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베이징 올림픽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한국대표팀이 아쉽게 탈락했지만 한편으로는 NBA 농구팬에게 있어 지루한 오프시즌을 달래줄 또 하나의 이벤트라는 점에서 기다려지는 행사다.

농구와 지구인의 최대 축제인 올림픽과의 연결고리를 바탕으로 세계 최고의 프로리그 NBA선수들의 참가배경을 비롯 치열했던 미국-소련의 라이벌 구도를 보다 이해하기 쉽도록 올림픽 농구의 역사를 되짚어봤다. 이번 1부에서는 시범종목으로 채택됐던 세인트루이스 올림픽부터 뮌헨 올림픽까지를 다루었다.
 

위대한 시작 1904 세인트루이스 올림픽

제임스 네이스미스 박사가 농구를 고안하며 13년 뒤 올림픽에 농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국의 YMCA에 농구가 전파된 해이기도하다. 만국 박람회의 부속 행사로 전락했던 올림픽이었지만 시범종목으로 농구를 전 세계에 알리는 성과를 이루어냈기에 농구인 들에게는 뜻 깊은 해였다고 볼 수 있다.

현대와 같은 신식 체육관은 꿈도 못 꿀 시기였고 세인트루이스의 야구장에서 3개의 베이스위에 코트를 얹혀 경기를 진행하였다. ‘올림픽 세계 농구 챔피언십’이라 불렸던 토너먼트는 5개의 미국 아마추어 클럽 팀만이 참가하며 올림픽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반영됐다. 우승은 버팔로 YMCA 클럽이 차지했으며 2위에 랭크된 시카고 YMCA는 2번의 부전승으로 행운을 챙겼다. 당시 부전승의 스코어는 ‘2-0‘으로 처리됐다.


정식종목 채택된 1936 베를린 올림픽    

베를린 올림픽은 손기정 선수의 금메달 쾌거와 함께 농구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기념비적인 해다. 또한 일제텃세를 이겨내며 장이진, 이성구, 염은현 선수가 일본 대표 팀에 선발되는 쾌거를 이룩한 해이기도 하다. 이는 대한민국 출신의 농구선수로서는 최초다.

21개국이 참여하며 제법 올림픽다운 규모가 갖추어졌고 흙과 모래를 단단히 다져놓은 테니스 코트를 사용하며 경기장의 질도 발전을 이루었다. 재밌는 사실은 이 경기장이 제 기능을 발휘 하려면 반드시 맑은 날씨여야 한다는 것. 조금이라도 비가 오는 날에는 코트가 진흙탕으로 돌변해 드리블을 포함한 전반적인 플레이에 애를 먹었던 것이다. 사상 첫 우승은 조 포튼베리가 이끈 미국이 캐나다를 19-8로 물리치며 네이스미스 박사의 이름을 딴 메달을 획득했다.


2차 세계대전의 끝 평화의 시작 1948 런던 올림픽

냉전으로 꺼졌던 성화가 다시금 화려한 불꽃을 일으키며 런던 올림픽의 시작을 알렸다. 대한민국은 해방이후 첫 출전에서 23개국 중 8위에 랭크되며 가능성을 전 세계에 알렸다. 종주국인 미국은 59-57로 승리했던 아르헨티나전을 제외하고 경기당 38점의 득실마진으로 손쉽게 금을 손에 쥐었다. 특히 미국은 6피트 5인치 이상의 장신선수를 5명이나 보유하며 압도적인 경기로 타 국가를 제압했다.

런던 올림픽은 갖가지 진풍경과 진기록을 남긴 대회로도 유명했다. 당시 100점 이상의 고득점이 꿈만 같던 농구계에서 이라크는 필리핀과 대한민국에 이어 중국에게 100점을 내주며 체면을 구겼다. 아일랜드는 경기당 17.5점이라는 엽기적인 팀 득점을 기록했고 영국심판이 경기 도중 충돌로 기절하는 사건도 있었다. 중국 선수가 7피트의 미국 선수인 밥 컬랜드의 다리사이로 드리블을 하는 묘기를 선보이기도 했고 브라질 선수가 팬츠를 잃어버리는 진풍경을 하며 경기 외적인 볼거리도 많았던 런던 올림픽이었다.


운명적인 만남 1952 헬싱키 올림픽

구소련은 올림픽 처녀출전에도 불구하고 미국과의 금 전쟁에서 호각세를 보이며 화려한 등장을 만천하에 알렸다. 국제 농구계 최대 라이벌이 될 양국의 만남도 여기서 시작됐다. 미국은 미네아폴리스 레이커스(現 LA 레이커스)와 보스턴 셀틱스에서 우승을 경험한바 있는 캔자스 주립대의 클라이드 러브렛을 앞세워 3연속 금 행진을 이어갔다. 구소련은 무한한 잠재력을 선보이며 신흥강호로 급부상했다.  

구소련은 본선예선에서 멕시코와 불가리아 개최국 핀란드를 차례로 꺾으며 파죽지세를 이어갔지만 미국의 벽을 넘는데 실패하며 은메달로 만족했다. 당시 구소련은 강력한 조직력을 앞세워 전반전 17-15로 대등한 경기를 펼쳤다. 하지만 다운템포로 흐름을 되찾은 미국에 리드를 내주며 36-25로 석패하였다. 경기 후 구소련 선수들은 코트에 앉아 항의를 했지만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헬싱키 올림픽에서 특이할만한 점은 농구경기가 드디어 스타디움으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협회는 예선전은 도시 중심에 위치한 테니스 코트를 사용하도록 하고 준결승전과 결승전에 한해서는 스타디움에서 치르도록 하였다.  


