛을 보게되는 순간이었다.
프랜시스의 험난한 NBA 입성
1999년 NBA 드래프트의 1순위 지명자 후보는 엘튼 브랜드와 스티브 프랜시스의 양강체제였다. 두명 다 1순위로써 손색이 없었지만, 프랜시스는 특히 1순위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수많은 역경을 딛고 일어섰다는 프라이드도 그 이유중 하나였겠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밴쿠버 그리즐리스에서 뛰기 싫었기 때문이다.
드래프트 전부터 많은 NBA 팀들은 스티브 프랜시스에 관심을 표명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밴쿠버 그리즐리스였다. 당시의 밴쿠버는 리그 최약체 중 하나였고 이미 1998년 포인트 가드 마이크 비비를 지명했던 팀이었다. 게다가 프랜시스의 집이 있는 매릴랜드와의 거리는 어마어마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밴쿠버 그리즐리스에서 뛰기 싫다는 프랜시스의 입장은 확고했다. 드래프트 이전 프랜시스는 언론에 공개적으로 밴쿠버가 자신을 뽑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내용의 인터뷰까지 하며 공개적으로 자신의 심정을 드러냈다.
프랜시스가 얼마나 그리즐리스를 거부했는지는 이 일화를 통해 알 수 있다.
드래프트 이전, 프랜시스는 시카고 불스(1위픽)와 샬럿 호넷츠(3위픽)의 개인 워크아웃에 자발적으로 참여했지만 그리즐리스와는 개인 워크아웃을 가지지 않았다.
당시 그리즐리스의 감독 브라이언 힐과 단장 스튜 잭슨은 프랜시스를 보기위해 직접 매릴랜드로 와야했다. 하지만 프랜시스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거의 모든 슛을 일부러 미스했다고 한다.
프랜시스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리즐리스는 끝내 1999년 NBA 드래프트에서 2순위로 스티브 프랜시스를 지명했다. 프랜시스는 즉각 그리즐리스와의 계약을 거부했고 트레이드를 요청했다. 많은 여론들의 비판이 있었지만 프랜시스는 완고했다.
결국 밴쿠버 그리즐리스는 휴스턴 로켓츠와 올랜도 매직을 포함한 삼각 트레이드를 통해 프랜시스를 휴스턴 로켓츠로 이적시켰다 (밴쿠버, 휴스턴, 올랜도간의 삼각 트레이드는 총 11명의 선수들이 포함되었다).
1999년 드래프트 이후, 프랜시스와 밴쿠버간의 신경전은 꽤나 큰 이슈를 불러일으켰지만 결국 프랜시스는 어렵게나마 휴스턴 로켓츠와 3년 루키계약을 맺으며 NBA에 입성하게 되었다.
겁없는 신인 프랜시스의 화려했던 루키 시즌
트레이닝 캠프때 당시 휴스턴 로켓츠의 루디 톰쟈노비치 감독은 프랜시스를 보자마자 이 말을 건넸다고 한다.
“스티브, 너에게 공을 줄테니, 한번 마음껏 달려봐.”
그리고 프랜시스는 거침없이 달렸다.
상대가 누구던간에 그는 폭발적인 스피드와 극강의 운동능력으로 상대를 농락했다.
특히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있었던 프랜시스는 매 경기 엄청난 플레이로 매일 밤 하일라이트를 장식했다. 어느순간부터 크로스오버와 인 유어 페이스 덩크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있었다.
그는 1999-2000 시즌의 신인왕을 엘튼 브랜드와 공동수상했고, 2000년 NBA 올스타 덩크 콘테스트에서 2위를 기록하며 (1위는 전설적인 덩크 퍼포먼스를 보였던 토론토 랩터스의 빈스 카터) 그의 실력을 입증했다. 또한 그는 당시 NBA 역사상 경기당 15점-5리바운드-5어시스트를 기록한 7번째 신인이었다 (프랜시스의 루키 기록은 경기당 18.1점-5.3리바운드-6.3어시스트)
프랜시스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로켓츠는 시즌 39승 43패를 기록하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비록 하킴 올라주원과 찰스 바클리가 있었지만 그들은 이미 리그를 호령하던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또한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로 트레이드 되었던 스코티 피펜의 공백 역시 컸다. 팀 상황상 프랜시스가 팀의 중심이 될 수 있었지만, 반대로 그를 보좌할 선수들이 그의 절친 커티노 모블리를 제외하면 없다는 것이 팀의 마이너스 요소였다.
