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 & COLUMNS/JEFFREY23 2009. 4. 30. 10:40

NBA 역사 속의 오늘

BY jeffrey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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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30, 1956
보스턴 셀틱스가 에드 맥컬리와 클리프 하간을 세인트 루이스 호크스로 트레이드 하며 드래프트 1번 픽을 얻었다. 보스턴은 이 픽으로 빌 러셀을 지명하였다.

April 30, 1971
떠오르는 신성 카림 압둘자바와 베테랑 오스카 로벗슨 콤비가 볼티모어 불리츠와의 파이널 4차전(118-106) 승리를 견인하며 스윕을 거두었다. 밀워키 벅스는 구단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 우승이었다.

April 30, 1975

래리 오브라이언이 J.월터 케네디에 이어 3번째로 NBA 커미셔너에 부임하였다.

April 30, 1988
서부컨퍼런스 1라운드 2차전에서 83점을 합작한 슬리피 플로이드와 하킴 올라주원(각각 42점, 41점)의 휴스턴 로케츠가 댈러스에 119-108, 승리를 거두었다. 이들은 NBA 플레이오프 역사상 두 번째로 2명이 40점 이상을 뽑아낸 주인공이 되었다.

April 30, 2002
시애틀 슈퍼소닉스의 게리 페이튼이 역사상 2번째로 올 NBA 퍼스트 수비팀에 9번 당선된 선수로 이름을 올렸다. 이 기록은 앞서 마이클 조던이 시카고 불스 시절 세운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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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COLUMNS/JEFFREY23 2009. 4. 28. 11:03

NBA 역사 속의 오늘

BY jeffrey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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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28, 1966

보스턴 셀틱스의 전설적인 감독 레드 아우어벅이 지도자 자리에서 물러났다. 아우어벅은 파이널전에서 라이벌 LA 레이커스를 95-93으로 물리치며 8년 연속 우승(1959~66)을 포함하여 통산 9회 우승의 금자탑을 쌓았다. 현재까지 이 기록은 필 잭슨 감독(1991~93, 96~98, 00~02)이 유일하다.

April 28, 1979
전설의 트리플더블러 오스카 로벗슨이 밀워키 벅스 선수로는 처음으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로벗슨은 밀워키 구단 유일무이한 우승(1971) 멤버였으며 통산 26,710점과 9,887 어시스트를 남겼다.

April 28, 1990
보스턴 셀틱스가 NBA 플레이오프 역사상 단일 경기 팀 득점 기록을 갱신하였다. 보스턴은 동부컨퍼런스 플레이오프 1라운드 2차전에서 뉴욕 닉스에 157-128, 대승을 거두었다. 보스턴은 도합 94개의 야투를 시도하여 63개나 성공시켰는데(67.0%) 이 역시 역대 플레이오프 최고 기록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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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를 붉은 색으로 물들였던 시카고 불스가 슬픔에 잠겼다. 70년대 현 유타 재즈의 감독인 제리 슬로언과 함께 팀을 이끌었던 놈 반 리어와 시카고의 감독을 비롯, 지역 아나운서로 활동해온 조니 ‘레드’ 커는 한국시간으로 27일 불과 몇 시간을 두고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특히 커는 2009년 명예의 전당 입성을 코앞에 두던 터라 안타까움을 더했다.

첫 번째 비보는 반 리어의 몫이었다. 컴앤캐스트 방송사에서 시카고 불스의 하프타임 리포트를 맡아온 반 리어는 지난 26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등 건강악화의 조짐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방송사 동료이자 전 NBA 스타였던 켄달 길은 “평상시 반 리어는 최소한 1시간 30분 전에는 미리 와 있었고 언제나 같은 자리에 앉았다”며 “내가 도착 했을 때 그가 보이지 않아서 분장실에 있거나 휴게실에 있는 줄 알았다. 주위를 둘러보며 ‘반 리어 본 사람 없습니까?’라고 물어봤지만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며 비통함을 전했다.

컴앤캐스트 방송사의 데스크 매니저를 담당하고 있는 팀 포크씨가 다음 날 직접 반 리어의 아파트를 찾아갔지만, 불행하게도 바라지 않았던 일을 목격하고 말았다. 반복해서 문을 두들긴 포크씨는 거실의 TV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만 어떤 응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포크씨는 긴급전화로 경찰서와 소방서등 공공기관에 신고를 하기에 이르렀고, 출동한 경찰과 소방대원들이 문을 부수고 투입되어서야 상황은 종료됐다. 반 리어는 미동도 없이 조용히 바닥에 쓰러진 채 발견되었다. 아직까지 정확한 사인은 발표되지 않은 상태다.

향년 61세. 현역 시절 강직함과 터프함으로 무장하며 슬로언과 함께 리그에서 가장 견고한 백코트를 꾸려갔던 반 리어의 생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짧은 만남과 이별, 그리고 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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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반 리어는 순도 100% 시카고의 프랜차이저라고 부를 수 없다. 왜냐하면 신시내티 로얄스에서 데뷔무대를 가졌기 때문이다. 시카고는 1969년 당시 3라운드 전체 34번 픽을 반 리어에게 행사하였지만 곧바로 신시내티 로얄스의 센터 월트 웨슬리와 트레이드하였다. 냉정하게 말해서 비즈니스적인 측면으로 볼 때 얼마든지 납득이 갈만한 사안이지만 반 리어로서는 섭섭한 마음을 가질 만도 한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반 리어는 이미 대학시절부터 시카고 행이 유력할 만큼 구단의 남다른 관심 속에 성장하였다.

반 리어는 펜실베니아 주(州)의 피츠버그에서 미드랜드 고교를 챔피언으로 이끌며 지역스타로 발돋음 하였다. 대학진학을 앞두고 미식축구팀을 보유한 각 대학들이 그를 데려가기 위한 리쿠르팅이 활발할 정도로 그는 다재다능한 스포츠맨이었다. 하지만 그는 명문농구팀이 있는 학교를 원했고 세인트 샌프란시스코는 더 없는 선택이었다.

시카고의 스카우터를 담당하고 있던 제리 크라우저는 반 리어를 보기 위해 무려 2000(3218km)마일이 넘는 거리를 장작 30시간 동안 운전하며 찾아갔다. 당시에는 자동차를 수단삼아 대륙횡단을 하는 것이 대부분의 스카우터들에게 익숙한 터라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이 정도 지극정성이면 시카고가 얼마나 반 리어를 원했는지 짐작이 간다.

어찌 되었든 빅맨 자원이 절실했던 시카고로서는 어쩔 수 없는 수순이었지만 이는 중대한 실수를 범한 것이었다. 웨슬리는 시카고에 둥지를 틀고 그 해 경기 당 9.5점, 6.3리바운드를 기록하며 백업센터로는 만족스러운 시즌을 보냈다. 하지만 웨슬리는 이듬 해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가 창단하며 실시한 확장 드래프트로 인해 팀을 떠났다. 첫 두 시즌은 커리어 최고의 활약을 펼친 그였지만 이후 은퇴할 때까지 단 한 번도 경기당 5득점, 4리바운드를 넘기지 못할 정도로 초라한 내리막길을 걸었다. 반면 반 리어는 데뷔 후 2년 만에 리그 어시스트왕을 거머쥐며 트레이드의 설움을 날리는 한 편 탄탄대로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만약 반 리어가 시카고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불스는 땅을 치고 후회했을 것이다. 하지만 반 리어는 거짓말 같이 시카고에 컴백했다. 신시내티는 1970년 드래프트에서 또 한 명의 전설적인 가드인 네이트 아치볼드를 선택하였는데 두 명의 유망주를 두고 행복한 고민에 빠진 신시내티의 선택은 결국 아치볼드였다. 센터 영입을 위해 시카고의 짐 폭스를 받는  대신 ‘과분한‘ 잉여자원 반 리어를 보냄에 따라 시카고는 다시 잃어버렸던 자식을 품에 안을 수 있었다. 터프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제리 슬로언(現 유타 재즈 감독)과 반 리어가 마침내 재회하며 리그에서 가장 터프한 백코트 콤비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두려움을 모르는 남자 그리고 두 명의 파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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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들의 만남은 처음이 아니었다. 슬로언은 반 리어가 팀에 합류하자 “나와 싸울 수 있을 정도로 깡이 있는 선수니 함께 뛸 수 있다”는 말을 남긴 바 있는데 이 일화는 좀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반 리어는 생전에 워싱턴 포스트지에서 “신시내티 시절에 시카고 불스와 연습경기를 가진 적이 있다. 장소는 아마도 일리노이스 주립대학 캠퍼스였을 것이다”며 슬로언과의 만남을 회고하였다.

“난리도 아니었다. 우리는 경기 내내 서로 밀치고 내동댕이치면서 거칠게 플레이했다. 그리고 경기가 끝난 후 둘이 못 끝낸 승부(?)를 마무리 하러 둘만의 시간을 가졌다”며 이어서 “체육관 복도로 돌아간 우리는 남자들의 대화를 나누었는데 팝콘기계에 부딪힌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NBA 역사상 가장 지독하고 사나운 백코트의 탄생배경이다.

슬로언은 “반 리어와 함께 뛸 수 있어서 정말 기뻤다. 그는 훌륭한 동반자이자 경쟁자였다”며 고인을 기리는 한편 “우리는 매일같이 지독하게 훈련을 했다. 그리고 반 리어는 팀 동료들에게 이와 같은 훈련 참여에 대해 말 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 모두가 우리가 이 자리에 서기 위해 한 일이다”며 지난 날의 일을 떠올렸다. 

당시 시카고의 단장을 담당하던 팻 윌리엄스는 "반 리어와 슬로언은 뛰어난 재능을 지니지는 못했다. 하지만 루즈볼을 잡기 위해 다이빙도 서슴지 않는 코트위에서의 열정은 리그에서 그 어떤 이들도 따라갈 수 없었다. 시카고에 사는 오랜 농구팬이라면 그들이 매일 밤 가져왔던 열정과 격렬함을 잊지 못할 것“이라며 고인과 그의 오랜 친구의 공을 치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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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리어와 적지 않은 시간을 함께 한 밥 러브도 과거를 회상하며 그를 추억했다. 러브는 마이클 조던, 스카티 피펜, 그리고 슬로언과 함께 시카고 불스에서 유일하게 영구결번 된 인물이다. “반 리어는 그 누구도 겁내지 않는 진정한 싸움꾼이었다”며 운을 뗀 러브는 “포틀랜드 블레이저스에 시드니 윅스란 선수가 있었는데 204cm, 108kg의 거구였고 반 리어는 고작 184cm에 74kg에 불과했다. 윅스에게 거친 파울을 당한 반 리어는 의자를 집어 들었고 윅스는 코트 주위를 달리며 도망 다녔다. 지금 생각해보니 만약 의자로 윅스를 쳤다면 반 리어를 제압해서라도 말렸을 것이다”며 추억을 떠올렸다. 당시 시카고의 감독을 담당하고 있던 딕 모타도 박장대소하며 “반 리어가 단지 앉기 위해 의자로 향한 것이 아님을 직감했다”며 고인을 추억했다.

소위 말해 깡따구 좋은 선수로 기억되는 반 리어의 기행은 현역에서 그치지 않았다. 반 리어는 워싱턴 위저드와 시카고 불스의 지역중계를 담당하고 있는 컴앤캐스트에 입사하며 여전한 시카고 사랑을 과시해 왔다. 특히 지난 2006년 플레이오프에서 시카고의 가드 커크 하인릭과 마이애미의 제임스 포지의 설전에 뛰어들며 눈길을 끌기도 했다. 당시 3차전이 진행되는 가운데 포지는 하인릭에게 거친 파울을 범했고 이것이 화근이 되었다. 반 리어는 포지에게 “라커룸 밖에서 자네를 만나 혼 줄을 내줄테니 그리 알라”며 엄포를 놓았다. 대부 같은 반 리어의 성품을 다시 한 번 확인 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무조건 성질만 부리고 도구를 휘두르는 파이터가 아닌 내 식구도 챙길 줄 아는 그런 사나이가 바로 반 리어였다. 예외는 없었다. 자신과 한 배를 탄 사람이더라도 잘못된 언동을 본다면 언제 어디서든 바로 잡았다. 


