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부에서 장기집권 하던 미국의 독주가 끝나며 세계 농구판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금메달이 미국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인식이 전파되며 희망과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생긴 것이다. 한편 농구의 올림픽 등장과 더불어 끊임없는 시도와 변화를 모색해온 FIBA는 여성 농구 종목을 채택함에 따라 진정한 스포츠 정신을 아우를 수 있는 전기를 마련했다.

이번 2부에서는 최초 금메달의 탈환을 위한 미국의 새 출발과 찬란했던 드림팀의 업적, 우여곡절 끝에 리딤팀으로 명명된 2008 베이징 올림픽 사단의 탄생배경 전까지를 짚어봤다.


여성 농구 신기원 이룩한 1976 몬트리올 올림픽

뮌헨 올림픽에서 최대 이변을 일으키며 세간의 관심을 모은 미국-소련전의 리매치는 끝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전통의 강호 소련이 유럽의 신흥강호로 비상하던 유고슬라비아에 발목을 잡혔기 때문이었다. 한편 미국은 금메달을 되찾겠다는 일념 하에 비장한 각오로 떠오르는 신예감독 노스캐롤리아나의 딘 스미스를 지휘관에 앉힘으로서 초석을 다졌다.

미국 농구협회는 스미스에게 전반적인 팀 운영권을 맡기며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고 스미스 감독은 이에 보답하듯(?) NBA 신인왕 출신인 월터 데이비스를 포함하여 노스캐롤라이나 선수만 4명을 선발하는 등 끈끈한 사제관계를 과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의 금메달 탈환을 이끈 이는 다름 아닌 노틀담대의 득점기계인 에이드리언 댄틀리였다. 미국은 댄틀리의 활약 속에 다시 한 번 성조기를 경기장에 드높이며 명예회복을 할 수 있었다. 한편 마퀫 대학의 부치 리는 조국 푸에르토 리코 소속으로 미국전에서 35득점으로 맹활약하며 95-94의 짜릿한 승부를 연출했다. 라이벌 소련의 예기치 못한 탈락으로 결정적 동기가 사라진 미국에게 좋은 자극제가 된 셈이다.

올림픽 사상 첫 걸음마를 내딛은 여자 농구 종목에서는 남자 농구와 상반된 판도를 보였다. 미국의 독주와 소련의 2강 구도로 대변됐던 남자부와는 달리 여자부는 소련의 강세가 두드려졌기 때문이다. 소련은 미국을 112-77로 대파하는 등 압도적인 전력을 과시했다. 당시 라트비아 공화국 출신으로 소련의 간판센터였던 우자나 세조노바는 협회 측의 출전시간 제한에도 불구하고 경기당 19점과 12리바운드를 보태며 여성 올림픽 최초의 금메달을 소련 품에 안겼다. 


정치적 대립으로 반쪽 된 1984 LA 올림픽   

서방국가와 동유럽 국가 간의 정치적 대립은 1980 모스크바 올림픽 대규모 보이콧이라는 역사상 최악의 사태로 몰아넣었다. 결국 LA 올림픽은 4년 전의 불상사를 그대로 재현함으로서 세계인의 축재라는 올림픽 슬로건을 무색하게 하였다. 동유럽권 국가들이 보복성 보이콧으로 대거 이탈하며 응수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여전히 강력한 전력을 보유했던 미국은 한결 쉽게 남-여부 금메달이라는 쾌거를 달성하며 안방잔치의 흥을 돋우었다.

84 LA 올림픽은 한국 여자 농구사와 나아가 대한민국 농구사에 있어 큰 획을 그은 해로 기억된다. 농구의 변방으로 치부됐던 대한민국이 사상 최초로 메달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대한의 여전사들은 미국에게 30점차로 대패했지만 은메달을 목에 걸며 가능성을 전 세계에 알렸다.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전설적인 스타 레지 밀러의 누나로도 잘 알려져있는 셰릴 밀러는 WNBA의 마이클 조던이라 불리는 리사 레슬리 이전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여제로서 올림픽 우승의 히로인이 됐다. 당시 밀러의 수비를 전담하던 대한민국의 성정아 선수는 밀러를 16점으로 묶으며 블락까지 성공시키는 등 인상적인 호수비로 분전했다. 

