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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거대 케이블 방송사인 터너 스포츠(TNT)가 9일(이하 한국시간) 2008-09 NBA시즌 NBA TV 스케줄을 공식발표했다. NBA의 대표 방송라인으로서 리그와 인연을 맺은 지도 벌써 25년째다. TNT는 이번시즌 NBA 공식 방송국인 NBA TV에 96경기의 생중계를 제공하게 된다. 이는 최대 규모로 경쟁사인 ESPN이나 ABC를 뛰어 넘는 수치다.

직장 폐쇄로 반쪽 시즌이 되어 버린 지난 1999년부터 방송수급에 나섰던 TNT는 NBA TV와 10주년을 맞이함에 따라 NBA의 견실한 파트너로서의 입지를 다지게 됐다.

TNT는 NBC와 함께 90년대 NBA의 전도사로서 팬들의 기억에 남아있다. TNT는 간결하고 경쾌했던 인트로 영상과 마브 알버트라는 정상급 해설자로 대변되던 NBC사와는 달리 독특한 인터페이스와 폭넓은 해설진의 운용을 통해 팬들에게 어필하였다. 갓 은퇴한 선수들을 스튜디오에 세우며 젊은 시청자를 TV앞에 끌어 모은 것도 타사와의 차별화를 이룰 수 있었던 원동력 중 하나였다. 덕분에 현역 선수들의 은퇴 후 진로에 대한 긍정적인 로드맵을 제시할 수 있었다.

NBA 최고의 달변가로 꼽히는 찰스 바클리나 케니 스미스, 레지 밀러같은 스타 플레이어들은 TNT 해설진의 계보를 성공적으로 이어왔고 제프 밴 건디, 덕 콜린스, 마이크 프로텔로같은 명장들도 마이크를 잡아 팬들을 찾았다. 또한 CBS의 명콤비로 꼽혔던 딕 스탁튼과 휴비 브라운이 오랜만에 조우하며 올드팬들의 향수를 자극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TNT는 국내 팬들에게 큰 방향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실패했다. 이유 인즉 TNT 생중계는 한국시간으로 오전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최소 1회에서 많게는 3회까지 AFKN(現 AFN)을 통해 중계됐던 TNT는 화요일과 수요일, 목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고루 편성을 하였지만 오전 10시나 오후 1시의 시간대로 학생이나 직장인의 발목을 잡았다. 정보화 시대를 넘어 인터넷을 이용한 시청이 가능해진 지금은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지만 당시에는 비디오 녹화가 유일한 시청수단이었을 정도였다.

시간적인 측면을 볼 때 NBC가 그래서 사랑을 받지 않았나 싶다. 일요일과 월요일 새벽 12시 30분에 시작되는 중계는 ‘NBC 쇼 타임’이라는 프리뷰 방송을 통해 한 주간의 리그 소식을 간결하게 정리해주고 당일 경기분의 예상과 분석을 통해 팬들의 기대를 120% 충족시켜 주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직장이나 학교에 구애받지 않는 주말방송이라는 점은 국내 NBA 팬들의 머릿속에 NBC의 짙은 향수가 남아있는 이유일 것이다.    

NBC는 1990-91시즌을 앞둔 1989년 4월 28일 4년간 6억 달러에 중계권 계약을 맺었다. 마이클 조던과 시카고 불스의 왕조건설을 함께 한 NBC는 지난 1993년 4년간 7억 5천만 달러의 금액으로 독점 연장계약에 합의하며 전성기를 예고했다.

NBA on NBC하면 역시 빠질 수 없는 것이있다. 바로  ‘NBC의 아이콘은 테마곡이다’라 말할 수 있을 만큼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누린 인트로 음악이다. 필자 역시 ‘라운드볼 락’의 신명나는 선율이 아직까지도 머리 한 구석에 선명히 자리 잡고 있다. 힙합 가수인 넬리가 리메이크를 할 정도로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킨 이곡은 각종 미디어의 주요 장면에 삽입됐고 덴젤 워싱턴이 주연한 영화 리멤버 타이탄의 ‘타이탄 스피리트’곡으로 쓰이는 등 폭 넓은 확장성을 과시하기도 했다.

NBC가 호평을 받은 또 하나의 이유는 방송 외적인 부분만큼이나 내실 있는 중계 팀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나운서 밥 코스타스와 한나 스톰은 1996년까지 ‘NBA 쇼타임’의 진행자로 이름을 알렸으며 주간 NBA 프로그램 ‘인사이드 스터프’로 유명세를 탄 아마드 라샤드 역시 오랜 경험을 토대로 쌓은 노하우를 유감없이 발휘하며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든든한 후원사들도 NBC의 탄탄대로에 한 몫 했다. 인터넷 서비스 공급사인 ‘넷 지로‘의 지원으로 온라인과 연동한 세밀한 분석을 이끌었고 세계적인 맥주회사 밀러는 ’FLASH BACK‘ 을 통하여 과거 NBA의 추억들을 생생하게 살리는 콘텐츠를 제작하여 많은 호응을 이끌기도 했다. 이러한 독특한 메뉴들은 종전에 없던 NBC만의 고유 콘텐츠로서 끊임없는 개발만이 냉혹한 경쟁사회에서 가장 확실한 생존법임을 몸소 보여주었다.   

잘나가던 NBC는 한 차례 불미스러운 일을 겪었는데 다름 아닌 스타 해설자 마브 알버트가 그 원인이었다. 그는 명쾌하고 냉철한 분석으로 브라운관을 누볐지만 1997-98시즌을 앞두고 성 스캔에 휘말리며 중도하차하였다. 알버트의 후임은 NBA 쇼타임의 진행을 맡았던 밥 코스타스가 낙점됐고 파트너로는 전설적인 포인트 가드 아이제이아 토마스가 선발됐다. 이후 직장폐쇄와 마이클 조던의 은퇴, 파이널 전 시청률 최저기록 경신 등 온갖 악재가 겹치며 고사위기에 빠진 방송사는 결국 알버트를 다시 불러들이게 된다. 레이커스와 샌안토니오의 1999년 크리스마스 매치에 복귀한 알버트는 방송계약 만료시점까지 종횡무진하며 이름값을 해냈다.  

NBC는 오랜 세월동안 받아온 농구팬들의 관심을 뒤로하고 2002년 샌안토니오와 뉴저지의 파이널 6차전을 끝으로 방송을 마치게 된다. 당시 해설진들은 그토록 사랑받았던 NBC의 테마곡을 배경으로 숙연한 분위기속에 인사말을 꺼냈지만 빌 월튼 해설위원은 결국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고 알버트와 코스타스 역시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감격에 벅차 했다. 그만큼 NBC가 받은 관심과 이룬 업적은 대단했고 관련 방송인들의 자부심 또한 대단했다고 볼 수 있겠다.    

80년대 NBA의 인기를 한 단계 끌어올린 매직 존슨과 래리 버드 시대를 경험한 이들은 CBS의 향수를 잊지 못한다. 매직-버드 라이벌 시대를 선도한 방송사이자 전설적인 해설자 딕 스탁튼을 배출하였기에 그 추억들은 모든 올드팬들에게 각별할 것이다. 

CBS는 초창기에 시끄러운 인트로 음악과 해설의 질이 도마 위에 오르며 비난도 많이 샀지만 스포츠 중계의 꽃인 리플레이 영상을 도입하며 발전을 거듭해나갔다. 하프타임에는 현역 선수와 은퇴 선수를 불러들여‘HORSE(역주: 2인 이상이 참가하여 슈팅 대결을 펼치는 경기)’라는 번외 경기로 이색적인 볼거리를 제공하기도 했다.

매직 존슨래리 버드가 이끄는 LA 레이커스와 보스턴 셀틱스의 구도는 CBS의 전성시대를 연 초석이었고 80년대 중반 한 때 MLB의 월드시리즈와 근접하는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특히 당시에는 NBA의 유일한 등용문이었던 NCAA마저 독점중계하며 농구방송계의 지존자리를 확인시켰다. 이러한 CBS의 위상덕분에 빌 러셀, 엘진 베일러, 릭 배리, 톰 헤인슨 등 굵직한 경력을 보낸 은퇴선수들이 마이크를 잡으며 해설진도 호화진용을 갖출 수 있었다.