2000-2001 시즌의 프랜시스는 소포모어 징크스와는 관계없는 엄청난 활약으로 휴스턴 로켓츠를 시즌 45승 37패로 이끌었다. 비록 팀은 플레이오프 진출에는 여전히 실패했지만, 프랜시스는 경기당 19.9점, 6.9리바운드, 6.5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향상된 경기력을 선보였다.
하지만 로켓츠의 플레이오프 진출은 멀기만 했다.
프랜시스의 세번째 시즌이었던 2001-2002 시즌, 프랜시스는 부상으로 57경기밖에 뛰지 못했으며 경기당 21.6점, 7.0리바운드, 6.4어시스트라는 훌륭한 성적을 남기긴 했지만 팀 성적은 28승 54패로 추락했다. 굴욕적인 팀 성적이었지만 이는 바로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고 만다. 휴스턴은 2002년 NBA 드래프트에서 1순위 지명권리를 얻게되었고, 이는 결국 프랜시스와 야오밍의 만남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Stevie “Franchise”, Ming “Dynasty”와 만나다.
2002년 여름, 1순위 지명권을 얻은 휴스턴 로켓츠는 야오밍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복잡한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CBA(중국 농구협회)와 야오밍의 소속팀 샹하이 샥스가 야오밍의 NBA 진출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CBA와 샹하이 샥스는 야오밍을 보내는 적절한 댓가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현대 축구에서 자주 발생하는 일종의 “이적료”를 원했다).
비록 프리드래프트 캠프 참석과 당시 2순위 지명권을 가지고 있던 시카고 불스와 비공개 워크아웃을 가졌다고는 했지만, 그다지 인상깊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야오밍(당시 야오밍은 NBA 진출이 불확실 함에도 사비를 들여 미국에 입국했고, 입국하자마자 바로 다음날 워크아웃을 가졌기 때문에 자신의 진가를 제대로 발휘 할 수 없었을 것이다)에 대해 스티브 프랜시스도 비관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당시 스티브 프랜시스는 휴스턴의 단장 캐롤 더슨에게 1순위 픽을 트레이드 해서 베테랑 선수를 보강하자고 건의했을만큼 야오밍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야오밍이 휴스턴에 지명되자 그를 가장 먼저 반겼던 이도, 미국생활 적응에 가장 많은 도움을 준 이도 바로 스타 플레이어 스티브 프랜시스였다. 훗날 이 둘은 사이좋게 2003년, 2004년 NBA 올스타전에 나란히 서부지구 선발로 출전하게 된다.
그가 야오밍에 대해 한 이 한마디는 프랜시스의 따뜻한 동료애를 대변한다.
“저는 팀의 프랜차이즈(franchise, 프랜시스의 별명)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야오는 왕조(dynasty)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야오밍의 합류도 로켓츠를 바꾸지는 못했다.
2002-2003 시즌, 프랜시스는 81경기에 출전하며 평균 21점, 6.2리바운드, 6.2어시스트, 1.7스틸을 기록하며 팀을 이끌었지만 결국 로켓츠는 시즌 43승 39패로 다시한번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한편 야오밍은 루키로써 평균 13.5점 8.2리바운드의 나쁘지 않은 시즌을 보냈지만 체력과 몸싸움이 아직 NBA 레벨이 아니라는것이 증명되었다.
문제아 프랜시스 vs 엄격한 밴 건디
2002-2003 시즌 도중 건강문제로 인해 중도 하차 했던 톰쟈노비치 감독은 시즌 직후 방광암이 발견됨에 따라 감독직에서 사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임은 팻 라일리의 후계자이며 전 뉴욕 닉스 감독이었던 제프 밴 건디였다.
밴 건디는 공수 밸런스를 가장 중요시 여겼으며 팻 라일리의 후계자 답게 센터중심의 하프코트 오펜스의 신봉자였다. 수비를 강조하던 그는 팀의 거의 모든 세트 플레이를 직접 지시하는 스타일의 감독이었기에 전술에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 팀의 공격을 해결하던 스티브 프랜시스와는 전혀 궁합이 맞지 않았다.