빌 러셀의 올림픽 데뷔 1956 맬버른 올림픽

샌프란시스코의 슈퍼스타 빌 러셀이 올림픽에 등장했다. NBA와 보스턴 셀틱스의 전설적인 인물로 기억되는 러셀은 동문후배이자 훗날 보스턴의 동료가 될 K.C. 존스와 함께 미국의 4연패에 공헌하였다. 미국대표팀은 러셀을 앞세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기력을 펼치며 올림픽 기간 동안 승승장구했다.

강력한 라이벌로 예상됐던 구소련은 7피트 3인치에 달하는 라트비아 공화국 출신의 목수를 공수하며 미국의 높이에 대항했지만 완벽한 실패로 돌아갔다. 키는 컸지만 기술과 기동력은 0에 가까운 선수였기 때문이다. 구소련은 예선에서 30점차로 대패하며 자존심을 구겼고 결승전에서도 71-62로 분투했지만 한층 업그레이드 된 미국을 넘기엔 역부족이었다.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금메달 1960 로마 올림픽      

사상최초로 위성 중계된 로마 올림픽에서 미국이 다시 한 번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미국대표팀에 소집된 명단을 보면 혀를 내두를만한 호화진용으로 감히 ‘고전 드림팀‘이라 부를만하다.

시즌 평균 트리플더블에 빛나는 오스카 로벗슨과 NBA 로고의 주인공이자 클러치 슈터의 원조 제리 웨스트를 시작으로 올해의 신인왕에 오른 월트 벨라미와 제리 루카스까지 일찌감치 명예의 전당자리를 예약한 불세출의 스타들이었다. 경기당 102점의 화력을 뽐낸 미국은 결승전에서 81-57로 구소련을 대파하며 라이벌을 좌절시켰다. 


멈추지 않는 골드러쉬 1964 도쿄 올림픽

도쿄 올림픽은 미국과 유럽이 양분했던 올림픽 개최를 아시아가 가져갔다는 의미에서 매우 뜻 깊은 대회라 할 수 있다. 정치적인 전략으로 대규모 선수단을 파견시킨 대한민국은 실로 오랜만에 농구대표팀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7전 전패로 세계의 벽을 실감해야 했고 미국과 유럽의 메달잔치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특히 12년 동안 3번 연속 금메달을 내준 구소련의 각오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구소련의 감독인 알렉산더는 대회전 인터뷰에서 “미국의 선수들은 모두가 놀라운 실력을 지녔다. 하지만 우리는 전력증강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며 출사표를 던졌다. 실제 구소련은 전 대회에 비하면 네임밸류가 다소 떨어지는 미국대표팀을 거칠게 몰아붙이며 한풀이에 성공하는 듯했다. 하지만 미국의 뒷심은 예상외로 거셌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빌 브래들리와 루크 잭슨을 필두로 래리 브라운(現 샬럿 밥캐츠 감독)을 앞세운 미국은 18-4로 경기막판 스퍼트를 내며 최종 스코어 73-59로 다시 한 번 구소련의 4연속 은메달을 도왔다.

브라운은 당시 메달 수여식 인터뷰에서 “이 메달이 12달러에 불과하지만 당신이 100만 달러를 준다 해도 사지 못할 것”이라며 소감을 밝혔다. 브라운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의 금사냥에 실패하며 선수-감독 금메달의 대기록에 실패한 바 있다.


농구변방 유고의 부상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

올림픽 개최 전인 1967년 당시 UCLA의 루 앨신더(카림 압둘자바의 개명 前 이름)는 학업을 포기하지 않겠다며 보이콧을 선언하였다. 이어서 휴스턴대의 엘빈 헤이즈는 샌디에고 로케츠(휴스턴 로케츠의 전신)와 계약을 맺은 상태였기 때문에 프로선수 참가가 허용되지 않는 올림픽 규정에 따라 소집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두 명의 대학스타를 선수명단에 포함시키지 못한 미국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조조 화이트와 스펜서 헤이우드라는 걸출한 스타플레이어로도 금 사냥은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 남자농구대표팀 역사상 최연소 출전 기록(19세)을 보유하고 있는 헤이우드는 보스턴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거듭나게 될 화이트와 함께 5번째 금메달을 조국에 안기는데 공헌하였다.  


구소련의 복수심이 낳은 1972 뮌헨 올림픽 비극사

팔레스타인 게릴라 단체의 테러로 얼룩졌던 뮌헨 올림픽은 지금도 회자될 정도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남자 농구부 결승전에서 노골적인 편파판정을 등에 업은 구소련이 20년 만에 염원하던 금메달을 손에 쥐었기 때문이다. 올림픽에 이래 멈출 줄을 몰랐던 미국의 금메달 독주는 그렇게 막을 지었다.

그 유명한 ‘한번 더’의 사건은 경기종료 3초전에 시작됐다. 극적인 스틸에 이어 자유투를 얻어낸 덕 콜린스는 2점 차로 뒤진 상황에서 동점 내지는 역전으로 갈 수 있는 찬스를 손에 넣었다. 콜린스는 침착하게 모두 성공을 시켰고 구소련은 인바운드 패스를 시작으로 하프코트를 넘으려 시도했다. 그때 브라질 출신인 리나토 라이또 주심의 휘슬이 울렸다. 전광판이 가리킨 시간은 종료 1초전. 심판진은 논의 끝에 구소련이 타임아웃을 부른 것으로 판정을 지었다. 미국 측의 항의는 거셌지만 경기는 속행됐고 구소련의 장거리 3점 슛은 림을 외면했다. 모두가 코트위로 달려 나왔고 미국의 6번째 금메달은 실현된 것처럼 보였다.