독특한 자유투 폼으로 국내 팬들에게도 익숙한 릭 배리는 정장 대신 화려한 가죽 자켓과 가슴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파격적인 의상을 입으며 눈길을 끌기도 했고 1981년 파이널 중계 당시 빌 러셀을 향해 인종차별 발언을 하여 중도하차하는 등 많은 이야기 거리를 남기기도 했다.

1989년을 끝으로 성공리에 막을 내린 CBS는 NBC에 바톤을 넘겨주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현재까지도 미 대학농구인 NCAA를 통해 농구팬들과 교감을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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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내지 못하면 이탈리아행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발언을 선언한 코비 브라이언트에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물론 코비의 다음시즌 거취는 NBA가 분명하지만 소속팀인 LA 레이커스와의 계약이 만료되는 2011년이라면 생각을 달리 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양질의 NBA선수들이 대거 유럽행을 선언함에 따라 일반적 고정관념을 탈피한 새로운 농구판도가 짜여지고 있다. 절대자였던 미국 NBA리그에 더 이상의 매리트를 느끼지 못하는 젊은 선수들의 인식도 한몫했지만 높아진 유럽리그의 수준은 두말하면 입이 아플 정도로 비약적인 성장세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코비 같은 경우에는 이 같은 케이스와 조금 거리가 멀다.

코비는 계약이 만료되는 2011년에 한국나이로 34세가 된다. 물론 코비의 도전은 현재진행형이지만 NBA에 잔류해야할 동기나 미련이 사라질만한 나이다. 만약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이탈리아가 그 행선지거나 NBA급 계약금을 상회하는 천문학적인 돈이 뒤따른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전성기에 준하는 기량을 선보이기는 힘들겠지만 어느 정도 정상급 플레이를 유지할 수 있다면 ‘새로운 도전‘ 명분아래 부와 명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도 가능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운동선수의 기본적인 역량을 충족시킨다는 전제 조건은 반드시 따라야 한 다는 점이다.

세계적인 축구스타 데이비드 베컴은 31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기량유지라는 조건이 충족되지 않은 것이 흠이었다. 부상까지 겹친 베컴은 지난 시즌 MLS(미국 프로축구리그)에서 단 5경기만을 뛰는데 그쳤다. 덕분에 미국축구에 도전이라는 명분은 빛이 바랬고 여전히 많은 금액은 족쇄가 되어 많은 논쟁을 낳았다. 물론 그의 외모와 인기는 여전하고 이는 헐리우드에 꽤나 잘 어울리고 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컴은 MLS 이적에 대해 후회 한 번 해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LA 입성 후에 코비와 친분을 쌓은 그는 “사람들은 재능 있는 스포츠맨을 좋아한다. 코비는 굉장한 실력을 지닌 선수이니만큼 유럽으로 가면 큰 성공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내다봤다. “다른 나라, 다른 장소에서 견문을 넓히고 새로운 삶을 살아볼 수 있는 경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며 운을 뗀 베컴은 “나는 이미 모든 것을 경험해 보았고 가족들과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나 역시도 이를 즐겼고 새로운 도전에 대해 자신있게 추천할 수 있다”며 프로 생활 노하우를 밝혔다.

코비의 농구실력에 침이 마른 베컴이지만 그의 유럽행을 낙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인기’였다. “베이징에서의 코비를 봤다면 알 것이다. 유럽 어느 곳을 막론하고 그의 인기는 대단하다”고 말한 베컴은 “그가 만약 유럽으로 간다면 어디가 되었든 사람들은 코비의 이름을 연호 할 것이다. 정말 강직한 친구고 사람들은 언제나 성공해법을 찾아내는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현 시점에서 코비의 심중은 알 길이 없지만 선택의 시간이 다가온다면 어떠한 이변도 배제 할 수 없다. 샐러리캡에 제한이 없는 유로리그의 모든 구단주들은 기꺼이 지갑을 열 것이며 NBA의 모든 구단은 최대계약금을 앞 다투어 제시할 것은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만약 코비가 유럽으로 노선변경을 하게 된다면 베컴과 같은 5천만 달러의 천문학적 연봉시대를 열지도 모를 일이다.

분명한 것은 이 모든 것이 ‘코비‘특수를 누릴 것이라는 기대감이 빚어낸 얘기들이라는 것이다. 전력증강에 목적을 두는 유럽구단도 있겠지만 NBA 스타라는 상품성에 대한 기대감과 수익창출을 방향으로 자유계약 시장에 뛰어드는 구단도 속출 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특히 앞서 얘기한 것과 같이 유럽리그의 ’무제한 샐러리캡‘이라는 시스템은 자칫 심각한 인플레 현상을 야기 시킬 수 있다.

결국 리그간의 왕성한 교류를 통한 저변확대와 규모 확장이 선행돼야겠지만 물질만능주의와 빈익빈 부익부가 만연해 진다면 팬들의 발걸음은 경기장으로 향하기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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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의 카트리나 ‘구스타브’가 1등급으로 약화 된 가운데 뉴올리언즈 호네츠 관련 시설 상태의 윤곽이 드러났다.

막심한 피해가 우려된다는 당초 예상과는 도시 대부분의 주요 건물들의 피해는 미미했다. 시 외곽에 위치한 뉴올리언즈의 연습 체육관 역시 생존에 성공하여 팀 관계자와 팬들을 안심시켰다. 뉴올리언즈의 단장 제프 바워는 AP와의 인터뷰에서 “연습장에 대한 긍정적 발표를 하게 되어 기쁘다. 빠른 시간 내에 연습을 재개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번 구스타브는 호네츠의 이름뿐 아니라 자칫 지도상에서 뉴올리언즈를 지워버릴 수 있을 만큼의 큰 위협이었다. 뉴올리언즈는 구단주 조지 신이 직접 나서서 최악의 경우를 대비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지 신 구단주는 허리케인 상륙 전날 뉴올리언즈 시장인 레이 내긴과 접촉하여 허리케인 피해에 대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을 약속 받았다. 

연습 체육관과는 달리 구단 홈구장인 뉴올리언즈 아레나는 소규모 피해를 보았지만 심각한 수준은 아닌 것으로 알려졌다. 본관을 비롯하여 비디오 상영관 외벽 일부는 파편의 충돌로 인해 손상을 입었지만 전체적인 형세는 종전과 다를 바가 없다. 

“이번 허리케인은 어떤 상황이 닥치던지 준비를 해야 한다는 불변의 진리를 깨워주었다고 생각 한다”며 운을 뗀 바워 단장은 “피해상황을 최소화 할 수 있어서 너무나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지난 카트리나 때보다 쉽게 복구상황이 진행되고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기대한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NBA 리그는 지난 2005년 카트리나의 재앙 이후 물심양면으로 광범위한 도시 복구에 나선 바 있다. 특히 MVP후보에 이름을 올릴 정도의 가파른 성장세를 보인 크리스 폴의 등장은 연고지 스타 이전에 뉴올리언즈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오클라호마로 임시 연고지 이전을 감행하며 지난 시즌 올스타전의 유치까지 우여곡절 끝에 성공적인 도시 재건의 평가를 받았던 뉴올리언즈였다.


카트리나의 시련을 딛고 서부지구의 새강자로 부상한 뉴올리언즈 호네츠기에 다가오는 2008-09시즌은 기대해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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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시즌 내내 선수 영입을 노리던 클리블랜드가 마침내 한 건을 터뜨렸다.

베이징 올림픽이 한창이던 8월 13일, 클리블랜드는 공격형 포인트가드인 모리스 윌리암스를 영입했다고 발표했다. 클리블랜드는 조 스미스를 오클라호마 시티에, 데이먼 존스를 밀워키에 보내고 밀워키는 윌리암스를 클리블랜드에, 데스먼드 메이슨을 오클라호아 시티에 보냈으며, 오클라호마 시티는 루크 리드노어와 애드리언 그리핀을 밀워키에 보내는 삼각 트레이드였다.

클리블랜드의 윌리암스의 영입은 일단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팀 리더인 르브론 제임스는 '윌리암스는 매우 뛰어난 포인트가드'라며 트레이드에 'A'를 주겠다고 말했고, 오하이오주의 지역 언론들도 대부분 호의적인 반응을 보내고 있다. 윌리암스 또한 '클리블랜드는 나와 꼭 맞는 팀'이라며 트레이드를 반겼다.

이번 트레이드가 클리블랜드에 가져올 결과를 예상해본다.