남성부에서는 NCAA의 명장 바비 나이트가 지휘봉을 잡으며 일찌감치 지휘체계를 굳건히 했고 ‘농구 황제’ 조던과 조지타운의 패트릭 유잉, ’제 2의 래리 버드‘로 떠올랐던 크리스 멀린이 출전하며 일약 글로벌 스타도 거듭나는 계기를 마련했다.

거친 언행과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로 명성이 자자했던 나이트 감독은 당시 어번대의 슈퍼스타 찰스 바클리의 반항적인 태도를 지적하며 최종 엔트리에서 제외시키는 결단력을 보였다. 조던은 인터뷰에서 “정말로 훌륭한 감독이지만 제발 욕만 안했으면 좋겠다”며 기자회견장을 폭소로 빠트린 일화는 나이트 감독의 이중성을 뒷받침 해주는 좋은 사례다. 나이트 감독은 인터뷰 직후 제자의 애교 섞인(?) 불만에 미소만 머금었다는 후문이다.

불같은 성격과 온갖 구설수에 오르며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인물이었지만 빛나는 금메달은 명장의 반열에 좋은 가산점이 되기에 충분했다. 나이트 감독은 스페인과의 결승전을 승리로 이끈 후 인터뷰에서 “2년이나 소련을 지켜봐왔다. 헌데 소련은 이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며 운을 뗀 뒤 “그들은 토너먼트에서 시종일관 무기력했고 수비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우리와 붙길 원한다면 어느 장소에서든 박살을 내줄 것”이라며 오랜 라이벌을 자극 시켰다. 4년 뒤에 찾아올 재앙도 모른 채 말이다.


뮌헨 악몽의 재림 1988 서울 올림픽 

미국 농구역사에서 지우고 싶은 추억을 꼽으라면 지난 1972년 뮌헨 올림픽과 함께 1988 서울 올림픽이 자웅을 겨루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서울에는 심판의 편파 판정도 시원찮은 전자 스코어보드도 없었다. 미국과 유럽의 좁아진 전력 차만이 확인됐을 뿐이었다. 이는 우월주의에 젖은 미국에 경각심을 울리는 한편 프로선수 참여와 함께 미국 원조 드림팀을 발족시킨 계기가 되었다. 

철천지원수인 대 소련전의 패배라는 사실과 편파 판정 없이 공정한 여건 속에 치러진 경기였기에 미국의 통산 첫 동메달이 주는 충격은 더욱 컸다. 당시 미국은 해군사관학교에 다니던 데이비드 로빈슨을 위시하여 미치 리치몬드, 대니 매닝, 댄 멀리, 허시 호킨스 등 미래의 NBA 올스타들로 가득한 팀이었다. 패를 기록하지 않고 준결승에 안착할 때까지 만해도 미국의 금메달을 의심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국민영웅 아비다스 사보니스와 소련은 미국의 장밋빛 꿈을 산산조각 내며 은메달조차 허락지 않았다. 유고슬라비아는 NBA 유로피언 전성시대를 열은 주역들이 대거 출연하며 돌풍을 일으켰다. 이 후 드라젠 페트로비치, 블라디 디박 등 유럽선수들은 NBA 진출의 물고를 틀며 글로벌화의 시동을 걸기도 했다.

한편 대한민국은 이충희와 김현준 신예 허재까지 당대 최고의 슛쟁이들로 이루어진 호화진용을 구축하며 12개국 중 9위를 차지하였다. 특히 허재는 외국의 장신 숲을 뚫고 시원시원한 돌파를 시도하며 내외각을 넘나드는 천부적 득점감각을 뽐냈다. 마치 인천 전자랜드의 정영삼처럼 말이다.

