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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 존스 코치, 게일 굳리치, 짐 클레몬스, 팻 라일리, 짐 맥밀란, 제리 웨스트, 플린 로빈슨, ?

키쓰 에릭슨, 해피 헤어스톤, 르로이 엘리스, 빌 샤만 감독, 켄트 쿡 구단주, 프렛 쇼우스 GM,
윌트 체임벌린 (13), 존 트랩, 엘진 베일러 (22)


 

정규시즌 33연승....

대단한 기록입니다.

 

대부분의 NBA 팬들은 지난 정규시즌 휴스턴 로켓츠의 22연승 신화를 목격했고, 그 연승기록이 얼마나 어려운 지도 보고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1972년의 레이커스는 33연승을 해냈습니다.

 

대체 이 팀은 어떠한 팀이었으며, 33연승의 원동력은 어디에 있었는 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 타임머신을 타고 1971년 오프시즌의 로스-앤젤리스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10여년 전부터 계속 이어져 온 파이널에서의 실패로 레이커스의 구단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참혹했습니다. 60년대 내내 빌 러셀의 셀틱스에게 번번이 고배를 마셨던 레이커스. 러셀과 셀틱스 주전들이 대거 은퇴한 1969년을 끝으로 이제 숨통이 좀 트이나 했더니, 이번에는 윌리스 리드의 뉴욕 닉스와 커림 압둘자바 (류 앨신도)의 밀워키 벅스가 리그의 강자로 떠올랐습니다. 두 팀 모두 레이커스에 상성을 갖고 있던 까다로운 팀들이었죠.

 

팀의 주축이었던 빅 3 - 제리 웨스트 (34), 엘진 베일러 (37), 윌트 체임벌린 (36)도 세월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 한 채, 노쇠화의 길에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이제 이들이 함께 뛰어봐야 1~2. 마지막 승부를 걸 시기가 온 것입니다. 웨스트는 본인이 우승을 한 번도 해보지 못 하고 은퇴한다면, 평생을 정신적인 공황상태에서 살 지도 모른다며 절치부심 각오를 다지고 있었습니다. 8번이나 파이널에 진출하고도 우승을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 한 불운의 사나이, 엘진 베일러의 마음은 또 어떠했겠습니까?

 

이 때, 레이커스의 구단주, 켄트 쿡 씨는 보스턴 셀틱스의 명 가드 출신인 빌 샤만 (사진 左) 씨와 K.C. 존스 씨를 레이커스의 감독과 어시스턴트 코치로 데리고 오는 용단을 내립니다. 밥 쿠지, 빌 러셀과 함께 5~60년대 셀틱스가 왕조를 이루는 데 있어서 1등 공신이었던 샤만 씨는, 본인이 현역으로 뛰던 당시의 셀틱스 팀 칼라를 1972년 레이커스에 접목시키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려면, 팀이 수비를 최우선으로 여기며, 하나의 유기체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기본조건들은 물론, 속공찬스만 나면 전원이 뛸 수 있는 기동력도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빌 러셀 역할을 해줄 수비형 센터와 밥 쿠지 역할을 해줄 플레이메이커, 그리고 하블리첵 역할을 해줄 빠른 스윙맨도 필수였습니다.

 

여기서 현실적인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당시의 레이커스에는 전형적인 포인트 가드가 없었습니다. 웨스트나 게일 굳리치는 둘 다 듀얼 가드로서 득점력이 좋은 슈팅가드들이었습니다. 말년에 수비에 더 주력을 한 체임벌린이었지만, 아무래도 그는 빌 러셀 스타일과는 거리가 먼 공격형 센터였습니다. 심한 무릎부상을 두 번이나 입었던 37세의 엘진 베일러는 기동력이 출중한 하블리첵 역할을 도저히 감당해 낼 수가 없었습니다.

 

새로 온 감독과 선수들은 함께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했습니다. 이미 시즌 오픈은 눈앞으로 다가온 시점이었습니다. 지금 있는 선수들로 무슨 혁신적인 변화를 일으켜야만 했던 절대절명의 순간이었습니다.

 

이 때 정적을 깨고 체임벌린이 입을 열었습니다. "제가 러셀 역할을 하겠습니다. 공격 시도를 최소화하며, 동시에 리바운드와 피벗에서의 패싱, 그리고 골밑 수비에만 주력하겠습니다."  

 

한 줄기 빛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곧이어 제리 웨스트도 말문을 열었습니다. "제가 포인트 가드 역할을 하죠. 저의 플레이메이킹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 올리겠습니다. 득점은 굳리치가 좀 더 분발해주면 될 것입니다."

 

팀의 주득점원인 수퍼스타 두 명으로부터 너무나도 쉬운 응답을 받아낸 빌 샤만 감독은 그들의 자원하는 심정을 감사히 받으며 새 시즌을 새로운 각오로 맞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즌 시작은 그리 좋지 못 했습니다. 주전들이 나이를 먹어서였는지, 셀틱스의 속공농구 스타일이 팀 전술에 제대로 녹아들지를 못 했던 것입니다. 약팀들에게도 패배를 하면서, 우승을 향한 꿈은 점점 요원해지고만 있었습니다.

 

바로 이 때, 엘진 베일러(사진 右)가 큰 용단을 내립니다. 시즌 시작한 지 9경기를 소화했을 때였습니다. 베일러가 무릎부상으로 인해 느려진 자신이 팀의 바뀐 런앤건 스타일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 하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비록 37세의 나이였으나 베일러의 노련함과 위대함은 그를 아직도 쓸만한 포워드로 유지해 줄 수 있었고, 본인 자신도 오프시즌 동안에 많은 훈련을 했기에 한 시즌을 더 소화하는 데는 별 무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베일러는 이 순간 자신이 은퇴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힙니다. 자신이 은퇴를 하고 자리를 완전히 내줘야지만, 벤치멤버로서 운동능력과 스피드가 출중했던 짐 맥밀란이란 스윙맨이 더 클 수 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더군다나 맥밀란은 1972년 레이커스가 추구하고 있던 속공농구에 안성맞춤인 선수였습니다.

 

뼈에 사무치도록 원했던 우승의 꿈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7차전까지 가서야 패배한 숱한 파이널들을 경험한 선수였다면 더 더욱 그랬을 겁니다. 맨 정신이라면 여기서 어떻게 포기를 합니까? 하지만 베일러는 자신이 벤치에 앉아 있는 것조차 팀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임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시즌 중에 조촐한 은퇴식을 감행합니다.

 

 

베일러의 이 위대한 결정이, 이 위대한 희생이, 1972년 레이커스의 33연승 신화의 밑거름이 되었음을 아는 팬들은 많지 않습니다.

 

베일러의 은퇴와 함께, 빌 샤만 감독은 즉시로 벤치의 짐 맥밀란을 스타팅 스몰 포워드 자리로 올렸습니다. 베일러가 나감으로써 공백이 생길 수 있었던 보드 장악력에 대한 책임은 체임벌린과 파워 포워드, 해피 헤어스톤이 분담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전 시즌에 게임당 17.5점을 득점했던 게일 굳리치가 팀의 공격 1옵션으로서 거듭나게 됐습니다.

 

굳리치(사진 左)와 웨스트는 리그에서 가장 빠르고 화력이 좋은 백코트를 구축했습니다. 이 둘의 백코트 진은 게임당 무려 평균 52점에 15개의 어시스트를 만들어 냈습니다. 짐 맥밀란은 이들의 리딩을 받으며 거의 매 게임 하일라이트 덩크나 레이업을 양산해 냈으며, 체임벌린과 헤어스톤은 보드를 완전히 장악하고 수비 리바운드와 블락샷으로 끊임없는 속공찬스를 만들어 줬습니다.

 

빌 샤만 감독이 부임하는 순간부터 그려 왔던 바로 그 경기 패턴이 코트 위에서 실현되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레이커스는 승승장구하기 시작합니다. 베일러가 은퇴한 11월의 남은 경기에서 14승 무패, 12월 동안 16승 무패, 그리고 1972 1월의 첫 세 경기에서 모두 승리하며 33연승이란 금자탑을 세우게 된 것이죠. 압둘자바의 밀워키 벅스가 홈에서 레이커스를 120 104로 꺾으면서 연승행진이 멈추게 되지만, 이 기간동안의 레이커스의 위력이란 말이나 글로 표현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습니다. NBA 뿐만 아니라 모든 프로 스포츠를 통틀어 최장기 연승기록이었고, 아직도 이 기록은 어느 프로 구단에 의해서도 깨지지 않고 있습니다.

 

1996, 시카고 불스가 72승을 기록하며 시즌 최다승 기록을 경신하기까지, 1972년 레이커스의 시즌 69승 기록 또한 리그 최고기록으로 남아 있었죠.

 

 

그러나 정규시즌 기록이 아무리 뛰어난들, 우승을 못 하면 도로아미타불 아니겠습니까? 레이커스는 플레이오프에서도 막강했습니다. 컨퍼런스 준결승에서 만난 시카고 불스를 4 0으로 스윕한 레이커스는,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디펜딩 챔피언이자 자신들의 34연승에 제동을 걸었던 압둘자바의 밀워키 벅스도 4 2패로 꺾습니다.

 

그리고 파이널에서 마주친 라이벌 뉴욕 닉스. 이번에는 하늘도 레이커스의 편을 들어줬습니다. 닉스의 레전드 센터, 윌리스 리드가 부상으로 파이널에서 뛸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제리 루카스라는 또 하나의 명예의 전당 센터와 체임벌린을 잘 막기로 소문났던 파워 포워드, 데이브 드부셔가 버티고 있던 닉스였으나, 리드없이 이 둘이서만 체임벌린을 당해내기란 역부족이었습니다. 레이커스는 다섯 게임만에 그토록 염원하던 우승을 하게 됩니다.

 

빌 샤만 감독의 영입으로 시작된 1972년 레이커스의 시즌은 이로써 폭발적인 정규시즌 전력이 포스트시즌에서까지 계속 이어지며 우승이라는 아름다운 열매로 마감하게 됩니다. 그리고 빌 샤만 감독은 '올해의 감독상' 수혜자가 되지요.

 

그러나 이와 같은 값진 열매가 맺어지기까지 초호화 수퍼스타들이 팀을 위해 보여준 그 희생정신이 잊혀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최근의 인터뷰에서 당시 레이커스의 팀내 득점 1위였던 게일 굳리치 씨는 '당시의 레이커스를 한 단어로 규명짓는다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에 서슴없이 'SACRIFICE(희생)'라고 답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포인트 가드 역할을 자원했던 제리 웨스트 9.7개라는 자신의 커리어 최다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팀의 공격을 지휘했거든요. 수비형 센터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던 체임벌린도 자신의 커리어 로우인 14.8점만을 득점하며 19.2개의 리바운드, 그리고 비공식이긴 하나 게임당 5~6개에 달하는 블락샷으로 골문을 굳건히 지켰습니다.

 

반면, 게일 굳리치는 자신의 평균득점을 이전 시즌의 17.5점에서 25.9점으로 끌어 올리며 팀의 리딩 스코러가 됐고, 플레이오프에서도 평균 23.8점으로 맹활약, 레이커스의 공격 선봉장이 되었습니다.

 

파워 포워드, 해피 헤어스톤도 본인의 커리어 하이인 13.1개의 리바운드를 잡으며, 베일러로 인해 생겨날 수 있었던 리바운드에서의 출혈을 막아주었고, 벤치 멤버들, 특히 나중에 레이커스의 감독이 될 팻 라일리 또한 벤치에서 나와 엄청난 허슬과 수비력을 보태며 팀의 활력소 역할을 잘 감당했습니다. 베일러의 빈 자리에 새로 영입된 존 트랩이란 선수도 식스맨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줬습니다.

 

그리고, 엘진 베일러의 용기있는 은퇴결정으로 졸지에 선발진에 등용된 프로 2년차 짐 맥밀란은 이전 시즌에 8.4점이었던 평균득점을 18.8점으로 향상시키며 레이커스 속공의 피니셔 역할을 잘 감당해 주었습니다. Most Improved Player(약칭 MIP: 기량발전상) 상이 당시 리그에 있었다면, 그 상의 임자는 의심의 여지없이 이 짐 맥밀란의 몫이었을 겁니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1972년 레이커스의 33연승, 시즌 69, 그리고 그들이 그토록 기다려 왔던 리그 우승은 그들의 스타파워가 가져온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 스타들이 자기 자신을 희생하면서 스스로를 낮췄기에 따라온 부산물이었던 것입니다.