밴 건디는 예상대로 휴스턴의 시스템을 개편했고 서서히 팀의 중심은 프랜시스에서 야오밍으로 바뀌었다. 프랜시스의 영향력은 여전했지만, 더이상 그는 팀 공격의 선봉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는 프랜시스에게는 너무나 큰 변화였다. 프랜시스의 볼 점유율은 현저히 줄었고, 그의 슈팅 시도횟수 역시 줄었다. 결국 밴건디와 함께 한 2003-2004 시즌의 프랜시스는 전반적으로 스탯이 모두 하락했다. (평균 16.6점, 5.5리바운드, 6.2어시스트)
하지만 프랜시스와 밴 건디 간의 문제는 단 한번도 수면 위로 떠오른 적이 없다. 프랜시스는 새로운 팀 시스템에 적응하기 위해 밴 건디가 주문한 “스타일의 변화”를 위해 노력했으며 밴 건디 역시 프랜시스를 “팀을 위해 희생하는 그가 고맙고 존경스럽다”라는 말로 화답했다. 프로 선수와 감독으로써 프랜시스와 밴 건디는 서로를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둘 사이에 충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팀의 질서를 중요시하는 밴 건디는 성실하지 못한 프랜시스의 훈련태도를 못마땅해 했으며 프랜시스 역시 세세한 규칙까지 중요시하는 밴 건디의 엄격한 팀 관리를 부담스러워 했다. 프랜시스가 프로 미식축구(NFL) 올스타전을 관전하기 위해 원정경기를 떠나는 팀과 합류하지 않은 사태는 밴 건디의 프랜시스에 대한 마지막 신뢰마저 앗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시즌 도중 프랜시스와 밴 건디를 둘러싼 여러 잡음에도 불구하고 휴스턴은 밴 건디 체제에서 드디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프랜시스, 야오밍, 모블리를 토대로 안정적인 전력을 구축한 휴스턴은 2003-2004 시즌을 45승 37패, 서부지구 8위로 마치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다.
“전당포” LA 레이커스와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맞붙게 된 휴스턴 로켓츠. 프랜시스는 시리즈 내내 팀의 에이스로써 맹활약 했지만 팀은 결국 1승 4패로 조기 탈락하고 만다. 매 경기 접전 끝에 승부가 갈렸던 휴스턴과 LA 레이커스 간의 5경기 사투는 프랜시스의 처음이자 마지막 플레이오프 경험이기도 하다.
휴스턴과의 이별, 모블리와의 이별
2004년 여름, 휴스턴 로켓츠는 스티브 프랜시스와 커티노 모블리, 켈빈 케이토를 올랜도 매직의 트레이시 맥그레이디, 타이론 루, 주완 하워드, 리스 게인스와 맞바꿨다. 휴스턴과 올랜도 간의 트레이드는 프랜시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과거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여러번 옮겨다닌 기억이 있는 프랜시스에게는, 5년만에 소속팀을 바꿔야 한다는 현실이 받아들이기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또한 휴스턴은 프랜시스에게는 좋은 추억만이 담긴 도시다. 두 팀간의 트레이드 발표 후, 프랜시스는 인터뷰에서 서운한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만큼 그는 휴스턴을 떠나기 싫었 던 것이다.
하지만 프랜시스에게 이 트레이드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그 이유는 바로 그의 감독은 더이상 제프 밴 건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 올랜도 매직의 감독 조니 데이비스는 밴 건디와는 달리 빠른 템포의 농구를 선호했다. 1996-1997 시즌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감독을 맡았었던 데이비스는 당시 신인이었던 앨런 아이버슨을 중용했던 스타일을 프랜시스에게 그대로 적용시키려 했던 것이다.
2004-2005 시즌, 프랜시스는 빠른 템포의 시스템에서 자신만의 경기력을 선보이며 부활했다. 그러나 또다른 이별이 프랜시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2004-2005 시즌 도중, 팀 수비력에 큰 문제가 있었던 올랜도 매직은 프랜시스의 백코트 파트너이자 절친인 커티노 모블리를 새크라멘토 킹스의 덕 크리스티와 맞바꾼 것이다.
