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부에서 장기집권 하던 미국의 독주가 끝나며 세계 농구판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금메달이 미국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인식이 전파되며 희망과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생긴 것이다. 한편 농구의 올림픽 등장과 더불어 끊임없는 시도와 변화를 모색해온 FIBA는 여성 농구 종목을 채택함에 따라 진정한 스포츠 정신을 아우를 수 있는 전기를 마련했다.
이번 2부에서는 최초 금메달의 탈환을 위한 미국의 새 출발과 찬란했던 드림팀의 업적, 우여곡절 끝에 리딤팀으로 명명된 2008 베이징 올림픽 사단의 탄생배경 전까지를 짚어봤다.
여성 농구 신기원 이룩한 1976 몬트리올 올림픽
뮌헨 올림픽에서 최대 이변을 일으키며 세간의 관심을 모은 미국-소련전의 리매치는 끝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전통의 강호 소련이 유럽의 신흥강호로 비상하던 유고슬라비아에 발목을 잡혔기 때문이었다. 한편 미국은 금메달을 되찾겠다는 일념 하에 비장한 각오로 떠오르는 신예감독 노스캐롤리아나의 딘 스미스를 지휘관에 앉힘으로서 초석을 다졌다.
미국 농구협회는 스미스에게 전반적인 팀 운영권을 맡기며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고 스미스 감독은 이에 보답하듯(?) NBA 신인왕 출신인 월터 데이비스를 포함하여 노스캐롤라이나 선수만 4명을 선발하는 등 끈끈한 사제관계를 과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의 금메달 탈환을 이끈 이는 다름 아닌 노틀담대의 득점기계인 에이드리언 댄틀리였다. 미국은 댄틀리의 활약 속에 다시 한 번 성조기를 경기장에 드높이며 명예회복을 할 수 있었다. 한편 마퀫 대학의 부치 리는 조국 푸에르토 리코 소속으로 미국전에서 35득점으로 맹활약하며 95-94의 짜릿한 승부를 연출했다. 라이벌 소련의 예기치 못한 탈락으로 결정적 동기가 사라진 미국에게 좋은 자극제가 된 셈이다.
올림픽 사상 첫 걸음마를 내딛은 여자 농구 종목에서는 남자 농구와 상반된 판도를 보였다. 미국의 독주와 소련의 2강 구도로 대변됐던 남자부와는 달리 여자부는 소련의 강세가 두드려졌기 때문이다. 소련은 미국을 112-77로 대파하는 등 압도적인 전력을 과시했다. 당시 라트비아 공화국 출신으로 소련의 간판센터였던 우자나 세조노바는 협회 측의 출전시간 제한에도 불구하고 경기당 19점과 12리바운드를 보태며 여성 올림픽 최초의 금메달을 소련 품에 안겼다.
정치적 대립으로 반쪽 된 1984 LA 올림픽
서방국가와 동유럽 국가 간의 정치적 대립은 1980 모스크바 올림픽 대규모 보이콧이라는 역사상 최악의 사태로 몰아넣었다. 결국 LA 올림픽은 4년 전의 불상사를 그대로 재현함으로서 세계인의 축재라는 올림픽 슬로건을 무색하게 하였다. 동유럽권 국가들이 보복성 보이콧으로 대거 이탈하며 응수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여전히 강력한 전력을 보유했던 미국은 한결 쉽게 남-여부 금메달이라는 쾌거를 달성하며 안방잔치의 흥을 돋우었다.
84 LA 올림픽은 한국 여자 농구사와 나아가 대한민국 농구사에 있어 큰 획을 그은 해로 기억된다. 농구의 변방으로 치부됐던 대한민국이 사상 최초로 메달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대한의 여전사들은 미국에게 30점차로 대패했지만 은메달을 목에 걸며 가능성을 전 세계에 알렸다.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전설적인 스타 레지 밀러의 누나로도 잘 알려져있는 셰릴 밀러는 WNBA의 마이클 조던이라 불리는 리사 레슬리 이전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여제로서 올림픽 우승의 히로인이 됐다. 당시 밀러의 수비를 전담하던 대한민국의 성정아 선수는 밀러를 16점으로 묶으며 블락까지 성공시키는 등 인상적인 호수비로 분전했다.
남성부에서는 NCAA의 명장 바비 나이트가 지휘봉을 잡으며 일찌감치 지휘체계를 굳건히 했고 ‘농구 황제’ 조던과 조지타운의 패트릭 유잉, ’제 2의 래리 버드‘로 떠올랐던 크리스 멀린이 출전하며 일약 글로벌 스타도 거듭나는 계기를 마련했다.
거친 언행과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로 명성이 자자했던 나이트 감독은 당시 어번대의 슈퍼스타 찰스 바클리의 반항적인 태도를 지적하며 최종 엔트리에서 제외시키는 결단력을 보였다. 조던은 인터뷰에서 “정말로 훌륭한 감독이지만 제발 욕만 안했으면 좋겠다”며 기자회견장을 폭소로 빠트린 일화는 나이트 감독의 이중성을 뒷받침 해주는 좋은 사례다. 나이트 감독은 인터뷰 직후 제자의 애교 섞인(?) 불만에 미소만 머금었다는 후문이다.