시카고에 의해 시카고를 위한 삶

2002년 개봉한 영화 ‘우리 동네 이발소에 무슨 일이(원제_ Barbershop)’에 반 리어가 출연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저예산 영화로 작품성에서 호평을 받은 이 영화의 배경은 역시 시카고다. 만약 다른 도시를 배경으로 촬영이 진행됐다면 아마도 반 리어는 출연을 거절 했을 것이다. 그만큼 시카고에 대한 반 리어의 사랑은 절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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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사 동료인 길은 “그는 마치 불스를 아이들 보듯 하였다. 잘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하고 경기가 풀리지 않는 날이면 제 일인 냥 슬퍼하였다”며 고인의 생전 모습을 꺼냈다.

시카고를 아끼는 마음도 좋고 경기에 대한 열정들도 훌륭한 것은 지겹게 들어 알겠다. 헌데 과연 반 리어에 대한 흔적은 단지 추상적인 것들뿐일까? 어시스트왕 1회, 3번의 올스타 선정, 8번의 NBA 수비팀. 반 리어가 남긴 수상기록들이다.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수비팀 기록이다. 허슬플레이의 대가답게 1970-71시즌부터 8년 동안 수비팀을 놓치지 않았다. 반 리어의 가치는 수비의 달인 브루스 보웬과 같이 스틸이나 블락 등 기록지의 숫자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과거 팀 동료였던 러브는 말 한다 “1대1 수비는 그가 최고다. 아마 당신을 잡아먹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그를 ‘작은 쥐’라고 부를 것이다. 반 리어에게는 농구가 치즈조각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이렇다할만한 슈퍼스타의 부재 속에서도 70년대 나름의 입지를 다져온 시카고의 원동력이다. 물론 반 리어의 진가는 표면적인 성과로 드러나지 못했다. 그가 위대한 50인이나 훗날 찾아올 NBA를 빛낼 100인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무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구단차원에서 ‘프랜차이즈를 빛낸 선수‘의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만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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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우승트로피를 가져다주진 못했지만 1984년 마이클 조던이 등장하기 전까지 시카고 스타디움을 달군 이는 반 리어였다. 지금껏 수많은 지인들의 고증과 역사적 기록을 살펴보면 반 리어는 조던, 피펜과 같이 시카고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다. 하지만 수많은 젊은 팬들과 오늘날 그를 기억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하다 못 해 비슷한 시기에 활약한 러브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유나이티드 센터 홈구장을 찾는 관중을 비롯하여 시카고 경기중계를 보는 시청자들은 경기장 천장에 걸려있는 러브의 영구결번 유니폼으로 러브의 존재를 인지하고 다시금 각인하곤 한다. 때문에 구단에서는 적잖은 족적을 남긴 반 리어의 업적을 기리고자 영구결번식을 검토할 것으로 전망된다. 최근 시카고 트리뷴 홈페이지에서 실시되고 있는 반 리어의 2번 유니폼 영구결번에 관한 투표에서 5000명이 넘는 참가자중 87% 가까운 지지율을 얻으며 그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불스가 자신을 제대로 대우해주는 것 같지 않다며 영구결번에 대해 늘 아쉬움을 토로하였다”며 운을 뗀 방송사 동료 길도 “더 늦기 전에 구단에서 그에 대한 예우를 갖추어 주었으면 한다. 사람들이 영구결번 유니폼을 보고 그를 추억하길 바란다”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반 리어는 아내 수잔과의 사이에서 슬하에 2명의 딸과 손녀딸을 두었다.


놈 반 리어(Norm Van Lier, 1947-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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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통산 746경기 출장
평균 11.8득점, 4.8리바운드, 7.0어시스트(구단 역대 1위), 1.8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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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애미 히트의 베테랑 센터 알론조 모닝(38, 마이애미 히트)이 23일(이하 한국시간) 공식적인 은퇴절차를 밟으며 현역에서 물러났다. 90년대 NBA를 주름잡았던 ‘정통센터 1세대’의 한축을 담당했던 모닝의 은퇴로 이제는 샤킬 오닐(37, 피닉스 선즈) 정도만이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됐다.

센터로는 다소 작은 208cm의 키로 10년 넘게 골밑을 누빈 모닝. 모닝은 상대 공격수에게는 높디높은 산이었으며 동료들에게는 믿음직한 맏형이었다. 큼직한 눈망울을 지닌 모닝은 나름의 수려했던 외모와는 달리 그렇게 파이팅 넘치는 투사기질로 오늘날까지 많은 후배 선수들에게 귀감을 사왔다. 종종 난투극 현장의 주범으로 언론에 입에 오르내렸지만 모닝의 남다른 승부근성을 대변하는 사건들이다.
신장이식 수술로 저하된 신체능력은 불굴의 투지와 의지로 이겨냈다. 부상을 이겨내고 코트에 선 마지막 순간까지 투혼을 불사르던 그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가 왜 ‘전사‘로 불렸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부상으로 인해 재능을 피우지 못하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많은 스타플레이어들과는 겪을 달리한 인간승리였다.

올스타 선발, 세계 선수권대회 금메달, 올해의 수비왕 등 남부럽지 않은 경력을 쌓은 모닝은 뉴저지 네츠를 거쳐 친정팀으로 복귀한 지난 2005-06시즌, 180도 다른 모습으로 돌아왔다. 팀의 기둥은 이미 타인의 몫이었지만 자존심은 내던진 지 오래였다. 입단 동기이자 라이벌이었던 오닐의 백업을 자처한 모닝은 그 해 평생 바라왔던 타이틀을 차지하며 이력의 마지막을 채웠다.

필자에게 있어 모닝의 노년투혼은 감동과 슬픔이 교차하는 시간들이었다. 이른바 4대 센터로 90년대 리그의 골밑을 평정했던 라이벌들에 비해 모닝은 상대적으로 저평가 받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던 모닝이 한껏 날개를 펼 즈음 부상의 악령이 찾아왔고 더 이상의 도약은 없었다. 그에게서 블락과 골밑 수비 능력을 앗아간다면 더 이상 남아있을 것이 없다는 사실이 그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 건강만 잃지 않았다면 더 크게 뻗어 나갈 만한 재목임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때문에 2005-06시즌 우승 트로피를 품에 안은 모닝의 모습은 앤퍼니 하더웨이나 그랜트 힐에게서 맛보았던 아쉬움을 해소시켜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전성기를 보내야 할 시기에 부상과의 싸움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는 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보냈기 때문이다. 1년이 걸리든 10년이 걸리든 말이다. 예전처럼 20득점이나 두 자리 수의 리바운드를 걷어내지는 못했지만 우승에 기여한 모닝의 공로는 결코 작지 않았고, 그 사실에 많은 팬들이 기뻐했고 감사해하였다.

한국 나이로 불혹을 맞이한 알론‘Zo' 모닝의 40년 인생을 다시 한 번 조명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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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의 불운한 탄생, 그리고 농구

1970년 2월 8월, 버지니아 주(州)에 소재한 체서피크의 한 병원에서 우렁찬 신생아의 울음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이 아기를 맞이한 것은 따듯한 부모의 품이 아닌 차가운 양육원 건물이었다. 그의 부모는 그가 태어나던 시기에 10대 청소년에 불과했으니 모닝의 양육원행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어렸을 때는 소극적이면서 반항아였다. 툭하면 싸움을 벌여 벌을 받곤 했다”며 유년시절을 회고하였다. 10살이 되던 해에 모닝은 변화가 필요한 시점임을 느꼈다. 부모가 있고 따뜻한 집이 있는 제대로 된 안식처 말이다. 하지만 어렵사리 찾은 모닝의 부모가 모닝이 12살이 되던 해에 이혼을 결정하면서 소년의 꿈은 다시 한 번 산산조각 났다.

“정말 화가 났었다. 집과 가정을 갖고 싶다는 생각은 사라지고, 양육원에서 다신 나오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모닝의 말이다. 이후 모닝은 부모의 친구였던 패니 쓰리트라는 이웃집으로 보내졌다. 이후 부모의 이혼을 받아들이며 힘겨운 시간을 보낸 어린 모닝은, 학교 선생님과 주위 친구들의 권유로 농구공을 잡게 된다. 또래 아이들에 비해 월등히 큰 키를 자랑했던 모닝이었지만 농구가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정말 서투르고 실력도 형편없었다”며 농구와의 첫 만남을 회상한 모닝은 “사람들은 나를 비웃었지만 그것이 나를 더 연습에 몰두하게 만들었다”며 유년시절의 추억을 이어갔다.
어둠으로 점철됐던 모닝의 과거는 남다른 승부근성의 토대가 되었고 갖가지 자선활동과 무료 농구캠프에 열을 올리는 동기가 되었다. 특히 고아들에 대한 모닝의 관심은 남달랐다. 아마도 부모님 대신 그의 울타리가 돼주었던 양육원 생활의 추억들이 지금의 모닝을 만들었을 것이다. 모닝은 해마다 오프시즌이 되면 마이애미 등지에서 팀 하더웨이 같은 과거 동료들을 초청하여 자선 올스타전을 열어왔다.

지역 고등학교인 인디안 리버 고교에 입학한 모닝은 농구선수의 재능을 마음껏 펼쳤다. 입학하던 해에 모교의 51연승을 주도한 모닝은 2학년이 되자 경기당 25점 15리바운드 12블락을 기록하며 마침내 진가를 발휘해 보였다. 센터임에도 준수한 중거리 슛 능력과 다양한 포스트 업 기술을 자랑했던 모닝은 수비에서는 이미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선수로 성장해 있었다. 혹자들은 이런 모닝을 두고 전설적인 센터 카림 압둘자바의 젊은 시절을 연상케 한다며 입을 모았다.

대학입학을 앞둔 모닝의 선택은 다름 아닌 조지타운이었다. 조지타운은 그가 존경했던 패트릭 유잉을 배출한 명문대학이었기에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조지타운 입학 전 모닝은 1988 서울올림픽 국가대표팀 트라이아웃에 초청되었지만 아깝게 탈락하였는데 연습경기에서 동문선배인 유잉과의 맞대결로 아쉬움을 달랬다. 신입생 시절 전미 블락왕 타이틀을 거머쥔 모닝은 졸업반이 되던 해에 올-아메리칸 팀에 선정되며 명실상부 전국구 스타로 거듭났다.


고아 농구선수의 ‘Dream come tr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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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A행을 외친 지난 1992년, 또 한명의 대어였던 오닐에 밀리며 전체 2위로 살럿 호네츠(現 뉴올리언즈 호네츠)에 입단한 모닝. 모닝은 리복의 모델도 아니었고, 힙합 패션을 즐기며 랩 앨범을 발매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사각의 코트에서는 오닐에 필적하는 성적표를 남겼다. 특히 플레이오프 같은 큰 무대에서 모닝의 담대함은 빛을 발하였다. 전공인 수비력은 일찌감치 인정을 받아 모닝은 훗날, 공격력까지 겸비한 빌 러셀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었다.
모닝의 혼자 힘으로 쌓은 것은 아니지만 코트 밖에서는 샬럿의 유니폼 판매율이 상한가를 치며 비인기 약체 팀과 신생구단의 이미지를 벗는데도 일조하였다.

