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시카고 불스 주전멤버로 활약했던 론 하퍼가 한국을 방문한다.

사실 론 하퍼라는 이름은 NBA 농구에 심취한 열혈 매니아가 아니라면 다소 생소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흔한 포털사이트 인물사전에도 기록이 없는 선수이니 당연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도 시카고의 향수를 잊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하퍼의 존재가 가슴속 한 구석에 선명히 남아 있을 것이다.

하퍼는 과연 어떤 선수였을까?


최고의 스윙맨에서 나락으로

하퍼는 마이클 조던, 스카티 피펜, 데니스 로드맨 등 스타플레이어들과 함께 시카고의 3연패에 일조한 최고의 ‘조연’이었다. 하지만 그가 걸어온 농구인생을 되돌아보면 이보다 파란만장한 이야기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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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퍼는 마이애미 대학시절 공수에서 최고의 기량을 뽐내던 ‘주연‘이며 스타플레이어였다. 마이애미 재학시절 4년 동안 경기 당 19.8점을 기록한 하퍼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공격형 선수였다. 운동능력도 발군을 자랑하여 멋진 슬램덩크를 곧잘 성공시키던 하퍼를 두고 혹자들은 줄리어스 어빙과 비교하기도 하였다. 현역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어빙과의 첫 번째 대결을 꼽는 하퍼에게는 엄청난 영광이었다.
 
뛰어난 공격만큼이나마 수비도 빛이 났다. 스틸은 물론 리바운드와 블락에서도 웬만한 빅맨 급 이상의 기량을 발휘하여 하퍼는 공수에서 완벽한 스윙맨으로 거듭나있었다.

졸업 후 1986년 NBA 드래프트에 뛰어든 론 하퍼는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황금기를 이끌 브래드 도어티, 마크 프라이스와 함께 전체 8번 픽으로 프로에 입문한다.

루키 시즌은 하퍼에게 잊지 못할 한 해였다. 하퍼는 본인의 생애 최다 기록이자 루키 전체 1위인 경기 당 22.9점(리그 16위)으로 득점본능을 드러냈고 경기 당 2.6개의 볼을 훔치며 이 부문에도 리그 4위에 올라 신인왕을 예약한 듯 보였다. 하지만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척 퍼슨에게 밀려 결국 최종 투표는 2위로 마감, 아쉬움을 남겼다.

두 번째 시즌을 맞이한 하퍼는 개막 두 달 만에 심각한 발목부상으로 단 25경기나 결장했다. 공격빈도는 출장시간과 함께 다소 줄어들었지만 수비력 하나는 여전했다. 건강을 되찾은 하퍼는 훗날 몸담게 될 시카고 불스와 피할 수 없는 플레이오프 라이벌전을 시작하게 된다. 상대는 자신과 비슷한 신체조건을 지닌 마이클 조던이었다. 때문에 당시 하퍼는 클리블랜드의 원정 유니폼 색에서 착안된 ‘오렌지 조던’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됐다.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하퍼는 조던과 함께 수년 뒤 시카고에서 역사상 가장 강력한 백코트 수비군단의 핵심인물이 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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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클리블랜드 시절의 하퍼 역시 조던의 여느 라이벌들과 다를 바 없는 신세였다. 시카고는 당시 해마다 디트로이트의 괴롭힘에 고배를 들었지만 클리블랜드 역시 뉴욕 닉스와 함께 시카고의 조연에 머물렀다. 특히 클리블랜드에 유독 강한 면모를 보였던 조던의 활약에 하퍼는 ‘제2의’라는 수식어에 만족해야 했다.

