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NBA의 인기가 몰아치기 시작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NBA의 글로벌화에 가장 크게 공헌했던 마이클 조던의 1차 은퇴 이 후였다고 생각한다. 앤퍼니 하더웨이, 그랜트 힐 등의 스타들은 한국 청소년들의 우상으로 자리잡기 시작했고 매 주 공중파를 통해 NBA 경기를 시청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리그의 미래를 책임질 것으로 손꼽히던 스타들은 유난히 그 빛을 허무하게 잃어간 경우가 많았다. 하더웨이와 힐을 비롯해서 자말 매쉬번, 래리 존슨 같은 선수들은 그 재능을 채 꽃피우기도 전에 조금씩 자신의 자리를 잃어갔다.

오늘 만나볼 선수 역시 당시 최고의 전성기를 달리던 선수로 절정의 기량을 뽐내다가 너무도 허무하게 무너져버린 선수다. 앞서 언급한 선수들과는 달리 부상이 아닌 다른 이유로 무너져내리긴 했지만 말이다. 그는 하늘을 날아다니며 NBA 공중전의 최강자로 군림했고, 미국을 대표하여 세계에 NBA 농구의 화려함을 전파하기도 했다. 그 위대한 조던을 상대로 파이널에서 진검 승부를 펼치기도 했으며 국내 NBA 팬들에게는 하더웨이, 힐 만큼이나 커다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선수이기도 하다.

골밑이라는 정글을 누비는 한 마리 야수와도 같았던, 리그를 대표하는 하이라이트 필름. 오늘 만나볼 '그 때 그 선수' 는 바로 숀 켐프다.


고졸 신인? 얼리 엔트리?


켐프의 엄청난 운동능력은 고교시절부터 유명한 것이었다.리바운드를 위해 뛰어올랐다가 림에 머리를 부딪쳐 부상을 입었던 일화는 잘 알려진 사실.

이토록 훌륭한 신체조건에 무시무시한 운동능력을 지닌 유망주 포워드를 리쿠르팅 대상으로 삼지 않았던 대학은 없을 것이다. 켐프 역시 농구 명문 켄터키 대학교에 리쿠르팅 되어 NCAA 무대 데뷔를 준비한다.

그러나 데뷔를 하기도 전에 크고 작은 농구 외적인 일들로 학교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어 버린 켐프는 트니리니티 밸리 컬리지로 전학을 가게 된다. 하지만 이미 시즌을 치루기 위한 선수등록 기간이 지나버린 뒤였고, 켐프는 NCAA 프레쉬맨 시즌을 날려버릴 위기에 처한다. 리그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1년을 기다려야만 했던 것이다. 결국 1년을 기다린 뒤 NCAA에 데뷔를 하기 보다는 곧장 프로행을 결심한 켐프는 그렇게 1989년 드래프트에 참가를 신청한다.

보통 모제스 말론 이 후 최초의 고졸루키라는 단어로 숀 켐프를 설명하고는 하는데, 어떻게 보면 극단적인 얼리 엔트리 케이스라고 설명할 수도 있겠다. 어쨌든 대학교에 입학을 했었던 선수였으니. (실제로 드래프트 참가 당시 켐프의 출신 학교는 Trinity Valley Community College 로 표기되었다.)

이런 저런 말썽이 많았던 켐프였지만 그의 가능성은 프로 무대에서도 높이 평가되어 시애틀 수퍼소닉스에 의해 1라운드 17번째로 이름이 호명되며 NBA 무대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당시로써는 대학무대 경험이 전무했던 그에게 굉장히 높은 순위의 지명권이 행사된 것이었다.


시애틀의 잠못드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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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 시즌 벤치 멤버로 플레이하며 가능성을 보인 켐프는 2년차 시즌을 보내며 본격적으로 시애틀의 스타팅 포워드로 발돋움한다. 그리고 놀라운 운동능력으로 매 경기마다 하이라이트 필름을 양산하며 팬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특히 그의 2년차 시즌이었던 1991-1992 시즌, 팀의 헤드코치로 조지 칼 감독이 부임하면서 켐프와 시애틀의 고공비행이 서서히 시작된다.단지 하늘을 날아다니던 유망주에서 더블더블을 기록하는 빅 맨으로 성장한 켐프와 함께 시애틀은 돌풍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큰 키에 민첩함과 점프력, 천부적인 포스트 무브 감각을 앞세운 켐프는 시애틀 골밑의 지배자로 떠올랐다. 역대 최고의 덩커를 논할 때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그인 만큼 파워풀하고 다이나믹한 덩크는 상대팀을 파괴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게다가 날이 갈수록 성장해갔던 켐프는 단순한 덩커가 아닌 훌륭한 로우 포스트 득점원으로 성장했다. 그런 그에게 팬들이 붙여준 별명이 바로 Reign Man. 시애틀의 골밑에 군림하며 팀을 이끌던 그에게 딱 맞는 별명이 아닌가 생각한다.

