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YERS/NBA 2010. 1. 14. 06:28

밥 부저 (Robert Bob Boozer)

BY jeffrey23

 #19  밥 부저 (Robert Bob Boozer) - 포워드
고향: 4/26/1937 오마하, 네브라스카
: 6-8 (198cm)
몸무게: 215 lbs.(98kg)
학력: 캔자스 주립 대학교
포지션: 포워드
드래프트: 1959년 1라운드 (1번 픽) 신시내티 로얄스
주요수상: NBA 우승 (1971 밀워키) ... 로마 올림픽 금메달 (1960년) ... NCAA 빅이스트 올해의 선수 (1959년)

통산 성적
 시즌   팀  경기  시간  FG%  3P%  FT% REB AST STL BLK  TO  PF  PTS
60/61  CIN   79  19.9  .415    -  .672  6.2  1.4   -    -    -   2.4   8.4
61/62  CIN   79  31.5  .438    -  .707 10.2  1.6   -   -   -  3.5  13.7
62/63  CIN   79  31.5  .444    -  .714 11.1  1.3   -   -   -  3.8  14.3
63/64  NYK   81  29.4  .427    -  .723  7.4  1.2   -   -   -  2.9  14.9
64/65  NYK   80  26.7  .440    -  .768  7.6  1.4   -   -   -  2.3  14.2
65/66  LAL   78  23.7  .484    -  .779  7.0  1.1   -   -   -  2.5  12.2
66/67  CHI   80  30.6  .487    -  .781  8.5  1.1   -   -   -  2.7  18.0
67/68  CHI   77  38.8  .492    -  .768  9.8  1.6   -   -   -  3.0  21.5
68/69  CHI   79  36.4  .481    -  .806  7.8  2.0   -   -   -  2.8  21.7
69/70  SEA   82  31.1  .491    -  .822  8.7  1.3   -   -   -  2.9  15.2
70/71  MIL   80  22.2  .450    -  .818  5.4  1.6   -   -   -  2.7   9.1
 총합    -  874  29.2  .462    -  .761  8.1  1.4   -   -   -  2.8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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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 부저 전기 (Biograph)



부저는 그의 고향인 네브래스카, 노스 오마하에 소재한 테크 하이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 후 캔자스 주립대학에 입학한 부저는 1958년과 1959년 연속으로 올아메리칸 팀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린다. 

윌트 체임벌린으로 인해 탄생된 1959년 NBA 드래프트 지역연고에서 신시내티 로얄스의 지명을 받은 부저는, 1960년 로마 올림픽으로 조국의 부름을 받게 되며 NBA 데뷔를 1년 미뤄야 했다. 당시에는 프로 선수들의 올림픽 참여가 불가능 했기 때문에, 미국 농구협회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아쉬움을 뒤로 한채 로마로 향한 부저는 팀 선배인 오스카 로벗슨과 함께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다. 

데뷔 시즌을 벤치맨으로 출장하며 8.4점 6.2리바운드을 기록한 부저는 2번 째 시즌에 곧바로 선발로 발탁되었다.

이 후 1962-63시즌까지 두 시즌 연속 더블-더블을 기록한 부저의 미래는 밝아 보였다. 하지만 훗날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게 될 존 루카스의 존재로 부저는 결국 1963-64시즌 중반 뉴욕 닉스로 트레이드 된다.

역마살이라도 낀 것일까. 부저의 유랑은 계속됐다.

이듬 해, LA 레이커스로 보금자리를 옮긴 부저는 엘진 베일러와 제르 웨스트를 보좌하는 역할을 담당하며 한 시즌을 보냈다. 그리고 1966년 창단한 시카고 불스와 확장 드래프트로 연을 맺게 된다.

30살이 되면서 어느 덧 베테랑에 접어든 부저는, 갓난아이에 불과했던 시카고를 플레이오프로 이끌며 제 2의 전성기를 예고했다. 다음 해에는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올스타에 선정되는 영광도 누렸다. 하지만 1968-69시즌, 생애 최다인 21.7점을 기록한 부저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시카고는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였다.



현실은 냉혹했다. 밥 러브와 채트 워커, 제리 슬로안 등 새로운 스타들의 대거 등장으로 이적 수순을 밟아야 했던 것이었다. 이 후 시애틀과 밀워키에서 각각 한 시즌을 보낸 부저는 1971년 은퇴를 선언하였다. 커리어의 끝은 나쁘지 않았다. 떠오르는 신성, 루 앨신더(카림 압둘자바)와 함께 1970-71시즌 밀워키 벅스의 우승에 일조하였기 때문이다.

비록 주연으로 얻은 영광은 아니었지만, 모든 선수들의 꿈인 우승반지를 끼고 물러난 그는 분명 행복한 농구선수였을 것이다.