얻은 것 - 믿음직한 서브 스코어러, 핵심 전력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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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블랜드는 르브론 제임스가 지난 시즌 득점왕을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팀 평균득점에서 24위에 그쳤다. 제임스 외에는 리딩을 할 수 있는 선수가 없었기 때문에 팀 전체가 르브론의 돌파 및 킥아웃 패스에만 의존했고, 르브론에게 집중마크가 들어가면서 공격 세팅에 많은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또한 르브론이 벤치에서 쉬고 있을 때 클리블랜드의 공격은 끔찍한 수준이었다. 따라서 르브론의 패스 없이도 스스로 득점 찬스를 만들어낼 수 있는 윌리암스의 영입은 클리블랜드의 답답했던 공격에 숨통을 틔워줄 것으로 예상된다.

윌리암스는 지난 시즌 경기당 17.2득점을 올리며 48%의 야투율과 38.5%의 3점 성공율을 기록했다. 코트 어디에서든 자신있게 슛을 던질 수 있는 윌리암스는 클러치 타임에서도 전혀 기죽지 않고 공격할 수 있다. 볼 핸들링도 준수한 편이며 지난 시즌 경기당 6.3어시스트를 기록할 정도로 패싱마인드도 뛰어난 편이다.

재미있는 것은 지난 시즌 윌리암스의 공격력을 가장 확실히 경험한 팀이 클리블랜드라는 것이다. 클리블랜드는 10명이 이동한 큰 트레이드를 단행한 직후 윌리암스의 전 소속팀이던 밀워키와 경기를 가졌다. 클리블랜드가 만약 그 경기를 이겼다면 바로 다음날로 예정되어있던 보스턴 원정경기를 좀더 편안한 마음으로 치를 수 있었고 시즌 목표였던 50승에도 한발 가까워질 수 있었다.

윌리암스는 그 경기에서 4쿼터에만 13점을 올리며 37점 7리바운드 6어시스트를 올렸다. 수비력이 뛰어나다는 딜론테 웨스트와 데빈 브라운, 심지어 르브론까지 윌리암스를 막으려 해봤지만 코트 모든 곳에서 득점을 성공시킨 윌리암스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비록 버저비터 위닝샷을 성공시킨 마이클 레드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됐지만, 그 경기의 주인공은 박빙의 상황에서 르브론과 막상막하의 쇼다운을 펼친 윌리암스의 몫이었다. 윌리암스는 지난 시즌 클리블랜드를 상대로 평균 26득점 9어시스트와 50%의 야투율을 기록했다.

이제 클리블랜드의 상대팀은 더이상 르브론에게만 수비를 집중시킬 수 없게 됐다. 르브론의 반대 사이드에는 득점과 패싱이 모두 가능한 윌리암스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클리블랜드 프런트가 정말로 칭찬받아야 하는 부분은 윌리암스 정도의 선수를 데려오면서 전력 누수가 거의 없었다는 점일 것이다. 클리블랜드가 윌리암스를 받는 댓가로 내보낸 선수는 데이먼 존스와 조 스미스였는데, 이들은 대니얼 깁슨과 J.J.힉슨이 성장하면 거의 할 일이 없어질 선수들이었다. 클리블랜드는 이들의 만기 샐러리 1,000만 달러의 트레이드 가치를 썼지만, 아직 월리 저비악의 만기 샐러리 1,300만 달러가 남아있으므로 추가적인 전력 강화도 가능해졌다.


잃은 것 - 팀 디펜스

윌리암스는 그리 뛰어난 수비수는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워낙 공격적인 성향 탓에 수비시에는 그리 집중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는 백코트의 빈틈없는 로테이션을 바탕으로 상대 템포를 떨어트리는 클리블랜드 팀 디펜스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다.

2007시즌 클리블랜드가 파이널까지 진출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백코트진의 수비력이었다. 르브론과 래리 휴즈, 사샤 파블로비치는 모두 1~3번을 막을 수 있는 선수들이었기 때문에 상대팀이 백코트에서 볼을 돌려도 거의 완벽한 스위치 디펜스가 가능했다. 디펜시브팀 멤버가 한 명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클리블랜드가 최고의 수비팀이라 불리운 이유다.

하지만 지난 시즌 휴즈를 트레이드하고 파블로비치가 컨디션 난조를 보이면서 클리블랜드의 최고 강점이었던 수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딜론테 웨스트는 수준급의 수비수였지만 개인 수비능력보다 팀 수비를 강조하는 클리블랜드의 수비 시스템에 완벽히 녹아들어가지는 못했다. 저비악의 느린 발은 팀의 수비로테이션에 항상 걸림돌이 되었으며, 팀에서 이를 보완할 팀 수비전술을 완성시킨 플레이오프때까지 고전을 면치 못했다. 백코트 파트너가 모두 바뀌면서 수비 부담은 르브론에게 집중되었고, 결국 르브론이 체력에서 한계를 드러내자 팀도 시즌 중반까지의 상승세를 이어가지 못했다.

이번 오프시즌에는 수준급 스윙맨 수비수이던 데빈 브라운마저 뉴올리언즈로 이적했기 때문에, 현재 클리블랜드 백코트진 중에서 신장 195센티미터가 넘는 선수는 파블로비치와 저비악 뿐이다. 만약 파블로비치의 컨디션 난조가 2009시즌에도 계속된다면 클리블랜드는 휴스턴이나 애틀랜타, 레이커스같이 장신의 공격력 좋은 스윙맨이 있는 팀을 상대로 고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궁금한 것 - 스타팅 라인업, 후속 트레이드

딜론테 웨스트가 1년 더 남아있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클리블랜드의 2009시즌 스타팅 라인업은 윌리암스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전망이다. 윌리암스를 주전으로 쓸 경우 스타팅 라인업은 윌리암스-파블로비치-르브론-벤 월러스-지드루나스 일가우스카스가 될 것이며, 윌리암스를 벤치 에이스로 쓸 경우에는 웨스트-파블로비치-르브론-월러스-일가우스카스가 될 것이다. 만약 파블로비치의 컨디션이 회복되지 않았을 경우 저비악이 대신 출장할 수도 있다. 깁슨은 1~2번 백업으로 벤치에서 꾸준히 출격할 것으로 보이며, 특히 르브론에게 볼이 집중되는 4쿼터에는 윌리암스와 함께 나올 수도 있다. 클리블랜드는 이번 트레이드를 통해 백코트 운용의 다양성을 얻었기 때문에, 상대 라인업에 따라 여러 조합을 구사할 수 있게 됐다.

현재 클리블랜드는 저비악의 1,300만달러짜리 만기계약이 남아있다. 여기에 2010시즌 옵트아웃이 거의 확실한 앤더슨 바레장의 연봉을 합치면 2,000만달러짜리 트레이드 카드를 제시할수 있다. 클리블랜드의 전력 강화 행보가 이걸로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는 부분이다. 만약 웨스트까지 트레이드 카드로 쓸 경우, 클리블랜드는 작년의 가넷 트레이드에 맞먹는 블록버스터 트레이드를 이끌어낼 수도 있다. 클리블랜드 프런트는 일단 현 멤버로 시즌을 시작하고, 트레이드 마감일까지 다른 팀 슈퍼스타들의 트레이드 가치가 떨어지기를 기다릴 것이다.


마치며 .. 클리블랜드의 트레이드는 2010 프로젝트의 일환

클리블랜드의 최대 관심사는 르브론이 플레이어 옵션을 쓸 수 있게 되는 2010년에 르브론을 지켜내는 것이다. 구단주 댄 길버트가 클리블랜드 구단을 매입한 것도 르브론 때문이고 프런트가 사치세를 감수해가며 선수를 영입할 수 있는 것도 르브론이 사치세보다 훨씬 더 큰 수익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므로, 구단에서는 이미 여러 구단이 영입 의사를 밝힌 르브론을 지켜내기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것이다.

현재 르브론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 팀 전력의 강화이다. 클리블랜드는 이미 2005년에 르브론의 파트너로 이른바 '휴즈 패키지'를 붙여주었지만, 이 프로젝트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최근 클리블랜드가 보여준 모든 움직임은 '휴즈 패키지'를 처리하고 2010년 르브론의 파트너를 구해주려는 움직임이었다. 그 결과 노장 선수들이 우글거리던 클리블랜드의 로스터는 30대 선수들이 빠르게 사라짐과 동시에 파블로비치, 깁슨, 바레장, 힉슨, 윌리암스 등 20대의 젊은 선수들로 채워져 가고 있다. 클리블랜드는 2010년 이후 르브론과 전성기를 함께할 수 있는 선수들을 모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르브론은 진정한 의미의 '2옵션'이 될 수 있는 선수를 얻었다. 그가 말한 대로 이번 트레이드가 'A'학점이 되느냐, 아니면 제2의 휴즈 영입으로 끝나느냐는 르브론이 그동안 자신에게 몰려있던 공격 부담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나눌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 '프랜차이즈 플레이어' 르브론과 클리블랜드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3년 전에 비해 기량도 리더쉽도 성장한 르브론의 이번 시즌 모습에 NBA 팬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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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닉스에서 15년간 전설을 쌓은 전 NBA 스타 패트릭 유잉의 아들 패트릭 유잉 주니어(24, 203cm)가 아버지와 같은 유니폼을 입는다.