불같은 성격과 온갖 구설수에 오르며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인물이었지만 빛나는 금메달은 명장의 반열에 좋은 가산점이 되기에 충분했다. 나이트 감독은 스페인과의 결승전을 승리로 이끈 후 인터뷰에서 “2년이나 소련을 지켜봐왔다. 헌데 소련은 이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며 운을 뗀 뒤 “그들은 토너먼트에서 시종일관 무기력했고 수비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우리와 붙길 원한다면 어느 장소에서든 박살을 내줄 것”이라며 오랜 라이벌을 자극 시켰다. 4년 뒤에 찾아올 재앙도 모른 채 말이다.
뮌헨 악몽의 재림 1988 서울 올림픽
미국 농구역사에서 지우고 싶은 추억을 꼽으라면 지난 1972년 뮌헨 올림픽과 함께 1988 서울 올림픽이 자웅을 겨루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서울에는 심판의 편파 판정도 시원찮은 전자 스코어보드도 없었다. 미국과 유럽의 좁아진 전력 차만이 확인됐을 뿐이었다. 이는 우월주의에 젖은 미국에 경각심을 울리는 한편 프로선수 참여와 함께 미국 원조 드림팀을 발족시킨 계기가 되었다.
철천지원수인 대 소련전의 패배라는 사실과 편파 판정 없이 공정한 여건 속에 치러진 경기였기에 미국의 통산 첫 동메달이 주는 충격은 더욱 컸다. 당시 미국은 해군사관학교에 다니던 데이비드 로빈슨을 위시하여 미치 리치몬드, 대니 매닝, 댄 멀리, 허시 호킨스 등 미래의 NBA 올스타들로 가득한 팀이었다. 패를 기록하지 않고 준결승에 안착할 때까지 만해도 미국의 금메달을 의심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국민영웅 아비다스 사보니스와 소련은 미국의 장밋빛 꿈을 산산조각 내며 은메달조차 허락지 않았다. 유고슬라비아는 NBA 유로피언 전성시대를 열은 주역들이 대거 출연하며 돌풍을 일으켰다. 이 후 드라젠 페트로비치, 블라디 디박 등 유럽선수들은 NBA 진출의 물고를 틀며 글로벌화의 시동을 걸기도 했다.
한편 대한민국은 이충희와 김현준 신예 허재까지 당대 최고의 슛쟁이들로 이루어진 호화진용을 구축하며 12개국 중 9위를 차지하였다. 특히 허재는 외국의 장신 숲을 뚫고 시원시원한 돌파를 시도하며 내외각을 넘나드는 천부적 득점감각을 뽐냈다. 마치 인천 전자랜드의 정영삼처럼 말이다.
여자부에서는 미국이 소련을 꺾고 우승을 차지해 남자부의 저조한 성적으로 떨어진 미국농구의 위상을 살렸다. 신시아 쿠퍼와 카트리나 맥클레인이 이끈 미국 여자대표팀은 6전 전승으로 지난 84 LA 올림픽에 이어 대회 2연패를 달성했다.
위대한 탄생 ‘원조 드림팀’ 92 바르셀로나 올림픽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앞두고 NBA의 데이빗 스턴 총재는 실추된 명예 회복의 일환으로 ‘프로선수 올림픽 참여’를 IOC 설득시키기 시작했다. 변호사 출신의 스턴 총재는 수완을 발휘하여 결국 안건을 통과시켰고 미국 농구는 사상 초유의 팀을 발족시키는 신호탄을 쏘아 올릴 수 있었다. ‘꿈의 팀‘이라 명명된 드림팀은 그렇게 탄생했다.
당시 미국은 80년대 NBA를 주도했던 매직 존슨-래리 버드의 베테랑 라인을 시작으로 마이클 조던까지 각 포지션 마다 최고의 선수들로 배치가 됐다. 크리스 멀린을 제외한 10명의 선수들은 모두 ‘위대한 50명의 NBA 선수’에 뽑혔고 명예의 전당 출신이나 가까운 시일내에 입성을 기다리는 선수들이다. NBA에서는 쓸쓸한 말년을 보냈지만 대학최고의 선수였던 듀크의 크리스찬 레이트너도 신-구 조화의 마지막 퍼즐로 최고의 선택이라는 평이었다.
일부 포지션의 선발에서 잡음이 들렸지만 NBA선수들이라면 하나같이 경험해보고 싶은 무대가 올림픽일 정도로 열기는 뜨거웠다. 프로선수 참가를 불허했던 종전의 룰은 실력뿐 아니라 ‘운’까지 따라야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과거에는 4년을 주기로 하는 올림픽 특성상 대학무대와 프로데뷔 사이의 시간을 비켜 가면 평생 올림픽 출전은 불가능 한 것이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개인과 조국의 명예라면 여름방학도 고사하는 것이 당시 NBA의 분위기였고 이러한 정신적 동기가 최근 대표팀에 요구되는 점이기도 하다.
시카고 불스의 간판스타 마이클 조던은 사실 처음부터 대표팀 참여에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조던은 각종 언론매체에서 “내 관심사는 언제나 말했지만 오프시즌에는 충분한 휴식을 가지는 것”이라며 출전을 고사하였다. 매직 존슨과 버드의 설득으로 결국 출전을 받아들인 조던은 스페인의 휴양도시 몬테카를로에서 P.J. 칼리시모와 로드 쏜 등 코칭스태프와 함께 골프를 즐기며 회포를 풀었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최고의 프로답게 연습만큼은 실전을 방불케 하며 공과 사를 구분하였다. 팀 전원이 마찬가지였다.