 


1960 CATERPILLAR BASKETBALL Greater Peoria Sports Hall Of F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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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뉴올리언스 아레나의 천장에는 두 장의 유니폼이 영구 결번 되어 걸려있다. 한 장은 뉴올리언스로 연고지를 이전하면서 이벤트 형식을 빌려 영구 결번 시킨 뉴올리언스 농구의 영웅 피트 마라비치의 7번 유니폼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또 한 장의 유니폼이 걸려있다. 사실 마라비치가 호네츠 소속으로 플레이했던 적이 없었음을 떠올려본다면, 그야말로 구단 역사상 최초의 영구 결번 유니폼인 셈이다.

그 유니폼의 주인공은 마라비치 같은 전설적인 농구 스타는 아니었다. 화려한 플레이를 펼치던 스타플레이어도 아니었다. 공격 보다는 수비를, 화려함 보다는 궂은일을 도맡아 하던 선수였다. 하지만 코트 위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달렸고, 뜨거운 심장으로 게임에 임했으며, 카리스마 있는 캡틴이자 라커룸 리더였고, 홈팬들을 위해 지역 사회 봉사 활동에도 최선을 다하던 선수였다. 고교 시절부터 사귀어왔던 아내에게는 너무나 다정한 남편이었고, 한 가정의 듬직한 아버지였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모든 선수가 그러하듯 그 유니폼의 주인공 역시 더 이상 코트 위에 설 수 없게 된 날이 찾아왔고, 팀은 주저 없이 그의 유니폼을 영구 결번 시키기로 결정했다. 2000년 2월 9일, 그의 영구 결번식이 진행됐다. 그러나 모두의 박수 속에 열렸어야 할 축하 행사는 숙연하고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경기장을 가득 메운 팬들과 그를 아끼던 동료 선수들은 눈시울을 붉혔고, 영구 결번의 주인공은 행사에 참석하지도 못했다. 그의 어린 아들이 아버지를 대신해 유니폼을 경기장 하늘 높이에 걸어두었다.

영구 결번 행사로부터 꼭 4주 전이었던 2000년 1월 12일. 영구 결번의 주인공이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그 때 그 선수, 오늘의 주인공은 호네츠의 영원한 캡틴 바비 필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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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비 필스, NBA 리거가 되다

바비 필스는 1969년 12월 20일 루이지애나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는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해외 노동자 생활을 하셨고, 어머니 역시 생활고에 시달리느라 필스를 제대로 돌볼 수 없었다. 해서 어린 필스는 보육원에서 성장했다. 하지만 필스는 강한 몸과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타고난 운동 신경을 뽐내며 농구에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고, 동시에 학업에도 소홀하지 않으며 훌륭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이후 서던 대학에 입학한 필스는 농구와 학업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며 멋진 대학 생활을 보낸다. 특히 졸업반이었던 1990-91 시즌에는 123개의 3점슛을 성공시키며 평균 28.4득점, 4.7리바운드, 1.9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자신의 위력을 뽐냈다. 대학 졸업장을 손에 든 필스는 NBA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약체 팀의 에이스였던 그를 주목하는 팀은 그리 많지 않았다. 1991년 드래프트에 참가한 필스는 2라운드 45번 픽으로 밀워키에 지명되며 가까스로 NBA 입성에 성공한다. 하지만 프로의 높은 벽을 실감하며 단 한 경기도 뛰어보지 못한 채 계약에 실패, 결국 프로로써의 첫 커리어는 CBA 선수로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필스는 좌절 앞에 쉽게 포기하는 나약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는 NBA를 향한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1991-92 시즌 도중 클리블랜드와 10일 계약을 맺는데 성공했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당시 클리블랜드는 결코 만만한 팀이 아니었다. 브래드 도허티, 마크 프라이스, 래리 낸스 등이 활약하던 동부 컨퍼런스의 강자였다. 그런 팀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스가 쏟았던 노력의 크기는 감히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크기였으리라.

필스는 도허티와 프라이스가 팀을 떠나고 테럴 브랜든을 중심으로 새롭게 전력을 재편될 무렵, 완벽히 리그에 적응을 끝마친 상태였다. 그는 이미 클리블랜드의 확고한 주전 가드로 입지를 공고히 하고 있었다.

어느 덧 당당한 NBA 리거가 된 필스는 1997년 여름 FA 자격을 얻게 됐다. 그리고 필스는 호네츠의 일원이 되었다. 당시 그는 높은 연봉 보다는 장기 계약을 원했다. 이는 선수로써의 이해관계도 포함된 결정이었지만, 가족들에게 보다 안정적인 생활을 안겨주고 싶다는 마음이 컸기 때문이었다. 필스가 합류하기 직전인 1996-97 시즌의 샬럿은 54승 28패로 당시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고 승률을 기록하며 장밋빛 미래를 펼치고 있었다. 샬럿은 리그의 강팀으로써 확실히 자리매김 하기 위해 필스를 영입하며 전력 강화를 시도한 것이다.