전직 권투선수라는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 래리 존슨과 전 세계 어린이들의 팬心 을 사로잡은 리그 최단신 가드(160cm) 타이론 보그스의 존재는 모닝과 함께 팀의 미래를 밝혀주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4년의 신인 계약 만료기간이 다가옴에 따라 구단은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했다. 모닝과 존슨을 모두 잡기에는 무리라는 판단아래 트레이드를 물색했고 매물 대상은 다름 아닌 모닝이었다. 샬럿은 마이애미 히트의 글렌 라이스, 맷 가이거를 받는 조건으로 지난 3년 동안 팀을 이끈 모닝을 내주었다.

위기는 기회라고 했던가? 당시 마이애미의 선장은 팻 라일리 감독이었다. 라일리는 80년대 ‘스카이 훅슛의 달인‘ 카림 압둘자바에 이어 90년대 킹콩‘패트릭 유잉’을 키워낸 센터 조련사로 이름난 감독이었다. 특히 숨 막히는 압박수비 시스템을 뉴욕 닉스에 투영시키며 본격적인 수비농구시대를 연 인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라일리 감독의 성향은 모닝과도 잘 부합하였고 이들은 빠른 시간 내에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었다. 모닝과 P.J. 브라운이 버티는 마이애미의 골밑은 리그에서 가장 공략하기 까다로운 공간이었으며 백코트 역시 끈끈한 수비로 이름난 댄 멀리와 팀 하더웨이가 버티고 있어 물 샐 틈 없는 수비진용이 구축됐다.

모닝은 주위의 기대를 결코 저버리지 않았다. 매 경기 20점에 가까운 득점을 뽑아내면서도 10개의 리바운드와 4개의 블락을 함께 조달하며 공수에서 팀을 이끌었다. 하지만 모닝도 천하의 농구 황제 앞에서는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신흥강호로 급부상한 마이애미는 2년 연속 시카고 불스에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번번이 고배를 들며 자리를 내주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고 팀 분위기도 좋았지만 마이클 조던과 시카고의 벽은 너무나도 높아 보였다.

그리고 찾아든 선수 노조파업과 직장폐쇄. 승승장구 할 것 같던 조던과 시카고가 마침내 해체됨에 따라 모닝은 수많은 무관의 제왕들과 함께 우승의 꿈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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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NBA가 과거로부터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필자는 주저 없이 ‘격렬함과 터프함‘을 꼽을 것이다. 냉혹한 승부의 세계에서 반드시 지녀야할 덕목임에도 근대농구에서 그 자취를 감추고 있는 것은 개인적으로 무척 아쉬운 대목이다.

지난 날 NBA에는 성실한 일꾼들이 참으로 많았다. 구슬땀을 흘리며 코트 위를 누비고 있는 현역선수들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리그의 모든 팀들이 브루스 보웬 같은 선수들을 보유하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지금의 경기환경이 얼마나 유연해졌는지 수긍이 갈 것이다. 핸드체킹 룰이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에는 신체접족이 잦은 골밑은 하루하루가 전쟁과도 같아 박스아웃이나 스크린 같은 음지의 기술들을 잘 다루는 파워포워드의 가치가 매우 높았다. 때문에 투철한 경쟁의식은 물론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질 수 있는 진정한 사나이들이 넘쳐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파울 콜에 대한 수위가 높아지고 리그의 징계가 점차 강화되며 이 매력적인 남자들은 하나 둘씩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한때 NBA는 암묵적으로 난투극을 묵과하던 시기가 있었다. 물론 최악의 사태까지 수수방관하지 않았지만 누적되는 몸싸움으로 주먹다짐이 비일비재했다. 3심제가 도입되기 전에는 화의 근원이 될 만한 유치한 신경전도 미처 잡아내지 못했다. 그렇다고 마냥 울상만 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스스로가 마음을 독하게 먹고 생존법을 터득해야했다.

리바운드의 황제로 군림했던 데니스 로드맨은 ‘Bad as I wanna be'라는 자서전을 통하여 악명 높은 ’배드 보이즈‘에 대해 충격적인 사실들을 회고한 바 있다. 당시 로드맨은 “동료들 중 상당수가 거리의 싸움꾼 출신이었다. 어떻게 하면 상대에게 부상을 입힐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며 본인도 그에 대한 노하우(?)를 전수받았다는 후문이다. “마음만 먹으면 매일 밤 상대선수를 병원으로 보낼 수 있었을 것”이라는 로드맨의 증언은 과거의 NBA가 어떻게 돌아갔는지 생생하게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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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소개할 이는 승리를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투사 중에 투사였으며 미국 막노동꾼들을 일컫는데서 유래된 ‘블루컬러워커’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파워포워드이다. 그렇다. 눈치를 챈 분도 있겠지만 바로 찰스 오클리다. 그는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패트릭 유잉의 조력자로서 90년대 리그의 골밑을 누볐다. 특히 뉴욕 닉스의 원정 유니폼을 입는 날이면 영락없는 코트의 노동꾼 그 자체였다. 별명인 ‘Oak Tree' 역시 절묘한 작명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참나무는 단단한 재목으로 그 쓰임새가 매우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단단한 내구력과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던 오클리에게 더 없는 별명이다.

206cm의 키에 111kg의 몸무게로 기골이 장대했던 오클리의 신체적 단점은 탄력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의 경기에서는 덩크슛을 보기가 힘들었고 명장면만 모아놓은 하이라이트 필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공격리바운드에 의한 풋백 득점, 45도와 베이스라인의 중거리 슛이 주 득점수단일정도로 그는 수비에 특화된 선수였다. 

리바운드에 있어서 탄력도 하나의 필요요소이지만 절대적 요구사항은 아니다. 오클리는 타고난 하체 힘과 노련한 위치 선정으로 이를 극복했고 대학무대와 NBA의 골밑을 평정할 수 있었다. 버지니아 유니온 재학시절에는 평균 20.3점과 14리바운드로 빼어난 성적을 거두었는데 특히 마지막 졸업 시즌에는 17.3리바운드로 2부 디비전 1위를 차지하며 전문 리바운더로서의 이름을 만천하에 알릴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황제의 보디가드를 자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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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릭 유잉의 드래프트로 불리는 1985년,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에 의해 전체 9번으로 지명된 오클리는 당일 같은 팀에 지명 된 캘빈 던컨과 함께 시카고 불스로 트레이드 된다. NCAA 2부 리그에 속한 이유로 인지도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었지만 13번에 지명된 유타 재즈의 칼 말론이나 L.A 레이커스의 A.C 그린 등을 뒤로하고 당당하게 NBA에 입성한다. 당시 시카고는 떠오르는 신성 마이클 조던과 올랜도 울리지라는 정상급 스윙맨 듀오를 보유했지만 취약했던 로포스트의 전력 보강이 절실했고 오클리는 마지막 조각으로 더 없는 선택이었다.  

데뷔전 이후로 올스타 브레이크까지 벤치를 지켰던 루키 오클리는 시즌 중반부터 선발 파워포워드의 중책을 맡으며 마침내 그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특히 3월 한 달 동안 15.5점 13.8리바운드의 기염을 토하며 ‘이달의 신인‘에 선정되는 한편 팀을 진두지휘 하였다. 시카고는 간판스타 조던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오프 행 8번 티켓을 끊었는데 이 겁 없는 신인 포워드가 없었다면 꿈도 못 꿀 결과였다. 또한 인구에 꾸준하게 회자되고 있는 조던의 63점 경기는 존재하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오클리의 성공적인 데뷔 시즌은 리그에서도 인정되었고 유잉, 말론, 듀마스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며 올NBA 루키 팀에 선정되는 영광을 안겨준다. 언론에 “조던을 건드는 이가 있다면 내가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며 리그의 모든 팀에 선포하며 에이스의 신임도 얻었다. 모두가 꺼려하는 힘들고 더러운 일도 일선에 나서는 오클리의 존재는 더 없이 든든했고 미래는 밝아만 보였다. 하지만 오클리의 시카고 생활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잘못된 일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일일이 지적해왔고 이러한 오클리의 당당한 언행은 윗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사게 돼 결국 리빌딩의 희생자로 낙점되고 만다.

1987-88시즌을 끝으로 뉴욕과의 트레이드에 의해 새 보금자리를 찾은 그는 시카고의 영원한 라이벌 도시에 그렇게 입성한다. 그의 등 뒤에는 오클리의 트레이드를 반대하는 조던의 격렬한 항의가 메아리치듯 울렸지만 한번 엎지른 물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깡마른 두 명의 신인 포워드가 오클리의 공백을 메웠지만 훗날 이들은 ‘죽여야만 사는‘ 얄궂은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화려한 조연배우의 전성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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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프트 동기 유잉과 함께 골밑 임무를 분담한 오클리의 역할은 시카고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유잉으로 인해 활동반경이 넓어졌고 장기인 중거리 슛의 위력도 배가됐다. 시카고에서 보낸 마지막 시즌 당시 아쉽게 리바운드 타이틀을 내준 그는 1988-89시즌 리그 전체 6위에 해당하는 10.5리바운드를 걷어내며 뉴욕 골밑의 새로운 살림꾼으로 입지를 다져갔다.

뉴욕은 당시 1987-88시즌 신인왕에 빛나는 마크 ‘액션’ 잭슨을 필두로 자니 뉴먼과 제럴드 윌킨스로 이어지는 탄탄한 선발멤버와 신구조화가 어우러진 벤치전력을 자랑하며 시카고와 함께 떠오르는 신흥강호였다. 오클리가 가세한 1988-89시즌은 친정팀 시카고와 악연의 고리를 만들게 된 시작이라 볼 수 있다. 양 팀은 이후 8년간 여섯 차례 플레이오프 무대에서 만나 격투기를 방불케 하는 경기를 펼치며 코트를 뜨겁게 달구었다.

1988년도에 제작된 시카고 불스의 ‘하이그라운드‘라는 시즌 리뷰 비디오를 보면 오클리의 코트 안팎의 모습을 잠시나마 들여다 볼 수 있다. 애송이에 불과했던 스카티 피펜을 라커룸 벽에 세워놓고 이등병 대하듯 고참행세를 하며 만면에 웃음을 짓던 그런 모습 말이다. 그는 절대로 뒤끝이 없어 한 번 혼쭐을 내어도 큰 형처럼 다독이는 넓은 마음씨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적어도 코트에서의 오클리는 천사일 수 없었다. 피펜이나 그랜트에게 거친 파울을 수차례 범하면서도 손 한번 내밀지 않는 냉혹한 승부사로 변해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는 어느 팀에 몸을 담고 있던 상대방에 대한 변하지 않는 그만의 철학이었다.  

하지만 친정팀에게 번번이 고배를 든 오클리는 먼발치에서 그들의 우승 잔치에 쓰린 속을 부여잡아야 했다. 1991-92시즌 새 사령탑으로 부임한 팻 라일리 감독이 앤쏘니 메이슨을 중용하며 출장시간도 줄어들었다. 물론 코트위에 서 있는 순간에는 최선을 다하는 선수였고 여전히 거친 허슬플레이어였다. 하락한 개인 성적도 개의치 않는 오클리였지만 가슴 한구석의 공허감을 달래기 위해서는 역시 우승이 필요했다.

농구 황제 조던 없이 맞이한 1993-94시즌은 오클리에게 있어 제2의 전성기나 다름없는 해였다. 생애 최초로 올스타에 선정되는 영광을 맛본데 이어 올NBA 퍼스트 수비팀에 당당이 이름을 올렸다. 3년 만에 더블-더블 기록도 되찾았으니 개인적으로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하킴 올라주원의 휴스턴 로케츠에 고배를 든 뉴욕은 이듬해 NBA에 돌아온 조던에 의해 다시 한 번 가로막히며 좌절을 거듭하게 된다. 1997-98시즌에는 설상가상으로 유잉의 시즌아웃이라는 악재가 겹치며 변화의 시간을 재촉하였다.