여자부에서는 미국이 소련을 꺾고 우승을 차지해 남자부의 저조한 성적으로 떨어진 미국농구의 위상을 살렸다. 신시아 쿠퍼와 카트리나 맥클레인이 이끈 미국 여자대표팀은 6전 전승으로 지난 84 LA 올림픽에 이어 대회 2연패를 달성했다.


위대한 탄생 ‘원조 드림팀’ 92 바르셀로나 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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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 올림픽을 앞두고 NBA의 데이빗 스턴 총재는 실추된 명예 회복의 일환으로 ‘프로선수 올림픽 참여’를 IOC 설득시키기 시작했다. 변호사 출신의 스턴 총재는 수완을 발휘하여 결국 안건을 통과시켰고 미국 농구는 사상 초유의 팀을 발족시키는 신호탄을 쏘아 올릴 수 있었다. ‘꿈의 팀‘이라 명명된 드림팀은 그렇게 탄생했다.

당시 미국은 80년대 NBA를 주도했던 매직 존슨-래리 버드의 베테랑 라인을 시작으로 마이클 조던까지 각 포지션 마다 최고의 선수들로 배치가 됐다. 크리스 멀린을 제외한 10명의 선수들은 모두 ‘위대한 50명의 NBA 선수’에 뽑혔고 명예의 전당 출신이나 가까운 시일내에 입성을 기다리는 선수들이다. NBA에서는 쓸쓸한 말년을 보냈지만 대학최고의 선수였던 듀크의 크리스찬 레이트너도 신-구 조화의 마지막 퍼즐로 최고의 선택이라는 평이었다.

일부 포지션의 선발에서 잡음이 들렸지만 NBA선수들이라면 하나같이 경험해보고 싶은 무대가 올림픽일 정도로 열기는 뜨거웠다. 프로선수 참가를 불허했던 종전의 룰은 실력뿐 아니라 ‘운’까지 따라야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과거에는 4년을 주기로 하는 올림픽 특성상 대학무대와 프로데뷔 사이의 시간을 비켜 가면 평생 올림픽 출전은 불가능 한 것이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개인과 조국의 명예라면 여름방학도 고사하는 것이 당시 NBA의 분위기였고 이러한 정신적 동기가 최근 대표팀에 요구되는 점이기도 하다.

시카고 불스의 간판스타 마이클 조던은 사실 처음부터 대표팀 참여에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조던은 각종 언론매체에서 “내 관심사는 언제나 말했지만 오프시즌에는 충분한 휴식을 가지는 것”이라며 출전을 고사하였다. 매직 존슨과 버드의 설득으로 결국 출전을 받아들인 조던은 스페인의 휴양도시 몬테카를로에서 P.J. 칼리시모와 로드 쏜 등 코칭스태프와 함께 골프를 즐기며 회포를 풀었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최고의 프로답게 연습만큼은 실전을 방불케 하며 공과 사를 구분하였다. 팀 전원이 마찬가지였다.   

철통 호위 속에 락 밴드 급 인기를 구가하며 대회기간 내내 화제가 된 드림팀은 남자농구 팀 기록을 연일 갈아치우며 승리보다 ’몇 점차로 이기나‘에 중점을 둘 정도로 압도적인 실력을 과시했다. 아프리카의 강호 앙골라전을 앞두고 가진 기자회견장에서 찰스 바클리는 “앙골라가 무슨 나라인지는 모르겠으니 시끄러운 곳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며 충만한 자신감과 입담을 세계에 알리기도 했다.

한편 1991년 구소련의 해체와 유고슬라비아의 내전은 남자농구 판도에 급진적 변화를 주었다. 유고슬라비아 소속의 선수들은 독립 선언을 외친 크로아티아 대표팀으로 출전했으며 구소련의 영웅 아비다스 사보니스는 리투아니아에 새 뿌리를 뻗었다. 하지만 꿈의 팀 미국과의 전력 차도 문제였지만 정치적인 문제로 국가가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 것이 유럽 팀들에게 큰 짐이 되었다.

