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 & COLUMNS/HELTANT79 2009. 9. 28. 16:57

칠전팔도-클리블랜드의 FA 영입

BY 알 수 없는 사용자

클리블랜드는 오프시즌이 시작될 무렵 지니고 있던 가장 큰 트레이드 자산인 벤 월러스/사샤 파블로비치의 만기계약 카드를 샤킬 오닐 영입에 올인했고, 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권을 소위 '알박기'에 썼다. 대니 페리 단장이 일부러 말할 것도 없이 누구든지 클리블랜드가 오프시즌 FA시장에서 활발히 쇼핑에 나설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드래프트를 마감한 시점에서 클리블랜드가 FA 영입에 쓸 수 있었던 '실탄'은 다음과 같았다.

  • 미드레벨 익셉션(약 5.8백만 달러)
  • 바이애뉴얼 익셉션(약 2백만 달러)
  • 베테랑 미니멈 익셉션(최대 약 1백만 달러)

클리블랜드는 이들 카드를 이용해 장신 윙 플레이어, 득점이 가능한 파워포워드, 베테랑 가드 등을 영입하려 했다. 또한 옵트아웃을 통해 비제한 FA가 될 수 있었던 앤더슨 바레장과의 재계약도 성사시켜야 했다.

클리블랜드가 FA 시장을 노리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선수들이 소문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중 상당수는 실제로 클리블랜드와 협상을 했고, 영입 성사 직전까지 간 선수들도 있었다. 하지만 여러 대내외적인 요인 때문에 클리블랜드는 창단 이후 가장 분주한 여름을 보내야 했다. 이번 순서에서는 전력 강화를 위해 페리 단장이 FA 시장에서 겪은 일들을 살펴본다.



Mavs-Bucks


찰리 빌라누에바


인사이드의 지배자인 오닐이 클리블랜드 유니폼을 입자 가장 먼저 거론된 이름은 찰리 빌라누에바(당시 밀워키 벅스)였다. 그동안 오닐과 호흡을 맞춘 파워포워드들은 모두 중거리슛이 가능한 선수들이었다. 올랜도 시절의 호레이스 그랜트, 레이커스 시절의 그랜트와 로버트 오리, 마이애미 시절의 유도니스 하슬렘은 모두 오닐이 만들어준 미들레인지 공간을 잘 활용하며 우승을 일궈낸 '스트레치 파워포워드'였다. 클리블랜드는 주전 파워포워드 바레장의 미들슛 능력이 전무했기 때문에, 오닐 영입의 이점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스트레치 파워포워드가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211cm의 신장에 3점슛까지 가능한 빌라누에바는 이런 클리블랜드의 요구에 딱 맞는 선수였다. 특히 지난 시즌 플레이오프에서 클리블랜드를 침몰시킨 올랜도의 라샤드 루이스에게는 최적의 대항마로 보였다. 팀의 에이스 르브론 제임스와는 어린 시절부터 또래 친구였으며 모리스 윌리암스와도 밀워키 시절 절친한 사이였음이 알려지며 빌라누에바 영입 가능성은 높아져갔다. 빌라누에바 역시 오닐이 클리블랜드로 트레이드된 직후 '클리블랜드는 나같은 선수를 원한다'는 글을 트위터에 올리는 등 클리블랜드 행에 큰 관심을 보였다. 퀄리파잉 오퍼 권한을 가졌던 밀워키가 재정 압박때문에 빌라누에바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자 클리블랜드가 5.8백만 달러의 미드레벨 익셉션을 모두 써서 빌라누에바를 영입할 것이란 추측이 기정사실화되기도 했다.

하지만 클리블랜드의 빌라누에바 영입 시도는 의외의 암초를 만나 좌절됐다. 당초 빌라누에바에게 미드레벨 익셉션 금액 이상을 제시할 수 있는 팀은 네 팀이었다. 이중 파워포워드가 필요한 팀은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였지만 조 듀마스 디트로이트 단장은 유타의 올스타 파워포워드 카를로스 부저 영입에 주력하고 있었다. FA가 될 수 있는 권리를 지니고 있던 부저는 새 팀과 거액의 계약을 맺을 걸로 예상되고 있었기 때문에, 클리블랜드의 빌라누에바 영입 경쟁 팀에 애시당초 디트로이트는 포함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 FA 시장에서 원하는 만큼의 큰 계약을 이끌어낼 수 없음을 알게 된 부저가 유타 잔류를 선언하자 모든 상황이 바뀌었다. 부저 영입 실패로 돈 쓸 곳이 없어진 디트로이트가 빌라누에바에게 연평균 8백만 달러의 장기계약을 제시했고, 벌써 클리블랜드 유니폼을 입은 것처럼 말하던 빌라누에바는 망설임 없이 디트로이트를 선택했다. 아직 젊은 빌라누에바는 금전적인 이익을 포기하면서까지 우승권 팀으로 갈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FA 시장에서 처음으로 노린 빌라누에바의 영입에 실패하면서 클리블랜드의 FA영입은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Pistons vs. Cavaliers


라쉬드 월러스/안토니오 맥다이스

어제의 숙적이 오늘의 동지로? 클리블랜드의 오랜 라이벌 디트로이트의 골밑을 지난 시즌까지 책임졌던 월러스와 맥다이스도 소문의 주인공이었다. 이들은 빌라누에바와 같은 수준의 중거리슛 능력을 지닌데다가 빌라누에바에게는 기대할 수 없는 수비력까지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이가 많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어차피 오닐을 영입한 시점에서 클리블랜드의 목표는 '지금 당장 우승하기'가 되었으므로, 이들에게 2년 이상의 미드레벨 익셉션 계약을 제시해서 오닐의 파트너로 쓸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FA 시장이 시작되 전부터 클리블랜드가 월러스에게 2년 계약을 제시했다는 말이 돌기도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페리 단장은 월러스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맥다이스에게는 다소 관심이 있었으나 미드레벨 익셉션을 모두 쓸 생각은 없었다. 보스턴 셀틱스의 빅3가 닥 리버스 감독과 함께 월러스를 방문해 보스턴행을 설득하는 동안 페리 단장은 월러스에게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 라스베거스에서 다음에 언급될 론 아테스트와 트레버 아리자 스카우트에 전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맥다이스에게도 2백만 달러 가량의 바이애뉴얼 익셉션을 쓸 생각은 있었지만 미드레벨 익셉션을 쓸 생각은 없었다. 그러는 사이 월러스는 보스턴과, 맥다이스는 샌안토니오 스퍼스와 다년계약을 맺으며 리그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Pacquiao and Cotto Press Conference


론 아테스트/트레버 아리자


FA 협상기간 첫 주동안 침묵을 지키던 페리 단장은 미국 독립기념일 주말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이크 브라운 감독과 함께 라스베거스로 날아가 여러 FA를 만난 것이다. 조쉬 칠드레스, 션 매리언 등 여러 이름이 나왔지만 페리 단장이 진심으로 노린 것은 론 아테스트(당시 휴스턴 로케츠)와 트레버 아리자(당시 LA 레이커스)였다. 두 선수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원소속팀을 떠날 예정이었기 때문에 페리 단장은 둘 중 하나에게 미드레벨 익셉션 전액을 제시하면 잡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2미터대의 신장으로 강력한 수비력을 지닌 이 두 선수는 클리블랜드의 약점 중 하나인 장신 윙플레이어 부재를 말끔히 해결해줄 수 있을 걸로 생각되었다.

페리 단장은 먼저 아테스트와 접촉했다. 라스베거스에서 아테스트의 매니저와 만난 페리 단장은 미드레벨 익셉션 전액을 제시했다. 그런데 여기에 레이커스가 끼어들었다.
라마 오덤의 재계약을 앞둔 레이커스는 아리자와의 재계약을 포기하고 대신 아테스트와 접촉했다. 레이커스가 제시할 수 있는 최대 금액은 클리블랜드와 같은 미드레벨 익셉션 전액 뿐이었다. 아테스트 급의 선수를 잡기에는 다소 부족한 금액이었으나 레이커스는 계약을 제안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아테스트 본인이 진작부터 레이커스행 의사를 공공연히 밝히곤 했기 때문이다. 오덤과 죽마고우이자 래퍼이기도 한 아테스트는 오덤과 헐리우드가 있는 LA를 동경하고 있었다. 2008 파이널에서 레이커스가 패배한 직후 샤워실에 들러 코비에게 '너를 우승시켜주겠다'고 말한 후 사라진 일화도 있었다. 아테스트는 클리블랜드행도 진지하게 고려했으나 결국 레이커스행을 선택했다. 오닐의 클리블랜드 입단식이 열렸던 6월 2일의 일이었다.

이제 레이커스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아리자는 클리블랜드를 비롯한 여러 팀과 협상을 벌였다. 클리블랜드는 아테스트 때와 똑같은 미드레벨 익셉션 전액을 제시했고, 주전 스윙맨 트레이스 맥드래디의 복귀가 불투명한 휴스턴 역시 똑같은 금액을 제시했다. 야오 밍까지 부상당한 휴스턴은 우승 전력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전년도 우승팀 출신 아리자가 승리를 위해 클리블랜드를 선택할 것이란 예측이 우세했다.

하지만 클리블랜드는 이번에도 헛물을 켰다. 아리자가 휴스턴행을 선택한 것이다. 올여름 FA 시장에서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계약을 이끌어낼 수 없다고 판단한 아리자는 다음 계약을 위해 조금이라도 많은 역할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우선시했고, 주전으로 나오더라도 르브론, 모리스 윌리암스, 오닐에 이어 네 번째 옵션에 불과할 클리블랜드보다는 팀의 기둥인 야오 밍과 맥그래디의 공백으로 많은 역할을 확보할 수 있는 휴스턴 쪽이 더 매력적이었다.

금전 문제도 클리블랜드의 발목을 잡았다. 클리블랜드와 휴스턴이 제시한 계약 조건은 5년간 34백만 달러로 같았지만, 소득세율 차이때문에 실수령액에서 차이를 보인 것이다. 클리블랜드가 속한 오하이오 주는 미국에서 소득세율이 가장 높은 주 중 하나인 반면, 휴스턴이 속한 텍사스 주는 소득세율이 가장 낮은 주 중 하나였다. 이에 따라 아리자가 클리블랜드로 올 경우 2백만 달러에 가까운 금전적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아테스트와 아리자의 계약 실패는 빌라누에바나 월러스/맥다이스 영입 실패 사례와는 성질이 달랐다. 빌라누에바는 불가항력에 가까운 연봉차이가 있었고 월러스와 맥다이스는 페리 단장 본인이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아테스트와 아리자는 페리 단장이 직접 영입 작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한 것이다. 그것도 경쟁 상대와 똑같은 조건을 제시하고도 밀려났다. 협상력 부족이라는 비판을 들어도 할 말이 없었다. 클리블랜드라는 팀, 클리블랜드라는 도시가 FA에게 외면받고 있다는 비관론이 쏟아졌다. 그 와중에 클리블랜드에 와서 워크샵을 가진 첫 선수엿던 채닝 프라이는 더 많은 출장 기회를 얻기 위해 피닉스행 비행기를 탔고, 올랜도 매직이 에너지 넘치는 인사이더 브랜드 배스를 영입하는 등 경쟁팀들의 전력은 갈수록 강해져갔다.

이러다 아무도 못 건진 채 새 시즌을 맞이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던 7월 중순, 페리 단장이 그때까지 잃었던 점수를 순식간에 만회하기 시작했다.


basquetebol
basquetebol by delima[dubem] 저작자 표시비영리


바레장 재계약


이번 여름 옵트아웃 권리를 가지고 있었던 바레장이 FA를 선언하자 적잖은 클리블랜드 팬들이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바레장은 2년 전에도 재계약에 난항을 겪은 끝에 시즌이 한참 진행된 다음에야 팀에 합류했고, 이때문에 클리블랜드 인사이드진에 전체적으로 과부하가 걸린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 바레장은 준수한 벤치 플레이어 수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연봉 천만 달러를 요구하며 버텼는데, 지난 시즌 주전 파워포워드로 올라서며 생애 최고의 활약을 펼친 직후 FA를 선언한 것이다. 게다가 바레장의 에이전트는 악명 높은 댄 페건이었다. 팬들의 우려가 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페건도 이번만큼은 무턱대고 뻗댈 수 없었다. 당초 바레장과 페건이 FA를 선언하면서 기대한 연봉은 평균 천만 달러였는데, 경제 한파와 '2010 프로젝트'로 인해 올 여름 바레장에게 그런 거액을 안겨줄 팀은 없었던 것이다. 클리블랜드보다 많은 금액을 제시한 팀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바레장에게 계약을 제시한 팀이 없을 정도였다. 페건은 울며 겨자먹기로 클리블랜드로 돌아와 페리 단장과 마주앉을 수밖에 없었다.
바레장 말고도 FA 여러 명과 계약을 추진하고 있었던 페리 단장도 바레장 재계약을 질질 끌 이유가 없었다. 결국 쿨할 필요가 있었던 페리와 페건은 협상 개시 며칠 만에 바레장 재계약을 쿨하게 발표했다.

바레장의 계약 조건은 6년 계약(마지막 해는 팀 옵션)에 총액 48.3백만 달러였다. 연평균 8백만 달러가 조금 넘는 금액이다. 다른 팀과의 계약에 실패하고 막다른 곳에 몰린 선수에게 너무 후하게 쳐줬다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페리 단장은 바레장이 2010년 이후 르브론 의 동료로써 손색이 없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마지막 해 9.8백만 달러 중 약 7백만 달러는 비보장이다. 다시 말해 클리블랜드는 이제 27세가 된 바레장의 전성기 5년을 연평균 7.7백만 달러에 쓰고, 32세가 될 마지막 해에는 7백만 달러짜리 샐러리 비우기 카드로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클리블랜드로써는 결코 나쁜 조건이 아니다. 다년 계약으로 심리적 안정을 얻은 바레장도 올 여름 3년만에 처음으로 브라질 국가대표에 가세, 모든 면에서 한 단계 발전한 모습을 보이며 브라질이 세계선수권 미주지역 예선에서 우승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바레장과 재계약함으로써 파워포워드 부재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한 페리 단장은 장신 윙맨 영입에 박차를 가했다.


Anthony Parker told us in Hebrew
Anthony Parker by Nir Nussbaum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앤써니 파커/자마리오 문


페리 단장의 가장 큰 강점은 항상 '플랜 B'를 준비해놓고 있다는 점이다. 아테스트와 아리자 영입에 실패한 후에도 어김없이 플랜 B를 가동했다. 목표는 WNBA 슈퍼스타 캔디스 파커의 오빠로 유명한 앤써니 파커(당시 토론토)였다.

1975년생으로 34세을 맞은 파커는 미국보다 유럽에서 더 유명한 선수다. 필라델피아와 올랜도에서 세 시즌을 보내고 유럽리그로 향한 파커는 이스라엘의 마카비 텔아비브에서 뛰며 이스라엘 챔피언십 5회, 이스라엘컵 5회, 유로리그 3회 우승을 이끌었다. 2005년에는 유로리그 MVP를 수상하기도 했다. 페리 단장은 파커가 유럽에 있을 때부터 파커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파커가 오랜 유럽 생활을 마치고 NBA로 돌아왔을 때 적극적인 영입 노력을 펼쳤지만 파커를 데려오는 데는 실패했었다. 그로부터 3년 후 파커가 토론토와의 계약을 끝마치고 FA 가 되자 마침내 파커를 영입한 것이다. 토론토도 파커를 놓치기 아까웠지만 히도 터콜루를 영입하는 과정에서 파커의 버드 권리를 포기하는 바람에 클리블랜드에 영입 기회가 온 것이다. 계약 조건은 미드레벨 익셉션의 일부인 2년간 총액 5백만 달러였다.

198cm의 스윙맨인 파커는 준수한 운동능력과 정교한 슈팅 능력, 견고한 수비력과 리딩까지도 가능한 패싱 능력을 모두 갖춘 선수다. 주 포지션은 슈팅가드지만 필요에 따라 스몰포워드와 포인트가드도 볼 수 있는 올 어라운드 플레이어다. 랜스 블랭스 부단장은 파커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효율적인 선수'라며 '힘든 영입 경쟁을 극복하고 파커를 얻어서 기쁘다'고 말했다. 파커 역시 클리블랜드에서 뛸 수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며 팀에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파커를 영입한 지 일주일 후, 페리 단장은 마이애미의 장신 스윙맨 자마리오 문을 영입하며 윙 플레이어 보강을 마쳤다. 문은 흔히 '빈자의 트레버 아리자'로 불리는 선수다. 아리자의 몸값(이번 여름 기준)보다 훨씬 싼 가격으로 비슷한 활약을 해주기 때문이다. 지난 시즌 르브론이 쉬는 동안 상대 스윙맨을 막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던 클리블랜드는 203cm의 장신에 뛰어난 운동능력과 수비력을 갖춘 문의 가세로 커다란 구멍을 메운 셈이다. 피닉스 선즈의 포워드 맷 반즈 역시 클리블랜드 행을 희망했지만, 페리 단장의 선택은 수비력이 더 나은 문이었다.

아테스트나 아리자 한 선수에게 썼을 돈으로 파커와 문이라는 준수한 윙 플레이어 두 명을 영입한 페리 단장은 이제 파워포워드 보강으로 눈을 돌렸다.


Boston Celtics vs Denver Nuggets in Denver


리온 포우


션 메이(당시 샬럿 밥캐츠)와 하킴 워릭(당시 멤피스 그리즐리스)을 모두 지나치며 파워포워드 자원 보강에 관심이 없는 듯했던 페리단장은 누구도 예상 못한 계약을 터뜨렸다. 보스턴의 백업 인사이더 리온 포우를 미니멈 계약으로 영입한 것이다.

지난 시즌 무릎에 큰 부상을 입어 내년 2월까지 출장이 불가능한 포우는 보스턴이 자신에게 일찌감치 재계약을 제안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포우의 재기 가능성을 확신하지 못한 보스턴은 포우에게 얼마를 제시해야 할 지 몰라 주저하고 있었고, 포우는 보스턴이 자신을 대우하는 방식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이런 사정을 감지한 페리 단장은 포우에게 미니멈 계약을 제시했다. 첫 해엔 0.84백만 달러, 2년째에는 비보장으로 0.91백만 달러라는 조건이었다. 달리 갈 곳이 없었던 포우는 승락 의사를 밝혔고, 그 후 포틀랜드와 댈러스, 멤피스, 그리고 보스턴이 뒤늦게 계약 의사를 타진했으나 스스로 남아일언 중천금을 외치는 포우의 결정을 되돌리지는 못했다.

203cm의 단신 파워포워드인 포우는 리그에서 가장 터프한 선수 중 하나이다. 신장은 작은 편이지만 탄탄한 근육에서 뿜어져나오는 힘이 강하기 때문에, 일단 골밑에서 볼을 잡으면 높은 확률로 득점으로 연결시킨다. 근성이 뛰어나 리바운드에도 능하고 탄탄한 몸을 이용한 골밑 수비에도 일가견이 있다.

포우는 현재 생애 세 번째 무릎 수술을 받고 재활중이다. 빨라야 1월 말에나 복귀할 수 있고 복귀한다고 해도 과거의 움직임을 보여줄 지는 미지수다. 따라서 페리 단장의 포우 영입은 일종의 도박인 셈이다. 다만 리스크는 적고 배당은 높은 도박이다. 포우가 재기에 실패한다해도 클리블랜드가 잃는 것은 0.84백만 달러의 이번 시즌 확정 연봉 뿐이다. 하지만 재기에 성공해 2008년 파이널 2차전에서 14분 동안 21점을 올리던 모습으로 돌아온다면, 플레이오프에서 클리블랜드 골밑은 그 어느 팀보다도 강한 골밑이 될 것이다.

물론 대가는 있었다. 포우가 활약할 경우 출장시간이 줄어들 것을 염려한 베테랑 파워포워드 조 스미스가 클리블랜드와의 재계약을 거부하고 애틀랜타로 향한 것이다. 팀에서 거의 유일한 '스트레치 파워포워드'였던 스미스의 이탈은 페리 단장에게 새로운 고민거리를 안겼다.


끝나지 않은 선수 영입

페리 단장은 우여곡절 끝에 장신 윙플레이어 두 명을 확보하는 한편 FA 선언을 한 바레장을 지켜냈다. 포우를 미니멈 계약으로 영입하며 모험수를 던지기도 했다. 굵직굵직한 FA들을 자의반 타의반으로 놓치긴 했지만, 이후 영입한 멤버들도 충분히 경쟁력 있는 선수들이다.

하지만 트레이닝 캠프를 맞이하면서도 페리 단장의 행보는 멈추지 않고 있다. 바레장, 포우와 계약했지만 아직 '스트레치 4번'의 공백은 남아있으므로 지난 시즌까지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서 뛰었던 2년차 포워드 랍 커즈를 비보장 계약으로 초청했고, 대럴 잭슨 등의 비보장 카드를 이용해 베테랑 가드와 사인앤트레이드를 추진한다는 소식도 들리고 있다.

2005년 클리블랜드 단장으로 취임한 이래 페리 단장은 '트레이드는 귀신, FA영입은 등신'이라는 소리를 들어왔다. 모리스 윌리암스 트레이드나 2008년의 빅딜 등으로 트레이드 능력은 인정받았지만, 래리 휴즈, 도넬 마샬, 데이먼 존스 등 이른바 '휴즈 패키지'와 장기계약을 맺는 등 FA 시장에서는 많은 오점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런 페리 단장이 이번 여름 드디어 승부수를 던지며 그 어느 때보다도 분주한 여름을 보냈다. 시즌이 시작되면 페리 단장의 FA 영입이 이번에는 '귀신'일지 '등신'일지 모두가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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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오프시즌에는 상위권 팀들의 전력 강화가 두드러졌다. 경제 한파 및 소위 '2010 프로젝트' 올인 등으로 인해 당장 우승을 노리지 않는 팀들은 이번 여름 돈을 쓰기보다는 미래를 위해 비용을 절감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수요자가 발을 뺀 오프시즌 시장에는 유례 없는 찬바람이 불었다.
하지만 이런 환경은 지금 당장 전력을 강화해 우승하고자 하는 우승권 팀들에게는 오히려 절호의 기회였다.

샐러리 절감을 노리는 팀들에게 만기계약자를 보내고 즉시전력감을 받아오거나 수요 부족으로 몸값이 크게 떨어진 자유계약선수들을 끌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라마 오돔을 지키면서도 론 아테스트를 미드레벨 익셉션만으로 영입한 지난 시즌 우승팀 LA 레이커스나 리처드 제퍼슨, 안토니오 맥다이스를 영입해 빈틈없는 라인업을 갖춘 샌안토니오 스퍼스, 히도 터콜루를 잃었지만 빈스 카터 등을 영입해 손익계산 플러스를 기록한 올랜도 매직, 라쉬드 월러스를 영입해 골밑을 강화한 보스턴 셀틱스 등이 이런 과정을 통해 슈퍼 팀으로 올라섰다.

그 중에서도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샤킬 오닐 영입은 오프시즌 초반 최대의 이슈였다. 6월 24일(이하 미국 현지시작) 대니 페리 클리블랜드 단장은 벤 월러스와 사샤 파블로비치, 2010년 2라운드 지명권과 약간의 현금을 피닉스 선즈에 보내고 오닐을 영입하는 대형 트레이드를 발표했다. 이번 오프시즌 클리블랜드가 가지고 있던 가장 큰 자산인 월러스+파블로비치 만기계약 카드를 오닐에게 쓴 것이다. 드래프트 전날 전해진 이 뉴스는 수많은 NBA 팬들을 전율케 했다.



영입 과정

사실 오닐의 클리블랜드 행은 지난 시즌부터 꾸준히 논의되어오고 있었다. 피닉스의 플레이오프 진출이 점점 멀어지던 지난 2월, 트레이드 마감일이 다가오자 오닐의 거대 계약을 부담스러워하는 피닉스를 상대로 페리 단장이 트레이드를 시도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과거 샌안토니오에서 한솥밥을 먹은 바 있는 페리 단장과 스티브 커 피닉스 단장은 클리블랜드의 만기계약 선수들과 오닐의 트레이드를 진지하게 논의했으나, 페리 단장이 아직 계약이 1년 남아있던 월러스를 제시한 반면 커 단장은 계약 마지막 해였던 월리 저비악을 원하는 바람에 난항을 맞았다. 두 단장은 한 테이블에 앉아 제3의 팀을 끌어들여 트레이드를 성사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 했지만 결국 결렬되고 말았다.