당시 중계를 맡은 ABC사의 방송로고에 조차 선명하게 'FINAL'이란 문구를 내보내며 경기 종료를 알렸고 사진기자들은 미국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며 분위기는 종결된 듯 했다. 하지만 주심의 휘슬이 다시 한 번 울리며 경기는 중단됐다. 이번에는 전광판 스코어가 잘못 체크 되었다는 것 이었다. 3초가 돼 있어야할 전광판에는 50초라는 숫자가 기록돼있었고 이는 분명 재경기의 사유가 될 수 있었지만 구소련의 공격이 무위로 그칠 때마다 경기가 중단됐기에 의심이 증폭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구소련은 길게 던진 인바운드 패스를 풋백 득점으로 연결시키며 금메달의 숙원을 풀었다. 아이러니 한 것은 철두철미한 판정으로 일관했던 심판진이 구소련의 마지막 인바운드 패서의 발이 라인을 넘어선 것에 대해서는 잡아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FIBA 상소배심 투표에서는 이탈리아와 푸에르토 리코는 미국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폴란드와 헝가리, 쿠바는 구소련의 편에 섰다. 미국대표팀의 소송이 기각되자 언론의 반응은 동정론부터‘미국은 패배를 받아들여야한다‘는 자숙의 말까지 나올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26년 전 당시 그 3초는 아마 ‘지구 스포츠 역사상 가장 긴 3초’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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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틀랜타 호크스의 조쉬 칠드레스(25, 203cm)가 그리스의 명문 팀 올림피아코스와 계약을 맺었다. 이는 시사 하는 바가 크다. 유럽 리그의 명성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 NBA 출신의 젊은 유망주가 20대 중반에 건너 갈 정도의 매력이 있는가’에 대한 공통된 대답은 ‘No'였기 때문이다.

칠드레스는 지난 2004년 애틀랜타에 입단하며 약 1200만 달러의 신인 계약을 맺은 바 있다. 이번에 올림피아코스가 제시한 금액은 3년간 2천만 달러로 제법 구미가 당기는 금액이다.

제한적 FA인 칠드레스는 애틀랜타가 해당 금액을 매치 시켰다면 NBA 잔류가 가능했지만 릭 선드 단장은 인터뷰에서 “칠드레스와 절충안을 찾으려 협상을 진행 중이었다. 이는 NBA 시장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라며 불쾌함을 드러냈다. 하지만 정작 현지 언론의 입장은 냉담하기만 하다. “칠드레스의 에이전트인 론 바비는 최근 3년 동안의 미국시장에서 유럽리그가 갖고 있는 잠재력과 가능성으로 시선을 돌렸다. 러시아에서 대형 사업가들이 적극적인 투자도 리그에 개입하는 것도 그 예다. 이제 유로리그는 어떤 선수에게도 더 나은 환경을 제공 할 수 있다”며 안이한 구단대응을 꼬집었다.

칠드레스가 이룬 성과가 기대이상은 아니었지만 그동안 이루어진 NBA선수들의 유럽행의 배경을 살펴보면 이번 계약을 선뜻 이해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기량 미달로 자국 하부리그 대신 수준 높은 유럽리그를 택하며 강도 높은 실전경험을 쌓는 젊은 선수들은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었다. 또는 노쇠화와 함께 떨어지는 연봉과 벤치를 전전하는 대신 확실한 노후보장(?)을 제시하는 유럽 측의 조건을 수락하여 전성기 못지않은 대접을 받으며 케이스도 있다.

하지만 칠드레스의 경우는 로스터의 과부하로 기회를 갖지 못 했을 뿐 일반적인 유럽행의 배경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밀레니엄 시대를 맞이하여 유로피언들의 NBA 침공이 득세를 보였지만 불과 10년도 채 되기 전에 미국에서 유럽으로 노선을 변경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비단 미국선수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유럽 용변선수들도 ‘컴백 홈’을 외치며 금의환향에 앞장서고 있다. 뉴저지 네츠의 보스찬 나크바와 프리모즈 브레첵은 각각 러시아와 이탈리아 비행기에 몸을 실었으며 호르헤이 가바호사 역시 모스크바행이 유력시 되고 있다. 스페인의 영웅 후안 카를로스 나바로는 일찌감치 스페인으로 돌아간 상황.

이는 최근 환율동향과 무관하지 않다. 유가반등과 함께 고개를 들고 있는 미국 경기 침체의 우려로 달러가치의 하락이 이어지고 유로가치가 상종가를 치는 현주소를 보면 고개가 끄떡여진다. 보다 많은 잠재력과 가능성. 더 젊고 건강한 몸을 지니고 있을 때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겠다는 선수들의 인식도 한 몫 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시즌 개막과 함께 37경기나 결장한 칠드레스에게 돈에 눈이 멀었다는 비난을 내릴 수도 있겠지만 이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국 선수들이 해외로 유출되는 빌미를 제공 할 수 발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보수적인 생각일지 모르나 하나의 리그는 그 나라를 대변하는 색깔을 갖출 때 비로소 완벽한 리그로 거듭날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이는 NBA가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글로벌화와 개방을 한 이후로 확고해졌다. 물론 세계 정상급의 기량을 최고의 리그에서 보여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데이빗 스턴 총재의 전략은 여지없이 들어맞았다. 유럽의 전설 드라잔 페트로비치나 토니 쿠코치, 블라디 디박 등 불세출의 용병들은 성공적인 평가를 받으며 경력을 마쳤고 덕 노비츠키나 마누 지노빌리같은 2세대 용병들은 현 리그를 주름잡으며 명성을 떨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행태는 그러한 바람과 역행하고 있다. 마치 현대인들이 조미료로 인해 미각을 잃어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고유의 맛은 잊은 지 오래다. 무분별하고 맹목적인 유럽 용병 발굴은 정작 본토 선수들의 입지를 좁혀놨으며 MVP는 더 이상 미국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는 말이 있다. 국제무대에서도 미국은 수년간 종이호랑이에 그치며 자존심을 구긴지가 오래다.