프랜시스에게는 또 한번의 충격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트레이드 이후 그는 인터뷰에서 구단에 대한 실망감과 분노를 한꺼번에 표출했다. 인생 최고의 동반자였던 어머니를 잃었던 프랜시스에게는, 6년간 함께 백코트를 함께 누볐던 형제같와 같던 커티노 모블리와의 이별은 아마 정신적으로 큰 타격이 있었을 것이다.
결국 올랜도에서의 첫 시즌은 프랜시스에게는 최고의 한 해(평균 21.3점, 5.8리바운드, 7.0어시스트 기록)였지만 모블리와의 이별로 인한 최악의 한 해 이기도 했다.
서서히 지는 프랜차이즈
2005-2006 시즌을 시작으로, 프랜시스는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조니 데이비스가 감독직에서 물러난 후 브라이언 힐이 새롭게 부임하면서 프랜시스의 역할은 다시 한번 축소된 것이다.
브라이언 힐 감독은 프랜시스가 아닌 팀내 젊은 센터 드와잇 하워드를 중심으로 새롭게 팀을 개편했고, 떠오르는 신성 히도 터콜루의 성장, 그리고 2년차 백업 가드 저미어 넬슨의 육성을 중요시 했다. 프랜시스의 존재는 이들의 성장에 방해만 될 뿐이었던 것이다.
결국 불만에 쌓인 프랜시스는 브라이언 힐과의 관계가 최악에 이르렀고, 2005-2006 시즌 도중 올랜도 매직은 프랜시스를 뉴욕 닉스의 트레버 아리자와 앤퍼니 “페니” 하더웨이의 만기계약으로 트레이드 하면서 프랜시스의 1년 반의 짧았던 올랜도 생활은 끝이 났다.
뉴욕 닉스는 이미 스테판 마버리가 포인트가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결국 프랜시스는 슈팅가드 포지션을 소화해야 했고, 루키시절부터 달아온 등번호 3번 역시 1번으로 바꿔야 했다. 그러나 프랜시스는 더이상 휴스턴 시절의 능력을 보여줄 수 없었다. 고질적인 무릎부상으로 인해 운동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스테판 마버리 역시 프랜시스와 비슷한 스타일의, 볼 소유욕이 강한 선수다. 마버리와 백코트를 나눠갖던탓에 프랜시스는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살리지 못했다.
프랜시스는 결국 닉스에서 자신의 진가를 제대로 보여주지도 못한 채 2007년 여름,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로 트레이드 된다. 트레이드 직후, 트레일블레이저스는 프랜시스의 남은 2년간 3000만불의 계약을 해지(buy out)하면서 그는 자유계약 선수가 되었다.
같은 해 여름 프랜시스는 고향팀 휴스턴 로켓츠와 2년-600만불에 계약하며 귀환했다. 하지만 2007년의 휴스턴은 자신이 알던 예전의 휴스턴이 아니었다. 야오밍은 리그 정상급 센터로 성장했고 팀의 에이스는 자신의 트레이드 상대였던 트레이시 맥그레이디였다. 팀 내 주전 포인트가드는 자신이 아닌 레이퍼 알스턴이었으며 심지어 감독까지 제프 밴 건디가 아닌 릭 아델만이었다.
프랜시스의 기량 역시 예전의 그것이 아니었다. 거기다 대퇴근 부상까지 생기며 그의 몸상태는 NBA 경기를 소화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결국 프랜시스는 2007-2008 시즌 휴스턴 로켓츠 소속으로 단 10경기(3경기 선발출전)만을 소화한 후 더이상 NBA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2008년 겨울, 로켓츠는 프랜시스를 멤피스 그리즐리스의 2011년 2라운드 픽과 트레이드 했고, 그리즐리스는 2009년 1월에 프랜시스를 웨이브 했다. 루키시절, 그리즐리스를 거부했었던 프랜시스는 결국 그리즐리스에 의해 NBA 무대에서 초라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너무나도 특별했던 스티브 프랜시스, 그의 파란만장했던 농구인생 총정리.
사람들은 그를 화려했던 공격형 가드라고 표현할 것이다. 다른 몇몇은 그를 장단점이 극명하게 드러났던 한계가 있던 선수라고 말할 수도 있다. 올스타급 선수였으나 부상으로 인해 전성기가 짧았던 안타까운 선수라고 할 사람들도 있을것이며, 트러블 메이커라고 손가락질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농구선수가 아닌 “한 인간”으로 본다면 아마 필자는 그를 이렇게 평가하고 싶다.