 

 

최근 NBA를 돌아봐도 이 진리는 불변입니다. 특히, 작년 우승팀인 보스턴 셀틱스, 지난 10년간 4회 우승을 해낸 샌안토니오 스퍼스, 2004년에 소위 '전당포'라 불리우던 레이커스를 꺾은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이들 팀들을 보면 팀 내 스타들이 스스로 팀의 공격 1옵션이 되려 한 욕심을 찾아볼 수 없던 팀들입니다. 수퍼스타들이 강력한 카리스마를 뿜어대며 팀을 승리로 이끄는 모습도 멋이 있지만, 이렇게 서로서로가 이타적으로 하나의 유기체를 이뤄 플레이하는 팀들은 소리없이 강하고 그 저력 또한 대단하지요.

  
1972
년 레이커스의 신화... 그것은 '레전드들의 자기 희생 속에서 피어난 한 송이 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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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승자 새 챔피언 

스퍼스 팬의 입장에서 스퍼스 선수들의 경기력 위주로 되짚어 본 경기리캡입니다. 


지난 덴버 원정경기에서 주전들을 모두 벤치에 앉히고 많은 비난을 받았던 포포비치 감독. 그의 결정은 옳았습니다. 6일이라는 오래된 휴식으로 인해 주전선수들의 리듬감이나 경기감각이 악영향을 받지는 않을까 우려했던 것도 기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자존심과 프라이드, 시즌 후반기의 분위기 조성 등, 많은 이슈들이 걸려 있는 스퍼스의 셀틱스 원정경기는 근 일주일을 푹 쉴 수 있었던 팀 덩컨과 마누 지노빌리가 경쾌하고 가벼운 몸동작을 선보이며 허슬과 수비 면에서 맹활약, 스퍼스가 105 대 99의 귀중한 1승을 챙길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4쿼터 종료 2분 30초를 남겨 두고 양 팀이 보여준 투혼과 근성은 왜 이 두 팀이 리그 최고들 중 하나인지를 여실히 증명해 보였습니다. 가넷 (26점, 12리바운드, 4어시스트)의 2연속 야투가 들어갈 때만 해도 승운은 셀틱스 쪽으로 기우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맷 보너가 멋진 런닝 플로터로 응수하면서 스퍼스는 다시 한 번 역전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고, 곧이어 터진 로져 메이슨의 삼점으로 경기를 뒤집을 수 있었습니다. 메이슨이 3점을 터뜨릴 때 기가 막힌 스크린을 서준 덩컨의 공로가 묻혀서도 안 될 것입니다.  

비록 패배는 했지만, 셀틱스 선수들도 훌륭한 경기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물론 막판 레이 앨런의 실수들이 뼈아팠지만, 이런 클러치 상황에서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었습니다. 비슷한 상황에서 앨런이 팀을 구해냈던 적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현 셀틱스는 수비 면에서 약간의 보완과 분발이 필요할 듯 싶습니다. 스퍼스는 오늘 셀틱스를 상대로 48.8%의 야투 성공률을 보였고, 삼점슛도 21개를 시도해 8개나 성공시켰습니다. 2쿼터와 4쿼터, 두 쿼터에만 69득점을 했습니다. 스퍼스의 공격 실행력도 좋았으나, 작년 플레이오프 때 보여준 수비력이 셀틱스에게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스탯이기도 합니다. 이런 부분은 시즌이 흘러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향상될 수 있는 부분이고, 챔피언 보스턴 셀틱스는 충분히 작년 플레이오프 때의 레벨로 팀전력을 끌어 올릴 수 있는 팀입니다.


그렉 포포비치 감독_
오늘 포포비치 감독의 수비전략은 훌륭했습니다. 론도와 셀틱스 빅맨들이 스퍼스 진영을 유린하지 못 하도록 경기 초반부터 그들의 타이밍과 리듬을 빼았는 수비를 지시했고, 피어스나 앨런이 득점을 할 만한 위치에서 공을 잡으면 시기적절하게 협력수비가 붙도록 지시했습니다. 이 수비전략은 셀틱스로 하여금 페인트존 바깥에서 점프슛만을 쏘도록 하는 효과를 가져 왔고, 더불어 유연한 슈팅리듬을 가져가지 못 하도록 하는 결과까지 파생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로 셀틱스는 오늘 11개의 3점을 시도해 3개 밖에 성공시키지 못하는 부진을 보였습니다. 공격에 있어서도, 평상시보다 약간 빠른 타이밍에 슛을 쏘도록 지시함으로써, 피지컬한 수비가 강점인 셀틱스가 수비진영을 제대로 갖출 수 있는 시간을 갖지 못 하게끔 만들었습니다. 선수들 로테이션에 있어서도 어느 한 선수도 40분을 뛰지 못 하도록 출장시간을 잘 배분했습니다. 그러나 보웬이나 유도카의 출장시간에 대해서는 약간의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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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덩컨_
(39분 출장, 23점, 13리바운드, 5어시스트)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 스퍼스 승리의 중심에는 팀의 대들보, 팀 덩컨이 있었습니다. 후반 들어서 포스트업 무브가 약간 주춤하는 기색이 있었지만, 경기 초반부터 클러치 상황까지 덩컨의 제공력과 장악력은 독야청청 빛이 났습니다. 페인트존 수비에서는 뛰어났지만, 미드레인지 점퍼를 쏘는 셀틱스 선수들에 대한 헬핑 디펜스가 예전같지는 못 했습니다. 쫓아가는 타이밍이 반의 반 박자씩 느렸다고나 할까요? 하여간 오늘 덩컨은 팀의 주장으로서 훌륭한 역할을 해냈습니다. 셀틱스 수비가 그토록 조여드는데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여유있게 자신의 슛들을 성공시키는 모습에서 타 팀원들이 많은 용기를 얻었을 것입니다.

마누 지노빌리_ (31분 출장, 19점, 3리바운드, 3어시스트, 3스틸) 오래 쉬어서인지, 아니면 셀틱스 전이라 의욕이 넘쳐서였는지, 초반에 마누는 많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1쿼터 막바지에 두 개의 슛을 성공시키면서 리듬감을 찾았고, 그 이후로는 매우 훌륭한 경기력을 보여줬습니다. 큰 경기임에도 서두르거나 무리하지 않고, 차분하게 게임이 자기에게로 올 수 있도록 기다리는 여유와 노련함이 엿보였습니다. 언제 외곽슛을 던져야 할지, 언제 돌파를 해야할 지, 언제 패스를 빼줘야 할 지, 그 결정을 완벽하게 실수없이 해냈고, 수비 면에서도 많은 칭찬을 받을 만 했습니다. 마지막에 앨런으로부터 천금같은 스틸을 해내며 얻어낸 clear path 파울, 폴 피어스를 육탄방어로 막아내는 모습, 그리고 몸을 날려 잡아내는 리바운드와 스틸 등등, 팀의 해결사로서 부족함이 없는 경기를 했습니다.

토니 파커_ (32분 출장, 7점, 7어시스트, 3-12 야투) 오늘 셀틱스가 수비에서 주안점을 둔 것은 파커의 경기리듬을 완전히 빼앗겠다는 것이었고, 그 면에서 셀틱스는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파커에게 순간적으로 붙는 더블팀이나 함정수비가 처음부터 파커의 리듬감과 자신감을 모두 앗아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파커는 나름대로 플레이메이커로서 본인의 역할을 잘 해주었죠. 또 그런 수비를 받으면서도 턴오버를 한 개만 범했다는 것이 고무적이었습니다.

맷 보너_ (36분 출장, 23점, 8리바운드, 2스틸, 3-6 3점슛률) 6명의 '명예의 전당급' 선수들이 코트에 있었던 이 경기의 전반전 스폿라이트는 다름아닌 맷 보너의 몫이었습니다. 보스턴 근교 출신의 이 선수는 마치 친정집에라도 돌아온 양, 전반에만 3점슛 3개를 포함, 16점을 쓸어 담았습니다. 단순히 3점 뿐만 아니라, 수비가 들러 붙으면 마치 마누 지노빌리처럼 골밑으로 돌진해 들어가 레이업이나 플로터를 성공시키기도 했습니다. 웬만한 자신감이 없다면 이런 플레이는 하기 힘든데.... 결과적으로, 보너의 이러한 플레이는 보스턴 골밑수비의 핵인 가넷을 외곽으로 끌어내는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보너가 노비츠키가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경기 종료 1분을 남겨두고, 가넷이 두 개의 슛을 성공시키며 셀틱스가 승기를 잡았을 때, 맞불을 놓았던 선수도 보너였지요. 주로 4쿼터에는 '투명인간'이 되어 버리던 선수가 보너였음을 감안해 볼 때, 오늘의 이 클러치 슛은 앞으로의 보너의 경기력에 큰 자산이 될 것입니다.

로져 메이슨_ (31분 출장, 11점, 3리바운드, 2-6 3점슛률) 4쿼터 종료 1분을 나긴 상황까지 스퍼스 팀의 최대역적(?)은 바로 메이슨이었습니다. 슛이 안 들어가는 것은 고사하고, 수비도 안 되죠, 중요한 순간마다 잡은 공을 놓쳐대지요.... 그런데.... 대체 그 놈의 킬러 본능이란 게 뭔지... 경기 종료를 얼마 안 남기고 자신이 수비리바운드를 잡고 드리블 해 나가서 그냥 3점을 냅다 던진 것이 들어가 버렸네요? 올 시즌에 그가 성공시킨 클러치 3점이 제 기억으로만도 5개입니다. 아직 수비에서 미흡한 부분들이 많이 보이지만, 그리고 경기를 완전히 말아먹을 잠재력도 농후하지만, '제 2의 로버트 오리'라 불릴 만한 강심장과 클러치 3점 능력 하나만으로도 효용가치가 높은 선수입니다.

마이클 핀리_ (27분 출장, 7점, 2어시스트) 마지막 순간의 자유투 말고는 이렇다 할 플레이를 펼치지 못 했습니다. 공수 양 면에서 부진한 모습이었고, 몸 움직임도 느렸습니다. 핀리에게 간 27분이 보웬에게 갔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브루스 보웬_ (7분 출장, 무득점) 3쿼터 시작과 함께 셀틱스가 10-0 런을 가져갈 때 출격해 불을 끈 장본인입니다. 공격에서는 아무런 활약을 못 했으나, 보웬이 들어 오면서 스퍼스는 대패를 할 수도 있었던 경기를 원점으로 돌릴 수 있었습니다. 4쿼터 막판, 지노빌리가 앨런의 인바운드 패스를 스틸할 때 큰 역할을 한 선수도 보웬이었고, 마지막 피어스의 3점 시도를 에어볼로 만든 선수도 보웬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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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지 힐_
(16분 출장, 7점, 3리바운드, 3-3 야투율) 전반에는 몹시 긴장한 모습이었습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디펜딩 챔피언의 홈구장이었으니, 루키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지요. 그러나 그 심장떨리는 4쿼터에 투입된 힐은 '이게 정말 루키 맞나?'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베테랑 뺨치는 활약을 했습니다. 두 번의 버저비터를 성공시켰고, 엄청난 윙스팬과 스피드로 론도의 공격력을 둔화시켰습니다. 오늘 경기에서 그가 얻은 경험은 앞으로의 플레이오프에서, 또 힐의 NBA 커리어에서 소중한 경험으로 남을 것입니다.

컷 토마스_ (19분 출장, 6점, 5리바운드) 작년 시즌과는 달리 완전히 스퍼스 시스템에 녹아든 토마스입니다. 오늘도 4쿼터 초반에 두 개의 중요한 골을 성공시켜 줬습니다. 그 중 하나는 공격 리바운드에 의한 득점이었죠. 보스턴같이 피지컬한 팀을 상대할 때 반드시 필요한 선수입니다.


맺는 글

지난 레이커스 전 승리 이후로, 가장 값지다고 할 만한 승리를 낚은 스퍼스였습니다. 특히, 작년 시즌에 두 팀 간에 벌어졌던 두 경기에서 모두 간발의 차이로 패배를 감수해야 했던 스퍼스였기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시즌의 흐름상, 오늘의 승리는 앞으로 남은 로데오 원정트립은 물론, 후반기 남은 경기를 대하는 데 있어서도 팀에 많은 자신감과 활력을 불어넣어 줄 것입니다. 특히, 메이슨, 힐, 보너같이 누구도 예상치 못 했던 인물들이 치고 올라오며 빅 3의 부담을 덜어주었기에 얻어낼 수 있었던 승리여서 더더욱 값집니다. 여기서 만족하지 말고 이틀 후에 벌어질 뉴저지 넷츠와의 경기에서도 최고의 경기력을 보이며 후반기에는 확실한 우승후보로 떠오를 스퍼스가 되기를 바랍니다.