따라서 클리블랜드가 플레이오프에서 인사이드 파워의 약세를 드러내며 올랜도에게 패하자 오닐 루머가 고개를 든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오닐을 비롯해 마커스 캠비, 타이슨 챈들러, 라쉬드 월러스, 찰리 빌라누에바, 카를로스 부저 등 리그의 유수한 빅맨들이 클리블랜드와 관련된 루머에 휩싸였다. 페리 단장은 이 모든 루머를 부정하면서도 협상 가능성 자체는 부정하지 않는 묘한 여운을 남겼다.

보름 정도가 지나자 오닐의 행선지가 조만간 결정될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피닉스가 오닐을 원하는 팀들과 협상중인데, 클리블랜드를 비롯해 댈러스 매버릭스와 시카고 불스 등이 그 대상이라는 것이었다. 샐러리 절감 효과는 월러스/파블로비치를 내놓은 클리블랜드가, 전력 강화 효과는 브래드 밀러를 내놓은 시카고가 비교우위를 지니고 있었다. 피닉스는 댈러스 및  시카고와의 협상 사실을 지렛대 삼아 클리블랜드의 '2009년 히트상품' 딜론테 웨스트를 요구했고, 페리 단장은 당연히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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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2일, 라디오 방송에 출연한 클리블랜드 스포츠 전문기자 브라이언 윈드호스트가 '빅 딜이 임박했으며 수일 내로 성사될 것'이라는 소식을 전했고, 이제 팬들의 이목은 오닐 영입 가능성에 집중됐다. 페리 단장은 제3의 팀을 끌어들여 삼각 딜을 모색하는 한편, 오닐이 아닌 다른 선수의 영입 가능성을 흘리며 커 단장을 압박해갔다.

샌안토니오의 제퍼슨 영입 소식이 전해진 다음날인 6월 24일 오후 11시 50분, 트레이드 당사자인 오닐이 자신의 트위터에 '이제 (우승)반지 하나를 더 얻을 시간'이라는 글을 올리며 자신의 클리블랜드 행이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비판한 칼럼니스트 마크 잭슨을 비난했다. 오닐이 트레이드를 통보받은 게 아니냐는 추측이 나왔고, 곧이어 ESPN 홈페이지에 오닐의 클리블랜드 행 뉴스가 메인 기사로 올라왔다. 넉 달에 걸친 긴 협상이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입단 기자회견에 참석해 댄 길버트 구단주로부터 클리블랜드의 겨울을 뒤덮는 눈을 치울 대형 삽을 선물받은 오닐은 이번 시즌 목표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한 마디로 대답했다.

"Win a Ring for the King."

왕(르브론)의 팀에 우승하러 왔음을 분명히 한 입단 일성이었다.



손익평가

오닐 트레이드의 세부사항은 다음과 같다.

오닐(21백만 달러)<->월러스(14백만 달러)+파블로비치(4.9백만 달러)+2010년 2라운드 지명권+현금 0.5백만 달러

오닐을 데려오는 댓가로 클리블랜드가 내놓은 것 중 월러스는 하락세가 뚜렷했고 파블로비치는 사실상 로테이션 밖의 선수였으며, 선수층이 두터운 클리블랜드에서 내년 2라운드 지명권은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지도 미지수였다. 다시 말해 클리블랜드가 오닐 트레이드로 잃은 것은 사실상 없었던 셈이다. 당초 트레이드에 포함될 것으로 알려졌던 웨스트, J.J. 힉슨, 테런스 킨지, 2009년 드래프트 30번 지명권 중 아무 것도 잃지 않았다.

1972년생으로 가치 평가에 '건강하기만 하면'이라는 단서가 붙게 된 오닐은 그야말로 건강하기만 하면 클리블랜드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선수다. 인사이드 득점원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아온 클리블랜드에 오닐이 가세한 것은 분명히 전력 플러스 요인이다. 르브론 제임스는 자신의 프로 경력을 통틀어 최고의 센터와 경기할 수 있게 됐다며 이 트레이드를 크게 환영했다. 오프시즌에 오닐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그런 선수와 함께 뛰는 것 자체가 영광'이라고 할 정도다.

오닐의 영입은 클리블랜드의 게임을 크게 바꿀 것이다. 클리블랜드는 그동안 로포스트에서 볼을 잡고 움직일 수 있는 선수가 거의 없었는데, 그 자리에 지난 20년간 로포스트에서 가장 위력적이었던 선수가 가세한 것이다. 이제 클리블랜드는 르브론이나 모리스 윌리암스가 외곽에서 볼을 잡고 공격을 시작하는 대신 로포스트에 있는 오닐에게 볼을 넘긴 후 오프더볼 무브를 통해 공격을 운영할 수 있게 됐다.

리그 최고 수준을 자랑하던 클리블랜드 외곽슈터진은 그 위력을 한 단계 높일 수 있게 됐다. 오닐은 최고의 로포스트 득점원일 뿐아니라 킥아웃 능력에서도 리그 최고를 다투는 빅맨이기 때문이다. 지난 시즌 르브론의 골밑 돌파를 통해서만 볼을 받던 슈터진은 이제 오닐을 통해서도 슛찬스를 얻을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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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블랜드는 지난 시즌 골밑에서 1:1 수비를 해줄 수 있는 빅맨이 없어 고전해야 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리그 최고 수준의 헬프디펜스 능력을 키웠지만, 헬프디펜스 자체가 자기 수비수를 버려두고 하는 수비다보니 볼이 잘 도는 팀을 상대로는 어려움을 겪었다. 지난 플레이오프에서 올랜도에게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던 것도 골밑의 하워드에 너무 신경을 쓰다가 라샤드 루이스 등 올랜도 슈터진에게 무차별 폭격을 당했기 때문이다. 이번에 로포스트에서 여전히 강력한 1:1 수비력을 보여주는 오닐이 가세하면서 이런 문제점은 대폭 개선될 전망이다.

결과적으로 벤치가 강화된 것도 커다란 플러스 요인이다. 오닐에게 선발 자리를 넘겨주고 벤치에서 나오게 될 지드루너스 일가우스카스는 리그 대부분의 팀에서 주전 센터로 뛸 수 있는 선수다. 지난 시즌 벤치 멤버의 경기력 부재로 어려움을 겪었던 클리블랜드에게 일가우스카스의 벤치 출전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가장 큰 도움을 받을 선수는 에이스 르브론이다. 르브론과 오닐이 함께 뛴다는 것은 볼을 지니고 있을 때 더블팀을 해야 하는 선수 두 명이 동시에 코트에 있다는 걸 의미한다. 이제 과거처럼 스윙맨 두 명이 르브론을 더블팀하고 빅맨 한 명이 드라이브인 경로에 끼어들어 막는 것은 매우 힘들어졌다. 그 뒤에는 골밑 마무리 능력으로는 역대 최고를 다투는 오닐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오닐 역시 입단 기자회견에서 상대팀들에게 "이제 더블팀은 없다. 여기 밑줄 백 번 그어라. 이제 더 이상 더블팀 올 수는 없다." 고 강조했다. 시간이 흐르며 어느 정도 정립돼가던 르브론 수비법을 처음부터 다시 고민해야 한다는 사실은 상대팀들에게 커다란 골칫거리가 될 것이다.

잃은 것은 사실상 없는 반면 기대 수익은 크다는 점에서 클리블랜드의 이번 트레이드는 성공이라 할 수 있다.



새로 생긴 과제

오닐 영입은 분명히 팀 전력에 보탬이 됐지만 해결해야 할 과제도 생겼다.

상대의 2:2 플레이, 특히 하이포스트 픽앤롤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오닐은 전성기에도 2:2 수비에 매우 약한 모습을 보여줬다. 2:2 공격을 막으려면 빅맨의 기동력이 필수적인데 다소 발이 느린 오닐이 상대의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했던 것이다. 피닉스가 샌안토니오의 팀 던컨을 넘기 위해 야심차게 오닐을 영입했다가 실패한 이유도 던컨이 파커나 지노빌리와 2:2 플레이로 오닐을 괴롭혔기 때문이다. 클리블랜드가 오닐을 영입한 가장 큰 이유인 올랜도의 드와이트 하워드도 1:1 못지 않게 2:2 플레이를 많이 하는 편이다. 오닐을 도와줄 최적화된 수비 전술이 필요하다.

LeBron Ja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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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브론과 오닐이 최대의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는 전술도 필요하다. 르브론의 주무기는 어디까지나 골밑 돌파기 때문에 골밑에서 오닐과 동선이 겹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오닐은 르브론의 프로 시절 뿐아니라 농구 경력 전체를 통틀어서도, 유소년 리그 때 한 팀이었던 리온 포우 이후 처음으로 함께 뛰게 된 로포스트 득점원이다. 르브론 자신이 빅 센터와 함께 뛰는 법을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 오닐 역시 페니 하더웨이, 코비 브라이언트, 드웨인 웨이드 등 스윙맨을 가장 잘 살린 센터이긴 하지만 르브론처럼 돌파 비중이 높은 스윙맨과 뛰어본 적은 없다. 오닐이 르브론의 돌파 경로를 가로막고 볼을 요구하는 일이 많아질 경우 팀워크가 깨질 가능성도 있다.

이 둘을 조율해야 할 클리블랜드의 공격 코치는 현재 공석 상태다. 지난 시즌 볼무빙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며 클리블랜드가 효율적인 공격팀이 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존 쿠에스터 코치가 디트로이트 감독으로 영전했기 때문이다. 새 공격 코치 후보 0순위인 마이크 말론 코치가 이 과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오닐이 골밑으로 몰아준 수비진의 헛점을 공략할 수 있는 '스트레치 파워포워드' 부재도 과제다. 지금까지 오닐과 좋은 호흡을 보인 파워포워드는 모두 중거리 슛이 있는 선수들이었다. 올랜도 시절의 호레이스 그랜트, 레이커스 시절의 그랜트와 로버트 오리, 마이애미 시절의 유도니스 하슬렘 등은 모두 오닐을 막느라 쏠린 수비진을 공략할 수 있는 중거리 슛을 지니고 있었다. 피닉스에서 호흡을 맞췄던 아마레 스타더마이어의 경우 뛰어난 중겨리 슛 능력이 있었지만 오닐과 공격 템포를 맞추는 데 실패하며 시너지를 발휘하지 못했다.

이번 시즌 선발 파워포워드로 오닐과 함께 나올 앤더슨 바레장은 중거리슛 능력이 제로에 가깝다. 물론 올 여름 FIBA 아메리카 선수권대회에서 괜찮은 슈팅능력을 보여주긴 했지만 NBA에서도 같은 모습을 보여줄 지는 미지수다. 지난 시즌 클리블랜드의 파워포워드 중 유일하게 중거리 슛을 갖췄던 조 스미스는 애틀랜타 호크스에 새 둥지를 틀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인 법, 오닐이 확보해준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방안이 필요하다.



작년 여름 조 스미스, 데이먼 존스라는 만기계약 카드로 모 윌리암스를 얻어왔던 페리 단장은 올 여름엔 월러스, 파블로비치 만기계약 카드로 오닐을 데려와 2연타석 홈런을 쳤다. 르브론이 사실상 계약 마지막 해를 맞는 이번 시즌 오닐은 '반드시 우승' 모드인 클리블랜드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 'We are all Witness(우리 모두 산 증인)'라는 모토 아래 르브론의 왕좌등극의 목격자가 되기를 기대했으나 지난 시즌 뜻을 이루지 못한 클리블랜드 팬들에게 오닐은 'Witness Protection(증인 보호 프로그램)'이 되는 것이다.

클리블랜드의 오프시즌 첫 움직임이자 최대 자산을 이용한 움직임이 오닐 영입이었다는 것은 이후 전력 강화 움직임이 오닐이라는 대전제 아래 이뤄질 것이란 뜻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다음 순서에서는 클리블랜드가 오닐 이후 FA로 영입한 선수들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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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떠들썩했던 시즌은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로 끝났다. 르브론 제임스의 시즌 MVP 및 마이크 브라운 감독의 올해의 감독상 수상, 그리고 수많은 프랜차이즈 기록들은 정규시즌 1위라는 결과를 가져다줬고, 플레이오프 전 시리즈에서 홈코트 어드벤티지를 확보한 클리블랜드는 2라운드까지 파죽의 8연승을 거두며 순항했다.
 너무 빨리 달린 탓일까? 클리블랜드는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올랜도 매직을 만나 고전했고, 르브론의 믿을 수 없는 대활약에도 불구하고 시리즈 전적 2-4로 패배, 코비 브라이언트와 레이커스가 기다리고 있던 파이널 무대 바로 앞에서 주저앉았다.

 이 패배의 후유증은 컸다. 올랜도의 미스매치 공격에 대한 해법을 시리즈가 끝날 때까지 내놓지 못한 '수비형 감독' 브라운은 해임설에 시달렸고, 탈락이 확정된 직후 상대 선수와 악수하지 않고 경기장을 빠져나간 르브론도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시리즈 내내 부진을 면치 못한 주전 가드 모리스 윌리암스는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클리블랜드가 정규시즌에 거둔 성과에 비해 너무나도 쓰디쓴 결말이었다.

 파이널 진출 실패라는 사실은 현재 클리블랜드가 처한 상황을 명백히 보여줬다. 클리블랜드 로스터에는 아직도 구멍이 많이 남아있는 것이다. 이 구멍이 채워지지 않는 이상, 클리블랜드는 내년 시즌에도 우승을 장담할 수 없는 처지라는 것이 드러났다.
 따라서 클리블랜드의 이번 오프시즌은 이런 구멍들을 채우기 위해 숨막히게 진행될 예정이다. 이 시리즈는 클리블랜드의 오프시즌 행보를 추적하고, 앞질러 살펴보는 시간이 될 것이다.


2009-2010 시즌의 중요성

 2009-2010 시즌은 클리블랜드에게는 매우 중요한 시즌이다. 어쩌면 40년 프랜차이즈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시즌이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 르브론은 2009-2010 시즌이 끝나면 옵트아웃 권한을 갖게 된다. 즉 다음 시즌은 사실상 브롱의 계약 마지막 해이다. 그리고 르브론은 지난 시즌 정규리그 1위를 하고도 파이널 진출에 실패했다. 이 사실이 가지는 의미는 모두가 알고 있다.
  • 주전 센터 지드루너스 일가우스카스가 마지막 시즌을 맞는다. 일가우스카스가 이번 오프시즌에 옵트아웃하고 다년 연장계약을 하지 않는 이상 2009-2010 시즌이 일가우스카스의 마지막 시즌이다. 이미 발목에 4번의 대수술을 받아 걸어다니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는 소릴 듣고 있는 일가우스카스는 계약이 끝나면 은퇴할 가능성이 높다. 지난 시즌 기준 클리블랜드의 로테이션 빅맨진은 바레장을 제외하면 거의 모두가 은퇴를 앞두고 있는 베테랑이고 힉슨이나 잭슨은 주전급이 되려면 몇 년은 더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2009-2010 시즌이 지나면 클블은 갑자기 빅맨 공백이 생길 수 있다.
  • 브라운 감독 역시 계약 마지막 해를 맞는다. 2005년 클리블랜드에서 감독 생활을 시작한 마감독은 2008시즌까지 매시즌 나름대로 성공 및 발전을 이뤄냈다. 지난 시즌은 마감독 스스로가 실패와 좌절을 느낀 첫 시즌이다.
  • 클리블랜드 지분구조가 변동한 뒤 맞는 첫 시즌이다. 대주주인 댄 길버트는 글로벌 마케팅을 위해 중국계 자본에게 구단 지분의 10~15%를 매각했고, 그 대신 다른 마이너 주주의 지분을 사들였다. 따라서 2009-2010 시즌은 브롱과 클블이 본격적인 글로벌 마케팅에 나서는 첫 해가 될 것이다.

 위와 같은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이번 오프시즌을 맞는 페리 단장의 각오는 비장할 수밖에 없다. 이런 페리 단장 앞에는 팀의 운명을 결정지을 중대 선택이 기다리고 있다. 팀 운영의 초점을 2010시즌과 2011시즌 중 어느 쪽에 맞출 것인지 하는 것이다. 이것은 클리블랜드가 나름대로 추진해온 '2010 프로젝트'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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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블랜드의 2010년 프로젝트

 다른 많은 팀들도 마찬가지겠지만 클리블랜드가 지난 1~2년간 해온 딜에는 한 가지 원칙이 있었다. 2010년 이후에도 계약이 남는 베테랑 선수는 되도록 배제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두말 할 나위도 없이 2010년에 르브론을 지켜내면서 슈퍼스타 FA를 영입, 2010-2011 시즌에 우승권 전력을 만들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이 원칙을 잘 지키면서도 우승권 전력을 유지해온 페리 단장의 능력은 인정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현재로썬 르브론 외에 또다른 맥시멈급 선수를 잡을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클리블랜드 판 2010 프로젝트'에 수정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현재 클블의 2010년 확정 페이롤은 37.3백만 달러인데, 르브론이 옵트아웃할 경우 17백만 달러 정도가 빠져 약 20.1백만 달러가 된다. 르브론은 재계약시 최대연봉 계약이 확실하므로, 샐러리 캡의 30%에 해당하는 연봉을 받을 수 있다. 경제 위기를 감안해 샐캡을 58백만 달러 정도로 보면 17.4백만 달러 정도다. 오프시즌에 제한적 FA인 앤더슨 바레장을 아예 놔준다고 가정할 경우 2010년의 확정 샐러리는 다음과 같이 된다.

르브론: 17,400,000 (캡홀드 - 샐러리 캡의 30% )
대니얼 깁슨: 4,015,334
딜론테 웨스트: 4,500,000 (웨이브시 0.5백만 달러만 보장)
힉슨: 1,528,920 (팀 옵션)
잭슨: 854,389 (전액 비보장)
윌리암스: 9,300,000
2009년 1라운드 지명 선수: 1,063,200
2009년 2라운드 지명 선수: 762,195
2010년 1라운드 지명 선수: 1,020,960 (낮은 순위일 경우)
2010년 2라운드 지명 선수: 473,604
로스터 채우기용: 473,604
로스터 채우기용: 473,604
10일 계약 선수 세 명
----------------------------
합계: 41,865,810

예상 샐러리 캡 58백만 달러에서 위 연봉 합계를 빼면 16,134,190 달러가 남는다. 그런데 이 금액으로는 2010년에 풀리는 최대 연봉급 선수들인 드웨인 웨이드, 조 존슨, 크리스 보쉬, 아마레 스타더마이어, 야오 밍 등을 잡기에는 약간 부족하다. 총연봉이 샐러리캡 미만인 팀은 샐러리 캡을 초과하는 계약을 맺을 수가 없으므로, 약 6백만 달러와 2백만 달러 정도로 예상되는 미드레벨 익셉션 및 바이애뉴얼 익셉션으로는 이들 슈퍼스타들을 데려오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클리블랜드가 2010년에 최대 연봉급 슈퍼스타를 추가로 데려오기 위해서는 르브론이 재계약 연봉을 깎거나 현재 전력을 더 깎아내리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프랜차이즈 그 자체인 르브론의 최대 연봉 계약을 깎으면서 또다른 최대 연봉급 선수를 최대 연봉으로 데려오는 것을 르브론이 용납할 지도 의문이고, 바레장과 일가우스카스가 모두 사라진 저 전력에서 선수를 더 내보내면 과연 그게 우승할 수 있는 팀이 될지도 의문이다.

즉 클리블랜드가 2010년에 연봉을 비워서 샐러리 캡 내에서 전력을 강화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많은 과제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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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프로젝트를 포기할 경우

그렇다면 여기서 발상의 전환을 꾀해볼 수 있다. 트레이드를 통해 현재의 총연봉을 유지해가며 전력을 강화하자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오프시즌을 보내게 되면 샐러리 캡을 뛰어넘는 규모의 전력을 유지하며 당장 다음 시즌부터 우승에 도전할 수 있다.

페리 단장이 이 방법을 선택할 경우 다음과 같은 움직임이 이어질 것이다.

  • 바레장과 재계약하거나 사인앤트레이드
  • 벤 월러스+사샤 파블로비치 만기계약 카드를 이용해서 2010년 이후에도 계약이 남아있는 올스타급 선수 영입
  • 미드레벨 익셉션급 선수와 2년 정도 계약
  • 만약 샤킬 오닐을 영입할 경우 곧바로 연장 계약
  • 이번 드래프트에서 픽업 또는 픽 구매

 위와 같은 과정에서 클리블랜드의 젊은 선수 중 한두 명이 팀을 떠날 수도 있다.

다만 이런 방법을 쓸 경우, 2010 프로젝트는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웨이드, 보쉬, 야오, 조 존슨 등과 계약할 가능성은 더이상 없다. 페리 단장이 이쪽 길을 선택한다는 것은 미래를 포기하는 것이므로, 2009-2010 시즌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우승해야 한다.


갈림길에 선 페리의 선택은?

 페리 단장은 단장직을 맡은 이래 가장 중대한 선택을 해야 한다. 연봉 여유분을 지키며 2010년을 노릴 것인가, 연봉 여유분을 포기하면서 당장 우승을 위해 전력 강화를 할 것인가? 둘다 선택할 수는 없고 어느 쪽이든 리스크가 존재한다. 페리 단장이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클블의 오프시즌 계획은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드래프트 하루 전, 페리 단장은 월러스, 파블로비치, 2010년 2라운드 지명권 및 현금 50만 달러로 피닉스 선즈의 샤킬 오닐을 영입하는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페리가 선택한 길은 두 번째 길이었던 것이다.

다음 순서에서는 샤킬 오닐 영입 과정과 그 영향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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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COLUMNS/HELTANT79 2009. 4. 25. 00:03

킨샤사의 성자-세계인 무톰보 이야기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아프리카 한가운데 위치한 콩고 민주공화국의 수도 킨샤사. 오랜 내전으로 황폐해진 이곳에는 300석의 병상을 보유한 초현대식 병원이 세워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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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7년 개관한 이 병원은 소아과, 외과, 산부인과와 전염병 연구 센터로 이루어져 있으며, 매년 5세 이하 어린이 중 20%가 에이즈 등 전염병으로 죽어가며 평균 수명이 50살도 안 되는 이 나라의 의료/보건 환경을 발전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습니다.

병원의 설립자는 이 나라 출신의 노장 NBA 선수로, 그는 무려 1500만 달러를 기부해서 조국에 세운 이 병원에 어머니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NBA가 키워낸 세계인, 디켐베 무톰보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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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켐베 무톰보 무폴론도 무캄바 장 자크이 워무톰보,' 아프리카 출신
 
Dikembe Mutombo는 1966년 6월 25일, 아프리카의 신생국 콩고의 수도 레오폴드빌에서 학교 교장이었던 사무엘 무톰보와 비암바 마리 무톰보의 10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습니다. 그가 속한 부족은 태어난 아이에게 친족의 이름을 물려주는 것이 관례였고, 결국 무톰보는 ‘디켐베 무톰보 무폴론도 무캄바 장 자크이 워무톰보(Dikembe Mutombo Mpolondo Mukamba Jean Jacque Wamutombo)'라는 터무니없이 긴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무톰보의 아버지는 월수입이 37달러로 당시 콩고에서는 중산층에 속했지만, 10명이나 되는 자녀를 부양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무톰보 부부는 굶주린 이웃을 어떻게든 도우려 항상 노력했고, 소년 무톰보는 어려서부터 주위 사람들을 배려할 줄 아는 아이로 자라갔죠.

당시 콩고는 1960년 벨기에로부터 독립한 이래 5년 동안 무려 세 번이나 정변이 일어나는 혼란 끝에, 미국 CIA가 후원하는 모부투 군사 정권이 권력을 잡은 직후였습니다. 국민들은 국가의식보다는 약 200개에 달하는 부족의식이 더 강했으며, 무엇을 해야 할지 아무도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다른 많은 아프리카 국가의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풍족한 자원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고 있었고, 서구 세계가 착취의 대가로 뿌려주는 원조 물자에 의지해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영특한 두뇌를 자랑했던 소년 무톰보는 이런 환경 속에서 병에 걸려 죽어가는 주위 사람들을 보면서 약사가 되기로 다짐했고, 미국의 경제 원조 정책인 USAID 장학금을 받으며 학문을 쌓아갔습니다. 고등학교 때 이미 7피트에 가까울 정도로 키가 크고 운동신경이 좋았던 무톰보는 모든 운동, 특히 농구와 축구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미군 원조 학교인 Salvation Army School과 Jesuit-run Institut Boboto의 명물이 되었습니다. 집안 식구 모두가 키가 컸던 관계로 형 일로와 함께 농구 청소년 대표 팀에 뽑히기도 했죠. 그 사이에 모부투 정권은 국명을 자이르로, 수도 이름을 킨샤사로 바꿨지만 소년 무톰보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습니다.