좌우 베이스 라인에서 보여주는 폭발적인 무브에 이은 골밑 슛, 림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솟구쳐 올라 성공시키던 페이스 업 점퍼는 위력적이고 확실한 득점루트였다. 수비 센스도 훌륭한 선수여서 1:1 포스트 디펜스는 리그에서도 손꼽히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어마어마한 탄력을 자랑하는 블록슛은 그의 덩크만큼이나 화려한 볼거리를 만들어냈고, 박스 아웃과 보드 장악력도 훌륭해서 켐프가 코트위에 있는 동안만큼은 시애틀의 골밑을 쉽게 공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대학 무대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인지 기본기에 있어 문제를 드러내기도 했던 켐프였다. 그의 가장 커다란 단점으로 지적되었던 것은 볼 핸들링이었는데, 볼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을 좋아했던 켐프였지만 그의 볼 핸들링은 굉장히 투박한 것이어서 생애 통산 A/T rate 가 0.4에 그치는 수준이었다. 볼 핸들링 만큼이나 커다란 단점은 바로 파울 관리가 미숙하다는 점이었다.

리그 최고수준의 기량을 갖춘 빅 맨이었던 켐프였지만 단 한 번도 시즌 평균 20득점-10리바운드를 기록하지 못했던 것은 다름 아닌 파울 트러블 때문이었다. 최절정의 기량을 자랑하던 시절에도 평균 플레잉 타임이 35분을 넘지 못했던 것은 평균 4개에 육박하는 파울 숫자 때문이었는데, 만약 켐프가 파울 관리만 철저히 할 수 있었다면 전성기 내내 20득점-10리바운드를 손쉽게 기록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진 선수였다는 점을 떠올려 봤을 때 볼 핸들링의 미숙함보다도 더욱 아쉽게 다가오는 단점이 아닐 수 없다.

비록 이런 단점을 안고 있던 선수였음에도 너무나 출중한 실력과 매력을 가진 선수였기에 홈팬들의 지지를 한 몸에 받을 수 있었다. 특히 1990년 드래프트를 통해 팀에 합류한 게리 페이튼과의 콤비 플레이는 시간이 갈수록 그 위력을 더했고 지난 시즌을 뜨겁게 달궜던 크리스 폴과 타이슨 챈들러의 "CP to TC" 앨리웁 콤비가 있기 훨씬 이전에, 켐프와 페이튼의 "GP to SK" 앨리웁 콤비는 리그를 뒤흔들며 서서히 리그 정상을 향해 달려갔다.

두 명, 세 명의 블로커를 뚫고 in your face 를 작렬시킨 뒤, 마치 이소룡을 연상케 하는 포즈를 취하며 포효하던 켐프의 모습은 전율 그 자체였다.


초음속 비행, 리그의 "Reign Man" 이 되다.

1993-1994 시즌, 켐프는 어느 덧 시애틀의 에이스 플레이어가 되어 있었고 팀은 63승 19패를 기록한 서부 컨퍼런스 챔피언이 되어 있었다. 1번 시드를 받은 채 돌입했던 PO의 상대는 덴버 너게츠. 모두가 시애틀의 우세함을 인정하고 있었고, 그들의 손쉬운 승리가 점쳐지던 시리즈. 그러나 시애틀은 리그 역사상 최초의 8번 시드 업셋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디켐베 무톰보가 공을 잡고 코트에 누워 환희에 찬 소리를 지르는 장면으로 유명했던 이 시리즈는 시애틀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

비록 실패로 끝나버린 PO였지만 켐프의 위상은 하늘을 찔렀다. 1994년의 여름에 있었던 세계 농구 선수권 대회에 미국은 리그를 대표할 젊은 스타들을 주축으로 결성된 드림팀2 를 출격시켰고, 숀 켐프는 국가 대표가 되어 전 세계에 NBA의 화려함을 널리 알렸다. 그야말로 자타공인 리그의 미래를 빛낼 빅 맨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어진 1994-1995 시즌, 57승 25패를 기록하며 서부 컨퍼런스 4번 시드를 받은 시애틀은 1라운드에서 5번 시드의 LA 레이커스를 만나게 된다. 역시나 대부분 시애틀의 우세함을 점쳤던 시리즈였으나, 그들은 또 다시 업셋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1995-1996 시즌을 맞이하는 시애틀의 각오는 남다른 것이었다. 두 번이나 업셋의 희생양이 된 그들은 더 이상의 패배를 원하지 않았다. 한 때 넥스트 조던이라고까지 불리던 켄들 길을 보내고 허시 호킨스를 영입하며 "게리 페이튼-허시 호킨스-데틀리프 슈렘프-숀 켐프-샘 퍼킨스" 로 이어지는 스타팅 라인업을 결성했다. 내외곽과 공수의 조화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 라인업을 앞세운 시애틀은 다시금 고공비행을 시작했다.

