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와 올랜도 매직에서 감독을 지냈던 척 데일리 감독이 췌장암과 투병 끝에 결국 78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했다. 디트로이트 구단은 그가 9일(이하 한국시간) 플로리다 주피터에 소재한 자택에서 유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히 떠났다며 AP를 통해 전했다.

디트로이트의 구단 대변인은 금일 “개인적으로나 프로리그에서 그와 만났던 모든 사람들은 그의 영광을 기릴 것이다. 데일리 감독의 혼은 우리와 함께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이라며 애통함을 감추지 않았다.

데일리 감독은 지난 1989-90시즌과 1990-91시즌에 걸쳐 2년 연속 디트로이트를 우승으로 이끌었고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원조 드림팀과 함께 조국에 금메달을 안긴 명장 중에 명장이었다. NBA 우승과 금메달을 모두 손에 쥔 감독은 데일리 감독이 최초였다. 그는 지난 1996년 NBA 50주년 행사에서 최고 감독 10인에 선발되었고 2년 뒤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바 있다.

“NBA는 선수들의 리그다. 선수들이 당신을 코치로 인정하거나 아니거나 둘 중 하나다. 선수들이 감독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만 두는 수밖에 없다” 생전에 데일리 감독이 남긴 말이다. 결국 주역은 선수이며 감독 스스로가 자신의 입지를 다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교훈이다. 그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선수들을 휘어잡는 스파르타 교육을 따랐고 이는 오히려 개개인의 선수들을 융화시키는데 큰 효과를 낳았다.
 
디트로이트 시절에는 이른 바 배드보이즈라 불리던 거친 선수들을 한 대 묶어 ‘팀’으로 거듭나게 만들었다. 악동의 대명사와도 같은 데니스 로드맨은 그를 스승 이상으로 따르며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가 1993년 샌안토니오 스퍼스로 이적한 이유도 데일리 감독의 재계약이 불발이었으니 선수들의 신뢰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드림팀은 또 어떠한가. 데일리 감독은 지구 최고의 농구선수들만 엄선하여 발족한 드림팀도 하나의 팀으로 똘똘 뭉치게 만들었다. 마이클 조던과 찰스 바클리, 매직 존슨 등 개성 강한 스타선수들도 그를 감독으로 인정하고 따랐다.

과거 데일리 감독의 제자였던 디트로이트의 단장 조 듀마스는 “데일리 감독은 농구만큼이나마 사람들을 잘 이해한다”며 고인을 추억했다.

드림팀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래리 버드는 “그와 오랜 시간 NBA에서 지냈다. 팀은 언제나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는 정말 좋은 코치였다”며 안타까움을 전했다. 버드는 이어서 “드림팀에서 우리는 함께 잘 해냈다. 스타들이 우글거렸지만 주된 쟁점은 누가 가장 많은 득점을 올리냐가 아니라 오직 하나, 금메달을 따내는 것이었다”며 지난날을 회상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실 드림팀이 처음부터 이타적인 마인드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리그 득점왕서부터 대학 최고의 선수까지 모두가 스타 플레이어다보니 아무래도 자만심이 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분위기를 감지한 데일리 감독은 초장부터 군기를 잡겠다는 심산으로 당시 앤퍼니 하더웨이와 크리스 웨버, 그랜트 힐 등 대학 올스타 팀을 구성하여 친선경기를 추진하였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본선에서 맞붙게 될 유럽의 강호들과 비슷한 세트오펜스와 지역방어 전술을 대학팀에 주문한 데일리 감독의 예상이 적중했던 것이다. NBA와 다른 국제 전술패턴을 직접 경험시켜 주는데 그치지 않고 스타군단의 기강해이까지 조기에 단속하며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셈이다. 이는 드림팀에게 좋은 자극제가 되었고 금메달을 잡는데 중요한 동기부여가 되었다. 데일리 감독은 당시 올림픽 최종 결승전이 끝난 후 “나는 경기장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다”며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그의 팀들만 놓고 보면 최고의 선수들만 지도하며 손쉽게 1등을 차지한 듯 보이지만 그는 최고의 전략가이자 전술가였다.