어느 날, 무톰보의 장학금 담당관이 무톰보를 찾아왔습니다. 미국에서 왔다는 담당관은 무톰보를 유심히 관찰하더니, 미국에서 공부해볼 생각은 없냐고 물었죠. 언젠가는 미국에서 공부해보고 싶다고는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무톰보 자신도 그 기회가 그렇게 일찍 찾아올 줄은 몰랐습니다. 무톰보는 망설일 것도 없이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죠.

 세계인 무톰보의 첫걸음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Rejection R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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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톰보와 모닝, 1991년


무톰보는 조지타운 대학교에 입학해서 약학 전공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미국에서 약사로 성공한 후 고국으로 돌아가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약을 지어주고 싶었기 때문이죠. USAID 프로그램에서는 학비만 대주었기 때문에, 무톰보는 친구들과 함께 미 의회와 세계은행에서 여름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함께 아르바이트를 한 친구들 중에는 무톰보처럼 세계 각지에서 온 친구들이 많았고, 무톰보는 그들과 대화하면서 국제적인 감각을 익혀나갔습니다. 그가 영어나 콩고의 공용어인 불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배우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죠. 조지타운에서 보낸 1년 동안, 무톰보의 시야에 담긴 세계는 그의 영어 실력만큼이나 죽죽 자라났습니다.


                               조지타운 새내기 시절의 무톰보

‘세계인’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하고 있던 무톰보의 인생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큰 변화를 맞이했습니다. 조지타운 농구부의 명장 존 톰슨이 무톰보를 찾아온 것이죠. 애당초 무톰보가 미국으로 올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학업능력과 함께 농구 실력이 높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농구 원로인 자리드 헐버스타트가 경제원조 담당관이던 허먼 헤닝에게 무톰보의 비디오를 보여줬고, 헤닝이 조지타운의 톰슨 감독에게 추천서를 보냈던 것이죠. 1985년에 패트릭 유잉이 졸업한 후 센터 난에 시달리고 있던 톰슨 감독은 무톰보에게 선뜻 농구장학금을 주기로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무톰보는 농구 선수가 된다는 것을 별로 내켜하지 않았습니다. 고국에 있었을 때도 NBA라는 프로리그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몸을 부딪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무톰보는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지는 농구 경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죠. 하지만 톰슨 감독은 ‘프로 농구 스타가 되면 세계적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으며 무톰보는 프로 농구 스타가 될 자질이 충분하고 자신은 프로 농구 스타를 만들 가능성이 가장 높은 대학 감독 중 하나’라며 무톰보를 설득했습니다.

마침내 마음을 정한 무톰보는 조지타운 호야스 농구부에서 본격적으로 농구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농구부 입단 후에는 전공도 바꿨습니다. 외교학과 언어학의 복수 학위로 졸업한 무톰보는 영어, 불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와 아프리카 5개 부족 언어를 구사하는 국제적 인재가 되어있었죠. 무톰보는 정말로 ‘세계적인’ 농구선수가 되고 싶어 했습니다.

당시 무톰보는 이미 7피트가 넘는 장신에 엄청난 윙스팬과 유연성까지 갖췄지만, 기본기나 전술 이해도는 아예 처음부터 시작해야 할 정도로 형편없었습니다. 톰슨 감독은 끈기를 가지고 하나하나 기본기를 전수해갔죠. 특히 무톰보를 수비형 센터로 키우기로 결정하고 리바운드와 블록 기술을 집중적으로 가르쳤습니다. 톰슨 감독은 심지어 NBA 레전드인 빌 러셀까지 동원했습니다. 농구부에 러셀을 닷새 동안 초청했는데, 그중 사흘을 무톰보에게 붙인 거죠. 러셀은 그때까지 프로 선수가 될지 망설이고 있던 무톰보에게 ‘자네는 할 수 있어. 자네는 농구를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야’라며 설득했고, 마침내 무톰보는 프로 선수의 길을 걷기로 결정했습니다.

2학년이 되던 해부터 1년 후배 알론조 모닝의 백업으로 출전하기 시작한 무톰보는 3학년부터 주전으로 출장, 모닝과 함께 공포의 골밑 수비를 자랑했습니다. 그는 세인트존스와의 경기에서 무려 12개의 슛을 걷어내며 대학농구 역대 신기록을 세웠고, 강팀이 즐비한 빅 이스트 컨퍼런스에서 공동 수비왕을 수상했습니다. 무톰보와 모닝의 더블포스트는 상대에게서 골밑 득점 기회를 앗아가 버렸고, 조지타운 대학교의 팬들은 그들에게 ‘Rejection Row’라는 별명을 붙였습니다.
졸업반이 되자 무톰보의 골밑 수비는 경이적일 정도로 발전했습니다. 모닝이 부상으로 시즌 대부분을 결장하는 바람에 골밑 부담을 혼자 짊어지게 되었지만, 그는 평균 15.2점과 12.2리바운드, 그리고 4.71블록을 기록했으며 수비왕과 컨퍼런스 퍼스트 팀에 선정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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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조지타운 멤버들, 아랫줄 가운데가 무톰보, 뒷줄 오른쪽에서 6번째가 모닝


당시 무톰보의 수비력을 가장 잘 보여준 경기는 1991년 빅 이스트 컨퍼런스 토너먼트 8강에서 펼쳐진 코네티컷과의 경기였습니다. 조지타운은 야투율 25퍼센트의 슛난조에 시달렸지만 11점차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골밑에서 27개의 리바운드를 잡아낸 무톰보가 있었기 때문이죠. 긴 팔과 높이, 운동능력을 바탕으로 한 무톰보의 골밑 수비는 금세 NBA 스카우트들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수비력에서 학교 선배 패트릭 유잉의 대를 이을 선수로 평가받곤 했죠. 1991년 졸업한 무톰보는 드디어 NBA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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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1년 학위수여식의 무톰보


    런&건 팀의 골키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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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NBA 드래프트, 무톰보는 자이르에서 날아온 부모님이 보는 앞에서 전체 4순위로 덴버 너게츠에 지명되었습니다. 1번 픽의 영광은 차지한 래리 존슨을 비롯해서 케니 앤더슨, 스티브 스미스, 스테이시 오그먼, 테럴 브랜든, 그렉 앤써니 등 가드나 포워드들이 대세를 이룬 그 해 드래프트에서 무톰보는 루크 롱리, 데일 데이비스 등과 함께 몇 안 되는 인사이드 자원이었습니다.

1980년대 명감독 더그 모의 지휘 아래 알렉스 잉글리시, 팻 레버 등을 앞세워 쇼타임 레이커스를 제치고 팀 득점 1위를 독점할 정도로 빠른 농구를 펼쳤던 덴버는, 무톰보가 입단하던 무렵에는 선수들의 노쇠화로 리빌딩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폴 웨스트헤드 감독은 기존의 런&건 시스템을 유지하면서 속공이 특기인 포워드와 가드를 중심으로 러닝플레이를, 무톰보에게 골밑 수비 하프코트 공격을 맡기기로 했죠. 무톰보는 루키 시즌 평균 16.6점과 12.3리바운드, 3블록을 기록하는 활약으로 감독의 기대에 부응하며 단숨에 팀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올 루키 퍼스트 팀은 물론이고 올스타에 선발되기도 했는데, 하킴 올라주원, 데이비드 로빈슨과 함께 미드웨스트 디비전에서 뛴 루키 센터로써는 준수한 성적이었죠.
다른 모든 루키와 마찬가지로 무톰보도 ‘황제’ 조던과 만나야 했습니다. 자신의 대학 시절 라이벌이었던 유잉의 뒤를 잇는 조지타운 센터가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무톰보를 눈여겨보고 있던 조던은, 자유투 라인에 서자 눈을 감은 채 자유투를 던지고는 무톰보에게 외쳤죠. “NBA에 온 것을 환영하네!” 프로 농구 선수의 생활은 모든 것이 새로웠습니다.

이듬해 프랜차이즈 스타인 댄 아이슬 감독을 새로 영입한 덴버는 루키 라폰소 엘리스와 브라이언트 스티스를 영입하고 마흐무드 압둘 라프가 본격적으로 스타팅 라인업에 합류하면서 전 시즌보다 15승이나 향상된 성적을 올렸습니다. 무톰보는 여전히 팀의 기둥이었고, 이제 많은 득점원들과 함께하게 된 그는 득점 비중을 줄이고 수비에 집중하게 되었죠.
그들은 이듬해에도 성적을 끌어올려 시즌 42승을 거두며 4년 만에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습니다. 덴버 팬들로써는 환호할 만한 일이었지만, 1라운드 상대는 그 해 최고 승률 팀인 시애틀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들을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시애틀과의 그 시리즈는 무톰보의 커리어를 통틀어 가장 화려한 시대로 기록되며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습니다.


아메리칸 드림

그 해 시애틀의 성적은 63승 19패로 1번 시드, 덴버는 42승 40패로 8번 시드. 1984년 컨퍼런스 7,8위 팀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기 시작한 이래 8번 시드가 1번 시드를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1라운드 따위에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던 거죠. 심지어 덴버의 아이슬 감독마저도 시리즈 시작 전에 ‘우리의 목표는 경험을 쌓는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였으니까요. 적지에서 치른 두 경기에서 평균 15점차로 완패하자, 덴버의 플레이오프 경험은 세 경기로 끝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때부터 누구도 기대하지 않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3차전을 110-93으로 승리하며 기사회생한 덴버는 4차전마저 연장 접전 끝에 승리하며 시리즈를 최종전으로 끌고 갔습니다. 이제야 슬슬 욕심이 생기기 시작한 아이슬 감독은 ‘이런 큰 경기에 우리 어린 선수들이 긴장할까봐 걱정’이라고 했지만, 그의 팀 센터는 조지타운 출신이었습니다. 무톰보는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이건 플레이오프다. 어떤 바보가 홈에서 승리를 내주고 싶겠냐? 걔네들이 시끄럽게 떠들어댈 것은 뻔한 일이다. 우린 그냥 가서 편안히 경기하면 된다.’며 동료들을 독려했습니다.

마침내 벌어진 운명의 5차전, 무톰보에게는 상대 에이스인 숀 켐프를 상대로 골밑을 사수하라는 특명이 내려졌고, 그는 라폰소 엘리스, 브라이언 윌리엄스와 함께 켐프를 묶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전반까지는 시애틀이 앞서나갔지만 시애틀의 포인트가드 게리 페이튼이 발에 경미한 부상을 입으면서 리듬이 흐트러졌고, 후반 들어 제 타이밍에 공을 공급받지 못하게 된 켐프는 번번이 무톰보에게 가로막히기 시작했습니다. 그 틈을 타서 로버트 팩과 엘리스가 득점포를 가동했고, 마침내 경기는 또다시 연장으로 가게 됐습니다.
연장전에서 무톰보는 수비력만으로 최고의 경기지배력을 보여줬습니다. 시애틀 선수들은 완벽한 돌파를 해내고도 무톰보의 블록슛 때문에 공을 밖을 뺄 수밖에 없었고, 데틀레프 슈렘프나 네이트 맥밀란 등 시애틀의 슈터들은 수비를 앞에 두고 외곽 슛을 던져야 했습니다. 림을 돌아 나온 공은 모조리 무톰보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갔고, 덴버는 속공으로 손쉬운 득점을 올렸죠.

마침내 종료 휘슬이 울리고, 98-94로 승리한 덴버 선수들은 환호했습니다. 엄청난 활약을 펼친 무톰보는 코트 위에 벌렁 누워 공을 쥐고 포효했습니다. 그 장면은 지금도 플레이오프 하이라이트의 단골 메뉴로 등장하곤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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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하이라이트 보기

덴버는 리그 역사상 최초로 1라운드에서 1번 시드를 꺾은 8번 시드 팀이 되었고, 팬들은 전국에 방송된 이 시리즈를 통해 ‘수비형 센터 무톰보’의 진가를 깨닫게 됐죠. 다섯 경기를 통해 그가 기록한 블록슛은 무려 31개. 경기당 6개가 넘는 슛을 막아낸 것입니다. 비록 덴버는 2라운드에서 유타에게 4-3으로 아깝게 탈락했지만, 무톰보는 이 시리즈에서도 칼 말론을 상대로 7경기에서 38개의 블록을 기록하며 선전했습니다.

덴버는 이듬해에도 8번 시드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2년 연속으로 기적을 만들어내지는 못했습니다. 이 무렵부터 무톰보는 블록슛을 성공시킨 후 집게손가락을 좌우로 흔드는 세리모니를 시작했는데, 당시 막 복귀해 45번을 달고 뛰던 조던도 이 세리모니의 희생양이 됐죠. 여담이지만, 몇 년 후 조던은 무톰보에게 인유어페이스 덩크를 먹인 후 손가락 세리모니를 하며 보기 좋게 설욕했습니다.
그 해 무톰보는 리바운드 2위와 블록슛 1위를 기록하면서 처음으로 올해의 수비수 상을 수상했습니다. 이제 무톰보는 리그를 대표하는 수비형 센터로 자리매김한 것이죠.

그러자 덴버 구단의 걱정이 커졌습니다. 무톰보의 계약 기간은 1995~96 시즌으로 만료될 예정이었고, 구단 살림은 무톰보에게 거액을 안겨줄 정도로 풍족하지 못했으니까요. 마침 1995년 드래프트에서 빅맨 유망주였던 안토니오 맥다이스를 얻고도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자, 덴버는 맥다이스를 중심으로 팀을 리빌딩하기로 했습니다.

무톰보는 덴버에서의 추억을 뒤로 하고 자유계약선수가 되었습니다. 수많은 팀들이 그를 원한 끝에, 결국 애틀랜타가 무톰보의 새 팀으로 결정되었죠.
무톰보는 애틀랜타에서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애틀랜타에는 무키 블레일락과 스티브 스미스 등 덴버 시절보다 득점력이 뛰어난 선수가 많았고, 수비에 전념한 무톰보는 거의 매 경기 골밑을 자신의 땅으로 만들었습니다. 올스타전에도 꼬박꼬박 나갔으며 2년 연속 올해의 수비상 수상과 생애 최초 올 NBA팀 선정 등 무톰보는 1990년대 후반 동부를 대표하는 센터로 군림했습니다. 팀도 매년 50승 이상을 기록하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죠. 애틀랜타는 마이애미, 인디애나와 함께 최강 시카고에 동부에서 가장 근접한 팀 중 하나였고, 당대 최고의 수비 팀이었습니다.

2001시즌 중에 동부지구 1위 팀이었던 필라델피아로 트레이드된 후에도, 무톰보는 아이버슨 원맨 팀이었던 필라델피아의 수비라인을 총지휘하며 팀을 83년 이후 처음으로 파이널에 진출시켰습니다. 비록 파이널에서는 최고의 포스를 자랑하고 있던 샼의 레이커스에게 4-1로 무릎을 꿇었지만, 그 해의 필라델피아는 가장 위대한 패자였죠.

그는 이제 평균 천만 달러 이상을 받는 슈퍼스타가 되었습니다. 애틀랜타에 큰 집도 샀고 간호사 지망생이던 자이르 미녀 로즈와 결혼하면서 결혼하라고 성화를 대던 어머니에게 체면도 세웠죠. 그들은 나중에 아이 셋을 낳았고 조카 넷을 입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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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선 행사에 참석한 무톰보 부부

무톰보는 이제 본격적으로 주위를 돌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출전을 위해 미국을 찾은 조국 자이르의 여자농구 대표 팀의 경비를 대주기도 했고, 1993년에는 국제 구호단체인 CARE의 대변인 자격으로 소말리아 난민 캠프를 찾았습니다. 매년 오프시즌 아프리카를 방문해 매일 2000명 이상의 아이들을 상대로 농구를 가르쳤죠. NBA 총재 데이비드 스턴과 조지타운 동문인 유잉, 모닝과 함께 막 인종차별에서 벗어나고 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고향의 가족들과 친척들도 호강시켜줄 일만 남았었죠.
 이야기가 이것으로 끝난다면, 이 이야기는 후진국 출신으로 미국에서 슈퍼스타가 된 한 농구선수의 아메리칸 드림 이야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애틀랜타에서 첫 시즌을 보내고 있던 여름, 고향에서 일어난 비극이 모든 것을 바꿔 놓았습니다.


비극

1997년 5월, 자이르의 수도 킨샤사에서는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30여 년간 자이르를 철권통치해온 모부투 정권에 맞서 로랑 카빌라를 중심으로 한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죠. 킨샤사의 모든 시민들에게는 통행금지령이 내려졌습니다. 물론 총탄이 비 오듯 쏟아지는 밖으로 나갈 만큼 정신 나간 시민도 몇 없었지만 말이죠.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반드시 외출해야 하는 사람은 있었습니다.

사무엘 무톰보는 뇌졸중으로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아내 비암바 마리를 보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습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병원이 있었지만 통행금지령 때문에 갈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습니다. 이대로 시간이 지날수록 아내는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었고, 사무엘은 결코 그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죠. 사무엘은 가족들의 만류를 마다하고 집을 나섰습니다.
 
사무엘은 평소 같으면 10분이면 도착했을 병원에 30여분 만에 도착했습니다. 의사를 부르려던 사무엘은 그제야 병원이 텅 비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킨샤사에서도 의료인들은 항상 부족했고, 내전을 벌이고 있는 양 세력은 그들을 가장 먼저 데려가 버린 것이죠.
그 병원은 모부투가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마마 예모’라 이름붙인 2000병상의 큰 병원이었습니다. 모부투는 자신의 치적을 자랑하기 위해 병원 운영에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그래서 ‘마마 예모’는 중앙아프리카 지역의 자랑이었죠. 하지만 그 병원은 가장 도움이 필요한 때 가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아무 도움도 주지 못했습니다.

모든 희망을 잃고 집으로 돌아온 사무엘이 맨 처음 들어야 했던 것은, 아내의 주검 앞에서 오열하는 가족들의 울음소리였습니다.

불스 왕조의 플레이오프 홈경기 14연승을 저지하는 등 선전한 끝에 아쉽게 탈락한 무톰보는 TV 뉴스를 통해 고국의 정변을 알았습니다. 무톰보는 검은 연기로 뒤덮인 킨샤사를 보면서 고향 집에 전화를 해보려 노력했지만 전화가 될 리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톰보는 어머니의 부음을 모든 소동이 진정된 후 들어야 했습니다. 임종은커녕, 무톰보가 간신히 비행기를 구해 돌아갔을 때는 장례식까지 마친 뒤였던 것이죠.

무톰보는 어머니의 무덤 앞에서 오열했습니다. 가족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친절했던, 죄와는 가장 거리가 멀었던 어머니가 왜 그렇게 세상을 떠야 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는 사실도 납득할 수 없었죠.
하지만 납득할 수 있든 없든, 무톰보는 움직여야 했습니다. 어머니는 생전에 항상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려 했었습니다. 단돈 3센트짜리 예방주사를 못 맞아서 죽어가는 아이들이 있었죠.
 
무톰보는 그들을 돕기로 결심했습니다.


디켐베 무톰보 재단

미국에 돌아온 무톰보가 맨 처음 한 일은 에이전트에게 구호 기금 설립을 지시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훗날 ‘디켐베 무톰보 재단’이라 불리게 된 이 기금을 통해, 다시 콩고로 이름이 바뀐 조국의 비극적인 상황을 세계에 알리고 가능한 모든 도움을 주려 했습니다. 그는 인터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콩고를 비롯한 아프리카의 참상에 대해 이야기했고, 시즌 오프 후 모금 계획을 짜 나갔습니다. 2003년에는 아프리카에 다녀온 후 말라리아에 걸려 사경을 헤맨 적도 있었죠.

어머니를 기리고 고국의 고통 받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한 작은 움직임은 서서히 주변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CBS는 인기 프로그램 ‘60분’ 특파원과 무톰보가 내전 후유증에 시달리는 킨샤사의 참상을 취재한 다큐멘터리를 방송했고, 각종 유수 언론사들이 인권 및 복지 관련 상의 수상자로 무톰보를 선정했죠. 리그 역시 2001년 NBA 인도주의상 수상자로 무톰보를 선정했으며 선수협회와 구단주 모임도 무톰보의 움직임을 지지했습니다.
미국 정부와 국제 여론도 무톰보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디켐베 무톰보 재단’의 모금활동에 카터, 아버지 부시, 클린턴 등 전직 대통령과 콜린 파월, 콘돌리자 라이스 등의 정부 각료가 참여했고,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이던 배럭 오바마와 제프 블룸버그 뉴욕 시장 등이 미국 정부에서 재정적인 지원을 할 수 있도록 지원했습니다. 미국 정부는 1999년 미국에서 봉사자에게 주는 가장 큰 상인 ‘대통령 봉사상’ 수상자로 무톰보를 선정했습니다.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와 넬슨 만델라 남아공 전 대통령도 무톰보의 모금 활동에 기꺼이 참여했으며, 코피 아난 사무총장이 이끌던 유엔에서는 유엔 개발 프로그램(UNDP)의 초대 대사로 무톰보를 임명하며 그를 공식적으로 지지했습니다. 전 세계가 무톰보의 꿈에 공감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학 시절 존 톰슨 감독이 예언한 대로, 무톰보는 정말로 ‘세계를 움직이는 농구선수’가 된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무톰보의 소속팀은 뉴저지, 뉴욕, 시카고, 그리고 사흘 후 휴스턴으로 변해갔고 기록도 점점 나빠졌지만, 그의 인류 평화에 대한 신념과 의욕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무톰보는 재단이 모금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도록 미국 시민권도 얻었습니다. 그는 리그의 ‘국경 없는 농구’ 프로그램에 참가하여 아프리카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려 노력했으며, 남아프리카의 불우 어린이들에게 15만 달러를 기부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NBA와 유니세프가 공동으로 추진하는 ‘United for Children, Unite against AIDS’ 캠페인에도 참가하여 부모의 잘못으로 날 때부터 에이즈로 고통 받아야 하는 어린이들을 돕기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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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아이들과 함께 한 42세의 무톰보


하지만 무톰보가 가장 큰 노력을 기울인 사업은 고향에 병원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단지 치료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조국의 의료 환경을 향상시킬 수 있는 병원,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언제든지 도움을 줄 수 있는 병원 말이죠.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무톰보는 꼭 그런 병원을 짓고 싶었습니다.


비암바 마리 무톰보 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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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은 병원을 짓기 전에 있던 구식 병원입니다. 이 허름한 병원 터에 새 병원을 짓는 데 드는 예산은 약 2천9백만 불로 추산되었습니다. 무톰보는 이를 위한 기금 중 첫 1500만 불을 자신의 개인 기부로 충당했습니다. 그것은 그때까지 무톰보가 벌어들인 연봉의 1/3에 육박하는 거액이었죠. 하지만 나머지 반을 채우는 데는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무톰보는 기금 마련을 위해 누구든 만났고 어디든 갔습니다. 처음 병원 설립을 결심한 1997년부터 2006년까지 무톰보가 기금 마련을 위해 이동한 거리는 무려 80만 5천 킬로미터에 이릅니다. 지구를 20바퀴나 돌 정도로 엄청난 거리죠. 오프시즌 동안 다른 선수들은 대부분 집에서 가족과 시간을 보내지만, 무톰보는 일주일에 2~3일은 기금 마련을 위해 밖에 나가있어야 했습니다. 무톰보 스스로가 ‘아내가 도망가지 않고 기다려줘서 정말 다행’이라고 할 정도였죠.
그는 시즌 중에도 다른 선수들이 아직 자고 있을 이른 아침에 일어나 기부자들을 만나는 일이 많았습니다. 시애틀에 원정을 가면 아침에 빌 게이츠 재단을 다녀오는 식이었는데, 어느 날인가는 빌 게이츠를 만나다 팀 연습에 늦어서 택시를 타고 시애틀 시내를 질주한 적도 있었죠.
물론 좌절도 여러 번 겪어야 했습니다. 1999년에 야심차게 추진한 첫 모금 바자는 4만9천 달러 적자라는 처참한 결과로 끝나기도 했죠. 하지만 이 노장 선수의 꺾이지 않는 의지는 리그의 모든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휴스턴 팀메이트였던 쥬완 하워드는 10만 달러를 기부했고, 덕 노비츠키나 레안드로 발보사등 여러 선수들이 무톰보 재단에 모두 50만 달러를 기부했습니다. 휴스턴 구단에서는 연말 자선 바자회로 모금한 49만 달러를 모두 기부했고, 새크라멘토의 패트리 단장도 25만 달러를 기부하는 등 구단주 및 단장 모임에서도 지원을 약속했죠. 마침내 리그 사무국에서 공식적으로 지원을 선언했고, 재정적 지원과 함께 병원 설립 후 운영비 모금을 위해 ‘10만 기부자 모집’ 캠페인을 펼치기로 했습니다. 10만 명이 한 달에 10달러씩 1년 동안 1200만 달러를 모으자는 캠페인이죠. 이 캠페인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합니다.