"누구보다도 불리한 위치에서 시작했지만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기어이 자신의 꿈을 이루었던 불굴의 정신력을 지닌 인간승리의 표본"
물론 그는 트러블 메이커였다.
규칙 위반은 기본이었고, 전국TV 생중계 하프타임 인터뷰에서 심판욕을 대놓고 할 정도의 다혈질적인 성격까지..프랜시스는 분명 결점이 있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꿈을 위해 그가 달려온 길을 돌이켜보자.
프랜시스는 단 1년만의 고등학교 정식 농구경험 외에는 길거리에서 그의 농구 실력을 갈고 닦았다. 덕분에 그는 대학교에서의 스카웃을 받지 못했고 고등학교 시절 어머니를 떠나보내며 당분간 농구공을 손에 잡지 않았다. 포기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타 NBA선수처럼 대학교 무대를 평정할 기회조차 없었다. 그가 NCAA 1부리그를 경험한 것은 3학년이 되고 나서부터였다. 대학교 1, 2학년은 4년제가 아닌 2년제 전문대에서 활약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매릴랜드 대학 소속으로 맹활약하며 NBA 드래프트 2순위로 리그에 입성한다. 필자는 프랜시스가 NBA 선수로 뛰는 것이 인간승리 그 자체라고 표현하고 싶다.
중도 포기할 수도 있었던 상황들을 프랜시스는 매번 이겨냈기 때문이다.
프랜시스가 달려온 길을 볼때마다 매번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과연 그가 어려서부터 길거리 농구가 아닌 체계적인 정식 농구 시스템에서 자라났다면 어땠을까? 대학교 1학년부터 NCAA 1부리그의 치열한 무대를 경험했다면 어땠을까?
그는 아마 현재 우리가 알고있는 것보다 훨씬 훌륭한 선수가 되지 않았을까.
길거리 농구가 배출한 또 한명의 스타 플레이어, 3번의 올스타 선정에 2000년대 초반 공격형 포인트가드의 표본으로 떠올랐던 선수, 상대 센터를 앞에두고 인 유어 페이스 덩크를 무지막지하게 먹였던 극강의 운동능력의 소유자, 그리고 안타깝게 사라진 특별한 재능 스티브 프랜시스.
비록 아무도 모른게 쓸쓸히 사라졌으나 팬들은 스티브 프랜시스 그 이름을 기억 할 것이며 그가 남긴 전설은 NBA의 역사 속에 살아 숨쉴 것이다.
스티브 프랜시스(1999-2008)
생애통산 576경기 출전(543경기 선발) 평균 37.6분 출전 / 18.1점, 5.6리바운드, 6.0어시스트, 1.5스틸 1999-2000 시즌 신인왕 수상, 올스타 선정 3회
필자는 포인트 가드라는 포지션을 좋아한다. 개인 블로그의 이름은 물론이고, 즐겨 찾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사용 중인 닉네임 역시 포인트 가드와 관련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인지 간혹 '당신이 생각하는 최고의 포인트 가드를 꼽아보라'는 질문을 받기도 하는데 보통 대답을 피하곤 한다. 누가 더 잘하고 못하고를 판단하는 것은 너무나 주관적인 요소가 강하기에 섣불리 대답하기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고의' 라는 단어를 '좋아하는' 이라는 단어로 바꾼다면 몇몇 떠오르는 인물들이 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은 NBA의 매력에 빠져들게 해준 앤퍼니 하더웨이와 바로 오늘의 주인공이다. 그는 하더웨이처럼 엄청난 운동능력을 가졌거나 위력적인 득점력을 자랑하던 선수는 아니었다. 날카로운 외곽슛으로 상대팀 가슴에 비수를 꽂는 선수도 아니었으며, 철통 같은 수비력을 뽐내며 상대를 질식시키는 선수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오늘 날까지 뉴욕을 대표하는 포인트 가드로 회자되고 있고 개인적으로는 NBA 최후의 올드 스쿨 스트리트 스타일의 포인트 가드로 기억하고 있다. 그는 위대한 존 스탁턴의 10년 연속 어시스트 1위 등극에 제동을 걸어버린 선수이기도 하며, 커리어의 마지막에는 전설의 포인트 가드인 매직 존슨의 어시스트 기록을 넘어서 통산 1만개 이상의 어시스트 갯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뉴욕 최후의 올드스쿨 스트리트 볼러. 오늘의 주인공은 마크 잭슨이다.