작년 시즌의 경기들과는 다르게 올 시즌의 스퍼스는 박빙의 클러치 상황에서 빛을 발하는 팀이 되었습니다. 1999년에도, 2003년에도, 2005년에도, 2007년에도, 우승하던 시즌에는 이런 진흙탕 싸움의 경기 속에서 자주 살아남았던 팀이 스퍼스였음을 상기해 볼 때, 올해도 플레이오프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하게 만드는군요.


마지막으로... 스퍼스의 플레이오프 탈락을 예고(?)하셨던 ESPN의 존 홀린저 씨에게는 미안한 마음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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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브론과 함께 급부상하고 있는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고, 그동안 이 구단을 거쳐간 수퍼스타들로 Cavs All-Time Team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구단은 1970년에 신생팀으로서 창단되었습니다. 연고지는 29년 동안 한 번도 안 바뀌었지요. 첫 해에는 15승 67패를 기록함으로써 리그 최하위였고, 덕분에 당시 대학최고선수였던 '오스틴 카'를 드래프트할 수 있었습니다. 항상 성적이 하위권에서 맴돌았기에 거의 매년 대학 최고의 선수들을 영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1975-76 시즌에는 49승을 올리면서 구단 역사상 최초로 디비젼 타이틀을 따냅니다. 그 이후로는 다시 내리막 길이었죠. 80년대 중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다시 한 번 중흥의 길을 터보려 했던 이 팀의 발목을 매번 잡은 것은 마이클 조던의 불스였습니다. 그리고 20년후, 캐벌리어스는 르브론 제임스를 중심으로 구단 역사상 세번째의 중흥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캐벌리어스는 3명의 '명예의 전당' 선수들을 배출했습니다. 네이트 써몬드, 웨인 엠브리, 레니 윌킨스가 그들입니다. 하지만 이 선수들의 전성기는 클리블랜드 소속 시절이 아니었기에, 이 구단이 이 세 명의 인물들을 배출했다고 말하는 것은 말에 좀 어폐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캐벌리어스 소속으로 뛴 선수들 중 6명의 져지넘버가 영구결번 됐습니다 - 빙고 스미스 (7), 래리 낸스 (22), 마크 프라이스 (25), 오스틴 카 (34), 네이트 써몬드 (42), 브랫 도허티 (43). 네이트 써몬드는 그의 이름값 때문에 영구결번이 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말년에 두 시즌 벤치멤버로 뛰면서 팀에 그리 공헌한 것은 거의 없었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르브론 제임스가 별 이상없이 지금의 실력을 향후 4~5년간만 지속해 준다면, 명실공히 구단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자리매김 될 것입니다.

지금부터, 현역선수들을 제외한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All-Time Team을 구성해 보겠습니다.


Starting Five

센터 - 브랫 도허티(Brad Daugher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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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역대 캐벌리어스 선수들 전체를 대상으로 투표해도 별다른 이견없이 뽑힐만한 선수라 생각됩니다. 브랫 도허티는 1965년생이고, 키는 213cm입니다.

1986년 드래프트에서 전체순위 1번으로 영입됐습니다. 이 드래프트는 2번 픽으로 셀틱스에 의해 드래프트가 되자마자 사망한 '렌 바이어스' (사진 오른쪽에서 두번째)로 인해 더 유명해진 드래프트였죠. 이 드래프트에서 '론 하퍼'도 8번픽으로 뽑혀서 캐벌리어스 유니폼을 입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댈러스와의 트레이드로 인해 '마크 프라이스'까지 낚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존 “Hot Rod” 윌리암스'라는 뛰어난 USBL출신 파워포워드까지 영입한 캐벌리어스는 아마도 NBA 역사상 드래프트 당일날, 유능한 선수들을 한꺼번에 가장 많이 영입한 팀일 것입니다. 프라이스를 제외한 이들 모두는 86-87 All-Rookie 팀에도 이름을 올렸습니다.

마이클 조던과 함께 대학생활을 하며 딘 스미스 감독으로부터 철저한 기본기를 전수받은 도허티의 플레이는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실속있었고 효율적이었습니다. 현재의 팀 던컨과 아주 비슷한 스타일의 농구를 했었지요. 팀 던컨이 조금 더 몸이 크고 느려서 센터를 봐야만 했다면 영락없는 도허티입니다. 물론 수비력과 리더쉽에 있어서는 던컨이 훨씬 더 뛰어나지만요. 도허티는 올스타게임에 다섯번 출전하며 (88, 89, 91, 92, 93) 8시즌을 캐벌리어스의 일원으로 뛰었습니다. 커리어 평균은 19.0점, 9.5리바운드, 3.7어시스트입니다. 센터로서는 상당히 높은 어시스트 수치가 눈에 띄지요?

도허티는 1993-94 시즌을 끝으로 28세의 젊은 나이에 농구인생을 접어야만 했습니다. 고질적인 허리 디스크때문이었지요. 도허티가 건강했더라면 90년대 4대센터들의 각축전에도 뛰어들만한 실력의 선수였습니다. 현재는 기독교인으로서 수많은 사회봉사 일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파워포워드 - 존 '핫 로드' 윌리엄스(John "Hot Rod" Willia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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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Hot Rod” 윌리암스는 1962년생으로 신장 211cm의 전형적인 수비형 파워포워드였습니다. 1985-86년 시즌에 USBL에서 뛰었던 숨은 진주를 캐벌리어스가 건져낸 거였죠. 이 선수의 수비력과 블라킹 능력이 워낙 뛰어났기에, 상대적으로 이 부분들이 약했던 도허티를 드래프트하는데 있어서 별 고민을 하지 않았었다고 전해집니다. 1988-89 시즌에는 16.8점, 8.1리바운드, 2.1블락샷을 기록하며 식스맨으로서 맹활약하기도 했습니다.

존 윌리암스라는 이름이 워낙 흔한 이름이라서 그의 어렸을 적 별명인 "Hot Rod"를 미들네임처럼 사용했습니다. 당시에 해설자들도 그를 '핫 로드 윌리암스'라고 했지 '존 윌리암스'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Hot Rod는 어렸을때 윌리암스가 집안에서 자동차의 엔진소리를 내며 집안을 가로질러 뛰어다녔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입니다. 엔진이 밖으로 드러나서 엔진소리가 유난히 크게 나는 차를 가리켜 미국에선 Hot Rod라고 하거든요.

윌리암스는 9시즌을 캐벌리어스 유니폼을 입고 뛰었으며, 그의 1,200 블락샷과 20,802분의 출장시간, 그리고 1,620개의 공격리바운드는 아직도 프랜차이즈 올타임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윌리암스의 40분 대비 커리어 평균은 14.9점, 9.1리바운드, 2.4어시스트, 2.2블락샷입니다.


스몰포워드 - Larry Nance(래리 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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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닉스 선즈에서 프로생활을 시작한 낸스는 1988년부터 1994년까지 캐벌리어스의 일원으로 뛰었습니다. 1959년생이며 신장 208cm인 낸스는1981년 드래프트에서 전체순위 20번으로 드래프트 되었습니다.

올스타 게임에 3번(85, 89, 93) 출전했고, 1984년 슬램덩크 콘테스트에서는 줄리어스 어빙을 결승에서 누르고 NBA 첫 슬램덩크 우승자가 됐지요. 대학 졸업시의 서전트점프가 102cm였던 낸스는, 프로 초창기에는 주로 선즈의 칼 매이시의 앨리우프 패스만 받아먹는 단조로운 공격패턴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986-87 시즌에는 22.5득점을 기록하며, 더 이상 덩크만이 아닌 미드레인지 점퍼와 다양한 공격루트를 장착했음을 과시하기도 했습니다. 낸스는 또한 스타팅 멤버로 뛴 11시즌동안 매시즌 평균이 최소 16득점에 8리바운드로써 ‘꾸준함’에 있어서도 유명했던 선수였습니다. 1989년과 1992년, 93년에는 All-Defensive Team에도 뽑혔었죠.

1988년에 있었던 피닉스와 클리블랜드 (케빈 존슨, 댄 말리)의 트레이드로 인해 클리블랜드에 새 둥지를 튼 낸스는 젊은 피의 수혈로 점점 강해지던 캐브스를 당장에 파이널 컨텐더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허나, 두 가지 장벽이 도사리고 있었으니, 같은 컨퍼런스에 조던의 불스가 있었다는 점과, 이때부터 그의 고질적인 허리부상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는 점이었습니다.

3번부터 5번까지의 포지션을 모두 소화할 수 있었던 낸스의 커리어 평균은 17.1점, 8.0리바운드, 2.6어시스트, 2.2블락샷입니다.


슈팅가드 - 오스틴 카(Austin Car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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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틴 카는 클리블랜드가 창단 첫해에 리그의 쓴 맛을 본 덕분(?)에 다음 시즌인 1971년의 드래프트에서 전체순위 1번으로 뽑혔던 당시 대학 최고의 득점기계이자 대학 최우수선수상을 받은 선수였습니다. 1948년생이며 193cm였던 이 슈팅가드는 노틀댐 대학시절 34.5점이란 대학 커리어 평균을 해내 세상을 놀라게 했었지요. '"피스톨" 피트 마라비치'와 비견될 만한 득점기계였습니다. 코트 위의 어떠한 위치나 각도에서도 터지는 그의 슈팅레인지는 가공할 무기였습니다.

하지만 입단 첫 시즌부터 입은 발과 다리부상의 어두운 그림자는 커리어 내내 그를 괴롭혔고, 결국 그는 대학때의 명성에 걸맞지 않는 수준으로 농구인생을 마쳐야만 했습니다. 1973-74 시즌에는 21.9점, 3.6리바운드, 3.8어시스트에 86%의 자유투 성공률을 보이며 잠시나마 그가 어떠한 능력의 소유자인지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잠깐, 다음 시즌에 곧바로 무릎부상을 입으며 다시 힘든 커리어를 보내게 됩니다.

오스틴 카는 캐벌리어스의 일원으로 뛴 9시즌동안 16.2 평균득점을 기록했습니다. 계속되는 부상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도전하던 그의 모습은 많은 젊은 농구선수들에게 귀감이 되었고, 그래서 구단은 그의 져지넘버를 영구결번시켜 주었습니다.


포인트가드 - 마크 프라이스(Mark Pr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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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긴 것 부터가 남달리 영민하게 생긴 마크 프라이스는 "생긴대로" 플레이했던 뛰어난 포인트가드였습니다. 1964년생이며 농구명문 조지아 공대를 졸업한 프라이스는 182cm라는 작은 신장에도 불구하고 코트를 휘젓고 다니던 카리스마 넘치는 민완가드였죠. 너무 작고, 너무 느리고, 너무 정석적인 플레이만 한다며 그를 드래프트 2라운드까지 끌어내렸던 스카우터들의 안목을 비웃기라도 하듯, 프라이스는 보란 듯이 12시즌 동안 NBA 코트의 야전사령관 역활을 멋지게 해냈습니다.

이 글을 보시는 분들이 기억하실지 모르겠으나, 마크 프라이스의 플레이를 보다 보면 저의 고교 1년 선배셨던 유재학 감독님의 전성기적 플레이가 떠오르곤 합니다. 허재나 강동희같은 특출난 기술이 없었어도 언제 패스하고 언제 외곽슛을 날려야 할 지를 누구보다 빠르게 판단할 수 있었던 분이었죠. 낮고 불규칙한 드리블, 경기를 읽는 영리한 두뇌, 그리고 단신임에도 인사이드를 향해 치고 들어가며 완벽하게 빼주는 킥아웃 패스나 직접 시도하는 반박자 빠른 레이업 등이 그 분의 전매특허였습니다. 프라이스도 그러한 스타일의 농구를 했습니다. 키는 작았지만 드리블을 치다가 순간적으로 점프하며 높은 타점에서 터뜨리는 풀업점퍼는 예술이었죠. 그리고 강한 손목힘에서 비롯된 3점라인 훨씬 뒤에서의 안정된 롱슛이나 빠른 드리블과 함께 변칙적인 타이밍에서 발생되는 킬패스는 역대 최고수준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자유투 성공률도 커리어 평균이 90.4%에 달했고 3점슛 성공률도 40%를 상회했습니다. 1988-89 시즌에는 '야투성공률이 50%를 넘고, 3점슛이 40%를 넘으며, 자유투까지 90%의 성공률을 보인 180 클럽' (버드, 노빗츠키, 내쉬, 레지 밀러 등)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4번의 올스타 게임에 출전했던 프라이스는 1992-93 시즌에는 All-NBA First Team에 선출되기도 했지요. 프라이스의 40분 대비 커리어 평균은 20.4점, 9.0어시스트, 1.6스틸입니다.