철통 호위 속에 락 밴드 급 인기를 구가하며 대회기간 내내 화제가 된 드림팀은 남자농구 팀 기록을 연일 갈아치우며 승리보다 ’몇 점차로 이기나‘에 중점을 둘 정도로 압도적인 실력을 과시했다. 아프리카의 강호 앙골라전을 앞두고 가진 기자회견장에서 찰스 바클리는 “앙골라가 무슨 나라인지는 모르겠으니 시끄러운 곳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며 충만한 자신감과 입담을 세계에 알리기도 했다.
한편 1991년 구소련의 해체와 유고슬라비아의 내전은 남자농구 판도에 급진적 변화를 주었다. 유고슬라비아 소속의 선수들은 독립 선언을 외친 크로아티아 대표팀으로 출전했으며 구소련의 영웅 아비다스 사보니스는 리투아니아에 새 뿌리를 뻗었다. 하지만 꿈의 팀 미국과의 전력 차도 문제였지만 정치적인 문제로 국가가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 것이 유럽 팀들에게 큰 짐이 되었다.
여자부에서는 미국 여자농구 역사상 최대 이변으로 기억되는 불상사가 연출 되 희비가 엇갈렸다. 예선 개막과 함께 첫 3경기에서 평균 45.7점차의 대승을 이어갔던 미국대표팀이 준결승전에서 불의의 일격을 당한 것. 상대는 소련 주변 연합국가 팀이었다. CIS(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라고 불리던 연합팀은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연방, 리투아니아로 이루어졌는데 소련의 해체 직후 바로 금메달을 따는 쾌거를 일궈냈다.
그 명성 그대로 1996 애틀랜타 올림픽
‘드림팀’이라 명명된 미국 남자 농구대표팀은 애틀랜타 올림픽을 앞두고 다시 한 번 NBA의 별들을 끌어 모았다. 역대 최고의 센터 진을 구성하며 코트 제일의 격전지인 로포스트를 강화하여 유럽 장신숲에 대항하겠다는 계산이었다. 미국은 90년대 NBA를 주름잡았던 ‘4대 센터’중 하킴 올라주원, 데이비드 로빈슨 그리고 샤킬 오닐을 끌어들임으로서 호화골밑을 구축할 수 있었다. 한편 코트에서 돌아온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은 미치 리치몬드에게 자리를 양보하며 대표팀의 세대교체를 예고했다.
이번 드림팀은 트랜지션 게임을 중심으로 속공을 지향했던 원조 드림팀과는 달리 하프코트 오펜스도 활용하는 전략을 펼쳤고 무게감 있는 로포스트 옵션이 이를 가능케 했다. 내전의 여파가 가시며 재정비한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은 결승전까지 7연승을 달리며 부활을 알렸지만 처음이자 마지막 패를 기록하며 아쉽게 은메달에 만족했다. 미국대표팀은 통산 11번째 금메달을 목에 걸음으로서 명실상부 농구강국의 입지를 다시 한 번 세계에 확인시킴과 동시에 ‘드림팀’이라는 제2의 이름에 걸 맞는 위용을 과시할 수 있었다. 한편 서울 올림픽 이후 8년 만에 출전한 대한민국 남자대표팀은 숙소이탈과 음주사건으로 지울 수 없는 얼룩을 남겼다. 국내 농구인기가 정점에 달하며 KBL 프로리그의 출범을 앞둔 시기였기에 협회와 팬들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미국은 여자부에서도 전승 금메달을 달성하며 겹경사를 맞이했다. KBL과 마찬가지로 WNBA 프로리그 출범을 앞둔 미국 여자농구에게 있어 애틀랜타 올림픽은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악몽과 함께 고됐던 지난 1년의 여정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순간이었다. 충격적인 지난대회를 타산지석으로 삼은 여자대표팀은 소집기간을 1년 앞당겨 담금질에 들어갔다. 자존심을 모두 버리고 초심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지였다. 창단 이후 9개월 동안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 이 기간 동안 치룬 평가전만 해도 52경기. 16만Km에 해당하는 대장정이었다. 리사 레슬리는 팀 득점을 주도하며 최종 결승전에서 29점을 기록 히로인이 되었다.
존경심과 공포는 옛말 2000 시드니 올림픽
지난 바르셀로나의 아련한 추억은 사그라지고 말았다. 경외의 대상이자 꿈이라 불렸던 남자 미국대표팀은 망국의 전조를 암시했다. 미국은 표면적으로 8전 전승으로 금메달을 차지했지만 그들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높아진 유럽농구의 수준이 미국의 진땀 승을 만들어 낸 것이다. 사인과 사진촬영을 요구하는 외국선수는 온대간데 없고 오로지 승리하겠다는 살기어린 눈빛만 보였다.
‘드림팀4‘로 불려진 이번 대표팀의 명단은 훌륭한 선수로 가득했지만 로포스트의 열세가 두드러진 점이 아쉬웠다. 전성기에 접어든 LA 레이커스의 샤킬 오닐은 필 잭슨 감독의 입김과 이미 두 차례 대표팀 경험을 맞본 본인에게도 동기를 주지 못해 긴 여름을 집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는 데이비드 로빈슨도 마찬가지였다. 하킴 올라주원이나 패트릭 유잉은 뚜렷한 노쇠기미가 발목을 잡으며 NBA에서 조차 예전의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7풋 센터와 정통센터의 기근현상으로 협회 측은 나름의 심사숙고로 가용선수를 선발 했지만 높이의 한계는 여실했다.