무톰보의 어머니 이름을 딴 ‘비암바 마리 무톰보 병원’은 몇 번이나 개관을 연기하는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2007년 6월 17일, 아버지 사무엘을 모시고 개관식을 가졌습니다. 무톰보 일생의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죠.

“이 뜻 깊은 날, 사랑하는 저희 어머니, 비암바 마리 무톰보를 떠올려봅니다. 어머니는 제 인생 최고의 선생님이셨습니다. 죽음이 어머니를 데려가서, 어머니는 당신 두 눈으로 당신의 꿈이 이뤄진 이 모습을 보지 못하십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천국에서 웃음 지으며 우리들과 함께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축사를 읽는 무톰보의 목소리가 탁했던 건 단지 그의 평소 목소리가 그랬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비암바 마리 무톰보 병원' 개관식 모습


같은 해 12월에 첫 환자를 받은 이 병원의 병실에는 ‘트레이시 맥그래디’나 ‘야오 밍’, ‘알론조 모닝’같은 동료들의 이름이 붙어있습니다. 아직 의사나 연구원, 각종 기자재가 많이 부족하지만, 무톰보의 열정이 살아있는 한 콩고와 아프리카 사람들의 삶에 반드시 큰 기여를 할 것입니다.


세월도 비켜간 '마운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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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스턴에서 퇴물 선수로 은퇴할 것 같았던 무톰보가 다시 한 번 빛을 발한 것은 2006-07시즌이었습니다. 야오 밍이 부상으로 한동안 돌아오지 못한 것이죠. 절체절명의 위기해서 무톰보가 일어났습니다.
선발로 나선 첫 경기에서 18분 동안 5리바운드로 컨디션을 끌어올리기 시작한 무톰보는 두 번째 경기에서는 19분 동안 10리바운드를 잡아냈습니다. 그리고 14개, 11개, 12개...... 계속해서 두 자릿수 리바운드를 잡아낸 무톰보는 11경기 연속 두 자릿수 리바운드를 기록하는 노익장을 과시했죠.
1월 10일, 레이커스와 가진 홈경기에서 무톰보는 대기록을 세웠습니다. 스물한 살이나 어린 바이넘의 원핸드 덩크를 블록하며 NBA 통산 블록슛 2위에 오른 것이죠. 이 경기에서 무톰보는 무려 34분을 소화하며 7득점 19리바운드 5블록의 괴물 같은 활약을 펼쳐 팀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두 달 후 덴버와의 홈경기에서는 22리바운드를 잡아내며 40대 나이에 한경기 20리바운드 이상을 기록한 최초의 선수가 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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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톰보가 조국에 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팀에서도 최후의 희망 같은 존재였습니다. 비록 지난 시즌도 야오 밍이 시즌아웃 당하며 우승반지를 끼는 데 실패했지만, 무톰보는 그가 뛰고 있는 동안에 수비진의 최후의 보루로, 라커룸의 큰형님으로 그 역할을 다했습니다.


제게 농구는 끝났습니다.’

2008-2009 시즌, 미계약 상태로 시즌 개막을 맞은 무톰보는 몇 달 후 휴스턴과 계약했습니다. 이번 시즌이 정말로 마지막이라는 다짐과 함께 맞은 시즌이었습니다. 야오 밍의 백업으로 시즌 후반부터 9경기에 출장하며 플레이오프에 대비한 무톰보는 여전히 관록 있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플레이오프 첫 경기에서는 포틀랜드를 상대로 18분 동안 리바운드 9개, 블록슛 2개를 기록하며 노익장을 과시했습니다.

그리고 맞은 2차전, 야오 밍을 대신해서 1쿼터 종료 3분여 전 투입된 무톰보는 포틀랜드의 그렉 오든과 리바운드 볼을 다투고 있었습니다. 농구공을 처음 잡은 이래 수만 번이나 잡아내온 수비 리바운드 점프였습니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은 무톰보의 왼쪽 무릎이 이상한 방향으로 비틀렸고, 무톰보는 뛰어오르지 못한 채 코트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쓰러지는 와중에도 오든에게 파울을 해서 쉬운 득점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관중석에 갑자기 정적이 흘렀습니다. 휴스턴 벤치에 있던 선수들이 모조리 일어섰고, 수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무톰보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해설자들은 무톰보가 NBA에서 18년간 걸어온 길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코트에 쓰러져 무릎을 부여잡고 괴로워하는 무톰보에게 아주 나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경기장의 모든 사람들이 직감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빨리, 똑똑히 깨달은 것은 무톰보 자신이었습니다. 의료진이 달려오고 이동 침대가 운반돼 오는 동안, 43세를 맞은 노장 선수의 눈에서는 조용히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무톰보에게 내려진 판정은 ‘무릎 인대 손상’이었습니다. 무톰보는 그의 이번 시즌이 끝난 것을 의미하는 것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슬픈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아뇨, 내 커리어가 끝났습니다. 전 아마 수술을 받아야 할 겁니다. 일단 남은 플레이오프 경기에는 함께 할 것입니다. 후배들과 함께 하며 그들을 응원하고, 그들이 나에게 보여줬던 사랑에 보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내게 농구는 이제 끝났습니다.”

이동 침대에 실려 나가는 무톰보에게 로즈 가든의 관중들은 일제히 기립박수를 보냈습니다. 원정팀에게 가혹하기로 유명한 포틀랜드 홈구장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지난 18년 동안 무톰보가 보여준, 농구 이상의 그 무엇을 향한 박수였습니다.





다음날,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한 무톰보에게 리그 사무국은 리그 역사상 최초로 인도주의상 2회 수상의 영예를 선사했습니다.


킨샤사의 성자

무톰보는 1991년부터 18시즌동안 6개의 팀에서 1196경기를 출장, 평균 9.8득점과 10.3개의 리바운드, 2.8개의 블록슛을 기록했습니다. 그의 통산 블록슛 3289개는 역대 2위의 기록이며, 수비왕 4회와 디펜시브팀 6회, 리바운드왕 2회, 블록슛왕 3회로 수비수로써 위대한 업적을 남겼죠. 그가 코트 위에서 펼친 활약만으로도 우리가 그를 기억해야 할 이유는 충분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위대함은 경기장 밖에서 더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수많은 자선 활동을 통해 고통 받는 사람들을 도우려 애썼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능으로 인한 성공의 결과를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썼습니다.

“이건 살아오면서 얻은 지혜입니다. 모두가 삶의 목적이 있죠? 제 삶의 목적은 사회를 발전시키는 겁니다. 그냥 혼자서 좋은 사람으로 있는 게 아니라, 사람들의 생활에 기여하는 겁니다. 저는 제가 돌보는 사람들의 생명과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려 하고 있죠.
 만약 사람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면, 그 사람들이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도 있겠죠. 제가 그들에게 원하는 것은 바로 그겁니다.“
 
2007년 1월 부시 미국 대통령은 신년 담화문 발표장에 무톰보를 초대했습니다. 그는 영부인 로라 부시의 옆에 앉은 무톰보를 가리키며 ‘이 콩고의 아들을 미국 시민이라 할 수 있어서 영광’이라고 말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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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대통령 신년 담화 현장에서 기립박수를 받고 있는 무톰보


그는 나이지리아에 컨설팅 회사를 차리고 아프리카에 새 집을 짓는 사업을 시작하려 하고 있습니다. 또한 ‘아프리카 채널‘ TV 방송국을 설립해서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한 홍보활동을 하고 있기도 하죠. 농구선수로써 경력은 끝났지만, 세계와 인류를 향한 무톰보의 발걸음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무톰보는 훗날 NBA 팬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을까요?

이런 모습일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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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는 이런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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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제 생각에는, 무톰보가 진정으로 기억되길 원하는 모습은 이런 것일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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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톰보가 살려낸 저 아이들 중에는 미래의 위대한 자선사업가, 아프리카의 현실을 개선할 위대한 정치인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혹은 저 중 위대한 NBA 선수가 나와서, 우리 아이들이 그를 보고 열광할 수도 있겠죠. 그럼 우리는 아이들에게 '바로 저 선수가 아버지 때의 위대한 수비수 무톰보가 키워낸 선수란다' 하고 말해줄 수도 있을 겁니다.

우리가 친구들에게 NBA를 자랑할 때 말할 수 있는 것이 많을 것입니다. 마이클 조던이라는 이름의 신이 하늘을 날아다녔고 매직과 버드의 전설이 만들어진 곳, 샤킬 오닐이라는 괴수가 바스켓을 습격하며 코비라는 불세출의 스타가 폭발하는 곳,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초인들이 최고의 경기를 펼치며 수많은 명장면이 만들어지는 곳..... 모두 좋은 얘깁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죠.

"우리가 보고 있는 NBA는, 아프리카 어디 붙어있는지도 모르는 나라 출신의 비쩍 마른 소년에게 인류애를 실현할 기회를 줄 수 있는 리그다"

그리고 무톰보 역시 리그에게 옳은 일을 할 기회를 주었죠.

그는 자신의 생애를 통해 자신이 속한 무대에 더욱 특별한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수많은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그의 신념과 열정은 주위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그의 위대한 여정에 동참하도록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NBA는 지나치게 상업화되었고 선수들은 돈만 밝힌다’는 비판을 들었을 때 조용히 무톰보를 가리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무톰보가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 명예의 전당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인지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게 하나 있죠.

언제 어디서든, 우리가 볼 수 있든 없든 무톰보는 인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고 있을 것이며, 우리는 그를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디켐베 무톰보 재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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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COLUMNS/HELTANT79 2009. 4. 8. 01:31

마이클 조던의 작은 선행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로베르토 거레이가 미래를 내다볼 수 있었다면 그날은 평소보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출근했을 것이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1987년 8월의 어느 날, 시카고 시경에서 근무하던 거레이는 신고 전화를 받고 시카고 남부에 위치한 한 아파트로 출동했다. 꼬마 아이가 의식불명 상태로 있다는 것이었다. 응급구조대와 함께 현관문을 연 거레이는, 이후로도 계속해서 그를 괴롭히는 악몽을 만나야 했다.
방 안에는 다섯 살도 안 돼 보이는 아이가 발목에 심한 상처를 입은 채로 누워있었다. 끈으로 오랜 시간 동안 졸려있을 때나 생길 수 있는 상처였다. 호흡을 확인하기 위해 아이의 셔츠를 걷어올리자 훨씬 끔찍한 상처가 나타났다. 아이의 가슴이 화상으로 완전히 문드러져 있엇던 것이다.

“살덩어리가 완전히 문드러져서 흘러내리고 있었죠. 말도 안되는 광경이었어요. 제 평생 그런 끔찍한 모습은 처음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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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살짜리 레티 맥기의 참혹한 죽음은 시카고 시민들을 경악시켰다. 도대체 누가, 무슨 이유로 이런 어린아이를 이렇게 잔인하게 죽였을까? 시카고 언론은 레티의 사망을 주요 기사로 보도했고, 시민들은 범인이 밝혀질 때까지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레티의 친엄마 앨리시아 에이브러햄과 그녀의 남자친구 죠니 캠벨이 체포될 때까지 말이다.

에이브러햄과 캠벨은 그해 여름 내내 레티를 학대했다. 레티의 목소리가 너무 높다는 것이그 이유였다. 캠벨은 레티를 ‘계집애같다’고 나무라며 주먹과 몽둥이로 두들겼다. 담뱃불로 살갗을 지지는 것도 모자라서 다리미까지 동원했다. 에이브러햄에게서 받은 바늘로 계속해서 레티를 찔러댔다. 나중에는 끓는 물을 끼얹기도 했다. 밤에는 더 끔찍한 학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캠벨은 레티의 발목을 묶어 옷장 옷걸이에 밤새 거꾸로 매달아버렸다. 애타게 엄마를 찾았지만 소용없었다. 전에도 시 복지국으로부터 아동 방치에 대한 경고를 받은 적이 있었던 에이브러햄은 레티가 아무리 울부짖어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캠벨은 레티의 입에 헝겊 조각을 물린 뒤 감자껍데기로 눈을 비벼댔다. 레티가 죽기 전날 레티는 이미 폐렴 증세를 보이고 있었고, 쇄골과 골반이 부러져 있었다.

운명의 날, 캠벨이 레티를 풀어주자 레티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목이 마르다고 했다. 캠벨이 사내답게 스스로 찾아먹으라고 소리치자, 몸무게가 12킬로그램도 안 되는 레티는 혼자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캠벨이 게으름 피우지 말라고 소리치는 순간 마침내 레티의 고통도 끝이 났다. 레티가 학대의 손길에서 벗어나 영원한 안식을 찾았을 때, 레티의 친엄마 에이브러햄은 바로 옆에 앉아서 ‘헐크’를 보고 있었다.

에이브러햄과 캠벨을 체포하긴 했지만 어려움은 남아있었다. 두 사람의 혐의에는 정황증거만이 뚜렷할 뿐, 결정적인 목격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혐의를 극구 부인했고, 아파트 주민 중에는 레티의 울음소리를 들은 사람조차도 나타나지 않았다. 대부분의 아동 학대 사건이 겪는 ‘증인 불명’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담당 검사인 제임스 비고네스가 이 최악의 살인자들이 법의 심판을 받도록 최선을 다 하겠다고 천명했지만 사건은 장기화 조짐을 보였고, 어쩌면 살인마들이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날 수도 있었다.
두 사람의 희망은 큰 오산이었다. 레티가 뒤늦게 발견되던 날, 그 아파트에는 레티 말고도 아이 한 명이 더 있었던 것이다. 레티보다 한 살 많은 형인 코르넬리우스 에이브러햄은 그해 여름 내내 레티가 학대받는 모습을 지켜봤고 그 끔찍한 형벌 중 몇 가지는 함께 고통받기도 했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에이브러햄과 캠벨의 혐의를 입증할 수 있는 증인은 코르넬리우스뿐이었다.

하지만 코르넬리우스가 증언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당시 다섯 살에 불과했던 코르넬리우스가 그날 있었던 일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경우 배심원들이 얼마나 믿어줄지 의문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코르넬리우스가 살인자 두 명과 또다시 대면하는 일에 극도의 공포를 나타냈던 것이다.
하지만 비고네스 검사는 포기하지 않았다. 비고네스는 코르넬리우스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코르넬리우스가 심리적으로 안정을 찾도록 해주는 한편, 동생을 위해서라도 법정에서 진실을 밝혀야 한다며 코르넬리우스를 설득했다.

코르넬리우스는 마침내 용기를 내 법정에 섰다. 평소 농구와 함께 책읽기를 가장 좋아하는 소년이었던 코르넬리우스는 두 살인자의 얼굴을 마주보며, 배심원들에게 책을 읽어주듯이 그해 여름에 있었던 일을 또박또박 설명해줬다. 정의는 승리했다. 2년여의 재판 끝에 에이브러햄과 캠벨은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두 살인자는 절망으로 고개를 떨궜다.

살인자는 죗값을 치렀지만 살아남은 자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코르넬리우스는 부모의 사랑이 가장 필요한 나이에 엄마로부터 ‘너는 필요 없는 녀석이야. 너 같은 녀석은 죽어버려야 해’라는 말을 들으며 학대받아왔다. 다섯 살은 엄마가 검은 것을 희다고 하면 희다고 믿는 나이다. 이제는 더 이상 그런 말을 듣지 않아도 됐지만, 어린 코르넬리우스는 자신이 계속 살아가도 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코르넬리우스는 극도로 조용하고 주위에 무관심한 아이가 되었다.
비고네스 검사도 코르넬리우스가 법정에 서야 할 이유를 설명해줄 수는 있었지만, 어째서 계속 살아가야 하는지, 살아가는 게 세상에 무슨 도움이 되는지 설명해줄 수는 없었다. 비고네스는 살인에서 재판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심층 취재한 시카고 트리뷴의 밥 그린 기자와 함께 코르넬리우스에게 웃음을 찾아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굳게 닫힌 문을 여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린 기자는 시카고 불스 프런트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코르넬리우스가 농구를 좋아한다니 일요일에 열리는 마이애미 히트와의 경기를 볼 수 있게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이미 그날 경기는 매진되었지만 특별히 자리를 마련해주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1990년 4월 1일, 코르넬리우스는 그린, 비고네스와 함께 태어나서 처음으로 시카고 스타디움을 찾았다.

아무리 마음의 문을 닫았어도 코르넬리우스는 한창 호기심 많은 여덟 살이었다. 하물며 코르넬리우스는 지금 마음속의 신전이었던 시카고 스타디움에 와 있는 것이다. 경기장 복도를 걷고 있는 지금도 자신이 걷고 있는 곳이 시카고 스타디움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비고네스와 그린이 코르넬리우스를 라커룸 앞으로 데려가는 동안, 코르넬리우스는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로 경기장 구석구석을 돌아봤다. 하지만 문이 열리고 정장을 입은 한 남자가 걸어나오는 걸 본 순간, 코르넬리우스는 입을 크게 벌릴 수밖에 없었다. 입뿐 아니라 눈도 놀라움과 경이로움으로 가득 찼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눈앞에 마음속 신전의 주인이 서 있었던 것이다.
코르넬리우스는 입을 뻐끔거리며 뭔가를 말하려 했지만 도무지 제대로 된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남자가 먼저 말을 걸어야 했다.


“안녕, 코르넬리우스. 나는 마이클 조던이다.”

조던은 무릎을 꿇고 앉아서 조용히 얘기를 시작했다. 몇 가지 조크를 섞어가며 농구 이야기를 들려줬지만 결코 대답을 재촉하지는 않았다. 코르넬리우스가 겪었던 일을 위로하지도 않았다. 신문에서 코르넬리우스와 레티의 이야기를 읽고 코르넬리우스가 불스 경기를 보러 온다는 소식을 듣자, 구단 관계자에게 부탁해서 이 모든 것을 준비한 조던이었이다. 조던은 코르넬리우스를 도울 계획을 나름대로 생각해놓고 있었다.
경기 준비를 위해 라커룸으로 들어가면서, 조던은 코르넬리우스에게 말했다. “오늘 우리 팀을 응원해주지 않을래? 우리가 이기려면 너의 도움이 필요하단다.”

그날 불스는 코르넬리우스의 도움을 정말 많이 필요로 하는 것 같았다. 불스의 붉은 저지를 입은 코르넬리우스는 다른 볼보이들과 함께 선수들이 연습하는 동안 정신없이 볼을 챙겼고, 마침내 경기가 시작되자 불스 벤치에 앉아서 경기를 지켜봤다. 코르넬리우스에게 주어진 자리는 조던 바로 옆자리였다. 조던이 벤치에서 쉬는 동안 코르넬리우스는 조던 옆에 앉아 있다가, 조던이 다시 코트로 들어가면 조던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경기는 불스가 리드를 잡은 가운데 마이애미의 거센 추격이 이어졌다. 하지만 언제나와 같이 조던이 경기를 끝냈다. 이날 69%의 야투율로 47득점 6리바운드 7어시스트 3스틸 3블록슛을 기록한 조던은 경기 막판 승부를 결정짓는 강력한 슬램덩크를 꽂아넣었다. 그리고 불과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는, 그날 하루 종일 ‘필요한 사람’이었던 코르넬리우스가 기쁨에 겨워 마구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경기가 끝난 후 그린은 기자 생활 처음으로 불스 라커룸으로 향했다. 그린 역시 불스 경기를 본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항상 수많은 기자들에 둘러싸여 있던 조던은 모든 인터뷰를 끝내고 막 짐을 챙겨 라커룸을 빠져나가려 하고 있었다. 라커룸 문 쪽으로 걸어오던 조던은 그린을 발견하고 발걸음을 멈췄다. 그린은 조던에게 말했다.

“오늘 당신이 해준 일을 코르넬리우스가 얼마나 고마워하고 있는지 말해주려고 들렀습니다.”

그 말을 들은 조던은 한참동안 말없이 서있었다. 조던은 그에게 그런 감사를 한 후 새로운 부탁을 하려 했던 사람들을 많이 만나봤던 것이다. 그린을 한참이나 지켜보고 있던 조던이 말했다.

“그냥 그 말을 하려고 온 겁니까?”
“음, 당신이 선물한 하루가 코르넬리우스에게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잘 모르는 것 같군요.”
“아뇨, 저는 단지 당신이 그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내려온 것에 놀랐을 뿐입니다.”

그린은 미소지으며 대답했다.“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우리 어머니가 절 죽이려 했을 겁니다. 우리 어머니는 저를 올바르게 자라도록 키우셨거든요.”
조던도 웃으며 말했다.“우리 어머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린이 조던과 악수를 나누고 돌아서는데 조던이 물었다.

“경기장에는 자주 오십니까?”

“아뇨, 오늘이 처음입니다.”

“흠, 그럼 꼭 다시 한번 오세요.”


그날의 경험이 코르넬리우스에게 온전히 행복을 가져다준 것은 아니다. 코르넬리우스는 친아버지와 함께 살게 됐지만 친아버지 역시 코르넬리우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코르넬리우스를 사랑으로 돌봐줄 양부모가 나타날 때까지 코르넬리우스는 보호시설에서 살아야 했다.
하지만 이제 코르넬리우스는 더 이상 왜 사는지 모르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는 필요한 사람이었으니까. 코르넬리우스 마음속 신전의 주인이 그렇게 말해줬으니까. 그날 시카고 스타디움에서의 경험은 코르넬리우스에게 어떤 역경에도 맞서 싸울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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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고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한 코르넬리우스는 노던 일리노이 대학에 입학, 컴퓨터 공학도의 길을 선택했다. YMCA 시카고 지부 청소년 상담 분과는 학대를 딛고 어린이에게 희망을 준 사람에게 주는 ‘코르넬리우스 S. 에이브러햄 상’의 첫 수상자로 코르넬리우스를 선정했다.

플레이오프라는 전쟁터에 임하게 될 전사들이여, 명심하라. 그대들이 써나갈 이야기는 그대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누군가는 그대들의 모습을 보고 삶을 살아갈 용기를 얻을 수도 있다. 그대들은 그들 마음속 신전의 주인으로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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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그대들의 마음속에 있는 마이클 조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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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COLUMNS/HELTANT79 2009. 3. 11. 01:16

두 번째 기적을 꿈꾸는 오스틴 카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이번 시즌 창단 이래 최고의 성적을 기록하고 있는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는 관심도와 상업적인 성공 면에서도 커다란 발전을 이루고 있다. 대부분의 홈경기가 매진사례를 이루고 있는 캐벌리어스는 평균 20,477명의 홈 관중 수를 기록, 이 추세대로라면 구단 역사상 한 시즌 최다 홈관중 기록을 경신하게 된다. 그들 중 27%는 클리블랜드가 속한 오하이오 주 밖에서 온 관중이다. 창단 40여 년 만에 드디어 전국적인 관심을 받는 팀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캐벌리어스에게 클리블랜드와 오하이오 주의 팬들이 보내는 성원은 훨씬 더 열광적이다. 2008년 오하이오 주의 케이블 TV 프로그램 중 가장 점유율이 높았던 프로그램은 폭스 스포츠 오하이오에서 방송하는 캐벌리어스의 경기였다. 8.2에 이르는 시청자 지수는 리그 평균보다 2.4배나 높으며, 13%의 점유율은 미국 최고 인기드라마인 ‘LOST'보다도 높은 수치다. 우리나라에 비유하자면 울산에서 울산 모비스의 농구경기 시청률이 ’아내의 유혹‘보다도 높은 것과 같다.

보다 많은 팬들이 캐벌리어스의 경기를 시청하게 되면서 클리블랜드 지역방송에서 캐벌리어스 경기 해설을 맡고 있는 오스틴 카(Austin Carr)의 인기도 함께 높아지고 있다. 재즈 가수를 연상시키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대놓고 편파방송을 하는 카는 자신만의 독특한 추임새로도 유명하다. 예를 들어 캐벌리어스 선수가 슬램덩크를 성공시키면 ‘Throws the hammer down(해머를 내리칩니다)!' 하고 소리친다. 블락을 하면 ’Get that weak stuff outta here(엉덩이 이리 대)!‘, 3점을 성공시키면 ‘Deep at the Q(퀴큰 론즈 아레나 깊숙한 곳에서 성공)!'이다. 르브론 제임스에게 ’L-Train'이라는 별명을 처음 붙인 것도 카다.