2. 샬럿 호네츠의 캡틴

필스는 팀에 합류하자마자 주전 슈팅 가드로 출장했다. 퍼리미터 디펜스의 중심이자 에이스 스타퍼로 맹활약했고, 때로는 공격의 선봉에도 나서며 전천후 플레이를 펼쳤다. 비록 포지션 대비 신장은 작은 편이었지만 엄청난 활동량과 뛰어난 근력, 그리고 누구보다 커다란 투지를 무기로 게임에 임했다. 수비 센스가 좋아서 패싱 레인을 잘라 들어오는 스틸에도 능했고, 공격 파울을 유도하는 솜씨도 일품이었다. 대학 시절 장기였던 3점슛은 여전히 강력한 공격 옵션이었으며 트랜지션 게임에서는 화끈한 덩크슛을 꽂아넣기도 했다.

필스가 샬럿에 합류한 첫 번째 시즌이었던 1997-98 시즌. 팀은 51승 31패를 기록하며 프랜차이즈 사상 최초로 2년 연속 50+승을 달성하는데 성공하며 동부 컨퍼런스 4번 시드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1라운드에서 애틀랜타를 3승 1패로 가볍게 물리친 샬럿은 2라운드에서 시카고를 상대하게 되었다. 당시 시카고는 2년 연속 NBA 정상에 오른 디펜딩 챔피언이었다. 이 때 두 팀의 대결에서 마이클 조던과 필스의 매치업이 시리즈 키포인트로 주목받았을 만큼 필스는 팀에서 큰 비중을 가진 선수가 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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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를 앞두고 필스는 조던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받게 되자 "Michael, Who?" 라고 대답하며 큰 화제를 낳았다. 조던에게 정면으로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물론 최후의 승자는 조던이었다. 하지만 조던을 그렇게 도발한 이후 실제로 그를 훌륭히 막아내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특히 시리즈 2차전에서는 조던을 단 22득점으로 봉쇄하기도 했다. 이 시리즈에서 조던은 경기당 평균 29.6득점을 기록했는데, 이는 조던이 1998년 플레이오프에서 유일하게 평균 30+득점을 넘어서지 못한 시리즈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것이 필스의 마지막 플레이오프 무대가 되었다. 이듬해였던 1998-99 시즌, 샬럿은 라이스 등의 주축 선수들이 연이어 부상을 당하며 큰 어려움에 빠졌고 레이커스의 에디 존스, 엘덴 캠벨을 얻기 위해 라이스, JR 리드 등을 떠나보내는 대형 트레이드를 성사시키며 리빌딩에 들어갔다. 당시만 하더라도 리그 탑레벨의 슈팅 가드였던 존스의 등장으로 인해 필스는 팀의 주전 라인업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어떤 불만도 표현하지 않았으며 되레 존스의 절친을 자청하며 라커룸 분위기를 주도했다.

새 천년이 열리던 1999-2000 시즌. 필스는 데이빗 웨슬리와 함께 팀의 캡틴이 되었다. 비록 스타플레이어는 아니었지만 그 동안 팀을 위해 보여주었던 헌신적인 모습을 인정받은 것이다.

샬럿의 분위기는 어느 때 보다 좋았다. 존스와 앤써니 메이슨 등이 이끄는 주전 라인업은 어느 때보다 견고해보였고 브래드 밀러, 리키 데이비스, 배런 데이비스와 같은 유망주들도 전 포지션에 걸쳐 두루 자리하고 있었으며 필스가 이끄는 벤치 멤버들 역시 탄탄한 전력을 뽐냈다. 비록 지난 시즌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긴 했지만 팀의 재정비가 끝이 난 시즌 막판에는 14승 4패를 기록하며 시즌을 마무리했기에 수많은 전문가들 역시 샬럿의 전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샬럿은 한 때 8연승을 질주하며 16승 7패로 시즌을 시작했다. 쾌조의 스타트였다. 하지만 12월에 들어서면서 최악의 스케줄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으니, 12월 30일부터 1월 10일에 걸치는 기간(12일) 동안 6경기 연속 원정 경기를 갖게 된 것이다. 샬럿은 마치 뭔가에 홀린 듯 패배하기 시작했고 6경기를 모두 내주고 말았다. 6연패의 늪에 빠진 것이다. 6연속 원정 경기를 마친 뒤 다음 경기를 준비하는 필스의 마음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캡틴으로써의 막중한 책임감은 패배를 견디지 못하는 그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3.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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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월 12일. 힘겨운 원정길에서 샬럿으로 돌아온 필스는 간단한 슈팅 훈련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 팀의 공동 캡틴이자 절친한 동료인 웨슬리와 대화를 나눴다.

웨슬리는 연패로 인한 스트레스로 힘들어 하던 필스에게 자동차 경주로 기분 전환을 해보지 않겠냐고 말했다. 평소 같았다면 언제나 바른 생활 사나이로 살아오던 필스가 응했을 리 없었던 제의.