최근 KBL은 하승진의 데뷔와 함께 용병 키 제한 해제를 발효시키는 강수를 두었다. 장신의 하승진을 견제하려는 협회 측의 의지가 반영된 것은 불을 보듯 뻔하지만 가뜩이나 좁은 토종 빅맨들의 입지를 더욱 더 좁히는 결과가 우려된다. 농구 팬들이 국내 선수들의 활약을 등에 업는 리그 분위기가 조성될 때 경기장과 TV를 찾을 것임은 자명하다. 용병 중심의 경기라는 굴레를 10년 이상 벗어나지 못하고 90년대의 농구인기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국내실정이다. 결국 자국 선수들의 힘을 실어 주여야 한다는 점은 국경을 막론하고 일맥상통한다.

그 어떤 팬들도 르브론 제임스가 전성기를 스페인에서 보내는 것을 지켜보고 싶지 않을 것이다. 유럽이나 타국 선수들의 진출을 무작정 막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리그 비중의 무게가 기울어지고 있다면 리그가 발 벗고 나서기 전에 기본적인 내 집단속이 선행돼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번 칠드레스 계약이 NBA에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비록 지금은 미국 출신의 스타플레이어들이 즐비하지만 언젠가 유럽에서 올스타 급의 NBA 선수들이 뛰는 날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NBA 중심의 글로벌 리그를 꿈꾸는 스턴 총재의 야망은 한 여름 밤의 꿈처럼 날아갈 지도 모를 일이다. 한 때 지구상의 모든 농구선수들의 꿈이자 목표였던 NBA지만 매리트가 사라진 현시점에서 오만함을 버리고 근본적인 대책마련이 시급하다. 변화는 한순간이다.

자신의 가치를 끊임없이 창출해내는 스포츠 스타들의 본능을 배금주의로 치부 할 수 없다. 어디까지나 운동선수라는 틀에서 본인의 능력은 어디서든 발휘 될 수 있고 이는 권리다. 하지만 NBA가 NBA다울 때는 미국선수들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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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A에는 다양한 기술이 존재한다. 오늘날 스타들은 코트위에서 덩크슛, 크로스 오버 드리블, 더블 클러치등 팬들을 매료시키는 스킬을 구사하며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하지만 오늘 소개할 기술을 말하자면, TV 중계에도 캣치하기 힘들며, 경기장에서도 눈을 크게 뜨고, 귀를 열어야 간신히 볼수있는 음지에 존재하는 기술이라 할수 있을것이다. 

바로 '트래쉬 토킹'이다. 트래쉬 토킹의 사전적 의미는 《미》 (스포츠에서 상대(팀)에 대한) 모욕적인 말(하기), 더러운 욕설(하기) 라고 명시돼있다. 사실 필자가 트래쉬 토킹을 처음접한것은 NBA의 존재조차 모르던 유년시절이다.

영화 'White Men Cany't Jump'에서 웨슬리 스나입스와 그의 동네 친구들이 벌이던 설전을 배꼽잡아 봤던 기억이 난다. 동네에서나 일어날법한 유치한 말장난이 NBA 코트에서 심심치않게 벌어지고있다는것은 새삼스럽지않다.

도가 지나치면 벌금이 부과되기도 하는 이 기술을 선수들이 왜 사용하는지를 알아보기에 앞서, 역대 최고의 입담꾼들을 소개해볼까한다.


게리 페이튼(마이애미 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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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쉬 토킹을 얘기할때 페이튼의 이름을 논하지 않을수 없다. 그만큼 페이튼의 입담은 전설적이다. 1996년 시카고 불스와의 챔피언 결정전에서 또 다른 베스트 트래쉬 토커 마이클 조던을 상대로 전혀 주눅들지않고, 유일하게 조던을 파이널에서 20점대로 묶는 철벽수비를 선보여 많은 호평을 받았다.

NBA에서는 트래쉬 토킹에 대해서 심판에게 500달러짜리 벌금 스티커를 뗄수있도록 하는데, 한창때는 연간 2만달라씩 벌금을 물어도 그의 혀는 멈출줄을 모른다. 지금부터 전설적인 페이튼의 어록들을 한번 살펴보자.

1995년 창단된 밴쿠버 그리즐리스의 루키 크리스 로빈슨에게 한말이다. "이봐, 애송이! 수비 좀 배우고 와야겠어. 여기는 고등학생 노는곳이 아니라고."

덴버 너겟츠 시절의 바비 잭슨은 페이튼의 쉴새없는 트래쉬 토킹에 진저리가 난 나머지, "니가 얼마나 잘하는지 한번 보자, 어디한번 마음대로 쏴보라구"라고 받아쳤다. 이에 페이튼은 보란듯이 3점슛을 성공시키며 "내가 괜히 1200만달러씩 받는줄 알어?"라고 되받아쳤다는 후문.

2004년 파이널 MVP이자 매년 All-NBA 디펜시브 팀에 단골손님으로 빠지지않는 천시 빌럽스도 보스턴 셀틱스 루키시절에 페이튼에 뒤통수를 맞은경험이있다. "어이~ 꼬맹이, 수비를 그렇게 해서돼겠나?" 현재 빅리그에서 모습을 감췄지만 빌럽스와 입단동기였던 론 머서 역시 페이튼의 독설을 피할수없었다. "이봐, 애송이! 네가 날 막는다면, 1200만달러 주는 우리 구단주가 눈물을 흘릴걸세. 그지?"

최고의 스피드를 자랑하는 앨런 아이버슨은 정말 치욕스러운, 토킹을 경험했다. "니 별명은 키스 밴혼이 어떨까? 넌 너무 느리거든." 하지만 아이버슨은 이에 굴하지않고 평소대로 플레이를 진행했고, 페이튼은 한술더떠 아이버슨을 자극했다. "앨런, 왜 사람들이 너를 'Answer'라고 부르는지 알것같에. 누가 25개의 슛을 시도해 0개 성공시킬 해답(Answer)이기 때문이지. 하하!"   

페이튼의 어록은 나열하자면, 그 어떤 백과사전도 부럽지않을 두께로 채울수있을것이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페이튼의 어록의 게스트는 존 스탁튼이다.