그들의 목표는 오직 파이널이었다. 엄청난 트랩 디펜스와 켐프-페이튼 콤비를 주축으로 하는 화려한 공격을 앞세워 얻은 성적은 64승 18패. 홈에서의 성적이 38승 3패에 이를 만큼 압도적인 경기를 펼치며 착실히 승수를 쌓아갔던 결과였다. 지금까지도 시애틀의 프랜차이즈 최다승으로 기록되어 있는 성적을 거두며 서부 컨퍼런스 우승을 차지한 켐프와 동료들은 거칠 것이 없었다. 새크라멘토 킹스, 휴스턴 로케츠, 유타 재즈를 차례로 격파하며 꿈에 그리던 파이널 진출에 성공한다.

파이널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상대는 무려 72승을 기록했던 마이클 조던의 시카고 불스. 켐프와 시애틀은 리그 역사상 가장 많은 승리를 기록한 팀을 상대로 최선을 다해 맞섰다. 하지만 2승 4패를 기록하며 아쉬운 준우승에 머물고 만다. 페이튼은 조던과 스카티 피펜에게, 켐프는 데니스 로드맨에게 막히며 공수 양면에서 부족함을 여실히 드러냈던 파이널이었다.


충격의 이적

준우승이라는 절반의 성공을 거둔 시즌을 뒤로한 채 맞이한 1996-1997 시즌. 시애틀은 짐 맥길베인이라는 백인 센터와 거액의 계약을 체결한다. 자존심이 강했던 켐프는 큰 계약을 따낸 맥길베인과 구단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맥길베인이 "먹튀"로 이름을 날릴수록 켐프와 구단 사이의 골은 깊어져 갔다.

물론 그런 배경과 무관하게 켐프와 시애틀의 위력은 여전했다. 그들은 57승 25패를 기록하며 서부의 강자 노릇을 톡톡히 했다. 하지만 PO 2라운드에서 휴스턴에게 7차전 접전 끝에 패배한 이 후 시애틀은 결단을 내린다. 지금의 선수 구성으로는 리그의 패권을 차지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결론이 내려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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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의 오프 시즌, 시애틀 수퍼소닉스,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밀워키 벅스 간의 3자 트레이드가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밀워키의 빈 베이커를 받아온 시애틀은 켐프를 클리블랜드로 보내버린다. (하지만 훗날 이 트레이드의 승자는 타이론 힐과 테런 브랜든을 얻은 밀워키 단 한 팀이었을 뿐, 모두에게 상처만을 안긴 트레이드로 기억된다.)

숀 켐프의 실망은 엄청난 것이었다. 높은 점프력만큼이나 커다란 자존심을 가지고 있던 그는, 프랜차이즈에서 버림 받았다는 상실감을 크게 느꼈다. 그러나 그의 실력은 흔들리지 않았다. 클리블랜드에서의 초창기에는 여전히 위력적인 Reign Man 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특히 장신 센터 지두르나스 일가우스카스와 세드릭 핸더슨, 데릭 앤더슨, 브래빈 나이트로 이어지는 루키 3인방에 숀 켐프가 가세하면서 클리블랜드는 동부의 다크호스로 떠올랐다. 그들은 47승 35패를 기록하며 PO에 나섰고 인디애나 페이서스와 1라운드에서 만났지만 1승 3패로 패배하고 만다.

비록 시리즈는 내주었지만 켐프의 위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당시 인디애나의 골밑을 책임지던 데일 데이비스-안토니오 데이비스 콤비는 켐프에게 무차별 폭격을 당했다. 두 명의 데이비스가 돌아가며 켐프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켐프는 무주공산에서 플레이하듯 인디애나의 골밑을 맹폭했다.