하지만 계속되는 패배와 캡틴으로써의 중압감은 잠시 그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었다. 두 선수는 나란히 각자의 포르쉐를 몰고서 샬럿의 어느 산간 도로로 들어갔다. 그 도로는 평소에도 아마추어 레이서들의 레이스 코스로 종종 이용되던 곳이었는데 워낙 사고 위험이 높은 곳이었다.

맹렬한 속도로 달려 내려오던 필스의 포르쉐는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었고, 마주오던 차량과 3중 추돌 사고를 일으켰다. 필스는 현장에서 즉사했다.



갑작스러운 필스의 죽음은 샬럿과 리그 전체에 커다란 충격을 몰고 왔다. 샬럿의 모든 경기 일정은 무기한 연기 되었고 구단은 그의 백넘버 13번을 프랜차이즈 최초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2000년 2월 9일. 필스의 친정팀이었던 클리블랜드와의 경기 하프 타임을 통해 필스의 영구 결번식이 진행되었다. 이미 세상에 없는 필스를 대신해 그의 남동생이 코트로 걸어 나왔고, 그 어깨에는 필스의 둘째 아들이 올라있었다. 필스의 13번 유니폼은 어린 아들의 손에 의해 샬럿 콜로세움의 하늘 높이 올라갔다. 필스를 아끼던 수많은 동료들과 팬들은 그와의 이별을 슬퍼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필스가 곁을 떠난 후, 샬럿 선수들은 절치부심 힘을 내기 시작한다. 필스의 사망 이후 31승 16패를 기록하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또 한 명의 캡틴인 웨슬리는 시즌 내내 경찰 조사를 받으며 친구를 떠나보낸 죄책감에 힘들어 했고, 데릭 콜먼 등의 주축 선수들이 연이어 부상을 당하며 전력 누수가 심해졌다. 결국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앨런 아이버슨이 이끄는 필라델피아에게 1승 3패를 당하며 힘없이 시즌을 마무리했다.


4. 필스를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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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리그 제일의 에이스 스타퍼이자 샬럿의 절대적인 캡틴이었다. 또한 농구 이외에 골프, 미식축구, 사이클 등에도 능했던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하지만 필스가 정말로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코트 밖에서 보여줬던 그의 모습들 때문이었다.

1998년 NBA Sportsmanship Award 수상자이기도 했던 필스는 자신을 응원해주는 팬들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무던히 애쓰던 사람이었다. 활발한 사회봉사 활동은 물론이거니와 다양한 장학 재단을 설립하기도 했다. 또한 팀 메이트들과 주변 지인들에게도 봉사 활동을 적극적으로 권장하며 스스로 앞장서 모범을 보였다. 코트 밖에서는 언제나 밝고 유쾌한 남자였으며 팬들에게 가장 호의적인 선수이기도 했다. 자신에게 사인을 요청하는 어린 팬들은 절대 그냥 지나치지 않았으며 비시즌 기간에도 소탈한 모습으로 샬럿의 사람들과 어울려지냈다. 거기에 수려한 외모까지 갖추고 있었으니 팬들은 이런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필스가 호네츠의 일원으로 플레이 한 것은 채 3년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팬들은 아직도 그를 그리워하고 있다. 코트 안에서 상대팀과 맞설 때는 누구보다 무서운 얼굴로 코트를 달렸지만, 코트 밖에서 팬들을 만날 때에는 누구보다 멋진 미소를 지어보이던 그를 기억하고 있다. 너무나 믿음직스러웠던 그의 뒷모습을, 팀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동료들을 다독이며 용기를 북돋아 주던 그를 추억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경기장 가장 높은 곳에서 후배들을 지켜보며 파이팅을 외치고 있을 필스. 그는 영원한 호네츠의 캡틴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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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영원한 저의 친구이며, 영원한 남편이고, 영원한 연인입니다."

- 필스의 장례식에서, 아내 켄들 필스

그 때 그 선수. 오늘의 주인공은 바비 필스였다.


Bobby Phil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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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산 467경기 출장 (379선발)
평균 11.0득점, 3.1리바운드, 2.7어시스트, 1.3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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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COLUMNS/HELTANT79 2010. 1. 6. 22:38

NBA도 예외없는 '비정규직 설움'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세계 최고의 농구리그인 NBA에도 '비정규직'은 존재한다. 비보장 계약 선수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보장 계약이란 연봉 전액 또는 일부분의 지급이 보장되어있지 않은 계약으로, 이 계약을 맺은 선수는 시즌 도중 방출돼도 잔여 연봉을 받을 수 없다. 선수에게 크게 불리한 계약이지만 NBA 선수로 뛰는 것은 큰 기회기 때문에 많은 선수들이 비보장 계약을 감수한다.