유잉 주니어는 세크라멘토 킹스에 의해 2라운드 43번 픽으로 지명됐지만 지난번 론 아테스트 트레이드 과정에서 휴스턴 로케츠에 새둥지를 튼 바 있다. 뉴욕은 프레드릭 와이즈의 권리를 휴스턴에 넘기면서 유잉 주니어 영입을 성사시켰다.

“닉스에서 플레이하고 팀에 기여한다는 것은 내게 많은 의미를 준다”며 운을 뗀 유잉 주니어는 “어렸을 때부터 뉴욕에 뛰는 것이 꿈이었다. 팀 승리를 위해 어떠한 플레이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라며 충만한 기대와 자신감을 드러냈다.

아버지 유잉도 아들의 뉴욕 입성을 흐뭇해 하는 눈치다. 현재 올랜도 매직의 어시스턴트 코치직을 수행하고 있는 유잉은 “아들이 내 전처를 밟아 행복하고 자랑스럽다. 부디 뉴욕에서 오랫동안 선수생활을 이어나갔으면 한다”며 아들에 대한 무한신뢰를 보였다.  

하지만 이 모든 시작이 해피엔딩으로 끝난다는 보장은 없다. 수퍼스타로 활약했던 아버지의 업적과 팬들의 관심을 등에 업고 프로선수생활을 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와도 같기 때문이다.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의 아들 제프리 조던 역시 지난 시즌 시카고의 일리노이스 대학에 입학 한 후 출장시간조차 보장받지 못하며 신통치 않은 성적을 남겼다. 이러한 사례는 그동안 리그 역사를 통틀어 보아도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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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명예의 전당에 오른 유잉의 업적은 이루 다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그는 비록 무관의 제왕으로 남았지만 90년대 4대 센터의 반열에 오르며 리그를 주름잡았던 당대 최고의 센터중의 하나였고 역대 위대한 50인에도 이름을 올리는 등 NBA의 역사를 아우르는 전설 중에 전설이었다.

특히 뉴욕에 남긴 유잉의 발자취는 그가 왜 팀의 심장이었는지를 말해준다. 득점과 리바운드, 블락 등 주요 카테고리에서 프랜차이즈 1위는 아직까지 유잉이 차지하고 있고 당분간 깨지기 힘들 전망이다. NBA 데뷔 이전에 조지타운 대학을 전미 챔피언으로 이끄는 등 엘리트의 길을 걸어온 최고의 아버지다.

유잉 주니어는 사실 대학조차도 아버지와 같은 조지타운에서 졸업했다. 본래 인디애나 대학에 입학했던 그는 지난 2005년 전학을 결심했고 아버지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했다. 포워드를 수행하고 있는 유잉 주니어는 지난 시즌 경기당 6.1점 4.2리바운드로 빅 이스트 올해의 식스맨에 선발되며 이름을 알렸고 슬램덩크 콘테스트에서 고난이도 덩크를 선보이며  피는 물보다 진함을 입증했다. 특히 지난 드래프트 캠프 신체검사에서는 버티컬 점프 42인치로 최고를 기록하며 탄력만큼은 아버지보다 낫다는 평이다.  

하지만 폭발적인 운동신경에 비해 부족한 점이 많은 유잉 주니어다. 지난 2008 드래프트에서는 지명될 가능성이 거의 없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ESPN의 한 전문가는 “절대로 아버지를 능가 할 수 없을 것”이라는 혹평을 내리기도 했다. 슈팅이나 드리블, 패싱 등 기본적인 기술의 연마가 더 필요하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이러한 유잉 주니어의 단점들이 노출됐음에도 뉴욕 구단 프론트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모습이다. 구단주 도니 월시는 “유잉 주니어는 우리 로스터의 마지막 퍼즐이다. 그는 견고한 수비수일 뿐 아니라 훌륭한 운동선수”라며 영웅의 아들을 반겼다. 

많은 스포츠 스타들의 염원이자 아버지의 바람은 자녀가 자신의 업을 물려받아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모든 아버지들이 뜻을 이루기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전 NBA 스타 찰스 바클리 역시 장녀를 농구선수로 키우려 노력했지만 무산되었고 공개석상에서 서운함을 토로한 적도 있다.   

결국 유잉 주니어가 정상급 운동신경을 지니고도 NBA문을 열지 못해 결국 선수생활을 마감한 수많은 유망주들을 비롯하여 아버지를 잇겠다는 심리적 압박을 견디지 못한 2세들의 실패를 거울삼아 발전을 도모한다면 ‘뉴욕 킹콩‘ 향수에 젖은 뉴욕 팬들의 갈증을 해소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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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이하 한국시간) 전 NBA 스타였던 케빈 덕워쓰(44, 213cm)가 4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두 차례 올스타에 선발되며 대부분의 전성기를 포틀랜드 블레이저스에서 보낸 견실한 센터였다. 링컨 주 보안관 당국이 덕워쓰의 사망을 발표했지만 아직까지 정확한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덕워쓰는 평소 포틀랜드가 주관하는 무료 어린이 농구클리닉에 참여해왔으며 지역 방송국인 FOX12의 웹사이트 리포터로 활약하는 등 왕성한 코트 밖 활동을 이어와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지난 1986년 드래프트에서 샌안토니오 스퍼스에 의해 2라운드 지명을 받은 덕워쓰는 곧바로 포틀랜드에 트레이드 됐다. 주전 센터 샘 보위의 부상으로 자리를 메운 스티브 존슨을 보좌하며 첫 시즌을 마친 덕워쓰는 이듬해 보위의 부상이 재발하며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불과 1년 만에 주전 자리를 차지한 덕워쓰는 경기당 15.8점과 7.4리바운드로 리그에서 가장 기량이 향상하는 선수에게 부여하는 MIP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이후 덕워쓰는 ‘블루컬러 워커‘ 벅 윌리엄스와 제롬 커시의 가세로 강력한 프론트 코트를 구축하는 한편 클라이드 드렉슬러와 테리 포터가 버티는 백코트와 함께 서부지구의 신흥강호로 떠오른 포틀랜드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 유럽 최고의 가드 드라젠 페트로비치와 헤드밴드 유행을 몰고 온 클리포드 로빈슨의 데뷔로 최상의 전력을 구축하게 된 포틀랜드는 1989-90시즌과 1991-92시즌 파이널에 올랐지만 ’배드보이즈’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와 마이클 조던의 시카고 불스의 아성을 넘지 못하며 해체됐다.

1992-93시즌 종료후 덕워쓰는 워싱턴 불리츠(現 워싱턴 위저드)의 하비 그랜트와 트레이드를 통해 새둥지를 틀었지만 1995년 밀워키 벅스로 전격 이적하며 방황의 시작을 알렸다. 비대한 체중으로 야기된 잔부상으로 이미 전성기의 기량은 잃은 뒤였다. 결국 1996-97시즌 LA 클리퍼스를 끝으로 짧고도 아쉬운 NBA 경력에 마침표를 찍었다.

은퇴 후 고향인 오레건의 타이가드에 정착한 덕워쓰는 약혼녀와 두 명의 자녀를 유족으로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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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자농구 대표팀이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8년 만에 금메달을 되찾는 쾌거를 달성하였다. 대륙별 최고의 12개국이 참가한 이번 올림픽에서 최강 자리를 확인한 이번 대표팀은 과연 선배들의 위업에 견줄만한 성과를 달성한 것일까? 이번 리딤팀과 역대 드림팀의 업적을 비교 조명해보자.