차기 시즌을 기다리는 동안, 켐프와 루키 3인방이 이끄는 클리블랜드는 동부의 새로운 강자가 될 것이라는 장밋빛 예측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직장 폐쇄의 여파로 단축 시즌이 되었던 1998-1999 시즌, 일가우스카스는 부상으로 쓰러졌고 팀은 예전 같지 않았다. 22승 28패라는 성적을 기록하며 5할 승률을 달성하는 것마저 실패한 그들은 PO 진출에 실패하고 만다.

이어진 1999-2000 시즌에는 어설픈 리빌딩을 시도한 구단의 판단 미스로 팀의 분위기는 엉망이었다. 켐프는 평균 17.8득점, 8.8 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이름값을 했지만 조금씩 시애틀에서의 포스를 잃어갔다. 스폰서였던 리복과의 계약기간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이키 농구화를 신고 경기에 나서며 문제를 일으켰고, 리복의 농구화는 쓰레기일 뿐이라며 소송에 휘말리기도 했다.

조금씩 가치가 하락하던 켐프에게 손을 뻗은 것은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였다. 당시 드림팀에 가까운 화려한 멤버를 구축하던 포틀랜드로의 이적은 켐프의 부활을 알리는 전주곡이 될 것으로 기대됐다.


절망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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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포틀랜드 유니폼을 들고 나타난 켐프의 모습에 전 세계 NBA 팬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샤프한 몸매와 탄탄한 근육질을 자랑하던 켐프는 온데간데없어지고, 늘어지는 턱살과 튀어나온 뱃살의 켐프가 나타난 것이다. 극명한 데피니션을 자랑하던 두 팔의 근육과 섹시하다는 표현이 어울릴법했던 날렵한 발목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화려한 멤버를 자랑하던 포틀랜드에서 폐인이 되어버린 켐프의 자리는 없었다. 엎친데 덥친격으로 술과 코카인에까지 손을 대면서, 그야말로 밑바닥으로 추락을 하게 된 켐프였다. 이 후 올랜도 매직으로 이적하여 재기를 노려보지만, 이미 그의 몸은 예전의 야성미 넘치는 세포들이 모두 죽어 사라져버린 뒤였다.

떠밀리다시피 하게 된 은퇴 이 후에도 술을 달고 살았으며 마약 소지가 적발되기도 했다. 이 후 복귀를 타진하며 뼈를 깎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켐프의 훈련 장면이 인터넷에 공개되며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더 이상 그를 원하는 팀은 나타나지 않았다. 


숀 켐프를 그리며

엄청난 스피드로 coast to coast 에 이은 슬램덩크를 찍어 내리고, 상대팀의 골밑슛을 스파이크 하듯 쳐내며, 페이튼의 앨리웁 패스를 받아 림이 부서져라 내리치고, 현란한 스핀 무브로 상대팀의 골밑을 유린하던 숀 켐프의 말로는 너무나 어이없는 것이었다. 치명적인 부상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며, 노화에 의한 자연스러운 위력감소에 의한 것도 아니었다. 사생활을 절제하지 못하고, 자기 관리에 실패하며 NBA 역사에 손꼽힐 만한 운동능력이라는 축복 받은 재능을 스스로 태워버렸던 것이다. 매년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산타 복장을 하고 시애틀의 어린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기도 했으며, 매직 존슨의 따뜻한 미소를 가장 닮고 싶다고 말했던 켐프였기에 그 충격은 더할 수밖에 없었다.

흔히 역대 최고의 덩커를 논할 때면 빈스 카터, 도미닉 윌킨스, 마이클 조던, 줄리어스 어빙 등의 이름이 나온 뒤에야 켐프의 이름이 거론되곤 한다. 하지만 내게 있어서 역대 최고의 덩커는 그 누구도 아닌 숀 켐프다. 켐프의 덩크에서 카터, 윌킨스가 보여주는 화려함이나 조던, 어빙이 보여주는 우아함은 찾아볼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온 몸의 세포가 본능적으로 반응하여 본인도 인지하지 못하는 듯 한 동작으로 림을 내려치던 켐프의 모습은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전율을 불러일으키던 것이었다.

날렵한 몸매와 험상궂은 얼굴, 터프한 매너와 놀라운 운동능력으로 리그의 골밑을 지배하던 숀 켐프.

갈수록 세련된 몸놀림과 유려한 스킬을 자랑하는 선수들이 리그를 지배해나가는 요즘, 켐프의 그것과 같은, 온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반응하여 터져 나오는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상대방을 압도하는 선수를 다신 볼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에 아쉽게 무너져버린 그를 향한 향수가 더욱 크게 느껴지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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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wn Kemp (1990-2003)



생애통산 1051경기 출장(727선발)
평균 14.6득점, 8.4리바운드, 1.6어시스트, 27.9분 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