NBA의 비정규직이라 할 수 있는 이들 비보장 계약 선수들에겐 크리스마스와도 같은 시기가 찾아왔다. 비보장 계약 선수의 보장 계약 전환일이다. 리그 규정상 비보장 계약 선수는 매년 1월 10일(이하 현지시각) 이후 팀에 남아있을 경우 계약이 자동적으로 보장 계약으로 전환된다. 비정규직 근로자가 정규직으로 바뀌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올해는 1월 10일이 일요일이기 때문에 이번주 마지막 업무일인 8일이 보장 계약 전환일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시기는 가장 많은 비보장 계약 선수들이 눈물을 흘리는 시기이기도 하다. 보장 계약 전환일 이후 연봉부담을 꺼리는 구단이 필요없는 비보장 계약 선수를 방출하는 것이다. 최근 경기침체 여파로 재정 문제를 겪고 있는 많은 구단이 비보장 계약 선수의 방출을 통해 연봉 부담을 해결하려 하면서 '정규직 전환 직전 계약 해지'를 겪는 선수들이 많아지고 있다.

방출 공시 기간이 48시간이므로, 6일부터 8일까지의 시간은 비보장 계약 선수에겐 가장 마음졸이는 시간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방출 뉴스의 포문은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가 열었다. 골든스테이트는 6일 베테랑 파워포워드 마이키 무어를 웨이브한다고 밝혔다. 지난 시즌 보스턴에서 뛰었던 무어는 작년 여름 계약 종료 후 골든스테이트와 비보장 계약을 맺었으나 새 팀을 알아봐야 할 처지가 됐다.

밀워키 벅스는 장신 포인트가드 로코 유키치를 방출했다. 지난 시즌까지 토론토에서 뛰다 트레이드로 밀워키에 합류했던 유키치는 '무서운 신인' 브랜든 제닝스에 가려 출장기회를 잡지 못하다가 스스로 방출을 요청했다. 유키치는 터키 리그에서 뛰게 될 예정이다.

토론토 랩터스에서는 포워드 팝스 멘사-봉수가 짐을 쌌다. 지난 시즌에만 세 번이나 팀을 옮겼던 멘사-봉수는 이번 시즌을 앞두고 토론토와 두 번째로 비보장 계약을 맺었지만 보장 계약을 이끌어내는 데 실패했다. 하지만 토론토는 멘사-봉수와 '10일 계약'을 체결해 한 번 더 기회를 줄 전망이다. '10일 계약' 선수는 글자그대로 열흘간만 계약하는 단기계약직을 말한다.

한편 애틀랜타는 2년차 포워드 오델로 헌터를 방출했다. 역시 비보장 계약 선수였다.

보장 계약 전환에 성공하며 한숨 돌린 선수도 있다. 시즌 초반 은퇴를 선언했다 친정팀 필라델피아 76 서스로 복귀하는 등 화제의 주인공이 됐던 앨런 아이버슨은 6일 구단으로부터 잔여 시즌 계약 보장 통보를 받았다. 드웨인 웨이드(마이애미 히트)에 이어 동부 컨퍼런스 올스타 투표 2위를 달리며 생애 11번째 올스타전 출전이 유력한 아이버슨에겐 경사가 겹친 셈이다.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는 등록 선수 15명 중 4명이 비보장 계약 선수다. 시즌 중 전력강화 움직임이 예상되고 있는 클리블랜드인 만큼 이들 비보장 계약 선수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일지가 관심거리다. 유능한 선수를 지니고 있지만 재정 부담으로 비보장 계약 선수를 원하는 팀과 트레이드를 할 수도 있고 FA 영입을 위해 현재 꽉 차있는 자리를 비보장 선수의 방출로 비울 수도 있는 것이다. 덴버 너게츠 조지 칼 감독의 아들인 코비 칼이 '해고 대상 1순위'로 예상되는 가운데, 클리블랜드는 금요일 덴버 원정 경기를 치른다. 

NBA 선수 자격이 위태롭지만 비보장 계약 선수들은 의외로 담담한 모습이다. '비즈니스는 비즈니스일 뿐'이라는 말을 여러 번 실감해왔기 때문이다. 클리블랜드의 비보장 계약 선수인 자와드 윌리암스가 지역지 플레인 딜러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 이들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지금까지 이런 일을 많이 겪어왔다. 만약 무슨 일이 일어나면, 금방 극복하고 (클리블랜드가 아닌)다른 곳에서 나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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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COLUMNS/HELTANT79 2009. 12. 31. 23:43

클리블랜드 2009년 결산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창단 이래 가장 시끄러웠던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2009년이 마무리됐다. 클리블랜드는 30일(이하 현지시각) 벌어진 애틀랜타 호크스와의 홈경기에서 이날 생일을 맞은 르브론 제임스가 48득점을 폭발시키고 앤더슨 바레장이 막판 극적인 3점슛을 집어넣으며 대역전승을 일궈냈다. 곧이어 벌어진 보스턴 셀틱스-피닉스 선즈 경기에서 보스턴이 패함에 따라 클리블랜드는 동부 컨퍼런스 1위의 성적으로 2010년을 맞게 됐다.