결국 사상초유의 선수노조 파업사태가 불어 닥친 1998년 오프시즌을 맞이하여 구단은 대대적인 수술의 칼을 들게 됐고 36세의 노장 포워드는 토론토 랩터스의 마커스 캠비와의 맞트레이드로 팀의 미래에서 제외되는 불운을 겪고야 만다. 이듬해 뉴욕은 NBA 역사상 최초로 8번 시드 파이널 진출을 이룩하며 돌풍을 일으켰는데 오클리가 떠난 팀마다 성공을 일궈내는 묘한 운명은 계속 이어졌다. 11년간의 파란만장했던 뉴욕생활은 그렇게 초라하게 막을 내렸다.


역마살이 깃든 노장의 마지막 여정

창단 3년 만에 새로운 유니폼과 홈구장을 선보인 토론토는 오클리의 가세로 노련미 넘치는 로포스트를 구축하게 된다. 오클리는 베테랑 센터 케빈 윌리스와 함께 녹슬지 않은 기량을 뽐내며 토론토가 신생팀의 이미지를 벗는데 일조하였다. 농구선수로서 이미 황혼기에 접어든 그였지만 투지 넘치는 플레이는 세월을 무색케 하였다.

화려한 고공플레이로 이른바 ‘에어 캐나다’ 센세이션을 일으킨 빈스 카터는 지난 날 붉은 색 유니폼의 23번 사나이를 떠올리게 만들었지만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팀의 에이스를 무조건 감싸기 보다는 더 나은 선수가 되라며 채찍을 들었던 것이다. 들쑥날쑥한 카터의 슈팅기복과 취약한 장거리 슈팅능력, 오른쪽 돌파만을 선호하던 습관 등을 지적하며 쓴 소리를 아끼지 않은 오클리는 맏형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특히 출장시간에 대해 불만을 표했던 트레이시 맥그레이디에게는 “어린 선수가 너무 많은 것을 바란다”며 일침을 놓기도 하였다. 

동부 컨퍼런스의 정상권을 노려볼만한 위치에 이른 토론토는 간판스타 카터의 부상으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결국 오클리는 몰락하는 팀의 운명을 뒤로하고 모든 여정의 시작이었던 시카고로 돌아온다. 토론토에서 마지막으로 보낸 2000-01시즌 당시 득점과 리바운드에서 더블-더블급 활약을 펼쳤던 그의 마지막 불꽃은 점차 희미해지고 있었다.

타이틀에 대한 미련도, 개인적인 영예의 욕심도 모두 버린 오클리는 오로지 경기에 대한 열정으로 선수생활을 버텨나갔다. 불혹의 나이에도 그가 코트에 설 수 있었던 이유다. 농구경력을 시작했던 곳에서 마지막을 생각하고 있을 시기에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단짝인 마이클 조던이 코트로 돌아왔다. 조던의 간절한 설득에 마음을 돌린 오클리는 워싱턴과 베테랑 최저 연봉액수에 합의하며 절친한 동료의 마지막 길동무가 돼주었다. 결국 조던의 은퇴로 워싱턴에 남을 이유가 없어진 오클리는 2003-04시즌 휴스턴에서 단 7경기만을 뛰며 NBA 이력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의 경력을 돌이켜볼 때 우승반지는 물론 변변한 개인수상의 경력하나 없는 평범한 프로선수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록지의 숫자로 평가할 수 없는 선수가 바로 이 찰스 오클리였으며 많은 이들이 이면에 드리워진 그의 모습을 사랑했다. 필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매직 존슨이나 클라이드 드렉슬러와 같은 화려한 슈퍼스타에 대한 그리움. 그것은 타이론 힐이나 오티스 도프, 오클리, 로드맨과 같이 코트 사이드를 뒹굴며 흙먼지를 뒤집어 쓴 터프가이들에 대한 그리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계속 되는 도전, 그리고 두 얼굴의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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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트를 떠난 지 만 3년이 되던 지난 2007년 오클리의 복귀 설이 모락모락 피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는 불혹을 넘겨 43세였다. 그 해 드래프트 1순위인 오든이 갓난아기라면 오클리는 할아버지뻘인 셈이었다.

지난 3년 전 바닥을 드러낸 오클리는 이제 더 이상 플레이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음에도 자긍심 하나는 여전했다. “하찮은 액수의 계약금으로는 뛰지 않을 것”이라 공언하며 리그에서 장려하는 베테랑 미니멈의 경로혜택을 마다한 것이다. 은퇴와 복귀를 두 차례 반복했던 절친 조던은 “제대로 된 대우가 없다면 뛸 필요 없다”며 오클리를 지지했고 그 역시 본인의 입장을 고수했다. “좋은 연봉여건에서 뛸 것이다. 어느 구단도 나를 돈으로 살 수 없으며 돈도 나를 지배할 수 없다. 터무니없는 베테랑 최저연봉으로는 코트에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며 다시 한 번 본인의 의지를 피력했다. 결국 오클리의 복귀는 무산됐지만 그의 뚝심과 담대함을 재차 확인 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샤킬 오닐이나 찰스 바클리처럼 본인이 내뱉은 말로 곤욕을 치루는 이도 있지만 오클리의 말은 무게감이 틀렸다. 가볍고 무모한 호언장담이 아닌 누군가는 맸어야 할 총대와도 같은 사안들은 언제나 오클리의 몫이었다. 그리고 현재는 일선에서 한 발짝 물러났지만 필요할 때는 쓴 소리를 아끼지 않을 정도로 리그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고 있다.

팀 도너기 심판파동으로 소란스러웠던 올 해 여름, 오클리는 분노를 금치 못하였다. “분명 저 너머에는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이 숨겨져 있다. 책을 통해 모든 전말이 공개 되는 날이 올 것”이라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그는 “지난 시즌 브렌트 베리의 파울만 봐도 알 것이다. 누가 봐도 명백한 파울이었음에도 휘슬은 울리지 않았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경기조작”이라며 흥분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룰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고 매 시즌마다 새로운 영웅이 만들어진다. 이는 속임수나 다름없는 짓”이라며 리그 행정부에 따끔한 충고를 건냈다.

오클리의 쭉 찢어진 눈, 고집을 담은 두툼한 입술은 마치 마이크 타이슨을 방불케 하는 외모로 기억된다. 터프가이로 한 평생을 살아온 그였지만 가슴 따뜻한 ‘인간 오클리‘를 아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왼팔이 하는 일을 오른팔이 모르게 하라”는 옛말도 있다. 하지만 오클리가 실행해온 수많은 자선행사들은 그가 얼마나 배려 깊은 남자인지 알려주는 좋은 자료다.

1993-94시즌에는 리바운드 한 개당 1달러의 기부금을 적립했고 팀 동료 존 스탁스가 이를 본받아 3점 슛 한 개당 5달러의 기부금을 내게끔 만들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고향 버지니아 유니언에서는 재단을 운영하며 오랜 세월동안 불우아동 단체를 지원하고 있고 클리블랜드 등지에서 무료 여름캠프를 개최하며 꿈나무들의 육성을 돕고 있다.

이러한 오클리의 자선활동은 폭넓은 개인사업의 확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6개의 세차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그는 남다른 사업수완을 발휘하여 성공적인 자산증식을 이끌었다는 후문이다. 외모에 걸맞지 않는 탁월한 패션 감각도 오클리가 가진 또 하나의 능력이었다. 특히 1997년 패션 전문 매거진 ‘GQ'에서는 과소평가 받은 드레서로 선정되며 다양한 끼를 발산했다.

   
마치며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선수와 팬으로서의 관계를 영원히 지속시키고픈 인물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해왔다. 줄리어스 어빙이 그랬으며 매직 존슨과 마이클 조던 같은 팬의 사랑을 듬뿍 받은 영웅들도 좋은 예가 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없으면 못살 것 같던 슬픔과 인연의 끝에 맛보는 아쉬움은 한 순간에 사라진다. 마치 물레방아처럼 떠나는 이의 자리는 누군가가 항상 채워왔기 때문이다.

NBA 총재 데이빗 스턴도 말한다 “리그는 슈퍼스타의 은퇴로 위기에 처할 때마다 항상 새로운 누군가가 등장하곤 했다. 윌트 체임벌린이 사라지자 카림 압둘자바가 데뷔했고 어빙이 퇴장하니 조던이 혜성처럼 등장했다. 덕분에 우리는 문제를 극복해나갈 수 있었다”고 말이다. 어디 국내뿐이겠냐 만은 NBA의 전파에 혁혁한 공을 세운 조던의 존재도 차츰 잊혀져  가고 있다. 심지어는 그가 누구인지 모르는 젊은 팬들도 생겨나고 있을 정도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치유되는 만병통치약 ‘시간’은 시대를 풍미한 영웅도 지울 수 있는 날카로운 검인 셈이다. 이치가 이러한데 별다른 족적 없이 사라진 많은 선수들의 추억은 오죽할까?

찰스 오클리는 몇 년 안에 많은 팬들의 머릿속에서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필자에게 있어서 그는 좋은 추억으로 남은 영화한편에 대한 회상과도 같은 존재다. 재밌는 영화는 흥행에 성공하지만 좋은 영화는 가슴에 남는 이유와도 상통한다. 그렇다. 오클리는 과거의 담습을 유쾌하게 만들어 준 그런 선수였다. 농구 이상의 감동을 선사해 준 그가 오늘따라 무척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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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 스포츠의 꽃 농구의 시즌이 돌아왔다. 국내리그는 WKBL이 막을 올린데 이어 KBL도 20일 시범경기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레이스에 돌입한다. NBA 역시 2008-09시즌을 앞두고 트레이닝캠프를 통하여 마지막 담금질로 여념이 없다.

해마다 늘 겪게 되는 일이지만 올 여름에도 별들의 이동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블록버스터급은 아니어도 팀을 좌지우지 할 만한 올스타 레벨의 굵직한 선수들이 우승이라는 대의명분으로 친정팀과의 이별을 고하기도 하였다. 어떤 이는 의지와 상관없이 등이 떠밀려지기도 했지만 말이다.

때문에 LA 클리퍼스의 새 얼굴 배런 데이비스마커스 캠비의 각오는 남다르다. 저마다의 사연은 다르지만 그들의 목표는 오직 하나, 우승이다. 오랜 세월 이어온 만년 꼴지, 동네북의 간판을 확실히 걷어내겠다는 의지도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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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퍼스의 역사를 살펴보면 부끄러운 수식어에 수긍이 간다. 그도 그럴 것이 우승은 고사하고 플레이오프 진출만으로도 해마다 힘겨운 사투를 벌였기 때문이다. 강팀들이 60승이니 50승이니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구석에서 신생팀들과 최다 패를 두고 자웅을 겨루었으니 팬들의 가슴은 시커멓게 타들어가다 못해 재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시즌이 끝날 때면 드래프트 상위 픽을 얻는 수혜도 입었지만 이 역시 운이 따라주지를 않았다. 갓 데뷔한 스타들이 경험삼아 클리퍼스에 몇 년 뛰고 이적을 해버리는 통에 소위 말하는 ‘남 좋은 일’을 일관해 왔기 때문. 고참선수들도 클리퍼스라면 손사레를 치긴 매한가지다.

전설적인 센터 빌 월튼은 부상으로 클리퍼스의 벤치를 달구고 보스턴으로 떠났다. 휴먼 하이라이트 필름으로 수많은 팬들을 몰고 다닌 도미니크 윌킨스 역시 트레이드로 클리퍼스에 온 것을 “모욕”이라 칭하며 이듬해 보스턴으로 이적하였다. 이 사건으로 마음의 상처를 입은 윌킨스는 그리스행 비행기로 몸을 실어 주위의 안타까움을 사기도 하였다.