1994년에는 세계농구선수권에서 샤킬 오닐, 숀 캠프, 레지 밀러등의 공격을 이끌어내며 미국에 금메달을 안기는데 있어 큰 공헌을 했던 주전 포인트가드 마크 프라이스. 그의 캐벌리어스 All-Time Team 선정에는 이견이 없을 듯 합니다.


벤치 멤버들

센터 겸 파워포워드 - 숀 켐프(Shawn Ke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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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다른 프로필이 필요치 않은 수퍼스타 숀 캠프의 클리블랜드에서의 3시즌은 상당히 화려했습니다. 1997년부터 2000년까지 캐벌리어스의 일원으로 활약하며 18~20점에 9~10리바운드를 기록해 줬지요. 1998-99 시즌에는 자신의 커리어 하이인 20.5점을 득점했습니다.

1998년에는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올스타 게임에 스타팅 멤버로 '선발출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클리블랜드에 온 후에 시작된 체중조절의 문제는 그의 커리어를 단축시키는 주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슈팅가드 겸 포인트가드 - 월드 B.프리(World B. F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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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시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원래의 이름은 Lloyd Free였는데, 나중에 커리어가 쌓임에 따라 자기는 이 세상을 품는 대인이 되겠다고 선언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World B. Free로 개명한 선수입니다 (가운데 B는 아무 의미가 없답니다.^^;)) 월드 비 프리는 1975년부터 1988년까지 활약했는데, 신장은 186cm였지만 44인치의 점프력을 이용해 가공할 덩크를 많이 보여줬던 선수입니다.

몸은 뚱뚱한(?)편으로 둔해보이기까지 했는데도 몸놀림은 무척 민첩했습니다. 79년과 80년에는 조지 거빈과 득점왕을 다툴 정도로 득점력도 뛰어났습니다. 커리어 평균은 20.3점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루키시즌과 말년 두시즌 동안에 많이 까먹은 수치고, 나머지 10시즌 동안에는 대체적으로 23점에서 30점 사이를 득점해줬죠. 클리블랜드에서는 82년부터 86년까지 뛰며 평균 23점을 득점했던 뛰어난 스코러였습니다.


스몰포워드 겸 슈팅가드 - 론 하퍼(Ron Har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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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시카고 불스에서 뛰던 선수로만 기억하실 분들이 계실텐데요.... 론 하퍼는 1985년에 입단할 때부터 '조던의 라이벌', '오렌지 조던'같은 수식어가 따라다닐 정도로 조던과 여러면에서 비슷한 선수였습니다.

훌륭한 점프력을 바탕으로 한 그의 올라운드 공격력은 클리블랜드에서의 루키시즌에 이미 평균 22.9점이라는 수치로 증명이 되었습니다. 클리블랜드에서의 3시즌을 보낸 뒤에 LA 클리퍼스에서 맹활약을 했던 하퍼. 그를 멈춘 것은 무릎부상이었습니다. 그 후, 레이커스와 불스에서 롤플레이어로 뛰며 우승반지를 5개나 챙겼지요.

무릎부상을 당하기 전인 클리블랜드와 LA 에서의 8시즌 동안엔 꾸준히 18점에서 23점 사이를 득점해주며 리바운드와 어시스트도 5~6개씩 해주던 올라운더였습니다.

이 외에도 로이 힌슨, 키이쓰 리, 타이론 힐, 마이크 밋첼, 빙고 스미스, 필 허바드, 테럴 브랜든과 같은 많은 좋은 선수들이 있었지만, 위에 언급된 선수들만큼 긴 시간동안 꾸준한 활약을 보이지는 못했다고 판단되어 All-Time Team에서는 제외시켰습니다. 이제 르브론을 중심으로 클리블랜드에 새 태양이 떠오를 것을 기대하며 여기서 글을 줄일까 합니다.


설 연휴, 의미있게 잘 보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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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퍼스의 '기본기' 농구 들여다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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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전 내내 팽팽한 줄다리기였던 경기가 3쿼터가 시작되면서 스퍼스의 일방적인 경기로 급격히 전환됐다.

4쿼터 전체가 가비지 타임이 되고 말았던 이 경기. 이토록 큰 변화를 가져오게 한 스퍼스 경기력의 열쇠는 무엇이었을까?


시시하게도........... 새로운 것은 전~혀 없었다.

상황에 따른 결정을 각 선수들이 잘해준 결과였고, 전술과 시스템을 잘 알고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팀 전체의 공이었을 뿐이다.


타 팀 선수들에 비해 네임벨류 면에서는 떨어지지만, 지난 10년간 네 번이나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던 팀 스퍼스의 저력이 바로 여기에 있다.

정확하게 어느 시점에 어느 각도에서 빈 자리가 생겨날 지를 미리 알고 움직이는 게 스퍼스 선수들이다.

언제 컷-인을 들어가고, 언제 돌파를 해야하며, 언제 어디로 패스를 빼줘야 하는 지도 아주 잘 알고 능숙하게 움직이는 팀이다.


스퍼스의 공격 루트를 보면 아주 단순 무식하다. 딱 세 가지 경로만 쓰기 때문이다.

1) 덩컨을 중심으로 한 포스트업에서 파생되는 골밑 찬스와 오픈 삼점슛
2) 코트를 넓게 가져가며 빅맨의 스크린을 타고 돌파하는 파커나 지노빌리
3) 2 대 2로 풀어나가는 픽앤롤과 픽앤팝


무척 역설적인데...... 이런 단순무식하고 잘 알려진 전술들이 먹혀드는 이유가 바로 스퍼스 선수들이 BQ가 뛰어나고 이타적이기 때문이다.

스퍼스 선수들, 개개인 능력만 보면 사실 대부분 별 거 없는 선수들이다.

그런데 이 별 것도 아닌 선수들이 BQ(농구 IQ)들은 정말로 뛰어나다. 그리고 팀을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할 줄도 안다.




(동영상 1 - 시작부터 10초) 더블 팀이 붙을 것을 미리 감지한 덩컨이 반박자 빠르게 골밑에 있던 보너에게 킬패스를 넣어준다든지...
   

(동영상 2 - 12초에서 24초) 수비진이 바깥 쪽으로 약간 넓혀지는 것을 느낀 파커가 그 짧은 찰나에 ball-screen switch를 이용해 골밑 돌파를 하는 것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픽앤롤 공격을 수비할 때 수비수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철칙이 바로 "절대로" '스위치 디펜스'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인데...

동영상에서 보셨듯이, 파커를 수비해야 할 클리퍼스의 제이슨 하트 선수가 파커를 놓치면서 덩컨을 수비해야만 하는 스위치 디펜스 상황이 오고 말았다. 이 기회를 놓칠 파커가 아니다. 파커는 덩컨의 스크린을 타고 비교적 쉬운 페네트레이션을 성공시킨다.

이렇게 상대 팀 수비의 허를 빨리 간파하고, 실행에 옮길 수 있어야 하는 것이 농구의 기본이고, 이런 교과서적인 농구를 리그에서 가장 잘하는 팀들 중의 하나가 바로 스퍼스다.  

(동영상 3 - 26초에서 37초) 자신에게 붙는 헬핑 수비를 보며 재빨리 자리를 옮겨 빈 자리의 보너에게 패스를 빼주는 파커의 pick-and-pop 플레이도 이러한 탁월한 공격 기본기에서만 파생될 수 있는 종류의 플레이다. 
                                                      

교과서적인 농구. 이런 기본적인 농구를 리그에서 가장 잘하는 팀들 중 하나가 스퍼스다.

6~70년대는 대부분의 NBA 팀들이 이러한 시스템 농구를 했고, 그래서 운동능력이나 재능보다도 기본기와 BQ가 더 중요시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90년대의 시카고 불스와 유타 재즈 이후로, 이러한 기본기에 입각한 농구를 하는 팀들은 이제 손에 꼽아야 할 지경이 되었다.

여러 다양한 기술들이 보편화되고, 선수들 개개인의 신체조건이 발달을 했어도, 많은 농구원로들이 오히려 농구가 퇴보하고 있다고 아우성치는 이유다.

타 팀에 비해 개개인의 능력치는 뛰어나지 않지만, 이와 같이 BQ가 좋고, 전술 실행능력이 뛰어난 이타적인 선수들로 이루어진 팀, 스퍼스.

재미없고 지루한 팀이라고 쉽게 치부할 일이 아니다. 기본기를 중요시하는 많은 농구인들이 최고로 꼽는 팀들 중 하나가 스퍼스이기 때문이다.

독자들과 농구팬들께서
이 팀의 오랜 기간 지속되는 저력의 원천이 대체 무엇인지를 피부로 직접 느끼며 경기를 관전하실 수만 있다면, 이 졸렬한 글을 쓴 필자에게는 무한한 영광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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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 농구 카페나 동호회의 질문 게시판에 종종 올라오는 글을 보면 이런 물음들이 발견됩니다.

"저의 농구 롤모델은 누구로 하면 좋을까요?"

"코비를 저의 롤모델로 삼고 싶은데 도움 좀 주세요.".....

여기서 말하는 '롤 모델'로 삼는다는 표현은, 어떤 특정선수와 같은 스타일의 슛폼이나 농구 스타일을 닮고 싶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렇죠?

그런데.... 과연 여기서 말하는 '롤 모델'이 올바른 용어사용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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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 모델'이란 단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Robert K. Merton이라는 이름의 대학교 사회학 교수셨습니다. 이 분이 말한 '롤 모델'의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A role model is any "person who serves as an example, whose behaviour is emulated by others".

이 분이 사회학을 전공하는 대학생들에게 "한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인생의 귀감이 될만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역설하는 과정에서 이 용어가 창조되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특정한 인물의 삶과 행동양식을 닮아서 그 사람처럼 본이 되는 삶을 살고 싶을 때에, 그 모델이 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롤 모델'이라는 것이죠.

제 닉네임이 말해주듯이, 저는 자라면서 'Doctor J' 줄리어스 어빙을 저의 롤 모델로 삼고 자랐습니다.

줄리어스 어빙처럼 공중을 걸어 다니고, 덩크하고 싶어서 그를 롤 모델로 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빙이 코트 위에서나 코트 밖에서나 타 팀의 모든 선수들과 감독들로부터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린 마음에 저도 커서 그러한 인물이 되고 싶었습니다. 아직도 멀었지만, 그와 같은 모습으로 살고자 최소한 노력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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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지에 실린 '롤 모델' 관련 칼럼을 보면, 미국의 모든 메이저 스포츠를 통틀어서 최고의 롤 모델이 누구였는가라는 질문에 칼럼니스트가 주저함 없이 줄리어스 어빙을 1위로 지목했습니다. 농구선수로서는 데이빗 로빈슨도 3위인가 4위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어빙이 농구를 제일 잘 해서가 아닙니다. 잘 하는 순서였다면 당연히 마이클 조던이었겠죠.

또 어빙이 완벽한 인간이라는 말과도 거리가 멉니다. 이미 혼외정사로 인해 낳은 어빙의 2세도 있지 않습니까? 그도 어쩔 수 없는 한 인간임을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선수 시절의 어빙은 자신의 팀원들은 물론, 라이벌 팀의 선수들, 타 팀의 감독들, 리그의 모든 심판들을 포함해 사무국까지, 그리고 농구에 관련되어있지 않은 모든 사람들로부터도 한결같은 존경과 애정을 받았고, 심지어 라이벌들에게조차 안 좋은 말이나 트래쉬 토킹을 해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신화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프로 선수들이 흔히 하는 도박이나 술, 담배 등은 평생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인터뷰를 할 때도 언제나 옳은 말만 했고, 자기 자신을 내세우거나 또는 상대방 선수, 상대 팀을 깍아 내리거나 폄하해서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선수가 어빙입니다.


'롤 모델'은 이렇게 자신에게 바람직하고 올바른 인생관과 행동양식을 갖고 살고 싶게끔 자극을 준 다른 특정 대상인 가리킬 때 쓰는 용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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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프로 초창기에 악동 노릇을 많이 했던 찰스 바클리도 '당신은 아이들이 보고 닮고 싶어하는 프로 스포츠 스타인데 이렇게 말하고 행동해도 괜찮겠느냐?'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아주 단순하게 "I am not a role model. I am Charles Barkley."라고 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이들에게 자신의 삶과 행동양식을 배우라고 강요하지 않을테니, 당신들도 나에게 어떤 특정한 모습의 삶의 모습을 강요하지 말아라'라고 한 것이죠.

말이 길어졌군요. 정리하겠습니다.