평소 냉정하고 웬만해서 흥분을 하지않기로 유명한 스탁튼의 이성을 흔들어놓은 페이튼은 대체 어떤 마법을 부렸을까? 소닉스와 재즈의 경기중 스탁튼은 쉴새없이 떠드는 페이튼에게 "니 입에는 모터가 달렸냐? 하루종일 떠드는데 혀가 지치지도않는가? 좀 쉬어가며 하지?"라고 일침을 놓았다. 이에 페이튼은 "존 할아버지, 내 혀의 젊음이 부러운가보군."라고 화답하며 스탁튼을 도발시켰다.

페이튼의 트래쉬 토킹에 대한 타 선수들의 입장은 각양각색이다. 앞서 언급한 마이클 조던은 "페이튼의 입에 농구공을 쳐넣고싶었다."라고 회고했고, 현재 마이애미 히트에서 한솥밥을 먹고있는 제이슨 윌리엄스는 "나는 코트 내에서 변변치 못한 실력을 뽐내는 선수 9명 보다는 말 잘하는 1명의 선수가 더 낫다고 생각한다."라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코트에서 말을 하지 않으면 농구를 하는 것 같지 않다. 나는 트레쉬 토킹을 하면서 `내가 최고다'라는 자기 최면을 건다. 트래쉬 토킹은 이기기 위한 방법이다." 페이튼의 말이다.


마이클 조던(前 시카고 불스-워싱턴 위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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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칭호를 가지고있는 그가 이런 더티한 스킬을 구사한다? 사실이다. 마이클 조던 역시 트래쉬 토킹의 대가로 알려져있다. 조던의 트래쉬 토킹은 그의 칭호답게 페이튼과 달리 품격(?)이 있었다고 한다. 덩크슛이나 드라이브인을 할때마다 어김없이 나왔던 조던의 혀가 우리들이 모르는 어딘가에 쓰였는지 알아보는것도 또다른 재미일것이다.

조던의 눈감고 자유투 슛은 필자가 처음본 조던의 '트래쉬 토킹'이었다. 사실 트래쉬 토킹 중에서는 수위가 낮다고 볼수도있고, 그 범주에서 벗어날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농구경기 도중에 동료도 아닌 다른선수와 대화를 할수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장면이기에 지금도 뇌리한구석에 선명히 자리잡고있다.

상황은 이러했다. 무톰보의 데뷔시즌이었는데(1992년) 조던의 명성을 시험해보고픈 마음에 "헤이~ 마이클, 제 아무리 당신이래도 자유투를 눈감고 넣을수는 없을꺼야" 조던은 웃으면서 기꺼이 무톰보의 도전에 응했고, 크린으로 성공한뒤 한마디 던졌다. "Welcome to the NBA."

훗날 무톰보는 이일을 두고두고 회자하면서 자식들 얼굴을 어떻게 보냐면서 걱정했다는 후문이다. 어찌보면 무톰보가 도발을 시켰지만 결국 당한것은 무톰보였기에 조던에게 저작권을 주어도 무방하지않을까? 

역시 같은해인 1992년도 파이널 1차전에서 일어난 일이다. 리그 슈팅가드의 양대산맥이라 불리던 조던과 드렉슬러의 대결로 관심을 끈 이 시리즈에서 드렉슬러는 조던의 혀에 또다른 희생양이 돼고말았다. 평소 조용하고 침착한 성격으로 알려진 드렉슬러도 격분하게 만든 조던의 토크를 들어보자.

조던의 3점슛이 연거푸 터지자 드렉슬러를 향해 조용하 입을 열었다. "오늘 내 슛이 너무 좋은 것 같에. 자네 잘못이 아니야." 드렉슬러는 슬슬 스팀이 올라오고있었다.

조금후에 클리포드 로빈슨을 앞두고, 전반전 6번째 3점슛을 성공시킨 조던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도 자네 잘못이 아니야. 냐도 놀랬거든. 이번엔 자네가 넣어보게." 전반전에만 조던에게 35점과 NBA 파이널 역사상 가장많은 3점슛(개인)을 허용한 블레이저스는 결국 1차전을 내주고말았다.

1997-98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와의 정규시즌때 일이다. 당시 올랜도에서 이적해온 브라이언 쇼는 조던의 공격을 번번히 막아내며, 자신감이 충만한나머지 조던에게 트래쉬 토킹을 건낸다. 조던은 응답했다. "이제 조용히 하는게 좋을걸?" 쇼는 조던의 충고를 무시한채 조던을 열받게하는데 열중했다.

조던은 워리어스의 감독이었던 P.J 칼리시모 감독에게 말했다. "저 친구 조용히하게 하는게 좋을걸요." 이후 조던은 12연속 득점을 몰아넣으며 워리어스는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가오는 칼리시모 감독에게 조던은 입을 열었다. "내가 조용히 시키는게 좋을거라고 했죠?"

이러한 사례들은 조던의 지인들과 리그 여러선수로부터 어렵지않게 들을수있다. 조던은 상대방이 트래쉬 토킹을 시작하면 반드시 응징을 내렸고, 눈이 마주치면 도전으로 받아드렸다고하니, 그 위용이 짐작이 되고도 남음이다.

상대 선수중에 시그네처 신발을 신고 나오는 선수가 있다면 "어이, 자네 오늘 그 신발을 꼭 신게나. 내가 너보다 10배는 잘한다는 것을 보여줄테니까." 라고 말했고, 어렵사리 골을 성공시키면 "자네 수비 매우 훌륭했어. 하마터면 내가 막힐 뻔했으니까." 라고 도발시켰다.

좀 자극적이지만 가족 이야기를 들먹거리는 예도 있다. "나 오늘 50점정도 넣을것 같은데, 자네 아들이 보고있다면 정말 미안하게됐네." 정말 굴욕적이지않을수없다.

최고의 트래쉬 토커가 누구냐는 질문에 조던에게 한표를 던진 리그 동료선수들의 이야기다.