마크 잭슨, MSG에 입성하다 !!
뉴욕 토박이였던 마크 잭슨이 NBA에 데뷔한 것은 1987년 드래프트를 통해서였다. 세인트 존스 대학 출신의 잭슨은 그의 3, 4학년 시즌을 통해 현란한 공격형 포인트 가드로 인정 받으며 1라운드 18번 픽으로 고향 팀인 뉴욕 닉스에 호명 되었다. 당시 뉴욕은 패트릭 유잉이라는 걸출한 센터가 팀의 중심으로 버티고 있었고, 도미닉 윌킨스의 동생으로 잘 알려진 제럴드 윌킨스가 주축 스윙맨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팀의 득점리더였던 버나드 킹이 워싱턴으로 떠났지만, 젊은 유잉을 중심으로 동부 컨퍼런스 다크호스로의 발돋음을 준비하던 시기였던 뉴욕은 때마침 팀을 이끌어 줄 포인트 가드가 필요한 상황이었고, 마크 잭슨은 뉴욕에게 꼭 필요한 선수였다. 그렇게 뉴욕에 입단한 잭슨은 루키 시즌부터 주전 멤버로 자리 잡으며 맹활약했다.
루키임에도 전 경기에 출장하며 40분 가량의 플레잉 타임을 소화했고, 시즌이 끝난 뒤 평균 13.6 득점 10.6 어시스트로 더블더블을 기록함과 동시에 4.8 리바운드, 2.5 스틸을 기록하며 스카티 피펜, 케니 스미스, 케빈 존슨, 호레이스 그랜트, 레지 밀러, 레지 루이스 등의 동기들을 제치고 그 해 신인왕에 등극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뉴욕을 떠나다
데뷔 이 후 줄곳 뉴욕의 주전 포인트 가드로 맹활약했던 잭슨이었지만 뉴욕에서의 생활은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화려했던 루키 시즌 이 후 각종 잔부상에 시달려야 했고 모리스 칙스, 로드 스트릭랜드 등의 동료 포인트 가드들에게 조금씩 입지를 빼앗기며 출장 시간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힘든 시간을 보내던 잭슨에게 또 한 차례의 기회가 다가오는 듯 했으니 그것은 바로 명장 팻 라일리의 등장이었다.
뉴욕이 본격적으로 동부 컨퍼런스의 강자로 올라선 것은 1991-92 시즌이었는데 그 해가 바로 라일리의 감독 취임 시기였던 것이다. 라일리의 첫 시즌에 뉴욕의 주전 포인트 가드로 활약하게 되면서 잭슨의 성적은 다시금 상승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평균 11.3 득점, 8.6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부활에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잭슨은 끝내 라일리가 원하는 선수가 되지는 못했다.
수비력이 취약했던 잭슨은 강력한 수비를 바탕으로 뉴욕을 동부의 패자로 만들려했던 라일리의 스타일에 부합하는 선수가 아니었다. 결국 잭슨은 당시 LA 클리퍼스에서 플레이하던 닥 리버스, 찰스 스미스와 트레이드 되며 뉴욕을 떠나게 되었다. 라일리의 판단은 멋지게 적중했다. 잭슨을 보낸 이 후 맞이한 1992-93 시즌의 닉스는 파이널 우승을 차지했던 1969-1970 시즌 이 후 최초로 60승 고지를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뉴욕의 팬들은 너무나도 빠르게 잭슨의 이름을 잊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잭슨이 합류한 클리퍼스의 상황은 정반대였다. 당시 엄청난 기대를 받았던 대니 매닝과 론 하퍼라는 젊은 콤비가 버티고 있었고 스탠리 로버츠, 로이 버트 등의 견실한 골밑 요원들이 출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리그의 수퍼스타였던 도미닉 윌킨스까지 팀에 가세했지만 연이은 주축 멤버들의 부상으로 인해 좌절의 계절을 맞이하고 있었다.
인디애나의 잭슨, 부메랑이 되어 뉴욕으로 날아들다!