클리블랜드의 2009년을 돌아본다.



1월_ 발목 부상을 당한 주전 센터 지드루너스 일가우스카스 없이 2009년을 맞이한 클리블랜드 앞에는 서부 원정 4경기를 포함한 험난한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클리블랜드는 1월을 거치며 진지하게 우승후보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9일 벌어진 보스턴과의 홈경기에서 르브론이 완벽하게 경기를 장악하며 완승을 거둔 클리블랜드는 곧이어 주전 파워포워드 벤 월러스가 독감으로 한동안 나오지 못했고, 가드 딜론테 웨스트가 손목 골절을 당하는 등 며 정상 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LA레이커스와 올랜도 매직 원정에서의 완패는 장신팀에 약하다는 과제를 던져줬다.

하지만 모든 악재에도 불구하고 10승 4패를 올린 클리블랜드는 여전히 동부 컨퍼런스 선두권을 달리며 리그 관계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시즌 개막 전 46승이 예상됐던 팀이 일약 우승후보로 올라선 한 달이었다.


2월_ 부상 문제는 계속해서 클리블랜드를 괴롭혔다. 웨스트 없이 치른 레이커스전에서 시즌 첫 홈경기 패배를 당한데 이어 다음날 인디애나 페이서스에게도 석패하며 시즌 첫 연패를 맛봤다. 트레이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실제로 여러 팀과 교섭했지만, 대니 페리 단장의 선택은 현상유지였다. 이때 논의된 트레이드 중 하나인 샤킬 오닐 영입은 시즌이 끝난 뒤 현실화된다.

한편 모리스 윌리암스가 르브론과 함께 생애 첫 올스타에 선발되면서 클리블랜드는 2005년 이후 4년 만에 르브론 이외의 올스타를 배출하게 됐다. 르브론은 4일 뉴욕 닉스전에서는 52득점 11어시스트 9리바운드, 20일 밀워키 벅스전에서는 3쿼터 2분여 동안 16점을 몰아넣으며 55득점 9어시스트를 올리는 등 역사에 남을 경기를 펼쳤다.


3월_ 웨스트가 복귀했지만 이번에는 월러스가 정강이 골절을 당하며 이탈했다. 페리 단장은 오클라호마 썬더에서 바이아웃된 조 스미스를 영입하며 구멍을 메우려 했지만 벤치 핵심 빅맨인 앤더슨 바레장이 선발로 올라간 빈자리를 완전히 메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클리블랜드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보스턴 셀틱스 원정경기에서 졌지만 나머지 16경기를 모두 승리하며 팀 역사상 월별 최다승을 올렸다. 시즌 60승 돌파와 원정 경기 23승 돌파 역시 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보스턴과 올랜도의 페이스가 떨어지면서 동부 컨퍼런스 1위 독주 체제를 굳혔다.

시즌 초반 팀 통산 리바운드 신기록을 세운 일가우스카스는 22일 뉴저지 네츠와의 홈경기에서 4개의 블록슛을 기록하며 팀 통산 블록슛 신기록도 수립했다.


4월_ 충격의 2연패로 4월을 시작했다. 특히 플레이오프 상대가 될 수도 있었던 올랜도와의 원정경기에서 당한 29점차 대패는 불행의 전주곡과도 같았다. 하지만 클리블랜드는 이후 치른 5경기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며 정규시즌 한 경기를 남겨두고 리그 1위를 확정지었다. 창단 이후 처음 맞는 경사였다. 동부 컨퍼런스 1번 시드로 플레이오프에 임한 클리블랜드는 1라운드 상대인 디트로이트를 평균 15점 이상의 점수차로 4경기만에 일축해버렸다.

팀의 정규시즌 66승 16패를 이끈 마이크 브라운 감독은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하며 1976년 빌 피치 이후 창단 이후 이 상을 받은 두 번째 클리블랜드 감독이 됐다.


5월_ 환호와 탄식이 어우러진 한 달이었다. 르브론은 6일 생애 첫 MVP를 수상했다. 리그 역사상 웨스 언셀드(전 워싱턴 불리츠), 모지스 말론(전 휴스턴 로케츠) 다음으로 어린 나이의 수상이었다. 르브론은 모교인 세인트 빈센트-세인트 메리 고등학교 체육관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가족과 친지, 팀 동료들의 박수를 받으며 MVP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애틀랜타와 가진 플레이오프 2라운드도 르브론을 위한 무대였다. 르브론은 애틀랜타 수비진을 완벽하게 농락하며 클리블랜드의 평균 18점차 4전 전승을 이끌었다. 클리블랜드의 경기력은 완벽해보였고 누구나 르브론과 코비 브라이언트의 결승을 꿈꾸고 있었다.