클리퍼스의 끝없는 터널에 조금씩 빛이 들어선 것은 밀레니엄시대로 접어들면서이다. 시카고 불스 출신의 신인왕 엘튼 브랜드를 영입하면서 마이클 올로워칸디와 나름의 궁합을 맞춘 것이 그 시작이었다. 백코트와 벤치는 무한 잠재로 넘쳐흘렀다. 포인트 포워드 라마 오돔과 ‘제2의 케빈 가넷‘을 꿈꾸던 대리우스 마일스가 포진해 있었고 코리 매거티와 쿠엔튼 리차드슨이라는 유망한 스윙맨들은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어 그 미래는 매우 밝아 보였다.

‘LA의 주인은 더 이상 레이커스가 아니다‘라고 큰소리 칠만한 배짱을 갖추게 된 것이다. 베테랑 가드 샘 카셀과 쿠티노 모블리의 합류를 필두로 젊은 골밑 자원을 보강한 클리퍼스는 2005-06시즌 꿈에 그리던 플레이오프 진출을 달성한데 이어 덴버 너게츠를 꺾고 2라운드에 오르는 기염을 토해냈다. 특히 서부 컨퍼런스 준결승전에서는 난적 피닉스 선즈와 최종 7차전까지 가는 접전을 펼치며 침몰 직전으로 몰아넣어 강한 인상을 남기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것이 클리퍼스의 짧고도 굵었던 마지막 투쟁이었다. 이후 두 시즌동안 내리 플레이오프 진출에 좌절하며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 것. 팀의 기둥이었던 브랜드와 프랜차이즈 스타 매거티마저 떠난 사실은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시즌에 임해야 하는 이유로 충분하다. 

때문에 새로운 클리퍼스 호의 선장 마이크 던리비 감독의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돌아가고 있다. 던리비 감독은 “클리퍼스가 2006년 수준의 수비 팀으로 거듭나지 못하면 실망할 것”이라 공언하며 강력한 수비를 바탕으로 경기운영을 펼칠 것을 약속했다.

준비여건은 완벽하다. 새로 합류한 리키 데이비스나 기존의 모블리-팀 토마스는 수준급 퍼러미터 디펜더로의 자질을 갖추고 있다. 언제 어디에 내놓아도 제 몫을 해낼 인물들이다. 클리퍼스의 골밑을 책임졌던 크리스 케이먼은 올림픽에서의 부진으로 주가가 하락했다고는 하지만 나이를 감안하면 존재감을 발휘할 여지가 남아있음은 물론 성장에 대한 기대감마저 갖게 할 젊은 인재다. 또한 브랜드의 공백은 수비왕 출신의 블락머신 캠비가 훌륭하게 메울 전망이다. 어느 덧 노장소리를 듣게 된 캠비지만 케이먼과 함께 강력한 시너지를 내줄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수비가 밑바탕이 되는 것도 좋지만 골이 들어가야 이기는 법이다. 역시 공격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선수 면면을 살펴보면 공격성향이 짙고 볼 소유욕이 많은 점이 눈에 띈다. 이번에 데뷔할 에릭 고든 역시 인디애나 대학시절 슈팅머신으로서 본인의 능력을 발휘했기 때문에 슈팅가담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으로 보인다. 이에 던리비 감독은 “누가 되었든 볼을 만지는 시간이 줄어들 것”이라며 적절한 볼 배급과 원활한 볼 무브를 강조하였다. 

골든스테이트에서 시원시원한 속공 조율사로 코트를 휘저었던 데이비스는 알 쏜튼이나 리키 데이비스 같은 탄력 넘치는 이들에 날개를 달아 줄 것이다. 또한 노장 모블리와 함께 직접 지원사격에 나선다면 신바람 고득점 농구를 이 곳 클리퍼스에도 가져올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신인 고든이 즉시 전력감으로서 당장에 큰 도움은 못되겠지만 벤치에서 캐치 앤 슈터 정도의 몫만 제대로 해낸다면 더 할 나위 없는 보탬이 될 것이다. 

이들 모두가 손발을 맞출 시간이 부족했지만 새로운 팀 조련에 일가견이 있는 던리비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으니 많은 이들은 전폭적인 신뢰를 보낼 수밖에 없다. 포틀랜드 감독시절에는 온갖 스타들이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큰 잡음 없이 팀을 이끈 그다. 이러한 던리비 감독의 역량은 이번 시즌 클리퍼스에도 유감없이 발휘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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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험무대의 선봉에 설 데이비스의 책임은 특히 무겁지만 그의 입은 연신 웃음이다. 데뷔 후 10번째 시즌을 맞이하며 만난 세 번째 팀이지만 이 곳 LA가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LA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부터 대학까지 한시도 캘리포니아 주를 떠나 본적이 없는 그에게 더 없는 행운이다. 이는 고향의 가족들과 모든 친구들에게 전폭적인 응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심리적인 안정을 취하기엔 더 없는 조건이라는 얘기다. 특히 올여름 비지땀을 흘리며 9kg 가까이 감량에 성공했다. 가드 이상의 파워는 유지하며 날렵함과 더 나은 스피드를 준비한 것이다.

절묘한 타이밍에 팀을 떠난 브랜드에 대한 아쉬움은 뒤로한 채 이제는 그와 농을 주고받을 정도로 쾌활한 모습을 보여주는 데이비스다. 이번 시즌 플레이오프 진출 가능성에 대해 “가능성은 무한하다”며 자신감을 드러낸 그의 말에서는 이번 시즌에 임하는 그의 각오를 엿볼 수 있었다. 

스테이플 센터의 간판을 교체하는 것은 그들이 이룰 초과 목표달성의 보너스일 것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강해지는 서부 컨퍼런스의 틈에서 과연 클리퍼스의 원대한 꿈이 이루어 질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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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거대 케이블 방송사인 터너 스포츠(TNT)가 9일(이하 한국시간) 2008-09 NBA시즌 NBA TV 스케줄을 공식발표했다. NBA의 대표 방송라인으로서 리그와 인연을 맺은 지도 벌써 25년째다. TNT는 이번시즌 NBA 공식 방송국인 NBA TV에 96경기의 생중계를 제공하게 된다. 이는 최대 규모로 경쟁사인 ESPN이나 ABC를 뛰어 넘는 수치다.

직장 폐쇄로 반쪽 시즌이 되어 버린 지난 1999년부터 방송수급에 나섰던 TNT는 NBA TV와 10주년을 맞이함에 따라 NBA의 견실한 파트너로서의 입지를 다지게 됐다.

TNT는 NBC와 함께 90년대 NBA의 전도사로서 팬들의 기억에 남아있다. TNT는 간결하고 경쾌했던 인트로 영상과 마브 알버트라는 정상급 해설자로 대변되던 NBC사와는 달리 독특한 인터페이스와 폭넓은 해설진의 운용을 통해 팬들에게 어필하였다. 갓 은퇴한 선수들을 스튜디오에 세우며 젊은 시청자를 TV앞에 끌어 모은 것도 타사와의 차별화를 이룰 수 있었던 원동력 중 하나였다. 덕분에 현역 선수들의 은퇴 후 진로에 대한 긍정적인 로드맵을 제시할 수 있었다.

NBA 최고의 달변가로 꼽히는 찰스 바클리나 케니 스미스, 레지 밀러같은 스타 플레이어들은 TNT 해설진의 계보를 성공적으로 이어왔고 제프 밴 건디, 덕 콜린스, 마이크 프로텔로같은 명장들도 마이크를 잡아 팬들을 찾았다. 또한 CBS의 명콤비로 꼽혔던 딕 스탁튼과 휴비 브라운이 오랜만에 조우하며 올드팬들의 향수를 자극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TNT는 국내 팬들에게 큰 방향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실패했다. 이유 인즉 TNT 생중계는 한국시간으로 오전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최소 1회에서 많게는 3회까지 AFKN(現 AFN)을 통해 중계됐던 TNT는 화요일과 수요일, 목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고루 편성을 하였지만 오전 10시나 오후 1시의 시간대로 학생이나 직장인의 발목을 잡았다. 정보화 시대를 넘어 인터넷을 이용한 시청이 가능해진 지금은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지만 당시에는 비디오 녹화가 유일한 시청수단이었을 정도였다.

시간적인 측면을 볼 때 NBC가 그래서 사랑을 받지 않았나 싶다. 일요일과 월요일 새벽 12시 30분에 시작되는 중계는 ‘NBC 쇼 타임’이라는 프리뷰 방송을 통해 한 주간의 리그 소식을 간결하게 정리해주고 당일 경기분의 예상과 분석을 통해 팬들의 기대를 120% 충족시켜 주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직장이나 학교에 구애받지 않는 주말방송이라는 점은 국내 NBA 팬들의 머릿속에 NBC의 짙은 향수가 남아있는 이유일 것이다.    

NBC는 1990-91시즌을 앞둔 1989년 4월 28일 4년간 6억 달러에 중계권 계약을 맺었다. 마이클 조던과 시카고 불스의 왕조건설을 함께 한 NBC는 지난 1993년 4년간 7억 5천만 달러의 금액으로 독점 연장계약에 합의하며 전성기를 예고했다.

NBA on NBC하면 역시 빠질 수 없는 것이있다. 바로  ‘NBC의 아이콘은 테마곡이다’라 말할 수 있을 만큼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누린 인트로 음악이다. 필자 역시 ‘라운드볼 락’의 신명나는 선율이 아직까지도 머리 한 구석에 선명히 자리 잡고 있다. 힙합 가수인 넬리가 리메이크를 할 정도로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킨 이곡은 각종 미디어의 주요 장면에 삽입됐고 덴젤 워싱턴이 주연한 영화 리멤버 타이탄의 ‘타이탄 스피리트’곡으로 쓰이는 등 폭 넓은 확장성을 과시하기도 했다.

NBC가 호평을 받은 또 하나의 이유는 방송 외적인 부분만큼이나 내실 있는 중계 팀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나운서 밥 코스타스와 한나 스톰은 1996년까지 ‘NBA 쇼타임’의 진행자로 이름을 알렸으며 주간 NBA 프로그램 ‘인사이드 스터프’로 유명세를 탄 아마드 라샤드 역시 오랜 경험을 토대로 쌓은 노하우를 유감없이 발휘하며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든든한 후원사들도 NBC의 탄탄대로에 한 몫 했다. 인터넷 서비스 공급사인 ‘넷 지로‘의 지원으로 온라인과 연동한 세밀한 분석을 이끌었고 세계적인 맥주회사 밀러는 ’FLASH BACK‘ 을 통하여 과거 NBA의 추억들을 생생하게 살리는 콘텐츠를 제작하여 많은 호응을 이끌기도 했다. 이러한 독특한 메뉴들은 종전에 없던 NBC만의 고유 콘텐츠로서 끊임없는 개발만이 냉혹한 경쟁사회에서 가장 확실한 생존법임을 몸소 보여주었다.   

잘나가던 NBC는 한 차례 불미스러운 일을 겪었는데 다름 아닌 스타 해설자 마브 알버트가 그 원인이었다. 그는 명쾌하고 냉철한 분석으로 브라운관을 누볐지만 1997-98시즌을 앞두고 성 스캔에 휘말리며 중도하차하였다. 알버트의 후임은 NBA 쇼타임의 진행을 맡았던 밥 코스타스가 낙점됐고 파트너로는 전설적인 포인트 가드 아이제이아 토마스가 선발됐다. 이후 직장폐쇄와 마이클 조던의 은퇴, 파이널 전 시청률 최저기록 경신 등 온갖 악재가 겹치며 고사위기에 빠진 방송사는 결국 알버트를 다시 불러들이게 된다. 레이커스와 샌안토니오의 1999년 크리스마스 매치에 복귀한 알버트는 방송계약 만료시점까지 종횡무진하며 이름값을 해냈다.  