선발기준과 운영체제부터 비교불가

마이클 조던매직 존슨, 래리 버드 등 80-90년대를 풍미한 전설들이 몸담았던 원조 드림팀과 센터 르네상스 시대를 연 이른바 4대 센터의 주역들이 참가했던 ‘드림팀3‘가 남긴 족적은 결코 작지 않다. 하지만 이들이 남긴 결과물을 논하기에 앞서 판이하게 다른 미국농구협회의 과거와 현재의 행정체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1988 서울 올림픽까지만 해도 프로 선수의 출전이 금지돼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대표팀과 금메달이 NBA 선수들에 선망의 대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미국농구협회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앞두고 출전거부 따위의 문제로 고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최고의 선수들을 놓고 즐거운 고민에 빠져있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도 마찬가지였다. 전설들의 자리를 대신 한 새로운 세대들이 얼굴을 내밀었고 가히 최고의 진용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덕분에 미국은 상비군 제도와 전임감독제를 택하는 대신 그때그때 팀을 구성하여 가볍게 손발을 맞추어왔다. 올스타전처럼 말이다.

하지만 2000 시드니 올림픽 무렵에는 선수들의 인식이 달라져있었다. 올림픽은 젊은 선수들에게 영광의 대상이기 보다 귀찮고 힘든 ‘여름방학 보충수업‘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이번 베이징 올림픽 대표팀의 포지션을 면면히 살펴보면 사실 최고의 멤버가 소집되지는 않았다. 스몰포워드와 슈팅가드, 포인트가드 등 백코트만큼은 역대 어느 팀에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었지만 말이다. 지난 시즌 수비왕에 오른 케빈 가넷이나 아마레 스타더마이어는 출전을 고사했고 드래프트 1번 픽에 빛나는 그렉 오든은 부상으로 인한 재활훈련에 여념이 없었다. 

로스터의 깊이만큼은 역시 아직까지는 원조 드림팀들만한 작품이 없다. 이번 베이징 올림픽은 로포스트 부문에서도 최고의 선수가 엄선됐다면 더 좋은 성적표가 나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비록 유럽의 높이를 압도적으로 제압하는데 실패했지만 새로 도입한 상비군 시스템으로 2006년부터 호흡을 맞추어 온 조직력을 바탕으로 단점을 상쇄할 수 있었다. 

다음 런던 올림픽에서는 포지션 별 최고의 선수들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선배들도 안 부러운 경기력

이번 대표팀이 대회에서 남긴 경기당 점수 차는 28.9점. 이는 드림팀이 발족됐던 1992년 이래 3위에 해당한다.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43.8점과 애틀랜타 올림픽의 32.3점 다음 가는 성적이다. 하지만 단순 숫자로 우열을 가리기엔 설득력이 떨어진다.

먼저 세계농구의 수준은 비교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높아졌다. 미국농구를 저지할만한 팀으로 과거 구소련과 크로아티아가 단골손님에 뽑혔지만 NBA 스타들 앞에서는 이렇다할만한 힘을 쓰지 못했다. 하지만 데이비드 스턴 NBA 총재의 리그 세계화 정책으로 유럽이나 남미같은 대륙들의 전력은 무럭무럭 자라기 시작했다. 덕분에 덕 노비츠키나 마누 지노빌리 등 국민 영웅들을 위시로 하여 기존에도 탄탄했던 팀 조직력에 기술이 더해졌다. NBA의 글로벌화가 스스로의 발등을 찍은 셈이다.    

결국 비교선상에서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세계 강호들의 전력을 고려하면 이번 올림픽에서 남긴 28.9의 마진은 숫자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요즘 말로 ‘넘사벽’의 경지에 이른 격차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알렌 아이버슨이나 팀 던컨 등 최고의 개인기량을 지닌 선수들로도 이루지 못한 이번 성과는 역시 팀 조직력이 기인한 결과물이다. 농구를 고안한 네이 스미스 박사의 ‘팀 스포츠다’라는 고언은 세월이 지나도 변치 않는 이치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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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번 대표팀 역시 선수 개개인의 기량에 의존을 탈피하지는 못했다. 팀 내 득점 1위를 차지한 드웨인 웨이드와 뒤를 이은 르브론 제임스, 코비 브라이언트는 대부분의 득점을 1대1이나 속공에서 만들었다. 그렇다면 아이솔레이션과 오픈찬스의 배경은 무엇일까?

역시 수비에서 비롯된 작품이다. 일선에서 최고의 대인방어 능력을 지닌 코비나 웨이드에 노장 제이슨 키드는 상대 백코트를 압박했고 스틸을 유도했다. 이는 대부분 어김없이 득점으로 연결됐다. 스크린이나 백도어, 커터들의 유기적인 움직임과 패턴 플레이는 이번 대표팀에서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트랜지션 게임에서는 찰떡궁합을 선보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전개되는 런 앤 건에서 미국은 전열을 정비할 필요가 없었다. 

가장 확실하고 효율적인 공격을 펼친 미국이지만 문제점도 노출됐다. 3점 슛은 37.7%로 대회 6위에 랭크됐고 자유투는 68%로 간신히 꼴찌를 면했다. 수년간 지적받아온 퓨어가드의 부재문제는 여전히 남겨놓은 것이다. 슈팅 전문 마이클 레드를 카드로 내놓았지만 이번 대회에서 총 18개의 3점 슛을 시도 13개를 허공에 날렸다. 오히려 NBA에서 3점 슛이 약하다 평가받은 제임스나 웨이드는 5할에 가까운 고감도 성공률로 깜짝 성적을 남겼다. 비록 거리는 가까워졌지만 말이다.

돌파의 달인 웨이드는 팀 내 가장 많은 41개의 자유투를 얻어냈지만 63%의 성공률에 그쳐 아쉬움을 샀고 드와이트 하워드 역시 5할에도 못 미치는 ‘샤킬 오닐 급‘ 성공률로 일관해 개선의 여지가 보이지 않았다. 대회 내내 폭발적인 인기로 화제가 된 코비 역시 손가락 부상의 여파로 정확한 슈팅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클러치 상황에서만큼은 해결사를 자처하며 림을 가르는 킬러본능을 드러냈다.

페인트 존으로 편중된 득점이 외각으로 고루 분산될 경우 당분간 세계무대에서 미국을 꺾을 팀은 나오지 않을 전망이다.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찰스 바클리칼 말론의 골밑 득점 외에도 크리스 멀린과 래리 버드의 지원포가 완성도를 더 했다. 애틀랜타 올림픽은 호화 센터 라인업에 레지 밀러와 미치 리치몬드라는 엘리트 저격수가 언제든 채비를 할 만큼 내외각이 안정돼 있었다.
 
몇 가지 문제를 드러낸 미국이지만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신-구조화가 잘 어우러진 이번 대표팀은 대체적으로 20대 선수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어 성장 가능성과 발전의 여지는 충분하다. 제이슨 키드는 대회 마지막 날 “내가 가장 나이가 많은 만큼 쉬는 시간도 많았다”며 대표팀 은퇴를 시사했다. 코비 역시 다음 올림픽에서는 34살이 되어 출전을 장담키 어려운 만큼 런던 원정대는 새얼굴이 가세할 공산이 크다. 

4년 뒤 2012 런던 올림픽에서는 새로운 별들이 노출된 문제들을 보완하여 ‘무결점 드림팀’으로 거듭나길 기대해본다.


이번은 리딤팀, 차기 드림팀은 런던에서

이번 대표팀의 이름은 ‘되찾는다’라는 의미에서 리딤팀이라 명명했다. 따라서 역대 드림팀과의 비교는 다른 시각으로 볼 때 불공평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표면적인 전력 면에서 과거에 비해 떨어질지 모르겠지만 나름의 내실 있는 준비와 성과를 냈다.

중요한 것은 과거 산전수전을 모두 겪은 베테랑 중심의 팀이 아닌 전성기에 막 접어든 젊은 팀이라는 것이다. 대부분이 5년차를 전후로 아직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선수들이다. NBA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앞으로의 국제무대도 기대가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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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자농구대표팀이 잃어버린 두 가지를 되찾았다. 금메달과 드림팀 간판이 그것이다. 이제는 선배들의 위업을 이은 진정한 의미의 차세대 드림팀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24일 열린 베이징 올림픽 남자농구 최종 결승전에서 미국이 스페인을 118-107로 꺾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시드니 올림픽 이후 8년만이다. 지난 아테네 올림픽에서 동메달에 머문 미국은 일본에서 열린 2006 세계 농구선수권 대회에서도 3위에 그치는 등 농구종가로서의 자존심을 구겨왔다. 절치부심한 미국은 전임감독제와 상비군 제도를 확립하며 부활의 기틀을 마련했고 결국 노력의 열매를 맺었다.