클리퍼스에서의 힘들었던 2년이 지나고 잭슨은 인디애나로 날아가 페이서스의 일원이 된다. 당시 인디애나는 명장 래리 브라운의 지도하에 있던 팀이었다. 인디애나의 전설 레지 밀러가 전성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네덜란드의 거인 릭 스미츠가 활약하고 있었다. 데일 데이비스, 안토니오 데이비스가 골밑을 지켰으며 데릭 맥키 등도 위력을 뽐내던 시기였다. 다만 푸 리차드슨, 헤이우드 워크맨 등이 활약하고 있었던 포인트 가드 포지션이 약점으로 꼽히던 인디애나였기에 잭슨의 합류는 서로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잭슨이 합류하기 이전에도 이미 47승을 거둔 강팀이었던 인디애나는 잭슨 영입 이후 52승을 마크하며 단숨에 동부 컨퍼런스 센트럴 디비전 우승을 차지한다. 그리고 잭슨은 자신을 잊어버린 뉴욕의 팬들에게 엄청난 부메랑이 되어 날아가게 된다. 잭슨은 총 여섯 번의 시즌을 인디애나에서 보내게 되는데 그 중 다섯 시즌을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이 다섯 번의 플레이오프를 치루면서 1라운드에서 호크스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했던 1995-96 시즌을 제외한 네 번의 모든 플레이오프에서 뉴욕을 만나 겨루게 된다.
인디애나에의 첫 시즌이자 뉴욕과의 플레이오프 첫 대면이었던 1994-95 시즌 플레이오프는 그 유명한 '밀러 타임'이 터지며 7차전 접전 끝에 동부 준결승에서 뉴욕을 탈락시켰던 시즌이었다. 1997-98 시즌에는 플레이오프 4강 전에서 뉴욕을 만나 시리즈 스코어 4-1을 기록하며 다시 한 번 뉴욕을 울린다. 이후 1998-99 시즌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뉴욕에게 2-4 로 패배했지만, 1999-2000 시즌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4-2 로 승리를 거두며 곧장 복수에 성공한다.
플레이오프에서 뉴욕과 총 4차례 만남을 가지며 3승 1패의 성적을 거두었으니 자신을 내친 고향팀과 팬들에게 확실히 복수하는데 성공한 셈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편 뉴욕을 꺾고 진출했던 2000년 파이널에서는 샤킬 오닐과 코비 브라이언트가 버틴 LA 레이커스를 만나 분투했으나 결국 시리즈 스코어 2-4로 준우승에 그치게 된다)
하지만 인디애나와 함께하던 영광의 시간들도 영원하진 못했다. 인디애나에 합류한 이후 처음으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던 1996-1997 시즌, 감독이었던 브라운과의 불화가 깊어진 잭슨은 시즌 도중 덴버 너게츠로 트레이드 되고 만다.
아이러니한 것은 인디애나에서 내쳐진 이 시즌이 앞서 언급했던 스탁턴의 10년 연속 어시스트 왕 등극을 가로막은 시즌이었다는 점이다. 바로 스탁턴의 10년 연속 어시스트 왕 등극을 가로막은 시즌이었다는 점이다. 당시 잭슨은 경기당 평균 11.4 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10.5 개의 어시스트에 그친(!) 스탁턴을 제치고 리그 어시스트 리더 자리에 올랐다.
굴곡의 연속
인디애나 소속으로 시작해서 덴버의 유니폼을 손에 들고 마감했던 1996-97 시즌이 끝나고 1997-98 시즌이 시작됐다. 헌데 잭슨의 손에는 또 다시 인디애나의 유니폼이 들려있었다. 이유인 즉 잭슨과 불화를 일으켰던 브라운이 감독직에서 물러나고 래리 버드가 새로운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또 다시 잭슨을 영입한 것이다. 하지만 2000-01 시즌이 시작할 무렵에는 토론토 랩터스의 유니폼을 손에 들고 있었다.