브라이언 러셀 : "MJ다. 트래쉬 토킹은 NBA의 일부이다. 어느 팀이든 한 명은 꼭 그렇게 해줘야 하는 선수가 있어야 한다."
에디 존스 : "당연히 MJ!!!"
앤쏘니 필러 : "그는 좀 세련된 트래쉬 토크를 추구한다. 예를 들어 점프샷을 인유어 페이스로 넣고 '아깝군 거의 막을 수 있었는데'라는 식으로.."
헤이우드 워크맨 : "만약 당신이 공격형 선수가 아니라면 그는 '쏘게 해주지'라고 한 후 오픈 찬스를 내준다. 당신이 넣지 못하게 하고 공격에서 완전히 당신을 제외시킨다." 

이런 조던의 어록들은 그의 남다른 승부근성을 대변하는 선례라 할수있을것이다.


찰스 바클리(前 필라델피아 76ers-피닉스 선즈-휴스턴 로켓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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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다니는 냉장고', '리바운드하는 둥근산', '코트의 악동'. 누군지 금방 눈치챘을것이다. 때로는 재치있는 위트로, 모든 NBA 관계자를 대변하는 거침없는 독설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과 비난을 한몸에 받고있는 찰스 바클리를 일컫는 수식어들이다. 

1999-00시즌 자신의 친정팀인 필라델피아 76ers와의 정규시즌 경기도중 입은 부상으로 은퇴를 선언해야만했다. 이후 바클리는 방송계에서 장기인 입담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종횡무진 활약중이다.

휴스턴의 야오 밍이 20득점 이상하면 당나귀 엉덩이에 키스를 한다고 공약했다가 야오의 30득점으로, 스튜디오에 당나귀를 끌고와 기어이 입을 맞추는,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올초에는 케니 스미스의 도발로 라스베가스에서 열렸던 올스타전에서 딕 바베타 심판과 수어 사이드 형식의 시합을 벌이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전성기 시절 책임못질 언행으로 수많은 사건사고 사례들을 양산해낸 바클리는 해설가로 변신하긴 했지만 역시 그의 입은 은퇴하지 않았음을 과시하고 있다.

현재 ESPN에서 바클리와 함게 한솥밥을 먹고있는 레지 밀러는 “그는 선수의 기록만 들먹이는 다른 해설자들과 달리 선수들에게 비난도 서슴지 않는 독특한 입담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그의 활동을 좋아한다."라고 말하며 동료애(?)를 과시하기도 했다.

바클리는 사실 코트에서보다 경기장 밖에서의 어록들로 어필을 많이 하였다. 코트 위에서 일어난 바클리의 트래쉬 토킹을 들어보자.

평소 신앙심이 남달랐던 '코트의 철인' A.C 그린에게 바클리가 말한다. "하나님이 그렇게 위대하다면, 왜 너에게 점프슛 능력을 주지않은건가?"

코비 브라이언트가 98년 서부컨퍼런스 올스타 투표 1위를 달리고있을때 당시 로켓츠 소속이었던 바클리가 오닐에게 물었다. "코비가 누구냐?"

마지막 백인 리바운드왕이자 악명높은 배드 보이즈의 일원이었던 빌 레임비어가 은퇴하자, 바클리가 편지를 보냈는데 내용은 이러했다. '친애하는 빌에게. 엿먹어. 당신을 사랑하는 찰스가'

조던이나 페이튼이 상대방의 약점을 극대화해 이성을 흔들게하는 '마인드 컨트롤러형'이라면 바클리는 자기과시형의 토킹을 즐겨썼다. 일례로 "이봐, 난 잘생겼지. 게다가 돈도많어. 넌 나한테 모든면에서 안돼."라고 하거나 자신의 시그내쳐 슈즈를 신고있는 상대방에게 보이며, "이게 이번에 나온 내 운동화라네. 하지만 이걸 자네가 신는다고해서, 자네를 부자로 만들어주거나 리바운드를 잡게해준다는 생각은 버려. 아, 당연히 나처럼 잘생기게 해주지도 않고 말이야. 그냥 나랑 똑같은 신발을 신었다는데에 의미를 두도록 하게나."라고 하기도했다.

바클리는 코트에서 항상 무언가를 말한다. 그를 떠벌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항상 실력으로 말을 뒷받침하는 바클리다.

"나는 이렇게 될걸로 정해져 있었다고 생각한다. Philly에서의 끝은 정해져 있었다." - 선즈로 트레이드된 후 인터뷰에서

"내가 입단했으므로 우승할 수 있을 것이다. 친구 마이클과 결승전에서 만난다면 더 바랄것이 없겠다." - 선즈에 이적한 후 첫 시즌을 맞으며

"내가 그에게 엉터리 같은 판정을 하더라고 말했더니 그는 그런 말을 하면 벌금을 물리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돈으로 위협말라 돈으로는 나를 움직일수 없을 테니까라고 말했다." - 심판 판정에 항의하다 벌금을 문후

"인생에서 이렇게 좋은 날은 죽을때까지 없을 것이다. 꿈이라면 깨고 싶지 않다." - 93년 5월 MVP수상 소감중

"우리들은 지금 커다란 구멍에 빠졌다. 아리조나에는 그랜드캐년이 있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일은 태양이 뜰 것이다." - 93년 파이널 2차전 불스에 패배후

"선즈의 팬들에게 말하겠다. 케빈존슨이 없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결승에 올라왔겠는가. 그런 그에게 야유하다니 그런 사람은 경기장에 오지마라." - 93년 파이널전때 부진했던 케빈존슨을 야유하는 팬들에게

"사람들은 멋진 일년이었지 라고 하겠지만 지금 기분은 최악이다. 우승했다면 은퇴하겠지만 이래서야 어디 그만 두겠는가. 나는 준우승하러 피닉스에 온게 아니다." - 93년 파이널 패배

"나는 신이 내가 시작한 곳에서 그걸 끝내길 원한다고 생각한다. 내 맘속엔 어떤 슬픔도 없다. 모두들 내가 소년에서 어른이 되가는걸 봐 왔잖은가. 그리고 내가 시작했었던 Philly에서의 끝은 훌륭하다. 내가 명예의 전당에 갈만큼 운이 좋다면, 그건 76er로서일 것이다" - 2000년 필라델피아에서 부상후 인터뷰에서

“이대로 떠날 수 없다. 화려한 은퇴경기를 갖겠다. 단 한 경기다. 더 이상은 뛰지 않겠다. 내가 원하는 건 단지 마지막 경기서 남의 부축을 받지 않고 내 힘으로 당당하게 코트를 나서는 것이다."
 