하지만 동부컨퍼런스 결승에서 만난 올랜도는 이런 꿈을 무참히 깨버렸다. 드와이트 하워드가 골밑을 장악한 올랜도는 라샤드 루이스 등 슈터진이 외곽포를 폭발시키며 클리블랜드를 압도했고, 모 윌리암스가 최악의 부진을 보인 클리블랜드는 르브론의 생애 최고 활약에도 불구하고 결승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탈락 확정 직후 르브론은 상대팀 선수와의 악수와 공식 기자회견을 거부하며 구설수에 올랐고 시즌 내내 이어졌던 클리블랜드에 대한 찬탄은 비관으로 바뀌었다. 긴 여름방학의 시작이었다.


6월_ 페리 단장이 마침내 칼을 빼들었다. 올랜도와의 플레이오프 시리즈를 치르면서 골밑 강화의 필요성을 절감한 페리 단장은 벤 월러스와 사샤 파블로비치, 2010년 드래프트 2라운드 지명권과 약간의 현금을 피닉스로 넘기고 샤킬 오닐을 영입하는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리그 관계자들을 충격에 빠뜨린 대형 트레이드였다.

다음날 벌어진 드래프트에서 페리 단장은 콩고 출신의 무명 선수 크리스천 아옝가를 1라운드에서 지명하며 다시 한 번 리그를 놀라게 했다. 애시당초 이번 드래프트에서 뽑은 신인은 다음 시즌 계획에 없을 정도로 오프시즌 선수 수집에 전념하겠다는 선언이었다.


7월_ 페리 단장 취임 이래 가장 바쁜 여름이 시작됐다. 찰리 빌라누에바, 론 아테스트, 트레버 아리자 등 대어급 FA 사냥에 연달아 실패한 페리 단장은 대신 앤써니 파커와 자마리오 문을 영입하며 장신 윙 플레이어를 확보했다. 바레장과 6년 재계약을 맺으며 팀과 미래를 함께 할 것임을 분명히 하기도 했다.

한편 오닐은 워싱턴에서 벌어진 WWE 프로레슬링에 일일 단장으로 출연해 쇼맨의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했다.


8월_ 클리블랜드는 선수영입을 멈추지 않았다. 라이벌 보스턴의 주력 빅맨 리온 포우를 영입한 것이다. 무릎 수술 회복 여부가 불투명해 보스턴과의 재계약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포우는 클리블랜드가 최소연봉만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클리블랜드행을 선택했다. 이듬해 2월에나 복귀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만큼 기다릴 가치는 충분하다는 것이 페리 단장의 생각이었다.

오닐은 NBA 선수 중 처음으로 자신만의 전국방송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의 주인공이 됐다. ABC 방송에서 'Shaq VS'란 이름으로 방영된 이 프로그램에서 오닐은 야구의 앨버트 푸홀스, 권투의 오스카 델라호야, 수영의 마이클 펠프스 등 각 종목을 대표하는 슈퍼스타들과 맞대결을 펼쳤다.


9월_ 르브론의 고등학교 시절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More than a game'이 공개됐다. 7년여에 걸친 제작기간 끝에 만들어진 영화였다. 이 영화는 각종 독립영화제에서 호평받았다. 동시에 출간된 르브론의 자서전 'Shooting Star' 역시 화젯거리였다.

클리블랜드 선수들은 28일 열린 미디어 데이 행사에서 처음으로 모두 모여 새 시즌을 시작했다. 며칠 전 총기소지 혐의로 체포됐던 웨스트 역시 밝은 표정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하지만 밝은 분위기는 다음날 곧바로 뒤집혔다. 평생 조울증을 앓아온 웨스트가 사전 통보 없이 팀을 이탈한 것이다. 웨스트를 선발 슈팅가드감으로 여기고 있던 브라운 감독의 시즌 구상에 위기가 찾아왔다.


10월_ 웨스트는 이탈 몇 주 뒤 팀에 복귀했지만 여전히 경기에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시범경기를 치르는 동안 A형 독감이 팀을 덮쳤다. 르브론을 비롯해 선수단의 거의 절반과 브라운 감독이 독감에 걸렸다. 이때문에 르브론이 신종플루에 걸렸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클리블랜드는 거의 2주 동안 제대로 훈련을 하지 못했고, 시즌 준비에 큰 차질을 빚게 됐다. 브라운 감독이 '정규시즌 첫 2주는 시범경기와 같음'을 선언할 정도였다.

브라운 감독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27일 보스턴과의 개막전과 다음날 토론토 랩터스 원정에서 충격의 2연패를 당한 클리블랜드는 당초 우승전력으로 평가받았던 것과는 달리 무기력한 모습으로 일관했다. 선수들간에 호흡이 전혀 맞지 않았고 브라운 감독의 선수 기용 방식 역시 들쭉날쭉했다.

르브론은 개막전에서 역대 최연소 통산 13,000점을 기록했지만 팀 패배로 빛이 바랬다.