토너먼트에서는 경기부저가 울리기 전까지 승리를 장담하지 못하는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펼치며 고전을 면치 못하며 절반의 성공이라는 평가를 받은 대표팀은 그렇게 대회를 마쳤다. 프랑스와의 결승전에서는 85-75로 승리를 거두었지만 미국 남자대표팀 결승전 역사상 최저 점수 차의 기록을 남기는 등 ‘드림팀 최저’기록을 갈아치우기에 바쁜 한해였다. 빈스 카터의 경이로운 덩크슛은 시드니 올림픽의 하이라이트로 남았지만 경기 중 상대선수와 언쟁을 벌이며 테크니컬 파울을 받는 등 비난의 한 축도 담당하여 아쉬움을 사기도 했다.
한편 여자부에서는 미국이 WNBA의 원년을 주도한 리사 레슬리를 앞세워 가볍게 대회 2연패를 달성했다. 대한의 여전사들은 ‘미녀가드‘ 전주원과 정은순-정선민의 트윈타워 등 한국 여자농구의 대들보가 총 출격 종합 4위의 성적을 남겼다. 특히 전주원은 올림픽 역사상 최초로 트리플더블을 작성하는 등 1984 LA 올림픽 이래 가장 만족스러운 성적표를 남겼다.
드림팀을 위한 나라는 없다 2004 아테네 올림픽
미국 남자농구 역사상 금메달에 실패한 대회는 한손으로 꼽는다. 하지만 아테네 올림픽의 실패는 전 세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미국 농구의 패배’이전에 ‘NBA 농구의 패배’였기 때문이다. 언론은 패배가 익숙해진 드림팀을 빚 대어 ‘드럼팀’이라 비꼬았고 안이한 정신 상태와 단조로운 전술패턴과 국제농구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미국대표팀에 뭇매를 가했다.
선수단 소집단계에서 불균형한 로스터로 우려를 샀던 대표팀은 예고됐던 불안요소들이 올림픽을 맞이하며 수면위로 떠올랐다. 유럽과 남미의 견고한 지역방어로 돌파는 꿈도 못 꾸었고 전문 슈팅가드의 부재는 미국의 문제를 더욱 심화시키는 꼴이 돼버렸다. 결국 예선에서 리투아니아와 푸에르토 리코에게 덜미를 잡힌 미국은 비극의 서곡을 울리며 조4위로 간신히 토너먼트에 합류하였다. 8강에서 파우 가솔이 이끄는 무적함대 스페인을 102-94로 따돌린 미국은 4강전에서 마누 지노빌리를 앞세운 아르헨티나에 일격을 당하고 만다. 4강전 탈락은 지난 서울올림픽 이후로 16년만이었다. 리투아니아전에 승리하며 동메달로 체면치례를 했다지만 시상대 구석에 오른 미국의 굴욕은 절대 잊지 못할 추억이었을 것이다.
결국 리그 최고의 선수들이 대표팀에 가치를 느끼지 못함에 따라 최고전력을 구축할 수 없게 된 점과 단기간에 이루어지는 수박 겉햝기 식의 훈련체제는 드림팀을 NBA의 부속팀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여자부는 리사 레슬리, 셰릴 스웁스 등 WNBA 스타들이 여전한 기량을 과시하며 3연속 금메달을 목에 걸어 고개 숙인 남자부 대표팀과 상반된 모습을 보였다. 대한민국 여자대표팀은 지난 아테네 올림픽의 선전을 이어가는데 실패하며 5전 전패로 세계의 벽을 실감해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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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베이징 올림픽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한국대표팀이 아쉽게 탈락했지만 한편으로는 NBA 농구팬에게 있어 지루한 오프시즌을 달래줄 또 하나의 이벤트라는 점에서 기다려지는 행사다.
농구와 지구인의 최대 축제인 올림픽과의 연결고리를 바탕으로 세계 최고의 프로리그 NBA선수들의 참가배경을 비롯 치열했던 미국-소련의 라이벌 구도를 보다 이해하기 쉽도록 올림픽 농구의 역사를 되짚어봤다. 이번 1부에서는 시범종목으로 채택됐던 세인트루이스 올림픽부터 뮌헨 올림픽까지를 다루었다.
위대한 시작 1904 세인트루이스 올림픽
제임스 네이스미스 박사가 농구를 고안하며 13년 뒤 올림픽에 농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국의 YMCA에 농구가 전파된 해이기도하다. 만국 박람회의 부속 행사로 전락했던 올림픽이었지만 시범종목으로 농구를 전 세계에 알리는 성과를 이루어냈기에 농구인 들에게는 뜻 깊은 해였다고 볼 수 있다.
현대와 같은 신식 체육관은 꿈도 못 꿀 시기였고 세인트루이스의 야구장에서 3개의 베이스위에 코트를 얹혀 경기를 진행하였다. ‘올림픽 세계 농구 챔피언십’이라 불렸던 토너먼트는 5개의 미국 아마추어 클럽 팀만이 참가하며 올림픽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반영됐다. 우승은 버팔로 YMCA 클럽이 차지했으며 2위에 랭크된 시카고 YMCA는 2번의 부전승으로 행운을 챙겼다. 당시 부전승의 스코어는 ‘2-0‘으로 처리됐다.
정식종목 채택된 1936 베를린 올림픽
베를린 올림픽은 손기정 선수의 금메달 쾌거와 함께 농구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기념비적인 해다. 또한 일제텃세를 이겨내며 장이진, 이성구, 염은현 선수가 일본 대표 팀에 선발되는 쾌거를 이룩한 해이기도 하다. 이는 대한민국 출신의 농구선수로서는 최초다.