Cleveland Cavaliers announcer Austin Carr

오스틴 카가 직접 들려주는 'L-train! Throws the hammer down!'


카의 독특한 멘트는 오하이오 지역에 수많은 팬들을 만들어냈다. 심지어 클리블랜드에서는 ‘오스틴 카 술 마시기 게임’이라는 게임도 유행하고 있다. 친구들끼리 캐벌리어스 경기를 보면서 카가 특정 멘트를 할 때마다 술을 ‘원샷’ 하는 것이다. ‘Shoot Boobie, shoot!' 이란 멘트에는 두 잔, ’What in the world is going on!‘에는 넉 잔 하는 식이다. 경기 중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라디오 뉴스를 통해 그런 게임이 있다는 사실을 안 카는 팬들에게 새로운 즐거움을 준 것을 기뻐했다.

올해로 39년째 캐벌리어스와 인연을 맺고 있는 카는 클리블랜드를 대표하는 스포츠 스타다. 처음에는 선수로, 은퇴 후에는 구단 홍보 담당자와 TV 해설자로, 또한 지역사회사업가로, 카는 언제나 클리블랜드 시민들과 함께 해왔다. 한 세대가 넘는 오랜 시간 동안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카와 클리블랜드 시민들이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추억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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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농구 최고의 득점기계

오스틴 카는 1948년 3월 10일, 국방성 자재부 직원인 아버지와 간호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카의 부모님은 다섯 자녀를 엄격한 가톨릭 방식으로 키웠고, 카는 주위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는 예의바른 아이로 자랐다. 부모님의 직장이 있던 워싱턴 D.C.에서 소년시절을 보낸 카는 그리 크지 않은 키에도 불구하고 민첩한 몸놀림과 정교한 슈팅으로 고교 농구계를 주름잡았다. 고등학교 마지막 학년에 아티스 길모어 등과 함께 All-America에 선정된 카는 체육 특기자로 대학에 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카의 아버지는 집에 밀려든 수많은 대학홍보물 중에서 노트르담 대학과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을 놓고 고민했다. 그는 자신의 능력에도 불구하고 학력 부족 때문에 번번이 승진 인사에서 탈락했던 아픔을 가지고 있었다. 아들에게는 똑같은 아픔을 맛보게 하고 싶지 않았던 그는 아들을 엄격한 가톨릭 학풍을 지닌 노트르담 대학으로 진학시키기로 했다.

카는 아버지의 바람과는 달리 첫 학기에 신통찮은 성적에 그쳤다. 처음으로 가족과 멀리 떨어져서 생활하게 된 데다 모든 것을 혼자서 계획해야 하는 대학 생활에도 적응하지 못했던 것이다. 곤경에 빠진 카에게 손을 내민 것은 교수들이었다. 교수들은 카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을 뿐 학습능력도 의지도 부족하지 않은 학생이라는 것을 알고 카가 공부에 집중할 수 있도록 여러 모로 배려해줬다. 마음을 다잡은 카는 점점 성적을 올리기 시작했고, 경제학사 학위를 받은 졸업학기에는 우등생 명단에까지 들었다.

카는 대학농구에도 순조롭게 적응했다. 당시에는 1학년이 경기에 뛸 수 없었기 때문에 카의 NCAA 데뷔는 2학년에 이루어졌는데, 이때부터 3년 동안 카는 장거리 슈터임에도 불구하고 60%의 야투율로 경기당 34.5점을 올리는 최고의 대학 스타로 성장했다. 신장은 193cm로 그렇게 크지 않았지만 이를 상쇄할 만한 민첩성을 가지고 있었고, 오늘날의 3점슛 라인보다 훨씬 먼 곳에서 마치 레이업을 넣듯이 꽂아넣는 폭발적인 장거리 슛은 카를 막을 수 없는 득점기계로 만들어 주었다. 카는 3학년과 4학년 시즌에 각기 1,000득점 이상을 올렸는데, 그때까지 한 시즌에 1,000득점을 올린 대학선수는 피트 마라비치 뿐이었다.

카의 득점력은 플레이오프 같은 중요한 경기에서 더 빛을 발했다. 1970년 NCAA 토너먼트에서 카는 오하이오 대학을 상대로 무려 61점을 몰아넣었는데, 이는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NCAA 토너먼트 한 경기 득점 기록이다. 카는 이날 경기에서 한 경기 최다 야투성공(25개) 및 야투시도(44개)를 기록했으며, 카가 NCAA 토너먼트 7경기에서 기록한 평균 50득점은 앞으로도 깨지기 힘든 불멸의 기록으로 남아있다.

“저도 그 경기를 다시 보고 싶은데 경기 영상을 구할 수가 없군요. (그 경기를 중계한) CBS 방송국 여러분, 경기 영상이 남아있으면 보내주시겠습니까? 우리 아이들에게 제 한창때 모습을 보여주고 싶군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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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올해의 대학 선수상을 수상한 카는 대학 시절 통산 2,560득점으로 역대 통산득점 5위의 성적을 남겼고, 훗날 대학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이제 남은 것은 NBA 도전 뿐이었다. 대학 농구 영웅 카는 1971년 드래프트에서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에게 1순위로 지명되며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신생팀의 희망, 그리고 부상

클리블랜드는 카가 지명되기 1년 전 리그에 가입한 신생팀이었다. 당시 클리블랜드 시는 파산상태였고, 클리블랜드의 젊은이는 일자리를 찾아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다. 클리블랜드 출신 사업가이며 MLB 구단인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소유주기도 했던 닉 말리에티는 스포츠를 통해 시민들의 자긍심을 높이려 했고, 마침 NBA에서 팀을 늘리려고 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곧바로 유치 신청을 했다.

팀 유치 목적이 클리블랜드 시민 단합이었기 때문에, 클리블랜드의 신생팀은 처음부터 철저하게 지역 사회와의 유대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말리에티는 신생팀 이름을 시민 공모로 결정하기로 했고, 14,000여 개의 응모작 중 기병대(Cavaliers)를 신생팀의 이름으로 정했다. 개척시대에 인디언과 미국 기병대가 클리블랜드 지역에서 사투를 벌였던 역사에 착안한 것이었다. 유니폼 색깔도 클리블랜드에 위치한 말리에티의 모교인 존 애덤스 고등학교 유니폼의 색깔을 그대로 정했다. 오늘날 캐벌리어스의 별칭이자 특별한 경기에 입고 나오는 '와인 앤드 골드‘ 유니폼이다. 말리에티는 자신의 모교인 보울링 그린 대학교 농구 코치였던 빌 피치를 단장겸 감독으로 영입하면서 ’시민 친화형 구단‘ 구성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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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말리에티의 기대와는 달리, 혹은 예상대로, 신생팀 캐벌리어스의 시작은 처참했다. 1970-71시즌, 캐벌리어스는 15승 67패의 성적으로 리그 꼴찌를 기록했다. 함께 창단된 버펄로 브레이브스보다도 7승이나 뒤진 성적이었다. 관중 동원도 뒤에서 두 번째였다.
하지만 모든 일이 나쁘기만 할 수는 없는 법. 최악의 성적은 최고의 신인지명순위로 연결됐고, 캐벌리어스는 1971년 1순위 지명권을 획득하게 됐다. 오스틴 카는 바로 이 1순위 지명권으로 구단의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프로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카의 프로 생활은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카는 프리 시즌에 다리가 부러지며 데뷔전을 미뤄야 했다. 한 달 후에 복귀했지만 이번에는 반대쪽 발을 다쳐 또다시 7주간 치료를 받아야 했다. 결국 첫 시즌을 제대로 치르게 된 것은 시즌이 반 가까이 지난 후였다. 카의 선수경력 내내 발목을 잡았으며, 이후 캐벌리어스 출신 선수들에게 지긋지긋하게 따라붙게 되는 부상의 시작이었다.

일단 뛰기 시작하자 카의 득점력은 금세 두각을 나타냈다. 부치 비어드와 함께 백코트를 이룬 카는 43경기를 소화하며 팀 내 최다인 경기당 21.2득점을 올렸다. 출장경기 수 부족으로 포틀랜드의 시드니 윅스에게 신인왕을 넘겨줬지만 올 루키 퍼스트 팀에 들기에는 충분한 성적이었다.

이듬해인 1972-1973시즌 캐벌리어스는 비어드를 시애틀로 보내고 베테랑 민완가드인 레니 윌킨스를 영입했다. 훗날 캐벌리어스와 드림팀 III의 감독을 역임하며 명예의 전당에 오른 윌킨스는 당시 35세의 노장이었지만 올스타에 8번이나 오른 적이 있는 명가드였다. 카와 윌킨스는 멋진 조화를 이루며 40.1점과 11.8어시스트를 합작했고, 팀 성적도 3년 연속 상승세를 보였다. 카는 윌킨스를 보면서 득점을 하지 않고도 팀에 공헌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워나갔다. 이듬해 노쇠 기미를 보인 윌킨스 대신 팀을 이끌게 된 카는 커리어 최다인 21.9점과 3.6리바운드, 3.8어시스트를 올리며 마침내 올스타에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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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1975시즌을 앞둔 캐벌리어스는 어느 때보다도 기대에 들떠있었다. 카와 포워드 빙고 스미스가 네 시즌째 호흡을 맞추며 탄탄한 기반을 이루고 있었고, 윌킨스가 팀을 떠났지만 짐 클레몬스가 훌륭히 포인트가드 자리를 이었기 때문이다. 캐벌리어스는 또한 ABA 파산 드래프트로 센터 짐 쵼스를, 트레이드로 베테랑 스윙맨 딕 스나이더를, 드래프트로 캠피 러셀과 푸츠 워커를 영입하는 등 알찬 전력보강을 했다. 홈구장도 최신 시설을 갖춘 리치필드 콜로세움으로 옮겼다.
캐벌리어스는 시즌 첫 경기를 4차 연장 끝에 분패하는 등 3연패로 시즌을 시작했지만, 이후 연승 가도를 달리며 팀 역사상 처음으로 5할 이상의 승률을 올리고 있었다.

불행이 닥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캔사스 시티와의 홈경기에서 카가 치명적인 무릎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대수술을 받은 카는 시즌 막판 복귀했지만, 이미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폭발적인 운동능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뒤였다. 나머지 선수들이 분전한 캐벌리어스는 휴스턴 로케츠와 마지막까지 플레이오프 진출을 놓고 경합을 벌였지만,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단 한 점 차이로 분패, 역시 단 한 경기 차이로 창단 이후 첫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카 개인에게는 참담한 한 해였지만 캐벌리어스에게는 가능성을 보인 한 해였다. 창단 이후 줄곧 팀을 이끌어온 빌 피치 감독은 모든 선수들이 공격과 수비에 참가하는 농구를 추구했고, 피치 감독의 이러한 철학은 지난 5년간 팀에 완전히 녹아들었다. 대부분 젊은 선수들로 이루어진 로스터에는 다재다능한 선수들이 많았고, 피치 감독이 단장까지 맡고 있던 프런트 역시 전력강화를 위한 노력을 그치지 않았다.

구단주 말리에티 역시 캐벌리어스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스포츠를 통해 ‘파산 도시’ 클리블랜드의 자긍심을 높이고자 노력한 말리에티의 꾸준한 노력은 1974년 리치필드 콜로세움 완공으로 그 결실을 보았다. 이전 시즌까지 홈 구장이었던 클리블랜드 아레나는 관중석이 8,000여 석에 불과한 낡은 경기장이었다. 이런 구장에서는 관중을 모을 수 없겠다고 생각한 말리에티는 클리블랜드 외곽 20여 킬로미터에 있는 부지를 매입해 다목적 대형 구장을 짓기 시작했다. 농구장 기준 20,273석의 관중석을 보유한 리치필드 콜로세움은 농구뿐 아니라 아이스하키, 콘서트 등 여러 목적으로 쓰일 수 있었으며, 귀빈석을 도입한 최초의 실내 경기장이기도 했다.

말리에티는 새 구장을 홍보하기 위해 처음부터 큰 이벤트를 많이 개최했다. 개관식을 겸해 프랭크 시내트라 콘서트를 유치했고, 이듬해 당대 최고의 복서 무하마드 알리와 애송이 척 웨프너간에 펼쳐진 대혈전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무명 배우였던 실베스터 스텔론은 TV로 이 경기를 시청한 후 영감을 얻어 ‘록키’의 대본을 썼고, 자신이 직접 주연을 맡으며 스타덤에 오르기도 했다.

캐벌리어스 역시 새 경기장에서 새로운 모습을 보이며 점점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이전 시즌까지는 8,000석 작은 경기장의 반도 채우기 힘들었지만, 리치필드 콜로세움에서 치른 첫 시즌에는 그 두 배의 관중을 모았다. 팀 전체가 활력에 차있었고, 누구나 다음 시즌을 기대했다.


마지막 퍼즐 조각 써몬드

기대와는 달리 캐벌리어스의 1975-1976시즌 초반은 그리 좋지 못했다. 공수 모두 안정적인 경기를 하는데도 번번이 2%가 부족한 모습을 보이며 6승 11패에 그쳤다. 그 이유를 쵼스 혼자서 맡고 있던 빅맨진의 부족에서 찾은 피치 감독은 트레이드로 훗날 명예의 전당에 오르게 되는 네이트 써몬드를 영입했다. 리치필드 콜로세움에서 불과 30여 킬로미터 떨어진 애크런에서 태어난 써몬드는 당시 34세로 오랜 시간을 뛰지 못하는 노장이었지만, 바로 전 시즌 리그 역사상 최초로 쿼트러플 더블을 기록할 정도로 능력 있는 선수였다. 피치 감독은 선발로 쵼스를 30분 가량 기용하면서 나머지 18분을 써몬드가 책임져주길 기대했다.

써몬드는 피치 감독의 기대에 잘 부응했다. 아니, 기대를 훨씬 뛰어넘었다. 써몬드는 캐벌리어스 센터진의 18분을 책임졌을 뿐만 아니라 라커룸에서 최고의 리더 역할을 해냈다.
카의 회상에 따르면, 처음 팀에 합류한 써몬드는 라커룸에 들어서자마자 후배들을 모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희들은 너희들이 얼마나 뛰어난 선수들인지 모르고 있어. 이제 힘을 모아 뛰기만 하면 돼. 내가 앞으로 우승을 위해 뛸 수 있는 시간은 1,2년에 불과하겠지만, 여기서는 우승할 수 있을 것 같아.”

캐벌리어스 선수들은 산전수전 다 겪은 대선배의 격려에 큰 자신감을 얻었고 서로를 믿기 시작했다. 그리고 코트 위에서 그러한 믿음을 남김없이 표출했다. 캐벌리어스는 이후 승리를 거듭하며 전반기를 21승 20패로 마쳤다. 후반기로 접어들자 캐벌리어스의 상승세는 최고조에 달했다. 캐벌리어스는 후반기에만 28승 13패를 거두며 리그 최고 성적을 올렸고, 49승 33패의 성적으로 창단 이후 첫 디비전 우승을 차지했다.

1975-1976시즌의 캐벌리어스는 팀 플레이의 극한을 보여줬다. 최다득점자인 쵼스의 평균득점이 15.8점에 불과했지만, 그해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한 피치 감독이 주로 기용한 9명중 7명이 두 자릿수 득점을 올린 것이다. 모든 선수들이 팀을 위해 개인을 희생했다. 슈팅 갯수나 득점, 출장시간 등에 대해 불평하는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카도 팀을 위해 식스맨 자리를 자청, 생애 최저인 경기당 19.7분 출장과 10.1득점에 그쳤지만, 중요한 순간마다 벤치에서 나와서 득점을 성공시켰다.

캐벌리어스 선수들의 동료애는 코트 밖에서 더 잘 나타났다. 선수들은 경기가 끝난 후에도 항상 함께 다녔다. 피치 감독이 쉬는 날 선수들을 소집할 일이 있으면 전화를 한 통만 걸면 될 정도였다. 어차피 전화 거는 곳에 전원이 모여있었기 때문이다.

캐벌리어스의 선전은 클리블랜드를 비롯한 오하이오주 북동부 주민들의 폭발적인 지지를 얻어냈다. 평균 관중 수는 지난해에 비해 또다시 50% 증가한 12,000여 명을 기록했고, 팬들은 클리블랜드의 새로운 자랑거리로 캐벌리어스를 꼽기 시작했다. MLB의 대표적인 약체 팀인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나 최악의 성적을 내고 있던 NFL팀 클리블랜드 브라운스 대신 캐벌리어스가 클리블랜드를 상징하기 시작한 것이다. 젊은이들의 캐벌리어스에 대한 사랑은 광적이었다. 암울한 지역 경제 때문에 방황하던 그들은 ‘젊은 캐벌리어스‘의 선전에서 자신들의 희망을 발견한 것이다.

열정적인 구단주와 우수한 감독, 팀워크로 똘똘 뭉친 선수들, 그리고 열광적인 팬들까지. '기적'을 위한 모든 요소가 갖춰졌다.


'리치필드의 기적'
 
창단 후 처음으로 플레이오프 무대를 밟은 캐벌리어스가 1라운드에서 마주친 상대는 워싱턴 불리츠였다. 그해에는 비록 48승에 그쳤지만, 불리츠는 바로 전 시즌만 해도 60승을 올리며 파이널에 올랐던 강팀이었다. 윌트 체임벌린과 함께 신인왕과 MVP를 동시 수상한 유이한 선수인 웨스 언셀드를 중심으로, 훗날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엘빈 헤이스와 데이브 빙이 언셀드를 보조하고 있었다. 정규시즌 성적은 캐벌리어스가 앞섰지만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워싱턴의 승리를 점쳤다.

하지만 캐벌리어스의 팬들은 생각이 달랐다. 리치필드 콜로세움에서 벌어진 1차전은 19,974명의 관중이 몰리며 플레이오프 관중동원 신기록을 세웠다. 비록 캐벌리어스가 95-100으로 분패하긴 했지만, 팬들은 클리블랜드의 자랑에게 아낌없는 성원을 보냈다. 캐벌리어스도 팬들의 성원에 화답하듯 2차전에서 짜릿한 역전승을 거뒀다. 워싱턴에서 벌어진 2차전에서 캐벌리어스는 종료 6초전까지 79-78로 뒤졌으나 종료 직전 터진 빙고 스미스의 장거리 슛으로 한 점차 승리를 거뒀다. 스미스의 슛이 림을 가를 때 오늘날까지도 캐벌리어스의 라디오 중계 캐스터로 일하고 있는 조 타이트는 ‘빙고!’라고 소리쳤다. 본명이 로버트인 스미스에게 ‘빙고’라는 별칭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기세를 탄 캐벌리어스는 홈에서 펼쳐진 3차전에서도 낙승을 거뒀으나 4차전 원정에서 패하며 시리즈 전적 2-2 동률을 이뤘다.

클리블랜드에서 열린 5차전도 마지막까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명승부였다. 캐벌리어스는 종료 7초전까지 90-91로 뒤진데다 엘빈 헤이스에게 자유투까지 내줬지만, 헤이스는 클리블랜드 관중들의 필사적인 방해공작(?) 때문인지 두 개의 자유투를 모두 실패했다. 캐벌리어스는 타임아웃 후 시도한 공격에서 2차전의 영웅 스미스가 에어볼을 던졌으나 베이스라인을 파고든 짐 클레몬스가 천금같은 공격리바운드를 잡아낸 후 버저비터 리버스 레이업까지 성공시켰다. 92-91, 캐벌리어스의 승리였다.

워싱턴도 홈에서 열린 6차전을 연장 끝에 잡아내 시리즈 전적 3-3. 양팀 모두 벼랑 끝에 선 가운데 운명의 7차전이 다가왔다.

4월 29일, 리치필드 콜로세움에서 열린 7차전을 앞두고 클리블랜드의 팬들은 캐벌리어스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기로 한 것처럼 보였다. 카는 그날의 열정적인 성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경기 시작이 두 시간이나 남았는데도 수천 명의 팬들이 이미 입장해 있었어요. 그리고 두 시간 내내 연습하는 우리들에게 ‘우리는 캐브스를 원한다’며 응원을 보내줬죠. 저는 클리블랜드에서 40년 가까이 살고 있지만 그런 열정적인 응원은 본 적이 없습니다.”

경기 시작이 다가옴에 따라 관중들은 계속해서 몰려들었다. 표를 구하지 못한 팬들도 어떻게든 입장하려고 갖가지 방법을 동원했다. 구단 직원들이 제지해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고, 결국 20,273석의 수용인원을 훨씬 넘는 관중들이 통로를 꽉 채운 채 열광적인 응원을 보냈다. 오하이오 북동부의 주민들이 모두 모인 것 같았다. 공식적으로는 그날의 관중 수가 새로운 플레이오프 관중 기록인 21,564명으로 기록되긴 했지만, 실제로 몇 명이 들어왔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들이 외치는 응원의 함성이 어찌나 컸던지, 네이트 써몬드는 그날 녹음한 응원소리를 평생 지니고 다니며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마다 듣곤 한다.

경기는 시종일관 접전 양상을 보였고, 팬들은 점점 더 큰 목소리로 ‘Let's Go Cavs!!!'를 외치기 시작했다. 오늘날 캐벌리어스의 홈구장에서 울려퍼지곤 하는 구호가 바로 이때 탄생했다. 종료 1분 30초 전 85-83으로 앞서고 있던 캐벌리어스는 헤이즈가 5차전에 이어 또다시 자유투 두 개를 모두 실패하며 승기를 잡는 듯 했지만, 9초를 남기고 워싱턴의 필 체니어에게 점프슛을 얻어맞아 동점을 허용했다. 시리즈를 승리하기 위해서는 남은 9초 동안 반드시 득점을 성공시켜야 했다. 타임아웃을 부른 피치 감독은 슈터인 딕 스나이더에게 마지막 공격을 맡겼다. 단, 점프슛이 아니라 드라이브인 공격을 주문했다. 워싱턴 수비진의 의표를 찌르기 위해서였다.

모든 것이 걸린 마지막 공격, 사이드라인에서 클레몬스에게 인바운드 패스를 건네받은 스나이더는 슛을 막으러 나온 언셀드를 제치고 페인트존으로 파고들었다. 스나이더가 4초를 넘기고 던진 한 손 플로터는 백보드를 한 번 맞추고 림으로 빨려들어갔다. 캐벌리어스가 87-85로 앞서는 순간이었다. 워싱턴은 마지막 공격에서 언셀드가 골밑으로 롱패스를 시도했으나 스나이더에게 걸렸고, 체니어가 던진 마지막 슛도 림을 외면했다. 경기를 중계하던 조 타이트가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캐벌리어스 승리! 캐벌리어스 승리!” 플레이오프에 첫 진출한 캐벌리어스가 강호 워싱턴에게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는 순간이었다.

승리가 확정되는 순간 리치필드 콜로세움을 가득 메운 관중들이 코트로 쏟아져들어왔다. 그들은 기쁨의 함성을 지르며 선수들을 끌어안았다. 이미 선수도 관중도 없었다. 놀라운 일체감을 보여주며 서로를 위해 헌신한 기적의 주인공들이 있을 뿐이었다. NBA 역사에 ‘리치필드의 기적’이라 기록되는 캐벌리어스 역사상 최고의 순간이었다.


'리치필드의 기적'

카는 그날의 감격을 떠올리며 지그시 눈을 감는다.
“팬들이 우리가 지는 걸 허락하지 않았어요. 그날 우리가 치른 경기를 기적이라고들 하는데, 진짜 기적은 그날 경기장에 있었던 팬 여러분들입니다. 그런 응원을 받으면 누구든지 힘을 낼 수밖에 없을 겁니다.”

기세가 하늘 끝가지 오른 캐벌리어스는 컨퍼런스 파이널 상대인 보스턴을 맞아 전의를 다지고 있었다. 하지만 크나큰 불행이 캐벌리어스를 덮쳤다. 보스턴과의 1차전을 이틀 앞두고 가진 훈련시간에 주전 센터인 쵼스가 러셀의 발을 잘못 밟으며 발목이 부러진 것이다. 캐벌리어스에게는 너무나 큰 손실이었다. 존 하블리첵과 데이브 코웬스가 이끄는 보스턴에게 쵼스 없이 이기기는 너무나 힘들었다.