여자부에서는 미국 여자농구 역사상 최대 이변으로 기억되는 불상사가 연출 되 희비가 엇갈렸다. 예선 개막과 함께 첫 3경기에서 평균 45.7점차의 대승을 이어갔던 미국대표팀이 준결승전에서 불의의 일격을 당한 것. 상대는 소련 주변 연합국가 팀이었다. CIS(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라고 불리던 연합팀은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연방, 리투아니아로 이루어졌는데 소련의 해체 직후 바로 금메달을 따는 쾌거를 일궈냈다.      


그 명성 그대로 1996 애틀랜타 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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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팀’이라 명명된 미국 남자 농구대표팀은 애틀랜타 올림픽을 앞두고 다시 한 번 NBA의 별들을 끌어 모았다. 역대 최고의 센터 진을 구성하며 코트 제일의 격전지인 로포스트를 강화하여 유럽 장신숲에 대항하겠다는 계산이었다. 미국은 90년대 NBA를 주름잡았던 ‘4대 센터’중 하킴 올라주원, 데이비드 로빈슨 그리고 샤킬 오닐을 끌어들임으로서 호화골밑을 구축할 수 있었다. 한편 코트에서 돌아온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은 미치 리치몬드에게 자리를 양보하며 대표팀의 세대교체를 예고했다. 

이번 드림팀은 트랜지션 게임을 중심으로 속공을 지향했던 원조 드림팀과는 달리 하프코트 오펜스도 활용하는 전략을 펼쳤고 무게감 있는 로포스트 옵션이 이를 가능케 했다. 내전의 여파가 가시며 재정비한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은 결승전까지 7연승을 달리며 부활을 알렸지만 처음이자 마지막 패를 기록하며 아쉽게 은메달에 만족했다. 미국대표팀은 통산 11번째 금메달을 목에 걸음으로서 명실상부 농구강국의 입지를 다시 한 번 세계에 확인시킴과 동시에 ‘드림팀’이라는 제2의 이름에 걸 맞는 위용을 과시할 수 있었다. 한편 서울 올림픽 이후 8년 만에 출전한 대한민국 남자대표팀은 숙소이탈과 음주사건으로 지울 수 없는 얼룩을 남겼다. 국내 농구인기가 정점에 달하며 KBL 프로리그의 출범을 앞둔 시기였기에 협회와 팬들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미국은 여자부에서도 전승 금메달을 달성하며 겹경사를 맞이했다. KBL과 마찬가지로 WNBA 프로리그 출범을 앞둔 미국 여자농구에게 있어 애틀랜타 올림픽은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악몽과 함께 고됐던 지난 1년의 여정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순간이었다. 충격적인 지난대회를 타산지석으로 삼은 여자대표팀은 소집기간을 1년 앞당겨 담금질에 들어갔다. 자존심을 모두 버리고 초심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지였다. 창단 이후 9개월 동안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 이 기간 동안 치룬 평가전만 해도 52경기. 16만Km에 해당하는 대장정이었다. 리사 레슬리는 팀 득점을 주도하며 최종 결승전에서 29점을 기록 히로인이 되었다.


존경심과 공포는 옛말 2000 시드니 올림픽
 
지난 바르셀로나의 아련한 추억은 사그라지고 말았다. 경외의 대상이자 꿈이라 불렸던 남자 미국대표팀은 망국의 전조를 암시했다. 미국은 표면적으로 8전 전승으로 금메달을 차지했지만 그들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높아진 유럽농구의 수준이 미국의 진땀 승을 만들어 낸 것이다. 사인과 사진촬영을 요구하는 외국선수는 온대간데 없고 오로지 승리하겠다는 살기어린 눈빛만 보였다.