NBC는 오랜 세월동안 받아온 농구팬들의 관심을 뒤로하고 2002년 샌안토니오와 뉴저지의 파이널 6차전을 끝으로 방송을 마치게 된다. 당시 해설진들은 그토록 사랑받았던 NBC의 테마곡을 배경으로 숙연한 분위기속에 인사말을 꺼냈지만 빌 월튼 해설위원은 결국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고 알버트와 코스타스 역시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감격에 벅차 했다. 그만큼 NBC가 받은 관심과 이룬 업적은 대단했고 관련 방송인들의 자부심 또한 대단했다고 볼 수 있겠다.    

80년대 NBA의 인기를 한 단계 끌어올린 매직 존슨과 래리 버드 시대를 경험한 이들은 CBS의 향수를 잊지 못한다. 매직-버드 라이벌 시대를 선도한 방송사이자 전설적인 해설자 딕 스탁튼을 배출하였기에 그 추억들은 모든 올드팬들에게 각별할 것이다. 

CBS는 초창기에 시끄러운 인트로 음악과 해설의 질이 도마 위에 오르며 비난도 많이 샀지만 스포츠 중계의 꽃인 리플레이 영상을 도입하며 발전을 거듭해나갔다. 하프타임에는 현역 선수와 은퇴 선수를 불러들여‘HORSE(역주: 2인 이상이 참가하여 슈팅 대결을 펼치는 경기)’라는 번외 경기로 이색적인 볼거리를 제공하기도 했다.

매직 존슨래리 버드가 이끄는 LA 레이커스와 보스턴 셀틱스의 구도는 CBS의 전성시대를 연 초석이었고 80년대 중반 한 때 MLB의 월드시리즈와 근접하는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특히 당시에는 NBA의 유일한 등용문이었던 NCAA마저 독점중계하며 농구방송계의 지존자리를 확인시켰다. 이러한 CBS의 위상덕분에 빌 러셀, 엘진 베일러, 릭 배리, 톰 헤인슨 등 굵직한 경력을 보낸 은퇴선수들이 마이크를 잡으며 해설진도 호화진용을 갖출 수 있었다.

독특한 자유투 폼으로 국내 팬들에게도 익숙한 릭 배리는 정장 대신 화려한 가죽 자켓과 가슴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파격적인 의상을 입으며 눈길을 끌기도 했고 1981년 파이널 중계 당시 빌 러셀을 향해 인종차별 발언을 하여 중도하차하는 등 많은 이야기 거리를 남기기도 했다.

1989년을 끝으로 성공리에 막을 내린 CBS는 NBC에 바톤을 넘겨주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현재까지도 미 대학농구인 NCAA를 통해 농구팬들과 교감을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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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자농구 대표팀이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8년 만에 금메달을 되찾는 쾌거를 달성하였다. 대륙별 최고의 12개국이 참가한 이번 올림픽에서 최강 자리를 확인한 이번 대표팀은 과연 선배들의 위업에 견줄만한 성과를 달성한 것일까? 이번 리딤팀과 역대 드림팀의 업적을 비교 조명해보자.


선발기준과 운영체제부터 비교불가

마이클 조던매직 존슨, 래리 버드 등 80-90년대를 풍미한 전설들이 몸담았던 원조 드림팀과 센터 르네상스 시대를 연 이른바 4대 센터의 주역들이 참가했던 ‘드림팀3‘가 남긴 족적은 결코 작지 않다. 하지만 이들이 남긴 결과물을 논하기에 앞서 판이하게 다른 미국농구협회의 과거와 현재의 행정체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1988 서울 올림픽까지만 해도 프로 선수의 출전이 금지돼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대표팀과 금메달이 NBA 선수들에 선망의 대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미국농구협회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앞두고 출전거부 따위의 문제로 고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최고의 선수들을 놓고 즐거운 고민에 빠져있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도 마찬가지였다. 전설들의 자리를 대신 한 새로운 세대들이 얼굴을 내밀었고 가히 최고의 진용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덕분에 미국은 상비군 제도와 전임감독제를 택하는 대신 그때그때 팀을 구성하여 가볍게 손발을 맞추어왔다. 올스타전처럼 말이다.

하지만 2000 시드니 올림픽 무렵에는 선수들의 인식이 달라져있었다. 올림픽은 젊은 선수들에게 영광의 대상이기 보다 귀찮고 힘든 ‘여름방학 보충수업‘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이번 베이징 올림픽 대표팀의 포지션을 면면히 살펴보면 사실 최고의 멤버가 소집되지는 않았다. 스몰포워드와 슈팅가드, 포인트가드 등 백코트만큼은 역대 어느 팀에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었지만 말이다. 지난 시즌 수비왕에 오른 케빈 가넷이나 아마레 스타더마이어는 출전을 고사했고 드래프트 1번 픽에 빛나는 그렉 오든은 부상으로 인한 재활훈련에 여념이 없었다. 

로스터의 깊이만큼은 역시 아직까지는 원조 드림팀들만한 작품이 없다. 이번 베이징 올림픽은 로포스트 부문에서도 최고의 선수가 엄선됐다면 더 좋은 성적표가 나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비록 유럽의 높이를 압도적으로 제압하는데 실패했지만 새로 도입한 상비군 시스템으로 2006년부터 호흡을 맞추어 온 조직력을 바탕으로 단점을 상쇄할 수 있었다. 

다음 런던 올림픽에서는 포지션 별 최고의 선수들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선배들도 안 부러운 경기력

이번 대표팀이 대회에서 남긴 경기당 점수 차는 28.9점. 이는 드림팀이 발족됐던 1992년 이래 3위에 해당한다.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43.8점과 애틀랜타 올림픽의 32.3점 다음 가는 성적이다. 하지만 단순 숫자로 우열을 가리기엔 설득력이 떨어진다.

먼저 세계농구의 수준은 비교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높아졌다. 미국농구를 저지할만한 팀으로 과거 구소련과 크로아티아가 단골손님에 뽑혔지만 NBA 스타들 앞에서는 이렇다할만한 힘을 쓰지 못했다. 하지만 데이비드 스턴 NBA 총재의 리그 세계화 정책으로 유럽이나 남미같은 대륙들의 전력은 무럭무럭 자라기 시작했다. 덕분에 덕 노비츠키나 마누 지노빌리 등 국민 영웅들을 위시로 하여 기존에도 탄탄했던 팀 조직력에 기술이 더해졌다. NBA의 글로벌화가 스스로의 발등을 찍은 셈이다.    

결국 비교선상에서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세계 강호들의 전력을 고려하면 이번 올림픽에서 남긴 28.9의 마진은 숫자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요즘 말로 ‘넘사벽’의 경지에 이른 격차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알렌 아이버슨이나 팀 던컨 등 최고의 개인기량을 지닌 선수들로도 이루지 못한 이번 성과는 역시 팀 조직력이 기인한 결과물이다. 농구를 고안한 네이 스미스 박사의 ‘팀 스포츠다’라는 고언은 세월이 지나도 변치 않는 이치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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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번 대표팀 역시 선수 개개인의 기량에 의존을 탈피하지는 못했다. 팀 내 득점 1위를 차지한 드웨인 웨이드와 뒤를 이은 르브론 제임스, 코비 브라이언트는 대부분의 득점을 1대1이나 속공에서 만들었다. 그렇다면 아이솔레이션과 오픈찬스의 배경은 무엇일까?

역시 수비에서 비롯된 작품이다. 일선에서 최고의 대인방어 능력을 지닌 코비나 웨이드에 노장 제이슨 키드는 상대 백코트를 압박했고 스틸을 유도했다. 이는 대부분 어김없이 득점으로 연결됐다. 스크린이나 백도어, 커터들의 유기적인 움직임과 패턴 플레이는 이번 대표팀에서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트랜지션 게임에서는 찰떡궁합을 선보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전개되는 런 앤 건에서 미국은 전열을 정비할 필요가 없었다. 

가장 확실하고 효율적인 공격을 펼친 미국이지만 문제점도 노출됐다. 3점 슛은 37.7%로 대회 6위에 랭크됐고 자유투는 68%로 간신히 꼴찌를 면했다. 수년간 지적받아온 퓨어가드의 부재문제는 여전히 남겨놓은 것이다. 슈팅 전문 마이클 레드를 카드로 내놓았지만 이번 대회에서 총 18개의 3점 슛을 시도 13개를 허공에 날렸다. 오히려 NBA에서 3점 슛이 약하다 평가받은 제임스나 웨이드는 5할에 가까운 고감도 성공률로 깜짝 성적을 남겼다. 비록 거리는 가까워졌지만 말이다.

돌파의 달인 웨이드는 팀 내 가장 많은 41개의 자유투를 얻어냈지만 63%의 성공률에 그쳐 아쉬움을 샀고 드와이트 하워드 역시 5할에도 못 미치는 ‘샤킬 오닐 급‘ 성공률로 일관해 개선의 여지가 보이지 않았다. 대회 내내 폭발적인 인기로 화제가 된 코비 역시 손가락 부상의 여파로 정확한 슈팅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클러치 상황에서만큼은 해결사를 자처하며 림을 가르는 킬러본능을 드러냈다.

페인트 존으로 편중된 득점이 외각으로 고루 분산될 경우 당분간 세계무대에서 미국을 꺾을 팀은 나오지 않을 전망이다.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찰스 바클리칼 말론의 골밑 득점 외에도 크리스 멀린과 래리 버드의 지원포가 완성도를 더 했다. 애틀랜타 올림픽은 호화 센터 라인업에 레지 밀러와 미치 리치몬드라는 엘리트 저격수가 언제든 채비를 할 만큼 내외각이 안정돼 있었다.
 
몇 가지 문제를 드러낸 미국이지만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신-구조화가 잘 어우러진 이번 대표팀은 대체적으로 20대 선수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어 성장 가능성과 발전의 여지는 충분하다. 제이슨 키드는 대회 마지막 날 “내가 가장 나이가 많은 만큼 쉬는 시간도 많았다”며 대표팀 은퇴를 시사했다. 코비 역시 다음 올림픽에서는 34살이 되어 출전을 장담키 어려운 만큼 런던 원정대는 새얼굴이 가세할 공산이 크다. 

4년 뒤 2012 런던 올림픽에서는 새로운 별들이 노출된 문제들을 보완하여 ‘무결점 드림팀’으로 거듭나길 기대해본다.


이번은 리딤팀, 차기 드림팀은 런던에서

이번 대표팀의 이름은 ‘되찾는다’라는 의미에서 리딤팀이라 명명했다. 따라서 역대 드림팀과의 비교는 다른 시각으로 볼 때 불공평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표면적인 전력 면에서 과거에 비해 떨어질지 모르겠지만 나름의 내실 있는 준비와 성과를 냈다.

중요한 것은 과거 산전수전을 모두 겪은 베테랑 중심의 팀이 아닌 전성기에 막 접어든 젊은 팀이라는 것이다. 대부분이 5년차를 전후로 아직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선수들이다. NBA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앞으로의 국제무대도 기대가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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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딤팀’이라 불리며 중국열도를 달구고 있는 미국대표팀이 16일(이하 한국시간) 무적함대 스페인과 격돌한다. 스페인은 양질의 NBA 스타들이 다수 포진해있고 우승을 거머쥐었던 지난 2006년 세계농구선수권 대회의 전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평이다. 14일 벌어진 조별예선에서 중국에 진땀 승을 거두었지만 스페인은 미국을 견제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나라임에 틀림없다.