간단히 예를 들어보자면 이렇습니다.

"나는 마라도나를 나의 롤 모델로 삼겠다." "나는 데니스 로드맨을 나의 롤 모델로 삼겠다"라는 말은 사실 어불성설입니다.

이들을 롤 모델로 삼는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마약 중독에 빠진 사람이나 여성편력, 기행 등을 일삼던 선수처럼 인생을 살고 싶다"라는 말도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농구선수였던 윌트 체임벌린이 선수 시절 당시에 '롤 모델'로 거론되지 않았던 것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그냥, '나는 마라도나의 축구 기술를 배우고 싶다'라든지 '데니스 로드맨의 열정과 몸관리, 리바운드 기술을 본받아 내 것으로 만들어 농구할 때 써먹고 싶다', 또는 '코비의 슛폼과 플레이 스타일, 또는 그의 악착같은 근성과 노력하는 자세를 내 인생에도 적용하고 싶다'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롤 모델은 인격과 행동양식에 관한 용어이지, 실력이나 능력, 스타일에 관한 용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특정 용어가 약간 잘못 이해되고 사용되어지는 것 같아서 한 말씀 올렸습니다.

 다가오는 연말연시 건강하고 보람있게 잘 보내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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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맨" 조지 거빈은 제리 웨스트가 '자신이 돈내고 볼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선수'라고 까지 극찬을 했으며, 그 외에도 줄리어스 어빙, 마이클 조던, 게리 페이튼 등 수많은 레전드 농구인들이 극찬에 극찬을 더했던, 정말로 농구를 쉽고 우아하게 그리고 창조적으로 해내던 선수였다. 물론 이는 팬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피나는 기본기 훈련과 각고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6-8 (203cm)의 거빈은 슈팅 가드로서 최초로 3연속 득점왕에 올랐고, 역대 최고의 가드 중 한명으로도 꼽히지만 실제로는 전형적인 가드가 아니었다. 팀에서 2번으로 출장은 했지만, 당시의 스퍼스는 1가드-3포워드-1센터 시스템을 자주 쓰던 팀이었고, 거빈은 가드의 역할보다는 주로 스코링 스몰 포워드의 역할을 하던 선수였다. 당시의 스몰 포워드들은 골밑, 미드레인지, 장거리슛까지 마스터해야만 했던 전방위 공격수들이었고, 이는 거빈도 마찬가지였다. 주로 인사이드에서 오프볼-무브 중에 패스를 받아 골밑 득점을 하거나, 포스트업에서 양 손을 모두 사용하는 런닝 훅슛으로 득점을 했다. 외곽에서 공을 잡으면 드라이브인을 해서 장신 인사이더들이 손도 못 댈 핑거롤 레이업으로 득점을 하기도 했으며, 컷인 능력도 뛰어났고, 아무리 수비가 2중 3중으로 타이트하게 붙어도 결국에는 슈팅루트와 각도를 찾아내어 골을 성공시키고야 마는 타고난 골잡이였다. 3점슛도 매우 뛰어났다. 특히, 수비가 자신의 시야와 슈팅 각도를 완전히 커버하거나 가리면, 3점슛을 뱅크샷으로 성공시키던 슈팅의 귀재가 바로 조지 거빈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포워드와 가드를 "그네 타듯이 넘나드는" 포지션 파괴 스타일때문에 사람들은 거빈을 "스윙맨"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서 조지 거빈은 "원조" 스윙맨인 셈이다. 거빈 이전에 활약하기 시작했던 보스턴 셀틱스의 레전드 존 하블리첵이 플레이 스타일상 최초의 스윙맨 소리를 들어야 했으나, 아무튼 캐스터나 해설자들이 처음으로 스윙맨이란 단어를 사용했던 대상은 조지 거빈이었다.

자, 이쯤에서 그토록 유명했던 거빈의 핑거롤의 메카니즘을 한 번 짚고 넘어가 보자. 많은 농구 팬들께서 아마 이렇게 반문하실지 모르겠다. 핑거롤이야 이제는 한국선수들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극히 보편화된 레이업 기술이 아니겠냐고. 조던, 드렉슬러, 피픈, 에디 존스, 티맥, 코비, 모두들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기술이 아니겠냐고. 그런데...... 그게 그렇지가 않다. 아무리 덩크가 보편화된 공격기술이 되었다 하더라도 줄리어스 어빙과 마이클 조던의 덩크에는 뭔가 차원이 다른 깊이와 멋이 존재하듯이, 조지 거빈의 핑거롤은 매우 특별했고, 공이 손가락 끝을 떠나는 지점이나 궤적, 각도 등이 현재의 농구선수들은 흉내내기도 힘든 슛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핑거롤은 거빈 이전에 이미 존재했다. 가장 먼저 핑거롤을 경기에서 무기로 사용한 인물은 '윌트 체임벌린'이다. 체임벌린은 페인트존 근처에서 공을 건네받으면, 주로 턴어라운드 점퍼나 "터닝 핑거롤"로 득점을 올리곤 했다. 플레이 그라운드의 레전드 '커니 호킨스'도 핑거롤을 주무기로 사용한 선수다. 이 커니 호킨스의 긴 팔과 큰 손에서 터져나오는 다양한 각도의 핑거롤이 버지니아 스콰이어스에서 같이 뛰던 조지 거빈과 줄리어스 어빙에게 큰 영감을 가져다 주었다. 그래서 이 둘은 팀 연습이 끝난 후에도 코트에 남아 일대일 대결을 즐기며 자기들 나름대로의 핑거롤 기술을 계속 발전시켜 나갔던 것이다. 핑거롤 레이업이 게임 중에 자유롭게 구사가 되려면, 일단 큰 손은 필수다. 그리고 길고 부드러운 손가락, 유연한 손목 등도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체임벌린, 호킨스, 어빙, 거빈이 모두 이 조건에 잘 부합되는 신체의 소유자들이었다. 특히, 거빈은 손목을 뒤로 꺾어도 손가락 끝이 팔목에 닿는 놀라운 유연성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거빈의 핑거롤이 유명해진 이유는, 대체로 그 슛의 사정거리가 무척이나 길었다는 것과, 본인이 페인트존 안에만 있다면 어느 각도에서건 스핀먹은 레이업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는 데에 있다. 7~80년대 스퍼스 경기 영상을 보면, 거빈이 자유투 라인에서 핑거롤을 던지고 성공시키는 모습 등을 아주 흔히 볼 수 있다. 수비가 불가능한 거리와 각도다. 베이스 라인에서 돌파해 들어갈 때도 마찬가지. 보통 선수들이 한 두 걸음 더 치고 들어가야 할 지점에서 공은 이미 큰 궤적을 그리며 림을 향해 치솟곤 했다. 거빈의 핑거롤은 비단 레이업에만 국한된 기술이 아니었다. 자신만이 갖고 있는 손목과 손가락의 터치를 이용해 응용된 훅슛이나 플로터 등도 자유자재로 시도했으며, 이 모든 다양한 슛을 양 손 모두로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이 그의 크나큰 장점이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백보드를 이용해야 할 지, 아니면 그냥 림을 향해 던져야 할 지에 대한 슛셀렉션과 판단력, 임기응변력이 누구보다도 뛰어났던 선수가 거빈이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핑거롤은 이제 보편화된 기술이다. 그러나 필자는 아직까지도 거빈과 같이 먼 거리에서 높은 궤적을 그리며 날아가는 핑거롤은 목격한 적이 없다. 그리고 거빈처럼 경기당 6~7개의 우아하고도 난이도가 높은 핑거롤을 꾸준히 성공시키는 선수도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

조지 거빈... 필자는 그를 생각할 때마다 '핑거롤을 저작물로 만든 사나이'라는 특별한 호칭을 붙여주고 싶다. 별명인 '아이스맨'답게, 자신의 핑거롤 기술을 후세 선수들이 도용(?)치 못하도록 영원히 냉각시켜버린 것만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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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빈은 이와 같은 다양한 기술로 네 번의 득점왕에 올랐고, 세 번 연속으로 득점 타이틀을 따내는 기염 또한 토했다. 팀의 에이스 스윙맨으로서 수비를 2~3명씩 달고 다니면서도 52%에 육박하는 야투 성공률을 기록한 것이 놀랍기만 하다. 그 와중에 78년과 79년 두 번 연속으로 MVP 득표 2위를 한 것은 덤이라 할 수 있겠다. 거빈의 커리어 중 최고 하이라이트는 뭐니뭐니해도 1978년 시즌 마지막 날 벌어진 덴버의 데이빗 톰슨과의 득점왕 대결이었다.

시즌 내내 득점왕 자리를 놓고 각축전을 벌였던 두 선수는 시즌 종료 마지막 날까지도 싸워야만 했다. 먼저 벌어진 경기에서 73점을 쏟아부은 데이빗 톰슨이 마지막 경기를 남겨둔 거빈에게 총득점 58점 차로 앞서고 있었다. 59점을 득점하면 득점왕이 거빈의 차지가 되는 상황이었다. 모든 농구팬들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뉴올리언즈 재즈 원정경기를 시작한 거빈은 첫 여섯 개의 야투를 모두 실패한다. 너무 긴장한 탓이었다. 그러나 곧 슈팅리듬을 찾았고 1쿼터에만 20점을 득점하며 좋은 출발을 했다. 그러더니 2쿼터에서 그야말로 폭발을 하고 만다. 코트의 모든 각도에서 온갖 슛을 다 성공시킨 거빈은 이 한 쿼터에서만 33점을 득점한다. 이는 아직껏 깨지지 않는 한 쿼터 최다 득점 기록이다. 하프타임 때 거빈의 득점은 이미 53점. 득점왕 경쟁의 승자는 이미 정해졌다. 3쿼터 중반이 지나기도 전에 거빈은 63점을 득점했고, 거칠어지는 재즈 선수들의 수비와 반칙때문에 플레이오프를 앞두고 부상의 가능성을 염려한 더그 모 감독이 거빈을 벤치로 불러들인다. 30여분만 뛰고 기록한 63득점이었다. 4쿼터까지 놔두었더라면 80점은 가뿐히 넘어섰을 슈팅리듬이기도 했다. 득점왕은 거빈의 차지였다 - 평균 27.22점 (톰슨 - 평균 27.15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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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거빈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 거리가 하나 있다. 바로 그의 아이스맨 나이키 포스터에 얽힌 일화다. 80년대 초반까지 농구화 시장을 석권하다시피했던 컨버스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낸 나이키는 광고 포스터에서부터 차별화를 선언하고 나섰다. 1982년의 일인데, 이미 줄리어스 어빙, 래리 버드, 매직 존슨을 모두 스폰서하고 있던 컨버스 운동화였어서, 애초부터 쉬운 싸움이 아님을 간파하고 있던 나이키는 리그 MVP 모제스 말론, 그리고 득점왕이자 올스타 팬득표 1위의 조지 거빈을 앞세운 최고급 광고 포스터를 제작하기에 이른다. 일류 사진사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창안해낸 회심의 나이키 포스터 처녀작이 바로 거빈의 아이스맨 포스터다.

얼음 보좌에 앉아 은색 농구공 위에 양 손을 얹고 썩소를 날리고 있는 거빈이 이 포스터의 컨셉이다. 필자의 친구 누님이 1982년 당시 미국 방문길에 이 포스터를 사왔는데, 그 친구가 액자로 제작해 벽에 걸어 놓는 바람에 이 포스터를 갖고 있던 그 친구를 무척이나 부러워했던 기억이 있다.

이 포스터의 미국 내 인기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나이키사는 이 멋진 포스터를 다량으로 제작해 아주 저렴한 가격에 팔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나이키 농구화 판매량도 수직상승하기 시작했다. 한 때 이 포스터의 판매량이 나이키 농구화 판매량을 앞지르기도 하는 웃지 못할 헤프닝이 일어나기도 했다. 주객이 전도된 셈이었다. 현재도 이 1982년도판 오리지날 나이키 포스터가 EBay같은 곳에 가끔 경매로 올라오는데, 여기저기 찢기고 구겨진 포스터인데도 값이 미달러로 $200까지 치솟곤 한다. 90년대와 최근 들어 이 포스터의 Replica들이 제작되기도 했지만, 이러한 복제품들은 이미지나 색상이 선명하지가 않고, 사실 별 가치도 없다.

아무튼 조지 거빈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70년대와 80년대 초반 농구화의 지존이었던 컨버스사에 정면도전을 한 나이키사의 선봉장이 되다시피 했고, 당시 나이키사의 이 참신한 아이디어는 지금도 높게 평가를 받고 있다. 거빈이 시작한 이 나이키 농구화 포스터의 전통은 모제스 말론, 버나드 킹과 같은 인물들에 이어 마이클 조던이 물려받았고, 나이키사의 농구화 판매량과 인기도는 80년대 내내 철옹성을 구축할 수 있었다.