바클리는 희망대로 시즌아웃에 버금가는 무릎부상을 눈물겨운 재활훈련으로 극복하며, 2000년 4월 19일 밴쿠버 그리즐리스와의 마지막 경기에 출장하였다. 그리고 15년동안 보여주었던 특유의 공격 리바운드에 이은 바스켓 카운트 골밑 슛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역시 바클리답지않은가?


레지 밀러(前 인디애나 페이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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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적인 3점슛터로 명성을 떨치던 레지 밀러가 트래쉬 토킹으로 세간에 알려진것은 80년대 조던과의 사건에서 비롯됐다.

밀러는 당시 2년차에 불과한 애송이였는데, 2년 연속 득점왕에, 2년연속 슬램덩크 콘테스트에서 우승한 '라이징 스타 마이클 조던'에게 도전장을 내밀었고 기어이 조던을 화나게 하며 그가 먼저 밀러에게 주먹을 날리게하는 불상사를 만들어낸다. 이 정도의 담대함이라면 그가 왜 4쿼터 승부처에 그토록 강심장일수있는지 짐작이 간다.  

밀러는 은퇴후에 바클리와 케니 스미스가 속해있는 TNT 해설위원팀에 들어가서 제2의 농구인생을 준비하였는데, 향후 해설자로서의 포부를 묻는 인터뷰에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데이빗 스턴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독설을 퍼부을수 있습니다."

레지 밀러와 트래쉬 토킹을 말하자면, 빠질수없는 사람이 한명있다. 바로 '스파이크 리' 감독이다. 레이커스에 잭 니콜슨이 있다면 닉스에는 스파이크 리가 있다고 할정도로 열렬한 닉스의 팬이었던 스파이크 리는 닉스팬들에게 원성을 살만한 일을 저지른 과거가 있다.

기자: 스파이크 리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 하십니까?
밀러: (기자에게 어깨 동무를 하며) 스파이크 뭐요?

둘의 악연은 시간을 거슬러 지금으로부터 12년전에 시작됐다.

당시 닉스는 패트릭 유잉과 올 NBA팀에 선발된 존 스탁스가 팀을 이끌고 있었고, 헤드 코치는 명장 팻 라일리 였다. 결과론적으로 닉스는 이 해에 동부 컨퍼런스 챔피온에 등극하며 로켓츠와 자웅을 겨룬게된다. 페이서스의 전력도 만만치않았지만, 5차전에서 마크 잭슨의 결장과 릭 스미치의 파울 트러블은 페이서스를 궁지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스파이크 리는 늘 그랬듯이, 적군에게는 독설을, 아군에게는 독려의 말을 아끼지않으며, 떠들기 시작했다. 5차전이 열린 홈구장 메디슨 스퀘어 가든은 경기 내내 뜨겁게 달궈졌고, 필자가 기억하는 이 당시 분위기는 파이널을 방불케 할정도로 대단했다. 팻 라일리는 숨이 막히는 수비를 주문하며 페이서스를 유린했고 우세하게 경기를 장악해나갔다. 적어도 스파이크 리의 독설이 시작됐기전까지는 말이다.

"이봐 밀러, 우리 닉스랑은 상대가 안돼. 네가 하는게 농구냐? 나도 그정도는 하겠다. 넌 3점밖에 모르잖아." 그 얘기를 들은 레지 밀러는 벤치에 들어가다가 말고 스파이크 리에게 가서 이렇게 설교를 했다. "시끄러워 땅꼬마 감독아! 난 너같은 인간이 제일 싫어. 입만 살아가지고, 나 열받게 해봤자 좋을 건 하나도 없다는 건 알아라."

"너같이 3점밖에 모르는 놈한테 몇백만 달러씩 주는 인디애나도 참 한심하다. 불쌍한 팀이야. 벤치에 앉아 있는 애들과 별반 다를게 없잖아? 넌 내 영화에 출연하면, 시간당 10달러도 안줄텐데 말이야." 순간 레지 밀러는 머리 끝까지 폭팔하고 말아서 그에게 달려가 그가 입고 있던 뉴욕 닉스 유니폼을 붙잡고 설교했다. "넌 날 열받게 했어. 열받게 하지 말랬지. 너 때문에 닉스는 죽 쑨 밥이 되고 말거야, 이제 두고 봐라."

작전타임 뒤 레지 밀러의 예고대로 게임의 양상은 바뀌기 시작했다. 밀러의 주특기인 3점슛 퍼레이드가 시작됐고, 골이 들어갈 때 마다 밀러는 스파이크 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연속 3점슛 3개 성공, 그리고 9m 3점슛. 메디슨 스퀘어는 조용해 졌고 카메라 앵글들은 밀러와 스파이크 리를 번갈아 가며 비추기 시작했다. 그 당시 밀러의 마크맨이던 최고의 수비수 존 스탁스가 그에게 말했다.

"야 너무 무섭다. 적당히 해라. 네 체면도 생각해야지."

"나보고 난 시간당 10달러 짜리라고 스파이크 리가 말하는데 넌 5달러 주기도 아깝단 소리지?" 이것이 바로 첫번째 밀러 타임이다.