캐벌리어스는 보스턴에서 펼쳐진 1,2차전을 예상대로 모두 내줬다. 하지만 기적의 여운은 아직 남아있었다. 클리블랜드에서 펼쳐진 3,4차전에서는 또다시 플레이오프 관중 신기록이 세워졌고, 캐벌리어스는 홈 팬들의 열광적인 응원에 힘입어 3,4차전에서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주전 센터 없이 상대하기에는 보스턴의 골밑이 너무 높았다. 신장의 열세 때문에 시리즈를 계속할수록 체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결국 써몬드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5,6차전을 모두 내준 캐벌리어스는 파이널 진출 일보직전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파이널에서 만날 수도 있었던 피닉스에게는 시즌 전적 3-1로 앞서있었기 때문에 아쉬움이 더했다.

비록 파이널에 진출하지 못하고 보스턴의 우승을 지켜봐야 했지만, 캐벌리어스는 우승보다 값진 것을 얻었다. 창단 6년 만에 클리블랜드의 일부로 자리잡은 것이다. 스포츠를 통해 클리블랜드 시민들의 자긍심을 높이려던 말리에티 구단주의 꿈이 마침내 이루어졌다.

                           1975-1976시즌 '기적의 팀' 캐벌리어스.
                                  아래 왼쪽에서 두 번째가 카


부상, 그리고 은퇴

기적은 한 번만 일어나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일까? 캐벌리어스는 이듬해에도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나 1라운드에서 복수의 칼을 갈고 있던 워싱턴에게 탈락했고 이듬해에도 뉴욕에게 2전 전패로 탈락하는 등 1라운드의 벽을 넘지 못했다. 팀의 구심점이었던 맏형 써몬드는 은퇴했고 캐벌리어스는 더 이상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하는 팀이 되었다. 카는 세 시즌 연속 전경기를 출장했지만 팀의 몰락을 막지 못했다. 결국 1978-1979시즌 30승 52패에 그친 피치 감독이 물러났고, 이듬해에는 팀 자체가 팔렸다. 캐벌리어스에 긴 암흑기가 다가온 것이다. 이후 6년 동안 캐벌리어스는 세 명의 구단주와 아홉 명의 감독이 바뀌어야 했다. 연고지 이전 파동을 두 번이나 겪으며 버림받을 뻔한 팬들도 등을 돌렸다. 한때 만원사례를 이뤘던 리치필드 콜로세움에는 정원의 1/4도 안 되는 관중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캐벌리어스의 암흑기는 1986년 고든 군드가 팀을 인수한 뒤 과거 캐벌리어스 선수였던 레니 윌킨스를 감독으로 앉히고 브래드 도허티와 마크 프라이스를 영입한 뒤에야 끝나게 된다.

어느덧 30대에 접어든 카의 선수인생에도 마지막이 다가왔다. 무릎에 또다시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 카는 선수인생 세 번째로 대수술을 받아야 했다. 의사는 카가 두 발로 설 수 있을 것이란 말 외에는 어떤 긍정적인 약속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카는 포기하지 않았다. 재활치료가 끝난 뒤에도 매일 18kg의 기구를 발에 묶고 들어올리는 훈련을 반복했다. 결국 카는 기적적으로 돌아와 코트 위에서 은퇴할 수 있었다. 비록 그 사이에 댈러스를 거쳐 워싱턴으로 트레이드되는 바람에 정든 홈코트에서 은퇴할 수는 없었지만, 카의 초인적인 재활노력과 감동적인 복귀는 리그의 후배들에게 큰 감동을 줬다.

카는 NBA에서 10시즌간 뛰며 평균 15.4득점 2.9리바운드 2.8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대학 시절 받았던 기대에는 한참 미치지 못한 성적이었지만, 캐벌리어스가 클리블랜드 시민들의 마음속에 정착한 첫 10년을 상징하기에는 충분했다. 캐벌리어스는 카가 마지막 시즌을 끝내기도 전인 1981년 1월 카의 34번 저지를 영구결번시켰다. 카와 영광의 시절을 함께 했던 빙고 스미스와 네이트 써몬드도 캐벌리어스 역사상 단 6명뿐인 영구결번의 영예를 안았다. 오늘날까지도 캐벌리어스 통산 출장경기 5위, 득점 3위, 야투시도 및 성공 1위, 어시스트 8위 등에 올라있는 카는 1999년 클리블랜드 팬들이 뽑은 올타임 캐벌리어스 베스트 5에 선정되기도 했다.


제2의 고향에서 새 인생을 시작하다


비록 선수로써의 인연은 끝났어도 카와 클리블랜드의 인연은 끝나지 않았다. 선수시절부터 클리블랜드에서 사회사업에 헌신해 1980년 NBA가 지역사회에 공헌한 선수에게 주는 ‘월터 케네디 스포츠맨십 상’을 수상하기도 한 카는 은퇴 후에 클리블랜드로 돌아와 제2의 고향과의 인연을 이어갔다. 카는 클리블랜드 아동들을 상대로 농구 교실을 열어 팀플레이 중심의 교육을 했다. 카는 오늘날 사회가 각박해져가고 있는 이유가 어릴 때부터 자신만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며 자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저는 한때 전국 최고의 대학 선수였지만 저 혼자 특별대우를 받거나 연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재능은 신이 주셨지만 그 재능을 연마해 사용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죠. 어렸을 때부터 ‘나는 노력할 필요가 없어’라고 생각하며 자라게 되면 어른이 돼서도 그런 태도를 지니고 살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태도는 함께 살아가야 하는 세상에서는 용납될 수 없죠.”

카는 이런 교육방침을 자신의 가정에도 그대로 적용시켰다. 클리블랜드에서 결혼한 아내 샤론과의 사이에 1남1녀를 두고 있는 카는 자녀들에게 남을 위해 헌신하는 자세를 가르쳤고, 클리블랜드에서 줄곧 자라난 카의 자녀들은 모두 지역 사회를 위해 여러 가지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카가 클리블랜드에서 펼쳐온 사회사업에는 때때로 ‘기적의 해’ 동료들이 함께하기도 한다. 캐벌리어스에는 은퇴 선수들과 전임 구단주가 참석한 가운데 자선 골프대회를 여는 전통이 있다. 카가 은퇴한 후 구단주가 여러 번 바뀌었지만, 댄 길버트 현 구단주를 비롯한 역대 구단주들은 이 전통을 30여 년째 지켜오고 있다. 골프대회에는 핸디 6의 ‘명 골퍼’ 카를 비롯해 말리에티 전 구단주, 빌 피치 전 감독, 빙고 스미스, 네이트 써몬드 등 캐벌리어스의 여명기를 함께 한 전우들이 자리를 빛낸다. 노장들의 대화는 항상 ‘기적의 해’로 거슬러 올라간다. ‘만약 보스턴과의 컨퍼런스 파이널을 앞두고 쵼스의 다리가 부러지지 않았더라면‘ 하는 가정 말이다. 노장들은 한껏 기세를 올린다. “쵼스만 있었으면 우리가 최고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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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단의 심장

카가 클리블랜드에서 펼친 여러 사회사업은 클리블랜드 시민과 카 사이에 굳건한 유대감을 형성했다. 시민들은 카와 함께하며 어려웠던 시절 클리블랜드에 희망을 줬던 ‘기적의 해’를 떠올린다. 그로부터 30여 년, 이제 기적이 이루어졌던 리치필드 콜로세움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캐벌리어스는 1994년 새 구장인 군드 아레나(현 퀴큰 론즈 아레나)로 홈구장을 옮겼고, 사명을 다 한 리치필드 콜로세움은 1999년 클리블랜드 시민의 애도 속에 철거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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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들이 함께한 추억은 와인 & 골드 옛 유니폼을 입은 리그의 새로운 아이콘이 코트를 질주하고 있는 오늘날에도 세대를 건너 이어져오고 있다. 카가 퀴큰 론즈 아레나의 중계석에 앉으면 캐벌리어스 팬들은 따뜻한 박수를 보낸다. ‘기적의 해’를 함께 한 올드팬도, 카의 농구 교실에서 농구를 배운 젊은 팬도 말이다. 팬들은 카 뿐 아니라 클리블랜드 지역방송국에서 하프타임 리포트를 진행하는 캠피 러셀이나 경기 후 라디오 분석을 하는 짐 쵼스에게도 갈채를 보낸다. 캐벌리어스가 어려운 일을 겪었을 때나 큰 도전을 만났을 때, ‘리치필드의 기적’은 선수와 팬 모두의 마음속에서 등불처럼 빛나곤 했다.

‘기적의 해’ 이후 처음으로 센트럴 디비전 왕좌를 눈앞에 두고 있는 오늘날의 캐벌리어스를 카는 어떻게 생각할까?

“무엇보다 선수들의 자부심과 의지가 대단합니다. 모든 스포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죠.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선수들이 잘 어울리고 있습니다. 라커룸 분위기도 최고고요. 마치 ‘기적의 해’ 시절같은 분위기입니다. 이런 팀은 언제든 이길 기회를 갖게 됩니다.”

오스틴 카는 스포츠가 스포츠를 넘어 지역 사회에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 그의 생애를 통해 대답했다. 그는 캐벌리어스의 여명기를 상징하는 선수였을 뿐 아니라 클리블랜드 시민이 어려운 시절에도 잃지 않았던 용기와 희망의 상징이기도 했다.

캐벌리어스 후배들이 마침내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날, 카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캐벌리어스와 함께 할 것이다. 자신과 동료들이 못다 이룬 기적이 이뤄진 현장에서 카만의 푸근한 목소리로 소리칠 것이다.

“Yes! Young men, Boom Boom.... It's 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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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A 트레이드 데드라인이 지났다. 클리블랜드는 마지막까지 논의됐던 샤킬 오닐 영입을 포기하면서, 주전 5명 중 3명을 바꿨던 작년과는 달리 어떤 트레이드도 하지 않은 채 후반기에 임하게 됐다. 아무 것도 얻지 않은 대신 아무 것도 잃지 않은 것이다.

클리블랜드를 둘러싼 여러 가지 루머 중 어제 마지막까지 논의되던 것은 뜻밖에도 오닐을 데려오는 딜이었다. 클리블랜드에서 벤 월러스와 사샤 파블로비치를 보내고 피닉스에서 오닐을 데려오는 딜이었다. 그런데 피닉스에서 저비악, 파블로비치와 J.J. 힉슨 또는 1라운드픽을 제시했고, 클리블랜드 측에서 제3의 팀을 끌어들여보려 했지만 실패하며 협상이 결렬됐다.

이 딜에 대해 필자가 어떻게 느끼는지는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협상과정을 통해 클리블랜드 프런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추론할 수 있다.


첫째, 아무리 클리블랜드라도 무한정으로 돈을 쓸 수 있는 팀은 아니다.

클리브랜드의 현재 총연봉은 약 9,000만 달러로 리그에서 세 번째로 많다. 세계 경제 침체로 리그 전체에 불고 있는 비용 감축 바람은 클리블랜드도 예외가 아니다. 게다가 클리블랜드의 구단주 댄 길버트의 주력 회사인 퀴큰 론즈는 미국발 금융위기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회사다. 구단마다 당장 내년 총연봉을 줄이려 안간힘을 쓰는 바람에 만기계약자의 가치가 이례적으로 뛰어올랐지만, 만기계약자가 아쉬운 것은 클리블랜드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클리블랜드에서 월러스를 제시했는데 피닉스가 월러스 대신 저비악을 원했다는 건 피닉스가 내년에 계약이 끝나는 선수보다는 당장 올해 계약이 끝나는 선수를 원했다는 걸 의미한다. 하지만 클리블랜드는 저비악 트레이드를 거부했다. 이것은 월러스의 선수로서의 가치가 저비악보다 떨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클리블랜드 역시 올해 계약이 끝나는 선수가 필요했다는 뜻이다. 사실 파블로비치 역시 내년 만기연봉 490만 달러 중 보장되어 있는 것은 180만 달러에 불과하기 때문에 만기카드로 봐도 되는데, 클리블랜드는 만기 카드 두 장의 가치가 오닐보다 크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올해 7.3밀의 만기계약자인 스노우의 이름이 이 딜에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스노우의 계약은 부상으로 인한 은퇴가 확정될 경우 대부분을 보험처리할 수 있는 '슈퍼 만기 계약'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클리블랜드는 이 카드를 쓸 생각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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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블랜드가 내년 저비악과 스노우의 연봉 2,000만 달러가 빠지더라도 샐러리캡이 넘음을 들어 어차피 FA를 영입할 수 없을 바에는 이번에 누군가를 데려와야 했다는 의견이 있다. 그런데 클리블랜드는 지금 FA 영입에 신경쓸 여유가 없다. 이번 시즌이 끝나고 옵트아웃이 확실시되는 바레장과의 재계약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미국 경제가 어렵더라도, 바레장의 에이전트인 댄 페건은 최소한 1,000만 달러는 부르고 협상을 시작할 것이다. 클리블랜드로써는 바레장을 잡기 위한 자금을 아껴놓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클리블랜드는 이번 트레이드 시장에서 전력을 보강하기보다는 그 여력으로 현 전력을 보존하는 길을 택한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 클리블랜드는 힉슨을 트레이드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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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 페리 단장에 따르면 클리블랜드에게 오퍼를 넣은 팀 대부분이 힉슨을 달라고 했다. 사실 클리블랜드에서 거의 유일한 유망주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단장들 사이에서 힉슨의 잠재력이 그만큼 인정받고 있다는 뜻도 된다. 그리고 페리는 그런 단장들 중에서도 힉슨에게 가장 큰 기대를 걸고 있는 사람이다. 신인 드래프트 전 워크아웃에서 힉슨과 워크아웃을 가진 페리가 이후 워크아웃 일정을 모조리 취소해버린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페리는 힉슨이 2010년 이후 르브론 제임스의 골밑 파트너가 돼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생각해봐도 힉슨은 클리블랜드의 미래에 반드시 필요한 선수다.

클리블랜드의 최대 강점 중 하나는 벤치에서 나오는 바레장으로, 바레장은 클리블랜드가 보드 장악력과 수비력에서 우위를 보이는 요인 중 하나다. 그런데 바레장이 이번 시즌 종료 후 클리블랜드와 장기계약을 맺으면, 빠르면 다음 시즌, 늦어도 그 다음 시즌에는 주전으로 올라갈 가능성이 높다. 현재 주전인 지드루나스 일가우스카스와 월러스 모두 고령이고 2010년에 계약이 끝나는데다가 1,000만 달러 내외를 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바레장을 벤치에서 내보내긴 아깝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벤치에서 지금의 바레장과 같은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선수는 힉슨 뿐이다.

페리 단장은 르브론과 재계약한 재작년부터 2010년을 계획해온 사람이다. 그런 페리에게 2010년 이후 골밑을 책임져줄 수 있는 힉슨은 쉽게 버릴 수 없는 카드였을 것이다.

셋째, 가장 중요한 점이지만, 페리를 비롯한 클리블랜드 팀 전체가 이번 트레이드 시장에 소극적이었다.

데드라인 종료 후 페리가 한 말이 현재 클리블랜드가 트레이드에 대해 느끼는 바를 가장 잘 표현해준다.

"We felt no pressure to make changes."

실제로 페리나 마이크 브라운 감독이나 선수들이나 트레이드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난 수개월간 저비악 만기카드를 둘러싸고 나온 루머는 거의 모두가 상대팀에게서 나온 것이었고, 브라운 감독이야 원래 트레이드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니 둘째치더라도 선수들중 트레이드를 원하는 선수는 한명도 없었다.

작년 이맘때를 돌이켜보면, 당시에는 팀의 모든 구성원이 트레이드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모두가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래리 휴즈패키지‘, 좋지 않은 팀 캐미스트리, 키드 영입을 강력히 워한 르브론 등, 뭔가 분위기를 바꾸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팀 구성원 모두가 자신감에 차있고 실제로 성적도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고승률을 달리고 있다. 브라운 감독의 전술은 클리블랜드에 온전히 뿌리내렸고 선수들은 서로를 좋아한다. 팀의 알파요 오메가인 르브론은 '현재 팀에 만족한다'며 거듭거듭 만족을 표하고 있다. 과연 이런 팀을 깰 만큼 강심장인 GM이 리그에 몇이나 있을까? 아무리 팀 전력을 높여줄 수 있는 트레이드라도 그것이 팀 캐미스트리를 깰 경우 좋은 결과를 내긴 힘들다. 따라서 페리가 트레이드 시장에 적극적이고 공격적으로 임하기에는 처음부터 많은 제약이 있었다.

그렇다면 데드라인 이전 며칠간 페리가 보인 수많은 움직임은 무엇인가? 필자는 그것들이 전형적인 '되면 좋고 안되면 그만' 류의 움직임이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페리가 제시한 딜들을 보면 정말 딜을 할 생각이 있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황당한 찔러보기가 많았다. 전혀 페리답지 않은 제안들이었다. 페리는 트레이드 데드라인 몇 달 전에는 황당한 얘길 많이 하지만 트레이드 데드라인을 며칠 앞두고는 누구보다도 현실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막판까지 황당한 딜을 계속 제시했다는 건 애시당초 별로 성의가 없었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이에 대해 몇 달 전 페리 단장 자신이 직접 한 말이 있다. 제랄드 월러스 영입 얘기가 막 나올 무렵이었는데, 당시 페리는 시즌 중 트레이드에 대해 '맥시멈급 젊은 슈퍼스타를 데려올 수 있으면 모르되 아니면 별로 움직일 마음이 없다'고 한 적이 있다. 이번 ‘노 딜’은 그 마인드가 데드라인까지 그대로 이어진 것일 뿐이다.

따라서, 애시당초 페리는 팀에 재정압박을 주면서까지 무리수를 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클리블랜드의 전력 보강은 이걸로 끝인가? 필자는 그렇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클리블랜드에는 아직 FA 영입이란 한 수가 남아있다. 특히 빅맨 물량을 보충하기 위해 여러 움직임이 있을 걸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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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생각해볼 수 있는 게 조 스미스다. 뉴올리언즈 호네츠와의 트레이드 불발로 오클라호마 썬더스로 돌아온 후 끝내 트레이드되지 않으면서, 조수미는 바이아웃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아직은 오클라호마를 떠나지 않겠다고 단언하고 있지만, FA로 영입한 선수가 플레이오프에 뛸 수 있는 제한선인 2월 말까지 그것이 유지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만약 스미스가 바이아웃될 경우 여러 우승권 팀들이 스미스를 노릴 걸로 예상되는데, 클리블랜드는 이 싸움에서 실탄을 가장 넉넉하게 보유하고 있는 팀이다.

클리블랜드가 현재 보유하고 있는 익셉션은 총 510만 달러에 달한다. 스미스가 올시즌 받고 있는 480만 달러보다도 많으며 플레이오프 상위시드권 팀들 중에서는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와 함께 가장 많은 축에 속한다. 특히 유력한 경쟁팀인 보스턴보다는 쓸 수 있는 돈이 훨씬 많습니다. 최근 스미스의 목적지로 거론되던 보스턴 셀틱스는 마이키 무어와 스테판 마버리를 영입하면서 전력 보강을 끝냈다. 또한 스미스는 두달 전까지만 해도 'FA가 되면 클리블랜드에서 뛰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510만 달러는 스미스를 데려오기에 부족하지 않은 금액이다.

스미스 다음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카드는 로버트 오리와 크리스 밈이다. 플레이오프에서 수많은 빅샷을 터뜨려 ‘빅샷 랍’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는 오리는 샌안토니오 스퍼스에서 뛴 지난 시즌 이후 한 경기도 뛰지 않고 있다. 파워포워드와 센터를 볼 수 있는 오리가 클리블랜드에 가세한다면 마지막 순간 가동할 수 있는 무기가 하나 더 늘어나게 된다. 오리는 샌안토니오 시절 한솥밥을 먹은 페리 단장 및 마이크 브라운 감독과도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밈은 7피트의 신장을 바탕으로 골밑 수비가 가능하며, 파이널에서 만날 수도 있는 레이커스에서 최근까지 뛰었기 때문에 경기 감각도 살아있는 상태다. 밈은 르브론의 프로 초창기 시절 클리블랜드에서 함께 뛴 경험도 있다.

이번주까지 방출된 선수는 FA 계약 후에도 플레이오프에서 뛸 수 있기 때문에, 클리블랜드의 움직임은 좀더 두고봐야 할 전망이다.

필자는 오닐을 데려오는 것이 클리블랜드의 전력 강화에 큰 도움이 안될 것이라 생각했다. 일가우스카스와 포지션이 겹치며 2:2 수비에 약점을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닐 루머가 돌기 시작한 이후로 오닐이 르브론과 함께 뛸 수도 있다는 생각에 데드라인 전날 잠을 이루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2000년대를 대표하는 선수이며 페니 하더웨이, 코비 브라이언트, 드웨인 웨이드 등 당대 최고 스윙맨과 호흡을 맞춰온 오닐이 2010년대를 대표할 르브론과 함께 커리어 마지막 우승을 일궈내는 모습, 애증의 대상인 코비와 2000년대 최고의 라이벌이었던 던컨과의 마지막 승부..... NBA 팬이라면 누구든 떠올렸음직한 즐거운 상상이다.
하지만 오닐은 클리블랜드로 오지 않았고, 앞으로 올 가능성도 사라졌다. 클리블랜드는 새로운 전력 보강 없이 후반기에 임하게 됐지만, 주전 슈팅가드 딜론테 웨스트를 비롯한 부상 선수들이 복귀하게 되면 최고의 전력을 가동할 수 있게 될 것이다.

NBA 파이널까지 약 4개월, 르브론이 생애 두 번째 도전에서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게 된다면 클리블랜드의 ‘노 딜’은 팬들게서 옳은 선택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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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 브라운 감독은 성공의 기쁨을 동료들과 나눌 줄 아는 사람이다. 클리블랜드에서 감독 경력을 시작한 지 4년 만에 처음으로 올스타전 감독으로 확정됐을 때도 브라운의 이같은 자세는 변함이 없었다.

“올스타전 감독으로 뽑힌 것은 전적으로 팀에게 주어진 상입니다. 선수들이 잘 해줘서 높은 승률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우리 선수들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이같은 영광을 누릴 수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선수들이 그렇게 잘 하게 해준 것이 브라운 본인이라는 것을 클리블랜드의 모든 선수들은 알고 있다. 팀 리더인 르브론 제임스는 브라운은 최고의 코치 중 한 명이며 올스타전 감독 뿐 아니라 올해의 코치상도 브라운이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브라운은 리그에서 선수들과의 관계를 가장 잘 유지하는 감독 중 한 명이다. 구단 자체 방송으로 매주 라이브 쇼를 진행할 정도로 매끄러운 화술과 경기에 많이 뛰지 못하는 가비지 타임 선수들의 열정까지 알아주는 자상함을 지니고 있다. 팀의 5번째 가드인 테런스 킨제이는 브라운의 세심함을 증언할 수 있는 선수다.

"지난 1월 포틀랜드 원정에서 선발 가드진이 일찍 파울트러블에 빠졌을 때 제가 감독님께 '감독님, 제게 기회를 주세요.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어요. 감독님은 그날 경기에는 저를 많이 쓰지 않으셨지만, 다음날 제가 연습하는 걸 눈여겨 보신 후 골든스테이트전에 저를 중용해주셨죠. 감독님께 정말 감사했습니다."

킨제이는 브라운이 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난조에 빠진 모리스 윌리암스를 대신해 11점을 올리며 승리에 큰 공헌을 했다.

선수들의 개인사까지 챙기는 브라운의 자상함은 리그 감독 중 세 번째로 젊은 나이와 짧은 감독 경력에도 불구하고 선수들에게 커다란 안정감을 주고 있다.

브라운의 이같은 친화력은 하루아침에 얻어진 것이 아니다. NBA는커녕 프로 선수 경험도 없는 브라운이 이 자리에 서기까지는 브라운 본인의 엄청난 노력뿐 아니라 훌륭한 스승들의 가르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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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클리블랜드가 속한 오하이오주에서 태어난 브라운은 아버지의 일 때문에 어린 시절을 해외에서 보냈다. 독일 뷔르츠부르크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브라운은 샌디에이고 대학으로 진학해 본격적으로 농구를 시작했다. 같은 해 포틀랜드 대학에 입학한 에릭 스포엘스트라 마이애미 감독과는 신입생 시절부터 라이벌이었다. 누가 많이 이겼을까?