줄리어스 어빙의 후계자, 제2의 에어조던 같은 칭송은 하퍼에게 있어 더 없는 영광이었지만 결국 팬들과 농구관계자들에게 실망만 안겨주었다. 좋은 선수임은 분명했지만 주위의 기대를 충족시키기에는 충분히 높이 날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빛났던 클리블랜드시절에는 남부럽지 않은 성적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올스타 무대를 밟아보지 못했다. 1987년부터 1988년까지 두 차례 슬램덩크 콘테스트에 참가하며 별들의 전쟁에 얼굴을 내밀었지만 쟁쟁한 공중곡예사들에 가려 이렇다할만한 인상도 심어주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프로생활의 첫 번째 전환점이 찾아왔다. 클리블랜드가 클리퍼스의 레지 윌리엄스와 신인 대니 페리를 받는 조건으로 하퍼와 미래의 드래프트 픽 3장을 넘기는데 합의한 것이다. 만년 약체팀으로 리그 모든 선수가 꺼리는 LA 클리퍼스에 새 둥지를 틀게 됐지만 전망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용꼬리보다는 뱀머리, 재능 앗아간 무릎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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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퍼스 입장에서 하퍼의 영입은 더 없는 선택이었다. 당시 클리퍼스는 대니 매닝와 찰스 스미스라는 전도유망한 선수들로 강력한 프론트라인을 구축하고 있었지만 백코트의 공격력 부재가 가장 큰 문제였다.

마지막 퍼즐을 채운 클리퍼스는 하퍼와 함께 새롭게 태어났다. 주장까지 담당하게 된 하퍼는 젊은 클리퍼스를 16년 만에 플레이오프 무대로 이끌며 마침내 ‘주역’으로 우뚝섰다. 1992-93시즌에는 클리퍼스 구단 기록인 단일 시즌 스틸 기록(177개)도 갈아치우며 승승장구 했다.

하지만 하퍼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클리퍼스에서 보낸 마지막 해에 팀이 와해된 것이다. 클리퍼스의 미래였던 매닝과 ‘덩크 아티스트‘ 도미니크 윌킨스의 트레이드가 불운의 시작이었다.

취지는 나쁘지 않았다. 구단 입장에서는 윌킨스가 전성기에 비해 운동신경이 다소 떨어졌지만 흥행 상승과 함께 당장의 전력에 큰 보탬이 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정작 윌킨스의 생각은 달랐다. 10여 년 동안 애틀랜타 호크스의 아이콘이자 NBA를 대표하는 슈퍼스타였기 때문에 클리퍼스 행은 그에게 있어 좌천과도 다름없었다.

프랜차이즈 스타와 함께 팀의 재건을 다짐했던 하퍼의 꿈은 그렇게 허물어졌다. 미래를 약속했던 젊은 유망주들은 하나 둘 팀을 떠났고, 주위에는 불만으로 가득 찬 베테랑 선수들과 은퇴를 앞둔 노장들, 이적을 기다리는 일회용 선수들로 득실댔다.

하퍼는 또 한 번의 멋진 시즌을 보냈지만 팀은 27승 55패를 거두며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994-95시즌을 앞둔 하퍼 인생에 일대 개혁의 바람이 일었다. 무릎수술과 시카고와의 계약. 두 번째 터닝포인트였다.


희생과 바꾼 6개의 우승반지 
 
시카고가 하퍼에게 원하는 것은 클리퍼스와 같았다. 조던의 돌연은퇴로 득점을 올려주는 공격형 슈팅가드를 물색하던 차에 눈에 띈 것이 하퍼였다. FA신분이었던 하퍼의 영입은 즉각 이루어졌다.

하지만 하퍼는 무릎수술로 인해 그가 가지고 있던 많은 재능을 잃은 상태였다. 스피드와 점프 등 그가 자랑했던 운동능력은 대부분 상실되었고 베테랑 선수들에게도 난해한 ‘트라이앵글 오펜스’의 적응까지 온갖 악재들이 그를 괴롭혔다. 시련의 연속이었다.

개인기록은 자연스레 전 카테고리에서 데뷔 이래 최저를 기록했다. 시카고의 필 잭슨 감독은 하퍼를 53경기에서 선발로 내세웠지만 출장시간은 20분 이하만 허락하였다. 경기 당 20점이 가능했던 올스타 급 가드가 평균 6.9점의 벤치선수로 전락하기까지 1년도 걸리지 않았다. 결국 두 자리 수 득점도 힘겨워 보이는 하퍼의 ‘조던화’는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야구로 외도한 조던이 극적으로 돌아왔다. 