중국 입성과 함께 치룬 다섯 차례의 친선 경기에서 다소 불안한 전력을 드러낸 미국이었지만 막상 뚜껑을 여니 주위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음을 증명했다. 조직적인 팀플레이 보다 개인플레이에 의존하는 모습과 확실한 외각슈터의 부재는 여전했지만 끈끈한 수비조직력을 앞세운 전광석화와 같은 시원한 속공 농구는 금빛향연의 밑거름이 되었다.

대회 내내 후반전에 더 강한 면모를 보이며 여유로운 경기운영을 펼친 미국의 모습은 과거 드림팀의 향수를 달래기에 충분했다. 특히 3쿼터에 집중력을 발휘하며 상대팀의 전의를 일찌감치 상실시키는 등 압도적인 경기력을 펼쳤다. 지난 8년간 보여주었던 ‘살얼음판 경기’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때문에 마지막 관문인 스페인과의 결승전은 11점차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보는 이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르브론 제임스는 “스페인에 존경을 표하지만 우리는 다시 정상에 섰다”며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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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전 전승으로 파죽지세를 이어오던 미국만큼이나마 스페인의 각오도 남달랐다. 비록 예선전에서 대패하며 기선제압에는 실패했지만 외나무다리에 선만큼 물러설 수 없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화끈한 득점쟁탈전으로 전개된 1쿼터는 미국의 7점차 리드로 끝났다. 2쿼터는 특유의 압박수비와 속공이 살아난 미국의 분위기였다. 제임스와 웨이드의 적극적인 득점가세로 점수 차를 벌린 미국은 금메달을 눈앞에 두는 듯했지만 스페인의 반격은 후반전에 본격적으로 전개됐다.

3-2지역방어를 앞세우며 수비조직력을 강화한 스페인은 4쿼터 초반 2점차까지 점수를 좁히며 대반격에 나섰다. 21점을 넣은 가솔의 로포스트 장악력은 어려울 때 빛을 발휘했고 농구 신동 루비오의 노련한 경기운영이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고비 때마다 실책을 범하며 부상으로 결장한 토론토 랩터스의 호세 칼데론의 부재가 뼈아팠다. 

특히 NBA만큼이나 빛을 발한 코비 브라이언트는 클러치 능력을 십분 발휘하며 위기의 리딤팀을 구해냈다. 경기 종료 3분여 전 루디 페르난데즈의 3점 슛으로 승부의 향방은 안개 속에 빠져들었고 코비는 바로 3점 슛과 함께 얻어낸 자유투를 성공시키며 ‘4점 플레이’로 응수했다. 4쿼터에 기록한 미국의 27점 중 절반에 가까운 13점은 코비의 몫일만큼 해결사의 면모는 유감없이 발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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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 내내 화끈한 공격력을 선사한 드웨인 웨이드는 팀 내 최다인 27점으로 금메달을 도왔다. 웨이드는 “아테네 올림픽 당시에는 신인들의 재능을 보여줄 기회도 없었다. 나는 제임스, 앤쏘니와 함께 팀을 돕고 이끌기를 정말로 원했다”며 기쁨을 전했다. 전반에만 21점을 몰아넣는 괴력을 발휘한 웨이드의 덕분에 미국은 근소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스페인은 아르헨티나와 함께 미국의 독주를 저지할 카드로 꼽혔지만 메달의 색을 바꾸기엔 역부족이었다. 파우 가솔은 “우린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경기에 임했지만 미국은 대회에서 보여준 모습과 같이 한결같았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하지만 1984 LA 올림픽에 이어 24년 만에 이루어낸 두 번째 결승진출과 성공적인 세대교체를 달성하며 위안을 삼았다. 꾸준히 국제무대에서 경험을 쌓아온 마르크 가솔과 DKV 유벤투트의 루디 페르난데즈-루비오 콤비 등 ACB를 주름잡는 젊은 피들에게는 은메달 이상의 경험이 됐을 것이기 때문.    

‘리딤팀‘ 간판은 미국의 금메달 탈환과 함께 내렸지만 이제는 새로운 드림팀의 위치를 지키기 위한 입장에 섰다. 세계 흐름에 맞추어 체계적인 국가대표팀 체제를 도입한 미국농구의 질주가 얼마나 지속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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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졸출신 포워드 대리우스 마일스(27, 206cm)가 디펜딩 챔피언 보스턴 셀틱스의 문을 두드렸다. 자세한 계약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실상 선수생명이 끝날 것처럼 보였던 마일스는 부상을 극복하며 NBA에 2년 만에 돌아오게 됐다.  

지난 2000년 LA 클리퍼스에 3순위로 지명된 마일스는 2005년 포틀랜드 블레이저스로 이적하며 지난 두 시즌을 오른쪽 무릎 골절로 헌납해야 했다. 결국 포틀랜드는 마일스에게 웨이브 공시를 통보할 수밖에 없었다. 선수생명을 더 이어가기 힘든 치명적인 부상에 한해서는 구단으로부터 조건 없이 방출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뛰어난 운동신경을 바탕으로 다재다능함을 겸비한 마일스는 ‘제2의 케빈 가넷‘으로 그 기대를 한 몸에 받아왔다. 본인 역시 데뷔 초창기부터 가넷을 롤 모델로 삼으며 명확한 성장라인을 잡았지만 점프슛과 빈약한 웨이트 등 누차 지적받아온 단점을 보완하지 못했다. 기약 없는 성장통과 무릎부상이라는 이중고는 마일스에게 절치부심의 계기를 마련케 했다. 무릎수술 이후 재기를 노리던 그는 결국 결실을 맺었다.  

보스턴은 마일스의 부상은 확실히 책임지겠다는 입장이다. 대니 에인지 단장은 “대리우스의 건강은 날로 좋아지고 있다. 성실한 태도 역시 우리를 감동시켰다. 닥 리버스 감독과 나는 마일스가 몇 달 안에 우리의 승리를 도울 수 있을 것이라 확신 한다”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식스맨 제임스 포지를 잃으며 벤치자원의 수급이 절실했던 보스턴 입장에서는 마일스의 영입소식은 반갑기만 하다.

마일스 역시 보스턴 입성에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않고 있다. “지난 시즌 보스턴의 경기를 많이 봤다. 코트 위에서의 팀워크나 조직력도 맘에 든다”며 운을 뗀 마일스는 “팀에 합류하여 뛰는 것은 정말 흥분된다. 내 경력을 되돌리기 위해 노력 할 것이다”며 각오를 다졌다.
 
여섯 시즌동안 총 412경기에서 10.6점 5.2리바운드 1.1블락을 기록하고 있는 마일스는 보스턴의 주전 멤버들을 보좌할 것이 확실하다. 케빈 가넷과 폴 피어스가 버티는 올스타 라인으로 인해 마일스의 설 자리는 좁아 보이지만 주어진 출장시간을 잘 활용한다면 성공적인 재기도 꿈만은 아니다.

공수에서 알토란 활약을 보여주었던 포지의 모습을 기대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지만 발군의 운동신경을 십분 활용하여 벤치 에너자이저로서의 역할만 소화할 수 있다면 보스턴의 백 투 백 전선에 큰 힘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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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NBA의 인기가 몰아치기 시작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NBA의 글로벌화에 가장 크게 공헌했던 마이클 조던의 1차 은퇴 이 후였다고 생각한다. 앤퍼니 하더웨이, 그랜트 힐 등의 스타들은 한국 청소년들의 우상으로 자리잡기 시작했고 매 주 공중파를 통해 NBA 경기를 시청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리그의 미래를 책임질 것으로 손꼽히던 스타들은 유난히 그 빛을 허무하게 잃어간 경우가 많았다. 하더웨이와 힐을 비롯해서 자말 매쉬번, 래리 존슨 같은 선수들은 그 재능을 채 꽃피우기도 전에 조금씩 자신의 자리를 잃어갔다.

오늘 만나볼 선수 역시 당시 최고의 전성기를 달리던 선수로 절정의 기량을 뽐내다가 너무도 허무하게 무너져버린 선수다. 앞서 언급한 선수들과는 달리 부상이 아닌 다른 이유로 무너져내리긴 했지만 말이다. 그는 하늘을 날아다니며 NBA 공중전의 최강자로 군림했고, 미국을 대표하여 세계에 NBA 농구의 화려함을 전파하기도 했다. 그 위대한 조던을 상대로 파이널에서 진검 승부를 펼치기도 했으며 국내 NBA 팬들에게는 하더웨이, 힐 만큼이나 커다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선수이기도 하다.