“저희가 더 많이 이겼습니다. 저희가 이길 때마다 에릭이 굉장히 화를 내던 기억이 나네요.”

어느덧 졸업 학기를 맞게 된 브라운은 자신이 NBA에서 뛸 만한 재능이 없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농구에 대한 열정을 멈출 수는 없었기 때문에, 브라운은 행크 에건 감독의 사무실을 찾아 인턴 직원이라도 좋으니 자신이 NBA 팀에서 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물었다. 제자의 열정에 감동한 에건은 자신이 소개해줄 수 있는 NBA 팀들을 이야기해주며 어느 팀에 가고 싶냐고 물었다. 바로 그때 브라운의 눈에 띈 것이 에건의 책상 위에 놓여있던 농구 잡지였다. 표지에는 샌디에이고 대학 선배이며 NBA 선수생활을 하지 않고서도 당시 덴버 너게츠의 단장을 맡고 있던 버니 비커스태프의 사진이 있었다. 비커스태프는 브라운의 롤 모델이었던 것이다. 브라운은 잡지를 가리키며 ‘이 팀으로 보내달라’고 말했다. 브라운의 사회 경력이 시작한 계기가 된 그 잡지를 브라운은 아직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에건의 소개로 덴버 너게츠의 무급 인턴 자리를 얻게 된 브라운은 부모님이 주신 약간의 용돈만 지닌 채 덴버로 향했다. 졸업하려면 아직 한 학기가 남아있었지만 브라운은 개의치 않았다. 처음으로 경험한 프로농구의 세계가 꿈만 같았다. 브라운은 당시 덴버의 홈구장이었던 맥니콜스 아레나에서 살다시피 하며 무시무시한 속도로 구단 업무를 배워나갔다.

브라운의 성실한 업무태도와 농구에 대한 진지한 열정은 직원들 사이에서 금방 화제가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커스태프 단장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비커스태프는 농구에 미친 어린 후배에게 뭔가를 해주고 싶었다. 비커스태프는 대학 마지막 학기를 수료하기 위해 샌디에이고로 돌아가려던 브라운에게 졸업 후 덴버 구단의 정규직 비디오 분석가 자리를 제의했고, 무급임에도 불구하고 성실히 일한 보답으로 자비를 털어 1,500달러의 수표를 끊어주기도 했다. 경영학사 학위를 받고 졸업한 뒤 돌아온 브라운은 연봉 15,000달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브라운의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조건이었다.

“저는 스니커즈와 트레이닝복을 살 수 있을 만큼의 용돈만 벌 수 있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브라운이 당시의 감격을 떠올리며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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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이 처음으로 맡은 업무는 전국 각지의 농구 캠프와 대학을 찾아다니며 유망주들의 경기 모습을 촬영하는 것이었다. 브라운의 열정은 그가 맡은 ‘촬영’ 업무를 금세 ‘촬영 및 분석’ 업무로 바꿔버렸다. 어린 선수들의 플레이 하나하나를 비디오에 담으면서 브라운 나름의 방식으로 농구를 보는 눈을 갖게 된 것이다. 브라운이 제출하는 비디오에는 어느 샌가 브라운 자신이 작성한 스카우팅 리포트가 따라붙게 되었다. 브라운의 스카우팅 리포트가 쓸 만하다고 생각한 댄 이셀 덴버 감독은 브라운을 아예 정식으로 스카우트에 임명했다. 브라운은 덴버에서 5년간 스카우트로 재직하며 경기를 보는 안목을 키워나갔다. 아이러니하게도 전통적인 런앤건 팀이었던 덴버에서 브라운이 중점적으로 공부한 부분은 수비였다.

덴버는 브라운에게 직장 뿐 아니라 가정도 선물해줬다. 브라운은 덴버 아가씨인 카롤린과 결혼해서 두 아들을 뒀다. 브라운이 팀을 옮길 때마다 함께 이사를 다니는 이들 가족은 집에서 리틀 리그 운동 경기를 보며 시간을 보내곤 한다.

1997년 비커스태프가 워싱턴 감독으로 부임하며 덴버를 떠나게 되었을 때, 비커스태프는 ‘자기 사람’인 브라운을 떠올렸다. 비커스태프에게서 워싱턴 코치직을 제의받은 브라운에게 불만이 있을 리가 없었다. 브라운은 워싱턴에서 2년간 첫 코치직을 훌륭히 수행해내며 리그에서도 주목받는 젊은 인재로 성장했다.

1999년 워싱턴이 크리스 웨버와 미치 리치몬드를 트레이드하고 비커스태프를 해임하자, 브라운 역시 새로운 자리를 찾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 때마침 1998~1999시즌 우승팀인 샌안토니오 스퍼스의 그렉 포포비치 감독이 브라운에게 코치직을 제의했다. 포포비치는 브라운의 열정과 성실함, 그리고 수비 코칭 능력에 주목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실함을 중시하는 포포비치의 지도철학은 브라운과 꼭 맞았고, 브라운은 샌안토니오에서 본격적으로 코치 경력을 쌓아나가기 시작했다.

당시 샌안토니오에는 데이비드 로빈슨과 팀 던컨이라는 슈퍼스타가 있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한 바람직한 리더십이 팀을 지탱하고 있었다. 65년생인 로빈슨은 70년생인 브라운보다 다섯 살이나 연상이었다. 브라운은 로빈슨이 2003년 우승 반지를 끼고 던컨의 존경과 함께 은퇴하는 모습을 보며 프랜차이즈 스타나 슈퍼스타를 다루는 법, 그리고 그들을 상대로 어디까지 권위를 행사해야 하는지 등을 배워나갔다. 선수들 중에는 스티브 커 같이 팀 운영에 관심있는 노장 선수들도 있었기 때문에 이들과 자주 의견을 교환할 수 있었다. 훗날 클리블랜드에서 단장과 감독으로 다시 만나게 되는 대니 페리와도 이때 처음 만났다. 서머 리그에서는 샌안토니오 서머리그 팀의 감독을 맡으며 처음으로 감독 경험도 쌓았다.

2003년 샌안토니오가 LA 레이커스의 연속 우승을 끝내며 4년만에 우승을 차지한 직후, 브라운은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릭 칼라일 감독에게서 코치직을 제의받았다. 수비에 대한 전권을 위임한다는 조건이었다. 브라운은 제의를 받아들였고, 인디애나에서 리그 최고 성적인 61승과 동부컨퍼런스 파이널 진출에 공헌했다. 브라운이 전권을 위임받은 팀 수비에서 인디애나는 경기당 실점율 85.6점으로 리그에서 세 번째로 적은 점수를 허용했다.

브라운은 샌안토니오와 인디애나에서 강팀을 지도하는 법을 배웠다. 브라운이 코치로 재직하는 동안 브라운의 팀들은 평균 62.9%의 승률을 기록했고 4번의 디비전 우승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가 보고 배운 포포비치와 칼라일은 모두 올해의 감독상을 받은 명장이었다. 브라운은 최고의 팀에서 최고의 스승들에게 ‘이기는 법’을 배운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이기는 노하우’가 브라운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줬다.

2005년 초여름, 브라운은 클리블랜드로 가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신임 구단주였던 댄 길버트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 해 3월에 캐벌리어스를 인수한 길버트는 ‘미래의 아이콘’ 르브론 제임스가 속해있던 캐벌리어스를 대대적인 팀 개편을 통해 리그 엘리트 팀으로 만들려는 계획을 지니고 있었고, 젊지만 경험이 풍부한 코칭스태프를 찾고 있었다. 35세의 브라운은 그런 길버트의 조건에 딱 맞는 상대였다. 브라운과 대화를 나눠본 길버트는 브라운의 성실한 태도와 직업의식, 그리고 코치로서의 식견을 금방 알아보았다. 며칠 후인 6월 2일, 길버트는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17대 감독으로 브라운을 선임했음을 공식 발표했다. 그리고 27일에는 샌안토니오에서 브라운과 한솥밥을 먹었던 대니 페리를 단장으로 영입했다. 클리블랜드의 ‘페리-브라운 시대’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덴버에서 무급 인턴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13년, 브라운이 언제나 꿈꿔왔던 자리에 서게 된 것이다.

클리블랜드는 2003년 르브론이 입단한 후 전력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르브론의 입단과 함께 클리블랜드 감독을 맡았던 폴 사일러스는 채 2년을 못 버티고 팀을 떠났고 감독대행으로 뒤를 이은 브랜든 말론도 오래 버티지 못했다. 르브론과 함께 클리블랜드의 대들보가 될 것 같았던 카를로스 부저는 석연치 않은 과정을 거쳐 유타로 떠나버렸고, 대신 도녤 마셜과 래리 휴즈를 영입하는 등 팀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이런 상황에서 감독으로 부임한 브라운은 ‘우리는 모두 한 가족’이라 선언하고, ‘팀의 화합’을 팀 운영 원칙으로 정했다. NBA 팀 정도 되면 선수들의 재능에는 큰 차이가 없지만 이 차이를 크게 만드는 것은 팀이 얼마나 화합하고 있는지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브라운은 팀 구성원 모두가 자기 위치에서 최고의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도록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에게 최대한 권한을 위임했다. 팀의 중심인 르브론에게는 주장을 맡기며 다른 동료들을 이끌 것을 주문했다. 또한 벤치의 역할과 함께 수비를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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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 효과’는 금세 나타났다. 선수들은 르브론과 터줏대감인 지드루나스 일가우스카스를 중심으로 응집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휴즈같이 끝내 팀에 녹아들지 못한 선수도 있었지만 극소수에 불과했다. 모래알 같던 팀워크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선수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려 했으며, 특히 동료가 놓친 공격수를 대신 막아주는 방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브라운의 감독 첫 해 클리블랜드는 르브론 입단 이후 첫 50승과 첫 플레이오프 진출을 달성했다. 클리블랜드는 플레이오프 2라운드에서 강팀 디트로이트를 맞아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탈락했지만, 브라운의 클리블랜드가 보여준 강함은 그동안 감독 경력이 없는 브라운이 팀을 단기간에 강팀으로 만들지는 못할 것이라 말해온 비관주의자들의 입을 다물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듬해 브라운의 농구는 완전히 꽃을 피웠다. 클리블랜드는 경기당 실점율을 지난 시즌에 비해 3점이나 끌어내리며 리그 5위의 수비팀이 되었고, 2년 연속 50승을 거두며 동부 컨퍼런스 2위를 차지했다. 플레이오프에서 워싱턴과 뉴저지를 차례로 물리친 클리블랜드는 1991~1992시즌 이후 처음으로 컨퍼런스 파이널에 진출했다. 상대는 숙적 디트로이트. 클리블랜드는 르브론이 5차전에 믿을 수 없는 대활약을 펼치며 시리즈를 승리, 프랜차이즈 사상 처음으로 파이널에 진출했다. 비록 옛 스승 포포비치의 팀인 샌안토니오를 만나 압도적인 전력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시리즈 전적 4-0으로 완패했지만 부임 2년 만에 플레이오프에도 오르지 못하던 팀을 파이널에 올려놓은 브라운 감독의 지도력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르브론에 의존하는 공격전술의 부재를 지적하는 의견도 있었지만, 브라운은 자신의 신념을 꿋꿋하게 밀고나갔다.

2007~2008시즌은 브라운에게 새로운 도전이 닥친 한해였다. 시즌이 시작하기도 전에 계약 문제로 사샤 파블로비치와 앤더슨 바레장을 잃은 클리블랜드는 시즌 중 블록버스터 트레이드를 단행, 주전 5명 중 3명을 바꾼 것이다. 처음으로 한 팀이 된 선수들은 서로에 대해 완전히 알지 못했고, 특히 팀워크를 기반으로 하는 브라운식 수비에 적응하지 못했다. 브라운이 지난 2년간 쌓아온 것들 중 적잖은 부분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하지만 브라운은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하며 서서히 팀을 진정시켜갔고, 그 해 챔피언을 차지한 보스턴 셀틱스를 플레이오프 탈락 일보직전까지 몰아넣으며 가능성을 보였다. 브라운의 이러한 지도력은 길버트 구단주와 페리 단장이 지난 시즌 중반 브라운과 연장 계약을 체결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브라운의 코칭 철학은 간단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팀의 화합이고 화합은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며 팀 수비를 통해 나타난다는 것이다. 프리 시즌 캠프를 시작하며 브라운이 라커룸 칠판에 크게 적어놓은 말은 ‘팀워크=신뢰’였다.

신뢰는 대화를 통해 쌓여간다. 브라운은 선수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며 문제 해결 방법을 깨닫길 바랐고 프리 시즌 캠프에서도 자신의 말은 최대한 아끼며 선수들의 대화를 유도했다. 그 결과 클리블랜드는 벤치와 라커룸에서 가장 시끄러운 구단이 됐다. 선수들은 경기가 끝난 후에도 라커룸에서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며, 쉬는 날에는 식당과 영화관 등을 떼를 지어 돌아다닌다. 커다란 사내들이 시내를 함께 걷는 모습은 이제 클리블랜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 됐다.

브라운은 아예 팀 운영의 상당 부분을 선수들에게 위임하기도 한다. 클리블랜드의 특징은 감독과 일반 선수 사이에 ‘선수 위원회’라 불리는 대표조직이 있다는 것이다. 브라운은 르브론, 일가우스카스, 벤 월러스, 모리스 윌리암스로 이루어진 이 위원회를 통해 팀 운영 방침을 통보하거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받고 있다. 위원회는 일반 선수들의 의견을 수렴해 선수에 대한 팀내 자체 징계 수위나 원정 숙소 결정, 훈련 일정 등을 건의하고 이런 건의들은 대부분 받아들여진다. 위원회는 때에 따라서는 경기 중에 스스로 행동 지침을 정하기도 한다. 지난 12월 토론토와의 홈경기에서 전반에 난조를 보이자, 브라운은 하프타임 동안 선수들을 라커룸에 남겨둔 채 코칭스태프와 함께 자리를 떴다. 선수들은 비디오를 보며 토의한 끝에 수비 로테이션에서 문제를 발견했고, 선수들이 제안해 받아들여진 새로운 수비 로테이션은 3쿼터 초반 6분 동안 토론토에게 단 4점만 내줬다.

브라운의 권한 위임은 휘하 코치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클리블랜드의 코칭스태프에는 브라운의 대학 시절 은사인 행크 에건을 비롯하여 경험 있는 노장들이 많다. 젊은 축에 드는 코치들도 브라운과 동년배다. 브라운은 이들 코치들에게 각자 위치에서 최대한 넓은 재량권을 주었다. 코치들에게 전권을 부여하고 책임은 자신이 지는 운영 방식은 칼라일에게서 배운 것이다. 클리블랜드 코치들은 이러한 운영 방식 덕분에 자신들의 경험과 창의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다. 그동안 부족함을 지적받던 공격 전술도 과거 래리 브라운 감독 밑에서 공격 전술을 전담했던 존 쿠에스터에게 권권을 위임한 지 3년 만에 큰 결실을 보고 있다.

하지만 브라운이 선수와 코치들에게 모든 것을 맡겨둔 채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순간에는 스스로 판단해 결단을 내리기도 한다. 지난 크리스마스에 펼쳐진 워싱턴과의 홈경기가 좋은 예다.

브라운은 경기 종료 37초를 남기고 한 점을 뒤진 상황에서 공격력이 좋은 일가우스카스 대신 바레장을 넣었다. 모든 사람들이 의아해했지만, 바로 다음 공격에서 딜론테 웨스트가 3점슛을 실패하자 바레장이 빠른 풋워크를 이용해 공격리바운드를 낚아챈 후 파울을 얻었다. 발이 느린 일가우스카스였다면 워싱턴의 박스아웃을 제치지 못했을 것이다. 브라운은 곧바로 대니얼 깁슨을 빼고 월러스를 투입했다. 바레장의 자유투로 역전한 다음 맞은 워싱턴의 공격에서, 월러스는 마지막 공격을 맡은 캐런 버틀러에게 적절히 더블팀을 붙으며 공격자 파울을 유도해내 사실상 경기를 끝내버렸다.

브라운은 이런 적재적소의 용병술을 이번 시즌에만 여러 번 보여줬다. 브라운이 단지 슈퍼스타에 의지하는 감독이 아니며 스스로도 굉장히 우수한 코치라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다.

NBA 선수 경험도 없이 리그의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해서 리그 엘리트 팀의 감독이 된 브라운을 동경하는 젊은 코치 지망생들이 늘고 있다. 17년 전 브라운에게 비커스태프가 그랬던 것처럼 이제는 브라운이 그들의 롤 모델이 되고 있는 것이다. 브라운은 이 모든 것들을 훌륭한 스승 덕분으로 돌린다.

“저는 운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훌륭한 감독 밑에서 많은 것을 배웠죠. 칼라일에게서는 평정심과 권한 위임을, 포포비치에게서는 공/수 전술과 슈퍼스타를 지도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제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은 비커스태프입니다. 그는 아무 것도 증명할 수 없었던 시절 제 열정을 믿어줬고, 그 믿음을 끝까지 지켜줬죠. 비커스태프는 제게 이 업계에서는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는 가르쳐 줬고, 그 가르침이 저를 이 자리까지 이끌었습니다.”

아직 40도 되지 않은 이 젊은 감독의 능력은 이미 수많은 전문가들에 의해 인정받고 있다. 이제는 브라운의 진가를 팬들에게도 인정받을 차례다. 올스타전 감독을 맡은 이번 시즌은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브라운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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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COLUMNS/HELTANT79 2008. 12. 29. 00:57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2008년 10대 뉴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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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블랜드의 2008년이 끝나가고 있다.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고의 성적을 거두며 순항하고 있는 클리블랜드는 28일(이하 현지시각)과 30일 마이애미 히트와의 2연전을 마지막으로 2008년 일정을 마무리하게 된다.

클리블랜드는 두 번의 대형 트레이드를 통해 2005년 이후 이어져오던 시스템을 전면 개편하고 2010년 이후를 위한 포석을 밟아나가기 시작했다. 2008년은 '팀 르브론' 클리블랜드가 진정한 리그 엘리트 팀으로 나아가는 첫 걸음이 된 셈이다.

클리블랜드의 다사다난했던 2008년을 수놓은 사건 10가지를 살펴본다.


10. 2007-2008 플레이오프 2라운드 탈락

우승팀 보스턴을 상대로 7차전 승부를 펼치며 동부 디펜딩 챔피언의 저력을 보여줬지만 끝내 원맨팀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 
1차전 원정경기에서 클리블랜드는 에이스 르브론이 12득점 10턴오버로 철저히 틀어막히면서 패배를 맛보아야 했고 2차전 역시 대패해 조기 탈락하는듯 했다. 하지만 클리블랜드는 홈에서 펼쳐진 3,4차전에서 승리를 거둔 후 5,6차전을 나눠가져 승부를 최종전까지 끌고갔다.
보스턴에서 펼쳐진 운명의 7차전, 르브론은 45점을 올리며 분전했지만 상대팀 에이스인 피어스가 41점으로 함께 폭발하며 힘든 경기를 펼쳤고, 결국 막판 집중력 부족으로 2년 연속 파이널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시즌중 대형 트레이드로 팀워크를 완전히 다지지 못한 클리블랜드에게 '올해의 수비수' 케빈 가넷이 이끄는 보스턴의 수비는 넘기 힘든 벽이었다.


9. 바레장, 파블로비치의 난조-잘못 끼운 첫 단추

2007-2008 시즌이 개막했을 때 클리블랜드의 로스터에는 팀이 2007년 파이널에 진출하는 데 크게 공헌했던 두 선수의 이름이 없었다. 두 명 모두 팀과의 재계약 실패로 경기에 나서지 못한 것이다. 핵심 롤 플레이어인 두 사람의 공백은 클리블랜드의 시즌 운영에 굉장한 부담을 주었다.
앤더슨 바레장의 에이전트는 터무니없는 금액을 요구하기로 악명 높은 댄 페건이다. 페건은 겨우 20분 남짓 출전하는 바레장에게 연간 1,000만 달러를 지급해달라고 요구했는데 이것은 팀으로써는 받아들이기 힘든 금액이었다. 결국 12월 중순에야 복귀한 바레장은 프리 시즌을 소화하지 않은 몸의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부상, 2월의 거의 모든 경기를 결장해야 했다. 바레장의 공백은 32살의 노장 센터 지드루나스 일가우스카스의 체력 부담을 연결되었고, 결국 일가우스카스마저 부상을 겪에 되었다. 바레장이 초래한 클리블랜드 인사이드진의 이러한 부담은 프런트가 월러스와 스미스를 영입하는 블록버스터 트레이드를 단행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파블로비치는 바레장에 비해 빨리 계약을 마무리지어 시즌 초반부터 출장했지만, 연봉 협상 기간 동안 전혀 농구를 접하지 않은 몸은 NBA의 힘든 일정을 견뎌내지 못했다. 결국 부상과 컨디션 난조로 1월 말부터 경기에 나서지 못한 파블로비치는 3월 중순에야 복귀할 수 있었고, 이것은 휴즈를 떠나보낸 클리블랜드 백코트진의 부담으로 이어졌다. 파블로비치는 이번 시즌에도 컨디션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클리블랜드와 2010년까지 계약되어있다. 하지만 바레장은 이번 시즌이 끝나면 FA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얻고 파블로비치는 코칭스태프의 눈 밖으로 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앞으로도 클리블랜드 유니폼을 입게 될지는 미지수다.



8. 르브론, 마침내 생애 첫 득점왕 등극

2007-2008 시즌은 르브론이 또 한 단계 발전한 시즌으로 기록될 것이다. 경기당 30점을 기록하며 데뷔 5년만에 처음으로 득점왕에 오른 르브론은 야투율, 리바운드, 어시스트, 블록슛에서 모두 커리어 하이를 기록하며 개인 기록 면에서는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하지만 이것은 클리블랜드가 그만큼 원맨팀이라는 사실 역시 반증했다. 르브론 외에 확실한 득점원이 없었던 클리블랜드는 시종일관 답답한 경기를 펼쳐야 했고, 리그 득점왕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득점력 빈곤에 시달려야 했다. 게다가 주축 선수들의 잦은 부상과 블록버스터 트레이드로 인한 어수선한 팀 상황은 모두 리더 르브론의 부담으로 연결됐고, 르브론은 시즌이 진행될 수록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번 시즌 완벽하게 정비된 팀에서 확실한 조력자들과 함께 뛰고 있는 르브론은 지난 시즌에 비해 개인 기록이 크게 떨어졌다. 하지만 르브론은 개인 기록에는 연연하지 않는 눈치다. 르브론에게는 4쿼터에 10점씩을 올리면서 힘든 경기를 해야 했던 지난 시즌보다 벤치에서 춤을 추며 동료들을 응원할 수 있는 이번 시즌이 더 행복할 것이다.


7. 기록의 시대-일가우스카스와 르브론의 프랜차이즈 기록 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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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9일은 클리블랜드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같은 날 두 개의 프랜차이즈 통산 신기록이 수립됐기 때문이다. 12월 9일 토론토와의 홈경기에서 르브론은 경기 시작 1분여만에 두 개의 스틸을 기록, 마크 프라이스가 가지고 있던 734개의 통산 스틸 기록을 넘어섰다. 그로부터 20여분 뒤, 이번에는 팀의 터줏대감 일가우스카스가 그날 4개째의 리바운드를 잡아내며 브래드 도허티가 가지고 있던 5,227개의 통산 리바운드 기록을 2위로 밀어냈다.
르브론과 일가우스카스는 클리블랜드의 통산 기록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이름들이다. 르브론은 2월 27일 보스턴 원정경기에서 도허티의 통산 득점 기록(10,389점)을 넘어섰고, 9672점을 기록하고 있는 일가우스카스도 이번 시즌 내로 팀 통산 4번째로 1만점을 돌파할 전망이다.


6. 르브론 올림픽 금메달 획득-더이상 르브론'즈'가 아니다!

르브론이 국제대회 도전 세 번째만에 마침내 우승의 기쁨을 맛봤다. 르브론은 베이징 올림픽의 주전 멤버로 활약하며 미국에 8년만의 금메달을 안겼다.
르브론은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았던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 출전했지만 동메달에 그쳤다. 2년 뒤 미국 대표팀의 공동 주장을 맡아 세계선수권에 출전했지만 이번에도 준결승에서 그리스에 패하며 동메달에 그쳐야 했다. 리그를 대표하는 선수로써 굉장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르브론에게 이번 올림픽은 반드시 우승할 필요가 있는 대회였다. 시즌 MVP 코비 브라이언트와 국제대회 무패 제이슨 키드등 최고의 라인업으로 올림픽에 출전한 미국 대표팀은 매경기 상대를 압도하며 결승에 진출, 스페인을 명승부 끝에 제압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팀 리더 중 한 명이었던 르브론은 대회 평균 18.2득점과 3.6리바운드 4.7어시스트를 기록했고, 팀내 최고인 76%의 야투 성공율과 62.2%의 3점 성공율을 기록했다. 최고의 선수들과 함께 하며 리더로써 한 단계 발전했다고 말하는 르브론은 대표팀에서 얻은 자산을 이번 시즌 소속팀에서 마음껏 발휘하고 있다.