21개국이 참여하며 제법 올림픽다운 규모가 갖추어졌고 흙과 모래를 단단히 다져놓은 테니스 코트를 사용하며 경기장의 질도 발전을 이루었다. 재밌는 사실은 이 경기장이 제 기능을 발휘 하려면 반드시 맑은 날씨여야 한다는 것. 조금이라도 비가 오는 날에는 코트가 진흙탕으로 돌변해 드리블을 포함한 전반적인 플레이에 애를 먹었던 것이다. 사상 첫 우승은 조 포튼베리가 이끈 미국이 캐나다를 19-8로 물리치며 네이스미스 박사의 이름을 딴 메달을 획득했다.
2차 세계대전의 끝 평화의 시작 1948 런던 올림픽
냉전으로 꺼졌던 성화가 다시금 화려한 불꽃을 일으키며 런던 올림픽의 시작을 알렸다. 대한민국은 해방이후 첫 출전에서 23개국 중 8위에 랭크되며 가능성을 전 세계에 알렸다. 종주국인 미국은 59-57로 승리했던 아르헨티나전을 제외하고 경기당 38점의 득실마진으로 손쉽게 금을 손에 쥐었다. 특히 미국은 6피트 5인치 이상의 장신선수를 5명이나 보유하며 압도적인 경기로 타 국가를 제압했다.
런던 올림픽은 갖가지 진풍경과 진기록을 남긴 대회로도 유명했다. 당시 100점 이상의 고득점이 꿈만 같던 농구계에서 이라크는 필리핀과 대한민국에 이어 중국에게 100점을 내주며 체면을 구겼다. 아일랜드는 경기당 17.5점이라는 엽기적인 팀 득점을 기록했고 영국심판이 경기 도중 충돌로 기절하는 사건도 있었다. 중국 선수가 7피트의 미국 선수인 밥 컬랜드의 다리사이로 드리블을 하는 묘기를 선보이기도 했고 브라질 선수가 팬츠를 잃어버리는 진풍경을 하며 경기 외적인 볼거리도 많았던 런던 올림픽이었다.
운명적인 만남 1952 헬싱키 올림픽
구소련은 올림픽 처녀출전에도 불구하고 미국과의 금 전쟁에서 호각세를 보이며 화려한 등장을 만천하에 알렸다. 국제 농구계 최대 라이벌이 될 양국의 만남도 여기서 시작됐다. 미국은 미네아폴리스 레이커스(現 LA 레이커스)와 보스턴 셀틱스에서 우승을 경험한바 있는 캔자스 주립대의 클라이드 러브렛을 앞세워 3연속 금 행진을 이어갔다. 구소련은 무한한 잠재력을 선보이며 신흥강호로 급부상했다.
구소련은 본선예선에서 멕시코와 불가리아 개최국 핀란드를 차례로 꺾으며 파죽지세를 이어갔지만 미국의 벽을 넘는데 실패하며 은메달로 만족했다. 당시 구소련은 강력한 조직력을 앞세워 전반전 17-15로 대등한 경기를 펼쳤다. 하지만 다운템포로 흐름을 되찾은 미국에 리드를 내주며 36-25로 석패하였다. 경기 후 구소련 선수들은 코트에 앉아 항의를 했지만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헬싱키 올림픽에서 특이할만한 점은 농구경기가 드디어 스타디움으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협회는 예선전은 도시 중심에 위치한 테니스 코트를 사용하도록 하고 준결승전과 결승전에 한해서는 스타디움에서 치르도록 하였다.
빌 러셀의 올림픽 데뷔 1956 맬버른 올림픽
샌프란시스코의 슈퍼스타 빌 러셀이 올림픽에 등장했다. NBA와 보스턴 셀틱스의 전설적인 인물로 기억되는 러셀은 동문후배이자 훗날 보스턴의 동료가 될 K.C. 존스와 함께 미국의 4연패에 공헌하였다. 미국대표팀은 러셀을 앞세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기력을 펼치며 올림픽 기간 동안 승승장구했다.
강력한 라이벌로 예상됐던 구소련은 7피트 3인치에 달하는 라트비아 공화국 출신의 목수를 공수하며 미국의 높이에 대항했지만 완벽한 실패로 돌아갔다. 키는 컸지만 기술과 기동력은 0에 가까운 선수였기 때문이다. 구소련은 예선에서 30점차로 대패하며 자존심을 구겼고 결승전에서도 71-62로 분투했지만 한층 업그레이드 된 미국을 넘기엔 역부족이었다.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금메달 1960 로마 올림픽
사상최초로 위성 중계된 로마 올림픽에서 미국이 다시 한 번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미국대표팀에 소집된 명단을 보면 혀를 내두를만한 호화진용으로 감히 ‘고전 드림팀‘이라 부를만하다.
시즌 평균 트리플더블에 빛나는 오스카 로벗슨과 NBA 로고의 주인공이자 클러치 슈터의 원조 제리 웨스트를 시작으로 올해의 신인왕에 오른 월트 벨라미와 제리 루카스까지 일찌감치 명예의 전당자리를 예약한 불세출의 스타들이었다. 경기당 102점의 화력을 뽐낸 미국은 결승전에서 81-57로 구소련을 대파하며 라이벌을 좌절시켰다.