골밑이라는 정글을 누비는 한 마리 야수와도 같았던, 리그를 대표하는 하이라이트 필름. 오늘 만나볼 '그 때 그 선수' 는 바로 숀 켐프다.


고졸 신인? 얼리 엔트리?


켐프의 엄청난 운동능력은 고교시절부터 유명한 것이었다.리바운드를 위해 뛰어올랐다가 림에 머리를 부딪쳐 부상을 입었던 일화는 잘 알려진 사실.

이토록 훌륭한 신체조건에 무시무시한 운동능력을 지닌 유망주 포워드를 리쿠르팅 대상으로 삼지 않았던 대학은 없을 것이다. 켐프 역시 농구 명문 켄터키 대학교에 리쿠르팅 되어 NCAA 무대 데뷔를 준비한다.

그러나 데뷔를 하기도 전에 크고 작은 농구 외적인 일들로 학교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어 버린 켐프는 트니리니티 밸리 컬리지로 전학을 가게 된다. 하지만 이미 시즌을 치루기 위한 선수등록 기간이 지나버린 뒤였고, 켐프는 NCAA 프레쉬맨 시즌을 날려버릴 위기에 처한다. 리그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1년을 기다려야만 했던 것이다. 결국 1년을 기다린 뒤 NCAA에 데뷔를 하기 보다는 곧장 프로행을 결심한 켐프는 그렇게 1989년 드래프트에 참가를 신청한다.

보통 모제스 말론 이 후 최초의 고졸루키라는 단어로 숀 켐프를 설명하고는 하는데, 어떻게 보면 극단적인 얼리 엔트리 케이스라고 설명할 수도 있겠다. 어쨌든 대학교에 입학을 했었던 선수였으니. (실제로 드래프트 참가 당시 켐프의 출신 학교는 Trinity Valley Community College 로 표기되었다.)

이런 저런 말썽이 많았던 켐프였지만 그의 가능성은 프로 무대에서도 높이 평가되어 시애틀 수퍼소닉스에 의해 1라운드 17번째로 이름이 호명되며 NBA 무대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당시로써는 대학무대 경험이 전무했던 그에게 굉장히 높은 순위의 지명권이 행사된 것이었다.


시애틀의 잠못드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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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 시즌 벤치 멤버로 플레이하며 가능성을 보인 켐프는 2년차 시즌을 보내며 본격적으로 시애틀의 스타팅 포워드로 발돋움한다. 그리고 놀라운 운동능력으로 매 경기마다 하이라이트 필름을 양산하며 팬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특히 그의 2년차 시즌이었던 1991-1992 시즌, 팀의 헤드코치로 조지 칼 감독이 부임하면서 켐프와 시애틀의 고공비행이 서서히 시작된다.단지 하늘을 날아다니던 유망주에서 더블더블을 기록하는 빅 맨으로 성장한 켐프와 함께 시애틀은 돌풍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큰 키에 민첩함과 점프력, 천부적인 포스트 무브 감각을 앞세운 켐프는 시애틀 골밑의 지배자로 떠올랐다. 역대 최고의 덩커를 논할 때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그인 만큼 파워풀하고 다이나믹한 덩크는 상대팀을 파괴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게다가 날이 갈수록 성장해갔던 켐프는 단순한 덩커가 아닌 훌륭한 로우 포스트 득점원으로 성장했다. 그런 그에게 팬들이 붙여준 별명이 바로 Reign Man. 시애틀의 골밑에 군림하며 팀을 이끌던 그에게 딱 맞는 별명이 아닌가 생각한다.

좌우 베이스 라인에서 보여주는 폭발적인 무브에 이은 골밑 슛, 림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솟구쳐 올라 성공시키던 페이스 업 점퍼는 위력적이고 확실한 득점루트였다. 수비 센스도 훌륭한 선수여서 1:1 포스트 디펜스는 리그에서도 손꼽히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어마어마한 탄력을 자랑하는 블록슛은 그의 덩크만큼이나 화려한 볼거리를 만들어냈고, 박스 아웃과 보드 장악력도 훌륭해서 켐프가 코트위에 있는 동안만큼은 시애틀의 골밑을 쉽게 공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대학 무대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인지 기본기에 있어 문제를 드러내기도 했던 켐프였다. 그의 가장 커다란 단점으로 지적되었던 것은 볼 핸들링이었는데, 볼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을 좋아했던 켐프였지만 그의 볼 핸들링은 굉장히 투박한 것이어서 생애 통산 A/T rate 가 0.4에 그치는 수준이었다. 볼 핸들링 만큼이나 커다란 단점은 바로 파울 관리가 미숙하다는 점이었다.

리그 최고수준의 기량을 갖춘 빅 맨이었던 켐프였지만 단 한 번도 시즌 평균 20득점-10리바운드를 기록하지 못했던 것은 다름 아닌 파울 트러블 때문이었다. 최절정의 기량을 자랑하던 시절에도 평균 플레잉 타임이 35분을 넘지 못했던 것은 평균 4개에 육박하는 파울 숫자 때문이었는데, 만약 켐프가 파울 관리만 철저히 할 수 있었다면 전성기 내내 20득점-10리바운드를 손쉽게 기록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진 선수였다는 점을 떠올려 봤을 때 볼 핸들링의 미숙함보다도 더욱 아쉽게 다가오는 단점이 아닐 수 없다.

비록 이런 단점을 안고 있던 선수였음에도 너무나 출중한 실력과 매력을 가진 선수였기에 홈팬들의 지지를 한 몸에 받을 수 있었다. 특히 1990년 드래프트를 통해 팀에 합류한 게리 페이튼과의 콤비 플레이는 시간이 갈수록 그 위력을 더했고 지난 시즌을 뜨겁게 달궜던 크리스 폴과 타이슨 챈들러의 "CP to TC" 앨리웁 콤비가 있기 훨씬 이전에, 켐프와 페이튼의 "GP to SK" 앨리웁 콤비는 리그를 뒤흔들며 서서히 리그 정상을 향해 달려갔다.

두 명, 세 명의 블로커를 뚫고 in your face 를 작렬시킨 뒤, 마치 이소룡을 연상케 하는 포즈를 취하며 포효하던 켐프의 모습은 전율 그 자체였다.


초음속 비행, 리그의 "Reign Man" 이 되다.

1993-1994 시즌, 켐프는 어느 덧 시애틀의 에이스 플레이어가 되어 있었고 팀은 63승 19패를 기록한 서부 컨퍼런스 챔피언이 되어 있었다. 1번 시드를 받은 채 돌입했던 PO의 상대는 덴버 너게츠. 모두가 시애틀의 우세함을 인정하고 있었고, 그들의 손쉬운 승리가 점쳐지던 시리즈. 그러나 시애틀은 리그 역사상 최초의 8번 시드 업셋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디켐베 무톰보가 공을 잡고 코트에 누워 환희에 찬 소리를 지르는 장면으로 유명했던 이 시리즈는 시애틀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

비록 실패로 끝나버린 PO였지만 켐프의 위상은 하늘을 찔렀다. 1994년의 여름에 있었던 세계 농구 선수권 대회에 미국은 리그를 대표할 젊은 스타들을 주축으로 결성된 드림팀2 를 출격시켰고, 숀 켐프는 국가 대표가 되어 전 세계에 NBA의 화려함을 널리 알렸다. 그야말로 자타공인 리그의 미래를 빛낼 빅 맨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어진 1994-1995 시즌, 57승 25패를 기록하며 서부 컨퍼런스 4번 시드를 받은 시애틀은 1라운드에서 5번 시드의 LA 레이커스를 만나게 된다. 역시나 대부분 시애틀의 우세함을 점쳤던 시리즈였으나, 그들은 또 다시 업셋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1995-1996 시즌을 맞이하는 시애틀의 각오는 남다른 것이었다. 두 번이나 업셋의 희생양이 된 그들은 더 이상의 패배를 원하지 않았다. 한 때 넥스트 조던이라고까지 불리던 켄들 길을 보내고 허시 호킨스를 영입하며 "게리 페이튼-허시 호킨스-데틀리프 슈렘프-숀 켐프-샘 퍼킨스" 로 이어지는 스타팅 라인업을 결성했다. 내외곽과 공수의 조화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 라인업을 앞세운 시애틀은 다시금 고공비행을 시작했다.