조던이 되야 했던 하퍼는 조던의 쉬는 시간을 대신하는 벤치워머의 역할을 감내해야 했다. 조던의 컴백이 마냥 기쁠 수가 없었던 이는 아마도 하퍼가 유일했을 것이다.

역사적인 1995-96시즌을 앞둔 시카고는 더 이상 하퍼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조던은 연일 단내 나는 개인훈련으로 예전의 기량을 되찾고 있었으며 제 2옵션인 스카티 피펜 역시 언제든 20점이 가능한 올스타 포워드였다. 그 뒤를 잇는 토니 쿠코치는 두 시즌 동안 검증을 마치며 벤치에서 가장 신뢰받는 식스맨으로 시즌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하퍼의 역할에 변화가 불가피 했다. 잭슨은 결국 하퍼를 주전 포인트가드로 임명하고 조던과 피펜의 백코트에 보다 사이즈와 힘을 높였다. 198cm의 신장을 지녔던 하퍼는 예나 지금이나 포인트가드로서는 파격적인 높이의 이점을 십분 살렸다. 슈팅가드부터 스몰포워드까지 수비할 수 있는 하퍼의 폭넓은 매치범위는 조던과 피펜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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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하퍼는 비록 존 팩슨이나 B.J. 암스트롱 같은 선수들에 비해 슈팅능력이 부족했지만 NBA 역사상 가장 경쟁력 있는 백코트 수비의 한 축으로 그의 존재가치를 재조명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혹자들은 조던과 피펜 그리고 하퍼가 수비진영에 나란히 서 있으면 코트가 꽉 차 보일정도라고 하였다. 이들의 긴 팔에서 나오는 인터셉트와 발군의 수비능력은 24초 공격시간이 갱신되는 시점부터 상대팀을 압박했다.

‘전문수비수’로서 새로운 농구인생을 시작하게 된 하퍼는 점차 트라이앵글 시스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볼을 잡고 공격을 시작하고 주도했던 과거는 뒤로하고 공 없이 어떻게 움직여야하는지가 그의 최우선 과제였다. 하퍼는 기꺼이 동료들이 득점을 올리기 위한 발판이 되어 주었다. 이따금씩 재치 있는 컷인 플레이로 골밑 득점을 올리기도 하였고 위크사이드에서 더블팀에 빠져든 조던과 피펜에게 공을 받아 3점 슛도 넣어 주었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그에게 할당된 공격범위 내에서는 최선을 다 해주었다.

3연속 우승. 그를 빛내 주었던 재능을 반납한 댓가로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선물을 받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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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퍼는 이후 조던의 은퇴와 피펜의 이적, 잭슨 감독의 재계약 불발로 붕괴된 시카고를 떠나 다시 한 번 LA를 찾는다. 리그 대부분의 선수가 뛰길 원하며 새로운 왕조를 준비하고 있는 팀이라는 점에서 전과 달랐다. 그의 4번 째 팀은 바로 명문구단 레이커스였다. 은사 잭슨 감독의 간곡한 설득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레이커스는 시카고의 코칭스태프가 이동했기 때문에 유니폼 색만 제외하고는 낯설지가 않은 곳이었다.

하퍼는 정신적인 멘토역할을 자처하며 젊은 레이커스에 노련함을 가져다 주었다. 과거 경험을 토대로 트라이앵글 오펜스의 이해를 도왔고 젊은 코비에게는 정신적인 멘토역할을 수행했다. 

마침내 레이커스는 90년대의 긴 터널을 지나 밀레니엄의 첫 번째 왕좌에 오르며 3연속 우승을 일궈냈다. 하퍼는 늘 그랬듯이 밀레니엄 왕조의 탄생에 숨은 조연으로 다시 한 번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였다.

강요된 희생은 아니었지만 누구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운명은 아니었다. 필시 대개는 보이콧이나 이적을 요구하며 본연의 자아를 잃는 것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태업이나 젊은 나이에 은퇴하는 선수들을 종종 목격하기도 한다. 하퍼가 아직까지 추억되는 이유다.

금세기 최고의 농구팀으로 기억되는 90년대 시카고 불스. 그들과 함께 호흡하며 역사를 만들었던 인물을 만나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번 방한은 많은 올드팬들에게 남다른 의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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