나이키 포스터로 선후배의 연을 맺은 거빈과 조던은 거빈의 은퇴년도인 1986년에 시카고 불스에서도 한솥밥을 먹는 인연으로 이어졌다. 노쇠화를 보이며 은퇴를 준비하던 거빈이 후배인 앨빈 로벗슨에게 자리를 내주기 위해 스스로 트레이드를 요청했고, 스퍼스는 거빈을 조던의 불스로 보내줬다. 자신의 루키시즌을 줄리어스 어빙과 함께 시작했던 거빈이 이제 자신의 은퇴시즌을 어빙의 후계자라 할 수 있었던 마이클 조던과 함께 하게 된 것이다. 조던이 2년차 때 입은 큰 발목부상때문에 조던과 거빈이 실제로 함께 뛴 경기는 20게임이 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두 선수는 경기가 없는 날도 함께 하며 끊임없이 많은 대화를 나눴고, 매일같이 일대일 농구를 하며 돈독한 우정을 키워 나갔다. 체임벌린 이후 최초로 3연속 득점왕의 자리에 올랐던 거빈의 풍부한 경험에서 나온 노하우가 조던의 경기력에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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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빈은 조던이 없는 동안 평균 20점에 가까운 득점을 하며 불스를 이끌기도 했다. 댈러스 원정경기에서 있었던 일화다. 조던이 벤치에 앉아 지켜보는 가운데, 거빈이 전반에만 35득점을 했다. 그러나 후반전에 체력이 달리면서 총 40득점에 그치고 말았다. 조던이 거빈에게 "형님, 많이 늙으셨구려. 후반전 통틀어 단 5득점이라니..." 하면서 장난기있게 놀리자, 거빈이 "이 친구야, 전반전은 내가 젊었을 때는 어떻게 플레이했었는지를 자네에게 보여주려 한 것이고, 후반전은 왜 내가 이제 물러나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야" 하면서 "이제 자네가 리그의 득점왕이 되어주게"라는 말을 해줬다. 그리고 조던은 다음 시즌부터 내리 7시즌 연속 득점왕의 영예를 누렸다.

거빈은 1986년 불스와의 1년 인연을 마치고 NBA에서 은퇴했다. 26,595점이라는 통산득점과 함께. 그 후, 거빈은 이탈리아 리그의 Banco Roma팀에서 한 시즌을 더 뛰었다. 이미 35세가 넘었지만, 평균 26.1점을 득점하며 맹활약했고, 나중에는 39세의 나이로 CBA의 Quad City Thunder 팀에서 한 시즌을 뛰며 평균 20.3점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의 지칠줄 모르는 농구를 향한 열정과 득점력을 대변해주는 간접적인 증거다.

조지 거빈에게 항상 따라다니는 두 가지 통설이 있는데, 하나는, '거빈은 팀을 우승권으로 이끌 능력이 안되는 뛰어난 스코러였을 뿐이었다'라는 평가고, 또 하나는, '그의 수비력이 제로였다'라는 평가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거빈은 사실 네 번이나 팀을 컨퍼런스 파이널까지 올려 놓았다. 다만, 그때마다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상대해야 했던 팀이 당대의 최고 팀들이었던 헤이스, 언셀드의 워싱턴 불렛츠, 매직 존슨, 압둘자바의 레이커스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거빈은 일대일 수비능력이 뛰어나지는 않았으나, 대신 패싱라인을 차단하는 능력이나 헬핑은 매우 뛰어났던 선수였다. 역대 가드들 중 블락샷 1위에 랭크되어 있는 선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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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으로부터의 은퇴 이후, 스퍼스의 어시스턴트 코치 역할을 잠시 했었지만, 그가 은퇴 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몸담고 일해오고 있는 분야는 사회복지 활동이다. 본인 스스로가 너무나도 불우한 유년기, 청소년기를 보냈던 터라, 지금도 샌안토니오 지역의 가난하고 환경이 좋지 못한 아이들을 돕고 교육하는 일에 대부분의 시간과 자산을 쏟아 부으며 지내고 있다. 교육을 받을 재정적 여건이 안되는 아이들에게는 기술 양성을 위한 전문학교이자 비영리단체인 the George Gervin Youth Center에 무료로 입학시켜주는 특혜를 주고 있으며, 십대 미혼모들에게도 무료 주거시설을 마련해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정성껏 보살피고 있다.

본인이 선수로서 얻었던 모든 영예와 재물을 고스란히 사회에 환원하며 거기서 진정한 삶의 보람을 느끼고 사는 사람이 바로 조지 거빈이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든든한 구단 후배 데이빗 로빈슨 목사가 함께 한다. 이 둘을 중심으로 한 샌안토니오 구단의 지역사회 봉사의 규모는 실로 엄청나다. '얼음 사나이'의 따스한 손길로 인해 샌안토니오 시가 봄 눈 녹듯 녹아 내리고 있다.

'아이스맨' 조지 거빈.... 그는 진정으로 살아 숨쉬는 레전드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으나 '아이스맨', '핑거롤의 달인', '득점기계'와 같은 수식어를 달고 다니며 NBA에서 대성공을 하는 '인간승리'를 일궈냈고,  지금은 예전의 자신처럼 힘든 상황에 처한 이들을 위해 다시 한 번 뜨거운 열정을 불태우고 있지 않은가?

그에게 "당신은 욕심쟁이, 우후훗 ~"이라는 멘트를 날려주고 싶다.

글: Doctor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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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농구를 접하신 분들도 7~80년대를 풍미했던 ‘아이스맨’ 조지 거빈과 그의 ‘핑거롤’에 관한 이야기 쯤은 익히 들어 잘 알고 계실 것이다. 조지 거빈은 줄리어스 어빙과 함께 70년대에 중학생이던 필자를 NBA의 세계로 빠지게 만들어준 장본인이다. 그동안 여러 농구팬들로부터 거빈에 관한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었지만, 이 선수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의 칼럼으로는 부족할 것 같았고, 또 막상 시리즈로 쓰자니 일이 너무 커질 것 같아서, 차일피일 미뤘던 것이다. 허나,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다는 I Love NBA 카페나 NBA 매니아와 같은 사이트에 조차도 거빈에 관한 칼럼 하나가 없음을 며칠 전에 발견하고는, 부족하지만 2부 정도의 부담없이 읽을만한 짧은 칼럼이라도 써서 이 선수를 국내에 소개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12년 연속 올스타 선정, 3년 연속 올스타 최다 팬득표, 3년 연속 (총 4년) 득점왕, 커리어 평균 야투 성공률 52%, 2년 연속 MVP 득표 2위, 7번의 All-NBA (퍼스트 팀 5회) 선정, 명예의 전당 헌액, 위대한 50인 선정 등등, 거빈의 선수로서의 업적과 위대함은 짧게 열거하기가 쉽지 않다. 역대 최고 슈팅가드들을 논할 때 항상 5위 안에 이름을 올리는 거빈. 그를 제대로 평가하려면 그의 전성기적 경기영상을 많이 봐야만 한다. 거빈의 플레이를 직접 본 팬들은 알 것이다. 스탯이나 수상경력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그만의 멋이 있었음을. 코트에 서있는 그가 얼마나 매력이 있었으며 카리스마 또한 넘쳤는지는 동시대를 살아가며 함께 호흡을 하지 않고는 사실 느낄 수 없는 부분일 것이다. 포지션이나 신장, 경기를 풀어나가는 모습으로만 미루어 비교한다면, 현 로켓츠의 트레이시 맥그레이디가 가장 많이 닮았다고 볼 수 있겠지만... 사실 거빈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정말로 특이하고 개성이 넘치는 고유의 색깔이 넘쳐나는 선수였다.

조지 거빈의 어린 시절은 몹시 불우했다. 디트로이트의 빈민굴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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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한 번도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자란 적이 없다. 거빈의 아버지가 그의 출생과 동시에 가족을 버리고 가출해버렸던 것이다. 거빈의 어머니는 이 철부지 육남매를 홀로 먹여 살려야만 했다. 공중화장실 청소로부터 종이봉투를 만드는 공장일까지... 거의 하루의 3분의 2를 막노동으로 보내며, 그녀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만 했다. 거빈이 회고하길, 자신의 집은 정말로 가난했지만, 6남매 모두 끼니를 거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그녀는 훌륭하고 강한 어머니였다. 이러한 어머니의 노고를 보며 자란 거빈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성공해서 어머니를 행복하게 해드리겠다는 각오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살던 주거지가 위험한 갱들이 득실거리던 지역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었어서, 어릴 적부터 마약, 술, 창녀, 폭력, 살인 등에 완전히 노출되었던 거빈이었지만, 프로농구선수가 되고자 하는 어릴 적 꿈을 좇아 그는 주변의 유혹을 이길 수 있었으며 착실히 농구에만 열중하는 청소년기를 보낼 수가 있었다. 많은 위대한 농구선수들의 레파토리처럼 들리시겠지만, 거빈은 농구를 하기엔 신장이 터무니없이 작았다. 그리고 몸은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것 같은 젓가락이었다. 그가 중학교 농구팀 감독으로부터 퇴짜를 맞은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거빈은 여기서 포기하지 않았다. 어머니로부터 영향을 받은 하나님을 향한 기독교 신앙은 어린 거빈을 더더욱 강하게 만들어줬고, 결국,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세 가지 응답을 받았다. 첫째, 그의 키가 갑자기 쑤욱쑤욱 자라기 시작한 것이다. 173cm였던 신장이 몇 개월 만에 193cm가 되었다. 둘째, 농구팀 감독으로부터는 퇴짜를 맞았지만, 그를 불쌍히 여긴 Meriweather 코치로부터 꾸준히 농구수업을 받는 특권을 누릴 수가 있었다. 셋째, 수줍고 내성적이었으나 심성이 착했던 거빈은 중학교 경비원 아저씨와 쉽게 친해질 수 있었고, 경비원은 밤에도 체육관을 사용할 수 있게끔 그에게만 특별히 허락을 해주었다.

거빈은 하늘이 그에게 내려준 이 세 가지 기회를 소중하게 여겼다. Meriweather 코치로부터 농구의 기본기와 전략 등을 상세히 배운 그는, 저녁시간만 되면 학교 체육관으로 가서 쉴 새 없이 그만의 슈팅연습을 했다. 그의 전매특허 ‘핑거롤’은 바로 이 때 그가 스스로 만들어낸 기술이다. 1년 365일 단 하루도 개인연습을 거른 적이 없어서, 매주 일요일에도 체육관 문을 열어주러 학교에 와야만 했다는 마음씨 착한 당시 경비원 아저씨의 증언에 따르면, 거빈은 매일같이 육백 개에서 일천 개에 달하는 슈팅을 마치고서야 집에 돌아갔다고 한다. 그의 중고등학교 시절은 이와 같이 오로지 농구 뿐인 인생이었다. 거빈은 선수시절에 한 TV 인터뷰에서, “몇 년 동안 매일같이 컴컴한 체육관에서 혼자 공을 드리블하며 슛을 쏴대는 나를 알아 준 이는 이 세상에 오직 하나님 뿐이셨다” 라며 당시의 힘들고 외로웠던 나날들을 짧고 담담하게 표현했다.

Eastern Michigan 대학시절의 거빈은 더이상 말라깽이 코흘리개가 아니었다. 그는 이제 신장도 201cm이었으며, 2학년 때는 평균 29.5점에 15.3개의 리바운드를 잡아내는 명 포워드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선수로서의 황금기에 청천벽력과 같은 사건이 하나 일어났으니, 바로 Roanoke 대학과의 토너먼트 경기 중에 거빈의 어머니를 입에 담아 트래쉬토킹을 한 상대선수에게 그가 정권을 날렸던 것. 거빈은 어릴 때부터 80년대말 프로생활을 청산할 때까지 누구와 싸우거나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어머니가 욕의 대상이 되자 그것만큼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큰 불상사였다. 거빈의 대학감독은 책임을 지고 사임해야 했으며, 거빈 자신도 NCAA 선수자격을 박탈당하고야 말았다. 졸지에 NBA 선수로서의 꿈을 접어야 했던 거빈은 EBA라는 한 마이너리그에서 밥벌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이 전화위복이 될 줄이야... 우연히 마이너리그 경기장에 왔다가 거빈의 실력을 꿰뚫어 본 ABA 버지니아 스콰이어스의 스카웃 담당자 죠니 커 씨가 거빈을 스카웃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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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조지 거빈은, 이미 일 년 전부터 버지니아 스콰이어스에서 뛰며 ABA 리그의 역사를 새롭게 쓰고 있던 Doctor J 줄리어스 어빙과 한 솥밥을 먹게 되었다. 나중에 한 번 더 언급하겠지만, 조지 거빈은 남들에게는 없는 아주 특이한 경력이 하나 있다. 줄리어스 어빙과 마이클 조던, 이 두 레전드들 모두와 한 팀에서 뛰어봤던 유일한 선수였다는 것.