‘드림팀4‘로 불려진 이번 대표팀의 명단은 훌륭한 선수로 가득했지만 로포스트의 열세가 두드러진 점이 아쉬웠다. 전성기에 접어든 LA 레이커스의 샤킬 오닐은 필 잭슨 감독의 입김과 이미 두 차례 대표팀 경험을 맞본 본인에게도 동기를 주지 못해 긴 여름을 집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는 데이비드 로빈슨도 마찬가지였다. 하킴 올라주원이나 패트릭 유잉은 뚜렷한 노쇠기미가 발목을 잡으며 NBA에서 조차 예전의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7풋 센터와 정통센터의 기근현상으로 협회 측은 나름의 심사숙고로 가용선수를 선발 했지만 높이의 한계는 여실했다. 

토너먼트에서는 경기부저가 울리기 전까지 승리를 장담하지 못하는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펼치며 고전을 면치 못하며 절반의 성공이라는 평가를 받은 대표팀은 그렇게 대회를 마쳤다. 프랑스와의 결승전에서는 85-75로 승리를 거두었지만 미국 남자대표팀 결승전 역사상 최저 점수 차의 기록을 남기는 등 ‘드림팀 최저’기록을 갈아치우기에 바쁜 한해였다. 빈스 카터의 경이로운 덩크슛은 시드니 올림픽의 하이라이트로 남았지만 경기 중 상대선수와 언쟁을 벌이며 테크니컬 파울을 받는 등 비난의 한 축도 담당하여 아쉬움을 사기도 했다.

한편 여자부에서는 미국이 WNBA의 원년을 주도한 리사 레슬리를 앞세워 가볍게 대회 2연패를 달성했다. 대한의 여전사들은 ‘미녀가드‘ 전주원과 정은순-정선민의 트윈타워 등 한국 여자농구의 대들보가 총 출격 종합 4위의 성적을 남겼다. 특히 전주원은 올림픽 역사상 최초로 트리플더블을 작성하는 등 1984 LA 올림픽 이래 가장 만족스러운 성적표를 남겼다.    
   

드림팀을 위한 나라는 없다 2004 아테네 올림픽
      
미국 남자농구 역사상 금메달에 실패한 대회는 한손으로 꼽는다. 하지만 아테네 올림픽의 실패는 전 세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미국 농구의 패배’이전에 ‘NBA 농구의 패배’였기 때문이다. 언론은 패배가 익숙해진 드림팀을 빚 대어 ‘드럼팀’이라 비꼬았고 안이한 정신 상태와 단조로운 전술패턴과 국제농구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미국대표팀에 뭇매를 가했다.

선수단 소집단계에서 불균형한 로스터로 우려를 샀던 대표팀은 예고됐던 불안요소들이 올림픽을 맞이하며 수면위로 떠올랐다. 유럽과 남미의 견고한 지역방어로 돌파는 꿈도 못 꾸었고 전문 슈팅가드의 부재는 미국의 문제를 더욱 심화시키는 꼴이 돼버렸다. 결국 예선에서 리투아니아와 푸에르토 리코에게 덜미를 잡힌 미국은 비극의 서곡을 울리며 조4위로 간신히 토너먼트에 합류하였다. 8강에서 파우 가솔이 이끄는 무적함대 스페인을 102-94로 따돌린 미국은 4강전에서 마누 지노빌리를 앞세운 아르헨티나에 일격을 당하고 만다. 4강전 탈락은 지난 서울올림픽 이후로 16년만이었다. 리투아니아전에 승리하며 동메달로 체면치례를 했다지만 시상대 구석에 오른 미국의 굴욕은 절대 잊지 못할 추억이었을 것이다.

결국 리그 최고의 선수들이 대표팀에 가치를 느끼지 못함에 따라 최고전력을 구축할 수 없게 된 점과 단기간에 이루어지는 수박 겉햝기 식의 훈련체제는 드림팀을  NBA의 부속팀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여자부는 리사 레슬리, 셰릴 스웁스 등 WNBA 스타들이 여전한 기량을 과시하며 3연속 금메달을 목에 걸어 고개 숙인 남자부 대표팀과 상반된 모습을 보였다. 대한민국 여자대표팀은 지난 아테네 올림픽의 선전을 이어가는데 실패하며 5전 전패로 세계의 벽을 실감해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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