버드가 떠나고 아이재이아 토마스가 신임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레지 밀러와 저메인 오닐을 주축으로 한 팀의 전력 재정비 과정의 일환으로 잭슨을 떠나보낸 것이다. 당시 리그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빈스 카터, 과거의 동료들이었던 안토니오 데이비스, 찰스 오클리 등과 재회한 잭슨이었으나 토론토에서의 생활도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또 한 번 시즌 중에 트레이드 되는 일을 겪게 되는데 잭슨이 당도한 곳은 처음 NBA 커리어를 시작했던 고향팀 바로 뉴욕이었다. 트레이드 이후 뉴욕의 주전 가드로 활약한 잭슨은 트레이드로 인한 스케줄 중복으로 '한 시즌 83경기 출장'이라는 독특한 경험을 하기도 한다. 잭슨의 굴곡 많은 커리어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 해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뉴욕의 1라운드 상대가 바로 토론토였던 것이다. 뉴욕은 토론토에게 시리즈 스코어 2-3으로 아쉽게 패배하며 시즌을 마무리했다. 잭슨으로써는 개막전 당시 소속되어 있었던 팀에게 패배하며 시즌이 종료된 것이었다.
이후로도 잭슨의 굴곡은 계속된다. 2001-02 시즌까지 뉴욕에서 활약하던 잭슨은 2002-03 시즌이 되어 또 다시 트레이드가 되는데, 이번에 그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스탁턴의 유타 재즈였다. 팬들의 입장에서는 역대 통산 어시스트 1, 2위를 기록 중인 선수들이 한 팀에서 뛰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였지만 잭슨에게는 주전 선수에서 백업 선수로의 보직 변경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자신의 어시스트 기록을 앞서 있는 유일한 선수에 의해 출장 시간을 빼앗기고 있는 형국이 되기도 했다. 유타에서의 생활을 단 1년만에 정리한 잭슨은 휴스턴 로케츠로 둥지를 옮기지만 조용히 시즌을 보낸 뒤 은퇴를 선언하며 굴곡 많은 커리어에 마침표를 찍었다.
잭슨, 그를 기억하다
마크 잭슨. 그는 위력적인 돌파 능력은 없었지만, 포스트 업에 능했으며 오픈 찬스에서 던지는 슈팅으로 팀에 득점을 보탰다. 넓은 시야로 코트를 바라보며 현란한 킬패스를 꽂아넣었고 안정적인 리딩 능력을 뽐냈으며 무엇보다 엄청나게 영리한 두뇌를 자랑하던 선수였다. 아무리 작은 틈이라해도 그것이 포착되는 즉시 그 약점을 파고드는 데는 귀신과도 같은 선수였다. 또한 작은 체구에도 경기당 3개 이상의 리바운드를 잡아내기도 했던 선수이기도 했다. 커리어 내내 문제로 지적되던 수비 측면의 보강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지만 1:1 수비에 약점을 보였던 것에 비해 픽앤롤의 수비나 더블팀, 트랩 등의 팀디펜스에 있어서는 두뇌 플레이를 즐기던 선수답게 썩 나쁘지 않은 응용력을 보여주던 선수였다.
NBA 통산 어시스트 2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전설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받은 개인 트로피는 신인왕 트로피가 유일무이 했고, 올스타 게임 출장 역시 1988-89 시즌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시즌 어시스트 리더에 이름을 올린 것도 단 한 차례 뿐이다. 그렇다고 '영원한 2위' 와 같은 비운의 닉네임조차 얻지 못했다. 수많은 사연들로 엉키고 설킨 트레이드의 역사까지 떠올려본다면 실로 한많고 탈많은 커리어를 보낸 전설 아닌 전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내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언제나 결혼반지를 농구화 신발끈에 끼우고 경기를 했다는 잭슨. 뉴욕에서는 유잉을, 인디애나에서는 밀러를, 토론토에서는 카터를, 유타에서는 스탁턴의 뒤를 받치며 커리어를 보냈다. 그는 단 한 번도 팀의 주연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러나 커리어가 끝난 뒤, 그의 이름은 포인트 가드의 1차 덕목이라 할 수 있는 어시스트 부문에서 매직 존슨의 이름보다 앞에 놓여져 있었다. 잭슨의 이름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확률은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아니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농구를 좋아하는 이라면, 1990년대 NBA 를 즐겨봤던 이라면 결코 그의 이름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리그 역사상 최고의 조연 포인트 가드, 굴곡 많은 커리어의 전설 아닌 전설. 바로 오늘의 주인공은 마크 잭슨이었다.
Mark Jackson (1988-2004)
생애통산 1296경기 출장 (1091선발)
평균 9.6득점, 3.8리바운드, 8.0어시스트
통산 어시스트 10334 개 (역대 2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