멈추지 않는 골드러쉬 1964 도쿄 올림픽
도쿄 올림픽은 미국과 유럽이 양분했던 올림픽 개최를 아시아가 가져갔다는 의미에서 매우 뜻 깊은 대회라 할 수 있다. 정치적인 전략으로 대규모 선수단을 파견시킨 대한민국은 실로 오랜만에 농구대표팀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7전 전패로 세계의 벽을 실감해야 했고 미국과 유럽의 메달잔치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특히 12년 동안 3번 연속 금메달을 내준 구소련의 각오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구소련의 감독인 알렉산더는 대회전 인터뷰에서 “미국의 선수들은 모두가 놀라운 실력을 지녔다. 하지만 우리는 전력증강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며 출사표를 던졌다. 실제 구소련은 전 대회에 비하면 네임밸류가 다소 떨어지는 미국대표팀을 거칠게 몰아붙이며 한풀이에 성공하는 듯했다. 하지만 미국의 뒷심은 예상외로 거셌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빌 브래들리와 루크 잭슨을 필두로 래리 브라운(現 샬럿 밥캐츠 감독)을 앞세운 미국은 18-4로 경기막판 스퍼트를 내며 최종 스코어 73-59로 다시 한 번 구소련의 4연속 은메달을 도왔다.
브라운은 당시 메달 수여식 인터뷰에서 “이 메달이 12달러에 불과하지만 당신이 100만 달러를 준다 해도 사지 못할 것”이라며 소감을 밝혔다. 브라운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의 금사냥에 실패하며 선수-감독 금메달의 대기록에 실패한 바 있다.
농구변방 유고의 부상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
올림픽 개최 전인 1967년 당시 UCLA의 루 앨신더(카림 압둘자바의 개명 前 이름)는 학업을 포기하지 않겠다며 보이콧을 선언하였다. 이어서 휴스턴대의 엘빈 헤이즈는 샌디에고 로케츠(휴스턴 로케츠의 전신)와 계약을 맺은 상태였기 때문에 프로선수 참가가 허용되지 않는 올림픽 규정에 따라 소집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두 명의 대학스타를 선수명단에 포함시키지 못한 미국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조조 화이트와 스펜서 헤이우드라는 걸출한 스타플레이어로도 금 사냥은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 남자농구대표팀 역사상 최연소 출전 기록(19세)을 보유하고 있는 헤이우드는 보스턴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거듭나게 될 화이트와 함께 5번째 금메달을 조국에 안기는데 공헌하였다.
구소련의 복수심이 낳은 1972 뮌헨 올림픽 비극사
팔레스타인 게릴라 단체의 테러로 얼룩졌던 뮌헨 올림픽은 지금도 회자될 정도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남자 농구부 결승전에서 노골적인 편파판정을 등에 업은 구소련이 20년 만에 염원하던 금메달을 손에 쥐었기 때문이다. 올림픽에 이래 멈출 줄을 몰랐던 미국의 금메달 독주는 그렇게 막을 지었다.
그 유명한 ‘한번 더’의 사건은 경기종료 3초전에 시작됐다. 극적인 스틸에 이어 자유투를 얻어낸 덕 콜린스는 2점 차로 뒤진 상황에서 동점 내지는 역전으로 갈 수 있는 찬스를 손에 넣었다. 콜린스는 침착하게 모두 성공을 시켰고 구소련은 인바운드 패스를 시작으로 하프코트를 넘으려 시도했다. 그때 브라질 출신인 리나토 라이또 주심의 휘슬이 울렸다. 전광판이 가리킨 시간은 종료 1초전. 심판진은 논의 끝에 구소련이 타임아웃을 부른 것으로 판정을 지었다. 미국 측의 항의는 거셌지만 경기는 속행됐고 구소련의 장거리 3점 슛은 림을 외면했다. 모두가 코트위로 달려 나왔고 미국의 6번째 금메달은 실현된 것처럼 보였다.
당시 중계를 맡은 ABC사의 방송로고에 조차 선명하게 'FINAL'이란 문구를 내보내며 경기 종료를 알렸고 사진기자들은 미국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며 분위기는 종결된 듯 했다. 하지만 주심의 휘슬이 다시 한 번 울리며 경기는 중단됐다. 이번에는 전광판 스코어가 잘못 체크 되었다는 것 이었다. 3초가 돼 있어야할 전광판에는 50초라는 숫자가 기록돼있었고 이는 분명 재경기의 사유가 될 수 있었지만 구소련의 공격이 무위로 그칠 때마다 경기가 중단됐기에 의심이 증폭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구소련은 길게 던진 인바운드 패스를 풋백 득점으로 연결시키며 금메달의 숙원을 풀었다. 아이러니 한 것은 철두철미한 판정으로 일관했던 심판진이 구소련의 마지막 인바운드 패서의 발이 라인을 넘어선 것에 대해서는 잡아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FIBA 상소배심 투표에서는 이탈리아와 푸에르토 리코는 미국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폴란드와 헝가리, 쿠바는 구소련의 편에 섰다. 미국대표팀의 소송이 기각되자 언론의 반응은 동정론부터‘미국은 패배를 받아들여야한다‘는 자숙의 말까지 나올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26년 전 당시 그 3초는 아마 ‘지구 스포츠 역사상 가장 긴 3초’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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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틀랜타 호크스의 조쉬 칠드레스(25, 203cm)가 그리스의 명문 팀 올림피아코스와 계약을 맺었다. 이는 시사 하는 바가 크다. 유럽 리그의 명성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 NBA 출신의 젊은 유망주가 20대 중반에 건너 갈 정도의 매력이 있는가’에 대한 공통된 대답은 ‘No'였기 때문이다.