조지 거빈은 슈팅 가드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본래의 포지션은 스몰 포워드였던 선수다. 줄리어스 어빙과 한 팀에서, 그것도 동포지션에서 뛰면서 충분한 출장시간을 얻어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둘이서 함께 뛴 1972~73 시즌에 줄리어스 어빙은 평균 31.9점을 득점하며 득점왕이 되었고, 어빙을 백업하며 슈팅 가드 역할까지 소화해야 했던 루키 거빈은 평균 23분의 출장시간을 기록하며 14.1점을 득점했다. 디트로이트 뒷골목 출신 말라깽이의 비교적 성공적인 프로 데뷔였다.

거빈은 정말 운대가 따라주는 인물이었다. 어빙이라는 훌륭한 수퍼스타와 함께 하며 프로 첫 시즌을 부담없이 무난히 보낼 수가 있었던 그에게 또다른 행운이 찾아온 것이다. 바로 줄리어스 어빙이 뉴욕 넷츠로 가게 된 것. 버지니아 스콰이어스의 주전 스몰 포워드 자리는 이제 그의 몫이었다. 거빈은 평균 23.4점, 8.4리바운드, 1.4스틸, 1.6블락샷을 기록하며 순식간에 팀의 에이스가 되었고, ABA리그의 새로운 수퍼스타 스윙맨으로 떠올랐다. 물론, 그는 생애 첫 올스타 게임에도 출전할 수 있었다.

거빈이 본인 특유의 ‘핑거롤’과 함께 수퍼스타로 떠오를 무렵인 1973년, 그의 팀메이트인 “Fatty” 테일러가 그에게 별명을 지어주었다. 이름하여 “Iceberg Slim”. 우리말로 굳이 표현하자면 “비쩍 마른 얼음 빙산”이 되겠다. 코트 위에서도 평상시에도 절대로 표정의 변화가 없는 차갑고 냉정해보이는 그의 얼굴표정때문에 붙여진 별명이었다. 거빈은 그랬다. 자신의 버저비터로 팀이 승리를 챙겨도, 상대선수가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어도, 그의 얼굴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필자는 거빈의 경기를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을 넘게 봐 왔지만, 한 번도 그가 코트 위에서 웃거나 화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불우하고 외로운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거빈은 감정을 표현할 줄을 몰랐다.

그다지 느낌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던 이 별명을 그의 팬들이 “The Iceman”으로 바꿔주었고, 그 때부터 거빈은 “얼음 사나이”의 이미지를 좇아 커리어 내내 ‘쿨’한 모습을 꾸준히 유지했다. 거빈의 몸동작은 굉장히 부드럽고 편안해 보였다. 영어로 표현하자면 effortless라고나 할까? 전혀 무리하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상상도 못할 각도와 거리에서도 불가능해 보이는 슛들을 너무 쉽게 성공시키곤 했다. 마치 피겨 스케이터들이 얼음을 지치듯, 코트 위에서 부드럽게 미끄러져 들어가는 그의 풋워크와 스탭들은 “The Iceman”이라는 별명과 너무나도 잘 맞아 떨어졌다.

이런 거빈의 스타성을 알아본 ABA 리그의 신생 팀 샌안토니오 스퍼스는 연고지와 팀 명을 바꾼 후, 1973~74 시즌 중간에 그를 영입해 온다. 거빈의 나이 21세. 이제 바야흐로 샌안토니오의 전설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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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여름으로 기억한다. 서울 신세계 백화점 아래에 위치한 회현 지하상가를 지나고 있을 때였다. 한 비디오 대여점 쇼윈도우에 마치 흑인 보컬그룹을 연상시키는 사진 한 장이 비디오 케이스를 장식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영화제목은 ‘피츠버그의 행운아들’. 얼핏 보기에도 B급 영화같아 보였다. 그냥 지나치려던 순간, 비디오 케이스 앞면의 흑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줄리어스 어빙이었다. 70년대 중반부터 그토록 좋아했던 농구스타. 그가 출연한 영화였던 것이다.
 
무작정 대여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주인장께 다짜고짜 저 비디오를 팔라고 졸라댔다. 뭔가 이 비디오에 큰 가치가 있음을 간파한 주인장께서 터무니없는 값을 불렀다. 그 때 그 분이 부른 가격이 기억은 안나지만, 옆에 놓여있던 새로 나온 블록버스터급 영화의 비디오 소매가격과 거의 같았다. 더구나 이 비디오는 이미 대여가 많이 나갔던 중고 비디오. 그래도 샀다. 돈이 아깝지 않았다.
 
집에 오자마자 틀어보니, 역시나 줄리어스 어빙이 주연한 농구영화였다.
 
영화의 원제목은 “The Fish that Saved Pittsburgh”. 굳이 번역을 하자면, “피츠버그 시를 구해낸 물고기 자리 사나이들”이 되겠다. 아마도 1984년 당시를 기점으로 현재까지 한 30번은 넘게 본 것으로 기억된다.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애수” (1940년, 로버트 테일러, 비비안 리 주연) 다음으로 가장 많이 본 영화가 바로 이 영화다. 현재도 이 영화를, 당시에 구입한 비디오테이프, TV에서 녹화한 버젼, 그리고 오리지날 VHS 비디오테이프 원본으로 소장하고 있으니, 필자는 이 영화에 미친 사람임에 틀림없다.
 
이 영화는 1978년 길버트 모제스라는 한 흑인 감독에 의해 펜실바니아 주에 위치한 피츠버그 시에서 촬영이 됐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선지 영화의 개봉은 1979년 11월로 미뤄졌다. 영화의 시작부터 끝나는 순간까지 쉴 새 없이 디스코 음악이 배경음악으로 깔리기 때문에 영상이 대체적으로 어두움에도 분위기는 매우 흥겹다. 무엇보다도, 당시에 현역이었던 NBA 선수들이 무더기로 출연을 하기 때문에 눈요기 거리가 넘쳐난다.
 
당시에 최고 인기스타였던 줄리어스 어빙을 위시로 하여, 커림 압둘자바, 놈 닉슨, 커니 호킨스, 로니 셸튼, 루 헛슨, 밥 르니어, 스펜서 헤이우드, 돈 체이니, 크리스 포드, 세드릭 맥스웰, 마이컬 톰슨 등이 출연을 하고, 영화 “그리스”에서 올리비아 뉴튼 존의 날라리(?) 친구 역을 맡았던 스토카드 채닝과 3천여 명의 경쟁자를 뚫고 이 역할을 따낸 제임스 본드 3세라는 특이한 이름의 아역 흑인배우가 어빙과 함께 영화의 주연을 맡는다. 유명한 농구 캐스터, 마브 알버트와 칙 헌 씨도 찬조출연을 함으로써 영화를 빛내는데 일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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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플롯은 상당히 단순하고 어떤 면에서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유치하기까지 하다.
 
영화의 시작은 NBA 최약체 구단인 The Pittsburgh Pythons라는 팀의 경기영상과 함께 한다. 이 팀은 모제스 거쓰리 (줄리어스 어빙)라는 수퍼스타 한 명을 거느린 원맨팀이고, 팀 케미스트리가 좋지 못해 연패의 늪에 빠진 팀이다. 특히 모제스 거쓰리가 받는 리그 최고 연봉에 불만을 품은 루크 터커 (제리 체임버스)를 중심으로 대부분의 팀원들이 태업에 들어가거나 타 팀으로 떠나버린다.
 
구단 자체가 문을 닫느냐 마느냐 하는 절대절명의 기로에서, 팀의 볼보이인 타이론 (제임스 본드 3세)이 한 점성술사를 찾아가 어떻게 하면 이 팀이 살아날 지를 의뢰한다. 미녀 점성술가인 모나 몬디유 (스토카드 채닝)는 희한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팀의 프랜차이즈 플레이어인 모제스 거쓰리 (줄리어스 어빙)의 별자리가 ‘물고기 자리’이므로, 생일이 물고기 자리인 선수들만을 모집해서 팀을 꾸리면, 엄청난 팀웤과 선수 간에 시너지 효과가 발생해 최고의 팀으로 우뚝 설 수 있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역주 - ‘물고기 자리’는 ‘Pisces’라고 하는데, 2월 19일에서 3월 20일 사이에 태어난 사람들이 이 별자리에 해당됩니다. 줄리어스 어빙은 실제로 1950년 2월 22일 생입니다. 여담이지만, 필자도 2월 28일 생입니다).
 
이 말도 안되는 점성술사의 해결책과 구단 볼보이의 제안이 구단 측에 받아들여지고, 구단은 새로운 선수들을 모집하는 광고를 낸다. 전국에 퍼져있는 온갖 어중이 떠중이들이 면접을 보고 공채시험을 본다. 특히 과거에 프로농구선수가 되고 싶어했으나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농구를 계속할 수 없어서 낙오되고만 사회의 폐인들, 심지어는 농구를 때려치우고 성직자의 길로 들어선 목사까지도 이 공채시험에 참가를 한다. 이들 중에서 오로지 생일이 물고기 자리이며 잡초같이 살아온 농구선수 출신들만 뽑아서 구성된 팀이 바로 Pittsburgh Pisces (피츠버그의 물고기들)다.
 
이렇게 급조된 파이시스 팀은, 점성술사인 모나가 예측한대로 엄청난 호흡과 팀웤을 자랑하며 승승장구하고, NBA의 모든 강팀들을 다 무너뜨린 후, NBA 파이널에서 압둘자바의 로스앤젤리스 레이커스를 만난다. 문제는, 결승전이 시작되는 시간대가 물고기 별자리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 별 힘을 못 쓰는 최악의 시간대였다는 것. 모나와 타이론은, 우승하기에는 레이커스가 너무 강했고, 반면 파이시스 선수들은 되는 것 하나 없는 졸전의 연속임을 보고, 경기를 거의 포기해버린다.
 
자신들의 별자리 운이 다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수들만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을 때였다. 4쿼터 몇 분을 남기고 마지막 작전타임을 부른 주장 모제스 거쓰리 (줄리어스 어빙)는 선수들을 불러모으고, 여기까지 그들이 얼마나 힘들게 왔는 지를 상기시키며 선수들을 독려한다. 거쓰리의 리더쉽에 힘을 얻은 선수들은 젖먹던 힘가지 다해가며 승부를 원점으로 돌려놓고, 1점 차로 뒤진 마지막 클럿치 상황에 주인공 모제스 거쓰리가 위닝샷을 넣으며 피츠버그 파이시스는 구단 사상 최초로 우승을 한다.
 
모제스 거쓰리는 우승과 함께 사랑도 얻는다. 볼보이 타이론의 누나와 눈이 맞은 것. 우승 축하파티가 코트 한 가운데에서 벌어지고, 거쓰리와 토비 (마가렛 애이브리)가 서로 포옹한 채 키스를 하며 영화의 막이 내린다.
 
어떠신가? 확실히 내용은 좀 진부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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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농구 영화로는 첫 영화이다 보니 이런 저런 ‘옥에 티’들도 발견되고, 많은 에피소드들도 생기게 됐는데, 그 중 몇 가지만 소개를 해보고자 한다.
 
(1) 농구 경기들을 찍으려면 가장 큰 문제는 관중동원이 아닐까 싶다. 만 오천에서 이만 가량되는 액스트라를 동원할 수도 없고, 지금 같으면 CG를 이용해 충분히 숫자를 불릴 수 있겠지만, 당시로서는 불가능했던 사안이다. 역시나 이 영화의 경기 장면들을 보면 실제 NBA 경기 (대체로 워싱턴 불렛츠의 경기 장면들이다) 중계장면과 짜집기를 한 모습이 역력히 보이는데, 예를 들면, 방금 전만 해도 훵하니 비어있던 관중석이 몇 초 후에는 빈자리없이 꽉 차있는 모습으로 둔갑해있는 장면들이다.
 
(2) 영화가 개봉된 후에도 영화 자체보다는 영화의 OST, 즉, 디스코 풍의 주제가 레코드 판들이 더 잘 팔려나간 영화였다. 음반의 타이틀이 ‘The Fish’였는데, 지금도 EBay와 같은 곳에서는 이 레코드 판들이 심심치않게 올라오고 있고, 또 구매도도 상당히 높은 편이다.
 