이듬해인 1995년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메디슨 스퀘어가든의 악몽은 재현됐다. 경기 종료가 18초 정도 남았을 시점, 인디애나 페이서스는 6점 차로 뒤지고 있었다. 그러자 이것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밀러의 3점슛이 다시 한번 터졌다. 차이는 3점 차. 3점을 넣음과 동시에  백코트로 돌아갈려고 하던 밀러는, 그러나, 다시 방향을 바꿔 스탁스에게 오던 패스를 스틸했고, 스탁스는 넘어졌다.

그런 뒤 밀러는 3점 라인 밖에 나가자 마자 턴어라운드 3점슛을 쐈고, 손에서 떠나간 공은 그대로 림에 꽂혔다. 동점을 만든 밀러는 그 뒤 파울을 엏어 그의 주특기 중 하나인 자유투 두개를 림에 꽂음으로써 8.9초 8득점으로 닉스를 격침시켰다.

경기 종료 버저가 울렸을 때, 전광판 스코어는 107-105. 밀러는 스파이크 리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이봐, 스파이크 리 감독. 10달러짜리 선수한테 깨져버린 닉스는 시간당 1달러 주기도 아깝지 않나? 너무 고맙네, 스파이크 리. 경기장 나갈 때 목숨부지하길 바라네." 밀러의 얘기에 스파이크 리는 기가 완전히 죽어버렸고, 언론은 스파이크 리가 닉스를 죽였다는 식으로 보도를 했다.

세월이 약이랬던가. NBA 최고의 앙숙이 되버린 둘의 관계는 밀러가 은퇴할 무렵에 극적인 반전을 맞는다. 레지 밀러 최고의 Hater는 어느덧 최고의 팬이 돼있었다. 사실 필자는 레지 밀러가 코트에 남긴 트래쉬 토킹에 관한 어록을 잘 알지못한다. 앞서 얘기했던 80년대 후반 조던과의 마찰만이 유일하게 기억나고 밀러와 리그의 어떠한 선수가 입씨름을 했던 사례가 있다하여도 스파이크 리와의 전쟁보다 더 할수는 없었을것이다. 

레지 밀러를 4번째 토커로 선정한것은 사실 트래쉬 토킹보다도 그의 3점슛 때문이다. 밀러는 스파이크 리에게 약속을 하였다. 그것도 원정경기에서 그 어느 팀에게 뒤지지않을 열정적인 원정팬들 앞에서 말이다. 스파이크 리의 혀에 응수하는 밀러의 기백넘치는 처세술과 그에 걸맞는 실력을 입증하는 시나리오 자체가 레지 밀러와 인디애나 페이서스 팬, 나아가 NBA 팬들을 충분히 매료시키지않았는가.

 이번시즌 TNT에서 많은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지만 내년에는 바클리 못지않은 입담을 기대해봐도 좋을것이다.


지금까지 알아본 특정 4인이 모두 불혹을 전후하는 베테랑 혹은 은퇴선수다. 그렇다면 젊은 현역 선수중에 이들의 계보를 이을만한 입담꾼은 없는걸까? 아이버슨은 근래에 잠잠한 모습이지만 한창때는 선배들에게 거침없이 독설을 날리며 명성을 쌓아왔고, 코비 브라이언트나 케빈 가넷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최고라고 중얼거리며 자기암시를 하는등, 선배못지않은 입담을 과시하고있다.

최근 사람들 머리속에 강렬히 각인되어 회자되고있는 트래쉬 토킹은 아마 르브론 제임스가 그 주인공일것이다. 지난 2006시즌 워싱턴 위저드와의 플레이오프때 생긴 일이다. 당시 6차전이 치러지고 있었는데, 양팀다 물러설수없는 중요한 한판승부였다. 아레나스는 연장전 종료직전 승부를 결정지을수있는 자유투 2개를 얻었고, 첫번째 자유투를 실패했다.

르브론 제임스는 두번째 자유투를 준비하던 아레나스에게 다가가 말했다 "이번에 못넣으면 너흰 집에 가게될꺼야." 정말 일품이지 않은가? 아레나스는 결국 2의 자유투를 모두 놓쳤고, 데이먼 존스에게 통한의 3점슛을 허용하며 패배의 빌미를 제공했다.

선수가 아닌 관중에 의해 시작된 2005년 인디애나-디트로이트 사건은 트래쉬 토킹이 최악의 상황으로 연결될수있는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었지만, 그 이면에는 승부에 활력이 되는 긍정적인 사례를 어렵지않게 찾아볼수있다.

신인왕과 MVP, 2회 우승을 거머진 '해군 제독' 데이비드 로빈슨이 말한다. "조던, 버드, 페이튼의 트래쉬토크는 즐길만 했다. 하지만 요즘의 트래쉬 토크는 도를 넘어 지나치게 천박한 느낌이다. 그래서 내가 팀 던컨을 좋아한다. 그는 경기와 자기 플레이 이외의 것들은 절대 신경쓰지 않는다." 최근 눈살을 찌뿌리게하는 젊은 선수들의 언행이 야기시키는 일련의 문제들을 꼬집어 얘기하고있는 로빈슨이다. 이는 최근 몇년간 리그에 불어닥친 폭력사태와도 무관하지 않다.

스퍼스의 또 다른 선수인 브루스 보웬 역시 동료였던 로빈슨과 같은 생각이다. "트래쉬토크는 잡담에 불과하다. 쓸데없는 짓 말고 경기에 집중하는게 낫다."

 지금까지 트래쉬 토킹에 관해 여러가지 어록들과 인터뷰를 알아보았다. 필자는 이번 글을 쓰면서 한가지 결론에 도달할수 있었다. 트래쉬 토킹은 독이다. 하지만 훌륭한 약사는 독을 약으로 조제한다. 그렇지 못하면 약사와 환자 모두가 해를 입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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