11월_ 지난 시즌 홈에서 2패만 당한 클리블랜드는 정규시즌 6경기만에 벌써 홈 2패째를 기록했다. 설상가상으로 오닐이 어깨 부상으로 6경기를 결장했다. 하지만 올랜도 원정경기에서 오닐은 하워드를 잘 막아내며 클리블랜드의 완승에 큰 공헌을 했다. 페리 단장이 오닐을 영입한 이유가 증명된 경기였다.

시즌 7번째 경기였던 뉴욕 닉스 원정부터 2년차 J.J. 힉슨이 선발로 기용되기 시작했다. 지난 시즌 주전 멤버였던 일가우스카스와 바레장을 벤치에서 출격시켜 경기 내내 고른 경기력을 유지하겠다는 브라운 감독의 복안은 이후 계속 지켜져 오고 있다.

10승 3패로 11월을 마감한 클리블랜드는 동부 컨퍼런스 선두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평균 30.5득점을 올린 르브론은 동부 컨퍼런스 이달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12월_ 14승 3패를 올리며 창단 이후 12월 최다승 기록을 세웠다. 브라운 감독은 12월 반격의 한 달로 선언했고, 클리블랜드는 새로 들어온 선수들이 서서히 자리를 잡으며 경기력을 회복해갔다. 22경기 연속으로 상대 야투율을 50% 미만으로 묶으며 수비팀의 면모를 되찾았고 오닐을 이용한 작전수행능력도 크게 향상됐다. 조울증으로 고생하던 웨스트가 제 자리를 찾으면서 벤치 경기력도 크게 나아졌다. 크리스마스에 레이커스를 상대로 거둔 대승은 이러한 자신감을 잘 보여주는 경기였다.

2010년 르브론이 FA로 나올 것으로 점쳐지는 가운데, 클리블랜드는 창단 이후 첫 우승을 향해 전력질주하고 있다. 창단 40주년을 맞는 2010년 클리블랜드의 발걸음을 주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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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한국시간) LA 레이커스와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경기가 개운치 않은 여운을 남겨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경기 종료시간이 채 반나절도 되지 않았지만, 현지 미디어 커뮤니티를 비롯하여 국내외 포럼에서는 금일 경기의 심판판정을 두고 열띤 논쟁이 펼쳐지고 있다.

오늘 경기는 이견의 여지도 없이 클리블랜드가 월등한 경기력을 과시하며 손쉽게 승리를 가져갔다. 때문에 아쉬움과 분노를 토로하는 것은 레이커스 측이다. 물론 심판판정이 100% 패배의 원인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비중 있게 작용을 했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스테이플센터에 운집한 2만여 관중들은 급기야 4쿼터 중반, 레이커스 전용 응원도구를 코트에 집어 던지는 극단적인 항의를 하기에 이르렀다. 바쁜 추격전을 펼치던 레이커스의 코비 브라이언트가 수차례 슈팅파울이 불리지 않자, 마지못해 관중들이 분노를 표출시킨 것이다.

코비는 경기 후 가진 인터뷰에서 “파울을 범하더라도 최소한 상대선수가 다치지는 않아야 할 것 아닌가. 파울콜이 불리려면 거품이라도 물어야 할 것 같다”며 강한 유감을 표했다.

레이커스의 수장 필 잭슨 감독은 “오늘 같은 홈팬들의 반응은 본적이 없다”며 운을 뗀 뒤 “오닐이 코비를 4번이나 넘어뜨렸지만 휘슬은 불리지 않았다”고 거들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식스맨 라마 오돔만큼 최악의 크리스마스 저녁을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후반전에 테크니컬 파울 누적으로 코트를 떠나야했기 때문이다.

오돔은 “심판들의 열정은 존중하지만 편파판정은 유쾌하지 않다. 판정이나 경기나 최악이었다”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그렇다면 승리를 거머쥔 클리블랜드의 입장은 어떠할까?

간판스타 르브론 제임스는 신중한 입장을 밝혔다. 금일 경기는 크리스마스 매치를 떠나서 미리 보는 파이널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는 최고의 시험무대였다. 때문에 르브론은 “레이커스나 우리에게 중요한 경기였다. 그래서 오늘의 원정 1승은 팀에 좋은 동기부여가 됐다. 레이커스는 리그 최고의 팀이기 때문이다”며 승리에 대한 기쁨을 표하는 한편 “가득 찬 물병을 집어던지는 행동은 옳지 못하다. 선수든 심판이든 누구나 다칠 수 있지 않은가. 그런 상황은 누구도 원치 않을 것”이라며 몰지각한 일부 관중의 행동을 꼬집었다.

‘패자는 말이 없다‘고 하지만 냉철함과 프로의식이 결여된 판정은 반드시 지양 돼야 한다. 그래야만이 팬과 선수들, 나아가 리그가 보기 좋게 공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상호간의 불신은 자칫 집단의 퇴보로 이어질 위험도 크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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