그들의 목표는 오직 파이널이었다. 엄청난 트랩 디펜스와 켐프-페이튼 콤비를 주축으로 하는 화려한 공격을 앞세워 얻은 성적은 64승 18패. 홈에서의 성적이 38승 3패에 이를 만큼 압도적인 경기를 펼치며 착실히 승수를 쌓아갔던 결과였다. 지금까지도 시애틀의 프랜차이즈 최다승으로 기록되어 있는 성적을 거두며 서부 컨퍼런스 우승을 차지한 켐프와 동료들은 거칠 것이 없었다. 새크라멘토 킹스, 휴스턴 로케츠, 유타 재즈를 차례로 격파하며 꿈에 그리던 파이널 진출에 성공한다.

파이널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상대는 무려 72승을 기록했던 마이클 조던의 시카고 불스. 켐프와 시애틀은 리그 역사상 가장 많은 승리를 기록한 팀을 상대로 최선을 다해 맞섰다. 하지만 2승 4패를 기록하며 아쉬운 준우승에 머물고 만다. 페이튼은 조던과 스카티 피펜에게, 켐프는 데니스 로드맨에게 막히며 공수 양면에서 부족함을 여실히 드러냈던 파이널이었다.


충격의 이적

준우승이라는 절반의 성공을 거둔 시즌을 뒤로한 채 맞이한 1996-1997 시즌. 시애틀은 짐 맥길베인이라는 백인 센터와 거액의 계약을 체결한다. 자존심이 강했던 켐프는 큰 계약을 따낸 맥길베인과 구단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맥길베인이 "먹튀"로 이름을 날릴수록 켐프와 구단 사이의 골은 깊어져 갔다.

물론 그런 배경과 무관하게 켐프와 시애틀의 위력은 여전했다. 그들은 57승 25패를 기록하며 서부의 강자 노릇을 톡톡히 했다. 하지만 PO 2라운드에서 휴스턴에게 7차전 접전 끝에 패배한 이 후 시애틀은 결단을 내린다. 지금의 선수 구성으로는 리그의 패권을 차지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결론이 내려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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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의 오프 시즌, 시애틀 수퍼소닉스,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밀워키 벅스 간의 3자 트레이드가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밀워키의 빈 베이커를 받아온 시애틀은 켐프를 클리블랜드로 보내버린다. (하지만 훗날 이 트레이드의 승자는 타이론 힐과 테런 브랜든을 얻은 밀워키 단 한 팀이었을 뿐, 모두에게 상처만을 안긴 트레이드로 기억된다.)

숀 켐프의 실망은 엄청난 것이었다. 높은 점프력만큼이나 커다란 자존심을 가지고 있던 그는, 프랜차이즈에서 버림 받았다는 상실감을 크게 느꼈다. 그러나 그의 실력은 흔들리지 않았다. 클리블랜드에서의 초창기에는 여전히 위력적인 Reign Man 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특히 장신 센터 지두르나스 일가우스카스와 세드릭 핸더슨, 데릭 앤더슨, 브래빈 나이트로 이어지는 루키 3인방에 숀 켐프가 가세하면서 클리블랜드는 동부의 다크호스로 떠올랐다. 그들은 47승 35패를 기록하며 PO에 나섰고 인디애나 페이서스와 1라운드에서 만났지만 1승 3패로 패배하고 만다.

비록 시리즈는 내주었지만 켐프의 위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당시 인디애나의 골밑을 책임지던 데일 데이비스-안토니오 데이비스 콤비는 켐프에게 무차별 폭격을 당했다. 두 명의 데이비스가 돌아가며 켐프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켐프는 무주공산에서 플레이하듯 인디애나의 골밑을 맹폭했다.

차기 시즌을 기다리는 동안, 켐프와 루키 3인방이 이끄는 클리블랜드는 동부의 새로운 강자가 될 것이라는 장밋빛 예측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직장 폐쇄의 여파로 단축 시즌이 되었던 1998-1999 시즌, 일가우스카스는 부상으로 쓰러졌고 팀은 예전 같지 않았다. 22승 28패라는 성적을 기록하며 5할 승률을 달성하는 것마저 실패한 그들은 PO 진출에 실패하고 만다.

이어진 1999-2000 시즌에는 어설픈 리빌딩을 시도한 구단의 판단 미스로 팀의 분위기는 엉망이었다. 켐프는 평균 17.8득점, 8.8 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이름값을 했지만 조금씩 시애틀에서의 포스를 잃어갔다. 스폰서였던 리복과의 계약기간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이키 농구화를 신고 경기에 나서며 문제를 일으켰고, 리복의 농구화는 쓰레기일 뿐이라며 소송에 휘말리기도 했다.

조금씩 가치가 하락하던 켐프에게 손을 뻗은 것은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였다. 당시 드림팀에 가까운 화려한 멤버를 구축하던 포틀랜드로의 이적은 켐프의 부활을 알리는 전주곡이 될 것으로 기대됐다.


절망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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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포틀랜드 유니폼을 들고 나타난 켐프의 모습에 전 세계 NBA 팬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샤프한 몸매와 탄탄한 근육질을 자랑하던 켐프는 온데간데없어지고, 늘어지는 턱살과 튀어나온 뱃살의 켐프가 나타난 것이다. 극명한 데피니션을 자랑하던 두 팔의 근육과 섹시하다는 표현이 어울릴법했던 날렵한 발목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화려한 멤버를 자랑하던 포틀랜드에서 폐인이 되어버린 켐프의 자리는 없었다. 엎친데 덥친격으로 술과 코카인에까지 손을 대면서, 그야말로 밑바닥으로 추락을 하게 된 켐프였다. 이 후 올랜도 매직으로 이적하여 재기를 노려보지만, 이미 그의 몸은 예전의 야성미 넘치는 세포들이 모두 죽어 사라져버린 뒤였다.

떠밀리다시피 하게 된 은퇴 이 후에도 술을 달고 살았으며 마약 소지가 적발되기도 했다. 이 후 복귀를 타진하며 뼈를 깎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켐프의 훈련 장면이 인터넷에 공개되며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더 이상 그를 원하는 팀은 나타나지 않았다. 


숀 켐프를 그리며

엄청난 스피드로 coast to coast 에 이은 슬램덩크를 찍어 내리고, 상대팀의 골밑슛을 스파이크 하듯 쳐내며, 페이튼의 앨리웁 패스를 받아 림이 부서져라 내리치고, 현란한 스핀 무브로 상대팀의 골밑을 유린하던 숀 켐프의 말로는 너무나 어이없는 것이었다. 치명적인 부상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며, 노화에 의한 자연스러운 위력감소에 의한 것도 아니었다. 사생활을 절제하지 못하고, 자기 관리에 실패하며 NBA 역사에 손꼽힐 만한 운동능력이라는 축복 받은 재능을 스스로 태워버렸던 것이다. 매년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산타 복장을 하고 시애틀의 어린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기도 했으며, 매직 존슨의 따뜻한 미소를 가장 닮고 싶다고 말했던 켐프였기에 그 충격은 더할 수밖에 없었다.

흔히 역대 최고의 덩커를 논할 때면 빈스 카터, 도미닉 윌킨스, 마이클 조던, 줄리어스 어빙 등의 이름이 나온 뒤에야 켐프의 이름이 거론되곤 한다. 하지만 내게 있어서 역대 최고의 덩커는 그 누구도 아닌 숀 켐프다. 켐프의 덩크에서 카터, 윌킨스가 보여주는 화려함이나 조던, 어빙이 보여주는 우아함은 찾아볼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온 몸의 세포가 본능적으로 반응하여 본인도 인지하지 못하는 듯 한 동작으로 림을 내려치던 켐프의 모습은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전율을 불러일으키던 것이었다.

날렵한 몸매와 험상궂은 얼굴, 터프한 매너와 놀라운 운동능력으로 리그의 골밑을 지배하던 숀 켐프.

갈수록 세련된 몸놀림과 유려한 스킬을 자랑하는 선수들이 리그를 지배해나가는 요즘, 켐프의 그것과 같은, 온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반응하여 터져 나오는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상대방을 압도하는 선수를 다신 볼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에 아쉽게 무너져버린 그를 향한 향수가 더욱 크게 느껴지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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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wn Kemp (1990-2003)



생애통산 1051경기 출장(727선발)
평균 14.6득점, 8.4리바운드, 1.6어시스트, 27.9분 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