칠드레스는 지난 2004년 애틀랜타에 입단하며 약 1200만 달러의 신인 계약을 맺은 바 있다. 이번에 올림피아코스가 제시한 금액은 3년간 2천만 달러로 제법 구미가 당기는 금액이다.
제한적 FA인 칠드레스는 애틀랜타가 해당 금액을 매치 시켰다면 NBA 잔류가 가능했지만 릭 선드 단장은 인터뷰에서 “칠드레스와 절충안을 찾으려 협상을 진행 중이었다. 이는 NBA 시장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라며 불쾌함을 드러냈다. 하지만 정작 현지 언론의 입장은 냉담하기만 하다. “칠드레스의 에이전트인 론 바비는 최근 3년 동안의 미국시장에서 유럽리그가 갖고 있는 잠재력과 가능성으로 시선을 돌렸다. 러시아에서 대형 사업가들이 적극적인 투자도 리그에 개입하는 것도 그 예다. 이제 유로리그는 어떤 선수에게도 더 나은 환경을 제공 할 수 있다”며 안이한 구단대응을 꼬집었다.
칠드레스가 이룬 성과가 기대이상은 아니었지만 그동안 이루어진 NBA선수들의 유럽행의 배경을 살펴보면 이번 계약을 선뜻 이해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기량 미달로 자국 하부리그 대신 수준 높은 유럽리그를 택하며 강도 높은 실전경험을 쌓는 젊은 선수들은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었다. 또는 노쇠화와 함께 떨어지는 연봉과 벤치를 전전하는 대신 확실한 노후보장(?)을 제시하는 유럽 측의 조건을 수락하여 전성기 못지않은 대접을 받으며 케이스도 있다.
하지만 칠드레스의 경우는 로스터의 과부하로 기회를 갖지 못 했을 뿐 일반적인 유럽행의 배경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밀레니엄 시대를 맞이하여 유로피언들의 NBA 침공이 득세를 보였지만 불과 10년도 채 되기 전에 미국에서 유럽으로 노선을 변경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비단 미국선수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유럽 용변선수들도 ‘컴백 홈’을 외치며 금의환향에 앞장서고 있다. 뉴저지 네츠의 보스찬 나크바와 프리모즈 브레첵은 각각 러시아와 이탈리아 비행기에 몸을 실었으며 호르헤이 가바호사 역시 모스크바행이 유력시 되고 있다. 스페인의 영웅 후안 카를로스 나바로는 일찌감치 스페인으로 돌아간 상황.
이는 최근 환율동향과 무관하지 않다. 유가반등과 함께 고개를 들고 있는 미국 경기 침체의 우려로 달러가치의 하락이 이어지고 유로가치가 상종가를 치는 현주소를 보면 고개가 끄떡여진다. 보다 많은 잠재력과 가능성. 더 젊고 건강한 몸을 지니고 있을 때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겠다는 선수들의 인식도 한 몫 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시즌 개막과 함께 37경기나 결장한 칠드레스에게 돈에 눈이 멀었다는 비난을 내릴 수도 있겠지만 이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국 선수들이 해외로 유출되는 빌미를 제공 할 수 발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보수적인 생각일지 모르나 하나의 리그는 그 나라를 대변하는 색깔을 갖출 때 비로소 완벽한 리그로 거듭날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이는 NBA가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글로벌화와 개방을 한 이후로 확고해졌다. 물론 세계 정상급의 기량을 최고의 리그에서 보여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데이빗 스턴 총재의 전략은 여지없이 들어맞았다. 유럽의 전설 드라잔 페트로비치나 토니 쿠코치, 블라디 디박 등 불세출의 용병들은 성공적인 평가를 받으며 경력을 마쳤고 덕 노비츠키나 마누 지노빌리같은 2세대 용병들은 현 리그를 주름잡으며 명성을 떨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행태는 그러한 바람과 역행하고 있다. 마치 현대인들이 조미료로 인해 미각을 잃어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고유의 맛은 잊은 지 오래다. 무분별하고 맹목적인 유럽 용병 발굴은 정작 본토 선수들의 입지를 좁혀놨으며 MVP는 더 이상 미국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는 말이 있다. 국제무대에서도 미국은 수년간 종이호랑이에 그치며 자존심을 구긴지가 오래다.
최근 KBL은 하승진의 데뷔와 함께 용병 키 제한 해제를 발효시키는 강수를 두었다. 장신의 하승진을 견제하려는 협회 측의 의지가 반영된 것은 불을 보듯 뻔하지만 가뜩이나 좁은 토종 빅맨들의 입지를 더욱 더 좁히는 결과가 우려된다. 농구 팬들이 국내 선수들의 활약을 등에 업는 리그 분위기가 조성될 때 경기장과 TV를 찾을 것임은 자명하다. 용병 중심의 경기라는 굴레를 10년 이상 벗어나지 못하고 90년대의 농구인기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국내실정이다. 결국 자국 선수들의 힘을 실어 주여야 한다는 점은 국경을 막론하고 일맥상통한다.