(3) 이 영화의 아역을 맡은 제임스 본드 3세는 30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발탁됐다. 주연배우로 낙점받은 후 영화 스튜디오에 있는 화장실에서 이 아이가 줄리어스 어빙과 맞닥뜨렸는데, 어빙을 알아보지 못한 제임스 曰, “키가 되게 크시네요?” 이에 어빙이 “너는 내가 누군지 모르니?”라고 묻자, “이 영화에 출연하려고 테스트 받으신 분들 중 하나 아니세요?”
 
(4) 줄리어스 캐리 (영화에서 아랍 스타일의 흰 천 '고트라'를 머리에 두르고 나오는 자말 트루쓰 역할)는 농구를 배워본 적이 없고, 해본 운동이라곤 가라데와 태권도 밖에 없었다는데, 이 영화에서 놀라운 운동능력을 선보이며 멋진 덩크들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해내는 바람에 많은 농구 구단들에서 접촉이 들어왔다고 한다.
 
(5) 최근에 미국의 영화 평론가들이 수백, 수천개에 달하는 “스포츠 관련” 영화나 다큐들을 통틀어 작품성 등을 중심으로 순위를 매겨보는 시간을 가졌다는데, 이 영화를 역대 순위 75번 째에 올려 놓았다. 상당히 높이 평가받았다고 봐진다. 거의 과대평가 수준이다.
 
(6)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모제스 거쓰리 (어빙)가 선수들을 독려하며 “점성술은 허상이야. 우리의 운명은, 별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스스로의 땀과 노력, 그리고 자긍심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라네. 나는 그것을 믿고 나가 싸워 이길 것이야. 다들 별자리만 믿고 여기서 주저앉을 건가? 아니면 나를 믿고 따르겠는가?”라는 멋진 대사를 읊는데, 이 말때문에 점성가들을 비롯한 그 쪽 계통(?) 일에 종사하는 많은 분들이 줄리어스 어빙의 안티가 되기도 했다.
 
(7) 이 영화의 감독 이름이 길버트 ‘모제스’인데, 영화 속 주인공의 이름도 ‘모제스’ 거쓰리다. 이 ‘모제스’ 역을 맡았던 어빙은 몇 년 후에 ‘모제스’ 말론을 팀원으로 맞아, 영화 속에서의 결승전 상대였던 커림 압둘자바의 로스앤젤리스 레이커스를 실제 상황에서 꺾고 우승의 감격을 누린다. 묘한 우연이 아닐 수 없다.
 
 
아카데미는 물론 어느 영화제에도 출품될 수가 없었던 이 B급 영화, NBA 선수들이 보여주는 어색한 연기들,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는 디스코 음악...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농구 팬들이 DVD로 소장하고픈 영화가 바로 이 영화일 것이다. 70년대 NBA 레전드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으며, 특히나 70년대를 살았던 세대들에겐 당시의 의상이나 음악, 헤어 스타일 등이 추억으로 다가올 영화이기 때문이다.
 
농구영화의 효시였던 “The Fish that Saved Pittsburgh”... 최소한 필자에게는 하나의 클래식과 같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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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A 리그는 시작할 때부터 NBA와 비교해서 가능하면 다른 스타일의 체제와 전통으로 경기운영을 할 것을 모토로 삼았던 프로리그였습니다. 런-앤-건 스타일, 팬들을 즐겁게 할 수 있는 점프하고 덩크하는 농구, 거기에 작전타임 때마다 등장하는 비키니 차림의 치어걸들, 그리고 알록달록한 색깔있는 농구공에 3점 라인까지.....

ABA는 자금이 넉넉한 리그는 아니었지만 유능한 선수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었고, 창단된 지 오래되지는 않았어도 많은 수의 고정 농구팬들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ABA 리그가 NBA와의 차별화를 선언하고 난 후에, 가장 큰 화제를 몰고 왔던 이슈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대학 중퇴생들도 프로 드래프트에 참가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게 한 것이죠.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대학 졸업생들만이 NBA 드래프트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운동선수가 프로가 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 당시의 사회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ABA는 이 규정과 고정관념을 깨버리기로 결정했습니다. 아마도 신생 프로리그로서, 대학 졸업생들을 놓고 NBA 리그와 줄다리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중과부적인 싸움이라 생각되어 그랬을 수도 있겠지요. 아무튼 이 규정은 실행이 되었고, 이러한 결과로 ABA는 대학 3년만 마치고 조금 일찍 프로에 뛰어들고 싶어했던 ‘줄리어스 어빙’과 같은 거물을 NBA에 빼앗기지 않고 데려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스펜서 헤이우드는 이러한 두 프로리그간의 알력 사이에서 혜택도 받았고, 또한 큰 손해를 입기도 했던 레전드 빅맨이었습니다. 오늘 이 헤이우드 선수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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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우드는 1949년생으로 신장 206cm(6-9)의 파워 포워드 겸 센터였습니다. 대학 1년생일 때 이미 시즌 평균 28.2점, 22.1리바운드를 기록했던 괴물 헤이우드는, 1학년을 마친 뒤 1968년 멕시코 올림픽에 출전할 미국 국가대표팀에 뽑히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19세의 나이로 미국에게 금메달을 안겨주며 올림픽 토너먼트의 최고선수가 됩니다.

미국팀 내에서는 평균 16.1점으로 최다 득점자였고, 또한 올림픽에 참가한 모든 농구선수들 중에서 리바운드와 야투율 1위를 석권하기도 했지요. 그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몰랐습니다. 1968년, 헤이우드는 디트로이트 대학으로 편입을 했고, 그곳에서도 그는 시즌 평균 32.1점, 21.5리바운드를 기록하며 화제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대학 첫 2년 동안에 평균 30점에 20리바운드를 기록한 이 괴물을 프로 구단들이 가만 놔둘 리가 없었지요. 그의 졸업년도인 1971년에 맞춰서 NBA의 버펄로 브레이브즈 구단이 그를 미리 드래프트 해버립니다. 헤이우드가 졸업하려면 2년을 더 기다려야 했는데도, 이 선수를 다른 팀에서 데려가게 놔두고 싶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러나 헤이우드는 대학 2년을 마친 1969년에 ABA 리그의 Denver Rockets와 보기좋게 계약을 체결해 버립니다. 이런 것이 NBA가 ABA를 싫어하고 경멸했던 이유 중 하나가 되는 것이죠.

그는 프로리그 데뷔 첫시즌에 폭풍처럼 리그를 강타합니다. 평균 30.0점에 19.5리바운드로 두 부문 모두 리그 정상에 올랐고, 야투율도 1위, 거기에 신인왕, 리그 MVP, 올스타게임 MVP까지, 상이란 상은 모조리 싹쓸이 해버리지요.

NBA의 두 기둥, 빌 러셀과 체임벌린 중, 러셀은 이미 은퇴를 했고, 체임벌린은 무릎부상의 여파로 노쇠화 기미가 보이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헤이우드의 현란한 빅맨 플레이는 이런 지배적인 센터를 그리워하던 NBA 팬들까지 ABA 리그로 끌어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 때였습니다. 문제가 터진 것은.

ABA에서 성공적인 첫시즌을 마친 헤이우드를 NBA 산하의 시애틀 수퍼소닉스가 접근을 해 계약을 맺은 것입니다. 이 계약과정에서 많은 편법이 적용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아무튼 기본적으로 시애틀 수퍼소닉스 구단은 리그의 중요한 규정 하나를 깨뜨려 버렸지요. 바로 ‘대학 중퇴생은 NBA에서 뛸 수가 없다’는 규정 말입니다. 시애틀 구단의 이러한 이기적이고 괘씸한(?) 행동에 대해 NBA 사무국은 헤이우드까지 싸잡아 소송을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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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송과정은 길고도 험난했습니다. 헤이우드는 더이상 운동에 전념할 수가 없었고, 시애틀 구단 홀로 거대한 NBA 리그를 상대로 싸우기엔 너무나도 벅찼습니다. 이 때, 헤이우드의 변호인들 측에서, “헤이우드는 가족의 생계를 혼자 짊어진 사람이니 재판장의 선처를 바란다”는 요청을 넣었습니다 (여담이지만, 가족부양의 중요성을 외치던 라트렐 스프리웰이 오버랩 되는군요). 놀랍게도 이 요청은 받아들여졌고, 헤이우드와 시애틀 구단은 NBA를 상대로 승소할 수가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기적이 일어난 것이죠.

이렇게 해서 길고 긴 우여곡절 끝에 스펜서 헤이우드는 역사상 최초의 대학 중퇴생 출신 NBA 선수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험난한 인생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너무나도 장기화됐던 법정싸움 때문에 그의 첫 NBA 시즌은 코트에 발도 못 붙여본 채 거의 다 종료되고 있었고, 경기장이든, 길거리이든, 그가 가는 곳이면 어느 곳에서나 그는 심한 야유와 욕설을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시애틀에서 뛴 네 시즌동안, 헤이우드는 게임당 평균 25~30점, 12~14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이름값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NBA 사무국과 수많은 안티팬들의 텃세에도 불구하고, 그는 4년 연속으로 올스타에 뽑혔으며, 2회의 All-NBA 퍼스트팀, 2회의 All-NBA 세컨드팀에까지 뽑히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뛰어난 선수였음에도 불구하고 광고 하나가 들어오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올스타 게임 전에 선수들을 소개할때도 그의 이름이 호명되면 팬들은 일제히 야유를 보내곤 했지요.

헤이우드의 게임은 한마디로 호쾌했고 멋이 있었습니다. 좋은 신체 사이즈에 비해 작았던 두상, 긴 팔과 큰 손, 그리고 출중한 점프력을 이용해 페인트존을 힘차고도 우아하게 장악하던 그의 모습은 NBA에서도 최고의 인기를 끌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베이스라인에서 터지는 높은 타점의 폭발적인 그의 턴어라운드 페이더웨이 점퍼는 그 어느 수비수도 막을 수가 없었던 난공불략의 공격무기였습니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들어야했던 심한 야유와 냉대는 그의 삶을 너무도 피곤하게 만들었고, 정신적으로나 심리적인 면에서 많이 지쳐버린 그는 30세가 되자 일찌감치 은퇴를 고려하게 됩니다.

1979-80 시즌에 레이커스의 일원이자 압둘자바의 백업 요원으로서 신인인 매직 존슨과 함께 얻어낸 우승반지 한 개가 그에게 위안이라면 위안이었을까요? 잠깐... 그 매직 존슨, 그도 대학 중퇴자 아니던가요? 그렇지요. 매직 존슨은 미시간 주립대 2년 중퇴지요. 매직 존슨은 자기 자신이 NBA에 일찍 들어올 수 있도록 길을 닦아준 선구자가 바로 자기 팀의 백업 센터였음을 본인이 드래프트되던 당시에 알고 있었을까요?

스펜서 헤이우드의 기구한 농구인생이 NBA에 남겨놓은 소중한 유산이 바로 그것입니다. 헤이우드가 소송에서 이김으로써, NBA는 줄리어스 어빙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70년대 중반에는 대럴 도킨스, 모제스 말론과 같은 고교졸업생들까지 NBA 드래프트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매직 존슨, 아이재야 토마스, 하킴 올라주원, 마이클 조던, 샤킬 오닐도 이 헤이우드가 개척해 놓은 새로운 NBA 토양의 수혜자들입니다. 헤이우드가 없었다면, 코비 브라이언트도, 르브론 제임스도, 드와이트 하워드도, NBA에 들어온 시기가 4년 후로 지연됐을 겁니다.

최근에 제가 들은 그의 인터뷰에서 헤이우드는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NBA 사무국으로부터 저는 절대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뭐 저야 리그를 상대로 대법원까지 가서 법정싸움을 벌인 장본인 아닙니까? 그러니 그런 NBA 사무국의 결정을 십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같은 이유로 1997년에 선정된 역대 최고 50인에서도 빠질 수 밖에 없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제가 20여년 전에 행했던 괘씸죄에 대한 벌을 철저히 받고 있는 느낌입니다. 사실 저를 기억하는 농구팬들이 몇이나 될까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벌은 충분히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 기억해 주십시오. 제가 악의를 가지고 행한 도전과 싸움이 아니었다는 것을. 당시에 쇠퇴기로 들어가던 NBA는 참신한 변화가 필요했고, 젊고 유능한 선수들이 수혈되야만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저 자신이 총대를 맸던 것 뿐이죠.”

스펜서 헤이우드.... 이제 NBA 사무국에서도 그를 부활시켜줬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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