5. 딜론테 웨스트, 우울증으로 팀 이탈-전화위복

10월 중순 웨스트가 팀을 갑자기 이탈했을 때 팬들은 우려 섞인 시선으로 그를 기다렸다. 팀에서는 웨스트의 이탈 이유를 발표하지 않았기 때문에 온갖 소문들이 돌아다녔다.
사실 웨스트는 우울증을 앓아오고 있었다. NBA 선수가 된 다음에도 우울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팀 자체 청백전을 뛰고 있었던 웨스트는 갑자기 심판과 크게 싸우기 시작했고, 우울증이 심각해졌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치료를 위해 팀을 떠났다.
웨스트가 우울증과 싸운 2주 동안 클리블랜드의 팀 동료들은 수시로 전화를 걸어 그를 염려해줬다. 또한 웨스트 스스로 밝힐 때까지는 웨스트의 증상을 언론으로부터 철저히 감싸줬다. 마침내 우울증을 극복하고 시즌 개막 직전 복귀한 웨스트는 클리블랜드의 주전 슈팅가드로써 뛰어난 활약을 보이고 있다. 또한 웨스트를 배려하는 과정에서 팀 전체가 똘똘 뭉치게 됐다. 지난 시즌에 비해 로스터 대부분이 교체되어 서로가 생소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웨스트의 이탈은 팀 캐미스트리를 다지는 좋은 계기가 됐다.
현재 클리블랜드의 팀 분위기는 최고다. 르브론이 '내가 입단한 이래 이렇게 분위기가 좋았던 적은 없었다'고 말할 정도다. 지난 시즌에는 래리 휴즈등 몇몇 선수가 팀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선수들이 경기 끝나고 어디를 함께 갈지가 화제에서 빠지지 않을 정도로 개인적으로도 친해진 상태다. 클리블랜드의 이번 시즌 전망을 밝게 하는 이유다.


4. 블록버스터 트레이드 단행-2010 프로젝트의 초석

좀처럼 대형 트레이드를 하지 않는 대니 페리 단장이 모처럼 '한 건'을 터뜨렸다. 클리블랜드는 2월 22일 시카고 및 시애틀과의 3각 트레이드를 발표했다. 클리블랜드는 래리 휴즈와 드류 구든, 섀넌 브라운, 세드릭 시몬스를 시카고 불스로 보내고 벤 월러스, 조 스미스, 드래프트 2라운드 지명권을 받았으며 도넬 마샬, 이라 뉴블을 시애틀 슈퍼소닉스로 보내고 딜론테 웨스트와 월리 저비악을 받았다.
클리블랜드의 이 트레이드는 2005-2006시즌부터 진행해온 '래리 휴즈 2인자 프로젝트'의 포기를 선언하는 것이었다. 클리블랜드에서 팀 시스템 적응 실패와 부상으로 제 몫을 하지 못하던 휴즈를 보내면서 휴즈와 함께 계약한 마샬 등을 처분한 것이다. 대신 수비왕 4회에 빛나는 월러스를 비롯해서 클리블랜드 시스템에 잘 맞는 선수들을 모아왔다. 이 트레이드로 클리블랜드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 중 조 스미스를 제외한 모든 선수들이 현재 클리블랜드의 주축 선수로 활약하고 있다.
한편 이같은 블록버스터 트레이드와 잦은 부상 등의 여파로 클리블랜드는 2007-2008시즌에만 리그에서 가장 많은 23명의 선수가 로스터에 이름을 올려, 조직력을 다지는 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3. '모 윌' 영입-마침내 르브론의 조력자를 얻다?

클리블랜드의 팀 개편 노력은 오프시즌에도 이어졌다.
베이징 올림픽이 한창이던 8월 13일, 클리블랜드는 공격형 포인트가드인 모리스 윌리암스를 영입했다고 발표했다. 클리블랜드는 조 스미스를 오클라호마 시티에, 데이먼 존스를 밀워키에 보내고 밀워키는 윌리암스를 클리블랜드에, 데스먼드 메이슨을 오클라호마 시티에 보냈으며, 오클라호마 시티는 루크 리드노어와 애드리언 그리핀을 밀워키에 보내는 삼각 트레이드였다.
트레이드의 핵심은 클리블랜드 유니폼을 입게 된 모리스 윌리암스였다. 유타와 밀워키에서 선수생활을 한 6년차 포인트가드 윌리암스는 뛰어난 볼핸들링과 공격력으로 그간 원맨팀의부담을 혼자 짊어져왔던 르브론의 조력자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베이징에서 트레이드 소식을 들은 르브론 역시 '윌리암스는 매우 뛰어난 포인트가드'라며 트레이드에 'A'를 주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시즌이 1/3 정도 진행된 시점에서 윌리암스는 이러한 팀의 기대를 100% 만족시켜주고 있다. 윌리암스는 르브론과 함께 뛸 때는 르브론의 리딩 부담을 덜어주고, 르브론이 벤치에서 휴식을 취할 때는 스스로 공격 찬스를 만들어내며 르브론의 공백을 완벽하게 메워주고 있다. 윌리암스의 가세로 클리블랜드는 르브론 외에 또다른 '컨트롤 타워'를 얻게 되어 르브론만 막으면 이길 수 있는 팀이라는 소리를 더이상 듣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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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010 프로젝트' 파동-리그의 이목을 모은 르브론의 거취

11월 내내 리그를 후끈 달군 이슈는 레이커스의 엄청난 상승세도 보스턴의 여전한 강세도 아니었다. 심지어 이번 시즌에 일어난 일도 아니었다. 20개월이나 남은 2010년 이적시장에 대한 기사가 홍수처럼 쏟아졌고, 그 모든 논란 한가운데 르브론이 있었다.
리그의 몇몇 팀들은 벌써부터 2010년을 대비해서 샐러리캡을 비우고 있고, 공공연히 르브론을 노리고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르브론 자신이 2010년 이후 자신의 거취에 대해 확답을 주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각 팀의 '2010 프로젝트'는 점점 과열 양상을 띠고 있다. 그 와중에 TNT 해설위원인 찰스 바클리가 '르브론은 입을 닥쳐야 한다. 2010년 거취에 대해 자꾸 떠드는 것은 팀 동료와 팬들을 생각치 않는 처사'라며 르브론을 비난했고, 르브론이 '난 두 아이의 아버지다. 바클리에게 그런 소릴 들을 이유가 없다. 바클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다. 끝!'이라며 받아치는 사건까지 있었다.
르브론에게도 2010년의 거취를 질문받는 것은 고역임에 틀림없다. 프로 선수가 지금 당장도 아닌 2년 후의 계약 문제에 대해 못박아 대답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르브론은 어린 나이답지 않은 노련한 언론 플레이로 오히려 언론을 가지고 놀며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기회로 삼고 있다.
이미 여러 팀이 '2010 프로젝트'를 선언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르브론의 행보에 대한 추측은 계속될 것이다. 르브론 스스로가 '아직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고 있는 만큼, NBA 팬은 '2010 프로젝트'를 향한 각 팀 단장들의 머리싸움을 2년간 즐길 수 있을 전망이다.


1. 팀 역사상 최고의 시즌?

클리블랜드는 12월 28일 현재 25승 4패로 보스턴에 1경기 뒤진 리그 2위를 달리고 있다. 25승 4패의 성적은 당연히 팀 역사상 최고의 초반 성적이고, 득실 마진(+12.72), 최소실점(89.24) 등에서 리그 1위를 달리고 있다. 또한 홈경기 15승 무패로 리그 유일의 홈경기 무패팀으로 남아있다. 시즌 개막 전 50승도 안되는 성적으로 동부 4위권에도 오르지 못할 것이라던 전문가들의 예측을 무색케 하는 선전이다.
클리블랜드가 리그 엘리트 팀으로 발돋움한 것은 지난 시즌 대폭 물갈이된 선수들이 프리시즌 캠프를 함께하면서 팀워크를 다졌고, 모리스 윌리암스의 합류로 공격이 훨씬 부드러워졌으며, 마이크 브라운 감독이 수비에서뿐 아니라 공격에서도 뛰어난 지도력을 보이며 한단계 성장했기 때문이다. 팀 스타일이 탄탄한 수비력과 결실한 팀 플레이에 의존하기 때문에 남은 시즌도 기복없는 경기력을 유지할 전망이다.
클리블랜드는 르브론 입단 후 꾸준히 발전해왔지만 지금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르브론 본인도 예상 밖이라고 말할 정도로 큰 발전을 이뤘다. 시즌 MVP 후보 0순위로 꼽히고 있는 르브론이 이끄는 클리블랜드가 이번 시즌 어디까지 발전할지, 과연 르브론의 선언대로 파이널 우승을 달성할 수 있을지, 모든 것이 결정될 2009년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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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 랩터스의 슈터 제이슨 카포노의 3점 슛이 림을 돌아 나오자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르브론 제임스와 지드루나스 일가우스카스가 리바운드를 잡기 위해 점프했다. 토론토 선수들은 공격리바운드를 포기하고 모두 백코트 했기 때문에 둘 중 하나는 분명히 리바운드를 잡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20여 분 전 이미 클리블랜드의 프랜차이즈 스틸 기록을 경신한 르브론은 일가우스카스를 흘끔 바라본 후 손을 내렸고, 일가우스카스는 볼을 한 번 바운드한 후 경기 네 개째의 리바운드를 잡아냈다. 마이크 브라운 클리블랜드 감독은 곧바로 타임아웃을 신청해 경기를 중단시켰고, 2만여 명의 홈 관중들은 일가우스카스에게 기립박수를 보냈다. 일가우스카스는 덤덤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답례했다. 통산 리바운드 5,228개. 구부정한 등을 지닌 리투아니아 출신의 이 센터가 프랜차이즈 통산 최다 리바운드 기록을 세우는 순간이었다.

일가우스카스는 큰 키(221cm)를 제외하면 그렇게 눈에 띄는 선수는 아니다 그는 르브론처럼 높이 점프하지도 않고 벤 월러스처럼 강렬하지도 않다. 득점도 호쾌한 슬램덩크보다는 점프슛이 대부분이다. 하다못해 팀 후배 앤더슨 바레장처럼 특이한 헤어스타일을 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를 아는 사람은 그의 인간성에 대한 찬사의 말을 아끼지 않는다. 2007년 클리블랜드의 첫 번째 파이널 진출이 확정된 직후 일가우스카스에게 달려가 안겼던 르브론은 ‘그런 인간성을 지닌 선수와 같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말했고, 브라운 감독은 ’그를 지닌 우리 팀은 정말 운이 좋은 것‘이라며 ’그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한 마디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라 말했다. 

브라운의 말이 맞다. 일가우스카스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하려면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는 NBA에서 첫 경기를 치르는 것부터 실력에 비해 훨씬 가혹한 운명과 싸워야 했다.

일가우스카스는 1975년 발트 3국 중의 하나인 리투아니아에서 태어났다. 1990년 소련에서 독립한 인구 350만의 이 작은 나라는 어린아이들이 매 처음 농구선수를 꿈꾸고, 자신에게 가능성이 없다는 걸 깨달으면 의사나 변호사를 꿈꿀 만큼 농구의 인기가 높은 나라다. 일가우스카스는 농구의 나라인 이 나라에서 축구선수를 꿈꾸던 아이였다. 지금도 그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경기를 꼬박꼬박 챙겨보는 열혈 축구팬이고, 집에서 키우는 개 이름도 ‘베컴’이다.

하지만 너무 빨리 자란 키 때문에 축구를 포기해야 했던 일가우스카스는 고향 카우나스 선배이자 세계적인 농구선수였던 아비다스 사보니스의 경기를 보고 농구선수가 되기로 결심했다. 맨 처음 맡은 포지션은 포인트가드였다. 당시 유럽은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출전했던 드림팀 I의 영향으로 NBA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높아지고 있었다. 리투아니아에서도 TV를 틀면 항상 NBA 경기를 볼 수 있었고, 이제 리투아니아의 농구소년들은 그냥 농구 선수가 아닌 NBA 선수를 꿈꾸게 되었다. 일가우스카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이미 210cm가 넘게 자란 일가우스카스는 NBA 선수가 되기 위해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

일가우스카스는 미국 대학에 입학하기로 했다. 미국에서 고등학교 졸업 경력을 얻고 영어를 익히기 위해 리투아니아의 고등학교 마지막 학년을 일부러 유급하기도 했다. 미국에 있는 동안 그를 관리해줄 에이전트와도 계약했다.

하지만 리투아니아에 닥친 경제위기가 그의 꿈을 가로막았다. 버스 기사였던 아버지와 엔지니어였던 어머니가 모두 직장을 잃었고, 일가우스카스는 미국 대학에 다니기는커녕 부모님과 여동생의 생활을 돌보아야 할 처지가 되어버렸다. 일가우스카스는 미국 유학을 포기하고 고향 카우나스의 신생 농구팀인 아틀레타스에 입단해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다행히 첫 팀에서의 경력은 순조로웠고,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리투아니아 국가대표로 뽑히기도 했다.

그 무렵 리투아니아 대표 팀은 켄터키 대학의 초청을 받아 미국에서 시범경기를 가지게 되었다. 켄터키 대학의 홈구장에서 열린 이 경기에서 일가우스카스는 26득점 19리바운드 4블록슛 2스틸을 기록하면서 33점차 대승을 이끌었다. 깜짝 놀란 릭 피티노 당시 켄터키 감독은 친구인 마이크 프라텔로 당시 클리블랜드 감독에게 연락해서 ‘제2의 사보니스가 등장했다’며 흥분했고, 일가우스카스는 몇몇 NBA 관계자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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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감을 얻은 일가우스카스는 1995년 NBA 드래프트에 참가했고, 켄터키 대학과의 경기 비디오를 본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던 케빈 맥헤일 단장은 일가우스카스를 시험해보기 위해 미네소타 팀버울브즈의 워크아웃에 일가우스카스를 초청했다. 일가우스카스의 머리 위에서 카메라를 설치하던 촬영기사가 삼각대를 떨어뜨려 죽을 뻔 하기도 했지만, 아무튼 그는 이틀 동안 진행된 워크아웃에서 맥헤일에게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 지명 가능성을 높였다. 하지만 오른발에 갑자기 통증이 느껴졌고, 결국 발이 부러진 것으로 확인된 일가우스카스는 NBA 입성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프로 생활을 시작한 후 처음으로 겪은 부상이었다.

이듬해인 1996년 열린 드래프트는 앨런 아이버슨과 코비 브라이언트, 스티브 내쉬등이 참가한 NBA 역사상 최고의 드래프트 중 하나였다. 일가우스카스는 2라운드에라도 뽑히면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프라텔로의 이야기를 들은 웨인 엠브리 클리블랜드 단장이 20번째 지명권을 그에게 사용했다. 12번째 지명권을 일가우스카스와 같은 센터인 비탈리 포타펜코에게 썼음에도 불구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다른 팀들은 미국 농구를 경험하지 못한 데다 부상 경력까지 있는 일가우스카스를 외면했지만, 엠브리는 큰 키에 걸맞지 않은 부드러운 슛터치에 주목했다. 일가우스카스의 NBA 경력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운명은 NBA 데뷔전을 쉽사리 허용하지 않았다. 첫 시즌을 앞두고 맹연습을 하던 중 또다시 오른발이 부러진 일가우스카스는 NBA 데뷔전을 또다시 1년 후로 연기해야 했다.

그래도 일가우스카스가 크게 낙담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리그에 갓 입단한 신인으로써 모든 것에 호기심을 보였고, 팀 분위기에 빠르게 적응해갔다. 영어 실력도 많이 늘었다. 비록 가장 먼저 배운 게 욕이었지만 말이다. 일가우스카스와 함께 뛰었던 선수들은 누구든 그의 걸쭉한 농담에 대해 이야기하며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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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가우스카스는 1997-1998시즌 마침내 첫 경기를 치렀다. 개막전에서 16득점 16리바운드 2블록슛을 기록하며 화려하게 데뷔한 일가우스카스는 시즌 전 경기를 뛰며 평균 13.9득점과 8.9리바운드를 기록, 클리블랜드의 주전 센터로 확실히 자리 잡았다. 올스타 루키 챌린지에도 선발 출장해서 루키 챌린지 MVP가 된 첫 번째 클리블랜드 선수가 되었다.

이듬해, 순조롭게 흘러갈 것 같은 두 번째 시즌이었지만 또다시 부상 악령이 찾아왔다. 이번에는 왼쪽 발목이 부러진 일가우스카스는 단 6경기만 뛰고 시즌을 접어야 했고, 이듬해에도 코트에 나서지 못했다. 일가우스카스는 크게 낙담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용기를 찾았다. 힘든 재활과정을 견뎌나가는 그의 성실함은 팀 관계자들을 감동시켰다.

2년여의 공백 끝에 코트에 돌아온 2000-2001 시즌, 일가우스카스는 첫 23경기에서 11.7점과 6.8리바운드를 올리며 부활을 알렸다. 팀도 15승 8패로 선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시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일가우스카스는 시즌 최다득점인 24점을 올린 다음 경기였던 마이애미 전에서 점프슛을 던진 후 왼발에 엄청난 통증을 느꼈다. 수많은 부상을 당해봤지만 결코 느끼지 못했던 통증이었다. 의료진이 달려오는 짧은 시간 동안 일가우스카스는 공포에 질려있었다.

그의 왼발이 또다시 부러진 것이다. 이번에는 분쇄골절이었다. 발등 뼈가 산산조각 나버렸다.

클리블랜드의 모든 팀 관계자들은 깊은 슬픔에 빠졌다. 일가우스카스가 다시 코트에 서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왔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동료 선수들은 남은 시즌 결과에 신경을 쓸 수 없을 정도로 그의 부상을 슬퍼했다. 8년이 지난 지금도 클리블랜드 관계자들은 그 일을 떠올릴 때면 눈물짓곤 한다.

하지만 일가우스카스 본인의 절망은 훨씬 컸다. 지금까지 수많은 시련도 잘 이겨내 왔지만 이번만은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수술을 해도, 재활을 해도 다시 코트에 설 수 있다는 보장이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또다시 가만히 앉아서 동료들이 뛰는 모습을 구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농구선수 생활을 계속해야 할지 회의마저 들었다. 하지만 일가우스카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클리블랜드 프로 스포츠 역사에서 최악의 거품 선수로 기록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그를 다시 분발케 했다. 그는 마침내 재건 수술을 받기로 결심했다. 왼발 뼈의 대부분을 금속제 인조 뼈대로 바꾸는 대수술이었다. 나중에 ‘의술이라기보다는 예술에 가까웠다’는 평을 받은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난 다음에는 혹독한 재활 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발의 고통은 이제는 친숙해질 정도였고, 진통제를 군것질거리처럼 달고 다녀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자리에서 일어난 일가우스카스는 더 이상 발의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가우스카스는 2001-2002 시즌 기적적으로 복귀했다. 처음에는 크리스 밈의 백업으로 출전했지만 금방 선발진으로 올라섰다. 그는 62경기에 출장하며 11.1득점 5.4리바운드를 기록했다. 이듬해에는 생애 처음으로 올스타에도 선정됐다. 2003년 르브론이 입단하자 팀 전체가 르브론에 맞춰 개편됐지만 일가우스카스는 여전히 클리블랜드의 주전 센터로 남아있었다. 건강을 되찾은 일가우스카스가 르브론과 함께 힘을 발휘하면서 클리블랜드의 성적도 점점 나아졌다. 2004년 결혼한 일가우스카스는 2005년 다시 한 번 올스타에 선정되었고 팀과 5년간의 장기계약을 맺기도 했다. 이제 모든 시련은 끝난 듯했다.

2007년 2월, 클리블랜드 로스터에서 일가우스카스의 이름이 갑자기 사라졌다. 원정 3연전을 앞두고 그의 아내 제니퍼가 쌍둥이를 유산한 것이다. 일가우스카스 부부의 첫 아이들이었다. 일가우스카스는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지금까지 당한 그 어떤 부상보다도 심한 아픔이 가슴을 때렸다. 아내가 고통 받을 때 같이 있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도 그를 괴롭혔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고통을 이겨내고 다시 돌아왔다. 지금까지 그를 믿고 기다려준 팀을 어려움에 빠뜨릴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아내가 일가우스카스가 코트에서 뛰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다. 네 경기 만에 복귀한 일가우스카스는 클리블랜드의 첫 파이널 진출을 이끌었다.

NBA 13시즌 째를 맞고 있는 일가우스카스는 이번 시즌 26분간만 출장, 15.1득점과 7.5리바운드를 올리고 있다. 53%의 야투율은 생애 최고이고, 평소에도 넓었던 슈팅 범위를 더욱 늘려 올시즌에만 벌써 6개를 성공, 지난 시즌까지 성공시킨 3점슛 갯수(5개)를 이미 넘어섰다. 우리 나이로 35세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발전을 멈추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일가우스카스가 수많은 시련을 딛고 계속 발전할 수 있는 것은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 때문이다. 몇 주 전 필라델피아 원정 경기에서 왼발 부상을 당해 라커룸으로 향했을 때, 엑스레이 사진을 찍은 필라델피아 의료진들은 깜짝 놀랐다. 재건 수술을 받을 때 집어넣은 인공뼈가 발을 온통 뒤덮고 있어서 부상 부위가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묻는 의료진들에게 일가우스카스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음, 그거 설명하자면 좀 긴데요."
지난 주 미네소타 원정 경기에서 일가우스카스는 맥헤일 미네소타 단장과 재회했다. 맥헤일이 사진기사의 실수로 일가우스카스가 죽을 뻔했던 것을 떠올리자 일가우스카스가 대답했다. "만약 그때 제가 죽었으면, (미네소타 홈 구장인) 타겟 센터는 이름이 (저를 기념해서) Z 센터로 바뀌었을 걸요?" 일가우스카스에게는 시련조차도 유머의 소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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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가우스카스는 스스로가 동료들의 모범이 될 뿐 아니라 어린 선수들이 리그에 적응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기도 한다. 특히 외국인 선수들이 겪는 문화적 어려움을 잘 이해하고 그들이 미국 생활에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앤더슨 바레장이나 사샤 파블로비치같은 선수들은 일가우스카스가 베푼 엉망진창 유머가 섞인 따뜻한 배려 덕분에 팀에 쉽게 녹아들 수 있었다. 유순해 보이는 외모와는 다르게 상대팀과 몸싸움이 벌어지면 가장 먼저 달려가 동료들을 보호하기도 한다.

일가우스카스의 따뜻한 시선은 팀 동료뿐 아니라 자신에게 기회를 준 지역사회까지 미친다. 팀 내 지역봉사활동 모임의 일원으로써 클리블랜드와 오하이오 주를 돌며 봉사활동을 펴기도 하고, 특히 건강이 좋지 않은 아이들을 돌보는 데 관심이 많다. 클리블랜드 아동병원을 방문하는 것은 그가 자주 하는 활동 중 하나다. 일가우스카스는 클리블랜드 홈 팬들의 마음에 이미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일가우스카스가 클리블랜드에서 선수 생활을 한 13년 동안 그는 2명의 구단주, 2명의 단장, 7명의 감독, 그리고 118명의 선수들과 함께했다. 일가우스카스 개인적으로나 팀으로써나 쉽지만은 않은 세월이었다. 하지만 그는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 클리블랜드의 각종 통산 기록에 빠짐없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얼마 전 일가우스카스는 내년에 FA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스스로 포기하고 클리블랜드에 남기로 했다. 르브론이 말한 것과 같이, 일가우스카스는 클리블랜드에서 영구 결번될 것이다.

일가우스카스가 2010년 후에도 선수생활을 계속할 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언제 은퇴하건, 클리블랜드 팬들은 그가 겪은 시련과 이를 극복한 그의 열정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경제적 어려움도, 거듭된 부상도, 아이를 잃은 아픔조차도 농구에 대한 그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일가우스카스가 마지막 경기를 마치는 날, 팬들은 그가 보여준 것만큼의 열정을 담아 박수를 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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