흔히 디트로이트를 최고의 수비 팀으로 보는 이가 많았지만 사실 디트로이트는 공격에도 능한 챔피언이었다. 정상급 포인트가드인 아이제이아 토마스를 중심으로 다양한 전술을 만들어냈다. 센터임에도 뛰어난 슈팅능력을 보유했던 빌 레임비어는 다양한 2대2 플레이로 활용했고 조 듀마스나 마크 어과이어 등의 윙맨들도 이러한 전술패턴에서 빛을 발했다.

데일리 감독이 본격적으로 지도자의 길을 택한 것은 1978년 필라델피아 76ers에서였다. 그는 빌리 커닝햄 감독 아래서 어시스턴트 코치직을 수행하며 기회를 기다렸고 클리블랜드에서 마침내 염원하던 헤드코치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시작은 좋지 않았다. 그는 1981-82시즌 9승 32패로 저조한 성적을 남기며 정규시즌을 채 마치기도 전에 해고되는 아픔을 겪었다. 이듬해 1983년 디트로이트와 계약한 데일리 감독은 이후 토마스와 듀마스, 레임비어, 로드맨 등 2년 연속 우승의 주역들을 맞이하며 팀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흔히 알려진 ‘배드보이즈'의 이미지는 이때 탄생하였다. 상대 선수들을 코트에 내치며 거친 파울도 마다하지 않는 디트로이트의 경기방식은 찬사와 비난이 함께 쏟아졌다. 좋게 보면 승리에 대한 열망이 충만한 프로의식이었지만 동업자 정신의 결여와 비열함이라는 부정적인 측면도 공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혈이 낭자한 전쟁터 한 켠에 우두커니 선 데일리의 생각은 확고했다. “나는 오히려 선수들에게 권장하고 도발시켰다. 누가 상관 하겠는가” 리그에서 가장 터프하고 위험했던 팀 수장의 말이다.

2번의 우승을 맛본 뒤 90년대 최고의 농구팀 시카고 불스가 도약하자 디트로이트는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책임은 당연히 데일리 감독의 몫이었다. 그는 결국 뉴저지 네츠에 새둥지를 틀었고 두 시즌동안 팀을 플레이오프에 올려놓았다. 로드맨은 훗날 자서전을 통해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구단프론트의 간사함을 실랄하게 비판하며 안타까움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이후 방송해설가로 모습을 드러낸 데일리 감독은 1997년 샤킬 오닐의 추천으로 올랜도 매직과 계약을 맺으며 감독으로 컴백하였다. 직장폐쇄로 반쪽시즌을 맞이한 1998-99시즌까지 2년 동안 74승을 거두며 나쁘지 않은 성적을 남겼지만 시즌이 종료하고 그의 지도자 인생은 막을 내렸다. 당시 68세였던 데일리 감독이 사임을 선택한 이유는 오랜 지도자 생활에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그의 심신은 지쳐있었다.

하지만 데일리 감독의 농구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감출 수가 없었다. 그는 2000년 밴쿠버 그리즐리스의 고문을 담당하며 NBA와 연을 이어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랜 방황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는 디트로이트의 선장이었다. 구단은 지난 1997년 2회의 우승과 함께 데일리 감독의 업적을 기리고자 2번 유니폼을 영구결번 시킨 바 있다. 당시 배드보이즈의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릭 마혼은 “당신 없인 우리도 없었을 것이다”며 스승의 공로를 치켜세웠다.

13번의 정규시즌에서 통산 638승 437패를 거둔 데일리 감독은 12번의 플레이오프 진출을 일궈내며 75승 51패를 남겼다.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그에게도 한 가지 간절했던 타이틀이 있다. 바로 올해의 감독상 트로피가 그 것이다.

하지만 프로스포츠에서 성공의 바로미터인 우승을 이끈 그는 영원한 승자요 명장으로 우리 기억에 남을 것이다. 

고인은 아내 테리와 딸 시드니, 그리고 손녀 세브리나와 코너를 유족으로 두었다.

<
저작권자 ⓒ 뛰어(www.ddueh.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