LA 레이커스의 파우 가솔과 토론토 랩터스의 호세 칼데론을 중심으로 하여 자국 리그인 ACB를 주름잡는 신예들의 가세로 스페인의 사기는 그 어느 때보다 높다. 특히 파우 가솔의 친동생인 마크 가솔과 유럽 최고의 백코트 콤비로 찬사를 받고 있는 DKV 유벤투트의 루디 페르난데즈와 리키 루비오의 존재는 든든 하기만하다. 특히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있는 루비오에 대한 관심이 집중 되고 있는 가운데 전문가들은 NBA 드래프트 1순위 감으로 꼽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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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유럽에서는 그를 우상으로 삼는 청소년 팬들이 급증하고 있으며 농구 각 계층에서 루비오에 대한 칭찬에 침이 마를 지경이다. 혹자는 그를 전 NBA 선수인 古 피트 마라비치와 비교하곤 한다. 유년시절부터  왜소한 체격의 결함을 피가 나는 노력으로 만회한 마라비치는 묘기 농구의 고전으로 통하며 그만의 하이라이트 필름을 남기는 등 작지 않은 족적을 남겼다. 루비오의 환상적인 패스와 저돌적인 드라이브, 전광석화와 같은 스틸은 마라비치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루비오에 대한 존재는 이미 유럽을 떠나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고 있다. 세계 최대 UCC 사이트인 유투브에서는 루비오의 경기 영상과 하이라이트 게시물이 폭발적인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을 정도다. 그만큼 인터넷은 루비오를 범세계적인 스타덤에 올리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베일에 가려있던 루비오의 성장과정이나 비하인드 스토리 등 그를 어필할 수 있는 모든 정보가 전달 된 것이다.

수려한 외모와 화려한 플레이로 알려진 루비오지만 농구실력 또한 인기를 뒷받침한다. 청소년 유로피언 챔피언십 대회에서 매년 발군의 기량으로 동년배 선수들을 제압한 루비오의 가치는 하루가 멀다 하고 치솟기 시작했다. 결국 2005년에는 만 14세의 나이로 스페인 리그 역사상 최연소 빅 리그 데뷔기록을 갈아치웠다. 이듬해에 열린 16세 이하 유럽 챔피언십 대회에서는 러시아전에서 무려 51점 24리바운드 12어시스트 7스틸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남기며 농구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비록 성인무대에서 확실한 검증을 거치지 않았지만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2006-07 유로리그에서는 결코 녹녹치 않은 유럽의 명문 팀들 사이에서 19분의 출장시간에 무려 3.2개의 스틸로 이 부문 1위에 올랐다. 어시스트 기록에 대한 기준이 NBA보다 엄격한 유로리그에서 2.8개를 기록 포인트가드로서의 볼 배급도 인정받은 루비오다. ACB리그에서의 활약도 우선은 합격점이다. 루비오는 지난 시즌 DKV 유벤투트에서 23분의 출장시간 동안 경기당 10.5점으로 팀에 공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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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표팀의 구성위원장인 제리 콜란젤로는 “그는 유럽선수들과 다른 종류의 재능을 지녔다”며 루비오의 가능성을 높이 샀다. 익명의 NBA 단장은 인터뷰에서 “만약 루비오가 드래프트 2순위 안에 뽑히지 못한다면 놀랄 것이다. 점퍼만 갖춘다면 티켓 매진과 팀 리더는 장담하건데 그의 몫이다. 루비오는 NBA의 모든 단장들이 탐내는 인재 중에 인재”라며 스페인의 천재소년을 치켜세웠다.

하지만 정작 루비오 본인은 NBA 진출이나 자국리그에 대해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보인다. 당장 눈앞에 금메달을 두고 치러야할 올림픽 경기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3경기를 소화한 루비오는 짧은 출장시간으로 뚜렷한 활약을 보여주진 못했지만 코트위에 서있는 시간만큼은 스페인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치열했던 중국전에서는 스틸을 5개나 성공시키며 타고난 수비감각을 과시하기도 했다.

오늘밤 미국과의 결전은 그의 농구인생에 있어 잊을 수 없는 하루가 될 전망이다. “오늘 경기는 나에게 좋은 시험무대가 될 것이다. 미국 선수들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선수들이다. 이번 올림픽은 나에게 중요한 해”라며 출사표를 던지는 루비오의 인터뷰는 여느 프로선수 못지않은 성숙함이 묻어난다.

약관의 나이도 채 되지 않은 신동 루비오가 베이징 올림픽에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더욱더 성장하여 완숙한 기량을 NBA에서 펼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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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부에서 장기집권 하던 미국의 독주가 끝나며 세계 농구판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금메달이 미국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인식이 전파되며 희망과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생긴 것이다. 한편 농구의 올림픽 등장과 더불어 끊임없는 시도와 변화를 모색해온 FIBA는 여성 농구 종목을 채택함에 따라 진정한 스포츠 정신을 아우를 수 있는 전기를 마련했다.

이번 2부에서는 최초 금메달의 탈환을 위한 미국의 새 출발과 찬란했던 드림팀의 업적, 우여곡절 끝에 리딤팀으로 명명된 2008 베이징 올림픽 사단의 탄생배경 전까지를 짚어봤다.


여성 농구 신기원 이룩한 1976 몬트리올 올림픽

뮌헨 올림픽에서 최대 이변을 일으키며 세간의 관심을 모은 미국-소련전의 리매치는 끝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전통의 강호 소련이 유럽의 신흥강호로 비상하던 유고슬라비아에 발목을 잡혔기 때문이었다. 한편 미국은 금메달을 되찾겠다는 일념 하에 비장한 각오로 떠오르는 신예감독 노스캐롤리아나의 딘 스미스를 지휘관에 앉힘으로서 초석을 다졌다.

미국 농구협회는 스미스에게 전반적인 팀 운영권을 맡기며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고 스미스 감독은 이에 보답하듯(?) NBA 신인왕 출신인 월터 데이비스를 포함하여 노스캐롤라이나 선수만 4명을 선발하는 등 끈끈한 사제관계를 과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의 금메달 탈환을 이끈 이는 다름 아닌 노틀담대의 득점기계인 에이드리언 댄틀리였다. 미국은 댄틀리의 활약 속에 다시 한 번 성조기를 경기장에 드높이며 명예회복을 할 수 있었다. 한편 마퀫 대학의 부치 리는 조국 푸에르토 리코 소속으로 미국전에서 35득점으로 맹활약하며 95-94의 짜릿한 승부를 연출했다. 라이벌 소련의 예기치 못한 탈락으로 결정적 동기가 사라진 미국에게 좋은 자극제가 된 셈이다.

올림픽 사상 첫 걸음마를 내딛은 여자 농구 종목에서는 남자 농구와 상반된 판도를 보였다. 미국의 독주와 소련의 2강 구도로 대변됐던 남자부와는 달리 여자부는 소련의 강세가 두드려졌기 때문이다. 소련은 미국을 112-77로 대파하는 등 압도적인 전력을 과시했다. 당시 라트비아 공화국 출신으로 소련의 간판센터였던 우자나 세조노바는 협회 측의 출전시간 제한에도 불구하고 경기당 19점과 12리바운드를 보태며 여성 올림픽 최초의 금메달을 소련 품에 안겼다. 


정치적 대립으로 반쪽 된 1984 LA 올림픽   

서방국가와 동유럽 국가 간의 정치적 대립은 1980 모스크바 올림픽 대규모 보이콧이라는 역사상 최악의 사태로 몰아넣었다. 결국 LA 올림픽은 4년 전의 불상사를 그대로 재현함으로서 세계인의 축재라는 올림픽 슬로건을 무색하게 하였다. 동유럽권 국가들이 보복성 보이콧으로 대거 이탈하며 응수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여전히 강력한 전력을 보유했던 미국은 한결 쉽게 남-여부 금메달이라는 쾌거를 달성하며 안방잔치의 흥을 돋우었다.

84 LA 올림픽은 한국 여자 농구사와 나아가 대한민국 농구사에 있어 큰 획을 그은 해로 기억된다. 농구의 변방으로 치부됐던 대한민국이 사상 최초로 메달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대한의 여전사들은 미국에게 30점차로 대패했지만 은메달을 목에 걸며 가능성을 전 세계에 알렸다.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전설적인 스타 레지 밀러의 누나로도 잘 알려져있는 셰릴 밀러는 WNBA의 마이클 조던이라 불리는 리사 레슬리 이전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여제로서 올림픽 우승의 히로인이 됐다. 당시 밀러의 수비를 전담하던 대한민국의 성정아 선수는 밀러를 16점으로 묶으며 블락까지 성공시키는 등 인상적인 호수비로 분전했다. 

남성부에서는 NCAA의 명장 바비 나이트가 지휘봉을 잡으며 일찌감치 지휘체계를 굳건히 했고 ‘농구 황제’ 조던과 조지타운의 패트릭 유잉, ’제 2의 래리 버드‘로 떠올랐던 크리스 멀린이 출전하며 일약 글로벌 스타도 거듭나는 계기를 마련했다.

거친 언행과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로 명성이 자자했던 나이트 감독은 당시 어번대의 슈퍼스타 찰스 바클리의 반항적인 태도를 지적하며 최종 엔트리에서 제외시키는 결단력을 보였다. 조던은 인터뷰에서 “정말로 훌륭한 감독이지만 제발 욕만 안했으면 좋겠다”며 기자회견장을 폭소로 빠트린 일화는 나이트 감독의 이중성을 뒷받침 해주는 좋은 사례다. 나이트 감독은 인터뷰 직후 제자의 애교 섞인(?) 불만에 미소만 머금었다는 후문이다.

불같은 성격과 온갖 구설수에 오르며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인물이었지만 빛나는 금메달은 명장의 반열에 좋은 가산점이 되기에 충분했다. 나이트 감독은 스페인과의 결승전을 승리로 이끈 후 인터뷰에서 “2년이나 소련을 지켜봐왔다. 헌데 소련은 이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며 운을 뗀 뒤 “그들은 토너먼트에서 시종일관 무기력했고 수비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우리와 붙길 원한다면 어느 장소에서든 박살을 내줄 것”이라며 오랜 라이벌을 자극 시켰다. 4년 뒤에 찾아올 재앙도 모른 채 말이다.


뮌헨 악몽의 재림 1988 서울 올림픽 

미국 농구역사에서 지우고 싶은 추억을 꼽으라면 지난 1972년 뮌헨 올림픽과 함께 1988 서울 올림픽이 자웅을 겨루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서울에는 심판의 편파 판정도 시원찮은 전자 스코어보드도 없었다. 미국과 유럽의 좁아진 전력 차만이 확인됐을 뿐이었다. 이는 우월주의에 젖은 미국에 경각심을 울리는 한편 프로선수 참여와 함께 미국 원조 드림팀을 발족시킨 계기가 되었다. 

철천지원수인 대 소련전의 패배라는 사실과 편파 판정 없이 공정한 여건 속에 치러진 경기였기에 미국의 통산 첫 동메달이 주는 충격은 더욱 컸다. 당시 미국은 해군사관학교에 다니던 데이비드 로빈슨을 위시하여 미치 리치몬드, 대니 매닝, 댄 멀리, 허시 호킨스 등 미래의 NBA 올스타들로 가득한 팀이었다. 패를 기록하지 않고 준결승에 안착할 때까지 만해도 미국의 금메달을 의심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국민영웅 아비다스 사보니스와 소련은 미국의 장밋빛 꿈을 산산조각 내며 은메달조차 허락지 않았다. 유고슬라비아는 NBA 유로피언 전성시대를 열은 주역들이 대거 출연하며 돌풍을 일으켰다. 이 후 드라젠 페트로비치, 블라디 디박 등 유럽선수들은 NBA 진출의 물고를 틀며 글로벌화의 시동을 걸기도 했다.

한편 대한민국은 이충희와 김현준 신예 허재까지 당대 최고의 슛쟁이들로 이루어진 호화진용을 구축하며 12개국 중 9위를 차지하였다. 특히 허재는 외국의 장신 숲을 뚫고 시원시원한 돌파를 시도하며 내외각을 넘나드는 천부적 득점감각을 뽐냈다. 마치 인천 전자랜드의 정영삼처럼 말이다.