그 어떤 팬들도 르브론 제임스가 전성기를 스페인에서 보내는 것을 지켜보고 싶지 않을 것이다. 유럽이나 타국 선수들의 진출을 무작정 막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리그 비중의 무게가 기울어지고 있다면 리그가 발 벗고 나서기 전에 기본적인 내 집단속이 선행돼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번 칠드레스 계약이 NBA에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비록 지금은 미국 출신의 스타플레이어들이 즐비하지만 언젠가 유럽에서 올스타 급의 NBA 선수들이 뛰는 날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NBA 중심의 글로벌 리그를 꿈꾸는 스턴 총재의 야망은 한 여름 밤의 꿈처럼 날아갈 지도 모를 일이다. 한 때 지구상의 모든 농구선수들의 꿈이자 목표였던 NBA지만 매리트가 사라진 현시점에서 오만함을 버리고 근본적인 대책마련이 시급하다. 변화는 한순간이다.
자신의 가치를 끊임없이 창출해내는 스포츠 스타들의 본능을 배금주의로 치부 할 수 없다. 어디까지나 운동선수라는 틀에서 본인의 능력은 어디서든 발휘 될 수 있고 이는 권리다. 하지만 NBA가 NBA다울 때는 미국선수들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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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올림픽이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각국 농구 대표팀들은 담금질에 여념이 없다. 최종 예선을 위해 비지땀을 흘리는 대한민국 대표팀만큼이나 NBA 스타들로 가득한 종주국 미국대표팀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을 포함하여 최근 두 차례의 세계 농구 선수권대회에서 고배를 든 미국대표팀은 절실한 입장이다. 비약적으로 발전한 유럽과 남미의 전력도 문제지만 실패를 거듭할 때마다 지적돼 왔던 기강해이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 때문에 협회는 어린 선수들의 독려와 함께 동기부여 차원에서 금메달리스트 출신의 은퇴 선수들을 초빙하여 근본적인 문제를 뿌리 뽑고자 나섰다. 더없는 영광이요 꿈이었던 올림픽 참여가 평범한 오프시즌의 연례행사쯤으로 퇴색해버린 근래의 인식을 바꾸겠다는 계산이다.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코트의 마술사 매직 존슨은 대표팀이 한자리에 모인 강당에서 “당시에는 정말 믿기지 않았다. 우린 어떻게 이 많은 스타들을 소집했는지에 대해 흥분됐지만 금메달이라는 하나의 목표만 생각했다”라며 운을 뗐다. 현역 시절에 비해 몸은 많이 불었지만 매직의 진심어린 강연에 선수들은 하나같이 경청했다.
마이크 슈셉스키 감독 역시 당시의 추억이 누구보다 가슴에 와 닿는다. 지난 1992년 바르셀로나 원조 드림팀의 일원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헤드코치였던 척 데일리의 보조관으로 어시스턴트 코치직을 수행한 슈셉스키는 “기대도 안했던 호응에 놀랐다. 하늘엔 헬리콥터가 떠있고 우린 마치 비틀즈를 방불케 하는 인기를 과시했다”며 당시의 기억을 떠 올렸다.
하지만 범세계적인 열풍 속에 드림팀의 뜻 그대로 ‘꿈’같은 성과를 거둔 미국대표팀의 명성은 채 10년도 가지 못했다. 압도적인 경기력은 세계 강호들과의 벽이 낮아지며 자연스레 실종됐으며 개인기량은 월등할지 모르나 조직력만큼은 더 이상 세계 최고라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다.
매직 존슨은 “우리 때는 누가 몇 점을 넣을까? 내일 신문 일면에는 누가 실릴까? 따위의 생각은 일체 안했다. 오로지 이기는 것에만 집중했다. 일사불란한 컷인이나 적시적소의 패스들은 정말 환상적 이었고 이것이 미국농구라고 자신 있게 외칠 수 있었다”며 유기적인 팀플레이를 거듭 강조했다. 역사상 최고의 득점기계로 꼽히는 마이클 조던 조차도 원조 드림팀 내에서는 넘버원 스코어러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그 자리는 조던의 라이벌이자 둘도 없는 벗인 찰스 바클리가 경기당 18점으로 차지했었다.
올림픽 기간 동안 조던과 바클리는 코트나 숙소에서 자주 어울리며 끈끈한 우정을 과시한 바 있다. 바클리는 “정말 특별한 시간들이었다. 서로 잘 아는 절친한 친구들과 몇 달간 함께 플레이 할 수 있다는 것은 꽤 멋진 일이다”며 회고했다. 제 아무리 올스타 군단일지라도 일개 팀으로서 최소한의 공동체 의식은 필수 조건인 셈이다.
선배들의 이러한 업적은 이번 베이징 올림픽 선수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마이애미 히트의 드웨인 웨이드는 “역사상 모든 스포츠 팀을 통틀어도 92바르셀로나의 드림팀만큼 어울리는 이름은 없을 것”이라며 선배들을 치켜세웠다. 카멜로 앤쏘니는 “내가 12살이나 13살 때 TV를 통해 과거 드림팀의 경기를 봐왔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대표팀 선수다”라며 출사표를 던졌다.
FIBA룰에 대한 적응과 그에 따른 전술적 준비도 탄탄히 해야겠지만 세계 최고의 기량을 지닌 선수들인 만큼 정신적 무장과 화합이 수반된다면 금메달 획득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꿈의 팀을 뜻 했던 ‘Dream Team'에서 동네북을 뜻하는 ’Drum Team'으로의 전락까지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미국 국가대표팀이다. 만약 이번 베이징 올림픽에서 목표 달성을 이룬다면 새로 명명된 리딤팀(Redeem Team)의 의미는 금메달과 함께 빛을 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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