여자부에서는 미국이 소련을 꺾고 우승을 차지해 남자부의 저조한 성적으로 떨어진 미국농구의 위상을 살렸다. 신시아 쿠퍼와 카트리나 맥클레인이 이끈 미국 여자대표팀은 6전 전승으로 지난 84 LA 올림픽에 이어 대회 2연패를 달성했다.


위대한 탄생 ‘원조 드림팀’ 92 바르셀로나 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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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 올림픽을 앞두고 NBA의 데이빗 스턴 총재는 실추된 명예 회복의 일환으로 ‘프로선수 올림픽 참여’를 IOC 설득시키기 시작했다. 변호사 출신의 스턴 총재는 수완을 발휘하여 결국 안건을 통과시켰고 미국 농구는 사상 초유의 팀을 발족시키는 신호탄을 쏘아 올릴 수 있었다. ‘꿈의 팀‘이라 명명된 드림팀은 그렇게 탄생했다.

당시 미국은 80년대 NBA를 주도했던 매직 존슨-래리 버드의 베테랑 라인을 시작으로 마이클 조던까지 각 포지션 마다 최고의 선수들로 배치가 됐다. 크리스 멀린을 제외한 10명의 선수들은 모두 ‘위대한 50명의 NBA 선수’에 뽑혔고 명예의 전당 출신이나 가까운 시일내에 입성을 기다리는 선수들이다. NBA에서는 쓸쓸한 말년을 보냈지만 대학최고의 선수였던 듀크의 크리스찬 레이트너도 신-구 조화의 마지막 퍼즐로 최고의 선택이라는 평이었다.

일부 포지션의 선발에서 잡음이 들렸지만 NBA선수들이라면 하나같이 경험해보고 싶은 무대가 올림픽일 정도로 열기는 뜨거웠다. 프로선수 참가를 불허했던 종전의 룰은 실력뿐 아니라 ‘운’까지 따라야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과거에는 4년을 주기로 하는 올림픽 특성상 대학무대와 프로데뷔 사이의 시간을 비켜 가면 평생 올림픽 출전은 불가능 한 것이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개인과 조국의 명예라면 여름방학도 고사하는 것이 당시 NBA의 분위기였고 이러한 정신적 동기가 최근 대표팀에 요구되는 점이기도 하다.

시카고 불스의 간판스타 마이클 조던은 사실 처음부터 대표팀 참여에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조던은 각종 언론매체에서 “내 관심사는 언제나 말했지만 오프시즌에는 충분한 휴식을 가지는 것”이라며 출전을 고사하였다. 매직 존슨과 버드의 설득으로 결국 출전을 받아들인 조던은 스페인의 휴양도시 몬테카를로에서 P.J. 칼리시모와 로드 쏜 등 코칭스태프와 함께 골프를 즐기며 회포를 풀었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최고의 프로답게 연습만큼은 실전을 방불케 하며 공과 사를 구분하였다. 팀 전원이 마찬가지였다.   

철통 호위 속에 락 밴드 급 인기를 구가하며 대회기간 내내 화제가 된 드림팀은 남자농구 팀 기록을 연일 갈아치우며 승리보다 ’몇 점차로 이기나‘에 중점을 둘 정도로 압도적인 실력을 과시했다. 아프리카의 강호 앙골라전을 앞두고 가진 기자회견장에서 찰스 바클리는 “앙골라가 무슨 나라인지는 모르겠으니 시끄러운 곳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며 충만한 자신감과 입담을 세계에 알리기도 했다.

한편 1991년 구소련의 해체와 유고슬라비아의 내전은 남자농구 판도에 급진적 변화를 주었다. 유고슬라비아 소속의 선수들은 독립 선언을 외친 크로아티아 대표팀으로 출전했으며 구소련의 영웅 아비다스 사보니스는 리투아니아에 새 뿌리를 뻗었다. 하지만 꿈의 팀 미국과의 전력 차도 문제였지만 정치적인 문제로 국가가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 것이 유럽 팀들에게 큰 짐이 되었다.

여자부에서는 미국 여자농구 역사상 최대 이변으로 기억되는 불상사가 연출 되 희비가 엇갈렸다. 예선 개막과 함께 첫 3경기에서 평균 45.7점차의 대승을 이어갔던 미국대표팀이 준결승전에서 불의의 일격을 당한 것. 상대는 소련 주변 연합국가 팀이었다. CIS(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라고 불리던 연합팀은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연방, 리투아니아로 이루어졌는데 소련의 해체 직후 바로 금메달을 따는 쾌거를 일궈냈다.      


그 명성 그대로 1996 애틀랜타 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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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팀’이라 명명된 미국 남자 농구대표팀은 애틀랜타 올림픽을 앞두고 다시 한 번 NBA의 별들을 끌어 모았다. 역대 최고의 센터 진을 구성하며 코트 제일의 격전지인 로포스트를 강화하여 유럽 장신숲에 대항하겠다는 계산이었다. 미국은 90년대 NBA를 주름잡았던 ‘4대 센터’중 하킴 올라주원, 데이비드 로빈슨 그리고 샤킬 오닐을 끌어들임으로서 호화골밑을 구축할 수 있었다. 한편 코트에서 돌아온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은 미치 리치몬드에게 자리를 양보하며 대표팀의 세대교체를 예고했다. 

이번 드림팀은 트랜지션 게임을 중심으로 속공을 지향했던 원조 드림팀과는 달리 하프코트 오펜스도 활용하는 전략을 펼쳤고 무게감 있는 로포스트 옵션이 이를 가능케 했다. 내전의 여파가 가시며 재정비한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은 결승전까지 7연승을 달리며 부활을 알렸지만 처음이자 마지막 패를 기록하며 아쉽게 은메달에 만족했다. 미국대표팀은 통산 11번째 금메달을 목에 걸음으로서 명실상부 농구강국의 입지를 다시 한 번 세계에 확인시킴과 동시에 ‘드림팀’이라는 제2의 이름에 걸 맞는 위용을 과시할 수 있었다. 한편 서울 올림픽 이후 8년 만에 출전한 대한민국 남자대표팀은 숙소이탈과 음주사건으로 지울 수 없는 얼룩을 남겼다. 국내 농구인기가 정점에 달하며 KBL 프로리그의 출범을 앞둔 시기였기에 협회와 팬들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미국은 여자부에서도 전승 금메달을 달성하며 겹경사를 맞이했다. KBL과 마찬가지로 WNBA 프로리그 출범을 앞둔 미국 여자농구에게 있어 애틀랜타 올림픽은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악몽과 함께 고됐던 지난 1년의 여정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순간이었다. 충격적인 지난대회를 타산지석으로 삼은 여자대표팀은 소집기간을 1년 앞당겨 담금질에 들어갔다. 자존심을 모두 버리고 초심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지였다. 창단 이후 9개월 동안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 이 기간 동안 치룬 평가전만 해도 52경기. 16만Km에 해당하는 대장정이었다. 리사 레슬리는 팀 득점을 주도하며 최종 결승전에서 29점을 기록 히로인이 되었다.


존경심과 공포는 옛말 2000 시드니 올림픽
 
지난 바르셀로나의 아련한 추억은 사그라지고 말았다. 경외의 대상이자 꿈이라 불렸던 남자 미국대표팀은 망국의 전조를 암시했다. 미국은 표면적으로 8전 전승으로 금메달을 차지했지만 그들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높아진 유럽농구의 수준이 미국의 진땀 승을 만들어 낸 것이다. 사인과 사진촬영을 요구하는 외국선수는 온대간데 없고 오로지 승리하겠다는 살기어린 눈빛만 보였다.

‘드림팀4‘로 불려진 이번 대표팀의 명단은 훌륭한 선수로 가득했지만 로포스트의 열세가 두드러진 점이 아쉬웠다. 전성기에 접어든 LA 레이커스의 샤킬 오닐은 필 잭슨 감독의 입김과 이미 두 차례 대표팀 경험을 맞본 본인에게도 동기를 주지 못해 긴 여름을 집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는 데이비드 로빈슨도 마찬가지였다. 하킴 올라주원이나 패트릭 유잉은 뚜렷한 노쇠기미가 발목을 잡으며 NBA에서 조차 예전의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7풋 센터와 정통센터의 기근현상으로 협회 측은 나름의 심사숙고로 가용선수를 선발 했지만 높이의 한계는 여실했다. 

토너먼트에서는 경기부저가 울리기 전까지 승리를 장담하지 못하는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펼치며 고전을 면치 못하며 절반의 성공이라는 평가를 받은 대표팀은 그렇게 대회를 마쳤다. 프랑스와의 결승전에서는 85-75로 승리를 거두었지만 미국 남자대표팀 결승전 역사상 최저 점수 차의 기록을 남기는 등 ‘드림팀 최저’기록을 갈아치우기에 바쁜 한해였다. 빈스 카터의 경이로운 덩크슛은 시드니 올림픽의 하이라이트로 남았지만 경기 중 상대선수와 언쟁을 벌이며 테크니컬 파울을 받는 등 비난의 한 축도 담당하여 아쉬움을 사기도 했다.

한편 여자부에서는 미국이 WNBA의 원년을 주도한 리사 레슬리를 앞세워 가볍게 대회 2연패를 달성했다. 대한의 여전사들은 ‘미녀가드‘ 전주원과 정은순-정선민의 트윈타워 등 한국 여자농구의 대들보가 총 출격 종합 4위의 성적을 남겼다. 특히 전주원은 올림픽 역사상 최초로 트리플더블을 작성하는 등 1984 LA 올림픽 이래 가장 만족스러운 성적표를 남겼다.    
   

드림팀을 위한 나라는 없다 2004 아테네 올림픽
      
미국 남자농구 역사상 금메달에 실패한 대회는 한손으로 꼽는다. 하지만 아테네 올림픽의 실패는 전 세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미국 농구의 패배’이전에 ‘NBA 농구의 패배’였기 때문이다. 언론은 패배가 익숙해진 드림팀을 빚 대어 ‘드럼팀’이라 비꼬았고 안이한 정신 상태와 단조로운 전술패턴과 국제농구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미국대표팀에 뭇매를 가했다.

선수단 소집단계에서 불균형한 로스터로 우려를 샀던 대표팀은 예고됐던 불안요소들이 올림픽을 맞이하며 수면위로 떠올랐다. 유럽과 남미의 견고한 지역방어로 돌파는 꿈도 못 꾸었고 전문 슈팅가드의 부재는 미국의 문제를 더욱 심화시키는 꼴이 돼버렸다. 결국 예선에서 리투아니아와 푸에르토 리코에게 덜미를 잡힌 미국은 비극의 서곡을 울리며 조4위로 간신히 토너먼트에 합류하였다. 8강에서 파우 가솔이 이끄는 무적함대 스페인을 102-94로 따돌린 미국은 4강전에서 마누 지노빌리를 앞세운 아르헨티나에 일격을 당하고 만다. 4강전 탈락은 지난 서울올림픽 이후로 16년만이었다. 리투아니아전에 승리하며 동메달로 체면치례를 했다지만 시상대 구석에 오른 미국의 굴욕은 절대 잊지 못할 추억이었을 것이다.

결국 리그 최고의 선수들이 대표팀에 가치를 느끼지 못함에 따라 최고전력을 구축할 수 없게 된 점과 단기간에 이루어지는 수박 겉햝기 식의 훈련체제는 드림팀을  NBA의 부속팀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여자부는 리사 레슬리, 셰릴 스웁스 등 WNBA 스타들이 여전한 기량을 과시하며 3연속 금메달을 목에 걸어 고개 숙인 남자부 대표팀과 상반된 모습을 보였다. 대한민국 여자대표팀은 지난 아테네 올림픽의 선전을 이어가는데 실패하며 5전 전패로 세계의 벽을 실감해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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